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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世一의 비교 評傳 (73)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 李承晩과 金九

建國準備委員會 3週日
-1945年 8月(中)-

손세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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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국정부가 항복의사를 연합국에 통보한 사실을 안 조선총독부는 한국지도자들에게 치안유지에 협조해 줄 것을 부탁했다. 宋鎭禹에게 먼저 교섭했으나, 송진우는 거부했다. 呂運亨은 8월 15일 아침 일찍 요청을 수락하고 安在鴻 등과 함께 建國準備委員會(建準)를 조직했다. 建準은 급속히 지방으로 확산되어 8월말까지 전국에 145개 지부가 조직되었다. 建準에는 공산주의자들이 대거 참여했는데, 이들은 한반도 전체를 蘇聯軍이 점령할 것으로 생각했다.
 
  解放과 동시에 서울과 일부 지방에 李承晩을 대통령, 金九를 국무총리로 하는 ‘東震共和國’이 수립된다는 벽보가 나붙었다. 이 소문은 滿洲의 延邊에까지 급속히 전해졌다. 8월 16일에는 서울과 釜山, 大邱, 大田에 소련군이 도착한다는 소문이 퍼져 많은 국민들이 역으로 몰려나가는 소동이 벌어졌다. 그러나 그것은 日本人들의 공작에 따른 헛소문이었다.
 
  일부 右派民族主義者들은 建準을 左右翼이 함께 참여하는 全國有志團體로 확대 개편할 것을 요구했으나, 장안파공산당과 재건파공산당의 주도권다툼 때문에 실현되지 않았다.
 
  韓半島를 美軍과 蘇聯軍이 38도선을 경계로 남북으로 분할 점령한다는 뉴스가 전해진 것은 8월 24일에 이르러서였다. 呂運亨과 安在鴻은 8월 31일에 建準의 위원장과 부위원장직을 사퇴했다. 안재홍은 9월 1일에 조직된 朝鮮國民黨의 당수로 추대되었다.
 

  1. “소련군이 서울에 온다”
 
  조선총독부 경무국은 8월 10일 오전에 본국정부가 국체호지〔國體護持: 천황제 유지〕의 조건으로 포츠담선언 수락 의사를 연합국에 통보한 사실을 단파방송을 듣고 알았다.1) 이미 청진(淸津)에 상륙한 소련군은 기차로 20시간이면 서울에 도착할 수 있었다. 소련군은 당장 수감 중인 정치범들을 석방하고 공산주의 정권을 수립할 것이고, 그 과정에서 약탈과 폭행은 필연적일 것으로 예상되었다. 이때에 전국 각지의 형무소에는 3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수감되어 있었다.2) 그리고 한국에 있는 일본인은 77만명(남한에 27만명, 북한에 50만명)가량 되었다.3)
 
 
  朴錫胤, 生田 등이 宋鎭禹에게 治安維持 교섭
 
   조선총독부의 치안책임자인 니시히로 다다오(西廣忠雄) 경무국장은 종전 대책으로 일본정부의 항복 결정과 동시에 정치범과 경제범을 석방하는 한편 한국인의 손으로 치안유지를 하게 할 것을 생각하고, 그 적임자로 여운형(呂運亨), 송진우(宋鎭禹), 안재홍(安在鴻) 세 사람을 염두에 두었다고 한다.4) 위의 세 지도자 가운데에서 8월 15일 이전에 조선총독부가 먼저 교섭을 시도한 사람은 동아일보사, 보성전문학교, 경성방직회사(京城紡織會社) 그룹을 배경으로 한 우파 민족주의 세력의 중심인물인 송진우였다. 송진우는 서울 원서동(苑西洞) 자택에서 병을 핑계로 외부와의 접촉을 끊고 있었다.
 
  본국정부가 연합국에 포츠담선언 수락 의사를 통보한 사실을 안 조선총독부는 바로 그날부터 송진우와의 교섭을 시도했다. 정무총감 엔도 류사쿠(遠藤柳作)는 총독부의 조사과장 최하영(崔夏永)의 추천에 따라 일본의 괴뢰국가 ‘만주국(滿洲國)’의 폴란드 주재 총영사를 지낸 박석윤(朴錫胤)에게 그 공작을 맡겼다.5) 박석윤의 연락을 받은 송진우는 그를 따라 어떤 일본 요릿집으로 갔다. 거기에는 총독부 보안과장 이소자키(磯崎)와 차석 사무관 하라다(原田), 조선군 사령부 참모 간자키(神崎) 등이 와 있었다. 그들은 송진우에게 형세가 급박하다고 말하면서, 행정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라고 권했다. 독립준비까지 해도 좋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송진우는 칭병(稱病)하며 거절했다.6) 송진우가 거절하자 박석윤은 여운형과 만났던 것 같다. 최하영은 “그 후 박석윤은 여몽양(呂夢陽: 呂運亨)을 설득하여 건준이 조선의 치안권을 이양받게끔 하였던 것이다”라고 술회했다.7) (崔夏永은 엔도가 자기를 부른 것이 8월 11일이었다고 했고 宋鎭禹도 朴錫胤으로부터 전화를 받은 것이 “8월 12일 날인가”였다고 했으나, 뒤에서 보듯이 薛義植의 8월 11일 기술이 정확하므로 송진우와 박석윤 등이 만난 것은 8월 10일이었을 것이다.)
 
  송진우는 이어 이튿날인 8월 11일 오전에 경기도지사 이쿠다 세이사부로(生田淸三郞)를 만났다. 이쿠다는 70노인이었다. 이쿠다를 만난 시각 송진우는 일본정부가 포츠담선언을 조건부로 수락하겠다는 의사를 연합국에 통보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1936년의 손기정 선수 일장기말소사건(日章旗抹消事件) 때에 사장 송진우와 함께 〈동아일보(東亞日報)〉 편집국장직을 물러난 설의식(薛義植)이 그날 아침 7시쯤에 알려준 것이었다. 이 무렵 설의식은 광산사업에 종사하면서 은밀히 단파방송을 청취하고 있었는데, 10일 밤에 단파방송을 통하여 일본이 포츠담선언 수락을 연합국에 통보했다는 뉴스를 듣고 이튿날 아침 7시에 송진우에게 알렸다.8)
 
  경기도 경찰부장 오카 히사오(岡久雄)가 배석한 자리에서 이쿠다는 송진우에게 “조선에서 일본세력이 후퇴하니까 국내치안을 맡아달라”고 말했다. 한―일 양 민족의 충돌을 막고 일본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일에 협력해 달라는 것이었다. 승낙만 한다면 현재 총독이 가진 권력의 4분의 3을 넘겨주겠다고 했다. 신문, 방송, 교통기관, 헌병, 경찰, 검사국 등을 넘겨주겠다는 것이었다. 오카는 안절부절못해 하면서 당장 정무총감한테 가서 결말을 짓자고 재촉했다.9) 이쿠다의 이러한 제의에 대해 송진우는 “일본이 후퇴했으면 했지 우리 조선사람이 일본으로부터 어떤 지시나 부탁을 받을 성질이 아니겠고, 그것은 오직 우리 자신이 처리할 것이라는 이념이 앞서고, 또 일인의 고등탐정적 소이가 아닌가라고도 의심했기에 자기는 신병으로 감당할 수 없다고 두 번이나 거절하고는 누구에게도 함구무언 하였다”라고 8월 15일 오후에 자기 집에 모인 사람들에게 설명했다고 한다.10)
 
  송진우와 가까운 변호사였던 이인(李仁)은 송진우의 이러한 말을 듣고 “고하(古下: 宋鎭禹)의 그 의연한 태도에는 감동했으나 고하 역시 정세판단이 서툴고 또 그와 같은 중대사를 어찌해서 동지와 상의 한마디 아니하고 독단 거절했느냐고 논란이 있었다”라고 회고했다.11)
 
 
  “李承晩 박사가 美國군함이라도 타고 仁川港에나 들어올 줄 아시오?”
 
朝鮮總督府의 치안유지 협조요청을 거부한 宋鎭禹.
  송진우는 조선총독부로부터 치안유지권이나 행정권을 이양받는 것은 중국의 왕자오밍(汪兆銘: 본명 汪精衛)이나 프랑스의 페탱(Henrie P. Petain)과 같은 ‘괴뢰’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주장은 일본의 통치가 완전히 철폐될 때까지는 그대로 있어야 하고, 연합국이 조선총독부로부터 정권을 넘겨받은 뒤에 충칭에 있는 임시정부가 연합국으로부터 그것을 인도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제국주의 일본의 붕괴가 가까워 올 무렵의 세계정세와 한국의 장래문제에 대해 송진우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가는 1944년 7월에 안재홍에게 했다는 다음과 같은 말에 잘 드러나 있다. 사이판도에서 일본군이 전멸했다는 뉴스가 전해지던 무렵이었다. 평택(平澤)의 진위(振威)에 소개해 있던 안재홍이 송진우를 찾아가서 일본의 패전 뒤에 예상되는 상황에 대비하여 국내의 양심적인 세력이 주류역량을 결성하여 무슨 운동을 벌여야 하지 않느냐고 하자 송진우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 미국은 전 세계를 영도하고 있소. 소련은 미국의 요청에 응하여 이미 코민테른(국제공산당)도 해체했소. 소련의 세계혁명운동은 폐기되었소. 또 소련은 전후 국가재건의 필요에서 미국에 잘 협력할 것이므로 국제적 난관은 없을 것이오.”
 
  이러한 인식에서 송진우는 이미 북한에 소련군이 진주한 8·15의 시점에서도 곧 미군이 서울에 진주하여 연합군의 주도권을 행사할 것으로 전망했던 것이다.
 
  송진우는 충칭임시정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충칭임시정부는 이미 연합열국의 정식 승인을 얻었고, 그 휘하에 10만의 독립군을 거느리고 있으며, 미국으로부터 10억 달러의 차관교섭이 성립되어 1억 달러의 전도금을 받고 있소. 임시정부가 국내에 들어와서 친일거괴(親日巨魁) 몇 무리만 처단하고 행호시령(行號施令: 명령을 내림)하면 … 만사는 큰 문제 없이 해결될 것이오.”12)
 
  송진우의 충칭임시정부 절대지지론은 임시정부에 대한 이러한 과대평가에 입각한 것이었다.
 
  송진우 쪽에서는 이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안재홍이 송진우에게 한국청년들이 군인으로 나가서 피를 흘렸으니 그 피값을 받아야 하지 않느냐면서 민족유신회(民族惟新會) 같은 것을 만들자고 제의했다. 그러자 송진우는 다음과 같은 말로 거절했다.
 
  “민세(民世: 安在鴻), 그 무슨 소리요. 긴박한 이 시점에서 오직 침묵밖에는 … 만일 우리가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일본의 손아귀 속에 끌려들어 갈 뿐이오.”
 
  “고하는 참 로맨틱도 하시오. 침묵만 지키고 앉아 있으면 이승만 박사가 미국 군함이라도 타고 인천항구에나 들어올 줄 아시오?”
 
  안재홍의 이 말에 송진우는 노기 띤 음성으로 말했다.
 
  “피는 딴 사람이 흘리고, 그 값은 당신이 받는단 말이오?”
 
  이날 이후로 송진우는 아예 약병을 머리맡에 두고 이불을 펴고 드러누워서 두문불출했다는 것이다.13)
 
 
  8월 15일 아침에 政務總監이 呂運亨 초청
 
  8월 14일 밤 11시쯤에 〈도메이(同盟)통신〉 서울 지국에 포츠담선언을 수락하는 일본천황의 육성방송 원고가 도쿄로부터 전화로 통보되고, 그것은 즉시 총독부 경무국과 조선군 참모부에 전달되었다. 경무국장 니시히로의 보고를 받은 정무총감 엔도는 바로 경성보호관찰소장 나가사키 유조(長崎祐三)에게 전화를 걸어 이튿날 오전 6시에 여운형과 같이 정무총감 관저로 오도록 지시했다. 나가사키에게 이러한 지시를 한 것은 여운형이 사상범 전과자로서 보호관찰의 대상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14)
 
  나가사키의 연락에 앞서 여운형은 조선군 참모본부로부터도 이튿날 일본 천황의 포츠담선언 수락방송이 있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고 한다. 여운형은 새로 이발을 하고, 자정이 지나서 이웃에 사는 홍증식(洪植), 동생 여운홍(呂運弘), YMCA 체육부 간사이며 유도사범인 장권(張權), 운니동(雲泥洞)의 송규환(宋圭桓) 등을 불러 협의했다. 동아일보사와 조선일보사의 영업국장을 지낸 공산당의 지략가 흥증식에게는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每日新報)>를 접수하게 하고 여운홍에게는 경성방송국을 접수하여 한국어뿐만 아니라 영어로 광복을 세계에 알리도록 했다. 장권에게는 이미 해방되었을 때의 치안문제에 대한 준비를 하도록 지시해 놓고 있었다.15)
 
  여운형은 경성지방법원의 백윤화(白允和) 검사를 통역으로 대동하고, 8월 15일 오전 6시 반쯤에 나가사키와 함께 필동의 정무총감 관저〔지금의 코리아 하우스〕에 도착했다. 그런데 이날 여운형과 엔도의 회담내용에 대해서는 기록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다. 엔도, 니시히로, 나가사키 등의 회고담을 토대로 하여 적은 모리타(森田芳夫)의 서술은 다음과 같다.
 
  여운형과 대좌한 엔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늘 12시에 포츠담선언 수락 조칙이 발표된다. 적어도 17일 오후 2시쯤까지는 소련군이 서울에 들어올 것이다. 소련군은 먼저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할 것이다. 그리고 형무소에 있는 정치범을 석방할 것이다. 그때에 조선민중은 부화뇌동하여 폭동을 일으키고 두 민족이 충돌할 위험이 있다. 이러한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하여 미리 형무소의 사상범과 정치범을 석방하려고 한다. 연합군이 들어올 때까지 치안유지는 총독부가 맡겠지만 측면에서 협력해 주기 바란다.”
 
  여운형은 “기대에 부응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대답했다. 이때에 니시히로가 들어와서 합석했다. 니시히로는 사상범이나 정치범, 그리고 특히 청년학생들이 경거망동하지 않도록 미리 설득해 줄 것을 부탁했다.
 
  엔도는 “안재홍씨에게도 같이 치안유지에 협력하도록 전해 달라”고 말하고는 자리를 떴고, 니시히로와 여운형 사이에 구체적인 대화가 계속되었다. 니시히로는 여운형에게 “치안유지에 필요하다면 조선인 경찰관을 당신 휘하로 이관해도 좋다”고 말했다. 여운형은 식량사정에 대하여 질문했고, 니시히로는 10월까지는 걱정 없다고 대답했다.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경찰서와 헌병대에 구금되어 있는 사람들을 석방해 주기 바란다는 여운형의 요구에 니시히로는 “그것은 물론이다. 형무소에 있는 사람들까지 석방하니까”라고 대답했다. 집회의 금지를 해제해 주기 바란다는 여운형의 말에 니시히로는 집회자유의 보장을 약속했다. 또한 여운형은 “석방자들에게 성심으로 건국에 노력하도록 한마디 하겠다”고 말했다. 회담을 마치고 일어서면서 여운형은 니시히로에게 “건강을 빈다”면서 손을 내밀었다.16)
 
 
  解放 직전에 民族大會召集 제의
 
  엔도가 안재홍에게도 같이 치안유지에 협력하도록 전해달라고 말한 데에는 그럴 만한 곡절이 있었다. 1944년 7월에 송진우를 찾아가서 민족유신회 같은 것을 만들어 합법운동을 벌일 것을 제안했던 안재홍은 12월 상순부터는 총독부와 일본군 간부들을 상대로 1) 민족자주 2) 호양협력 3) 마찰방지를 원칙으로 하고 언론과 행동의 자유를 달라는 교섭을 벌였다. 그리하여 1945년 5월 하순에는 여운형과 안재홍이 함께 요정 백운장(白雲莊)에서 경무국장 니시히로를 비롯한 일본인 몇 사람과 회담을 가졌다. 니시히로가 두 사람의 주장을 수용할 태도를 보이자 안재홍은 “우리 소수의 의사만으로는 결정할 수 없는 일이므로 서울에서 민족대회를 소집하여 그 결의를 밟지 않고서는 정식으로 공작을 추진할 수 없다”고 말했다. 민족대회 문제는 그 뒤에 별다른 진전이 없다가, 8월 들어 원자폭탄 투하와 소련의 대일전 참전으로 상황이 급박해지자 조선총독부는 다시 여운형과 안재홍을 찾았다. 이때의 일을 안재홍은 “당시 많은 지우(知友)가 의구불안 중에 나에게 손을 떼고 물러나라고 하였으나, 유혈방지 한 가지만이라도 나는 일관되게 역설하였고 그것이 건국준비위원회가 출현된 주요과제의 한 항목이었다”라고 술회했다.17) 한편 1935년 이후로 활동을 중지하고 광산 브로커 일을 하고 있던 서울파 공산당의 정백(鄭栢)은 이때의 일에 대해 “표면운동으로는 여운형, 안재홍, 정백 등이 패퇴하여 가는 총독부 적진의 최후 발악인 박해와 음모를 역용하면서 … 민족대회 소집을 운행하다가 적의 저지를 받고 말았다”라고 기술했다. 그리고 8월 15일이 박두하기 5일 전부터 일본항복설이 유력하게 전파됨에 따라 “민족대회관계의 여운형, 안재홍은 8월 12일에 석방된 정백과 함께” 독립에 대한 구체적 정책수립을 준비했다는 것이다. 정백은 두 주일 전인 7월 하순에 조동호(趙東祜), 이영(李英), 최원택(崔元澤) 등과 공산당 재건 준비를 모의하다가 검거되어 있었다.18) 이러한 기술들은 이때의 민족대회 소집 논의가 건국준비위원회의 배경이 되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19)
 
  미군정의 기록들에 따르면, 여운형이 자신들의 요청을 수락하자 아베(阿部) 총독은 여운형에게 활동자금으로 2,000만 엔을 주었다. 그리고 공공집회를 열고, 신문과 라디오 및 공공시설을 이용하고, 일본비행기로 선전 전단을 살포할 수 있는 권리도 주었다는 것이다.20) 여운형이 과연 총독부의 정치자금을 받았느냐의 문제는 이내 정계의 격심한 논란거리가 되었다.
 
  조선총독부가 여운형에게 치안유지를 의뢰한 것은, 17일이면 서울에 소련군이 들어올 것이라고 한 엔도의 말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한반도 전체를 소련군이 점령할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이때까지는 조선총독부는 미군과 소련군이 한반도를 분할점령한다는 사실은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조선총독부의 통역관이었던 오다 야스마(小田安馬)는 급진적인 사상을 가진 여운형이 학생들 사이에 인기가 있었으므로 여운형의 협력을 얻으면 가장 염려되는 학생들의 과격한 시위행동을 자제시킬 수 있을 것으로 총독부 간부들은 기대했었다고 증언했다.21)
 
  소련군이 곧 서울에 진주한다는 총독부의 정세판단은 여운형의 행동에도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여운형은 엔도와의 회담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계동의 장일환(張日煥) 집에 묵고 있는 정백을 만나서 그와 함께 자기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와서는 또 건넛방에서 20분 이상이나 둘이서만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기하던 여운홍이 “방송국을 접수할까요?” 하고 묻자 여운형은 정세가 달라졌다면서 모든 계획을 변경해야 한다고 말했다. 방송도 영어로 할 필요가 없으니까 서두르지 말고 신중히 일을 추진해야 한다고 했다.22) 이때의 여운형의 행동에 대해 뒷날 여운홍은 “엔도의 이러한 말은 광복이 된 그날로부터 여러 가지 혼란의 원인으로 되었으며 그것은 특히 형님의 심경에 많은 변동을 일으키게 하였는데, 이것은 극히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라고도 적었다.23)
 
 
  治安維持만 할 것인가
  政治活動도 할 것인가

 
  여운형은 이여성(李如星), 김세용(金世鎔), 이강국(李康國), 박문규(朴文圭), 양재하(梁在廈), 이상백(李相佰) 및 자신의 사돈이며 측근인 이만규(李萬珪) 등 건국동맹(建國同盟) 그룹을 송규환의 집으로 급히 불러 모았다.24) 이들은 먼저 지금부터 착수할 활동을 엔도와 약속한 대로 치안유지에 한정할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국가건설을 위한 정치활동까지 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집중적으로 토의했다. 그 결과 두 가지 이유로 정치활동까지 하기로 결정했다. 첫째는 광복과 더불어 벌떼같이 일어날 정치열을 치안유지 활동만으로는 만족시킬 수 없을 것이고, 둘째는 치안유지뿐이라면 시민 전체의 동원 형식이기 때문에 친일분자를 배제하기 어려울 것인데, 한 번 치안유지활동에 참가한 친일분자는 나중에 반드시 정치활동에도 참가하려 들 것이므로, 그때에 이들을 배제하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25) 여운형은 앞으로 송규환의 집은 기획처가 되고 별도로 안재홍과 딴 장소를 정하여 그곳을 실행부가 되게 하겠다고 말하고, 연락 책임은 자기가 맡겠다고 했다.26)
 
  여운형은 평소에 “유사(有事)할 때에 정치운동에 내세울” 인물로 송진우, 안재홍, 조만식(曺晩植), 박헌영(朴憲永), 허헌(許憲)을 생각하고 있었다고 한다.27) 이들 가운데에서 8월 15일 현재 서울에 있는 사람은 송진우와 안재홍뿐이었다. 여운형은 송진우와의 협조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여성을 송진우에게 보내어 협력을 설득하게 했으나 송진우는 응하지 않았다. 그러자 여운형은 이날 오후에 직접 반바지에 헬멧을 쓴 차림으로 송진우의 집을 찾아갔다.
 
  이날 송진우의 집은 잔칫집처럼 인성만성했다. 여운형은 송진우에게 “우리 사이에 다소 견해차가 있다손 치더라도 건국이라는 국가적 대사를 위해서 허심탄회한 태도로 서로 협력하자”고 말했고, 그러나 송진우는“경거망동을 삼가라. 충칭임시정부를 지지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협력을 거부했다.28)
 
  마침내 두 사람은 언성이 높아지고 분위기가 거칠어졌다. 여운형이 단념하고 돌아간 뒤에 이 광경을 지켜본 신도성(愼道晟)이 송진우에게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지 않으냐고 말하자, 송진우는 “신군, 자네는 아무것도 몰라. 저 사람은 공산당 앞잡이야!” 하고 잘라 말했다.29)
 
  송진우는 자리를 피했던 동지들에게 여운형과 나눈 대화내용을 설명하면서 “몽매에도 그립던 민족성업은 거족적이라야 한다. … 그러나 몽양이나 민세도 그렇거니와 그 주위가 문제다. 그 사실을 몽양에게 언급했으나 불응한다”라고 말했다고 한다.30) 여운형에게 주변에 있는 공산주의자들을 정리하라는 말을 했으나 여운형이 듣지 않더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자리에 모인 인사들은 이대로만 있을 것이 아니라면서, 여운형이나 안재홍과 친분이 있는 이인에게 두 사람을 만나서 절충해 보라고 권유했다.31) 한편 여운형 쪽에서는 일부 청년들이 여운형이 송진우의 존재를 너무 과대시한다고 비난하기도 했다.32)
 
 
  “주의자 서클은 안됩니다”
 
  8월 15일 오전의 서울 거리는 쥐죽은 듯이 조용했다. 정오가 되어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일본천황의 육성은 잡음이 많아서 분명히 알아들을 수 없었으나 항복선언이라는 것은 쉽사리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한 시간 뒤인 오후 1시에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堈)의 차남인 이우(李?)의 장례식이 동대문 운동장에서 일본육군장으로 거행된 것은 참으로 역사의 아이러니였다. 이우는 8월 6일의 히로시마(廣島) 원폭 투하로 사망했다.
 
  여운형은 오후 4시에 석방되는 정치범들을 맞이할 참으로 몇몇 동지들과 함께 서대문 형무소로 갔다. 그러나 이날은 석방수속이 끝나지 않아서 그냥 돌아와야 했다.
 
  여운형은 8월 15일 저녁에 안재홍과 정백 및 이만규, 이여성, 이상백, 최근우(崔謹愚) 등 건국동맹 인사들과 함께 자기 집 가까이에 있는 재력가 임용상(林龍相)의 양옥집에서 건국준비위원회(建國準備委員會: 약칭 建準)를 발족시켰다.33) 건국준비위원회라는 이름은 안재홍이 지은 것이었다.34) 위원장은 여운형 자신이 맡고, 부위원장에는 안재홍이 추대되었다.
 
  8월 15일 오후에 여운형이 직접 일본 헌병대에 가서 신병을 인수해 온 그의 자금후원자 이임수(李林洙)의 행동이 퍽 인상적이다. 이임수는 강원도 춘천의 개업의였다. 그는 여운형의 심부름을 하고 저녁에 돌아온 아들 이란(李欄)을 통하여 여운형 주변에 모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는 “큰일 났다. 전부 공산주의자가 포위하고 있구나”라고 말하면서 아들을 앞세워 임용상의 집을 찾아갔다. 방이며 마루며 마당이며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으므로 그는 여운형을 그 집 화장실로 끌고 가서 따졌다.
 
  “왜 이렇게 좌익만 만납니까? 주의자 서클은 안됩니다.”
 
  그러나 여운형은 이임수의 걱정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겼다.
 
  “해방이 되었다고 나를 찾아오는 사람을 내쫓겠소? 해방된 이 마당에 좌익 우익이 어디 있소. 양심적인 사람이면 다 손잡아야지. 남관(이임수의 호)도 우익이라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보내시오. 내 얼마든지 만나주고 같이 일하리다.”
 
  그리하여 이임수는 여운형과 가까운 사이이면서도 건준의 활동에는 가담하지 않았다.35)
 
  이렇듯 건준 결성을 실제로 주도한 사람들은 공산주의자들이었다. 그러한 공산주의자들의 움직임의 하나가 8월 15일 밤에 같은 계동의 홍증식 집에서 열린 재경혁명자대회였다. 모인 사람들은 주로 일본헌병대와 경찰서에서 이날 석방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여운형이 조선총독부로부터 약속받은 5개항을 중심으로 앞으로의 대책을 숙의했다.36) 혁명자대회에 이어 7월 하순에 공산당재건준비를 비밀리 모의하다가 검거되었던 조동호, 이영, 정백, 최원택, 정재달(鄭在達) 5명에 서중석(徐重錫), 홍남표(洪南杓), 이승엽(李承燁), 최용달(崔容達)을 더한 9명이 별도로 공산당 재건을 위한 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는 종로에 있는 장안(長安)빌딩의 장안사진관 자리에서 밤을 새워 진행되었다.37) 회의에서는 또 이정윤(李廷允)과 이현상(李鉉相)을 추가하여 11명을 당간부로 결정했다. 이들은 각각 화요회계, ML계, 경성콤그룹 등 지난날 공산주의 운동 계파의 대표급 인물들이었다. 당의 명칭은 조선중앙공산당으로 결정하고 각 부서와 그 책임자도 선정했다. 책임비서로는 조동호를 선출하고, 조직부는 정재달, 선전부는 정백이 책임을 맡았다. 그리고 이들을 포함한 11명 간부 전원으로 중앙위원회를 구성했다.38) 이들은 장안빌딩에 간판을 내걸었으므로 뒤이어 결성되는 박헌영 중심의 재건파공산당과 구별하여 장안파공산당으로 불리게 되었다. 건준의 결성모임에 참여했던 정백은 이 공산당 재건 회의에도 참여하여 회의를 주도했다.39)
 
  한편 이날 동대문 밖 최익한(崔益翰)의 집에 모인 일단의 공산주의자들은 고려공산당 조직위원회를 조직했다.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에서 경제학을 수학한 최익한은 사회주의 이론가로서 조선공산당 조직부장, 선전부장 등으로 활동하다가 7년 동안 옥고를 치렀다. 석방된 뒤에는 친일단체의 간부로 동원되기도 했고, 1944년 11월까지 3년 동안 자기 집에서 주류소매업을 했다. 이 고려공산당 조직위원회는 이튿날 장안파공산당과 합류하고, 경성지구위원회를 조직했다.40)
 
  수감되거나 지하에 피신해 있는 공산주의자들이 하루 이틀이면 자리를 같이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활동을 중단한 채 더러는 일본인들에게 협력하고 있던 사람들이 황급히 공산당 재건을 표방하고 나선 것은 한국공산주의 운동의 고질인 분파주의에 따른 주도권 싸움이 얼마나 격심했는지를 여실히 드러내 보이는 것이었다.
 
 
  대통령 李承晩, 총리대신 金九, 육군대신 金日成, 외무대신 呂運亨…
 
  8월 16일부터 서울은 광복의 흥분으로 들끓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와 골목을 가득 메우고 태극기를 만들어 행진하기 시작했다. 건준은 서둘러 시민들의 자중을 당부하는 전단을 만들어 서울시내에 뿌렸다.
 
  때를 같이하여 “해방된 조선에 곧 동진공화국(東震共和國)이 수립된다”는 전단이 뿌려지고 요소요소에 ‘동진공화국’에 대한 벽보가 나붙었다. 미국의 이승만, 중국의 김구, 소련의 김일성(金日成)이 국내의 여운형과 손을 잡고 ‘동진공화국’을 세운다는 내용이었다. ‘동진공화국’ 소문은 서울시내는 물론 지방과 만주의 옌볜(延邊) 등지에까지 급속히 유포되었다. ‘동진공화국’의 대통령은 이승만이고, 총리대신은 김구, 육군대신은 김일성, 외무대신은 여운형, 그 밖에는 미정이라는 벽보도 있었다.41)
 
  장안빌딩 앞에는 8월 16일 이른 아침부터 흥분한 군중이 몰려들었다. 빌딩 안에서 열리고 있는 회의는 장안파공산당이 결성된 사실을 공표하는 재경 혁명자대회로 소집된 회의였던 것 같다.42) 이날 아침에 현장에 갔던 고준석(高峻石)은 이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몰려든 군중은 그 집회에 열광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회의장은 초만원이었다. 누군가가 연설을 하고 있었으나 회의장에 들어가지 못한 군중이 소란을 피워서 연설은 중단되었다. 군중이 갑자기 장안빌딩에서 쏟아져 나와 안국동 쪽으로 달려갔다. 군중은 덕성여자실업학교 교정으로 밀려들어 갔다. 주최 쪽인 듯한 사람이 연단에 올라가서 “지금부터 재경혁명자대회를 개최한다”고 말하고 한 노혁명가를 소개했다. 노혁명가는 전날 밤의 공산당 재건회의에 참석했던 홍남표였다. 홍남표가 열변을 토하고 있을 때에 아침에 서대문 형무소나 각 경찰서 유치장에서 석방된 정치범들이 연설장으로 들어왔다. 그들이 돌아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군중이 다시 한꺼번에 교문으로 뛰쳐나갔다. 오후 1시에 소련군이 서울역에 도착한다는 말이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하여 재경혁명자대회는 중단되었다.43)
 
만세를 부르는 西大門刑務所 출옥자들과 환영나온 사람들.
 
  서울역에 소련군이 도착한다는 헛소문 퍼져
 
  여운형은 8월 16일 오전 9시에 이강국과 최용달을 대동하고 나가사키와 함께 서대문형무소에 가서 정치범 석방에 입회했다. 이때에 석방된 수감자들은 서울에서만 1만명이 넘었다.44) 석방된 정치범이나 사상범들은 거의가 일본의 식민지 정책에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공산주의자들이었다. 오전 11시부터 출옥한 정치범들과 사상범들을 선두로 각 사상단체들의 시위행진이 종로에서 있었다. 급조한 태극기를 꽂은 트럭과 자동차와 전차마다 사람들이 빼곡히 타고 독립만세와 광복만세를 불렀다.45)
 
  정오쯤이 되자 여운형의 집과 인접한 휘문중학교 교정에도 군중이 모여들었다. 여운형을 보러 온 사람들이었다. 여운형은 이들 앞에서 열변을 토했다. 그는 먼저 전날 아침에 엔도를 만나서 나눈 대화 내용을 설명했다.
 
  여운형은 엔도가 “지나간 날 조선과 일본 두 민족이 합한 것이 조선민중에게 합당하였는가 아닌가는 말할 것이 없고, 다만 서로 헤어지는 오늘날을 당하여 마음 좋게 헤어지자”라고 말하고 “오해로 말미암아 피를 흘리든지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잘 지도하여 달라”고 요청하기에, 자기가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요구조건을 제시하여 그 자리에서 응낙을 받았다고 말했다.
 
  (1) 전 조선 각지에 구속되어 있는 정치 경제범을 즉시 석방하라.
 
  (2) 식량이 제일 문제이니 3개월(8, 9, 10)분의 식량을 확보하여 명도하라.
 
  (3) 치안 유지와 건설사업에 있어서 간섭을 하지 말라.
 
  (4) 조선 내의 민족해방의 모든 추진력이 되는 학생훈련과 청년조직에 대하여 간섭을 하지 말라.
 
  (5) 전 조선 각 사업장에 있는 노무자를 우리의 건설사업에 협력시키며, 아무 괴로움을 주지 말라.46)
 
  여운형이 연설을 시작하고 20분쯤 되었을 때에 덕성여자실업학교에서와 똑같은 사태가 벌어졌다. 누군가가 장내로 헐레벌떡 뛰어들면서 “오후 1시에 소련군이 도착한다” 하고 외치자, 군중은 갑자기 혼잡을 이루면서 일제히 서울역으로 몰려갔다. 연설을 하다 말고 집으로 돌아온 여운형은 심부름하는 이란을 시켜 러시아어를 통역할 박우천(朴宇天: 본명 朴亨權)을 급히 불러오게 했다. 박우천은 하얼빈에서 백계 러시아인들과 변호사로 일하다가 1945년 4월에 귀국해 있었다.47)
 
  이날 이른 아침부터 “소련군이 이미 원산을 출발했다” 하고 외치며 큰길을 지나가는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거리에는 붉은 기가 여기저기의 건물 창문에 내걸렸다. “오후 1시 소련군 입성”, “가라 경성역으로”, “소련군 만세” 등의 벽보가 전신주며 판자벽이며 건물 유리창에 나붙었다. 오토바이가 붉은 기를 흔들면서 “혁명이다. 혁명이다” 하고 외치고 지나갔다. 여기저기에서 쏟아져 나온 사람들은 홍수가 되어 서울역으로 몰려갔다.48)
 
  그러나 소련군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러한 소련군 환영소동은 함흥(咸興), 대전(大田), 대구(大邱), 부산(釜山)에서도 있었고,49) 서울의 소련영사관에는 언제 소련군이 도착하는지를 묻는 전화가 계속 걸려왔다.50)
 
  그런데 소련군의 서울진주 소문은 전혀 터무니없는 것이 아니었다. 8월 15일에 북한의 소련군 점령지역에서 보내는 것으로 여겨지는 한 해적 방송이 경성방송국(JODK) 주파수로, 서울에 곧 임시정부가 수립되며 8월 16일에 그 간부 세 사람이 서울에 도착할 것이라고 방송했다.51) 서울주재 소련 영사관 사람들의 행동도 수수께끼였다. 일본인들은 소련이 대일선전포고를 하고 나서도 이들을 구금하지 않고 있었다. 영사 폴리안스키(Alexander S. Poliansky)는 8월 15일 오후에 경성중앙전화국을 통하여 원산(元山)역장에게 소련군이 원산역을 통과했는지 않았는지를 확인해 주도록 요청했다. 폴리안스키는 통화의 계속으로 소련군은 오늘(8월 15일) 오후 5시쯤까지, 늦어도 오후 8시까지는 서울에 올 예정이라고 말하고 돌아갔다.52)
 
  그러나 이날의 소련군 환영소동은 경성보호관찰소장 나가사키 유조가 야마토주쿠(大和塾)의 회원들인 사상전향자들을 동원하여 꾸민 정치공작이었다. 나가사키가 그러한 일을 꾸민 동기는 서울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을 “흥분한 조선인 폭도”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었다.53)
 
8월 16일에 휘문중학교 교정에 모인 젊은이들과 呂運亨.
 
  安在鴻의 라디오演說에 열광
 
8월 16일 오후에 소련군이 도착한다는 소문을 듣고 서울역으로 몰려나온 서울 시민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8월 16일 오후 3시에 경성방송국에서 방송된 건준 부위원장 안재홍의 라디오 연설은 국민들을 열광시켰다. “지금 해내 해외 3천만 우리 민족에게 고합니다”라는 말로 시작한 안재홍의 방송연설은 일반국민에게 독립정부 수립에 즈음한 시정연설과 같은 인상을 주었다.
 
  안재홍은 조선민족은 지금 새로운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고 말하고, 당면 문제는 “조선과 일본 양 민족이 자주호양(自主互讓)의 태도를 견지하여 추호라도 마찰이 없도록 하는 것”, 곧 일본인 거주자들의 생명 재산을 보장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건준 소속의 경위대(警衛隊)의 신설, 정규병의 편성, 식량의 확보, 물자배급의 유지, 통화의 안정, 쌀 공출, 정치범의 석방, 대일협력자 대책 등을 구체적으로 언급함으로써 마치 정권이 한국인의 손에 넘어온 듯한 느낌을 주었다.54) 이 방송은 처음에 여운형이 하기로 되었던 것을 안재홍이 대신한 것이었다.
 
  건준의 가장 시급한 과제는 조선총독부 경찰이 사실상 포기한 치안유지 체제를 정비하는 일이었다. 이 일의 책임을 맡은 장권은 8월 16일 오후에 휘문중학교 강당에서 일반체육무도계 대표, 각 중학교의 체육담당 교사, 전문학교 이상의 학생대표를 모아 건국청년치안대를 조직했다.55) 치안대는 여운형의 직속이었고, 본부는 풍문학교(豊文學校)에 두었다. 청년과 학생 2,000명을 동원하여 밤낮으로 서울의 치안확보를 위하여 노력하는 한편 지방별, 직장별 치안대를 조직하게 하여 각각 그 지역의 치안을 담당하고 중요자료와 수원지 등 공공시설을 경비하게 했다. 또한 지방 치안대를 조직하기 위해 전문학교 이상의 학생 100명을 각지에 파견했다. 지방에 따라서는 지방유지들이 본부에 와서 자기들이 조직해 놓은 단체의 지방치안대 승인을 받아가는 사례도 있었다. 그리하여 전국적으로 162개의 지방 치안대가 조직되었다.56)
 
  장권의 치안대 이외에도 치안대나 보안대를 자처하는 단체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이들에 의한 ‘접수’가 바로 시작되었다. 이들은 건준의 지시를 받았다면서 신문사, 방송국, 경찰서, 학교, 군수회사, 철도, 병원, 백화점 등 일본인들이 관리하는 중요기관을 차례로 ‘접수’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서울시내 10개 경찰서도 본정(本町) 경찰서와 용산 경찰서 이외에는 모두 ‘조선건국준비위원회○○경위대’로 간판이 바뀌었다.57) 한편 건국동맹은 이날 종로의 YMCA회관에 본부 사무실을 개설했다.58)
 
  이때의 치안대 활동과 관련하여 신도성은 “건준 산하의 치안대라는 것이 완장을 두르고 다니며 어느 정도 질서를 잡기도 하였으나, 거기에도 불량배 같은 것이 끼어들어 일본인들의 재산을 약탈하는 등 매우 소란스러웠다”라고 회고했다.59)
 
  이러한 행동은 패전의 울분에 쌓여 있는 일본군의 젊은 참모들을 자극하는 것이었다.
 
 
  安在鴻은 8월 16일 아침에 사퇴 결심
 
  건준은 8월 17일에 간부진의 인선을 발표했다. 총무부장에는 최근우, 조직부장에는 정백, 선전부장에는 조동호, 선전부 차장에는 최용달, 무경부장(武警部長)에는 권태석(權泰錫), 재정부장에는 이규갑(李奎甲)이 선임되었다.60)
 
  최근우는 2·8독립선언의 주동자의 한 사람이었고 1919년에 여운형이 일본정부의 초청으로 도쿄를 방문했을 때에 동행했던 여운형의 핵심 측근이었다. 그는 뒤에 ‘만주국’의 안동성 민정청(民政廳) 사무관, 협화회(協和會) 안동성 사무장 등을 지냈다. 3·1운동 직후에 국내에서 선포된 한성정부(漢城政府)의 산파역을 했었고 상하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에서 활동했던 이규갑은 안재홍과 함께 신간회운동에 참여했던 목사였다. 그리고 나머지 정백, 조동호, 최용달 세 사람은 8월 15일 저녁부터 16일 새벽에 걸쳐서 결성된 장안파공산당의 핵심간부들이었고, 권태석은 서울계의 공산당 출신이었다.
 
  소련군이 서울에 진주할 것이라는 예상 아래 좌익 인사들이 주축이 되어 서둘러 결성한 건준은 국민들의 정치적 열광을 수렴하여 합리적인 통제력을 발휘하기에는 능력에 한계가 있었다. 우선 부위원장 안재홍이 건준이 결성된 이튿날로 사퇴를 결심할 정도로 불만이었다. 안재홍은 이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나는 건준 성립된 8·15 당일부터 철야하는 동안 거의 38시간을 통하여 좌방제씨(左方諸氏: 좌익인사들)가 나의 의도하는 건준과는 딴판으로 각각 독자적인 의도에서 잠행공작을 하고 있는 것을 똑똑히 본 까닭에, 16일 조조(早朝)이면 급류용퇴(急流勇退: 벼슬자리에서 제때에 쾌히 물러남), 곧 결별할 것을 내심 결의하였으나, 위원장 몽양 여운형씨 외의 정백씨 및 그 밖의 요인이 사정을 설명하고 협동을 역설하므로 나는 내심 품었던 사의를 뒤집어 최후의 순간까지 내 뜻을 고집하고 전술한 3항의 취의(趣意)를 관철케 하기로 결심하였다. …”
 
  그가 말하는 3개항의 취의란 자신이 건준에 참여한 이유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첫째, 민족적 자중으로 대량유혈을 방지하고, 둘째 현존하는 시설과 기계와 계획문서 등 일체를 완전히 보관하여 독립정부에 인계하며, 셋째 그 독립정부는 충칭의 임시정부를 최대한으로 지지하여 해내외의 혁명세력으로 적정한 보강 확충을 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공산계열에 대하여 민족주의자의 지도자가 제1선에 나서도록 하고 공산계열은 차라리 차위(次位)에서 협동하기를 제안하였으나 성취치 못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에 대해 안재홍은 “여몽양은 대체로 공당(共黨) 측의 진언에 이끌리고 민족주의자로서는 이 일에 참획한 자 자못 빈곤하였다”라고 적었다.61)
 
  한편 8월 15일 오후에 송진우 집에 모인 인사들로부터 여운형과 안재홍을 만나보라는 권유를 받은 이인은 이튿날 아침 일찍 임용상의 집으로 두 사람을 찾아갔다. 여러 가지 이야기 끝에 이인은 여운형에게 우선 송진우와 다시 협의할 것을 권했고, 여운형은 그러겠다고 대답했다.62) 여운형은 이인과의 약속대로 8월 17일 오후에63) 다시 송진우의 집을 찾아갔다. 그러나 두 사람의 입장은 달라지지 않았다. 송진우는 여운형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몽양은 내가 보기에 공산주의자가 아니오. 그러나 자칫하면 그들에게 휘감기어 공산주의자도 못되면서 공산주의자 노릇을 하게 될 위험성이 없지 않소. …”
 
  송진우의 이러한 말에 여운형은 “내가 무엇이 되든 두고 보시오” 하고 말하고 일어났다고 한다.64)
 
  송진우의 이러한 태도는 제국주의 일본으로부터 광복을 맞은 바로 그 시점에서 그가 공산주의자들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어서 눈여겨볼 만하다. 송진우는 독립운동 기간의 경험을 통하여 공산주의자들과는 그들의 주장이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는 한 타협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이 점은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 데에는 공산주의자들과의 협조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여운형의 인식과는 상반되는 것이었다.
 
 
  建準의 ‘指令’에 따라 地方支部 조직돼
 
  건준의 간부인선을 확정하고 나서 여운형은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했다.
 
  “조선에는 지금 묵은 정권이 물러가려 하고 있는데, 새 정권은 아직 서지 않고 또 갑자기 설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정권이 물러가고 대중이 헤매는 이때에 가장 걱정되는 것은 대중이 형편없이 날뛰는 것이고 가장 필요한 것은 대중을 잘 이끌어 가면서 역량을 살리고 잘 육성하여 나가는 일입니다. 이 사명을 띠고 나온 것이 조선건국준비위원회입니다. 그리고 이 건국준비에 가장 필요한 것은 첫째, 치안을 유지함이요, 둘째는 모든 건국의 요소되는 힘과 자재(資財)와 기구(器具) 등을 잘 보관하고 육성하여 새로 탄생되는 국가를 되도록 건전하게 건설하자는 것입니다.…”65)
 
  이날 건준은 또 당분간 자발적인 자치수단을 강구할 것 등 5개항의 ‘건국준비위원회 지령’을 발표했다.66) 이러한 여운형의 연설이나 건준의 ‘지령’은 여운형의 사진과 함께 건준의 기관지가 되어 있는 〈매일신보〉에 크게 보도되었다. 이러한 서울의 움직임과 병행하여 전국 각지에서 ‘자치수단’으로 지방 건준이 급속히 조직되어 나갔다. 개중에는 이미 조직되어 있는 지방 건준이 서울에 와서 “○○건준지부”의 승인을 받아가는 경우도 많았다. 그리하여 8월 말까지 전국에 건준지부가 145개소 조직된 것으로 집계되었다.67)
 
 
  日本軍의 반발에 부딪혀
 
  그러나 건준의 활동은 이내 일본군의 맹렬한 반발에 부딪혔다. 정무총감 엔도와 여운형의 교섭에 대해 사전협의가 없었던 것에 격분한 일본군의 젊은 참모들은 조선총독부에 항의하고 앞으로는 군이 치안을 맡겠다고 나섰다. 그리하여 8월 16일에 총독부와 조선군 사이에 ‘정치운동취체요령’이라는 것이 책정되었다. 이날 조선군관구사령부는 “관내 일반민중에게 고함”이라는 포고문을 발표하고, 인심 교란과 치안 방해행위에 대해서는 군이 단호히 조치하겠다고 위협했다.68)
 
  그리고 일본군의 강력한 요청에 따라 조선총독부는 8월 20일에 건준을 비롯한 모든 한국인단체의 책임자를 종로경찰서에 불러 모아 정치 또는 치안유지 단체는 그날 오후 5시까지 간판을 떼고 즉시 해산하도록 명령했다. 건준의 총무부장 최근우는 박석윤과 함께 엔도를 찾아가서 일본군의 태도는 약속과 다르다고 항의하고, 일본군 사령부의 참모장 등과 격렬한 논쟁을 벌인 끝에 건준의 명의만은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69)
 
  한편 엔도는 나가사키로 하여금 8월 17일 저녁에 여운형에게 “접수는 연합국에 의하여 이루어져야 할 것이므로 건준의 활동은 치안유지 협력에 그치도록” 전하게 했다. 또 8월 18일 오후에는 니시히로가 나가사키와 백윤화 검사와 함께 안재홍을 만나서 8월 16일의 방송내용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건준의 해체를 요구했다. 그러나 안재홍은 이 요구를 거부했다.70)
 
 
  2. 朝鮮共産黨의 재건과 建準의 분열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는 8월 18일 밤 11시에 여운형이 테러를 당한 것으로 알려졌다.71) 그러나 테러리스트들의 정체는 밝혀지지 않았다. 여운형이 경기도 양평(楊平)의 시골집으로 가서 요양하는 동안 위원장의 일은 안재홍이 대행했는데, 그러는 동안 건준은 심각한 혼선과 내부갈등에 휩싸였다.
 
 
  建準의 內紛은 共産主義者들의 分派主義 때문
 
  첫째는 우파 민족주의자들이 건준의 확대 개편을 위한 전국유지자대회를 열 것을 요구하고 나온 것이었다. 안재홍과 일부 간부들은 이에 동의하고 서울 거주자들만의 경성유지자대회를 열기로 합의했다. 그리하여 135명의 대표자 명단이 신문에 발표되기까지 했다.72) 그러나 이 계획은 여운형을 포함한 건준 내부 좌익계열의 강력한 반대로 성사되지 못했다. 여운형은 부득이하여 회의를 열어야 한다면 그 회의에는 의견 제출권만 주고 결의권은 주지 말라고 했다.73)
 
  둘째로 강낙원(姜樂遠), 유억겸(兪億兼) 등이 청년들을 모아 보안대를 따로 조직해 가지고 건준 치안대에 들어오겠다고 요청한 것을 안재홍이 허락한 데서 비롯된 알력이었다. 그들이 들어오면 여운형의 직속으로 되어 있는 장권의 부하들과 마찰을 일으킬 것이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여운형은 이것도 거부했다.74)
 
  셋째는 여운형이 신뢰하는 고경흠(高景欽), 정백, 윤형식(尹亨植) 등 건준의 공산주의자 간부들이 여운형에게 상의도 없이 8월 21일에 휘문중학교 강당에서 건준 경성지회를 조직하고 경성지회위원을 선거할 전형위원 15명까지 선정하여 물의를 일으킨 것이었다.75) 여운형은 낭패했다. 이때의 일을 이만규는 “안에서는 일마다 불통일로 이러한 큰 문제를 만들어 내고, 밖에서는 간부의 몇몇 사람을 내쫓아야 할 것을 안 하고 있다고 좌우양익에서 비난이 들어오니 실로 곤란하였다”라고 적었다.76)
 
  건준의 이러한 내부갈등은 한국공산주의자들의 주도권 싸움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장안파공산당은 활발히 움직였다. 8월 17일에는 형무소에서 석방된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재경혁명자대회를 열고, 이튿날에는 외곽조직으로 소설가 김남천(金南天)을 위원장으로 하는 조선공산주의청년동맹을 결성하는 한편, 전국 각도의 조직을 서둘러 평안남도에 현준혁(玄俊赫), 황해도에 김덕영(金德永)을 책임자로 임명했다. 그리고 현재의 혁명단계를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규정하는 내용의 정강정책도 발표했다.77)
 
 
  朴憲永의 出現과 「8月테제」
 
光州벽돌공장에서 상경하여 재건파조선공산당을 결성한 朴憲永.
  그러나 장안파공산당의 이러한 움직임은 광주(光州)의 한 벽돌공장에서 숨어 지내던 경성콤그룹의 중심인물 박헌영이 서울에 나타나면서 제동이 걸렸다. 8월 17일에 광주를 출발한 박헌영이 전주(全州)에서 측근 김삼룡(金三龍)을 만나서 같이 서울에 도착한 것은 8월 18일 저녁 무렵이었다.78) 서울에서는 8월 15일부터 “박헌영 동무는 빨리 나타나서 우리의 지도에 당하라”는 벽보가 거리에 나붙었다.79) 박헌영은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홍증식의 집으로 경성콤그룹 멤버들을 불러 모았다. 이들은 거의가 지하에서 나름대로 활동을 계속했거나 검거되어서도 전향하지 않은 공산주의자들이었다. 회의에서는 조선공산당 재건준비위원회 결성문제, 기관지 〈해방일보(解放日報)〉 창간문제, 장안파 흡수공작문제 등이 논의되었다.80) 이들은 장안파공산당을 “운동탈락자”, “유휴분자”, “변절자”로 치부했다.
 
  박헌영은 이어 소련영사관의 부영사 샤브신(Anatoli I. Shabshin)을 찾아가서 한반도 정세와 장래의 운동에 대해서 논의했다. 박헌영은 지하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샤브신과 비밀리에 연락을 해왔었다. 서울에 나타난 이론가 박헌영이 가장 먼저 착수한 작업은 “현정세와 우리의 임무”라는 문서를 작성한 것이었다.81) 그것이 유명한 「8월테제」이다.
 
  「8월테제」는 소련군의 서울점령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제2차대전 종결과 관련해서도 다른 연합국에 대한 언급은 없이 “세계혁명의 등대, 국제 프롤레타리아의 조국, 지구의 5분의 1을 차지하는 소련”이 승리한 결과라고 말하고, 그런데도 일본 군대는 “지금 붉은 군대가 서울로 진입하는 것에 대비하여 전투를 전개하기 위한 책동을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82)
 
  「8월테제」의 핵심적인 이론은 한국혁명의 현 단계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단계라고 규정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 혁명의 가장 중요한 과업은 완전한 민족적 독립의 달성과 농업혁명의 완수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조선민족부르주아지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자기의 친일적 성향을 숨기려 하고 있다. … 우리의 과업은 이들과 비타협적 투쟁을 전개하면서 노동자, 농민, 소부르주아지 등 혁명적 대중의 선두에 서는 것이다”라고 투쟁방향을 천명했다.83) 그런데 「8월테제」는 1928년 12월에 코민테른(국제공산당) 집행위원회가 발표한 “한국문제에 대한 결의”, 이른바 「12월테제」84)의 내용을 해방 이후의 실정을 감안하여 약간 바꾸었을 뿐 골격은 거의 그대로 번안한 것이었다.85)
 
  한편 「8월테제」는 장안파공산당을 다음과 같이 단호하게 비판했다.
 
  “탄압의 시기에는 기득의 영예에 만족하던 이런 자들은 합법적 운동의 시기, 곧 1945년 8월 15일에 하부조직의 창설이나 아무런 준비도 없이 ‘조선공산당’을 조직하여 당 중앙위원회를 선출하기까지 하고 유해한 전통적인 파벌활동을 반복하여 인민운동의 최고지도자가 되려고 희망하였다. 그들은 흔들림 없이 오래전부터 지하운동을 진행하고 있는 충실한 공산주의자들의 믿음직한 그룹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 이렇게 행동했던 것이다. 이런 결과로 조선공산주의운동은 분열되었다.”86)
 
  마지막으로 「8월테제」는 인민정권의 수립을 위한 투쟁을 전개해야 한다고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우리는) 기본적 민주주의적 여러 가지 요구를 내세우고 이것을 철저히 실천할 수 있는 인민정부를 수립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반민주주의적 경향을 가진 반동단체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투쟁하여야 한다. ‘정권을 인민대표회의로’라는 표어를 걸고 진보적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을 할 것이다.…”87)
 
  장안파공산당은 8월 19일에 박헌영에게 중앙의 요직에 취임할 것을 요청했으나 박헌영은 이에 응하지 않고, 도리어 장안파공산당의 해체를 주장했다.88)
 
  박헌영은 8월 20일에 명륜동 김해균(金海均)의 집에서 경성콤그룹을 조선공산당 재건위원회로 개칭하고, 「8월테제」를 당의 잠정적 정치노선으로 채택했다. 이른바 재건파공산당의 출현이었다.
 
 
  共産黨 주축으로 建準의 機構改編
 
  이러한 상황에서 건준은 8월 22일에 기구를 12부1국제로 확대하고 8월 25일에는 새로이 건준의 목적과 활동방향을 천명하는 ‘선언’과 ‘강령’을 채택했다. 개편된 기구는 경무부를 치안부로 개칭하고, 식량부, 문화부, 교통부, 건설부, 기획부, 후생부, 조사부와 서기국을 신설하는 한편 위원도 7명에서 32명으로 크게 늘렸다. 신임위원에는 김교영(金敎英), 유석현(劉錫鉉), 홍기문(洪起文) 등 안재홍계뿐만 아니라 김준연, 이용설(李容卨), 함상훈(咸尙勳), 김약수(金若水) 등의 우파 민족주의 인사들도 포함되기는 했으나, 두드러진 특징은 정백, 권태석, 이강국, 최익한, 고경흠, 최성환(崔星煥) 등 공산당인사들이 다수 선임된 것이었다. 새로 선임된 김준연, 이용설, 함상훈, 홍기문은 아예 참여하지도 않았다.
 
  시골에서 요양 중이던 여운형은 8월 25일에 집행위원들 앞에서 “지금 우리가 할 일이 정부조직이 아니고 또 어떠한 기성세력을 형성하려는 것도 아니니, 물론 무슨 정권의 쟁탈도 아닙니다. 다만 신정권이 수립될 때까지의 준비를 위한 것과 치안을 확보하는 것뿐입니다. 과언묵행(寡言默行)이 오직 이 실행에 있습니다. …”라고 역설했다. 또 그는 “나는 임무를 마치면 농촌으로 가겠습니다”라는 말도했다.89)
 
  그러나 사흘 뒤인 8월 28일자로 발표된 건준의 새 ‘선언’은 여운형의 이러한 소회와는 사뭇 다른 전투적인 내용이었다. 이만규는 그것이 여운형이 직접 작성했다고 할 만큼 그가 내용을 대폭 수정했다고 했으나,90) 이러한 모순은 조선공산당의 재건이라는 엄중한 상황변화가 반영된 것이었음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91)
 
  ‘선언’은 건준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규정했다.
 
  “본 준비위원회는 우리 민족을 진정한 민주주의 정권에로 재조직하기 위한 새 국가건설의 준비기관인 동시에, 모든 진보적 민주주의적 제세력을 집결하기 위하여 각층각계에 완전히 개방된 통일기관이요 결코 혼잡된 협동기관은 아니다. 왜 그런고 하면, 여기에는 모든 반민주주의적 반동세력에 대한 대중적 투쟁이 요청되는 까닭이다. 과거에 있어서 그들은 일본제국주의와 결탁하여 민족적 죄악을 범하였고 금후에도 그들은 해방조선을 그 건설 도중에서 방해할 가능성이 있나니, 이러한 반동세력, 즉 반민주주의적 세력과 싸워 이것을 극복 배제하고 진정한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하여 강력한 민주주의 정권을 수립하여야 할 것이다.…”
 
  ‘선언’은 결론으로 강력한 민주주의 정권의 수립 절차와 그 정권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 정권은 전국적 인민대표회의에서 선출된 인민위원으로서 구성될 것이며 그동안 해외에서 조선해방운동에 헌신하여 온 혁명전사들과 특히 그의 지도적인 집결체에 대하여는 적당한 방법에 의하여 전심적으로 맞이하여야 할 것은 물론이다.…”92)
 
  그것은 사회주의국가의 인민정부의 수립을 분명히 한 것이었다. 재건파공산당을 발족시킨 박헌영 그룹은 전국적인 조직을 갖춘 건준을 인민공화국으로 개편하는 작업에 착수한 것이었다.
 
  새로 제정된 건준의 ‘강령’은 다음과 같았다.
 
  (1) 우리는 완전한 독립국가의 건설을 기함.
 
  (2) 우리는 전 민족의 정치적, 사회적 기본 요건을 실현할 수 있는 민주주의정권의 수립을 기함.
 
  (3) 우리는 일시적 과도기에 있어서 국내질서를 자주적으로 유지하며 대중생활의 확보를 기함.93)
 
  건준의 ‘선언’이 발표된 뒤에 안재홍은 양평으로 요양 중인 여운형을 찾아갔다. 모든 일을 흉금을 터놓고 상의해 보려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최용달과 정백이 행여나 여운형이 안재홍의 설득에 넘어갈까 하여 뒤쫓아 감으로써 여운형과 안재홍의 회담은 아무런 성과도 없었다.94)
 
해방을 맞아 축하시위가 연일 계속되었다.
 
  右派들은 美軍進駐 뉴스에 고무돼
 
  인성만성한 분위기가 계속되는 상황에서 한반도를 미군과 소련군이 남북으로 분할하여 점령한다는 뉴스가 전해진 것은 8월 24일에 이르러서였다. 이날 자 〈매일신보〉는 〈도메이 통신〉의 도쿄발 전화로 “한국은 독립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미국과 소련의 분할 점령 아래 두고 각각 군정이 실시될 것으로 보인다”라고 보도했다.95) 8월 26일에는 일본어 신문 〈게이조일보(京城日報)〉도 같은 내용의 뉴스를 전했다. 그러나 이때의 보도에는 38도선은 언급되지 않았다.96)
 
  한편 조선총독부는 8월 22일에 본국정부의 내무차관으로부터 조선주둔 일본군의 무장해제 담당구역은 북위38도 이북은 소련군, 이남은 미군이 될 전망이라는 예고전보를 받았고, 8월 29일에는 정식 통보를 받았다.97) 이보다 앞서 8월 18일에 여의도 비행장에 내린 광복군 국내정진대가 영등포 일대에 뿌린 전단에도 미군이 진주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으므로, 일본군이나 조선총독부 간부는 서울에 미군이 진주할 것이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다만 그 사실이 한국 지도자들에게 얼마나 알려졌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건준 인사들이나 조선공산당은 8월 말까지도 서울에 소련군이 진주할 것으로 믿고 있었다.98)
 
  한국을 미군과 소련군이 분할점령한다는 뉴스는 한국인들에게 여간 큰 충격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은 건국준비위원회에 정국주도의 기선을 빼앗긴 채 계파별로 모여 정당결성 작업을 추진하고 있던 우익 민족주의자들을 크게 고무시켰다.
 
  우익인사들 가운데에서 가장 먼저 활동을 시작한 사람들은 허정(許政)과 장덕수 등 미국유학파들이었다. 허정은 8월 16일에 보성전문학교로 장덕수를 찾아가서 정당결성 문제를 논의했다. 두 사람은 집권을 목표로 하지 않고, 일부 계층이나 파벌만을 대표하지 않는 정당을 만들어야 한다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 미국에 유학할 때부터 이승만을 지지하는 활동을 해 왔던 이들은 새로 조직되는 정당은 “임시정부를 맞이할 기반을 닦는 준비기관적”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장덕수는 지도급 인사들을 만나고 허정은 동년배들을 만나보기로 했다.99)
 
  장덕수는 이날 바로 여운형을 찾아갔다. 여운형은 평소의 지론대로 충칭의 임시정부를 유일한 정통정부로 맞이하는 데에는 부정적이었다.100) 여운형은 장덕수에게 건준사업에 협동할 것을 권했다.101)
 
  장덕수는 송진우와 김성수를 만나고 안재홍도 만났다. 송진우는 의견이 달랐다. 그는 임시정부의 귀국을 서둘러 그들을 추대하면 되고 새로 정당을 조직할 필요는 없다는 주장이었다. 김성수는 〈동아일보〉복간준비와 보성전문학교를 명문대학으로 발전시키는 일에 더 열의를 가지고 있었다. 가장 적극적인 반응을 보인 사람은 건준 부위원장 안재홍이었다.102)
 
 
  呂運亨 이하 建準간부들이 總辭職
 
  여운형과 송진우의 중재에 실패한 이인도 부지런히 움직였다. 그는 8월 17일 오후 1시에 반도호텔에서 연합군환영준비회와 임시정부환영준비회를 발족시켰다. 회의는 위원장에 권동진(權東鎭), 부위원장에 이인, 사무장에 조병옥(趙炳玉)을 선출했으나, 권동진이 와병 중이어서 이인은 다시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이인은 이어 8월 19일 밤에 같이 자던 원세훈(元世勳)과 조병옥에게 환영준비위원회를 모체로 임시정부의 기반이 될 정당을 만들자고 제의했다. 이인은 건준이 독주하는 것은 자기들이 조직이 없는 것을 무시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것이었다.103)
 
  원세훈은 이미 독자적으로 8월 18일에 한학수(韓學洙), 송남헌(宋南憲) 등과 함께 사회민주주의적 강령을 내걸고 고려민주당(高麗民主黨)을 창당했다. 그러나 고려민주당은 8월 20일에 모든 정치단체는 해산하라는 일본군의 명령에 따라 정당의 간판을 내리고 있었다.104)
 
  건준을 전국유지단체로 확대 강화하기 위해 노력하던 김병로 그룹은 건준과의 합동을 포기하고 고려민주당 인사들을 통합하여 8월 28일에 오성학교 강당에서 조선민족당(朝鮮民族黨)을 창당했다. 여기에는 원세훈, 조병옥, 나용균(羅容均), 함상훈(咸尙勳) 등과 일찍이 사회주의 운동을 했던 김약수도 참여했다.105)
 
  또 하나의 그룹은 8월 29일에 안국동 윤보선(尹潽善)의 집에서 별도의 정당결성 회의를 열었다.106) 이 자리에는 허정, 장덕수, 백남훈(白南薰), 김도연(金度演), 구자옥(具滋玉), 유억겸, 윤치영(尹致暎) 등과 함께 건준 부위원장 안재홍도 참석했다. 참석자들은 장덕수가 작성한 정강 정책 초안을 놓고 토의를 벌였다. 당명은 중국국민당을 염두에 두고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으로 정했다.107) 그러나 안재홍은 결국 한국국민당에 참여하지 않고, 9월 1일에 결성된 조선국민당(朝鮮國民黨)의 당수가 되었다.
 
  여운형은 마침내 8월 31일에 급히 건준의 집행위원회를 소집하고 사직을 선언했다. 각부 간부들은 통일이 안된 책임은 자기들에게 있다면서 총사직을 단행했고, 그러자 안재홍도 사표를 제출했다. 이 총사직 문제는 확대위원회에서 처리하기로 하고, 9월 2일 오후 5시에 확대위원회를 소집했다.108) 총사직 문제로 어런더런한 분위기에서 안재홍이 9월 1일에 결성된 조선국민당의 당수로 추대되었다는 신문보도는 건준을 긴장시켰다. 특히 국민당은 충칭임시정부를 절대 지지할 것을 표명하고 나옴으로써 건준을 더욱 당혹스럽게 만들었다.109)⊙
 

  1) 森田芳夫, 『朝鮮終戰の記錄』, 巖南堂書店, 1967, p. 67. 2) 『駐韓美軍史(3)』(History of the United States Armed Forces in Korea: 이하 HUSAFIK 3), 돌베개影印版, 1988, p. 609. 3) 다카사키 소지―이규수 역, 『식민지조선의 일본인들』, 역사비평사, 2006, p. 182. 조선총독부 통계로는 1944년 현재 71만2,583명이었고(森田芳夫, 앞의 책, p. 7 「제5표」), 1945년 12월에 작성된 소련외무성의 한 보고서는 이 시점에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은 75만2,900명이었다고 기술했다(김학준,『북한의 역사 (제1권) 강대국권력정치 아래서의 한반도 분할과 소련의 북한군정개시 1863년~1946년1월』,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8, p. 673). 4) 森田芳夫, 앞의 책, pp. 67~68.
 
  5) 崔夏永, 「政務總監, 韓人課長 呼出하다」, 『月刊中央』 1968년 8월호, p. 128. 6) 宋鎭禹, 「新朝鮮建設의大道 ─ 各政黨首腦懇談會」, 夢陽呂運亨先生全集發刊委員會 編, 『夢陽呂運亨全集(1)』, 한울, 1991, p. 229; 金俊淵, 「政界回顧一年」, 『獨立路線(第六版)』, 時事時報社出版局, 1959, p. 2. 7) 崔夏永, 앞의 글, p. 128. 8) 薛義植, 「八·一五直前直後」, 『解放以後』, 東亞日報社, 1947, pp. 3~13. 9) 金俊淵, 앞의 글, pp. 2~3. 10) 李仁, 『半世紀의 證言』, 明知大學校出版部, 1974, p. 145. 11) 李仁, 「日帝末葉의 나의 受難」, 金鳳基-徐容吉 編, 『愛山餘滴 第1輯』, 世文社, 1961, p. 138.
 
  12) 安在鴻, 「民政長官을 辭任하고」, 安在鴻選集刊行委員會 編, 『民世安在鴻選集(2)』, 知識産業社, 1983, p. 261. 13) 金俊淵, 「나만이 아는 示必密 ─ 宋鎭禹, 安在鴻, 呂運亨과 解放政界」, 『獨立路線(第六版)』, p. 264; 古下先生傳記編纂委員會 編, 『古下宋鎭禹先生傳』, 東亞日報社 出版局, 1965, pp. 288~289. 14) 森田芳夫, 앞의 책, p. 69. 15) 呂運弘, 『夢陽 呂運亨』, 靑廈閣, 1967, pp. 134~135.
 
  16) 森田芳夫, 앞의 책, pp. 69~70. 17) 安在鴻, 「八·一五 당시의 우리政界」, 『새한민보』, 1949년 9월, 『民世安在鴻選集(2)』, pp. 409~742. 18) 鄭栢, 「八月十五日朝鮮共産黨組織經過報告書」, 『朝鮮共産黨文獻資料集(1945~46)』,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1993, pp. 6~7. 19) 金仁植, 「송진우-한국민주당의 ‘중경임시정부 절대지지론’」, 『한국근현대사연구』 제24집, 한울, 2003, pp. 129~132 참조. 20) C. Leonard Hoag, American Military Government in Korea : War Policy and the First Year of Occupation 1941-1946(manuscript), Histories Division, Office of the Chief of Military History, Department of Army, 1970, p. 128 ; 『駐韓美軍史(1)』(HUSAFIK 1), p. 198. 21) 『駐韓美軍史(1)』(HUSAFIK 1), pp. 197~198. 22) 呂運弘, 앞의 책, p. 136. 23) 위의 책, p. 137. 24) 같은 책, p. 133.
 
  25) 李萬珪, 『呂運亨先生鬪爭史』, 民主文化社, 1946, p. 190. 26) 위의 책, pp. 189~190. 27) 같은 책, p. 203. 28) 같은 책, p. 204; 呂運弘, 앞의 책, p. 246. 29) 愼道晟, 「韓民黨創黨①」, 『朝鮮日報』 1981년 2월 23일자, 「轉換期의 內幕」 (33). 30) 李仁, 「日帝末葉의 나의 受難」, 金鳳基-徐容吉 編, 앞의 책, pp. 138-140; 李仁, 앞의 책, p. 145. 31) 위의 책, pp. 145~146. 32) 李萬珪, 앞의 책, p. 204. 33) 李基炯, 『몽양 여운형』, 실천문학사, 1984, p 190. 34) 安在鴻, 「八·一五 당시의 우리 政界」, 『民世安在鴻選集(2)』, p. 472. 35) 李基炯, 앞의 책, pp. 190~191; 李欄 口述, 「해방 전후의 여운형 ─ 이란(李欄)씨의 회고」, 이정식, 『여운형―시대와 사상을 초월한 융화주의자』,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8, pp. 738~739, p. 742. 36) 鄭栢, 앞의 글, p. 7; 李萬珪, 앞의 책, p. 229; 民主主義民族戰線 編, 『朝鮮解放一年史(朝鮮解放年報)』, 文友印書館, 1946, p. 3.
 
  37) 김남식, 『南勞黨硏究』, 돌베개, 1984, p. 17. 38) 鄭栢, 앞의 글; 『革命者新聞』 1945년 10월 4일자, 「革命日誌」, Chung-Sik Lee, ed., Materials on Korean Communism 1945-1947, Center for Korean Studies, University of Hawaii, 1977, p. 152; 『戰線』제4호(1945년 10월 31일)에는 장안파공산당이 결성된 것이 8월 16일이라고 했다. 39) 鄭栢, 앞의 글, pp. 7~8. 40) 鄭栢, 앞의 글, p. 8; 『戰線』1945년 10월 31일자, 「黨統一促進에 대한 略報」, 沈之淵, 『朝鮮革命論硏究 ─ 해방정국논쟁사 2』, 실천문학사, 1987, pp. 152~153. 41) 森田芳夫, 앞의 책, p. 81; 崔永禧, 『격동의 해방 3년』,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1996, p. 6; 강원용, 『역사의 언덕에서 ─ 젊은이에게 들려주는 나의 현대사 체험(1) 엑소더스』, 한길사, 2003, p. 185; 김형수, 『문익환 평전』, 실천문학사, 2004, p. 234; 趙萬薺 證言, 정신문화연구원 편, 『내가 겪은 건국과 갈등』, 선인, 2004, pp. 62~63; 『駐韓美軍史(1)』 (HUSAFIK 1), pp. 202~203. 42) 김남식, 앞의 책, p. 17. 43) 高峻石, 『朝鮮 1945-1950 革命史の證言』, 社會評論社, 1985, pp. 32~34.
 
  44) HQ,USAFIK, “G-2 Periodic Report no. 4”, (1945. 9.14), 國防部戰史編纂委員會 編, 『韓國戰爭史(1) 解放과 建軍』, 國防部戰史編纂委員會, 1968, p. 46에는 1만1,000명이라고 했다. 45) 森田芳夫, 앞의 책, p. 77. 46) 『每日新報』 1945년 8월 17일자, 「呂運亨氏講演」. 47) 李欄 口述, 「해방 전후의 여운형 ─ 이란(李欄)씨의 회고」, 이정식, 앞의 책, pp. 738~739, pp. 743~744. 48) 中保與作, 『新朝鮮の政治情勢』, 協同出版社, 1946, pp. 14~15. 49) 森田芳夫 著, 앞의 책, p. 83. 50) 파냐 샤브쉬나 지음, 김명호 옮김, 『1945년 남한에서』, 한울, 1996, p. 74. 51) 『駐韓美軍史(1)』 (HUSAFIK 1), p. 203. 52) 遞信部, 『電氣通信史資料(Ⅱ) 日本電氣電信公社 編, 外地海外電氣通信史資料 朝鮮之部 2』(年度未詳, 등사본), p. 566. 53) 長崎祐三, 「コケシと時計」, 森田芳夫 編,, 『須江二郞さんをぶ』, 學習院大學東洋文化硏究所, 1958, pp. 38~40.
 
  54) 『每日新報』, 1945년 8월 17일자, 「安在鴻氏放送」. 55) 李萬珪, 앞의 책, p. 194. 56) 위의 책, pp. 194~195. 57) 中保與作, 앞의 책, p. 15; 森田芳夫, 앞의 책, p. 81. 58) 『朝鮮年鑑』(1947年版), 朝鮮通信社, 1946, p. 373. 59) 愼道晟, 「韓民黨創黨②」, 『朝鮮日報』1981년 2월 25일자, 「轉換期의 內幕」 (34). 60) 『朝鮮解放一年史』, p. 80.
 
  61) 安在鴻, 「民政長官을 辭任하고」, 『民世安在鴻選集 (2)』, pp. 259~261. 62) 李仁, 앞의 책, pp. 145~146. 63) 李仁은 呂運亨이 宋鎭禹를 찾아간 것이 8월 16일 오후라고 했으나(李仁, 앞의 책, pp. 145~146), 여기서는 『古下宋鎭禹先生傳』의 기술(pp. 308~309)을 따른다. 呂運亨의 일정상 16일에 宋鎭禹를 찾아갔을 개연성은 희박하다. 64) 『古下宋鎭禹先生傳』, pp. 308~309. 65) 『每日新報』 1945년 8월 18일자, 「建國準備委員會呂運亨委員長談」. 66) <每日新報>, 1945년 8월 18일자, 「建國準備委員會指令」. 67) 李萬珪, 앞의 책, p. 210; 『朝鮮解放一年史』, p. 81. 68) 森田芳夫, 앞의 책, p. 103. 69) 위의 책, p. 104; 李榮根, 「八·一五解放前後のソウル① 建國準備委員會」, 『統一朝鮮新聞』1970年8月15日字, 번역문은 「呂運亨〈建準〉의 좌절」, 『月刊朝鮮』1990년 8월호, pp. 445~446. 70) 森田芳夫, 앞의 책, p. 81.
 
  71) 李萬珪, 앞의 책, p. 213. 그러나 『京城日報』 주필이었던 나카야스 요사쿠(中保與作)는 여운형이 극도의 피로 때문에 입원한 것이 테러를 당했다고 와전되었다고 기술했다(中保與作, 앞의 책, p. 20). 여운형 자신은 8월 25일에 건준간부들에게 일사병(日射病) 같은 병세로 정양을 위해 시골에 가 있었다고 말했다(李萬珪, 앞의 책, p. 213). 72) 『每日新報』, 1945년 9월 1일자, 「各界各層을 網羅한 百三十五氏 招請」. 73) 李萬珪, 앞의 책, pp. 216~217; 李仁, 앞의 책, pp. 146~147. 74) 李萬珪, 위의 책, pp. 217~218. 75) 위의 책, p. 218. 76) 『每日新報』, 1945년 9월 1일자, 「委員會京城支部會의 發足」. 77) 鄭栢, 앞의 글, p. 8. 78) 중앙일보 특별취재반, 『示必錄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1992, 中央日報社 p. 281; 박헌영, 「자필 이력서」, 이정박헌영전집편찬위원회 편, 『이정박헌영전집②』, 역사비평사, 2004, p. 59. 79) 金午星, 『指導者群像』, 大成出版社, 1946, p. 19. 80) 박헌영, 「자필이력서」, 『이정박헌영전집②』, p. 59; 박갑동, 『朴憲永』, 인간사, 1983, pp. 88~89. 81) 『示必錄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pp. 280~284; F. 샤브시나 꿀리꼬바, 「역사인물회고 ─ 소련의 여류 역사학자가 만난 박헌영」, 『역사비평』(1994. 여름), p. 179; 안재성, 『이관술 1902-1950』, 사회평론, 2006, p. 165. 82) 박헌영, 「현정세와 우리의 임무」, 『이정박헌영전집②』, p. 49.
 
  83) 위의 글, p. 50. 84) 村田陽一 編譯, 『コミンテルン資料集(4)』, 大月書店, 1981, pp. 487~495 참조. 85) 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사연구 ─ 해방 후 민족국가 건설운동과 통일전선』, 역사비평사, 1991, p. 236. 86) 박헌영, 「현정세와 우리의 임무」, 『이정박헌영전집②』, p. 51. 87) 위의 글, p. 55. 88) 『戰線』제4호, 1945년 10월 31일자, 「黨統一促進에 대한 略報」. 89) 李萬珪, 앞의 책, p. 215. 90) 위의 책, p. 210. 91) 이정식, 앞의 책, pp. 522~524. 92) 李萬珪, 앞의 책, pp. 211~212.
 
  93) 위의 책, p. 213. 94) 安在鴻, 「夢陽 呂運亨씨의 追憶」, 『民世安在鴻選集 (2)』, p. 205. 95) 『每日新報』, 1945년 8월 24일자, 「朝鮮은 蘇軍과 米軍」. 96) 『京城日報』, 1945년 8월26일자, 「南鮮は米, 北はソ. 夫れ夫れ分割占領」. 97) 山名酒喜男, 「終戰前後に於ける朝鮮事情槪要」, 森田芳夫-長田かな子 編, 『朝鮮終戰の記錄 資料篇(一)』, 1979, 巖南堂書店 p. 18. 98) 李庭植, 「呂運亨과 建國準備委員會」, 『歷史學報』 제 134-135合輯, 歷史學會, 1992, pp. 48~50. 99) 許政, 『내일을 위한 證言 ─ 許政回顧錄』, 샘터, 1979, pp. 95~96. 100) 위의 책, pp. 96~97. 101) 李萬珪, 앞의 책, p. 205. 102) 許政, 앞의 책, pp. 98~99; 李敬南, 『雪山 張德秀』, 東亞日報社, 1981, pp. 300~301.
 
  103) 李仁, 앞의 책, pp. 146~148. 104) 위의 책, p. 149. 105) 李起夏, 『韓國政黨發達史』, 議會政治社, 1961, p. 58. 106) 尹潽善, 『救國의 가시밭길 ─ 나의 回顧錄 ─』, 韓國政經社, 1967, p. 45. 107) 李起夏, 앞의 책, p. 58; 許政, 앞의 책, pp. 99~100. 108) 李萬珪, 앞의 책, pp. 218~219. 109) 위의 책, pp. 219~220; 『每日新報』, 1945년 9월 2일자, 「朝鮮國民黨을 結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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