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은 서비스입니다. 건축가는 자신의 능력만큼 일을 맡고, 맡은 일은 뼈가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철저하게 서비스하라는 겁니다. 10년만 그런 자세로 일하면 그 분야의 권위자가 될 것입니다”
⊙ 국회의사당, 서울대학병원, 남산 어린이회관 등 현역시절 170여 점 작품 남겨
⊙ 건축업 하는 선친 손에 이끌려 경성공업전문 진학…모스크바 유학 꿈꾸며 평양行
⊙ 세계적 건축설계사무소 ‘아이엠페이’에서 연수…국내 최초 미국식 설계기법 도입
⊙ 朴正熙 최고회의 의장, KBS남산방송국 설계 맡겨
⊙ 가장 존경하는 건축가는 핀란드 태생 모더니즘의 아버지 ‘알바르 알토’
李光魯
⊙ 1928년생. 서울대 건축학과 졸업. 同 대학원 공학박사.
⊙ 서울대 공과대학 교수, 일본 도쿄대학 교환교수, 대한건축학회 회장, 문화재위원회 부위원장,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 미국 건축가협회(AIA) 명예특별회원 역임.
⊙ 상훈 : 서울시 문화상, 대통령 표창, 보관문화훈장, 대한민국 예술원상.
⊙ 저서 : 《건축구조》 《한(韓)의 건축문화》 외.
⊙ 국회의사당, 서울대학병원, 남산 어린이회관 등 현역시절 170여 점 작품 남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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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光魯
⊙ 1928년생. 서울대 건축학과 졸업. 同 대학원 공학박사.
⊙ 서울대 공과대학 교수, 일본 도쿄대학 교환교수, 대한건축학회 회장, 문화재위원회 부위원장,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 미국 건축가협회(AIA) 명예특별회원 역임.
⊙ 상훈 : 서울시 문화상, 대통령 표창, 보관문화훈장, 대한민국 예술원상.
⊙ 저서 : 《건축구조》 《한(韓)의 건축문화》 외.
“난 죽기 전에 150명 남짓 모여 기도할 수 있는 조용한 산상(山上) 기도원을 짓는 게 꿈이오. 10여 년 전 세상을 떠난 아내와 함께 교회를 못 다닌 것이 못내 아쉬워서….”
푸른 산 정상에 건평 330㎡(100평) 정도의 백색 기도원, 그가 도면으로 그려 색(色)을 입힌 기도원은 양떼가 목동(牧童)의 인도로 도착한 ‘오아시스’였다!
그는 한국 건축학계의 원로 이광노(李光魯·82) 서울대 건축학과 명예교수다. 그의 아호를 딴 무애(無涯)건축연구소(1955년 설립)는 ‘김수근(金壽根) 건축연구소’와 쌍벽을 이루면서 한국 현대건축을 선도했다. 지난 1월 8일 오후, 서울 중구 태평로 《조선일보》 근처 광안(光安)빌딩. 그의 사무실은 한국 현대건축을 개척한 선각자의 체취로 가득했다. 국회의사당, 국립박물관, 남산 어린이회관 등 한국의 건축사를 장식할 만한 건축물 모형들과 자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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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엔전우탑 설계도면. |
28세 때 서울공대 건축과 교수로 부임한 그는 30여 년 동안 교단에서 후학들을 양성하는 한편, 건설부 건축위원, 문화재위원, 서울시 도시계획위원·건축위원, 대한건축학회장으로 일했다. 그가 1949년부터 1987년까지 ‘현역’ 시절 남긴 작품은 170여 점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대한극장·크리스천아카데미 등은 근대건축을 충실하게 해석해 한국적으로 표현한 작품으로, 중국대사관·서울대 규장각도서관은 전통미를 표현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88올림픽경기장과 선수촌, 법원청사, 코엑스몰, 국립중앙박물관, 인천국제공항 등의 심사위원장을 역임했고, 1960~1970년대 한국건축사의 새 장을 연 무애건축연구소와 서울대 건축과를 축(軸)으로 현대 건축가 양성의 ‘본산(本山)’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모스크바 유학 꿈꾸며 北行… 김일성의 전쟁준비 목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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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광노 교수가 최근 설계한 작품 ‘산상기도원’. 150여 명의 신자들이 조용히 묵상기도를 드리는 구조로 설계했다. |
1945년 4월, 그는 경성공업전문학교(서울공대 전신) 건축공학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이광노는 이미 건축공부에 흥미를 잃어가고 있었다. 건축을 ‘예술’로 생각했던 이광노에게 교수들은 ‘시멘트 골조’니 뭐니 하며, 당장 써먹을 ‘기술’만 가르쳤고, 설상가상(雪上加霜) 광복정국으로 교내는 좌우익으로 갈라져 혼란했다. 그의 말이다.
“광복을 맞고 좌우익 갈등이 벌어지자 ‘철학’공부를 하고 싶어 철학과로 옮기려 했어요. 교내에 좌익 거물이 몇 있어 함께 YMCA 회관에서 열린 ‘공산당 창당대회’에 가보기도 했지요. 콧수염이 멋진 여운형(呂運亨) 선생의 카랑카랑한 연설과 상대적으로 연설실력이 형편없는 박헌영(朴憲永)의 연설이 지금도 기억납니다.”
그러나 그는 “공산주의 원리에 대해서는 찬성했지만, 방법론에 대해선 반대했다”면서 “그러는 사이 건축이란 무엇인지 맛을 보게 돼 철학공부를 그만두게 됐다”고 했다. 국립도서관에서 영국의 배니스터 플레처(Sir Banister Fletcher) 경이 쓴 《건축사》(A History Of Architecture)를 비롯해 건축 수필집을 탐독했다. 그는 건축사를 읽으며 “내가 생각하는 낭만적, 문학적, 철학적 요소들이 모두 건축 속에 용해될 수 있는 거구나”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좌우익의 쓰나미 속에 그도 한가지 이데올로기를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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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친 이성근, 모친 김일원과 함께한 가족사진. |
이광노는 1947년 봄, 서울 아현동 집을 나서며 부모님께 “모내기를 다녀오겠다”고 둘러대고 북한 지역으로 무전여행(無錢旅行)을 떠났다. 해주 부근에서 ‘로스케’에 잡혀 유치장에서 사흘을 보낸 그는 사리원을 거쳐 평양으로 들어갔다. 그곳 평양에서 노동법시행 군중집회를 구경했고, 을밀대(乙密臺)에 올라 대동강을 굽어보며 분단의 현실을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그는 끼니를 위해 노동판을 전전했다. 탄광으로 일하러 갔다가 간첩으로 오인돼 감옥에 끌려가 일주일 동안 강냉이죽만 먹기도 했다.
그는 “그때 문득 ‘내가 왜 이런 짓을 하는가’라고 생각했다”면서 “‘모스크바는 글렀다, 하루빨리 내려가야겠다’고 판단하고 남행길에 올랐다”고 했다. 북에서 그는 김일성(金日成)이 군사퍼레이드를 펼치면서 전쟁준비를 하는 것을 목격했다. 38선의 경계가 강화됐으나 가까스로 철원을 통해 집으로 귀환한 후 돌연 육사(陸士)를 지원했다.
“만약 입학을 했다면, 박정희(朴正熙) 대통령과 동기(2기)가 되는 거였어요. 1차시험 합격 후 구두시험을 치르러 갔더니, 일본도를 차고 소위 계급장을 단 면접관이 ‘장차 우리나라는 총칼로 할 것이 아니라 기술로 겨뤄야 한다’며 ‘광복 후 조국을 건설해야 할 기술자가 군에 들어오면 어떡하나,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라’고 했다”면서 “그때 불현듯 내가 실수했구나”란 생각이 들어 돌아섰다고 한다. 그는 “나는 하늘이 정해준 목수”라는 생각으로 서울공대 건축과로 돌아왔다고 한다.
총각 때 한옥 4채 값을 설계 당선금으로 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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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5년 10월 20일, 국립중앙박물관 국제설계경기에서 1등으로 뽑힌 김창일씨의 작품을 주돈식(가운데) 문체부장관과 독일의 빌헬름 퀴커 심사위원장, 이광노(주장관 왼쪽) 부위원장 등이 살펴보고 있다. |
“철학 스승인 고 박상현(朴相鉉) 연희전문 철학과 교수는 ‘기왕 건축을 했으니 이론과 실천이 결합되도록 하라, 작품을 하려면 구라파에서처럼 시간이 흘러도 예술품으로 존재하는 작품을 남기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분의 말씀대로 실천하자고 굳게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러나 현장감이 없는 학교수업에 얼마 지나지 않아 갑갑함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이광노는 ‘종합건축연구소’를 설립하고 장충체육관을 설계한 서울대 건축과 스승 이천승(李天承)을 찾아 사숙(私淑)했다. 1948년 학부 2학년 때부터 설계사무실에 출근하며 학교 공부와 실습을 병행한 것이었다. 그는 학부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고, 1947년 1학년 당시 건축공학과 전체 수석(首席)을 차지했다고 한다. 그즈음, 그는 방학 때면 교통부에 나가 실습을 했다.
―그럼, 교통부나 ‘이천승설계사무소’ 등에서 실무를 배운 셈이군요.
“그렇죠. 6·25전쟁이 터지던 해, 학도호국단에서 토목과와 건축과를 대표하는 간부가 됐습니다. 전쟁이 발발하자, 교통부에 들어갔습니다. 6·25 때 교통부는 전쟁물자 수송을 담당했기 때문에 병역을 대체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대체복무인데, 철도 수송지휘관(RTO·Railway Transport Officer)으로 복무했습니다. 9·28 서울수복 때는 철도국 부대에 배속돼 7사단과 함께 원산(元山)파견대로 나가 청진(淸津), 북청(北靑)에서 근무하다 흥남(興南)에서 배를 타고 탈출했습니다. 결국 부산에서 대학을 졸업했죠.”
이광노는 대학 졸업 후 그해 겨울 경주 국립공원 계획에 참여한다. 교통부 시설국장을 지낸 당시 내무부 토목국장 이봉인(李鳳寅)씨는 그를 석 달 동안 경주에 파견해 일하도록 했다. 그때 그의 인생에 전환점이 될 ‘사건’이 일어났다. 경주국군묘지 및 기념탑 현상설계, 유엔전우탑 현상설계에 응모, 김중업·정인국(鄭寅國) 등 기라성 같은 선배 건축가들을 따돌리고 연이어 당선하며 건축계에 화려하게 데뷔한 것이다. 그는 “가회동 한옥 한 채에 500만원 하던 시절에 2000만원의 ‘떼돈’을 상금으로 받아 최고급 양복 20만원짜리 하나 사입고, 나머지는 선후배들과 나눴다”면서 “총각 시절이니까 가능했지”라며 웃었다.
첫 직장인 교통부 시설국은 건축 초년생인 이광노에게는 ‘자궁’과 같은 곳이었다고 한다. 서울 수복 후인 1953년, 이광노는 건축학회 추천으로 6개월간 미국대사관 수리공사를 맡았다. 그는 그곳에서 당시 62세의 애너(Anner)라는 미국 건축가를 만났다고 한다. 그는 “애너에게서 처음으로 미국식 설계방법을 배웠다”면서 “나로서는 처음으로 외국의 건축기법에 눈을 뜨게 된 결정적 계기였다”고 했다.
―1954년 10월 미국 뉴욕에 있는 아이엠페이(I.M.PEI) 건축설계 사무소로 떠난 계기는 뭐였습니까.
“6·25 직후 한미재단에서 주택원조자금을 한국에 주어 향촌동에 대규모 주택단지를 세웠습니다. 정부는 미국식으로 주택을 지어보자며 강명구, 유덕호, 이건영씨 등 몇 사람을 선발해 보냈습니다. 그때 저도 동료들과 함께 부산에서 수송선을 타고 25일간 항해해 뉴욕에 도착했습니다. 말하자면 주택사업을 위한 트레이닝이었습니다. 게다가 대학 동기동창인 안병도(납북)의 외사촌 동생(崔安分)과 결혼을 하고 나니, 공부는 나중에 하더라도 아이엠페이라는 세계적인 건축설계 사무소에서 미국의 세계적 수준의 건축기술을 배우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습니다.”
이광노는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건축가로, 파리 루브르박물관을 설계한 중국계 이오밍 페이의 문하에서 미국 건축기술을 익혔다. 그 때문에 그는 일본식 건축 스타일에 젖은 동시대의 다른 건축가들과는 달리 미국건축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건축가로 통한다. 이광노 교수는 “디자인 프로세스, 즉 아이디어를 만드는 법, 사무실 시스템 등은 온전히 아이엠페이에서 배운 것”이라며 “미국대사관 수리공사 때 미국식 설계도면 그리던 것을 이오밍 페이 앞에서 쓱쓱 그려대니 그가 놀라더라”고 했다.
후지시마 교수, “총독부 건물의 상투를 자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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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복중학교 시절의 이광노 교수(앞줄 왼쪽). |
“방송국 건설공사가 시작되자, 통행금지 시각이 지났는데, 현장에서 박정희 최고회의의장이 ‘설계자 어디 갔느냐’고 찾았습니다. 새벽 1시에 퇴근하면서 공사현장을 꼭 들러 보고 가셨습니다. 그분은 건축가는 설계도면 그리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공사가 준공될 때까지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건축의 시스템을 아는 분이었어요.”
그는 “1969년, 육영수(陸英修) 여사께서 ‘어린이들에게 ‘과학정신’을 길러주었으면 좋겠다’며 ‘남산에 어린이회관을 지으려 하니 설계를 해달라’는 의뢰를 받았다”며 “플라네토리움을 설치해 어린이회관을 지었고 건물 꼭대기의 둥그런 돔은 ‘레이더돔’”이라고 했다.
“동양에서 가장 큰 오카야마(岡山)천문대를 갔을 때 일이에요. ‘미국 애리조나주의 키즈픽(Kidspeak)천문대에 비하면 초라하다’고 하자, 도쿄대 교수인 천문학자는 ‘별은 멀리도, 가까이도 있다. 중간지점까지의 별을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우린 행복하다’고 했어요. 천문대에서 별과 태양을 보면 인생관이 달라져요.”
구 총독부 건물이 6·25전쟁으로 큰 손상을 입자,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은 “건물을 복구하는 것이 옳으냐, 철거하는 것이 옳으냐”며 대한건축학회에 물어왔다. 총독부 건물은 멋진 디자인의 건물이지만 사무실로의 유효면적은 35%밖에 안된다는 것이었다. 이광노 교수는 6·25전쟁 직후 대한건축학회 최연소 이사로 구 총독부 청사 철거논의에 참여했다. 그의 말이다.
“선배 건축가들은 우리나라 제헌국회가 개원하고 초대대통령 취임식이 있었던 역사적 상징성이 강한 건물이니 수리하는 쪽으로 결론을 냈습니다. 정부도 건물 보존을 위해 막대한 돈을 들여 정부청사로 사용했죠. 1981년 새 정부청사가 준공되자 총독부 건물은 국립박물관으로 개수해 전시용으로 썼습니다. 나는 중앙문화재위원회 제1분과위원장(유형문화재)이었습니다. 1984년 일본 도쿄대학 건축학과 교환교수로 갔을 때 《한(韓)의 건축문화》라는 책을 읽게 됐습니다. 일본 최고의 건축학자 후지시마 가이지로(藤島亥治郞)가 쓴 책이었습니다. 이분은 서울대 전신인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 초창기에 교수로 일하며 한국건축에 대한 다양한 연구를 한 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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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년대 종로의 무애건축사무소 시절의 이광노 교수. 미국 아이엠페이 건축사무소에서 연수를 받고 돌아온 직후라 나비넥타이를 매고 있다. |
후지시마 교수는 “도쿄대학 2학년 재학 중 여름방학 때 한국건축을 연구하려고 도쿄대 미술사학자로 《조선의 건축과 예술》을 지은 세키노 다다시(關野貞) 교수의 지시로 경복궁을 찾았다”면서 “그때 경복궁은 총독부 건물을 신축한다고 말뚝을 박는 중이었고, 좋은 옛 건물을 부수고 있는 처참한 광경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노태우(盧泰愚) 대통령 시절, 건물이전을 지시했으나, 건물이전이 불가능해 포기했고, 김영삼(金泳三) 대통령 취임 후 경복궁 복원에 대한 요구가 강하게 일어났다.
“총독부 건물 북쪽을 가보니 궁전 건물과 사이가 20m밖에 떨어지지 않아 그 일대의 건물들은 지난 80여 년간 햇볕을 받지 못해 우중충했습니다. 게다가 경비원들은 ‘일본인 관광객들이 광장을 찾아 한국통치 설명을 듣고 단체사진을 찍는 것이 무척 자존심이 상한다’며 푸념을 했습니다. 문화재위원으로 총독부 건물 철거를 강하게 주장했습니다. 일부 언론에서 치욕의 역사도 보존해야 한다며 반대했으나, 광복회 등은 ‘당장 허물라’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이광노 교수는 문화재위원회 제1분과위원장으로 국립박물관 건립에도 관여했다. 그는 문화체육부 간부들과 함께 서울시내를 돌아보고, 서울시에 반환돼 가족공원으로 조성 중인 용산 미군골프장 가운데 5만 평을 신축부지로 결정했다고 한다. 그는 “국립중앙박물관을 신축하게 되자 나도 건축가로 설계를 하고 싶었다”고 했다. 1993년 10월 문화체육부는 국립중앙박물관 건축위원회를 만들어 이광노 교수를 건축위원장으로 임명했다. 설계안은 세계건축가연합(UIA)에 공식요청해 국제적으로 설계안을 공모했다.
“UIA는 1995년 10월, 세계 각국에 국립중앙박물관 설계를 공고했고, 46개국에서 341건의 작품이 올라왔습니다. 독일(심사위원장), 프랑스, 이탈리아, 미국의 저명 건축가와 함께 저도 5명의 심사위원에 포함됐습니다. 모든 작품은 무기명으로 심사했고, 심사위원 역시 무기명으로 투표를 했습니다. 일주일 동안의 심사결과, 한국 건축가의 설계가 당선됐습니다. 심사위원단 모두가 놀랐죠. 통례상 UIA 주관의 심사위원회에서 그 나라의 건축가 작품이 당선되는 예는 극히 드물었거든요. 우리 설계의 국제적 수준을 말해 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세계 5대 박물관의 하나’라는 UIA의 평가를 받은 국립중앙박물관은 이렇게 탄생했습니다.”
광복 1세대 건축의 대표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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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광노 교수가 1970년 설계한 서울대병원. |
―직접 설계한 건물이 헐릴 땐 기분이 어떻습니까.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격언이 있지만, 건축은 ‘예술은 짧고 인생은 길다’란 표현이 맞아요. 내 작품 가운데 없어진 것이 꽤 됩니다. 지금 태평로 한국프레스센터 앞 주차장 자리에 신문회관을 지었는데, 그 설계를 제가 했습니다. 신문회관 준공 기념사에서 《조선일보》 홍종인(洪鍾仁) 주필이 ‘집만 지어주면 뭐하나, 신문기자 대접을 제대로 해야지’ 하기에, 속으로 ‘신문기자란 저런 것이구나’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납니다.”
―작가와 마찬가지로 건축가도 건축물이란 작품을 통해 자신을 표현한다고 합니다. 지금껏 남긴 170여 개 이상의 작품을 연대기별로 구분해 볼 때, 일관되게 흐르는 건축관은 어떤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까.
“저는 물론 현대건축가지만, 제가 자란 한국적인 토양과 전통, 그리고 한국적 이미지를 갖고 건축을 합니다. 표현을 할 때는 기능을 존중하고, 경비(經費)를 존중해야 합니다. 한미재단의 아파트와 연립주택은 박스 스타일인 반면, 연세대 대강당의 기본안은 현대적이지만 승복(僧服)을 입은 한국의 여인을 형상화한 작품입니다. 흔히 ‘콘크리트 익스포즈’만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콘크리트는 뼈대(bone)일 뿐이고, 마감재가 있어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KIST나 서울대병원 건축에는 벽돌을 혼용한 겁니다.” 계속해서 그의 말이다.
“교육연합회 교육회관도 향토적 색깔을 우리나라 재료를 써 현대적 특색을 나타내고, 본(bone)과 스킨(skin)을 혼용해서 본만으로 끝내지 않았다는 것이 제 건축 이데올로기의 중요한 점이죠. 저는 한국의 전통적 요소들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강릉 오죽헌의 기념관, 국기원, 중국대사관, 서울대 규장각을 설계할 때는 기와를 입혔어요. 현대적인 것을 좇는 모더니스트 입장에선 ‘갓 쓰고 양복 입는 꼴’이라고 비판할지도 모르지만, 저는 갓도 멋있게 쓰면 좋다고 봅니다. 건물에 기와를 입히면 ‘고대(古代)’라고 하는 인식을 갖지 않아요.”
그는 “건축물은 상상력이 중요하다”면서 “KIST는 ‘자연과의 조화’, 서울대 마스터플랜과 국회의사당은 현대건축 속에서 한국인이라는 상상력을 갖고 현대건축을 해석한 것, 이것이 제 건축의 태도”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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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8년 12월, 서울시 문화상(건설부문)을 수상한 후 고건 당시 서울시장(오른쪽)과 기념촬영을 했다. 왼쪽은 부인 최안분씨. |
“나는 서울대 교수니까 대중적 인기란 것은 말이 안 되죠. 김수근, 김중업 두 분은 어떤 측면에서 보면 제 작품을 따라온 측면이 많습니다. 김수근씨의 작품, ‘경동교회’를 비롯해 상당수 작품이 벽돌을 사용합니다. 벽돌은 제가 성심여고를 설계할 때 처음으로 사용했습니다. ‘노출콘크리트’식 건물을 짓다 1980년대 들어서면서 다 붉은 벽돌을 쓰잖습니까.”
―김수근씨 일화를 보면 시내를 차 타고 지나다 마음에 들지 않는 자신의 건축물을 보고, “폭파해 버리고 싶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간혹 그런 마음이 드는 때가 있습니까.
“제 경우는 많지 않아요(웃음). 건축가가 자기 작품을 폭파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는 것은 작가정신이란 측면에서 멋스럽게 보일지 모르지만, 건축은 그렇지 않습니다. 건축은 건축가만의 작품이 아닙니다. 자신의 아이디어를 건축주(建築主)에게 설득해 관철시켜야 합니다.
건축주가 단지 경비가 부족해 당초 의도한 대로 안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특히 건축위원회가 있어 건축가의 손발을 묶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런 경우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포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국회의사당을 설계할 때, 기본설계 책임자로 활동했지만, 제 의도가 위원회와 맞지 않아 반영이 되지 않은 것도 있으니까요.”
▣ 이광노 교수의 설계 작품들![]()
서울시 도시 기본설계(1953), 삼성빌딩(1964), 교육회관(1965), 크리스천아카데미(1967), 국회의사당(1968), 홍릉 한국과학기술연구원(1968), 서울 한국어린이회관(1969), 서울대부속병원(1970), 서울대 종합계획 및 기본설계(1972), 제주대 종합계획 및 본관·도서관·체육관·교양학부 신축설계(1976), 주한중국대사관(1977), 영남대 본관·인문관·자연관·종합병원(1981), 서울대 규장각(1985), 아산재단 중앙병원 기본설계(1986), 서울대 신공학관(1986), 오지호 기념미술관(1997), 자원 회수시설 건물설계(1999), 통일기원탑(2000), 태양열 이용 업무시설(2001), S문화관(2002), 전통문화연구소(2003), 디지털빌딩(2006), 건축미술관(2007), 오페라극장(2008). |
工法은 진보, 아이디어는 퇴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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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년 도쿄 산토리홀에서 열린 손녀 장영주(왼쪽)씨의 공연장을 찾은 이광노 교수. |
이 교수는 “하버드대 건축과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 교수는 ‘건축가가 자신의 건물에 사인을 하지 않는 것은 건축물이 그 건축가의 얼굴이기 때문’이라고 했다”며 “‘장난’하는 건물을 지으면 자기 얼굴에 ‘낙서’하는 격”이라고 했다. 그는 “설계가 끝났다고 설계 자체가 끝난 것은 아니다”면서 “건축가는 수시로 나가서 점검하고, 감리(監理)해 준공될 때 비로소 설계가 끝난 것, 이것이 건축가의 태도”라고 했다.
이광노 교수는 20대 후반부터 30대 후반까지 10년 동안 활발한 작품활동을 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개발연대’의 건축물은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다. 그러나 그 후 그의 작품은 급격히 줄어 건축계에서는 ‘조로증(早老症)’에 걸린 것 아니냐는 시선을 받기도 했다.
이광노 교수는 “작품을 많이 만들었다고 좋은 것만은 아니다”면서 “역사적으로 유명한 건축가들도 결국 몇 개의 대표작으로 평가를 받았다”고 했다.
“국회의사당 설계를 할 때, 제가 기본설계 책임자였습니다. 본설계(실시설계)를 하려면 국립대 교수 신분으론 불가능했습니다. 결국 교수를 그만두지 않고 파트너로 참가했지만, 그때 나름 깨달은 것이 있어요. ‘악법도 법’이란 겁니다. 제가 비즈니스맨이라면 적당히 넘길 수도 있겠지만, 대학교수라는 교육자가 국법(國法)을 어기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겠어요? 설계를 하려면 학교를 그만두어야 할 것이고, 대학에 있으려면 작품에 한계를 두어야 되지 않겠느냐는 선택의 딜레마에 빠지게 됩니다. 그동안 작품을 많이 하다 보니 나 자신을 반성하게 됐고, 지식을 축적하자는 의미에서 결국 교수직을 지킨 것입니다.”
―우리 건축계에서 광복 1세대의 활동시기는 1950~1970년대입니다. 우리나라 경제개발이 막 시작되던 시기였죠. 김정수, 엄덕문, 김희춘, 정인국, 김중업씨 등이 이 시기에 활약했습니다. 이들을 우리 건축사에서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요.
“그분들의 공적은 작품 자체보다 건축이란 예술장르를 우리 사회에 알리고, 건축가들의 지위를 향상시키는 데 큰 역할을 담당했다는 점입니다.”
―최근 주변의 건축물들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듭니까.
“컴퓨터를 이용해 설계하는 등 공법(工法)은 많이 발전했으나, 아이디어는 별로 발전한 게 없는 것 같아 늘 안타깝습니다. 천편일률적으로 건물 외벽을 유리 포장하는 거죠. 광복 후 1세대들도 건물의 기능보다 조형을 강조하는 ‘구조적 장난’이 종종 있었습니다. 만약 내가 서울시 건축심의위원이라면 요즘 건축허가 안 나올 건물들, 수두룩할 겁니다. 건물은 상식선에서 합리적, 기능적으로 지어야 유행을 타지 않는 랜드마크가 되는 겁니다.”
알바르 알토를 가장 존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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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7년 미국 설계사무소 ‘아이엠페이’에 다녀온 직후 이광노 교수 부부가 연세대 동문 근처의 봉원사를 찾았다. |
“핀란드 태생의 모더니즘 아버지 알바르 알토(Alvar Aalto·1898~1976)를 흠모했습니다. 참 친근감이 가는 분입니다. 이오밍 페이는 같은 동양인이고, 한때 함께 일했던 분으로서 존경합니다. 우리나라 사람으로 저는 이천승씨의 영향을 받았고, 개인적으로 ‘절두산복자기념성당’ ‘국립극장’을 설계한 이희태(李喜泰)씨의 작품을 좋아합니다. 재능이 탁월한 분인데, 일찍 돌아가셨습니다.”
이광노 교수는 ‘후배에게 들려줄 말이 없는가’라고 하자, “작가는 연필을 놓지 말고, 직접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면서 “자신의 손을 거치지 않은 작품은 절대로 이름을 올리지 말라”고 했다.
“건축은 서비스입니다. 설계는 준공 테이프를 끊어야 끝나는 겁니다. 소홀하면 자기 이름에 욕이 되는 겁니다. 건축가는 자신의 능력만큼 일을 맡고, 맡은 것은 뼈가 부서져도 철저하게 서비스하라는 겁니다. 10년만 그런 자세로 일하면 그 분야의 권위자가 될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건축가는 한두 작품으로 유명해집니다.”
이광노 교수는 1958년 서울공대 최초의 여학생동창회장 출신인 고 최안분(崔安分)씨와의 사이에 5녀를 둔 ‘딸부자’다. 이 교수의 다섯 자녀 모두가 서울대 동문이다. 큰딸 명준(明峻)씨는 서울대 음대를 졸업하고, 미국 펜실베이니아대에서 음악박사 과정을 수료한 뒤 필라델피아 스워스모어(Swathmore) 칼리지에서 작곡과 강사를 지냈다. 그는 서울음대를 졸업하고 줄리아드음대와 템플대에서 박사학위를 딴 장민수(張敏洙) 하돈필드(Hardon Field) 오케스트라 악장과 결혼했다. 이들 부부의 큰딸이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사라 장’(한국명 張永宙)이다. 이광노 교수 책상 위, 사라장이 보내온 장미꽃 모양의 연하장이 기자의 눈에 들어왔다.
둘째 양준(良峻)씨는 서울대 음대(바이올린)를 졸업하고, 필라델피아 예술대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했다. 셋째 화준(和峻)씨는 서울대 음대를 졸업하고 보스턴 뉴잉글랜드 컨서버토리에서 음악석사를 받고 KBS교향악단의 수석 첼리스트로 활약하고 있다. 넷째 옥준(沃峻)씨는 서울대 미대를 졸업하고, 필라델피아 아카데미 오브 파인아트를 졸업한 조각가다. 다섯째 경준(京峻)씨는 홍익대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대학원 건축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아버지의 뒤를 이어 ‘여류 건축가’의 길을 걷고 있다.
이광노 교수는 “고 이병철(李秉喆) 회장과 건축에 대해 토론을 하며 지은 옛 삼성본관 건물이 지금껏 헐리지 않고 있는 것을 보면 건축가로서 행복하다”면서 “이병철 회장이 한양컨트리클럽을 지은 내게 안양컨트리클럽 설계를 맡기면서 ‘이 교수, 너무 멋 내지 말고 실용적으로 만들어줘’라고 한 소박한 말이 지금 생각하면 건축의 진리”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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