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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여인들 〈18〉

고구려의 여성 혁명가 부여태후

글 : 엄광용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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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무신왕 때 고구려에 항복한 부여인의 후예
⊙ 두로를 사주해 폭군 모본왕을 살해하고, 태조왕 옹립
⊙ 7년간 수렴청정하면서 요서 경략 등 영토 확장하고, 국가 기틀 다져

엄광용
1954년생. 중앙대 문예창작과 졸업, 단국대 대학원 사학과 박사과정(한국사 전공) 수료 / 1990년 《한국문학》에 중편소설 당선 문단 데뷔. 창작집 《전우치는 살아 있다》 외 다수 / 2015년 장편역사소설 《사라진 금오신화》로 제11회 류주현문학상 수상
중국 지안시 장천1호 고분 벽화 중 前室의 귀부인 나들이 모습.
  삼국시대에는 여성이 정치권력의 중심에 서기 쉽지 않았다. 특히 고구려와 백제는 북방세력인 부여의 혈통으로, 왕의 형제나 아들이 왕위를 잇는 것이 전통처럼 이어지고 있었다. 즉 왕자가 없을 경우 왕의 동생이 왕위를 이었지, 공주에게 그 자리가 돌아가는 법은 없었다. 다만 신라의 경우 골품제를 유지하려다 보니 부득이하게 세 명의 여왕을 배출했다. 그러다가 결국 골품제가 무시되고 태종무열왕 이후부터는 고구려와 백제처럼 왕자나 왕제(王弟)가 왕위를 이었다.
 
  고구려의 경우 여성이 왕위에 오를 수는 없었으나, 일찍이 여성 혁명가가 나와 정치권력을 장악한 적은 있었다. 그 주인공은 바로 태조대왕의 친모(親母) 부여태후다. 고구려와 백제 건국의 어머니라고 할 수 있는 ‘소서노’가 대단한 여걸(女傑)로 알려져 있듯이, 부여태후는 그 대를 이은 여걸이면서 남편 재사(再思)를 제치고 아들 대신 직접 정치에 관여한 대가 매우 센 여자였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태조대왕조에 보면, 아버지 재사가 연로하여 아들 궁(宮)이 왕위에 오른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즉위 당시 왕의 나이가 7세이므로 태후(太后)가 수렴청정(垂簾聽政)하였다고 한다. 즉 왕은 어리고, 남편은 연로하여 부여태후가 정치를 좌지우지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여기서 유리명왕의 아들인 재사의 나이에 의문이 생긴다. 유리명왕의 아들로 왕이 된 사람은 대무신왕과 민중왕이다. 그렇다면 재사는 그 두 사람 뒤에 태어난 아들일 것이다. 대무신왕이 11세에 왕위를 계승하여 재위 27년에 죽었으므로, 38세를 살았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 뒤를 이어 민중왕이 5년간, 대무신왕의 아들 모본왕이 6년간 통치를 하였다. 따라서 태조대왕이 왕위에 오를 때, 그의 아버지 재사는 불과 40대 중반이었을 것이다.
 
  모본왕이 죽었을 때를 기준으로 계산하면 고인이 된 대무신왕은 49세가 될 것이다. 또한 대무신왕의 아우인 민중왕 역시 두 살 어리다고 가정할 때 죽은 이후까지 계산하여 47세, 그다음 재사가 또 민중왕과 두 살 터울로 태어났다면 45세가 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대무신왕·민중왕·재사 형제가 각기 두 살 터울이라고 계산할 때, 태조대왕 즉위 시 그의 부친(재사) 나이는 45세 이하가 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재사는 결코 정치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연로한 나이가 아니다. 모본왕의 대를 이어 왕위에 올라도 충분한 나이인데, 7세밖에 안 되는 그의 아들 궁이 왕위를 계승한 것이다. 여기에는 분명히 역사적 비밀이 숨겨져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 모본왕을 죽인 배후가 재사의 세력이기보다는 그의 아내인 부여인(扶餘人) 세력일 가능성이 높다. 즉 태조대왕의 외척 세력이 왕권보다 강했기 때문에, 명색이 유리명왕의 아들인 재사는 정통 왕가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권력의 순위에서 밀려났다고 봐야 한다.
 
 
  고구려로 귀화한 1만여 부여 세력
 
  부여인 태후의 성씨는 정확한 기록이 전해지지 않아 알 수 없다. 부여 왕실의 여자라는 설도 있긴 하지만 근거가 없고, 《삼국사기》에 다만 ‘부여인’이라고 나오기 때문에 명칭을 ‘부여태후’라 부르는 것이 마땅하다고 본다.
 
  바로 그 부여태후가 남편 재사의 적통으로 내세우고, 부(富)와 권력을 쥔 친정의 부여 세력을 숨은 배경으로 하여 쿠데타를 일으킨 장본인이다. 모본왕을 죽인 두로를 뒤에서 사주한 것은 엄밀히 말하면 재사의 세력이 아니라 부여태후의 세력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부여인이므로 부여태후라고 한 것을 보면, 그 세력은 고구려 북방에서 내려온 부여의 이주민들일 것이다. 고구려는 대무신왕 5년에 부여를 공략해 대소왕을 죽였다. 이때 부여에서 대소왕의 막냇동생이 자신을 따르는 무리를 이끌고 압록곡에 이르렀다. 그는 그 지역을 관장하던 해두국왕(海頭國王)을 죽인 후, 그곳 백성을 위무하여 스스로 갈사왕(曷思王)이 되었다. 《삼국사기》 대무신왕 6년 7월 기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부여왕의 종제가 나라 사람에게 말하기를 “우리 선왕(帶素)이 신망국멸(身亡國滅)하자 백성은 의지할 바가 없고, 왕제는 도망하여 갈사에 도읍을 정하였다. 나 또한 불초한 사람이라 나라를 부흥시킬 수 없다” 하였다. 이에 만여 명과 더불어 (고구려에) 내투(來投)하니, 왕(대무신왕·大武神王)은 그를 봉하여 제후로 삼고 연나부(椽那部)에 안치하였다. 그의 등에 낙문(絡紋)이 있으므로 낙씨(絡氏)란 성을 내렸다.〉
 
  이때 ‘낙(絡)’은 명주실을 두른 모양에서 만들어진 형성자이므로, 아마 대무신왕에게서 낙씨 성을 받아 연나부에 정착한 부여 대소왕의 왕제는 등에 실을 감은 듯한 줄이 그어져 있은 모양이다. 아무튼 이런 기록을 통해 볼 때 대무신왕 때 부여에서 고구려로 내려온 이주민들이 상당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부여태후가 부여인이라면 갈사국왕이나 그의 형으로 나중에 고구려에 귀화한 낙씨의 핏줄일 가능성이 높다.
 
  역사적으로 볼 때 어느 나라나 귀화인은 그 나라의 왕족이나 권문세가와 정략결혼하지 않으면 정착해 살아가기가 쉽지 않다. 호동왕자를 낳은 대무신왕의 차비(次妃)도 갈사왕의 손녀인 것을 보면 미루어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대무신왕이 유리명왕의 셋째 아들이었으므로, 다섯째 아들로 짐작되는 재사도 부여인을 배필로 맞이한 것이다. 아니, 맞이했다기보다 고구려로 이주한 갈사국이나 낙씨 세력인 부여 왕족들이 고구려 왕족에게 딸들을 바쳤다고 보는 것이 옳다.
 
  아무튼 부여태후가 갈사국왕의 또 다른 손녀든, 아니면 낙씨의 핏줄이든 고구려로 망명한 부여인의 후손임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이처럼 고구려로 망명한 부여 세력들은 고구려 왕족들과 정략결혼을 하여 외척으로 정치권력을 장악하고자 내심 골몰했을 것으로 보인다.
 
  만약 갈사국왕의 손녀가 낳은 호동왕자를 비운에 잃지 않았다면, 그는 대무신왕의 대를 이어 왕위에 올랐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아주 쉽게 부여 세력은 정치권력을 손아귀에 틀어쥘 수 있었을 것인데, 호동왕자는 원비(元妃)의 계략으로 대무신왕의 명을 받아 자결하였다. 원비는 당시 호남아던 호동왕자가 사사롭게 유혹했다고 왕에게 간하여 자결케 한 후, 그해 바로 자신이 낳은 어린 아들 ‘해우(解憂·나중에 모본왕)’를 태자로 삼게 한 것이다. 그 바람에 결과적으로 부여 세력은 좋은 기회를 놓치고 만 것이다.
 
 
  모본왕을 시해한 두로
 
  대무신왕은 재위 27년에 죽었고, 다음 대를 왕제 ‘해색주(解色朱)’가 이어 고구려 제4대 왕이 되었다. 이때 대무신왕의 원비가 낳은 아들 해우는 태자지만 어리다는 이유로 삼촌이 왕위를 이어 민중왕이 된 것이다. 따라서 태자 해우가 민중왕의 대를 이어 고구려 제5대 모본왕이 된 것은 그로부터 5년 후 일이었다.
 
  하늘도 폭군의 등장을 아는 듯, 모본왕 즉위 원년 8월에 나라에 큰물이 져서 20여 군데 산이 무너졌다고 한다. 그러나 재위 2년 되던 해에 모본왕은 한(漢)나라의 우북평으로 장수를 보내어 어양(漁陽)·상곡(上谷)·태원(太原)을 급습하였다. 그리하여 요동태수 채동(蔡彤)이 은의와 신의로 고구려를 대하자, 한나라와 화친을 맺기도 했다. 그해 4월에는 서리와 우박이 내렸는데, 사자를 보내 기아에 허덕이는 백성을 구제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외치와 내치에 힘쓴 모본왕이지만, 그 뒤로 친모인 원비의 성격을 닮아 포악한 사람으로 변했다. 모본왕의 폭정은 날로 심해져 주변 사람들을 못살게 굴었다. 앉을 때는 엉덩이로 사람을 깔아뭉갰으며, 누울 때도 사람을 베개로 삼을 정도였다. 엉덩이 밑에 깔린 사람이나 머리 밑에 베개 대용으로 쓰인 사람이 조금만 움직여도 그들을 즉살시켰다. 근신들이 그러지 말라고 간청하였지만, 모본왕은 바른말을 하는 충직한 신하들까지 직접 화살로 쏘아 죽였다.
 
  《삼국사기》 모본왕조 6년 11월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두로(杜魯)가 왕을 시(弑)하였다. 두로는 모본인(慕本人)으로, 왕의 좌우에 시측(侍側)하고 있었는데, 해(害)를 입을까 염려하여 통곡하였다. 누가 그에게 말하기를, “대장부가 왜 우는가. 옛사람이 이르기를 ‘나를 무휼(撫恤)하면 임금이요, 나를 학대하면 원수’라고 했다. 그대는 도모할지어다”라고 하였다.〉
 
  그 누군가의 말을 듣고 두로는 어느 날 몰래 칼을 품고 왕의 곁으로 다가갔다. 때마침 왕이 그를 끌어다 방석처럼 깔고 앉았다. 이때 두로는 몰래 칼을 뽑아 왕을 찔러 죽였다.
 
 
  쿠데타의 배후는 부여태후?
 
  《삼국사기》에는 모본왕을 죽이기 위해 두로를 하수인으로 삼은 ‘그 누군가’에 대해 명확하게 나와 있지 않다. 그러나 모본왕 사후 왕위를 누가 이었는지를 살펴보면, 쿠데타 세력을 미루어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모본왕의 대를 이어 고구려 제6대 왕이 된 인물은 궁인데, 그가 바로 태조대왕이다. 궁은 유리명왕의 막내아들인 재사와 부여태후 사이에서 태어났다. 즉 유리명왕의 손자로, 모본왕과는 사촌간이 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 모본왕조 기록에 보면 즉위년 10월에 ‘왕자(王子) 익(翊)을 태자로 삼았다’고 한다. 모본왕이 죽었다면 당연히 그 태자가 이어 왕위에 올라야 하는데, 재사의 아들 궁이 고구려 제6대 왕이 되었다.
 
  여기서 태조대왕이 즉위할 때의 《삼국사기》 기록을 잠깐 살펴볼 필요가 있다.
 
  〈모본왕이 돌아가시고 태자가 불초(不肖)하여 족히 사직(社稷)의 주인이 되지 못하겠으므로 나라 사람이 궁(宮)을 맞이하여 세운 것이다. 왕은 나면서 능히 눈을 뜨고 볼 줄 알았고 어려서도 출중하였으나 (이때) 나이 7세이므로 태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이 기록을 잘 분석해보면 두로를 앞세워 모본왕을 죽인 배후가 재사의 세력, 아니 더 정확하게는 부여태후의 세력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엄연히 태자가 있는데, 7세의 어린아이를 왕으로 세웠다. 더구나 그 아버지 재사가 있는데도 부여태후는 어린 아들을 왕위에 앉히고 ‘수렴청정’이란 명목으로 정치권력을 손아귀에 넣었다. 어린 ‘궁’을 왕으로 세운 ‘나라 사람’들은 바로 부여태후의 강력한 힘이 되어준 부여 세력들이었다. 이것은 요즘 말로 쿠데타인 셈이다.
 
 
 
요서 정벌

 
통구12호 고분 벽화 속의 고구려 무사. 말까지 갑주를 착용한 중무장 기병의 모습이다.
  부여태후가 수렴청정했다는 것은 대무신왕 때 회복된 왕권이 민중왕과 모본왕의 두 대를 거치면서 다시 약화되자, 왕의 외척 세력이 실제 정치 전면으로 나섰음을 뜻한다. 모든 실세(實勢)는 부여태후 편이었으며, 유리명왕의 적통인 재사는 명색이 ‘고추가(古皺加)’란 관직을 갖고 있었지만 실권은 없었다.
 
  남편을 제치고 아들인 왕을 대신하여 정권을 손에 쥐고 흔든 부여태후는, 역사상 아들을 대신하여 수렴청정을 한 여러 태후와는 질적으로 다른 여건을 갖추고 있었다. 즉 다른 태후들은 왕인 남편이 죽고 나서 아들이 어릴 때 수렴청정하는 입장이었지만, 부여태후는 번연히 남편이 살아 있는데도 자신이 직접 영향력을 행사하여 권력을 잡았다는 점에서 달랐다. 다시 말하면 부여태후는 역사상 아들을 대신하여 수렴청정을 한 여느 태후(대비)들보다 권력장악력이 강했으며, 따라서 정치력을 발휘하는 데 있어서도 큰 힘을 행사할 수 있었다.
 
  부여태후는 태조대왕이 14세, 즉 재위 7년이 될 때까지 수렴청정을 하였다. 수렴청정 7년 동안 부여태후는 많은 일을 하였다. 태조대왕 재위 3년 2월에는 요서(遼西)를 쳐서 10성을 쌓았으며, 4년 7월에는 동옥저(東沃沮)를 공격하여 그 땅을 빼앗아 성읍(城邑)으로 삼았다. 이렇게 하여 당시 고구려 국경이 서로는 요서에서, 북으로는 부여까지, 그리고 동으로는 창해(滄海·지금의 東海)에 다다르고, 남으로는 살수(薩水·지금의 淸川江)에 이르렀다.
 
  일설에 의하면 부여태후 시절 요서를 공략했다는 기록은 잘못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당시 고구려 국력으로 볼 때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추측에 불과하다. 당시 기마민족의 피를 이어받은 고구려는 빠르고 날쌘 기병대가 있었으며, 거리상으로 볼 때 속전속결의 전략으로 나가면 요서 공략은 충분히 가능했을 것이다. 더구나 모본왕이 한나라 서북 국경을 급습하여 요동을 지배하게 된 이후이므로, 요동을 경유하여 요서까지 진출하는 데는 큰 무리가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부여태후는 아들이 10대 중반이 될 때까지 7년 이상 수렴청정해 나라를 굳건하게 만들었다.
 
 
  ‘태조’라는 시호에 담긴 의미
 
  고구려왕 중에 ‘태조’를 붙인 것은 6대에 이르러서인데, 이는 고려나 조선 시대와 다른 점이다. 즉 태조는 주로 나라를 건국한 왕에게 붙이는 칭호인데, 고구려 시대에는 6대 태조대왕대에 와서야 가능해졌다. 이는 나라의 기틀이 태조대왕대에 와서 더욱 굳건해져 나라다운 면모를 갖추었다는 뜻도 될 것이다. 그 기틀을 마련한 것이 수렴청정한 부여태후이고 보면 고구려 정치사상 중요한 인물임을 간할 수 없을 것이다.
 
  《삼국사기》 기록으로 볼 때 부여태후의 아들인 태조대왕·차대왕·신대왕 등이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태조대왕이 94년 동안 재위한 것으로 나오는데, 이는 역사 기록의 오류일 수도 있다. 태조대왕의 뒤를 이어 왕제인 차대왕과 신대왕까지 왕위를 이었는데, 이들 3대 왕을 모두 부여태후의 아들로 보는 것은 무리한 해석이라는 설도 있다.
 
  단재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태조왕이 즉위할 때에 나이 겨우 7살이요, 생모 되는 태후가 섭정하였으니, 이때에 재사가 생존해 있었을지라도 모든 일을 감당하는 것이 여자나 어린아이만도 못할 만큼 노쇠하여 7살 된 아들에게 왕위를 내주고, 아내가 섭정함에 이른 것인데, 그 뒤에 어찌 다시 굳세어져서 차대왕(次大王)과 신대왕(新大王)과 인고(仁固)의 3형제를 낳음에 이르렀으랴? 재사가 정치상에는 싫증이 났으나, 아들을 낳을 만한 생식력은 강하였다 하더라도 차대왕은 즉위할 때 나이가 76살이었으니, 태조왕 19년이 그가 난 해요, 신대왕은 즉위할 때에 나이가 77살이었으니, 태조왕 37년이 그가 난 해이다. 태조왕 원년에 많이 늙은 재사가 19년 만에 또 차대왕을 낳고 그 뒤 또 20년 만에 신대왕을 낳았다 함이 어찌 사리에 맞는 말이랴? 대개 차대왕·신대왕과 인고 세 사람은 태조왕의 서자이고, 차대왕에게 죽은 막근(莫勤)과 막덕(莫德) 두 사람은 태조왕의 적자이므로, 신대왕과 인고가 비록 차대왕(왕자 시대의)의 전천(專擅)을 미워하였으나, 초록(草綠)은 동색(同色)이라, 그 반역의 음모를 고발하지 않은 것이고, 차대왕도 그 즉위한 뒤에 막근 형제를 살해하였으나, 신대왕과 인고는 그대로 둔 것이니, 후한서에 차대왕을 태조왕의 아우라고 한 것은 잘못된 기록이거나 혹은 거짓 기록이다.〉
 
 
 
태조대왕, 차대왕, 신대왕

 
  신채호의 문체인 쉼표가 많은 장문을 그대로 인용해본 것인데, 이 기록으로 보면 차대왕과 신대왕은 부여태후의 아들이 아니라 태조대왕의 아들일 가능성이 크다. 《후한서(後漢書)》에도 차대왕이 태조대왕의 아우로 기록된 것을 김부식이 《삼국사기》에 그대로 가져다 썼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태조대왕이 왕위에 오를 때 그 부친 재사는 너무 연로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그 뒤에 계속해서 아들을 낳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태조대왕은 7세 때 왕위에 올라 재위 94년 만에 차대왕에게 선양하였다. 차대왕은 이름이 수성(遂成)이었는데, 태조대왕 시절 명장으로 많은 적을 물리친 공이 있었다. 그를 따르던 장수들이 왕으로 추대할 음모를 꾸미자, 태조대왕은 나이가 많다는 이유를 들어 수성에게 양위하였다.
 
  이때 차대왕(수성)도 76세였으니, 만약 그가 태조대왕의 아들이라 하더라도 다 늙어서야 왕위를 물려받은 셈이 된다. 태조대왕은 별궁으로 물러나서도 119세까지 살다 차대왕 재위 20년 3월에 죽었다. 같은 해 10월에 연나부조의 명림답부가 폭정을 일삼는 차대왕을 시해하고 왕제 신대왕을 제8대 고구려왕으로 추대하였다.
 
  나이로 따져볼 때, 신채호의 주장처럼 차대왕과 신대왕이 부여태후의 아들일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따라서 부여태후가 낳은 아들이 3대에 걸쳐 고구려왕이 되었다는 것은, 《삼국사기》 기록을 근거로 할 때 막연하게 그렇다고 여겨질 뿐이다.
 
  그런 것은 논외로 치더라도 아무튼 부여태후는 고구려의 건국정신인 ‘다물(多勿)’, 즉 고조선의 옛날 영토를 회복하는 데 큰 역할을 한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여걸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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