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탁학련, 신탁통치 반대 시위 후 좌익신문 《인민보》 습격
⊙ 북한 출신들 모인 서북청년회, 《현대일보》 등 좌익신문사 습격, 친공검사 암살
⊙ 김두한이 감찰부장으로 있던 대한민청, 용산철도 파업 등 진압
⊙ 북한 출신들 모인 서북청년회, 《현대일보》 등 좌익신문사 습격, 친공검사 암살
⊙ 김두한이 감찰부장으로 있던 대한민청, 용산철도 파업 등 진압
- 소련군 철수를 요구하는 데모를 벌이는 서북청년회 회원들.
북한에서 공산주의를 체험하고 내려와서 반공의식이 투철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의 와중에서 박근혜 대리인단(변호인)에서는 “탄핵이 인용되면 아스팔트가 피로 물들 것”이라고 했다. 그 말처럼 헌법재판소가 박근혜 대통령을 파면한 3월 10일 이후 벌써 세 명이 아스팔트에 피를 뿌리고 세상을 떠났다. 그 시간에 “탄핵이 기각되면 혁명”이라고 외치던 측에서는 ‘국민승리’를 자축하면서 환호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을 둘러싸고 문제가 불거지기는 했지만, 사실 이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아스팔트에서 촛불과 태극기의 대결은 기본적으로 종래 내연(內燃)해 오던 좌우(左右) 갈등 구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리고 이러한 갈등의 뿌리는 1945년 해방 이후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해방 이후 우익(右翼)진영은 좌익진영에 비해 열세에 있었다. 좌익진영은 해방 직전 여운형이 일제(日帝)로부터 치안권을 이양받고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 유리한 고지를 선점(先占)했다. 이들은 미군이 38선 이남에 진주하기 전에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하고, 내각 명단까지 내놓았다. 미(美)군정청은 조선인민공화국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좌익의 우세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좌익은 이미 기업·언론사 등을 점거하고, 조선공산당을 재건했으며, 정치·경제·사회·문화 각 분야의 전위(前衛)조직들을 만들어 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을 막을 우익진영의 역량은 전무(全無)하다시피 했다. 권력을 쥔 미군정청은 서구식 민주주의 이념에 사로잡혀 좌우 이념문제에 대한 경각심이 없었다. 경찰은 한국민주당계의 조병옥·장택상 등이 장악하고 있었지만, 일제시대에 복무했다는 약점 때문에 대다수 민중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있었다. 국군의 전신(前身)이라 할 수 있는 국방경비대에는 미군정청의 무신경함 때문에 좌익세력이 깊이 침투해 있었다. 공권력은 권위도, 물리력도 없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무력(無力)한 공권력을 대신해 좌익과 투쟁한 이들이 있었다. 바로 서북청년회를 비롯한 우익청년단체들이었다.
우익운동의 인력풀이 된 이북 출신 청년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이나 이탈리아에서도 그랬듯이, 아스팔트 위에서 투쟁하기 위해서는 인적(人的) 자원이 충분히 뒷받침되어야 한다. 독일과 이탈리아에서는 전쟁 후의 퇴역군인, 실직자들이 그런 역할을 했다면, 해방 후 한국(남한)에서는 북한에서 내려온 실향민들이 우익청년운동의 공급원이 됐다.
1945년 8월~1946년 4월까지 38선을 넘어온 월남민(越南民)들은 50만명에 달했다. 그중에는 단신으로 월남한 청년·학생들도 적지 않았다. 서울 거리를 헤매던 이들은 알음알음으로 동향(同鄕) 사람들이 모이는 합숙소를 찾아 들어갔다. 합숙소는 대개 일본인들이 버리고 간 공장 기숙사, 창고, 사찰, 신사(神社) 등이었다. 서울에선 60여 개의 합숙소에 2000~3000여 명이 수용되어 있었다. 종로구 권농동의 호림장, 효창공원 옆 함북청년회 합숙소, 삼각병원 2층, 옛 목정소학교 자리의 대원장, 그리고 용산의 해방촌 등이 유명했다. 월남한 청년들은 고향의 이름을 따서 청년단체를 조직했다. 평남 진남포와 용강군 출신들은 진룡동지회, 평북 신의주 출신들은 압록강동지회, 평양 출신들은 대동강동지회, 황해도 출신들은 구월산동지회, 수양산특별지부라고 하는 식이었다.
호림장은 원래 일제시대 노구치 피복공장의 여공 기숙사였다. 여기에 함남 영흥에서 반공운동을 이끌었던 조영진 등 함남 출신 청년들, 청산리전투에 참가했던 독립운동가 김성이 이끌던 반공조직 양호단, 평양에서 만들어진 항일 지하조직이자 반공조직인 대동단, 신의주 반공학생의거 후 월남한 평북지역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염동진의 대동단은 후일 백의사(白衣社)로 발전한다 (《월간조선》 2016년 10월호, ‘남의사(藍衣社)와 백의사 - 치열하게 살다 안개처럼 사라져 간 한·중의 반공투사들’ 참조).
호림장의 월남청년들은 100여 명에 달했다. 대한혁신청년회 회장으로는 유진산이 추대되었다. 박정희 정권 시절 신민당 총재를 지내면서 정치사(政治史)에 큰 족적을 남긴 바로 그 사람이다. 남한 땅에 연고가 없는 ‘38따라지’들은 충남 금산 출신 유진산을 앞세워서 자신들의 입지를 마련하려 했던 것이다. 대한혁신청년회 이외에도 북한 출신 청년들이 만든 단체는 여럿이었다. 1946년 4월에는 북선(北鮮)청년회가, 1946년 6월에는 함북청년회와 황해회가 결성됐다. 황해회는 해주 9·16 반공의거를 이끌었던 김인식·이영호 등이 만들었다. 김인식은 후일 제헌국회의원이 되었다.
반탁학련
1945년 12월 28일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조선에 대한 신탁통치 결정이 내려졌다는 보도가 나왔다. 소련이 신탁통치를 제안했다는 잘못된 보도가 나오고, 조선공산당 등 좌익이 당초 신탁통치에 반대하다가 찬성으로 돌아서면서, 우익세력은 ‘반탁(反託)’의 기치 아래 결집했다. 이듬해 1월 3일 반탁치학생연맹(반탁학련)을 결성했다. 위원장은 당시 보성전문학교에 다니던 이철승이었다. 후일 신민당 대표최고위원을 지내는 그는 반탁학련을 시작으로 평생을 반공투쟁에 헌신했다.
1월 15일 ‘미국의 소리’ 방송이 “박헌영이 《뉴욕타임스》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소련 단독의 신탁통치 후 조선이 소비에트연방에 편입되기를 희망했다”고 보도했다. 그날 스티코프 중장이 이끄는 미소공동위원회 소련 대표들이 서울에 들어왔다.
반탁학련은 다음 날 정동교회에서 박헌영의 망언을 규탄하는 성토대회를 열었다. 성토대회를 마친 후 학생들은 을지로 입구에 있던 좌익신문 《인민보》를 습격, 윤전기에 모래를 부었다. 이들은 이어 종로에 있는 인민당, 안국동의 서울시 인민위원회 등을 습격했다. 안국동과 신문로에서 시위대를 향해 총격이 가해졌다. 좌익계 학병동맹·국군준비대의 소행이었다. 연희전문학교 학생 함영훈(전 주파키스탄 대사) 등 40여 명이 부상을 당했다.
반탁학련은 1946년 7월 31일 전국학생총연맹으로 발전했다. 이들은 반탁투쟁 과정에서는 물론, 이후 좌우익 투쟁 과정에서 좌익과 피투성이 싸움을 벌였다. 이런 투쟁들은 시작에 불과했다.
1946년 3월 1일 해방 후 첫 3·1절 기념집회가 열렸다. 이날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우익 3·1절 집회에는 3만여 명, 남산에서 열린 좌익행사에는 10만여 명이 나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자존심이 상한 문봉제·채기은·이성수 등 평남 출신 반공청년들은 3월 5일 38선철폐국민대회를 개최했다. 조선민주당, 양호단, 한국독립당, 백의사 등이 이들을 지원했다. 평북 정주 출신인 《조선일보》 사주 방응모 선생은 수만장의 홍보전단을 인쇄해 주었다. 이날 행사에는 2만5000여 명이 모였다. 3·1절 행사로부터 불과 나흘 만에, 빈손이나 다름없는 ‘38따라지’들이 이런 행사를 성공시켰다는 사실은 북한 출신 반공청년들을 크게 고무시켰다. 이들은 행사를 마친 후 “때려 부숴라 38선!” “때려 부숴라 공산당!” 등의 구호를 외치면서 가두시위를 벌였다. 시위대는 정동에 있는 소련영사관으로 몰려가 영사관에 돌을 던졌다. 남한의 공산주의자들을 배후 조종하던 영사 샤브신 등은 황급히 도망쳤다. 청년들은 다시 인민위원회 본부, 조선공산당 본부와 해방일보사, 인민일보사, 현대일보사, 중앙일보사, 자유신문사 등 좌익 언론사들을 습격했다.
그동안 좌익의 공세에 밀리기만 하던 우익은 이 사건으로 크게 고무되었다. 평남 출신 청년들은 평남동지회 출범을 준비하면서, 〈이북통신〉을 발간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평북 정주 출신 선우기성이 찾아왔다. 오산학교를 나온 그는 독립운동을 하다가 옥고(獄苦)까지 치렀던 항일투사였다. 선우기성은 평남, 평북 출신을 가리지 않고 통합된 단체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1946년 6월 평안청년회가 출범했다. 출범 당시 회원은 500여 명. 회장은 백남홍(평남), 부회장은 선우기성(평북), 문봉제(평남)가 맡았다.
좌익노동운동 진압
1946년 5월 15일 조선정판사 사건이 터졌다. 조선정판사 사장 박낙동, 공산당 재정부장 이관술, 《해방일보》 사장 권오직 등 조선공산당 당원들이 300만원의 위조지폐를 찍어 유통시킨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조선공산당은 당장 ‘미군정의 조작극’이라고 반발했다(국내 좌파 역사가들 중에는 조선정판사 사건이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이 사건 이후 미군정은 종전의 관용적이던 태도를 바꾸어 조선공산당과 좌익세력에 대해 단호한 자세를 취하게 되었다.
평안청년회는 조선정판사 사건 이후, 조선정판사 건물에 내걸린 “우리는 위폐(僞幣)와 무관하다!” “인민전선 만세!”라고 적힌 플래카드를 철거하려다가 공산당원들과 충돌했다. 좌익신문 《현대일보》는 평안청년회를 ‘악마’라고 비난하는 기사를 실었다. 문봉제 등 평안청년회 간부들이 현대일보사를 찾아가 사과를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 평안청년회 회원들은 신문사 안으로 난입, 인쇄시설을 박살냈다. 평안청년회원들은 옆 대성빌딩에 있던 좌익계 《중앙일보》도 습격, 인쇄시설을 파괴했다. 이 인쇄시설은 《중앙일보》는 물론, 《자유신문》 《현대일보》 《인민일보》 등 좌익신문들이 공동으로 이용하던 것이었다. 이들 신문은 이후 발행이 중단되었다.
경성방직, 조선피혁 등 경공업공장 등이 밀집해 있는 서울 영등포 일대는 좌익노동운동 세력의 해방구(解放區)였다. 좌익노동자들은 1945년 11월 5일 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를 만들어 기세를 올렸다. 전평 위원장 허성택은 후일 월북(越北)해 초대 노동상, 석탄공업상 등을 지냈다.
좌익은 적산(敵産)기업만 점거한 게 아니었다. 김연수가 세운 경성방직 같은 회사도 좌익노조의 수중에 떨어졌다. 김연수는 한국민주당을 이끌던 김성수의 동생이었다. 경성방직은 평안청년회에 공장 탈환을 부탁했다. 1946년 8월 21일 평안청년회를 비롯한 여러 우익청년단체들은 양평동에 있는 경성방직 탈환작전을 벌였다. 평안청년회의 김성주, 함북청년회의 반성환·장창원, 평양 출신의 유명한 레슬링 선수 황병관 등이 앞장섰다. 맨주먹으로 쳐들어간 이들에게 좌익노동자들은 용광로에 달군 쇠파이프를 휘두르며 저항했다. 난투극 끝에 우익청년단체들은 경성방직을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공장지대였던 인천도 ‘조선의 레닌그라드’라고 불릴 정도로 좌익세가 강했다. 장면 정권 시절 민의원 의장을 지낸 곽상훈 등 인천의 우익인사들은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평안청년회에 도움을 요청했다. 다행히 인천에는 황해도나 평안도에서 월남한 젊은이들이 많았다. 평안청년회는 이들을 중심으로 평안청년회 인천지부를 결성하고, 좌익세력 축출작전에 나섰다. 동양방직, 조선화학비료, 조선기계, 조선제마(製麻), 조선차량, 조선알미늄, 야전장유(醬油) 등 좌익이 점령했던 공장들이 치열한 싸움 끝에 탈환되었다.
이렇게 탈환한 공장들을 1946년 3월 10일 우익노동단체인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대한노총·한국노총의 전신)의 기반이 되었다.
서북청년회 출범
좌익세력들과 피 흘려 가며 투쟁하는 가운데, 북한 출신 청년운동단체들 사이에서는 난립한 여러 단체들을 하나로 통합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게 되었다. 결국 1946년 11월 30일 서북청년회가 출범했다. ‘서북(西北)’이라는 말은 관서(關西·평안도, 황해도)와 관북(關北·함경도, 강원도)이라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 ‘38선 이북지역’이라는 의미였다. 위원장은 선우기성, 부위원장은 장윤필(함북), 조영진(함남)이 맡았다.
서북청년회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단순무식한 폭력단체’가 아니었다. 회원의 절반 정도는 5년제 중학 재학 이상의 학력을 가지고 있었고, 국내나 일본에서 대학공부를 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회원들 중에는 주먹패로 유명했던 이들도 있었다. 평양 출신의 이화룡, ‘시라소니’ 이성순 등이 그들이다. 서북청년회 회원들은 북한에서 공산주의를 체험했기 때문에 당시 그 누구보다도 반공의식이 투철했다. 이들은 황해도 출신인 이승만·김구 등 민족진영 지도자들과 정서적으로 가까웠다.
서북청년회가 정식으로 출범하기 이전부터 북한 출신 반공청년단체들은 경찰의 치안활동을 보조하면서 좌익과 싸워 왔다. 서북청년회는 발족 후인 1947년 6월 10일 대전에 남선(南鮮)파견대를 창설했다. 남선파견대는 충청·영남·호남 지역에서 활동하는 서북청년회의 전진기지였다. 우익 지방유지들이 서북청년회에 지원을 요청해 오면 이들은 20~40명의 병력을 파견했다. 남선파견대장은 함북 청진 출신 임일이었다. 대담무쌍한 그를 두고 좌익은 ‘장군’이라는 야유 섞인 별명을 지어 주었다.
당시 국방경비대에는 적지 않은 좌익세력들이 침투해 있었다. 1947년 6월 충북 영동에서 현지 주둔 국방경비대 소속 좌익 군인들이 서북청년회원들의 숙소를 습격, 회원 10명을 죽창으로 찔러 죽였다. 이 소식을 접한 서북청년회 남선파견대장 임일은 20명의 회원들을 데리고 충북 영동으로 들어갔다. 훈련부장 허태화가 증원 병력을 이끌고 뒤를 따랐다. 서북청년회원들은 몽둥이를 들고 좌익 병사들이 모여 있는 막사를 습격했다. 난투극이 벌어졌다. 미군정청은 이 사건을 심각하게 보고, 관계자들을 엄벌하려 했다. 임일은 국방경비대 내 좌익세력이 먼저 서북청년회원들을 공격해 죽인 게 원인임을 분명히 하는 한편, 김구에게 광복군 출신인 유동열 통위부장(국방부 장관)과 송호성 사령관에게 영향력을 행사해 달라고 요청해 사건을 무마했다.
1947년 6월 20일 대구역전 공회당에서 남로당 경북도당과 전평이 주최한 신탁통치 찬성 웅변대회가 열렸다. 서북청년회원 30여 명은 운동선수로 가장하고 야구방망이를 들고 행사장에 침투했다. 이들은 “이승만·김구를 타도하자!”는 구호가 스피커에서 나오는 순간, 전기를 끊고 야구방망이를 휘둘러 집회를 분쇄했다. 서북청년회원들은 공산주의를 찬양하는 좌익들을 붙잡아 포항에서 목선에 태워 북한으로 보내기도 했다.
대구의 좌익신문 《민성일보》가 서북청년회를 규탄하자, 임일은 신문사를 찾아가 정정보도를 요구했다. 《민성일보》는 이를 거절하고, “서북청년회가 신문사를 협박했다”는 보도를 내보냈다. 서북청년회는 《민성일보》를 습격해 인쇄시설을 파괴해, 더 이상 신문을 발행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남로당 비밀당원인 검사 암살
1947년 6월 부산에서는 1주일 간격으로 남부산경찰서장과 독립촉성국민회 경남지부장이 좌익에게 살해당했다. 부산 지역 우익 유지들의 요청으로 반성환이 이끄는 30명의 서북청년회원들이 부산으로 내려갔다. 7월 7일 이들은 좌익문학가동맹과 《민주중보》가 공동주최한 미소공동위원회 재개 축하행사장을 습격했다. 이들은 동학란을 주제로 한 공연이 한창 진행될 때, 단상에 다이너마이트를 던졌다. 요란한 폭음과 함께 공연장은 난장판이 됐고, 공연은 중단됐다. 다이너마이트가 불량품이었는지, 사상자는 없었다.
8월 8일에는 손진, 전의, 한창협 등은 좌익계 《조선신문》 《대중신문》 《민주중보》를 습격, 인쇄시설을 파괴했다. 8월 11일에는 남로당 경남도당을 습격, 당원 명부를 탈취했다. 이후로도 좌익의 총연합체인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 경남도 지부, 김원봉의 인민공화당 당사 등을 습격했다. 8월 23일에는 조선민주애국청년동맹(민애청) 회관을 공격해 민청 간판을 떼어내고 서북청년회 부산지부 간판을 달았다.
당시 부산지방검찰청의 정모 검사는 검찰 내에서 암약하던 좌익분자였다. 그는 평소 직무를 수행하면서 우익에게는 가혹하고, 좌익에게는 관대하게 대했다. 서북청년단은 8월 11일 입수한 남로당 당원명부를 통해 정 검사가 남로당 비밀당원임을 확인했다. 1947년 9월 4일 서북청년회원 허원섭은 출근하던 정 검사를 권총으로 쏘아 죽였다.
1주일 후에는 서북청년회 정보부장 이춘식이 부산 민전의장 겸 공산당 기관지 《조선신문》 사장이었던 박모의 집에 들어가 그를 사살했다. 박모는 양조장을 경영하는 부자이면서도 공산주의자였던, 요즘으로 치면 ‘강남 좌파’ 같은 사람이었다.
서북청년회가 이렇게 맹활약을 하고 있을 때인 1947년 여름 광복군 총사령관 이청천 장군이 귀국했다. 이청천이 대동청년단을 결성하기로 하자, 서북청년회는 둘로 갈라졌다. 선우기성 등은 대동청년단으로의 합류를, 문봉제·김성주 등은 잔류를 주장했다. 이청천이 대동청년단을 결성한 후인 1947년 9월 26일, 잔류파는 서북청년회 재건대회를 열었다. 이를 재건서북청년회라고 한다. 위원장은 문봉제가 맡았다.
1947년 11월 14일 유엔총회는 남북한 자유총선거에 의한 통일한국정부 수립을 결의했다. 1948년 4월 3일 제주에서 5·10총선거를 방해하기 위한 폭동이 발생했다. 조병옥 경무부장, 9연대장 송요찬 중령 등의 요청에 따라 서북청년회는 700명의 회원들을 제주도로 파견했다. 그해 10월 여순반란이 일어났을 때에도 서북청년회원 600명이 경찰과 함께 진압작전에 참가했다.
김두한과 대한민청
서북청년회 이외에도 많은 우익청년단체들이 활동했다. 그 중 하나인 대한민주청년동맹(대한민청)은 1946년 4월9일 결성됐다. 회장은 대한혁신청년회를 이끌던 유진산이었다. 이 단체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도 이 조직의 감찰부장 이름은 기억한다. 감찰부장의 이름은 바로 ‘장군의 아들’ 김두한. 김두한은 해방 후 같은 주먹패인 정진룡과 함께 좌익청년단체인 조선청년전위대를 결성했지만, 우익인사 박용직으로부터 아버지 김좌진 장군이 공산주의자의 총에 죽었다는 걸 알게 된 후 우익으로 전향했다.
1946년 김두한 등은 공산주의 선동영화 〈님〉을 상영하고 있던 중앙극장에 연막탄과 폭음탄을 투척하고, 영사기를 탈취한 후 필름을 소각했다. 신문에도 보도되었던 여운형 납치사건도 대한민청의 소행이었다.
김두한과 대한민청 회원 700명은194년 9월 30일 용산 철도파업 진압작전에도 앞장섰다. 이 작전에는 경찰 3500명과 대한민청, 서북청년회, 대한독립촉성국민회청년대(국청), 대한노총 등 2000여 명의 청년단체 회원들이 참가했다. 김두한은 다음 날에는 200여 명의 단원들을 이끌고 좌익노조의 총본산인 전평 사무실을 습격, 전평의 서류들을 탈취했다.
1947년 4월 20일, 대한민청 회원들은 조선청년전위대의 정진룡 등 35명을 납치했다. 대한민청 회원들은 납치해 온 좌익들을 폭행하다가 정진룡 등 2명을 죽게 만들었다. 김두한을 ‘한국의 알 카포네’라고 부르며 못마땅하게 여기던 미군정청은 이를 기화로 김두한을 체포하고 대한민청을 해산시켰다.
이렇게 보면 서북청년회 등 우익청년단체들이 대단한 폭력을 행사한 것 같다. 하지만 당시는 동란의 시대였다. 일례로 1946년 대구 10·1폭동 때에는 400여 명의 경찰관이 좌익에게 학살당했다. 미군 G-2 보고서에 의하면 대구 시내에서만 경찰관 38명, 공무원 163명, 민간인 73명이 죽고 1000여 명이 부상당했다. 폭도들은 붙잡힌 경찰관들을 고문하고, 산 채로 불에 태우거나 껍질을 벗겨 죽였다. 10월 2일 밤 미군 순찰대는 경찰관 7명의 시체를 발견했다. 시체는 칼과 도끼로 난자당하거나 큰 돌로 머리가 짓이겨지거나 성기(性器)가 잘려 있었다. 칠곡경찰서장 윤상탕 경감은 죽창, 낫에 찔리고 곤봉에 맞아 죽었다. 왜관경찰서를 점령한 폭도들은 경찰서장을 죽이기 전에 눈을 파내고 혀를 뽑았으며, 도끼로 장작을 패듯 머리를 쪼개 살해했다. 좌익폭도들은 대구 수성천변에서 방적공장을 하던 서모씨의 집을 습격, 가족 7명을 때려 죽였다. 서씨의 부인과 큰딸의 시체는 새끼줄로 매달아 자동차에 달고 대구 시내를 한 시간 반가량 끌고 다녔다. 상주의 지주 이인석을 학살한 폭도들은 그의 네 살바기 손자까지 살해했다. 좌파들이 극악무도한 테러리스트로 비난하는 우익청년단체들의 ‘테러’라는 것은 좌익폭도들의 만행에 비할 바가 못 된다.
대한청년단으로 통합
서북청년회 등 우익청년단체들은 대한민국을 세우고 지킨 세력이었다. 미군정청 경무부장 조병옥은 후일 “그들이 아니었다면 치안을 유지할 수도, 건국을 할 수도 없었다”고 술회했다. 하지만 그들은 해방공간에서만 존재할 수 있고, 존재가치가 있는 이들이었다. 역설적으로 대한민국의 건국이라는 그들의 목표가 이루어지는 순간, 그들의 존재근거는 사라졌다. 1948년 12월 19일 이승만 대통령은 국내 모든 청년단체들을 대한청년단으로 통합하도록 지시했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서북청년회 출신들은 대북첩보부대인 KLO(켈로)부대, 3사단 18연대(백골부대), 구월산유격대 등에서 활약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면서 그들의 시대는 완전히 저물었다. 지지리도 가난했던 정부는 건국의 투사들에게 보답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해방공간의 풍운아였던 우익청년단체의 투사들은 삶의 고단함에 치이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갔다. 선우휘 전 《조선일보》 주필은 그들의 쓸쓸한 모습을 소설 《오리와 계급장》에 담았다. 선우휘의 자전적 성격이 강한 이 소설에서 6·25 당시 장사상륙작전에도 참가했던 서북청년회의 맹장(猛將) 춘봉 형님은 부역(附逆) 혐의로 죽다 살아난 동향(同鄕) 출신 전직 교사와 함께 호구지책(糊口之策)으로 시골에서 오리를 치며 살길을 찾으려 애쓴다.
1980년대 이후 친북좌파적 역사관이 횡행하며 건국의 투사들은 ‘테러리스트’ ‘학살자’로 매도되기 시작했다. 반면에 대한민국에 반대했던 폭동과 반란은 ‘봉기’로 미화되고, 국가적 기념과 배상이 뒤따랐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다시 극심한 이념적 내전을 겪고 있다. 이제 아스팔트 위에서의 내전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흑(黑)과 백(白)이 뒤집히는 이런 상황은 어쩌면 나라를 세우고 지키기 위해 피 흘린 이들을 현창(顯彰)하는 것을 게을리한 응보(應報)일지도 모른다.⊙
해방 이후 우익(右翼)진영은 좌익진영에 비해 열세에 있었다. 좌익진영은 해방 직전 여운형이 일제(日帝)로부터 치안권을 이양받고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 유리한 고지를 선점(先占)했다. 이들은 미군이 38선 이남에 진주하기 전에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하고, 내각 명단까지 내놓았다. 미(美)군정청은 조선인민공화국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좌익의 우세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좌익은 이미 기업·언론사 등을 점거하고, 조선공산당을 재건했으며, 정치·경제·사회·문화 각 분야의 전위(前衛)조직들을 만들어 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을 막을 우익진영의 역량은 전무(全無)하다시피 했다. 권력을 쥔 미군정청은 서구식 민주주의 이념에 사로잡혀 좌우 이념문제에 대한 경각심이 없었다. 경찰은 한국민주당계의 조병옥·장택상 등이 장악하고 있었지만, 일제시대에 복무했다는 약점 때문에 대다수 민중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있었다. 국군의 전신(前身)이라 할 수 있는 국방경비대에는 미군정청의 무신경함 때문에 좌익세력이 깊이 침투해 있었다. 공권력은 권위도, 물리력도 없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무력(無力)한 공권력을 대신해 좌익과 투쟁한 이들이 있었다. 바로 서북청년회를 비롯한 우익청년단체들이었다.
우익운동의 인력풀이 된 이북 출신 청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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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혁신청년단, 대한민주청년동맹, 청년조선총연맹 등 우익청년단체를 이끌었던 유진산. |
1945년 8월~1946년 4월까지 38선을 넘어온 월남민(越南民)들은 50만명에 달했다. 그중에는 단신으로 월남한 청년·학생들도 적지 않았다. 서울 거리를 헤매던 이들은 알음알음으로 동향(同鄕) 사람들이 모이는 합숙소를 찾아 들어갔다. 합숙소는 대개 일본인들이 버리고 간 공장 기숙사, 창고, 사찰, 신사(神社) 등이었다. 서울에선 60여 개의 합숙소에 2000~3000여 명이 수용되어 있었다. 종로구 권농동의 호림장, 효창공원 옆 함북청년회 합숙소, 삼각병원 2층, 옛 목정소학교 자리의 대원장, 그리고 용산의 해방촌 등이 유명했다. 월남한 청년들은 고향의 이름을 따서 청년단체를 조직했다. 평남 진남포와 용강군 출신들은 진룡동지회, 평북 신의주 출신들은 압록강동지회, 평양 출신들은 대동강동지회, 황해도 출신들은 구월산동지회, 수양산특별지부라고 하는 식이었다.
호림장은 원래 일제시대 노구치 피복공장의 여공 기숙사였다. 여기에 함남 영흥에서 반공운동을 이끌었던 조영진 등 함남 출신 청년들, 청산리전투에 참가했던 독립운동가 김성이 이끌던 반공조직 양호단, 평양에서 만들어진 항일 지하조직이자 반공조직인 대동단, 신의주 반공학생의거 후 월남한 평북지역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염동진의 대동단은 후일 백의사(白衣社)로 발전한다 (《월간조선》 2016년 10월호, ‘남의사(藍衣社)와 백의사 - 치열하게 살다 안개처럼 사라져 간 한·중의 반공투사들’ 참조).
호림장의 월남청년들은 100여 명에 달했다. 대한혁신청년회 회장으로는 유진산이 추대되었다. 박정희 정권 시절 신민당 총재를 지내면서 정치사(政治史)에 큰 족적을 남긴 바로 그 사람이다. 남한 땅에 연고가 없는 ‘38따라지’들은 충남 금산 출신 유진산을 앞세워서 자신들의 입지를 마련하려 했던 것이다. 대한혁신청년회 이외에도 북한 출신 청년들이 만든 단체는 여럿이었다. 1946년 4월에는 북선(北鮮)청년회가, 1946년 6월에는 함북청년회와 황해회가 결성됐다. 황해회는 해주 9·16 반공의거를 이끌었던 김인식·이영호 등이 만들었다. 김인식은 후일 제헌국회의원이 되었다.
반탁학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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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탁통치 반대운동은 좌익에게 밀리던 우익이 결집하는 계기가 됐다. |
1월 15일 ‘미국의 소리’ 방송이 “박헌영이 《뉴욕타임스》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소련 단독의 신탁통치 후 조선이 소비에트연방에 편입되기를 희망했다”고 보도했다. 그날 스티코프 중장이 이끄는 미소공동위원회 소련 대표들이 서울에 들어왔다.
반탁학련은 다음 날 정동교회에서 박헌영의 망언을 규탄하는 성토대회를 열었다. 성토대회를 마친 후 학생들은 을지로 입구에 있던 좌익신문 《인민보》를 습격, 윤전기에 모래를 부었다. 이들은 이어 종로에 있는 인민당, 안국동의 서울시 인민위원회 등을 습격했다. 안국동과 신문로에서 시위대를 향해 총격이 가해졌다. 좌익계 학병동맹·국군준비대의 소행이었다. 연희전문학교 학생 함영훈(전 주파키스탄 대사) 등 40여 명이 부상을 당했다.
반탁학련은 1946년 7월 31일 전국학생총연맹으로 발전했다. 이들은 반탁투쟁 과정에서는 물론, 이후 좌우익 투쟁 과정에서 좌익과 피투성이 싸움을 벌였다. 이런 투쟁들은 시작에 불과했다.
1946년 3월 1일 해방 후 첫 3·1절 기념집회가 열렸다. 이날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우익 3·1절 집회에는 3만여 명, 남산에서 열린 좌익행사에는 10만여 명이 나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자존심이 상한 문봉제·채기은·이성수 등 평남 출신 반공청년들은 3월 5일 38선철폐국민대회를 개최했다. 조선민주당, 양호단, 한국독립당, 백의사 등이 이들을 지원했다. 평북 정주 출신인 《조선일보》 사주 방응모 선생은 수만장의 홍보전단을 인쇄해 주었다. 이날 행사에는 2만5000여 명이 모였다. 3·1절 행사로부터 불과 나흘 만에, 빈손이나 다름없는 ‘38따라지’들이 이런 행사를 성공시켰다는 사실은 북한 출신 반공청년들을 크게 고무시켰다. 이들은 행사를 마친 후 “때려 부숴라 38선!” “때려 부숴라 공산당!” 등의 구호를 외치면서 가두시위를 벌였다. 시위대는 정동에 있는 소련영사관으로 몰려가 영사관에 돌을 던졌다. 남한의 공산주의자들을 배후 조종하던 영사 샤브신 등은 황급히 도망쳤다. 청년들은 다시 인민위원회 본부, 조선공산당 본부와 해방일보사, 인민일보사, 현대일보사, 중앙일보사, 자유신문사 등 좌익 언론사들을 습격했다.
그동안 좌익의 공세에 밀리기만 하던 우익은 이 사건으로 크게 고무되었다. 평남 출신 청년들은 평남동지회 출범을 준비하면서, 〈이북통신〉을 발간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평북 정주 출신 선우기성이 찾아왔다. 오산학교를 나온 그는 독립운동을 하다가 옥고(獄苦)까지 치렀던 항일투사였다. 선우기성은 평남, 평북 출신을 가리지 않고 통합된 단체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1946년 6월 평안청년회가 출범했다. 출범 당시 회원은 500여 명. 회장은 백남홍(평남), 부회장은 선우기성(평북), 문봉제(평남)가 맡았다.
좌익노동운동 진압
1946년 5월 15일 조선정판사 사건이 터졌다. 조선정판사 사장 박낙동, 공산당 재정부장 이관술, 《해방일보》 사장 권오직 등 조선공산당 당원들이 300만원의 위조지폐를 찍어 유통시킨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조선공산당은 당장 ‘미군정의 조작극’이라고 반발했다(국내 좌파 역사가들 중에는 조선정판사 사건이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이 사건 이후 미군정은 종전의 관용적이던 태도를 바꾸어 조선공산당과 좌익세력에 대해 단호한 자세를 취하게 되었다.
평안청년회는 조선정판사 사건 이후, 조선정판사 건물에 내걸린 “우리는 위폐(僞幣)와 무관하다!” “인민전선 만세!”라고 적힌 플래카드를 철거하려다가 공산당원들과 충돌했다. 좌익신문 《현대일보》는 평안청년회를 ‘악마’라고 비난하는 기사를 실었다. 문봉제 등 평안청년회 간부들이 현대일보사를 찾아가 사과를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 평안청년회 회원들은 신문사 안으로 난입, 인쇄시설을 박살냈다. 평안청년회원들은 옆 대성빌딩에 있던 좌익계 《중앙일보》도 습격, 인쇄시설을 파괴했다. 이 인쇄시설은 《중앙일보》는 물론, 《자유신문》 《현대일보》 《인민일보》 등 좌익신문들이 공동으로 이용하던 것이었다. 이들 신문은 이후 발행이 중단되었다.
경성방직, 조선피혁 등 경공업공장 등이 밀집해 있는 서울 영등포 일대는 좌익노동운동 세력의 해방구(解放區)였다. 좌익노동자들은 1945년 11월 5일 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를 만들어 기세를 올렸다. 전평 위원장 허성택은 후일 월북(越北)해 초대 노동상, 석탄공업상 등을 지냈다.
좌익은 적산(敵産)기업만 점거한 게 아니었다. 김연수가 세운 경성방직 같은 회사도 좌익노조의 수중에 떨어졌다. 김연수는 한국민주당을 이끌던 김성수의 동생이었다. 경성방직은 평안청년회에 공장 탈환을 부탁했다. 1946년 8월 21일 평안청년회를 비롯한 여러 우익청년단체들은 양평동에 있는 경성방직 탈환작전을 벌였다. 평안청년회의 김성주, 함북청년회의 반성환·장창원, 평양 출신의 유명한 레슬링 선수 황병관 등이 앞장섰다. 맨주먹으로 쳐들어간 이들에게 좌익노동자들은 용광로에 달군 쇠파이프를 휘두르며 저항했다. 난투극 끝에 우익청년단체들은 경성방직을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공장지대였던 인천도 ‘조선의 레닌그라드’라고 불릴 정도로 좌익세가 강했다. 장면 정권 시절 민의원 의장을 지낸 곽상훈 등 인천의 우익인사들은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평안청년회에 도움을 요청했다. 다행히 인천에는 황해도나 평안도에서 월남한 젊은이들이 많았다. 평안청년회는 이들을 중심으로 평안청년회 인천지부를 결성하고, 좌익세력 축출작전에 나섰다. 동양방직, 조선화학비료, 조선기계, 조선제마(製麻), 조선차량, 조선알미늄, 야전장유(醬油) 등 좌익이 점령했던 공장들이 치열한 싸움 끝에 탈환되었다.
이렇게 탈환한 공장들을 1946년 3월 10일 우익노동단체인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대한노총·한국노총의 전신)의 기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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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북청년회 초대 위원장 선우기성. |
서북청년회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단순무식한 폭력단체’가 아니었다. 회원의 절반 정도는 5년제 중학 재학 이상의 학력을 가지고 있었고, 국내나 일본에서 대학공부를 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회원들 중에는 주먹패로 유명했던 이들도 있었다. 평양 출신의 이화룡, ‘시라소니’ 이성순 등이 그들이다. 서북청년회 회원들은 북한에서 공산주의를 체험했기 때문에 당시 그 누구보다도 반공의식이 투철했다. 이들은 황해도 출신인 이승만·김구 등 민족진영 지도자들과 정서적으로 가까웠다.
서북청년회가 정식으로 출범하기 이전부터 북한 출신 반공청년단체들은 경찰의 치안활동을 보조하면서 좌익과 싸워 왔다. 서북청년회는 발족 후인 1947년 6월 10일 대전에 남선(南鮮)파견대를 창설했다. 남선파견대는 충청·영남·호남 지역에서 활동하는 서북청년회의 전진기지였다. 우익 지방유지들이 서북청년회에 지원을 요청해 오면 이들은 20~40명의 병력을 파견했다. 남선파견대장은 함북 청진 출신 임일이었다. 대담무쌍한 그를 두고 좌익은 ‘장군’이라는 야유 섞인 별명을 지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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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북청년회 남선파견대장 임일. |
1947년 6월 20일 대구역전 공회당에서 남로당 경북도당과 전평이 주최한 신탁통치 찬성 웅변대회가 열렸다. 서북청년회원 30여 명은 운동선수로 가장하고 야구방망이를 들고 행사장에 침투했다. 이들은 “이승만·김구를 타도하자!”는 구호가 스피커에서 나오는 순간, 전기를 끊고 야구방망이를 휘둘러 집회를 분쇄했다. 서북청년회원들은 공산주의를 찬양하는 좌익들을 붙잡아 포항에서 목선에 태워 북한으로 보내기도 했다.
대구의 좌익신문 《민성일보》가 서북청년회를 규탄하자, 임일은 신문사를 찾아가 정정보도를 요구했다. 《민성일보》는 이를 거절하고, “서북청년회가 신문사를 협박했다”는 보도를 내보냈다. 서북청년회는 《민성일보》를 습격해 인쇄시설을 파괴해, 더 이상 신문을 발행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남로당 비밀당원인 검사 암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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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건서북청년회 위원장 문봉제. |
8월 8일에는 손진, 전의, 한창협 등은 좌익계 《조선신문》 《대중신문》 《민주중보》를 습격, 인쇄시설을 파괴했다. 8월 11일에는 남로당 경남도당을 습격, 당원 명부를 탈취했다. 이후로도 좌익의 총연합체인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 경남도 지부, 김원봉의 인민공화당 당사 등을 습격했다. 8월 23일에는 조선민주애국청년동맹(민애청) 회관을 공격해 민청 간판을 떼어내고 서북청년회 부산지부 간판을 달았다.
당시 부산지방검찰청의 정모 검사는 검찰 내에서 암약하던 좌익분자였다. 그는 평소 직무를 수행하면서 우익에게는 가혹하고, 좌익에게는 관대하게 대했다. 서북청년단은 8월 11일 입수한 남로당 당원명부를 통해 정 검사가 남로당 비밀당원임을 확인했다. 1947년 9월 4일 서북청년회원 허원섭은 출근하던 정 검사를 권총으로 쏘아 죽였다.
1주일 후에는 서북청년회 정보부장 이춘식이 부산 민전의장 겸 공산당 기관지 《조선신문》 사장이었던 박모의 집에 들어가 그를 사살했다. 박모는 양조장을 경영하는 부자이면서도 공산주의자였던, 요즘으로 치면 ‘강남 좌파’ 같은 사람이었다.
서북청년회가 이렇게 맹활약을 하고 있을 때인 1947년 여름 광복군 총사령관 이청천 장군이 귀국했다. 이청천이 대동청년단을 결성하기로 하자, 서북청년회는 둘로 갈라졌다. 선우기성 등은 대동청년단으로의 합류를, 문봉제·김성주 등은 잔류를 주장했다. 이청천이 대동청년단을 결성한 후인 1947년 9월 26일, 잔류파는 서북청년회 재건대회를 열었다. 이를 재건서북청년회라고 한다. 위원장은 문봉제가 맡았다.
1947년 11월 14일 유엔총회는 남북한 자유총선거에 의한 통일한국정부 수립을 결의했다. 1948년 4월 3일 제주에서 5·10총선거를 방해하기 위한 폭동이 발생했다. 조병옥 경무부장, 9연대장 송요찬 중령 등의 요청에 따라 서북청년회는 700명의 회원들을 제주도로 파견했다. 그해 10월 여순반란이 일어났을 때에도 서북청년회원 600명이 경찰과 함께 진압작전에 참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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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주청년동맹 회원들. 미군정으로부터 유사 군사단체로 의심받기도 했다. |
1946년 김두한 등은 공산주의 선동영화 〈님〉을 상영하고 있던 중앙극장에 연막탄과 폭음탄을 투척하고, 영사기를 탈취한 후 필름을 소각했다. 신문에도 보도되었던 여운형 납치사건도 대한민청의 소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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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청 감찰부장 김두한. |
1947년 4월 20일, 대한민청 회원들은 조선청년전위대의 정진룡 등 35명을 납치했다. 대한민청 회원들은 납치해 온 좌익들을 폭행하다가 정진룡 등 2명을 죽게 만들었다. 김두한을 ‘한국의 알 카포네’라고 부르며 못마땅하게 여기던 미군정청은 이를 기화로 김두한을 체포하고 대한민청을 해산시켰다.
이렇게 보면 서북청년회 등 우익청년단체들이 대단한 폭력을 행사한 것 같다. 하지만 당시는 동란의 시대였다. 일례로 1946년 대구 10·1폭동 때에는 400여 명의 경찰관이 좌익에게 학살당했다. 미군 G-2 보고서에 의하면 대구 시내에서만 경찰관 38명, 공무원 163명, 민간인 73명이 죽고 1000여 명이 부상당했다. 폭도들은 붙잡힌 경찰관들을 고문하고, 산 채로 불에 태우거나 껍질을 벗겨 죽였다. 10월 2일 밤 미군 순찰대는 경찰관 7명의 시체를 발견했다. 시체는 칼과 도끼로 난자당하거나 큰 돌로 머리가 짓이겨지거나 성기(性器)가 잘려 있었다. 칠곡경찰서장 윤상탕 경감은 죽창, 낫에 찔리고 곤봉에 맞아 죽었다. 왜관경찰서를 점령한 폭도들은 경찰서장을 죽이기 전에 눈을 파내고 혀를 뽑았으며, 도끼로 장작을 패듯 머리를 쪼개 살해했다. 좌익폭도들은 대구 수성천변에서 방적공장을 하던 서모씨의 집을 습격, 가족 7명을 때려 죽였다. 서씨의 부인과 큰딸의 시체는 새끼줄로 매달아 자동차에 달고 대구 시내를 한 시간 반가량 끌고 다녔다. 상주의 지주 이인석을 학살한 폭도들은 그의 네 살바기 손자까지 살해했다. 좌파들이 극악무도한 테러리스트로 비난하는 우익청년단체들의 ‘테러’라는 것은 좌익폭도들의 만행에 비할 바가 못 된다.
대한청년단으로 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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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0총선을 앞두고 서북청년회원들은 의용경찰관으로 활약했다. |
6·25전쟁이 일어나자 서북청년회 출신들은 대북첩보부대인 KLO(켈로)부대, 3사단 18연대(백골부대), 구월산유격대 등에서 활약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면서 그들의 시대는 완전히 저물었다. 지지리도 가난했던 정부는 건국의 투사들에게 보답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해방공간의 풍운아였던 우익청년단체의 투사들은 삶의 고단함에 치이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갔다. 선우휘 전 《조선일보》 주필은 그들의 쓸쓸한 모습을 소설 《오리와 계급장》에 담았다. 선우휘의 자전적 성격이 강한 이 소설에서 6·25 당시 장사상륙작전에도 참가했던 서북청년회의 맹장(猛將) 춘봉 형님은 부역(附逆) 혐의로 죽다 살아난 동향(同鄕) 출신 전직 교사와 함께 호구지책(糊口之策)으로 시골에서 오리를 치며 살길을 찾으려 애쓴다.
1980년대 이후 친북좌파적 역사관이 횡행하며 건국의 투사들은 ‘테러리스트’ ‘학살자’로 매도되기 시작했다. 반면에 대한민국에 반대했던 폭동과 반란은 ‘봉기’로 미화되고, 국가적 기념과 배상이 뒤따랐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다시 극심한 이념적 내전을 겪고 있다. 이제 아스팔트 위에서의 내전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흑(黑)과 백(白)이 뒤집히는 이런 상황은 어쩌면 나라를 세우고 지키기 위해 피 흘린 이들을 현창(顯彰)하는 것을 게을리한 응보(應報)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