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한국의 영화감독을 만나다] 강우석

<이끼> <공공의 적> 등 17편으로 3000만명을 극장으로 부른 ‘승부사’

글 : 임도경  한국영상자료원 부원장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목록
  • 프린트
  • 스크랩
  • 글자 크게
  • 글자 작게
⊙ 임권택 감독의 <취화선>, 이창동 감독의 <초록물고기> 제작도 전액 지원
⊙ “난 예술영화 만들 자신 없어 오천만 관객과 놀겠다”
⊙ CJ로부터 빌린 100억원 갚지 못하면 2012년 다시 프리랜서 감독이 될 판

임도경
⊙ 이화여대 신문방송학과졸업. 동 대학원 언론학석사, 경희대 언론학박사.
⊙ 중앙일보 뉴스위크 한국판 편집장, 현 경희대 언론정보학부 객원교수, 한국영상자료원 부원장.
  강우석(50) 감독은 1990년 이후 충무로 중흥기를 이끌어 온 한국영화산업계의 파워맨이다. 강 감독은 영화제작, 배급에서 상영관까지 일원화시키는 할리우드 스타일의 제작시스템을 시도해 외화에 밀리던 한국영화의 배급률을 반전시키는 데 한몫을 단단히 해냈다. 그렇다고 그를 제작자나 배급업자 반열에 놓고 평가할 수만은 없다. 그는 감독으로서도 명실상부한 흥행사이다. 2000년대 이후 그가 만든 영화 4편 <실미도> <공공의 적2> <강철중:공공의 적 1-1> <한반도>만 모두 2300만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했다. 이번에 개봉한 <이끼>까지 총 5편의 영화로 최소한 대한민국 인구의 절반이 넘는 2600만명을 극장으로 불러들였다. 영화감독으로서 대단한 기록이다.
 
  1990년대 이후 급격하게 변화해 온 한국영화산업의 역사를 뒤지다 보면 한국영화계를 종횡무진하며 뛰어다닌 그의 발자취가 그대로 드러난다. 그가 한국영화산업의 한 페이지를 썼다는 데는 그를 좋아하는 사람이든, 싫어하는 사람이든 이견을 달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영화 한 편을 흥행시킬 때마다 매번 새로운 사업을 향해 나갔고, 그 도전은 성공했다. 또 사업이 고비를 맞을 때도 자신의 작품으로 위기를 넘겨 왔다. 그래서 그의 영화는 그에겐 단지 ‘작품’이 아니라 명운을 가르는 진정한 ‘승부수’이기도 하다.
 
  그가 이렇게 자신의 영화로 매번 승부를 낼 수 있었던 것은 영화 속에 관객의 시선을 잡아끄는 무엇인가를 늘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은 늘 사회성 짙은 소재를 택하지만 스스로의 무게를 못 이겨 침몰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는 않는다. 그는 어떤 주제를 택하든 그 속에 적절한 ‘유머’를 가미해 누구나 볼 수 있는 상업성 짙은 영화로 탈바꿈시킨다. “관객이 외면하는 영화는 더 이상 만들지 않겠다”고 선언한 1993년도 영화부터 이런 성향은 더 확실하게 드러나고 있다. 영화 한 편을 최소 수백만에서 천만 관객이 보려면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공명하는 영화여야 하는데, 가볍지 않은 소재로 이런 공감대를 만들어 내는 것, 이것이 바로 ‘강우석의 힘’이다.
 
  그는 1993년 (주)강우석 프로덕션을 시작으로 (주)시네마서비스를 만들어 한국영화계를 이끌어 왔다. 강우석 프로덕션의 첫 작품 <투캅스>를 시작으로 <초록물고기>(1997) <여고괴담>(1998) <인정사정 볼 것 없다>(1999) <주유소습격사건>(1999) <텔 미 썸딩>(1999) <신라의 달밤>(2001) <가문의 영광>(2002) <취화선>(2002) <실미도>(2003) <알포인트> (2004) <밀양>(2007) 등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대작들을 제작 또는 배급했다. 특히 제작을 전액지원한 임권택 감독의 <취화선>은 세계무대에 한국영화를 알렸다.
 
  이렇듯 그는 거장의 작품성 짙은 영화를 지원한 것은 물론 관객동원에 성공한 다양한 상업적 영화까지 모든 장르의 영화를 만들어 냈고, 그 사이 신인 감독들을 발굴하는 등 한국 영화의 다양성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한국영화가 2006년 봉준호 감독의 <괴물>을 마지막으로 내리막길을 걸으며, 그의 시네마서비스도 현재 위기에 봉착해 있다. <이끼>와 앞으로 개봉될 그의 18번째 영화 <글러브>는 그의 운명을 가를 것이다. 이번 승부수 역시 그의 시네마서비스를 난파로부터 구하게 될지 영화계는 초조하게 지켜보고 있다. 자신이 그간 만들어 온 17편의 영화가 그가 걸어온 영화산업의 역사 속에 어떻게 자리매김해 왔는지 한번 되짚어 보자.
 
 
  데뷔작 <달콤한 신부들>에서 8번째 영화 <미스터 맘마>까지
 
강우석 감독의 데뷔작 <달콤한 신부들>.
  강 감독의 입봉작은 1988년 당시 한창 사회문제로 부각된 장가 못 간 농촌 총각들의 이야기인 <달콤한 신부들>이다. 그전까지 그는 <애마부인>으로 유명한 정인엽 감독의 조감독 생활을 하면서 생계를 위해 외화번역 작업을 했다. 그가 번역한 작품으로 대중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외화는 밀로스 포먼 감독의 <아마데우스>와 존 맥티어넌 감독의 <프레데터>이다. 특히 <아마데우스> 시나리오 번역본은 영화전문 잡지 <스크린>의 부록판으로 전편이 게재될 정도로 인정받았다.
 
  경북 경주 태생인 그의 영화계 진출은 부친의 사업실패로 인해 이뤄졌다. 성균관대 영문과 2학년까지 다니다 더 이상 학업을 계속할 상황이 안되자 중퇴하고 국군홍보관리소에 취직을 한 것이다. 그는 이때부터 군 홍보영화를 만들었다. 그가 하필 이 길을 택한 데는 집안의 환경적 요인도 많이 작용했다. 영화광이었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영화는 그에게 어떤 것보다 익숙했다. 더군다나 형 강용석씨가 액션배우로 활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교 때부터 정지영, 김호선 감독 등 영화계 인사들과 교분이 있었다. 이장호 감독의 <바람 불어 좋은 날>, 임권택 감독의 <짝코> 등의 작품을 보고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열망에 불타 있던 그에겐 주저할 것이 없었다.
 
  본격적인 충무로 생활은 1984년 곽정환 서울극장 회장이 경영하는 합동영화사에서 시작했다. 곽 회장은 그에게 ‘양아버지’와 같은 존재로, 그를 사업가로 키워 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 준 한국영화계의 거물이다. 후에 강 감독이 씨네마플러스를 키워 내는 데 그의 뒷받침은 절대적이었다.
 
상업적으로 성공한 강우석 감독의 첫 작품 <미스터 맘마>.
  1989년 작품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는 강 감독의 출세작이다. 오직 일등만이 살아남는다는 폭력적 신념이 아이들을 어떻게 파괴시키는지를 알려주기 위해 만든 영화였다. 세 번째 작품 <나는 날마다 일어선다>(1990)는 고학력 실업자의 문제를 다룬 영화이다.
 
  1991년엔 한 해에 세 작품을 선보이는 괴력을 과시했다. 청소년 성장영화인 <열아홉 절망의 끝에서 부르는 하나 사랑노래>와 <스무살까지만 살고 싶어요> <누가 용의 발톱을 보았는가>(이하 <용의 발톱>)였다. 그중 <용의 발톱>은 강제규 감독이 시나리오를 쓴 작품으로 대통령선거의 부정과 타락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는 이 작품을 아직도 자신의 대표작으로 꼽고 있을 정도로 아낀다.
 
  이들 작품은 하나같이 비평가들에게는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관객들로부터는 외면을 당했다. 그때부터 그는 아예 “관객들에게 더 이상 외면받고 싶지 않다”고 선언하면서 상업성 짙은 영화로 선회해 버렸다.
 
  그렇게 만든 영화가 8번째 작품 아기를 혼자 키우는 아빠이야기 <미스터 맘마>(1992)였다. 감각적인 화면과 경쾌한 대사로 만들어진 이 영화는 당시 평론가들 사이에서 ‘저급한 오락물’이냐 ‘건전한 상품’이냐를 놓고 논쟁이 벌어질 만큼 유명세를 탔다. 그리고 그의 영화는 관객들로부터 더 이상 외면받지 않았다. 그의 필모그래피(filmography)가 완전히 변화하는 시점이다.
 
 
  9번째 영화 <투캅스>에서 13번째 영화 <실미도>까지
 
강우석 프로덕션 설립 후 첫 작품인 <투캅스>.
  강 감독은 그의 전성시대인 이 10년간 <투캅스>(1993)에서 <실미도>(2003)까지 다섯 작품을 만들었다. 편수는 적지만 영화가 곧 승부수가 되기 시작하는 시절이다.
 
  <미스터 맘마>로 성공을 거둔 그는 1993년 강우석 프로덕션을 차리고 첫 작품으로 <투캅스>를 만들었다. 프로덕션을 차리면서 그는 ‘영화는 재미있어야 한다’는 것을 창립이념으로 내세웠는데, 부패한 경찰을 소재로 한 <투캅스>는 문민정부 출범 이후의 분위기를 타고 역대 흥행 2위를 기록하며 초등학생들까지 볼 정도로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이즈음 영화계는 재벌의 영상사업 진출로 젊은 감독들의 독립영화사 설립이 붐을 이루던 시절이었다. 그 전까지 감독들은 제작사가 건네주는 적은 제작비로는 소신껏 영화를 만들지 못했으며, 그 결과 영화시장은 거의 외화가 장악하고 있었다. 재벌들은 젊은 감독들에게 어느 정도 자율권을 보장했고, 실제 1994년부터는 한국영화의 시장 장악력이 반전세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당시 그는 대우그룹으로부터 비디오 판권료로 4억원을 먼저 받아내 최고의 시장가를 기록했다.
 
  직접 제작한 <투캅스>에 이어 <마누라 죽이기>도 성공하면서 강 감독은 배급에 원망을 품었다. 영화제작비를 충당하기 위해 지방 배급업자들에게 소액 입도선매를 하다 보니 대박이 나도 감독에게 주어지는 돈은 얼마 되지 않았다. 남의 배만 불려 주는 일만 하고 있다는 데에 한이 맺힌 것이다.
 
  <투캅스>와 <마누라 죽이기>로 번 돈을 가지고 1995년에 강우석프로덕션을 시네마서비스로 확대 개편하고 배급에 나선 것도 이 때문이다. 그는 <투캅스>의 작가인 김성홍씨와 김의석 감독 등 흥행성이 높은 인력을 시네마서비스로 끌어들이면서 이른바 ‘인 하우스 프로덕션(in house production)’ 개념의 영화사를 만들었다. 이런 강 감독에게 날개를 달아 준 사람이 바로 곽정환 회장이다.
 
  1994년 1월 1일부로 영화업계는 프린트 벌수 제한 철폐와 함께 영화 배급업이 완전 개방되고 외국자본 투자규제 항목으로 묶여 있던 제작업도 풀리는 등 큰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곽 회장은 이에 대비해 1993년부터 ‘무비코리아’라는 배급사를 설립하고 전국에 대표적 판매업자들과 전속계약을 맺어 직배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던 시절이었다.
 
  서울극장에서 개봉한 시네마서비스의 1호작이며 그의 열 번째 작품인 <투캅스2>가 1996년 최고의 흥행작이 되면서 강 감독은 ‘흥행감독’이라는 입지를 굳혔다. 곽 회장에게 그는 서울극장에 흥행작을 대 주는 제작자며 감독이었다. 1997년 돈독한 관계를 쌓아 온 그에게 곽 회장은 직배시스템 운영권과 함께 50억원의 투자를 해 줬다. 곽 회장과의 4년 동안 그는 곽 회장이 지방 극장업주들로부터 선수금을 만들어 모은 수십억 원을 바탕으로 <초록물고기> <홀리데이인> <넘버3> <올가미> <투캅스3> <여고괴담> <생과부위자료청구소송> <미술관 옆 동물원> 등 많은 흥행작을 제작했다.
 
 
  시네마서비스, 영화배급시장의 60% 장악
 
  최고의 주가를 올리던 이 시절 그는 ‘냉혹한 상업주의 영화 제작자’라는 비난도 받아야 했다. 하지만 재벌이 외면한 이창동 감독의 <초록물고기> 제작비를 선뜻 지원한 것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다.
 
  1995년부터 1999년까지 이어진 곽정환-강우석 체제는 재벌들의 공략에 맞서 전통적인 자금조달법으로 자신들의 세력을 키워 내는 데 성공했다. 당시 영화계는 삼성, 대우, 일신창투, 시네마서비스 등 4개 배급회사 간 전쟁이 치열하게 전개되던 시절이었다. 그는 열한 번째 작품인 <생과부위자료청구소송>(1998) 이후 2001년 열두 번째 작품 <공공의 적>을 만들어 내기까지 3년간 자신의 영화를 만들어 내지 못했다. 사업에 몰두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강 감독은 행복하지 않았다. 벌어들인 돈이 그의 방식대로 쓰인 것이 아니라 곽 회장이 극장을 만드는 데 재투자됐기 때문이다. 그는 극장의 지분으로 이익을 돌려받았다.
 
  IMF 이후인 1999년 그는 곽 회장으로부터 독립을 꿈꾸며 삼부파이낸스로부터 32억원을 투자받고 <연풍연가> <마요네즈> <간첩 리철진> <주노명 베이커리> <이재수의 난>까지 5편을 제작하지만 흥행에 내리 실패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삼부파이낸스가 부도를 맞게 되자 그 역시 부도 위기에 처하게 된다. 절박한 상황에서 풀 베팅한 <인정사정 볼 것 없다>와 <주유소습격사건>의 잇따른 흥행에 힘입어 삼부파이낸스와의 관계를 정리하게 된다.
 
  이후 한국영화계는 시네마서비스와 CJ엔터테인먼트 양강 구도로 재편됐다. 시네마서비스는 1999년에는 한국영화 배급 편수에서 60%의 시장을 장악했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 <텔 미 썸딩> <자귀모> <미술관 옆 동물원> 등의 흥행에 힘입어 300억원의 매출을 일으켰다. 곽 회장의 전국배급망을 통해 70~80개의 극장에서 영화를 동시에 개봉하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식 배급방식을 도입해 대성공을 거둔 탓이다.
 
 
 
영화계의 큰손

 
  2000년 강 감독은 미국의 투자전문회사인 워버그핀커스로부터 당시 돈 200억원을 투자받으며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강 감독은 대신 시네마서비스의 지분 35%를 그쪽에 넘겼다. 곽 회장의 극장 지분투자로 인해 제작에서 극장까지 갖게 된 파워맨이 된 그를 두고 영화계 소장학자들 사이에서는 ‘독과점’ 논란이 일어났다. 이때 그는 대표 자리를 20세기 폭스 코리아 사장이었던 김정상씨에게 넘겨주고 감독의 자리로 돌아갔다. 김 대표의 취임 이후 시네마서비스는 외화수입 배급에도 손을 뻗었다. 파트너는 태원엔터테인먼트였다. 조건은 수입비용 일체를 시네마서비스가 지원하고 수익은 6(시네마서비스) 대 4로 나누는 것이었다. 2001년부터 3부작을 들여온 〈반지의 제왕〉은 매해 평균 500만명 이상의 관객을 끌어들이며 시네마서비스의 수익에 큰 공로를 세웠다. 4년간 진행된 두 회사의 밀월은 시네마서비스가 국내외 영화를 아우르는 국내 제1의 투자배급사로 성장하는 데 주요한 역할을 했다.
 
  2001년 2월에는 코스닥 등록기업인 로커스홀딩스가 시네마서비스를 인수했다. 당시 지분 구조는 강 감독 30.46%, 로커스홀딩스 62.7%, 워버그핀커스는 시네마서비스의 지분이 없어진 대신 로커스홀딩스의 1대주주(25.28%)가 됐다. 이때 제작한 영화가 <선물> <신라의 달밤> <세이 예스> <킬러들의 수다> <흑수선> <화산고> 등이다.
 
  시네마서비스는 로커스홀딩스와의 합병을 바탕으로 300억원을 확보하면서 비디오 출시, 멀티플렉스 진출 등 사업다각화를 꾀했다.
 
  2002년 11월에는 한국영화계 최초로 제1금융권인 하나은행이 ‘하나 시네마 투자신탁 1호’를 개설해 그의 영화에 투자하는 데 나섰다. 이는 고객으로부터 유치한 돈(최대 100억원)을 시네마서비스가 제작 투자하는 영화에 투자해 수익금을 고객에게 배당하는 상품이었다. 이해 시네마서비스는 매출 800억원에 순익 60억원을 내며 선두 자리를 지켰다.
 
  감독의 자리로 돌아온 강우석 감독은 2002년을 <공공의 적> 개봉으로 시작했다. <생과부위자료청구소송> 이후 3년 만이었다.
 
  이즈음 로커스홀딩스는 시네마서비스를 합병하면서 회사명을 ‘플레너스 엔터테인먼트’로 변경했는데, 강 감독은 이 회사의 지분 11.4%를 소유한 세 번째 주주가 됐다. 이런 소유구조하에서 투자가 자유롭지 않자 태원엔터테인먼트는 시네마서비스를 떠나 CJ와 손을 잡았다. CJ엔터테인먼트는 그해 2월 영화사로서는 처음으로 코스닥에 등록했는데, 시네마서비스는 로커스홀딩스와 합병하면서 주식시장에서도 경쟁을 벌이게 된다. <공공의 적>의 흥행성공은 이런 작업을 더 순조롭게 이뤄지게 했다.
 
  강 감독은 여세를 몰아 경기도 파주 헤이리에 테마파크형 스튜디오를 세우려고 했다. ‘강우석 필름아카데미’를 세워 후배를 양성하려고도 했다. 그때 그의 꿈은 ‘감독들이 시나리오만 들고 들어와도 캐스팅부터 유통까지 끝내는 시스템’이었다.
 
  그해 8월에는 시네마서비스 극장체인사업을 위해 멀티플렉스 극장사업법인인 ‘프리머스시네마’를 출범시켰다. 그의 손이 안 닿는 곳이 없을 정도였다.
 
  2003년 6월 플레너스는 500억원 규모의 게임업체인 넷마블과 합병, 새롭게 몸집을 불렸으나 영화와 게임은 이질적인 사업이었기 때문에 동거는 오래가지 않았다. 넷마블과의 불화는 2004년 6월 CJ인터넷으로 이름을 바꾼 플레너스에서 시네마서비스가 나오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2003년 말에 개봉한 그의 열네 번째 영화로, 천만관객 동원 기록을 세운 <실미도>는 그가 플레너스와의 분리절차를 순조롭게 진행하도록 이끌어 줬다. 그는 시네마서비스와 아트서비스(미술 세트 제작 회사)의 지분을 50% 이상 확보했지만, 극장체인인 프리머스의 소유권은 CJ측이 이미 지분 70% 이상을 확보해 버리는 바람에 ‘2006년까지 3년간 경영권 보장’이라는 애매한 조건에 합의하며 손을 떼야했다. 파워게임은 끝이 났다. 그후 한국영화산업의 중심축은 완전히 CJ그룹으로 넘어가게 됐다.
 
 
  14번째 영화 <공공의 적2>에서 17번째 영화 <이끼>까지
 
  제작사로 계열분리(방출)된 이후 시네마서비스는 이렇다 할 작품을 내지 못했다. 시네마서비스를 통해 투자한 <로보트태권브이> <바람피기좋은날>이 실패했고, 2006년 기한으로 경영권을 받은 프리머스영화관을 통한 배급도 성공하지 못했다. 2005년 초 강 감독이 <공공의 적2>로 첫 편을 뛰어넘는 흥행에 성공하며 겨우 명맥을 유지했다. 2005년 10월 강 감독은 장진 감독과 함께 KnJ엔터테인먼트사를 설립했다. 여기서 만든 작품의 배급 및 마케팅은 CJ에서, 부분투자 및 홈비디오는 시네마서비스에서 담당했다.
 
  KnJ를 통해 만들어진 100억원 규모의 블록버스터인 열다섯 번째 영화 <한반도>는 관객동원에는 어느 정도 기록을 세웠지만 정치논쟁에 휘말리며 투자 대비 큰 수익을 남기지는 못했다. 2007~ 2008년은 최악이었다. 한국영화계가 불황에 빠져들면서 시네마서비스가 배급을 맡았던 대작 <황진이>가 실패했다. 2008년에는 시네마서비스가 투자한 〈신기전〉(제작 강우석 감독〉과 〈모던보이〉(제작 KnJ엔터테인먼트)가 다 실패하자 시네마서비스는 2008년부터 사실상 배급을 중단하고 회사 정리단계에 들어간다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하지만 강 감독은 이 위기 속에서 만든 그의 열여섯 번째 작품 <강철중: 공공의 적1-1>을 히트시키면서 기사회생의 기회를 마련했다. 어려움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2009년 시네마서비스의 투자작 <용서는 없다>가 또 실패하면서 회사는 다시 위기로 몰렸다. 급기야 통의동 사옥을 팔고 지금의 충무로 사무실로 전세살이를 시작했다.
 
  강 감독은 자신이 소유한 시네마서비스와 아트서비스의 주식 전체를 담보로 2007년에 CJ로부터 100억원을 빌렸다. 이 돈을 2012년까지 갚지 못하면 그는 처음 충무로에 발을 내디뎠을 때와 똑같은 프리랜서 감독이 될 형편이다. 열일곱 번째 영화로 올해 개봉된 <이끼>는 그런 상황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끼>는 그에게 어떤 운명의 영화일지 궁금해진다.⊙
 

 
▣ 강우석 감독 인터뷰

 
  “영화는 돈과 바꿔 보는 예술이다”
 
 
<공공의 적 2>를 찍을 당시의 강우석 감독.
  강우석 감독을 만나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그가 <이끼>를 개봉하기 전부터 차기작 <글러브> 촬영준비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인터뷰가 <글러브> 촬영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시점과 맞물려 있어서 시간을 잡기는 더 어려웠다. 8월 4일 오후 “딱 30분”이라는 전제하에 시네마서비스에서 그를 만났다. 하지만 정작 인터뷰가 시작되자 그는 자신의 영화인생을 되짚는 질문에 “재미있다”며 뒷약속을 미뤄 버렸다. 거침없는 그다운 모습이었다. 인터뷰는 준비해 간 질문지가 다 끝난 뒤로 꽤 오랜 시간 이어졌다.
 
  강 감독은 지난 7월 14일 <이끼> 개봉 일 주일 만에 한국영화감독 사상 처음으로 통산 영화관객 3000만명을 돌파하는 저력을 과시했다. 이 기록은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에 따른 공식적 집계이다. 2위인 윤제균 감독의 공식집계가 2600만명이고, 한국영화의 또 다른 흥행사 강제규 감독 역시 약 2120만명에 불과한 것을 보면 감독으로서 그의 흥행력은 ‘보증수표’로 불릴 정도로 확고하다. 시네마서비스 사무실에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그를 만났다.
 
 
  “〈이끼〉, 500만명은 갈 줄 알았다”
 
300만 관객을 동원한 <이끼>.
  ―3000만 관객돌파 기록에 대한 소감은.
 
  “숫자로는 워낙 크지만 집계가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네요. 집계를 정확하게 하면 훨씬 더 많을 겁니다. 2000년 멀티플렉스 시대 이전 것은 전산처리가 안돼서 정확한 집계가 안 나올 거예요. 90년대는 서울관객만 집계했을 거고요. 어쨌든 제일 먼저 든 생각은, 관객들에게 엄청난 사랑을 받았다는 거예요. 관객에게 보답하는 영화를 만든 데 대한 애정표현이 아니었나 하는 마음으로 고마웠어요.”
 
  ―<이끼>는 예상만큼 성공한 겁니까. 러닝타임(2시간36분)도 길고, ‘18세 이상 관람가’라는 제한도 있어서 힘겨워 보입니다.
 
  “글쎄, 관객동원이 어디까지 갈지 정확하게 모르겠어요. 단,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속도가 좀 늦네요. 18세 이하가 못 보기 때문인 듯해요.”
 
  ―누구나 볼 수 있는 웹툰을 소재로 했고, 원작보다는 오히려 더 밝은 분위기인데, ‘18세 이상 관람가’ 등급이 나온 이유가 있습니까.
 
  “저는 도저히 이해 못하겠어요. 어느 부분이 그런지 지적해 달랬더니 부분이 아니라 전체적 느낌이 그렇다니까요. 모방범죄 내지는 모방행위를 할 만한 충분한 성적 코드도 있고 잔혹함도 있다는 얘기였어요. 그래도 한 커트도 손대기 싫어서 그대로 내보냈어요.”
 
  ―두 편을 연속해서 찍는 것은 강행군 아닌가요.
 
  “찍으면서 역부족이라고 느낍니다. 체력도 달리고요. <이끼>를 찍으며 너무 고생을 해서 후반이 되니까 오히려 신인감독 때 열정이 생기더군요. 이참에 영화 하나 더 찍자는 생각이 들었고 마침 그 무렵에 <이끼>와 전혀 다른 느낌의 시나리오를 받았어요. 이것도 한번 해 보자는 마음에서 첫 휴먼 드라마를 찍게 됐네요. <글러브>는 시골학교 야구부를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예요. 내일부터 본격 첫 촬영에 들어가서 이렇게 바빠요.”
 
  ―혹시 2012년까지 CJ엔터테인먼트에서 차입한 100억원을 갚지 않으면 두 회사(시네마서비스, 아트서비스)를 다 넘기기로 한 2007년 계약 때문에 ‘생계형’으로 강행군하는 건가요.
 
  “어떻게 알았어요? 계약서 봤어요? 그중 이미 70억은 날렸어요. 못 갚으면 프리랜서가 되는 거지요. 일반 감독과 같아요. 그렇게 된다 해도 미련은 없어요. 짐을 벗는 거지요.”
 
  ―그래도 강 감독은 늘 ‘한 방’이 있지 않습니까. <이끼>는 ‘한 방’이 됐나요.
 
  “<이끼>는 돈을 버는 것으로는 ‘한 방’이 안됐어요. 내 기준으로 보면 많이 약해요. 난 500만명은 쉽게 갈 줄 알았어요. 이제 300만명 넘었으니….”
 
 
  “다른 감독 지원, 작품이 잘 안 나오더라”
 
  ―12월 개봉 예정인 <글러브>는 더 많은 관객을 동원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합니까.
 
  “<글러브>는 온가족이 다 같이 봐도 되고, 영화의 성격이 넓어요.”
 
  ―사람 챙기느라 사업이 어려워졌다는 소문도 있던데.
 
  “그건 100% 사실이에요. <실미도>나 <왕의 남자>처럼 큰 흥행을 하면 돈이 많이 생기지요. 여유가 생기면 기다리고 있던 많은 감독 다 영화를 찍게 해 줬어요. 예술영화도 꽤 지원했어요. 좋은 시절이 있었지요.”
 
  ―제작지원은 대부분 사람을 보고 결정했나요. 사람과 능력에 대한 평가는 달라야 하는 것 같은데.
 
  “여유가 있을 때는 사람 보고 결정했어요. 그런데, 좋은 감독들임에도 불구하고 함량 미달의 영화를 많이 찍어 내더군요. 관객에 대한 연구나 서비스 정신이 부족한 것 아닌가, 너무 자기 취향적이고 관객과의 교감이 부족했다는 느낌이에요. 찍어 놓고 보면 ‘어떻게 이걸로’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어요.”
 
  ―투자한 영화가 그러면 마음이 어때요.
 
  “정말 속상하지요. 내가 잘못 찍어서 욕먹는 것보다 훨씬 속상해요. 내 선구안이 너무 부족한 것이 아닌가, 내가 기획자로서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그런 감독들에게 또 기회를 줍니까.
 
  “한두 번 더 해 주지요. 까먹은 걸 이걸로 좀 어떻게 하라고 하면서 다시 해 보라고 해요. 감독은 단칼에 자르면 일생이 무너져요. 감독들은 예민하고 사실 약해요. 이런 사람들에게 잔혹하게 칼을 들이대면 재기불능이 되지요. 그래서 용기를 주려고 합니다. 나도 실패한 적 있으니까요. 그런데 작품이 잘 안 나오더군요.”
 
  ―강 감독은 늘 위기에 좌절하기보다는 스스로 타개해 가는 스타일이던데요.
 
  “대부분 그렇지요. 이상하게 다른 감독들 찍게 해 놓으면 갑자기 내가 찍어야 하는 거 아닌가, 혹시 멍하게 있다가 망하면 회사가 어려워져서 내 거 준비할 때 너무 어려워지는 것 아닌가 하는 강박관념이 생겨요. 그때마다 꼭 시나리오나 아이템이 생겨서 그들과 같이 찍거든요. 결과를 보면 그들은 다 망하고 내 거가 돼서 손해를 메우는 식으로 십여 년을 살아 왔어요.”
 
  ―사업가로서도 상당히 탁월한 결정을 해 왔는데 그런 선택에서 고려하는 것들은 무엇인가요.
 
  “그건 테크닉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가장 많은 영화를 찍을 수 있을 것인가에 관점을 둔 결정이에요. 그때 가장 손을 정확하게 내미는 사람은 누군지, 어떤 자본이 나를 가장 믿는가 하는 관점에서 손을 잡았어요. 자본에 구걸하지 않아요. 개인이든 기업이든.”
 
 
  “정치에 관심 없다”
 
  ―올해 만든 두 편의 영화가 새로운 변화 모색의 계기가 될까요.
 
  “그렇지 않으면 영화를 안 할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확신합니다. <이끼>와 <글러브>를 다 만들었을 때 저 사람은 자본과 무관하게 영화계에 굉장히 활력소를 불어넣고 앞으로 길게 영화를 할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느냐가 관건이에요. 난 그럴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적어도 내가 찍는 영화는 믿어라. 그리고 앞으론 과거처럼 무조건 찍게 하진 않을 것이다. 일일이 선구안을 들이댈 테니까 손해 보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주고 싶다’는 거지요. 다행히 이번 영화를 보고 CJ가 ‘흥행과 관계없이 저 사람 잡아야 돼’라고 판단했다고 하더군요. 들려오는 이야기가 ‘역시 우리 믿음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이렇게 긴 영화로 ‘18세 이상 관람가’가 나온 영화로 손익분기점을 넘겨 줬고, 또 앞으로 (관객이)얼마나 들지 모르고, 또 다른 영화를 찍기 시작했고. 이런 파트너가 어디 있나 그런 식이에요.”
 
  ―늘 저력으로 승부하네요.
 
  “노동이지요. 너무 힘들어요.(웃음)”
 
  ―<이끼>의 작품성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립니다.
 
  “어쨌든 내 영화가 너무 재미만 좇는다고 우려하거나 비아냥거렸던 사람까지도 문자로 좋은 글을 많이 보내 주더군요. 지금 논란은 원작에 심취된 사람들 사이에서 나오는 거예요. 가장 중요한 것은 원작자인 윤태호 작가가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영화가 다 풀어 냈다고 좋게 평하니까 된 거예요. 그 논란도 작품에 대한 비난이 아니라 호·불호에 대한 것이라 상관없어요. <한반도>로 비난받을 때와 달라요.”
 
  ―<한반도> 때는 비평가들로부터 정치적 논쟁에 휘말렸었지요.
 
  “<한반도>는 노무현 정권의 연장선상에 놓고 ‘대통령을 미워한다’는 식으로 몰아 갔어요. 나는 단지 판타지로 찍은 건데. 지금 정권 사람들만 좋아하는 영화처럼 받아들여졌으니까요. 그 영화를 지금 찍었으면 그렇게까지 비난했을까요. 아, 또 다른 면에서 비난했겠지요. 난 정치에 전혀 관심 없어요. 정치색도 실제 없고. 죽을 때까지 그냥 감독으로 남을 것입니다.”
 
  ―<이끼>가 강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할까요.
 
  “되게 독특한 느낌으로 오래 남아 있을 것 같아요. 저 사람은 저런 장르도 찍어 낼 수 있구나 하는 평가가 있거든요. 사실 그런 걸 노리기도 했고요. 긴장감을 고조시키기 위해 혐오스러울 정도의 잔혹함이 없어도 가슴으로 충분히 무섭고 눈으로 충분히 괴로울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지요. 60~70대 원로기자들이 전화해서 영화 보다가 무서워 죽는 줄 알았다고 하더군요. 한순간도 다른 생각이 안 들었대요. 그러면 다음 영화는 더 솔직하게 하자, 외치는 것을 줄이고 관객들이 스스로 판단하라고 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어요. 앞으로 내 영화는 그렇게 변해 갈 것 같아요. 나이가 들면서 더 깊어지는 느낌이에요. 그런 느낌으로 전환점이 되는 영화가 될 것 같네요.”
 
 
  “예술 영화 자신 없었다”
 
평론가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으나 흥행에는 실패한 <누가 용의 발통을 보았는가>.
  ―최단기간 100만 돌파, 최단기간 최다관객 동원 기록 1000만 흥행을 이뤄낸 <실미도>는 강 감독 개인에게는 어떤 의미의 작품입니까.
 
  “못 찍을 영화는 아무것도 없다는 자신감이 생겼지요. 모든 사건은 다 영화화할 수 있다, 섬 하나를 까부숴서라도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이요. 만들기 어려운 영화에 관객이 들더군요. 관객이 어떻게 아는지 기가 막힐 정도예요. 개봉 첫날부터 터지더군요.”
 
  ―<투캅스> 이전의 초기 작품 8편 중 5편이 흥행에 실패했지만, 작품성은 상당히 뛰어난 영화들이라는 말이 들리는데요. 이 시기의 작품에 대해 재조명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심심치 않게 그런 이야기를 듣습니다. <나는 날마다 일어선다>에 대해서는 비평가들이 ‘당신의 대표작은 그것 같다’고 이야기합니다. <누가 용의 발톱을 보았는가>도 그 시대상황에 어떻게 그런 용기를 냈냐는 얘기를 듣습니다.
 
  당시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그런 영화를 찍었던 열정을 영화인들이 알고 계속 찍으라고 밀어 주었고, 그런 에너지가 <투캅스> 등 흥행작을 만들어 내게 된 계기가 된 겁니다.”
 
  ―당시 인터뷰에서 강 감독은 “영화는 흥행을 해야 한다. 관객이 외면하는 영화는 더 이상 안 만들겠다”고 선언했는데요. 어떤 심정이었습니까.
 
  “너무 보람이 없었어요. 시사회만 하면 영화 잘했다는데, 막상 개봉하면 손님이 너무 안 드는 거예요. 진짜 우울했어요. 이 영화사 저 영화사 돌아다니며 피해만 끼쳐서 미안하기도 했고요. 나는 감독비 받아서 먹고사는데 돈 낸 사람은 다 망하게 하는 것이 괴로웠어요. 내가 제작을 직접 하게 된 것도 내가 직접 돈 끌어들여서 해 보고 망하면 안 하겠다는 심정에서 시작된 거예요.”
 
  ―관객과 비평가들 사이에서 감독들은 늘 고민할 것 같습니다. 강 감독께서는 과감히 예술보다는 흥행을 택하겠다고 선을 그었는데요.
 
  “예술영화를 만들 자신이 없었어요. 나는 그게 싫어요. 내 영화를 영화제에 보낼 생각이 없어요. 어디서 출품하자고 하면 하지 말라고 해요. 그들이 개봉관에 와서 보고 좋다면 가져가라고 말해요. 내가 내 영화에 대한 심사를 요청할 이유가 없습니다. 난 사오천만 관객과 같이 놀겠어요. 관객들이야말로 나에게 밥을 먹여 주니 정말 무서운 존재 아닙니까?”
 
 
  “불필요한 신은 안 찍어요”
 
  ―어린 시절 ‘암산왕’이었는데, 이런 두뇌가 지금까지 해 온 일에 도움이 됐습니까.
 
  “수치에 밝은 것은 연출자로서 편집계산에는 도움이 많이 되지요. 난 불필요한 신은 안 찍어요. 보통 감독들은 찍어서 나중에 들어내지요. 감독 중 나만큼 불필요한 걸 안 찍는 사람도 없을 걸요. 전 카메라를 두세 대씩 돌려서 배우들이 한 번에 찍을 수 있게 해 줘요. <실미도>는 편집을 딱 1분20초 했어요.
 
  그러니까 배우들 하는 이야기가 ‘강 감독님과 찍으면 조심해라. 찍으면 다 나온다’고 한대요. 날릴 것은 콘티상에서 먼저 날려 버리는 거지요. 촬영이 끝나고 나면 되게 좋아해요 . 배우들에게 ‘불필요한 건 당연히 안 찍겠지만 관객이 다 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임해라. 얼마나 무섭냐’고 주문해요. 연극무대처럼 그대로 화면에 드러나는 거지요. 그러다 보니 배우고 스태프고 모두 몰입도가 높아요.”
 
  ―영화에 대해 정의를 내린다면.
 
  “영화는 산업이요, 돈과 교환해서 보는 예술?”
 
  ―강 감독은 재벌자본에 대해 혐오한다면서 재벌자본으로 영화를 제작했고, 금융자본에 대해 교만하다고 비판하고 난 뒤인 2000년 4월에는 미국 투자회사 워버그 핀커스로부터 당시 200억원을 투자받았어요. 이기기 위해 자신의 논리를 뒤집는 걸 서슴지 않는 ‘승리 이데올로기’로 무장돼 있다는 비판을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건 내가 얼마만큼 절치부심하고 사는지 몰라서 하는 이야기예요. 나는 중소기업 사장들이 이래서 목매는구나 하는 순간을 너무 많이 겪었어요. 매 순간 한국영화가 살아갈 최선의 길을 택한 것뿐이에요.”
 
 
  “대기업이 외면해도 나는 간다”
 
1000만 관객 동원 기록을 세운 <실미도>.
  ―충무로의 1인자로 부상한 뒤 영화산업을 독점한다는 비판에 대해 상당히 민감하게 반응하며 대표직을 떠나기까지 했는데, 주변의 반응에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인가 봐요.
 
  “나한테는 끔찍했던 것이, 제작에 미쳐서 일 년에 열 몇 개씩 만들게 하다 보니까 호칭이 사장님, 회장님으로 바뀌어 버리더군요. 난 감독이에요. 비즈니스하다 보니까 그렇게 치이더라고요. 아침부터 저녁까지 돈 이야기만 하고. 그래서 친구인 김정상을 찾아가서 도와달라고 했어요. 나는 비판을 즐기는 사람이지 피하지 않아요.”
 
  ―현재 영화산업은 충무로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몇몇 기업이 거대 독점자본으로 장악했는데, 영화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까.
 
  “대표주자인 CJ와 같이 어깨를 견주고 있는 롯데, 쇼박스, SK텔레콤이 더 문제입니다. 경쟁상대가 있어 주면 영화인들이 선택하고 선택당하는 입장이 되는데, 너무 한쪽으로 쏠려서 다들 불안해해요. CJ에서 시나리오를 외면하면 다른 데서는 보지도 않아요. SK가 들어올 때 하드웨어(극장)를 가지고 있는 재벌들이 진짜로 경쟁하면서 규모도 커지고 발전할 줄 알고 기대했는데, 영화 한두 개 망하니까 안하겠다고 하더군요.”
 
  ―비(非)충무로 자본이 주는 폐단이 있다면.
 
  “가장 염려되는 것은 획일화된 영화만 나온다는 것이에요. 고만고만한 액션과 로맨스만 나오고 있어요. 흥행판을 뒤집는 것은 새로운 실험적인 영화예요. <왕의 남자>가 판을 뒤집을 수 있었던 것은 그것 때문이었어요. 자본가들은 늘 투자 대비 산출로만 보니까 그게 가장 문제예요.”
 
  ―‘승부사’로서 지금까지 여러 번 고비를 넘겨 왔는데, 잘한 선택과 잘못한 선택을 꼽는다면 어떤 것입니까.
 
  “감독 데뷔해 놓고 10여 년 동안 다른 일을 하던 친구 이준익을 불러 <왕의 남자>와 <황산벌>로 다시 감독으로 만들어 낸 것이 무엇보다 보람있고요. 임권택 감독님의 <취화선> 제작비 전액 지원을 한 것도 잘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대기업이 외면해도 나는 간다는 선택을 할 때 자부심을 느낍니다.
 
  잘못한 선택은 <왕의 남자>로 많은 돈을 벌었을 때, 내가 너무 나태해져서 회사 일에서 발을 빼고 난 후 2년간 만든 10여 편의 영화가 다 망해서 말아먹어 버린 것이에요. 내가 조금만 발을 담그고 있었어도 시행착오 막아 줬을 텐데 까불다 혼이 나고 있지요.
 
  물론 100% 된다고 생각한 <용서는 없다>도 안됐어요. 다행히 작품은 비평가와 저널리스트들이 너무 좋다고 했는데도 관객은 외면했어요. 근데 비디오나 DVD 보고는 영화 좋다고 난리니 그게 속상해요. 결국 마케팅의 미스지요.”
 
  ―요즘도 생각이 필요할 때 <삼국지>를 읽나요.
 
  “요새는 채플린 영화나 대부1편 등 오래됐으나 명작들을 찾아봐요. 그리고 요즘 또 달라진 것이 옛날에는 찾아가서 다른 감독 영화를 보지 않았어요. 내 영화가 아닌 것들은 천천히 비디오 나오면 보는 수준이었어요. 하지만 이제는 개봉관에서 하자마자 거의 다 봐요. 그게 다른 후배 감독들에 대한 예의인 것 같더군요.”
 
 
  “구기동 빌라에 10년째 살아”
 
  ―이제 영화계 선배로서 여유가 생긴 것 같네요.
 
  “그래요. 이전에는 내가 투자하거나, 제작하거나, 감독하는 영화 이외의 것이 터지면 속상하고 질투했는데, 지금은 아니에요. 잘 만들면 전화해 주고 싶고, 걱정하면 손님 들 테니 걱정 말라고 위로하고, 상 받으면 난 보내고 다 해요. 하지만 내 영화를 만드는 데는 더 까다로워졌어요.”
 
  ―‘강우석 사단’(그를 중심으로 모인 영화감독과 제작자들)은 건재합니까.
 
  “본인들이 다 어려운데, 내가 스스로 버티고 있으니까 그 용기로 다들 준비하고 있다고 합니다. 내가 여유가 없으니까 서로 정신만 왔다 갔다 하는 거지 뭐…. 그래도 소주 한잔 먹자면 벌떼처럼 몰려들어요.”
 
  ―그동안 들었던 비난 중 가장 싫은 것이 있다면.
 
  “돈에 대한 오해였어요. 내가 독주했던 시대에 돈 많이 벌고 밝히는 감독이 된 것이에요. 주변 사람들은 내가 은행에 수백억씩 넣어 놓고 야금야금 먹고 오버하고 산다고 생각해요. 난 내가 찍은 영화가 흥행되면 개런티와 인센티브만 받아도 몇 년씩은 먹고살아요. 그건 맞아요.
 
  하지만 <왕의 남자>나 <주유소습격사건>처럼 제작으로 터진 영화는 일 원도 받은 적 없어요. 그건 다 회사 돈이고 다른 영화 찍게 하는 데 썼어요. 아내가 하는 말이 친구들이 ‘신랑이 수백억 갖고 있는데 소형차 타냐’고 한다며 툴툴거리는데, 회사와 나를 착각한 거예요. 돈 벌어서 회사 사람들 먹고살고, 또 어려울 때 진 빚도 갚고 그러는 건데…. 제가 구기동 빌라에 십 년째 살거든요. 동네 사람들이 ‘저 사람 심하게 부자인데 아직도 왜 저기 사냐’며 ‘감독님 심하게 절약한다’고 한대요.(웃음)”
 

 
  “나는 자본에 졌다”
 
  ―가족들 평생 먹을 건 마련해 놓으셨나요.
 
  “그랬다면 내가 놀고 있을걸요. 세 아이(11살, 10살, 9살)가 대학까지는 불편 없이 갈 정도로 해 놓은 게 다예요. 여기서 더 나빠지면 컴백이에요. 아내는 나보다 14년이나 어려요. 내가 20년은 먼저 갈 것 같은데, 아이들의 교육과 아내의 노후가 걱정이에요. 남들과 똑같이 작은 보험밖에는 없어요. 아내가 나를 못 믿어서 따로 보험을 3개나 들던데요.(웃음)”
 
  ―본인 영화 중 가장 아끼는 영화, 아쉬운 영화, 아까운 영화를 꼽는다면.
 
  “가장 아끼는 영화는 두 편인데, <투캅스>와 <공공의 적>이에요. 관객에게 신선한 웃음을 던졌고, 엽기적인 것에 유머를 얹는 새로운 시도가 성공했기 때문이에요.
 
  아쉬운 건 <실미도>예요. 지금 찍었으면 인간미를 넣었을 텐데 여유 없이 드라이하게 찍은 것이 아쉬워요. 그 실수를 <이끼>에서 푼 거고요.
 
  아까운 것은 초창기 영화들이에요. <용의 발톱>과 <19살까지만 살고 싶어요>는 열심히 만들었는데 개봉도 제대로 못한 영화예요.”
 
  ―가장 좋아하는 영화는.
 
  “채플린 영화 중 <시티 라이트>(1931년)예요. 그걸 보다가 좌절했어요. 1930년도에도 그런 감성으로 영화를 찍고 저런 편집과 드라마 연기를 하다니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1980년 중반 조감독 시절부터 채플린을 보고 영화정신을 공부했어요.”
 
  ―가장 존경하는 감독을 꼽는다면.
 
  “임권택 감독님입니다. 그분의 영화에 대한 생각과 집념은 정말 대단하십니다. 몇 달 전에도 술 한잔 마셨는데, 정말 장인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현장에 가서 일하시는 거 보면 진짜 머리 좋은 분이라는 걸 알게 돼요. 순발력이 뛰어나고 집요해요. 진짜 멋쟁이지요. 영화에 대한 평가는 놀라울 정도예요. 연출자로서는 저 장면이 좋을지 모르나 관객에게 불친절하다고 비판하시기도 해요. 상당히 무섭습니다.”
 
  ―충무로 파워맨으로 1위를 기록할 당시 마지막 목표가 ‘감독들이 시나리오만 들고 들어와도 캐스팅부터 유통까지 끝내는 시스템’이라고 했는데, 지금도 그런가요.
 
  “아, 그 꿈 버렸어요. 난 자본에 졌습니다. 하지만 영화를 많이 만들겠다는 꿈은 그대로예요. 양질의 자본이 주어지면 그렇게 하겠어요. 지금은 극장 체인을 갖고 있지 못하니까 그꿈을 접을 수밖에 없어요.”
 
 
  “사람의 감성 움직이는 영화 찍고 싶을 뿐”
 
  ―현재 한국영화계가 전반적으로 침체기인데 앞으로의 한국영화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요.
 
  “방법이 없다고 봐요. 이래도 안 볼래 식의 기발한 영화를 만들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할 거예요. 영화 만드는 데 국가 보고 돈 대 달라는 것도 말이 안 되고. 어쨌든 돈 주고 극장 안에 들어온 사람들은 웃음, 눈물, 감동으로 죽여서 내보내야 한다, 그것만이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이런 어려움은 오히려 영화가 체질을 강화해서 양질화될 수 있는 좋은 찬스라고 봅니다.”
 
  ―<아바타>의 대성공 등 영화의 기술적 환경 변화도 상당한 수준인데, 3D영화시대를 어떻게 대비하고 있나요.
 
  “<아바타> 보고 약 올라 죽는 줄 알았어요. 하지만 난 끝까지 가슴을 두드리며 남아 있는 쪽에 있겠어요. 저 지금까지 아날로그 폰 쓰고 있어요(구형 휴대폰을 꺼내 보이며). 난 정보의 바다에 들어가고 싶지 않아요. 단지 사람의 감성을 움직이는 영화를 찍고 싶을 뿐이에요. 난 아직 메일 주소도 없고, 컴맹이에요. 내가 유일하게 쉬는 게 아무것도 안하는 건데 쉴 때 메일 찾아봐야 하고 그거 싫어요. 문자도 보낼 줄 모르고요, 휴대폰 번호 저장도 못해서 뒷번호로 사람 외워요.(웃음)”⊙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NewsRoom 인기기사
Magazine 인기기사
댓글달기 0건
댓글달기는 로그인 하신 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

Load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