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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화소설] 金八峰과 인민재판

“깨끗하게 죽자! 아무도 미워하지 말자! 아무도 원망하지 말자!
내가 50도 되기 전에 일찍 죽는 것을 한탄하지도 말자!
이것을 내가 죽는 그 최후의 순간까지 절대로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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吳効鎭 언론인
⊙ 1943년 출생. 서울대 국문학과 졸업, 서울대 대학원 국문학 석사.
⊙ 월간조선ㆍ조선일보 기자, 서울방송 보도국장, 정부 공보실장, 청원군수 역임.
  1950년 7월 2일, 서울의 하늘은 마치 쪽물을 풀어놓은 듯이 파랬다. 특히 태평로 국립극장(옛 부민관, 현 서울시의회) 앞에서 올려다본 하늘은 더욱 아름다웠다. 이 자리에선 인민재판이 열리고 있었는데, 하늘이 어찌나 파랗고 아름다웠던지 그 으스스한 분위기도 느낄 수 없을 정도였다.
 
  팔봉 김기진은 이 인민재판의 피고로 끌려나와 포박당한 채 서 있었다. 그는 죽음이 임박한 절박한 상황에서도 푸른 하늘을 쳐다보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젠장, 참 아름답구나!”
 
  그 자신도, 자기가 인민재판의 피고로 서 있는 것이 도무지 실감 나지 않았다. 팔봉은 지금 자기가 꼭 죽을 자리에 서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이상하리만큼 마음이 가라앉아 있었다. 도봉산 기슭에서 서모와 함께 지내고 계신 팔순의 아버지도 생각나지 않았다.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에 대한 생각도 나지 않았다. 누가 그립다거나 불쌍하다거나 하는 생각도 나지 않았다. 이 세상에 대한 애착도 없었다.
 
  그때 멀리 한강 건너쯤에서 비행기가 우르르 쾅쾅 하며 폭격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언뜻 이런 생각이 들었다.
 
  ‘미국 비행기겠지. 여기 부민관 위로 날아와서 내가 서 있는 이 자리에다 폭탄이라도 하나 떨어뜨렸으면 좋겠다.’
 
  그러나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사방을 둘러보았다. 정면에는 서울신문사가 보였다. 그는 그 신문사를 한참 쳐다봤다. 그리고 자기를 가까이서 둘러싸고 있는 군중을 찬찬히 훑어봤다. 모두 400~500명은 될 것 같았다. 오른편을 봤다. 200명은 될 것 같았다. 뒤에 있는 현관 앞에도 100명은 서 있는 것 같았다. 그는 그 가운데 자기가 아는 얼굴이 있는지 찬찬히 찾아봤다. 오늘 오전 여기 끌려오기 전에 호의적인 영감을 통해서 아내한테 자기가 인민재판에 걸려들었단 쪽지를 전달하고 주선해 줄 것을 부탁했었다. 그래서 혹시 가족이 와 있나 하고 열심히 찾아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내가 여기서 이렇게 아무도 모르게 죽나 보다.’
 
  그때 언뜻 북에 가 있던 문인 이원조가 눈에 들어왔다. 이원조는 그와 눈이 마주치자 얼른 눈길을 거두고 몸을 감추는 것 같았다. 그 후 인민재판을 받는 도중 팔봉은 이원조를 다른 위치에서 또 한 번 봤다. 팔봉과 눈이 마주친 그가 곧 다른 데로 자리를 옮겼던 것 같다.
 
  꿈만 같았다.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꿈만 같고, 여기 끌려와서 ‘날 죽여 줍쇼’ 하고 서 있는 것도 꼭 꿈만 같고, 이틀 전 그자들에게 잡혀 온 것도 꼭 꿈만 같았다. 지나온 세상이, 아니 세상만사가 꼭 꿈만 같았다.
 
  ‘그렇다. 꿈을 꾸며 살다가 꿈을 꾸듯 가나 보다.’
 
 
  인민군, 끌고가자마자 조사도 없이 인민재판에 넘겨
 
  그러니까 그저께, 곧 6월 30일 저녁때였다. 피란을 가지 않고 서울에 남아 있던 그의 가족은 서울이 인공치하에 떨어진 지 사흘간을 불안한 가운데 보냈다. 그러다가 저녁때 웬 젊은이 여럿이 집에 찾아와 김기진을 찾았다. 그들은 주인이 집에 없다고 해도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고 기다리기만 했다.
 
  팔봉은 당시 을지로에서 경영하던 인쇄소 애지사의 2층집에 살고 있었는데 아래층 공장 사무실에 청년들이 찾아와 가지 않고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2층 살림집에 있던 팔봉은 처음엔 가족의 권유대로 어디로 피할까 생각하다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기가 죽을 죄를 지은 일이 없는 것 같아 그냥 집에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어쩐지 그냥 넘어갈 것 같지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집에서 입고 있던 평상복을 벗고, 고동색 양복 윗저고리와 허름하고 헐렁헐렁한 골프 바지로 갈아입었다. 혹 어디 끌려가게 되면 아무 데나 앉고 눕게 되는 일이 있어도 괜찮을 복장이었다. 그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옷을 갈아입고 앉아서 생각하니 이러지 말고 몸을 피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팔봉과 그의 아내는, 옆집 지붕 위로 달아나면 어떨까, 샛문으로 튀면 어떨까, 하고 이 궁리 저 궁리를 하다가 결국 커다란 옷장 속에 들어가 숨기로 했다. 아내가 요를 깔아 놓고 베개까지 가져다 놓았다.
 
  팔봉은 옷장 속에 들어가 누웠다. 참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털끝만큼도 잘못한 일이 없다. 양심상 가책도 없다. 소위 인민공화국에서 반동분자라고 지탄할 만한 일을 한 일도 없다. 그런데 내가 왜 이런 데 숨어 있어야 하나. 또 그렇지. 누가 여기 올라와서 나를 찾다가 없으면 당연히 이 옷장을 뒤질 것 아닌가. 내가 이렇게 양복까지 입고 누워 있다가 저자들한테 들키는 날이면 이게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생각이 여기까지 미친 그는 벌떡 일어나 문을 열고 방으로 나와 앉았다. 그때가 자정쯤 된 것 같았다.
 
  그때 방 밖이 갑자기 떠들썩했다. 아래층에서 기다리던 청년들이 우르르 2층으로 몰려 올라온 것이다. 아무도 없다고 만류하는 아내를 뿌리치며 청년들은 장지를 드르륵 열고 팔봉이 있는 방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장총을 든 자가 총을 팔봉의 가슴에 들이대고 눈을 부라리며 소리쳤다.
 
  “당신 누구요? 일어나, 손들어!”
 
  총을 든 자는 치안대원 같았다.
 
  팔봉은 그자의 호통을 들으며 엉거주춤 일어나 손을 들었다.
 
  치안대원 옆에서 흰 양복을 입고 있던 자가 좀 낮고 묵직한 소리로 같은 말로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이 집 주인이오?”
 
  팔봉의 아내는 손을 저으며 그들에게 말했다.
 
  “아니에요, 이분은 아니에요!”
 
  그러나 팔봉은 태연자약하게 말했다.
 
  “내가 이 집 주인이오.”
 
  이 말이 떨어지자 흰 양복이 말했다.
 
  “내려갑시다. 당신 보려고 우리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시오?”
 
  그 길로 그는 남대문 협성인쇄소로 끌려갔다. 당시 남로당 중구당부 임시사무소로 쓰고 있던 건물이었다. 그는 거기서 조사 같은 조사도 받지 않고 이튿날인 7월 2일 인민재판에 부쳐진 것이다.
 
6ㆍ25 당시 인민재판 모습. 팔봉 김기진의 인민재판 장면으로 알려져 있다. 오른쪽)팔봉 김기진.
 
  팔봉, “아무도 원망하지 말자” 되뇌어
 
  팔봉이 인민재판을 받기 위해 부민관 앞에 끌려오기 전 그는 그의 인쇄소에서 일하던 이영환과 함께 팔을 뒤로 해서 결박당한 채로 시가행진을 해야 했다. 흰 광목에 급히 ‘인민재판소’라고 쓴 플래카드가 행렬의 맨 앞에 섰다. 그 뒤에 팔봉과 이영환을 세웠다. 그들의 양옆에는 팔봉의 인쇄소에서 일하던 직공 12명을 6명씩 두 줄로 나누어 서게 했다. 그 뒤에 일반 군중이 따라왔다. 그리고 그들은 플래카드 앞에 메가폰을 쥔 젊은이를 앞세우고 “인민재판! 인민재판!” 하고 외치도록 했다. 그러면 뒤따르던 사람들이 “인민재판! 인민재판!” 하고 복창했다.
 
  이렇게 우스운 모습을 한 행렬은 남대문을 출발해서 세종로 네거리, 동아일보사 앞, 서울신문사 앞을 거쳐,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국립극장 앞에 다다르게 된 것이다.
 
  그들에게 끌려다니면서 팔봉은 생각했다.
 
  ‘이제 죽나 보다. 아아 이제는 최후다. 마침내 내가 이렇게 죽는구나. 지금 보면 저자들이 나를 죽이려고 하는 게 분명하다. 이제 살기는 틀렸다. 나를 구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구나. 그렇다. 이왕 죽을 바엔 깨끗이 죽자. 비열하게 생명을 구걸하지 말자. 내가 눈물을 흘리며 생명을 구걸한다 해도 놈들은 나를 살려주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깨끗하게 죽자.’
 
  그는 끌려다니면서 계속해서 입속으로 되뇌었다.
 
  “깨끗하게 죽자! 아무도 미워하지 말자! 아무도 원망하지 말자! 내가 50도 되기 전에 일찍 죽는 것을 한탄하지도 말자! 이것을 내가 죽는 그 최후의 순간까지 절대로 잊지 말자!”
 
  그는 당시 48세였다.
 
  이렇게 생각이 정리되자, 그는 인민재판을 받는 장소에 끌려와서도 입속으로 주문처럼 계속해서 이 세 가지 명심불망(銘心不忘) 사항을 외었다.
 
  “아무도 미워하지 말자! 원망하지 말자! 한탄하지 말자! 미워하지 말자! 원망하지 말자! 한탄하지 말자!…”
 
  그는 다시 하늘을 보았다. 흰 구름이 조금 흩어져 있었지만 넓고 넓은 푸른 하늘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비취같이 파란 하늘 아래 높이 솟아 있는 북악산, 다시 그 뒤로 불쑥불쑥 등에 업힌 것처럼 가까이 서 있는 삼각산. 그는 전과 조금도 다름없이 아름다운 하늘과 산들을 보면서 또 쉬지 않고 명심불망 사항을 외었다.
 
  “미워하지 말자! 원망하지 말자! 한탄하지 말자!…”
 
  이상하게도 마음이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그래, 내가 이렇게 죽는구나. 이렇게 아름다운 하늘과 산을 보며 이렇게 죽는구나. 그러니 깨끗하게 죽자.’
 
 
  인쇄소 직공이 인민재판 선동 연설
 
  그는 죽음의 그림자가 한 발짝 한 발짝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이때 웬 젊은이가 현관 앞 계단으로 올라가서 연설을 시작했다.
 
  “여러분! 친애하는 노동자, 학생, 시민 여러분!”
 
  연설하는 젊은이를 가만히 보니, 작년까지 팔봉이 경영하는 인쇄소에서 일하다가 자진해서 나간 식자공 차성태였다.
 
  사실, 팔봉이 이 자리에 서게 된 건 인쇄소 직공들이 그를 고발했기 때문이었다. 얼마 전 좌익성향의 젊은 직공들이 무슨 삐라를 몰래 인쇄하다 적발돼 5명이 경찰에 잡혀간 일이 있었다. 그중 3명은 팔봉이 책임을 지겠다고 보증을 서고 데리고 나왔지만, 두 사람은 경찰이 내주질 않았다. 나이 사십이 다 된 김봉두라는 사람은 경찰에서 자기가 남로당 전라북도 책임자라고 자백을 했기 때문에 경찰에서 내주지 않았고, 이인희는, 경찰이 하는 말이, 그가 이랬다저랬다 해서 앞뒤가 맞지 않으니 아무리 주인이 보증을 서겠다고 해도 안 되겠다고 해서, 그냥 경찰서에 두고 온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이,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한 다음 날인 6월 28일 감옥에서 석방돼 나와서 팔봉을 당에 고발했던 것이다. 그래서 인쇄소 직공 열두 명을 불러다가 팔봉을 둘러싸고 시가행진을 하게 했던 것이다.
 
  차성진의 연설은 계속됐다.
 
  “우리가 오늘날 8·15 이후 5년간 갖은 신고를 감내하면서 지하투쟁을 하여오던 중에 혁혁한 인민군의 광휘 있는 승리로 말미암아서….”
 
  그는 주먹을 내두르며 선동연설을 시작했다. 그러나 팔봉을 대놓고 욕하거나 고발하지는 않았다. 그의 선동연설은 약 5분간 계속됐다.
 
  그의 연설이 끝나고 곧 인민재판이 시작됐다. 흰 양복 저고리에 검은 바지를 입은 청년이 앞으로 나와 사회를 봤다.
 
  “지금으로부터 인민재판을 개정합니다.”
 
  처음 열리는 인민재판이라 사람들도 어리둥절 했다.
 
  개정선언 뒤에 아래위 검은 양복을 입은 청년이 나와서 팔봉의 곁에 섰다. 검사격인 사람이었다. 그는 부스럭부스럭 주머니에서 원고를 꺼내 논고문을 떠듬떠듬 읽어 내려갔다. 급하게 누가 써 준 것을 읽는 것 같았다.
 
  “피고인 김기진은 과거에 좌익운동을 하던 자로서 8·15를 전후해서 변절했고,”
 
  여기까지를 듣고 팔봉은 재빨리 생각했다.
 
  ‘그래, 맞는 말이다. 한때 마르크스-레닌주의가 우리 조국을 구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건 사실이다. 그리고 프롤레타리아 문학운동을 열심히 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 내가, 내가 입이 마르게 칭찬했던 바로 그 공산주의한테 죽는구나. 그러나 내가 공산주의를 졸업한 건 그것이 조국을 구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게 죽을 죄란 말이냐.’
 
  논고는 떠듬떠듬 계속됐다.
 
  “자신이 직접 밀정행위를 해 온 것은 물론이요.”
 
  ‘그건 아니다. 천부당만부당한 일이다. 나는 당신들이 노동조합운동을 하는 것을 하라거나 말라거나 한 일이 없다. 삐라사건이 일어났을 때마다 경찰이 들이닥치면 오히려 당신들을 변호했고, 당신들이 경찰에 잡혀갔을 땐 내가 보증을 서고 데리고 나왔다. 아무리 인민재판이라지만 이건 너무하다!’
 
  “그뿐만 아니라 경찰의 밀정을 자신이 경영하는 공장에 종업원으로 잠입시켜서 많은 동지를 투옥게 하였다.”
 
  ‘이것도 어불성설이다. 너희가 내 옆에 묶어 세운 영환이를 두고 하는 말이구나. 영환이는 경찰의 밀정이 아니다. 오히려 당신들의 사정을 나한테 좋게 말해 온 사람이다.’
 
  “또 피고인 김기진은 선량한 노동자를 착취했으니 마땅히 죽어야 한다. 따라서 이 검사는 인민의 이름으로 사형을 구형한다!”
 
  ‘사형! …그래 내 그럴 줄 알았다.’
 
  팔봉은 명심불망 세 가지를 다시 외기 시작했다.
 
  “미워하지 말자. 원망하지 말자. 한탄하지 말자. 그래, 깨끗이 죽자.”
 
  논고가 끝나자 사회자가 나와서 인민재판을 진행했다.
 
  “이제 논고를 들었으니, 피고인의 죄를 증명할 증인이 있으면 나와서 증언하시오.”
 
  말이 끝나자마자 미리 짜맞춘 것처럼 자칭 증인이라는 사람이 올라왔다. 검사도, 증인도, 팔봉이 전에 본 일이 없는 사람이었다.
 
  증인은 앞에 나와 겁에 질린 사람처럼, 아니면 거짓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아서 그랬는지,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말했다.
 
  “저 사람은 아주 나쁜 사람입니다. 내가 저 사람네 공장에 직공으로 다니고 있었는데 저 사람이 경찰에 고발해서 서대문 감옥에서 2년 반이나 고생을 하다가 이번에 인민군의 승리로 겨우 나오게 됐습니다.”
 
  그는 여기까지 증언을 하고, 뒤에서 시킨 사람의 눈치를 본 다음, 목청을 높여 큰소리로 증언을 끝마쳤다.
 
  “우리 노동자가 이렇게 되고, 그동안 착취당한 것이 다 이놈 때문입니다!”
 
  그는 ‘이놈 때문입니다’ 하고 말할 땐 팔봉을 향해 손가락질을 했다.
 
  팔봉은 생면부지의 청년이 자기를 논죄하는 걸 보고 눈을 감고 명심불망을 또 외었다.
 
  “미워하지 말자. 원망하지 말자. 한탄하지 말자….”
 
  팔봉은 혼자 생각해 봤다.
 
  ‘이게 소위 인민재판이라는 것이니 변호사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인민재판이라고 해도 나한테 변명의 기회는 줄지 모른다. 그러면 나는 뭐라고 말할 것인가.’
 
  생각은 계속 이어졌다.
 
  ‘아무런 변명도 하지 말자. 누추한 변명일랑 하지 말자. 이자들은 지금 나를 죽음의 골짜기로 몰아넣고 있다. 내가 누추한 변명을 늘어놓는다고 해도 나를 살려줄 리는 없다. 사람만 추해질 뿐이다. 그래 깨끗이 죽자.’
 
  다행히 그들은 이른바 피고인에게 변명의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망나니 같은 사내가 몽둥이로 팔봉 내리쳐

 
  사회자가 다시 등단했다.
 
  “그러면 판사님께서 판결을 내리시겠습니다.”
 
  이번에도 자칭 판사라는 사람이 등장해서 판결문을 낭독했다.
 
  “피고 김기진 일명 김팔봉과 피고 이영환은 검사가 논고 한 바와 같은 사실의 죄악을 범해 온 자들이요, 이들의 범행에 관해서는 지금 감옥에서 해방된 여러 동지 가운데, 직접 이 두 피고인의 범행으로 말미암아 2년 반 동안이나 철창생활을 하고 나온 동지의 증언이 있었고, 피고 이영환은 경영자에게 붙어서 신분이 동일한 동지들을 경영자에게 팔아먹었으니 더욱이 고려할 여지가 없다. 그러므로 두 피고에 대하여 검사의 구형과 같이 사형을 언도한다. 이에 판결함.”
 
  생각한 대로 사형판결이 나왔다. 팔봉은 기도의 덕인지 마음이 담담했다. 사회자는 최후로 할 말이 있으면 해보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사회자는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어떠시오? 검사의 논고와 판사의 판결에 대해서 의견이 있거든 말들 해 보시오!”
 
  군중은 괴괴했다. 사회자가 다시 다그쳤다.
 
  “여러분, 어떠시오?”
 
  이 대목에서 ‘옳소’와 함께 박수소리가 터져 나와야 될 듯싶었다. 그러나 아무도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30초는 지났을 것 같았다. 그래도 아무도 나서지 않으니까 사회자가 다시 재촉했다.
 
  “여러분 어떠시오!”
 
  사회자의 재촉을 받고 맨 앞줄에 서 있던 깡마른 청년이 조그맣게 소리쳤다.
 
  “좋소!”
 
  그러면서 그는 손바닥을 두들겼다. 팔봉이 얼른 그를 봤다. 그는 하이칼라 머리를 하고 있었고, 와이셔츠 없이 검은 양복을 입고 있었다.
 
  팔봉은 누가 좋다고 사형에 찬성하는가를 남의 일처럼 지켜보며 숫자를 헤아려 봤다.
 
  그가 “좋소” 하고 말문을 터 줘서 그런지 주위에 있던 40~50명이 박수를 쳤다. 박수소리에 묻혀 “옳소!” 하는 소리도 들렸다.
 
  팔봉은 침착하게 또 생각했다.
 
  ‘500명 중에 50명이면 십분의 일이다. 고작 십분의 일이 찬성했는데도 나는 인민의 이름으로 죽는구나.’
 
  팔봉은 하늘을 올려보았다. 역시 파랬다. 아름다웠다. 그는 기도했다. 깨끗하게 죽자고.
 
  “미워하지 말자. 원망하지 말자. 탓하지 말자. …깨끗하게 죽자.”
 
  어디선가 이런 소리가 들렸다.
 
  “총탄도 아깝다. 때려죽여라!”
 
  이 소리가 들려온 건 그의 기도가 끝나기도 전이었다. 그의 등 뒤에서 건장하게 생긴 젊은이가 몽둥이를 들고 나왔다. 망나니 같은 사내가 걸어나오는 것을 보고 구경꾼들은 잠시 긴장했다. 그러면서도 설마 때려죽이기야 할까 하는 생각들이었다. 그러나 그 망나니는 인정사정 두지 않고 팔봉의 머리를 힘껏 내리쳤다. 순간 붉은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구경꾼들의 입에서 “어어!” 하는 소리가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팔봉은 이 한 방을 얻어맞고 정신을 잃었다. 사람들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지켜봤다. 쩍 벌어진 입을 다물 줄 몰랐다.
 
  팔봉은 이 일격으로 정신을 잃었다. 그 후의 일은 그의 기억 속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나 쓰러지지는 않았다. 비틀거리긴 했지만 곧 정신을 가다듬고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그러자 몽둥이를 든 청년은 겁먹은 얼굴이 돼 가지고 머리통을 또 한 번 세게 내리쳤다. 팔봉은 두 번째 타격을 받고 비틀거리며 넘어졌다. 그렇게 맞고 넘어져서도 그는 죽지 않고 버르적거렸다. 그러더니 금방 다시 일어나 앉아서 처참한 표정으로 앞을 응시했다. 그러고는 무얼 찾는 것처럼 두리번거렸다. 그는 근처에 있던 막대기를 주워들고는 놀랍게도 다시 우뚝 서서 꼭 복수라도 할 사람처럼 앞으로 뚜벅뚜벅 세 발짝을 걸어 나왔다. 전혀 깨끗하게 죽자고 주문을 외던 사람 같지 않았다. ‘이놈들, 내가 너희를 복수하고야 말 테다!’ 하고 어금니를 부드득 가는 사람 같았다. 부릅뜬 눈은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았다.
 
  그걸 보고 다른 두 명의 건장한 청년이 겁먹은 데다 당황한 표정으로 몽둥이를 들고 나왔다. 그러곤 머리와 몸통을 여러 차례 내리쳤다. 이렇게 몰매를 맞은 팔봉의 몸뚱이는 그제야 움직이지 않고 축 늘어졌다.
 
  팔봉의 옆에 서 있던 이영환은 머리를 한 대 호되게 얻어맞고 이내 죽어버렸다. 그들은 총살형이 아니라 타살형을 선고받았던 것이다.
 
 
  만신창이 된 팔봉, 동대문경찰서 유치장서 살아나
 
  ‘죄수’ 두 사람이 죽어 나자빠지자, 박수치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죽은 사람들의 다리를 각각 밧줄로 묶었다. 그리고 그 한끝을 끌고 거리 행진을 나섰다. 시체들은 피를 흘리며 질질 끌려다녔다. 그들은, 아까 인민재판이 벌어지기 전에 산 사람들을 끌고 다니며 행진했던 거리를, 이제는 그 사람들을 죽여 가지고 끌고 다녔다. 그들은 “인민재판! 인민재판!” 하고 목이 터져라 외치고 다녔다.
 
  끌려다니는 시체들은 끊임없이 피를 흘렸다. 시체를 끌고 다니다가 어쩌다 뒤집혔을 때 보니 머리통 뒤쪽과 등판때기, 그리고 꼬리뼈 부분이 갈려 나가고 뭉개져서 뼈가 허옇게 드러나 있었다. 팔봉이 입고 나갔던 고동색 양복 윗저고리와 골프 바지의 뒷부분은 찢기고 갈려 나가 갈기갈기 찢어져 있었다.
 
  그런데도 시체를 끌고 다니던 군중은 피를 보고 더 흥분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재꼈다.
 
  “인민재판! 인민재판!”
 
  그들은 인민공화국에 반역하면 당신들도 이 꼴이 된다고 시민들에게 위협적으로 말하는 것 같았다. 아닌 게 아니라 거리를 지나던 시민들은 이 모습을 보고 기가 질려 머리를 움츠렸다.
 
  시위대는 저녁때가 다 돼서야 시체 둘을 수도청 앞에 버리고 뿔뿔이 흩어졌다. 내무서원이 시체를 내다버리라는 명령을 받고 나와, 인부들을 시켜 팔봉과 이영환의 시체를 트럭에 싣게 했다. 그때 인부 하나가 중얼거렸다.
 
  “어, 하나는 아직 살아 있는 뎁쇼.”
 
  인부들이 시체를 다 싣자 내무서원이 운전수에게 말했다.
 
  “의전병원으로 갑시다.”
 
  그러나 의전병원에선 그곳이 인민군 전문병원이기 때문에 이런 환자는 받을 수 없다고 했다. 그때 트럭에 실린 시체 하나가 뭐라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까 꿈지럭거리던 사람이었다. 그는 “물 물”하고 물을 찾았다. 내무서원이 약국에 가서 물을 한 대접 얻어다가 입에 대 주었다. 그는 물을 조금 먹었는데 반은 넘어가고 반을 흘렸다. 이 사람이 바로 팔봉이었다. 그는 그 모진 매를 맞고, 길바닥에 끌려다녔지만 다행히 실낱 같은 목숨이 붙어 있었다.
 
  내무서원은 팔봉을 동대문 경찰서 유치장에 인계했다. 이영환은 시체로 처리해 내다버렸다. 팔봉은 그 유치장에서 나흘 동안이나 아무것도 먹지 않고 죽은 것처럼 누워 있었다.
 
  7월 6일, 팔봉은 문득 눈을 떴다. 파란 하늘이 보였다. 2층집 지붕도 보였다. 이튿날인 7월 7일, 그는 집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경찰서 밖으로 나왔다. 파란 하늘에서 눈부신 햇살이 쏟아져 내렸다.
 
  “아, 나는 살아 있구나!”
 
  팔봉은 생명의 환희를 느끼며, 자기 발로 걸어서 종묘 앞까지 가서, 청계천의 나무다리를 건너고, 을지로3가 전차길로 나와선, 모퉁이를 돌아 그의 인쇄소로 갔다. 꽤 긴 거리를 걸어오는 동안, 그는 배가 고프다거나, 어지럽다거나, 걷기 힘들다거나 하는 생각이나 증세를 전혀 느낄 수 없었다.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가 어떻게 살 수 있었으며, 4일간을 아무것도 먹지 않고 있다가 깨어나서 무슨 기운으로 그 먼 거리를 걸어올 수 있었을까.
 
  팔봉도 현관문을 드르륵 열며 이런 생각을 했다.
 
  ‘아, 이게 꿈이 아닌가!’
 
  사무실에 있던 큰아들 인환이 문을 열고 들어서는 아버지를 보고 깜짝 놀라 소리쳤다.
 
  “아이고, 아버지!”
 
  그는 아버지를 얼른 업고 이층으로 올라갔다. 이층 살림집에 있던 아내와 셋째아들 용한이 또 놀라 소리쳤다.
 
  “아이고, 여보!”
 
  “아버지이!”⊙
 
  * 이 글은 김팔봉과 그의 딸이 써 놓은 글들을 참고로 소설적 구성으로 작성한 것이다.
 
  [참고문헌]
  1. 김팔봉문학전집/ 문학과 지성사/ 홍정선편 2권 중‘인민재판’ 이후 P439, 인민재판 P450
  2. 김팔봉문학전집 위의 책 5권 중/ 나는 살아 있다 P555, 내가 당한 인민재판 P619
  3. 아버지 팔봉 김기진과 나의 신앙/ 김복희/ 정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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