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의사는 황푸군관학교 출신 텅제 등이 만든 장제스의 친위조직 삼민주의역행사와
그 외곽조직, 군통(軍統)·중통(中統) 등 정보기관 등을 통칭해서 일컫는 말
⊙ 장제스에 비판적 지식인, 친일파 등 암살… 김원봉 등 한국 독립운동 지원하기도
⊙ 백의사 사령 염동진, 뤄양군관학교 출신으로 남의사·군통에서 근무
⊙ 10·26 일어난 궁정동 안가는 백의사 본부 자리… 유진산·김두한 등도 백의사 고문
⊙ 백의사, 현준혁 암살, 김일성 암살 미수… 여운형 암살에도 개입
그 외곽조직, 군통(軍統)·중통(中統) 등 정보기관 등을 통칭해서 일컫는 말
⊙ 장제스에 비판적 지식인, 친일파 등 암살… 김원봉 등 한국 독립운동 지원하기도
⊙ 백의사 사령 염동진, 뤄양군관학교 출신으로 남의사·군통에서 근무
⊙ 10·26 일어난 궁정동 안가는 백의사 본부 자리… 유진산·김두한 등도 백의사 고문
⊙ 백의사, 현준혁 암살, 김일성 암살 미수… 여운형 암살에도 개입
- 장제스의 초상화를 앞세우고 행진하는 삼민주의청년단원들. 삼민주의역행사(남의사)의 후신인 삼청단을 이끈 것도 역행사 출신들이었다.
1920년대부터 20여 년간은 ‘셔츠의 시대’였다. 1922년 이탈리아에서는 검은 셔츠(파시스트), 1933년 독일에서는 갈색 셔츠(나치)가 정권을 잡았다. 스페인에서는 푸른 셔츠(팔랑헤당), 루마니아에서는 녹색셔츠(철위단)가 등장했다. 이 물결은 유라시아 대륙을 가로질러 중국에까지 밀려왔다. 서양에서 흔히 ‘블루셔츠(Blueshirts)’라고 번역하는 남의사(藍衣社)가 등장한 것이다. 그리고 그 영향을 받아 해방 후 한국에는 백의사(白衣社)가 등장했다.
남의사가 등장하던 1932년 중국은 내우외환(內憂外患)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1927년 장제스(蔣介石)가 북벌(北伐)에 성공한 후 국민정부(난징정부)가 수립되었다. 하지만 산적한 문제들을 해결하기에는 국민당이나 정부의 능력이 미약했다. 정부에 대한 실망감이 확산되었다. 장제스 자신도 1931년 “혁명은 실패의 위험에 처해 있고, 온 나라는 당에 대한 믿음을 점차 잃어가고 있다”고 탄식했다. 중국 남동부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이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이라는 것을 수립했다.
1931년 9월에는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켰다. 장제스는 “일본은 피부병, 공산당은 심장병”이라며 안내양외(安內攘外)를 외쳤다. 하지만 공산주의자들을 먼저 소탕한 후에 일제(日帝)에 맞서자는 장제스의 외침은 대중의 민족주의 정서와는 한참 거리가 먼 것이었다. 장제스는 한때 군(軍)을 제외한 당정(黨政)의 자리를 내놓아야 했다.
삼민주의역행사
이런 상황에서 국민당을 힘 있는 혁명정당으로 재건하기 위한 비밀결사(密結社)가 나타났다. 이런 움직임을 주도한 사람들은 텅제(藤杰) 등 장제스가 길러낸 황푸(黃埔)군관학교 출신의 청년 엘리트들이었다. 이들은 당시 국가 재건의 특효약으로 여겨지던 이탈리아의 파시즘과 흑룡회(黑龍會)·현양사(玄洋社) 같은 일본국가주의 단체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1929년부터 이러한 단체 결성을 모색하던 텅제는 1931년 9월 40여 명의 동지들과 함께 삼민주의역행사(三民主義力行社)를 결성했다. 텅제는 1980년 국민당 정부의 한국 독립운동 지원에 대한 증언을 수집하기 위해 타이완을 방문한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관계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역행사는 중국 국민당 내에 새로 일어난 하나의 극히 비밀적인 조직으로 그 최고 목표는 삼민주의(쑨원이 내세운 중국의 혁명이념으로 민족·민권·민생을 말함)를 철저히 실행하는 데 있고, 단계적 목표는 안으로는 안정을, 밖으로는 외세를 물리치는 정책을 집행하는 데 있었다. … 이 신흥조직체는 황푸군관학교 출신자로서 일본이나 소련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군관들이 중심이 되고 전국의 문·무·청년들 중의 엘리트를 결합하여 구성한 것으로 그들은 전 국내와 해외에 망상(網狀)처럼 분포되어 있었다.”
‘안으로는 안정’이라는 말은 반공(反共)을, ‘밖으로는 외세를 물리친다’는 말은 ‘항일(抗日)’을 의미했다. 이들은 처음에는 장제스에게도 보고하지 않고 조직을 만들지만, 이듬해 1월 장제스에게 자신들의 존재를 알렸다. 자칫 당내 반역세력으로 오해받을까 우려해서였다. 안 그래도 기존의 당내 파벌 세력들을 넘어서는 친위(親衛) 세력을 필요로 하고 있던 장제스는 이들의 등장을 환영했다. 1932년 2월 29일 역행사가 공식 출범했다. 이 역행사가 바로 본래 의미에서의 남의사다. 텅제가 역행사 초대(初代) 서기를 맡았다. 텅제는 ‘남의사의 발기인’이라고 불린다.
누가 ‘남의사’인가?
남의사라는 이름이 나온 것은 남색이 중국 국민당의 상징 색인 데다가 예부터 중국인들이 남색 옷을 평복으로 즐겨 입었기 때문이었다. 나중의 일이지만 남의사의 특무요원들이 암살을 결행한 후 바로 군중 속으로 섞여들면 아무도 이들을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일본 정보기관의 분석에 의하면, 역행사의 핵심 조직원은 1937년 현재 528명에 불과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핵심 인물인 13명을 세상에서는 ‘13태보(太保·왕자)’라고 지칭했다.
역행사의 외곽에는 황푸군관학교 졸업생들이 중심이 된 중국혁명군인동지회(1933년 해산)와 ‘남의사의 이론가’ 류젠췬(劉健群) 등이 이끄는 중국혁명청년동지회가 있었다. 역행사의 간부가 청년동지회 간부를 겸했다. 청년동지회는 역행사가 기획한 일을 실천하는 일을 담당했다. 청년동지회는 새로운 인력을 발굴해서 역행사로 올려 보내는 일도 했다. 이 2번째 그룹의 바깥에는 또 중화부흥사(中華復興社)나 충의구국군 같은 대중조직이 있었다. 국민당-역행사-중국혁명청년동지회-부흥사 등으로 이어지는 조직 체계는, 지하당-RO(Revolutionary Organization·혁명조직)-RMO(Revolutionary Mass Organization·혁명적 대중조직)-MO(Mass Organization·대중조직)로 이어지는 좌익혁명운동 단체의 구성원리와 흡사하다.
역행사 초대 서기 텅제는 “그 최종 인원수는 약 10만명 정도였으며, 직간접적으로 그 영도를 받던 사람은 1000만명 이상으로 추산되었다”고 회고했다. 남의사 회원이 30만~50만명에 달했다는 관측도 있다. 역행사는 대외적으로는 구망회(救亡會)라는 이름을 사용하기도 했다. 엄밀한 의미에서는 ‘남의사=역행사’이지만, 부흥사·충의구국군 등 대중조직까지 남의사라고 보는 경우도 있었다. 장제스 정권의 특무조직인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 조사통계국(중통), 군사위원회 조사통계국(군통) 등까지 ‘남의사’라고 지칭하기도 했다.
이렇게 된 것은 조직 간 경계가 불분명하고, 인적으로 서로 겹치는 부분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정두음 경남대 교수는 《장제스와 국민당 엘리티스트-1930년대 남의사》에서 “이름과 관련하여 사람들이 느끼는 혼란은 남의사의 지도자들에게는 매우 이상적인 연막과 같은 것으로 여겨졌고, 그들 모두 이에 대해 설명하거나 그에 대한 책임을 두려워하지 않고, 더욱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살아서 들어가고 죽어서 나온다”
역행사에 입회하는 의식은 일종의 종교의식 비슷했다. 새로 들어오는 회원은 선서문을 낭독하고 기밀을 유지할 것을 맹세했으며, 비밀스러운 몸짓이나 수신호, 춤으로 의식을 치렀다. 이는 역사 속에서 끈질기게 이어져 내려온 중국 전통 비밀결사의 요소가 접목된 것이다. “살아서 들어가고 죽어서 나온다(生的進來 死的去出)”가 이들의 구호였다. 조직은 철저히 점(點)조직 형태로 구성되었으며, 윗선과 아랫선은 알아도 옆은 알 수 없었다.
역행사는 국민당 내에서 장제스의 독재 권력을 강화하는 선봉장을 자임했다. 또 대중을 상대로 국민당의 이념과 정책을 선전, 교육하는 일도 했다. 장제스가 대중동원을 위해 제창했던 신생활운동에서도 남의사는 중추적 역할을 맡았다.
그런데 국민당에는 CC단 등 비슷한 활동을 하는 분파(分派)나 기구들이 이미 있었다. 역행사가 이들과 두드러지게 다른 점은, 일종의 무력(武力)기구였다는 데 있다. 역행사는 별동총대(別動總隊)를 비롯한 다양한 무장테러 조직을 갖고 있었다.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 조사통계국(중통), 군사위원회 조사통계국(군통) 같은 정보기관이나 각급 공안국(경찰)에 역행사 인력을 침투시켰다. 이는 나치 독일 친위대(SS)가 무장SS라는 군대를 보유하는 한편, 게슈타포(비밀경찰), 경찰 등을 휘하에 두고 있었던 것과 흡사하다.
이탈리아의 파시스트나 나치 독일의 돌격대(SA), 친위대가 적대 세력에 대해 무자비한 테러를 자행했듯이, 남의사 역시 공산주의자, 반(反)장제스 세력, 친일파, 일본인들을 상대로 테러와 암살을 저질렀다. 민권보장동맹을 이끌던 비판적 지식인 잉슈런(應修人), 중앙연구원 부원장 양전(楊銓), 상하이의 비판적 언론 《신보(申報)》 편집국장 스량차이(史良才) 등이 살해됐다. 《천바오(晨報)》 등 친일언론사 사장 두 명도 남의사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남의사는 국민당 좌파 지도자로 장제스의 라이벌이던 왕징웨이(汪精衛), 전 재정부장 쑹쯔원(宋子文), 중국공산당 정보책임자 캉성(康生)의 목숨도 노렸다. 남의사를 연구한 프레데릭 웨이크먼은 “공식·비공식적 기관들 모두 1937~38년 일어난 반일테러 사건은 모두 남의사의 소행이라고 밝혔다”고 주장했다. 그 밖에 남의사는 상하이의 노동운동을 진압하고, 어용노조를 만들어 노동자들을 통제하는 일도 했다. 남의사가 일반적으로 ‘장제스 정권의 특무기관’쯤으로 인식되어 온 것도 이런 테러 활동들 때문이다.
남의사는 범죄조직들과 손을 잡기도 했다. 남의사가 추진한 왕징웨이 암살미수 사건에는 악명 높은 마피아 조직인 청방(靑幇) 조직원들이 행동대원으로 동원됐다. 장제스와 밀접한 관계에 있던 청방은 남의사와 협력하기도 했지만, 마약밀매 이권 등을 두고 서로 경쟁하기도 했다.
‘남의사의 몽둥이’ 다이리
이런 일들 때문에 모두가 남의사를 미워했다. 1935년 중국과의 국경분쟁 후 강화교섭에 나온 일본은 강화조건의 하나로 남의사 해체를 요구했다. 중국 내 비판적 지식인들도 남의사라면 치를 떨었다. 1936년 12월 시안(西安)사변이 일어났을 때, 남의사 별동총대 소속 병력을 이끌고 공산주의자들을 탄압하던 장샤오셴(蔣孝先·장제스의 조카)은 장쉐량(張學良)군에게 총살당했다. 시안사변 수습 과정에서 장제스와 대좌한 중국공산당 측에서 제일 먼저 내건 조건 중 하나도 남의사 해체였다.
거국일치 체제를 만들어 항일전쟁을 치르기로 하는 마당에 철저한 반공주의를 내건 남의사가 설 땅은 좁아졌다. 국민당 내 개혁 세력으로 출발했던 역행사가 결국은 다른 파벌들과 비슷한 또 다른 파벌로 전락했고, 남의사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이 높은 것도 장제스에게는 부담이었다.
1937~38년 남의사는 조용히 해체 수순을 밟기 시작했다. 역행사가 해오던 국민정신계몽운동은 신생활운동이 맡게 되었다. 이어 1938년 6월 16일 장제스는 삼민주의청년단(삼청단) 설립계획을 발표했다(정식 발족은 1938년 7월 9일). 삼청단은 나치 독일의 히틀러유겐트를 모방해서 만들었다. 역행사의 간부들은 삼청단으로 옮겨가 새로운 기구의 핵심이 되었다.
정치테러를 일삼던 남의사의 특무 기능은 국가정보기구인 군사위원회 조사통계국(군통)으로 넘어갔다. 군통의 책임자는 역행사 특무처장으로 ‘남의사의 몽둥이’라고 불리던, 다이리(戴笠)였다. 장제스와 동향인 저장(浙江)성 출신인 그는 장제스의 둘도 없는 충복이었다. 외국인들은 독일군 첩보부대장 빌헬름 카나리스 제독이나 나치 친위대 사령관 겸 게슈타포 총책 하인리히 힘러에 비견했다.
중국인들은 이런 비교에 대해 “두 사람은 다이리에 비하면 어린애다. (명나라의 특무기관인) 동창(東廠)·서창(西廠)도 다이리의 군통에 비하면 동네 파출소였다”며 코웃음을 쳤다고 한다. 다이리는 1946년 3월 비행기 사고로 죽었다. 저우언라이(周恩來)는 “다이리가 죽는 바람에 공산혁명을 10년 이상 앞당길 수 있었다”고 했다고 한다.
겉보기로는 남의사는 삼민주의청년단이 출범한 1938년에 사라졌다. 아직도 남의사의 많은 부분이 베일에 싸여 있다. 김명호 성공회대 교수는 “누구는 ‘남의사는 중국 하늘에 퍼져 있던 저녁안개와 같았다’고 말한다”면서 “남의사는 중국 현대사의 신기루였다”고 말한다. 반면에 정두음 교수는 “남의사의 지원과 보호가 없었다면, 장제스가 국민정부 시기 지도자로서 거의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도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역행사(남의사) 출신들은 황푸군관학교 졸업생, 삼민주의청년단원들, 부흥사 회원들과 함께 ‘연합좌담회파’를 구성, 1980년대 후반까지도 대만 국민당과 입법원(국회)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남의사의 한국 독립운동 지원
남의사의 세례를 받은 한국인들이 있었다. 왼쪽으로는 조선의용대가, 오른쪽으로는 백의사(白衣社)가 그들이다. 이들이 남의사의 세례를 받게 된 것은 윤봉길 의사의 의거 이후 중국 국민당 정부가 한국 독립운동 세력을 적극 지원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CC단을 이끌던 천궈푸(陳果夫)와 샤오정(蕭錚)이 임시정부를, 남의사(역행사) 서기 텅제와 간궈신(干國勳)이 의열단(義烈團)의 김원봉(金元鳳)을 맡았다. 진국빈(陳國斌)이라는 가명을 쓰던 김원봉은 텅제와 황푸군관학교 4기 동기였다. 당시 역행사는 산하에 한국·월남·대만·인도 등의 반제국주의 투쟁을 지원하기 위해 동방민족부흥운동위원회라는 기구를 두고 있었다.
텅제는 난징(南京) 탕산(湯山)에 조선혁명간부훈련반을 설치하고 4년여에 걸쳐 150~180명을 길러냈다. 장시(江西)성 싱쯔(星子)현에 있는 중앙육군군관학교 특별훈련반에서도 조선인 생도들이 교육을 받았다. 탕산 간부훈련반은 간궈신, 싱쯔특별훈련반은 캉쩌(康澤)가 이끌었는데, 두 사람 모두 남의사의 최고위급 간부들이었다(캉쩌는 ‘남의사 13태보’ 중 하나였음). 텅제와 간궈신은 나중에 김원봉이 조선의용대를 만드는 것도 지원했다. 텅제는 자신이 역행사 서기를 그만둔 후에도 장제스의 지시에 따라 역행사 상무간사 등의 신분으로 김원봉 그룹에 대한 지원을 계속했다고 회고했다.
김구와 장제스의 합의에 따라 뤄양(洛陽)에 있는 육군중앙군관학교 뤄양분교(뤄양군관학교)에도 한인특별반이 만들어졌다. 이들은 김구계(系), 지청천(池靑天)계, 김원봉계로 나뉘어 있었다. 김구는 장제스 정권으로부터 받는 자금줄을 쥐고 있다는 점에서, 지청천은 학생들을 직접 통제한다는 점에서 유리했다. 김원봉은 이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사회주의 사상을 유포하려 했다.
염동진의 등장
당시 한인특별반 학생 중에는 염응택(廉應澤·염동진)이라는 젊은이가 있었다. 《비밀결사 백의사》의 저자 이영신은 ‘최서면 한국학연구원장이 발굴한 〈경고(京高)비밀 제3210호-김구일당의 애국단원 검거에 관한 건〉에 의하면, 염응택은 1902년생으로 1934년 뤄양분교에 입학했다’고 주장한다. 그를 추천한 사람은 신익희(申翼熙)였다. 하지만 염응택은 학교를 졸업하지 못했다. 김원봉이 “중국 정부가 한인 학생들에게 지급하는 돈을 김구의 임시정부가 떼먹고 있다”고 선동하는 바람에 한인 학생들이 폭동을 일으켰는데, 염응택도 여기에 가담했던 것이다.
학교를 떠나게 된 염응택은 난징으로 신익희를 찾아갔다. 신익희는 그에게 난징 헌병사령부 우편물 검사처에 일자리를 만들어주었다. 이때 염응택은 요춘택이라는 중국식 이름을 사용했다. 이후 염응택은 남의사로 자리를 옮겼다. 염동진(廉東震)이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였다. 중일전쟁 발발 후, 남의사 요원들이 대거 군사위원회 조사통계국(군통)으로 들어갈 때, 염동진도 군통 첩보원이 됐다. 이후 만주로 파견되었던 그는 관동군 헌병대에 체포되었다. 모진 고문을 못 이긴 염동진은 변절, 관동군의 밀정이 되었다. 하지만 고문 후유증으로 시력이 약해지기 시작한 그는 1943년경 고향인 평양으로 돌아왔다. 귀국 후 그는 일본 나라여자고등사범학교를 나온 최성률과 결혼했다.
반면에 정병준 이화여대 교수의 주장은 약간 다르다. 그는 〈난징중앙육군군관학교 전봉남 사건〉 심문조서를 인용하는데, 염동진의 출생연도는 1909년이며, 염동진은 처음에는 군관학교 내 김구 계열이었으나 나중에는 지청천계로 전향한, 학교 내 반(反)김구 세력의 선봉이었다고 한다. 정 교수는 이듬해 학교를 졸업한 염응택은 지청천이 이끄는 신한독립당의 군사부·외교부 차장으로 활동하다가 1936년경 일제 헌병대에 체포되어 밀정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2015년 개봉해 1000만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했던 영화 〈암살〉에 나오는 변절자 염석진(이정재 분)은 바로 염동진을 모델로 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대동단 조직
평양에서 염동진은 정양을 구실로 은인자중하면서 모란봉 인근 영명사(永明寺)의 박고봉이라는 승려를 비롯해, 백기환・박승모・이근춘・고창의・이창해 등 민족주의자들과 어울렸다. 김유창・오경숙・위신성 등 좌파 성향 인사들과도 교유했다. 그러던 1944년 8월 여운형이 건국동맹을 조직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좌익 세력이 해방 후 정국의 주도권을 쥐게 놔둘 수 없다고 판단한 박고봉과 염동진은 건국동맹에 대항하기 위한 단체를 만들었다. 단체 이름은 대동단(大同團)이라고 했다.
1년 후 해방이 왔다. 하지만 북한에 들어온 소련군은 새로운 점령군이었다. 당초부터 반공(反共)을 앞세웠던 대동단은 소련군과 그 앞잡이인 공산주의자들에게 경고하기로 했다. 대동단원 백관옥・선우봉・박진양 등은 1945년 9월 3일 조선공산당 평양지구위원장 현준혁(玄俊赫)을 암살했다. 일반적으로 현준혁은 조만식 등 민족주의자들과 가까운 국내파 공산주의자였기 때문에 소련 군정과 김일성의 사주를 받은 공산주의자 장시우 등에 의해 암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준혁 암살 사건 후 염동진은 한때 보안서에 체포되었다.
소련 당국의 추적을 피해 38선을 넘은 염동진은 1945년 10월 서울 낙원동에서 대동단을 모태로 백의사를 창설했다. 염동진은 백의사의 사령(社令)을 맡았다. 염동진은 서울 궁정동에 있는 적산(敵産)가옥을 입수, 본부로 삼았다. 이 집은 후일 중앙정보부가 매입, 안가(安家)로 만들었다. 바로 10·26사태가 벌어진 궁정동 안가다.
2004년 9월 공개된 〈실리보고서(해방 후 한국 주둔 미군 971 CIC 파견대 소속 조지 E.실리 소령이 김구 암살 후 보고한 ‘김구-암살 관련 배경 정보’)〉는 백의사에 대해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염씨는 지하조직을 설립했는데, 이는 반공이 목적이지만 본질적으로 파시스트적인 것이었다. 그의 추종자들의 대다수는 김구씨의 추종자이기도 했다. 이 지하조직은 남한, 북한, 만주 전역과 중국 전역에 뻗어 있다. … 이 지하조직의 기본 목적은 모든 ‘공산주의자들’과 ‘반정부’ 정치인들을 암살하는 것이다. … 침투하거나 모집되는 조직원들은 부여받은 각각의 개별적 활동과 임무에 관해 비밀을 지킬 것을 맹세한다.〉
이에 대해 김일성 암살 작전에 참여했던 이성렬(李聖烈)은 12년 전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백의사가 친(親)김구 노선의 민족주의 단체였지만 확고한 이념적 바탕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라면서 “파시스트적이니 국수주의적이니 하는 것은 민족주의라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미국 측의 오해”라고 증언했다.
평양 출신인 이성렬의 아버지는 염동진과 절친한 사이였다. 이성렬의 아버지는 일제 말 김구의 조카 김흥두를 숨겨주기도 한 민족주의자였다. 이때 염동진도 김흥두를 보호하는 데 일조했다는 얘기도 있다. 월남한 이후 염동진은 맹인 행세를 했다. 이성렬은 “1945년 9월 염동진을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그는 눈이 잘 안 보인다고는 했지만 맹인은 아니었다”면서 “모두 염 사령이 무슨 다른 생각이 있어서 맹인 행세를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고 말했다.
김일성을 암살하라!
백의사는 우익 성향의 여러 단체와 연대(連帶)했는데, 그중 하나가 신익희가 만든 대한민국임시정부 중앙정치공작대였다. 정치공작대는 임시정부가 각 지역에 지지기반을 구축하기 위해 만든 단체였다. 정치공작대 조직부장 조중서는 염동진과 동지였다. 이성렬은 “조직 운영에 있어서는 ‘백의사=중앙정치공작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고 했다.
1946년 3월 1일의 김일성 암살 작전도 백의사와 정치공작대가 함께 벌인 일이었다. 조중서가 기획한 이 작전에는 백의사 대원 이성렬・김정의・김형집・최기성・이희두 등과 정치공작대의 선우길영 등이 가담했다. 평남임시인민위원회 정보과에 근무하던 조재국이 김일성의 행사 참석 일정 등 정보를 제공했다.
평양역전에서 열린 3・1절 기념행사장에서 김형집은 연설 중이던 김일성에게 수류탄을 던졌다. 경비 중이던 야코프 노비첸코 소련군 소위가 단상에 떨어진 수류탄을 주워 던지려는 순간, 그의 손에서 수류탄이 폭발했다. 이성렬 등이 김일성을 저격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순식간에 경호가 강화되는 바람에 때를 놓쳤다. 이성렬 등은 거사에 실패한 후, 김책·최용건·강양욱 등 북한 정권 요인들의 집을 차례로 습격했다.
백의사는 신탁통치에 반대하다가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연금된 조만식 구출도 시도했다. 염동진의 지시를 받은 정치공작대 황해도 지부의 유익배·안병성·정희섭(보건사회부 장관 역임) 등은 조만식이 갇혀 있는 고려호텔에 침투, 조만식에게 남행을 촉구했다. 하지만 조만식은 “내가 월남하면 북조선 동포들은 누굴 의지해서 산단 말인가?”라며 거절했다.
김두한과 백의사
‘장군의 아들’ 김두한도 백의사였다. 김두한은 생전에 자신이 백의사의 고문이었다고 주장했는데, 이영신의 《비밀결사 백의사》를 보면 염동진이 김두한을 ‘꼬붕’처럼 부린 것으로 되어 있다. 염동진은 김두한과 그 부하들을 백의사의 별동대처럼 부리면서 좌익의 철도파업 등을 분쇄했다. 김두한은 백의사의 지시를 받아 여운형을 납치해 권총으로 협박하기도 했고, 박헌영을 납치하려다가 미수에 그친 적도 있다. 염동진이 김두한을 활용한 것은, 남의사가 왕징웨이 암살 등에 청방을 동원했던 것을 연상케 한다.
후일 신민당 총재를 지낸 거물 정치인 유진산(柳珍山)도 백의사의 고문을 지냈다(이성렬은 유진산이 백의사의 총무였다고 증언). 당시 유진산은 대한혁신청년단이라고 하는 반공청년 단체를 이끌고 있었다. 백의사는 서북청년단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좌익 노조연합체인 전평(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에 맞서 우익 노동운동 단체 노동총연맹이 만들어지자, 백의사는 여기에도 손을 뻗쳤다. 유익배가 선전부장, 안병성이 조직부장, 정희섭이 후생부장을 맡았다. 이 노동총연맹은 후일 대한노동조합총연합회(대한노총·한국노총의 전신)가 된다. 이는 남의사가 중국 노동운동을 비밀리에 통제했던 것을 연상시킨다.
염동진은 1947년 방한한 미국의 앨버트 C. 웨드마이어 장군에게 제출한 보고서에서 백의사 단원이 한국(남한)에 4만1300여 명, 북한·만주에 2만6000여 명 등 총 6만7300여 명이라고 주장했지만,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당시 정당·사회단체 소속원들을 모두 합치면 전체 인구의 2~3배에 달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거품이 심했다.
백의사는 한국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 CIC(방첩대)와도 협조관계를 맺었다. G-2(정보처) 과장 장석윤(張錫潤·내무부 장관 역임) 대위, CIC 소속 이순용(내무부·체신부 장관 역임) 중사, 도널드 위태커(장면 정권의 정치고문) 소령 등이 연결고리가 됐다. 염동진은 북한에 침투한 공작원들을 통해 얻은 정보를 미국 CIC에 제공했고, CIC는 백의사의 보호막 역할을 해주었다. 김일성 암살 작전에 참여했던 이성렬도 미국 CIC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그는 “백의사에서 미군 CIC로 파견 나간 것”이라고 표현했다.
여운형 암살한 권총은 염동진이 준 것
당초부터 ‘반공’을 강하게 내걸었던 백의사에는 공산주의자들은 물론 그들과 협력하는 정치인들도 제거 대상이었다. 여운형도 그중 하나였다. 1947년 7월 19일 혜화동 거리에서 여운형을 암살한 사람은 한지근(본명 이필형)이라는 19세 젊은이였다(실제 나이는 25세였다고 함). 한지근의 배후에는 격몽의숙(擊蒙義塾)이라는 극우(極右)조직이 있었다. 격몽의숙의 리더는 송진우(宋鎭禹) 암살 사건의 주범인 한현우(韓賢宇)였다. 송진우 암살 사건으로 한현우가 감옥에 갇힌 뒤에는 그의 추종자인 신동운이 격몽의숙을 이끌면서, 한지근 등 오갈 데 없는 젊은이들을 교육했다. 한현우는 1993년 2월 21일자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당시 신탁통치를 했을 경우, 여운형을 주석으로 시키려고 했었다. 여운형을 주석으로 삼았다면 한국은 적화되고 말았을 것이다. 나는 공산주의와 김일성을 막기 위해서는 신탁통치를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감방에 면회 온 동지들에게 여운형을 살해하라는 지령도 내렸다.”
한현우의 지시에 따라 여운형 암살을 모의하던 신동운·김흥성 등을 염동진과 연결시켜 준 사람은 백의사 고문 김영철이었다. 당시 60대 초이던 김영철은 김구의 한인애국단에서 활동했다는 인물이었다. 염동진은 “여운형은 민족분열을 조장하는 야심가”라면서 이들에게 45구경 권총을 건네주었다. 여운형 암살범들은 또 다른 극우조직인 혁신탐정사의 양근환(일제시대 친일언론인 민원식을 암살한 독립운동가)으로부터도 일제 99식 권총을 받았다. 여운형의 목숨을 끊은 것은 염동진이 준 미제 45구경 권총이었다.
안두희는 백의사 요원이었나?
2004년 9월 4일 국사편찬위원회는 기자회견을 열고 “백범 김구 시해범 안두희가 미국 CIC 요원이자, 우익 단체인 백의사 특공대원이었다는 내용을 담은 보고서를 발굴했다”고 발표했다. 이 보고서가 앞에서도 언급했던 〈실리보고서〉다. 1948년 12월까지 한국에서 근무했던 실리 소령은 김구 암살 사건이 나자, 자진해서 자신이 경험했던 해방 이후 한국의 정치 정세에 대한 내용을 정리해서 보고했다(1949년 7월 1일).
이 보고서를 발굴한 정병준 교수는 〈백범 김구 암살 배경과 백의사〉라는 논문에서 “암살범 안두희가 미군 방첩대의 정보원이자 요원 출신이고, 극우 테러조직인 백의사의 단원이자 죽음으로 맹세한 살인 전문가였다”고 주장했다. 그는 국방부 제4국(정보국) 정보과장 김명욱 대위가 백의사 출신이라는 점도, 백의사가 김구 암살에 개입했을 정황 증거의 하나로 꼽았다. 그러면서도 정 교수는 “〈실리보고서〉에는 백의사나 미군 방첩대가 암살에 개입했다는 언급은 한 줄도 없었다”면서 “보고서의 핵심은 백의사 사령 염동진이 김구에 대해 품고 있던 존경과 증오라는 이중적 감정의 표출이었다”고 밝혔다. 정병준 교수는 “염동진은 김구에 대해 독립운동 정통성 유무에 따른 깊은 좌절감과 분노, 추종과 배신의 이율배반적 감정을 지녔다”고 주장한다.
〈실리보고서〉가 나온 직후 《월간조선》을 찾아온 이성렬은 “내가 아는 한 안두희는 백의사 사원(대원)이 아니다”라고 단언했다. 직접 행동에 참여하는 조직원들은 자신이 거의 다 알고 있었지만 안두희는 알지 못했으며, 백의사의 친(親)김구 노선으로 보아 백의사가 김구를 암살할 이유는 없었다는 것이다. 이성렬은 “백의사 사원들은 ‘우선 나라는 세워야 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에서 단독정부 수립에 찬성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김구 선생 말씀에도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면서 “우리로서는 백범 선생을 어떻게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고 말했다. 이는 “염동진의 추종자들의 대다수는 김구씨의 추종자이기도 했다”는 〈실리보고서〉의 내용과도 일치한다.
이성렬은 “아버지가 일제 말 김구의 조카 김흥두를 보호해 주었던 인연 때문에 경교장에도 드나들었는데, 그때 안두희를 본 적이 있다”고 말했다. 그때 김구의 수행비서들은 이성렬에게 “저 사람, 백범 선생님과 가까운 척하면서 자꾸 여기를 드나든다. 뭘 하려는 건지…”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성렬은 “〈실리보고서〉에 대한 보도를 접하는 순간, ‘의도적으로 이 땅의 우익과 미국을 흠집 내려는 세력이 장난을 치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염동진의 최후, 백의사의 조락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다. 정부 수립으로 바로 정치·사회 혼란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이제 비밀결사의 시절은 저물고 있었다. 이 무렵 염동진도 시력을 거의 잃어가고 있었다. 백의사 대원들은 육군의 첩보부대와 맥아더사령부가 만든 KLO(Korea Liaison Office·켈로부대)로 흡수되었다. 삼민주의청년단으로 가지 않은 남의사 요원들이 정보조직인 군통과 중통으로 들어간 것과 비슷하다. KLO부대는 6・25 때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염동진은 6・25 때 북한군에 체포되어 납북되어 가다가 처형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에도 백의사라는 이름은 간혹 신문에 등장한다. 1950년대, 백의사라는 이름을 내세워 ‘정치자금’을 요구하다가 붙잡혀서 감옥살이를 하게 된 사람들에 대한 보도가 간혹 나왔다.
백의사가 신익희·유진산 등 후일의 민주당 정치인들과 가까웠던 탓인지, 민주당 주변서 정치 낭인으로 떠돌다가 어려움을 겪은 사람들도 있었다. 군사정부 시절인 1962년 6월 1일 중앙정보부는 ‘반혁명쿠데타 사건’을 적발했다고 발표했다. 여기에는 조중서・이성렬・인순창 등 전 백의사 간부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성렬은 “옛 8240부대 출신자들을 동원해 박정희 장군(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을 암살하려고 동조자들을 물색하다가 가까이 지내던 민주당계 정치인들과 함께 반혁명음모죄로 엮여 들어갔다”고 했다. 몇 년간 감옥생활을 하다가 특사를 받아 석방된 그는 1969년에는 ‘3선 개헌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 최고위원 중 한 명으로 이름을 올렸다.
남의사 출신 인사들이 1980년대까지도 대만 당·정·군의 원로로 활약했던 것과 비교하면, 쓸쓸한 조락(凋落)이다.⊙
남의사가 등장하던 1932년 중국은 내우외환(內憂外患)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1927년 장제스(蔣介石)가 북벌(北伐)에 성공한 후 국민정부(난징정부)가 수립되었다. 하지만 산적한 문제들을 해결하기에는 국민당이나 정부의 능력이 미약했다. 정부에 대한 실망감이 확산되었다. 장제스 자신도 1931년 “혁명은 실패의 위험에 처해 있고, 온 나라는 당에 대한 믿음을 점차 잃어가고 있다”고 탄식했다. 중국 남동부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이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이라는 것을 수립했다.
1931년 9월에는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켰다. 장제스는 “일본은 피부병, 공산당은 심장병”이라며 안내양외(安內攘外)를 외쳤다. 하지만 공산주의자들을 먼저 소탕한 후에 일제(日帝)에 맞서자는 장제스의 외침은 대중의 민족주의 정서와는 한참 거리가 먼 것이었다. 장제스는 한때 군(軍)을 제외한 당정(黨政)의 자리를 내놓아야 했다.
삼민주의역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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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민주의역행사의 초대 서기 텅제. |
“역행사는 중국 국민당 내에 새로 일어난 하나의 극히 비밀적인 조직으로 그 최고 목표는 삼민주의(쑨원이 내세운 중국의 혁명이념으로 민족·민권·민생을 말함)를 철저히 실행하는 데 있고, 단계적 목표는 안으로는 안정을, 밖으로는 외세를 물리치는 정책을 집행하는 데 있었다. … 이 신흥조직체는 황푸군관학교 출신자로서 일본이나 소련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군관들이 중심이 되고 전국의 문·무·청년들 중의 엘리트를 결합하여 구성한 것으로 그들은 전 국내와 해외에 망상(網狀)처럼 분포되어 있었다.”
‘안으로는 안정’이라는 말은 반공(反共)을, ‘밖으로는 외세를 물리친다’는 말은 ‘항일(抗日)’을 의미했다. 이들은 처음에는 장제스에게도 보고하지 않고 조직을 만들지만, 이듬해 1월 장제스에게 자신들의 존재를 알렸다. 자칫 당내 반역세력으로 오해받을까 우려해서였다. 안 그래도 기존의 당내 파벌 세력들을 넘어서는 친위(親衛) 세력을 필요로 하고 있던 장제스는 이들의 등장을 환영했다. 1932년 2월 29일 역행사가 공식 출범했다. 이 역행사가 바로 본래 의미에서의 남의사다. 텅제가 역행사 초대(初代) 서기를 맡았다. 텅제는 ‘남의사의 발기인’이라고 불린다.
누가 ‘남의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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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사의 이론가’ 류젠췬. |
일본 정보기관의 분석에 의하면, 역행사의 핵심 조직원은 1937년 현재 528명에 불과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핵심 인물인 13명을 세상에서는 ‘13태보(太保·왕자)’라고 지칭했다.
역행사의 외곽에는 황푸군관학교 졸업생들이 중심이 된 중국혁명군인동지회(1933년 해산)와 ‘남의사의 이론가’ 류젠췬(劉健群) 등이 이끄는 중국혁명청년동지회가 있었다. 역행사의 간부가 청년동지회 간부를 겸했다. 청년동지회는 역행사가 기획한 일을 실천하는 일을 담당했다. 청년동지회는 새로운 인력을 발굴해서 역행사로 올려 보내는 일도 했다. 이 2번째 그룹의 바깥에는 또 중화부흥사(中華復興社)나 충의구국군 같은 대중조직이 있었다. 국민당-역행사-중국혁명청년동지회-부흥사 등으로 이어지는 조직 체계는, 지하당-RO(Revolutionary Organization·혁명조직)-RMO(Revolutionary Mass Organization·혁명적 대중조직)-MO(Mass Organization·대중조직)로 이어지는 좌익혁명운동 단체의 구성원리와 흡사하다.
역행사 초대 서기 텅제는 “그 최종 인원수는 약 10만명 정도였으며, 직간접적으로 그 영도를 받던 사람은 1000만명 이상으로 추산되었다”고 회고했다. 남의사 회원이 30만~50만명에 달했다는 관측도 있다. 역행사는 대외적으로는 구망회(救亡會)라는 이름을 사용하기도 했다. 엄밀한 의미에서는 ‘남의사=역행사’이지만, 부흥사·충의구국군 등 대중조직까지 남의사라고 보는 경우도 있었다. 장제스 정권의 특무조직인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 조사통계국(중통), 군사위원회 조사통계국(군통) 등까지 ‘남의사’라고 지칭하기도 했다.
이렇게 된 것은 조직 간 경계가 불분명하고, 인적으로 서로 겹치는 부분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정두음 경남대 교수는 《장제스와 국민당 엘리티스트-1930년대 남의사》에서 “이름과 관련하여 사람들이 느끼는 혼란은 남의사의 지도자들에게는 매우 이상적인 연막과 같은 것으로 여겨졌고, 그들 모두 이에 대해 설명하거나 그에 대한 책임을 두려워하지 않고, 더욱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살아서 들어가고 죽어서 나온다”
역행사에 입회하는 의식은 일종의 종교의식 비슷했다. 새로 들어오는 회원은 선서문을 낭독하고 기밀을 유지할 것을 맹세했으며, 비밀스러운 몸짓이나 수신호, 춤으로 의식을 치렀다. 이는 역사 속에서 끈질기게 이어져 내려온 중국 전통 비밀결사의 요소가 접목된 것이다. “살아서 들어가고 죽어서 나온다(生的進來 死的去出)”가 이들의 구호였다. 조직은 철저히 점(點)조직 형태로 구성되었으며, 윗선과 아랫선은 알아도 옆은 알 수 없었다.
역행사는 국민당 내에서 장제스의 독재 권력을 강화하는 선봉장을 자임했다. 또 대중을 상대로 국민당의 이념과 정책을 선전, 교육하는 일도 했다. 장제스가 대중동원을 위해 제창했던 신생활운동에서도 남의사는 중추적 역할을 맡았다.
그런데 국민당에는 CC단 등 비슷한 활동을 하는 분파(分派)나 기구들이 이미 있었다. 역행사가 이들과 두드러지게 다른 점은, 일종의 무력(武力)기구였다는 데 있다. 역행사는 별동총대(別動總隊)를 비롯한 다양한 무장테러 조직을 갖고 있었다.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 조사통계국(중통), 군사위원회 조사통계국(군통) 같은 정보기관이나 각급 공안국(경찰)에 역행사 인력을 침투시켰다. 이는 나치 독일 친위대(SS)가 무장SS라는 군대를 보유하는 한편, 게슈타포(비밀경찰), 경찰 등을 휘하에 두고 있었던 것과 흡사하다.
이탈리아의 파시스트나 나치 독일의 돌격대(SA), 친위대가 적대 세력에 대해 무자비한 테러를 자행했듯이, 남의사 역시 공산주의자, 반(反)장제스 세력, 친일파, 일본인들을 상대로 테러와 암살을 저질렀다. 민권보장동맹을 이끌던 비판적 지식인 잉슈런(應修人), 중앙연구원 부원장 양전(楊銓), 상하이의 비판적 언론 《신보(申報)》 편집국장 스량차이(史良才) 등이 살해됐다. 《천바오(晨報)》 등 친일언론사 사장 두 명도 남의사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남의사는 국민당 좌파 지도자로 장제스의 라이벌이던 왕징웨이(汪精衛), 전 재정부장 쑹쯔원(宋子文), 중국공산당 정보책임자 캉성(康生)의 목숨도 노렸다. 남의사를 연구한 프레데릭 웨이크먼은 “공식·비공식적 기관들 모두 1937~38년 일어난 반일테러 사건은 모두 남의사의 소행이라고 밝혔다”고 주장했다. 그 밖에 남의사는 상하이의 노동운동을 진압하고, 어용노조를 만들어 노동자들을 통제하는 일도 했다. 남의사가 일반적으로 ‘장제스 정권의 특무기관’쯤으로 인식되어 온 것도 이런 테러 활동들 때문이다.
남의사는 범죄조직들과 손을 잡기도 했다. 남의사가 추진한 왕징웨이 암살미수 사건에는 악명 높은 마피아 조직인 청방(靑幇) 조직원들이 행동대원으로 동원됐다. 장제스와 밀접한 관계에 있던 청방은 남의사와 협력하기도 했지만, 마약밀매 이권 등을 두고 서로 경쟁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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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사 출신으로 군통국장을 지낸 다이리. |
거국일치 체제를 만들어 항일전쟁을 치르기로 하는 마당에 철저한 반공주의를 내건 남의사가 설 땅은 좁아졌다. 국민당 내 개혁 세력으로 출발했던 역행사가 결국은 다른 파벌들과 비슷한 또 다른 파벌로 전락했고, 남의사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이 높은 것도 장제스에게는 부담이었다.
1937~38년 남의사는 조용히 해체 수순을 밟기 시작했다. 역행사가 해오던 국민정신계몽운동은 신생활운동이 맡게 되었다. 이어 1938년 6월 16일 장제스는 삼민주의청년단(삼청단) 설립계획을 발표했다(정식 발족은 1938년 7월 9일). 삼청단은 나치 독일의 히틀러유겐트를 모방해서 만들었다. 역행사의 간부들은 삼청단으로 옮겨가 새로운 기구의 핵심이 되었다.
정치테러를 일삼던 남의사의 특무 기능은 국가정보기구인 군사위원회 조사통계국(군통)으로 넘어갔다. 군통의 책임자는 역행사 특무처장으로 ‘남의사의 몽둥이’라고 불리던, 다이리(戴笠)였다. 장제스와 동향인 저장(浙江)성 출신인 그는 장제스의 둘도 없는 충복이었다. 외국인들은 독일군 첩보부대장 빌헬름 카나리스 제독이나 나치 친위대 사령관 겸 게슈타포 총책 하인리히 힘러에 비견했다.
중국인들은 이런 비교에 대해 “두 사람은 다이리에 비하면 어린애다. (명나라의 특무기관인) 동창(東廠)·서창(西廠)도 다이리의 군통에 비하면 동네 파출소였다”며 코웃음을 쳤다고 한다. 다이리는 1946년 3월 비행기 사고로 죽었다. 저우언라이(周恩來)는 “다이리가 죽는 바람에 공산혁명을 10년 이상 앞당길 수 있었다”고 했다고 한다.
겉보기로는 남의사는 삼민주의청년단이 출범한 1938년에 사라졌다. 아직도 남의사의 많은 부분이 베일에 싸여 있다. 김명호 성공회대 교수는 “누구는 ‘남의사는 중국 하늘에 퍼져 있던 저녁안개와 같았다’고 말한다”면서 “남의사는 중국 현대사의 신기루였다”고 말한다. 반면에 정두음 교수는 “남의사의 지원과 보호가 없었다면, 장제스가 국민정부 시기 지도자로서 거의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도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역행사(남의사) 출신들은 황푸군관학교 졸업생, 삼민주의청년단원들, 부흥사 회원들과 함께 ‘연합좌담회파’를 구성, 1980년대 후반까지도 대만 국민당과 입법원(국회)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남의사의 한국 독립운동 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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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봉이 이끌었던 조선의용대. 역행사의 텅제 등이 후원했다. |
텅제는 난징(南京) 탕산(湯山)에 조선혁명간부훈련반을 설치하고 4년여에 걸쳐 150~180명을 길러냈다. 장시(江西)성 싱쯔(星子)현에 있는 중앙육군군관학교 특별훈련반에서도 조선인 생도들이 교육을 받았다. 탕산 간부훈련반은 간궈신, 싱쯔특별훈련반은 캉쩌(康澤)가 이끌었는데, 두 사람 모두 남의사의 최고위급 간부들이었다(캉쩌는 ‘남의사 13태보’ 중 하나였음). 텅제와 간궈신은 나중에 김원봉이 조선의용대를 만드는 것도 지원했다. 텅제는 자신이 역행사 서기를 그만둔 후에도 장제스의 지시에 따라 역행사 상무간사 등의 신분으로 김원봉 그룹에 대한 지원을 계속했다고 회고했다.
김구와 장제스의 합의에 따라 뤄양(洛陽)에 있는 육군중앙군관학교 뤄양분교(뤄양군관학교)에도 한인특별반이 만들어졌다. 이들은 김구계(系), 지청천(池靑天)계, 김원봉계로 나뉘어 있었다. 김구는 장제스 정권으로부터 받는 자금줄을 쥐고 있다는 점에서, 지청천은 학생들을 직접 통제한다는 점에서 유리했다. 김원봉은 이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사회주의 사상을 유포하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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뤄양군관학교 시절의 염동진. |
학교를 떠나게 된 염응택은 난징으로 신익희를 찾아갔다. 신익희는 그에게 난징 헌병사령부 우편물 검사처에 일자리를 만들어주었다. 이때 염응택은 요춘택이라는 중국식 이름을 사용했다. 이후 염응택은 남의사로 자리를 옮겼다. 염동진(廉東震)이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였다. 중일전쟁 발발 후, 남의사 요원들이 대거 군사위원회 조사통계국(군통)으로 들어갈 때, 염동진도 군통 첩보원이 됐다. 이후 만주로 파견되었던 그는 관동군 헌병대에 체포되었다. 모진 고문을 못 이긴 염동진은 변절, 관동군의 밀정이 되었다. 하지만 고문 후유증으로 시력이 약해지기 시작한 그는 1943년경 고향인 평양으로 돌아왔다. 귀국 후 그는 일본 나라여자고등사범학교를 나온 최성률과 결혼했다.
반면에 정병준 이화여대 교수의 주장은 약간 다르다. 그는 〈난징중앙육군군관학교 전봉남 사건〉 심문조서를 인용하는데, 염동진의 출생연도는 1909년이며, 염동진은 처음에는 군관학교 내 김구 계열이었으나 나중에는 지청천계로 전향한, 학교 내 반(反)김구 세력의 선봉이었다고 한다. 정 교수는 이듬해 학교를 졸업한 염응택은 지청천이 이끄는 신한독립당의 군사부·외교부 차장으로 활동하다가 1936년경 일제 헌병대에 체포되어 밀정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2015년 개봉해 1000만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했던 영화 〈암살〉에 나오는 변절자 염석진(이정재 분)은 바로 염동진을 모델로 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대동단 조직
평양에서 염동진은 정양을 구실로 은인자중하면서 모란봉 인근 영명사(永明寺)의 박고봉이라는 승려를 비롯해, 백기환・박승모・이근춘・고창의・이창해 등 민족주의자들과 어울렸다. 김유창・오경숙・위신성 등 좌파 성향 인사들과도 교유했다. 그러던 1944년 8월 여운형이 건국동맹을 조직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좌익 세력이 해방 후 정국의 주도권을 쥐게 놔둘 수 없다고 판단한 박고봉과 염동진은 건국동맹에 대항하기 위한 단체를 만들었다. 단체 이름은 대동단(大同團)이라고 했다.
1년 후 해방이 왔다. 하지만 북한에 들어온 소련군은 새로운 점령군이었다. 당초부터 반공(反共)을 앞세웠던 대동단은 소련군과 그 앞잡이인 공산주의자들에게 경고하기로 했다. 대동단원 백관옥・선우봉・박진양 등은 1945년 9월 3일 조선공산당 평양지구위원장 현준혁(玄俊赫)을 암살했다. 일반적으로 현준혁은 조만식 등 민족주의자들과 가까운 국내파 공산주의자였기 때문에 소련 군정과 김일성의 사주를 받은 공산주의자 장시우 등에 의해 암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준혁 암살 사건 후 염동진은 한때 보안서에 체포되었다.
소련 당국의 추적을 피해 38선을 넘은 염동진은 1945년 10월 서울 낙원동에서 대동단을 모태로 백의사를 창설했다. 염동진은 백의사의 사령(社令)을 맡았다. 염동진은 서울 궁정동에 있는 적산(敵産)가옥을 입수, 본부로 삼았다. 이 집은 후일 중앙정보부가 매입, 안가(安家)로 만들었다. 바로 10·26사태가 벌어진 궁정동 안가다.
2004년 9월 공개된 〈실리보고서(해방 후 한국 주둔 미군 971 CIC 파견대 소속 조지 E.실리 소령이 김구 암살 후 보고한 ‘김구-암살 관련 배경 정보’)〉는 백의사에 대해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염씨는 지하조직을 설립했는데, 이는 반공이 목적이지만 본질적으로 파시스트적인 것이었다. 그의 추종자들의 대다수는 김구씨의 추종자이기도 했다. 이 지하조직은 남한, 북한, 만주 전역과 중국 전역에 뻗어 있다. … 이 지하조직의 기본 목적은 모든 ‘공산주의자들’과 ‘반정부’ 정치인들을 암살하는 것이다. … 침투하거나 모집되는 조직원들은 부여받은 각각의 개별적 활동과 임무에 관해 비밀을 지킬 것을 맹세한다.〉
이에 대해 김일성 암살 작전에 참여했던 이성렬(李聖烈)은 12년 전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백의사가 친(親)김구 노선의 민족주의 단체였지만 확고한 이념적 바탕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라면서 “파시스트적이니 국수주의적이니 하는 것은 민족주의라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미국 측의 오해”라고 증언했다.
평양 출신인 이성렬의 아버지는 염동진과 절친한 사이였다. 이성렬의 아버지는 일제 말 김구의 조카 김흥두를 숨겨주기도 한 민족주의자였다. 이때 염동진도 김흥두를 보호하는 데 일조했다는 얘기도 있다. 월남한 이후 염동진은 맹인 행세를 했다. 이성렬은 “1945년 9월 염동진을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그는 눈이 잘 안 보인다고는 했지만 맹인은 아니었다”면서 “모두 염 사령이 무슨 다른 생각이 있어서 맹인 행세를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고 말했다.
김일성을 암살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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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 정치공작대를 만든 신익희. |
1946년 3월 1일의 김일성 암살 작전도 백의사와 정치공작대가 함께 벌인 일이었다. 조중서가 기획한 이 작전에는 백의사 대원 이성렬・김정의・김형집・최기성・이희두 등과 정치공작대의 선우길영 등이 가담했다. 평남임시인민위원회 정보과에 근무하던 조재국이 김일성의 행사 참석 일정 등 정보를 제공했다.
평양역전에서 열린 3・1절 기념행사장에서 김형집은 연설 중이던 김일성에게 수류탄을 던졌다. 경비 중이던 야코프 노비첸코 소련군 소위가 단상에 떨어진 수류탄을 주워 던지려는 순간, 그의 손에서 수류탄이 폭발했다. 이성렬 등이 김일성을 저격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순식간에 경호가 강화되는 바람에 때를 놓쳤다. 이성렬 등은 거사에 실패한 후, 김책·최용건·강양욱 등 북한 정권 요인들의 집을 차례로 습격했다.
백의사는 신탁통치에 반대하다가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연금된 조만식 구출도 시도했다. 염동진의 지시를 받은 정치공작대 황해도 지부의 유익배·안병성·정희섭(보건사회부 장관 역임) 등은 조만식이 갇혀 있는 고려호텔에 침투, 조만식에게 남행을 촉구했다. 하지만 조만식은 “내가 월남하면 북조선 동포들은 누굴 의지해서 산단 말인가?”라며 거절했다.
김두한과 백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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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한(왼쪽)과 유진산(오른쪽)도 백의사에서 활동했다. |
후일 신민당 총재를 지낸 거물 정치인 유진산(柳珍山)도 백의사의 고문을 지냈다(이성렬은 유진산이 백의사의 총무였다고 증언). 당시 유진산은 대한혁신청년단이라고 하는 반공청년 단체를 이끌고 있었다. 백의사는 서북청년단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좌익 노조연합체인 전평(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에 맞서 우익 노동운동 단체 노동총연맹이 만들어지자, 백의사는 여기에도 손을 뻗쳤다. 유익배가 선전부장, 안병성이 조직부장, 정희섭이 후생부장을 맡았다. 이 노동총연맹은 후일 대한노동조합총연합회(대한노총·한국노총의 전신)가 된다. 이는 남의사가 중국 노동운동을 비밀리에 통제했던 것을 연상시킨다.
염동진은 1947년 방한한 미국의 앨버트 C. 웨드마이어 장군에게 제출한 보고서에서 백의사 단원이 한국(남한)에 4만1300여 명, 북한·만주에 2만6000여 명 등 총 6만7300여 명이라고 주장했지만,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당시 정당·사회단체 소속원들을 모두 합치면 전체 인구의 2~3배에 달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거품이 심했다.
백의사는 한국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 CIC(방첩대)와도 협조관계를 맺었다. G-2(정보처) 과장 장석윤(張錫潤·내무부 장관 역임) 대위, CIC 소속 이순용(내무부·체신부 장관 역임) 중사, 도널드 위태커(장면 정권의 정치고문) 소령 등이 연결고리가 됐다. 염동진은 북한에 침투한 공작원들을 통해 얻은 정보를 미국 CIC에 제공했고, CIC는 백의사의 보호막 역할을 해주었다. 김일성 암살 작전에 참여했던 이성렬도 미국 CIC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그는 “백의사에서 미군 CIC로 파견 나간 것”이라고 표현했다.
여운형 암살한 권총은 염동진이 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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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의사의 공격대상이었던 박헌영(왼쪽)과 여운형. |
“당시 신탁통치를 했을 경우, 여운형을 주석으로 시키려고 했었다. 여운형을 주석으로 삼았다면 한국은 적화되고 말았을 것이다. 나는 공산주의와 김일성을 막기 위해서는 신탁통치를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감방에 면회 온 동지들에게 여운형을 살해하라는 지령도 내렸다.”
한현우의 지시에 따라 여운형 암살을 모의하던 신동운·김흥성 등을 염동진과 연결시켜 준 사람은 백의사 고문 김영철이었다. 당시 60대 초이던 김영철은 김구의 한인애국단에서 활동했다는 인물이었다. 염동진은 “여운형은 민족분열을 조장하는 야심가”라면서 이들에게 45구경 권총을 건네주었다. 여운형 암살범들은 또 다른 극우조직인 혁신탐정사의 양근환(일제시대 친일언론인 민원식을 암살한 독립운동가)으로부터도 일제 99식 권총을 받았다. 여운형의 목숨을 끊은 것은 염동진이 준 미제 45구경 권총이었다.
안두희는 백의사 요원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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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두희에게 피살당한 후의 김구. 암살범 안두희가 백의사 요원이었다는 주장이 있다. |
이 보고서를 발굴한 정병준 교수는 〈백범 김구 암살 배경과 백의사〉라는 논문에서 “암살범 안두희가 미군 방첩대의 정보원이자 요원 출신이고, 극우 테러조직인 백의사의 단원이자 죽음으로 맹세한 살인 전문가였다”고 주장했다. 그는 국방부 제4국(정보국) 정보과장 김명욱 대위가 백의사 출신이라는 점도, 백의사가 김구 암살에 개입했을 정황 증거의 하나로 꼽았다. 그러면서도 정 교수는 “〈실리보고서〉에는 백의사나 미군 방첩대가 암살에 개입했다는 언급은 한 줄도 없었다”면서 “보고서의 핵심은 백의사 사령 염동진이 김구에 대해 품고 있던 존경과 증오라는 이중적 감정의 표출이었다”고 밝혔다. 정병준 교수는 “염동진은 김구에 대해 독립운동 정통성 유무에 따른 깊은 좌절감과 분노, 추종과 배신의 이율배반적 감정을 지녔다”고 주장한다.
〈실리보고서〉가 나온 직후 《월간조선》을 찾아온 이성렬은 “내가 아는 한 안두희는 백의사 사원(대원)이 아니다”라고 단언했다. 직접 행동에 참여하는 조직원들은 자신이 거의 다 알고 있었지만 안두희는 알지 못했으며, 백의사의 친(親)김구 노선으로 보아 백의사가 김구를 암살할 이유는 없었다는 것이다. 이성렬은 “백의사 사원들은 ‘우선 나라는 세워야 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에서 단독정부 수립에 찬성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김구 선생 말씀에도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면서 “우리로서는 백범 선생을 어떻게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고 말했다. 이는 “염동진의 추종자들의 대다수는 김구씨의 추종자이기도 했다”는 〈실리보고서〉의 내용과도 일치한다.
이성렬은 “아버지가 일제 말 김구의 조카 김흥두를 보호해 주었던 인연 때문에 경교장에도 드나들었는데, 그때 안두희를 본 적이 있다”고 말했다. 그때 김구의 수행비서들은 이성렬에게 “저 사람, 백범 선생님과 가까운 척하면서 자꾸 여기를 드나든다. 뭘 하려는 건지…”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성렬은 “〈실리보고서〉에 대한 보도를 접하는 순간, ‘의도적으로 이 땅의 우익과 미국을 흠집 내려는 세력이 장난을 치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염동진의 최후, 백의사의 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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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민주당계 반혁명쿠데타 음모 사건으로 재판정에 선 이성렬. |
이후에도 백의사라는 이름은 간혹 신문에 등장한다. 1950년대, 백의사라는 이름을 내세워 ‘정치자금’을 요구하다가 붙잡혀서 감옥살이를 하게 된 사람들에 대한 보도가 간혹 나왔다.
백의사가 신익희·유진산 등 후일의 민주당 정치인들과 가까웠던 탓인지, 민주당 주변서 정치 낭인으로 떠돌다가 어려움을 겪은 사람들도 있었다. 군사정부 시절인 1962년 6월 1일 중앙정보부는 ‘반혁명쿠데타 사건’을 적발했다고 발표했다. 여기에는 조중서・이성렬・인순창 등 전 백의사 간부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성렬은 “옛 8240부대 출신자들을 동원해 박정희 장군(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을 암살하려고 동조자들을 물색하다가 가까이 지내던 민주당계 정치인들과 함께 반혁명음모죄로 엮여 들어갔다”고 했다. 몇 년간 감옥생활을 하다가 특사를 받아 석방된 그는 1969년에는 ‘3선 개헌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 최고위원 중 한 명으로 이름을 올렸다.
남의사 출신 인사들이 1980년대까지도 대만 당·정·군의 원로로 활약했던 것과 비교하면, 쓸쓸한 조락(凋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