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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인터뷰

‘영원한 교육자’ 鄭元植 전 국무총리

“지금도 교사는 노동자가 아니라고 생각”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사진 : 서경리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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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리원상업학교에 진학했더라면 대학진학 불가능. 중학입시 실패가 인생 바꿔”
⊙ 한국외대 사태 후 “회초리로 내 종아리를 때리고 싶다”
⊙ 남북 고위급회담 위해 3번 평양行… ‘남북 기본합의서’와 ‘비핵화 공동선언’ 일궈내
⊙ “경색된 남북문제 풀려면 1991년 작성된 ‘남북 기본합의서’ 복원해야”
⊙ YS 강권으로 서울시장 선거 출마했다가 趙淳·朴燦鍾에 이어 3위
  정원식(鄭元植·88) 전 국무총리는 자갈밭을 가는 황소 같은 인물이다. 그의 고향은 황해도 재령(載寧). 황해도 사람 기질을 석전경우(石田耕牛)에 빗대기도 한다. 난세(亂世)의 돌밭을 건너는 법을 우직한 황소만이 아는지 모른다.
 
  서울대 교수, 한국교육학회장, 문교부 장관, 국무총리, 대한적십자사 총재, 대통령직인수위원장, 방송심의위원장, 유네스코(UNESCO) 총회 한국대표 등 그가 지나온 자리마다 소처럼 일한 흔적이 역력하다.
 
  그를 기억하는 많은 사람은 여전히, 제자들에게 멱살 잡힌 채 밀가루를 덮어쓴 노(老)스승의 얼굴을 떠올리지만, 북한 김일성(金日成)과 만나 ‘남북기본합의서’와 ‘비핵화 공동선언’을 이끈 인물이 정원식이다. 고(故) 김영삼(金泳三) 대통령이 14대 대선에 당선될 당시 민자당 선대위원장이었다는 사실도 잊어선 곤란하다. 무엇보다 가난과 전쟁의 상흔을 겪은 청소년의 마음을 상담(counseling)으로 다독인 1세대 교육학자로 1960년대 한국카운슬러협회를 창립했다.
 
  요즘 그는 서울 신당동 개인사무실에 나와 만년필과 원고지로 글을 쓰고 있다. 평생을 살아온 삶을 정리하기 위해서다. “지금 나이에 기억을 어느 정도 재생(再生)할 수 있을까 하는 염려도 했지만 2~3번 생각을 하다 보면 놀랍게도 옛일이 눈에 보이는 듯 재생되더라”고 말했다.
 
  “처음에는 사람의 이름이나 지명과 같은 고유명사를 떠올리기 어려웠는데 생각을 집중하다 보면 그것도 쉽게 재생할 수 있었어요. 인간의 기억력에 새삼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원고지 앞에서 황소의 희미한 족적이 점점 살아 꿈틀대고 있다는 것이다.
 
  —인생을 바꾼 ‘사건’이 있었나요.
 
  정 전 총리는 뜻밖에도 시험낙방 이야기를 꺼냈다.
 
  “일제시대 소학교를 옮겨 다니다 보니 중학교 진학을 위한 준비를 할 수 없었어요. 6학년 중반이 지날 무렵 황해도 사리원상업학교에다 원서를 냈어요.
 
  학과시험, 신체검사, 체력시험을 쳤는데 합격자 명단에 제 이름이 없었어요. 초등학교를 마치고 첫 관문인 중학입시에 낙방한 셈이지요. 그 충격이 작지 않았음은 물론입니다. 부모님의 권유로 재수를 마음먹었죠. 심상소학교 ‘고등부’ 과정(직업교육 과정)에 적을 두고 집중적으로 입시준비를 했어요.”
 
  1년 뒤 그는 황해도에 단 하나뿐인 공립 인문계 중학교에 합격했다. 4년제 해주동중(海州東中)이었다. 그때만 해도 각 도에 1개교의 공립중학교만 설립할 수 있었고 한국 학생 비율도 30%를 넘지 않게 제한했다. 만약 사리원상업학교에 진학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중학입시에 낙방했기에 재수라는 새로운 고통이 뒤따르게 됐지만 낙방 후 재수의 경험이 무의미한 것만은 아니었어요. 사리원상업학교에 진학했다면 대학진학은 불가능했을 거예요. 인생에서 한 번의 실패는 오히려 발전의 계기가 된다는 생생한 체험을 한 것이죠.”
 
 
  단독 越南의 결심
 
대학시절 정원식(앞줄 왼쪽 두 번째). 맨 오른쪽이 이영덕 전 총리다.
  —중학교 시절엔 공부를 잘하셨나요.
 
  “그땐 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했는데 첫 학기 시험성적이 10등 이내에 들었어요. 2학년 때는 5~6등, 어떨 때는 3등도 하고요. 문제는 2학년 말에 농구선수가 되면서 성적이 떨어졌어요. 수업을 마치고 오후 3시부터 3~4시간 농구훈련을 했는데 공부할 시간이 있나요? 저녁밥 먹고 곤해 자고 말았어요. 그랬더니 반에서 40 몇 등을 했어요. 최하로 떨어진 셈이죠. 방학이 되어 그 성적표를 들고 집에 갔더니 부모님이 ‘다시 학교로 돌아가라’고 하세요. 할 수 있나요? 학교 앞 하숙하는 선배 방에 찾아가 방학 동안 죽어라 공부했죠. 그 다음 학기에 성적이 10등 이내로 들어갔어요.”
 
  —농구부는 어떻게 됐나요.
 
  “나름 프라이드가 있었어요. 주전선수로 시합에 나갔을 정도였는데 어쩌겠어요. 성적이 떨어지는 바람에 농구부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죠.”
 
  4년제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이 되자, 진로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때 우연히 한 친구가 찾아왔다. “그것은 분명 신(神)의 계시처럼 여겨졌다”고 한다. 친구 말이 “난 서울에 가기로 작정했는데 함께 갈 의사가 없느냐”는 것이었다. 어쩌면 그 친구의 권유가 아니었다면 3·8선을 넘어 ‘유학’갈 결심을 못했을지 모른다.
 
  “당시만 해도 쉽게 3·8선을 넘을 수 없었습니다. 황해도 평산(平山)경찰서장이었던 그 친구 형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죠. 남과 북을 잇던 기차도 멈춘 지 오래됐고 자동차 또한 갈 수 없는 길이었어요. 숨어서 산을 넘어가야 했어요.”
 
  얼마쯤 걸었을까. 그때 그는 이렇게 중얼거렸다고 한다. ‘이제 청운(靑雲)의 꿈을 안고 남(南)으로 간다. 이 순간부터 나의 새로운 이름은 청남(靑南)’이라고. 정 전 총리의 아호 ‘청남’은 그렇게 해서 만들어졌다.
 
  “서울에서 제가 상급학교에 진학하는 길은 두 가지였어요. 4년제 중학교를 나왔으니 고등학교 2학년에 편입하거나 아니면 대학병설 예과에 진학하는 방법이었는데, 저는 서울대 사범대 예과에 진학했어요. 사대 예과를 택한 이유는 교육자의 길을 걷고 싶었던 이면에 장차 교사가 될 학생에게 매달 생활비를 보조해 주었기 때문이었어요.”
 
  이듬해 1947년 대학 재학 중 고향에 가기 위해 개성(당시 남한 땅이었다)을 거쳐 38선을 넘었으나 그곳 보안요원에게 발각돼 서울에 돌아오고 말았다. 할 수 없이 3·8선을 오가는 장사꾼을 따라 월북을 결심한다. “그 장사꾼은 서울에서 다이아찡이나 구아노찡 같은 약품을 사서 북에 들고 가 판다”는 것이었다.
 
  해방 직후 미군이 들여온 ‘다이아찡’은 폐렴, 임질, 이질, 설사 등에 특효약이었다. 지사제(止瀉劑)인 구아노찡은 위약(僞藥·placebo) 효과가 높아 감기와 골절에 쓰였다고 한다.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연백의 청단까지 갔어요. 청단역에서 무작정 3·8선까지 걸었어요. 한참 만에 어느 집에 도착했고, 새벽이 되어 다시 어디론가 걸어갔어요. 알고 보니, 해주 비행장 앞바다에 물이 빠지자 그 백사장을 따라 3·8선을 넘었더군요. 물 빠진 바닷가를 유심히 보니 오른쪽 멀지 않은 곳에 비행장 등불이 보였어요.
 
  해주까지는 무사히 왔는데 기차를 타고 사리원까지 가는 것이 문제였어요. 북한에서는 여행의 자유가 없잖아요. 기차를 타고 먼 곳으로 떠나려면 여행증명서를 발급받아야 하고, 발급도 여간 까다롭지 않습니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거리를 걷는데 해주동중 친구를 만났어요. 친구가 ‘해주역에 동창생 한 명이 있으니 찾아가라’고 해요. 친구 말만 믿고 해주역에 가서 동창을 만났더니 ‘내일 아침 떠나는 기차의 어느 칸에 앉아 있으라’는 겁니다.”
 
  다음 날 아침 기차는 예정대로 출발했다. 역무원이 승객의 신원을 일일이 확인하는데 간이 콩알처럼 졸아들었다. 그런데 그가 앉은 자리에 오더니 힐끗 쳐다만 보고 지나치는 것이 아닌가.
 
  “기차는 서사리원역에 도착했어요. 거기서 내리면 집까지는 걸어갈 수 있는 거리였어요. 그런데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있었어요. 동생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누가 나의 도착 사실을 집에 알려줬을까요? 짐작하건대 서울에서 함께 온 그 장사꾼이 아니었을까요?”
 
 
  ‘가이댄스? 가이던스(Guidance)!’
 
서울대 교육학과 교수 시절 제자들과 함께.
  민족해방과 6·25를 거치며 많은 문제를 교육당국에 던져 주었다. 일제 군국주의 교육 잔재를 청산하는 일 못지않게, 전화(戰禍)가 던진 사회적 정신적 상흔을 치유해야 할 책무도 학교가 져야 했다. 게다가 전쟁의 피해와 농촌경제의 파괴로 인한 도시화 현상은 도시빈곤과 청소년 문제를 야기시켰다.
 
  전통적인 훈육 교육과 반대되는 가이던스 카운슬링(Guidance Counseling·지도상담 혹은 생활지도)이 1953년 내한(來韓)한 미국 교육사절단을 통해 전파되기 시작했다. ‘무조건적 긍정, 일치성, 공감적 이해’를 중심으로 한 비(非)지시적 상담이 학교에 소개된 것도 이즈음이었다.
 
  미국 교육사절단의 추천으로 1957년 미국 피바디(Peabody) 대학으로 유학을 떠나 상담심리를 본격적으로 배웠다. 귀국 후 카운슬러 양성교육에 뛰어들었다. 일례로 강원도 초·중등 교원 8000명 중 그의 강의를 한 번 이상 들은 이가 4000명 이상이었다고 한다.
 
  서울대 조교로 정식 발령을 받은 것은 4·19혁명 이듬해의 일이다. 그는 아시아재단(The Asia Foundation) 도움으로 서울대 내에 ‘가이던스 센터’를 설립했다. 일종의 ‘학생상담소’.
 
  “센터에서 학생상담을 한다는 광고를 교내 몇 군데 붙였더니 예상보다 많은 수의 학생들이 찾아왔어요. 그러고는 평소의 고민거리를 털어놓았어요. 놀랍게도 신경불안증(노이로제)에 걸린 학생이 너무나 많았어요. 그래서 서울대 신입생을 대상으로 노이로제 검사를 했는데 그 결과 신입생의 4분의 1가량이 뚜렷한 노이로제 경향을 보였죠. 그들이 입시로 얼마나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짐작이 가더군요.”
 
  서울대에 가이던스 센터가 설립됐다는 소문이 전국의 교도교사(요즘의 상담교사)에게 전파됐다. 전국 중·고교 교도교사들을 위한 구심적 역할을 해 달라는 요청이 쇄도했다. 문교 당국도 “가이던스 센터가 서울대생만을 위한 기관이 아니라 교도교사들을 지도하는 역할을 해 달라”고 종용했다. 결국 가이던스 센터는 전국 카운슬링 운동의 중심지가 되었고 이를 계기로 한국카운슬러협회가 창립됐다. 1967년의 일이다.
 
  “이런 일도 있었어요. ‘가이던스 카운슬링’ 강의를 하러 어느 지방 교육청에 갔더니 50여 명의 초등학교 여자 선생님이 가득 있어요. 당시엔 여교사 수가 많지 않은 때라 조금 이상하게 생각했어요. 그래서 ‘왜 여선생님만 왔나요?’라고 물었지요. 그런데 당연한 걸 왜 묻느냐는 반응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분들은 무용 강습회로 알고 오신 것이었어요. 당시엔 ‘가이던스(Guidance)’를 ‘가이단스’라 불렀는데 해당 교육청 장학사가 상담에 대한 이해가 없어 ‘단스’를 ‘댄스’로 오해한 겁니다. 포크댄스처럼 무슨 무용의 일종이라고 생각한 것이죠. 그때 온 여교사들은 무용복까지 준비해 왔다고 해요. 웃지 못할 일입니다.”
 
  —교육학을 전공한 이유는 뭔가요.
 
  “서울대 사대 예과를 수료하고 학부 선택을 할 때였어요. 선배들은 ‘교편을 잡자면 인기 있는 영어과를 택하라’고 권했어요. 그러나 선뜻 선배의 조언을 받아들일 수 없었어요. 그 길이 가장 합당한 것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습니다. 이런저런 생각 중에 ‘사회의 목자(牧者)가 되기로 한 이상, 교육 자체를 학문으로 탐구하면 어떨까’ 생각하게 됐어요.”
 
  교육학과에 진학한 학생은 20명이 채 안 됐다. 교과서도 따로 없었다. 교수님이 준비해 온 원고를 읽어 주면 그것을 학생들이 노트에 받아쓰는 게 고작이었다.
 
  “적어도 서울 사대 학생 중에는 나라의 교육을 위해 평생 헌신하려는 정열적인 학생들이 상당수 있었어요. 뭐라고 할까, 이 땅에 좋은 나라를 만들 수 있는 것도 교육이며, 이 나라가 세계로 웅비할 수 있는 길도 바로 교육을 통해 가능하다는 분위기가 학내에 팽배해 있었습니다.
 
  제 스승이신 오천석 박사는 교육자의 책무를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어렵고 무거운 교육의 짐을 맡아야 하는 교육자의 책임은 실로 크다’고요. 동시에 그 길은 가시밭과 같은 길이요, 단조한 길이며 무채(無彩)의 길입니다. 경제적 우우(優遇)가 기다리지 않고 사회적 영예가 따르지 않죠. 교사는 싸움마당에 쓰러지는 무명(無名)의 전사와 같고 그의 운명은 과실나무 뿌리에 파묻히는 거름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땐 해방된 조국의 사회 전반에 감돌고 있던 시대정신이 있었어요. 학생들은 페스탈로치의 교육사상을 읽고 그의 삶을 되새겼어요. 페스탈로치 그룹(PG)이라는 모임을 만들어 교육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어요.”
 
 
  교육환경 개선 특별회계와 전교조 파동
 
정원식 문교부장관이 1989년 7월 21일 오전 교원노조 문제와 관련해 서울 구로고교를 첫 방문, 교사들과 대화를 갖고 있다.
  1988년 한 해가 저물어 갈 무렵이었다. 밤 11시경 전화벨이 울렸다. 밤이 깊어 벨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수화기를 드니 청와대 홍성철 비서실장이었다. 대뜸 “문교부 장관으로 지명되어 내일 발표한다”는 것이었다.
 
  “일방적 통보 같아 다소 기분이 언짢았으나 영예로운 일이라는 마음, 그래도 한 번쯤 숙고하는 것이 도리일 것 같아 주저했어요. 그런 심사를 눈치챘는지 홍 실장은 부드러운 음성으로 ‘대통령이 여러 사람의 조언을 수렴하고 정보기관의 보고를 종합한 결과’라고 하더군요. ‘강원용 목사의 적극적인 추천이 있었다’는 말을 덧붙이며 주저하지 말 것을 당부했어요. 6공화국 초기 조각 때 하마평에 오르거나 첫 번째 개각에서도 거명된 적이 없었기에 그 소식은 전혀 예상치 못했어요.”
 
  장관 업무를 시작하자 문교행정이 낯설지만은 않았다. 이미 1985년에 교육개혁심의회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교육현실의 문제를 다루어 왔기 때문이다.
 
  “당시 교육환경은 급속한 경제성장에 비해 너무나 열악했었어요. 과밀학급으로 60명이 넘는 학급이 대부분이었죠. 노후 교실에다 책·걸상이 비좁고 화장실은 여전히 재래식이었어요. 그렇다 보니 학교에서 용변 못 보는 어린 학생들도 생겼습니다. 난방시설도 문제였고 이중창이 아닌 교실창은 단열이 안 됐습니다. 시골학교는 위생상태가 나쁜 우물이나 샘물을 먹어 식중독이나 전염병에 그냥 노출되어 있었어요.”
 
  당시 ‘지방교육 재정교부금’이 있었으나 우선순위에 밀려 교육환경 개선사업은 뒷전이었다. 정원식 장관은 ‘교육환경개선 특별회계안’을 마련했다. 그러나 대통령의 재가가 있어야 하고 경제기획원도 동의해야 재원을 마련할 수 있었다.
 
  “청와대 이연택 행정수석을 만났더니 긍정적 반응을 보였어요. 얼마 후 대통령께서 내락했다는 전갈을 받았습니다. 내친김에 바로 조순(趙淳) 경제부총리를 만났습니다. 그 양반하고 나하고는 같이 강의한 입장 아니요? 자주 어울렸지요. 그 양반은 사회대학이고 나는 사범대였지만 비교적 관계가 있다고. 밥도 밤낮 먹고. 그런 처지니까 가서 이거 하나 해 달라니까 처음엔 어려운 듯하더니, 그 양반이 결심을 했다고. 그래서 이듬해 바로 됐지.”
 
  그때 만들어진 교육환경개선 특별회계의 골자는 1990년부터 3년간 매년 3700억원씩 1조1000억원의 재원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사실 1조원이 넘는 재원을 특별회계로 갑자기 마련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다행히 대통령도, 경제기획원도, 국회도 많이 지원해 줬어요. 그때 상임위가 문공위였는데 위원장이 정대철(鄭大哲) 의원이야. 그 양반하고 나하고 개인적으로 친분관계도 있고. 사실은 먼 인척은 돼. 부친 정일영(鄭一永) 박사가 나를 무척 아꼈었어요. 그 양반 고향도 이북이라고, 평양이야.”
 
  —그때 문공위원들이 쟁쟁하더군요. 박관용(朴寬用), 손주환, 이철(李哲), 강삼재(姜三在), 김동영(金東英) 등등.
 
  “그분들이 다 밀어 줬어요. 야당이 역시 다수였는데 이것만은 밀어 주자, 이렇게 됐지. 그래서 무난히 통과된 거야. 이 특별회계 재정은 공·사립학교를 막론하고 실행됐다는 데 의미가 있어요.”
 
  그 후 특별회계는 3년 더 연장됐는데 그 결과 한국의 교육환경이 크게 개선됐다.
 
  1989년 초 전국 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이 결성되자 전국적으로 1만2000명의 교원이 전교조에 가입했다. 교육당국으로선 무척 난감한 일이었다. 물론 35만명에 가까운 교원 수에 비하면 적은 숫자라고 할 수 있으나 1만명이 넘는 교원이 전교조에 가입했다는 것은 결코 가볍게 생각할 수 없었다.
 
  “문교행정의 책임을 맡은 지 얼마 안 돼 겪게 된 전교조 문제는 제 생애에 가장 어려웠던 문제였어요. 곤혹스럽기는 하지만 제자뻘 되는 그들과 직접 만나 대화하기로 했어요. 그러나 소통이 쉽지 않았어요. 그들은 이미 조직에 얽매여 있었어요.
 
  탈퇴권유를 먼저 했어요. 설득할 때 압력을 가하거나 편법을 쓰지 않도록 강력한 지시를 내리기도 했어요. 일부 장학사는 교원의 부모나 친척을 동원해서 설득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해요. 한 달쯤 지나자 1만여 명의 교원이 전교조를 탈퇴했습니다. 두 달 남짓 탈퇴권유 작업이 계속됐고 더 이상 시간을 끌 수 없어 단호한 결정을 내려야 했습니다. 결국 공립 776명, 사립 624명 등 1400명의 교원이 교직을 떠나게 된 것은 마음 아픈 일이었어요.”
 
  —왜 전교조를 받아들일 수 없었나요.
 
  “가장 큰 이유는 반사회적 의식화 교육 때문이었어요. 사회융합보다 갈등을 야기하는 가르침이잖아요. 또 그들의 단체행동도 걸림돌이었어요.”
 
  —지금도 교사는 노동자가 아니라고 생각합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나 교단을 떠난 많은 해직교사들은 극심한 생활고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박봉의 교사들이 학교를 떠나니 더 생계가 어려워지게 됐어요. 대개 전직(轉職)이 어려워 아내가 품팔이에 나서는 경우도 있었다고 해요. 장관 퇴임 이후에도 해직교사의 생활이 어렵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무척 괴로웠습니다. 제 결정에 대한 후회는 없으나 젊은 교사들이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된 데 대한 자책을 떨칠 수 없었어요.”
 
  문교부 장관을 그만둔 뒤에도 전교조 해직교사 문제는 오래 그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문민정부가 들어서자 오병문(吳炳文) 교육부 장관을 찾아갔다. 오 장관은 서울대 교육학과 동기였다. “이제는 시간이 웬만큼 흘렀으니 복직 문제를 검토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김영삼 대통령(YS)을 만나 재차 부탁했다.
 
  “YS도 이미 해직교사의 복직을 결심한 상태였어요. 1994년 복직이 결정됐는데, 해임 전 동일 학교에 복직할 수 없다는 것과 단체활동을 하지 않는다는 서약이 복직 조건이었어요. 그 일로 전교조 파동에 얽힌 제 매듭은 풀렸다고 생각합니다.”
 
  —전교조 교사 해직결정은 지금도 후회가 없습니까.
 
  “누구나 쉽게 결정하기 어려운 일이었을 겁니다. 개인이 희생되더라도 이것만은 해야겠다는 생각에 순수하게 전교조 문제를 대처했어요. 돌이켜봐도 잘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밀가루 세례와 과격 학생운동의 몰락

 
1991년 6월 3일 정원식 국무총리가 취임 전 맡았던 강의의 고별수업을 위해 한국외국어대학교를 방문했다가 정권에 불만을 품은 일부 학생들로부터 밀가루 세례를 받는 봉변을 당했다.
  1991년 문교부 장관에서 물러나고 두 달 남짓 푹 쉰 뒤 덕성여대와 한국외대에서 출강요청이 왔다. 덕성여대에서 ‘여성과 교육’, 한국외대 교육대학원에서 ‘생활지도’ 강의를 맡게 됐다. 2년여 만에 강단으로 돌아오니 감회가 새로웠다.
 
  한 학기 강의의 3분의 2가 넘어설 무렵, 갑자기 청와대에서 대통령특사 자격으로 아프리카 5개국 순방을 해 달라는 요청이 왔다. 첫 순방국인 나이지리아에 도착하니 급한 전화가 걸려 왔다. 청와대 이병기 의전수석이었다.
 
  “이 수석은 노재봉(盧在鳳) 총리 후임으로 제가 지명됐다는 겁니다. 그러니 대통령의 제의를 수락하고 속히 귀국해 달라는 것이었어요. 하지만 뜻밖이었어요. 일단 ‘대통령의 뜻은 고맙지만 너무나 갑작스런 일이라 당장은 결심할 수 없다’고 했지요. 다시 서울로부터 전화가 와서 무조건 수락과 빠른 귀국을 종용하는 것이었습니다.”
 
  국무총리가 되자, 마치지 못한 강의를 마무리지어야 했다. 덕성여대 강의는 다른 교수에게 위탁했는데 외대 대학원 강의는 마땅한 강사를 못 찾았다.
 
  1991년 6월 3일 오후. 그는 총리가 아닌 시간강사 자격으로 외대로 향했다. 개인 일정인 만큼 경호원을 대동하지 않았고 총리 전용차 대신 지하철을 탔다. 비서 한 명만이 수행했다.
 
  수업이 1시간가량이 지났을까, 갑자기 교실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분명 외치는 소리였다. 수업을 듣던 대학원생들이 그를 보호하려 했지만 그들의 힘에 떨어져 나갔다. 그는 수업 침입자들에 잡혀 질질 끌려 나가는 신세가 됐다.
 
  복도에서 이리저리 밀려가고 있을 때였다. 어떤 학생이 그의 얼굴에 밀가루를 퍼부었다. 계란을 깨서 문지르는 학생도 있었다. 얼굴은 밀가루와 계란으로 뒤범벅이 되었다.
 
  “복도를 지나 계단을 내려갈 때는 정신을 바짝 차렸어요. 발이라도 헛디뎌서 넘어지면 뒤에서 밀려오는 사람들에게 깔릴 수도 있으니까요. 그때 참으로 고마운 학생이 있었어요. 지금은 그 얼굴이 흐릿하게 기억나지만 분명 내 강의를 듣던 대학원생은 아니고, 아마 시위를 하러 온 학생이었던 것 같아요. 그는 내 오른쪽 팔뚝을 붙잡고 함께 계단을 내려왔어요. 왼쪽 팔뚝은 민병환 비서가 붙잡고 있었기에 양쪽의 부축을 받으며 조심스레 계단을 내려올 수 있었습니다. 민 비서는 당연한 일을 한 것이지만 그 이름 모를 학생의 도움은 두고두고 잊을 수 없어요.”
 
  학생 중에는 군중심리에 흥분되어 발길질을 하던 학생도 있었다. 그러나 그 장면이 고스란히 저녁 TV뉴스에 보도돼 우리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사회적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려는 총리의 쇼’라는 시각도 있었다.
 
  어떻게 밀가루를 덮어쓴 총리 모습이 TV에 담기게 됐을까. 나중에 알아보니, ‘총리의 강의약속’이 훈훈한 기사감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한 총리 비서실 직원이 기자들에게 귀띔했다는 것이다. 미담 취재를 위해 TV 카메라가 외대에 도착했을 무렵, 총리는 훈훈한 장면이 아닌 비극의 주인공이 돼 있었다.
 
  이튿날 정 총리는 다소 몸이 불편했으나 평상시처럼 출근했다. 기자들이 몰려와 “지금 심정이 어떠냐”고 물었는데, 그는 “회초리로 내 종아리를 때리고 싶다”고 말했다. 이 말은 언론에 대서특필됐다.
 
  “이후 사회가 조금씩 안정되기 시작했어요. 우선 그동안 잇따랐던 학생들의 투신자살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또한 민주화를 외치는 캠퍼스의 시위도 수그러들었어요. 그러자 정치권도 더 이상 정부에 대한 공박을 자제했어요. 정말 다행이었습니다. 비록 개인이 고난을 당하기는 했으나 사회가 점차 안정되기 시작했으니까요.”
 
  이 사건은 한국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정국은 급반전됐고 주말마다 서울 시내에서 계속되던 시위가 사라졌다. 학생시위를 바라보는 국민의 시선도 냉소적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2주 후인 그해 6월 20일 치러진 시·도의회의원 선거에서 여당인 민자당이 564석을 차지했다. 야당인 신민주연합당 165석, 민주당 21석, 무소속 115석 순으로 호남을 제외한 전 지역에서 민자당이 압승했다. 일부에서는 이 사건을 학생운동권 몰락의 시발점으로 간주한다.
 
 
  주석 金日成과 개인 金日成은 다르다
 
1992년 9월 16일 평양에서 열린 제8차 남북 고위급회담에서 정원식 대표와 연형묵 북측 대표가 악수를 교환하고 있다.
  정원식 총리는 1991년 10월 22일부터 25일 사이에 4차 남북고위급회담 남측대표 자격으로 평양을 찾았다. 서울을 떠날 때만 하더라도 평양 가는 일이 실감나지 않았다고 한다. 평양행 특별열차가 개성역에서 출발했는데 얼마 후 “사리원에 가까이 왔다”는 북측 안내원의 말이 들리자 감정이 복받쳤다. 사리원을 떠나 서울에 온 지 실로 46년 만에 찾은 고향이었다.
 
  “평양에 갔을 때 북측에서 ‘총리 친척이 126명이나 되는데, 만나 보겠냐’고 제의를 해 왔어요. 저는 ‘남한에 200만의 이산가족이 상봉을 기다리는데, 제가 수석대표로 와서 친척을 만나는 게 양식상 못할 일’이라며 정중히 거절했어요.”
 
  —그 시절 무엇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까.
 
  “4~8차 회담까지 다섯 차례나 했는데 평양에 3번이나 갔어요. 회담 자체는 3일밖에 안 돼요. 그런데 준비는 한 달 이상 가야 하거든. 준비시간만 적어도 6~7개월은 걸렸다고요. 총리 재임, 반 이상은 회담준비에 보냈어요. 딴 일은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남북기본합의서’가 나왔는데 지금 봐도 잘된 겁니다.”
 
  —4차 회담의 핵심은 무엇이었나요.
 
  “4차 회담에서 한국의 주된 관심사는 남북관계 개선이었어요. 핵문제는 우선순위에서 밀려나 있었죠. 그래도 제4차 회담의 기조발언에서 핵개발이 남북 간 새로운 긴장을 고조시킨다는 점을 지적했어요. 핵무기 개발을 포기하고 국제기구 사찰을 무조건 받아들일 것도 북측에 요구했어요. 북측은 핵 문제에 묵묵부답이었습니다.”
 
  그러나 제5차 회담(서울, 1991년 12월 11~12일)에서 양측이 ‘남북화해’와 ‘불가침’, ‘교류협력’ 등을 골자로 한 3가지 남북기본합의서 내용을 완전히 타결하고 서명했다. 또 6차 회담(평양, 1992년 2월 19~20일)에서 정 총리와 북측 연형묵 정무원총리 간에 ‘한반도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도 정식 발효됐다. 북한은 1992년 1월 30일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핵 안전조치협정에 서명하고 핵시설과 그동안 생산한 플루토늄 90g을 신고했다.
 
  “당시 북한은 만약 1992년에도 팀스피리트 훈련이 실시되면 6차 회담을 개최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공공연하게 밝혔어요. 6차 회담이 못 열리면 애써 이룬 기본합의서가 발효되지 않을 수도 있었어요. 그런데 그 무렵, 한반도의 핵 상황에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1991년 9월 2일 부시 미국 대통령이 “세계의 모든 지역에서 전술 핵무기를 미국 본토로 철수시킨다”고 선언한 것이다.
 
  “노태우 대통령도 그해 11월 8일에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구축에 관한 선언’을 발표했어요. 그리고 12월 13일에 ‘한반도 핵 부재(不在)’를 선언했습니다. 이렇게 북한이 상투적으로 문제 삼아 온 주한미군의 핵무기 보유문제가 원천적으로 해소됐어요. 북한은 더 이상 핵확산금지조약(NPT) 의무를 지연시킬 구실을 잃어버렸던 겁니다.”
 
  비핵화 공동선언은 남북기본합의서에 비해 덜 알려져 있으나 1992년 1월 20일 6개 항목으로 ‘한반도의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에 남북 대표가 합의했다.
 
  “6개 항목 중 1항에 ‘남과 북은 핵무기의 시험, 제조, 생산, 접수, 보유, 저장, 배비(配備) 사용을 하지 아니한다’입니다. 이 선언에 명시된 대로 당시 양측은 한반도를 비핵화하려는 의도가 확실했어요. 그 취지대로 ‘남북 핵통제 공동위원회’가 제대로 운영됐다면 지금의 핵문제는 미연에 해소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북측은 공동선언에 서명하고 최고인민위원회의 비준을 받아 발효시켰음에도 이를 어기고 공동선언을 백지화시켜 버렸다.
 
  공교롭게도 기자와 정 전 총리가 만난 날(12월 11일), 개성에서 남북간 현안을 논의하기 위한 제1차 차관급 남북 당국회담이 열렸다.
 
 
 
YS의 강권과 서울시장 낙선

 
  —경색된 남북문제를 어떻게 풀면 좋을까요.
 
  “제가 했다고 주장하기는 어렵지만 ‘기본합의서’, ‘비핵화 공동선언’, 그 방향으로 가야 합니다. 어떤 문제해결을 하겠다는 것보다 기본합의서를 복원시키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비핵화 문제는 그때와 상황이 많이 달라졌어요. 이미 북측이 핵을 개발했는데 중단하라고 하면 말을 듣겠습니까. 미국의 개입으로 북이 핵개발을 중단했을 때 오는 손실 등을 국제적으로 보완할 수 있게 하는 장치가 마련돼야 합니다.
 
  사실, 기본합의서에 담긴 정신과 내용을 이후 정권에서 반대한 적이 없습니다. 햇볕정책도 기본합의서대로 했으면 좋은데 덮어놓고 재정지원을 한 것이 문제였어요. 이로 인해 북측이 많은 도움을 받은 것이 사실입니다.”
 
  —언제 한반도 통일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글쎄,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죠. 기본합의서를 만들 당시 우리 정부의 구상은, 일단 남북이 화해하고 적대관계에서 벗어나자는 것이었어요. 인적 경제적 교류협력을 활발하게 하고 남북이 완전히 화해된 상태로 가다가 어느 시기에 평화적 통일을 이룰 수 있다고 봤던 겁니다. 우리가 TV 매체 교류도 제안했는데 북한도 받아들였어요. 기본합의서대로라면 흡수통일을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북측도 (흡수통일을) 가장 두려워하지요.”
 
  그는 대한민국 국민 중에서 손으로 꼽을 만큼 적은, 김일성을 직접 만난 한국인이다. 김일성에 대한 인상을 물어보았다.
 
  “당시 82세임에도 건강해 보였어요. 제가 물어봐도 건강하다고 하더니, 그로부터 3년 뒤 세상을 떠났어요. 굉장히 부드럽고 저를 잘 대해 줬어요. 사람 대하는 태도가 능수능란했다고 할까요? 그런데 개별면담에서 하는 말과 공식성명의 말이 달라 이중적이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주석(主席) 김일성과 개인 김일성은 다르다고 생각했죠.”
 
  1992년 총리직에서 물러나고 1주일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당시 대선후보였던 YS의 밀명을 받고 안기부 운영차장이던 김기섭씨가 찾아왔다. “YS의 심부름을 왔다”며 민자당 선대위원장을 맡아 달라는 것이었다.
 
  “1992년 9월 16일부터 평양에서 열린 제8차 남북 고위급회담에 참가했을 때였는데 서울에서 달갑지 않은 소식이 들려왔어요. 여당이 대선후보인 YS가 중립내각 구성을 제안했으니까요. 취지는 ‘여당이 기득권을 내놓겠다’는 뜻인데 중립내각 구성을 위해 총리도 물러나야만 했던 겁니다. 저는 (노태우) 대통령의 주저하는 마음을 헤아려 스스로 사임을 청원했지요.
 
  어쩌면 총리직에서 물러나게 한 장본인이 YS인데, 선대위원장을 맡아 달라고 하니 고민이 될 수밖에요. 안 하겠다고 해 옹졸한 사람으로 여겨지는 것 또한 싫었어요. 아내는 수락해야 된다고 했지만, 몇몇 사람은 ‘배알도 없느냐’고 해.”
 
 
  ‘당을 좀 맡아 달라’
 
김영삼 대통령 당선자가 1992년 12월 21일 민자당 총재실에서 정원식 선거대책위원장으로부터 중앙선관위가 보내 온 대통령 당선 통지서를 전해 받고 있다.
  결국 1992년 12월 YS의 대선 선대위원장을 맡아 표밭을 일구었다. 당시 유세활동은 어땠을까. 정 전 총리의 기억을 더듬어 보면 이런 식이었다. 이덕화, 코리아나, 주현미, 남보원을 비롯한 연예인 유세단이 노래와 춤, 웃음으로 흥을 돋우면 선대위원장이 바통을 이어받아 유세를 벌인다. 그러면 대통령 후보가 무개차(無蓋車)에 올라 손을 흔들며 입장한다. 환호소리가 절정을 이룬다.
 
  “제가 연설을 많이 다녔어요. 이분이 대통령이 돼야 한다고. 내가 당선증 받아다가 김영삼 당선자에게 전해 줬다고 무척 좋아하더라고. 당사는 축제분위기였고 당선자는 마산에 사는 김홍조 옹에게 인사하러 바로 내려갔어요.”
 
  YS가 대통령이 된 뒤에는 대통령직인수위원장으로 6공에서 문민정부로의 정권승계를 원만하게 이뤄 냈다. 그리고 홀연히 정치권을 떠났다.
 
  “YS가 나보고 ‘당을 좀 맡아 달라’는 겁니다. 완전히 정치인이 되라는 거지. 사실, 내가 가만 보니 당의 생리라는 게 내가 있을 데가 못돼. 교육계와 영 딴판이야. 괜히 이 판에 들어와 어떻게 할 것이냐 하는 생각도 들고. 절대로 못한다고 거절을 했지….”
 
  정 전 총리가 교육계로 돌아가겠다고 고집하자 YS도 한발 물러났다. 대신 세종연구소 이사장에 임명했다.
 
  “1995년 3월이었어요. 세종연구소 ‘세계화 대학원’ 설립을 준비하기 위해 미국 랜드연구소에 머물고 있었는데 청와대 비서실장의 연락이 왔어요. 도착 이튿날 YS와 저녁식사를 하는데 분위기가 다소 긴장되고 무거웠습니다. YS는 반가워하면서도 무언가 주저하는 기색이 있었어요. 불쑥 저더러 ‘서울시장 후보로 나서 달라’는 겁니다. ‘전부터 말하려고 했지만 미루다가 그제야 말문을 열었다’면서요.
 
  사태가 이쯤 되고 보니, 더 이상 고사할 수 없었어요. 결국 며칠 생각할 말미를 허락받고 그 자리를 물러나는데 YS가 ‘빠른 결심을 바란다’며 직통 전화번호를 알려주더군요.
 
  비록 국무총리를 지내긴 했지만 스스로 정치인이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서울시장은 정치인이 아닌 행정가였지만 그래도 당의 공천을 받아 선거를 치러야 한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어요.”
 
  마음의 동요가 일었다. 사흘이 지나자 청와대에서 독촉전화가 왔다. 할 수 없었다.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다음 날 수락 전화를 걸었다.
 
  이후 논란 끝에 이명박(李明博) 후보와 경선을 거쳐 후보가 됐으나, 상대는 서울대 동료교수이자 동갑내기 조순 후보와 말 잘하기로 유명한 박찬종(朴燦鍾) 후보였다.
 
  첫 실시된 1995년 서울시장 선거에 우리나라 선거사상 처음으로 TV 토론이 시도됐다. 첫 서울시장 선거인 데다 첫 TV 토론인 만큼 국민적 관심이 컸다. 선거운동에 늦게 뛰어든 정원식 후보는 초반 지지율이 15%에 불과했다. 관훈클럽 토론 이후 상승세를 탔다. 그러나 선거전이 중반에 접어들면서 다양한 정치적 이슈들이 불리하게 작용했고 점점 불안해졌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이 참모들의 의견이었어요. 박성범, 강용식, 서청원, 이연석 의원 등과 손풍삼씨가 참모로 여러 도움을 주었어요. 참모들이 ‘더 늦기 전에 공격적인 전략을 써서 국면을 전환시키자’고 했지만 저는 한 번도 당이나 상대방 후보의 약점을 들추어 비방한 적이 없어요. 신념대로 페어플레이를 했습니다.”
 
  1995년 치러진 제1회 지방선거 당시 서울의 총 투표율은 66.2%였다. 조순(민주당) 후보가 42.4%의 득표율로 당선됐고, 박찬종 후보는 33.5%, 정원식 후보는 20.7%였다. 개표결과 예상대로 낙선하고 말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TV토론 당시 서민층이나 젊은이들에게 소탈하고 친근한 인상을 주지 못했던 것 같아요. 선거에서 감성적인 전략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처음 알게 됐어요. 저는 지금도 화려하거나 색깔이 튀는 넥타이를 매면 어색하기만 해요. 그런 태도는 교육자라는 고정관념에서 못 벗어난 한계지요. 옷차림이나 표정에서 자신도 모르게 근엄한 인상을 줬는지 모르겠어요. 아마도 권위적이라는 느낌을 받았을 겁니다.”
 
 
  YS와 나
 
세종연구소 이사장 시절의 정원식.
  —낙선 후에 어떻게 지냈습니까.
 
  “다행이랄까 불행이랄까, 낙선이 되고 다시 세종연구소 이사장으로 돌아왔어요. 임기를 다 채운 뒤 YS가 저를 대한적십자사 총재에 임명했어요. 강영훈(姜英勳)씨가 총재였는데, 우리 둘이 자리를 맞바꾼 겁니다. 강영훈씨가 세종연구소 이사장이 되어 둘이서 이·취임식을 같이 했어요.
 
  적십자사에 6년 있다가 파라다이스복지재단 이사장, 유한재단 이사장을 역임했지요. 정치의 유혹이 있었으나 정치를 멀리하고 교육의 길을 가야 한다는 고집이 정치인이 아닌 교육자로 남을 수 있었다고 봅니다.”
 
  정 전 총리는 꾸준히 교육학 전문도서를 펴내고 있다. 2001년 《인간의 동기》, 2003년 《인간의 성격》, 2005년 《인간과 교육(증보판)》, 2010년 《인간의 인지》, 2012년 《인간의 환경》, 2013년 《인간의 가치관》, 2014년 《교육시론(時論)》 등을 출간했다.
 
  —그때, 정치를 계속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요. 국회의원 배지를 달았겠지요.
 
  “YS의 마음속은 모르지만 제가 받은 인상은, 저를 서울시장으로 만든 뒤 대권에 도전케 하려 했다고 봅니다. 그런데 저는 그럴 의사가 전혀 없었어요. 솔직히 제 집에서 반대를 했어요. 아내가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데 순수성을 강조해요. 제가 정치하면 순수성과 멀어진다고 생각해서 극렬 반대했습니다. 아직도 저는 교육자라고 생각합니다. 정치인이나 행정가 출신이라 생각하지 않아요.”
 
  —2015년 11월 22일 YS가 돌아가셨는데 그분은 어떤 분이셨나요.
 
  “정치를 위해 태어나신 분 같았어요. 개인 사생활은 없고 가족보다 정치적 동지를 더 중시했어요. 정치적 의욕이 강했던 분이라고 할까요? 속되게 돈을 축적하실 분이 아니셨고 모은 돈도 없었던 것으로 생각이 들어요. 돈 관심이 없었던 겁니다. 그러다 보니, 단점도 생길 수밖에요. 자기중심으로 자기사람만 생각해서 불가피하게 타인과 적대적 관계를 맺었잖아요.
 
  이번에 돌아가신 뒤 우리 사회에서 대단히 높게 평가하는 보도를 봤습니다. 전혀 비하하는 일이 없었어요. 언론과도 좋은 관계였던 것이죠. 어떤 정치인도 그런 평가를 받기 어려울 겁니다.”
 
  —이명박 대통령과의 인연은.
 
  “별로 얘기하고 싶진 않은데, 서울시장 경선 때 나는 추대되는 줄 알았거든요. YS가 (내게) 간곡히 했으니. 그러나 당 총재가 부탁했는데도 당에선 경선해야 한다고 했어요. 그때 경선한 사람이 이명박 대통령이야. 내 바람에 그 양반이 낙선을 했지. 이후에 갈등은 없었지만 친해지지도 않았죠. 대통령 한 다음에도 나한테 조언을 구한 일이 한 번도 없었어요.”
 
  —전직 총리들은 자주 만나시나요.
 
  “6공화국 총리 중에 강영훈, 노재봉, 이헌재(李憲宰), 현승종(玄勝鍾), 내가 있고… 비교적 정치성 있는 사람들이 아니어서 계속 모였지. 강영훈 총리가 몸이 나빠 집에 들어앉게 되면서 뜸해졌어요. 아직도 사람을 못 만나요. 자연히 모임도 뜸해지고 서로 안 만나게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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