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덕궁을 정원으로 삼고 있는 주택
⊙ 궁궐의 사유화 과정 추적
⊙ 문화재청, 궁궐 토지 매매 인정
⊙ 건물소유자, “정당한 보상 요구”
⊙ 궁궐의 사유화 과정 추적
⊙ 문화재청, 궁궐 토지 매매 인정
⊙ 건물소유자, “정당한 보상 요구”
“썩은 시절이었어요.”
7월 초 서울시 광화문 인근 식당에서 만난 전(前) 문화재청 간부는 “과거 문화재관리국(現 문화재청)은 차마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로 부패가 심했다”며 ‘암울했던 시대’를 허심탄회(虛心坦懷)하게 고백했다. 구체적인 사례까지 이야기했다. 그의 말이다.
“1960~70년대 국장이 토지 관리 직원에게 ‘관인(官印) 가져와’라고 지시를 하곤 했어요. 담당 직원이 국장 방에 들어가면 신원을 알 수 없는 사람이 앉아 있곤 했죠. 둘 사이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도 몰라요. 그냥 계약서를 가짜로 만들어서 관인만 찍어버리면 나라 땅이 넘어가던 시절이었어요. 지금처럼 부동산이 전산화되어 있지도 않아서, 어떤 땅이 누구에게 넘어갔는지 알기도 어려워요. 문화재 관리국 땅이 평당 1~2원에 팔리던 시절이었어요.”
전직 문화재청 간부는 정치권의 부당한 압력에 대해서도 토로했다. 과거를 회상하며 그는 “특히 정치인들의 민원이 심했다”며 “주요 문화재가 들어서 있는 나라 땅에 무허가 건물을 지어 놓고 지상권 등 권리를 주장하며 무허가 건물을 ‘양성화(陽性化)’시켜 달라고 압력을 넣곤 했다”고 털어놨다. 그는 “공직기간 내내, 주요 문화재의 담장을 무너뜨리고 은근슬쩍 자기 땅으로 만드는 것을 수도 없이 보아왔다”며 한탄했다.
창덕궁을 정원으로 삼고 있는 주택
전직 간부는 “나름 최선을 다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며 “창덕궁을 정원으로 삼고 있는 개인 집도 있다”고 말했다.
창덕궁은 1405년 태종 때 건립된 조선왕조의 왕궁이다. 처음에는 법궁(法宮)인 경복궁에 이어 이궁(離宮)으로 창건하였지만, 임금들이 주로 창덕궁에 머물면서 조선시대 실질적인 법궁의 역할을 하였다. 이런 역사적 이유로, 창덕궁은 조선왕조 건물 가운데 가장 역사성을 인정받고 있으며, 1997년 12월 6일 유네스코(UNESCO)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그 대표성을 인정받았다. 그런 곳에 개인 주택이 존재한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창덕궁을 정원으로 삼고 있다”는 주택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7월 초 서울시 종로구 창덕궁 정문인 돈화문에서 좌측 창덕궁길을 따라 몇 걸음 걸으니 두 눈을 의심하게 만드는 개인 집이 발견됐다. 창덕궁 돌담을 개인 담장처럼 사용하며, 창덕궁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주택이었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와룡동 3(창덕궁길 30)’에 위치한 2층 건물은 문화재청 직원에게도 화젯거리였던 것으로 보인다. 전직 문화재청 간부는 해당 주택에 대해 “문화재관리국에서 근무하다 퇴직한 간부의 증언에 따르면, 해당 건물은 창덕궁 관리소장의 관사였는데, 그 후 문화공보부 시절 본부 국장의 개인 주택이 되어 버렸다”고 말했다.
이에 대한 문제 제기는 이미 오래전부터 계속되었다. 문화재 관리·보존의 문제점을 고발한 《그들이 말하지 않는 우리 궁궐의 비밀》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돌담 훼손의 모든 사례를 파노라마처럼 보여주고 있는 곳, 그래서 우리나라 궁궐 중 유일하게 돌담길을 따라 걷는 일이 불가능한 곳, 그곳이 바로 창덕궁이다. 대표적인 예로 창덕궁 궁궐 담 안에 있는 2층 개인 주택이다. 궁궐을 정원 삼고 궁궐 돌담을 담벼락 삼은 이 개인 주택은 1960년대 창덕궁 관리소장의 관사로 사용되다가 이후 문화공보부 간부가 사유지로 사들여 개인 주택이 된 건물이다. 현재 소유자는 1980년대 초에 이 집을 매입해 거주하고 있으며, 창덕궁 돌담의 일부는 아예 개인 주택의 철문으로 개조된 상황이다. 창덕궁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것이 1997년인데, 그 후에도 어떻게 이런 상황이 버젓이 방치돼 온 것일까. (중략) 1960년대가 아무리 어수룩한 시대라 하더라도 창덕궁 관리소장 관사를 문화공보부 간부가 매입하여 사유지화하는 황당무계한 일이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 어느 바보가 창덕궁 안에 있는 집을 살 것이며, 돈을 주고 궁궐 그것도 담장 안의 관리소장 관사 건물을 매입해서 자기 소유로 등기했다는 것이 법적으로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광복 이후 등기 서류 입수
그렇다면 왜 문화재청은 수십 년이 지나도록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기자는 해당 부동산의 입수 가능한 모든 등기부등본을 입수, 부동산 전문가의 자문을 바탕으로 의문을 풀어나갔다.
우선 해당 벽돌 시멘트 건물의 대지(垈地)는 269.1m2(약 81평)이다. 1층 33평, 2층 17평으로 연면적(延面積)이 약 50평에 이르렀다. 현재 소유주는 1935년생 김○○씨이다. 김씨는 1981년 8월 해당 부동산을 매입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해당 건물이 김모씨에게 넘어오는 과정은 매우 흥미롭다.
우선 1957년 7월 건물은 이○○씨 소유로 ‘소유권 보존 등기’되었다. 소유권 보존 등기는 주택의 출생신고와 비슷한 역할을 한다. 소유권 보존 등기는 출생신고처럼 건물을 짓고 무너져 없어질 때까지 단 한 번 하게 된다. 이모씨는 1957년 7월부터 ‘벽돌 기와지붕 2층 주택 건평 33평 외 2층 17평’을 소유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의문이 드는 것은 어떤 근거로, 20년 넘게 이모씨가 해당 건물에 거주할 수 있었느냐는 사실이다. 이모씨가 해당 주택에 거주하게 된 배경에 대한 설명을 부동산 증명서에서 찾을 수는 없다.
특이한 것은 1958년 6월 부속 건물이 추가로 접수(소유권 보존 등기)되었다는 것이다. 부속 건물은 1958년 6월 건물을 짓자마자 등기를 신청했다. 부속 건물은 바로 화장실이다. 목조기와 건물 건평 2.6평 변소(便所)가 소유권 보존 등기가 됐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변소의 주인(소유자)이 ‘國’ 즉 대한민국이라는 점이다.
화장실과 집의 주인이 다르다?
집은 개인 것인데, 화장실은 국가 소유인 이상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집은 1957년에 개인집으로 신고를 했는데, 화장실은 바로 1년 뒤에 나라 것이라고 신고를 한 것이다.
알 수 없는 이유로 건물에 살기 시작한 이씨는 1974년 1월 부동산 소유권을 확보했다며 등기를 신청했다. 의문이 드는 것은 매매계약일은 1964년 1월이라는 것이다. 10년 동안 무슨 이유에서인지 등기를 하지 않고 기다린 것이다.
왜 10년이 지난 후에 등기를 신청했을까. 의문은 곧 풀렸다. 1981년 이씨는 자신의 땅을 현재의 주인 김씨에게 매매예약 형식으로 팔아 버린다. 즉 자기 땅을 팔기 위해 등기를 한 것이다.
다만 이미 나라 건물로 등기가 되어 있던 화장실은 자기 것으로 하지 못했다.
궁궐 땅의 원래 주인은 당연히 국가이다. 국가 소유였던 해당 부동산을 이씨는 1964년 1월 돈 주고 산 것이다. 이씨는 어떻게 궁궐 땅을 살 수 있었을까. 40년이 지난 지금 진실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당시 국가와 이씨 사이의 매매계약서를 확인하는 것이 유일하다.
정상적인 국가 기관이라면, 자신이 관리 책임을 맡은 국가 부동산의 매매 관련 서류를 보관해야 할 의무가 있다. 기자는 문화재청에 ‘서울시 종로구 와룡동 3’ 땅 매매계약서를 요구했다. 이에 대한 문화재청의 초기 답변은 이러했다.
“서울시 종로구 와룡동 3(창덕궁길 30) 소재 민가에 대한 국유재산 매매계약과 관련하여 현재 우리 청이 소장하고 있는 자료는 국유재산대장과 재산처분대장이 있습니다. 위 건과 관련해, 국유재산 매매의 근거 및 구체적인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 당시 체결한 매매계약 서류를 확인한 결과, 위 건에 대한 매매계약 서류는 현재까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50여 년 전의 매매계약 건으로 관련 서류를 찾는 데 어려움이 있습니다.) 참고로, 재산처분대장을 확인한 결과 1964년 1월 14일 자로 위 건에 대한 매매계약을 체결한 사실이 확인되고 있습니다.”
문화재청, 궁궐 토지 매매 인정
그러던 중 문화재청은 7월 15일 취재를 모두 마치고 인쇄에 들어가기 직전, “문제의 계약서를 찾았다”며 문서 사본을 기자에게 송부했다. 계약서에 따르면, 1964년 1월 14일 대한민국 정부는 이모씨에게 해당 부동산을 매각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국유재산 매매계약서(一時拂)
계약의 표시 서울특별시 종로구 와룡동 3, 3-1 대지 90평
위 재산의 매매에 관하여 문교부장관을 “갑”이라 칭하고 서울특별시 종로구 와룡동 3번지 거주 이○○씨를 “을”이라 칭하여 아래의 계약조건과 같이 매매 계약을 체결한다.
제1조 갑은 위 표시 재산을 다음과 같이 감정가격에서 3할을 공제하여 일금 630,000원정으로 을에게 매각한다.(감정액 900,000원 3할액 270,000원)
(중략)
서기 1964년 1월 14일
매도자(갑) 대한민국정부 문교부장관 고광만
매수인(을)
주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와룡동 3번지 이○○
부서(副署) 문화재관리국 관리과장
그렇다면 이런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부동산 전문가 A씨에게 자문을 요청했다. A씨는 부동산학과에서 석사 학위를 마치고, 부동산 관련 책을 매년 한 권씩 발행하고 있다. 또 십여 년 넘게 다양한 형태의 부동산 실무를 섭렵했다. 그의 설명이다.
“상식적으로 국가 땅, 특히 궁궐터를 특정 개인에게 판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죠. 보통의 경우 ‘원인무효’로 처음부터 말이 안 되는 겁니다. 당시 얼마나 어이없이 국가 재산이 관리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부동산 소유자 이모씨의 원래 주소가 ‘와룡동 3번지’라는 겁니다. 관사로 이용하다가 자기 집으로 했다는 소문으로 볼 때 오랜 기간 해당 주택에 살다가 지상권 등을 명분으로 자기 주택으로 만든 것으로 보입니다. 한국전쟁 혼란기 얼마나 관리가 소홀했는가를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궁궐을 1964년 당시 가격 63만원에 팔아버린 문화재청은 40여 년이 지난 후 해당 부동산 매입을 시도한다. 유네스코 문화재 등록 등으로 창덕궁의 문화재적 가치가 올라가는 상황에서, 해당 주택을 매입하라는 요구가 계속되었다. 현재 해당 부동산의 소유자는 “이명박 정부 초기에 문화재청에서 17억원에 부동산 매입을 요청했으나, 가격이 맞지 않아 거절했다”고 답했다. 또 “국가로부터 해당 부동산을 매입한 이모씨는 이승만 정부 당시 공보 담당(국장급)으로 이 대통령으로부터 해당 부동산을 불하받았다”고 주장했다.
아무리 화폐 가치가 변했다지만 40년 사이에 63만원에 팔았던 부동산을 17억원에도 되사지 못하는 것이 현재의 안타까운 현실이다.
문화재청은 매각 원인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당시 관련 법규에 따라 처리된 것으로 보인다”고 해명했다.
“꾼의 수법이 보인다”
해당 부동산이 ‘소유주’에게 넘어가는 과정을 지켜보면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만드는 부분이 많다. 우선 1974년 1월 ‘소유주’ 이씨는 땅이 자기 것이라고 신고를 했다. 문제는 1964년 1월부터 자기 것이라고 신고를 했다는 점이다. 계약서에 따르면 소유권이 넘어간 것은 1964년이다. 부동산의 권리는 매매계약을 통해 이뤄진다. 일단 계약이 이뤄지면 소유권을 얻게 된다. 부동산 매매계약을 맺은 후 수년이 지나 등기를 해도, 권리관계에는 영향이 없다. 아마도, 등기부에 소유권 이전 날짜가 1964년 1월로 기록되어 있는 것은 계약서상 소유권 변동일이 1964년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왜, ‘소유주’ 이씨는 10년이 지난 이후에 등기를 했을까. 부동산 전문가 A씨는 이렇게 말했다.
“꾼의 냄새가 나는 부분이에요. 뭔가 투명하지 않은 방법으로 부동산을 손에 넣으면 곧바로 등기를 하지 못하죠. 일단 주위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질 때까지 기다리는 겁니다. 10년 정도 지나면, 담당 공무원도 바뀌고 해서 일이 어떻게 처리되었는지 알 길이 전혀 없어요. 만일 정말 당당하게 토지를 취득했다면, 지키기 위해서라도 계약을 하자마자 등기를 하는 것이 정상이죠. 뭔가 의심스러운 계약을 맺은 이후, 시간을 두고 기다린 것입니다.”
궁궐 내 개인 주택은 1981년 소유권이 이씨에게서 김모씨로 넘어가면서 더욱 꼬이게 되었다. 여기서 다시 의혹이 생긴다. 1981년 8월 이씨는 김씨에게 ‘매매예약’으로 땅을 넘긴다. 이 부분은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나. 다시 전문가의 자문을 바탕으로 상황을 분석했다.
“이 역시 거래 관행에서 많이 쓰이는 것이죠. ‘매매예약’이란 쉽게 설명해서 자신의 땅을 담보로 돈을 먼저 빌리고 정해진 기일 내에 돈을 갚으면 땅을 돌려주는 것이죠. 쉽게 이야기해서, 돈을 빌리거나 이미 빌린 돈을 갚지 못할 때 내 부동산을 우선 채권자 이름으로 하고 나중에 갚겠다고 약속하는 것이죠. 만일 갚지 못하면 자동으로 부동산은 채권자 소유가 됩니다. 현재 궁궐 내 부동산은 김씨로 되어 있는데, 어찌 보면 김씨도 피해자일지 몰라요. 누가 이런 궁궐 내 부동산을 사려고 하겠어요.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모르는 땅이고, 소유권 제한이 심하게 걸려 있는 토지이기 때문에, 웬만하면 사지 않죠. 이씨가 어떤 이에게 돈을 빌려주고 받지 못했거나 어떤 경제적 이유로 코가 꿰 어쩔 수 없이 부동산을 넘겨받았다고 볼 수도 있어요. 김씨로 소유권이 완전히 넘어갔으니, 김씨도 아마 이씨와 돈거래를 했다가 돌려받지 못한 것 아닌가 싶어요.”
문화재청, “매입 순탄치 않다”
어찌되었건 결과적으로 1981년 8월 궁궐 내 개인 주택은 김씨로 변경되었다. 바로 이 부분에서 문화재청은 법률적으로 고민해야 하는 일을 하지 않았다. 만일 김씨가 해당 부동산이 의심스런 사유로 넘어간 사실을 모르고(선의) 부동산을 넘겨받았다면 1991년까지(10년), 알고(악의) 넘겨받았다면 2001년까지 문화재청은 김씨에게 “해당 부동산은 국가 것이므로 국가에 반환해야 한다”고 알려야 했다. 이럴 경우 민법 245조에 따라 취득시효가 완성되지 않아 문화재청은 해당 부동산을 다시 찾을 수 있었다. 과연 문화재청은 이런 업무를 충실히 수행했을까. 기자는 문화재청이 취득시효 완성을 막기 위해 어떠한 법률적 노력을 기울였는지 문의했다. 이에 대한 문화재청의 답변은 이러하다.
“그 당시 매매계약의 법률적 결함 여부를 확인할 수는 없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따라서 취득시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해당 부지 점유의 위법성을 알려야 할 의무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별도의 입장을 표명하기 곤란한 점 양해 바랍니다.”
문화재청이 무엇을 했는지 당당히 밝히지 못하는 가운데, 2001년이 지나 이제 해당 부동산은 완전하게 김씨에게 넘어갔다. 대한민국은 소유권을 절대적으로 보장한다. 따라서 창덕궁이 해당 부동산을 가져올 방법은 오직 하나, 김씨로부터 다시 사들이는 것이 유일하다.
시민단체 혹은 언론에서 “왜 빨리 문제를 해결하지 않느냐”고 항의하면, 문화재청은 “매입이 순탄치 않다”고 답변한다. 나름 매입을 시도하는데 어렵다는 주장이다.
아마도 해당 주택 소유자 역시 여러 행정 규제로 궁궐에 붙어서 생활하는 것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특히 어떤 건축행위도 할 수 없어 60년 가까이 지난 집을 수리하지도 못한 채 살고 있다. 그런데도 창덕궁에 되팔지 않고 있다. 이유는 무엇일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부동산 규제 제도를 살펴봐야 한다.
해당 부동산은 역사문화미관지구, 문화재보호구역, 자연녹지지역 등 엄격한 행정규제로 묶인 땅이다. 일체의 건축행위가 쉽지 않다. 부동산 전문가의 자문을 통해 알아본 바에 따르면, 이런 이유에서 공시지가 등을 통해 아무리 넉넉하게 평가를 해도 3억4000만원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건물 소유자 측, “정당한 보상 필요”
과연 실제로 그럴까. 기자는 7월 중순 해당 건물을 방문해, ‘소유자’ 김씨의 주장을 들었다. 도예가 김씨는 자신의 작품 전시·판매 공간으로 해당 공간을 활용하고 있었다. 전시관을 관리하는 직원은 “주택의 소유자는 K대에서 오랜 기간 미술을 가르쳤다”며 “한국을 대표하는 도예가로 국빈(國賓)들이 이곳을 방문해 물건을 구입한다”고 설명했다. ‘창덕궁을 정원으로 삼고 있는 건물’이라는 비판에 대해서는 “‘알박기’라고 말하는 것을 알고 있지만, 소유권은 보호되어야 하는 것이다”고 주장했다. 기자는 도예가 김씨를 전화로 인터뷰했다.
—문화재청에서 건물을 사겠다는 요청을 받은 적이 있나요.
“이명박 정부 초기 그러니까 6년쯤 전에, 17억원에 문화재청에서 매입하겠다는 제의가 왔어요.”
—제의를 거절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시세는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비슷한 규모의 주변 땅은 30억 정도 합니다. 문화재청이 적당한 가격을 제시하면, 팔 생각입니다. 시세의 90%는 되어야 한다고 봐요.”
—원래 주인인 이씨는 어떻게 궁궐 땅을 가질 수 있었나요.
“그는 원래 이승만 대통령의 공보담당이었어요. 국장급이었죠. 이 대통령으로부터 불하(拂下)받은 것으로 알고 있어요.”
문화재청은 공시지가를 뛰어넘는 액수인 17억원 매입을 추진한 이유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현실적인 가격도 무시할 수 없기에 감정평가 가격을 이용해 구입을 추진했다”며 “강제수용 등도 가능하지만 최근 분위기상 어렵다”고 답변했다.
문화재청이 “매입이 순탄치 않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이러한 배경에 근거한다. 해당 지역은 서울 도심 핵심부에 위치한 까닭에 근처 주택의 가격은 매우 높게 형성되어 있다. 양측이 생각하는 가격이 차이가 클 수밖에 없기에, 향후 문화재청이 해당 문제의 개인 주택을 다시 사들이는 것은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한편 기자는 문화재청에 취재 내용을 자세히 설명하고, 구체적인 해결책을 문의했다. 문화재청은 해결 방안을 묻는 질문에 “향후 문제가 발생한다면 관계 전문가 등의 법률 자문 등을 통해 대응방안 마련에 대해 검토하겠다”고 답변했다.⊙
7월 초 서울시 광화문 인근 식당에서 만난 전(前) 문화재청 간부는 “과거 문화재관리국(現 문화재청)은 차마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로 부패가 심했다”며 ‘암울했던 시대’를 허심탄회(虛心坦懷)하게 고백했다. 구체적인 사례까지 이야기했다. 그의 말이다.
“1960~70년대 국장이 토지 관리 직원에게 ‘관인(官印) 가져와’라고 지시를 하곤 했어요. 담당 직원이 국장 방에 들어가면 신원을 알 수 없는 사람이 앉아 있곤 했죠. 둘 사이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도 몰라요. 그냥 계약서를 가짜로 만들어서 관인만 찍어버리면 나라 땅이 넘어가던 시절이었어요. 지금처럼 부동산이 전산화되어 있지도 않아서, 어떤 땅이 누구에게 넘어갔는지 알기도 어려워요. 문화재 관리국 땅이 평당 1~2원에 팔리던 시절이었어요.”
전직 문화재청 간부는 정치권의 부당한 압력에 대해서도 토로했다. 과거를 회상하며 그는 “특히 정치인들의 민원이 심했다”며 “주요 문화재가 들어서 있는 나라 땅에 무허가 건물을 지어 놓고 지상권 등 권리를 주장하며 무허가 건물을 ‘양성화(陽性化)’시켜 달라고 압력을 넣곤 했다”고 털어놨다. 그는 “공직기간 내내, 주요 문화재의 담장을 무너뜨리고 은근슬쩍 자기 땅으로 만드는 것을 수도 없이 보아왔다”며 한탄했다.
창덕궁을 정원으로 삼고 있는 주택
전직 간부는 “나름 최선을 다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며 “창덕궁을 정원으로 삼고 있는 개인 집도 있다”고 말했다.
창덕궁은 1405년 태종 때 건립된 조선왕조의 왕궁이다. 처음에는 법궁(法宮)인 경복궁에 이어 이궁(離宮)으로 창건하였지만, 임금들이 주로 창덕궁에 머물면서 조선시대 실질적인 법궁의 역할을 하였다. 이런 역사적 이유로, 창덕궁은 조선왕조 건물 가운데 가장 역사성을 인정받고 있으며, 1997년 12월 6일 유네스코(UNESCO)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그 대표성을 인정받았다. 그런 곳에 개인 주택이 존재한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창덕궁을 정원으로 삼고 있다”는 주택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7월 초 서울시 종로구 창덕궁 정문인 돈화문에서 좌측 창덕궁길을 따라 몇 걸음 걸으니 두 눈을 의심하게 만드는 개인 집이 발견됐다. 창덕궁 돌담을 개인 담장처럼 사용하며, 창덕궁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주택이었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와룡동 3(창덕궁길 30)’에 위치한 2층 건물은 문화재청 직원에게도 화젯거리였던 것으로 보인다. 전직 문화재청 간부는 해당 주택에 대해 “문화재관리국에서 근무하다 퇴직한 간부의 증언에 따르면, 해당 건물은 창덕궁 관리소장의 관사였는데, 그 후 문화공보부 시절 본부 국장의 개인 주택이 되어 버렸다”고 말했다.
이에 대한 문제 제기는 이미 오래전부터 계속되었다. 문화재 관리·보존의 문제점을 고발한 《그들이 말하지 않는 우리 궁궐의 비밀》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돌담 훼손의 모든 사례를 파노라마처럼 보여주고 있는 곳, 그래서 우리나라 궁궐 중 유일하게 돌담길을 따라 걷는 일이 불가능한 곳, 그곳이 바로 창덕궁이다. 대표적인 예로 창덕궁 궁궐 담 안에 있는 2층 개인 주택이다. 궁궐을 정원 삼고 궁궐 돌담을 담벼락 삼은 이 개인 주택은 1960년대 창덕궁 관리소장의 관사로 사용되다가 이후 문화공보부 간부가 사유지로 사들여 개인 주택이 된 건물이다. 현재 소유자는 1980년대 초에 이 집을 매입해 거주하고 있으며, 창덕궁 돌담의 일부는 아예 개인 주택의 철문으로 개조된 상황이다. 창덕궁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것이 1997년인데, 그 후에도 어떻게 이런 상황이 버젓이 방치돼 온 것일까. (중략) 1960년대가 아무리 어수룩한 시대라 하더라도 창덕궁 관리소장 관사를 문화공보부 간부가 매입하여 사유지화하는 황당무계한 일이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 어느 바보가 창덕궁 안에 있는 집을 살 것이며, 돈을 주고 궁궐 그것도 담장 안의 관리소장 관사 건물을 매입해서 자기 소유로 등기했다는 것이 법적으로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광복 이후 등기 서류 입수
그렇다면 왜 문화재청은 수십 년이 지나도록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기자는 해당 부동산의 입수 가능한 모든 등기부등본을 입수, 부동산 전문가의 자문을 바탕으로 의문을 풀어나갔다.
우선 해당 벽돌 시멘트 건물의 대지(垈地)는 269.1m2(약 81평)이다. 1층 33평, 2층 17평으로 연면적(延面積)이 약 50평에 이르렀다. 현재 소유주는 1935년생 김○○씨이다. 김씨는 1981년 8월 해당 부동산을 매입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해당 건물이 김모씨에게 넘어오는 과정은 매우 흥미롭다.
우선 1957년 7월 건물은 이○○씨 소유로 ‘소유권 보존 등기’되었다. 소유권 보존 등기는 주택의 출생신고와 비슷한 역할을 한다. 소유권 보존 등기는 출생신고처럼 건물을 짓고 무너져 없어질 때까지 단 한 번 하게 된다. 이모씨는 1957년 7월부터 ‘벽돌 기와지붕 2층 주택 건평 33평 외 2층 17평’을 소유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의문이 드는 것은 어떤 근거로, 20년 넘게 이모씨가 해당 건물에 거주할 수 있었느냐는 사실이다. 이모씨가 해당 주택에 거주하게 된 배경에 대한 설명을 부동산 증명서에서 찾을 수는 없다.
특이한 것은 1958년 6월 부속 건물이 추가로 접수(소유권 보존 등기)되었다는 것이다. 부속 건물은 1958년 6월 건물을 짓자마자 등기를 신청했다. 부속 건물은 바로 화장실이다. 목조기와 건물 건평 2.6평 변소(便所)가 소유권 보존 등기가 됐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변소의 주인(소유자)이 ‘國’ 즉 대한민국이라는 점이다.
화장실과 집의 주인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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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종로구 와룡동 3’ 구 등기부등본. |
알 수 없는 이유로 건물에 살기 시작한 이씨는 1974년 1월 부동산 소유권을 확보했다며 등기를 신청했다. 의문이 드는 것은 매매계약일은 1964년 1월이라는 것이다. 10년 동안 무슨 이유에서인지 등기를 하지 않고 기다린 것이다.
왜 10년이 지난 후에 등기를 신청했을까. 의문은 곧 풀렸다. 1981년 이씨는 자신의 땅을 현재의 주인 김씨에게 매매예약 형식으로 팔아 버린다. 즉 자기 땅을 팔기 위해 등기를 한 것이다.
다만 이미 나라 건물로 등기가 되어 있던 화장실은 자기 것으로 하지 못했다.
궁궐 땅의 원래 주인은 당연히 국가이다. 국가 소유였던 해당 부동산을 이씨는 1964년 1월 돈 주고 산 것이다. 이씨는 어떻게 궁궐 땅을 살 수 있었을까. 40년이 지난 지금 진실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당시 국가와 이씨 사이의 매매계약서를 확인하는 것이 유일하다.
정상적인 국가 기관이라면, 자신이 관리 책임을 맡은 국가 부동산의 매매 관련 서류를 보관해야 할 의무가 있다. 기자는 문화재청에 ‘서울시 종로구 와룡동 3’ 땅 매매계약서를 요구했다. 이에 대한 문화재청의 초기 답변은 이러했다.
“서울시 종로구 와룡동 3(창덕궁길 30) 소재 민가에 대한 국유재산 매매계약과 관련하여 현재 우리 청이 소장하고 있는 자료는 국유재산대장과 재산처분대장이 있습니다. 위 건과 관련해, 국유재산 매매의 근거 및 구체적인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 당시 체결한 매매계약 서류를 확인한 결과, 위 건에 대한 매매계약 서류는 현재까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50여 년 전의 매매계약 건으로 관련 서류를 찾는 데 어려움이 있습니다.) 참고로, 재산처분대장을 확인한 결과 1964년 1월 14일 자로 위 건에 대한 매매계약을 체결한 사실이 확인되고 있습니다.”
그러던 중 문화재청은 7월 15일 취재를 모두 마치고 인쇄에 들어가기 직전, “문제의 계약서를 찾았다”며 문서 사본을 기자에게 송부했다. 계약서에 따르면, 1964년 1월 14일 대한민국 정부는 이모씨에게 해당 부동산을 매각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국유재산 매매계약서(一時拂)
계약의 표시 서울특별시 종로구 와룡동 3, 3-1 대지 90평
위 재산의 매매에 관하여 문교부장관을 “갑”이라 칭하고 서울특별시 종로구 와룡동 3번지 거주 이○○씨를 “을”이라 칭하여 아래의 계약조건과 같이 매매 계약을 체결한다.
제1조 갑은 위 표시 재산을 다음과 같이 감정가격에서 3할을 공제하여 일금 630,000원정으로 을에게 매각한다.(감정액 900,000원 3할액 270,000원)
(중략)
서기 1964년 1월 14일
매도자(갑) 대한민국정부 문교부장관 고광만
매수인(을)
주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와룡동 3번지 이○○
부서(副署) 문화재관리국 관리과장
그렇다면 이런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부동산 전문가 A씨에게 자문을 요청했다. A씨는 부동산학과에서 석사 학위를 마치고, 부동산 관련 책을 매년 한 권씩 발행하고 있다. 또 십여 년 넘게 다양한 형태의 부동산 실무를 섭렵했다. 그의 설명이다.
“상식적으로 국가 땅, 특히 궁궐터를 특정 개인에게 판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죠. 보통의 경우 ‘원인무효’로 처음부터 말이 안 되는 겁니다. 당시 얼마나 어이없이 국가 재산이 관리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부동산 소유자 이모씨의 원래 주소가 ‘와룡동 3번지’라는 겁니다. 관사로 이용하다가 자기 집으로 했다는 소문으로 볼 때 오랜 기간 해당 주택에 살다가 지상권 등을 명분으로 자기 주택으로 만든 것으로 보입니다. 한국전쟁 혼란기 얼마나 관리가 소홀했는가를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궁궐을 1964년 당시 가격 63만원에 팔아버린 문화재청은 40여 년이 지난 후 해당 부동산 매입을 시도한다. 유네스코 문화재 등록 등으로 창덕궁의 문화재적 가치가 올라가는 상황에서, 해당 주택을 매입하라는 요구가 계속되었다. 현재 해당 부동산의 소유자는 “이명박 정부 초기에 문화재청에서 17억원에 부동산 매입을 요청했으나, 가격이 맞지 않아 거절했다”고 답했다. 또 “국가로부터 해당 부동산을 매입한 이모씨는 이승만 정부 당시 공보 담당(국장급)으로 이 대통령으로부터 해당 부동산을 불하받았다”고 주장했다.
아무리 화폐 가치가 변했다지만 40년 사이에 63만원에 팔았던 부동산을 17억원에도 되사지 못하는 것이 현재의 안타까운 현실이다.
문화재청은 매각 원인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당시 관련 법규에 따라 처리된 것으로 보인다”고 해명했다.
“꾼의 수법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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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과 창경궁을 조감도 형식으로 그린 조선 후기의 대표적 궁궐 그림인 <동궐도>. 창덕궁 인터넷 홈페이지 캡처. |
그렇다면 왜, ‘소유주’ 이씨는 10년이 지난 이후에 등기를 했을까. 부동산 전문가 A씨는 이렇게 말했다.
“꾼의 냄새가 나는 부분이에요. 뭔가 투명하지 않은 방법으로 부동산을 손에 넣으면 곧바로 등기를 하지 못하죠. 일단 주위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질 때까지 기다리는 겁니다. 10년 정도 지나면, 담당 공무원도 바뀌고 해서 일이 어떻게 처리되었는지 알 길이 전혀 없어요. 만일 정말 당당하게 토지를 취득했다면, 지키기 위해서라도 계약을 하자마자 등기를 하는 것이 정상이죠. 뭔가 의심스러운 계약을 맺은 이후, 시간을 두고 기다린 것입니다.”
궁궐 내 개인 주택은 1981년 소유권이 이씨에게서 김모씨로 넘어가면서 더욱 꼬이게 되었다. 여기서 다시 의혹이 생긴다. 1981년 8월 이씨는 김씨에게 ‘매매예약’으로 땅을 넘긴다. 이 부분은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나. 다시 전문가의 자문을 바탕으로 상황을 분석했다.
“이 역시 거래 관행에서 많이 쓰이는 것이죠. ‘매매예약’이란 쉽게 설명해서 자신의 땅을 담보로 돈을 먼저 빌리고 정해진 기일 내에 돈을 갚으면 땅을 돌려주는 것이죠. 쉽게 이야기해서, 돈을 빌리거나 이미 빌린 돈을 갚지 못할 때 내 부동산을 우선 채권자 이름으로 하고 나중에 갚겠다고 약속하는 것이죠. 만일 갚지 못하면 자동으로 부동산은 채권자 소유가 됩니다. 현재 궁궐 내 부동산은 김씨로 되어 있는데, 어찌 보면 김씨도 피해자일지 몰라요. 누가 이런 궁궐 내 부동산을 사려고 하겠어요.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모르는 땅이고, 소유권 제한이 심하게 걸려 있는 토지이기 때문에, 웬만하면 사지 않죠. 이씨가 어떤 이에게 돈을 빌려주고 받지 못했거나 어떤 경제적 이유로 코가 꿰 어쩔 수 없이 부동산을 넘겨받았다고 볼 수도 있어요. 김씨로 소유권이 완전히 넘어갔으니, 김씨도 아마 이씨와 돈거래를 했다가 돌려받지 못한 것 아닌가 싶어요.”
어찌되었건 결과적으로 1981년 8월 궁궐 내 개인 주택은 김씨로 변경되었다. 바로 이 부분에서 문화재청은 법률적으로 고민해야 하는 일을 하지 않았다. 만일 김씨가 해당 부동산이 의심스런 사유로 넘어간 사실을 모르고(선의) 부동산을 넘겨받았다면 1991년까지(10년), 알고(악의) 넘겨받았다면 2001년까지 문화재청은 김씨에게 “해당 부동산은 국가 것이므로 국가에 반환해야 한다”고 알려야 했다. 이럴 경우 민법 245조에 따라 취득시효가 완성되지 않아 문화재청은 해당 부동산을 다시 찾을 수 있었다. 과연 문화재청은 이런 업무를 충실히 수행했을까. 기자는 문화재청이 취득시효 완성을 막기 위해 어떠한 법률적 노력을 기울였는지 문의했다. 이에 대한 문화재청의 답변은 이러하다.
“그 당시 매매계약의 법률적 결함 여부를 확인할 수는 없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따라서 취득시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해당 부지 점유의 위법성을 알려야 할 의무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별도의 입장을 표명하기 곤란한 점 양해 바랍니다.”
문화재청이 무엇을 했는지 당당히 밝히지 못하는 가운데, 2001년이 지나 이제 해당 부동산은 완전하게 김씨에게 넘어갔다. 대한민국은 소유권을 절대적으로 보장한다. 따라서 창덕궁이 해당 부동산을 가져올 방법은 오직 하나, 김씨로부터 다시 사들이는 것이 유일하다.
시민단체 혹은 언론에서 “왜 빨리 문제를 해결하지 않느냐”고 항의하면, 문화재청은 “매입이 순탄치 않다”고 답변한다. 나름 매입을 시도하는데 어렵다는 주장이다.
아마도 해당 주택 소유자 역시 여러 행정 규제로 궁궐에 붙어서 생활하는 것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특히 어떤 건축행위도 할 수 없어 60년 가까이 지난 집을 수리하지도 못한 채 살고 있다. 그런데도 창덕궁에 되팔지 않고 있다. 이유는 무엇일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부동산 규제 제도를 살펴봐야 한다.
해당 부동산은 역사문화미관지구, 문화재보호구역, 자연녹지지역 등 엄격한 행정규제로 묶인 땅이다. 일체의 건축행위가 쉽지 않다. 부동산 전문가의 자문을 통해 알아본 바에 따르면, 이런 이유에서 공시지가 등을 통해 아무리 넉넉하게 평가를 해도 3억4000만원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건물 소유자 측, “정당한 보상 필요”
과연 실제로 그럴까. 기자는 7월 중순 해당 건물을 방문해, ‘소유자’ 김씨의 주장을 들었다. 도예가 김씨는 자신의 작품 전시·판매 공간으로 해당 공간을 활용하고 있었다. 전시관을 관리하는 직원은 “주택의 소유자는 K대에서 오랜 기간 미술을 가르쳤다”며 “한국을 대표하는 도예가로 국빈(國賓)들이 이곳을 방문해 물건을 구입한다”고 설명했다. ‘창덕궁을 정원으로 삼고 있는 건물’이라는 비판에 대해서는 “‘알박기’라고 말하는 것을 알고 있지만, 소유권은 보호되어야 하는 것이다”고 주장했다. 기자는 도예가 김씨를 전화로 인터뷰했다.
—문화재청에서 건물을 사겠다는 요청을 받은 적이 있나요.
“이명박 정부 초기 그러니까 6년쯤 전에, 17억원에 문화재청에서 매입하겠다는 제의가 왔어요.”
—제의를 거절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시세는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비슷한 규모의 주변 땅은 30억 정도 합니다. 문화재청이 적당한 가격을 제시하면, 팔 생각입니다. 시세의 90%는 되어야 한다고 봐요.”
—원래 주인인 이씨는 어떻게 궁궐 땅을 가질 수 있었나요.
“그는 원래 이승만 대통령의 공보담당이었어요. 국장급이었죠. 이 대통령으로부터 불하(拂下)받은 것으로 알고 있어요.”
문화재청은 공시지가를 뛰어넘는 액수인 17억원 매입을 추진한 이유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현실적인 가격도 무시할 수 없기에 감정평가 가격을 이용해 구입을 추진했다”며 “강제수용 등도 가능하지만 최근 분위기상 어렵다”고 답변했다.
문화재청이 “매입이 순탄치 않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이러한 배경에 근거한다. 해당 지역은 서울 도심 핵심부에 위치한 까닭에 근처 주택의 가격은 매우 높게 형성되어 있다. 양측이 생각하는 가격이 차이가 클 수밖에 없기에, 향후 문화재청이 해당 문제의 개인 주택을 다시 사들이는 것은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한편 기자는 문화재청에 취재 내용을 자세히 설명하고, 구체적인 해결책을 문의했다. 문화재청은 해결 방안을 묻는 질문에 “향후 문제가 발생한다면 관계 전문가 등의 법률 자문 등을 통해 대응방안 마련에 대해 검토하겠다”고 답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