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주둔 소련군사령관 치스차코프 대장은 8월 24일에 咸興에 도착한 뒤에 8월 26일에는 平壤, 8월 30일에는 新義州, 9월 8일에는 海州로 이동하면서 각 도별로 道政을 臨時人民政治委員會 등의 한국인 조직에 이양하게 했다. 제25군 軍事會議 委員 레베데프 소장과 ‘한국의 간디’ 曺晩植의 첫 대면은 소련군과 조만식의 관계가 순탄하지 않을 것임을 예고했다.
여의도 비행장에 착륙한 韓國光復軍 國內挺進隊는 日本軍의 거부로 이튿날 中國으로 돌아갔고, 독수리作戰은 중단되었다.
8월 18일에 金九가 重慶으로 돌아오자 臨時議政院에서는 臨時政府의 귀국문제로 격론이 벌어졌다. 國務委員들의 총사직을 주장하면서 임시정부의 政府로서의 귀국을 반대하는 左翼政派들은 臨時政府를 탈퇴했다.
李承晩은 8월 15일에 日本의 항복이 공식으로 선포되자 그날로 트루먼, 스탈린, 蔣介石에게 勝戰祝賀전보를 쳤다. 그러나 李承晩을 한국의 대표적인 반공반소 인물로 간주하고 있는 소련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소련의 국제문제 정보지 『노보에 브레미야(새 시대)』는 올리버(Robert T. Oliver)의 저서에 대한 서평 형식을 빌려 李承晩의 전후한국 경제정책 구상을 비판했다.
李承晩은 귀국을 서둘렀다. 미국인 친구들도 지원에 나섰다. 李承晩은 맥아더 장군에게도 편지를 써서 귀국 지원을 요청했다.
8월 30일 저녁에 열린 “한국해방의 밤” 만찬연설회는 워싱턴 지식인 사회에서 李承晩이 지닌 영향력을 보여주는 마지막 행사였다.
1. “占領軍이냐, 解放軍이냐?”
소련군 제24군 군사회의(military council) 위원으로서 1945년 8월부터 1948년 12월까지 북한에 머물면서 북한정권 창출의 산파역을 맡았던 레베데프(Nikolai G. Lebedev) 소장은 “북한의 역사는 소련군의 진주에서부터 시작되었다”라고 말했다.1) 그만큼 북한의 국가형성은 소련군의 주도 아래 추진되었다. 그리고 그 작업은 전격적이고 단호했다.
소련의 극동군 총사령관 바실레프스키(Alexandr M. Vasileveskii) 원수는 8월 18일에 만주와 한국의 주요 도시에 정규부대보다 먼저 이동할 수 있는 기동부대와 공수부대를 보내어 점령하도록 명령했다. 이들 부대에는 점령한 도시의 행정조직을 담당하기 위해 특별히 선발된 장교들이 배치되었다.2)
行政權移讓합의, 그날로 번복해
8월 16일에 청진(淸津)을 점령한 태평양함대의 해병여단 9,000명가량이 청진항을 출발하여 원산(元山)에 상륙한 것은 8월 21일이었다.3) 같은 날 제393사단 선발대가 함흥(咸興)에 도착했고, 본대는 8월 24일에 진주했다. 먼저 남부분단의 샤닌(G. I. Shanin) 소장 일행이 도착하고, 이어 제25군사령관 치스차코프(Ivan H. Chistiakov) 대장이 사령부가 있는 만주의 연길(延吉)로부터 비행기로 함흥에 도착했다.
이때의 치스차코프의 행동은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사령부의 최초의 정식행동이었다는 점에서 눈여겨볼 만하다. 치스차코프는 함흥의 비행장 건물 안에서 일본군 제34군사령관 구시부치(櫛淵) 중장과 만나 일본군의 무장해제에 대하여 협의하고, 시내로 들어가서 함경남도 지사 기시 유이치(岸勇一) 및 도청 간부들과 행정권 이양문제를 협의했다. 치스차코프는 먼저 “조선인이든 일본인이든 현재의 직장을 이탈하는 자는 교수형에 처한다”라고 엄명하고, 행정권 이양교섭은 샤닌 장군에게 맡겼다. 교섭은 30분 만에 끝났다. (1) 관내의 치안유지는 물론 행정사무는 종래대로 지사와 그 부하직원이 집행하고, (2) 인심을 교란하거나 치안을 문란하게 하는 자는 엄벌에 처하며, (3) 공장, 사업장, 광산 등은 조업을 계속하고, (4) 물자를 관외로 방출하지 않도록 한다는 등에 합의하고 기시 지사와 샤닌 장군 연명으로 이튿날 발표하기로 했다. 발표가 있을 것이라는 것을 함흥방송국을 통하여 예고방송까지 했으나, 발표는 갑자기 중지되었다.
소련군의 진주에 앞서 함흥에서는 8월 16일에 석방된 송성관(宋成寬) 등과 그 밖의 공산주의자들이 그날 밤으로 함경남도 인민위원회 좌익(咸鏡南道人民委員會左翼)을 조직했다가 바로 함경남도 공산주의자협의회를 결성하고 맹렬히 활동을 시작했다. 또 이들과는 별도로 도용호(都容浩), 최명학(崔明鶴) 등을 중심으로 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 함경남도지부가 결성되었다. 이 두 단체 대표들이 이날 오후에 치스차코프를 찾아가서, 두 단체가 합동으로 조선민족 함경남도집행위원회를 결성했다면서 행정권을 비롯한 모든 권한을 이 집행위원회에 이양하라고 요구했다. 행정권 이양 발표가 중지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이날 저녁 9시에 함흥의 행정, 산업, 경제, 금융, 교통, 신문, 통신 등의 대표자들이 소련군사령부에 소집되었다. 이 자리에 치스차코프가 조선민족 함남집행위 간부인 도용호, 최명학, 송성관 세 사람을 대동하고 나와서 다음과 같은 요지의 선포문을 읽었다.
“오늘 도용호를 위원장, 최명학을 부위원장으로 하는 조선민족 함경남도집행위원회가 설립되었다. 소련군의 명령 아래 동 집행위원회가 함경남도의 치안과 행정 일체를 담당한다. 헌병과 경찰관은 무장을 해제한다. 관공서나 공공물은 위원회에 인계한다. 위원회는 일본인을 억압해서는 안 된다. 일본인의 생명과 재산은 소련군 및 위원회가 보장한다. 신정부의 법규에 따를 것. 공장설비 등을 파괴하는 행위는 엄중히 처벌한다. 그것을 철거한 경우에는 원위치에 가져다 놓을 것.”
이어 도용호와 최명학을 신정부의 대표자로 소개했다. 기시 지사와 우체국장과 일본질소비료 흥남본부장은 그 자리에서 인계서에 서명해야 했다. 기시 지사가 자기는 총독에 의하여 임명되었으므로 총독의 명령이 없이는 서명할 수 없다면서 서명을 거부하자, 치스차코프는 “치스차코프 대장의 명령으로 서명했다고 쓰라”고 말했다. 이처럼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은 총독부를 상대하지 않고 도(道)별로 행정권을 접수했다. 조선민족 함남집행위원회는 8월 30일에 함경남도 인민위원회로 개칭되고, 민간 건물에 있던 사무소는 도청으로 옮겨졌다.4)
全國에서 최초로 平壤의 日本神社가 불타
치스차코프의 이러한 행동은 소련군의 한국진주가 너무 급작스러웠고, 따라서 군사점령에 대한 사전준비가 없었음을 말해 준다. 그러므로 치스차코프의 행동도 임기응변일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치스차코프가 제1방면군 사령관 메레치코프(Kirill A. Meretskov) 원수로부터 제25군이 북한점령군으로 선정된 사실을 통고받은 것은 8월 25일이었다. 이때에 치스차코프는 제25군사령부를 9월 1일 안으로 함흥이나 평양(平壤)으로 옮기라는 명령을 받았는데, 그는 사령부 소재지로 평양을 택했다.5)
치스차코프는 8월 26일에 평양에 도착했다. 평양에는 이미 8월 24일 오후 2시에 카멘슈코프(Kamenchikov) 소령이 이끄는 선발대가 대형수송기 3대로 진주했고, 오후 5시에는 평원선 기차로 2개 연대 병력이 도착했다. 이어 8월 26일에는 3,000~4,000명의 본대가 진주했다.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이 드센 함흥과는 대조적으로 평양은 ‘한국의 예루살렘’이라고 일컬어졌을 만큼 기독교의 도시였다. 8월 15일에 전국에서 처음으로 일본인들의 평양 신사(神社)가 불탄 것은 신사참배 강요로 쌓인 평양 시민들의 울분이 표출된 것이었다.6)
평양에는 소련군의 진주에 앞서 신사참배에 저항하다가 옥사한 주기철(朱基澈) 목사의 산정현(山亭峴) 교회 장로이자 ‘한국의 간디’로 알려진 민족주의 지도자 조만식(曺晩植)을 중심으로 평안남도 건준이 결성되어 있었다. 평안남도 건준은 서울의 여운형(呂運亨) 및 송진우(宋鎭禹)와 연락하면서,7) 치안유지에 주력했다.8) 한편 공산주의자들도 8월 15일에 경성제국대학 출신의 현준혁(玄俊赫)을 위원장으로 하는 조선공산당 평안남도지구위원회를 조직하고 “일본인의 생명을 보호하라”는 전단을 뿌리는 등 선전활동을 벌였다.9)
평양에 도착한 치스차코프는 철도호텔에 숙소를 정하고 그날로 활동을 개시했다. 먼저 일본군 평양사관구(平壤師管區) 사령관 다케시타 요시하루(竹下義晴) 중장을 철도호텔로 불렀다. 치스차코프는 다케시타에게 평양사관구 일본군의 무장해제에 관련된 사항을 지시했다.10) 이어 치스차코프는 평안남도 건준과 공산당 간부들을 함께 소집했다. 조만식은 치스차코프를 만나자마자 “소련군은 점령군이냐, 해방군이냐?” 하고 따지듯이 물었다.11) 그것은 소련군이 진주하면서 도처에서 강간과 약탈을 자행하고 있는 데 대한 항의였다.12) 평양부(平壤府)가 급히 유곽과 술집을 신설한 것도 그러한 사태에 대비한 것이었다.13) 치스차코프는 조만식에게 “소련군이 온 목적은 조선해방이다”라고 대답한 다음, “나는 순수 군인이니까 정치적인 문제는 이틀 뒤에 정치전문가인 레베데프 소장이 오면 그에게 물으라”고 잘라 말했다.14)
이 자리에서 치스차코프는 우익인사 15명, 좌익인사 15명(뒤에 각각 16명)으로 구성되는 위원회에 평안남도의 행정을 맡기겠다고 말했다. 이것은 전날 함흥에서 결성된 조선민족 함경남도집행위원회 구성과 같은 방식이었다. 치스차코프가 누가 위원장으로 적임자이겠느냐고 묻자, 모인 사람들 모두가 조만식을 천거했다. 부위원장은 평남건준의 부위원장 오윤선(吳胤善)과 조선공산당 평남지구위원장 현준혁이 맡기로 결정되었다.15)
“新政府 소재지는 서울에 한하지 않아”
그러나 회의 분위기는 함흥에서와는 달리 순조롭지 않았다. 치스차코프는 “이제부터는 도의 모든 행정에서 공산당의 지도를 받으라”고 말했다가 우익인사들의 반발에 부딪혀 “공산당과 협력하라”고 발언을 수정해야 했다.16) 치스차코프는 뒷날 이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짧은 대화를 해 보고 나는 이곳에는 군사회의 동지들이 없이 나와 라닌(V. M. Lanin) 중령[제25군사령부 작전부장 대리]만으로는 처리할 수 없을 만큼 문제가 많고 복잡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나는 곧 연길로 비행기를 보내어 8월 28일에 레베데프 장군을 수석으로 하는 군사회의 위원들을 평양으로 데려오게 했다.…”17)
치스차코프는 레베데프와 한국인 대표들의 정식 회의일을 8월 29일로 정했다. 그는 또 이날 밤에 조만식, 현준혁 등 한국인사들과 후루카와 가네히데(古川兼秀) 평안남도 지사를 비롯한 도오모토(堂本) 경찰부장 등 평양의 유력인사들을 불러 모았다. 이 자리에서 치스차코프는 다음과 같은 요지의 성명을 발표했다. (1) 일본군대는 일본천황의 명령으로 항복했기 때문에 26일 오후 8시에 평안남도의 일본정부는 소멸했으며, 조만식을 위원장으로 하는 한국인 위원회에 전권을 인계한다. (2) 모든 일본인 관리는 퇴임한다. 일본인 가운데 기술자 및 한국인이 할 수 없는 기능을 가진 사람은 현상을 유지한다. (3) 일본군은 모두 포로로 처우한다. (4) 식량배급은 종래대로 실시하고 일본인에게 감배(減配)하지 않는다. (5) 일본인과 한국인은 사이좋게 제휴하고, 만일 문제가 있으면 소련군에 신고한다. (6) 노무자의 태업은 금지한다. (7) 민간인이 소지한 총기는 모두 회수한다. (8) 신정권이 각도에 설립된 뒤에 통일된 정부를 만든다. 다만 신정부의 소재지는 서울에 한하지 않는다.18)
조만식과 현준혁을 비롯한 한국인 지도자들은 백선행(白善行)기념관으로 자리를 옮겨 위원회 조직에 착수했다. 이때에 위원회의 명칭을 두고 평남건준인사들은 평안남도 정치위원회로, 공산주의자들은 평안남도 인민위원회로 맞서다가 투표 끝에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로 결정되었다.19) 8월 27일에 평안남도 행정은 평남인민정치위에 이양되었다.20)
京元線, 京義線 철도운행 중단시켜
소련군은 평양 점령과 함께 38도선을 경계로 남과 북을 단절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먼저 8월 24일에 경원선(京元線), 8월 25일에 경의선(京義線)의 철도운행을 중단시키고, 38선에 인접한 금천(金川), 연천(連川), 평강(平康), 양양(襄陽) 등지에 경비부대를 배치하여 남과 북의 교류를 통제했다.21) 치스차코프는 8월 27일 오전 10시까지 38도선 이북에 있던 일본군 장성 7명은 출두시킨 다음, 이튿날 이들을 모두 연길로 이송했다.22)
황해도에는 8월 25일에 30명의 소련군 선발대가 진주했다. 이 부대는 비행기로 평양에 와서 철도편으로 해주에 도착했다. 소련군은 해주와 토성(土城) 사이의 철도를 38도선에서 차단하고, 주로 물자가 남한으로 유출되는 것을 감시했다.
이에 앞서 해주에서는 8월 17일에 정치범과 경제범이 석방된 데 이어 8월 20일에는 기독교인인 김응순(金應珣)을 위원장으로 하는 건준 황해도지부가 결성되고, 동시에 김덕영(金德永)을 위원장으로 하는 조선공산당 황해지구위원회도 발족해 있었다. 선발대와 같이 온 소련군 정치장교의 주선으로 건준 황해도지부는 황해도 인민정치위원회로 개편되었는데, 위원회의 간부는 대체로 민족주의계이고 공산계 인사는 한두 사람 포함되었다.23) 이 정치장교의 명령에 따라 쓰쓰이 다케오(筒井竹雄) 황해도지사는 9월 2일에 도행정을 황해도 인민정치위에 이양했다. 그러나 건준계가 우위인 이 기구에 불만을 가진 공산당이 그날로 우파의 두 간부를 구타하여 중상을 입히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리하여 위원회는 9월 4일에 총사직할 것을 소련군에 통고했고, 소련군은 하는 수 없이 도지사에게 당분간 행정을 계속하라고 지시했다.
9월 8일에 치스차코프가 해주에 온 뒤에 공산당 황해지구위원장 김덕영을 위원장으로 하는 황해도 인민위원회가 성립되고, 9월 13일에 도지사가 행정권을 이 위원회에 다시 이양했다. 격분한 우파의 해주보안대가 9월 16일 새벽에 인민위원회 본부를 습격하여 세 사람을 살해하고, 좌파가 반격에 나서 시가전이 벌어졌다. 결국 보안대 간부가 남한으로 피신하고 보안대 대신에 공산계가 치안대를 조직하고 해주경찰서를 점거했다.24)
평안북도에는 8월 27일에 소련군 선발대가 진주했고, 8월 30일에 치스차코프가 비행기로 신의주(新義州)에 도착했다. 신의주에는 8월 15일 오후 2시에 민족주의계의 이유필(李裕弼)을 위원장으로 하여 신의주자치위원회(치안유지회)가 결성되어 있었는데, 소련군이 진주하자 대부분의 위원들이 하룻밤 사이에 공산당이 되었다.25) 치스차코프는 평안북도자치위원회를 평안북도 임시인민정치위원회로 개칭한 다음 이튿날 오전 10시에 일본인 및 한국인 유력자들을 불러 모으고 이 위원회가 도행정을 인수한다고 선언했다.26)
대일선전포고와 동시에 소련군이 진격해 왔던 함경북도에서는 9월 말이 되어서야 나진의 실업가인 이창인(李昌仁)을 위원장으로 하는 함경북도 인민위원회가 청진에 설립되었다고 한다.27)
曺晩植은 눈감고 앉아 있어
제25군 군사회의 위원 레베데프 소장은 8월 28일 저녁에 28명의 소련계 한인들을 이끌고 평양에 도착했다.28) 레베데프와 함께 평양에 온 소련계 한인들 가운데에는 소련점령 기간 동안에 민정사령부 수석통역관 역할을 맡았던 강 미하일(Kang Mikhail) 소령과 다수의 문필가들이 포함되어 있었다.29)
조만식을 비롯한 평남인민정치위의 간부들은 8월 29일에 레베데프와 회담했다. 레베데프가 조만식에게 북한의 전반적인 상황을 말해 달라고 하자 조만식은 친일파의 준동, 산업활동의 중단, 식량부족, 토지제도의 미비, 문맹자 문제 등이 산적해 있다고 설명했다. 레베데프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지 묻자 조만식은 서슴없이 기본정치노선은 민주주의여야 하고, 자본주의에 입각한 경제제도를 채택해야 하며, 교육을 통해 인민을 깨우쳐야 하고, 피압박민족의 한을 자주독립국가 건설로 풀어야 하는데, 이 모든 것을 위해서는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레베데프는 조만식의 정치적 식견이 뛰어나다는 것을 느꼈으나 동시에 조만식이 ‘반동적 견해’를 가지고 있음을 알아차렸다.30) 대화가 이어지는 동안 안락의자에 기대어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있으면서 입을 다문 채 이따금 수긍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반대의 표시로 고개를 옆으로 젓기도 하는 조만식의 태도가 레베데프는 몹시 비위에 거슬렸다.31) 이 회담은 조만식과 소련군의 관계가 순탄하지 않을 것임을 예고했다.
“행복은 당신들의 수중에 있다”
평안남도 도청 청사는 소련군사령부가 사용하게 되었다. 치스차코프 사령관의 유명한 포고문이 북한주민들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이때부터였다. 원래 이 포고문은 제25군 사령부가 연길에 있던 8월 15일자로 작성된 것이었으나,32) 언제 어느 지역에 뿌려졌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뒤에 각종 문헌에 수록된 포고문에는 날짜가 들어있지 않다.
“조선인민들에게!
조선인들이여! 소련 군대와 동맹국군대들은 조선에서 일본약탈자들을 구축하였다. 조선은 자유국이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오직 신조선사의 첫 페이지가 될 뿐이다. 화려한 과수원은 사람의 노력(勞力)과 고려(顧慮)의 결과이다.… 조선인들이여! 기억하라! 행복은 당신들의 수중에 있다. 당신들은 자유와 독립을 찾았다. 이제는 모든 것이 죄다 당신들에게 달렸다. 소련 군대는 조선인민이 자유롭게 창조적 노력에 착수할 만한 모든 조건을 지어주었다. 조선인민 자체가 반드시 자기의 행복을 창조하는 자로 되어야 할 것이다.…”33)
포고문은 한국인들의 해방의 기쁨을 한껏 고무하는 것이기는 했으나, 한국에 대한 정책을 구체적으로 표명한 것은 없었다. 구체적인 것은 기업가에게 재산보호와 기업소의 정상조업을 보장하고 노동자에게 노동을 계속할 것을 촉구한 것뿐이었다. 그러나 치스차코프의 이 포고문은 38도선 이남지역에 미군정을 실시한다는 것을 선포한 맥아더(Douglas MacArthur)의 위압적인 「태평양 미국육군총사령부 포고」(제1호)와 대비되면서 좌익들의 선전자료로 이용되었다. 이 포고문은 남한에서도 조선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解放日報)』(1945년 10월 31일자)에 전문이 크게 실려 일반 민중에게 널리 알려졌다.
치스차코프, 레베데프, 슈티코프
북한에 공산주의 정권을 수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소련인은 제25군 사령관 치스차코프와 제25군 군사회의 위원 레베데프, 그리고 이 두 사람을 지도하는 위치에 있던 제1극동방면군 군사회의 위원 슈티코프(Terentii. F. Shtykov) 세 사람이었다.
평양에 왔을 때에 치스차코프는 마흔다섯 살이었다.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러시아 혁명 뒤에 붉은 군대 병사로 내전에 참가했다. 제2차 세계대전 전에 연해주군관구의 대령의 지위에 있던 그는 독-소 전쟁에 참가하여 여단장, 사단장, 군단장으로 승진하고, 마지막으로 제6군 사령관이 되었다. 그곳에서 대일전을 위해 제25군으로 옮겨왔다. 그는 평범한 군인이었다.34)
치스차코프 밑에서 정치회의 위원으로 활동한 레베데프는, 치스차코프의 평가에 따르면, “주목할 만한 정치공작자”였다. 정치회의 위원이란 정치담당 부사령관에 해당하는 존재였다. 레베데프는 1939~1940년의 소련-핀란드 전쟁에 참가했고, 그 뒤에 극동으로 와서 제25군 군사회의 위원으로 일해 왔다. 그는 대핀란드전쟁 때부터 슈티코프를 알고 있었고, 북한에 있던 3년이 넘는 동안은 슈티코프의 직접 지도 아래 일했다. 다음과 같은 그의 술회는 북한 정권의 수립과정에서 슈티코프의, 아니 소련의 역할이 얼마나 결정적이었는가를 웅변으로 말해 준다.
“새로운 인민의 조선 건설에서 조선의 동지들에게 직접 원조를 해준 소련인, … 당과 국가의 활동에서 개인적인 풍부한 경험을 조선의 동지들에게 나누어 준 소련인을 말한다면 나는 누구보다도 먼저 체렌치 슈티코프를 들고 싶다. 그가 조선에 있든 군관구 사령부에 있든 모스크바에 있든 관계없이, 그가 관여하지 않고는 당시의 북조선에서 단 하나의 조치도 취해질 수 없었다.”35)
슈티코프는 뒤에 미-소공동위원회의 소련 쪽 수석대표로 1946년과 1947년에 서울에 왔었고, 북한정권 수립 뒤인 1948년부터 6·25전쟁 발발 직후인 1951년까지 북한주재 초대 소련대사로 있었다. 슈티코프는 대장의 지위에까지 올랐으나 본래는 군인이 아니었다. 레닌그라드의 노동자 출신으로서 스무살 나던 1927년에 소련공산당에 입당한 그는 스탈린(Iosif V. Stalin)의 충실한 부하로 잔뼈가 굵은 사람이었다. 독-소전이 시작되자 서부방면군, 레닌그라드방면군의 군사회의 위원을 역임하고, 1943년부터 메레치코프 밑에서 볼호프(Volkhov) 방면군, 카렐리아(Karelia) 방면군의 군사회의 위원으로 활동하다가 같이 극동으로 배치되었다. 두 사람은 레닌그라드 해방 축하의 예포소리를 크렘린의 스탈린 집무실에서 들었다.36) 슈티코프와 레베데프가 소련-핀란드 전쟁에서부터 호흡을 맞추어 왔던 사실은 기억해 둘 만하다.
여의도 비행장에 나타난 光復軍 國內挺進隊
이범석(李範奭)을 대장으로 한 장준하(張俊河), 김준엽(金俊燁), 노능서(魯能瑞)와 버드(Willis Bird) 중령이 이끄는 미군사절단 18명은 중경(重慶)에서 새로 지원된 C-46수송기를 타고 8월 18일 오전 5시에 섬서성(陝西省)의 서안(西安) 비행장을 이륙했다. 사절단은 오전 9시15분부터 방문사실을 15분 간격으로 일본군에 알렸으나 일본군으로부터는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37) 이들은 영등포 상공을 선회하면서 한글과 일본어로 된 전단을 살포하다가 11시40분에 일본군의 답신을 받고 오전 11시56분에 여의도 비행장에 착륙했다.38)
광복군 정진대와 미군사절단의 여의도 비행장 착륙은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뒤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광복군과 중국전구의 미군이 처음으로 한국에 발을 디딘 중대사건이었다.39) 일본군은 적대적인 태도로 이들을 맞이했다. 착검을 하고 돌격태세를 갖춘 일본군이 수송기를 포위했고, 수송기로부터 50미터 떨어진 곳에는 1개중대 병력이 포진했다. 중형전차의 기관포까지 C-46수송기를 향해 배치되었다.40)
비행장에는 일본군 제17방면군 사령관 고즈키 요시오(上月良夫) 중장이 나와 있었다. 버드와 고즈키와의 대화는 한국계 미국인 함용준(Lyong C. Hahm) 대위의 통역으로 진행되었다.41) 버드는 자신들의 방문목적이 연합군 포로들의 후송문제를 준비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고, 일본총독에게 보내는 편지를 수교했다. 그러나 고즈키는 본국으로부터 지시받은 것이 없다면서 편지의 사본만 접수했다.42) 잠시 뒤에 고즈키는 자리를 떴고, 여의도 경비사령관 시부자와(澁澤) 대좌가 대화를 계속했다. 시부자와는 그늘 밑에 가서 이야기하자면서 맥주며 사이다며 담배가 준비된 탁자로 사절단을 안내했다. 그는 연합군 포로들은 안전하게 잘 있으니까 걱정 말라고 말하고, 그 이상의 정보는 제공해 줄 수 없다고 했다.43)
결국 일본군은 사절단의 임무를 허락할 수 없고, 다만 귀환에 필요한 가솔린은 공급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여의도 비행장에는 C-46수송기에 필요한 옥탄가100의 가솔린이 없었으므로 사절단은 그곳에서 하룻밤을 머물 수 있었다.44) 숙소로 배정된 곳은 비행장 안의 장교집합소라는 넓은 다다미방이었다.
정진대와 미군사절단 군인들이 잠을 청하려고 할 때에 시부자와 대좌와 여의도 경비사령부의 참모장 우에다(上田) 중좌가 맥주에다 계란부침과 튀김을 가져와서 술자리가 벌어졌다. 백발이 성성한 시부자와가 꿇어앉은 자세로 맥주를 권하는 모습은 한국 정진대원들로 하여금 일본의 항복을 실감하게 했다.
「독수리作戰」은 종료돼
8월 19일 아침이 되자 정진대는 물통에 물을 가득 채우고, 흙도 한줌씩 종이봉투에 담아 넣은 다음 애국가를 불렀다.45) 버드는 전쟁 포로의 완전한 명단과 그들이 수용되어 있는 위치를 알려줄 것을 요구하고, 그것이 어렵다면 숫자와 국적분류라도 제출해 달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이범석의 제안에 따라 아베 총독과의 면담을 요청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이러한 요구를 거부하면서, 사절단이 정오에는 이곳을 떠나야 한다고 강박했다. 정진대와 미군사절단은 하는 수 없이 돌아갈 채비를 하고 오후 12시15분에 숙소를 나왔고, 오후 2시에 평양에서 가져온 가솔린을 C-46수송기에 넣고 정비를 실시했다. 여의도 비행장을 떠날 준비를 하는 동안에도 일본군의 위협이 계속되었다. 일본군은 전차와 박격포를 사절단 쪽으로 향하게 하고 전투기 5대의 발진을 준비시켰다.46)
정진대와 미군사절단은 오후 4시20분에 여의도 비행장을 이륙했다. 이범석은 마지막까지 낙하산을 이용하여 국내에 침투하는 방안을 버드에게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버드는 오히려 일본 전투기의 습격을 우려했다. 하릴없이 돌아가는 정진대 네 사람의 표정은 침통했다.47) 급유와 정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수송기는 오후 6시10분에 산동성(山東省) 유현(維縣)비행장에 불시착했다. 사절단은 이곳에서 OSS의 「오리작전(Duck Mission)」 요원들과 조우했다.48)
침통한 심정으로 돌아온 국내정진대에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났다. 미군사절단에 동행했던 전시정보국(OWI) 소속의 리버먼(Lieberman)이 8월 18일 밤에 여의도 비행장에서 있었던 일본군과의 술자리를 포함한 뉴스를 8월 23일에 전시정보국의 라디오방송으로 내보낸 것이었다.49) 웨드마이어(Albert C. Wedemeyer) 장군은 격노했다. 8월 22일에 중경으로 가서 그에게 독수리작전의 대면보고를 한 버드는 여의도 비행장에서 일본군과 대치하면서 일어났던 긴박한 상황에 대해서만 보고했었기 때문이다. 18일 밤의 술자리는 미군과 일본군 사이의 화친행동으로 비쳐져 외부로부터 오해를 살 수 있었고, 사절단의 방문목적에도 부합하지 않았다. 웨드마이어가 특히 화가 난 것은 버드가 뒷날의 자기선전을 위해 사진기사와 전시정보국 요원을 대동하면서도 포로구출에 필요한 의료진은 사절단에 한 사람도 포함시키지 않은 사실 때문이었다. 웨드마이어는 8월 23일에 한국에서 포로를 구출하는 모든 작전이 “재구성되고 독수리작전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도록” 하라고 명령했다. 독수리작전의 책임자는 크라우제(Gustav Krause) 소령으로 교체되고, 8월 28일에는 유현에 있는 사절단이 서안으로 소환되었다. 국내정진대도 풀이 죽은 모습으로 두곡(杜曲)으로 돌아왔다.50) 이렇게 하여 독수리작전은 8월 30일에 종료되었다.51)
2. 左翼政派들의 臨時政府 탈퇴
임시정부 간부들은 8월 10일에 일본 정부가 포츠담 선언을 수락했다는 소식을 듣고 향후 대책을 논의했다. 김구가 없는 상황에서도 국무회의를 두 번이나 열었다. 국무회의는 그대로 귀국하여 임시정부를 국민에게 봉환(奉還)하기로 하고, 귀국한 뒤에 반포할 당면정책을 기초할 것, 대외교섭을 서둘러 귀국채비를 갖출 것, 정부와 의정원의 모든 문서와 집물을 정리할 것, 제39회 임시의정원 회의를 소집할 것 등을 결의했다.52) 그러나 김구가 서안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또 당파 내부의 회의도 있고 하여 구체적인 방침은 결정하지 못했다.53)
美軍과 함께 韓國에 들어가기 바라
외무부장 조소앙은 8월 14일에 주중미국대사 헐리(Patrick J. Hurley)를 방문했다. 조소앙은 중경임시정부가 (1) 한국에 진주하는 연합군, 특히 미군과 협조하기를 원한다는 점, (2) 극동전역에 산재한 일본군 안에는 한국인들이 100만명쯤 있는데, 이들의 무장해제와 재편성 작업을 하는 미국을 임시정부가 지원하겠다는 점, (3) 한국인 혁명지도자들이 한국정치문제에 관해 발언권을 갖고자 한다는 점을 피력했다. 헐리는 이 면담에 관한 보고서에서 조소앙은 또 한국에서의 소련의 영향력과 그들이 취할 조치들에 대해 우려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적었다.54)
조소앙은 이어 8월 17일에는 김구와 자신의 공동명의로 트루먼(Harry S. Truman) 대통령 앞으로 편지를 작성하여 이승만에게 보냈다. 편지는 연합국(미국, 영국, 소련, 프랑스, 중국)에 진심으로 축하한다고 말하고, 다가오는 평화회의와 국제연합 구제부흥기구(United Nations Relief and Rehabilitation Administration: UNRRA) 등과 같은 한국문제와 관련 있는 모든 공식 또는 비공식 회의에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표를 참가시킬 것을 요망했다.55)
좌익정파 인사들은 이러한 상황에서도 별도의 행동을 시작했다. 8월 17일에 중앙문화회당에서는 재중경 한국혁명운동자대회가 열렸다. 대회는 조선민족해방동맹 대표 박건웅(朴建雄)의 개회사에 이어 조선민족혁명당의 윤기섭(尹琦燮)을 의장으로 추대했다. 조소앙이 목전의 국내외정세에 대한 임시정부의 입장을 보고한 다음, 김규식(金奎植)의 부인 김순애(金淳愛)와 최형록(崔亨祿), 손두환(孫斗煥), 이연호(李然浩) 등 10여 명의 민족혁명당 인사들이 연설을 했다. 대회는 연합4개국(중국, 미국, 영국, 소련) 영수에게 축전발송, 임시정부와 의정원의 시급한 개선과 개조 등 7개항을 결의하고 조소앙, 손두환, 이두산(李斗山), 박건웅, 윤증우(尹證宇)를 주석단으로 선출하여 대회 폐회기간 동안 각항 대회결의사항을 책임지고 추진하게 했다.56) 이 대회의 결의사항은 이튿날 개회된 임시의정원에 청원안으로 제출되었다.
또한 이날 오전에 민족혁명당 총서기 김원봉(金元鳳)은 중국국민당 중앙당부로 오철성(吳鐵城) 비서장을 방문하고 임시정부의 귀국문제와 귀국한 뒤의 독립정부 수립 방안문제 등을 논의했다.57)
“이 政府가 그대로 國內로 들어가면 內戰 일어나”
같은 날 제39회 임시의정원도 개회되어 8월 18일부터 회의를 시작했다. 임시의정원은 개회 벽두부터 민족혁명당 소속 의원들의 국무위원 총사직 요구로 격돌했다. 임시정부는 임시의정원의 개회에 즈음하여 (1) 27년간 우리가 대행하던 임시정부의 정권을 오늘 해방된 국내 인민에게 봉환하기로 결의함 (2) 정권을 봉환하기 위하여 현 임시정부는 곧 입국하기로 결의함이라는 두 가지 결의안을 제출했다.58) 그런데 전날 혁명운동자대회에서 연사로 나섰던 과격파 손두환이 이 결의안을 비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은 해방을 맞은 시점의 임시정부의 좌우 대립이 얼마나 격렬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손두환은 일찍이 김구가 장련에서 교사생활을 할 때의 초립동이 제자였다.
“전번에 총사직 권고하였는데, 사직은 않고 국내로 들어간다는 것이 무슨 말이오. 당신들이 이 정부를 조선에 가지고 들어가는 것은 즉 내란을 일으키자는 위험한 생각입니다. 그러한 위험한 정책을 가진 정부 그대로 둘 수 없습니다. 나는 조선에도 정권이 있다면 그대로 복종할 뿐입니다. 무슨 딴 말이 있겠소. 그러고서 조선에 들어갈 것 같소. 당신들이 언제 정권을 맡아서 거들었단 말이오. 언제 국내 인민의 정권을 받았소. 잘하려면 어서 사직들 하시오. …”59)
손두환의 발언이 도화선이 되어 격론이 벌어지고, 마침내 같은 민족혁명당 소속의 임시정부 부주석 김규식마저 손두환의 과격한 발언을 반박하면서 국무위원들의 총사직 문제는 김구 주석이 돌아와야 결정할 수 있는 문제라고 설득했다.60) 임시의정원은 김구의 귀환을 기다리기로 하고 사흘 동안 휴회했다.
“中國國民黨은 韓國獨立黨 원조해야”
김구가 중경에 돌아온 것은 임시의정원 회의가 시작된 8월 18일 아침이었다. 그는 주말에 휴식을 취하고, 8월 21일에 국무회의를 소집하여 서안에 갔던 일을 보고하고 귀국방침을 논의했다. 김구는 이 자리에서 8월 18일에 임시의정원에서 있었던 논의를 전해 듣고 총사직에 반대한다는 점을 단호히 밝혔다. 이때에 김구는 미군과 함께 중국군도 한반도에 진주할 것으로 예상했고, 임시정부의 조기귀국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김구는 8월 21일에 한 중국 인사를 만나서 중국군이 한국에 들어갈 때에 광복군을 동반시킬 것을 제의했다.61)
임시의정원 회의는 8월 22일 오전에 재개되었으나, 김구는 먼저 박찬익(朴贊翊)을 대동하고 중국국민당 중앙당부로 오철성을 찾아갔다.62) 오철성은 김구가 서안에 머무는 동안에도 그를 찾고 있었다.
김구는 먼저 그동안 국민 정부의 지원에 대해 깊이 감사한다는 뜻을 전했다.
“8년의 장기항전 동안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한국독립운동에 아낌없는 물질적, 정신적 원조를 제공한 중국당국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특히 카이로선언을 통해 전후 한국의 독립을 보장한 것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큰 은혜입니다.”
오철성은 한국 각 정파들의 단합을 강조했다.
“한국 각 당파가 더욱 단결을 강화하여 독립운동의 마지막을 잘 마무리하시기 바랍니다.”
“한국인민을 영도하여 선거를 실시하고 민선의 정식정부를 출범시키기 위하여 중경의 한국임시정부가 순조롭게 조국으로 귀환할 수 있도록 중국정부가 도와주셔야 하겠습니다.”
김구의 이러한 요청에 오철성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의 바람이 순조롭게 실현되도록 동맹국의 협조 아래 한국독립운동 유관방면이 공동으로 임시정부를 조직하고, 선거를 통하여 민선정부를 출범시킬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그것은 며칠 전에 김원봉이 오철성에게 제안했던 것과 비슷한 방안이었다. 김구는 연합군이 군정을 실시할 경우에 임시정부 인사들이 이에 참여하는 문제를 제의했다.
“동맹군이 한국에 상륙한 뒤에 혹 과도정부로 군정부를 조직할 경우에는 한국혁명동지들이 여기에 참여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듣자하니 한국 북부는 소련군이 접수하고 한국 남부에는 미군과 중국군이 상륙하여 적의 무장을 해체시킬 것이라 합니다.”
오철성은 이렇게 말하고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개인적인 추측으로는 한국은 당분간은 신탁통치 방식이나 혹은 과도시기의 군정부를 통해 통치될 것으로 보입니다. 장래에는 아마 폴란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통일적 임시정부가 들어설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전망을 하고 있는 오철성에게 김구는 두 가지 사항을 부탁했다. 하나는 중국국민당과 한국독립당은 깊은 역사적 관계를 가지고 있으므로 공산당 세력의 신장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중국국민당은 이후로도 한국독립당을 적극 원조해 달라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중국정부가 즉시 한국임시정부를 승인해 달라는 것이었다. 지금 당장 승인이 어렵다면 한국임시정부가 귀국한 뒤에 각 방면의 영수들을 소집하여 새로운 임시정부를 조직하거든 중국정부가 다른 나라에 앞서 새 임시정부를 승인해 주기 바란다고 김구는 말했다.63) 이처럼 김구는 귀국한 뒤에 국내인사들을 포함하여 새로운 임시정부를 구성할 것을 고려하고 있었다.
金九도 漢城政府의 正統性 내세워
오철성을 만나고 온 김구는 오후에 임시의정원 회의에 참석했다. 이날의 임시의정원 회의는 오전 9시부터 개회되었으나, 주석이 서안에서 돌아오자마자 의정원회의에는 출석하지 않고 중국 사람을 만나러 다니는 것은 경솔하다고 비난하는 의견이 있어서 정회하고 있었다.64)
김구는 민족혁명당의 태도가 몹시 불쾌했다. 먼저 서안지방에 다녀온 일에 대하여 주석의 보고가 있을 것이라는 임시의정원 의장 홍진(洪震)의 말에, 보고는 국무회의에 다 했다고 말하고 필요하다면 정부 대변인으로 하여금 보고하게 하겠다고 받아넘겼다.65) 그리고 총사직문제는 분명히 반대한다고 잘라 말하고, 반대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지금 이 우리 임시정부는 기미년 3월 1일에 본토인 국내에서 우리의 피를 흘린 결과로 13도 대표가 모여 임시정부를 조직하였는데, 너무 압박이 심한 고로 상해에 조직하게 된 것입니다. 그 후 20여년간을 노력하여 왔습니다. 비록 우리 손으로 왜놈을 거꾸러뜨리지는 못하여 유감이라 할지나, 오늘날 중경에 와서 퍽 정신상으로나 질로 양으로 전에 비하여 진보되었다고 봅니다. 지금 국무위원들로 보면 다 연고덕숭[年高德崇: 나이가 많고 덕이 높음]한 이들입니다. 그러므로 본 주석 생각은 이제 임정이 할 일이 무엇이겠는가. 첫째로 국무위원들을 단속하여 속히 내지로 들어가게 해야겠다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각지에 버려져 있는 우리 한국사람이 어떻게 해야 위험을 떠나 생명을 보존하겠는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제도 중국사람과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 한국사람이 난타를 당한다면 너희 중국이 법치국이 못 되는 것을 보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중국군이 한국에 들어갈 때에 광복군을 동반시키자고 하였습니다. 하여튼 이 시기에 총사직은 불가합니다. 총총하고 일이 많고 보따리 쌀 이때에 총사직문제 나는 것은 불가합니다.”66)
이때의 김구의 주장 가운데에서 눈에 띄는 점은 임시정부 정통성의 근거를, 많은 사람들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이 고집스럽게 주장해 온, 한성정부(漢城政府)에 두고 있는 점이다. 이에 대해서는 김규식도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비슷한 발언을 하고 있어서 눈길을 끈다.67)
손두환이 서안 갔던 일을 묻자 김구는 먼저 서안에 간 것은 정부 주석으로서라기보다 광복군 통수부의 자격으로 갔었다고 말하고, 국내정진대를 파견한 사실을 간단히 설명했다.68)
조국의 해방이라는 감격적인 상황을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중경에 있는 한국독립운동자들의 분열과 적대감은 해소되기는커녕 이처럼 오히려 더 심화되었다. 그것은 임시정부의 정부로서의 귀국 문제에 대한 좌익정파들의 반대 때문이었다. 정부가 제출한 결의안을 두고 ‘정권’이라는 개념의 정의에서부터 온갖 공허하고 지엽말단적인 법리논쟁을 벌이던 임시의정원 회의는, 8월 23일에 결의안에 대한 표결동의가 있자, 좌익정파 의원들이 일제히 퇴장해 버리고 말아 폐회행사도 없이 끝나고 말았다.
韓國獨立黨만 독자적으로 歸國 서둘러
김구는 한국독립당만 독자적으로 귀국할 준비를 서둘렀다. 그는 먼저 8월 24일에 장개석(蔣介石)에게 중국국민당과 한국독립당이 앞으로 지속적으로 대표를 파견하여 상호연계를 맺게 하고, 각 동맹국이 빨리 한국임시정부를 승인하도록 중국 외교당국이 노력해 줄 것 등 7개항의 요구사항을 적은 비망록을 제출했다. 요구사항 가운데에는 시급한 경제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연합국에 구제금을 청구하는 한편, 중국이 우선 3억원을 지원해 줄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69)
김구는 장개석에게 비망록을 보내고 이틀 뒤인 8월 26일에는 오철성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내어, 중국정부가 우선 5,000만원을 지원해 줄 것을 요청했다.
“우리 한국임시정부는 조만간 동맹군을 따라 귀국할 예정입니다. 또한 간부 요원 여러 명을 중국 각지에 파견하여 중국군의 접수공작을 돕는 한편으로 적진에 끌려온 한인병사들을 편제하고자 합니다. 한국임시정부 인원의 귀국 및 각지에 간부 요원을 파견하는 데에는 적지 않은 비용이 들어갈 것으로 예상됩니다.”70)
같은 날 민족혁명당의 김원봉도 오철성에게 편지를 보내어 재미 한국청년들을 훈련시켜 중국 공군과 동반하게 하겠다는 등의 행동계획을 설명하고, 당원 가족들의 생활비로 10만원을 빌려줄 것을 요청했다.71)
한국독립당은 8월 28일에 임시전당대회를 열었다.72) 귀국에 즈음하여 「당헌」을 비롯한 「당강」, 「당책」 등을 국내상황에 맞게 수정하기 위한 회의였다. 「당헌」은 조직체계로서 군당부(郡黨部)와 면당부(面黨部)뿐만 아니라 그 아래 5명 이상의 당원으로 조직되는 동(洞), 리(里) 단위의 구당부(區黨部)까지 상정하고 있어서, 해방을 맞아 한국독립당이 얼마나 의욕에 차 있었는가를 짐작하게 한다. 그러나 이때의 한국독립당의 「당원명부」에는 중국에 174명, 재미동포 가운데에서 81명의 이름이 등재되어 있을 뿐이었다.73)
수정된 「당강」과 「당책」 가운데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토지제도에 관한 것이었다. 창당 이래로 토지와 대생산기관은 국유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었는데, 개정된 「당책」에서는 토지는 국유를 원칙으로 하되 구체적인 것은 토지법, 토지사용법, 지가세법(地價稅法) 등의 법률로 실행하고(제7항), 국민이 현재 소유하고 있는 사유토지와 중소 규모의 사영기업(私營企業)은 법률로 보장한다고 한 것이다(제10항). 그러나 매국적과 독립운동을 방해한 자의 재산을 몰수하여 국영사업에 충용하고 토지는 국유로 한다고 했다(제26항).74) 실제로 국정운영의 책임을 맡을 것을 전제로 한 입장에서 느끼는 한국독립당의 고민을 짐작하게 하는 항목들이다.75)
北韓地域에 당장 宣敎師 파견하도록
조소앙은 8월 30일에 다시 주중미국대사관을 방문하여 헐리 대사에게 준비해 온 비망록을 수교하면서 본국정부에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헐리는 비망록의 요지를 정리하여 이튿날 번즈(James F. Byrnes) 국무장관에게 타전했다.
조소앙은 먼저 한국 공산주의자들과 중경에 있는 그들의 동조자들은 한국임시정부를 전복하는 데 실패하자 그들의 당에 대한 충성심을 과시하고 국내외에서의 행동통일을 위하여 임시정부를 탈퇴했다고 기술했다. 비망록은 러시아의 한국인들과 연안(延安)의 한국공산주의자들이 대거 한국으로 들어가고 있다고 말하고, 그렇기 때문에 영미식 입헌주의를 신봉하며 지난 40여년 동안 한국의 자유를 위해 투쟁한 한국의 민주주의자들은 희망을 잃어가고 있고, 한국 안에서 그들의 기회가 감소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비망록은 이어 임시정부의 미국에 대한 입장을 다음과 같이 표명했다.
“한국의 혁명적 지도자들은 한국에서 미점령군을 지원하고 협력하기를 바라고 있으며, 법과 질서를 수호하기 위하여 친미 여론을 조성하고자 한다. 이들 인사들은 공산주의 지도자들보다 더 한국인들로부터 존경받고 있고 더 잘 알려져 있다. 그들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지도적 멤버들이 점령군의 보좌관이나 통역관 또는 미국에 적절한 다른 어떤 방식으로 한국에 입국하는 것을 미국이 허용해 주기를 희망한다. 그들은 한국이 민주주의 국가로 나아갈 것인가 공산주의 국가로 나아갈 것인가의 문제는 미국이 지금 무엇을 하는가에 달려 있다고 믿는다. 그러한 결정을 하지 못하는 것도 공산주의자들에게 유리하게 될 것이다.”
비망록은 또 한국지도자들은 미국이 북한지역에 당장 선교사들을 파견할 것을 바란다고 말하고, 많은 임시정부 멤버들이 기독교인들이라고 덧붙였다.76)
3. 蘇聯은 李承晩의 行動을 警戒
소련군의 진주로 한반도의 공산화가 한결 현실적으로 다가오고 있다고 판단한 이승만은 귀국을 서둘렀다. 종전 이전에 이승만이 기대했던 것은, 8월 3일에 마셜(George C. Marshall) 장군에게 보낸 편지에서 밝혔듯이, 마닐라로 가서 단파방송을 통하여 국내동포들의 봉기를 선동하고 연합군과 함께 귀국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포츠담선언 수락뉴스를 듣고 이러한 계획은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3國首腦에게 勝戰祝電 보내
이승만은 8월 15일에 일본이 정식으로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자 임병직(林炳稷), 장기영(張基永), 한표욱(韓豹頊) 부부 및 그 밖의 몇몇 측근들과 워싱턴의 한 음식점에서 점심을 함께 들면서 앞으로의 일을 상의했다. 이승만은 일본이 패전한 데 대해 기쁨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소련이 어떻게 나올지가 걱정”이라고 말하고, 또 “미국이 일을 지혜롭게 처리하지 못하면 한반도에서 민족주의자와 공산당 간에 피를 흘리게 될지 모른다”라고 걱정했다.77)
이승만은 당장 활동을 시작했다. 바로 그날로 그는 트루먼, 스탈린, 장개석 세 사람에게 승전 축하 전보를 쳤다. 트루먼에게 보낸 전보에서는 27년 전에 3·1운동으로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미국의 제도를 모방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각하. 우리는 대한이 일본의 노예로부터 해방된 데 대하여 마음에 깊이 박힌 감사를 각하와 미국인에게 표시합니다. 미국 군인의 용기와 과학적 천재기능을 대표한 미국 군력과 공업적 위력으로 인하여 일본은 무릎을 꿇고 항복하였습니다. … 27년 전에 대한이 일본에 대항하는 혁명이 일어났을 때에 우리 대한민국정부는 미국제도를 모방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기가 없었으므로 일본의 야만적 행위에 계속 희생이 되어 왔습니다. 오늘 미국이 승리하였음에 따라 각처에 있는 대한인의 기쁨과 감사함은 한이 없고 또한 일치하게 표시됩니다.”
스탈린에게 보낸 축전에서는 일본이 빨리 항복하게 된 “큰 조건” 가운데 하나가 스탈린의 지도력과 소련군의 용기라고 말하고 있어서 흥미롭다.
“각하. 대한임시정부 워싱턴 대표자로서, 또한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서 본인은 최후 승리와 세계평화가 회복된 데 대하여 각하와 소비에트연방국인에게 축하를 합니다. 대한인과 대한정부는 각하의 과단스러운 지도와 소비에트연방국 군인의 용맹을 세계적 자랑으로 부르며, 또한 일본이 속히 항복하게 된 큰 조건 중 하나라고 압니다. 평화스러운 3천만 대한인의 호의로 된 민주적 대한독립국은 극동과 소비에트연방에 대한 평화와 안전을 보장하리라고 우리는 각하에게 담보합니다.”78)
앞으로 한국이 극동과 소련에 대한 평화와 안전을 보장할 것이라고 말한 것은 소련의 안전보장상의 고려사항을 이승만이 정확히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장개석에게 보낸 축전에서는 한국과 중국은 “동일한 전후문제가 있으므로” 밀접한 협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각하. 공통 적국인 일본의 완전한 항복과 세상평화의 회복됨에 대하여 우리의 성심껏 축하를 받기를 바랍니다. 각하의 과단한 지도와 중국 군인의 애국적 용맹심은 세상이 부러워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각하의 대성공을 자랑합니다. 중국과 대한은 동일한 전후 문제가 있으므로 밀접한 협력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후원을 담보합니다.”79)
이승만은 4대연합국의 하나인 영국의 수상에게는 축전을 보내지 않았다.
李承晩의 政策構想에 대한 蘇聯의 비판
이승만이 스탈린에게 우호적인 축전을 보낸 것은 물론 외교적인 제스처였다. 따라서 이승만을 한국의 대표적인 반공 반소 인물로 간주하고 있는 소련당국의 태도에는 변함이 없었다. 8월 15일자로 발행된 소련의 국제문제 정보지 『노보에 브레미야(Novoye Vremiya: 새시대)』(제6권 제16호)에 실린 야로보이(B. Yarovoi) 명의의 “한국, 그 과거와 현재”라는 서평은 앞에서 본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기관지 『공보』(1945년 8월1일자)에 실린 “한국의 국내외 정세에 대하여”(『月刊朝鮮』 2010년 3월호, 「原子爆彈투하와 소련의 對日參戰」참조)에 이어 더욱 엄중하게 이승만에 대한 경계심을 드러낸 것이었다.
야로보이의 서평은 1942년부터 이승만을 돕고 있는 시러큐스대학교(Syracuse University)의 올리버(Robert T. Oliver) 교수가 1944년 9월에 출판한 『한국 ─ 잊어버린 나라(Korea ─ Forgotten Nation)』에 대한 것이었다.80) 이 책은 이승만의 권유와 지원으로 집필된 것이었다. 이승만은 1944년 1월에 켄터키주 애슐랜드(Ashland)에서 열린 한국승인대회에서 카이로선언 뒤에 한국은 더 이상 “잊어버린 나라”가 아니라고 역설하면서 임시정부의 승인을 촉구했었다.81) 그는 또한 이 책의 서문을 썼다.82) 그러므로 이 서평은 사실상 이승만의 비전에 대한 평가라고 할 수 있었다.
야로보이는 먼저 올리버가 중경의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한국인민의 권위있는 공식 대표”라고 말하고, 그러한 임시정부의 주미대표인 이승만을 부각시키고 있다고 비아냥했다. 그는 이승만이 전쟁기간 중에 여러 차례 반소적인 성명을 발표했고, 지금은 자기 조국의 진정한 해방에 반대하면서 가상적인 소련의 위협을 운위하고 있다고 비판했다.83)
올리버의 책에서 매우 주목되는 점은 이승만이 전후 한국정부의 경제정책의 대강으로 다음과 같은 여섯 가지를 발표했다고 소개한 대목이다.
(1) 토지의 회복: 일본인 소유의 대규모 토지를 몰수하여 국민들에게 10~12에이커[1만2000~1만4000평] 규모로 분배.
(2) 일본으로부터 반환된 금보유량에 기초를 둔 한국의 금융제도 회복.
(3) 수산업, 견직업, 제조업을 억압했던 일본의 규제 철폐.
(4) 한국 철도의 환수. 군사용으로 건설된 현재의 도로체계를 민간의 여행과 상업을 위한 도로체계로 발전시킬 것.
(5) 가내 도축의 규제 및 그 밖에 대부분의 식량을 일본으로 수출하도록 규정한 모든 법률의 폐지.
(6) 한국인에 대한 근대적 기계공학 교육. 공작기계, 석유제품, 기계류, 자동차와 그 밖의 수송수단, 철도차량과 설비, 의약품, 서적, 전화와 라디오, 그리고 모든 종류의 근대기구를 미국으로부터 수입.84)
이승만은 이처럼 1944년의 시점에서 전후 한국의 경제부흥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구상하고 있었다. 올리버는 이승만의 이러한 구상을 소개한 다음 한국인들이 자유경제체제 아래에서 자신들이 만든 법에 의한 통치를 받고 기만적인 식민정책의 착취의 촉수로부터 해방된다면, 종전 뒤에 그들의 능력과 자원에 상응하는 번영을 누릴 것이라고 설명했다.85) 그러나 그는 한국이 근대적인 경제사회체제로 전환하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그는 한국이 식민지 지배로 말미암아 극복하기 어려운 도덕적, 직업적, 지적 피해를 입었다고 말하고, 그러므로 외국의 이해관계자들에 의한 자본투자 및 기업경영의 지원과 함께 모든 망명지도자들의 지도력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올리버는 또 한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제기될 수 있는 문제로 상당한 자본 및 외국 전문가의 필요성과 함께 한국의 농업문제의 심각성도 지적했다.86)
이러한 올리버의 소론에 대해 야로보이는 히틀러의 폭정에서 해방된 동유럽 나라들의 농업문제 해결의 보기를 들어 반박했다. 연합국의 적절한 정책을 동반하는 공권력에 의하여 농민에 대한 토지분배가 이루어질 때에, 농촌주민의 이농 없이 농업을 빨리 발전시키는 데 필수적인 여건이 조성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야로보이는 결론적으로 “한국은 지리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대륙에 연결되어 있다”고 강조하고, 자신들의 풍부한 자원과 “연합국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대륙에 있는 강력한 이웃 나라들”의 지원을 통하여 대륙국가로서만 번영할 수 있다고 단언했다.87) 야로보이의 이 서평은 이승만 개인에 대한 소련의 경계심뿐만 아니라 한국의 장래에 대한 소련의 의도를 시사하는 것이어서 꼼꼼히 톺아볼 가치가 있다. 그것은 소련은 단지 신탁통치 4개국의 일원의 위치를 받아들이려고 생각하고 있지 않음을 말해 주는 것이었다.88)
이승만의 동향에 대한 소련정부 당국자들의 관심과 비판은 특별했다. 8월 23일에 외무인민위원부 제2극동국장 주코프(D. A. Zhukov)가 외무인민위원부 부위원장 비신스키(Andrei Vyshinsky)와 소비에트 정보국장 로조프스키(S. A. Lozovsky)에게 제출한 “조선인 정치가 이승만의 특징”이라는 보고서는 “조선인 정치망명가들 가운데에서 이승만은 가장 반동적인 인물이다. 그는 최근에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에 걸쳐서 미국에 반소비에트적인 성명들을 제출했다”라고 비판했다. 이 보고서는 이승만이 스탈린에게 보낸 축전과 관련하여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승만에 대한 이러한 평가는 여러 자료에서 눈에 뜨인다.89)
分割占領 포기를 트루먼에게 권고하도록 蔣介石에게 打電
이승만은 8월 18일에 조소앙이 김구와 공동명의로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를 백악관으로 보내고, 8월 20일에는 번즈 국무장관에게 면담을 희망하는 편지를 썼다.
“한국의 상황에 대하여 장관과 논의할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해 주실 것을 정중하게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또한 새롭게 자유를 되찾은 데 대한 한국인들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깊은 감사를 이 기회를 통해서 장관께 거듭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저는 우리 정부의 지시에 따라 이미 이러한 감사의 인사를 대통령에게 보냈습니다.”90)
그러나 한국문제에 대한 미국의 기존 정책이 변경되지 않는 한 국무장관의 회답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한국을 둘러싼 국제정세는 날로 심각해지고 있었다. 이승만은 한반도가 미국과 소련에 의하여 분할점령된다는 말을 듣고 여간 걱정스럽지 않았다. 그는 8월 21일에 트루먼과 장개석에게 급히 전보를 쳤다. 장개석에게 친 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독립을 위장하여 한국을 괴뢰로 이용하려는 계획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각하께서 트루먼 대통령에게 이 계획을 채택할 필요가 없다고 권고해 주십시오. 한국에 완전한 독립을 부여하지 않는 어떤 계획도 모두 한국국민은 받아들이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각하에게 삼가 보장합니다. 단결되고 민주적인 독립 한국은 장차 귀국의 충실한 맹방이 될 것입니다.”91)
장개석은 8월 24일에 “민족주의의 완성으로 국제평화를 유지하자”라는 연설을 통하여 “(중국의) 일본에 대한 항전은 중국 자체의 자유와 평등을 위한 투쟁일 뿐만 아니라, 또한 한국의 해방과 독립을 위한 분투였다. 오늘 이후 우리는 더욱 똑같은 종지(宗旨) 아래 모든 관계된 맹방과 공동으로 민족독립과 평등의 원칙을 존중하며 그들이 마땅히 획득해야 할 지위를 영원히 보장한다”라고 선언했다.92)
백악관으로부터는 아무런 회답이 없었다. 그러자 이승만은 8월 28일에 다시 트루먼에게 전보를 쳤다. 그리고 9월 7일에야 국무부의 밸런타인(Joseph W. Ballantine) 극동국장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극히 의례적인 짤막한 편지를 받았다.
“이승만 박사에게. 백악관의 지시로 귀하께서 대일전 승리와 한국문제의 여러 측면에 관하여 보내신 8월 15일, 21일, 28일의 전보와 8월 8일, 18일에 보내신 편지가 접수되었음을 확인해 드립니다. 국무차관을 대신하여 극동국장 밸런타인 올림.”93)
“李博士는 韓民族이 펼친 鬪爭의 상징”
이승만의 귀국을 위하여 미국인 친구들도 지원에 나섰다. 한미협회(Korean American Council)의 더글러스(Paul F. Douglas) 워싱턴대학교(University of Washington) 총장, 스태거즈(John Staggers) 변호사, 언론인 윌리엄스(Jay J. Williams) 세 사람은 8월 22일에 연명으로 트루먼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어 이승만의 귀국을 청원했다. 이들은 편지에서 미국정부가 이승만이 즉시 귀국하는 데 필요한 모든 도움을 제공하기 바란다고 말하고, 이승만과 한국인의 열망에 대한 더 이상의 냉대를 그만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편지는 또한 지난 27년간 한국인들이 유일한 정부로 인정해 온 중경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는다면 혼란과 유혈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고 경고하고, 다음과 같은 일화를 소개했다.
“이러한 모든 상황은 이 박사가 한국에 들어감으로써 회피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한민족이 펼친 기나긴 투쟁의 살아 있는 상징입니다. 우리는 국무부에 제출할 증거들을 수집하면서 전세가 호전된 뒤에 한국에서 귀환한 다수의 선교사들과 한 남자를 만났습니다. 그들은 이 박사가 한국인들의 가슴 속 가장 앞자리에 자리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심지어 일단의 선교사들이 송환을 기다리던 수용소에서 사슬에 묶여 수감된 여러명의 한국인 ‘죄수’들로부터 ‘이 박사가 아직도 우리를 위하여 미국에서 활동하고 계십니까?’ 하는 질문을 받았다고 합니다. 선교사들이 그렇다고 하자 그들의 얼굴에 행복감이 떠올랐다고 합니다.”94)
맥아더將軍에게 歸國청원
이승만은 8월 28일에 마닐라에 있는 맥아더 장군에게 전보를 쳤다. 이 전보는 맥아더의 「일반명령 제1호」의 포고를 보고 보낸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빨리 귀국하여 미군과 협조할 수 있도록 맥아더가 트루먼에게 영향력을 행사해 주기를 넌지시 부탁했다.
“한국에 있는 일본인들은 미군사령관에게 항복해야 한다는 장군의 명령은 우리에게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민족의 마음을 장군에게 말씀드릴 수 있게 된 데 대하여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우리는 공동점령 또는 신탁통치에 반대합니다. 만약 점령이 필요하다면, 미국인들이 흘린 피와 그들이 들인 비용의 대가로 미군만의 단독 점령을 우리는 환영합니다. 대일전쟁은 민주주의를 위하여 세계를 안전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왜 우리가 러시아로 하여금 한국에 들어와 공산주의를 건설하고 한국에서 유혈내전의 씨앗을 뿌리도록 허락해야 합니까? 우리의 유일한 희망은 극동의 평화를 위하여 트루먼 대통령과 장군께서 단일한 민주주의 독립 한국을 주장해 주시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트루먼 대통령에게 본인을 한국에 들여보내어 그곳에서 미군을 지원하고 협력하도록 해 주시기를 요망합니다.”95)
같은 날 OSS의 부책임자 굿펠로(Preston M. Goodfellow) 대령은 국무부 극동국장 밸런타인을 방문했다. 이승만은 김구로부터 중경으로 와서 한국에 관한 장래계획을 논의했으면 좋겠다는 통지를 받았다면서 중경행에 대한 주선을 굿펠로에게 부탁한 것이었다. 굿펠로는 밸런타인에게 정부가 이승만의 중경행을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면 이승만이 정식으로 중경행을 요청할 수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포기할 것이라고 말했다. 굿펠로는 정부가 정보를 얻기 위해 몇몇 관리들을 이승만과 동행시켜서 이승만 및 김구와 접촉을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할지 모른다고 말했다. 굿펠로는 이승만의 중경행이 미국에 도움이 되는 이유는 이승만이 “다른 한국 지도자들보다 더 미국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96)
때를 같이하여 이승만은 야심적인 행사를 준비했다. 그것은 한국에 협조적인 인사들을 초청하여 “한국해방의 밤(Korea’s Liberation Night)” 만찬연설회를 개최하는 일이었다. 한국 해방의 밤 만찬연설회는 8월 30일 저녁에 열렸다. 만찬연설회에는 130명가량의 사람들이 모였고, 한국해방을 축하하는 연설이 이어졌다. 특히 필리핀의 외교관이자 언론인이기도 한 로물로(Carlos P. Romulo) 장군과 뉴욕에서 온 가톨릭 해외 선교부(Catholic Foreign Mission)의 월시(Walsh) 대주교의 연설은 ABC방송을 통하여 전국에 방송되었다.97) 이 만찬연설회는 워싱턴 지식인 사회에서의 이승만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마지막 행사였다.⊙
1) 레베데프證言, 중앙일보 특별취재반, 『示必錄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中央日報社, 1992, p. 64. 2) Erik van Ree, Socialism in One Zone ─ Stalin’s Policy in Korea 1945-1947, Berg, 1989, p. 66. 3) 森田芳夫, 『朝鮮終戰の記錄』, 巖南堂書店, 1967, p. 166; 김기조, 『한반도 38선 분할의 역사 ─ 일제 15년전쟁 정전략과 미-소 외교 전략 비사 (1931~1945)』, 한국학술정보, 2006, p. 319.
4) 森田芳夫, 앞의 책, pp. 168~172. 5) Erik van Ree, op. cit., p. 91. 6) 森田芳夫, 앞의 책, p. 182.
7) 古下先生傳記編纂委員會 編, 『古下宋鎭禹先生傳』, 東亞日報社, 1965, p. 303; 呂運弘, 『夢陽 呂運亨』, 靑廈閣, 1967, p. 145; 김병기, 「손주에게 들려주는 光復이야기」, 『朝鮮日報』, 2005년 8월 24일자. 8) 이승현, 「해방직후 북한우익의 노선과 활동」, 『國史館論叢』, 54輯, 國史編纂委員會, 1994, p. 182. 9) 森田芳夫, 앞의 책, p. 182. 10) I. M. 치스차코프, 「第25軍의 戰鬪行路」, 蘇聯과학아카데미 編, 『朝鮮의 解放』, 國土統一院, 1988, pp. 63~65; Erik van Ree, op. cit., p. 91. 11) 레베데프證言, 『示必錄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p. 59, p. 91. 12) 金昌順, 『北韓十五年史』, 知文閣, 1961, p. 44. 13) 森田芳夫, 앞의 책, p. 183. 14) 레베데프 證言, 『示必錄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p. 59. 15) 曹圭河-李庚文-姜聲才, 『南北의 對話』, 고려원, 1987, pp. 153~155. 16) 吳泳鎭, 『하나의 證言 ─ 作家의 手記』, 中央文化社, 1952, pp. 112~124. 17) I. M. 치스차코프, 「第25軍의 戰鬪行路」, 『朝鮮의 解放』, p. 66; Erik van Ree, op. cit., pp. 91~92. 18) 森田芳夫, 앞의 책, pp. 184~185. 19) 李允榮, 『白史李允榮回顧錄』, 史草, 1984, pp. 105~106. 20) 森田芳夫, 앞의 책, pp. 185~186.
21) 曹圭河-李庚文-姜聲才, 앞의 책, pp. 60~61; 김광운, 『북한 정치사 연구 Ⅰ ─ 건당, 건국, 건군의 역사』, 선인, 2003, p. 54. 22) 森田芳夫, 앞의 책, p. 184. 23) 위의 책, pp. 178~179; 森田芳夫-長田かな子 編, 『朝鮮終戰の記錄 資料篇(ㅡ)』, 巖南堂書店, 1979, pp. 299~300. 24) 森田芳夫, 앞의 책, pp. 180~181. 25) 咸錫憲, 「내가 맞은 8·15」, 『씨알의 소리』, 25호, 씨알의소리사, 1973. 8, p. 46. 26) 森田芳夫, 앞의 책, pp. 188~190. 27) 위의 책, p. 163. 28) I. M. 치스차코프, 「第25軍의 戰鬪行路」, 『朝鮮의 解放』, p. 67; Erik van Ree, op. cit., p. 92. 29) Erik van Ree, op. cit., p. 92; 『示必錄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pp. 178~180. 30) 레베데프證言, 『示必錄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pp. 91~92. 31) Erik van Ree, op. cit., pp. 92~93; I. M. 치스차코프, 「第25軍의 戰鬪行路」, 『朝鮮의 解放』, p. 69; 『示必錄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pp. 92~93. 32) 김학준, 『북한의 역사 (제1권) 강대국권력정치 아래서의 한반도분할과 소련의 북한군정개시 1863년~1946년 1월』,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8, p. 703 주 87).
33) 『朝鮮中央年鑑 1949年版』, 朝鮮中央通信社, 1949, pp. 57~58. 34) 和田春樹, 「ソ連の朝鮮政策 ─ 1945年8~10月 ─」, 『社會科學硏究』, 第3卷4號, 東京大學社會科學硏究所, 1991, p. 115. 35) 위의 글, pp. 115~116; N. G. 레베데프, 「遂行해야 할 義務를 自覺하며」, 『朝鮮의 解放』, p. 104~105. 36) 和田春樹, 앞의 글, pp. 116~117. 37) 「경성으로 파견된 사절단의 예비보고 ─ 버드가 헤프너에게 (1945. 8.23)」,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13) 한국광복군 Ⅳ』, 국사편찬위원회, 2006, p. 206.
38) 「한반도 특수임무에 관한 보고―앨버트 에반스가 전략첩보국 동북지휘부 지휘관에게 (1945. 9.3)」, 위의 책, p. 222. 39) Maochun Yu, OSS in China ─ Prelude to Cold War, Yale University Press, 1996, p. 233; 韓詩俊, 『韓國光復軍硏究』, 一潮閣, 1993, p. 301. 40) 張俊河, 『돌베게』, 禾多出版社, 1982, pp. 373~374. 41) 「한반도 특수임무에 관한 보고―앨버트 에반스가 전략첩보국 동북지휘부 지휘관에게 (1945. 9.3)」,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13) 한국광복군 Ⅳ』, p. 222. 42) 「경성으로 파견된 사절단의 예비보고 ─ 버드가 헤프너에게 (1945. 8.23)」, 「한반도 특수임무에 관한 보고―앨버트 에반스가 전략첩보국 동북지휘부 지휘관에게 (1945. 9.3)」, 위의 책, p. 206, p. 222. 43) 張俊河, 앞의 책, pp. 375~376; 「경성으로 파견된 사절단의 예비보고 ─ 버드가 헤프너에게 (1945. 8.23)」,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13) 한국광복군 Ⅳ』, p. 207. 44) 「경성으로 파견된 사절단의 예비보고 ─ 버드가 헤프너에게 (1945. 8.23)」,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13) 한국광복군 Ⅳ』, p. 207. 45) 張俊河, 앞의 책, p. 382. 46) 「경성으로 파견된 사절단의 예비보고 ─ 버드가 헤프너에게 (1945. 8.23)」; 「한반도 특수임무에 관한 보고―앨버트 에반스가 전략첩보국 동북지휘부 지휘관에게 (1945. 9.3)」,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13) 한국광복군 Ⅳ』, pp. 209~210, p. 222; 金俊燁, 『長征(2)―나의 光復軍時節』, 나남, 1993, pp. 548~549. 47) 「한반도 특수임무에 관한 보고―앨버트 에반스가 전략첩보국 동북지휘부 지휘관에게 (1945. 9.3)」,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13) 한국광복군 Ⅳ』, p. 223; 張俊河, 앞의 책, p. 383; 金俊燁, 위의 책, p. 549. 48) 「한반도 특수임무에 관한 보고―앨버트 에반스가 전략첩보국 동북지휘부 지휘관에게 (1945. 9.3)」,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13) 한국광복군 Ⅳ』, p. 223; Maochun Yu, op. cit., p. 234. 49) Maochun Yu, op. cit., p. 234; 「한반도 특수임무에 관한 보고―앨버트 에반스가 전략첩보국 동북지휘부 지휘관에게 (1945. 9.3)」,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13) 한국광복군 Ⅳ』, pp. 224~227.
50) Maochun Yu, op. cit., pp. 234~235; 金俊燁, 앞의 책, p. 556. 51) 「독수리작전의 종료와 관련한 전문―INDIV가 플레쳐, 웸플러, 크라우제에게 (1945. 8.29)」,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13) 한국광복군 Ⅳ』, p. 215; Maochun Yu, op. cit., p. 235. 52) 趙擎韓, 『白岡回顧錄: 國外篇』, 韓國宗敎協議會, 1979, p. 366. 53) 「臨時議政院會議 제39회」(1945. 8),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4) 임시의정원 Ⅲ』, 국사편찬위원회, 2005, p. 152. 54) Hurley to Byrnes, Aug. 14, 1945,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이하 FRUS) 1945, vol.Ⅵ, Unite States Government Printing Office, 1969, p. 1036. 55) Kim, Tjo to Rhee, Aug. 17, 1945, FRUS 1945, vol.Ⅵ, pp. 1036~1037. 56) 石潭華 編著, 『韓國獨立運動與中國』, 上海人民出版社, 1995, pp. 557~558. 57) 秋憲樹 編, 『資料 韓國獨立運動 (2)』, 延世大學校出版部, 1972, p. 240. 58) 「臨時議政院會議 제39회」 (1945. 8),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4) 임시의정원 Ⅲ』, p. 153. 59) 「臨時議政院會議 제39회」 (1945. 8), 위의 책, p. 146. 60) 「臨時議政院會議 제39회」 (1945. 8), 같은 책, pp. 145~149.
61) 「臨時議政院會議 제39회」 (1945. 8), 같은 책, p. 150. 62) 南坡朴贊翊傳記刊行委員會, 『南坡朴贊翊傳記』, 乙酉文化社, 1989, pp. 286~287. 63) 「吳鐵城과 金九의 담화기록」(1945. 8.22),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22) 대중국외교활동』, 국사편찬위원회, 2008, pp. 260~261. 64) 「臨時議政院會議 제39회」(1945. 8),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4) 임시의정원 Ⅲ』, p. 149. 65) 「臨時議政院會議 제39회」(1945. 8), 위의 책, p. 150.
66) 「臨時議政院會議 제39회」(1945. 8), 같은 책, p. 150; 도진순 주해, 『백범일지』, 돌베게, 1997, p. 400. 67) 「臨時議政院會議 제39회」(1945. 8),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4) 임시의정원 Ⅲ』, p. 147. 68) 「臨時議政院會議 제39회」(1945. 8), 위의 책, p. 152. 69) 「임시정부의 희망사항을 담아 중국당국에 보내는 비망록」(1945. 8.24),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22) 대중국외교활동』, pp. 261~262. 70) 「法幣 5천만원 지원을 청하는 공함」(1945. 8.26), 위의 책, p. 263. 71) 秋憲樹 編, 앞의 책, p. 241. 72) 「재중경한독당 제5차 임시대표대회, 선언-당강-당책 발표」, 白凡金九先生全集編纂委員會 編, 『白凡金九全集 (8)』, 대한매일신보사, 1999, pp. 29~32. 73) 「韓國獨立黨員名簿」, 『白凡金九全集 (6)』, pp. 265~266. 74) 秋憲樹 編, 앞의 책, pp. 191~194; 盧景彩, 『韓國獨立黨硏究』, 신서원, 1996, pp. 288~299. 75) 趙擎韓, 앞의 책, p. 366.
76) Hurley to Byrnes, Aug. 31, 1945, FRUS 1945 vol.Ⅵ, p. 1042. 77) 한표욱, 『이승만과 한미외교』, 중앙일보사, 1996, pp. 37~38. 78) 「주미외교위원부통신」 제115호 (1945. 8.16),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19) 주미외교위원부 Ⅰ』, 국사편찬위원회, 2007, p. 510. 79) 위의 책, p. 511.
80) 和田春樹, 앞의 글, pp. 105~106; Erik Van Ree, op. cit., pp. 71~73. 81) Congressional Record, The House of Representatives, Feb. 7. 1944. “The Korean Movement”, Extension of Remarks of Hon. J. Harry McGregor. 82) Robert T. Oliver, Korea ─ Forgotten Nation, Public Affairs Press, 1944, pp. 7-8; Robert T. Oliver, Syngman Rhee and American Involvement in Korea, 1942~1960 ─ A Personal Narrative, Panmun Book Company LTD, 1978, p. 17; Robert T. Oliver, “The Way It Was ─ All The Way“ A Documentary Accounting (unpublished), p. 25. 83) 和田春樹, 앞의 글, pp. 105~106; Erik van Ree, op. cit., p. 71. 84) Robert T. Oliver, Korea ─ Forgotten Nation, p. 86. 85) Ibid. 86) op. cit., p. 108. 87) Erik van Ree, op. cit., p. 72.
88)Ibid., pp. 72~73. 89) 김성보, 『남북한 경제구조의 기원과 전개』, 역사비평사, 2000, pp. 118~119. 90) 미국무부문서 895.01/8-2045, Syngman Rhee to Byrnes, Aug. 20, 1945, Internal Affairs of Korea 1945~1949, p. 420. 91) 石潭華 編著, 앞의 책, p. 559. 92)胡春惠 著, 辛勝夏 譯, 『中國안의 韓國獨立運動』, 檀國大學敎出版部, 1978, p. 288. 93) 미국무부문서 895.01/8-1845, Ballantine to Syngman Rhee, Sept. 7, 1945, Internal Affairs of Korea 1945~1949, p. 419. 94) 미국무부문서 895.01/8-2245, Korean American Council to Truman, Aug. 22, 1945, Internal Affairs of Korea 1945~1949, p. 429.
95) Syngman Rhee to MacArthur, Aug. 28, 1945, 國史編纂委員會 編, 『大韓民國史資料集(28) 李承晩關係書翰資料集 1(1944~1948)』, 國史編纂委員會, 1996, pp. 35~38. 96) 미국무부문서 895.01/8-1545, Ballantine, “Trip to Chungking by Dr. Syngman Rhee,” Aug. 28, 1945, Internal Affairs of Korea 1945~1949, p. 404. 97) Syngman Rhee to Oliver, Sept. 5, 1945, 『大韓民國史資料集(28) 李承晩關係書翰資料集 1(1944~1948)』, p. 39.
여의도 비행장에 착륙한 韓國光復軍 國內挺進隊는 日本軍의 거부로 이튿날 中國으로 돌아갔고, 독수리作戰은 중단되었다.
8월 18일에 金九가 重慶으로 돌아오자 臨時議政院에서는 臨時政府의 귀국문제로 격론이 벌어졌다. 國務委員들의 총사직을 주장하면서 임시정부의 政府로서의 귀국을 반대하는 左翼政派들은 臨時政府를 탈퇴했다.
李承晩은 8월 15일에 日本의 항복이 공식으로 선포되자 그날로 트루먼, 스탈린, 蔣介石에게 勝戰祝賀전보를 쳤다. 그러나 李承晩을 한국의 대표적인 반공반소 인물로 간주하고 있는 소련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소련의 국제문제 정보지 『노보에 브레미야(새 시대)』는 올리버(Robert T. Oliver)의 저서에 대한 서평 형식을 빌려 李承晩의 전후한국 경제정책 구상을 비판했다.
李承晩은 귀국을 서둘렀다. 미국인 친구들도 지원에 나섰다. 李承晩은 맥아더 장군에게도 편지를 써서 귀국 지원을 요청했다.
8월 30일 저녁에 열린 “한국해방의 밤” 만찬연설회는 워싱턴 지식인 사회에서 李承晩이 지닌 영향력을 보여주는 마지막 행사였다.
1. “占領軍이냐, 解放軍이냐?”
소련군 제24군 군사회의(military council) 위원으로서 1945년 8월부터 1948년 12월까지 북한에 머물면서 북한정권 창출의 산파역을 맡았던 레베데프(Nikolai G. Lebedev) 소장은 “북한의 역사는 소련군의 진주에서부터 시작되었다”라고 말했다.1) 그만큼 북한의 국가형성은 소련군의 주도 아래 추진되었다. 그리고 그 작업은 전격적이고 단호했다.
소련의 극동군 총사령관 바실레프스키(Alexandr M. Vasileveskii) 원수는 8월 18일에 만주와 한국의 주요 도시에 정규부대보다 먼저 이동할 수 있는 기동부대와 공수부대를 보내어 점령하도록 명령했다. 이들 부대에는 점령한 도시의 행정조직을 담당하기 위해 특별히 선발된 장교들이 배치되었다.2)
行政權移讓합의, 그날로 번복해

이때의 치스차코프의 행동은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사령부의 최초의 정식행동이었다는 점에서 눈여겨볼 만하다. 치스차코프는 함흥의 비행장 건물 안에서 일본군 제34군사령관 구시부치(櫛淵) 중장과 만나 일본군의 무장해제에 대하여 협의하고, 시내로 들어가서 함경남도 지사 기시 유이치(岸勇一) 및 도청 간부들과 행정권 이양문제를 협의했다. 치스차코프는 먼저 “조선인이든 일본인이든 현재의 직장을 이탈하는 자는 교수형에 처한다”라고 엄명하고, 행정권 이양교섭은 샤닌 장군에게 맡겼다. 교섭은 30분 만에 끝났다. (1) 관내의 치안유지는 물론 행정사무는 종래대로 지사와 그 부하직원이 집행하고, (2) 인심을 교란하거나 치안을 문란하게 하는 자는 엄벌에 처하며, (3) 공장, 사업장, 광산 등은 조업을 계속하고, (4) 물자를 관외로 방출하지 않도록 한다는 등에 합의하고 기시 지사와 샤닌 장군 연명으로 이튿날 발표하기로 했다. 발표가 있을 것이라는 것을 함흥방송국을 통하여 예고방송까지 했으나, 발표는 갑자기 중지되었다.
소련군의 진주에 앞서 함흥에서는 8월 16일에 석방된 송성관(宋成寬) 등과 그 밖의 공산주의자들이 그날 밤으로 함경남도 인민위원회 좌익(咸鏡南道人民委員會左翼)을 조직했다가 바로 함경남도 공산주의자협의회를 결성하고 맹렬히 활동을 시작했다. 또 이들과는 별도로 도용호(都容浩), 최명학(崔明鶴) 등을 중심으로 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 함경남도지부가 결성되었다. 이 두 단체 대표들이 이날 오후에 치스차코프를 찾아가서, 두 단체가 합동으로 조선민족 함경남도집행위원회를 결성했다면서 행정권을 비롯한 모든 권한을 이 집행위원회에 이양하라고 요구했다. 행정권 이양 발표가 중지된 것은 그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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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에 도착한 소련 제25군사령관 치스차코프 대장. |
“오늘 도용호를 위원장, 최명학을 부위원장으로 하는 조선민족 함경남도집행위원회가 설립되었다. 소련군의 명령 아래 동 집행위원회가 함경남도의 치안과 행정 일체를 담당한다. 헌병과 경찰관은 무장을 해제한다. 관공서나 공공물은 위원회에 인계한다. 위원회는 일본인을 억압해서는 안 된다. 일본인의 생명과 재산은 소련군 및 위원회가 보장한다. 신정부의 법규에 따를 것. 공장설비 등을 파괴하는 행위는 엄중히 처벌한다. 그것을 철거한 경우에는 원위치에 가져다 놓을 것.”
이어 도용호와 최명학을 신정부의 대표자로 소개했다. 기시 지사와 우체국장과 일본질소비료 흥남본부장은 그 자리에서 인계서에 서명해야 했다. 기시 지사가 자기는 총독에 의하여 임명되었으므로 총독의 명령이 없이는 서명할 수 없다면서 서명을 거부하자, 치스차코프는 “치스차코프 대장의 명령으로 서명했다고 쓰라”고 말했다. 이처럼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은 총독부를 상대하지 않고 도(道)별로 행정권을 접수했다. 조선민족 함남집행위원회는 8월 30일에 함경남도 인민위원회로 개칭되고, 민간 건물에 있던 사무소는 도청으로 옮겨졌다.4)
全國에서 최초로 平壤의 日本神社가 불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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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직후에 머리붕대를 두르고 다닌 曺晩植. |
치스차코프는 8월 26일에 평양에 도착했다. 평양에는 이미 8월 24일 오후 2시에 카멘슈코프(Kamenchikov) 소령이 이끄는 선발대가 대형수송기 3대로 진주했고, 오후 5시에는 평원선 기차로 2개 연대 병력이 도착했다. 이어 8월 26일에는 3,000~4,000명의 본대가 진주했다.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이 드센 함흥과는 대조적으로 평양은 ‘한국의 예루살렘’이라고 일컬어졌을 만큼 기독교의 도시였다. 8월 15일에 전국에서 처음으로 일본인들의 평양 신사(神社)가 불탄 것은 신사참배 강요로 쌓인 평양 시민들의 울분이 표출된 것이었다.6)
평양에는 소련군의 진주에 앞서 신사참배에 저항하다가 옥사한 주기철(朱基澈) 목사의 산정현(山亭峴) 교회 장로이자 ‘한국의 간디’로 알려진 민족주의 지도자 조만식(曺晩植)을 중심으로 평안남도 건준이 결성되어 있었다. 평안남도 건준은 서울의 여운형(呂運亨) 및 송진우(宋鎭禹)와 연락하면서,7) 치안유지에 주력했다.8) 한편 공산주의자들도 8월 15일에 경성제국대학 출신의 현준혁(玄俊赫)을 위원장으로 하는 조선공산당 평안남도지구위원회를 조직하고 “일본인의 생명을 보호하라”는 전단을 뿌리는 등 선전활동을 벌였다.9)
평양에 도착한 치스차코프는 철도호텔에 숙소를 정하고 그날로 활동을 개시했다. 먼저 일본군 평양사관구(平壤師管區) 사령관 다케시타 요시하루(竹下義晴) 중장을 철도호텔로 불렀다. 치스차코프는 다케시타에게 평양사관구 일본군의 무장해제에 관련된 사항을 지시했다.10) 이어 치스차코프는 평안남도 건준과 공산당 간부들을 함께 소집했다. 조만식은 치스차코프를 만나자마자 “소련군은 점령군이냐, 해방군이냐?” 하고 따지듯이 물었다.11) 그것은 소련군이 진주하면서 도처에서 강간과 약탈을 자행하고 있는 데 대한 항의였다.12) 평양부(平壤府)가 급히 유곽과 술집을 신설한 것도 그러한 사태에 대비한 것이었다.13) 치스차코프는 조만식에게 “소련군이 온 목적은 조선해방이다”라고 대답한 다음, “나는 순수 군인이니까 정치적인 문제는 이틀 뒤에 정치전문가인 레베데프 소장이 오면 그에게 물으라”고 잘라 말했다.14)
이 자리에서 치스차코프는 우익인사 15명, 좌익인사 15명(뒤에 각각 16명)으로 구성되는 위원회에 평안남도의 행정을 맡기겠다고 말했다. 이것은 전날 함흥에서 결성된 조선민족 함경남도집행위원회 구성과 같은 방식이었다. 치스차코프가 누가 위원장으로 적임자이겠느냐고 묻자, 모인 사람들 모두가 조만식을 천거했다. 부위원장은 평남건준의 부위원장 오윤선(吳胤善)과 조선공산당 평남지구위원장 현준혁이 맡기로 결정되었다.15)
그러나 회의 분위기는 함흥에서와는 달리 순조롭지 않았다. 치스차코프는 “이제부터는 도의 모든 행정에서 공산당의 지도를 받으라”고 말했다가 우익인사들의 반발에 부딪혀 “공산당과 협력하라”고 발언을 수정해야 했다.16) 치스차코프는 뒷날 이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짧은 대화를 해 보고 나는 이곳에는 군사회의 동지들이 없이 나와 라닌(V. M. Lanin) 중령[제25군사령부 작전부장 대리]만으로는 처리할 수 없을 만큼 문제가 많고 복잡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나는 곧 연길로 비행기를 보내어 8월 28일에 레베데프 장군을 수석으로 하는 군사회의 위원들을 평양으로 데려오게 했다.…”17)
치스차코프는 레베데프와 한국인 대표들의 정식 회의일을 8월 29일로 정했다. 그는 또 이날 밤에 조만식, 현준혁 등 한국인사들과 후루카와 가네히데(古川兼秀) 평안남도 지사를 비롯한 도오모토(堂本) 경찰부장 등 평양의 유력인사들을 불러 모았다. 이 자리에서 치스차코프는 다음과 같은 요지의 성명을 발표했다. (1) 일본군대는 일본천황의 명령으로 항복했기 때문에 26일 오후 8시에 평안남도의 일본정부는 소멸했으며, 조만식을 위원장으로 하는 한국인 위원회에 전권을 인계한다. (2) 모든 일본인 관리는 퇴임한다. 일본인 가운데 기술자 및 한국인이 할 수 없는 기능을 가진 사람은 현상을 유지한다. (3) 일본군은 모두 포로로 처우한다. (4) 식량배급은 종래대로 실시하고 일본인에게 감배(減配)하지 않는다. (5) 일본인과 한국인은 사이좋게 제휴하고, 만일 문제가 있으면 소련군에 신고한다. (6) 노무자의 태업은 금지한다. (7) 민간인이 소지한 총기는 모두 회수한다. (8) 신정권이 각도에 설립된 뒤에 통일된 정부를 만든다. 다만 신정부의 소재지는 서울에 한하지 않는다.18)
조만식과 현준혁을 비롯한 한국인 지도자들은 백선행(白善行)기념관으로 자리를 옮겨 위원회 조직에 착수했다. 이때에 위원회의 명칭을 두고 평남건준인사들은 평안남도 정치위원회로, 공산주의자들은 평안남도 인민위원회로 맞서다가 투표 끝에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로 결정되었다.19) 8월 27일에 평안남도 행정은 평남인민정치위에 이양되었다.20)
京元線, 京義線 철도운행 중단시켜
소련군은 평양 점령과 함께 38도선을 경계로 남과 북을 단절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먼저 8월 24일에 경원선(京元線), 8월 25일에 경의선(京義線)의 철도운행을 중단시키고, 38선에 인접한 금천(金川), 연천(連川), 평강(平康), 양양(襄陽) 등지에 경비부대를 배치하여 남과 북의 교류를 통제했다.21) 치스차코프는 8월 27일 오전 10시까지 38도선 이북에 있던 일본군 장성 7명은 출두시킨 다음, 이튿날 이들을 모두 연길로 이송했다.22)
황해도에는 8월 25일에 30명의 소련군 선발대가 진주했다. 이 부대는 비행기로 평양에 와서 철도편으로 해주에 도착했다. 소련군은 해주와 토성(土城) 사이의 철도를 38도선에서 차단하고, 주로 물자가 남한으로 유출되는 것을 감시했다.
이에 앞서 해주에서는 8월 17일에 정치범과 경제범이 석방된 데 이어 8월 20일에는 기독교인인 김응순(金應珣)을 위원장으로 하는 건준 황해도지부가 결성되고, 동시에 김덕영(金德永)을 위원장으로 하는 조선공산당 황해지구위원회도 발족해 있었다. 선발대와 같이 온 소련군 정치장교의 주선으로 건준 황해도지부는 황해도 인민정치위원회로 개편되었는데, 위원회의 간부는 대체로 민족주의계이고 공산계 인사는 한두 사람 포함되었다.23) 이 정치장교의 명령에 따라 쓰쓰이 다케오(筒井竹雄) 황해도지사는 9월 2일에 도행정을 황해도 인민정치위에 이양했다. 그러나 건준계가 우위인 이 기구에 불만을 가진 공산당이 그날로 우파의 두 간부를 구타하여 중상을 입히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리하여 위원회는 9월 4일에 총사직할 것을 소련군에 통고했고, 소련군은 하는 수 없이 도지사에게 당분간 행정을 계속하라고 지시했다.
9월 8일에 치스차코프가 해주에 온 뒤에 공산당 황해지구위원장 김덕영을 위원장으로 하는 황해도 인민위원회가 성립되고, 9월 13일에 도지사가 행정권을 이 위원회에 다시 이양했다. 격분한 우파의 해주보안대가 9월 16일 새벽에 인민위원회 본부를 습격하여 세 사람을 살해하고, 좌파가 반격에 나서 시가전이 벌어졌다. 결국 보안대 간부가 남한으로 피신하고 보안대 대신에 공산계가 치안대를 조직하고 해주경찰서를 점거했다.24)
평안북도에는 8월 27일에 소련군 선발대가 진주했고, 8월 30일에 치스차코프가 비행기로 신의주(新義州)에 도착했다. 신의주에는 8월 15일 오후 2시에 민족주의계의 이유필(李裕弼)을 위원장으로 하여 신의주자치위원회(치안유지회)가 결성되어 있었는데, 소련군이 진주하자 대부분의 위원들이 하룻밤 사이에 공산당이 되었다.25) 치스차코프는 평안북도자치위원회를 평안북도 임시인민정치위원회로 개칭한 다음 이튿날 오전 10시에 일본인 및 한국인 유력자들을 불러 모으고 이 위원회가 도행정을 인수한다고 선언했다.26)
대일선전포고와 동시에 소련군이 진격해 왔던 함경북도에서는 9월 말이 되어서야 나진의 실업가인 이창인(李昌仁)을 위원장으로 하는 함경북도 인민위원회가 청진에 설립되었다고 한다.27)
제25군 군사회의 위원 레베데프 소장은 8월 28일 저녁에 28명의 소련계 한인들을 이끌고 평양에 도착했다.28) 레베데프와 함께 평양에 온 소련계 한인들 가운데에는 소련점령 기간 동안에 민정사령부 수석통역관 역할을 맡았던 강 미하일(Kang Mikhail) 소령과 다수의 문필가들이 포함되어 있었다.29)
조만식을 비롯한 평남인민정치위의 간부들은 8월 29일에 레베데프와 회담했다. 레베데프가 조만식에게 북한의 전반적인 상황을 말해 달라고 하자 조만식은 친일파의 준동, 산업활동의 중단, 식량부족, 토지제도의 미비, 문맹자 문제 등이 산적해 있다고 설명했다. 레베데프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지 묻자 조만식은 서슴없이 기본정치노선은 민주주의여야 하고, 자본주의에 입각한 경제제도를 채택해야 하며, 교육을 통해 인민을 깨우쳐야 하고, 피압박민족의 한을 자주독립국가 건설로 풀어야 하는데, 이 모든 것을 위해서는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레베데프는 조만식의 정치적 식견이 뛰어나다는 것을 느꼈으나 동시에 조만식이 ‘반동적 견해’를 가지고 있음을 알아차렸다.30) 대화가 이어지는 동안 안락의자에 기대어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있으면서 입을 다문 채 이따금 수긍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반대의 표시로 고개를 옆으로 젓기도 하는 조만식의 태도가 레베데프는 몹시 비위에 거슬렸다.31) 이 회담은 조만식과 소련군의 관계가 순탄하지 않을 것임을 예고했다.
“행복은 당신들의 수중에 있다”
평안남도 도청 청사는 소련군사령부가 사용하게 되었다. 치스차코프 사령관의 유명한 포고문이 북한주민들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이때부터였다. 원래 이 포고문은 제25군 사령부가 연길에 있던 8월 15일자로 작성된 것이었으나,32) 언제 어느 지역에 뿌려졌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뒤에 각종 문헌에 수록된 포고문에는 날짜가 들어있지 않다.
“조선인민들에게!
조선인들이여! 소련 군대와 동맹국군대들은 조선에서 일본약탈자들을 구축하였다. 조선은 자유국이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오직 신조선사의 첫 페이지가 될 뿐이다. 화려한 과수원은 사람의 노력(勞力)과 고려(顧慮)의 결과이다.… 조선인들이여! 기억하라! 행복은 당신들의 수중에 있다. 당신들은 자유와 독립을 찾았다. 이제는 모든 것이 죄다 당신들에게 달렸다. 소련 군대는 조선인민이 자유롭게 창조적 노력에 착수할 만한 모든 조건을 지어주었다. 조선인민 자체가 반드시 자기의 행복을 창조하는 자로 되어야 할 것이다.…”33)
포고문은 한국인들의 해방의 기쁨을 한껏 고무하는 것이기는 했으나, 한국에 대한 정책을 구체적으로 표명한 것은 없었다. 구체적인 것은 기업가에게 재산보호와 기업소의 정상조업을 보장하고 노동자에게 노동을 계속할 것을 촉구한 것뿐이었다. 그러나 치스차코프의 이 포고문은 38도선 이남지역에 미군정을 실시한다는 것을 선포한 맥아더(Douglas MacArthur)의 위압적인 「태평양 미국육군총사령부 포고」(제1호)와 대비되면서 좌익들의 선전자료로 이용되었다. 이 포고문은 남한에서도 조선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解放日報)』(1945년 10월 31일자)에 전문이 크게 실려 일반 민중에게 널리 알려졌다.
치스차코프, 레베데프, 슈티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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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제25군 군사회의 위원 레베데프 소장. |
평양에 왔을 때에 치스차코프는 마흔다섯 살이었다.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러시아 혁명 뒤에 붉은 군대 병사로 내전에 참가했다. 제2차 세계대전 전에 연해주군관구의 대령의 지위에 있던 그는 독-소 전쟁에 참가하여 여단장, 사단장, 군단장으로 승진하고, 마지막으로 제6군 사령관이 되었다. 그곳에서 대일전을 위해 제25군으로 옮겨왔다. 그는 평범한 군인이었다.34)
치스차코프 밑에서 정치회의 위원으로 활동한 레베데프는, 치스차코프의 평가에 따르면, “주목할 만한 정치공작자”였다. 정치회의 위원이란 정치담당 부사령관에 해당하는 존재였다. 레베데프는 1939~1940년의 소련-핀란드 전쟁에 참가했고, 그 뒤에 극동으로 와서 제25군 군사회의 위원으로 일해 왔다. 그는 대핀란드전쟁 때부터 슈티코프를 알고 있었고, 북한에 있던 3년이 넘는 동안은 슈티코프의 직접 지도 아래 일했다. 다음과 같은 그의 술회는 북한 정권의 수립과정에서 슈티코프의, 아니 소련의 역할이 얼마나 결정적이었는가를 웅변으로 말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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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제1극동방면군 군사회의 위원 슈티코프 대장. |
슈티코프는 뒤에 미-소공동위원회의 소련 쪽 수석대표로 1946년과 1947년에 서울에 왔었고, 북한정권 수립 뒤인 1948년부터 6·25전쟁 발발 직후인 1951년까지 북한주재 초대 소련대사로 있었다. 슈티코프는 대장의 지위에까지 올랐으나 본래는 군인이 아니었다. 레닌그라드의 노동자 출신으로서 스무살 나던 1927년에 소련공산당에 입당한 그는 스탈린(Iosif V. Stalin)의 충실한 부하로 잔뼈가 굵은 사람이었다. 독-소전이 시작되자 서부방면군, 레닌그라드방면군의 군사회의 위원을 역임하고, 1943년부터 메레치코프 밑에서 볼호프(Volkhov) 방면군, 카렐리아(Karelia) 방면군의 군사회의 위원으로 활동하다가 같이 극동으로 배치되었다. 두 사람은 레닌그라드 해방 축하의 예포소리를 크렘린의 스탈린 집무실에서 들었다.36) 슈티코프와 레베데프가 소련-핀란드 전쟁에서부터 호흡을 맞추어 왔던 사실은 기억해 둘 만하다.
여의도 비행장에 나타난 光復軍 國內挺進隊
이범석(李範奭)을 대장으로 한 장준하(張俊河), 김준엽(金俊燁), 노능서(魯能瑞)와 버드(Willis Bird) 중령이 이끄는 미군사절단 18명은 중경(重慶)에서 새로 지원된 C-46수송기를 타고 8월 18일 오전 5시에 섬서성(陝西省)의 서안(西安) 비행장을 이륙했다. 사절단은 오전 9시15분부터 방문사실을 15분 간격으로 일본군에 알렸으나 일본군으로부터는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37) 이들은 영등포 상공을 선회하면서 한글과 일본어로 된 전단을 살포하다가 11시40분에 일본군의 답신을 받고 오전 11시56분에 여의도 비행장에 착륙했다.38)
광복군 정진대와 미군사절단의 여의도 비행장 착륙은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뒤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광복군과 중국전구의 미군이 처음으로 한국에 발을 디딘 중대사건이었다.39) 일본군은 적대적인 태도로 이들을 맞이했다. 착검을 하고 돌격태세를 갖춘 일본군이 수송기를 포위했고, 수송기로부터 50미터 떨어진 곳에는 1개중대 병력이 포진했다. 중형전차의 기관포까지 C-46수송기를 향해 배치되었다.40)
비행장에는 일본군 제17방면군 사령관 고즈키 요시오(上月良夫) 중장이 나와 있었다. 버드와 고즈키와의 대화는 한국계 미국인 함용준(Lyong C. Hahm) 대위의 통역으로 진행되었다.41) 버드는 자신들의 방문목적이 연합군 포로들의 후송문제를 준비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고, 일본총독에게 보내는 편지를 수교했다. 그러나 고즈키는 본국으로부터 지시받은 것이 없다면서 편지의 사본만 접수했다.42) 잠시 뒤에 고즈키는 자리를 떴고, 여의도 경비사령관 시부자와(澁澤) 대좌가 대화를 계속했다. 시부자와는 그늘 밑에 가서 이야기하자면서 맥주며 사이다며 담배가 준비된 탁자로 사절단을 안내했다. 그는 연합군 포로들은 안전하게 잘 있으니까 걱정 말라고 말하고, 그 이상의 정보는 제공해 줄 수 없다고 했다.43)
결국 일본군은 사절단의 임무를 허락할 수 없고, 다만 귀환에 필요한 가솔린은 공급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여의도 비행장에는 C-46수송기에 필요한 옥탄가100의 가솔린이 없었으므로 사절단은 그곳에서 하룻밤을 머물 수 있었다.44) 숙소로 배정된 곳은 비행장 안의 장교집합소라는 넓은 다다미방이었다.
정진대와 미군사절단 군인들이 잠을 청하려고 할 때에 시부자와 대좌와 여의도 경비사령부의 참모장 우에다(上田) 중좌가 맥주에다 계란부침과 튀김을 가져와서 술자리가 벌어졌다. 백발이 성성한 시부자와가 꿇어앉은 자세로 맥주를 권하는 모습은 한국 정진대원들로 하여금 일본의 항복을 실감하게 했다.
「독수리作戰」은 종료돼
8월 19일 아침이 되자 정진대는 물통에 물을 가득 채우고, 흙도 한줌씩 종이봉투에 담아 넣은 다음 애국가를 불렀다.45) 버드는 전쟁 포로의 완전한 명단과 그들이 수용되어 있는 위치를 알려줄 것을 요구하고, 그것이 어렵다면 숫자와 국적분류라도 제출해 달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이범석의 제안에 따라 아베 총독과의 면담을 요청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이러한 요구를 거부하면서, 사절단이 정오에는 이곳을 떠나야 한다고 강박했다. 정진대와 미군사절단은 하는 수 없이 돌아갈 채비를 하고 오후 12시15분에 숙소를 나왔고, 오후 2시에 평양에서 가져온 가솔린을 C-46수송기에 넣고 정비를 실시했다. 여의도 비행장을 떠날 준비를 하는 동안에도 일본군의 위협이 계속되었다. 일본군은 전차와 박격포를 사절단 쪽으로 향하게 하고 전투기 5대의 발진을 준비시켰다.46)
정진대와 미군사절단은 오후 4시20분에 여의도 비행장을 이륙했다. 이범석은 마지막까지 낙하산을 이용하여 국내에 침투하는 방안을 버드에게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버드는 오히려 일본 전투기의 습격을 우려했다. 하릴없이 돌아가는 정진대 네 사람의 표정은 침통했다.47) 급유와 정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수송기는 오후 6시10분에 산동성(山東省) 유현(維縣)비행장에 불시착했다. 사절단은 이곳에서 OSS의 「오리작전(Duck Mission)」 요원들과 조우했다.48)
침통한 심정으로 돌아온 국내정진대에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났다. 미군사절단에 동행했던 전시정보국(OWI) 소속의 리버먼(Lieberman)이 8월 18일 밤에 여의도 비행장에서 있었던 일본군과의 술자리를 포함한 뉴스를 8월 23일에 전시정보국의 라디오방송으로 내보낸 것이었다.49) 웨드마이어(Albert C. Wedemeyer) 장군은 격노했다. 8월 22일에 중경으로 가서 그에게 독수리작전의 대면보고를 한 버드는 여의도 비행장에서 일본군과 대치하면서 일어났던 긴박한 상황에 대해서만 보고했었기 때문이다. 18일 밤의 술자리는 미군과 일본군 사이의 화친행동으로 비쳐져 외부로부터 오해를 살 수 있었고, 사절단의 방문목적에도 부합하지 않았다. 웨드마이어가 특히 화가 난 것은 버드가 뒷날의 자기선전을 위해 사진기사와 전시정보국 요원을 대동하면서도 포로구출에 필요한 의료진은 사절단에 한 사람도 포함시키지 않은 사실 때문이었다. 웨드마이어는 8월 23일에 한국에서 포로를 구출하는 모든 작전이 “재구성되고 독수리작전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도록” 하라고 명령했다. 독수리작전의 책임자는 크라우제(Gustav Krause) 소령으로 교체되고, 8월 28일에는 유현에 있는 사절단이 서안으로 소환되었다. 국내정진대도 풀이 죽은 모습으로 두곡(杜曲)으로 돌아왔다.50) 이렇게 하여 독수리작전은 8월 30일에 종료되었다.51)
2. 左翼政派들의 臨時政府 탈퇴
임시정부 간부들은 8월 10일에 일본 정부가 포츠담 선언을 수락했다는 소식을 듣고 향후 대책을 논의했다. 김구가 없는 상황에서도 국무회의를 두 번이나 열었다. 국무회의는 그대로 귀국하여 임시정부를 국민에게 봉환(奉還)하기로 하고, 귀국한 뒤에 반포할 당면정책을 기초할 것, 대외교섭을 서둘러 귀국채비를 갖출 것, 정부와 의정원의 모든 문서와 집물을 정리할 것, 제39회 임시의정원 회의를 소집할 것 등을 결의했다.52) 그러나 김구가 서안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또 당파 내부의 회의도 있고 하여 구체적인 방침은 결정하지 못했다.53)
美軍과 함께 韓國에 들어가기 바라
외무부장 조소앙은 8월 14일에 주중미국대사 헐리(Patrick J. Hurley)를 방문했다. 조소앙은 중경임시정부가 (1) 한국에 진주하는 연합군, 특히 미군과 협조하기를 원한다는 점, (2) 극동전역에 산재한 일본군 안에는 한국인들이 100만명쯤 있는데, 이들의 무장해제와 재편성 작업을 하는 미국을 임시정부가 지원하겠다는 점, (3) 한국인 혁명지도자들이 한국정치문제에 관해 발언권을 갖고자 한다는 점을 피력했다. 헐리는 이 면담에 관한 보고서에서 조소앙은 또 한국에서의 소련의 영향력과 그들이 취할 조치들에 대해 우려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적었다.54)
조소앙은 이어 8월 17일에는 김구와 자신의 공동명의로 트루먼(Harry S. Truman) 대통령 앞으로 편지를 작성하여 이승만에게 보냈다. 편지는 연합국(미국, 영국, 소련, 프랑스, 중국)에 진심으로 축하한다고 말하고, 다가오는 평화회의와 국제연합 구제부흥기구(United Nations Relief and Rehabilitation Administration: UNRRA) 등과 같은 한국문제와 관련 있는 모든 공식 또는 비공식 회의에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표를 참가시킬 것을 요망했다.55)
좌익정파 인사들은 이러한 상황에서도 별도의 행동을 시작했다. 8월 17일에 중앙문화회당에서는 재중경 한국혁명운동자대회가 열렸다. 대회는 조선민족해방동맹 대표 박건웅(朴建雄)의 개회사에 이어 조선민족혁명당의 윤기섭(尹琦燮)을 의장으로 추대했다. 조소앙이 목전의 국내외정세에 대한 임시정부의 입장을 보고한 다음, 김규식(金奎植)의 부인 김순애(金淳愛)와 최형록(崔亨祿), 손두환(孫斗煥), 이연호(李然浩) 등 10여 명의 민족혁명당 인사들이 연설을 했다. 대회는 연합4개국(중국, 미국, 영국, 소련) 영수에게 축전발송, 임시정부와 의정원의 시급한 개선과 개조 등 7개항을 결의하고 조소앙, 손두환, 이두산(李斗山), 박건웅, 윤증우(尹證宇)를 주석단으로 선출하여 대회 폐회기간 동안 각항 대회결의사항을 책임지고 추진하게 했다.56) 이 대회의 결의사항은 이튿날 개회된 임시의정원에 청원안으로 제출되었다.
또한 이날 오전에 민족혁명당 총서기 김원봉(金元鳳)은 중국국민당 중앙당부로 오철성(吳鐵城) 비서장을 방문하고 임시정부의 귀국문제와 귀국한 뒤의 독립정부 수립 방안문제 등을 논의했다.57)
“이 政府가 그대로 國內로 들어가면 內戰 일어나”
같은 날 제39회 임시의정원도 개회되어 8월 18일부터 회의를 시작했다. 임시의정원은 개회 벽두부터 민족혁명당 소속 의원들의 국무위원 총사직 요구로 격돌했다. 임시정부는 임시의정원의 개회에 즈음하여 (1) 27년간 우리가 대행하던 임시정부의 정권을 오늘 해방된 국내 인민에게 봉환하기로 결의함 (2) 정권을 봉환하기 위하여 현 임시정부는 곧 입국하기로 결의함이라는 두 가지 결의안을 제출했다.58) 그런데 전날 혁명운동자대회에서 연사로 나섰던 과격파 손두환이 이 결의안을 비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은 해방을 맞은 시점의 임시정부의 좌우 대립이 얼마나 격렬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손두환은 일찍이 김구가 장련에서 교사생활을 할 때의 초립동이 제자였다.
“전번에 총사직 권고하였는데, 사직은 않고 국내로 들어간다는 것이 무슨 말이오. 당신들이 이 정부를 조선에 가지고 들어가는 것은 즉 내란을 일으키자는 위험한 생각입니다. 그러한 위험한 정책을 가진 정부 그대로 둘 수 없습니다. 나는 조선에도 정권이 있다면 그대로 복종할 뿐입니다. 무슨 딴 말이 있겠소. 그러고서 조선에 들어갈 것 같소. 당신들이 언제 정권을 맡아서 거들었단 말이오. 언제 국내 인민의 정권을 받았소. 잘하려면 어서 사직들 하시오. …”59)
손두환의 발언이 도화선이 되어 격론이 벌어지고, 마침내 같은 민족혁명당 소속의 임시정부 부주석 김규식마저 손두환의 과격한 발언을 반박하면서 국무위원들의 총사직 문제는 김구 주석이 돌아와야 결정할 수 있는 문제라고 설득했다.60) 임시의정원은 김구의 귀환을 기다리기로 하고 사흘 동안 휴회했다.
“中國國民黨은 韓國獨立黨 원조해야”
김구가 중경에 돌아온 것은 임시의정원 회의가 시작된 8월 18일 아침이었다. 그는 주말에 휴식을 취하고, 8월 21일에 국무회의를 소집하여 서안에 갔던 일을 보고하고 귀국방침을 논의했다. 김구는 이 자리에서 8월 18일에 임시의정원에서 있었던 논의를 전해 듣고 총사직에 반대한다는 점을 단호히 밝혔다. 이때에 김구는 미군과 함께 중국군도 한반도에 진주할 것으로 예상했고, 임시정부의 조기귀국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김구는 8월 21일에 한 중국 인사를 만나서 중국군이 한국에 들어갈 때에 광복군을 동반시킬 것을 제의했다.61)
임시의정원 회의는 8월 22일 오전에 재개되었으나, 김구는 먼저 박찬익(朴贊翊)을 대동하고 중국국민당 중앙당부로 오철성을 찾아갔다.62) 오철성은 김구가 서안에 머무는 동안에도 그를 찾고 있었다.
김구는 먼저 그동안 국민 정부의 지원에 대해 깊이 감사한다는 뜻을 전했다.
“8년의 장기항전 동안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한국독립운동에 아낌없는 물질적, 정신적 원조를 제공한 중국당국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특히 카이로선언을 통해 전후 한국의 독립을 보장한 것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큰 은혜입니다.”
오철성은 한국 각 정파들의 단합을 강조했다.
“한국 각 당파가 더욱 단결을 강화하여 독립운동의 마지막을 잘 마무리하시기 바랍니다.”
“한국인민을 영도하여 선거를 실시하고 민선의 정식정부를 출범시키기 위하여 중경의 한국임시정부가 순조롭게 조국으로 귀환할 수 있도록 중국정부가 도와주셔야 하겠습니다.”
김구의 이러한 요청에 오철성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의 바람이 순조롭게 실현되도록 동맹국의 협조 아래 한국독립운동 유관방면이 공동으로 임시정부를 조직하고, 선거를 통하여 민선정부를 출범시킬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그것은 며칠 전에 김원봉이 오철성에게 제안했던 것과 비슷한 방안이었다. 김구는 연합군이 군정을 실시할 경우에 임시정부 인사들이 이에 참여하는 문제를 제의했다.
“동맹군이 한국에 상륙한 뒤에 혹 과도정부로 군정부를 조직할 경우에는 한국혁명동지들이 여기에 참여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듣자하니 한국 북부는 소련군이 접수하고 한국 남부에는 미군과 중국군이 상륙하여 적의 무장을 해체시킬 것이라 합니다.”
오철성은 이렇게 말하고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개인적인 추측으로는 한국은 당분간은 신탁통치 방식이나 혹은 과도시기의 군정부를 통해 통치될 것으로 보입니다. 장래에는 아마 폴란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통일적 임시정부가 들어설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전망을 하고 있는 오철성에게 김구는 두 가지 사항을 부탁했다. 하나는 중국국민당과 한국독립당은 깊은 역사적 관계를 가지고 있으므로 공산당 세력의 신장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중국국민당은 이후로도 한국독립당을 적극 원조해 달라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중국정부가 즉시 한국임시정부를 승인해 달라는 것이었다. 지금 당장 승인이 어렵다면 한국임시정부가 귀국한 뒤에 각 방면의 영수들을 소집하여 새로운 임시정부를 조직하거든 중국정부가 다른 나라에 앞서 새 임시정부를 승인해 주기 바란다고 김구는 말했다.63) 이처럼 김구는 귀국한 뒤에 국내인사들을 포함하여 새로운 임시정부를 구성할 것을 고려하고 있었다.
金九도 漢城政府의 正統性 내세워
오철성을 만나고 온 김구는 오후에 임시의정원 회의에 참석했다. 이날의 임시의정원 회의는 오전 9시부터 개회되었으나, 주석이 서안에서 돌아오자마자 의정원회의에는 출석하지 않고 중국 사람을 만나러 다니는 것은 경솔하다고 비난하는 의견이 있어서 정회하고 있었다.64)
김구는 민족혁명당의 태도가 몹시 불쾌했다. 먼저 서안지방에 다녀온 일에 대하여 주석의 보고가 있을 것이라는 임시의정원 의장 홍진(洪震)의 말에, 보고는 국무회의에 다 했다고 말하고 필요하다면 정부 대변인으로 하여금 보고하게 하겠다고 받아넘겼다.65) 그리고 총사직문제는 분명히 반대한다고 잘라 말하고, 반대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지금 이 우리 임시정부는 기미년 3월 1일에 본토인 국내에서 우리의 피를 흘린 결과로 13도 대표가 모여 임시정부를 조직하였는데, 너무 압박이 심한 고로 상해에 조직하게 된 것입니다. 그 후 20여년간을 노력하여 왔습니다. 비록 우리 손으로 왜놈을 거꾸러뜨리지는 못하여 유감이라 할지나, 오늘날 중경에 와서 퍽 정신상으로나 질로 양으로 전에 비하여 진보되었다고 봅니다. 지금 국무위원들로 보면 다 연고덕숭[年高德崇: 나이가 많고 덕이 높음]한 이들입니다. 그러므로 본 주석 생각은 이제 임정이 할 일이 무엇이겠는가. 첫째로 국무위원들을 단속하여 속히 내지로 들어가게 해야겠다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각지에 버려져 있는 우리 한국사람이 어떻게 해야 위험을 떠나 생명을 보존하겠는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제도 중국사람과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 한국사람이 난타를 당한다면 너희 중국이 법치국이 못 되는 것을 보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중국군이 한국에 들어갈 때에 광복군을 동반시키자고 하였습니다. 하여튼 이 시기에 총사직은 불가합니다. 총총하고 일이 많고 보따리 쌀 이때에 총사직문제 나는 것은 불가합니다.”66)
이때의 김구의 주장 가운데에서 눈에 띄는 점은 임시정부 정통성의 근거를, 많은 사람들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이 고집스럽게 주장해 온, 한성정부(漢城政府)에 두고 있는 점이다. 이에 대해서는 김규식도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비슷한 발언을 하고 있어서 눈길을 끈다.67)
손두환이 서안 갔던 일을 묻자 김구는 먼저 서안에 간 것은 정부 주석으로서라기보다 광복군 통수부의 자격으로 갔었다고 말하고, 국내정진대를 파견한 사실을 간단히 설명했다.68)
조국의 해방이라는 감격적인 상황을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중경에 있는 한국독립운동자들의 분열과 적대감은 해소되기는커녕 이처럼 오히려 더 심화되었다. 그것은 임시정부의 정부로서의 귀국 문제에 대한 좌익정파들의 반대 때문이었다. 정부가 제출한 결의안을 두고 ‘정권’이라는 개념의 정의에서부터 온갖 공허하고 지엽말단적인 법리논쟁을 벌이던 임시의정원 회의는, 8월 23일에 결의안에 대한 표결동의가 있자, 좌익정파 의원들이 일제히 퇴장해 버리고 말아 폐회행사도 없이 끝나고 말았다.
韓國獨立黨만 독자적으로 歸國 서둘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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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귀국을 앞둔 金九. |
김구는 장개석에게 비망록을 보내고 이틀 뒤인 8월 26일에는 오철성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내어, 중국정부가 우선 5,000만원을 지원해 줄 것을 요청했다.
“우리 한국임시정부는 조만간 동맹군을 따라 귀국할 예정입니다. 또한 간부 요원 여러 명을 중국 각지에 파견하여 중국군의 접수공작을 돕는 한편으로 적진에 끌려온 한인병사들을 편제하고자 합니다. 한국임시정부 인원의 귀국 및 각지에 간부 요원을 파견하는 데에는 적지 않은 비용이 들어갈 것으로 예상됩니다.”70)
같은 날 민족혁명당의 김원봉도 오철성에게 편지를 보내어 재미 한국청년들을 훈련시켜 중국 공군과 동반하게 하겠다는 등의 행동계획을 설명하고, 당원 가족들의 생활비로 10만원을 빌려줄 것을 요청했다.71)
한국독립당은 8월 28일에 임시전당대회를 열었다.72) 귀국에 즈음하여 「당헌」을 비롯한 「당강」, 「당책」 등을 국내상황에 맞게 수정하기 위한 회의였다. 「당헌」은 조직체계로서 군당부(郡黨部)와 면당부(面黨部)뿐만 아니라 그 아래 5명 이상의 당원으로 조직되는 동(洞), 리(里) 단위의 구당부(區黨部)까지 상정하고 있어서, 해방을 맞아 한국독립당이 얼마나 의욕에 차 있었는가를 짐작하게 한다. 그러나 이때의 한국독립당의 「당원명부」에는 중국에 174명, 재미동포 가운데에서 81명의 이름이 등재되어 있을 뿐이었다.73)
수정된 「당강」과 「당책」 가운데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토지제도에 관한 것이었다. 창당 이래로 토지와 대생산기관은 국유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었는데, 개정된 「당책」에서는 토지는 국유를 원칙으로 하되 구체적인 것은 토지법, 토지사용법, 지가세법(地價稅法) 등의 법률로 실행하고(제7항), 국민이 현재 소유하고 있는 사유토지와 중소 규모의 사영기업(私營企業)은 법률로 보장한다고 한 것이다(제10항). 그러나 매국적과 독립운동을 방해한 자의 재산을 몰수하여 국영사업에 충용하고 토지는 국유로 한다고 했다(제26항).74) 실제로 국정운영의 책임을 맡을 것을 전제로 한 입장에서 느끼는 한국독립당의 고민을 짐작하게 하는 항목들이다.75)
北韓地域에 당장 宣敎師 파견하도록
조소앙은 8월 30일에 다시 주중미국대사관을 방문하여 헐리 대사에게 준비해 온 비망록을 수교하면서 본국정부에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헐리는 비망록의 요지를 정리하여 이튿날 번즈(James F. Byrnes) 국무장관에게 타전했다.
조소앙은 먼저 한국 공산주의자들과 중경에 있는 그들의 동조자들은 한국임시정부를 전복하는 데 실패하자 그들의 당에 대한 충성심을 과시하고 국내외에서의 행동통일을 위하여 임시정부를 탈퇴했다고 기술했다. 비망록은 러시아의 한국인들과 연안(延安)의 한국공산주의자들이 대거 한국으로 들어가고 있다고 말하고, 그렇기 때문에 영미식 입헌주의를 신봉하며 지난 40여년 동안 한국의 자유를 위해 투쟁한 한국의 민주주의자들은 희망을 잃어가고 있고, 한국 안에서 그들의 기회가 감소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비망록은 이어 임시정부의 미국에 대한 입장을 다음과 같이 표명했다.
“한국의 혁명적 지도자들은 한국에서 미점령군을 지원하고 협력하기를 바라고 있으며, 법과 질서를 수호하기 위하여 친미 여론을 조성하고자 한다. 이들 인사들은 공산주의 지도자들보다 더 한국인들로부터 존경받고 있고 더 잘 알려져 있다. 그들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지도적 멤버들이 점령군의 보좌관이나 통역관 또는 미국에 적절한 다른 어떤 방식으로 한국에 입국하는 것을 미국이 허용해 주기를 희망한다. 그들은 한국이 민주주의 국가로 나아갈 것인가 공산주의 국가로 나아갈 것인가의 문제는 미국이 지금 무엇을 하는가에 달려 있다고 믿는다. 그러한 결정을 하지 못하는 것도 공산주의자들에게 유리하게 될 것이다.”
비망록은 또 한국지도자들은 미국이 북한지역에 당장 선교사들을 파견할 것을 바란다고 말하고, 많은 임시정부 멤버들이 기독교인들이라고 덧붙였다.76)
3. 蘇聯은 李承晩의 行動을 警戒
소련군의 진주로 한반도의 공산화가 한결 현실적으로 다가오고 있다고 판단한 이승만은 귀국을 서둘렀다. 종전 이전에 이승만이 기대했던 것은, 8월 3일에 마셜(George C. Marshall) 장군에게 보낸 편지에서 밝혔듯이, 마닐라로 가서 단파방송을 통하여 국내동포들의 봉기를 선동하고 연합군과 함께 귀국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포츠담선언 수락뉴스를 듣고 이러한 계획은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3國首腦에게 勝戰祝電 보내
이승만은 8월 15일에 일본이 정식으로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자 임병직(林炳稷), 장기영(張基永), 한표욱(韓豹頊) 부부 및 그 밖의 몇몇 측근들과 워싱턴의 한 음식점에서 점심을 함께 들면서 앞으로의 일을 상의했다. 이승만은 일본이 패전한 데 대해 기쁨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소련이 어떻게 나올지가 걱정”이라고 말하고, 또 “미국이 일을 지혜롭게 처리하지 못하면 한반도에서 민족주의자와 공산당 간에 피를 흘리게 될지 모른다”라고 걱정했다.77)
이승만은 당장 활동을 시작했다. 바로 그날로 그는 트루먼, 스탈린, 장개석 세 사람에게 승전 축하 전보를 쳤다. 트루먼에게 보낸 전보에서는 27년 전에 3·1운동으로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미국의 제도를 모방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각하. 우리는 대한이 일본의 노예로부터 해방된 데 대하여 마음에 깊이 박힌 감사를 각하와 미국인에게 표시합니다. 미국 군인의 용기와 과학적 천재기능을 대표한 미국 군력과 공업적 위력으로 인하여 일본은 무릎을 꿇고 항복하였습니다. … 27년 전에 대한이 일본에 대항하는 혁명이 일어났을 때에 우리 대한민국정부는 미국제도를 모방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기가 없었으므로 일본의 야만적 행위에 계속 희생이 되어 왔습니다. 오늘 미국이 승리하였음에 따라 각처에 있는 대한인의 기쁨과 감사함은 한이 없고 또한 일치하게 표시됩니다.”
스탈린에게 보낸 축전에서는 일본이 빨리 항복하게 된 “큰 조건” 가운데 하나가 스탈린의 지도력과 소련군의 용기라고 말하고 있어서 흥미롭다.
“각하. 대한임시정부 워싱턴 대표자로서, 또한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서 본인은 최후 승리와 세계평화가 회복된 데 대하여 각하와 소비에트연방국인에게 축하를 합니다. 대한인과 대한정부는 각하의 과단스러운 지도와 소비에트연방국 군인의 용맹을 세계적 자랑으로 부르며, 또한 일본이 속히 항복하게 된 큰 조건 중 하나라고 압니다. 평화스러운 3천만 대한인의 호의로 된 민주적 대한독립국은 극동과 소비에트연방에 대한 평화와 안전을 보장하리라고 우리는 각하에게 담보합니다.”78)
앞으로 한국이 극동과 소련에 대한 평화와 안전을 보장할 것이라고 말한 것은 소련의 안전보장상의 고려사항을 이승만이 정확히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장개석에게 보낸 축전에서는 한국과 중국은 “동일한 전후문제가 있으므로” 밀접한 협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각하. 공통 적국인 일본의 완전한 항복과 세상평화의 회복됨에 대하여 우리의 성심껏 축하를 받기를 바랍니다. 각하의 과단한 지도와 중국 군인의 애국적 용맹심은 세상이 부러워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각하의 대성공을 자랑합니다. 중국과 대한은 동일한 전후 문제가 있으므로 밀접한 협력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후원을 담보합니다.”79)
이승만은 4대연합국의 하나인 영국의 수상에게는 축전을 보내지 않았다.
李承晩의 政策構想에 대한 蘇聯의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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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承晩의 戰後韓國政策構想을 소개한 올리버의 저서 『한국―잊어버린 나라』. |
야로보이의 서평은 1942년부터 이승만을 돕고 있는 시러큐스대학교(Syracuse University)의 올리버(Robert T. Oliver) 교수가 1944년 9월에 출판한 『한국 ─ 잊어버린 나라(Korea ─ Forgotten Nation)』에 대한 것이었다.80) 이 책은 이승만의 권유와 지원으로 집필된 것이었다. 이승만은 1944년 1월에 켄터키주 애슐랜드(Ashland)에서 열린 한국승인대회에서 카이로선언 뒤에 한국은 더 이상 “잊어버린 나라”가 아니라고 역설하면서 임시정부의 승인을 촉구했었다.81) 그는 또한 이 책의 서문을 썼다.82) 그러므로 이 서평은 사실상 이승만의 비전에 대한 평가라고 할 수 있었다.
야로보이는 먼저 올리버가 중경의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한국인민의 권위있는 공식 대표”라고 말하고, 그러한 임시정부의 주미대표인 이승만을 부각시키고 있다고 비아냥했다. 그는 이승만이 전쟁기간 중에 여러 차례 반소적인 성명을 발표했고, 지금은 자기 조국의 진정한 해방에 반대하면서 가상적인 소련의 위협을 운위하고 있다고 비판했다.83)
올리버의 책에서 매우 주목되는 점은 이승만이 전후 한국정부의 경제정책의 대강으로 다음과 같은 여섯 가지를 발표했다고 소개한 대목이다.
(1) 토지의 회복: 일본인 소유의 대규모 토지를 몰수하여 국민들에게 10~12에이커[1만2000~1만4000평] 규모로 분배.
(2) 일본으로부터 반환된 금보유량에 기초를 둔 한국의 금융제도 회복.
(3) 수산업, 견직업, 제조업을 억압했던 일본의 규제 철폐.
(4) 한국 철도의 환수. 군사용으로 건설된 현재의 도로체계를 민간의 여행과 상업을 위한 도로체계로 발전시킬 것.
(5) 가내 도축의 규제 및 그 밖에 대부분의 식량을 일본으로 수출하도록 규정한 모든 법률의 폐지.
(6) 한국인에 대한 근대적 기계공학 교육. 공작기계, 석유제품, 기계류, 자동차와 그 밖의 수송수단, 철도차량과 설비, 의약품, 서적, 전화와 라디오, 그리고 모든 종류의 근대기구를 미국으로부터 수입.84)
이승만은 이처럼 1944년의 시점에서 전후 한국의 경제부흥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구상하고 있었다. 올리버는 이승만의 이러한 구상을 소개한 다음 한국인들이 자유경제체제 아래에서 자신들이 만든 법에 의한 통치를 받고 기만적인 식민정책의 착취의 촉수로부터 해방된다면, 종전 뒤에 그들의 능력과 자원에 상응하는 번영을 누릴 것이라고 설명했다.85) 그러나 그는 한국이 근대적인 경제사회체제로 전환하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그는 한국이 식민지 지배로 말미암아 극복하기 어려운 도덕적, 직업적, 지적 피해를 입었다고 말하고, 그러므로 외국의 이해관계자들에 의한 자본투자 및 기업경영의 지원과 함께 모든 망명지도자들의 지도력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올리버는 또 한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제기될 수 있는 문제로 상당한 자본 및 외국 전문가의 필요성과 함께 한국의 농업문제의 심각성도 지적했다.86)
이러한 올리버의 소론에 대해 야로보이는 히틀러의 폭정에서 해방된 동유럽 나라들의 농업문제 해결의 보기를 들어 반박했다. 연합국의 적절한 정책을 동반하는 공권력에 의하여 농민에 대한 토지분배가 이루어질 때에, 농촌주민의 이농 없이 농업을 빨리 발전시키는 데 필수적인 여건이 조성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야로보이는 결론적으로 “한국은 지리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대륙에 연결되어 있다”고 강조하고, 자신들의 풍부한 자원과 “연합국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대륙에 있는 강력한 이웃 나라들”의 지원을 통하여 대륙국가로서만 번영할 수 있다고 단언했다.87) 야로보이의 이 서평은 이승만 개인에 대한 소련의 경계심뿐만 아니라 한국의 장래에 대한 소련의 의도를 시사하는 것이어서 꼼꼼히 톺아볼 가치가 있다. 그것은 소련은 단지 신탁통치 4개국의 일원의 위치를 받아들이려고 생각하고 있지 않음을 말해 주는 것이었다.88)
이승만의 동향에 대한 소련정부 당국자들의 관심과 비판은 특별했다. 8월 23일에 외무인민위원부 제2극동국장 주코프(D. A. Zhukov)가 외무인민위원부 부위원장 비신스키(Andrei Vyshinsky)와 소비에트 정보국장 로조프스키(S. A. Lozovsky)에게 제출한 “조선인 정치가 이승만의 특징”이라는 보고서는 “조선인 정치망명가들 가운데에서 이승만은 가장 반동적인 인물이다. 그는 최근에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에 걸쳐서 미국에 반소비에트적인 성명들을 제출했다”라고 비판했다. 이 보고서는 이승만이 스탈린에게 보낸 축전과 관련하여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승만에 대한 이러한 평가는 여러 자료에서 눈에 뜨인다.89)
分割占領 포기를 트루먼에게 권고하도록 蔣介石에게 打電
이승만은 8월 18일에 조소앙이 김구와 공동명의로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를 백악관으로 보내고, 8월 20일에는 번즈 국무장관에게 면담을 희망하는 편지를 썼다.
“한국의 상황에 대하여 장관과 논의할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해 주실 것을 정중하게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또한 새롭게 자유를 되찾은 데 대한 한국인들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깊은 감사를 이 기회를 통해서 장관께 거듭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저는 우리 정부의 지시에 따라 이미 이러한 감사의 인사를 대통령에게 보냈습니다.”90)
그러나 한국문제에 대한 미국의 기존 정책이 변경되지 않는 한 국무장관의 회답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한국을 둘러싼 국제정세는 날로 심각해지고 있었다. 이승만은 한반도가 미국과 소련에 의하여 분할점령된다는 말을 듣고 여간 걱정스럽지 않았다. 그는 8월 21일에 트루먼과 장개석에게 급히 전보를 쳤다. 장개석에게 친 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독립을 위장하여 한국을 괴뢰로 이용하려는 계획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각하께서 트루먼 대통령에게 이 계획을 채택할 필요가 없다고 권고해 주십시오. 한국에 완전한 독립을 부여하지 않는 어떤 계획도 모두 한국국민은 받아들이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각하에게 삼가 보장합니다. 단결되고 민주적인 독립 한국은 장차 귀국의 충실한 맹방이 될 것입니다.”91)
장개석은 8월 24일에 “민족주의의 완성으로 국제평화를 유지하자”라는 연설을 통하여 “(중국의) 일본에 대한 항전은 중국 자체의 자유와 평등을 위한 투쟁일 뿐만 아니라, 또한 한국의 해방과 독립을 위한 분투였다. 오늘 이후 우리는 더욱 똑같은 종지(宗旨) 아래 모든 관계된 맹방과 공동으로 민족독립과 평등의 원칙을 존중하며 그들이 마땅히 획득해야 할 지위를 영원히 보장한다”라고 선언했다.92)
백악관으로부터는 아무런 회답이 없었다. 그러자 이승만은 8월 28일에 다시 트루먼에게 전보를 쳤다. 그리고 9월 7일에야 국무부의 밸런타인(Joseph W. Ballantine) 극동국장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극히 의례적인 짤막한 편지를 받았다.
“이승만 박사에게. 백악관의 지시로 귀하께서 대일전 승리와 한국문제의 여러 측면에 관하여 보내신 8월 15일, 21일, 28일의 전보와 8월 8일, 18일에 보내신 편지가 접수되었음을 확인해 드립니다. 국무차관을 대신하여 극동국장 밸런타인 올림.”93)
“李博士는 韓民族이 펼친 鬪爭의 상징”
이승만의 귀국을 위하여 미국인 친구들도 지원에 나섰다. 한미협회(Korean American Council)의 더글러스(Paul F. Douglas) 워싱턴대학교(University of Washington) 총장, 스태거즈(John Staggers) 변호사, 언론인 윌리엄스(Jay J. Williams) 세 사람은 8월 22일에 연명으로 트루먼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어 이승만의 귀국을 청원했다. 이들은 편지에서 미국정부가 이승만이 즉시 귀국하는 데 필요한 모든 도움을 제공하기 바란다고 말하고, 이승만과 한국인의 열망에 대한 더 이상의 냉대를 그만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편지는 또한 지난 27년간 한국인들이 유일한 정부로 인정해 온 중경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는다면 혼란과 유혈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고 경고하고, 다음과 같은 일화를 소개했다.
“이러한 모든 상황은 이 박사가 한국에 들어감으로써 회피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한민족이 펼친 기나긴 투쟁의 살아 있는 상징입니다. 우리는 국무부에 제출할 증거들을 수집하면서 전세가 호전된 뒤에 한국에서 귀환한 다수의 선교사들과 한 남자를 만났습니다. 그들은 이 박사가 한국인들의 가슴 속 가장 앞자리에 자리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심지어 일단의 선교사들이 송환을 기다리던 수용소에서 사슬에 묶여 수감된 여러명의 한국인 ‘죄수’들로부터 ‘이 박사가 아직도 우리를 위하여 미국에서 활동하고 계십니까?’ 하는 질문을 받았다고 합니다. 선교사들이 그렇다고 하자 그들의 얼굴에 행복감이 떠올랐다고 합니다.”94)
맥아더將軍에게 歸國청원
이승만은 8월 28일에 마닐라에 있는 맥아더 장군에게 전보를 쳤다. 이 전보는 맥아더의 「일반명령 제1호」의 포고를 보고 보낸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빨리 귀국하여 미군과 협조할 수 있도록 맥아더가 트루먼에게 영향력을 행사해 주기를 넌지시 부탁했다.
“한국에 있는 일본인들은 미군사령관에게 항복해야 한다는 장군의 명령은 우리에게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민족의 마음을 장군에게 말씀드릴 수 있게 된 데 대하여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우리는 공동점령 또는 신탁통치에 반대합니다. 만약 점령이 필요하다면, 미국인들이 흘린 피와 그들이 들인 비용의 대가로 미군만의 단독 점령을 우리는 환영합니다. 대일전쟁은 민주주의를 위하여 세계를 안전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왜 우리가 러시아로 하여금 한국에 들어와 공산주의를 건설하고 한국에서 유혈내전의 씨앗을 뿌리도록 허락해야 합니까? 우리의 유일한 희망은 극동의 평화를 위하여 트루먼 대통령과 장군께서 단일한 민주주의 독립 한국을 주장해 주시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트루먼 대통령에게 본인을 한국에 들여보내어 그곳에서 미군을 지원하고 협력하도록 해 주시기를 요망합니다.”95)
같은 날 OSS의 부책임자 굿펠로(Preston M. Goodfellow) 대령은 국무부 극동국장 밸런타인을 방문했다. 이승만은 김구로부터 중경으로 와서 한국에 관한 장래계획을 논의했으면 좋겠다는 통지를 받았다면서 중경행에 대한 주선을 굿펠로에게 부탁한 것이었다. 굿펠로는 밸런타인에게 정부가 이승만의 중경행을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면 이승만이 정식으로 중경행을 요청할 수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포기할 것이라고 말했다. 굿펠로는 정부가 정보를 얻기 위해 몇몇 관리들을 이승만과 동행시켜서 이승만 및 김구와 접촉을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할지 모른다고 말했다. 굿펠로는 이승만의 중경행이 미국에 도움이 되는 이유는 이승만이 “다른 한국 지도자들보다 더 미국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96)
때를 같이하여 이승만은 야심적인 행사를 준비했다. 그것은 한국에 협조적인 인사들을 초청하여 “한국해방의 밤(Korea’s Liberation Night)” 만찬연설회를 개최하는 일이었다. 한국 해방의 밤 만찬연설회는 8월 30일 저녁에 열렸다. 만찬연설회에는 130명가량의 사람들이 모였고, 한국해방을 축하하는 연설이 이어졌다. 특히 필리핀의 외교관이자 언론인이기도 한 로물로(Carlos P. Romulo) 장군과 뉴욕에서 온 가톨릭 해외 선교부(Catholic Foreign Mission)의 월시(Walsh) 대주교의 연설은 ABC방송을 통하여 전국에 방송되었다.97) 이 만찬연설회는 워싱턴 지식인 사회에서의 이승만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마지막 행사였다.⊙
1) 레베데프證言, 중앙일보 특별취재반, 『示必錄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中央日報社, 1992, p. 64. 2) Erik van Ree, Socialism in One Zone ─ Stalin’s Policy in Korea 1945-1947, Berg, 1989, p. 66. 3) 森田芳夫, 『朝鮮終戰の記錄』, 巖南堂書店, 1967, p. 166; 김기조, 『한반도 38선 분할의 역사 ─ 일제 15년전쟁 정전략과 미-소 외교 전략 비사 (1931~1945)』, 한국학술정보, 2006, p. 319.
4) 森田芳夫, 앞의 책, pp. 168~172. 5) Erik van Ree, op. cit., p. 91. 6) 森田芳夫, 앞의 책, p. 182.
7) 古下先生傳記編纂委員會 編, 『古下宋鎭禹先生傳』, 東亞日報社, 1965, p. 303; 呂運弘, 『夢陽 呂運亨』, 靑廈閣, 1967, p. 145; 김병기, 「손주에게 들려주는 光復이야기」, 『朝鮮日報』, 2005년 8월 24일자. 8) 이승현, 「해방직후 북한우익의 노선과 활동」, 『國史館論叢』, 54輯, 國史編纂委員會, 1994, p. 182. 9) 森田芳夫, 앞의 책, p. 182. 10) I. M. 치스차코프, 「第25軍의 戰鬪行路」, 蘇聯과학아카데미 編, 『朝鮮의 解放』, 國土統一院, 1988, pp. 63~65; Erik van Ree, op. cit., p. 91. 11) 레베데프證言, 『示必錄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p. 59, p. 91. 12) 金昌順, 『北韓十五年史』, 知文閣, 1961, p. 44. 13) 森田芳夫, 앞의 책, p. 183. 14) 레베데프 證言, 『示必錄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p. 59. 15) 曹圭河-李庚文-姜聲才, 『南北의 對話』, 고려원, 1987, pp. 153~155. 16) 吳泳鎭, 『하나의 證言 ─ 作家의 手記』, 中央文化社, 1952, pp. 112~124. 17) I. M. 치스차코프, 「第25軍의 戰鬪行路」, 『朝鮮의 解放』, p. 66; Erik van Ree, op. cit., pp. 91~92. 18) 森田芳夫, 앞의 책, pp. 184~185. 19) 李允榮, 『白史李允榮回顧錄』, 史草, 1984, pp. 105~106. 20) 森田芳夫, 앞의 책, pp. 185~186.
21) 曹圭河-李庚文-姜聲才, 앞의 책, pp. 60~61; 김광운, 『북한 정치사 연구 Ⅰ ─ 건당, 건국, 건군의 역사』, 선인, 2003, p. 54. 22) 森田芳夫, 앞의 책, p. 184. 23) 위의 책, pp. 178~179; 森田芳夫-長田かな子 編, 『朝鮮終戰の記錄 資料篇(ㅡ)』, 巖南堂書店, 1979, pp. 299~300. 24) 森田芳夫, 앞의 책, pp. 180~181. 25) 咸錫憲, 「내가 맞은 8·15」, 『씨알의 소리』, 25호, 씨알의소리사, 1973. 8, p. 46. 26) 森田芳夫, 앞의 책, pp. 188~190. 27) 위의 책, p. 163. 28) I. M. 치스차코프, 「第25軍의 戰鬪行路」, 『朝鮮의 解放』, p. 67; Erik van Ree, op. cit., p. 92. 29) Erik van Ree, op. cit., p. 92; 『示必錄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pp. 178~180. 30) 레베데프證言, 『示必錄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pp. 91~92. 31) Erik van Ree, op. cit., pp. 92~93; I. M. 치스차코프, 「第25軍의 戰鬪行路」, 『朝鮮의 解放』, p. 69; 『示必錄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pp. 92~93. 32) 김학준, 『북한의 역사 (제1권) 강대국권력정치 아래서의 한반도분할과 소련의 북한군정개시 1863년~1946년 1월』,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8, p. 703 주 87).
33) 『朝鮮中央年鑑 1949年版』, 朝鮮中央通信社, 1949, pp. 57~58. 34) 和田春樹, 「ソ連の朝鮮政策 ─ 1945年8~10月 ─」, 『社會科學硏究』, 第3卷4號, 東京大學社會科學硏究所, 1991, p. 115. 35) 위의 글, pp. 115~116; N. G. 레베데프, 「遂行해야 할 義務를 自覺하며」, 『朝鮮의 解放』, p. 104~105. 36) 和田春樹, 앞의 글, pp. 116~117. 37) 「경성으로 파견된 사절단의 예비보고 ─ 버드가 헤프너에게 (1945. 8.23)」,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13) 한국광복군 Ⅳ』, 국사편찬위원회, 2006, p. 206.
38) 「한반도 특수임무에 관한 보고―앨버트 에반스가 전략첩보국 동북지휘부 지휘관에게 (1945. 9.3)」, 위의 책, p. 222. 39) Maochun Yu, OSS in China ─ Prelude to Cold War, Yale University Press, 1996, p. 233; 韓詩俊, 『韓國光復軍硏究』, 一潮閣, 1993, p. 301. 40) 張俊河, 『돌베게』, 禾多出版社, 1982, pp. 373~374. 41) 「한반도 특수임무에 관한 보고―앨버트 에반스가 전략첩보국 동북지휘부 지휘관에게 (1945. 9.3)」,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13) 한국광복군 Ⅳ』, p. 222. 42) 「경성으로 파견된 사절단의 예비보고 ─ 버드가 헤프너에게 (1945. 8.23)」, 「한반도 특수임무에 관한 보고―앨버트 에반스가 전략첩보국 동북지휘부 지휘관에게 (1945. 9.3)」, 위의 책, p. 206, p. 222. 43) 張俊河, 앞의 책, pp. 375~376; 「경성으로 파견된 사절단의 예비보고 ─ 버드가 헤프너에게 (1945. 8.23)」,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13) 한국광복군 Ⅳ』, p. 207. 44) 「경성으로 파견된 사절단의 예비보고 ─ 버드가 헤프너에게 (1945. 8.23)」,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13) 한국광복군 Ⅳ』, p. 207. 45) 張俊河, 앞의 책, p. 382. 46) 「경성으로 파견된 사절단의 예비보고 ─ 버드가 헤프너에게 (1945. 8.23)」; 「한반도 특수임무에 관한 보고―앨버트 에반스가 전략첩보국 동북지휘부 지휘관에게 (1945. 9.3)」,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13) 한국광복군 Ⅳ』, pp. 209~210, p. 222; 金俊燁, 『長征(2)―나의 光復軍時節』, 나남, 1993, pp. 548~549. 47) 「한반도 특수임무에 관한 보고―앨버트 에반스가 전략첩보국 동북지휘부 지휘관에게 (1945. 9.3)」,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13) 한국광복군 Ⅳ』, p. 223; 張俊河, 앞의 책, p. 383; 金俊燁, 위의 책, p. 549. 48) 「한반도 특수임무에 관한 보고―앨버트 에반스가 전략첩보국 동북지휘부 지휘관에게 (1945. 9.3)」,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13) 한국광복군 Ⅳ』, p. 223; Maochun Yu, op. cit., p. 234. 49) Maochun Yu, op. cit., p. 234; 「한반도 특수임무에 관한 보고―앨버트 에반스가 전략첩보국 동북지휘부 지휘관에게 (1945. 9.3)」,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13) 한국광복군 Ⅳ』, pp. 224~227.
50) Maochun Yu, op. cit., pp. 234~235; 金俊燁, 앞의 책, p. 556. 51) 「독수리작전의 종료와 관련한 전문―INDIV가 플레쳐, 웸플러, 크라우제에게 (1945. 8.29)」,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13) 한국광복군 Ⅳ』, p. 215; Maochun Yu, op. cit., p. 235. 52) 趙擎韓, 『白岡回顧錄: 國外篇』, 韓國宗敎協議會, 1979, p. 366. 53) 「臨時議政院會議 제39회」(1945. 8),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4) 임시의정원 Ⅲ』, 국사편찬위원회, 2005, p. 152. 54) Hurley to Byrnes, Aug. 14, 1945,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이하 FRUS) 1945, vol.Ⅵ, Unite States Government Printing Office, 1969, p. 1036. 55) Kim, Tjo to Rhee, Aug. 17, 1945, FRUS 1945, vol.Ⅵ, pp. 1036~1037. 56) 石潭華 編著, 『韓國獨立運動與中國』, 上海人民出版社, 1995, pp. 557~558. 57) 秋憲樹 編, 『資料 韓國獨立運動 (2)』, 延世大學校出版部, 1972, p. 240. 58) 「臨時議政院會議 제39회」 (1945. 8),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4) 임시의정원 Ⅲ』, p. 153. 59) 「臨時議政院會議 제39회」 (1945. 8), 위의 책, p. 146. 60) 「臨時議政院會議 제39회」 (1945. 8), 같은 책, pp. 145~149.
61) 「臨時議政院會議 제39회」 (1945. 8), 같은 책, p. 150. 62) 南坡朴贊翊傳記刊行委員會, 『南坡朴贊翊傳記』, 乙酉文化社, 1989, pp. 286~287. 63) 「吳鐵城과 金九의 담화기록」(1945. 8.22),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22) 대중국외교활동』, 국사편찬위원회, 2008, pp. 260~261. 64) 「臨時議政院會議 제39회」(1945. 8),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4) 임시의정원 Ⅲ』, p. 149. 65) 「臨時議政院會議 제39회」(1945. 8), 위의 책, p. 150.
66) 「臨時議政院會議 제39회」(1945. 8), 같은 책, p. 150; 도진순 주해, 『백범일지』, 돌베게, 1997, p. 400. 67) 「臨時議政院會議 제39회」(1945. 8),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4) 임시의정원 Ⅲ』, p. 147. 68) 「臨時議政院會議 제39회」(1945. 8), 위의 책, p. 152. 69) 「임시정부의 희망사항을 담아 중국당국에 보내는 비망록」(1945. 8.24),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22) 대중국외교활동』, pp. 261~262. 70) 「法幣 5천만원 지원을 청하는 공함」(1945. 8.26), 위의 책, p. 263. 71) 秋憲樹 編, 앞의 책, p. 241. 72) 「재중경한독당 제5차 임시대표대회, 선언-당강-당책 발표」, 白凡金九先生全集編纂委員會 編, 『白凡金九全集 (8)』, 대한매일신보사, 1999, pp. 29~32. 73) 「韓國獨立黨員名簿」, 『白凡金九全集 (6)』, pp. 265~266. 74) 秋憲樹 編, 앞의 책, pp. 191~194; 盧景彩, 『韓國獨立黨硏究』, 신서원, 1996, pp. 288~299. 75) 趙擎韓, 앞의 책, p. 366.
76) Hurley to Byrnes, Aug. 31, 1945, FRUS 1945 vol.Ⅵ, p. 1042. 77) 한표욱, 『이승만과 한미외교』, 중앙일보사, 1996, pp. 37~38. 78) 「주미외교위원부통신」 제115호 (1945. 8.16),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19) 주미외교위원부 Ⅰ』, 국사편찬위원회, 2007, p. 510. 79) 위의 책, p. 511.
80) 和田春樹, 앞의 글, pp. 105~106; Erik Van Ree, op. cit., pp. 71~73. 81) Congressional Record, The House of Representatives, Feb. 7. 1944. “The Korean Movement”, Extension of Remarks of Hon. J. Harry McGregor. 82) Robert T. Oliver, Korea ─ Forgotten Nation, Public Affairs Press, 1944, pp. 7-8; Robert T. Oliver, Syngman Rhee and American Involvement in Korea, 1942~1960 ─ A Personal Narrative, Panmun Book Company LTD, 1978, p. 17; Robert T. Oliver, “The Way It Was ─ All The Way“ A Documentary Accounting (unpublished), p. 25. 83) 和田春樹, 앞의 글, pp. 105~106; Erik van Ree, op. cit., p. 71. 84) Robert T. Oliver, Korea ─ Forgotten Nation, p. 86. 85) Ibid. 86) op. cit., p. 108. 87) Erik van Ree, op. cit., p. 72.
88)Ibid., pp. 72~73. 89) 김성보, 『남북한 경제구조의 기원과 전개』, 역사비평사, 2000, pp. 118~119. 90) 미국무부문서 895.01/8-2045, Syngman Rhee to Byrnes, Aug. 20, 1945, Internal Affairs of Korea 1945~1949, p. 420. 91) 石潭華 編著, 앞의 책, p. 559. 92)胡春惠 著, 辛勝夏 譯, 『中國안의 韓國獨立運動』, 檀國大學敎出版部, 1978, p. 288. 93) 미국무부문서 895.01/8-1845, Ballantine to Syngman Rhee, Sept. 7, 1945, Internal Affairs of Korea 1945~1949, p. 419. 94) 미국무부문서 895.01/8-2245, Korean American Council to Truman, Aug. 22, 1945, Internal Affairs of Korea 1945~1949, p. 429.
95) Syngman Rhee to MacArthur, Aug. 28, 1945, 國史編纂委員會 編, 『大韓民國史資料集(28) 李承晩關係書翰資料集 1(1944~1948)』, 國史編纂委員會, 1996, pp. 35~38. 96) 미국무부문서 895.01/8-1545, Ballantine, “Trip to Chungking by Dr. Syngman Rhee,” Aug. 28, 1945, Internal Affairs of Korea 1945~1949, p. 404. 97) Syngman Rhee to Oliver, Sept. 5, 1945, 『大韓民國史資料集(28) 李承晩關係書翰資料集 1(1944~1948)』, p. 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