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孫世一의 비교 評傳 (76)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 李承晩과 金九

朝鮮人民共和國의 主席과 內務部長

글 : 손세일  논설위원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목록
  • 프린트
  • 스크랩
  • 글자 크게
  • 글자 작게
  하지 사령관이 9월 12일 오후에 부민관(府民館)으로 정당 및 문화단체 대표 2명씩을 초청하자 1200명의 인사들이 몰려왔고, 같은 시간에 경성공설운동장에서는 조선인민공화국 수립과 조선공산당의 재건을 축하하는 대규모 집회가 열리고 시위행진이 있었다.
 
  인민공화국은 9월 14일에 이승만(李承晩)을 주석(主席), 여운형(呂運亨)을 부주석(副主席), 허헌(許憲)을 국무총리로 하고, 김구(金九)를 내무부장, 김규식(金奎植)을 외무부장, 조만식(曺晩植)을 재무부장, 김성수(金性洙)를 문교부장 등으로 하는 내각 명단을 발표했다. 해외에 있는 인사들은 물론 국내인사들과도 사전 협의가 없이 발표된 ‘벽보내각’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지만, 독립정부 수립을 고대하고 있는 국민들은 열광했다. 그러나 그 명단은 여운형의 동의도 없이 공산당이 일방적으로 발표한 것이었다.
 
  우파(右派)민족주의자들은 9월 16일 오후에 천도교(天道敎)회관에서 우익세력의 결속을 과시하는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 결당식을 거행했다. 한민당은 이승만, 서재필(徐載弼), 김구 등 7명을 영수로 추대하고, 송진우(宋鎭禹)를 수석총무로 선출했다.
 
  하지 사령관은 아널드 군정장관의 고문관으로 김성수, 송진우, 여운형 등 11명을 임명했으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여운형은 곧 고문직을 사퇴했다.
 
  하지 사령관과 베닝호프 정치고문은 각각 맥아더 장군과 국무장관에게 중경(重慶)망명정부를 임시정부로 귀국시켜 점령기간 동안 및 한국국민이 선거를 실시할 수 있을 만큼 안정될 때까지 간판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그러나 그것은 미 국무부의 대한(對韓)정책과는 배치되는 것이었다.
 

  1. “불만 댕기면 당장 폭발할 화약통”
 
  한국은 태평양 방면에서 미군 점령 아래 군정이 실시된 나라 가운데에서 사전연구와 준비가 없었던 유일한 중요지역이었다.1) 남한의 군정 실시와 관련한 3부(국무-전쟁-해군) 조정위원회(State-War-Navy Coordinating Committee: SWNCC)의 「초기기본지령」이 도쿄(東京)의 맥아더 태평양방면 미군최고사령관에게 통달된 것은 한국에 미군이 진주하고 한 달도 더 지난 10월 17일이었다. 그리하여 하지(John R. Hodge) 주한미군사령관에게는 한국은 카이로선언에 따라 “적당한 시기에” 독립될 것이라는 것과 당분간 남한에 군정을 실시한다고 선포한 「맥아더포고 제1호」가 점령정책의 유일한 기본지침이었다. 하지 자신은 뒷날 “무엇보다 필요했던 것은 임기응변과 이니셔티브와 양키적 창의성이었다”라고 술회했다.2)
 
 
  “現存하는 行政機關을 이용한다”
 
   미국의 대한정책은 2차세계대전 기간에 지구규모로 확대된 미국의 국제정치적 위상과 경제규모에 따른 안전보장과 국가이익의 차원에서 검토되었다. 그리하여 미군정부의 점령정책의 기본방침은 “질서정연하고, 효과적으로 운영되고, 그리고 정치적으로 우호적인 한국”을 건설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3) 정치적으로 우호적인 한국의 건설이란, 종전 시점에 이르러서야 서둘러 북위 38도선 이남의 한국을 미군이 점령하기로 결정한 사실이 시사하듯이, 한반도에 “공산주의에 대한 방파제”를 구축하는 것이었다.4)
 
  진주한 미군 간부들이 먼저 접촉한 한국인들은 영어가 능숙한 우파 민족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거의가 미국에 유학했던 한국민주당(이하 한민당) 관계자들이었다. 일본군의 항복조인식이 있은 다음 날인 9월 10일 저녁에 요정 명월관(明月館)에서 한국기자단 주최로 미국종군기자단과 미군정부의 공보관계자들을 위한 만찬회가 열렸는데, 이 자리에서 『코리아 타임스(The Korea Times)』의 주간 이묘묵(李卯默)이 유창한 영어로 연설을 했다.5) 매사추세츠주의 보스턴대학교(Boston University)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했던 이묘묵은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 사건때에는 수감되기도 했었다. 이묘묵은 미군 진주에 맞추어 백낙준(白樂濬), 하경덕(河敬德) 등과 같이 9월 5일자로 영자신문 『코리아 타임스』를 창간했다.
 
  이튿날 오후 하지는 기자회견을 가졌다. 그는 먼저 “나는 군사방면의 일만 해 왔으므로 그밖의 문제에 대해서는 대답할 수 없는 것이 있을지 모른다”고 전제한 다음, 미군정부의 기본적인 시정방침은 「맥아더포고」의 제1호, 제2호, 제3호에 표명되어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카이로선언에서 언급한 “적당한 시기”란 한국 안에 치안이 잘되고 못 되는 데 달렸다고 주장했다.
 
  하지는 이어 잠정적 방법으로 현존하는 행정기관을 이용한다고 말하고, 그것은 공장원이 새로운 기계가 설치될 때까지 기존의 기계를 이용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설명했다. 그러므로 「맥아더포고 제1호」에 규정되어 있는 대로 모든 관리는 종전대로 직무를 계속 수행해야 하며, 그것을 준수하는 것이 “신생 한국의 첫 출발이며 다음 출발의 기반이 된다”고 강조했다. 하지는 끝으로 현재 한국에는 많은 정당과 단체들이 조직되었는데 그 가운데에는 자기에게 면회를 요청하는 사람이 많다면서, 한국인들의 의견을 듣기 위해 각 정당과 문화단체의 대표들을 만나겠다고 밝혔다.6)
 
 
  政黨 및 文化團體代表 초청하자 1,200명 몰려와
 
  하지는 이날 기자회견과 라디오 방송을 통하여 9월 12일 오후 2시50분에 부민관〔府民館: 지금의 서울시의회 의사당〕으로 정당 및 문화단체 대표 두 사람씩을 초청한다고 발표했다. 미군당국은 8·15 해방 이후에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정당들이 33개쯤 되는 것으로 파악했다. 그러나 지정된 시간이 다 되도록 참석자들의 접수가 계속되어 미처 등록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냥 입장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참석자는 무려 1,200명이 넘었다.
 
  하지는 오후 2시40분에 연단에 나타났다. 그는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 총독 사무실에 가서 아베의 해임을 통고하고 오는 길이었다. 하지는 먼저 자기는 농촌에서 나서 자란 ‘보통사람’이라고 말하고, 태평양전쟁 때에 했던 일을 대충 설명했다. 청중으로부터 갈채가 터져 나왔다. 하지는 자기는 군인이지 외교관이 아니므로 한국에 대한 연합국 계획의 전부를 알지는 못하지만 그 자신의 임무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면서, 그것은 일본인들의 항복을 접수하고 법과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는 이어 카이로선언은 “적당한 시기에”한국을 독립시키겠다고 약속했으나 독립은 하루 이틀에 되는 것도 아니고 몇 주일 안에 되는 것도 아니라 시일이 좀 걸릴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므로 너무 성급한 행동은 “여러분이 원치 않는” 혼란과 파국을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미국도 독립이 완성되기까지에는 수십 년이 걸렸다”고 덧붙였다.
 
  하지는 한국 지도자들의 협조를 당부하고, 청년들은 시위를 자제할 것을 촉구했다. 그는 맥아더 장군이 언론과 출판과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다고 포고했으나, 한국민들이 그것을 남용하지 말기 바란다고 말했다.7)
 
  하지의 연설이 끝나고 박수소리가 숙지근해지자 한복차림에 갓을 쓴 한 점잖은 노인이 하지에게 태극기를 증정했다. 이어서 조병옥(趙炳玉)이 청중석에서 일어나 영어로 연합국에 대한 감사를 표시했다. 그는 한국의 정치상황이 창피하다고 말하고, 카이로선언과 루스벨트(Franklin D. Roosevelt) 대통령, 대서양헌장 등에 대해 언급하고 나서, 한국이 머지않아 강력한 정부를 수립할 수 있도록 미국인들이 도와줄 것으로 믿는다고 역설했다. 그는 또한 중경임시정부가 모든 점에서 하지 장군과 잘 협조할 것으로 확신한다고 말했다.8) 뒤이어 임영신(任永信)이 일어나 한국여성을 대표하여 연합국에 감사의 뜻을 전했다.9) 임영신은 이튿날 결성된 여자국민당(女子國民黨)의 당수로 선출되었다.
 
  이날의 하지의 연설도 이묘묵이 통역했다. 이렇게 하여 이묘묵은 곧 하지의 통역 겸 고문관으로 기용되었다.
 
 
 
“共産黨은 가장 잘 조직된 政黨”

 
  주한미군사령부 정보참모부(G-2)의 9월 12일자 “G-2 정보일지(제2호)”는 한국 정치단체에 관한 최초의 정보보고서였는데, 한민당의 조병옥, 윤보선(尹潽善), 윤치영(尹致暎) 세 사람을 만난 일을 언급하고 있다. 조병옥은 뉴욕 컬럼비아 대학교(Columbia University), 윤치영은 뉴저지주 프린스턴 대학교(Princeton University), 윤보선은 영국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 대학교(Edinburgh University) 졸업생들이었다. 보고서는 이들과의 면담을 근거로 한 것이었다. 보고서는 많은 한민당 사람들이 미국에서 교육받은 고학력의 기업인들과 지역유지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하고, 그들은 미군에 대하여 다음 세 가지를 요망한다고 적었다.
 
  (1) 어떤 단체를 막론하고 일본인 단체나 한국인 단체의 무장을 해제할 것. (2) 중경에 있는 한국임시정부를 귀국하도록 초청하는 것을 허락할 것과 그러한 조치를 승인하고 편의를 제공할 것. (3) 한국임시정부 관계자들을 신뢰하여 정보를 제공하고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을 활용할 것.10)
 
  이러한 요구는 한민당이 임시정부를 대표하는 정당임을 자처하는 것이었다. 조병옥의 술회에 따르면, 이때의 한민당 관계자들의 판단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카이로선언과 포츠담선언에 의하여 한국은 곧 독립정부를 수립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한민당은 (「맥아더 포고」를 보고) … 미군정에 협력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반대하느냐 하는 문제로 딜레마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당시의 국제정세에 비추어 보아 한국은 군정단계의 훈정기(訓政期)를 거치지 않고서는 치안유지를 할 수 없고 또 전 반도의 적화(赤化)를 면치 못할 것이라는 결론을 내려 한민당 수뇌부에서 와신상담(臥薪嘗膽)의 격으로 군정에 협력하기로 결정하였던 것이다.”11)
 
  ‘훈정기’란 정치훈련기라는 뜻으로 손문(孫文)이 「국민정부 건국대강(國民政府建國大綱)」에서 중화민국을 건설하는 기간을 군정시기(軍政時期), 훈정시기(訓政時期), 헌정시기(憲政時期)의 3단계로 설정했던 것을12) 원용한 개념으로서, 한민당 관계자들은 미군정기를 독립에 앞선 훈정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정보참모부의 보고서는 이어 인민공화국, 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 공산당 등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부정확하거나 매우 왜곡된 내용이었다. 우선 인민공화국과 건준을 혼동했다. 인민공화국은 8월 초에 여운형의 주도 아래 친일협력자 그룹이 조직한 것이라고 기술했다. 일본총독은 여운형에게 전쟁종결에 따라 한반도는 소련군이 단독으로 점령한다고 말하면서 상당한 액수(2,000만엔 가량)의 자금지원을 했다는 것이었다. 처음에 인민공화국을 강력히 지지했던 공산주의 동조자들은 미군이 상륙한다는 전단이 뿌려진 뒤로는 공개적인 활동이 줄어들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리고 여운형은 한국인들에게 여러 해 동안 친일협력자이자 정치꾼으로 잘 알려져 있다고 적었다.13)
 
  건준에 대한 기술은 9월 8일 이른 아침에 캐톡틴호(USS Catoctin)에 올라와서 자신들이 건준의 대표라고 했던 백상규(白象圭), 여운홍(呂運弘), 조한용(趙漢用) 세 사람과의 면담에 근거를 둔 것이었다. 보고서는 건준의 지도자는 백상규인 것 같다고 적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조직이 전국에 135개 지부가 있고, 민주적 정부형태를 조직하는 것이 자신들의 목적이라고 말했다고 했다.14)
 
  공산당에 대해서는 백상규 일행이나 조병옥 등도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던 것 같다. 보고서는 공산당의 존재는 거의 의심이 없으나 누가 지도자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고 기술했다. 그러나 공산당은 모든 정당들 가운데 아마 가장 잘 조직된 정당일지 모른다고 우려를 표명했다.15)
 
  또한 9월 13일자 “G-2 정보일지(제3호)”는 국민대회준비회의 서상일(徐相日), 김도연(金度演), 설의식(薛義植), 김동원(金東元), 김용무(金用茂) 등을 만난 사실을 기록했다. 보고서는 이들이 “잘 알려져 있고 존경받는 기업인과 지도자들”이라고 말하고, 한민당은 “일반 한국인 대중을 가장 잘 대표하고 있고, 보수적이고 유능하고 인기있는 지도자들과 기업인들을 가장 많이 가진 정당”이라고 적었다.16)
 
  또한 9월 14일자 “G-2 정보일지(제4호)”는 이승만이 일찍이 한국임시정부의 지도자였다고 설명하고, 대다수의 한국인들이 이승만을 ‘한국의 손일선(孫逸仙: 孫文)’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점점 더 두드러지고 있다고 기술하고 있어서 눈길을 끈다.17)
 
  이러한 정세보고가 하지 사령관이나 베닝호프 정치고문의 상황판단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가장 고무적인 유일한 요소는 수백명의 保守主義者”
 
  베닝호프는 미군이 진주한 지 1주일 뒤인 9월 15일에 그동안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여 번스(James F. Byrnes) 국무장관에게 보냈다. 그것은 9월 13일에 하지가 맥아더에게 보낸 것과 같은 내용으로서, 미군정부 당국의 한국 정치정세 인식과 그것에 따른 독자적인 정책수립 방향을 제시하고 있어서 자세히 톺아볼 필요가 있다.
 
  베닝호프는 한국의 상황은 “불만 댕기면 당장 폭발할 화약통”이라고 설명했다. 한국인들은 카이로선언의 “적당한 시기에(in due course)”라는 말을 “며칠 안에(in a few days)” 또는 “빠른 시일 안에(very soon)”라고 이해했고, 따라서 미군진주 뒤에도 독립이 즉시 실현되지 않는 것이 사람들에게 큰 실망을 주고 있다고 지적했다.
 
  베닝호프는 또 한국인들의 일반적인 태도를 다음과 같이 실감나게 묘사했다.
 
  “거의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8월 15일부터 무기한의 휴가에 들어가 있다. 그들에게 독립은 노동으로부터의 자유를 뜻하는 것이 분명하다. 미래에 대한 걱정은 전혀 없이 ‘하나님이 먹여살려 준다’고 믿는다. 우리가 진주한 이래 이 지역에서 산업활동은 보이지 않으며, 평상의 직장으로 복귀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다. 하지장군과 그밖의 사람들이 한국인들은 직장을 지키고 자신들의 나라를 건설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계속 강조하고 있으나, 그들은 아직도 대부분의 기업과 산업시설을 일본인들이 소유하거나 지배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러한 주장은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한국은 완전히 무르익은 선동장이다. …”
 
  베닝호프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가장 고무적인 것은 한민당의 존재라고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정치정세 중에서 가장 고무적인 유일한 요소는 연만하고 고학력의 한국인들 가운데 수백명의 보수주의자들이 서울에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대일협력의 전력이 있으나, 그러한 오명은 결국은 사라질 것이다. 이들 그룹은 ‘임시정부’의 귀국을 지지하고 있으며, 비록 다수파는 아니더라도 하나의 그룹으로서는 아마 가장 큰 그룹일 것이다.”
 
 
 
“重慶亡命政府를 간판으로 활용해야”

 
  베닝호프는 이어 미국 신문기자들이 현지사정을 제대로 취재하지도 않고 무책임한 기사를 쓰고 있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실제로 이 무렵에 한국을 취재한 미국 기자들 가운데에는 에드가 스노(Edgar Snow)와 같이 루스벨트 시대의 미국 지식인들의 일반적인 경향대로 공산주의에 동정적인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베닝호프는 그들의 행태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어서 흥미롭다.
 
  “한국을 취재하는 신문특파원들은 집단적으로 좋지 않게 행동해 왔다. 그들은 우리가 상륙한 뒤에 비행기로 도착했는데, 대부분은 현지사정에 대한 지식도 없이 일본에서 날아왔고, 오리엔테이션도 없이 이 지역에서 자유로이 돌아다니기 위해 미군 군복을 이용하고 있다. 그리하여 군복을 입은 채 개인적인 부정행위까지 저지른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한국인 급진파를 공공연히 동정하여, 한국인 그룹의 지도자들에게 모든 것을 전복하고 한국인들이 모든 기능을 즉각 장악하도록 선동하는 일에 더 힘을 기울이도록 부추긴다고 믿을만한 근거가 있다. … 그들은 어느 날 오후에 한 그룹이 비행기편으로 도착하여 그날 밤으로 기삿거리를 챙겨 가지고 이튿날 아침에 떠나면서 한국점령에 대해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느낀다.”
 
  베닝호프는 마지막으로 하지가 맥아더에게 건의한 내용을 자신의 보고서에 그대로 적었다. 그것은 (1) 한국의 정치경제적 장래에 관한 국제적 정책을 수립하여 발표할 목적으로 서울에 국제정책분야에 관한 통제부를 설립할 것, (2) 그러한 통제부가 설립될 때까지 한국의 장래에 관한 정책에 대하여 명백한 지시를 본관에게 보내주거나 한국의 장래에 관하여 발언할 권한이 있는 워싱턴의 관리를 본관의 참모로 보강시켜 줄 것, (3) 중경망명정부를 연합국의 후원 아래 임시정부로서 귀국시켜 점령기간 동안 및 한국국민이 선거를 실시할 수 있을 만큼 안정될 때까지 간판으로 활용하는 문제를 고려해야 된다는 등 8개항이었다.18)
 
  그 가운데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3)항의 중경임시정부를 귀국시켜 간판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그것은 미국정부는 임시정부를 비롯한 어떠한 독립운동 단체도 한국국민의 대표기관으로 인정하거나 지지해서는 안 된다는 국무부의 일관된 정책과는 배치되는 주장이었다.
 
 
  2. 共産黨의 기습적인 人民共和國 組閣 발표
 
  미군진주와 군정의 실시라는 예상 밖의 상황을 맞아 좌익세력은 긴장했다. 그들은 적극적인 대응에 나섰다. 좌익세력의 움직임 가운데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9월 11일에 박헌영(朴憲永)의 재건파공산당 주도로 조선공산당을 재건했다고 발표한 일이었다. 1928년 12월에 코민테른〔국제공산당〕의 이른바 「12월테제」에 따라19) 조선공산당이 해체된 지 17년 만에 재건된 것이다. 그러나 이때의 조선공산당의 재건과정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밝혀진 것이 없다. 당연히 열었어야 할 절차인 전당대회도 열지 않았다.
 
 
  朴憲永이 朝鮮共産黨 재건
 
9월 12일에 있었던 朝鮮共産黨再建 祝賀集會와 示威에 대한 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의 논평.
  박헌영이 1946년 3월에 서울주재 소련영사관에 제출한 러시아어문 보고서가 유일한 당재건관계 기록인데, 이 보고서에서 박헌영은 “모든 공산당 조직열성자들의 위임에 따라 박헌영은 1945년 9월 11일에 당 중앙위원회를 결성하였다”라고만 간단히 적어 놓았을 뿐이다.20) 박헌영은 중앙위원의 한 사람일 뿐만 아니라 당의 제1인자인 ‘총비서’가 되었다. 또 그는 중앙위원회 안에 설치된 정치국과 조직국의 위원으로 선정되었다.21)
 
  조선공산당은 당면한 투쟁목표로 (1)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 병사, 인텔리겐차 등 일반 근로인민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이익을 옹호하며, 그들의 생활의 급진적 개선을 위하여 투쟁한다. (2) 조선민족의 완전한 해방과 모든 봉건적 잔재를 일소하고 자유발전의 길을 열어주기 위하여 끝까지 투쟁한다. (3) 조선인민의 이익을 존중하는 혁명적 민주주의적 인민정부를 확립하기 위하여 싸운다는 세 가지를 내걸었다.22)
 
  한편 박헌영은 8월 20일에 조선공산당 재건준비위원회 명의로 발표한 「8월테제」를 수정하여 새로 구성된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명의로 다시 발표했는데, 수정된 중요내용은 (1) “우리의 당면 임무” 가운데 청년운동, 부녀운동, 문화단체, 소비조합운동, 실업자운동 등의 항목을 추가한 것, (2) 글의 후반에 조선혁명을 2단계로 규정한 “혁명이 높은 계단으로 전환하는 문제”를 추가한 것, (3) 한민당과 장안파공산당에 대한 공격이 더 노골적으로 가해진 것, (4) 말미의 구호 가운데 “조선인민정부 만세!”, “일본 혁명 만세!”가 삭제되고, “조선 혁명 만세!”, “조선인민공화국 만세!”가 포함된 것 등이었다.23)
 
  9월 12일 오후에는 경성운동장에서 대규모의 대중집회가 열리고 뒤이어서 시위행진이 있었다. 건준 주최로 기획된 이날의 행사는 8월 15일 이후로 가장 큰 규모의 시위운동이었다. 서울과 영등포 공업지대의 화학, 금속, 기계, 철도, 체신, 토목, 출판, 섬유 등 각 산업별 노동조합을 비롯하여 청년, 학도, 일반시민 등 20여개 단체 소속인원 1만수천명이 참가했다.24)
 
  이날 행사에 대하여 『해방일보』는 자연발생적인 시위가 아니라 “목적의식적으로 발전한 계획”이라는 점과 참가자의 90퍼센트가 공장노동자들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을 뿐 아니라 “조선공산당의 통일결성을 보여 노동계급의 총지도부가 성립되고 다른 한편으로 모든 약체의 우경반동세력이 조선인민공화국 건설을 방해하려고 그 규합을 꾀하는 순간에” 시위가 있는 것은 특히 중대한 의의가 있다고 평가했다.25)
 
  한편 한민당은 이튿날 미군정부 정보부장 헤이우드가 인민공화국에 대해 “현재 한국에는 미군정부 이외에 어떠한 정부도 있을 수 없다. 관념적으로는 어떤 정부를 운운할 수 있을 것이나, 사실상의 정부는 미군정부뿐이다”라고 언명했다는 내용의 전단을 만들어 서울시내에 살포했다.26)
 
  이러한 상황에서 9월 14일에 인민공화국이 발표한 조각뉴스는 전국에 걸쳐서 다시 한 번 회오리바람을 몰고 왔다.
 
 
  呂運亨의 동의없이 組閣名單 발표
 
朝鮮共産黨이 기습적으로 발표한 朝鮮人民共和國 組閣名單을 보도한 『每日新報』 지면.
  시종원경(侍從院卿) 등을 지낸 한말의 문신으로서 한일병합 뒤에 일본으로부터 자작(子爵) 작위를 받은 윤덕영(尹德榮)의 옥인동(玉仁洞) 별장이 인민공화국의 사무실이 되어 있었다.27)
 
  중앙인민위원회는 그곳에서 매일 오전과 오후로 회의를 계속했고, 9월 14일 오전에는 인민공화국의 「선언」과 「정강」 이외에 「시정방침」까지 발표했다. 위원들은 허헌에게 조각 발표도 강력히 요구했다. 이날은 앞에서 본 대로 9월 8일의 중앙인민위원회 제1차 회의에서 인민공화국의 조각을 여운형과 허헌 두사람에게 위임하면서 못 박은 시한의 하루 전날이었다. 조각이 발표되어야 인민공화국의 실체를 실감할 수 있을 것이었다. 가평에서 정양하고 있는 여운형은 조각 발표 전에 자기에게 한번 더 의논하라고 허헌에게 다질러 놓고 있었다. 여운형은 조각 발표를 보류하고자 했는데, 그 이유는 세 가지였다고 한다. 첫째로 정부 조직에는 미군정 당국의 양해가 있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둘째로 정부로서 체면을 유지할 만한 청사가 있어야 하겠는데 그것이 준비되지 않았으며, 셋째로 정부 주석은 대통령과 같은데 일국의 주석의 신분으로 체면을 유지할 만한 준비가 없다는 것이었다.28)
 
  미군이 진주하기 전에 황급히 인민공화국을 선포해 놓은 상황에서 인민공화국의 조각은 미군정 당국의 양해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말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
 
  그러나 여운형에게는 공산당의 계획을 제압할 만한 힘이 없었다. 이처럼 엄중한 시간에 여운형이 시골에서 정양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우유부단한 그의 고뇌를 짐작하게 한다. 정부 각료 인선은 여운형과 허헌에게 위임했다고 하나 실제로는 박헌영 그룹이 작성하여 허헌의 동의를 받아서 확정한 것이었다. 의장인 이만규는 조각 발표와 같은 중대한 행사는 위원장이 출석한 자리에서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고 가평에 있는 여운형에게 사람을 보내어 그의 의견을 들어 오도록 고집하여 대표 두 사람을 가평으로 내려보내고 회답이 올 때까지 정회했다. 오후 4시에 회의를 속개하자 회답을 받아 왔다면서 위원장이 곧 발표할 것을 승낙하고 내일 출석하여 소감을 말하겠다고 하더라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말이었다. 가평으로 보낸 사람들이 가평에는 가지 않고 몇 시간 뒤에 나타나서 여운형의 승낙을 받아 왔다고 한 것이었다. 이에 이만규는 회의장에서 퇴장해 버렸다.29) 이때의 일에 대해 이만규가 “이 부서〔조각〕발표에 대한 상세한 이면은 나로서는 영구히 비밀에 부친다. 중간교섭에 (있었던) 착오를 말하지 않겠다. 어찌되었든지 몽양(夢陽: 呂運亨)은 발표 후에 알았다”라고 기술하고 있는 것을 보면,30) 조각 발표가 공산당의 위계에 의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各部의 代理(次長)는 모두 共産黨員으로
 
  이렇게 하여 이날 오후에 발표된 조선인민공화국의 조각명단은 다음과 같았다.31)
 
  주 석                 이승만(李承晩)
  부주석             ○ 여운형(呂運亨)
  국무총리             허 헌(許 憲)
  내무부장             김 구(金 九)
  임시대리             허 헌
  외교부장             김규식(金奎植)
  임시대리             여운형
  군사부장             김원봉(金元鳳)
  임시대리         ○ 김세용(金世鎔)
  재정부장             조만식(曺晩植)
  보안부장         ● 최용달(崔容達)
  사법부장             김병로(金炳魯)
  임시대리             허 헌
  문교부장             김성수(金性洙)
  임시대리         ○ 이만규(李萬珪)
  선전부장         ● 이관술(李觀述)
  경제부장         ● 하필원(河弼源)
  농림부장             강기덕(康基德)
  보건부장             이만규
  체신부장             신익희(申翼熙)
  임시대리         ● 이강국(李康國)
  교통부장         ● 홍남표(洪南杓)
  노동부장         ● 이주상(李胄相)
  서기장                 이강국
  법제국장         ● 최익한(崔益翰)
  기획국장         ● 정 백(鄭 栢)
 
  (● 공산당        ○ 여운형계)

 
  위의 20명의 각료 구성을 보면 아직 귀국하지 않은 임시정부 요인(이승만, 김구, 김규식, 김원봉, 신익희), 국내의 우파 민족주의자(조만식, 김병로, 김성수, 강기덕)와 좌파 민족주의자(여운형, 허헌, 이만규), 그리고 공산주의자(최용달, 이관술, 하필원, 홍남표, 이주상, 이강국, 최익한, 정백)가 망라되어 이른바 민족통일전선을 구성한 것처럼 되어 있다. 그러나 차장을 뜻하는 각 부의 대리 31명 가운데 여운형계의 김세용(金世鎔), 이여성(李如星)과 천도교의 김기전(金起田), 연안 독립동맹의 무정(武丁)을 제외한 27명이 모두 공산당원들이었다.32) 그것은 인민공화국의 실상이 어떤 것인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 조각 명단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이 이승만의 이름이다. 해방되자마자 서울의 요소요소에 나붙었던 ‘동진공화국(東震共和國)’ 벽보에도 이승만은 대통령으로 되어 있었는데, 이제 전국의 ‘인민대표’들이 대회를 열고 수립했다는 조선인민공화국에서도 정부수반인 주석(主席)으로 추대된 것이다.
 
  인민공화국을 급조한 좌익인사들이 이승만을 주석으로 추대한 데에는 여러 가지 고려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일반 국민들, 특히 지식인들 사이에 잘 알려져 있는 이승만의 설화적 명성을 고려했기 때문이었다. 여운형과 허헌은 이승만이 1942년에 「미국의 소리」 방송을 통하여 동포들의 봉기를 촉구한 단파방송 청취사건에도 관련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현실적으로는 장기간 미국에서 활동했던 이승만과 미군정 당국과의 관계를 감안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중경임시정부의 주석 김구를 부주석 여운형과 허헌 국무총리 다음의 내무부장으로, 부주석 김규식을 외무부장으로 선정한 것은 국내의 임시정부 추대세력, 특히 한민당을 의식하여 중경임시정부를 한국인의 유일한 대표기관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경쟁적인 입장에서 나온 조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인선은 해외에 있는 인사들과는 말할 것도 없고 국내의 우파 민족주의자들과도 사전협의를 하거나 승인을 받지 않은 것이었다. 그들의 명의를 도용했다는 비판이 이는 것은 당연했다.
 
 
  「宣言」과 「政綱」과 「施政方針」
 
  이날 발표된 인민공화국의 「선언」은 8·15해방은 “조선민족의 다난한 해방운동사상에서 새로운 제1보를 내디뎠음에 불과하다”라고 말하고, “우리는 일본제국주의의 잔존세력을 완전히 구축하는 동시에 우리의 자주독립을 방해하는 외래세력과 반민주주의적, 반동적 모든 세력에 대한 철저한 투쟁을 통하여 완전한 독립국가를 건설하여 진정한 민주주의 사회의 실현을 기한다”라고 천명했다. 그러면서 “안으로는 조선인민대중생활의 급진적 향상과 정치적 자유를 확보하고, 밖으로는 소련, 미국, 중국, 영국을 비롯하여 평화를 사랑하는 모든 민주주의적 제국가들과 제휴하여 세계평화의 확립에 노력하려 한다”라고 하여 「8월테제」에서 소련만을 거명했던 태도를 조금 수정했다.
 
  「정강」으로는 (1) 정치적 경제적으로 완전한 자유독립국가의 건설, (2) 일본제국주의와 봉건적 잔재세력의 일소, (3) 노동자 농민과 그밖의 일체 대중생활의 급진적 향상, (4) 세계민주주의제국의 일원으로서 상호유대하여 세계평화를 확립한다는 4개항을 표방했다. 또한 「시정방침」으로는 27개항을 열거했는데, 그 가운데에서 눈여겨볼 만한 것은 (2) 일본제국주의와 민족반역자들의 토지를 몰수하여 농민에게 무상분배. 단 비몰수 토지의 소작료는 3·7제로 실시, (3) 일본제국주의와 민족반역자들의 광산, 공장, 철도, 항만, 선박, 통신기관, 금융기관 및 그밖의 일체 시설을 몰수하여 국유화, (4) 민족적 상공업은 국가의 지도하에서 자유경영 허용, (10) 8시간 노동제 실시, (11) 최저 임금제 확립 등이었다.33) 그것은 해방정국에 논쟁점이 될 과제들을 망라한 것으로서, 박헌영의 「8월테제」가 말하는 ‘부르주아민주주의체제’의 건설이란 다름 아닌 사회주의체제의 국가건설을 뜻하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兄님의 政治生活 중 가장 큰 失策”
 
呂運亨은 정열적인 웅변으로 靑年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조선인민공화국의 조각 뉴스는 『조선일보(朝鮮日報)』나 『동아일보(東亞日報)』 등의 민족지들이 아직 복간되지 않은 상황에서 건준이 장악하고 있는 『매일신보(每日新報)』를 통하여 대대적으로 보도됨으로써 해방이 바로 독립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일반 국민들을 열광시켰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이 조선인민공화국의 각료명단을 이처럼 기습적으로 공표한 것은 미군정 당국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행위가 아닐 수 없었다.
 
  좌익인사들의 인민공화국 선포는 다른 어떤 사건보다도 해방정국을 처음부터 나쁜 방향으로 전개되게 한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다.34) 여운형의 동생 여운홍(呂運弘)은 인민공화국 수립은 “순전히 소아병적인 극렬 공산당원들이 꾸며낸 하나의 연극이었다”고 말하고, “형님의 정치생활 중 가장 큰 실책”이었고, “이때부터 형님은 극좌극렬분자들의 음모에 완전히 휩쓸리고 말았다”라고 술회했다.35)
 
  그런데 인민공화국의 조각발표가 있고 2주일이 지난 10월 1일 저녁에 기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한 여운형의 말은 그의 행동의 진정성을 의심하게 하는 것이었다. 인민공화국의 탄생 경위를 묻는 기자들에게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38도 이북에는 소련군이 온 후로 허다한 풍설과 세평이 있었으나, 시일이 지날수록 전광석화적으로 질서를 회복하고 인민에게는 줄 것을 착착 주고 있다. 그러므로 38도 이남에도 반드시 동일한 처치가 있을 줄로 알았다. 그러나 1개월이 지났는데 기대에 어그러진 것은 유감이다.”
 
  그는 또 인민공화국은 ‘혁명’의 결과물이라고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조선의 독립은 단순한 연합국의 선물이 아니다. 우리 동포는 과거 36년간 유혈의 투쟁을 계속하여 온 혁명으로 오늘날 자주독립을 획득한 것이다. 그러므로 혁명에는 기탄이 필요치 않다. 혁명가는 먼저 정부를 조직하고 인민의 승인을 받을 수 있다. 급격한 변화가 있을 때에 비상조치로 생긴 것이 인민공화국이다. … 당초에 연합군이 진주한다면 국권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준비한 것이 곧 인민공화국이다. … 혁명 초에는 혁명단체가 조각하는 것이요 인민이 조각하는 것이 아님은 손문을 보아 알 것이다.”
 
 
  “海外에 다섯 개의 政府가 있다”
 
  여운형은 중경임시정부를 정통정부로 맞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말로 반대했다.
 
  “중경임시정부를 지지 환영하는 것은 여운형이가 가장 강하다. … (그러나) 임시정부만을 지지하라는 법은 없을 줄로 생각한다. 중경임시정부의 절대지지는 필요하지 않다. 국내에 있는 모든 정치운동을 무시할 그네들이 아니다. 나는 해외정권을 환영한다. 현재 중경 이외에 미국에도 두 파가 있다. 연안(延安)에도, 시베리아에도 정당이 있어서 다섯 개의 정부가 있다. 따라서 한 정부만 지지하면 해외동지를 그만큼 분규시킬 뿐이다. 그러므로 모든 해외동지를 환영해 들여서 국내 정부를 조직하여야 한다.”
 
  가장 흥미있는 것은 인민공화국이 “붉다”고 본다는 지적에 대한 반응이었다.
 
  “포복절도할 일이다.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오늘날 민주주의 조선을 건설하는데 조선에 적색이 어디 있느냐. 대체 공산주의자를 배제할 필요가 어디 있느냐. … 노동자, 농민 및 일반대중을 위하는 것이 공산주의냐. 만일 그렇다면 나는 공산주의자도 되겠다. 근로대중을 위하여 여생을 바치겠다. 우익이 만일 반동적 탄압을 한다면 오히려 공산주의 혁명을 촉진시킬 뿐이다.…”
 
  이렇게 단호하게 역설하고는 “나는 공산주의자를 겁내지 않는다. 그러나 급진적 좌익이론은 나는 정당하다고 보지 않는다”36)라고 덧붙이고 있는 것은 그의 이념의 무정견을 드러내어 보이는 것이었다. 이러한 여운형을 그의 측근들은 반(半)인텔리, 개론(槪論)주의자, 아우트라인주의자라고 말했다.37) 이러한 그의 개론주의가 일반대중, 특히 청년층에 인기가 있었던 것은 그의 수려한 용모와 풍채에 더하여 어퍼컷 제스처를 곁들인 정열적인 웅변으로 표명되기 때문이었다.
 
  건준은 9월 26일에 열린 건준과 인민공화국의 연석회의에서 발전적으로 해체하기로 결의했으나,38) 여운형 측근들의 반대로 실현을 보지 못하다가 여운형의 기자회견이 있고 1주일 뒤인 10월 7일의 건준 중앙위원회 회의에서 정식으로 해체를 결의했다.39) 지방의 건준지부는 행정 단위별로 인민공화국의 행정기관인 지방인민위원회로 개편되었고, 치안대 등 건준의 산하조직은 무기를 소지한 채 인민공화국의 산하기관이 되었다. 미군정청은 9월 23일에 「법령 제3호」로 일반인의 무장해제를 명령했는데, 10월 3일자 “G-2 정보일지”에 따르면 9월 28일에 해산된 회원 3,000명가량의 부산치안대는 해산할 당시에 소총 257정, 엽총 3정, 권총 14정이 압수되었다.40)
 
 
  소련군당국은 人民共和國에 냉담해
 
  조선인민공화국의 선포와 조각발표에 대하여 북한의 소련군사령부는 아무런 반응 없이 사실확인에 주력했다. 소련인들이 인민공화국 결성과정을 인식한 경로는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북한 공산주의자들로부터 얻는 정보이고, 다른 하나는 서울주재 소련 총영사관의 보고였다.41)
 
  9월에 한국의 공산주의운동 상황을 조사하기 위하여 평양에 파견된 연해주군관구 정치부 조사위원회의 보고서가 인민공화국과 박헌영의 관계를 자세히 언급하고 있어서 눈길을 끈다. 조사위원의 한 사람인 메클레르(Gregory K. Mekler) 중령은 박헌영이 인민공화국을 주도하고 있는 점과 관련하여 박헌영과 서울 중앙의 실제활동을 재검토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건의했다. 메클레르는 인민공화국이 여운형과 박헌영의 합작으로 조직되었고, 그것은 미군정의 사주에 의한 것이라고 판단했다고 한다. 메클레르는 이 정부에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한 친미주구 이승만이 주석에, 아베 총독의 천거에 따라 친일주구 여운형이 중앙인민위원〔부주석〕에, 변호사 허헌이 부주석〔국무총리〕에, 중경에서 망명생활을 한 악명 높은 우익 민족주의자이자 테러리스트인 김구가 내무부장에, 평양의 친일주구 조만식이 재정부장에 임명되었는 데 비해 공산당은 보안, 교육〔교통〕, 경제, 노동의 4개 부장직을 차지하는 데 그쳤다면서 우익적이고 친미적인 조각구성을 비판했다.
 
  서울 주재 총영사관의 부영사 샤브신(Anatolii I. Shabshin)도 9월 22일에 인민공화국에 대한 비슷한 정보보고를 연해주군관구 군사위원 슈티코프(Terentii F. Shtykov)에게 보냈다.42) 또한 총영사 폴리안스키(Alexander S. Poliansky)는 10월초에 “조선의 상황에 대한 간략한 보고”에서 인민공화국의 각료들을 소개한 다음 “각료 모두가 한국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새로 구성된 내각은 실제로 업무를 개시하지 않았다. 아무도 정부를 인정하지 않았다. 공산당은 정부 구성을 지지하였고 고위직을 차지하지 않은 데 대해 반대하지 않았다”라고 짧게 언급했다. 그러나 그 말의 뉘앙스는 호의적인 것이 아니었다. 소련군당국은 인민공화국에 대해 10월 초까지 확실한 입장을 결정하지 않았다.43)
 
  급조된 인민공화국에 대한 소련인들의 반응이 왜 그처럼 냉담했는가는 서울주재 소련총영사관의 부영사 샤브신의 아내 샤브쉬나(F. I. Shabshina)의 다음과 같은 논평에 잘 드러나 있다.
 
  “공산주의자들이 공화국 대통령 직위에 이승만을 대표로 추대한 것은 그들의 미숙함과 불철저성을 말해 준다. 서울을 중심으로 한 인민공화국 건국에 대한 모든 사상도 현실적인 상황을 고려하지 않았는데, 대외적인 조건으로 보아 처음부터 혁명의 토대가 북한에 놓여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 그것이다.”44)
 
  혁명의 토대가 처음부터 북한에 놓여 있었다는 사실을 남한 공산주의자들이 간과했다는 샤브쉬나의 지적은 의미심장하다. 남한의 공산주의자들에게는 자율적으로 정권기관을 수립할 수 있는 권리가 이미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박헌영은 이와 같은 보고서들이 작성되고 있는 줄도 물론 몰랐다.
 
 
  共産黨 내부에서도 人民共和國 비판
 
  박헌영이 우격다짐으로 조선인민공화국을 급조한 데 대한 비판은 조선공산당 내부에서도 제기되었다. 장안파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은 10월 9일에 박헌영의 인민공화국 급조를 비판하는 「정권수립과 민족통일전선에 관한 결정」을 채택했다. 이 「결정」은 인민공화국의 결성에 대하여 “우리 계급진영 내부의 분열과 혼란, 소부르주아적 영향은 제1차 인민대표회의 이래 이 운동을 지도한 동지 박헌영을 중심으로 한 소위 재건측 동지들의 종파적, 기회주의적 제이탈 가운데 완전히 반영되고 폭로되었다. 그들은 국제정세에 대하여 완전한 착각과 성급한 판단 내지 전략과 전술의 변증법적 관계에 대한 기본적 의식의 결여로 ‘정권획득’이라는 투쟁을 극소수의 전위만으로 결행하는 극좌적 경향에 빠져 …” 오류를 범했다고 비판했다.45) 해방되자마자 경전(京電) 종업원조합 준비위원회를 조직했고, 이어 10월에 조선노동조합 전국평의회(이하 전평) 상임준비위원으로 선출된 정희영(鄭禧泳)의 “박헌영 동지에게 서간(書簡)”이라는 장문의 성토문은 공산당 내부비판의 대표적인 것이었다. 정희영은 박헌영이 서둘러 건준의 주도권을 장악한 것부터가 레닌주의의 투쟁원칙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레닌주의적 방법은 제1로 자기계급사업을 주체로 하면서 제2로 동맹자와의 협동을 꾀하는 것이다. 그런데 동무는 우리 계급진영의 통일문제는 그저 두고 ‘건준’의 지도와 ‘인민공화국’의 수립에 전력하였다는 것은 계동회의(桂洞會議)의 인사에서 고백되었다. 우리 계급진영이 통일되기 전에 민족운동의 영도는 불가능한 것이다. 민족운동의 영도는 결코 정략적으로 의자쟁탈에 있지 않은 것이며, 의자쟁탈에 일시적 성공을 한다 하더라도 그 의자는 결코 유지될 수 없는 것이다. ‘건준’의 사실상 분열, 곧 민족주의자들의 탈퇴는 이것을 말하는 바이다.”
 
  이러한 주장은 박헌영이 인민공화국을 급조한 목적이 민족통일전선정권이라는 권위를 내세워 장안파를 제압하고 당의 헤게모니를 장악하려 한 것이었음을 확인해 준다. 그것은 분명히 레닌주의의 원칙에 위배되는 방법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인민공화국의 결성이 시기상조였다고 정희영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동무는 정권획득문제로써 ‘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생각하였다. 이것은 동무의 우리 해방을 가져오게 된 국제적 사정에 무지하였다는 것과 국내의 정세와 자기계급 역량에 대한 몰이해에서 나온 전술이다. 그러므로 정부수립의 시기는 상조(尙早)하였고 정부원(政府員)의 구성은 극좌적이었다.”46)
 
朝鮮共産黨의 鄭禧泳이 人民共和國 수립발표를 비판한 「朴憲永同志에게 書簡」.
 
  3. 右翼勢力 과시한 韓國民主黨 결당식
 
  9월 16일 오후 2시부터 경운동(慶雲洞)의 천도교 회관 대강당에서 열린 한국민주당 결당식에는 1,600명가량의 당원들이 모였다. 그것은 해방 이후의 가장 큰 우익 민족주의자집회였다. 한국민주당은 9월 6일에 통합발기인대회를 개최한 이래 이미 우익세력의 집결체로서 미군정부와 긴밀히 협조하면서 활동하고 있었는데, 이날의 결당식은 우익세력의 결속을 과시하는 전당대회였다. 좌익 쪽에서 대회를 방해할지도 몰랐으므로 대회 진행자들은 역도계의 원로 서상천(徐相天)을 훈련부장 겸 경호사령으로 위촉하여 장골들을 동원했고, 서북청년단과 보성전문학교 학생 이철승(李哲承)이 이끄는 학련(學聯) 등의 청년 학생들로 하여금 대회장 안팎을 엄중히 경계하게 했다.47)
 
 
  李承晩, 徐載弼, 金九 등 7명을 領袖로 추대
 
韓民黨 首席總務로 선출된 宋鎭禹.
  백남훈(白南薰)이 개회사를 한 다음, 김병로가 의장으로 선출되어 회의를 진행했다. 회의는 먼저 원세훈(元世勳)이 제의한 “우리 해외 임시정부 요인 제공과 미태평양방면 육군최고지휘관 겸 연합군 총사령관 맥아더 원수에 대한 감사”결의안을 만장일치로 가결한 데 이어, 이인(李仁)이 제의한 두 가지 긴급결의안을 상정하여 토의했다. 긴급결의안이란 (1) 한국은 국제관계상 미-소 양군에 분할점령된 바 이것은 불편 불행한 일이므로 미국 군당국에 교섭하여 하루바삐 통일적 행정상태가 실현되도록 노력할 것, (2) 현 행정기구에 임시적이나마 일본인 관리를 남겨둠은 불안과 침체를 초래하므로, 공정하고 유능한 인물을 한국인 중에서 채용할 것의 두 가지였다. 이 두 결의안도 만장일치로 가결되었다.
 
  김도연의 경과보고에 이어 「선언」, 「강령」, 「정책」을 상정하고, 백관수가 제안설명을 했다. 이 세 가지는 9월 6일의 통합발기인대회에서 이미 의결한 것이었는데, 원안대로 채택되었다.
 
  회의는 이어 참석자 전원이 일어서서 장덕수(張德秀)의 선도로 당원선서를 한 다음, 의장 김병로가 당의 기구에 대하여 설명하고 이승만, 서재필(徐載弼), 김구, 이시영(李始榮), 문창범(文昌範), 권동진(權東鎭), 오세창(吳世昌) 7명을 한국민주당의 영수(領袖)로 추대할 것을 제의하여 만장일치로 가결되었다. 그러나 추대된 영수 가운데에서 이 시점에 국내에 있는 인사는 권동진과 오세창뿐이었다. 회의는 이어 대의원 300명을 선출했다. 그러고는 내빈축사가 있고, 4시45분에 폐회했다.
 
 
  地域別, 系派別로 總務 9명 選出
 
  결당식을 마친 한민당은 종로국민학교에 본부를 두고 체제정비를 서둘렀다. 9월 21일과 22일 이틀 동안 중앙집행위원회가 열렸다. 21일 오후 3시에 100여명이 모인 첫 중앙집행위원회 회의에서는 당무를 책임질 총무위원 9명을 선출했다. 먼저 원세훈이 위원장이 되어 이인을 비롯한 10명의 전형위원을 선정하여 총무들을 천거하게 했다. 수석총무 송진우(전라남도)를 비롯하여 백관수(전라북도), 허정(경상남도), 서상일(경상북도), 조병옥(충청도), 김도연(경기도), 김동원(金東元·평안도), 원세훈(함경도), 백남훈(황해도) 여덟 사람이 총무로 선출되었다.48)
 
  이들 9명의 총무단은 전국 각도를 대표할 뿐만 아니라 출신 당파별로 안배하는 형식으로 선출된 것이었다. 김병로가 총무에서 빠진 것도 송진우가 같은 전라남도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김병로는 이튿날 중앙감찰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결당식에서 당의 영수들을 선출하기는 했으나, 이승만이나 김구, 이시영 등은 아직 귀국하지 않은 상태였고 문창범은 시베리아 재류 동포대표로 상징적으로 선출한 것이었으며, 국내에 있는 연로한 권동진과 오세창은 정치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수석총무로 선출된 송진우가 실질적인 당의 대표였다.49)
 
  22일의 중앙집행위원회 회의에서는 사무국과 11부서의 간부 133명과 중앙감찰위원 30명을 선임했다. 사무국장을 비롯한 11부의 부장들은 다음과 같았다.
 
  사무국장        나용균(羅容均)
  당무부장        이 인
  조직부장        김약수(金若水)
  외무부장        장덕수
  재무부장        박용희(朴容喜)
  선전부장        함상훈(咸尙勳)
  정보부장        박준희(朴濬熙)
  노동부장        홍성하(洪性夏)
  문교부장        김용무(金用茂)
  후생부장        이 운(李 雲)
  조사부장        유진희(兪鎭熙)
  연락부장        최윤동(崔允東)50)
 
  이들 부서의 구성원들은, 가령 외무부는 부장 장덕수와 윤보선, 윤치영, 구자옥, 이활(李活) 등 10명, 선전부는 부장 함상훈과 백낙준, 송남헌(宋南憲), 이하윤(異河潤) 등 15명의 면면에서 보듯이, 이때의 저명한 우파 민족주의 지식인들을 총망라하다시피한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우파 민족주의 세력의 집결체로 결성된 한민당은 미군정청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면서 군정청의 실질적인 여당이 되어 조선공산당을 중심으로 한 좌익세력과 대결했다.
 
 
  “韓民黨은 李承晩과 臨時政府의 早期歸國 바라”
 
  미군이 진주하고 3주일이 지난 시점의 남한의 정치정세에 대한 미군정 당국의 인식은 9월 29일에 베닝호프가 번스 국무장관에게 보낸 장문의 보고서에 잘 표명되어 있다. 베닝호프는 먼저 남한은 정치적으로 선명한 두 그룹으로 나뉘어 있다고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서울은, 그리고 아마 남한 전역이 그렇겠지만, 현재 정치적으로 명확히 두 그룹으로 나뉘어 있다. 이 두 그룹은 각각 독자적인 정치이념을 가진 몇 개의 작은 분파들로 분열되어 있다. 그 하나는 이른바 민주적 또는 보수적 그룹으로서, 이 그룹 구성원의 상당수는 미국이나 한국에 있는 미국계 기독교선교기관에서 교육받은 전문가들이거나 교육계 지도자들이다. 그들의 정강과 정책은 서유럽 민주주의를 지향하고 있으며, 한결같이 이승만 박사와 중경임시정부의 조기귀국을 바라고 있다.
 
  다른 편으로 급진파 또는 공산주의 그룹이 있다. 이 그룹은 중도좌파에서 급진파에 이르는 다양한 사상 경향을 가진 몇 개의 작은 분파들로 구성되어 있다. 공산주의자임을 자인하는 인물들이 가장 목소리가 높고 지도력을 발휘하고 있어 보인다.”
 
  베닝호프는 이러한 전반적인 인식에 입각하여 각 그룹의 활동과 주장 등을 자세히 분석했다. 그는 보수세력 가운데에서 가장 규모가 큰 것은 한민당이라고 말하면서, 한민당의 정강과 정책을 자세히 설명했다. 그러고는 한민당은 고학력의 기업인 및 전문가들과 전국 각 지방의 지역지도자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하고, 또 전쟁 기간에는 전국에 걸쳐서 1,000여명 가량의 지도자들이 참가한 비밀조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고 덧붙였다.
 
 
  “呂運亨은 共産主義에 경도된 機會主義者”
 
  한편 급진그룹의 주도세력은 건준인데, 이 조직의 지도자인 여운형은 미국식의 정치행동의 자유라는 특권을 이용하여 9월 6일에 자신의 세력을 정당으로 재조직하여 조선인민공화국이라는 정부를 수립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베닝호프는 진정한 민주주의 정부의 수립, 대중생활수준의 급진적 향상 등 인민공화국이 표방하는 정강은 “한민당의 정강처럼 명확하지 않다는 사실에 주의해야 할 것이다”라고 덧붙이고 있어서 눈길을 끈다.
 
  베닝호프는 여운형을 “공산주의에 경도된 정치적 기회주의자”라고 규정하고, 인민공화국의 조각발표에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두 그룹의 공표된 정강을 검토하는 한 한국의 장래에 대한 비전에 어떤 첨예한 차이는 없다. 그러나 보수세력은 그들의 프로그램을 중경임시정부의 지도 아래 실현시킬 것을 희망한다.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이승만 박사를 ‘한국의 손일선(孫逸仙: 孫文)’으로 불러 왔다. 한편 급진파들은 임시정부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고, 그들의 정강도 세밀하지 않으며, 국가재건과정에서 받게 될 원조와 지도의 방식에 대해서는 애매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이 나라에서는 이 박사의 권위가 너무 커서 임시정부와 관련시키지 않고도 그의 이름이 김구와 김규식과 함께 인민공화국의 각료명단에 포함되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그들에게 할애된 직책은 각료층의 다른 인사와 공산주의자 각료들이 겸임하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그들은 현재 서울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이용하는 간판이다.”
 
  베닝호프는 이러한 남한의 정치적 추세에 대하여 미군정부가 취할 수 있는 태도는 “평화와 질서가 유지되는 한 일종의 불간섭주의”라고 말하고, “이 박사와 다른 임시정부 인사들이 귀국한다면, 미국이 급진파에 반대하여 보수파를 지원한다는 비난은, 비록 모든 재외거주 한국인은 정치적 입장에 상관없이 교통편만 허용되면 누구나 자유로이 그들의 고국으로 귀환할 수 있다고 발표함으로써 사전에 제지한다고 하더라도, 모면하기 어려울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그러한 비난보다도 하지나 베닝호프의 더 심각한 관심사는 북한 소련군의 점령정책이었다. 그들은 남한 공산주의자들의 동향도 소련군 당국의 의사와 관련이 있다고 판단했다.
 
  “그들(소련인들)은 일본인들을 축출하고 엄격히 일당제에 입각한 지방정부를 설립했다. 그들이 동유럽을 소비에트화한 것과 마찬가지로 북한을 소비에트화할 것이라는 것은 가능성 이상의 것이다. 미국은 머지않아 루마니아, 헝가리, 불가리아에서 맞닥뜨린 문제와 비슷한 문제와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상황이 정돈되고 나면, 아마 북한은 공산주의 지배 아래 놓이고 남한은 미군 점령 아래 실질적으로는 공산주의자들을 추종하는 국가가 되어 있을지 모른다.”51)
 
 
  4. 期待에 어긋난 軍政長官 顧問會議
 
  9월 8일 인천에 상륙한 이후 남한의 각 도청소재지와 주요 도시에 미군의 진주가 완료되기까지는 한 달 가까이 걸렸다. 9월 13일에 개성에 진주한 것을 시작으로 부산에는 16일, 청주에는 17일, 춘천에는 20일, 대구에는 9월 하순, 전주에는 9월 29일, 광주에는 10월 5일, 그리고 대전에는 10월 21일에 가서야 정식으로 진주했다.52)
 
  미군은 9월 20일에 ‘군정부’ 를 ‘군정청’ 으로 개칭하기로 했다. 그러면서 군정청은 “인민을 위한, 인민에 의한, 인민의 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할 때까지의 과도적 기간에 38도 이남의 한국지역을 통치, 지도, 지배하는 … 임시정부”이고 군정청의 유일한 임무는 “한국의 복리상, 견실한 정부 및 건전한 경제의 기초를 확립하는 것”이라고 천명했다. 그와 함께 아널드 군정장관은 해임된 조선 총독부 일본인 국장들 자리에 미군 장교들을 임명했다. 정무총감에는 선발대 대장으로 왔던 군정장교 해리스(Charles S. Harrice) 준장이 임명되었다.53) 해리스는 이내 경상남도 지사로 전임되었다.
 
 
  ‘軍政廳’으로 개칭하고 警察機構 확충
 
  군정청의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는 치안문제였다. 아널드는 군정장관으로 임명되자마자 9월 14일에 성명을 발표하고, 현재의 경찰기구는 「맥아더포고 제1호」에 의거한 것으로서 일본정부와는 전혀 관계가 없으며 한국인과 일본인으로 되어 있는 현재의 경찰관은 유능한 한국인을 채용하여 훈련이 끝나는 대로 속히 전원을 한국인으로 조직할 것이라고 언명했다. 그리고 정치단체나 귀환병단체 또는 그밖의 일반시민단체가 경찰력 및 그 기능을 행사하거나 행사하려 하는 일을 금한다고 못 박았다.54) 그러고는 9월 16일부터 일본인 경찰관을 절차로 해고했다.55)
 
  미군정부 경무국의 경찰관 모집에는 응모자가 답지했다. 그리하여 9월 18일에는 광화문 앞의 경찰훈련소에서 177명의 새 경찰관 임명 선서식이 거행되었다. 선서식이 끝나자 신임 경찰관들은 바로 시내 각 요소의 경찰서에 배치되었다. 19일에도 같은 선서식이 거행되었다.56)
 
  경찰기구도 확충되었는데, 그것은 군정청의 기구개혁의 대표적인 것이었다. 9월 17일부터 전 조선총독부 국장들과 이쿠다(生田) 전 경기도지사 등이 종전 전후의 서류소각문제, 조선은행권 남발과 융자문제, 총독부 및 단체의 과대한 지출문제, 아편처분 문제 등으로 헌병대, 경찰서, 검사국에 구속되어 조사를 받았다.57)
 
  미군정청은 미군이 인천에 상륙하던 날부터 실시해 오던 오후 8시에서 다음 날 오전 5시까지의 야간통행금지 시간을 9월 19일부터 오후 10시에서 다음 날 오전 4시까지로 단축했다. 한편 제국주의 일본의 악법폐지도 서둘러 아널드 군정장관은 9월 22일에 「일반명령 제5호」로 치안유지법을 비롯한 조선사상범 보호시찰령, 조선사상범 예비구금규칙, 조선임시보안령, 임시자금조치법, 조선총독부 중추원 관제 등 악법을 폐지한다고 포고했다.58)
 
  이어 미군정청은 정부기관의 중요직위에 일본인 대신에 한국인을 임명해 나갔다. 미군정청 정보부장 헤이워드 중령은 9월 17일에 담화를 발표하고, 하지 사령관이 매주 월요일과 화요일 오전 9시부터 11시까지 한 사람 앞에 5분 동안씩 중요한 정치단체 대표와 개별적으로 면담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면담의 목적은 군정청의 각 국장 대리, 도지사 대리, 서울시장 대리, 군수 대리 등의 직무를 담당할 수 있는 한국인 후보자의 추천을 받기 위한 것이었다. ‘대리’ 제도는 “먼저 미군 가운데에서 각 국장을 임명하고, 국장을 보좌하는 보좌관인 대리는 한국인 가운데에서 선발하여 적당한 시기에 대리를 해임하고 국장과 도지사 및 그밖의 직책에 한국인을 정식으로 임명하기 위한 것” 이라고 했다.59)
 
 
  韓民黨간부 중심으로 顧問會議 구성
 
軍政長官顧問會議의 委員長으로 선임된 金性洙.
  그러나 이 계획은 그다지 성과가 없었다. 그리하여 미군정청은 각계의 지도적 인물을 군정장관의 고문으로 임명하여 이 고문회의(Advisory Council)로 하여금 인사문제를 포함한 전반적인 문제에 대하여 군정장관을 자문하게 하는 방법을 채택했다. 10월 5일에 발표된 군정장관 고문은 김성수(교육가), 송진우(정치가), 김용무(변호사), 김동원(기업가), 전용순(全用淳·기업가), 이용설(李容卨·의사), 오영수(吳泳秀·은행가), 강병순(姜炳順·변호사), 윤기익(尹基益·광산주), 여운형(정치가), 그리고 북한의 조만식(曺晩植·정치가) 11명이었다.60) 이들 가운데에서 직접 정치에 관여하고 있던 사람은 김성수, 송진우, 김용무, 김동원, 여운형, 조만식 6명이었는데, 여운형과 조만식 말고는 모두 한민당 간부들이었다. 그밖의 5명은 각각 전문 직종의 대표적 인물로 선정되었다.
 
  고문회의는 정식발표에 앞서 10월 4일에 첫 회의를 열어 김성수를 위원장으로 선출하고, 이어 공장의 재개, 도지사 임명 등의 의안을 논의했다. 이때의 고문단 선임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평양에 있는 조만식을 포함시킨 것이었다.
 
  여운형은 고문회의의 첫 회의가 열린 10월 4일에 아널드 군정장관의 연락을 받고 황진남(黃鎭南)을 대동하고 처음으로 군정청을 방문했다. 군정장관의 고문이 되어 달라는 아널드의 요청에 대해 여운형은 “내가 인민공화국을 세웠으니까 당신들이 우리 고문이 되어야 한다. 당신의 고문이 되는 것은 주객이 뒤집힌 것이다” 라고 말하면서 거절했다. 그러자 아널드는 여운형을 하지에게로 안내했다. 이 시간에도 하지는 각당 대표들을 만나고 있었다. 하지와 여운형은 초대면이었다. 여운형을 보자 하지는 “당신은 일본인들과 어떤 관계를 가졌느냐?”고 물었고, 여운형이 아무런 관계도 없다고 대답하자 하지는 다시 “당신은 일본인의 돈을 얼마나 받았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여운형이 인천에 미군이 상륙할 때에 백상규(白象圭) 등 환영 특사를 보냈던 일 등을 이야기한 끝에 ‘오해’가 풀렸고, 여운형은 군정장관 고문직을 수락했다.61)
 
 
  “人民共和國을 백번 解散해도 좋다”
 
  이 자리에서 하지는 여운형에게 해외에서 누가 귀국하면 좋겠느냐고 물었고, 여운형은 이승만, 김구, 김규식 세 사람의 이름을 적어 주었다고 한다. 그러자 하지는 “좋다. 그대로 힘써 보겠다”고 말했다는 것이다.62) 이때에 이승만은 이미 하지의 요망에 따라 미합동참모본부의 주선으로 귀국도상에 있었다.
 
  다른 고문들이 모여 있는 옆방으로 안내된 여운형은 당황했다. 그 자리에 있던 다른 고문들도 놀라는 기색이었다. 여운형은 뒷날 이때에 임명된 고문 아홉 사람 가운데에서 김성수와 송진우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서울에서조차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이었고, “대부분 평판이 나쁜 사람들”이었다고 적었다. 그리고 고문회의 위원장 선거에서 자기는 광산업을 하는 윤기익에게 투표했는데, 투표결과는 9대 1이었다고 했다.63)
 
  그리하여 그는 “언제나 나의 주장과는 9대 1로 대립될 것”이라고 판단하고 자리를 떴다고 한다.64) 여운형은 10월 14일에 정식으로 고문직을 사퇴했다.65)
 
  그런데 군정청 고문회의의 첫 회합에 참석했던 여운형은 이튿날 동대문 밖의 창신동 임종상(林宗相)의 집에서 한민당의 송진우, 백관수, 김병로, 장덕수, 건준과 인민공화국 쪽의 여운형, 허헌, 최근우(崔瑾愚), 조동호(趙東祜), 국민당의 안재홍, 그리고 박헌영 대신에 참석한 공산당의 이현상(李鉉相), 김형선(金炯善), 최용달(崔容達)이 모인 정당수뇌 간담회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주목할 만한 발언을 했다.
 
  “건준과 인민공화국이 우리 민족의 단결과 통일행동을 파괴하고 분규를 가져왔다면 그 책임은 오로지 여운형에게 있다.”
 
  이렇게 사과하는 듯한 태도를 보인 여운형은 다음과 같이 단호하게 말했다고 한다.
 
  “여기에는 국내의 좌-우 지도자 대부분이 모여 있다. 이 장소에서 민족의 진로에 대한 결론이 나온다면 인민공화국은 백번 해산해도 좋다.”66)
 
  여운형의 이러한 발언은 전날에 미군정의 고문직을 수락하면서 하지와 나눈 대화 내용이 심상하지 않은 것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韓國人의 參與意識 고취 위해 顧問會議 설치”
 
  베닝호프는 미군정 당국이 고문회의를 설치한 목적을 국무부에서 도쿄에 파견되어 있는 정치고문 대리 애치슨(George Atcheson)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고문회의의 목적은 충고와 조언 이외에 한국인의 의식 속에 그들이 정부활동에 참여하기 시작했다는 느낌을 심어 주는 것이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고문회의의 ‘위신’을 제고시킬 수 있는 면밀한 홍보 캠페인이 필요할 것이다. 고문회의의 설치에 대한 여론의 반응이나 신문 논평은 별로 없었는데, 그것은 이미 조선총독부의 자문기관으로 설치되었다가 최근에 해체된 유사한 기관이 친일협력자들의 집합체로 간주되었기 때문인 것 같다.”67)
 
  최근에 해체된 유사한 기관이란 조선총독부 중추원(中樞院)을 지칭한 것이었다. 아널드 군정장관은 9월 28일에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 박중양(朴重陽), 고문 한상룡(韓相龍), 윤치호(尹致昊), 이범익(李範益), 그리고 참의 김윤정(金潤晶)을 파면했었다.68)
 
  미군정청의 고위 관리로 임용할 한국인을 추천하는 작업은 한국말을 구사할 수 있는 미국 선교사 2세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그 가운데서도 하지 사령관의 특별보좌관 윌리엄스(George Z. Williams) 중령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적임자 추천뿐만 아니라 한국인들과의 접촉을 통하여 얻은 한국 사정에 관한 정보를 하지에게 보고했다.
 
  윌리엄스 중령은 인천에서 태어나서 충남 공주(公州)에서 성장했다. 그는 1907년에 공주에 파송되어 1940년에 일본에 의해 강제 퇴거당할 때까지 공주읍 교회 담임목사와 영명학교(英明學校) 교장으로 활동했던 윌리엄스(Frank E C. Williams·禹利岩) 선교사의 아들이었다. 그는 하지 중장 휘하의 육군부대를 수송한 함대사령관 킹(Ernest J. King) 제독의 군의관이었는데, 인천에 상륙하던 날 하지는 인천부두에서 한국말을 구사하는 윌리엄스를 우연히 발견하고 자기의 특별보좌관으로 임명했다.69) 윌리엄스는 주로 기독교 신자인 한민당 인사 가운데에서 인물을 찾았다. 고문회의의 중요 인물 추천도 윌리엄스에 의한 것이었다.70)
 
 
  李承晩, 金九, 金奎植을 빨리 歸國시켜야
 
  큰 기대를 가지고 설치한 고문회의는 그러나 설치 목적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이 이내 드러났다. 베닝호프는 도쿄의 애치슨에게 고문회의를 설치한 사실을 알린 이튿날 다시 후속전보를 쳤다. 이 보고전보는 국무부에는 송부되지 않았다. 전보의 내용은 아무래도 이승만, 김구, 김규식 세 사람을 빨리 귀국시켜야겠다고 말하면서, 구체적인 절차까지 제의하고 있어서 눈길을 끈다.
 
  “보수적인 그룹은 훨씬 덜 공격적이고 지식인층의 생각을 대표하는 것으로 믿어지고 있는데, 그들은 군정에 대해서도 협조적이다. 그들의 대다수는 한국은 일정기간의 후견(tutelage)기를 거쳐야 하고, 그럴 경우 소련의 지도보다는 미국의 지도하에 있기를 더 바란다고 말했다. … 이들의 대다수는 임시정부에 충성을 표명하고 있고, 이승만, 김구, 김규식의 귀국을 희망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특히 공산주의자들마저도 임시정부를 전면적으로 부정할 수 없는 상황에서(아마 애국심이라는 견지에서 보아 이 조직이 가지고 있는 권위 때문일 것이나), 우리 사령부는 위의 세 사람이 개인자격으로 한국으로 귀환할 수 있도록 허가해 주기를 요청했다. 이들을 다른 한국인 저명인사 이상으로 특별히 예우할 생각은 없다. 그들은 미군정에 협조할 준비를 해야 할 것이며, 현재의 고문회의 멤버들과 같은 조건으로 고문직에 취임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서 베닝호프는 이러한 조건을 이승만이나 그밖의 지도자들에게 출국하기 전에 알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들의 귀국 뉴스는 큰 반향을 불러 올 것이고 심지어 불순세력이 정치적 목적으로 악용할지도 모르므로, 서울과 미국과 중경에서 공표내용과 시기를 조절하여 그들의 귀국이유에 대한 의혹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건의했다.71)
 
  이처럼 하지는 이미 이승만, 김구, 김규식 세 사람의 귀국 조치를 전쟁부에 건의해 놓고 있었다.72)
 
  하지가 이승만의 귀국조치를 특별히 요구한 것은 윌리엄스 중령의 보고와 건의에 따른 것이었다. 윌리엄스는 쌍발비행기를 타고 대전, 광주, 대구, 부산 등 남한 각지로 돌아다니면서 한국인들을 만났는데, 한국인들의 관심의 초점은 “왜 우리 대통령 이승만 박사를 빨리 데려오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그런데 윌리엄스가 가는 곳마다 이승만의 귀국이 화제가 된 직접적인 이유는 이승만이 조선인민공화국의 주석으로 발표되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73)⊙
 

  1) Philip H. Taylor, “Military Government Experience in Korea”, Carl J. Friedrich et al., American Experiences in Military Government in World War Ⅱ, Rinehart & Company, Inc., 1948, p. 355. 2) John R. Hodge, “With the U. S. Army in Korea”, The National Geographic Magazine, Jun. 1947, p. 833, 崔相龍, 『美軍政과 韓國民主主義』, 나남, 1988, p. 62. 3) 『駐韓美軍史(3)』(History of the United States Armed Forces in Korea, 이하 HUSAFIK 3), 돌베개影印版, 1988, p. 66.
 
  4) E. Grant Meade, American Military Government in Korea, Kings Crown Press, Columbia University, 1951, p. 52. 5) 『駐韓美軍史(1)』(HUSAFIK 1), pp. 253~254. 6) 『每日新報』 1945년 9월 12일자, 「하지軍司令官記者會見談」. 7) 『每日新報』 1945년 9월 12일자, 「하지中將 各團體代表에 付託」; 『駐韓美軍史(2)』(HUSAFIK 2), pp. 8~11. 8) HQ, USAFIK, “G-2 Periodic Report”, no. 3, (1945. 9. 13). 9) “G-2 Periodic Report”, no. 3, (1945. 9. 13); 『每日新報』 1945년 9월 12일자, 「하지中將 各團體代表에 付託」.
 
  10) “G-2 Periodic Report”, no. 2, (1945. 9. 12). 11) 趙炳玉, 『나의 回顧錄』, 民敎社, 1959, p. 146. 12) 荊知仁, 『中國立憲史』, 聯經出版事業公司, 1962, pp. 358~364. 13) “G-2 Periodic Report”, no. 2, (1945. 9. 12). 14) Ibid. 15) Ibid. 16) “G-2 Periodic Report”, no. 3, (1945. 9. 13). 17) “G-2 Periodic Report”, no. 4, (1945. 9. 14).
 
  18) Benninghoff to Byrnes, Sept.15, 1945,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이하 FRUS) 1945, vol.Ⅵ, pp. 1049~1053. 19) 金俊燁-金昌順, 『韓國共産主義運動史(3)』, 청계연구소, 1986, pp. 327~351 참조. 20) 박헌영, 「조선공산당의 재건과 그 현상황」, 이정박헌영전집편집위원회 편, 『이정박헌영전집(2)』, 역사비평사, 2004, p. 209. 21) 張福成, 『朝鮮共産黨鬪爭史』, 大陸出版社, 1949, p. 54. 22) 『每日新報』 1945년 9월 14일자, 「朝鮮共産黨再建」.
 
  23) 朝鮮共産黨中央委員會, 「現情勢와 우리의 任務」, 『이정박헌영전집(5)』, pp. 51~69 참조. 24) 『每日新報』 1945년 9월 13일자, 「感激과 歡喜의 行進」; 『해방일보』1945년 9월 19일자, 「共産黨再建의 大示威行列!」; 『駐韓美軍史(2)』(HUSAFIK 2), p. 11. 25) 『해방일보』 1945년 9월 25일자,「九·一二데모의 敎訓과 批判」. 26) 李革 編, 『愛國삐라全集』, 祖國文化社, 1946, p. 32. 27) 丁相允, 「建準天下20日」, 『月刊 四月』 제5권 제9호, 四月公論社, 1971. 10, p. 23. 28) 李萬珪, 『呂運亨先生鬪爭史』, 民主文化社, 1946, pp. 264~265.
 
  29) 위의 책, pp. 263~264; 이정식, 『여운형 ─ 시대와 사상을 초월한 융화주의자』,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8, pp. 539~540. 30) 李萬珪, 앞의 책, p. 264. 31) 『每日新報』 1945년 9월 15일자, 「朝鮮人民共和國組閣完了」. 32) 民主主義民族戰線 編, 『朝鮮解放一年史(朝鮮解放年報)』, 文友印書館, 1946, pp. 89~90.
 
  33) 『每日新報』 1945년 9월 19일자, 「宣言, 政綱等發表」. 34) 李昊宰, 『韓國外交政策의 理想과 現實 ─ 李承晩外交와 美國政策의 反省』, 法文社, 2000, pp. 130~131. 35) 呂運弘, 『夢陽 呂運亨』, 靑廈閣, 1967, p. 153, p. 158.
 
  36) 李萬珪, 앞의 책, pp. 265~269. 37) 李蘭, 「해방 전후의 여운형」, 이정식, 앞의 책, pp. 768~769. 38) 『朝鮮解放一年史』, p. 85. 39) 『每日新報』 1945년 10월 8일자, 「“建準”, 發展的解消」. 40) “G-2 Periodic Report”, no. 23, (1945. 10. 3).41) 기광서, 「해방직후 조선공산당에 대한 소련의 입장」, 『역사비평』 2003 겨울호, 역사비평사, p. 240. 42) 전현수, 「소련군의 북한진주와 대북한정책」,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9집,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5, pp. 364~365. 43) 기광서, 앞의 글, p. 240. 44) 파냐 샤브쉬나 지음, 김명호 옮김, 『1945년 남한에서』, 한울, 1996, p. 88; Erik van Ree, Socialism in One Zone ─ Stalin’s Policy in Korea 1945-1947, Berg, 1989, pp. 77~78.
 
  45) 조선공산당(장안파) 중앙위원회 정치국, 「정권수립과 민족통일전선에 관한 결정」(1945. 10. 9), 『이정박헌영전집(9)』, p. 247. 46) 鄭禧泳, 「朴憲永同志에게 書簡」, 『朝鮮共産黨文件資料集(1945~46)』,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1993, pp. 91~92. 47) 愼道晟, 「韓民黨 創黨」, 朝鮮日報 編, 『轉換期의 內幕』, 朝鮮日報社出版局, 1982, p. 140.
 
  48) 『每日新報』 1945년 9월 23일자, 「韓國民主黨, 總務委員八名決定」. 49) 박태균, 「해방직후 한국민주당 구성원의 성격과 조직개편」, 『國史館論叢』제58집, 國史編纂委員會, 1994, p. 90. 50) 『每日新報』 1945년 9월 24일자, 「部署, 監察委員決定」.
 
  51) Benninghoff to Byrnes, Sept.29, 1945, FRUS 1945, vol. Ⅵ, pp. 1061~1065. 52) 森田芳夫, 『朝鮮終戰の記錄』, 巖南堂書店, 1967, p. 292. 53) 『每日新報』 1945년 1월 19일자, 「軍政廳으로 改稱」.
 
  54) 森田芳夫-長田かな子 編, 『朝鮮終戰の記錄 資料篇(一)』, 巖南堂書店, 1978, pp. 283~284; 韓國警察史編纂委員會 編, 『韓國警察史(Ⅰ)』, 內務局治安局, 1972, p. 926. 55) 『每日新報』 1945년 9월 16일자, 「朝鮮人警察訓練」. 56) 『每日新報』 1945년 9월 19일자, 「새 警察官들 配置」. 57) 森田芳夫-長田かな子 編, 앞의 책, pp. 52~57. 58) 『每日新報』 1945년 9월 22일자, 「暴惡한 法律의 廢止」. 59)『每日新報』 1945년 9월 17일자, 「警察官志願者遝至」, 9월 25일자, 「하지中將定例會見談」. 60) 『自由新聞』 1945년 10월 7일자, 「各界의 指導者十一氏 軍政長官顧問被任」. 『每日新報』 1945년 10월 6일자에는 ‘吳泳秀’가 ‘具泳秀’로 되어 있다. 61) “The Victim of Military Occupation of Korea”, The Voice of Korea, Sept.16, 1947.
 
  62) 李萬珪, 앞의 책, p. 248. 63) “The Victim of Military Occupation of Korea.” 64) 李萬珪, 앞의 책, pp. 239~242. 65) 『自由新聞』 1945년 10월 15일자, 「呂氏顧問辭任」. 66) 李英根, “八·一五解放前後のソウル(5)”, 『統一朝鮮新聞』, 1970년 9월 30일자. 번역문은 『月刊朝鮮』 1990년 8월호, p. 442. 67) Benninghoff to Atcheson, Oct.9, 1945, FRUS 1945, vol. Ⅵ, p. 1069. 68) 『每日新報』 1945년 9월 29일자, 「中樞院參議等五名 二十八日에 罷免命令」. 69) 김승태-박혜진 엮음, 『내한선교사총람 1884-1984』,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4, p. 526; 이정식, 「해방 전후의 이승만과 미국」, 『대한민국의 기원』, 일조각, 2006, p. 319. 70) Richard E. Lauterbach, Danger from the East, Harper & Brothers Publishers, 1946, pp. 202~203.
 
  71) Benninghoff to Atcheson, Oct.10, 1945, FRUS 1945, vol. Ⅵ, pp. 1070~1071. 72) 미국무부문서 895-00/8-1949 Warren S. Hunsberger, Sept.2, 1949, “U.S.Involvement in the Return of Syngman Rhee to Korea and in His Subsequent Prominence in Korean Government and Politics”(Internal Affairs of Korea 1945~1949). 73) 윌리엄스證言, 이정식, 앞의 글, 『대한민국의 기원』, p. 320.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NewsRoom 인기기사
Magazine 인기기사
댓글달기 0건
댓글달기는 로그인 하신 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

Load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