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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人의 詩

최금진

귀신이 되어가는 세월, 詩를 쓰기엔 生이 너무 짧다

글 : 최금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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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족, ‘ㅅ’, 詩… 세 개의 아이러니는 나의 작품 키워드
⊙ 우리 가족은, 아무도 아프지 않은데, 다들 조금씩은 어딘가 아파
⊙ 神과 詩와 사랑… 나는 ‘ㅅ’의 사생아

최금진
⊙ 45세. 한양대 대학원 국문학박사. 동국대·경희사이버대·한양대 강의.
⊙ 시집 《새들의 역사》 《황금을 찾아서》 《사랑도 없이 개미귀신》,
    산문집 《나무 위에 새긴 이름》 출간.
⊙ 2001년 창작과비평 제1회 신인시인상, 2008년 제1회 오장환문학상 수상.
  
시집 《사랑도 없이 개미귀신》과 산문집 《나무 위에 새긴 이름》.
  가족은 내가 사랑하는 지옥이다. 만약 누군가 지옥에 가게 된다면, 그의 지옥행(行) 역시 가족 때문일 것이다. 우리 집 거실 벽시계는 기침 소리를 내며 돌아간다. 가족은 비유가 될 수 없다. 모든 절망의 부정이며, 모든 절망의 긍정이다.
 
  새해가 밝았고, 우리 식구들은 또 한 살씩 나이를 먹었다. 아이들이 어서 커주기를 바라는 아버지로서의 간절한 마음 반대편에는, 공중에 떠도는 눈송이를 오래 바라보는 가장(家長)의 마음도 있다. 컴컴한 땅굴 같은 데에서 숨어 사는 토끼들처럼, 우리는 지난해에도 이 집을 거처로 삼고, 두려움에 연신 귀를 쫑긋거렸다. 때때로 아이들의 잠꼬대가 너무 아팠다.
 
  과거를 되돌릴 수 없기 때문에 현실을 인정하자는 말은 얼마나 잔인한가. 생각하면 우리는 모두 서로 다른 별들처럼, 멀리서 흘러와 제 궤도를 돌고 있는 것 아닌가. 사랑으로 사랑을 억압하고, 사랑으로 사랑을 강변(强辯)할 수 있을까. 그렇게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사랑으로 지켜갈 수 있을까.
 
   ‌서로 사랑을 하자고 강변하던 날들이 가고 정말 사랑이 왔다
  ‌라면발처럼 쪼그라든 뇌 사진은 우리 엄마 것이고
  ‌코를 킁킁거리는 틱 장애는 큰아이의 것이고
  ‌나는 동굴 벽화에 나오는 고대인처럼 뭔가를 사냥할 기세로
  ‌파리채를 들고 다니며 엄포를 놓는다,
  제발 서로 사랑을 하자
  ‌비염과 축농증이 유전 때문만은 아니듯,
  불행은
  ‌나주 남평 출신의 사나운 처에게서 온 것이 아니다
  ‌틈과 틈을 메꾸는 건축술에서 벽이란 얼마나 울음에 취약한가
  ‌절망의 하찮음을 앓고 난 뒤에도 여전히
  변함없는
  이 무표정은 우리들 진화의 쾌거일까
  ‌칠십이 다 되어가지만 여전히 내성적인 엄마의 담배와
  ‌막내의 착하디 착한 혼잣말을 종일 발굴해 내는
  ‌내 귓속의 동굴에 오류투성이 메아리들이 섞여 울린다
  ‌사랑으로 가족의 사랑을 강제할 수 있는 날들은
  가고 없다, 대신
  ‌밤이면 새로 돋는 손톱을 만지작거리며 방들이 뒤척이고 있다
  ‌퍼렇게 인광을 흘리며 거실에서 혼자 물을 마시고 있는 엄마와
  ‌가방에 교회 전단지 뭉치를 소지하고 다니는 처를 본다
  ‌조용하고 지루한 광기가 고층에 사는 우리를 주시한다
  ‌하루라도 사랑이 없으면 안 되는 절실함에 대해 누구보다 박식한
  ‌나는 왜 서로 사랑을 하지 않느냐고 식구들 멱살을 잡고
  드라이버로 닫힌 방문들을 뚫고
  ‌세 번, 네 번, 열 번이라도 나는 사랑을
  연설한다
  아무도 아프지 않은데
  ‌다들 어딘가 조금씩은 아픈, 말도 안 되는 사랑이 온 것이다
 
  ‌- 우리 집 사랑의 내력, 《사랑도 없이 개미귀신》 중에서

 
  우리 가족은, 아무도 아프지 않은데, 다들 조금씩은 어딘가 아프다. 나의 근심은 이것이다. 가장으로서 나의 지옥이 이들 가운데 있는 것이다. 서로 사랑해야 하는데, 다들 각자의 방에서 각자의 병을 앓고 있다. 우리는 여행을 좋아하고, 여행에서 배우는 것은 단단한 불화와 조용한 침묵이다. 사랑하는 나의 가족이여, 왜 우리는 이토록 멀리 흘러온 것이냐.
 
 
  ‘ㅅ’의 균열
 
가족은 내가 사랑하는 지옥이다. 가족은 모든 절망의 부정이며 모든 절망의 긍정이다. 네 살 때 어머니, 누나와 함께.
  나는 ‘ㅅ’의 사생아다. 사생아는 부모가 있으나 합법적이지 못한 존재이다. 한 사람의 존재 자체가 불법인 이 불행의 아이러니는 아주 오래전부터 시작되었다. 신(神)과 시와 사랑, 그들은 나의 부모이며, 나는 그들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다. 나는 버림받았다. 근원으로부터의 소외 앞에서, 나는 이제 십자가에 달려야 할까 아니면 스스로 이단이 되어야 할까.
 
  ‌‌ㅅ은 어떤 것의 사이나 속을 의미한다는
  ㅅ의 계시였다
  한꺼번에 ㅅ이 몰아닥쳤다
  ‌사랑, 신앙, 시, 시큰둥, 시시함…… 나는 ㅅ을 진심으로 사랑했고
  ‌그 사이와 틈새를 들여다보기 위해 기꺼이 숨을 내놓았다
  ‌사자자리인 내가 사수자리인 너를 사랑하는 아이러니
  ‌신과 시와 사랑, 무엇을 택할래, ㅅ이 진지하게 내 대답을 기다렸다
  ‌ㅅ이 나를 망쳐놓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ㅅ이 만들어놓은 길을 싸돌아다녔다
  ‌어떤 것은 너무 시시했으며, 어떤 것은 너무 진지했지만
  ‌정작 내가 사랑한 것들은 내게 예의가 없었다
  ‌ㅅ의 가장자리에서 내 손금에 그어진 성공선이나 살피며
  ‌나는 ㅅ의 흔적을 아끼고 사랑하고 저주했다
  ‌ㅅ이 나를 키웠고, ㅅ이 나를 버렸고, ㅅ이 나를 필요할 때마다 불렀고
  ‌그때마다 ㅅ의 품에 안겼다, ㅅ 속을 걸으면 안개가 끼었고, 안개 속에선 소나무들이
  ‌유령처럼 걸어나와 내 목을 ㅅ의 줄기에
  매달기도 했다
  ‌ㅅ을 배신한 죄로 사형을 당할 때, 내 성기는 ㅅ을 향해 잔뜩 독이 오른 채
  곤두설 것이다
  ‌ㅅ이시여, 왜 나를 버리십니까, 왜 나는
  당신의 ㅅ이 될 수 없습니까
  인자하시고 자비하신 ㅅ의 음성이
  ‌나의 ㅅ과 그 뒤에 덧붙는 자음과 모음들을 모조리 ㅅ 안으로 끌어당겼지만
  내가 얻은 건 틈과 사이의 균열
  ‌ㅅ‌이시여, 당신의 속에 과연 내가 지금도 웅크리고
  ‌두 팔을 벌리고, 사지가 찢어진 채, 수염을 기른 채, 두 손을 합장한 채
  ‌사랑하며, 시를 쓰며, 신을 섬기며, 여전히 살아 있습니까, 숨 쉬고 있습니까
  ‌멈칫멈칫, 쭈뼛쭈뼛, 흘깃흘깃, 내 생의 꽁무니까지 따라온 ㅅ이시여
  ‌ㅅ밖에 남지 않은 이 불쌍한 나를 당신은
  여전히 ㅅ하십니까
 
  ‌- 여전히 ‘ㅅ’하십니까, 《사랑도 없이 개미귀신》 중에서

 
  지나온 날들은 온통 부끄러운 사랑이다.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고, 원하는 것은 늘 너무 많은 희생을 강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뻔뻔하게 살아 있다. 사랑하며, 시를 쓰며, 신의 이름을 부르며 이 모든 불행을 시와 신과 사랑에 덮어씌우고 있다.
 
  균열은 실존이다. 그리고 이 틈은 봉합되지 않는다. 영원과 이상(理想)을 갈망하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그러나 이 무서운 추동력을 가지고 나는 미친 듯이 달려나간다. 사생아로서, 사생아답게 절망하며, 분노하며, 그리워하며 나는 달려나간다.
 
 
  다시, 詩
 
  덧없는 세월이다. 세상 안팎으로는 흉흉한 소문과 사건들이 범람하고, 나 개인적으로는 인생무상(人生無常)의 시간을 견디고 있는 중이다. 사람들과 세상과 자꾸만 멀어지면서, 어떤 외계의 존재가 되어가는 것도 받아들이기 힘들다. 이렇게밖에 할 수 없었던 걸까. 나는 끝내 답하지 못한다.
 
  섬으로 들어가 살자고 식구들을 설득 중이다. 식구들은 나를 믿지 않는 눈치다. 도피(逃避)의 심리 이면에 잔뜩 도사리고 있는 내 질주의 욕망을 알기 때문일까. 나는 다시 절망한다. 아무도 나를 믿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나 스스로도 나를 믿지 못한다. 이율배반의 시, 시는 그 표리의 부동함을 견디며 태어난다.
 
30대 초반, 교직을 그만두고 방황하던 시절 신안 지도 선착장에서.
  ‌‌사랑도 없이 귀신이 되어가는 세월
  시를 쓰기엔 인생은 너무 짧은 건 아닐까
  ‌변명을 횃불처럼 들고 찾아가는 산82-5번지 모래 사원
  ‌해골을 주렁주렁 목에 걸고 누운 개미귀신이란 놈은
  시체애호증이 있어서
  ‌집 가까운 곳에 뼈다귀만 남은 것들을 파묻어 둔다
  ‌침침한 눈으로 머리카락을 골라내듯 언어를 골라내기엔
  너무 늦은 저녁, 책임감도 없이
  ‌어제 먹다 남은 말을 마저 먹는다, 아득바득
  시를 쓰기엔 인생은 너무 불쌍하다
  수도복을 입은 개미귀신들이 미사라도 보는 걸까
  모래 속에 몸을 납작 엎드리는 저녁
  ‌부스스, 내 손에서 사라지는 모래의 언어를 만져본다
  ‌시를 쓰기엔 너무 캄캄한 모래 구덩이에서
  ‌죽은 언어들을 해골처럼, 염주처럼 대롱대롱 목에 걸고
  ‌귀신처럼 늙어가기엔 너무 예쁜 시 한 줄을 맛보다가
  퉤, 하고 뱉어내는,
  당최 입맛이 없는, 개미귀신 한 마리
 
  ‌- 개미귀신, 《사랑도 없이 개미귀신》 중에서

 
  어제는 아파트 화단에서 죽은 까치를 보았다. 날렵하고 가벼운 몸이었다. 까치가 거느렸을 한 뼘의 하늘이 무너져 있었다. 딱 그만큼의 허공에서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시를 쓰는 것도 그렇다. 죽게 되면 죽을 것이나 그것은 끝이 아니다. 가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 의해 길이 생기듯, 시가 지나간 자리엔 구름을 뚫고 내리쬐는 햇살을 볼 수 있을 것이다.⊙
 

  詩人이 만난 詩人
 
  절망하는 자여, 그대는 가장 희망적인 사람
 
  ⊙ ‌이전에는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詩를 썼다면, 지금은 타락한 사람으로서 詩를 써
  ⊙ ‌이 시대야말로 神 없이 살기 어려운 시대… 불행한 家族史 넘어 희망을 얘기하고 싶어
  ⊙ 희망을 꿈꾸지 않는 자는 절대로 절망할 틈이 없다
 
 
  사람의 일생은 언제나 그 가장자리가 가장 아리다. 그 핍진한 자리에서 시간은 두 방향으로 붉게 흘러내린다. 하나는 과거로 되돌아가 기억의 실핏줄로 스며들고, 다른 하나는 그 운명의 밀도로 먼 미래를 향해 휘감겨 빨려들어간다. 이를테면 삶의 고통은 그토록 길들이고자 했던 운명이라는 짐승이 순량해지는 순간이랄까. 그러나 세상은 여전히 핏빛 저녁을 네온에 담아 굶주린 자본(資本)이라는 들판에 흩뿌린다. 시인은 그 붉은 두 손바닥으로 오체투지 하듯 시(詩)를 당신이라는 이름에 바른다. 신(神)은 이제 모두가 간절한 빅데이터(big data)라는 독배를 마셔야 한다.
 
 
 
시 쓰기 위해 교직 그만두다

 
  2001년은 최금진 시인에게 그의 삶 자체로 볼 때 기록적인 정점을 찍는다.
 
  “2001년 5월에 초등학교 교사직을 그만두고 그해 8월에 창비를 통해 등단되었으니까 3개월 만에 일어난 일이죠.”
 
  그는 당시 문학에 대한 열망과 절박함 사이에서 신병(神病)을 앓듯 심신(心身)이 지쳐 있었다. 조금씩 조여오는 볼트와 너트처럼 가족과 생계라는 틈바구니에서 양손으로 귀를 막았을 것이다.
 
  “교사라는 직업은 제가 간절히 원했던 길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시인이 되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가정 형편상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면서 교대를 갈 수밖에 없었죠. 4년 내내 장학금을 받으면서 다녔지요. 군대도 면제되어 안 갔습니다. 종교적 신념으로 술, 담배를 하지 않았고, 노래방도 가지 않았습니다. 직장이라고 다니긴 했지만 완전히 단절된 세상에서 살았습니다. 게다가 사회생활에 서툰 시인 지망생을 위한 좋은 직장이란 세상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초등학교 교직에 6년 8개월 있다 보니 적성이 안 맞는다는 걸 알았어요. 지금도 당시 제게 배웠던 학생들이 연락이 오곤 합니다만, 초등학교 애들한테 문학을 가르치고 윤동주 시를 읽게 하는 건 좋은데, 저는 오로지 글을 쓰고 싶었던 거예요. 그 무렵부터 몸이 좋지 않았는데 죽고 싶고 뛰어내리고 싶었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우울증이었던 거죠.”
 
  시인에게 여러 잔병이 뒤따라 찾아왔다.
 
  “그러다 보니 어머니께서 교직을 그만두게 한 거예요. 그때부터 불행이 시작되었죠. 가정이 엉망이었어요. 그 오랜 6년여 시간 동안 직장을 그만두고 싶다는 얘길 했었는데 가족은 아무도 동의를 하지 않았어요. 당연히 동의하지 않겠죠. 가장(家長)인데 동의하겠어요? 그걸 6년 동안 참으니까 배신감으로 오더라고요. 내가 이렇게 원하고 이렇게 죽고 싶을 정도인 상황에서 살아가는데 아무도 동의해 주지 않는 거예요. 그때 하도 자살 생각을 하니까 집에서 저 몰래 생명보험을 들어놓는 거예요(웃음). 그때 가족들과의 신뢰가 많이 깨졌죠. 그 후 지금까지도 저는 자발적 이방인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할까요.”
 
  한 사람의 문학작품은 그 사람의 정신이 몸으로 길어낸 그 무엇이다. 직접이든 간접이든 체험이 없이는 어떠한 시적 주제도 철 지난 신장개업 현수막 같은 것이다. 이러한 불화와 화해, 상생과 상극의 접점에서 불지르듯 라이터를 켜는 것이 진정 시가 아닐까. 그의 등단작에서 느껴지는 이 강렬한 휘발성은 당시 문단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리고 그의 첫 시집에 ‘제1회 오장환문학상(2008년)’을 건넸다.
 
  ‌‌차는 계곡에서 한 달 뒤에 발견되었다 / 꽁무니에 썩은 알을 잔뜩 매달고 다니는 / 가재들이 타이어에 달라붙어 있었다 / 너무도 완벽했으므로 턱뼈가 으스러진 해골은 / 반쯤 웃고만 있었다 / 접근할 수 없는 내막으로 닫혀진 트렁크의 / 수상한 냄새 속으로 파리들이 날아다녔다 / 움푹 꺼진 여자의 눈알 속에 떨어진 담뱃재는 / 너무도 흔해빠진 국산이었다 / 함몰된 이마에서 붉게 솟구치다가 말라갔을 / 여자의 기억들은 망치처럼 단단하게 굳었다 / 흐물거리는 지갑 안에 접혀진 메모 한 장 / ‘나는 당신의 무엇이었을까’ / 헤벌어진 해골의 웃음이 / 둘러싼 사람들을 물끄러미 올려다보고 있었다 / 나는 무엇, 무엇이었을까…… 메아리가 / 축문처럼 주검 위에 잠시 머물다가 사라져갔다
 
  ‌- ‘사랑에 대한 짤막한 질문’ (제1회 창비 신인상 시인상 당선작)

 
  최금진 시인을 앞에 두고 가족사 얘길 꺼낸다는 것은, 척박한 사막을 걷는 낙타의 눈동자에서 기미(幾微)를 찾으려는 모래바람 같은 느낌이다. 여러 매체에서 공개된 내용만 간단히 적으면서 자꾸만 필자의 눈이 서걱거린다. 우리는 모두 사막이 부르는 환원할 수 없는 엔트로피로 가고 있지 않은가.
 
  ‘할머니는 1907년생이었다. 할머니는 저승사자도 탐내지 않는 여든셋에 자살을 했다. 어쩌다 나는 아버지 없는 집에서 태어나, 어머니 없는 유년 시절을 보내고 서둘러 대책도 없이 어른이 되었을까. 아버지(1940년생)는 내가 세 살 때 역시 자살로 생을 마쳤다. 서른셋의 나이였다.’
 
  가슴 속 응어리로 남아 있을 가족사에 대해 그는 뭐라고 할까.
 
  “지나고 나니 첫 시집을 쓸 때는 그 내용이 제 불행인 것으로 느껴졌지만, 사실은 제 어머니의 불행이었어요. 저는 곁에서 겪었을 뿐이지요. 직접적인 피해자는 어머니입니다. 남편을 스물다섯에 잃었고 두 아이를 데리고 평생 살아오면서 여자로서 겪었을 갖가지 고초가 있었을 것 아닙니까. 똑같은 상황을 겪었을 터인데 누나는 그런 불행의식이 없더군요. 저는 그 시절을 다른 사람보다 더 예민하게 느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던 그에게 어느새 종교가 마음에 들어와 교회를 짓는다. 고등학교 때부터 교회를 다녔던 그는 신구약 성경을 여덟 번 통독했으며 세례도 받고 교회 집사로도 활동한다. 그는 성가대 지휘자로도 활동했다. 결국 시골교회가 그의 마음속 집회 장소였다.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였으니 그게 시적인 성향에서 무시될 수 없습니다. 작품으로 간간이 나오는 건 타락한 사람으로의 시적 화자가 비치는 거죠. 종교에 갇혀 있기보다 종교에 끼여 있다가 벗어난 사람으로서요. 막내가 여덟 살인데 지금도 재울 때마다 찬송가를 불러줍니다. 여전히 저는 신앙 비슷한 것을 가지고 있는 거지요. 그전에 가지고 있던 사유보다는 타락한 사람으로서 신을 다시 보는 거죠. 입장이 조금 달라진 것 같아요. 그전에는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시를 썼다면, 지금은 타락한 사람으로서 시를 쓰는 게 아닌가 생각해요. 그게 문학적으로 더 절실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단언컨대 시인은 하늘이 점지해 주지 않는다. 시인이 된다는 것은 제 심장에서 피를 뽑아 스스로의 문장에 흘려보내며 창백하게 방치된다는 것이다. 또한 재능은 시인에게 극복해야 할 암(癌)이다. 결국 시인 누구도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 시를 쓰는 것은 자신을 알아가는 고행인 것이다. 그 길에는 어떠한 부(富)도 남루한 거적에 불과하다.
 
  “등단 무렵은 참 심각하고 예민했어요. 교회에 가서 밤낮 기도하는 것으로도 문학적 갈망과 허기는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에는 신에 대한 배신감도 있었죠. 재능이 없는 내게 욕심만 잔뜩 집어넣은 분이 신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스물여덟 살에 《강원일보》 신춘문예가 되긴 했지만 서른두 살에 창작과비평으로 등단했으니까 그 사이에 백여 군데의 등단 지면(紙面)에서 떨어졌으니 좌절이 얼마나 컸겠어요. 하고 싶은 것도 못 하는데 쓸데없는 것에 잡혀 있다고 생각하니까 산골짜기 교사로 살아간다는 건 정말 암담한 거였죠.”
 
 
  저항과 변화의 바람 속에서
 
스스로를 재능 없는 자라고 피 터지게 머리를 박아본 적이 없다면 그는 가짜다. 그러므로 절망하는 자여, 그대는 가장 희망적인 사람이다.
  2008년 최금진 시인은 새로운 생활 터전을 마련해 광주로 이사한다. 그런 그에게 운명은 첫 시집의 여운도 사라지기 전에 혹독하게 꿈을 앗아갔다. 또 한 번의 시련이 그를 비극적 정체성에 욱신욱신하도록 패대기친다. 그의 말대로 절망은 늘 희망을 배신하며 태어나고, 시 역시 그 희망을 더 배신하며 태어난다.
 
  “그 당시 온 집안의 모든 돈을 합치고 빚까지 져서 빌라에 들어갔어요. 그때 전세금이 6000만원이에요. 셋째 아이가 태어났고요. 부동산 중개업자 말만 믿고 들어간 거죠. 등기부등본을 떼봤어야 했는데, 결국 한 푼도 돌려받지 못했어요. 집주인이 건축업자인데 여기저기 집을 지어놓고 대출을 어마어마하게 받아 고의로 부도를 내버린 거예요. 다 압류당했는데 우리가 1순위가 아니고 십몇 순위더라고요. 그걸 전혀 모르고 들어가 한 푼도 못 받고 길바닥에 나앉은 거였죠. 그 당시가 제일 암담했습니다. 어머니를 모시고 왔고 셋째는 태어났고 직업도 없는 상태에서 처음 소상공인대출을 받아 작은 아파트 상가 18평짜리 방 하나에서 학원 경영을 했는데, 그렇게 열심히 살고자 했는데 완전히 짓밟혀버린 거죠. 그 돈을 지금도 못 받았어요. 얼마 전에 다시 소송을 하려고 알아봤더니 이 건축업자 앞으로 재산이 없었어요.”
 
  그런 그가 다시 일어서 여기까지 희망을 질질 멱살 잡듯 끌고 왔다. 한양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 박사를 마친 후 대학 시간강의에 전담하고, 아내는 광주에서 논술학원을 운영하고 있다. 몇몇 몰지각한 시인들은 생계를 위한 그의 삶을 욕하기도 한다. 그러나 주변의 사소한 시기쯤은 그의 비극적 리얼리즘 미학에 점 하나 더 얹을 뿐이다.
 
  요즘 사회적으로 슬픈 이슈로 인해 적잖은 시인이 그 울분을 안으로 삭이곤 하는데 그는 진정 이 시대의 시가 무엇이 되길 원하는 것일까.
 
  “지금 시대가 재갈을 물리고 있는 것 같아요. 시를 쓰면서 두려움을 느낄 때가 있어요. 저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그런 느낌이 있을 겁니다. 좀 더 직설적으로 쓰고 싶은데 망설여지는…. 그야말로 말을 가로막는 시대입니다. 여기서 좀 용감한 사람들은 직설적으로 쓰면서 저항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다른 측면의 사람들은 시의 미학적 힘을 믿으며 자신만의 저항을 시도하겠지요. 요즘 같은 자본주의 세상에선, 시 쓰는 행위 자체가 저항이면서 변화의 바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생활인으로서 종종 세상에 침묵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저를 포함한 시인들이 좀 더 용감해졌으면 하는 거죠.”
 
  자식 셋을 둔 그는 아이들의 미래에 대한 걱정도 적잖다.
 
  “저까지는 희생하고 버틸 수 있는데, 문제는 뒤에 오는 아이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겁니다. 이 아이들이 직업을 어떻게 가지고 살아갈까 생각하면 암담해요. 비정규직을 양산하는 이 사회적 시스템 속에서 애들한테 할 수 있는 말은 ‘공무원 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입니다. 그래서 요즘 드는 것이 신이 꼭 있어야 된다는 생각입니다. 힘든 시대를 살아가고 있잖아요. 신이 없이 이 시대를 어떻게 살아가나 그런 생각이 들어요. 신이 절실하게 필요하게 되는 시대가 된 것 같아요. 그게 불교든 기독교든 신이 지켜주고 있고 옳고 그름을 말해주는 그런 신 말입니다.”
 
 
 
절망하는 者, 가장 희망적인 者

 
  최금진 시인은 다시 광주로 가는 버스를 타러 늦은 저녁 길을 나섰다. 그는 다섯 시간 족히 걸리는 버스 안에서 순간적으로 감정을 끌어올리며 메모에 시를 적을 것이고, 가족들 몰래 취미로 모으는 가짜 단검(短劍)을 생각할 것이다. 어차피 삶이 그런 거니까.
 
  필자는 그가 작년 여름에 출간한 《나무 위에 새긴 이름》(천년의 시작) 에세이집을 폈다. ‘안 팔릴 것이다’고 믿으며 그 용기로 펴냈다는 그 책의 한 구절에 밑줄을 그었다.
 
  ‘문학에 대해 미칠 듯이 희망을 꿈꾸어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절망할 틈이 없다. 마찬가지로 스스로를 재능 없는 자라고 피 터지게 머리를 박아본 적이 없다면 그는 가짜다. 그러므로 절망하는 자여, 그대는 가장 희망적인 사람이다.’⊙
 
  〈글 윤성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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