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긴급점검

金寬鎭과 독일 陸士 출신들

“실전 위주로 배워 野戰에 강하다”

글 : 오동룡  월간조선 기자  gomsi@chosun.com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목록
  • 프린트
  • 스크랩
  • 글자 크게
  • 글자 작게
⊙ 朴正熙 대통령 訪獨으로 물꼬 터… 1965년 24기부터 73기까지 50년간 51명 유학
⊙ 金寬鎭·金泰榮 국방부장관, 兪普善 차관, 朴正二 1군사령관 등 배출
⊙ 독일군, 패전 딛고 ‘내적 지휘’와 ‘임무형 지휘’로 무장한 자율형 장교 양성
⊙ 장성 진급 때마다 “또 獨士냐”는 질시 받기도… “우수 인재들이니 당연하다”는 평가도

취재지원 : 劉旿相 月刊朝鮮 인턴기자
  1965년 2월 1일 김포공항. 육군사관학교 박중윤(朴重潤) 교장(육군 소장)을 비롯한 생도대장과 훈육관들은 군악대의 팡파르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육사 정복을 입은 두 명의 생도를 환송했다.
 
  육사 24기생 유보선(兪普善), 류홍모(柳弘模) 두 명의 2학년 생도는 동료들의 ‘교차칼’ 세리머니를 받으며 루프트한자 트랩을 올랐다. 이들은 모스크바 횡단 항로가 없어 태평양을 건너 알래스카를 경유해 18시간을 비행한 끝에 쾰른-본(Ko¨ln-Bonn) 공항에 내렸다. 건군(建軍) 이후 처음으로 해외 사관학교에 생도를 파견하는 순간이었다.
 
  두 생도의 서독 유학은 1964년 12월 7일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서독 방문의 ‘독일 측 선물’이었다. 박 대통령은 서독 정부가 보내준 루프트한자 649호기에 올라 7개 도시를 경유하며 장장 28시간의 비행 끝에 베를린에 도착, 1억5900만 마르크(약 3500만 달러)의 차관을 얻는 데 성공했다. 파독 간호사와 광부들의 임금을 담보로 한 것이었다.
 
  당시 체류 나흘째인 12월 10일, 박 대통령이 루르 지방에 위치한 독일 함보른(Hamborn) 탄광을 찾아 300여 명의 파독 광부들과 파독 간호사 50여 명을 대상으로 연설을 하는 동안 참석자 모두가 눈물을 흘렸던 일화는 많은 국민이 기억하고 있다. 박 대통령이 귀국한 지 한 달 만에 전격적으로 ‘한·독 육사생도 위탁교육 프로그램’도 시동이 걸렸던 것이다.
 
  1965년 서독의 군사 원조로 시작한 육사 생도들의 서독 유학은 올해로 50주년을 맞는다. 1964년 입학한 육사 24기 유보선·류홍모 생도부터 시작해 올해 1월 독일 육사로 파견 간 73기 윤찬 생도까지 총 51명의 생도가 독일 유학길에 오른 것이다.
 
 
  준장 이상 16명 배출
 
처음 서독 육사로 유학을 떠나는 류홍모, 유보선 생도가 육사 연병장에서 생도들을 사열하고 있다.
  초창기 고국의 변변한 지원도 없이 서독 전투복을 빌려 입었지만, 이들은 아프리카·중동·중남미 출신 생도들 틈바구니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생도라는 자존심 하나로 이를 악물었다. 유보선 생도는 6개월 과정의 연방군언어학교(Bundessprachenamt)를 수석으로 수료해 학교 관계자를 놀라게 했고, 29기 김태영(金泰榮) 생도(국방부장관 역임)는 졸업 직전의 장교 교육 최종 과정을 수석으로 졸업해 한국인의 자존심을 세웠다.
 
  가난한 나라의 설움을 딛고 우수한 성적을 낸 이들은 귀국 후 더 빛을 발했다. 서독 육사를 다녀온 생도들 가운데 많은 인재가 탄생했다. 김관진(金寬鎭)·김태영 장관 등을 비롯해 유보선 차관, 박정이(朴正二) 전 1군사령관이 대표적 인물이다. 계급별로 보면 군사령관급(대장) 3명, 군단장급(중장) 2명, 사단장급(소장) 7명, 준장 4명, 대령 4명으로 나타났다. 준장 이상만 16명이 나온 것이다. 현재 육사 43기까지 별을 단 것을 감안하면, 24기부터 43기까지 22명의 독일 육사 유학생도 가운데 16명이 장군으로 진급했다.
 
  독일 육사 출신들을 기수별로 보면, 24기(1964년 입학)는 유보선 전 국방차관(예비역 육군 소장), 류홍모 전 20사단장(예비역 육군 소장)이 있다. 류홍모 장군은 “떠날 때는 화랑의식 행사로 연병장에서 전교생을 사열하였고, 졸업식 때는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한 내빈들과 함께 단상에서 동기들의 졸업식을 지켜봤다”고 했다. 귀국한 두 생도는 당시 최고 발행부수를 자랑하는 여성지 《여원(女苑)》 1968년 5월호의 인터뷰 대상이 되기도 했다.
 
  류 장군은 “지금은 동기생 가운데 가장 늦은 군번을 부여하지만, 서독 유학 초창기에는 동기생들 가운데 군번이 가장 빨라 호봉(號俸)이 한 단계 올라가는 바람에 회식 때 우리가 계산을 하곤 했다”고 말했다. 육사 32기 독일 유학생까지는 동기생 가운데 군번 1번을 부여했고, 35기부터는 늦은 군번을 줬다고 한다.
 
  25기(1965년 입학)는 이상선(李相善) 전 군수학교장(예비역 육군 준장), 조남국(趙南國) 전 육사 심리학과 교수가 있다.
 
류홍모 전 20사단장. 류홍모 생도가 장교숙소에서 지도를 보며 전술 과제를 해결하고 있다.
  괴팅겐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조 전 교수는 전격전의 주창자 에리히 폰 만슈타인(Manstein) 원수의 참모의 딸인 리히트스타이그(Richtsteig-Cho)와 하노버에서 만나 결혼했다. 이후 각각 육사와 성신여대에서 교편을 잡다 1998년 독일로 이주했다.
 
  26기(1966년 입학)는 이한홍(李翰洪) 육사 독일어과 명예교수, 정채하(丁菜夏) 서울디지털대 교수(예비역 육군 소장)가 있다. 정래혁(丁來赫) 전 국방부장관(예비역 육군 중장)의 아들인 정 장군은 지난 2012년 총선에서 25기 이상선 장군(전남 함평·영광·장성)과 함께 새누리당 후보(전남 담양·곡성·구례)로 출마하기도 했다. 27기(1967년 입학)는 김유성 인성내츄럴 대표이사(독일 참사관, 국정원 파견)와 박영한 전 합참대학 교장(예비역 육군 준장)이 있다.
 
  서독 육사 출신 가운데 마침내 28기(1968년 입학)에서 장관이 나왔다. 김관진 현 국가안보실장이다. 그는 2010년 연평도 포격으로 29기 서독 육사 후배인 김태영 국방부장관이 물러나면서 국방부장관에 취임해 박근혜(朴槿惠) 정부까지 3년6개월 동안 장관직을 수행했다. 김 실장은 역대 국방장관 중 네 번째 장수 장관, 1990년대 이후 최장수 국방장관이다.
 
  선후배들 사이에서 ‘레이저 김’ ‘독일병정’으로 불렸던 김 실장은 야전 경험이 풍부한 작전통으로 전략, 정책, 전력증강 분야 등에서도 폭넓은 경험을 쌓았다. 김 실장은 장관 취임 초기에 ‘전투형 부대’ ‘정신교육 강화’ ‘관료적 풍토 쇄신’을 화두로 던지며 군 개혁을 추진했다.
 
  김관진 장관은 미 국무성이 유행시킨 말 ‘김관진 이펙트’로 박근혜 대통령의 절대적 신임을 받고 있다. 2010년 12월 김 실장의 취임 이후 북한 도발에 대해 “원점, 지원세력은 물론 지휘세력까지 타격하라”며 강력하게 응징하겠다는 의지를 끊임없이 강조함으로써 북한의 도발을 사전에 억제하는 효과를 거뒀기 때문이다.
 
유보선 전 국방부차관. 기갑을 지원한 유보선 생도가 독일 레오파드 전차 포탑에서 훈련을 마치고 휴식을 취하고 있다(오른쪽 첫 번째). (사진 : 서경리)
  김 실장과 육사 28기 동기생으로 군내 손꼽히는 전략가라는 평가를 받는 김국헌(金國憲) 전 국방부 군비통제관(예비역 육군 소장)은 최근 기자에게 “김관진 장관은 보병학교에서 대대방어 교관을 할 때 전술의 정수(精髓)를 정확히 짚는 명강의로 후배들로부터 ‘미래 육군의 희망’이라는 찬사를 들었다”며 “그 후에도 김관진은 중령보다는 대령, 대령보다는 장군, 소장보다는 중장 때 진화·발전했고, 그때마다 괄목상대(刮目相對)하게 하는 그의 저력이 놀랍다”고 했다.
 
  김 실장과 함께 서독 유학을 떠난 생도로는 수도기계화보병사단장으로 예편한 박흥환(朴興煥) 예비역 소장이 있다. 박흥환 장군은 경기고를 졸업하고 연합사 부참모장, 합참 작전기획부장 등을 거쳤다. 박 장군의 딸 박정화 소령(38·여군 제43기)은 대학(이화여대) 4학년 때 3군사령부 작전처장이었던 아버지의 권유로 여군사관 후보생 과정에 입교했고, 육군 제51사단 예하 연대 제13중대장 때 선봉중대장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김 실장과 박 장군은 1969년 1월 4일 김포공항을 출발,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했다고 한다. 박 장군은 “김 실장과 보병 병과를 선택해 유학 3년 내내 함께 생활했다”며 “처음엔 언어와 배타적인 시각 때문에 고생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독일 생도들과 잘 어울릴 수 있었다”고 했다. 그는 “서독 육사 교육기간 중 취득한 차량 운전면허로 김 실장과 1000마르크(약 100만원)를 모아 중고 폴크스바겐 승용차를 사서 파리 등지를 여행했던 기억이 난다”고 했다.
 
  1972년 6월 독일에서 돌아온 김관진 실장과 박 장군은 3월부터 시작한 14주 코스의 초등군사반(OBC·Officer's Basic Course) 교육일정과 맞지 않아 1년 후 전방부대에서 소대장을 하다가 ROTC 11기생들과 함께 상무대에서 초등군사반 과정을 이수해야 했다고 한다.
 
 
  김태영, 선배 없는 함부르크 캠퍼스 선택
 
2010년 12월 4일 김관진 신임 국방부장관이 국방부에서 열린 국방부장관 이ㆍ취임식에서 김태영 국방부장관으로부터 국방부기를 이양받고 있다.
  육사는 28기까지 2명의 생도를 선발해 서독에 파견했으나, 29기(1969년 입학)부터는 1명만 선발했다. 같은 시기 서독에 파견하던 고등군사반(OAC·Officer's Advanced Course) 과정과 서독 지휘참모대학(CGSC·Command and General Staff College) 과정에 인원을 추가로 배정하기 위한 조치였다고 한다.
 
  29기 대표로 서독 육사를 다녀온 김태영 전 장관은 수방사령관(중장), 합참 작전본부장, 1군사령관(대장), 합참의장을 거쳐 2009년 9월 국방부장관에 취임했다. 당시 장관 인사청문회에서 “북한 핵시설에 대한 선제타격이 필요하다”고 소신을 밝혔고, 여야 의원들은 불법, 자질 시비가 나오지 않은 ‘클린 청문회’로 평가했다.
 
  그가 2010년 12월 퇴임사에서 “사관학교 시절부터 군 생활 내내 저의 든든한 조언자였던 김관진 신임 장관에 국방의 책임을 인계하게 됐다”고 말한 것도 서독 육사의 인연 때문이다. 김 실장과 김태영 전 장관은 함께 지내지는 않았다고 한다. 김태영 전 장관은 함부르크에서 공부했고, 김 실장은 뮌헨에서 수학했기 때문이다.
 
  지난 6월 12일 이태원에서 만난 김태영 전 장관은 “혈색이 좋아 보인다”고 하자, “국회에 가서 ‘기합’을 받지 않고 즐겁게 살아서 그런 것 같다”며 “무보수 이사장으로 한민고 지원을 요청하러 다니느라 비록 집에서는 구박을 받지만, 아쉬운 소리를 많이 해도 도리어 기분이 좋다”며 웃었다. 김 전 장관은 국방부장관 시절 격오지 근무로 자녀 교육에 어려움을 겪던 직업군인들의 고충을 해소하기 위해 2010년 국방부 군인자녀학교설립단을 창설했다.
 
김관진 국가안보실장의 독일 유학 생도 시절. (사진 : 육사제공)
  2011년 10월 국방부는 학교법인 ‘한민학원’을 설립하면서 사업 추진을 지휘했던 김 전 장관을 이사장으로 임명했다. 기숙형 사립고 한민고의 개교는 1970년 서울 중경고등학교와 춘천제일고등학교가 군인 자녀 교육기관으로 설립됐다가 1982년 국립화된 이후 처음이다.
 
  김 전 장관은 “격오지 근무로 어려움을 겪는 군인 자녀를 정원의 70%까지 뽑고 나머지 30%는 경기도 내 일반 학생들에게 입학 기회를 준다”며 “처음 원서를 받아보니 대부분의 학생이 내신 200점 만점에 190점 이상이었다”고 말했다.
 
  김 전 장관은 “유학 다녀온 지 45년이 지나선지 독일 무관과 대화할라치면 영어가 튀어나오곤 한다”면서 “경기고 다닐 때 독일 육사 생도(24기)들이 여성지에 등장한 것을 읽고 멋있다는 생각을 했고, 독일로 유학 간 것은 현명한 선택이라고 본다”고 했다.
 
  김 전 장관은 “서독에는 당시 하노버, 뮌헨, 함부르크에 독일 육군 장교학교(Offizierschule des Heeres)가 있었는데, 함부르크엔 선배들이 없어 일부러 함부르크 캠퍼스로 갔다”고 회고했다. 그는 “3년간 포병 병과 과정을 함께 수학했던 라이벌 격인 이란 생도는 수학에 장기가 있었으나, 가족과 함께 지내느라 졸업할 무렵이 되자 어학실력이 나와 극과 극이었다”며 “팀워크를 중심으로 하는 교육에서 의사소통이 잘 안 돼 결국 마지막 장교 교육 최종 과정에서 수석 자리를 내게 내주고 말았다”고 했다.
 
합참의장 시절 파병부대 장병들을 격려하는 김태영 전 장관.
 
  류제승 정책실장, 국내 처음 《전쟁론》 원전 번역
 
  31기(1971년 입학)의 하정열(河正烈) 한국안보통일연구원장(예비역 소장)은 스위스 국방무관, 독일교환교관 단장을 지낸 ‘독일통’이다. 5군단 참모장, 청와대 국방비서관, 27사단장을 거쳐 합참 전력발전부장, 3군부사령관을 지냈다. 1996년 《한반도 통일 후 군사통합 방안: 독일 군사통합과정과 교훈》이라는 책을 펴내는 등 한반도 통일 과정에서 남북한 군 통합을 위해 통독 과정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30기는 유학생으로 백모 생도를 파견했으나, 파독 간호사와 휴가를 보내다 부대에 미귀(未歸)하는 바람에 소환, 퇴교조치를 당한다. 1967년 동백림사건(東伯林事件)과 이듬해 1·21 청와대 기습사건이 터지는 등 안보상 민감한 시기였다.
 
  32기(1972년 입학)는 1군사령관을 지낸 박정이(朴正二) 예비역 대장이 다녀왔다. 박 장군은 천안함 사건 조사 민군합동조사단 군 측 공동단장을 맡아 천안함 침몰 원인을 규명하는 데 역할을 했다. 20사단장, 합참 작전부장, 수방사령관, 합참 전력발전본부장, 1군사령관을 역임한 그는 야전과 정책 분야에 대한 안목과 식견을 고루 갖춘 대표적인 ‘문무겸비형’으로 평가받고 있다.
 
  박정이 장군은 “33기와 34기는 왜 서독 육사에 보내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32기까지는 27개월의 학위 과정이 포함되지 않은 서독 유학을 다녀왔으나, 1974년 서독이 3년3개월 석사 과정까지를 포함한 ‘연방군대학’으로 교육 과정을 개편하면서 문제가 생겼다”고 했다. 박 장군은 “당시 최우근(崔宇根) 교장(육사 3기)은 생도들이 총 6년 과정(한국 사관학교 1년+서독 육사 5년)을 마치고 돌아오면, 동기들과 2년의 경력 차가 발생할 것을 우려해 두 기수를 보내지 않았다”며 “육사에서는 서독 육사 유학을 중단하는 것보다 연방군대학 과정을 생략하고, 27개월의 순수한 장교 교육만 받기로 하고 35기를 파견했다”고 했다.
 
  박 장군은 “어렵게 살던 시절, 서독에서 유학하며 언어문제 극복을 위해 군사학 교본을 거의 외우다시피 했던 것이 엊그제 같다”며 “1973년 1월 현지에 도착하니 서독 사람들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즘이라는 국가사회주의가 철저히 패배하자, 사회 전반에 걸쳐 민주화한 시스템을 정착하려고 노력했고, 군도 민주주의 체제와 신념, 군인의 법적 신분 등을 강조한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고 했다.
 
  우여곡절 끝에 서독 유학생이 된 35기(1975년 입학) 생도는 류제승(柳濟昇) 국방부 정책실장(예비역 중장)이었다. 류 장군은 대표적인 ‘전략통’으로 꼽힌다. 11사단장을 마친 그는 군의 전략과 정책을 다루는 합참 군사전략과장, 전략기획차장, 한미연합사령부 기획참모차장 등 주요 보직을 거쳐 국방부 정책기획관과 육군교육사령관을 역임했다.
 
  류 장군은 독일 보훔(Bochum)대학교 역사학과에서 〈한국전쟁 1950~1951년-북한의 전쟁수행과 소련의 영향〉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2003년 김병관(金秉寬) 7군단장에게 ‘독일에서 박사학위 구술테스트를 남겨놓고 있다’고 하자, ‘12일간 휴가를 줄 테니 끝마치라’고 한 덕분에 학위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고 했다.
 
  또한 류 장군은 1998년 클라우제비츠(Carl von Clausewitz)의 《전쟁론(Vom Kriege)》을 번역했다. 그의 《전쟁론》 번역은 국내 처음으로 독일어 원전(原典)을 번역했다는 점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그는 현재 방대한 클라우제비츠 《전쟁론》의 완역본에도 도전하고 있다.
 
 
 
교수요원도 3명 탄생

 
김태영 전 국방부장관의 독일 육사 생도 시절 사진. 독일육군공수공정학교에서 공수훈련을 받고 있는 김태영 생도(오른쪽 두 번째), (사진 : 육사제공)
  36기(1976년 입학)는 김영철 전 스위스 무관(중령 예편)이 다녀왔다. 37기(1977년 입학)는 박찬주(朴贊珠) 7군단장(중장)이다. 박 장군은 기갑전(機甲戰)의 전문가다. 독일을 ‘전차 군단’으로 표현하듯, 그도 전차처럼 추진력이 강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전시작전통제권 전환 업무를 총괄하는 ‘전작권 전환 추진단’의 단장을 맡기도 했다. 류제승 정책실장처럼 독일 육군청 교환교관을 지냈고, 2009년 독일 정부가 수여하는 은성명예십자훈장(Ehrenkreuz der Bundeswehr Silver)을 받았다.
 
  38기(1978년 입학)는 연제욱(延濟旭) 교육사령부 부사령관(육군 소장)이다. 연 장군은 2011년 11월 사이버사령부 초대 사령관으로 부임하면서 별을 달았다. 이어 2012년 11월 소장으로 진급하면서 국방부 정책기획관(소장)에 임명됐고, 대통령직 인수위에 파견돼 근무하다 청와대 국방비서관으로 임명됐다. 이후 국군 사이버사령부 요원들의 정치 댓글 관여 의혹이 불거짐에 따라 연제욱 비서관은 지난 4월 육군교육사령부 부사령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39기(1979년 입학)는 김태식(金泰植) 육군교육사령부 전투교리처장(대령)이다. 김 처장은 2009년부터 지난해까지 주독일 한국대사관 국방무관으로 근무하며 양국의 군사관계 협력 증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해 10월 독일 ‘일등십자공로훈장’을 받았다. 특히 김 처장은 천안함 폭침사건 때 독일 국방부에 신속히 관련 사실을 직접 설명, 독일이 가장 먼저 우리의 입장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그는 또 매달 유창한 독일어로 한국에 대한 안보강연을 실시하는 등 국방무관으로서 탁월한 군사외교 능력을 보였다는 평을 받았다.
 
  40기(1980년 입학)는 김상철 제20기계화보병사단장이다. 처음으로 서독 육사를 다녀온 24기 류홍모 장군이 거쳐간 사단이다. 42기(1982년 입학)는 신인호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준장)이고, 43기(1983년 입학)는 신현기 제1기갑여단장(준장)이다.
 
  독일 육사 출신들은 교수요원으로도 활발하게 진출하고 있다. 41기 김용주(金龍周) 육사 군사심리학과장(대령)을 비롯해 46기 정태영 육사 교수, 54기 김태현 국방대 교수가 있다.
 
  김용주 교수는 “초창기 선배들은 독일 측이 용돈(Taschengeld)을 포함해 모든 유학비용을 부담했지만, 1980년대 한국이 OECD에 가입한다는 이야기가 나오자, 독일은 한국을 ‘자립국가’로 분류하면서 지원을 중단했다”면서 “통독 이후 독일은 (무기판매 등 비즈니스 차원에서) 구소련 위성국가들을 대상으로 군사원조를 늘려갔다”고 했다.
 
 
  독일군을 디자인한 샤른호르스트
 
하정열 전 27사단장(원 안). 육군장교학교 시절 동기들과 기념 촬영. 앞줄 오른쪽 세 번째가 하정열 생도다.
  군 관계자는 “독일 육사 출신들은 대체로 똑똑하다는 소리를 듣는다”며 “아마도 동기생 중 우수한 자원을 선발해 근대 육군의 원형인 독일군에서 단련시키기 때문일 것”이라고 했다.
 
  나폴레옹이 프랑스 혁명 전쟁을 이끌며 유럽을 휩쓸 당시 프러시아(프로이센)는 큰 위기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위기감이 게르하르트 폰 샤른호르스트(Scharnhorst)라는 걸출한 군제(軍制) 개혁 이론가를 낳았다. 샤른호르스트는 귀족 중심의 프러시아 군대에 평민이 참여하는 의무병역제를 도입하고, 병참 중심의 참모본부를 설립하는 등 현대식 군대의 원형을 제시했다.
 
  샤른호르스트는 중장으로 승진한 지 얼마 안 돼 프랑스군과의 전투에서 입은 총상이 악화돼 1813년 숨졌다. 군인이라기보다는 조용한 철학자의 풍모를 지녔으며, 그의 뒤를 이어 군제 개혁을 완성한 아우구스트 폰 그나이제나우(Gneisenau) 원수 등 동료와 부하, 제자들로부터 깊은 존경을 받았다. 애제자인 유명한 군사 이론가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는 샤른호르스트를 “제2의 아버지”, 자신은 “그의 베드로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샤른호르스트, 그나이제나우 등에 의해 이룩된 군의 개혁은 보불전쟁(1870~1871)의 승리로 극에 달했다. 김용주 육사 교수는 “이후 프러시아 육군은 근대 육군의 원형이 되었다”면서 “일본군도 러시아군도, 프러시아군을 본떠 건설했고, 이 전통은 1·2차 대전을 치른 독일군에 그대로 전승됐다”고 했다.
 
  메이지 유신 이후 1870년 일본 육군은 프랑스를 벤치마킹했다. 사쓰마(薩摩), 조슈(長州), 도사(土佐) 번의 다양한 병식(兵式)을 프랑스식으로 통일하고 1873년 징병령(徵兵令)을 반포해 국민개병제를 실시하는 등 상비군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에스파냐 왕위계승권 문제를 이용해 프러시아의 참모총장 몰트케(Moltke)가 일으킨 보불전쟁에서 프러시아가 알자스, 로렌 지방을 차지하는 등 대승을 거두자, 일본은 재빨리 1895년 감군본부(監軍本部)가 주도해 전략전술 교육을 독일식으로 개편했다.
 
  1884년 초대 육군참모총장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와 육군경 오야마 이와오(大山巖)는 프러시아 육군대학교(Preuische Kriegsakademie)를 모델로 프러시아에 병학(兵學) 교관 파견을 요청했다. 프러시아는 참모총장 몰트케의 추천으로 클레멘스 빌헬름 야콥 멕켈(Meckel) 소령을 파견한다.
 
  멕켈 소령은 도상연습(圖上演習), 참모 업무의 실습, 전술 교육 등을 가르쳤고, 3년차에는 참모 연습 여행을 실시했다. 멕켈은 1888년에 퇴임했지만, 멕켈의 교육 내용은 실전면에서 높게 평가돼 이후에도 육군대학교에서 지속됐다. 결국 군제를 개혁한 일본은 청나라와 러시아를 상대로 1904년 뤼순(旅順)과 이듬해 펑톈회전(奉天回戰), 대한해협해전에서 톡톡히 재미를 보았다.
 
 
 
사관학교 교육은 훈련병 과정부터

 
독일 육사 유학생들. 왼쪽부터 이상선 전 군수학교장, 이한홍 육사 명예교수, 정채하 서울디지털대 교수, 연제욱 교육사령부 부사령관, 김상철 제20기계화 보병 사단장.
  서독의 사관학교 교육은 훈련병 과정부터 시작한다. 2007년 입학해 육사 67기로 유학을 다녀온 김영진 대위는 ‘독일 육사 제78기 위탁교육 귀국보고서’에서 “독일 장교 교육 과정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훈련병 과정부터 시작해 장교에 도달하도록 하는 상향식 교육체계”라며 “생도들은 야전부대로 들어가 기초 군사훈련을 받는데, 훈련병 과정, 이등병 과정, 일병 과정을 거친 뒤, 분대장 과정과 소대장 과정을 이수하고 소위로 임관한다”고 했다.
 
  김 대위는 “이러한 과정은 장교들로 하여금 병사, 부사관 간의 신뢰를 형성할 수 있게 한다”며 “상향식 교육체계는 지휘자 또는 지휘관이 직책과 역할에 맞는 임무를 합리적이고 효율적으로 부여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준다. 이것은 장교단과 부사관단을 엄격히 구분하는 미군(美軍)의 방식과는 차이가 있다”고 했다. 독일 유학생들은 연방언어학교에서 6개월 과정을 마치면 드레스덴의 장교학교, 그다음에 병과학교로 이동한다. 공수교육과 유격훈련은 남부 독일에서 받는다. 물론 병과도 먼저 정하고 시작한다.
 
  우리나라가 육사, 육군3사관학교, 학군단(ROTC), 학사장교 등의 다양한 교육기관을 통해 임관하는 반면, 독일 육군 장교들은 모두 같은 교육기관에 같은 교육 과정을 수료하고 임관한다. 따라서 출신의 차이가 없기 때문에 장교들 간의 거리감도 없다.
 
  김 대위는 “장교가 되려면 육군청 사관생도선발실(OPZ)이 주관하는 시험에 응시하면 된다”며 “17세 이상 25세 미만의 독일 국적자로 아비투어(Abitur·대학입학시험)를 치른 고교 졸업생, 부사관 또는 병으로 복무 중인 현역 군인이 모집대상”이라고 했다.
 
  모든 사관생도는 교육기관에서 교육을 받으면, 반드시 야전부대(모체부대·Einheitstamm)에서 실습을 한다. 선(先)학습, 후(後)실습 시스템이다. 예컨대 교관화(敎官化) 교육을 받은 교육생은 교육이 끝나면 이른 시일 내에 3개월간 신병교육 중대에서 분대장으로서 신병(新兵)을 교육해야 한다. 또 소대장 교육을 받은 후에는 5개월간 소대장 실습을 한다. 즉 소위로 임관하기 전까지 지휘자로서 역할을 적어도 1년씩 경험하고 야전에 배치되는 셈이다. 선학습, 후실습 전통은 상향식 교육체계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독일 장병, 식당에서 줄서서 식사
 
류제승 국방부 정책실장. 류 실장은 “독일군의 교육은 화려하지 않지만 전투 지휘자의 입장에서 자기 역할을 충분히 해낼 수 있는 교육을 실시한다”고 했다. (사진 : 서경리)
  제2차 세계대전에 패전한 독일은 연합군의 명령으로 무장을 할 수 없었다. 독일의 국방은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등 연합국이 책임지고 있었다. 그러나 6·25전쟁 이후 냉전이 본격화되자 독일의 비무장화 정책에 변화가 찾아왔다.
 
  소련의 영향력 아래 동독이 은밀하게 재무장하기 시작했고, 미국과 영국, 프랑스도 서독의 재무장을 허락했다. 1950년에 아데나워(Adenauer) 초대 수상은 구(舊) 독일군 장군 15명을 모아서 재무장 가능성을 타진한다.
 
  하정열 장군은 “일찍이 독일에는 바이마르 공화국과 나치 독일 시대의 독일 국방군(Wehrmacht) 등의 군대가 있었다”며 “1955년 창설된 독일 연방군 분데스베어(Bundesbehr)는 이전의 모든 독일 군대의 전통을 거부하고 19세기 초의 샤른호르스트와 그나이제나우, 클라우제비츠의 군사사상(軍事思想)을 본받고 패전 이후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더한 군대이다”고 했다.
 
  독일 군사교육의 두 개의 핵심 축은 ‘내적 지휘(Innere Fu¨hrung)’와 ‘임무형 지휘(Auftragstaktik)’다. 전자는 독일 기본법의 가치와 기준들이 연방군 내에서도 똑같이 구현되게 한다는 개념이다. 즉 자유, 민주주의, 그리고 법치국가의 원칙들을 군에 정착시킴으로써 ‘제복 입는 국민(Staatsbu¨rger in uniform)’의 정신을 구현시키는 개념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구 독일군이 ‘인도(人道)에 반하는 범죄 행위’를 거부할 수 없었던 이유로 들었던 ‘상관 명령에 절대복종’이라고 하는 전통은 부정되고, 기본법에서는 ‘항명권’의 행사가 명문화되고 있다.
 
  김태영 전 장관은 “장교와 사병들은 구분없이 식당에서 줄서서 식사를 하고, 병사들은 머리를 치렁치렁 길렀다”며 “여자처럼 머리를 기르다 보니 안전사고 위험이 있어 헬무트 슈미트(Helmut Schmidt) 당시 국방장관이 두발 규정을 놓고 공개토론회를 열어 ‘귀가 머리를 덮지 않는다’는 규정을 만들었다”고 했다.
 
 
  장교가 전차 조종
 
김용주 육사 군사심리학과 교수(원 안)가 1983년 11월 7일 동기들과 함께 영국군과 연합 훈련을 하는 것을 현지 언론이 보도했다.
  독일군 장교들은 장교학교에서 대대(大隊) 전술을 먼저 배우고 각 병과학교로 간다. 독일군은 전술의 기본단위인 대대의 전술을 익혀야 소대전술을 익힐 수 있다는 철학을 갖고 있다. 모든 병과의 모든 생도가 동일한 전술적 바탕을 갖고 자신의 병과를 익히게 해 초급장교 때부터 제병협동, 합동작전을 이해하고 멀리 내다보는 전술 판단을 하게 하는 것이다.
 
  하정열 장군은 “독일의 초급장교는 전술적 지식과 사고를 대대장급으로 할 수 있도록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대대장과 커뮤니케이션이 용이하다”며 “늘 부대의 위치를 생각하고, 임무 수행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작전을 한다”고 했다.
 
  김용주 교수는 “독일은 개념 주도적 접근, 미국은 경험주의적 접근방식을 취한다”며 “미국은 소대전술을 배워야 중대, 대대전술을 구사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독일은 대대전술을 가르치고 소대전술을 배워야 전술습득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김태영 전 장관은 “우리 육사는 학위 교육 위주로 운영되고, 군사훈련은 여름기간에 특수교육과 소대전술 위주의 교육을 한다”며 “이에 반해 독일은 병과를 먼저 선택하고 학위교육과 군사훈련을 분리해서 운영한다”고 했다.
 
 
  “독일군 시스템 적용”
 
2013년 5월 29일 경기도 양평 지평지구전적비에서 열린 지평리 전투 기념식에서 박찬주 7군단장이 기념사를 하고 있다.
  독일군 교육의 특색은 실전 위주다. 동기생들에게 가르치며 배우는 방식(Teaching and Learning)이라 학습 도달 수준이 100%에 육박한다는 것이다. 장교는 기관총, 박격포 등 대대급의 모든 편제화기를 다룰 수 있어야 하며 전차, 장갑차 등 모든 편제차량을 다룰 수 있어야 한다. 수영도 풀장에서 왔다갔다하는 것이 아니라 전투수영이다.
 
  류제승 정책실장은 “도피 및 탈출 훈련에서 프랑크푸르트의 마인(Main)강을 전투수영으로 건넜다”며 “‘맥주병’이었던 내가 교관의 지시에 따라 방수천막에 배낭을 싸서 70~80m 강폭의 마인강을 대각선으로 도강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전시에는 지프 운전뿐만 아니라 트럭 운전 능력도 필요하기 때문에 5톤 트럭까지 몰았다”며 “운전 교육만 6주를 받았다”고 했다.
 
  김태영 전 장관은 “지금도 헤클러&코흐사의 G3(Gewehr 3) 제식소총을 자유자재로 분해·결합할 수 있다”며 “우리 군의 이등병과 병장의 사격 실력이 똑같은 것은 독일군 기준으로 보면 이해가 안 되는 일”이라고 했다.
 
  1960년대 서독 육사에 유학한 생도들을 비롯해 오늘날 독일 육사에 유학하는 생도들은 이러한 최고 수준의 군사 교육을 받았고, 또 받고 있는 것이다. 독일 유학파 장교들은 독일에서 배운 지식을 우리 군에 어떻게 도입했을까.
 
  류제승 장군은 “독일군의 군사 교육은 결코 화려하지 않았다”며 “학교 교육은 개인 교육이지만, 부대 교육은 집체 교육이기 때문에 전투 지휘자의 입장에서 자기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수업을 진행한다”고 했다. 그는 “첫 수업에서 ‘행군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동기생들에게 던지고 난상토론하며 수업을 진행한 것이 40년 가까이 흘렀지만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면서 “교육이 끝나면 과정 동안 배운 내용들이 신기하게도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고 했다.
 
  김관진 국방부장관이 2010년 취임하면서 교육사령부 예하부대에 독일식 ‘티칭 앤 러닝 기법’을 도입한 ‘책임교관제’를 시행하기 시작했다. 류 실장은 “교육사령관 재직 때 병과학교에 가보니 정착이 돼 있지 않았다”며 “현장을 다니며 직접 워크숍을 개최하는 등 신경을 쓴 덕분에 이젠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느낌”이라고 했다.
 
  김태영 전 장관도 “장관 시절, 독일의 기초 군사 훈련 6개월을 5주에 불과한 우리 사관학교에 적용하려고 했다”며 “12주로 늘리고 싶었는데, 결국 8주로 늘리는 데 그쳤다”고 했다.
 
  김용주 육사 교수는 “2010년 한민구(韓民求·육사 31기) 총장 재임 시절, 육군본부에서 의뢰해 한국군에 나와 있는 임무형 지휘를 망라해 ‘임무형 지휘’ 교육참고자료를 쓴 적이 있다”며 “향후 내적 지휘와 함께 심도 있는 논의가 이뤄지길 바란다”고 했다.
 
  민명돈(閔丙敦) 전 육사교장(예비역 육군 중장)은 우리 군 최초로 1964년부터 2년간 독일 바이에른에 있는 괴테인스티튜트(Goethe Institute)에서 독어독문학을 전공했다. 민 장군은 귀국해 육사 외국어학부 독일어 교관으로 독일로 떠나는 육사 생도들을 24기부터 지도했다.
 
  민 장군은 “당시 독일에서 군사교리와 좋은 교육을 받고 온 장교들은 계급이 낮아 본인의 뜻을 펴기가 어려웠을 것으로 본다”며 “게다가 오랫동안 미국의 군사원조하에서 미국식 교리가 뿌리내려 있는 한국군에 독일의 시스템을 접목시키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1960년대 당시 독일로 지휘참모 과정을 다녀온 사람들도 많았지만, 본인의 뜻을 펴지 못하고 자신의 군사지식을 넓히는 정도로 만족했어야 했다”며 “지금은 독일 유학파가 국방부장관까지 배출하는 상황이어서 독일군의 좋은 시스템을 적용할 수 있는 토양이 마련됐다고 본다”고 말했다.
 
 
  “또 獨士냐”
 
독일군 병사가 독일군 최신예 전차 레오파드 2A6의 120mm포를 살펴보고 있다.
  독일 육사 출신들이 유학 50주년 만에 ‘주머니 속의 송곳(囊中之錐)’처럼 부상하기 시작하자, 언론은 물론 군 내부에서도 독일 육사 출신들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김국헌 장군은 “이들이 이처럼 잘나가다 보니 한국인 특유의 패 가름이 횡행한다”면서 “서독 육사 출신이 진급이나 보직에 추천되면 또 독사(獨士)냐고 하는 말도 나온다”고 했다. 김 장군은 “독일 육사 출신들은 큰 물에서 논 엘리트 장교들답게 패거리 정신이 없고, 역으로 ‘독사’라는 말도 그들이 훌륭했기 때문에 나온 말 아니냐”고 했다.
 
  독일 육사 출신들은 공식적인 모임은커녕 모임 이름조차 없다고 한다. 독일 육사 유학생의 최고 선임 격인 류홍모 장군은 “통독 기념일인 매년 10월 3일, 주한독일대사관에서 만나는 것이 전부”라면서 “김관진 후배도 합참의장을 마치고 잠시 쉴 때 식사 자리에 한두 차례 나온 적이 있을 뿐, 그 이후에는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김태영 전 장관은 “좋은 자원들이 독일에 가서 한눈팔지 않고 성실하게 육군의 원형을 간직한 나라의 노하우를 배웠던 것”이라며 “독일 육사에 대한 일부의 시각은 신경 쓸 것이 없고, 우리도 보은 차원에서 개발도상국 생도들을 초청해 친한파(親韓派) 장교들을 양성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김국헌 장군은 “독일이 1955년 독일연방군을 만들면서 패전으로 통렬한 반성을 하고 있는 소령, 중령들을 중심으로 독일 육사 교관을 삼았는데, 이들은 소련에 치를 떠는 철저한 반공주의자들이었다”며 “10년 후 독일에 간 우리 사관 생도들은 운 좋게도 만개(滿開)한 독일 육군의 정신을 온전히 습득할 수 있었다”고 했다.⊙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NewsRoom 인기기사
Magazine 인기기사
댓글달기 0건
댓글달기는 로그인 하신 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

Load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