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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10·26 40주년 - 朴正熙, 오해와 진실

박정희가 지역감정을 조장했다고?

박정희 정권 시절 인사편중도는 YS–DJ정권보다 낮아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ironheel@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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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 이전에도 서북파-기호파 대립 등 정치에서 地域色 존재
⊙ 박정희 정권 시절, 특히 유신 이후 장관, 요직 등에서 영남 출신 비율 크게 높아졌지만, 편중도는 이후 정권들보다 낮아
⊙ 경제개발 과정에서 영남 우선은 경부선의 영향
⊙ 김대중도 국회의원 출마 당시 小지역주의 조장, 1971년 대선 당시 호남 쪽에서도 지역감정 조장
1971년 제7대 대선 당시 전북 전주에서 유세를 벌이는 김대중 신민당 후보. 호남 출신인 김대중 후보는 전남북에서 박정희 후보에게 크게 승리했다. 사진=조선DB
  〈저는 박정희(朴正熙)씨의 최고의 죄는 독재도 아니고, 부(富)를 소수에게 집중시킨 것도 아니고, 가장 큰 죄는 지역감정을 조장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기억 못 하시는 분이 많겠지만 박정희씨는 전라도 사람들 덕택으로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63년 선거에서 15만 표 차이로 당선됐는데, 그 당시 박정희씨는 서울, 강원, 경기, 충북, 충남에서 다 졌습니다. 경상도하고 전라도에서 이겼습니다. 전라도에서만 35만 표를 이겼습니다.
 
  그랬는데 대통령이 되자마자 전라도와 경상도를 가른 것입니다. 왜 그랬는지 아십니까? 자유당 치하에서 가장 반독재투쟁을 잘한 곳이 경상도와 전라도였습니다. 따라서 이 둘이 합치면 독재를 할 수가 없으니까 둘을 갈라서 하나는 우월감을 조장하고 하나는 열등감으로 내리누르고 해서 전라도와 경상도 사람들끼리 싸움을 시킨 것입니다.
 
  처음에는 우습게 시작한 것이지만 30년 동안에 뭣도 모르고 거의 제2의 본성이 되다시피 되었습니다. 결국 이렇게 해서 역대의 박정희, 전두환(全斗煥), 노태우(盧泰愚) 군사정권의 지배층들이 부귀와 권세를 누리는 동안에 전라도 사람도 희생되고 여러분도 희생되고 이용당한 것입니다. 이것이 지역감정의 본질입니다.〉
 
  김대중(金大中) 전 대통령(이하 김대중)이 대권(大權) 도전 3수를 앞두고 있던 1991년 1월 20일 평화민주당의 대구 국정보고대회에서 한 말이다. 사실 많은 국민이 박정희 전 대통령(이하 박정희)에게 지역감정의 원죄(原罪)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 주장이 성립되려면 다음과 같은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첫째, 박정희 이전에는 지역감정이 없었나?
 
  둘째, 박정희 이전 정치에서는 지역감정이 작용하지 않았나?
 
  셋째, 지역 편중 인사는 박정희 때부터 시작되었고, 박정희 시대에 가장 극심했나?
 
  넷째, 지역 불균형 성장정책은 박정희의 지역차별정책의 소산인가?
 
  다섯째, 박정희가 지역감정을 정치적으로 악용한 시초인가?
 
 
  “‘전라도 사람은 안 된다’는 말에 피눈물 쏟아”
 
  첫째, 박정희 이전에는 지역감정이 없었나? 아니다. 박정희 시대 이전에도 우리나라에서는 지역감정이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었다. 통일신라시대 이후 호남 지역에 대한 정치·사회적 차별이 있었고, 이는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로 이어졌다. 조선시대에는 함경도·평안도 지역에 대한 차별도 극심했고, 영남 지역에 대한 차별도 있었다.
 
  호남에 대한 극심한 차별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고려 태조(太祖) 왕건(王建)이 남겼다는 《훈요십조(訓要十條)》이다. 후백제를 멸하고 통일을 이룬 왕건은 세상을 떠나기 전인 943년 박술희에게 이렇게 유언했다.
 
  〈차현(車峴) 이남으로서 공주강(公州江·금강)의 바깥은 산세와 지형이 모두 배역(背逆)으로 뻗어 있어 인심 또한 그러하다. 그곳 아래의 주·군(州·郡) 사람이 조정에 참여하여 왕후나 국척(國戚)과 더불어 혼인하여 나라의 정권을 잡게 되면, 혹은 국가에 변란을 일으키거나, 혹은 통합한 원한을 품고서 어가(御駕)에 범하여 소란을 일으킬 것이다.〉 (제8조)
 
  《훈요십조》에 대해서는 위작설(僞作說)도 있다. 하지만 이런 것이 역사에 기록되어 전해져 온다는 것 자체가 고려 지배층 사이에 호남에 대한 차별의식이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인 셈이다. 호남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조선 후기에 나온 《정감록(鄭鑑錄)》이나 이중환(李重煥)의 《택리지(擇里志)》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일제시대에, 혹은 1950~60년대에 “사글셋방이나 가정교사 자리를 얻으려다가 ‘전라도 사람은 안 된다’는 말에 피눈물을 쏟았다”는 식의 회고담은 수없이 많다. 박정희 시대 이전, 혹은 지역감정이 정치적 이슈가 되기 이전의 일이었다.
 
 
  자유당 시절까지 이어진 畿湖派와 西北派의 대립
 
  둘째, 박정희 이전 정치에서는 지역감정이 작용하지 않았나? 아니다. 영·호남 갈등은 아니었지만 다양한 형태의 지역갈등이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일제시대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 벌어졌던 기호파(畿湖派·경기-충청)와 서북파(西北派·평안-황해)의 갈등이다. 기호파는 이동녕, 이시영, 신규식, 신익희, 조성환, 조완구, 박찬익 등이 대표적 인물이었다. 이승만과 김구도 기호파에 가까웠다. 서북파(이북파)는 안창호, 손정도, 김인전, 이유필, 정재관, 이강, 이광수, 주요한 등이 대표적 인물이었다. 윤치호는 자신의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안창호씨가 지역감정의 소유자여서, 기호인의 노력으로 독립을 얻을 것 같으면 차라리 독립되지 않는 게 낫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얘기를 여러 차례 들었다.〉
 
  〈서북파의 지도자인 안창호씨가 이런 말을 했단다. “먼저 기호 사람들을 제거하고 난 후에 독립해야 합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얘기다.〉
 
  이런 갈등은 해방 후에도 이어졌다. 1963년 《망명노인 이승만 박사를 변호함》이라는 책을 발간한 김인서 목사는 이승만 대통령과 대립했던 민주당을 도산계(島山系·안창호의 흥사단계)와 인촌계(仁村系·김성수계)의 연합체로 보았다. 호남세력이 도산계와 손잡는 변화가 있지만, 임시정부 시절 서북파와 기호파 간 갈등의 연장선상에서 이승만 시절의 정치구도를 분석하고 있는 셈이다. 지역색(地域色)에 따른 정치는 박정희 시대 이전에 이미 존재했다는 얘기다.
 
 
  이승만 시절부터 영남 출신 비율 높아
 
  셋째, 지역 편중 인사라는 문제를 보자. 사실 박정희 정권 이후의 ‘지역차별’을 이야기할 때, 가장 많이 이야기하는 것이 바로 ‘지역 편중 인사’다. 하지만 이 문제와 관련된 여러 연구는 인사에서의 지역차별-특히 호남 홀대-이 박정희 시대에 시작됐다는 인식이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시원·민병익의 〈우리나라 역대 정부 장관의 재임 기간 및 배경 분석〉(《한국행정학연구》 제11권 3호, 2002년)을 보자.
 
  이미 이승만(李承晩) 정권 시절에 영남 출신은 23명으로 20.9%를 차지한 반면, 호남 출신은 7명으로 6.4%에 불과했다. 이 시기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한 것은 서울 출신(44명, 37.3%)이었다. 황해도 출신으로 서울에서 자랐고, 성인기 대부분의 기간 동안 해외에서 망명생활을 했던 이승만 대통령이 영·호남에 대한 지역감정이 있었을 리는 없다. 다만 야당인 민주당이 ‘호남지주정당’인 한국민주당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는 사정이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은 있다.
 
  위의 연구에 의하면 단명했던 장면 정권에서도 영남 출신 비율이 호남 출신보다 두 배가 높았다. 영남 출신은 15명으로 33.3%에 달했지만, 호남 출신은 6명으로 13.3%에 그쳤던 것이다.
 
  논란이 되는 박정희 정권 시절을 보자. 18년 내내 영남 출신이 다수(多數)를 차지했던 것은 사실이다. 영남 출신은 48명으로 33.8%, 호남 출신은 18명으로 18.3%를 차지했다.
 
  여기서 눈길을 끄는 것은 영·호남 지역 비율이 유신 전(제3공화국)과 유신 후(제4공화국)에 차이가 난다는 점이다. 유신 전에는 영남 출신 비율이 31.9%(29명)였는데, 유신 후에는 37.3%(19명)로 올라갔다. 반면에 호남 출신 비율은 13.2%(12명)에서 11.8%(6명)로 내려갔다. 이는 1971년 제7대 대선 당시 호남 출신 김대중의 도전, 유신 이후 친정(親政)체제의 강화 등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추세는 이후로도 계속된다. 전두환 정권 시절에는 영남 출신 비율이 39.8%(41명)까지 올라갔다가 노태우 정권 시절에는 30.3%(30명)로 내려간다. 이 시기 호남 출신 비율은 각각 10.7%(17명)와 17.2%(17명)였다.
 
  지역차별 문제를 연구하는 많은 학자는 영·호남 출신 충원 비율이 차이가 나는 원인을 정통성이 부족했던 군사정권이 그 지지기반을 출신 지역에서 구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말끝마다 ‘문민(文民)정부’라는 정통성을 자랑하던 김영삼(金泳三) 정권 시절, 영남 지역 편중 인사는 노태우 정권 시절보다 더 심해졌다. 영남 출신은 37%(37명)로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했다. 호남 출신은 18%(18명)였다.
 
  이런 상황은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면서 급변했다. 호남 출신과 영남 출신이 각각 25.8%(23명)로 동률(同率)을 점하게 된 것이다.
 
 
 
DJ 시절 호남 편중도, 박정희 때 영남 편중도보다 높아

 

  김대중 정권 시절 중앙인사위원회는 ‘지역편중도(=지역별 인구-누적 재임기간의 비율 절댓값)’라는 개념을 만들어냈다. 이는 기준연도(이승만~박정희 1925년, 최규하~전두환 1930년, 노태우 1935년, 김영삼~김대중 1940년)의 지역별 인구 비율과 재임기간 등을 반영한 것이다. 이에 따라 서원석 한국행정연구원 인적자원센터 소장이 분석해 2003년 발표한 바에 의하면, 지역편중지수는 이승만 정권 시절에 가장 높았고, 김대중 정권 시절에 가장 낮았던 것으로 나타났다(〈표〉 참조).
 
  인구 비례 등을 감안할 때 장면~김영삼 정권 기간 중 영남이 과다(過多) 대표됐고, 호남이 과소(過少) 대표된 것은 사실이다. 이런 문제들이 누적되면서 지역감정이 악화되었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눈길을 끄는 것은 박정희 정권 시절 영남이 과다 대표된 정도가 상대적으로 높지 않다는 점이다. 박정희 정권 시절 영남이 과다 대표된 비율은 3공 시절 +6, 4공 시절 +2였다. 전두환 정권 시절에는 +17, 노태우 정권 시절에는 +20, 김영삼 정권 시절에는 +16에 달했다. 박정희 정권 시절 영남이 과다 대표된 비율은 김대중 정권 시절 호남이 과다 대표된 비율(+12)에 비해서도 현저하게 낮다.
 
 
  개발연대에 영·호남 소득 격차 확대
 
  넷째, 불균형 성장정책은 박정희의 지역차별정책의 소산인가? 이 또한 사실과 다르다. 박정희 정권 시절 호남이 영남에 비해 산업화 과정에서 소외됐고, 그 결과 주민소득에서도 크게 차이가 나게 된 것은 사실이다.
 
  산업화의 동력은 제조업(공업)이다. 경제개발 초기 단계인 1963년 영남 지역은 전체 제조업 종사자의 37%, 부가가치의 32%를, 호남 지역은 제조업 종사자의 12.2%, 부가가치의 11%를 점하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1983년에 이르면 영남 지역의 제조업 종사자 비율은 41.1%, 부가가치는 40.3%로 상승한 반면, 호남 지역은 각각 5.5%, 8%로 하락했다(문석남, 〈지역감정의 원인과 해소방안: 영호남 두 지역을 중심으로〉, 1991년).
 
  이에 따라 영·호남 간 소득 격차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1960년 경상(經常)가격 기준으로 연간주민소득은 영남이 8400원, 호남이 7500원이었다. 영남이 호남보다 약간 높기는 했지만, 두 지역 모두 전국 평균 9500원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러던 것이 제7대 대선이 있기 1년 전인 1970년이 되면서 영남의 연간주민소득은 8만4634원, 호남은 5만8919원으로 벌어졌다. 그해 전국 평균은 8만3200원이었다. 1960년에는 영·호남 모두 전국 평균을 밑돌았지만, 10년 후에는 영남은 전국 평균을 웃돌게 된 반면, 호남은 전국 평균에 훨씬 미치지 못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한 이듬해인 1980년의 연간주민소득은, 영남은 96만4216원, 호남은 73만2283원이었다. 호남의 주민소득도 꾸준히 오르기는 했지만, 이 지역 주민들은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를 두고 문석남은 “경제발전 과정에서 특정 지역에 국가 지원을 집중 투자하여 지역 간의 격차를 심화시킨 것은 최고정책결정자의 지역연고성(地域緣故性)이 크게 영향을 미쳤음이 시사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는 많은 국민의 평균적 인식이기도 하다. 김만흠의 〈한국사회 지역갈등연구〉(1987년)에 의하면, 전체 응답자의 78.8%가 정치권력의 지역연고가 지역발전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믿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정말 그런 것일까?
 
 
 
‘경부선’이라는 ‘역사적 우연’

 
1901년 9월 경부선 철도 남부 기공식. 일제가 건설한 경부선 철도는 이후 경제개발 과정에서 공업단지 입지 등에 큰 영향을 끼쳤다.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박정희 정권의 경제발전 전략은 앨버트 허시먼(Albert Hirschman)의 ‘불균형성장이론’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이 이론은 “제한된 자원을, 총량적 확대를 꾀하기 위해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분배하고, 입지가 유리한 지역에 집중투자하여 개발효과를 극대화한 후, 다른 지역에 파급한다”는 논리에 바탕을 두고 있다.
 
  지지리도 가난했던 경제개발 초기의 대한민국은 기존에 있던 알량한 공업시설과 철도, 도로, 항만 등을 최대한 활용하면서 산업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당시 상황에서 ‘입지가 유리한 지역’은 서울·인천, 부산, 대구 정도였다. 경제개발이 시작되던 1963년에 이미 서울, 경기, 영남은 우리나라 공업 부문 종사자의 77%, 부가가치의 77.3%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렇게 된 데에는 일제가 건설한 경부선(京釜線) 철도의 영향이 컸다. 1901년 군사적 목적으로 경부선 건설에 착수한 일제는 서울~부산을 가능한 한 짧은 노선으로 연결하려 했다. 이에 따라 대구, 대전과 같은 신흥도시들이 등장했다. 이 도시들은 지역의 거점도시로 훗날 상공업 발전의 일익을 담당하게 됐다. 반면에 간선(幹線)철도 노선에서 제외된 호남 지역은 이미 일제시대부터 미곡(米穀)의 집하지(集荷地)인 목포나 군산 등지를 제외하고는 발전에서 소외되기 시작했다.
 
  결국 호남 지역이 개발에서 소외된 것은 박정희 정권의 의도적 정책 때문이라기보다는 경부선 철도라는 ‘역사적 우연’의 소산이었던 셈이다. 신복룡 전 건국대 교수는 “이런 점에서 볼 때 일제 치하의 호남 낙후는 일본이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결과적으로는 철도 부설의 차별화가 빚은 것이었다”면서 “영·호남 개발 격차로 인해 호남 포비아가 형성되었다는 논리가 가능하다면, 먼저 일본의 정책에서 뿌리를 찾아야지 후발적인 박정희의 차별정책을 강조하는 것은 선후(先後)가 바뀐 논리”라고 주장한 바 있다(〈한국의 지역감정과 역사적 배경: 호남 포비아를 중심으로〉, 1996년).
 
 
  박정희 경제정책에 ‘지역’은 없었다
 
1970년 光州에 있는 아시아자동차 공장을 시찰하는 박정희 대통령. 박 대통령은 공업입지 선정 등에서 효율성을 우선시했다. 사진=국가기록원
  만일 박정희 정권이, 일부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최고정책결정자의 지역연고성’에 따라 경제개발정책을 폈다면, 영남을 경북과 경남으로 나누었을 때 경북이 더 혜택을 보았어야 한다. 물론 구미전자공단이나 포스코(포항종합제철)처럼 경북 지역도 어느 정도 혜택을 보기는 했다. 하지만 그보다는 경남이 더 큰 몫을 가져갔다.
 
  1963년 경북은 전국 제조업 종사자 수의 14.5%, 부가가치의 12.9%를, 경남은 제조업 종사자 수의 22.5%, 부가가치의 19.1%를 차지했다. 1983년에 이르면 경북의 제조업 종사자 수는 12.6%, 부가가치는 13.1%였던 반면, 경남의 제조업 종사자는 28.5%, 부가가치는 27.2%로 올라갔다.
 
  호남에도 공단이 들어섰다. 영남 지역에 비할 바는 아니라고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박정희 정권 시절 수립, 건설된 제2석유화학공업단지는 전남 여천(여수)에, 1980년대에 건설된 포철 제2제철소는 전남 광양에 들어섰다. 광양 포철 제2제철소 부지는 원래 박정희 정권 시절 여천석유화학공업기지의 확장 예정지로 잡아놓았던 땅이다.
 
  박정희는 말년에 오원철 경제 제2수석비서관의 건의를 받아들여 충남 서산과 태안 사이에 있는 가로림만 일대를 싱가포르 2배가량의 항만·공업단지로 개발하는 계획을 추진했다. 가로림만을 중심으로 중부공업벨트, 그리고 호남으로 이어지는 서부공업벨트를 건설한다는 원대한 구상이었다. 오원철 수석은 “장차 우리나라의 공업지구는 서부공업벨트와 동남공업벨트로 양분될 것이며, 이로써 호남, 충청도의 소외감도 완전히 소멸될 것”이라고 박정희에게 보고했다. 박정희의 마지막 공식행사가 된 삽교호방조제 공사는 장차 건설될 중부공업단지에 공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경제발전 과정에서 박정희의 안중에는 영남이니 호남이니, 경북이니 하는 것은 없었다. 오로지 주어진 자원을 최대한 활용해서 한시라도 빨리 가난에서 벗어나겠다는 일념만이 있었을 뿐이다.
 
 
  “유달산이여! 너에게 넋 있으면…”
 
  다섯째, 박정희가 지역감정을 정치적으로 악용한 시초인가? 이제 살펴보겠지만, 그렇지 않다.
 
  박정희가 지역감정을 정치에 악용하기 시작한 원조(元祖)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 증거로 1963년 제5대 대선 당시 영남 출신 공화당 찬조연사들의 연설을 제시한다.
 
  〈이 고장은 신라 천년의 탄탄한 문화를 자랑하는 고장이건만, 그 긍지를 잇는 이 고장의 임금은 여태껏 한 사람도 없었다. 박정희 후보는 신라 임금님의 자랑스러운 후손이며, 이제 그를 대통령으로 뽑아 이 고장 사람으로 천 년 만의 임금님을 모시자.〉
 
  저널리스트 이상우씨는 “인신공격적인 선거 전략보다 공화당 측이 구사한 지역감정 호소 작전이 큰 효과를 낸 것으로 분석됐다”고 주장했다(《월간조선》 엮음, 《비록 한국의 대통령》, 1993년).
 
  정치인이 지역감정을 선거에 이용한 것은 잘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대선이나 총선에서 지역감정을 이용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유달산이여! 너에게 넋 있으면, 삼학도여! 너에게 정신이 있으면, 영산강이여, 네게 뜻이 있으면, 목포에서 자라고, 목포에서 커가지고, 그리고 이 나라를 위해서 무엇인가를 해보겠다는 이 김대중이를 지금 한 나라 정부가 외지의 사람, 목포 사람도 아닌 외지의 사람을 보내가지고 나를 죽이려고 나를 잡으려고 하니, 유달산과 영산강과 삼학도가 넋이 있고 뜻이 있으면 나를 보호해달라는 것을 목포시민 여러분과 같이 호소하고 싶습니다.〉
 
  이것은 1967년 6월 8일 제7대 국회의원 총선 당시 목포에서 출마했던 김대중의 연설이다. 김대중이 평생 자랑스럽게 생각한 연설이다. 당시 김대중과 맞섰던 공화당의 김병삼 후보는 전남 진도 출신이었다. 김대중은 같은 전남 사람인 김병삼을 ‘목포 사람도 아닌 외지의 사람’이라고 낙인찍고, 유달산과 삼학도와 영산강을 부르면서 목포 사람들의 감정에 호소했다. 이건 지역감정이 아닌가? 위에 소개한 ‘신라 임금님의 후손’ 운운하는 것은 공화당 찬조연사들의 발언이었지만, 이건 김대중 본인의 발언이었다.
 
  1967년 제6대 대선에서는 ‘호남 푸대접론’이 나왔다. 그해 4월 26일 전남 영광·나주·목포 유세에서 윤보선 신민당 후보는 “호남 푸대접 문제를 철저히 시정하겠다”면서 목포를 대(大)어업기지, 무역항, 공업중심지로 발전시키겠다고 공약했다. 이에 대해 박정희는 다음 날 광주 유세에서 “호남 지방이 푸대접 지역이라는 것은 말도 안 된다”면서 “분배식으로 공장을 건설하는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반박했다. 제6대 대선에서 박정희는 4년 전 54대 46으로 승리했던 전북에서는 46대 54, 62대 38로 승리했던 전남에서는 49대 51로 패했다. 당시 김대중은 신민당 대변인으로 윤보선의 참모 중 하나로 활약했다.
 
 
  “東韓·西韓 갈라지는 것 아냐”
 
  이렇게 내연(內燃)해오던 지역감정은 호남 출신인 김대중이 신민당 후보로 나선 1971년 제7대 대선에서 표출됐다. 박정희의 비판자들은 박정희 정권이 이 대선에서 노골적으로 지역감정을 부추겼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당시 언론 보도를 보면, 지역감정을 조장한 것은 양쪽이 도긴개긴이었다.
 
  〈쌀밥에 뉘가 섞이듯 경상도에서 반대표가 나오면 안 된다. 경상도 사람 쳐놓고 박 대통령 안 찍는 자는 미친놈이다.〉(《조선일보》 1971년 4월18일자)
 
  〈호남 사람이 받는 푸대접은 1200년 전부터이다. 서울 가면 구두닦이나 식모는 모두 전라도 사람이며, 남산에서 돌을 던져 차가 맞으면 경상도요, 사람이 맞으면 전라도다.〉(《조선일보》 1971년 4월21일자)
 
  〈야당 후보가 이번 선거를 백제와 신라의 싸움이라고 해서 전라도 사람들이 똘똘 뭉쳤으니 우리도 똘똘 뭉치자. 그러면 124만 표 이긴다.〉(《동아일보》 1971년 4월30일자)
 
  〈경상도 정권하에서 전라도는 푸대접을 받을 수밖에 없다.〉(《동아일보》 1971년 4월30일자)
 
  결국 제7대 대선에서 박정희는 김대중에게 94만7000여 표 차이로 승리했다. 영남에서 박정희는 261만169표, 김대중은 102만4163표를 얻었다. 호남에서 김대중은 141만493표, 박정희는 78만8587표를 획득했다. 박정희는 영남에서 2.6대 1의 비율로 김대중을 앞섰고, 김대중은 호남에서 1.8대 1의 비율로 박정희를 눌렀다. 1971년 4월30일자 《동아일보》는 “이게 어디 투표야? 경상도 전라도 싸움이지” “이러다가 동한(東韓) 서한(西韓)으로 갈라지는 것 아니야?”라는 유권자들의 우려를 전했다.
 
 
  누구의 책임인가
 
  그러한 우려는 직선제 개헌 이후 실시된 1987년 제13대 대선 때부터 현실화됐다. 그리고 그 책임을 박정희에게 묻는 것은 상식처럼 되어버렸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그것은 부당하다. 설혹 박정희에게 책임을 묻더라도 딱 그가 져야 할 몫만큼만 물어야 한다. 아울러 박정희 사후(死後) 끊임없이 지역감정을 확대 재생산하면서 자신의 정치적 자산으로 삼았던 이에게도 상응하는 책임을 물어야 한다.
 
  기자는 김대중의 초기 측근 중 하나였던 호남 출신 정계 원로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인터뷰를 마친 후 그에게 “지역감정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나지막하지만 단호하게 이렇게 답했다.
 
  “김대중씨 말고는 달리 생각할 수 없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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