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나자마자 용건부터 말하는 실용적 국민성
⊙ 월러스틴 예일大 석좌교수 “진정한 패권大國은 영국, 미국, 네덜란드”
⊙ 시골 중소기업도 무역 전문용어 척척… 생활속 깊숙이 국제화
⊙ ‘합법적 매춘’에 제동 건 암스테르담市정부… 홍등가 폐업 잇따라
⊙ “한국이 네덜란드를 배워야 하는 시대 지났다. 이젠 협업해야” (하인스브록 駐韓 네덜란드 대사)
⊙ 월러스틴 예일大 석좌교수 “진정한 패권大國은 영국, 미국, 네덜란드”
⊙ 시골 중소기업도 무역 전문용어 척척… 생활속 깊숙이 국제화
⊙ ‘합법적 매춘’에 제동 건 암스테르담市정부… 홍등가 폐업 잇따라
⊙ “한국이 네덜란드를 배워야 하는 시대 지났다. 이젠 협업해야” (하인스브록 駐韓 네덜란드 대사)
- 유로마스트 전망대에서 본 유럽 최대 항구 도시 로테르담 전경.
음습(陰濕). 첫 느낌은 그랬다. 건물 끝에 걸릴 것 같은 낮은 구름과 흩뿌려지는 빗방울은 일주일 취재 일정 내내 기자를 따라다녔다. 짙은 안개는 한 치 앞을 보기 어렵게 했고, 초저녁이면 해가 져버려 거리의 음산함을 더했다. 화창한 봄날 아름다운 튤립과 풍차가 어우러진 총천연색 네덜란드는 먼 나라 이야기였다.
유럽의 관문(關門), 히딩크의 고향, 자전거의 천국, 농업강국…. 네덜란드 하면 먼저 떠오르는 표현들이다. 좀 더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100여 년 전 일제의 강압을 폭로하기 위해 특사를 파견했던 헤이그, 나치의 잔혹한 탄압을 일기로 기록한 안네 프랑크의 집, 145년 전통의 하이네켄 맥주, 17세기 세계 최강 스페인 무적(無敵)함대를 무찌른 해군력, 20세기 전자기기 발달을 선도한 필립스, 인상파와 바로크 미술을 이끈 반 고흐와 렘브란트 등 네덜란드가 지닌 깊은 잠재력과 영욕(榮辱)의 역사를 말할 것이다.
바다를 메워 개척한 낮은 땅과 유럽 최강국 독일, 프랑스, 영국 사이에 자리 잡은, 남한의 절반도 안되는 땅에서 네덜란드인은 세계 역사를 뒤흔드는 기적을 일궈냈다. 무엇이 그들을 강하게 만들었을까. 2009년 11월 15일부터 일주일간 진행된 취재는 그 해답을 찾기 위한 노력이었다.
‘유럽의 허브’ 암스테르담 스키폴 공항은 인천국제공항이 벤치마킹한 공항답게 세계 각국에서 온 항공기와 승객으로 북적댔다. 수속을 마친 후 공항 밖으로 나오니 뭔가 빠진 듯 허전했다. 여행의 ‘목적’이나 ‘기간’을 묻는 그 흔한 질문도 없이, 일사천리로 출입국 심사와 세관을 줄 한 번 서지 않고 통과한 것이다. 최고 보안을 자랑하는 공항이니만큼 별문제가 없으니 통과됐겠지만, ‘유럽의 관문이 너무 쉽게 뚫리는 게 아닐까’란 기우(杞憂)가 생길 만큼 빠른 수속이었다.
담배꽁초와 쓰레기로 너저분한 거리
공항에서 암스테르담까지는 열차로 이동했다. 네덜란드의 철도 시스템은 처음엔 복잡해 보이지만, 조금만 익숙해지면 꽤 간단한 원리다. 우선 자동발매기에서 표를 산 후, 지정 플랫폼으로 가면 정시(定時)에 출발하는 열차를 탈 수 있다. 서울행(行), 부산행처럼 구간에 따라 플랫폼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 각 시간별로 바뀌는 플랫폼을 찾아가는 원리다. 열차표엔 따로 시간과 좌석이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원하는 시각에 도착하는 열차를 타서 아무 자리에나 앉으면 된다. 표 검사를 하는 일은 드물지만, 네덜란드인의 ‘성격상’ 무임승차는 거의 없다고 한다.
암스테르담 중앙역에 내렸다. 비잔틴과 르네상스 양식이 혼합된 역사(驛舍)가 낯설지 않았다. 1925년 조선총독부가 암스테르담 중앙역과 핀란드 헬싱키 중앙역을 본떠 지은 서울역의 이미지가 묘하게 겹쳐졌기 때문이다.
중앙역 앞은 바로 암스테르담 도심과 연결돼 있다. 인종전시장을 방불케 하는 다양한 피부색의 사람들이 바쁘게 오갔다. 좁은 전용도로를 따라 자전거가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남녀를 불문하고 누구든 자유롭게 길을 걸으며 담배를 피웠고, 거리 주변은 버려진 꽁초와 쓰레기들로 너저분했다.
암스테르담은 도심 곳곳이 물길로 연결된 ‘운하의 도시’다. 땅을 제방으로 둘러싼 후 고인 물을 빼기 위해 배수시설용으로 만든 운하는 시민의 중요한 교통로가 됐다. 네덜란드는 도시 이름에 ‘담(dam)’이 붙은 경우가 많은데, 말 그대로 오래전 강둑을 따라 건설된 댐을 중심으로 사람이 모여 마을이 생겨났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암스테르담은 암스텔강(江)을 가로지르는 댐이란 뜻이다.
암스테르담은 홍콩과 닮은 점이 많다. 홍콩은 중국 본토와, 암스테르담은 유럽 대륙과 연결된 중요한 물류중심지다. 대륙의 모든 경제 동맥이 한곳으로 모이고, 세계 각지의 물류가 쌓이는 거대한 시장이다. 교역을 위한 용역 수요로 인해 인구가 늘었고, 원료 가공으로 도시는 부를 얻었다.
만나면 용건부터 말하는 네덜란드 국민
자유로운 사유(思惟)를 즐기는 암스테르담 시민은 그곳을 진보적인 도시로 바꿨다. 유럽에서 가장 늦게 태형을 없앤 곳이지만, 사형제를 가장 먼저 폐지한 곳도 바로 암스테르담이다.
자유로운 사유는 해상무역 발달로 이어졌다. 동인도회사를 최초로 설립한 나라는 영국이 아닌 네덜란드다. 1602년 설립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동인도의 여러 섬을 점령해 향신료 무역을 독점했다. 1799년 해산 때까지 동인도회사를 통해 식민지 경영이 이뤄졌고, 헤이그의 재무성은 이를 통해 이윤을 남겼다.
자금력이 확보된 네덜란드는 19세기 후반부터 본격 성장 궤도에 올랐다. 1871년 독일을 통일한 비스마르크는 강력한 산업화 정책을 추진했다. 라인강 하구에 자리한 네덜란드는 자연스럽게 독일의 관문이 됐다.
2010년 현재 네덜란드는 세계 8위의 무역대국이다. KOTRA 암스테르담 코리아비즈니스센터(KBC)에 따르면, 네덜란드의 연간 교역규모는 7000억 유로(약 1135조원)에 육박하고, 세계 500대 기업 중 14개를 보유하고 있다. 외국인이 투자하는 유럽물류센터의 75%가 네덜란드에 있고, 유럽 수입물량의 60%, 수출물량의 30%를 취급해 유럽의 ‘작은 거인’으로 불린다. 세계 2대(大) 대한(對韓)투자국으로 연간 10억 달러 이상을 한국에 투자한다.
윤재천(尹在天) 암스테르담 KBC 센터장은 “네덜란드는 경쟁력 유지를 위해 핵심기술을 특화해 의료첨단장비, 금융컨설팅, 건축디자인 등 전략적 고부가가치에 집중하는 경향이 강하다”고 분석했다. 윤 센터장의 설명이다.
“과거 주력산업이었던 전자제품과 조선(造船)산업의 주도권이 한국과 일본 등 아시아로 넘어간 것은 사실입니다. 네덜란드의 자존심인 필립스를 제치고 삼성이 유럽 TV 시장 독주체제를 갖춘 것은 큰 사건이죠. 하지만 여전히 특수장비를 비롯한 여러 분야에서 네덜란드의 경쟁력은 결코 무시할 수 없습니다.”
―한국이 네덜란드를 통해 배워야 할 점은 무엇입니까.
“실용적 국민의식구조입니다. 바로 국경을 맞댄 벨기에 사람들만 해도 한 번 만나면 헤어질 때가 돼야 용건이 나옵니다. 한국도 비슷하죠. 네덜란드 사람은 만나자마자 용건부터 말합니다. 시간낭비와 형식적 예의 등 거품이 없죠.”
전쟁 중에도 적국과 은행거래
농축산업도 고부가가치로 이동하고 있다. 일찌감치 화훼와 치즈 등 산업에 집중한 네덜란드는 현재 미국, 프랑스와 함께 세계 3대 농축산물 수출 대국으로 꼽힌다.
“치즈와 화훼는 농축산물 중 부피에 비해 가장 비쌉니다. 무작정 농사지어 팔겠다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 속에서 자신이 가진 경쟁력을 철저하게 분석해 실행에 옮기는 것이죠. 네덜란드는 자국의 약점이 무엇인지, 그리고 무엇에 집중해야 할지를 분명히 아는 국가예요.”
윤 센터장은 “일본에 처음 진출한 나라는 포르투갈이었지만, 결국 일본은 네덜란드를 선택했다”면서 “가톨릭 신앙을 강요했던 포르투갈과 달리, 네덜란드는 종교 대신 교역을 통한 실익을 선택해 2009년 양국 교역 400주년을 맞이할 수 있었다”며 실용성을 강조했다.
1980년부터 30년간 로테르담에서 선박기술감독업에 종사해 온 이욱현(李旭鉉) 재화란 한인경제인협회 회장은 네덜란드의 가장 큰 원동력을 지리적 환경에서 찾았다.
“오늘날 네덜란드를 만든 가장 큰 배경은 ‘척박한 땅’입니다. 저습(低濕)하고 바람만 센 땅이라 중동에서 풍차를 도입해 물을 퍼냈죠. 풍차를 나무로 만드니 자연스럽게 제재(製材) 기술이 발달했고, 조선산업의 발달로 이어졌습니다. 농사가 어려운 땅도 결국 최대 농업국이 되는 밑거름이 됐습니다. 농작물 대신 건초를 키울 수밖에 없었고, 이는 곧 축산업의 발달로 이어졌죠.”
―네덜란드의 경쟁력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장소가 있을까요.
“로테르담입니다. 4년 전까지 세계 최대 항구였죠. 지금은 중국 상하이(上海)에 그 자리를 내줬지만, 여전히 유럽 최대 항구로 그 위용이 엄청납니다. 거대한 항구를 오가는 세계 각국의 선박을 보면, 저절로 ‘유럽의 관문’이란 말이 나오죠. 한국 선박도 연간 100회 이상은 꾸준히 와요.”
―그럼 로테르담 항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장소는 있겠습니까.
사진 촬영을 위해 로테르담 항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장소를 소개해 달라 하니, 이 회장은 어이가 없는 듯 웃었다.
“항구 총 연장이 40km가 넘는데, 무슨 수로 한눈에 볼 수 있겠습니까. 배를 타고 돌아도 며칠은 걸려요.”
―작고 척박한 땅의 나라가 어떻게 세계 최대의 항구를 갖게 됐을까요.
“한때 세계를 제패한 강대국들의 흥망성쇠를 다룬 중국 CCTV의 <대국굴기>를 보면, 진정한 대국(大國)으로 세 나라를 꼽습니다. 바로 미국, 영국, 네덜란드죠. 세계 최초로 주식거래소를 만들었고 스페인과의 전쟁 중에도 적국(敵國) 사람들과 은행 거래는 계속할 정도로 신용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현재 세계의 심장인 뉴욕을 건설한 것도 무역과 상업의 귀재였던 이들이었죠.”
중국 CCTV의 다큐멘터리 <대국굴기>에서 임마누엘 월러스틴 예일대 석좌교수는 “패권대국은 자국의 이익에 따라 세계질서를 재편할 수 있고, 군사력을 동원하지 않아도 자국의 목적을 이룰 수 있는 나라”라며 진정한 패권대국으로 영국, 네덜란드, 미국을 꼽았다.
이 회장은 네덜란드가 국제적으로 발전한 가장 큰 비결로 ‘국제화된 국민성’을 들었다.
“한국도 많은 산업분야에서 세계 1위를 기록하고 2010년 G20 정상회담을 개최할 만큼 세계의 중심국이 됐지만, 생활 속 깊숙이 국제화가 완성되진 못했습니다. 네덜란드는 시골의 작은 업체를 가도 놀랍도록 무역상식이 폭넓고 전문용어를 정확하게 이해합니다. 국제상거래에 대한 지식이 기본적으로 많아요. 우리나라도 국가 차원이 아닌 국민 개개인의 국제화가 이뤄져야 합니다.”
캐나다·영국보다 토플성적 높아
네덜란드인의 국제화 수준은 영어 구사 능력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토플시험을 주관하는 미국 ETS사(社)가 발표한 국가별 성적에 따르면, 네덜란드가 102점으로 1위, 덴마크가 101점으로 2위다. 영어권인 캐나다(91점)나 영국(95점)보다 평균점수가 오히려 높다.
위트레흐트 일정을 마친 후 유럽 최대항구를 직접 보기 위해 로테르담행 열차표를 샀다. 12시33분 차를 타기 위해 8번 플랫폼에서 한참을 기다렸는데 35분이 돼도 열차는 보이지 않았다. ‘시간과 약속을 칼같이 지키는 나라’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에 열차 시간표를 유심히 보고 있었다. 당황한 동양인의 모습이 딱했던지 한 20대 여성이 도울 일이 있느냐고 물어왔다.
“출발 시각을 넘겼는데 열차가 보이지 않는다”고 하자, 기자의 티켓과 시간표를 살펴본 그는 “‘8b’ 플랫폼이 아닌 ‘8a’에서 정시에 떠났다”며 자신도 마침 로테르담에 가는 길이라며 안내를 자청했다.
그의 이름은 엘가 빌렘슨, 네덜란드 동부 알멜로 지역 출신으로 위트레흐트 대학에서 저널리즘을 공부하고 있다. 학교 수업 과제로 로테르담의 ‘창조산업’에 대한 인터뷰를 하러 가는 길이었다. 한국에서 온 기자라고 소개하자, 그는 “우연한 인연이 너무 신기하다”면서 네덜란드 신문 목록을 발행부수 순서대로 적어가며 언론 환경에 대해 설명했다.
“(한 신문 이름을 가리키며) 이 신문이 현재 가장 많이 팔리고 있지만, 동시에 가장 ‘나쁜’ 신문이기도 하죠. 제가 좋아하는 신문은 발행부수 2·3위인 이 두 신문입니다. 저는 기회가 된다면 이 두 번째 신문사에 꼭 입사하고 싶어요.”
―1등 신문이 ‘나쁜’ 이유가 뭔가요.
“정치적 성향도 있고, 너무 발행부수에만 신경 쓰는 것이 보기 좋지 않습니다. 설명하기 어려운 꽤 복잡한 사연이 있어요.”
저널리즘 배우는 학생이면 3~4개 국어는 기본
그는 한국과 아시아를 비롯한 세계 각국의 정세에 관심이 많았다. 미국에선 교환학생을 했고, 베트남과 태국 등 동남아시아를 3개월 동안 혼자 여행했다. 모국어와 영어는 완벽하게 구사하고, 프랑스어, 독일어, 스페인어는 중급 이상의 실력을 갖추고 있다.
기자가 놀라워하자 그는 “네덜란드에서 저널리즘을 공부하는 학생이라면 이 정도는 기본”이라며 웃어넘겼다.
대화를 나누던 중, 좌석 옆에 놓인 신문이 눈에 들어왔다. ‘스피츠’란 이름의 무가지로, 주요뉴스와 연예·스포츠 소식으로 채워져 있었다. 한국과 비슷하게 첫 장과 뒷장이 전면광고였는데, 마침 현대자동차의 기업 광고였다. 낯선 이국의 신문에서 본 한국기업의 전면광고가 반가웠다.
로테르담역에서 빌렘슨 씨와 인사를 나눈 후, 관광안내센터에 가서 “로테르담 항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 있느냐”고 물었다. 한눈에 절대로 볼 수 없다는 이욱현 회장의 설명대로 직원은 난색을 보였다. 한참 후 직원은 지도를 꺼내며 한 곳을 가리켰다. “항구 전체를 한눈엔 볼 수 없지만, 항구 일부와 로테르담 시내 전경을 볼 수 있다”며 ‘유로마스트’를 소개했다.
로테르담 항의 북쪽 강가에 솟아 있는 높이 185m의 타워로, 360도로 회전하며 수직상승하는 전망대에 타면, 항구와 시내의 풍경을 파노라마로 볼 수 있다.
타워 꼭대기에서 본 로테르담은 천혜(天惠)의 항구였다. 독일에서부터 흘러온 라인강이 긴 해안선을 그리며 서쪽 바다와 합쳐져 거대한 유로 포트를 완성해 가고 있었다. 로테르담이 몇 해 전까지 세계 최대 항구자리를 차지했던 가장 큰 이유는 네덜란드의 수출입 물자 증가가 아니라 유럽대륙을 가로지르는 라인강 하구에 도시가 위치했기 때문이었다.
타워 동쪽엔 로테르담의 랜드마크인 ‘에라스뮈스 다리’가 보였다. 일명 ‘백조다리’로도 불리며, 세계적인 디자인을 자랑하는 로테르담 도시 경관의 결정판이다. 에라스뮈스 거리, 에라스뮈스 동상, 에라스뮈스대학 등 로테르담에는 유난히 ‘에라스뮈스’란 이름의 건축물이 많다. <우신예찬(愚神禮讚)>을 쓴 인문학자 에라스뮈스가 바로 로테르담 출신이기 때문이다.
紅燈街에서 물벼락 맞은 사연
로테르담은 160개국 출신이 모여 살고 있다. 백인은 도시 인구 60만명 중 3분의 1밖에 되지 않는다. 다시 열차에 올라 1m가 넘는 암스테르담 지도를 펼치자 옆자리의 40대 남자가 “여행 왔느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하자, 한 곳을 가리키며 ‘꼭 가봐야 한다’고 소개했다. 표기된 명칭은 ‘Red Light District’, 홍등가(紅燈街)다.
기자의 당황스런 표정을 봤는지 그는 곧바로 “예상과는 전혀 다른 거리 분위기를 볼 수 있을 것”이라며 “부담 갖지 말고 꼭 구경해 보라”고 덧붙였다.
암스테르담역에서 홍등가까지는 걸어서 10분이 걸리지 않는다. 남자의 말은 사실이었다. 마약과 성(性)에 굶주린 남성들로 가득한 음란한 뒷골목 대신, 깔끔하게 정비된 운하 사이로 700년 역사의 거리가 보였다. 부부동반 또는 가족 단위로 나온 관광객, 테이크아웃 커피를 들고 바쁘게 걷는 여성들, 나란히 서서 단체사진을 찍는 동양인들…. 남녀노소가 거리를 채운 모습이 ‘홍등가’라기보단 ‘홍등축제를 여는 관광중심지’가 맞는 듯했다.
카페와 식당 사이사이에 자리 잡은 붉은색 조명의 성매매업소들은 이곳이 단순관광지가 아님을 말해 준다. 유리창 너머 반라(半裸)의 여성들이 손짓하는 업소와 마리화나를 판매하는 카페 사이로 정복을 입은 기마경찰이 오가는 모습은 마약과 매춘이 합법화된 네덜란드에서만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이색적인 풍경을 담기 위해 카메라를 꺼내 들었다. 플래시가 터지는 순간, 뒤편의 한 여성이 생수병을 집어 물을 끼얹었다. 그녀는 벽에 걸린 팻말을 가리키며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소리를 질렀다. 팻말을 보니 ‘사진을 찍지 마라’는 문구가 보였다. “말로 설명하면 되지 왜 물을 끼얹느냐”고 항의했지만, 그녀가 할 줄 아는 영어는 몇 마디 욕설이 전부였다. 옆에 있던 경찰이 바로 달려와 사진내용에 큰 문제가 없음을 확인하고, 여성이 소속된 업소의 포주를 불러내 주의를 주는 것으로 승강이는 정리됐다.
홍등가는 2000년 매춘 합법화 이후 약 480개 업소가 성매매로 연간 1억 유로(1620억원)의 매출을 올리며 성업해 왔다. 하지만 2008년 암스테르담 시(市) 정부는 업소 수를 절반으로 줄이는 도시정화 계획을 발표했고, 지정된 업소의 폐업이 현재까지 진행되고 있다. 정부조치에 겁을 먹어서일까, 저녁 8시란 시간이 일러서일까, 창문을 열고 여성들과 흥정하는 남자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웠다.
세계 최고 DJ와 최고의 자전거 보유율
네덜란드는 자전거 천국이다. 어느 거리에나 쉽게 자전거 전용도로와 자전거 신호등이 설치된 것을 볼 수 있고, 철도역과 터미널 등 주요 시설엔 자전거 주차장이 설치돼 있다. 보급된 자전거 수는 1800만여 대로, 인구 1인당 1.1대다. 사람보다 자전거가 많은 셈이다.
자전거와 함께 네덜란드가 세계 최고 자리를 차지한 것이 바로 DJ 분야다. 영국은 지난해 11월 세계 최고의 DJ로 네덜란드 출신 판 뷔런을 선정했다. 2위도 네덜란드인인 티에스토가 차지했다. 현지교민 최종택(崔鍾澤·28)씨는 “네덜란드라 하면 보통 무역과 농업을 떠올리지만, DJ 분야에서 독보적인 선두를 차지할 만큼 엔터테인먼트 분야의 발전이 눈부시다”며 “네덜란드 젊은이의 열정과 역동적인 문화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했다.
암스테르담 일정을 마친 후 헤이그로 향하는 열차에 올랐다. 네덜란드의 정식수도는 암스테르담이지만, 실질적 수도는 정부기관과 외교공관이 모여 있는 헤이그다. 헤이그로 가는 목적은 단 한 가지였다. 한 세기 전 대한제국의 독립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떠난 헤이그 특사의 흔적을 밟기 위해서다.
1843년 지어진 헤이그HS역은 19세기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역을 보는 순간 2008년 1월 러시아 연해주 취재 중 방문했던 블라디보스토크역이 떠올랐다.
1907년 5월 21일, 두 조선인 남자가 블라디보스토크역에 들어섰다. 그들의 이름은 이준(李儁)과 이상설(李相卨). 대한제국 고종황제의 밀명을 받고 한 달 전 서울에서 출발해 블라디보스토크~상트페테르부르크~베를린~브뤼셀을 거쳐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열리는 헤이그에 6월 25일 도착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합류한 이위종(李瑋鍾)과 함께 역전(驛前) 중앙로인 ‘바겐 슈트라트’의 ‘드용호텔’에 여장을 푼 이들은 곧바로 옥상에 올라가 태극기를 게양했다.
그들이 묵었던 호텔엔 100년을 넘긴 현재도 태극기가 높이 걸려 있다. 1995년 현지 교포인 이기항(李基恒·73)·송창주(宋昌姝·70)씨 부부가 사재 20만 달러를 털어 세운 ‘이준열사기념관’으로, 한 세기 전 헤이그특사가 묵었던 방을 재현하는 한편, 이들의 유품과 서신 등 자료를 공개하고 있다.
“아직도 이준 열사가 자결했다는 설을 사실로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당시 신문보도와 기자회견 등 사료에는 자살에 대한 근거가 전혀 없어요. 사망 장소와 시간도 자살과는 거리가 멉니다.”
송창주 기념관장은 “만약 독립을 위해 자결을 결심했다면, 일요일 저녁 7시 호텔방에서 홀로 숨지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사인(死因)에 대한 의문이 많이 남아 있다”고 했다. 송 관장이 공개한 이준 열사의 사망보고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법관이었고 한국에 거주하는 이준은 금월(7월) 14일 저녁 7시에 여기(헤이그)서 사망했으며, 나이는 49세, 함경도 북청에서 태어나고 결혼했으며, 그 이외에는 알려진 바 없음…>
“이준 열사는 자결하지 않았다”
1907년 7월 16일 주(駐)네덜란드 일본 대사의 전보는 사인을 단독(丹毒·종기 또는 종창)이라 표현했고, 자살이란 풍설(風說)이 현지에 돌고 있다고 덧붙였다. 송 관장의 설명이다.
“일본 대사가 쓴 ‘풍설’을 가지고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자결’이란 표현을 쓰는 것은 우리나라 국민의 역사인식 수준을 보여주는 예입니다.”
―일제에 의한 암살일 가능성도 있습니까.
“정황상 가능성은 있지만, 객관적 자료가 없으니 사실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 심장마비설과 종기설도 확실하지 않죠. 조국을 위해 타향에서 돌아가신 분입니다. 정확한 사인이 하루빨리 밝혀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기항 이준아카데미 원장은 “한국인 관람객이 해가 지나면서 계속 줄고 있다”며 “민족의 역사를 이해하는 일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졌으면 한다”고 했다.
“우리 부부의 나이도 이제 70이 넘었습니다. 힘이 남아 있을 때까진 계속 이 일을 하겠지만, 그 뒤엔 누가 어떻게 하겠습니까. 위대한 국가는 역사의 위대함을 후손이 제대로 기억할 때 완성됩니다.”
헤이그HS역으로 다시 돌아가는 길, 한 세기 전 그들의 발걸음을 그대로 따라가 봤다. 역사(驛舍)도 옛 모습 그대로였고, 거리엔 400년 된 집들이 즐비했다. 세계의 중심 국가로 우뚝 선 조국의 후손들이 이곳에 다시 찾아올 것을 100년 전 그들은 상상할 수 있었을까.
네덜란드는 한국과 닮은 점이 많다. 강대국에 둘러싸인 전략적 요충지에 교역의 중심지다. 인접한 국가에 점령됐고, 독립 후 눈부신 성장과 발전을 이뤘다. 좁은 국토와 높은 인구 밀도에도 세계적 기업을 일으켜 영향력을 떨쳤다. 네덜란드의 ‘찬란한 과거’는 한국의 현재 모습과 흡사하다. 우리의 미래는 그들의 현재와 어떻게 달라질까. 오늘날 한국이 네덜란드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 네덜란드 국가 개요
⊙ 공식국명 The Kingdom of the Netherlands
⊙ 면적 4만1548㎢ (한반도의 5분의 1)
⊙ 인구 1634만명 (2006년 기준, 인구밀도 세계5위)
⊙ 종교 가톨릭(32%), 개신교(25%), 기타(5%), 무교(38%)
⊙ 정부형태 내각책임제, 양원제 (상원 75석, 하원 150석)
⊙ 1인당 GDP 4만598달러 (2008년 기준)
⊙ 세계 8위 무역국(한국은 11위), 세계 2대 대한(對韓)투자국, 세계 3대 농축산물 수출국
[인터뷰] 金永元 駐 네덜란드 대사
“태양광전지·풍력발전 배워야”
“네덜란드는 국민총소득(GNI) 중 0.8%가 공적개발원조자금(ODA)에 들어갑니다. 절대규모도 70억 달러로 세계 6위죠. ‘원조받는 나라’에서 ‘원조하는 나라’가 된 한국은 불과 0.07%밖에 되지 않습니다. 세계금융위기와 수출·투자 감소에 허덕이는 네덜란드가 아직 건재한 영향력을 과시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헤이그 주(駐)네덜란드 대사관에서 만난 김영원(金永元) 대사는 ODA 이야기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아프가니스탄과 보스니아 등 분쟁국 파병은 물론 국제원조의 책임도 함께 지녀야만 국제경쟁력이 큰 리더십 국가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네덜란드의 가장 큰 경쟁력은 무엇입니까.
“세계경제포럼(WEF)의 2009-2010 세계경쟁력 평가에서 조사대상 133개 국가 중 10위를 차지하는 등 네덜란드는 여전히 우수한 경쟁력과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외부정세에 밝고, 신기술 도입에 적극적인 요소가 큰 영향을 줬죠. 전년 순위 8위에서 2단계 하락한 것은 금융시장 평가가 악화됐기 때문입니다.”
김 대사는 열린 국민성, 영어구사능력, 국제기구 유치, 컨설팅산업 육성 등을 경쟁력의 중요한 배경으로 꼽았다.
―한국과의 경제협력 현황은 어떻습니까.
“우리나라의 유럽 제2의 교역 대상국입니다. 2008년 기준으로 64억 달러를 수출했고, 32억 달러를 수입했죠. 유럽에서 가장 큰 대한(對韓)투자국으로, 2008년 네덜란드는 12억 달러를, 한국은 8억 달러를 투자했습니다. 한국이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국가입니다.”
김 대사는 신재생에너지, 물류 분야 등 양국이 서로 협력해 나가야 할 과제가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세계적 수준인 태양광전지와 풍력발전기 연구 분야는 우리가 계속 배워야 할 과제입니다. 물류 분야도 한국이 동북아 물류허브를 지향하는 만큼 유럽의 허브인 네덜란드와의 협력이 매우 중요하겠죠. 새만금사업도 오랜 역사의 네덜란드 간척지 개발 경험을 활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터뷰] 한스 하인스브록 駐韓 네덜란드 대사
“작은 나라는 환경에 빨리 적응해야 살아남아”
“왜 아직도 네덜란드에 무언가를 배우려고만 하나요? 한국이 선진국을 무조건 배워야 하는 시대는 이미 지났습니다. 양국은 이제 동등한 위치와 시각으로 서로 협력해야 하는 동반자입니다.”
한스 하인스브록 주한 네덜란드 대사는 “무엇을 배워야 하나”란 질문에 예상치 못한 답변을 내놓았다.
“한국은 단기간에 놀라운 경제성장을 하며 기적을 일궈냈습니다. 압축 성장 과정에선 유럽과 미국의 발전모델을 많이 연구하고 따라야 했지만, 이젠 상황이 바뀌었죠. 선진국 문턱에 성큼 다가선 만큼, 보다 창조적이고 앞선 정책을 세워 함께 공존하는 방안을 모색해야 합니다. 저희가 한국에서 배워야 할 점이 너무나 많은 걸요.”
―구체적으로 어떤 분야에서 협력이 가능할까요.
“양국은 공통점이 많습니다. 국제정세와 지리적 환경도 비슷한데다, 기회가 많고 역동적이죠. 특히 새만금과 4대강 살리기 사업은 저희와 긴밀한 협력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현 정부가 내세운 기간산업이니만큼, 꼭 성공해야 하겠죠.”
하인스브록 대사는 19세기부터 이미 간척사업을 시작한 네덜란드의 교훈을 잘 이용한다면 습지를 보호하고 환경파괴를 최소화할 수 있는 미래지향적 개발을 완성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네덜란드 경쟁력의 역사적 배경은 무엇입니까.
“‘물과의 전쟁’이죠. 국토의 60%가 해수면 아래에 있는 우리의 역사는 물에 정복당하지 않기 위해 강한 나라가 돼야 했죠. 이젠 시대가 바뀌었습니다. 물과의 전쟁이 아닌, 물과의 공존이 중요한 이슈입니다. 무조건 바다를 육지로 메우는 대신, 물 위에 뜨는 집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네덜란드 건설업체 ‘옴스’는 지구온난화로 인한 해수면 상승에 대비하기 위해 물 위에 뜨는 집을 개발했다. 보트 위에 지붕을 씌운 것이 아니라, 알루미늄과 목재를 이용해 번듯한 2층 집을 지었다. 가난의 상징이었던 수상가옥이 부의 상징으로 바뀌었다.
“한국과 네덜란드같이 작은 나라는 새로운 환경에 빠르게 적응해야 살아남습니다. 이것이 곧 ‘소국(小國)’을 ‘강국(强國)’으로 변화시키는 길이라는 것은 역사적으로 증명된 결과입니다. 한국과 네덜란드가 서로 돕고 협업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유럽의 관문(關門), 히딩크의 고향, 자전거의 천국, 농업강국…. 네덜란드 하면 먼저 떠오르는 표현들이다. 좀 더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100여 년 전 일제의 강압을 폭로하기 위해 특사를 파견했던 헤이그, 나치의 잔혹한 탄압을 일기로 기록한 안네 프랑크의 집, 145년 전통의 하이네켄 맥주, 17세기 세계 최강 스페인 무적(無敵)함대를 무찌른 해군력, 20세기 전자기기 발달을 선도한 필립스, 인상파와 바로크 미술을 이끈 반 고흐와 렘브란트 등 네덜란드가 지닌 깊은 잠재력과 영욕(榮辱)의 역사를 말할 것이다.
바다를 메워 개척한 낮은 땅과 유럽 최강국 독일, 프랑스, 영국 사이에 자리 잡은, 남한의 절반도 안되는 땅에서 네덜란드인은 세계 역사를 뒤흔드는 기적을 일궈냈다. 무엇이 그들을 강하게 만들었을까. 2009년 11월 15일부터 일주일간 진행된 취재는 그 해답을 찾기 위한 노력이었다.
‘유럽의 허브’ 암스테르담 스키폴 공항은 인천국제공항이 벤치마킹한 공항답게 세계 각국에서 온 항공기와 승객으로 북적댔다. 수속을 마친 후 공항 밖으로 나오니 뭔가 빠진 듯 허전했다. 여행의 ‘목적’이나 ‘기간’을 묻는 그 흔한 질문도 없이, 일사천리로 출입국 심사와 세관을 줄 한 번 서지 않고 통과한 것이다. 최고 보안을 자랑하는 공항이니만큼 별문제가 없으니 통과됐겠지만, ‘유럽의 관문이 너무 쉽게 뚫리는 게 아닐까’란 기우(杞憂)가 생길 만큼 빠른 수속이었다.
담배꽁초와 쓰레기로 너저분한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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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스테르담 중앙역 앞 거리. 150여 개국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으로 인종전시장을 방불케 한다. |
암스테르담 중앙역에 내렸다. 비잔틴과 르네상스 양식이 혼합된 역사(驛舍)가 낯설지 않았다. 1925년 조선총독부가 암스테르담 중앙역과 핀란드 헬싱키 중앙역을 본떠 지은 서울역의 이미지가 묘하게 겹쳐졌기 때문이다.
중앙역 앞은 바로 암스테르담 도심과 연결돼 있다. 인종전시장을 방불케 하는 다양한 피부색의 사람들이 바쁘게 오갔다. 좁은 전용도로를 따라 자전거가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남녀를 불문하고 누구든 자유롭게 길을 걸으며 담배를 피웠고, 거리 주변은 버려진 꽁초와 쓰레기들로 너저분했다.
암스테르담은 도심 곳곳이 물길로 연결된 ‘운하의 도시’다. 땅을 제방으로 둘러싼 후 고인 물을 빼기 위해 배수시설용으로 만든 운하는 시민의 중요한 교통로가 됐다. 네덜란드는 도시 이름에 ‘담(dam)’이 붙은 경우가 많은데, 말 그대로 오래전 강둑을 따라 건설된 댐을 중심으로 사람이 모여 마을이 생겨났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암스테르담은 암스텔강(江)을 가로지르는 댐이란 뜻이다.
암스테르담은 홍콩과 닮은 점이 많다. 홍콩은 중국 본토와, 암스테르담은 유럽 대륙과 연결된 중요한 물류중심지다. 대륙의 모든 경제 동맥이 한곳으로 모이고, 세계 각지의 물류가 쌓이는 거대한 시장이다. 교역을 위한 용역 수요로 인해 인구가 늘었고, 원료 가공으로 도시는 부를 얻었다.
만나면 용건부터 말하는 네덜란드 국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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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재천 암스테르담 KBC 센터장은 “네덜란드인의 실용적 국민성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
자유로운 사유는 해상무역 발달로 이어졌다. 동인도회사를 최초로 설립한 나라는 영국이 아닌 네덜란드다. 1602년 설립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동인도의 여러 섬을 점령해 향신료 무역을 독점했다. 1799년 해산 때까지 동인도회사를 통해 식민지 경영이 이뤄졌고, 헤이그의 재무성은 이를 통해 이윤을 남겼다.
자금력이 확보된 네덜란드는 19세기 후반부터 본격 성장 궤도에 올랐다. 1871년 독일을 통일한 비스마르크는 강력한 산업화 정책을 추진했다. 라인강 하구에 자리한 네덜란드는 자연스럽게 독일의 관문이 됐다.
2010년 현재 네덜란드는 세계 8위의 무역대국이다. KOTRA 암스테르담 코리아비즈니스센터(KBC)에 따르면, 네덜란드의 연간 교역규모는 7000억 유로(약 1135조원)에 육박하고, 세계 500대 기업 중 14개를 보유하고 있다. 외국인이 투자하는 유럽물류센터의 75%가 네덜란드에 있고, 유럽 수입물량의 60%, 수출물량의 30%를 취급해 유럽의 ‘작은 거인’으로 불린다. 세계 2대(大) 대한(對韓)투자국으로 연간 10억 달러 이상을 한국에 투자한다.
윤재천(尹在天) 암스테르담 KBC 센터장은 “네덜란드는 경쟁력 유지를 위해 핵심기술을 특화해 의료첨단장비, 금융컨설팅, 건축디자인 등 전략적 고부가가치에 집중하는 경향이 강하다”고 분석했다. 윤 센터장의 설명이다.
“과거 주력산업이었던 전자제품과 조선(造船)산업의 주도권이 한국과 일본 등 아시아로 넘어간 것은 사실입니다. 네덜란드의 자존심인 필립스를 제치고 삼성이 유럽 TV 시장 독주체제를 갖춘 것은 큰 사건이죠. 하지만 여전히 특수장비를 비롯한 여러 분야에서 네덜란드의 경쟁력은 결코 무시할 수 없습니다.”
―한국이 네덜란드를 통해 배워야 할 점은 무엇입니까.
“실용적 국민의식구조입니다. 바로 국경을 맞댄 벨기에 사람들만 해도 한 번 만나면 헤어질 때가 돼야 용건이 나옵니다. 한국도 비슷하죠. 네덜란드 사람은 만나자마자 용건부터 말합니다. 시간낭비와 형식적 예의 등 거품이 없죠.”
전쟁 중에도 적국과 은행거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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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욱현 재화란 한인경제인협회 회장이 로테르담의 현황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치즈와 화훼는 농축산물 중 부피에 비해 가장 비쌉니다. 무작정 농사지어 팔겠다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 속에서 자신이 가진 경쟁력을 철저하게 분석해 실행에 옮기는 것이죠. 네덜란드는 자국의 약점이 무엇인지, 그리고 무엇에 집중해야 할지를 분명히 아는 국가예요.”
윤 센터장은 “일본에 처음 진출한 나라는 포르투갈이었지만, 결국 일본은 네덜란드를 선택했다”면서 “가톨릭 신앙을 강요했던 포르투갈과 달리, 네덜란드는 종교 대신 교역을 통한 실익을 선택해 2009년 양국 교역 400주년을 맞이할 수 있었다”며 실용성을 강조했다.
1980년부터 30년간 로테르담에서 선박기술감독업에 종사해 온 이욱현(李旭鉉) 재화란 한인경제인협회 회장은 네덜란드의 가장 큰 원동력을 지리적 환경에서 찾았다.
“오늘날 네덜란드를 만든 가장 큰 배경은 ‘척박한 땅’입니다. 저습(低濕)하고 바람만 센 땅이라 중동에서 풍차를 도입해 물을 퍼냈죠. 풍차를 나무로 만드니 자연스럽게 제재(製材) 기술이 발달했고, 조선산업의 발달로 이어졌습니다. 농사가 어려운 땅도 결국 최대 농업국이 되는 밑거름이 됐습니다. 농작물 대신 건초를 키울 수밖에 없었고, 이는 곧 축산업의 발달로 이어졌죠.”
―네덜란드의 경쟁력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장소가 있을까요.
“로테르담입니다. 4년 전까지 세계 최대 항구였죠. 지금은 중국 상하이(上海)에 그 자리를 내줬지만, 여전히 유럽 최대 항구로 그 위용이 엄청납니다. 거대한 항구를 오가는 세계 각국의 선박을 보면, 저절로 ‘유럽의 관문’이란 말이 나오죠. 한국 선박도 연간 100회 이상은 꾸준히 와요.”
―그럼 로테르담 항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장소는 있겠습니까.
사진 촬영을 위해 로테르담 항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장소를 소개해 달라 하니, 이 회장은 어이가 없는 듯 웃었다.
“항구 총 연장이 40km가 넘는데, 무슨 수로 한눈에 볼 수 있겠습니까. 배를 타고 돌아도 며칠은 걸려요.”
―작고 척박한 땅의 나라가 어떻게 세계 최대의 항구를 갖게 됐을까요.
“한때 세계를 제패한 강대국들의 흥망성쇠를 다룬 중국 CCTV의 <대국굴기>를 보면, 진정한 대국(大國)으로 세 나라를 꼽습니다. 바로 미국, 영국, 네덜란드죠. 세계 최초로 주식거래소를 만들었고 스페인과의 전쟁 중에도 적국(敵國) 사람들과 은행 거래는 계속할 정도로 신용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현재 세계의 심장인 뉴욕을 건설한 것도 무역과 상업의 귀재였던 이들이었죠.”
중국 CCTV의 다큐멘터리 <대국굴기>에서 임마누엘 월러스틴 예일대 석좌교수는 “패권대국은 자국의 이익에 따라 세계질서를 재편할 수 있고, 군사력을 동원하지 않아도 자국의 목적을 이룰 수 있는 나라”라며 진정한 패권대국으로 영국, 네덜란드, 미국을 꼽았다.
이 회장은 네덜란드가 국제적으로 발전한 가장 큰 비결로 ‘국제화된 국민성’을 들었다.
“한국도 많은 산업분야에서 세계 1위를 기록하고 2010년 G20 정상회담을 개최할 만큼 세계의 중심국이 됐지만, 생활 속 깊숙이 국제화가 완성되진 못했습니다. 네덜란드는 시골의 작은 업체를 가도 놀랍도록 무역상식이 폭넓고 전문용어를 정확하게 이해합니다. 국제상거래에 대한 지식이 기본적으로 많아요. 우리나라도 국가 차원이 아닌 국민 개개인의 국제화가 이뤄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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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트레흐트에서 로테르담까지 동행한 위트레흐트대 언론학과의 엘가 빌렘슨 씨. |
위트레흐트 일정을 마친 후 유럽 최대항구를 직접 보기 위해 로테르담행 열차표를 샀다. 12시33분 차를 타기 위해 8번 플랫폼에서 한참을 기다렸는데 35분이 돼도 열차는 보이지 않았다. ‘시간과 약속을 칼같이 지키는 나라’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에 열차 시간표를 유심히 보고 있었다. 당황한 동양인의 모습이 딱했던지 한 20대 여성이 도울 일이 있느냐고 물어왔다.
“출발 시각을 넘겼는데 열차가 보이지 않는다”고 하자, 기자의 티켓과 시간표를 살펴본 그는 “‘8b’ 플랫폼이 아닌 ‘8a’에서 정시에 떠났다”며 자신도 마침 로테르담에 가는 길이라며 안내를 자청했다.
그의 이름은 엘가 빌렘슨, 네덜란드 동부 알멜로 지역 출신으로 위트레흐트 대학에서 저널리즘을 공부하고 있다. 학교 수업 과제로 로테르담의 ‘창조산업’에 대한 인터뷰를 하러 가는 길이었다. 한국에서 온 기자라고 소개하자, 그는 “우연한 인연이 너무 신기하다”면서 네덜란드 신문 목록을 발행부수 순서대로 적어가며 언론 환경에 대해 설명했다.
“(한 신문 이름을 가리키며) 이 신문이 현재 가장 많이 팔리고 있지만, 동시에 가장 ‘나쁜’ 신문이기도 하죠. 제가 좋아하는 신문은 발행부수 2·3위인 이 두 신문입니다. 저는 기회가 된다면 이 두 번째 신문사에 꼭 입사하고 싶어요.”
―1등 신문이 ‘나쁜’ 이유가 뭔가요.
“정치적 성향도 있고, 너무 발행부수에만 신경 쓰는 것이 보기 좋지 않습니다. 설명하기 어려운 꽤 복잡한 사연이 있어요.”
저널리즘 배우는 학생이면 3~4개 국어는 기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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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무가지 전면에 실린 현대자동차 광고. |
기자가 놀라워하자 그는 “네덜란드에서 저널리즘을 공부하는 학생이라면 이 정도는 기본”이라며 웃어넘겼다.
대화를 나누던 중, 좌석 옆에 놓인 신문이 눈에 들어왔다. ‘스피츠’란 이름의 무가지로, 주요뉴스와 연예·스포츠 소식으로 채워져 있었다. 한국과 비슷하게 첫 장과 뒷장이 전면광고였는데, 마침 현대자동차의 기업 광고였다. 낯선 이국의 신문에서 본 한국기업의 전면광고가 반가웠다.
로테르담역에서 빌렘슨 씨와 인사를 나눈 후, 관광안내센터에 가서 “로테르담 항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 있느냐”고 물었다. 한눈에 절대로 볼 수 없다는 이욱현 회장의 설명대로 직원은 난색을 보였다. 한참 후 직원은 지도를 꺼내며 한 곳을 가리켰다. “항구 전체를 한눈엔 볼 수 없지만, 항구 일부와 로테르담 시내 전경을 볼 수 있다”며 ‘유로마스트’를 소개했다.
로테르담 항의 북쪽 강가에 솟아 있는 높이 185m의 타워로, 360도로 회전하며 수직상승하는 전망대에 타면, 항구와 시내의 풍경을 파노라마로 볼 수 있다.
타워 꼭대기에서 본 로테르담은 천혜(天惠)의 항구였다. 독일에서부터 흘러온 라인강이 긴 해안선을 그리며 서쪽 바다와 합쳐져 거대한 유로 포트를 완성해 가고 있었다. 로테르담이 몇 해 전까지 세계 최대 항구자리를 차지했던 가장 큰 이유는 네덜란드의 수출입 물자 증가가 아니라 유럽대륙을 가로지르는 라인강 하구에 도시가 위치했기 때문이었다.
타워 동쪽엔 로테르담의 랜드마크인 ‘에라스뮈스 다리’가 보였다. 일명 ‘백조다리’로도 불리며, 세계적인 디자인을 자랑하는 로테르담 도시 경관의 결정판이다. 에라스뮈스 거리, 에라스뮈스 동상, 에라스뮈스대학 등 로테르담에는 유난히 ‘에라스뮈스’란 이름의 건축물이 많다. <우신예찬(愚神禮讚)>을 쓴 인문학자 에라스뮈스가 바로 로테르담 출신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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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스테르담 홍등가에 어둠이 깔리자 붉은 조명 아래 선 반라의 여성들이 남성들을 유혹하기 시작했다. |
기자의 당황스런 표정을 봤는지 그는 곧바로 “예상과는 전혀 다른 거리 분위기를 볼 수 있을 것”이라며 “부담 갖지 말고 꼭 구경해 보라”고 덧붙였다.
암스테르담역에서 홍등가까지는 걸어서 10분이 걸리지 않는다. 남자의 말은 사실이었다. 마약과 성(性)에 굶주린 남성들로 가득한 음란한 뒷골목 대신, 깔끔하게 정비된 운하 사이로 700년 역사의 거리가 보였다. 부부동반 또는 가족 단위로 나온 관광객, 테이크아웃 커피를 들고 바쁘게 걷는 여성들, 나란히 서서 단체사진을 찍는 동양인들…. 남녀노소가 거리를 채운 모습이 ‘홍등가’라기보단 ‘홍등축제를 여는 관광중심지’가 맞는 듯했다.
카페와 식당 사이사이에 자리 잡은 붉은색 조명의 성매매업소들은 이곳이 단순관광지가 아님을 말해 준다. 유리창 너머 반라(半裸)의 여성들이 손짓하는 업소와 마리화나를 판매하는 카페 사이로 정복을 입은 기마경찰이 오가는 모습은 마약과 매춘이 합법화된 네덜란드에서만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이색적인 풍경을 담기 위해 카메라를 꺼내 들었다. 플래시가 터지는 순간, 뒤편의 한 여성이 생수병을 집어 물을 끼얹었다. 그녀는 벽에 걸린 팻말을 가리키며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소리를 질렀다. 팻말을 보니 ‘사진을 찍지 마라’는 문구가 보였다. “말로 설명하면 되지 왜 물을 끼얹느냐”고 항의했지만, 그녀가 할 줄 아는 영어는 몇 마디 욕설이 전부였다. 옆에 있던 경찰이 바로 달려와 사진내용에 큰 문제가 없음을 확인하고, 여성이 소속된 업소의 포주를 불러내 주의를 주는 것으로 승강이는 정리됐다.
홍등가는 2000년 매춘 합법화 이후 약 480개 업소가 성매매로 연간 1억 유로(1620억원)의 매출을 올리며 성업해 왔다. 하지만 2008년 암스테르담 시(市) 정부는 업소 수를 절반으로 줄이는 도시정화 계획을 발표했고, 지정된 업소의 폐업이 현재까지 진행되고 있다. 정부조치에 겁을 먹어서일까, 저녁 8시란 시간이 일러서일까, 창문을 열고 여성들과 흥정하는 남자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웠다.
세계 최고 DJ와 최고의 자전거 보유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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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거리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자전거 전용도로와 신호등. |
자전거와 함께 네덜란드가 세계 최고 자리를 차지한 것이 바로 DJ 분야다. 영국
암스테르담 일정을 마친 후 헤이그로 향하는 열차에 올랐다. 네덜란드의 정식수도는 암스테르담이지만, 실질적 수도는 정부기관과 외교공관이 모여 있는 헤이그다. 헤이그로 가는 목적은 단 한 가지였다. 한 세기 전 대한제국의 독립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떠난 헤이그 특사의 흔적을 밟기 위해서다.
1843년 지어진 헤이그HS역은 19세기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역을 보는 순간 2008년 1월 러시아 연해주 취재 중 방문했던 블라디보스토크역이 떠올랐다.
1907년 5월 21일, 두 조선인 남자가 블라디보스토크역에 들어섰다. 그들의 이름은 이준(李儁)과 이상설(李相卨). 대한제국 고종황제의 밀명을 받고 한 달 전 서울에서 출발해 블라디보스토크~상트페테르부르크~베를린~브뤼셀을 거쳐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열리는 헤이그에 6월 25일 도착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합류한 이위종(李瑋鍾)과 함께 역전(驛前) 중앙로인 ‘바겐 슈트라트’의 ‘드용호텔’에 여장을 푼 이들은 곧바로 옥상에 올라가 태극기를 게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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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재 20만 달러를 털어 헤이그에 이준열사기념관을 세운 이기항ㆍ송창주씨 부부. |
“아직도 이준 열사가 자결했다는 설을 사실로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당시 신문보도와 기자회견 등 사료에는 자살에 대한 근거가 전혀 없어요. 사망 장소와 시간도 자살과는 거리가 멉니다.”
송창주 기념관장은 “만약 독립을 위해 자결을 결심했다면, 일요일 저녁 7시 호텔방에서 홀로 숨지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사인(死因)에 대한 의문이 많이 남아 있다”고 했다. 송 관장이 공개한 이준 열사의 사망보고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법관이었고 한국에 거주하는 이준은 금월(7월) 14일 저녁 7시에 여기(헤이그)서 사망했으며, 나이는 49세, 함경도 북청에서 태어나고 결혼했으며, 그 이외에는 알려진 바 없음…>
“이준 열사는 자결하지 않았다”
1907년 7월 16일 주(駐)네덜란드 일본 대사의 전보는 사인을 단독(丹毒·종기 또는 종창)이라 표현했고, 자살이란 풍설(風說)이 현지에 돌고 있다고 덧붙였다. 송 관장의 설명이다.
“일본 대사가 쓴 ‘풍설’을 가지고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자결’이란 표현을 쓰는 것은 우리나라 국민의 역사인식 수준을 보여주는 예입니다.”
―일제에 의한 암살일 가능성도 있습니까.
“정황상 가능성은 있지만, 객관적 자료가 없으니 사실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 심장마비설과 종기설도 확실하지 않죠. 조국을 위해 타향에서 돌아가신 분입니다. 정확한 사인이 하루빨리 밝혀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기항 이준아카데미 원장은 “한국인 관람객이 해가 지나면서 계속 줄고 있다”며 “민족의 역사를 이해하는 일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졌으면 한다”고 했다.
“우리 부부의 나이도 이제 70이 넘었습니다. 힘이 남아 있을 때까진 계속 이 일을 하겠지만, 그 뒤엔 누가 어떻게 하겠습니까. 위대한 국가는 역사의 위대함을 후손이 제대로 기억할 때 완성됩니다.”
헤이그HS역으로 다시 돌아가는 길, 한 세기 전 그들의 발걸음을 그대로 따라가 봤다. 역사(驛舍)도 옛 모습 그대로였고, 거리엔 400년 된 집들이 즐비했다. 세계의 중심 국가로 우뚝 선 조국의 후손들이 이곳에 다시 찾아올 것을 100년 전 그들은 상상할 수 있었을까.
네덜란드는 한국과 닮은 점이 많다. 강대국에 둘러싸인 전략적 요충지에 교역의 중심지다. 인접한 국가에 점령됐고, 독립 후 눈부신 성장과 발전을 이뤘다. 좁은 국토와 높은 인구 밀도에도 세계적 기업을 일으켜 영향력을 떨쳤다. 네덜란드의 ‘찬란한 과거’는 한국의 현재 모습과 흡사하다. 우리의 미래는 그들의 현재와 어떻게 달라질까. 오늘날 한국이 네덜란드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 네덜란드 국가 개요
⊙ 공식국명 The Kingdom of the Netherlands
⊙ 면적 4만1548㎢ (한반도의 5분의 1)
⊙ 인구 1634만명 (2006년 기준, 인구밀도 세계5위)
⊙ 종교 가톨릭(32%), 개신교(25%), 기타(5%), 무교(38%)
⊙ 정부형태 내각책임제, 양원제 (상원 75석, 하원 150석)
⊙ 1인당 GDP 4만598달러 (2008년 기준)
⊙ 세계 8위 무역국(한국은 11위), 세계 2대 대한(對韓)투자국, 세계 3대 농축산물 수출국
[인터뷰] 金永元 駐 네덜란드 대사
“태양광전지·풍력발전 배워야”

헤이그 주(駐)네덜란드 대사관에서 만난 김영원(金永元) 대사는 ODA 이야기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아프가니스탄과 보스니아 등 분쟁국 파병은 물론 국제원조의 책임도 함께 지녀야만 국제경쟁력이 큰 리더십 국가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네덜란드의 가장 큰 경쟁력은 무엇입니까.
“세계경제포럼(WEF)의 2009-2010 세계경쟁력 평가에서 조사대상 133개 국가 중 10위를 차지하는 등 네덜란드는 여전히 우수한 경쟁력과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외부정세에 밝고, 신기술 도입에 적극적인 요소가 큰 영향을 줬죠. 전년 순위 8위에서 2단계 하락한 것은 금융시장 평가가 악화됐기 때문입니다.”
김 대사는 열린 국민성, 영어구사능력, 국제기구 유치, 컨설팅산업 육성 등을 경쟁력의 중요한 배경으로 꼽았다.
―한국과의 경제협력 현황은 어떻습니까.
“우리나라의 유럽 제2의 교역 대상국입니다. 2008년 기준으로 64억 달러를 수출했고, 32억 달러를 수입했죠. 유럽에서 가장 큰 대한(對韓)투자국으로, 2008년 네덜란드는 12억 달러를, 한국은 8억 달러를 투자했습니다. 한국이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국가입니다.”
김 대사는 신재생에너지, 물류 분야 등 양국이 서로 협력해 나가야 할 과제가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세계적 수준인 태양광전지와 풍력발전기 연구 분야는 우리가 계속 배워야 할 과제입니다. 물류 분야도 한국이 동북아 물류허브를 지향하는 만큼 유럽의 허브인 네덜란드와의 협력이 매우 중요하겠죠. 새만금사업도 오랜 역사의 네덜란드 간척지 개발 경험을 활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터뷰] 한스 하인스브록 駐韓 네덜란드 대사
“작은 나라는 환경에 빨리 적응해야 살아남아”

한스 하인스브록 주한 네덜란드 대사는 “무엇을 배워야 하나”란 질문에 예상치 못한 답변을 내놓았다.
“한국은 단기간에 놀라운 경제성장을 하며 기적을 일궈냈습니다. 압축 성장 과정에선 유럽과 미국의 발전모델을 많이 연구하고 따라야 했지만, 이젠 상황이 바뀌었죠. 선진국 문턱에 성큼 다가선 만큼, 보다 창조적이고 앞선 정책을 세워 함께 공존하는 방안을 모색해야 합니다. 저희가 한국에서 배워야 할 점이 너무나 많은 걸요.”
―구체적으로 어떤 분야에서 협력이 가능할까요.
“양국은 공통점이 많습니다. 국제정세와 지리적 환경도 비슷한데다, 기회가 많고 역동적이죠. 특히 새만금과 4대강 살리기 사업은 저희와 긴밀한 협력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현 정부가 내세운 기간산업이니만큼, 꼭 성공해야 하겠죠.”
하인스브록 대사는 19세기부터 이미 간척사업을 시작한 네덜란드의 교훈을 잘 이용한다면 습지를 보호하고 환경파괴를 최소화할 수 있는 미래지향적 개발을 완성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네덜란드 경쟁력의 역사적 배경은 무엇입니까.
“‘물과의 전쟁’이죠. 국토의 60%가 해수면 아래에 있는 우리의 역사는 물에 정복당하지 않기 위해 강한 나라가 돼야 했죠. 이젠 시대가 바뀌었습니다. 물과의 전쟁이 아닌, 물과의 공존이 중요한 이슈입니다. 무조건 바다를 육지로 메우는 대신, 물 위에 뜨는 집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네덜란드 건설업체 ‘옴스’는 지구온난화로 인한 해수면 상승에 대비하기 위해 물 위에 뜨는 집을 개발했다. 보트 위에 지붕을 씌운 것이 아니라, 알루미늄과 목재를 이용해 번듯한 2층 집을 지었다. 가난의 상징이었던 수상가옥이 부의 상징으로 바뀌었다.
“한국과 네덜란드같이 작은 나라는 새로운 환경에 빠르게 적응해야 살아남습니다. 이것이 곧 ‘소국(小國)’을 ‘강국(强國)’으로 변화시키는 길이라는 것은 역사적으로 증명된 결과입니다. 한국과 네덜란드가 서로 돕고 협업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