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신의 욕망을 그대로 표현하는 여인 역할 많이 맡은 ‘한국의 브리짓 바르도’
⊙ ‘코리아게이트’의 박동선이 첫사랑, 코미디언 자니윤과도 인연
⊙ 어려서부터 소녀가장, 사업가로 수완 발휘
임도경
⊙ 이화여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同 대학원 언론학석사, 경희대 언론학박사.
⊙ 중앙일보 뉴스위크 한국판 편집장. 現 경희대 언론정보학부 객원교수, 한국영상자료원 부원장.
⊙ ‘코리아게이트’의 박동선이 첫사랑, 코미디언 자니윤과도 인연
⊙ 어려서부터 소녀가장, 사업가로 수완 발휘
임도경
⊙ 이화여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同 대학원 언론학석사, 경희대 언론학박사.
⊙ 중앙일보 뉴스위크 한국판 편집장. 現 경희대 언론정보학부 객원교수, 한국영상자료원 부원장.
‘한국의 브리짓 바르도’라는 애칭을 갖고 있는 영화배우 최지희(71). 그녀는 자신의 얼굴처럼 ‘대담하고 정열적이며 야성적인 체취를 발산하는 여배우’로 뚜렷한 자기 개성을 자신이 출연한 모든 영화에서 그대로 보여줬다. 전후 세상이 격동하는 시절에 반항적인 이미지의 그녀는 시대적 아이콘으로 떠오르기에 충분한 여배우였다.
이런 이미지로 그녀는 전후 세대 여성들의 상징인 ‘아프레 걸’로 한 시절을 풍미했다. 1958년 데뷔작인 <아름다운 악녀>(이강천 감독)에 출연할 당시 그녀는 겨우 열여섯 살이었다. 이 영화에서 그녀는 매매춘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소매치기 소녀로 등장해 눈길을 사로잡았다. 이듬해 영화 <자매의 화원>(신상옥 감독)에서는 언니 최은희의 남자를 가로채는 깜찍한 여동생으로 등장했다. 그녀가 저지르는 일들은 대부분 비도덕적인 것이었지만 도저히 미워할 수 없는 모습으로 다가왔다. 자신의 욕망을 솔직하게 털어놓음으로써 이해받을 수밖에 없는 ‘공감’ 형태로 진행됐다. 그런 점에서 요즘 드라마에 잘 등장하는 ‘미워할 수 없는 악녀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최지희라는 배우는 아름다운 사악함을 두려워하면서 동시에 그렇게 할 수 있는 당돌함을 갈망하는 시대적 심리와 동일시된다. 그녀는 스크린 속에서, 불량기 가득한 욕망 속에서 금세 파열되어 치솟을 듯한 능동의 에너지를 간직한 여자로 자신의 모습을 감추지 않았다.
영화 속에서 그녀는 자신의 고향 언어인 굵직한 경상도 사투리를 구사하면서 비즈니스 감각을 발휘하는 여자로 곧잘 나왔고, 실제 자신의 삶 역시 선 굵은 국제적 사업가로 성공하는 저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래서 그녀의 삶이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연결되는지도 모르겠다.
1958년 데뷔해 1973년 스크린을 떠나기까지 16년간 그녀는 200여 편에 이르는 작품에 출연했다. 이 중 대표작은 대종상 여우조연상을 받은 <김약국의 딸들>(1963)이다. 이 작품으로 그녀는 완전무결한 악녀의 모습을 보여줬다는 평을 받았다. 이 밖에 <마부>(1961), <말띠 여대생>(1963), <연애졸업반>(1964), <말띠 신부>(1966), <남대문 출신 용팔이>(1970) 등이 대표작으로 꼽힌다.
1958년 데뷔~1961년 미국유학 전
최지희씨는 1940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나 1946년 경남 하동으로 이주했다. 4형제(언니 둘, 남동생 한 명) 속에서 자란 어린 시절 삶은 어려웠다. 아버지를 일찍 여읜 그녀는 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할 정도로 가난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15세가 되던 해 집을 떠나서 친구와 함께 부산 범일동에 있는 삼일극장 연구생으로 입단했다. 그 당시 유행했던 쇼 공연의 백댄서를 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 극단이 재정난으로 해체되고 난 뒤 대구여관에서 볼모로 잡히는 상황에서 귀인을 만나게 된다. 때마침 <산적의 딸>(1957)을 촬영하러 대구에 온 윤예담 감독을 보게 된 것이다. 그 감독의 여동생을 따라다니다가 서울까지 함께 오게 되고 명동에서 <인걸 홍길동>(1958)을 제작 중인 최남용씨를 만나 수양딸이 되면서 현재의 이름인 ‘최지희’로 개명하게 된다. 그녀의 본명은 김경자이다.
그해 <인걸 홍길동>과 <아름다운 악녀>에 출연하면서 본격적인 배우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아쉽게도 <아름다운 악녀> 필름은 유실된 상태. 당시까지 사투리가 심했던 그녀의 목소리는 배우 노경희씨에 의해 녹음이 됐다.
이 작품으로 인해 스타가 된 그녀는 고향에 있는 어머니와 동생을 불러들이면서 본격적인 ‘소녀가장’의 길에 들어선다. 열심히 촬영하며 어느 정도 돈이 모이자 그녀는 만리동에 집을 산다. 그러곤 바로 집 한 채를 더 살 만한 돈이 모이면 또 집을 사는 식으로 돈을 불려갔다고 한다. 당시 집값은 300만원 정도 선. 10대 소녀의 벌이로는 적지 않은 돈이었다. 당시 그녀의 출연료는 10만원 선이었다. 그녀는 부르는 곳은 다 뛰어다니면서 가능한 한 많은 일을 해 돈을 모았다고 한다. 부동산 투자를 이때 이미 시작한 셈이다.
다음 작품은 <오부자>(1958)와 <애모>(1959)였는데, 이 작품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한국배우학원에 등록해 연기를 배우면서 촬영을 하려고 했지만, 밀려드는 스케줄로 제대로 공부를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때 그녀의 첫사랑인 박동선씨를 만나게 된다. 김지미씨의 결혼식장에 다녀오는 길에 들른 다방에서 조지타운대 학생회장으로 잠시 귀국해 있던 그와 우연히 만난 것이 시작이었다. 박동선씨는 그녀에게 공부를 더 하라고 권유하면서 영어와 역사를 가르칠 가정교사까지 보내는 열의를 보였다. 이런 그의 정성에 감복해 그녀는 어렵게 미국유학을 결심하게 된다.
1961년 미국유학길에 오르기 전 5월 15일 출국기념 파티를 했다. 소공동 국제호텔 정글바에서 국내 영화인 전체와 미 대사관의 공보관들까지 초대한 큰 파티를 열었다. 그 당시만 해도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의 여배우가 미국유학을 떠난다는 것은 큰 뉴스거리였다. 그녀가 뉴욕의 연극학교에 입학한 사실이 UPI 통신 기사로 실릴 정도였으니까.
파티가 끝나고 마지막 촬영을 하기 위해 만리동 촬영소에 도착해 새벽까지 촬영을 하고 집으로 돌아와 씻는 와중에 총소리를 듣게 된다. 5ㆍ16 군사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그녀의 미국행은 난관에 부딪혔다. 여권 발급이 안 돼 나갈 수 없는 상황이 돼버린 것이다. 그때 여권과장의 도움을 받아 어렵게 미국행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미국 내 첫 거처는 연인인 박동선씨가 있던 워싱턴 DC였다. 여기서 랭귀지 코스를 마치고 뉴욕으로 자리를 옮겨 네이버후드 플레이 하우스에 입학했다. 여기서 연극, 모던 발레, 발음 연습 등 체계적인 연기수업을 받았다. 방학 전에 학생들이 공연한 <햄릿>에서 그녀는 오필리아 역을 맡아 열성적으로 연기했다.
이런 경력을 가지고 1962년 귀국을 한 이후 그녀는 20대에 들어선 ‘미국 유학파 배우’로서 좀 더 비중 있는 배역을 맡게 되었다.
5ㆍ16 혁명 이전 자유당 시절 배우들은 임화수씨의 비호 아래 세금을 내지 않는 혜택을 누렸다. 영화 이외에도 전국을 도는 극장 쇼에 가수들과 함께 출연하면서 많은 돈을 벌었다. 당시 가수들보다는 배우가 간판 역할을 하던 시절이었고, 현대적인 미모의 그녀는 어느 곳에서나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대신 정권의 선거운동과 파티에 동원되는 ‘화초기생’ 역할을 해야 했다. 이 시절을 그녀는 ‘최고로 대우를 받던 시기’로 기억하고 있다.
1962년 귀국 후 1966년 결혼 후 은퇴까지
미국유학 후 첫 작품은 <사춘기여 안녕>(1962)이었다. 트위스트를 추고, 오토바이 타고 다니는 발랄한 문제아에 대한 작품이었다. 미국에 다녀온 이후 자신감을 얻은 그녀는 연기도 한층 자신감이 붙어 있었다. 또 당시만 해도 여배우 중 유일하게 영어를 할 줄 아는 배우라는 시장성까지 더해져 그녀는 그즈음 유행하던 국가 간 합작영화는 다 휩쓸면서 출연했다. 그러다 보니 한 번에 서른 개의 작품에 동시 출연할 정도로 바쁜 생활을 해야 했다.
미국유학 후 그녀의 대표작을 찍게 되는데, 바로 유현목 감독의 대표작 중 하나인 <김약국의 딸들>이었다. 원작자였던 박경리씨는 일부러 그녀의 약수동 집까지 찾아와 맡은 역할이 갖는 중요성을 설명해 줄 정도로 작품에 대한 열의가 대단했다. 그녀가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를 구사하며 자신의 목소리로 유일하게 녹음한 영화가 바로 이 작품이다. 이 작품은 그녀에게 대종상 여우조연상, 청룡상 여우조연상 등을 안겨주었다. 셋째딸 역은 사실상 주인공인데,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조연상으로 밀리는 해프닝을 겪으면서 받은 상이다.
이렇게 개성이 뚜렷하다 보니 불이익도 있었다. 당시 영화계는 남녀배우들이 커플을 맺어 콤비 플레이를 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신성일씨의 경우는 엄앵란이 단골 파트너였다. 그녀만 그런 상대 남자배우가 없었던 탓에 적절한 배역인데도 빼앗기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오히려 여배우들이 “이 역은 지희 것”이라며 밀어주곤 했다.
그녀의 또 다른 대표작 <말띠 여대생>도 이때 작품이다. 액션 코미디를 잘 만들었던 이형표 감독은 그녀와 호흡이 잘 맞았다. 그녀는 패션 디자이너 노라노씨가 만든 의상을 트렁크 가득 준비해 가지고 가서 누가 뭘 입나 보고 슈팅 직전에 옷을 바꿔 입는 센스로 패션 아이콘이 되기도 했다. 큰 키에 허리사이즈가 20인치이던 시절이라 어떤 옷을 입어도 눈에 띄는 서구적 아름다움을 보여줬다.
이 작품이 히트친 이후 이런 부류의 영화들이 연이어 발표됐다. <말띠 신부> (김기덕)도 그녀가 주인공을 맡았다.
이런 작품을 할 당시 그녀는 재일교포 사업가를 소개받았다. 박동선씨와 결혼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던 시기였다. 그와 결혼한 후 그녀는 영화 일을 잠시 접었고, 딸을 낳았다. 사업가인 남편은 그녀의 뒷바라지를 받으며 여러 가지 사업에 도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고, 셋방살이까지 몰린 그녀는 결국 이혼하게 된다. 결혼 3년 만의 일이다.
1969년 컴백 후 1973년 마지막 영화까지
이혼 후 영화계에 컴백한 그녀는 B급 저예산 영화였던 <남대문 출신 용팔이>(설태호 감독)에 출연한다. 간판에는 ‘혜성같이 돌아온 최지희 컴백작품’이라는 타이틀이 붙었고, 영화는 기대 이상의 흥행을 보이며 지방극장가를 장악했다. 이 영화에서 그녀는 ‘의리의 사나이’ 용팔이(박노식)를 애먹이는 드세고 불량스런 애인 역을 맡았다. 영악한 그녀는 액션뿐만 아니라 <7년만의 외출>에서 매릴린 먼로가 보여줬던 스커트가 휘날리는 유혹적인 모습으로 발길질을 하는 섹시한 여성의 모습까지 가미시켰다.
이즈음 그녀는 MBC 전속 탤런트로도 활동을 시작해 TV드라마 <낮과 밤>에도 출연을 했다. <남대문 출신 용팔이>의 성공을 바탕으로 1970년대 극장가를 장악했던 용팔이 시리즈가 시작됐고, 그녀는 30편이 넘게 이어진 시리즈에 용팔이 애인 역으로 등장했다. 그녀의 가장 최근작 속 모습을 기억하는 영화팬들에게 그녀는 브리짓 바르도의 육감적 모습보다는 점퍼 차림의 액션 여배우로 더 강하게 자리 잡고 있다.
전후의 10대 반항적 아프레 걸로 데뷔해 한국의 바르도로서 섹시함의 심벌로 자리를 잡았던 그녀가 용팔이의 애인으로서 ‘정의의 가시내’ 이미지를 남겨놓고 홀연히 영화계를 떠날 당시 한국영화는 암흑기로 접어들고 있었다. 사전 사후 검열제도, 우수영화 쿼터제, 영화사 등록규제 강화 등으로 숨통이 조여 오는 시기였다. 바르도 역시 은막에 회의를 느끼고 프랑스 영화계를 떠난 시기와 일치하는 것도 흥미롭다.
서른셋의 나이에 그녀는 폐가처럼 변해가는 한국영화계를 떠나 일본에서 사업가로 변신하며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사업가로 성공한 후 오십대 때까지 그녀는 영화를 보면 연기가 하고 싶어 피가 끓는 시간을 보내야 했다고 한다. 자신이 그간 해온 역할을 하기엔 너무 늙었다고 스스로 포기한 나이가 육십이었다는 이야기다.
그녀 스스로는 아쉽겠지만 서른셋의 나이까지만 영화배우로서 활동을 했기 때문에 현재 남아 있는 필름 속의 그녀 모습은 늘 터질 듯 팽팽하며 나이 들어갈 줄 모른다. 어쩌면 영원한 청춘스타로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한다.
그 이후 영화보다도 더 영화같이 살아온 그녀의 이야기는 인터뷰로 계속된다.⊙
[인터뷰] 최지희
“남자에게 반했을 때가 제일 행복”
‘아름다운 악녀’의 세월은 천천히 가는 것 같았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최지희(71)씨의 모습은 여전히 여성성을 잃지 않은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인터뷰 중간 화장케이스에서 면봉을 꺼내 눈화장을 정성껏 수정하는 모습은 전성기에 있는 젊은 여배우들의 모습과 다름없었다. 그래서 더 여자같아 보였다.
영화배우로서 최지희씨의 이력은 1973년에 끝이 나지만 그 후 우리나라 여배우 중 가장 스케일이 큰 사업가로 한때 명성을 날렸으며,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연애를 하기도 했던 그녀의 삶이 궁금했다. 이번 인터뷰는 영화배우로서의 활동을 접은 뒤 영화보다 더 영화같이 살아온 그녀의 삶을 들어보기 위해 진행했다. 이런 삶 뒤 일흔을 넘긴 그녀가 지금 돌아온 자리는 한 시절을 풍미했던 ‘여배우’ 그 위치였다.
“신성일은 총각 때 목에 키스마크 하고 나온 날 많아”
―한국의 브리짓 바르도라는 별명으로 불렸잖아요.
“그 소리는 많이 들어요. 톡톡 튀는 역할을 했으니. 그때 당시 머리 모양이나 사진도 그런 식으로 찍기도 하고. 유명했으니까. 엄앵란이는 만날 우는 장면이고, 나는 만날 점퍼 입고 ‘그럴 수 있어?’하고 대드는 스타일이고. 브리짓 바르도라는 별명 기분 좋아. 세계적인 배우와 비교를 해주는 것도. 사진도 그렇게 찍기도 하고요.”
―영화 속 배역과 실제 성격이 맞나요?
“좀 활동적인 편이지요. 뭐든지 긍정적으로 하려고 해요. 토라지거나, 그런 건 있을 수가 없어요. 왜 그랬냐면, 소녀가장이었으니까. 뭐든지 감사하고, 예스하고, 시간관념 철저하고, 촬영장에 가 군소리 안 하고. 그렇게 살아왔어요.”
―육감적인 역할을 많이 맡았는데, 남자배우 중 특별히 호흡 잘 맞았던 사람이 있나요?
“제일 많이 같이 했던 사람은 신성일씨지요. 근데 하나 섭섭했던 건 뭐냐면, 그 당시 콤비 플레이가 많았었는데, 엄앵란이하고만 하겠다고 하는 거야. 내가 보기에 이건 최지희가 해야 할 역할인데 엄앵란이하고만 한다니까 얼마나 화가 났는지. 그래서 한번 따진 적도 있어요. 그리고 박노식씨랑도 많이 하고. 이제 신성일씨에게 가진 섭섭함은 없어요.”
―영화계 동료로서 당시 신성일씨를 지켜봤을 것 같은데, 자서전에 드러난 것처럼 연애를 많이 하는 분이었나요?
“신성일씨하고 작품할 때, 만날 목에 키스마크 해가지고 와요. 그래서 내가 화장도 해주고 그랬어. 총각 때지요. 배우니까 여자들이 가만히 두질 않아. 아우성을 치며, 어떻게 해서든 낚아채려고. 다른 남자배우들도 그랬어요.”
“연애할 수 있을 때 해야”
―지금이나 그때나 여배우들의 연애는 쉽진 않았을 것 같네요.
“대체로 좋지 않은 사람들만 만났어요. 옛날엔 바쁘니까 좋은 사람들이 안 기다려줘. 여배우들이 만나주지 않는다고 가버리고 좀 안 좋은 사람은 기다리다가 붙들어가지고 돈 가져가고. 돈 때문에 헤어지고. 다 그래서 헤어져요. 데이트가 힘들어요. 시간이 없으니까. 진짜 결혼하고 싶은 사람은 가버린단 말이야.”
―그래도 연애를 많이 해야 감정이 풍부해질 것 아닙니까.
“감독, 작가, 배우는 다 연애 많이 해야 해요. 내가 1983년에 조용필이를 NHK에 소개하면서 유명해지면 여자 조심하라고 충고했더니 ‘누이, 좋은 걸 어떡합니까’라고 하더라고요. 연애 못하는 사람이 바보지, 연애할 수 있을 때 연애하는 게 맞아요.”
―그럼 선생님도 사랑이 찾아오면 마다하지 않고 살아왔나요?
“그럼요. 반했을 때 제일 행복해요. 그거 이상 멋있는 게 없어요. 한때 나는 연애를 3년에 한 번씩 로테이션하면 좋겠다고 생각해 본 적이 있어요. 만나서 1년, 머무는 데 1년, 헤어지는 데 1년, 그렇게 3년이요. 나는 첫사랑만 14년이에요. 남자가 남 주기도 싫고, 지가 가지기도 뭐하고. 우물쭈물하는 데 ‘관둬’ 하고 만 사람이에요. 그래서 그 사람은 아직도 결혼 안 했어요.”
―선생님 첫사랑이 박동선씨라 알려져 있더군요.
“내가 박동선씨를 처음 알게 된 거는 김지미씨 결혼하는 날이었어요. 1958년도 봄인데, 홍성기 감독하고 결혼식장에 갔다가 명동으로 나왔는데, 아는 언니가 하는 ‘항아리다방’에서 봤어요. 둘 다 이북이 고향이었는데 그 언니가 소개를 해줬어요.”
―그때 박동선씨는 어떤 상황이었나요?
“자기 아버지가 편찮아서 일시 귀국한 건데, 당시 조지타운 유니버시티 학생회장을 하고 있었어. 그날 거기 다방에서 나와서 명동 태극당이라는 빵집에 가서 아이스크림이랑 빵 먹고 그렇게 알게 됐어요. 그래서 있는 동안에 계속 만나게 됐지요. 미국으로 돌아가서도 나한테 만날 편지를 쓰더라고. 미국 와서 공부하면 어떻겠느냐고요. 박동선 생각에는 나를 데려다가 같이 살고 싶었던 것 같아. 그래서 결국 내가 미국으로 연인을 찾아가게 된 거예요. 박동선이 날 미국에 오게 하기 위해서 우리 집으로 선생도 보내줬어. 그 선생님이 역사공부, 영어까지 가르쳐줬어요. 촬영하고 바쁘고 졸려 죽겠는데 선생이 오니까 하긴 해야 할 거 아니야. 그러니까 자기 딴에는 나를 길러서 자기 사람으로 만들려고 했던 거 같아. 그래서 1961년 미국유학도 주선해 준 거지요. 사실 연극학교보다도 영어를 배워가지고 보통 대학에 들어가서 공부하고 그러자고 그랬는데. 근데 내가 보니까 거기도 학생이고, 나는 소녀가장이고 해서 상황이 쉽지 않았어요.”
박동선에게서 한남체인 인수하게 된 배경
―근데 박동선씨 집안이 굉장히 부자잖아요.
“내가 보기는 부자인데 밥도 외상으로 사다 먹고 그러더라고. 뭐 돈이 없었나 봐요. 그때 당시 뭘 준비하고 있었는데, 조지타운 클럽(워싱턴에 세워진 첫 회원제 로비스트 클럽으로 가입비가 수만 달러가 넘을 정도며 워싱턴서 수입 규모 52곳 중 5위. 1976년 8월 박동선도 창립멤버였다)에 만날 갔었다고. 그러면서 자기 형님한테도 많이 도움 주고 굉장히 비즈니스 쪽으로 많이 하더라고요. 근데 보니까 나한테는 자신이 없었어요. 결혼하면 우리 어머니는 어떻게 되느냐 했더니 그건 자긴 모른대. 네가 알아서 하래. 거기서 내가 꼭지가 돌았어. 내가 여기서 공부하고 그러면 수입이 없는데, 어머니를 알아서 모시라고 하니. 그래서 한국으로 돌아와 버렸지.”
―그 이후로 안 만났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상복을 입고 날 보러 왔어. 초상났는데, 자기가 지루해서 잠깐 왔대.”
―상복 입고 달려올 정도면 사랑하는 거 아닌가요?
“그 사람은 그랬던 거 같아. 난 그런 게 둔했고. 살기 바빴는데 사랑은 무슨….”
―그 후에 박동선씨로부터 한남체인을 인수하게 된 계기는요?
“내가 1985년도에 박동선씨한테 5억원을 빌려줬었거든요. 그래서 돈을 받으러 한남체인에 갔다가 한남체인을 인수하게 된 거야. 사실 7억 빌려줬는데 2억은 받고 5억은 못 받았던 상황이었거든요.”
―그 돈으로 인수가 됐나요?
“그때 미국에서 막 나와서 정신이 없는 상황이었는데, 한남체인이 부도가 난다고 해서 한남체인을 샀어요. 계산을 해보니까 30억원이 있으면 이 회사를 편안하게 살릴 수 있겠더라고. 주식가는 12억원밖에 안 되는데 가수금 그걸 내는 데는 한 20억원 정도의 운영자금이 있어야겠더라고. 박동선이가 부도를 내놓으니까 기분이 좋을 리가 없잖아요. 그때 학교(박동선씨 집안에서 소유하고 있던)가 감사에 걸리고 별별 소리를 다 하며 날 꾀어서 돈을 빌려갔거든. 그래서 그때만 하더라도 나는 참 진실한 친구다,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해왔는데, 그래서 어떤 면에서 보면 한이 맺힌다는 이야기가 거기에서도 나오는 거고. 그래서 한남체인을 하게 돼요.”
연예계 사람과는 한 번도 사귄 적 없어
―오랜 세월 만났으니까 결혼을 할 기회가 있었을 것 같아요.
“1990년대 후반에 자주 만났어요. 나 혼자 살고 있을 때니까. 그래서 박동선씨하고 자주 밥도 먹고, 다시 좋은 감정을 갖게 됐는데, 어느 날 밤에 자다가 말고 중간에 사람 깨워서 당뇨 때문에 팔다리가 저려서 아파 잠이 안 온다고 주물러달라는 거야. 기가 차잖아. 그래서 속으로 이거 쫓아다니다가 안마사밖에 더 되겠나 싶었어….”
―그 일로 헤어진 건가요?
“헤어지고 뭐한 것도 없어. 자주 만나서 밥도 먹고, 그러고 나서도 계속 만나지. 만나긴 만났는데 결혼 가능성을 아예 접었다는 거지.”
―가장 최근은 언제 만났어요?
“지난해 10월 부산국제영화제 할 때 같이 갔었어요. 입장도 같이 했는데 누가 볼까 봐 내가 먼저 막 걸어가 버렸지.”
―결혼은 어떤 분과 하셨어요?
“일본에 있는 교포 양반하고 결혼을 했는데, 그래서 1973년도에 일본으로 떠나서 펍 클럽 ‘지희네’ 사업을 하게 된 동기도 그 때문이에요.”
―결혼생활은 얼마나 했나요?
“1966년에 결혼했다가 3년 후 생활고로 헤어졌어요.”
―남자배우하고 사귄 적 있나요?
“연예계 사람하고는 나는 한 번도 사귄 적 없어요. 내막을 너무 잘 아니까. 요즘은 돈벌이가 되지만, 옛날엔 스태프나 감독이나 너무 배고픈 직업이었어요. 내가 장사를 한 이유도 배고픈 게 싫어서 그랬어요. 세상에서 제일 싫은 건 ‘가난’이에요.”
5·16 혁명 주체세력들과의 인연
―1960년대 혁명주체들과도 교분 있었죠?
“그때 당시 비밀요정이 많았고, 그리고 퇴폐라 그래야 하나? 칠공주 붙들려가고 그런 사건 있었다고. 내가 신미리라고 기생 출신 배우를 아는데, 그 여자한테 한남동 집 세를 줬거든. 근데 그 집에서 비밀요정을 했어. 그래서 거기에 대한 이야기를 만날 와서 해줬지.”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 실종 사건 당시 프랑스로 김 전 부장을 유인한 배우가 한때는 최 선생님인 것으로 알려졌었는데, 다른 여배우였다면서요?
“나는 일본에 살고 있을 때였으니까 잘 모르겠어. 어떤 여배우가 애인이었던 건 맞고.”
―김재규 전 부장은?
“내가 서울에 있을 때 김재규 부장이, ‘몸뻬’라는 별명의 여자가 식당을 하고 있었을 때, 가면 와 있더라고. 그때 한두 번 본 적 있어. 영화 하고 그럴 적에는 바쁘게, 여기저기 돌아다녔으니까. 자유당 때는 여배우들이 화초기생 했었잖아요.”
―요인들의 파티에 많이 불려다녔겠네요.
“차지철 그 사람이 초대하면 치마저고리 한 감씩 선물로 줘요.”
―그래도 정이 있네요.
“정이 많은 사람이었어요. 그 사람 노래 18번이 ‘울어라 열풍아’였어. 그걸 만날 불렀어.”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과도 교분이 있었나요?
“이후락씨가 비서실장을 할 때였는데, 소설가 이병주 선생이랑 어울려서 자주 만났는데, 내가 결혼 후에 뭘 부탁했을 때도 잘 들어주고 그랬어. 그때 남편이 플라스틱 공장을 하겠다고 해서 좀 도와주십사 했는데 바로 연락이 오더라고. 그거 해도 별로 사업성이 없으니까 하지 말라고.
그때만 해도 애 아빠가 잘돼야 나도 잘된다 해서 굉장히 남편 지원을 많이 했어.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그런데도 안 되더라고. 있는 거 없는 거 다 투자했는데도 안 되고, 알거지가 되더라고. 나중에 월세 10만원짜리 집으로 이사를 했어. 그래서 다시 영화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지. 그래서 남편한테 이혼해 달라고 한 달 동안 울었지. 하도 조르니까 남편이 귀찮았는지 이혼을 해주더라고.”
자니윤과의 인연
―박정희 전 대통령은 만나봤어요?
“제일 처음은 1962년도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 시절에 연합뉴스 일일기자로 인터뷰를 갔을 때였어요. 내가 미국유학에서 막 돌아와서 최고로 날릴 전성기 때니까. 박 대통령 옆에 앉아서 이것저것 물어보고. 막 그랬지요.”
―대통령으로서는 못 만났나요?
“그 후에는 청와대 파티에서 봤어요. 아시아태평양 영화제 수상 기념으로 청와대에서 초대해가지고 정원에서 파티했는데, 거기서 봤지.”
―자니윤씨와의 관계는 어떻게 시작됐나요?
“자니윤은 <인걸 홍길동> 할 때, 그때 연출부 조감독이었어요. 그때는 자니윤이 아니라 윤종선이었지. 더 어렸을 때 만난 친구예요. 그래서 같이 영화도 찍고 그랬는데, 미국유학 간다고 그러고, 나는 사업하러 일본 가고 그러면서 헤어졌지요.
근데 미국에서 다시 만났어요. 내 딸이 미국 비벌리힐스로 유학을 갔었거든. 근데 학교에 들어가려면 집이 있어야 한대. 세를 얻으려니까 매달 2000~3000달러를 지불해야 하는 거야. 그래서 아예 1층, 2층 두 집을 다 샀어요.
근데 어느 날 금자라는 친구에게서 저녁식사 초대를 받았는데, 거기에 자니윤이 있더라고. 맨 처음에 나는 몰랐어요. 그러고 있는데 다가와서 자기가 윤종선이라고 하는 거야. 바닷가 근처에서 살고 있다기에 그럼 우리 딸 사는 데 2층으로 옮겨서 딸 좀 봐달라고 했지. 그렇게 시작됐어.
그 후 편지를 만리장성같이 써서 보내면서 좋다고 그러는 거야. 그때만 해도 40대니까 결혼 생각도 할 수 있고 그랬는데. 보니까 알거지인 거야. 옷도 사줘야 하고 다 그런 상황이었어요. 그래서 또 마지막으로 출세를 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대리만족이라는 게 있어요.”
―나름 뒷바라지를 잘한 것 같은데, 결혼까지 이어지진 않았군요.
“자니윤이 따라다니면서 보니까 재주는 있어요. 미국말 배워가지고 코미디 한 거 보면. 그렇게 친하게 지내다가, 한국에 자니윤을 알려야겠다는 생각에 1988년에 프레올림픽쇼를 하게 된 거예요. 그 후에 자니윤쇼도 해야겠다고 맘먹고 했지. 그런데 변하더라고. 유명해지고 그러니까 우쭐해지고 그러더라고. 안 되겠구나 싶었지. 나 몰래 내 증권 맡겨놓은 거 팔아가지고 영화제작비로 쓰고 그랬어요.”
“남자만 보면 손해가 생겨”
―자니윤씨 때문에 손해를 많이 봤나요?
“많이 없앴지. 그 당시 100만 달러면 큰돈 아닌가요? 영화제작(1986년 미국에서)하는 데 몇십만 달러 없앴지. 또 프레올림픽쇼 하는 데 100만 달러 없앴지.”
―선생님 연인은 딱 그 세 분인가요?
“그런 편이지. 그러니까 남자하고 여자하고 돈이 개입되면 깨지게 돼 있어. 첫 남편도 그랬고. 그 후에 박동선도 그랬고. 자니윤까지. 나는 남자만 보면 손해가 생겨.”
―한남체인으로는 돈을 번 것 아닌가요?
“한남체인은 돈 안 까먹었어. 그건 얹혀서 되팔았으니까 수익이 났지요. 근데 그때 한남체인 팔게 된 거는 프레올림픽쇼 제작하느라 그렇게 됐어요. 나는 제작자니까 자동으로 올라가잖아. 하고 싶은 걸 다 했지요.”
―현재 자니윤씨는 결혼해서 잘살지요?
“자세한 건 모르지만, 그 여자(자니윤 부인)가 유산을 많이 받았다나 봐. 자니윤은 나한테 타격을 많이 받았어.”
―타격을 받았다는 건 무슨 이야기인지요?
“갑자기 내가 집에서 막 내쫓았으니까. 그러니까 충격이 컸지요. 나는 남자를 만나서 존경하고 뭐하고, 그런 게 없어요. 물론 적도 없어요. 애 아빠는 지금도 만나요. 일본 가면 애 아빠하고 지금 사는 여자하고 나하고 셋이 만나서 차 마시고 그래요. 박동선이랑도 결혼 후에도 전화하고 그랬어요. 자기는 영원한 친구기 때문에 결혼 그런 거 상관없다, 만나야 한다고 해서 만나고 그랬어요. 그때 우리 애 아빠는 펄쩍펄쩍 뛰고 그랬지. 자니윤은 자니윤대로 박동선이 만난다고 난리였고. 그래서 언젠가 한 번 듣는데 내가 ‘왜 지랄이야’라고 했더니 죽이니 살리니 난리였지. 자니윤은 내가 자기를 보이처럼 취급한다고 그랬어. 다른 욕은 할 줄 모르고, 내가 지랄한다는 소리는 잘하거든. 그러니까 그 질투, 내가 보면 아무것도 아닌데 질투하고 뭐하고 해보자고 덤비고. 어휴 지겨워서….”
“만나본 정치인 중에 JP가 가장 멋있어”
―만나보신 한국 정치인 중에 가장 멋있었던 분이 있다면?
“많지, 많은데. 첫째가 JP(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 그 양반도 멋있었고. 김대중씨는 내 친구 보이프렌드였기 때문에 몇 번 만난 적이 있고, 정치인들은 그 당시 다 만났지. 김영삼씨도 만났었고. 다 만나봤어. 전두환씨도 만나고.”
―정치인들에게는 거의 여배우 애인이 있었나 봐요?
“다 있었겠지. 난 왜 거기에 끼지도 못했는지 몰라. 그 왜 유력정치인 애인이었던 두 여배우가 남산 체육관에서 벌거벗고 싸움질한 건 유명하잖아요?”
―인생에서 가장 즐거웠던 시절이라면요?
“1990년도에 내가 일본 도쿄에서 ‘지희타운’을 했었는데, 그때 옆에 짓고 있던 위너스빌딩에 한 40억원 정도 투자를 했어요. 위에다 골프장 겸 헬스클럽을 하는데, 레저도 같이 하자고 해서 신라호텔에서 사람들을 스카우트해 왔어요. 그런데 보니까 점점 그 동업자를 못 믿겠더라고. 그래서 내가 그냥 주식값만 받고 그만뒀는데, 신라호텔에서 스카우트한 사람들이 갈 데가 없잖아요. 그래서 그 사람들 먹고살게 하려고 논현동에 식당을 냈어요. 이름을 뭐라고 지을까 하다가 일본에 ‘지희네’가 있으니까 한국에서도 ‘지희네’로 하자고 해서 그렇게 이름을 지었더니, 손님들이 계속 최지희를 찾아서 나는 완전히 앞치마 두르고 식당에 묶이게 됐지요.
그래서 그 식당에서 한 10년 일하다 보니까 그 당시 유명한 사람들을 다 만날 수밖에요. 직업 중에서는 식당 할 때가 제일 재밌었어요. 사람을 많이 만나니까. 나는 평생 군중 속에서 살았어요. 군중 속에서 고독도 있고, 괴로움도 있고, 아픔도 있고. 그 이상 행복한 게 없더라고.”
―지금 주업이 있나요?
“없어요. 있는 거 간수 잘 하고 먹고살면 되니까. 어떻게 죽어야 하나 그것만 생각하고 있어요. 사는 게 재미가 없어요.”
―많은 일들을 겪어서 허탈한 것 아닐까요?
“그런 게 있어요. 열심히 살다가, 어느 순간 놨을 때의 허탈감, 공허감. 극장에 관객이 많았는데 나 혼자 서 있는 공허함. 내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느낌 그런 심정이에요. 열심히 살다 보니까 인생이 아무것도 아니더라고.”
―지금 함께 사는 가족은?
“딸하고 같이 살아요. 미혼인 딸과 둘이 같이 살고 있어요.”
―부동산 투자도 상당하게 했던데요?
“부동산 투자는 뭐 자유당 때부터 집 사고팔고 그랬지요.”
―그러면 지금 부동산 자산은?
“그건 이야기할 수가 없어요. 돈 받을 게 한 200억원 되지요. 100억원 가까이 떼였지만 그래도 받을 게 그 정도 있어요.”
―재산이 많은가 봐요?
“많았었지요. 그런데 뭔가 구름 같아요. 많은 걸 쥐었는데, 보면 없어요.”
―1973년도 이후 영화계를 떠나서 전혀 작품활동을 안 한 이유가 있나요?
“영화법이 바뀌면서 작품 하기도 어렵고 그래서 TV 쪽으로 시선을 돌려 MBC 전속 탤런트가 됐는데, 만날 대사 외우는 게 싫어서 1973년도에 일본에 다니러 갔다가 다시 안 돌아오고 사업을 한 거지요.”
―가장 호흡이 잘 맞은 감독이라면요?
“이형표 감독님이지요. 제가 미국서 와서 그때부터 이 감독님과 호흡을 맞췄어요. 이 감독님이 저에 대해 제일 잘 알아요.”
―가장 아쉬웠던 작품은?
“작품이 끝나고 나면 다 아쉬워. 만족이라는 게 없어요.”
“연애는 하고 싶다”
―선배로서 요즘 가장 매력적이라고 느끼는 여배우가 있다면?
“진짜 연기를 하는 배우는, 김희애인 것 같아요.”
―요즘 보신 영화 중에 눈길이 가는 작품이 있던가요?
“가장 최근에 본 건 <써니>인데, 우리가 했던 영화랑 똑같아요. 그 영화 보니까 내가 했던 역할 생각이 나더라고요. 짱으로 나왔던(웃음).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아.”
―사업가, 영화배우, 어떤 삶이 더 좋았나요?
“무엇을 하든 제일 괴롭고 외로웠던 건, 나 하나 지키기 위해서 무지무지하게 애를 써야 했던 거예요.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실패도 많았는데, 마음이 독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서 그랬던 것이 아쉬워요. 남자관계도 그래요. 돈이 개입되니까 모든 게 어려워져요. 이런 게 내 운명인가보다 생각하고 있어요. 그렇게 힘들게 하다 보니까 남자가 무서워서 근처도 가기 싫어요.”
―그래도 선생님 인생에서 멋진 남자로 기억이 날 사람이 있다면요?
“하나도 없어. 나한테 해만 끼쳤지. 도와주는 사람은 없었다고. 정신적으로나 금전적으로나. 멋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어. 알고 나서 보면 다 지질하고, 시시하고. 나만도 못하고. 자니윤이 폼 재고 있는데 바라보면서 ‘웃기고 있네’ 내가 그랬지.”
―그래도 사랑은 하고 싶지 않나요?
“연애는 하고 싶지요. 그런데 없어요. 안 한 지 꽤 오래됐어요. 죽을 때까지 연애는 할 수 있지. 마지막 사랑을 하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돼요.”⊙
이런 이미지로 그녀는 전후 세대 여성들의 상징인 ‘아프레 걸’로 한 시절을 풍미했다. 1958년 데뷔작인 <아름다운 악녀>(이강천 감독)에 출연할 당시 그녀는 겨우 열여섯 살이었다. 이 영화에서 그녀는 매매춘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소매치기 소녀로 등장해 눈길을 사로잡았다. 이듬해 영화 <자매의 화원>(신상옥 감독)에서는 언니 최은희의 남자를 가로채는 깜찍한 여동생으로 등장했다. 그녀가 저지르는 일들은 대부분 비도덕적인 것이었지만 도저히 미워할 수 없는 모습으로 다가왔다. 자신의 욕망을 솔직하게 털어놓음으로써 이해받을 수밖에 없는 ‘공감’ 형태로 진행됐다. 그런 점에서 요즘 드라마에 잘 등장하는 ‘미워할 수 없는 악녀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최지희라는 배우는 아름다운 사악함을 두려워하면서 동시에 그렇게 할 수 있는 당돌함을 갈망하는 시대적 심리와 동일시된다. 그녀는 스크린 속에서, 불량기 가득한 욕망 속에서 금세 파열되어 치솟을 듯한 능동의 에너지를 간직한 여자로 자신의 모습을 감추지 않았다.
영화 속에서 그녀는 자신의 고향 언어인 굵직한 경상도 사투리를 구사하면서 비즈니스 감각을 발휘하는 여자로 곧잘 나왔고, 실제 자신의 삶 역시 선 굵은 국제적 사업가로 성공하는 저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래서 그녀의 삶이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연결되는지도 모르겠다.
1958년 데뷔해 1973년 스크린을 떠나기까지 16년간 그녀는 200여 편에 이르는 작품에 출연했다. 이 중 대표작은 대종상 여우조연상을 받은 <김약국의 딸들>(1963)이다. 이 작품으로 그녀는 완전무결한 악녀의 모습을 보여줬다는 평을 받았다. 이 밖에 <마부>(1961), <말띠 여대생>(1963), <연애졸업반>(1964), <말띠 신부>(1966), <남대문 출신 용팔이>(1970) 등이 대표작으로 꼽힌다.
1958년 데뷔~1961년 미국유학 전
최지희씨는 1940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나 1946년 경남 하동으로 이주했다. 4형제(언니 둘, 남동생 한 명) 속에서 자란 어린 시절 삶은 어려웠다. 아버지를 일찍 여읜 그녀는 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할 정도로 가난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15세가 되던 해 집을 떠나서 친구와 함께 부산 범일동에 있는 삼일극장 연구생으로 입단했다. 그 당시 유행했던 쇼 공연의 백댄서를 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 극단이 재정난으로 해체되고 난 뒤 대구여관에서 볼모로 잡히는 상황에서 귀인을 만나게 된다. 때마침 <산적의 딸>(1957)을 촬영하러 대구에 온 윤예담 감독을 보게 된 것이다. 그 감독의 여동생을 따라다니다가 서울까지 함께 오게 되고 명동에서 <인걸 홍길동>(1958)을 제작 중인 최남용씨를 만나 수양딸이 되면서 현재의 이름인 ‘최지희’로 개명하게 된다. 그녀의 본명은 김경자이다.
그해 <인걸 홍길동>과 <아름다운 악녀>에 출연하면서 본격적인 배우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아쉽게도 <아름다운 악녀> 필름은 유실된 상태. 당시까지 사투리가 심했던 그녀의 목소리는 배우 노경희씨에 의해 녹음이 됐다.
이 작품으로 인해 스타가 된 그녀는 고향에 있는 어머니와 동생을 불러들이면서 본격적인 ‘소녀가장’의 길에 들어선다. 열심히 촬영하며 어느 정도 돈이 모이자 그녀는 만리동에 집을 산다. 그러곤 바로 집 한 채를 더 살 만한 돈이 모이면 또 집을 사는 식으로 돈을 불려갔다고 한다. 당시 집값은 300만원 정도 선. 10대 소녀의 벌이로는 적지 않은 돈이었다. 당시 그녀의 출연료는 10만원 선이었다. 그녀는 부르는 곳은 다 뛰어다니면서 가능한 한 많은 일을 해 돈을 모았다고 한다. 부동산 투자를 이때 이미 시작한 셈이다.
다음 작품은 <오부자>(1958)와 <애모>(1959)였는데, 이 작품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한국배우학원에 등록해 연기를 배우면서 촬영을 하려고 했지만, 밀려드는 스케줄로 제대로 공부를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때 그녀의 첫사랑인 박동선씨를 만나게 된다. 김지미씨의 결혼식장에 다녀오는 길에 들른 다방에서 조지타운대 학생회장으로 잠시 귀국해 있던 그와 우연히 만난 것이 시작이었다. 박동선씨는 그녀에게 공부를 더 하라고 권유하면서 영어와 역사를 가르칠 가정교사까지 보내는 열의를 보였다. 이런 그의 정성에 감복해 그녀는 어렵게 미국유학을 결심하게 된다.
1961년 미국유학길에 오르기 전 5월 15일 출국기념 파티를 했다. 소공동 국제호텔 정글바에서 국내 영화인 전체와 미 대사관의 공보관들까지 초대한 큰 파티를 열었다. 그 당시만 해도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의 여배우가 미국유학을 떠난다는 것은 큰 뉴스거리였다. 그녀가 뉴욕의 연극학교에 입학한 사실이 UPI 통신 기사로 실릴 정도였으니까.
파티가 끝나고 마지막 촬영을 하기 위해 만리동 촬영소에 도착해 새벽까지 촬영을 하고 집으로 돌아와 씻는 와중에 총소리를 듣게 된다. 5ㆍ16 군사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그녀의 미국행은 난관에 부딪혔다. 여권 발급이 안 돼 나갈 수 없는 상황이 돼버린 것이다. 그때 여권과장의 도움을 받아 어렵게 미국행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미국 내 첫 거처는 연인인 박동선씨가 있던 워싱턴 DC였다. 여기서 랭귀지 코스를 마치고 뉴욕으로 자리를 옮겨 네이버후드 플레이 하우스에 입학했다. 여기서 연극, 모던 발레, 발음 연습 등 체계적인 연기수업을 받았다. 방학 전에 학생들이 공연한 <햄릿>에서 그녀는 오필리아 역을 맡아 열성적으로 연기했다.
이런 경력을 가지고 1962년 귀국을 한 이후 그녀는 20대에 들어선 ‘미국 유학파 배우’로서 좀 더 비중 있는 배역을 맡게 되었다.
5ㆍ16 혁명 이전 자유당 시절 배우들은 임화수씨의 비호 아래 세금을 내지 않는 혜택을 누렸다. 영화 이외에도 전국을 도는 극장 쇼에 가수들과 함께 출연하면서 많은 돈을 벌었다. 당시 가수들보다는 배우가 간판 역할을 하던 시절이었고, 현대적인 미모의 그녀는 어느 곳에서나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대신 정권의 선거운동과 파티에 동원되는 ‘화초기생’ 역할을 해야 했다. 이 시절을 그녀는 ‘최고로 대우를 받던 시기’로 기억하고 있다.
1962년 귀국 후 1966년 결혼 후 은퇴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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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약국의 딸들〉. |
미국유학 후 그녀의 대표작을 찍게 되는데, 바로 유현목 감독의 대표작 중 하나인 <김약국의 딸들>이었다. 원작자였던 박경리씨는 일부러 그녀의 약수동 집까지 찾아와 맡은 역할이 갖는 중요성을 설명해 줄 정도로 작품에 대한 열의가 대단했다. 그녀가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를 구사하며 자신의 목소리로 유일하게 녹음한 영화가 바로 이 작품이다. 이 작품은 그녀에게 대종상 여우조연상, 청룡상 여우조연상 등을 안겨주었다. 셋째딸 역은 사실상 주인공인데,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조연상으로 밀리는 해프닝을 겪으면서 받은 상이다.
이렇게 개성이 뚜렷하다 보니 불이익도 있었다. 당시 영화계는 남녀배우들이 커플을 맺어 콤비 플레이를 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신성일씨의 경우는 엄앵란이 단골 파트너였다. 그녀만 그런 상대 남자배우가 없었던 탓에 적절한 배역인데도 빼앗기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오히려 여배우들이 “이 역은 지희 것”이라며 밀어주곤 했다.
그녀의 또 다른 대표작 <말띠 여대생>도 이때 작품이다. 액션 코미디를 잘 만들었던 이형표 감독은 그녀와 호흡이 잘 맞았다. 그녀는 패션 디자이너 노라노씨가 만든 의상을 트렁크 가득 준비해 가지고 가서 누가 뭘 입나 보고 슈팅 직전에 옷을 바꿔 입는 센스로 패션 아이콘이 되기도 했다. 큰 키에 허리사이즈가 20인치이던 시절이라 어떤 옷을 입어도 눈에 띄는 서구적 아름다움을 보여줬다.
이 작품이 히트친 이후 이런 부류의 영화들이 연이어 발표됐다. <말띠 신부> (김기덕)도 그녀가 주인공을 맡았다.
이런 작품을 할 당시 그녀는 재일교포 사업가를 소개받았다. 박동선씨와 결혼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던 시기였다. 그와 결혼한 후 그녀는 영화 일을 잠시 접었고, 딸을 낳았다. 사업가인 남편은 그녀의 뒷바라지를 받으며 여러 가지 사업에 도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고, 셋방살이까지 몰린 그녀는 결국 이혼하게 된다. 결혼 3년 만의 일이다.
1969년 컴백 후 1973년 마지막 영화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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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대문 출신 용팔이〉. |
이즈음 그녀는 MBC 전속 탤런트로도 활동을 시작해 TV드라마 <낮과 밤>에도 출연을 했다. <남대문 출신 용팔이>의 성공을 바탕으로 1970년대 극장가를 장악했던 용팔이 시리즈가 시작됐고, 그녀는 30편이 넘게 이어진 시리즈에 용팔이 애인 역으로 등장했다. 그녀의 가장 최근작 속 모습을 기억하는 영화팬들에게 그녀는 브리짓 바르도의 육감적 모습보다는 점퍼 차림의 액션 여배우로 더 강하게 자리 잡고 있다.
전후의 10대 반항적 아프레 걸로 데뷔해 한국의 바르도로서 섹시함의 심벌로 자리를 잡았던 그녀가 용팔이의 애인으로서 ‘정의의 가시내’ 이미지를 남겨놓고 홀연히 영화계를 떠날 당시 한국영화는 암흑기로 접어들고 있었다. 사전 사후 검열제도, 우수영화 쿼터제, 영화사 등록규제 강화 등으로 숨통이 조여 오는 시기였다. 바르도 역시 은막에 회의를 느끼고 프랑스 영화계를 떠난 시기와 일치하는 것도 흥미롭다.
서른셋의 나이에 그녀는 폐가처럼 변해가는 한국영화계를 떠나 일본에서 사업가로 변신하며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사업가로 성공한 후 오십대 때까지 그녀는 영화를 보면 연기가 하고 싶어 피가 끓는 시간을 보내야 했다고 한다. 자신이 그간 해온 역할을 하기엔 너무 늙었다고 스스로 포기한 나이가 육십이었다는 이야기다.
그녀 스스로는 아쉽겠지만 서른셋의 나이까지만 영화배우로서 활동을 했기 때문에 현재 남아 있는 필름 속의 그녀 모습은 늘 터질 듯 팽팽하며 나이 들어갈 줄 모른다. 어쩌면 영원한 청춘스타로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한다.
그 이후 영화보다도 더 영화같이 살아온 그녀의 이야기는 인터뷰로 계속된다.⊙
“남자에게 반했을 때가 제일 행복”

영화배우로서 최지희씨의 이력은 1973년에 끝이 나지만 그 후 우리나라 여배우 중 가장 스케일이 큰 사업가로 한때 명성을 날렸으며,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연애를 하기도 했던 그녀의 삶이 궁금했다. 이번 인터뷰는 영화배우로서의 활동을 접은 뒤 영화보다 더 영화같이 살아온 그녀의 삶을 들어보기 위해 진행했다. 이런 삶 뒤 일흔을 넘긴 그녀가 지금 돌아온 자리는 한 시절을 풍미했던 ‘여배우’ 그 위치였다.
―한국의 브리짓 바르도라는 별명으로 불렸잖아요.
“그 소리는 많이 들어요. 톡톡 튀는 역할을 했으니. 그때 당시 머리 모양이나 사진도 그런 식으로 찍기도 하고. 유명했으니까. 엄앵란이는 만날 우는 장면이고, 나는 만날 점퍼 입고 ‘그럴 수 있어?’하고 대드는 스타일이고. 브리짓 바르도라는 별명 기분 좋아. 세계적인 배우와 비교를 해주는 것도. 사진도 그렇게 찍기도 하고요.”
―영화 속 배역과 실제 성격이 맞나요?
“좀 활동적인 편이지요. 뭐든지 긍정적으로 하려고 해요. 토라지거나, 그런 건 있을 수가 없어요. 왜 그랬냐면, 소녀가장이었으니까. 뭐든지 감사하고, 예스하고, 시간관념 철저하고, 촬영장에 가 군소리 안 하고. 그렇게 살아왔어요.”
―육감적인 역할을 많이 맡았는데, 남자배우 중 특별히 호흡 잘 맞았던 사람이 있나요?
“제일 많이 같이 했던 사람은 신성일씨지요. 근데 하나 섭섭했던 건 뭐냐면, 그 당시 콤비 플레이가 많았었는데, 엄앵란이하고만 하겠다고 하는 거야. 내가 보기에 이건 최지희가 해야 할 역할인데 엄앵란이하고만 한다니까 얼마나 화가 났는지. 그래서 한번 따진 적도 있어요. 그리고 박노식씨랑도 많이 하고. 이제 신성일씨에게 가진 섭섭함은 없어요.”
―영화계 동료로서 당시 신성일씨를 지켜봤을 것 같은데, 자서전에 드러난 것처럼 연애를 많이 하는 분이었나요?
“신성일씨하고 작품할 때, 만날 목에 키스마크 해가지고 와요. 그래서 내가 화장도 해주고 그랬어. 총각 때지요. 배우니까 여자들이 가만히 두질 않아. 아우성을 치며, 어떻게 해서든 낚아채려고. 다른 남자배우들도 그랬어요.”
“연애할 수 있을 때 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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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코리아게이트 사건으로 미 의회 증언을 위해 출국하는 박동선씨(가운데). 박씨는 최지희의 첫 연인이었다. |
“대체로 좋지 않은 사람들만 만났어요. 옛날엔 바쁘니까 좋은 사람들이 안 기다려줘. 여배우들이 만나주지 않는다고 가버리고 좀 안 좋은 사람은 기다리다가 붙들어가지고 돈 가져가고. 돈 때문에 헤어지고. 다 그래서 헤어져요. 데이트가 힘들어요. 시간이 없으니까. 진짜 결혼하고 싶은 사람은 가버린단 말이야.”
―그래도 연애를 많이 해야 감정이 풍부해질 것 아닙니까.
“감독, 작가, 배우는 다 연애 많이 해야 해요. 내가 1983년에 조용필이를 NHK에 소개하면서 유명해지면 여자 조심하라고 충고했더니 ‘누이, 좋은 걸 어떡합니까’라고 하더라고요. 연애 못하는 사람이 바보지, 연애할 수 있을 때 연애하는 게 맞아요.”
―그럼 선생님도 사랑이 찾아오면 마다하지 않고 살아왔나요?
“그럼요. 반했을 때 제일 행복해요. 그거 이상 멋있는 게 없어요. 한때 나는 연애를 3년에 한 번씩 로테이션하면 좋겠다고 생각해 본 적이 있어요. 만나서 1년, 머무는 데 1년, 헤어지는 데 1년, 그렇게 3년이요. 나는 첫사랑만 14년이에요. 남자가 남 주기도 싫고, 지가 가지기도 뭐하고. 우물쭈물하는 데 ‘관둬’ 하고 만 사람이에요. 그래서 그 사람은 아직도 결혼 안 했어요.”
―선생님 첫사랑이 박동선씨라 알려져 있더군요.
“내가 박동선씨를 처음 알게 된 거는 김지미씨 결혼하는 날이었어요. 1958년도 봄인데, 홍성기 감독하고 결혼식장에 갔다가 명동으로 나왔는데, 아는 언니가 하는 ‘항아리다방’에서 봤어요. 둘 다 이북이 고향이었는데 그 언니가 소개를 해줬어요.”
―그때 박동선씨는 어떤 상황이었나요?
“자기 아버지가 편찮아서 일시 귀국한 건데, 당시 조지타운 유니버시티 학생회장을 하고 있었어. 그날 거기 다방에서 나와서 명동 태극당이라는 빵집에 가서 아이스크림이랑 빵 먹고 그렇게 알게 됐어요. 그래서 있는 동안에 계속 만나게 됐지요. 미국으로 돌아가서도 나한테 만날 편지를 쓰더라고. 미국 와서 공부하면 어떻겠느냐고요. 박동선 생각에는 나를 데려다가 같이 살고 싶었던 것 같아. 그래서 결국 내가 미국으로 연인을 찾아가게 된 거예요. 박동선이 날 미국에 오게 하기 위해서 우리 집으로 선생도 보내줬어. 그 선생님이 역사공부, 영어까지 가르쳐줬어요. 촬영하고 바쁘고 졸려 죽겠는데 선생이 오니까 하긴 해야 할 거 아니야. 그러니까 자기 딴에는 나를 길러서 자기 사람으로 만들려고 했던 거 같아. 그래서 1961년 미국유학도 주선해 준 거지요. 사실 연극학교보다도 영어를 배워가지고 보통 대학에 들어가서 공부하고 그러자고 그랬는데. 근데 내가 보니까 거기도 학생이고, 나는 소녀가장이고 해서 상황이 쉽지 않았어요.”
박동선에게서 한남체인 인수하게 된 배경
―근데 박동선씨 집안이 굉장히 부자잖아요.
“내가 보기는 부자인데 밥도 외상으로 사다 먹고 그러더라고. 뭐 돈이 없었나 봐요. 그때 당시 뭘 준비하고 있었는데, 조지타운 클럽(워싱턴에 세워진 첫 회원제 로비스트 클럽으로 가입비가 수만 달러가 넘을 정도며 워싱턴서 수입 규모 52곳 중 5위. 1976년 8월 박동선도 창립멤버였다)에 만날 갔었다고. 그러면서 자기 형님한테도 많이 도움 주고 굉장히 비즈니스 쪽으로 많이 하더라고요. 근데 보니까 나한테는 자신이 없었어요. 결혼하면 우리 어머니는 어떻게 되느냐 했더니 그건 자긴 모른대. 네가 알아서 하래. 거기서 내가 꼭지가 돌았어. 내가 여기서 공부하고 그러면 수입이 없는데, 어머니를 알아서 모시라고 하니. 그래서 한국으로 돌아와 버렸지.”
―그 이후로 안 만났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상복을 입고 날 보러 왔어. 초상났는데, 자기가 지루해서 잠깐 왔대.”
―상복 입고 달려올 정도면 사랑하는 거 아닌가요?
“그 사람은 그랬던 거 같아. 난 그런 게 둔했고. 살기 바빴는데 사랑은 무슨….”
―그 후에 박동선씨로부터 한남체인을 인수하게 된 계기는요?
“내가 1985년도에 박동선씨한테 5억원을 빌려줬었거든요. 그래서 돈을 받으러 한남체인에 갔다가 한남체인을 인수하게 된 거야. 사실 7억 빌려줬는데 2억은 받고 5억은 못 받았던 상황이었거든요.”
―그 돈으로 인수가 됐나요?
“그때 미국에서 막 나와서 정신이 없는 상황이었는데, 한남체인이 부도가 난다고 해서 한남체인을 샀어요. 계산을 해보니까 30억원이 있으면 이 회사를 편안하게 살릴 수 있겠더라고. 주식가는 12억원밖에 안 되는데 가수금 그걸 내는 데는 한 20억원 정도의 운영자금이 있어야겠더라고. 박동선이가 부도를 내놓으니까 기분이 좋을 리가 없잖아요. 그때 학교(박동선씨 집안에서 소유하고 있던)가 감사에 걸리고 별별 소리를 다 하며 날 꾀어서 돈을 빌려갔거든. 그래서 그때만 하더라도 나는 참 진실한 친구다,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해왔는데, 그래서 어떤 면에서 보면 한이 맺힌다는 이야기가 거기에서도 나오는 거고. 그래서 한남체인을 하게 돼요.”
연예계 사람과는 한 번도 사귄 적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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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만장자와 결혼하는 길〉. |
“1990년대 후반에 자주 만났어요. 나 혼자 살고 있을 때니까. 그래서 박동선씨하고 자주 밥도 먹고, 다시 좋은 감정을 갖게 됐는데, 어느 날 밤에 자다가 말고 중간에 사람 깨워서 당뇨 때문에 팔다리가 저려서 아파 잠이 안 온다고 주물러달라는 거야. 기가 차잖아. 그래서 속으로 이거 쫓아다니다가 안마사밖에 더 되겠나 싶었어….”
―그 일로 헤어진 건가요?
“헤어지고 뭐한 것도 없어. 자주 만나서 밥도 먹고, 그러고 나서도 계속 만나지. 만나긴 만났는데 결혼 가능성을 아예 접었다는 거지.”
―가장 최근은 언제 만났어요?
“지난해 10월 부산국제영화제 할 때 같이 갔었어요. 입장도 같이 했는데 누가 볼까 봐 내가 먼저 막 걸어가 버렸지.”
―결혼은 어떤 분과 하셨어요?
“일본에 있는 교포 양반하고 결혼을 했는데, 그래서 1973년도에 일본으로 떠나서 펍 클럽 ‘지희네’ 사업을 하게 된 동기도 그 때문이에요.”
―결혼생활은 얼마나 했나요?
“1966년에 결혼했다가 3년 후 생활고로 헤어졌어요.”
―남자배우하고 사귄 적 있나요?
“연예계 사람하고는 나는 한 번도 사귄 적 없어요. 내막을 너무 잘 아니까. 요즘은 돈벌이가 되지만, 옛날엔 스태프나 감독이나 너무 배고픈 직업이었어요. 내가 장사를 한 이유도 배고픈 게 싫어서 그랬어요. 세상에서 제일 싫은 건 ‘가난’이에요.”
5·16 혁명 주체세력들과의 인연
―1960년대 혁명주체들과도 교분 있었죠?
“그때 당시 비밀요정이 많았고, 그리고 퇴폐라 그래야 하나? 칠공주 붙들려가고 그런 사건 있었다고. 내가 신미리라고 기생 출신 배우를 아는데, 그 여자한테 한남동 집 세를 줬거든. 근데 그 집에서 비밀요정을 했어. 그래서 거기에 대한 이야기를 만날 와서 해줬지.”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 실종 사건 당시 프랑스로 김 전 부장을 유인한 배우가 한때는 최 선생님인 것으로 알려졌었는데, 다른 여배우였다면서요?
“나는 일본에 살고 있을 때였으니까 잘 모르겠어. 어떤 여배우가 애인이었던 건 맞고.”
―김재규 전 부장은?
“내가 서울에 있을 때 김재규 부장이, ‘몸뻬’라는 별명의 여자가 식당을 하고 있었을 때, 가면 와 있더라고. 그때 한두 번 본 적 있어. 영화 하고 그럴 적에는 바쁘게, 여기저기 돌아다녔으니까. 자유당 때는 여배우들이 화초기생 했었잖아요.”
―요인들의 파티에 많이 불려다녔겠네요.
“차지철 그 사람이 초대하면 치마저고리 한 감씩 선물로 줘요.”
―그래도 정이 있네요.
“정이 많은 사람이었어요. 그 사람 노래 18번이 ‘울어라 열풍아’였어. 그걸 만날 불렀어.”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과도 교분이 있었나요?
“이후락씨가 비서실장을 할 때였는데, 소설가 이병주 선생이랑 어울려서 자주 만났는데, 내가 결혼 후에 뭘 부탁했을 때도 잘 들어주고 그랬어. 그때 남편이 플라스틱 공장을 하겠다고 해서 좀 도와주십사 했는데 바로 연락이 오더라고. 그거 해도 별로 사업성이 없으니까 하지 말라고.
그때만 해도 애 아빠가 잘돼야 나도 잘된다 해서 굉장히 남편 지원을 많이 했어.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그런데도 안 되더라고. 있는 거 없는 거 다 투자했는데도 안 되고, 알거지가 되더라고. 나중에 월세 10만원짜리 집으로 이사를 했어. 그래서 다시 영화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지. 그래서 남편한테 이혼해 달라고 한 달 동안 울었지. 하도 조르니까 남편이 귀찮았는지 이혼을 해주더라고.”
자니윤과의 인연
―박정희 전 대통령은 만나봤어요?
“제일 처음은 1962년도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 시절에 연합뉴스 일일기자로 인터뷰를 갔을 때였어요. 내가 미국유학에서 막 돌아와서 최고로 날릴 전성기 때니까. 박 대통령 옆에 앉아서 이것저것 물어보고. 막 그랬지요.”
―대통령으로서는 못 만났나요?
“그 후에는 청와대 파티에서 봤어요. 아시아태평양 영화제 수상 기념으로 청와대에서 초대해가지고 정원에서 파티했는데, 거기서 봤지.”
―자니윤씨와의 관계는 어떻게 시작됐나요?
“자니윤은 <인걸 홍길동> 할 때, 그때 연출부 조감독이었어요. 그때는 자니윤이 아니라 윤종선이었지. 더 어렸을 때 만난 친구예요. 그래서 같이 영화도 찍고 그랬는데, 미국유학 간다고 그러고, 나는 사업하러 일본 가고 그러면서 헤어졌지요.
근데 미국에서 다시 만났어요. 내 딸이 미국 비벌리힐스로 유학을 갔었거든. 근데 학교에 들어가려면 집이 있어야 한대. 세를 얻으려니까 매달 2000~3000달러를 지불해야 하는 거야. 그래서 아예 1층, 2층 두 집을 다 샀어요.
근데 어느 날 금자라는 친구에게서 저녁식사 초대를 받았는데, 거기에 자니윤이 있더라고. 맨 처음에 나는 몰랐어요. 그러고 있는데 다가와서 자기가 윤종선이라고 하는 거야. 바닷가 근처에서 살고 있다기에 그럼 우리 딸 사는 데 2층으로 옮겨서 딸 좀 봐달라고 했지. 그렇게 시작됐어.
그 후 편지를 만리장성같이 써서 보내면서 좋다고 그러는 거야. 그때만 해도 40대니까 결혼 생각도 할 수 있고 그랬는데. 보니까 알거지인 거야. 옷도 사줘야 하고 다 그런 상황이었어요. 그래서 또 마지막으로 출세를 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대리만족이라는 게 있어요.”
―나름 뒷바라지를 잘한 것 같은데, 결혼까지 이어지진 않았군요.
“자니윤이 따라다니면서 보니까 재주는 있어요. 미국말 배워가지고 코미디 한 거 보면. 그렇게 친하게 지내다가, 한국에 자니윤을 알려야겠다는 생각에 1988년에 프레올림픽쇼를 하게 된 거예요. 그 후에 자니윤쇼도 해야겠다고 맘먹고 했지. 그런데 변하더라고. 유명해지고 그러니까 우쭐해지고 그러더라고. 안 되겠구나 싶었지. 나 몰래 내 증권 맡겨놓은 거 팔아가지고 영화제작비로 쓰고 그랬어요.”
“남자만 보면 손해가 생겨”
―자니윤씨 때문에 손해를 많이 봤나요?
“많이 없앴지. 그 당시 100만 달러면 큰돈 아닌가요? 영화제작(1986년 미국에서
―선생님 연인은 딱 그 세 분인가요?
“그런 편이지. 그러니까 남자하고 여자하고 돈이 개입되면 깨지게 돼 있어. 첫 남편도 그랬고. 그 후에 박동선도 그랬고. 자니윤까지. 나는 남자만 보면 손해가 생겨.”
―한남체인으로는 돈을 번 것 아닌가요?
“한남체인은 돈 안 까먹었어. 그건 얹혀서 되팔았으니까 수익이 났지요. 근데 그때 한남체인 팔게 된 거는 프레올림픽쇼 제작하느라 그렇게 됐어요. 나는 제작자니까 자동으로 올라가잖아. 하고 싶은 걸 다 했지요.”
―현재 자니윤씨는 결혼해서 잘살지요?
“자세한 건 모르지만, 그 여자(자니윤 부인)가 유산을 많이 받았다나 봐. 자니윤은 나한테 타격을 많이 받았어.”
―타격을 받았다는 건 무슨 이야기인지요?
“갑자기 내가 집에서 막 내쫓았으니까. 그러니까 충격이 컸지요. 나는 남자를 만나서 존경하고 뭐하고, 그런 게 없어요. 물론 적도 없어요. 애 아빠는 지금도 만나요. 일본 가면 애 아빠하고 지금 사는 여자하고 나하고 셋이 만나서 차 마시고 그래요. 박동선이랑도 결혼 후에도 전화하고 그랬어요. 자기는 영원한 친구기 때문에 결혼 그런 거 상관없다, 만나야 한다고 해서 만나고 그랬어요. 그때 우리 애 아빠는 펄쩍펄쩍 뛰고 그랬지. 자니윤은 자니윤대로 박동선이 만난다고 난리였고. 그래서 언젠가 한 번 듣는데 내가 ‘왜 지랄이야’라고 했더니 죽이니 살리니 난리였지. 자니윤은 내가 자기를 보이처럼 취급한다고 그랬어. 다른 욕은 할 줄 모르고, 내가 지랄한다는 소리는 잘하거든. 그러니까 그 질투, 내가 보면 아무것도 아닌데 질투하고 뭐하고 해보자고 덤비고. 어휴 지겨워서….”
“만나본 정치인 중에 JP가 가장 멋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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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11월 30일 제1회 조선일보 영화수상식에서 여우조연상을 받는 최지희. |
“많지, 많은데. 첫째가 JP(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 그 양반도 멋있었고. 김대중씨는 내 친구 보이프렌드였기 때문에 몇 번 만난 적이 있고, 정치인들은 그 당시 다 만났지. 김영삼씨도 만났었고. 다 만나봤어. 전두환씨도 만나고.”
―정치인들에게는 거의 여배우 애인이 있었나 봐요?
“다 있었겠지. 난 왜 거기에 끼지도 못했는지 몰라. 그 왜 유력정치인 애인이었던 두 여배우가 남산 체육관에서 벌거벗고 싸움질한 건 유명하잖아요?”
―인생에서 가장 즐거웠던 시절이라면요?
“1990년도에 내가 일본 도쿄에서 ‘지희타운’을 했었는데, 그때 옆에 짓고 있던 위너스빌딩에 한 40억원 정도 투자를 했어요. 위에다 골프장 겸 헬스클럽을 하는데, 레저도 같이 하자고 해서 신라호텔에서 사람들을 스카우트해 왔어요. 그런데 보니까 점점 그 동업자를 못 믿겠더라고. 그래서 내가 그냥 주식값만 받고 그만뒀는데, 신라호텔에서 스카우트한 사람들이 갈 데가 없잖아요. 그래서 그 사람들 먹고살게 하려고 논현동에 식당을 냈어요. 이름을 뭐라고 지을까 하다가 일본에 ‘지희네’가 있으니까 한국에서도 ‘지희네’로 하자고 해서 그렇게 이름을 지었더니, 손님들이 계속 최지희를 찾아서 나는 완전히 앞치마 두르고 식당에 묶이게 됐지요.
그래서 그 식당에서 한 10년 일하다 보니까 그 당시 유명한 사람들을 다 만날 수밖에요. 직업 중에서는 식당 할 때가 제일 재밌었어요. 사람을 많이 만나니까. 나는 평생 군중 속에서 살았어요. 군중 속에서 고독도 있고, 괴로움도 있고, 아픔도 있고. 그 이상 행복한 게 없더라고.”
―지금 주업이 있나요?
“없어요. 있는 거 간수 잘 하고 먹고살면 되니까. 어떻게 죽어야 하나 그것만 생각하고 있어요. 사는 게 재미가 없어요.”
―많은 일들을 겪어서 허탈한 것 아닐까요?
“그런 게 있어요. 열심히 살다가, 어느 순간 놨을 때의 허탈감, 공허감. 극장에 관객이 많았는데 나 혼자 서 있는 공허함. 내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느낌 그런 심정이에요. 열심히 살다 보니까 인생이 아무것도 아니더라고.”
―지금 함께 사는 가족은?
“딸하고 같이 살아요. 미혼인 딸과 둘이 같이 살고 있어요.”
―부동산 투자도 상당하게 했던데요?
“부동산 투자는 뭐 자유당 때부터 집 사고팔고 그랬지요.”
―그러면 지금 부동산 자산은?
“그건 이야기할 수가 없어요. 돈 받을 게 한 200억원 되지요. 100억원 가까이 떼였지만 그래도 받을 게 그 정도 있어요.”
―재산이 많은가 봐요?
“많았었지요. 그런데 뭔가 구름 같아요. 많은 걸 쥐었는데, 보면 없어요.”
―1973년도 이후 영화계를 떠나서 전혀 작품활동을 안 한 이유가 있나요?
“영화법이 바뀌면서 작품 하기도 어렵고 그래서 TV 쪽으로 시선을 돌려 MBC 전속 탤런트가 됐는데, 만날 대사 외우는 게 싫어서 1973년도에 일본에 다니러 갔다가 다시 안 돌아오고 사업을 한 거지요.”
―가장 호흡이 잘 맞은 감독이라면요?
“이형표 감독님이지요. 제가 미국서 와서 그때부터 이 감독님과 호흡을 맞췄어요. 이 감독님이 저에 대해 제일 잘 알아요.”
―가장 아쉬웠던 작품은?
“작품이 끝나고 나면 다 아쉬워. 만족이라는 게 없어요.”
“연애는 하고 싶다”
―선배로서 요즘 가장 매력적이라고 느끼는 여배우가 있다면?
“진짜 연기를 하는 배우는, 김희애인 것 같아요.”
―요즘 보신 영화 중에 눈길이 가는 작품이 있던가요?
“가장 최근에 본 건 <써니>인데, 우리가 했던 영화랑 똑같아요. 그 영화 보니까 내가 했던 역할 생각이 나더라고요. 짱으로 나왔던(웃음).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아.”
―사업가, 영화배우, 어떤 삶이 더 좋았나요?
“무엇을 하든 제일 괴롭고 외로웠던 건, 나 하나 지키기 위해서 무지무지하게 애를 써야 했던 거예요.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실패도 많았는데, 마음이 독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서 그랬던 것이 아쉬워요. 남자관계도 그래요. 돈이 개입되니까 모든 게 어려워져요. 이런 게 내 운명인가보다 생각하고 있어요. 그렇게 힘들게 하다 보니까 남자가 무서워서 근처도 가기 싫어요.”
―그래도 선생님 인생에서 멋진 남자로 기억이 날 사람이 있다면요?
“하나도 없어. 나한테 해만 끼쳤지. 도와주는 사람은 없었다고. 정신적으로나 금전적으로나. 멋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어. 알고 나서 보면 다 지질하고, 시시하고. 나만도 못하고. 자니윤이 폼 재고 있는데 바라보면서 ‘웃기고 있네’ 내가 그랬지.”
―그래도 사랑은 하고 싶지 않나요?
“연애는 하고 싶지요. 그런데 없어요. 안 한 지 꽤 오래됐어요. 죽을 때까지 연애는 할 수 있지. 마지막 사랑을 하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돼요.”⊙
<자니윤 쇼>는 개인적으로 알고 지내온 김현욱(金顯煜) 현(現) 평통자문회의 수석부의장(당시 민정당 의원)이 황인성(黃寅性) 전(前) 국무총리(당시 아시아나항공 사장)를 소개해 줘 그분의 후원으로 제작, 방송하게 된 프로그램입니다. 1982년 제가 제작한 영화 제가 최지희씨 증권을 팔아 영화 제작비로 사용했다는 얘기도 사실이 아닙니다. 저는 최지희씨가 증권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조차 모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