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털어놓고 하는 이야기 - 대한민국 법의학의 개척자 文國鎭 고려대의대 명예교수(上)

“손자 부검 말리는 할아버지 도끼에 맞아 죽을 뻔”

글 : 오동룡  월간조선 기자  gomsi@chosun.com

사진 : 서경리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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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9년 변사사건 해결로 朴正熙 대통령 만나… 국과수에 法齒醫學 도입 계기 마련
⊙ 국민들 ‘두벌 죽음’에 부검 터부시… 4·19 때 불의에 맞서는 시민 목격 후 법의학 계속하기로 결심
⊙ 서울의대 스승 張起呂 박사, “법의학 포기하겠다”는 문국진에 “한 우물 파라”고 충고

文國鎭
⊙ 89세. 서울대의대 졸업. 서울대대학원 의학박사, 미 컬럼비아퍼시픽대대학원 법학박사.
⊙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법의학과장, 고려대 법의학 교수, 미국 뉴욕대 법의학 객원교수,
    대한법의학회회장 역임.
⊙ 저서: 《최신법의학》 《지상아》 《법의학이 찾아내는 그림 속 사람의 권리》
    《美しき死體のサラン》 등 총 51권.
⊙ 상훈: 제1회 고려대 학술상, 대한민국 학술원상, 제9회 대한민국 과학문화상.
⊙ 現 대한법의학회 명예회장,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 고려대 명예교수, 일본 배상과학회 및
    한국배상의학회 고문, 국과수 자문위원.
  “경찰이 40일 만에 죽은 채로 발견된 유병언(兪炳彦)을 노숙자 변사사건으로 처리하면서 초동수사가 엉망이 됐습니다. 검시를 담당하는 검찰, 경찰, 의사, 판사는 초동수사 실패라고 하며 서로 몸사리기 바빠요. 언론은 애꿎은 국과수만 때리는데, 죽은 지 40일이나 지나 홀랑 썩은 것을 갖고 국과수가 무슨 재주로 사인(死因)을 규명합니까. 미국의 법의관(ME) 제도만 도입하면 간단히 해결될 문제인데, 답답한 노릇입니다.”
 
  지난 8월 6일 만난 문국진(文國鎭) 대한법의학회 명예회장은 유병언 회장 이야기를 꺼내자 갑자기 톤을 높였다. 올해로 아흔인 문 교수를 서울대의대 법의학교실 이윤성(李允聖) 교수는 이렇게 표현했다. “배구선수로 활약하던 건장한 체격, 권위와 단호함이 배어 있는 용모, 문학소년같이 희고 맑은 피부, 청중을 빠져들게 하는 유장한 평안도 사투리의 언변, 명쾌한 판단, 깊고 넓은 지식을 소유한 분”이라고. 기자도 동감이었다.
 
  문국진 교수는 대한민국 최초의 법의학자이자 지금의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 창설멤버다. 고려대의대에 대한민국 최초로 법의학교실을 설립했고, 대한법의학회 창설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그는 1955년부터 1990년 은퇴하기까지 35년간 수많은 억울한 죽음과 맞서왔고, 퇴임 이후에는 국과수 자문관으로 사회적 변사(變死)에 대해 법의학계 원로다운 평결을 내려왔다. 35년간 그의 손을 거쳐간 사체만 2000여 구가 넘는다. 대한의학회는 문 교수의 공로를 기려 지난 4월 그를 ‘대한의학회 명예의 전당’에 헌액했다.
 
 
  법의관 제도 도입 서둘러야
 
대한의학회는 지난 4월 8일 밀레니엄 힐튼 호텔에서 열린 2014년 대한의학회 정기총회에서 문국진 교수를 법의학 발전의 초석을 다진 공로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했다.
  —유병언 회장의 사인을 규명하지 못한 근본 이유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현재는 대부분 경찰이 변사체 외부 상태만 보고 범죄 의심이 없으면 사인이나 사망 종류를 알 수 없어도 ‘단순 변사’로 처리해요. 나중에 문제가 된 변사사건도 이렇게 처리하다 초동수사 잘못으로 이어진 것들입니다. 국내 검시(檢屍) 제도가 아직 후진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거든.”
 
  —그렇다면 검시의 목적은 무엇인가요.
 
  “변사체 검시는 국민의 죽음에 대한 국가적 감시입니다. 억울한 죽음이 없도록 하기 위한 엄중한 사법행위이기도 하지요. 정확하고 공정한 사인규명으로 국민권리를 보호하고,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데 검시의 목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국내 검시 내용을 보면 복잡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복잡하다니요?
 
  “검시집행 책임자는 검사가 책임을 집니다. 검사 수에 비해 변사체가 많아 집행을 경찰관에게 위임하죠. 실제로 검시집행 책임자는 경찰관인 셈이지요. 그런데 검시 업무 성격상 의사의 검안을 반드시 받아야 해요. 결국 검시 실무는 의사가 하고 있습니다.”
 
  —검사의 판단만으로 부검을 할 수 있습니까.
 
  “부검은 검사나 경찰관 또는 의사 마음대로 할 수 없어요. 반드시 법원의 영장을 받아야 합니다. 검시가 이처럼 지휘, 집행, 실무, 부검 결정 등 네 곳에 나눠져 있어요. 그렇다 보니 검시 원래 목적수행은 잊은 채 자기 책임 모면에만 집착하는 경향이 생깁니다.”
 
  —이런 모순을 해결하려면 ‘법의관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는 것인가요.
 
  “미국이나 유럽국가들은 지금 우리가 겪는 모순을 이미 겪었습니다. 그들은 일찍이 법의관 제도를 도입했어요. 검시의 모든 과정을 법의학 지식과 경험이 있는 법의관 한 사람에게 전담시키는 겁니다. 그들이 경찰과 함께 변사 현장에서 검시를 책임져요.”
 
  —우리는 왜 법의관 제도를 도입하지 않는 겁니까.
 
  “한국 법의학자들의 수준은 세계적인데, 관련 제도는 수준 미달입니다. 2005년 당시 유시민(柳時敏) 의원이 ‘검시제도 개선안’을 발의한 적이 있었으나, 17대 국회 내내 해당 기관들의 주도권 다툼으로 표류하다 회기를 넘기면서 자동 폐기됐습니다. 국회 율사(律士) 출신 의원들이 제도 도입에 마이동풍(馬耳東風)으로 대응했죠. 이제야 관심을 갖는다는데 지켜봐야죠”
 
 
  朴正熙 대통령 만나 국과수에 法齒學 법의관 요청
 
문국진 교수는 법의학을 알리기 위해 전문서적, 에세이, 시집 등 최근까지 51권의 저서를 냈다. 지난 2012년 8월 출간한 저서 《죽은자의 권리를 말하다》를 들고 있는 문 교수.
  1960년대 후반, 우리나라에는 증거에 의거한 ‘과학 수사’가 전무하던 시절이었다. 국과수는 그 형태를 갖추지 못했고, 법의관이라고는 문국진 박사 한 명뿐이었다. 1969년 어느 날, 한강 백사장에서 여자 변사체가 발견됐다. 시체를 검안해 보니 턱과 유두, 중요 부위에 치흔(齒痕·이 자국)이 있었다. 경찰은 변태적인 성범죄로 단정 짓고 수사를 시작했다.
 
  법의관 문국진의 눈에는 유두와 중요 부위에 있는 치흔은 문치(門齒·앞니) 자국밖에 없어 큰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턱에 난 치흔은 선명해서 증거로서 가치가 충분해 보였다. 치흔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는 것은 사망 후에 만들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누군가 여자를 살해한 뒤 성범죄자의 소행으로 위장했던 것이다.
 
  “경찰은 한강 백사장 부근에서 일하는 인부들 가운데 범인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조금만 수상해 보이면 잡아가서 족쳤어요. 경찰이 몽둥이로 때리면서 ‘빨리 불어, 이××!’라며 다그쳤지요. 그러나 시체에 난 치흔과 일치하는 사람은 찾지 못했지요. 한 수사관이 피해자 남편의 치흔과 비교해 보자고 했는데 말이야, 그게 딱 맞아떨어지는 거야. 치열궁(齒列弓·치열이 그리는 곡선)의 형태와 치아의 배열 상태는 지문처럼 누구도 똑같은 사람이 없어요. 치아의 모형과 교상(咬傷·물려서 남은 상처)으로 개인 식별을 한 건 처음이었어요.”
 
  문 박사는 일주일 동안 피해자에게 남은 치흔과 남편의 치아 모형을 이리 맞춰보고 저리 맞춰봤다. 모 치과대학의 K교수에게도 문의를 했다. 결국 증거 앞에서 남편은 자신이 범인임을 자백했다.
 
  문 교수는 “당시는 고문이 횡행하던 시절이었고, 허위 자백을 강요해 누명을 씌우는 일도 태반이었기 때문에 내가 치흔으로 남편이 범인임을 밝혀내지 않았다면 누가 범인이 되었겠느냐”고 반문했다. 그는 “증거는 지위 고하를 가리지 않고,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고 했다. 물론 공정하게 법의학을 집행한다는 전제하에서 하는 말이라고 했다.
 
  당시 ‘법의학 사건’이 신문에 대서특필되자,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우리나라 수사 역사상 ‘치흔’으로 범인을 잡은 그의 공을 높이 사 청와대로 불렀다. 박 대통령은 “승진(昇進)이든 상금(賞金)이든 무엇이든 들어주겠다”며 소원을 물었다.
 
  “소원이 뭐 따로 있었갔어? 승진이나 포상 같은 건 애초에 관심 밖이었지요. 그 사건 해결할 때 치과대학마다 찾아다니면서 감정을 요청하며 애를 먹어서 국과수에 법치의학자가 들어오는 게 소원이라 답했지.”
 
  박 대통령은 당시 국과수가 내무부 소속이었는데 해당 장관에게 “내무장관, 내일 당장 국과수에 법의학을 다루는 치과의사를 배정하시오”라고 지시했다. 문 교수의 한강 백사장 변사사건은 결과적으로 국과수에 ‘법치의학실(法齒醫學室)’을 설치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당시 들어온 우리나라 제1호 법치의학 담당자는 김종열(金鍾悅)씨로, 후에 제6대 국과수 소장과 연세대의대 법의학과장을 지냈다.
 
 
  일본 법의학의 代父, 후루하타 교수와의 인연
 
문국진 교수의 스승인 후루하타 다네모토(1891~1975) 동경대 교수. 미에현 출신으로 1949년 출근길 사망한 일본국유철도 초대 총재 시모야마 사다노리 사건 해결로 유명해졌다.
  문국진 교수는 1925년 3월 평양에서 중국어 통역관이었던 아버지 문기정(文崎正)과 어머니 홍숙정(洪淑正) 사이에서 독자(獨子)로 출생했다. 학교 성적이 우수했던 그는 명문 명륜소학교(明倫小學校)와 평양고보(平壤高普)를 거쳐 평양의과대학에 진학했다. 평양의과대학 본과 3학년 때 6·25전쟁이 발발하자, 문국진은 1951년 1월 홀어머니와 누이, 그리고 여동생과 함께 월남했다. 월남한 문국진은 대학로에 있던 서울의대 2학년에 편입해 서울생활을 시작했다.
 
  평범한 의대생이었던 문국진이 법의학자의 길에 들어선 것은 차라리 운명(運命)에 가까웠다. 그가 대학 3학년 때의 일이다. 종로구 원남동 근처를 걷다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에 잠시 몸을 피하려고 들어간 곳이 헌책방이었다.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며 이 책 저 책 뒤적거리다 그의 인생을 바꾸어놓은 한 권의 책을 그곳에서 발견한다. 후루하타 다네모토(古畑種基)라는 법의학자가 쓴 《법의학 이야기(法醫學の話)》라는, 당시로서는 낯선 책이었다.
 
  “지금도 하시가키(서문) 구절이 줄줄 생각나요. ‘사람에게는 생명도 중요하지만 권리도 그에 못지않게 소중하다.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의학이 임상의학이라면, 사람의 권리를 다루는 의학은 법의학이다. 고문수사는 절대 안 되고 반드시 과학적으로 증명해야 한다. 법의학은 인권을 소중히 여기는 문화가 발달된 민주국가에서만 발달한다.’” 그는 당시 감동이 떠오르는 듯 천장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그 구절을 읽는데, 그 말에 그만 홀딱 반해버렸어요. ‘인간의 권리를 다루는 의학’이 있다고 생각하니까 가슴이 막 뛰는 거요. 밤새 읽고 또 읽고 했어요. 그때까지 전공을 정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 책을 사서 다 읽고는 법의학을 하겠다고 결심했어요.”
 
  일본과 국교 수립 전이라 사실 일본으로 건너가 공부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불가능했다. 문국진은 책의 저자인 동경대 후루하타 교수에게 편지라도 띄워 궁금한 것을 물어보려고 몸이 달아 있었다.
 
  “하루는 친구의 형이 ‘홍콩에서 무역회사를 운영하는 사람과 점심을 먹으면서 들으니, 홍콩에선 일본과 편지 왕래는 물론이고 전화통화도 된다더라’고 해요. 내가 법의학을 공부하는데 애로사항이 많다고 말씀드렸더니, 친구 형이 ‘후루하타 교수에게 편지 왕래를 얼마든지 도와주겠다’고 해요. 편지를 써 보내니, 후루하타 교수는 ‘얼마든지 도와줄 테니 질문을 하라’고 했고, ‘몇 페이지 어느 대목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라고 하면 참고문헌을 사서 보내주셨어요. 답장을 받으려면 한 달씩 걸렸지만, 법의학 공부에 한줄기 서광(曙光)이 비쳤습니다.”
 
  후루하타 다네모토 교수는 1964년 편지에서 ‘곧 정년퇴임을 해 일본과학경찰연구소 소장으로 부임한다. 후임 우에노 쇼키치(上野正吉) 교수에게 부탁했다. 앞으로 우에노에게 연락하고, 내게 부탁할 일이 있다면 과학경찰연구소로 연락하라’고까지 안내했다.
 
  “정말 친절한 분이었어요. 편지로서 사제지간(師弟之間)이 된 케이스입니다. 작고하신 김상협(金相浹) 고려대 총장도 생전에 내게 일본 동경대 법학부 시절 후루하타 교수에게 법의학 강의를 들었다고 하시며 ‘당신이 어떻게 후루하타 교수를 아느냐’고 놀라신 적이 있어요.”
 
 
 
스승 장기려 박사, “법의학은 학문도 아니야”

 
사진 왼쪽부터 장기려 전 부산청십자병원장, 유영호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초대소장, 이제구 법의학회 초대회장.
  1954년 서울대의대 졸업반 시절, 문국진은 법의학 공부를 하기 위해 한국에서 법의학을 다루는 ‘교실’이 있는지 알아보기로 했다. 하지만 당시 우리나라는 법의학의 불모지(不毛地)였다. 배울 곳도, 가르치는 곳도 심지어 국과수도 없었을 때였다. 의과대학의 법의학 교육은 의대 전 과정에서 5시간 정도였다고 한다. 문 교수는 “물론 그것도 환자가 죽었을 경우에 필요한 검시 지식 정도였다”고 했다.
 
  “서울대학이 경성제대 시절에는 법의학교실이 있었어요. 돌에 새겨 건물에 붙박아 놓은 법의학교실 현판이 지금도 남아 있거든요. 독일처럼 대륙법계(大陸法系)를 따르는 일본은 메이지유신(明治維新) 때 메이지왕이 동경대 교수를 독일에 보내 법의학을 배우라고 파견했고, 귀국한 후 동경대를 중심으로 전국 58개 주요 대학에 법의학교실을 창설했다고 하더군요. 법의학교실에서 2~3년 경험이 있는 의사들을 감찰의무원(監察醫務員·미국의 법의관을 일본식으로 부른 것)으로 파견하는 등 대학과 정부관청이 교류를 하고 있어요.
 
  그래서 일본도 한국 강점기 때 경성제대에 법의학교실을 두었던 거지요. 그런데 광복 후 의학교육도 미국식으로 바뀌면서 법의학교실이 없어진 거지요. 당시 우리나라 시찰단이 미국에 가보니 의대에 법의학교실이 없으니까 귀국해서 의대의 법의학교실을 없앴던 거지요. 미국은 국가 단위에서 법의학을 관리하고 있다는 것을 모른 거예요. 미국은 법의학 시스템이 가장 잘 마련돼 있는 나라예요.”
 
  1955년 문국진은 서울대의대를 졸업하면서 평양의과대와 서울대의대 스승인 장기려(張起呂) 박사를 찾아가 상의를 했다. 고(故) 장기려 박사는 경성의학전문을 졸업하고 평양의과대 교수와 평양도립병원장을 지내다 1950년 월남해 서울대의대 교수를 역임했다. 피란지 부산 영도에서 복음병원의 전신인 천막병원을 설립하고 부산 청십자병원장으로 근무하는 등 ‘한국의 슈바이처’로 존경받는 의사였다.
 
  외과 주임교수였던 장기려 박사는 문국진에게 “임자는 튼튼하니까 우리 외과에 들어오면 수술도 오래할 수 있고 대성할 거야”라며 외과로 올 것을 권했다. 그러나 문국진이 “법의학을 꼭 해야겠다”고 하자, “그건 학문도 아니다”라며 크게 화를 냈다. 스승의 독려를 기대했던 문국진 박사는 실망했다.
 
  —그때 기분이 어땠습니까.
 
  “퍽 섭섭했어요. 장기려 선생님이 무의촌(無醫村) 진료를 다니실 때 열심히 모시고 다녔거든. 그런데 법의학을 너무 폄하하시니까 마음이 아주 안 좋았어요. ‘민주국가에서 사람의 목숨보다 인권을 존중하는 게 문화인이라는데, 그렇다면 선생님은 종교밖에 모르시고 문화인이 아니신가’라고 속으로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대로 나는 결심을 밀고 나갔죠.”
 
  —졸업하고 갈 곳이 없어 막막했겠네요.
 
  “정말 막막한 거예요. 한국에 법의학과나 법의학교실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런 일을 하는 곳도 배울 곳도 없으니까. 한때는 일본으로 밀항이라도 해야 하나, 극단적인 생각을 꽤 심각하게 하기도 했지요.”
 
 
  國科搜 창설 요원으로 가다
 
1968년 2월 제주 변사사건의 부검을 실시하던 중 심장을 검사하는 문국진 법의관.
  문국진은 고민 끝에 서울의대 병리학교실에 찾아갔다. 당시 주임 교수이자 의과대학장인 이제구(李濟九) 교수에게 도움을 청했다. 병리학이 법의학과 그나마 가장 가까운 분야였기 때문이다.
 
  “내가 ‘병리학을 하겠다’고 하자, ‘잘 왔네’하시면서 엄청나게 반가워하셨어요. 그런데 ‘선생님, 전 병리가 목적이 아니라 법의학이 목적입니다’라고 하자, 이 교수님 얼굴이 단박에 변해요. ‘글쎄, 우리 교실에 와서 도움이 되겠나, 좀 더 다시 생각해 보게’하며 돌려보내셨어요.”
 
  그런데 운명은 또 그를 찾았다. 사흘 만에 이제구 교수가 그를 다시 불렀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가 발족하는데 의학과 졸업생을 추천해 달라는 공문이 왔다는 것이다.
 
  “정말 운명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내가 졸업하던 해 국과수가 독립 기관으로 발족하면서 법의관(法醫官)을 뽑았던 거요. 가보니 청와대 뒤쪽에 있는 창고를 개조해 쓰고 있더라고. 국과수에서도 서울대의대 졸업생이 왔다고 무척 반겼지요. 그래서 본격적으로 법의학을 시작할 수 있었던 거요. 사람이 일이 되려면 그렇게 되나 봐요.”
 
  이승만(李承晩) 정부는 1955년 3월 25일 내무부 산하 기관으로 국과수를 설립했다. 국과수 기원은 1909년 4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법무부 행형과에 지문계(指紋係)를 설치한 것을 최초로 본다. 광복 이후인 1946년 4월 법무국 행형과 지문계와 경기도 경찰부 지문계를 통합해 경무부 수사국에 설치한 감식과(鑑識課)에서 지문 사무를 관장했다. 1955년 국과수가 설립되면서 지문 감식은 치안국 수사지도과 감식계로 넘어가고, 법의학과(法醫學課)와 이화학과(理化學課) 감식 업무는 국과수가 수행하도록 개편됐다.
 
  “세브란스의전 출신의 유영호 초대소장이 부임해 왔고, 감식과에서 최진(崔鎭) 박사가 와서 지문 감식을 담당했어요. 국과수 직원들은 아직 현역 경찰 신분이라 경찰복을 입고 있더군요. 서울의대를 졸업하고 곧장 1호 발령을 받아 온 나만 신분이 민간인이라 민간인 복장을 하고 있었어요.”
 
  법의관이 됐지만 할 일은 많지 않았다. 첫해에 한 부검은 고작 52건이었다. 일주일에 한 건 정도밖에 되지 않아 부검이 들어오기를 기다리는 형편이었다고 한다.
 
  —그래도 부검 인력은 부족한 것 아닙니까.
 
  “첫해에 52건을 해냈지만 이듬해부터 부검 의뢰가 부쩍 늘어나기 시작했어요. 의사라고 달랑 셋뿐인데, 게다가 유영호 소장은 소장 신분이라 부검에는 참여하지 않았고, 서울대의대 선배인 최진 선생과 단둘이서 해냈지요. 건수가 점점 늘면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감식도구나 부검도구가 제대로 갖춰져 있었습니까.
 
  “부검실은 물론이고 부검 장비도 변변치 않았어요. 부검 의뢰가 오면, 해부도구를 장만해서 창고에서 하거나, 장소가 여의치 않으면 현장으로 나갑니다. 현장에 나무로 된 사과상자를 늘여놓고, 그 위에 널빤지를 놓고 부검하곤 했죠. 그런데 현장의 물리적인 고통보다는 정신적인 고통이 가장 견디기 어려웠어요.”
 
 
 
부검의 장애물, 검사와 ‘두벌 죽음’

 
문국진 교수 자택에는 1990년 고려대의대 교수 퇴임을 기념해 제자들이 마련해 준 흉상이 있다. 문 교수가 흉상 앞에서 “학생시절에는 국가대표급 배구선수였다”고 말하고 있다.
  문 박사를 비롯해 법의학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예상치도 않은 두 가지 장애물이 있다. 과학수사라는 인식조차 없던 시절에 법의관이란 ‘명찰’을 달고 법의학이라는 불모의 땅을 개척해 나가기 위해 첫발을 내디딘 이들에게는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었다.
 
  첫째는 부검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부검을 ‘두벌 죽음’이라고 여겼는데, 그것은 큰 형벌과도 같은 것이었다. 피살자의 가족들은 어지간하면 부검을 하지 않으려 했고, 수사관들조차 부검까지 하면서 사건을 수사할 의지를 갖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사전을 찾아보면 ‘두벌 죽음’이란 ‘두 번 죽임을 당하거나 죽은 사람이 다시 해부나 화장, 극형 따위를 당하는 일’이라고 나와요. 왜 옛날부터 ‘신체발부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라는 말이 있잖소. 그런 인식이 주검에 손을 대는 것을 금기시하는 풍토를 만들었어요. 그러니 억울한 죽음이나 미제(未濟)의 사건들이 많을 수밖에요.”
 
  ‘두벌 죽음’이라는 인식으로 부검을 거부한 사건은 1991년 발생한 강경대 사건이다. 강경대 군 측도 두벌 죽음이라는 인식으로 부검을 거부한 사례에 속한다. 강창래 작가가 문국진 박사를 인터뷰한 책의 제목 《법의관이 도끼에 맞아 죽을 뻔했디》의 배경이 된 사건이기도 하다. 일명 ‘도끼 사건’이라 불리는 이 사건의 전모는 이렇다.
 
  경기도 남양주의 작은 마을에서 한 청년이 마을 뒷산에서 목을 매 자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마을청년 P군은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할머니 손에 컸으며, 그해 봄 고등학교를 마치고 농사일을 돌보고 있었다. 같은 마을에 P군과 연인 사이인 J양이 살고 있었다. 둘은 결혼 약속을 했으나, J양의 부모는 나은 혼처로 시집가기를 바랐다.
 
  급기야 둘의 밀회장소를 덮친 J양의 아버지는 P군을 자기 집으로 끌고 가 욕을 퍼붓고 때리기 시작했다. 동네사람들이 다 모여들었고, P군의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나타나 손자를 얼싸안고 항의했다. 이때 J양의 어머니가 욕설을 하며 “누가 부모 없이 자란 싸가지 없는 자식에게 딸을 주겠나”라는 말을 내뱉었다. 이 욕이야말로 P군의 가족에게는 모욕이었다. 참지 못한 P군은 자리를 박차고 나갔고, 얼마 후 뒷산에서 목을 맨 시체로 발견됐다.
 
  죽은 P군의 몸에는 많은 상처가 있었으며, 목을 맨 높이는 자신의 키보다 훨씬 낮은 나뭇가지였다. 이 때문에 J양의 아버지가 동네 불량배들을 동원해 살해하고, 이것을 숨기기 위해 자살로 꾸몄다는 소문이 돌았다. P군과의 교제를 반대했던 여자의 아버지가 범인으로 지목됐다.
 
  사인을 밝히려면 청년의 시체를 부검해야 했다. 하지만 문제는 P군의 할아버지가 부검을 완강히 반대한다는 것이었다. 할아버지는 전모가 어찌됐건 사랑하는 손자가 ‘두벌 죽음’을 당하는 것만은 막아야 한다며 노발대발했다. 할아버지는 “어느 놈이건 내 손자한테 칼을 대면 도끼로 까 없앨 것이니 알아서들 해!”라며 울부짖었다. 우여곡절 끝에 부검은 이뤄졌다.
 
  사과상자 네 개를 이어 만든 간이 해부대에 P군의 시체를 눕혀놓고 메스로 절개를 하려던 순간이었다. “안 된다”는 외침과 함께 도끼가 번쩍 날아들면서 사과 상자 한쪽이 동강나고 말았다. 문 박사가 고개를 들어보니 할아버지가 도끼를 손에 쥔 채 경찰, 청년들과 승강이를 벌이고 있었다. 하마터면 그는 할아버지가 휘두른 도끼에 맞을 뻔했던 것이다. 순간 식은땀이 좍 흘렀다고 한다.
 
 
  미국인들의 부검 인식 180도 달라
 
1977년 7월 17일 오탁근 검찰총장이 긴급조치위반자 17명에 청한 형집행정지를 발표하고 있다. 명치대(메이지대) 예과를 졸업한 오 총장은 검찰 내부에서 법의학에 조예가 있는 인물로 통했다.
  “내가 경험한 미국인들의 부검에 대한 인식은 우리와 너무나 달랐어요. 뉴욕대학에서 법의관으로 일할 때 있었던 일이에요. 로스앤젤레스에서 한 개업의가 자신의 아버지 부검을 의뢰해 왔어. 자신은 내과 개업의인데, 수명을 다하고 평화롭게 맞은 죽음이었지만 살아 계실 때 위암과 비슷한 증상을 보였다는 거야. 그러니 정말 위암이었는지 확인해야 자신과 자식들이 대비할 수 있다는 거지. 그런데 자기는 개업의라 바빠서 못 온다는 거요. 그러면서 자기 전화번호와 아버지 뉴욕 주소를 알려주더라고.
 
  속으로 ‘못된 놈’이라고 욕을 했지요(웃음). 아버지가 죽었다는데 와볼 생각은 않고 자기들을 위해 병력(病歷)만 확인하겠다는 거 아니오. 하지만 한편 죽음에 대한 생각이 이만큼이나 다르니 법의학과 의학이 발전하는 것 아닌가 싶더군.”
 
  문 박사가 말하는 두 번째 장애물은 검찰과 경찰이었다. 문 박사가 국과수에 있을 당시만 해도 법의관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매우 부족할 때였다. 경찰이나 검찰도 마찬가지였고, 심지어 수사관들도 법의관에게 정황을 설명해 주면서 증거를 찾아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답을 알아맞히나 보자는 식으로 테스트를 하려 들었다고 한다.
 
  “검사들도 그랬고, 부검을 해서 보고서를 보내면 읽어보지도 않고 무조건 검찰청 몇 호실로 오라고 부르는 거요. 가보면 한두 시간 기다리게 하는 것은 다반사고, 불러서 들어가면 새파란 검사가 보는 앞에서, 검사 서기가 나를 앉혀 놓고 ‘이건 왜 이렇소, 저건 맞는 거요, 정확한 거요’라고 질문을 해요. 말투도 ‘~하였는가’라고 해요. 내가 기가 막혀 쳐다보면 ‘빨리 대답하시오!’하며 호통을 쳐요. 피의자를 취조하는 작은 호떡의자(동그라미 의자)에 앉아 그런 질문에 대답하고 나오면 자괴심에 빠질 때가 많았어.
 
  검사들이 공소 유지에 도움이 되는 보고서가 나오면 ‘참, 수고하셨습니다’라고 하지만, 예상치 못한 결과가 나오면 범인 취조하듯 해요. 한번은 하도 못된 젊은 검사가 설치기에 ‘여보, 당신은 법과대학 나와서 검사가 됐고, 나는 의과대학 나와 의사가 됐어. 검사와 의사가 다를 게 뭐야. 당신들 도와주려고 하는 사람에게 감사하다는 말은 못하고 무슨 짓이오’라고 호통을 쳤어요. 그랬더니 이 친구가 ‘검사에게 모욕을 주었다’며 소리를 지릅디다. ‘아, 이거 안 되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게다가 40세가 넘는 경찰서 수사과장들이 머리를 조아리며 20대 중반 검사들에게 ‘영감’이라고 부르니 콧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높아져 있었어요. 법의학을 하겠다고 국과수에 왔던 후배들이 검찰청에 한번 불려갔다 와서는 진저리를 치고 내뺐습니다. 그런 꼬락서니를 보고 어떻게 살겠느냐고요.”
 
  문 박사는 검찰총장과 법무부장관을 지낸 오탁근(吳鐸根) 검사(2013년 작고)가 지금껏 법의학에 가장 관심을 기울였던 인물이라고 했다.
 
  “오탁근 검사는 내가 부검에 나설 때 현장에 함께 나가기도 했어요. 일본 명치대 제2종 예과와 법학부에서 공부하면서 법의학 강의를 들었다고 해요. 오 검사가 1976년 검찰총장이 되자, 나를 불러 나의 첫 법의학 개론서인 《최신법의학》 추천사를 써주면서 격려를 해주셨어요. 내게 ‘검사들을 모아놓을 테니, 점심시간을 이용해 법의학 교육을 시켜달라’고 요청할 정도였습니다. 두 달 동안 나를 취조했던 검사들을 상대로 신나게 법의학 강의를 했지요.
 
  1980년 법무부장관에 취임하자 내게 미국의 법의관 시스템을 만들자고 예상치도 못한 제안을 하셨죠. 오 장관도 현실적인 벽에 부딪혔는지 대안을 주더군요. 의사들에게 ‘검사보’ 직책을 줘 검시만을 담당하는 ‘의사검사’를 만들어 검찰청에 파견해 주면 어떻겠느냐는 것이었어요. 나도 적극 찬성했지요. 그런데 국회에 보낼 때마다, 율사 출신 의원들의 반대에 부딪혀 좌절되고 말았습니다. 지금 오탁근 장관이 살아계셨더라면, 당장 법의관 제도를 관철시키자고 나를 채근하셨을 겁니다.”
 
 
  법의관 3000원 월급은 쌀 한 가마니 값
 
서울 광화문에서 경무대로 올라가던 시위대가 경찰과 대치하고 있다. 1960년 4월 19일 하루 동안 전국적으로 186명의 사망자와 6천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법의학에 대한 낮은 인식 수준, 검사들의 횡포는 법의학에 일생을 바치기로 마음먹은 그에겐 참기 힘든 것이었다. 게다가 국과수 법의관의 월급은 3000원으로, 쌀 한 가마 값이었다. 당시 문 박사의 서울의대 동기생이 중앙청 맞은편 시립순화병원(현 서울특별시 서북병원)에 의사로 근무하며 월급 1만5000원을 받았던 시절이었다고 한다.
 
  실의에 빠진 문국진 박사는 부산으로 스승 장기려 박사를 찾아가 “선생님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더 이상 못 하겠으니 외과의사로 받아주십시오”라고 간청했다.
 
  “그분이 정말 대단하신 양반이오. ‘법의학은 학문도 아니야, 그런 것 하면 못 써’하시던 분이 ‘넌 내 얘기를 안 듣고 그 길로 갔지? 하지만 이제는 너를 받을 수 없다. 넌 5년이란 기간 동안 한 우물을 팠지 않느냐. 한 우물을 파면 반드시 네가 후회하지 않을 날이 올 것이야. 너같이 굳은 결심을 가진 사람은 그 의지를 반드시 살릴 수 있으니 돌아가라’며 매몰차게 돌려보내시더라고. 법의학은 학문도 아니라며 반대하셨던 분 맞나 싶을 정도였지. 아무튼 그때 장기려 박사님이 나를 받아주셨다면, 오늘날 법의학자 문국진은 없었겠지요.”
 
  그런데 문국진 박사를 잠재의식 속에 법의학에 붙들어 놓은 역사적 사건이 있었다. 바로 4·19혁명이었다. 경무대 근처 국과수에 근무하던 문국진 박사는 혁명 당일 의과대학생들이 경무대로 스크럼을 짜고 몰려가는 장면을 목격한다.
 
  “데모 소리가 요란해 밖을 보니 흰 가운을 입은 의대생들이 경무대 쪽으로 몰려가더라고요. ‘야, 이제는 의대생들까지 동원되는구나’라고 생각했어요. 순간 기관총 소리가 ‘다다다닥’하고 나더니 의대생들의 가운이 피로 물들면서 쓰러지더라고요.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시민들이 격분해서 총을 맞으면서 학생들과 합세해서 경무대로 밀고 들어가는 겁니다.
 
  나는 그것을 보고 ‘우리 민족은 불의의 죽음에 대해 자기 목숨을 초개(草芥)처럼 던지는 인권을 사랑하는 민족이구나’라고 생각했어요. 내가 이런 사람들을 놓아두고 절대로 법의학을 떠날 수는 없다고 깊이 다짐을 했어요. 내가 돈과 출세에 뜻이 있었다면 법의학을 선택하지도 않았지요.”
 
1978년 4월 고려대 법의학 실험실에서 교실원들에게 실험방법을 설명하고 있는 문국진 교수.
  그는 법의학이 아니었다면 엉뚱한 살인범을 낳았을 그때 그 사건 하나를 기자에게 소개했다.
 
  “시골에서 상경한 B는 창경원에 놀러 갔다가 처음 만난 여인과 여관에서 하룻밤을 묵었답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B는 하얀 거품을 물고 신음하다 죽었어요. 그의 시신을 부검했지만 정확한 사인이 나오지 않았어요. B의 신분증 주소로 연락을 해 그의 아내와 자식들이 상경했어요. 부인은 B가 건강했다고 했어요.
 
  부검을 해보았더니 일반적인 급사에서 볼 수 있는 장기의 울혈상, 심장혈액 유동성, 비점막 및 후두점막 수종, 폐기종 등이 나타났어요. 위에는 술 냄새가 나는 내용물이 100mL 남아 있었고요. 중독사 의심 소견이라 혈액, 위 내용물, 오줌을 검사했습니다.
 
  그러나 알코올 혈중농도가 0.2%라는 것뿐 독물은 전혀 검출되지 않았어요. 중독사도 아니었죠. 법의관 입장에서 부검을 하고서도 사인을 알 수 없을 때, 무척이나 당황스러워요. 이런 경우, 복상사(腹上死)가 아닌가 짐작을 하지요.
 
  그러다 우연히 연구실을 찾아온 부인으로부터 B가 꽃가루 알레르기가 심해 콧물이나 눈물, 재채기가 해가 갈수록 심해졌다는 말을 들었어요. 특히 메밀꽃이 심하게 필 무렵이면 아예 다른 곳에서 며칠간 지내다 온다고 해요. 그래서 집에서 쓰는 베개에는 메밀껍질을 넣지 못하고 쌀을 넣어 쓴다고 하더군요. 재부검 결과, 메밀껍질이 가득 든 여관 베개를 베고 자다 과민성 쇼크를 일으켜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어요.
 
  30대 여인은 ‘잠이 들려고 하는데 이상한 소리가 났다’고 하더군요. 과민성 쇼크가 시작된 것이죠. 범인으로 지목됐던 여자는 풀려났죠. 결국 B는 메밀꽃을 피해 서울까지 왔지만, 젊은 여인과의 속삭임에 취해 자기가 무엇을 피해 서울까지 왔는지 까맣게 잊어버리고 저세상으로 떠난 것이지요.”
 
 
  고려대 법의학교실을 만들다
 
남재 김상협(1920~1995) 전 고려대 총장. 동경대 재학시절 후루하타 교수의 강의를 들은 그는 고려대에 법의학교실을 설치하는 데 적극적이었다.
  문 박사는 1970년 국과수 법의학과장을 끝으로 고려대로 자리를 옮겼다. 1976년 법의학교실을 설립했다.
 
  “법의학에 대한 인식이 제고되지 않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겠다는 처음의 결론으로 돌아간 거죠. 내가 고려대에서 법의학교실을 만들기로 한 뒤에 서울대 의대학장을 만난 적이 있어요. 서울대의대 출신이 모교에 법의학교실을 만들지 못하고 고려대에 만든다는 게 마음에 걸렸거든. 그래서 서울의대 학장을 찾아가 ‘선생님, 제가 지금 고려대의대에서 법의학교실을 만드는데, 혹시 서울대에서 만든다면 서울대로 오겠습니다’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그분이 ‘그게 뭐 하는 거야’라고 하는 거야. 그래서 그냥 돌아왔지요. 법의학이 뭐 하는 건지 물어볼 정도면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지요.
 
  당시 고려대 총장은 김상협 선생이었는데, 그분은 동경대 법학부에 다닐 때 법의학에 대한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고 그러셨어요. 그래서 한국에도 법의학교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던 분이죠. 김 총장은 ‘우리 민족의 대학에서 당연히 법의학교실을 만들어야 한다’고 내게 법의학교실을 꼭 만들어달라고 간청하셨어요.”
 
  고려대의대에 법의학교실을 만드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대학원생을 받으려면 우선 법의학회를 만들어야 했다. 법의학회를 만들려면 주변학회의 동의가 필요했다는 것.
 
  “주변학회는 병리학회인데, 사실 병리학회도 회원이 50여 명에 불과해 법의학회를 하나 더 만들어 회원들이 빠져나가면 병리학회는 고사(枯死)하고 만다는 분위기였어요. 또 임상병리도 기초병리에서 분리하려는 움직임이 있어서 시기도 좋지 않았어요. 나로서는 법의학회를 만들어야 법의학교실을 열 수가 있으니까 고민스럽지 않을 수가 없었던 거지요.”
 
문국진 교수가 직접 도안한 고려대학교 법의학교실의 창설기념 로고.
  문국진 교수는 고민 끝에 묘안을 짜냈다. 서울대의대에서 오랫동안 강의한 이제구(1911~1986) 교수를 찾아갔다. 이제구 교수는 정년퇴임 후 경희대 초빙교수로 있을 때였다.
 
  “이제구 교수님은 1960년부터 10년 동안 병리학회장을 지낸 분이거든. 이분을 법의학회 초대회장으로 모실 수 있다면, 병리학회에서 동의서를 내주지 않을 수가 없다고 생각한 거지. 교수님께 ‘나를 법의학으로 보내신 분이니 책임을 지시라’고 협박(?)을 했지요. 결국 우리는 이제구 교수님을 초대회장으로 모시고 1976년 법의학회를 창설했어요. 그다음 단계로 대학원생을 모집하려면 40시간이란 강의시간을 법의학과에 만들어야 하는 일이 난제였어요. 이미 개설돼 있는 학과를 찾아다니면서 동문 교수들에게 양보를 해달라고 간청해서 간신히 1976년 9월 1일에 국내 최초로 법의학교실을 탄생시킬 수 있었습니다.”
 
  문 교수는 법의학교실 슬로건을 “사람은 꽃이다. 부드럽게 대하라(People are flowers, be gentle)”라고 정했다. “그거, 내가 만든 말이오. 법의학교실이라고 해서 죽음, 인권 같은 것만 내세우면 재미가 없디 않아요? 결국 법의학도 인간 중심의 학문이요. 그러니 그런 이야기가 훨씬 낫디요. 그러잖아도 그때 그 로고를 박은 접시를 나눠줬는데, 인기가 아주 좋았디요.” 그가 진한 평안도 사투리로 말했다.
 
  이렇게 문국진 교수가 초석을 놓은 법의학교실이 현재는 전국 의대 41곳 중 12곳에 있다. 법의학자가 되는 길은 좁다. 의대(6년)를 졸업하고 병리학 전문의(5년)를 따고 법의학교실에서 경험을 쌓아야 한다. 현재 법의학을 전공하는 사람의 숫자는 대략 70~80명, 고려대 법의학교실 창설연도를 기준으로 보면, 지금까지 오는 데 35년이 걸린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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