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완·싱가포르만 예외. 나머지 국가들은 대부분 실패작
⊙ 북한·쿠바·시리아·아제르바이잔 등 사회주의권(성향) 국가에서 父子·형제간 권력세습 사례 많아
⊙ 대부분 軍·공안기관에서 후계자 수업
⊙ 이집트, 리비아, 이란 등 이슬람 국가에서도 권력세습 시도 중
⊙ 니카라과는 아버지-아들-동생으로 권력세습, 아르헨티나에서는 2차례 부부간 권력 승계
⊙ 북한·쿠바·시리아·아제르바이잔 등 사회주의권(성향) 국가에서 父子·형제간 권력세습 사례 많아
⊙ 대부분 軍·공안기관에서 후계자 수업
⊙ 이집트, 리비아, 이란 등 이슬람 국가에서도 권력세습 시도 중
⊙ 니카라과는 아버지-아들-동생으로 권력세습, 아르헨티나에서는 2차례 부부간 권력 승계
북한의 金正日(김정일), 싱가포르의 리셴룽(李顯龍), 대만의 장징궈(蔣經國), 시리아의 바샤르 아사드, 아제르바이잔의 일함 알리예프, 콩고민주공화국의 조제프 카빌라, 가봉의 알리 벤 봉고….
이들의 공통점은 ‘공화국의 왕자’라는 점이다. 이들은 장기집권 혹은 철권통치를 했던 아버지의 뒤를 이어 나라를 ‘相續(상속)’받았다. 권력세습이다.
물론 그 방식은 차이가 있다. 장기간에 걸쳐 착실하게 후계자 수업을 받은 끝에 국민들로부터 실적을 인정받아 권력을 잡은 경우가 있는가 하면, 왕조 시대에 先王(선왕)이 죽자마자 世子(세자)가 大統(대통)을 잇듯이 권력을 이은 사람도 있다.
권좌에 오른 뒤의 성적표도 사람마다 다르다. 성공적으로 국가를 이끌어가는 지도자, 그럭저럭 체제를 유지해 가는 지도자가 있는가 하면, 전제군주처럼 통치하다 나라를 파탄지경으로 몰아넣은 지도자, 그리고 철권통치 끝에 민중봉기로 쫓겨난 지도자도 있다. 그런가 하면 김정운 후계설이 나오는 북한처럼 3대째 권력세습을 시도하는 경우도 있다.
‘공화국의 왕자’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권력을 세습했고, 그 후의 통치행태는 어떠했는가를 살펴보는 것은 북한에서 3대째 후계세습설이 솔솔 나오고 있는 오늘날 하나의 참고가 될 것이다.
■ 타이완: 장제스-장징궈 ■
1972년 2월 말 타이완 남부의 휴양지 日月潭(일월담)으로 행차한 타이완 총통(대통령) 장제스 부부는 타이완성 의회 의장인 셰둥민(謝東閔) 등을 불렀다. 장제스는 셰둥민에게 시중에서 장징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눈치 빠른 셰둥민은 장제스의 속마음에 부합하는 얘기를 늘어놓았다.
얼마 후 장제스는 장징궈의 측근인 총정치작전부 부주임 왕성(王昇) 장군을 불렀다. 장제스는 “얼마 전 국민대회(국민당 정부 시절 총통을 선출하던 기구. 유신헌법하의 통일주체국민회의와 유사) 대표 1000여 명이 連名(연명)으로 장징궈를 추천하는 글을 올렸고(사실은 장제스가 배후조종한 것임), 셰둥민 등도 고위층 회의에서 여러 차례 장징궈가 大任(대임)을 맡을 만하다고 추천했다”면서 “이미 사회에서 이렇게 장징궈를 극진히 모시고 있으니, 귀관은 셰둥민에게 가서 당(국민당) 중앙으로 보내는 ‘장징궈가 행정원장(국무총리)에 취임하는 것이 민심’이라는 내용의 정식 추천장을 받아 오라”고 지시했다.
장씨 부자의 忠僕(충복)인 왕성은 즉시 “장징궈 선생은 才德(재덕)을 겸비하고 지혜와 용기를 모두 갖추었으며, 어려운 중에 나라를 일으키고 보필한 뛰어난 인재다. 징궈 선생은 이미 衆望(중망)을 얻고 있고 전국 上下(상하)에서 모두 추천하니 이것은 민심이 원하는 바이다”라는 내용의 추천장을 만들어 셰둥민에게 달려갔다. 왕성이 추천장을 내밀자 셰둥민은 추천장에 서명했다.
1972년 5월 26일 국민당 중앙상임위원회가 열렸다. 부총통과 행정원장을 겸하고 있던 옌자간(嚴家)은 회의가 열리기 전 셰둥민의 추천서를 읽고 아들에게 총통 자리를 물려주려는 장제스의 뜻을 간파했다. 테크노크라트 출신답게 옌자간은 머리 회전이 빨랐다.
그는 장제스에게 “부총통과 행정원장 자리를 내놓고, 후임 행정원장으로 장징궈를 추천하겠다”고 말했다. 장제스는 “부총통직까지 내놓을 필요는 없고, 행정원장직만 내놓으면 된다”고 했다.
국민당 비서장(사무총장) 장바오수(張寶樹)가 셰둥민의 추천서를 읽고, 옌자간이 장징궈를 후임 행정원장으로 추천하자 장내는 침묵에 빠졌다. 장징궈의 후계자 지명은 뜻밖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장제스는 “옌 부총통의 제안에 찬성하는 사람은 기립하라”고 말하자, 참석자들은 장제스의 위세에 눌려 자리에서 일어났다.
국민당 선전부 등은 장징궈의 덕성과 업적을 찬양하는 대대적인 선전에 들어갔다. 장징궈는 입법원(국회)에서 압도적인 찬성표를 얻어 그해 6월 행정원장에 취임했다.
준비된 후계자 장징궈
하지만 장제스-장징궈 부자세습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장징궈는 ‘준비된 후계자’였다. 젊은 시절 소련에 유학하면서 한때 소련공산주의청년단(콤소몰)에 몸담았던 장징궈는 29세 때인 1939년 장시성(江西省) 행정감찰원으로 공직생활을 시작, 中日(중일)전쟁 중에는 청년군 정치부 주임, 東北(동북·만주)주재 특파원 등을 지냈다.
1949년 국민당 정부가 타이완으로 敗退(패퇴)한 후, 장징궈는 정치행동위원회 의장에 임명돼 모든 공안기관을 장악하고 좌익분자들과 反(반)정부 인사들을 숙청했다. 1950년에는 국방부 총정치작전부 주임(공산국가 군대의 총정치국장에 해당)과 국민당 중앙개조위원회 위원을 맡았다.
오랫동안 총통의 장남이라는 위치를 의식해 권력의 막후에서 자중자애하던 장징궈는 1963년 옌자간 내각에 무임소 정무위원(무임소장관)으로 입각하면서 정식으로 국정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1965년에는 현역 장성 신분으로 국방부장(국방부 장관)에 임명됐다.
장징궈는 1969년 1월에는 국제경제합작발전위원회 의장을 맡아 재정·경제분야로 활동영역을 확장했고, 그해 7월부터는 행정원 부원장(부총리)을 겸임했다. 1970년대로 접어들면서 그는 자신의 측근인 구국단 주임 리환(李煥)을 책임자로 하는 ‘국가건설연구반’을 조직해 젊은 엘리트, 특히 타이완 출신 엘리트들을 당·정·군에 포진시키기 시작했다. ‘국가건설연구반’ 조직은 1970년대에 金日成(김일성)의 후계자로 지명된 金正日(김정일)이 ‘3대혁명소조’를 통해 북한의 당·정·군을 자신을 지지하는 젊은 세대로 채워 나갔던 것과 흡사하다.
장징궈가 행정원장에 취임한 후 부총통 옌자간은 국정에 대해 발언하는 것을 삼가면서 조용히 뒤로 물러앉았다. 반면에 장징궈 옹립에 앞장선 사람들은 출세가도를 달렸다. 장제스의 뜻을 받들어 셰둥민에게 추천서를 받아낸 왕성은 총정치작전부 주임으로 승진했다.
셰둥민은 장징궈가 행정원장이 된 직후 타이완성 주석이 됐고, 후일 장징궈가 총통이 되자 부총통이 됐다. 그는 국가 최고위직에 오른 최초의 타이완 사람이었다. 자신이 타이완의 안정과 발전을 위해 큰일을 했다고 자부했던 그는 죽기 전에 장제스 父子(부자) 세습 과정의 이면에서 있었던 일들을 회고록에 남겼다.
1975년 4월 5일 장제스가 87세를 일기로 사망하자 옌자간이 총통으로 취임했다. 하지만 실권은 행정원장 겸 국민당 주석인 장징궈에게 있었다. 1978년 3월 장징궈는 국민대회에서 정식으로 총통으로 선출됐다.
3대 권력세습 가능성 차단
장징궈는 집권 후 1978년 美中(미중) 수교 등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타이완을 안정적으로 이끌면서 경제발전을 이룩했다. 특히 그는 당과 정부에 타이완성 출신 엘리트들을 중용하는 ‘본토화 정책’을 폈다. 1984년에는 타이완 출신의 젊은 경제학자인 리덩후이(李登輝)를 부총통으로 지명했다. 1987년 7월에는 38년간 지속되어 온 계엄령을 해제해 민주화를 향해 한 발짝 더 전진했다.
아버지로부터 권력을 물려받았지만, 장징궈는 아버지와 달랐다. 1985년 <타임>지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가족 중에서 후계자가 나오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1986년에는 후계자설이 떠돌던 장남 장샤오우(蔣孝武)를 싱가포르 주재 무역대표부 부대표로 내보내 3대 권력세습의 가능성을 차단했다.
1988년 1월 13일 장징궈는 7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고, 장징궈의 뜻대로 부총통 리덩후이가 총통직을 승계했다. 2000년에는 야당인 민주진보당(민진당)의 천수이볜(陳水扁) 후보가 총통에 당선돼 타이완 역사상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루었다.
■ 싱가포르 : 리콴유-리셴룽 ■
리셴룽(李顯龍·57) 싱가포르 총리도 ‘공화국의 왕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가 아버지로부터 권력을 세습받았다고 말하는 것이 적절한지는 모르겠다. 그가 총리에 취임한 것은 정치에 입문한 지 20년, 아버지 리콴유(李光耀)가 총리직에서 물러난 지 14년이 지나서였기 때문이다. 학력이나 경력, 업적도 흠잡을 데 없이 탁월하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부친의 후광이 전혀 없었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리셴룽은 싱가포르軍(군) 장학금을 받아 영국 케임브리지대 트리니티 칼리지로 유학, 수학과 컴퓨터공학을 전공했다. 그는 졸업시 수학과 수석을 차지했고, 컴퓨터공학과에서도 우수한 성적을 받았다.
교수들은 그에게 수학자의 길을 걷도록 권했지만, 어린 시절부터 정치에 관심을 가졌던 리셴룽은 “싱가포르야말로 내가 속한 곳이며, 앞으로도 계속 인생을 보내고 싶은 곳”이라면서 귀국했다.
1971년 싱가포르군에 입대한 그는 빠른 속도로 승진해 1984년 준장으로 예편했다. 군복무 시절 그는 美(미) 하버드대 행정대학원(케네디스쿨)과 미 육군 지휘참모대에서 修學(수학)했다.
1984년 리셴룽은 당시 국방부 장관 겸 인민행동당 부서기장이었던 고촉통(吳作棟)의 권유로 총선에 출마,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이후 그는 통상산업부 장관, 국방부 장관 등을 거치면서 승승장구했다.
1990년 11월 리콴유가 31년 만에 총리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는 회고록에서 이렇게 술회했다.
“나는 31년간(말레이시아연방 내 싱가포르 자치정부 총리 시절 포함-필자 注) 총리를 역임했다. 임기를 한 번 더 연장해 총리 자리에 있는다고 해도, 내가 여전히 건강하고 효율성을 잃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얻을 것이 없었다. 하지만 만일 내가 물러난다면, 남은 세월 동안 나의 후계자가 자신의 업무를 파악해 성공적으로 일하는 것을 도울 수 있다. 그것은 내가 싱가포르에 바치는 마지막 봉사가 될 것이다.”
이 ‘마지막 봉사’를 위해 리콴유는 신설된 선임장관(senior minister)을 맡았고, 경제관료 출신인 고촉통 제1부총리가 총리직을 승계했다. 리셴룽은 고촉통이 맡았던 제1부총리가 됐다.
그러자 리콴유가 선임장관으로 수렴청정을 하면서 리셴룽에게 권력을 세습하려는 것이라는 관측이 무성했다. “리콴유는 물러나는 것(step down)이 아니라 옆으로 자리만 옮기는 것(step aside)”이라는 비아냥이 나오는가 하면, “리콴유 부자가 언제 고촉통을 몰아내느냐를 결정하는 일만 남았다”거나 “리콴유 총리가 1992년 총선까지는 고촉통 체제로 밀고 나가다가 총선 승리 후 리셴룽 부총리에게 정권을 넘겨주려는 그림을 그리고 있으며, 고촉통은 벤치 워머(bench warmer) 역할밖에 못할 것”이라는 분석도 나왔다.
14년간 부총리 지내면서 실적 쌓아
하지만 과도체제로 끝날 것이라던 고촉통은 그 후 14년이나 자리를 지켰다. 사실 고촉통은 셸석유, 싱가포르 국영 넵툰해운에서 근무하다가 뛰어난 경영수완을 인정받아 리콴유에게 발탁된 인재였다. 1960년대 후반부터 건국 세대의 뒤를 이을 ‘젊은 피’를 물색해 오던 리콴유는 푸젠어(福建語) 악센트가 심하고 대중연설에 약한 고촉통에게 어학 선생까지 붙여 주면서 그를 키웠다.
리콴유는 “내가 뛰어난 바이올린 연주자라면, 고촉통은 나와 같은 독주자들로 구성된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와 같은 인물”이라고 고촉통을 높이 평가했다.
리셴룽은 13년 동안 제1부총리, 싱가포르금융청(중앙은행) 총재, 재무부 장관 등을 지내면서 ‘역량’을 인정받았다. 그는 1997년 아시아를 덮친 금융위기를 극복한 것은 물론, 과감한 금융자유화 정책으로 싱가포르를 금융허브로 만들었다. 법인세 등의 세율을 큰 폭으로 내려 첨단기술투자를 유치하는 한편, 케임브리지에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한 공학도답게 세계 최고수준의 정보통신 인프라를 구축했다.
한편 그는 1999년부터 40대 각료와 군장성들로 구성된 ‘40인 전략팀’을 만들어 자신과 국가의 장래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2003년 8월, 고촉통 총리는 리셴룽을 후계자로 지명했다. 리콴유 전 총리도 “그는 13년간 부총리직에 있으면서 능력을 보여줬다”면서 “내가 그를 선택하거나 임명한 것이 아니며, 본인이 능력을 입증하지 않았다면 총리가 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2004년 8월 총리에 취임한 후 리셴룽은 싱가포르를 의료·교육·바이오허브로 키운다는 전략을 수립, 추진하고 있다. “싱가포르는 작은 나라이기 때문에 살아남으려면 늘 탁월해야 한다”는 것이 그가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다. 이런 노력에 힘입어 그는 집권 이후 4년 동안 평균 8%의 경제성장을 달성했다.
하지만 인민행동당 1당 통치와 지도자들의 엘리트주의는 좀처럼 변하지 않고 있다. 2005년 리셴룽은 “서구식 多黨制(다당제)는 싱가포르에 어울리지 않기 때문에 향후 20년 동안 이를 도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리셴룽은 작년 4월 “앞으로 나는 두 번 더 집권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는 최소한 2021년까지는 정권을 놓지 않겠다는 얘기다. 그는 “내 후계자는 장기간 정부 안에서 국정을 이끌 능력을 배양해야 한다”면서 “30대나 40대 초반의 젊은층에서 총리 후보감을 찾아 미리 키우겠다”고 말했다.
부인은 ‘세계경제를 이끄는 파워 여성’ 7위에 올라
리셴룽의 부인인 호칭(何晶)은 현재 싱가포르 최대의 국영투자회사인 테마섹홀딩스 회장으로 활약하고 있다. 2005년 <월스트리트저널>이 선정한 ‘세계경제를 이끄는 파워 여성’ 7위에 오른 그는 싱가포르대학 공학과를 수석 졸업하고 국방부에서 근무하던 중 리셴룽과 만나 결혼했다. 리셴룽의 동생 리셴양은 싱가포르 최대 기업인 싱가포르텔레콤의 CEO를 맡고 있다.
부자 장기집권에도 싱가포르 국민들은 별 불만이 없는 듯하다. 지난 2006년 총선에서 리셴룽이 이끄는 인민행동당은 66.6%의 득표율로 84석의 국회의석 중 82석을 석권했다. 비결은 간단하다. 글자 그대로 ‘經國濟世(경국제세)’, 즉 경제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싱가포르 국민은 통치자와 ‘삶의 질을 올려주면 계속 권력을 보장해 주겠다’는 일종의 거래를 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타이완이나 싱가포르의 경우만 놓고 보면, 권력세습이라는 것도 그다지 나쁘지는 않은 것 같다. 하지만 권력을 세습한 통치자들 가운데 그들처럼 좋은 성적을 거둔 경우는 예외적이다. 다른 나라들의 경우를 보자.
■ 제3세계 국가들의 부자 세습 사례 ■
시리아: 대통령이 된 안과의사
2000년 6월 10일, 1971년 쿠데타로 집권한 이래 ‘다마스쿠스의 사자’ 혹은 ‘중동의 비스마르크’로 불리며 철권통치를 했던 하페즈 알 아사드 대통령이 69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하페즈의 뒤를 이은 것은 그의 둘째 아들 바샤르 알 아사드(44)였다. 그는 다마스쿠스 醫大(의대)를 졸업한 후 영국에서 안과 레지던트 과정을 밟고 있던 의사였다.
그가 처음부터 아버지의 후계자로 지목됐던 것은 아니었다. 원래 하페즈 알 아사드의 후계자는 바샤르의 형 바시르였다. 바시르는 대통령 경호와 레바논 문제 등을 담당하면서 후계자 수업을 받던 중 1994년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바시르가 사망하자 하페즈는 영국에 있던 바샤르를 불러들여 후계자 수업을 시키기 시작했다. 바샤르는 공화국수비대 대령으로 복무하면서 시리아에 인터넷과 휴대폰을 도입하고 각급 학교에 컴퓨터를 보급하는 등 ‘현대화의 기수’로 자신을 부각시켰다.
바샤르는 강력한 反(반)부패 캠페인도 벌였다. 이 와중에 국회의장으로 6년, 총리로 13년간 하페즈 알 아사드 대통령을 보좌했던 마르무드 알 조흐비 총리가 부패혐의로 실각했다가 자살했다.
하페즈가 사망한 후 바샤르의 권력승계는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하페즈가 죽은 다음날 집권 바트당은 바샤르를 대통령 후보로 추대했다. 긴급소집된 의회는 대통령 출마 제한 연령을 40세에서 바샤르의 나이인 34세로 낮추는 ‘爲人改憲(위인개헌)’을 단행했다.
같은 날 대통령 직무대행 압델 할림 카담 부통령은 바샤르를 대령에서 중장으로 진급시키면서 군총사령관에 임명했다. 국방장관, 참모총장 등 군 수뇌부도 즉각 바샤르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같은 달 19일 바트당은 바샤르를 당서기장으로 추대했다.
그해 7월 12일 바샤르는 단독 출마한 대통령선거(대통령 선거라기보다는 그의 추대를 확인하는 국민투표)에서 97.29%의 압도적 지지(?)를 받아 대통령에 당선됐다.
1983년에 하페즈 알 아사드가 병석에 누운 틈을 타서 쿠데타를 꾀하다가 해외로 축출됐던 바샤르의 삼촌 리파트가 바샤르의 권력세습은 違憲(위헌)이라고 주장하면서 바샤르에게 도전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으나,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없었다.
이후 바샤르는 대내외 정책에서 부친보다 다소 유연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아제르바이잔: 아들에게 권력 물려준 前 공산주의자
카스피해 연안의 小國(소국) 아제르바이잔은 1991년 소련 붕괴와 함께 독립한 신생국가다. 1993년 이후 이 나라를 통치해 온 헤이다르 알리예프 대통령은 舊(구)소련 시절 아제르바이잔 KGB 의장, 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서기장, 소련 제1부수상, 소련공산당 정치국원 등을 지냈으며, 안드로포프 死後(사후)에는 후임 소련공산당 서기장 물망에 오르기도 했던 인물이었다.
소련 붕괴 후 정계 일선에서 사라졌던 그는 1993년 최고회의(국회) 의장을 거쳐 內戰(내전)의 와중에 대통령이 됐다.
헤이다르 알리예프는 1999년 이후 심장병 등으로 고생했다. 2003년 4월에는 연설 도중 가슴을 움켜쥔 채 쓰러지는 모습이 TV를 통해 방영되기도 했다. 그가 터키의 군병원에 입원해 있던 2003년 8월 6일, 그의 아들 일함 알리예프(당시 48세)가 국회에서 총리로 선출됐다.
일함은 舊(구) 소련 시절 국립모스크바국제관계연구소에서 역사학 박사 학위를 받은 후 이 연구소에서 강사 생활을 하다가 소련 붕괴 후 기업인으로 변신했다. 그는 아버지가 정권을 잡은 후인 1994년 아제르바이잔 국영석유회사(SOCAR) 부사장이 됐고, 이듬해에는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같은 해 그는 아제르바이잔국가올림픽위원회(NOC) 위원장도 맡았다.
2003년 10월 15일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일함은 아버지의 지원에 힘입어 압도적 표차로 당선됐다. 그로부터 4개월 후 헤이다르 알리예프는 8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2013년 연임 임기가 끝나는 일함 알리예프의 후계자로는 그의 부인인 메흐리반 알리예바가 유력시되고 있다. 유네스코 친선대사, 아제르바이잔 체조협회 회장, 아제르바이잔 문화재단 이사장 등을 지낸 그녀는 2005년 총선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아프리카의 권력세습: 가봉·콩고민주공화국·토고
아프리카 가봉공화국의 오마르 봉고 전 대통령은 朴正熙(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 이래 네 번이나 訪韓(방한)했고, 기아자동차에서 생산하는 봉고 승합차에 이름을 남겨 우리 국민들에게 친숙한 인물이다. 1967년 이래 42년간 장기집권하다가 올 6월 18일 타계한 그도 아들에게 권력을 물려줬다. 오마르 봉고의 아들 알리 벤 봉고(50)는 지난 8월 30일 치러진 대선에서 41.7%를 득표,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알리 벤 봉고의 권력세습은 오래전부터 예정되어 온 것이었다. 그는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후 1981년 집권 가봉민주당(PDG)에 입당, 일찌감치 후계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1983년에는 가봉민주당 중앙위원, 이듬해에는 당 정치국원으로 선출돼 아버지와 당 사이의 가교 역할을 맡았다.
알리는 1989년 사촌인 마틴 봉고의 뒤를 이어 외무부 장관에 임명됐으나, 1991년 개헌으로 장관의 나이를 35세 이상으로 제한하면서 정부를 떠났다. 같은 해 하원의원으로 선출된 그는 이후 4선을 기록했다. 1996년에는 가봉이슬람사무고등평의회 총재가 됐다. 1999년 국방장관으로 임명되면서 정부에 복귀한 알리는 2003년 가봉민주당 부총재로 선출되면서 후계자 자리로 한 걸음 더 다가섰다.
한때 체 게바라와 함께 게릴라전을 벌였고, 이웃 탄자니아에서 홍등가를 운영한 적도 있는 로랑 카빌라가 부룬디·우간다·르완다의 투치족 정부 지원 아래 모부투 정권을 타도하고 수도 자이르의 수도 킨샤사에 입성한 것은 1997년 5월 17일이었다. 시민들은 종려나무 잎을 흔들며 그의 군대를 환영했다.
카빌라는 나라 이름을 자이르에서 콩고민주공화국으로 바꾸면서 자유민주선거를 약속했지만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카빌라는 자신을 지원했던 르완다·우간다·부룬디의 투치족 정부를 적대시하는 정책을 폈고, 이들 나라는 콩고민주공화국 내 투치족을 부추겨 카빌라에 맞서게 했다. 결국 새로운 내전이 벌어졌다.
2001년 1월 18일, 로랑 카빌라는 경호원에게 암살됐다. 그 경호원이 카빌라를 암살한 직후 자살하는 바람에 범행을 사주한 자가 누구인지 미궁에 빠졌다. 로랑 카빌라가 죽자 그의 아들 조제프 카빌라가 대통령직을 이어받았다. 이때 그의 나이는 29세였다.
조제프는 탄자니아에서 군사학을 공부했고, 우간다에서 대학을 다녔다. 1996년 로랑 카빌라의 반군이 모부투 정권에 대한 공세를 시작한 후, 그는 반군 부대를 지휘해 킨샤사 공략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아버지가 정권을 잡은 후 조제프 카빌라는 중국으로 건너가 인민해방군 국방대학교에서 수학했다. 1998년 귀국한 후 조제프 카빌라는 육군소장 계급장을 받고 콩고군 합참차장에 임명됐고, 2000년에는 콩고 육군참모총장이 됐다.
아버지가 암살된 지 8일 후인 2001년 1월 26일, 조제프 카빌라는 대통령에 취임했다.
이듬해 그는 유엔의 중재 아래 반군단체들과 권력을 분점하는 내용의 평화협정을 체결, 1998년부터 시작된 내전을 끝냈다. 하지만 이미 330만~470만명의 인명이 희생된 후였다.
조제프 카빌라는 2006년 7월, 건국 이래 최초로 실시된 민주선거에서 대통령에 당선됐다. 하지만 아직도 이 나라의 밀림에서는 반군들이 준동하면서 약탈과 강간, 살인을 일삼고 있다.
서부 아프리카의 貧國(빈국) 토고의 포레 냐싱베(43) 대통령도 아버지로부터 권력을 이어받은 경우다. 그는 1967년 쿠데타로 집권한 후 38년 동안 철권통치를 했던 에야데마 냐싱베가 2005년 2월 5일 사망하자, 군부의 지지를 업고 대통령직을 계승했다.
그는 프랑스 소르본대학에서 금융경영학을 전공한 후 미국 조지 워싱턴대에서 MBA를 받고 귀국한 다음 아버지의 재정보좌관을 지내면서, 아버지가 해외로 빼돌린 재산을 관리했다. 2002년 36세의 나이로 국회의원에 선출된 그는 이듬해 광업통신장관이 됐다.
이때부터 그는 공식행사에 아버지를 자주 수행하면서 아버지의 후계자로 부각됐다. 아버지 에야데마는 헌법을 바꾸어 대통령 출마 가능 연령을 45세에서 35세로 낮추었다.
포레 냐싱베는 아버지가 사망한 직후 권력을 승계했지만, 야당세력은 대통령 유고 시 60일 내에 대선을 치를 것을 명시한 헌법규정을 준수할 것을 요구했다. 서아프리카경제공동체, 아프리카연합 등 국제기구도 헌법을 준수하라는 압력을 가해 왔다. 결국 포레는 권력을 승계한 지 3주 만에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난 후 그해 4월 대통령 선거를 통해 정식으로 대통령에 선출됐다. 하지만 야당세력은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하며 거세게 반발했고, 포레는 무력진압으로 맞서 100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이슬람 국가에서도 父子 세습 시도 중
중동·아프리카 국가들 중에는 아직은 아니지만, 조만간 부자 권력세습이 이루어질 것으로 예상되는 나라들도 있다.
1981년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이 암살된 후 권력을 승계한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은 아들 가말 무바라크(46)에게 권력을 물려주기 위한 준비를 착착 진행하고 있다.
이집트 공군사령관을 거쳐 사다트의 부통령으로 있다가 정권을 잡은 무바라크는 오랫동안 부통령 자리를 공석으로 비워놓았다. 그러다가 2002년 차남 가말을 집권 국민민주당의 정책위 의장으로 임명, 아들에게 권력을 넘겨주려는 뜻을 드러냈다.
가말은 이후 집권당 사무부총장을 거쳐 2007년 당 최고위원으로 임명됐다. 이집트 헌법은 대통령 후보는 무소속이거나 정당의 ‘지도부’에 속해 있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가말의 최고위원 임명은 그가 대권을 향해 한 발 더 전진한 것으로 평가됐다.
이러한 권력세습 기도를 이집트 국민들은 의외로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가말은 카이로 소재 아메리칸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후 ‘뱅크 오브 아메리카’ 카이로지점에 근무하면서 私募(사모)펀드를 운영해 본 금융인 출신. 때문에 1952년 나세르혁명 이후 군 출신이 계속 집권해 온 이집트에서는 부자세습이라고는 해도 ‘민간인’ 출신이 대통령이 된다는 것만으로도 하나의 진전으로 보는 시각이 적지 않다고 한다. “새 도둑이 들면 헌 도둑(무바라크 일가)보다 더 훔치는 데 열을 낼 테니, 차라리 가말이 정상적인 민주정부로 가는 다리 역할을 맡는 게 최선”, “지긋지긋한 군부통치를 끝내는 것이 먼저”라는 의견이다.
이집트의 다음 대선은 2011년이다. ‘현대의 파라오’ 무바라크의 아들이 권좌를 물려받을지 두고볼 일이다.
리비아의 무아마르 카다피도 아들에게 권력을 넘겨주려 하고 있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그는 1969년 27세의 나이로 이드리스 왕정을 무너뜨리고 집권, 현재 세계 최장수 국가지도자로 군림하고 있다.
카다피의 6남3녀 중 후계자로 유력시되는 사람은 차남인 사이프 알 이슬람 카다피(37)다. 그는 미국 팬암기 폭파사건(로커비 사건) 해결, 리비아 내에서 에이즈 감염 혈액 수혈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던 불가리아 간호사 석방, 이탈리아의 리비아 식민지배 보상 협상 등 굵직한 대외협상을 맡아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으면서 카다피의 후계자로 주목을 받았다.
국내적으로는 도시공학도답게 주택 및 도시문제, 국영기업 민영화, 독립 민간언론매체 활성화 등을 추진했으나 보수파의 반대에 부딪히자 작년 8월 “국가는 상속이 가능한 농장 같은 것이 아니다”라면서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그는 지난 8월 말기전립선암을 이유로 스코틀랜드의 교도소에서 석방된 팬암기 폭파범 알 메그라히의 귀국길에 동행해 다시 주목을 받았다.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는 “사이프 알 이슬람이 알 메그라히와 함께 다시 대중 앞에 나타난 것은 그동안 자신이 갖지 못했던 보수층의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한 것”이라면서 “앞으로 그가 명실상부한 후계자가 될 조짐이 보인다”고 보도했다.
카다피의 셋째 아들 사디도 주목받는 인물이다. 리비아 국가대표 축구팀 선수로 국제대회에 출전한 적이 있는 그는 현역 육군 대령으로 2001년 1월 訪日(방일) 당시 일본 재계를 시찰하는 등 활발한 대외활동으로 눈길을 끌었다.
한편 카다피의 4남 한니발(32)은 프랑스 파리, 스위스 제네바 등지에서 음주운전, 여자친구 및 호텔종업원 폭행 등으로 말썽을 피우던 끝에 얼마 전 미국의 외교전문지 <포린 폴리시>가 선정한 ‘가장 골치 아픈 세계지도자 아들’ 다섯 명 가운데 한 명으로 꼽혔다.
이슬람 神政(신정)국가인 이란에서는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의 차남 모즈타바가 권력을 물려받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모즈타바(나이 불명)는 지난 6월 대선 부정에 항의하는 시위사태가 발생한 후 정권의 친위대인 혁명수비대의 민병대 조직 바시즈를 장악하고, 강경진압을 주도했다. ‘하메네이의 守門將(수문장)’이라고 불리는 그는 공개 석상에는 거의 나서지 않지만, 군부와 정보기관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이티의 ‘베이비 독’ 뒤발리에
중남미에서도 부자세습은 그리 낯선 일이 아니다. 카리브해의 貧國(빈국) 아이티에서는 뒤발리에 부자가 2대 30년에 걸쳐 독재정치를 했다.
왕조를 세운 프랑수아 뒤발리에는 아이티大(대) 의대를 나와 미국 미시간대에서 공중보건학을 전공한 의사 출신이었다. 보건노동부 장관 등을 역임하다 쿠데타 정권에 항의해 사임하기도 했던 그는 1957년 집권 후에는 독재자로 변신했다.
그는 ‘통통 마쿠트(마쿠트 아저씨)’라고 불리는 비밀경찰을 앞세워 공포정치를 자행했다. 비밀경찰은 부두교(아이티의 전통종교)의 무당들을 끄나풀로 활용했다. 그는 1964년 종신대통령이 됐다.
1971년 4월 21일 프랑수아가 64세로 사망한 후 그의 아들 장 클로드 뒤발리에가 권좌를 물려받았다. 이때 그의 나이 19세. ‘파파 독(Papa Doc)’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아버지와 비교해 그는 ‘베이비 독(Baby Doc)’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권력을 계승한 뒤부터 이 나이 어린 독재자는 세계 각국 언론의 해외토픽난을 심심찮게 장식하기 시작했다. 1972년 12월 2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베이비 독 뒤발리에’라는 8단짜리 기사를 보면, 그는 “스포츠용 승용차와 美人(미인) 수집벽, 文盲(문맹) 85%에 군림하는 21세 뚱보”로 소개됐다. 이 기사에는 한 손에 권총을 들고 어머니, 아내, 자식과 나란히 선 ‘베이비 독’ 뒤발리에의 사진이 함께 실렸다.
1985년 10월, 식량난에 항의하는 폭동이 발생했다. 상황이 점점 악화되자 미국 레이건 행정부는 뒤발리에에게 선거 실시 등 개혁을 요구했다. 뒤발리에는 “종신대통령제인데 선거는 무슨 선거냐”며 코웃음을 쳤지만, 사태가 악화되자 결국 1986년 2월 7일 망명길에 올랐다.
그 후 뒤발리에는 그동안 축재한 재산을 펑펑 쓰면서 파리에 망명 중이던 중앙아프리카의 식인황제 보카사 등과 어울려 ‘유유상종’이라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그가 축재한 재산은 2억 달러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 돈의 대부분은 1992년 아내와 이혼하면서 위자료로 날렸다. 이후 그는 집세는 그의 장모가 내 줬지만, 전화료를 못내 전화마저 끊기는 한심한 처지가 됐다.
1998년 12월, 칠레의 독재자 피노체트가 영국에서 체포된 후 뒤발리에가 병든 몸을 이끌고 사라졌다는 기사가 나왔다. 얼마 후에는 프랑스의 지방의원들이 그를 해외로 추방하자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는 기사가 나왔고, 이를 마지막으로 뒤발리에에 대한 뉴스는 더 이상 나오지 않고 있다.
니카라과 소모사 一家, 3대에 걸쳐 족벌통치
니카라과에서는 소모사 일가가 3대 52년에 걸쳐 족벌통치를 했다. 민중주의자 아우구스토 산디노(1979년 니카라과혁명을 이끈 반군단체 ‘산디니스타 전선’은 산디노의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다) 장군을 살해하고 권력을 잡은 아나스타시오 소모사 가르시아는 1937~47년, 1950~56년 두 차례에 걸쳐 대통령을 지냈다. 대통령직을 떠나 있을 때에도 그는 군대를 배경으로 사실상 국가를 지배했다.
그가 죽은 후에는 아들 루이스 소모사 데바이예가 1956~63년 대통령을 지냈다. 그는 아버지에 비해서는 비교적 부드럽게 통치했다는 평을 들었다.
소모사 일가는 루이스의 임기가 끝난 후 대통령직을 잠시 다른 사람에게 맡겨 놓았다가, 1967년 루이스의 동생 아나스타시오가 다시 대통령직을 차지했다. 루이스 시절에도 군사령관으로 막후 실력자였던 그는 1972년 수도 마나과에서 5000여 명이 사망하는 지진이 발생하자, 세계 각국에서 보내온 구호금품들을 횡령했다.
그는 1974년 다시 대통령이 되어 계속 강권통치를 했으나, 1979년 7월 민중봉기로 실각했다. 그는 1980년 9월 망명지인 파라과이의 아순시온에서 산디니스타 정부가 보낸 특공대의 공격을 받고 사망했다.
1959년 바티스타 정권을 타도하고 정권을 잡은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83)는 동생에게 권력을 물려줬다. 피델의 혁명 동지이기도 한 라울(78)은 혁명 직후 반대파들에 대한 피의 숙청을 감행해 ‘카리브해의 도살자’라고 일컬어졌다.
피델의 집권 이후 줄곧 국방장관을 맡아 온 라울은 2006년 7월 피델이 쓰러지자 국가평의회 임시의장(임시대통령)을 맡아 국사를 처리했다. 그는 작년 2월 피델이 정식으로 공직 사임의사를 밝힌 지 6일 뒤인 2월 26일 국가평의회 의장에 선출됐다.
그가 권력을 계승하자 일부에서는 그를 ‘실용주의자’로 평가하면서 쿠바의 개혁개방 가능성을 점쳤다. 라울도 취임한 후 정부조직 개혁, 농업생산성 확대, 국영기업 경영 정상화, 식품배급제 개선 등 개혁 필요성을 강조했으나, 아직까지 가시적인 결과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변화가 있다면 라울의 옷차림이 군복에서 신사복으로 바뀐 것 정도랄까.
두 차례 부부간 권력승계 이뤄진 아르헨티나
아르헨티나는 두 차례나 부부간에 권력을 주고받은 진기록을 가진 나라다.
첫 번째는 후안 도밍고 페론과 이사벨 페론 부부다. 군인 출신 정치가인 후안 도밍고 페론은 1946~1955년 대통령을 지내면서 포퓰리즘 정책을 펴서 노동자 등 대중의 인기를 끌었다. 1951년 그는 두 번째 대통령 출마를 앞두고 대중적 인기가 높던 아내 에바 페론(에비타)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가 군부가 반발하자 이를 철회했다. 에바는 이듬해 자궁암으로 사망했다.
페론은 그의 포퓰리즘 정책에 반발한 군부의 압력으로 1956년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파나마로 망명했다. 후안 페론은 망명지에서 만난 무용수 출신 이사벨 마르티네스를 비서로 채용했다가 1960년에 결혼했다. 이사벨은 후안보다 35세 연하였다.
이후 이사벨은 후안과 함께 스페인에서 망명생활을 하면서 여러 차례 아르헨티나를 방문해 국민들에게 ‘호시절’이었던 페론 시대를 상기시키며 남편의 정계 복귀 기반을 다졌다. 1972년 오랜 망명생활 끝에 귀국한 후안 페론은 이듬해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 화려하게 재기했다. 이때 그는 아내 이사벨을 부통령으로 지명했다.
1974년 후안 페론이 79세를 일기로 사망하자 이사벨이 대통령직을 승계, 세계 최초의 여성대통령이 됐다. 하지만 그녀는 내란을 방불케 하는 좌우 대립, 측근들의 부정부패, 인플레이션 등으로 표류하다가 1976년 군부쿠데타로 축출됐다. 그녀는 5년간 가택연금에 처해졌다가 1981년 석방되어 스페인으로 망명했다. 그녀는 수차 정계 복귀를 시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고, 2006년에는 재임 중 극우단체의 좌파인사 암살 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아르헨티나 법원으로부터 체포영장을 발부받기도 했다.
아르헨티나의 현 대통령인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데 키르치네르(56)도 남편으로부터 권력을 넘겨받았다.
변호사 출신인 그녀는 1970년대에 페론주의 정당인 정의당의 청년조직에서 활동하면서 정치에 입문했고, 1989년 산타크루즈 주의회 의원으로 선출됐다. 이후 그녀는 연방하원의원과 상원의원을 지내면서 소외계층을 대변하는 정치활동을 펼치면서 미모와 카리스마, 뛰어난 언변으로 ‘파타고니아의 표범’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녀의 남편 네스토르 키르치네르(59)도 아내와 마찬가지로 1970년대 정의당 청년조직에서 정치적 이력을 쌓기 시작한 변호사 출신 정치인이다. 그는 1986년 고향인 리오가예고스 시장으로 당선되면서 본격적으로 정치활동을 시작했는데, 그를 정계에 입문시킨 것은 아내 크리스티나였다고 한다. 1991년 이후 세 차례 산타크루즈 주지사를 지냈으나, 정치인으로서 전국적인 지명도는 아내에게 미치지 못했다.
2003년 네스토르는 ‘승리를 위한 전선’ 후보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취임 후 그는 페론주의자답게 세제 개편을 통한 부의 재분배, 교육·연금·보건 부문의 국가통제 강화, 전임자들인 메넴 정권과 델라루아 정권 시절 민영화된 주요 기업들의 再(재)국유화 정책 등을 펴면서 신자유주의적 경제개혁을 강요하는 국제통화기금(IMF) 및 미국과 충돌했다. 그의 노력으로 2001년 국가부도위기에 몰렸던 아르헨티나는 2003년 하반기에는 8.3%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다. 실업률도 취임 초에 비해 절반으로 떨어졌다.
이러한 업적 때문에 그는 2007년 대선에 다시 나설 경우 재선이 유력시됐으나, 재선에 나서는 대신 아내 크리스티나를 대통령 후보로 내세웠다. 그해 대선에서 크리스티나는 남편의 인기에 힘입어 樂勝(낙승)했다. 부부가 정상적인 대통령 선거에 의해 권력을 승계한 것은 이들이 세계에서 처음이다. 이미 남편의 집권 기간 중 국정에 깊이 간여했던 그녀는 각료의 절반 이상을 남편이 쓰던 사람으로 채우는 등 남편의 정책을 계승하고 있다.
권력세습을 택한 사회주의자들
명색이 공화국이면서 부자 권력세습이 이루어진 나라들을 보면 그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1인 독재 혹은 1당 독재 국가인 경우가 많다.
특히 세습독재가 이루어진 나라 가운데는 사회주의 국가 혹은 사회주의 성향의 국가가 많은 것이 눈에 띈다. 북한과 쿠바, 루마니아가 대표적이다. 아제르바이잔은 사회주의 국가가 아니지만, 헤이다르 알리예프는 소련공산당 정치국원까지 지낸 前(전) 공산주의자였다. 시리아의 집권 바트당은 원래 아랍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정당이었다. 명색이 평등을 기치로 내건 사회주의 국가에서 부자세습이 빈번하게 발생하는 이율배반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권력을 물려받은 지도자들 가운데는 장징궈(타이완), 라울 카스트로(쿠바), 알리 벤 봉고(가봉), 조제프 카빌라(콩고민주공화국), 아나스타시오 소모사 데바이예(니카라과) 등에게서 보듯 군이나 공안기관에서 이력을 쌓은 경우가 많다. 시리아의 바샤르 알 아사드는 후계자로 지명된 후 서둘러 군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고 한 마오쩌둥(毛澤東)의 말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하지만 권력상속자들의 국정운영 성적표는 그리 좋지 않다. 이는 지난 7월 미국의 외교전문지 <폴린 폴리시>가 발표한 ‘실패국가 리스트’를 보면 여실히 드러난다.
콩고민주공화국(5위)과 아이티(12위)는 ‘치명적 국가’로, 북한(17위), 시리아(39위), 토고(50위), 아제르바이잔(56위), 쿠바(76위)는 ‘위험국가’로 분류됐다.
과거 부자세습이 있었던 니카라과(64위)나 부자세습이 시도되고 있는 이란(38위), 이집트(43위) 등도 ‘위험국가’로 분류됐다. 최근 권력세습이 이루어진 아프리카의 가봉(99위)은 ‘위험국가’ 다음 수준인 ‘경계국가’로 분류됐다. 싱가포르(160위)와 아르헨티나(149위)만이 ‘안정적 국가’로 분류됐다(‘실패국가 리스트’는 순위가 높을수록 상황이 나쁜 것임-필자 注).
북한의 3대 권력세습 성공할까?
부자세습을 한 나라 중 성적이 탁월한 타이완과 싱가포르가 中華圈(중화권) 국가라는 점도 눈에 띈다. 타이완의 장징궈나 싱가포르의 리셴룽 모두 장기간에 걸쳐 후계자 수업을 받으면서 능력을 검증받은 후 권좌에 올랐는데, 여기에는 5000년 중국 역사의 축적, 특히 帝王學(제왕학)의 전통이 알게 모르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북한의 김정일은 1964년 노동당에서 일을 하기 시작한 이래 1994년 金日成(김일성)이 죽을 때까지 30년, 1973년 ‘당중앙’으로 지칭되면서 사실상 후계자로 내정된 이래 21년 동안 권력승계를 준비했다. 김일성 말기에 이르러 그는 사실상 김일성과 공동통치자였다.
하지만 그의 후계자 수업은 인민을 먹여살리기 위한 수업이 아니라 김일성 유일사상체계 수립 등 순전히 권력을 保持(보지)하기 위한 수업이었다. 그 결과는 대량 餓死(아사) 사태와 북한의 국제적 고립이었다.
이제 김정운 후계체제설이 나돌고 있다. 김정운이 군이나 국가안전보위부에서 이력을 쌓고 있다는 소문도 있다. 그게 사실일 경우 김정운 체제도 인민들을 위한 체제가 아니라 ‘김씨 조선’ 왕조 그 자체를 위한 체제가 될 것이 뻔하다.⊙
이들의 공통점은 ‘공화국의 왕자’라는 점이다. 이들은 장기집권 혹은 철권통치를 했던 아버지의 뒤를 이어 나라를 ‘相續(상속)’받았다. 권력세습이다.
물론 그 방식은 차이가 있다. 장기간에 걸쳐 착실하게 후계자 수업을 받은 끝에 국민들로부터 실적을 인정받아 권력을 잡은 경우가 있는가 하면, 왕조 시대에 先王(선왕)이 죽자마자 世子(세자)가 大統(대통)을 잇듯이 권력을 이은 사람도 있다.
권좌에 오른 뒤의 성적표도 사람마다 다르다. 성공적으로 국가를 이끌어가는 지도자, 그럭저럭 체제를 유지해 가는 지도자가 있는가 하면, 전제군주처럼 통치하다 나라를 파탄지경으로 몰아넣은 지도자, 그리고 철권통치 끝에 민중봉기로 쫓겨난 지도자도 있다. 그런가 하면 김정운 후계설이 나오는 북한처럼 3대째 권력세습을 시도하는 경우도 있다.
‘공화국의 왕자’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권력을 세습했고, 그 후의 통치행태는 어떠했는가를 살펴보는 것은 북한에서 3대째 후계세습설이 솔솔 나오고 있는 오늘날 하나의 참고가 될 것이다.
■ 타이완: 장제스-장징궈 ■

얼마 후 장제스는 장징궈의 측근인 총정치작전부 부주임 왕성(王昇) 장군을 불렀다. 장제스는 “얼마 전 국민대회(국민당 정부 시절 총통을 선출하던 기구. 유신헌법하의 통일주체국민회의와 유사) 대표 1000여 명이 連名(연명)으로 장징궈를 추천하는 글을 올렸고(사실은 장제스가 배후조종한 것임), 셰둥민 등도 고위층 회의에서 여러 차례 장징궈가 大任(대임)을 맡을 만하다고 추천했다”면서 “이미 사회에서 이렇게 장징궈를 극진히 모시고 있으니, 귀관은 셰둥민에게 가서 당(국민당) 중앙으로 보내는 ‘장징궈가 행정원장(국무총리)에 취임하는 것이 민심’이라는 내용의 정식 추천장을 받아 오라”고 지시했다.
장씨 부자의 忠僕(충복)인 왕성은 즉시 “장징궈 선생은 才德(재덕)을 겸비하고 지혜와 용기를 모두 갖추었으며, 어려운 중에 나라를 일으키고 보필한 뛰어난 인재다. 징궈 선생은 이미 衆望(중망)을 얻고 있고 전국 上下(상하)에서 모두 추천하니 이것은 민심이 원하는 바이다”라는 내용의 추천장을 만들어 셰둥민에게 달려갔다. 왕성이 추천장을 내밀자 셰둥민은 추천장에 서명했다.
1972년 5월 26일 국민당 중앙상임위원회가 열렸다. 부총통과 행정원장을 겸하고 있던 옌자간(嚴家)은 회의가 열리기 전 셰둥민의 추천서를 읽고 아들에게 총통 자리를 물려주려는 장제스의 뜻을 간파했다. 테크노크라트 출신답게 옌자간은 머리 회전이 빨랐다.
그는 장제스에게 “부총통과 행정원장 자리를 내놓고, 후임 행정원장으로 장징궈를 추천하겠다”고 말했다. 장제스는 “부총통직까지 내놓을 필요는 없고, 행정원장직만 내놓으면 된다”고 했다.
국민당 비서장(사무총장) 장바오수(張寶樹)가 셰둥민의 추천서를 읽고, 옌자간이 장징궈를 후임 행정원장으로 추천하자 장내는 침묵에 빠졌다. 장징궈의 후계자 지명은 뜻밖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장제스는 “옌 부총통의 제안에 찬성하는 사람은 기립하라”고 말하자, 참석자들은 장제스의 위세에 눌려 자리에서 일어났다.
국민당 선전부 등은 장징궈의 덕성과 업적을 찬양하는 대대적인 선전에 들어갔다. 장징궈는 입법원(국회)에서 압도적인 찬성표를 얻어 그해 6월 행정원장에 취임했다.
준비된 후계자 장징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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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원장 시절 민정시찰 중인 장징궈(오른쪽에서 두 번째)와 셰둥민 타이완성 주석. |
1949년 국민당 정부가 타이완으로 敗退(패퇴)한 후, 장징궈는 정치행동위원회 의장에 임명돼 모든 공안기관을 장악하고 좌익분자들과 反(반)정부 인사들을 숙청했다. 1950년에는 국방부 총정치작전부 주임(공산국가 군대의 총정치국장에 해당)과 국민당 중앙개조위원회 위원을 맡았다.
오랫동안 총통의 장남이라는 위치를 의식해 권력의 막후에서 자중자애하던 장징궈는 1963년 옌자간 내각에 무임소 정무위원(무임소장관)으로 입각하면서 정식으로 국정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1965년에는 현역 장성 신분으로 국방부장(국방부 장관)에 임명됐다.
장징궈는 1969년 1월에는 국제경제합작발전위원회 의장을 맡아 재정·경제분야로 활동영역을 확장했고, 그해 7월부터는 행정원 부원장(부총리)을 겸임했다. 1970년대로 접어들면서 그는 자신의 측근인 구국단 주임 리환(李煥)을 책임자로 하는 ‘국가건설연구반’을 조직해 젊은 엘리트, 특히 타이완 출신 엘리트들을 당·정·군에 포진시키기 시작했다. ‘국가건설연구반’ 조직은 1970년대에 金日成(김일성)의 후계자로 지명된 金正日(김정일)이 ‘3대혁명소조’를 통해 북한의 당·정·군을 자신을 지지하는 젊은 세대로 채워 나갔던 것과 흡사하다.
장징궈가 행정원장에 취임한 후 부총통 옌자간은 국정에 대해 발언하는 것을 삼가면서 조용히 뒤로 물러앉았다. 반면에 장징궈 옹립에 앞장선 사람들은 출세가도를 달렸다. 장제스의 뜻을 받들어 셰둥민에게 추천서를 받아낸 왕성은 총정치작전부 주임으로 승진했다.
셰둥민은 장징궈가 행정원장이 된 직후 타이완성 주석이 됐고, 후일 장징궈가 총통이 되자 부총통이 됐다. 그는 국가 최고위직에 오른 최초의 타이완 사람이었다. 자신이 타이완의 안정과 발전을 위해 큰일을 했다고 자부했던 그는 죽기 전에 장제스 父子(부자) 세습 과정의 이면에서 있었던 일들을 회고록에 남겼다.
1975년 4월 5일 장제스가 87세를 일기로 사망하자 옌자간이 총통으로 취임했다. 하지만 실권은 행정원장 겸 국민당 주석인 장징궈에게 있었다. 1978년 3월 장징궈는 국민대회에서 정식으로 총통으로 선출됐다.
3대 권력세습 가능성 차단
장징궈는 집권 후 1978년 美中(미중) 수교 등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타이완을 안정적으로 이끌면서 경제발전을 이룩했다. 특히 그는 당과 정부에 타이완성 출신 엘리트들을 중용하는 ‘본토화 정책’을 폈다. 1984년에는 타이완 출신의 젊은 경제학자인 리덩후이(李登輝)를 부총통으로 지명했다. 1987년 7월에는 38년간 지속되어 온 계엄령을 해제해 민주화를 향해 한 발짝 더 전진했다.
아버지로부터 권력을 물려받았지만, 장징궈는 아버지와 달랐다. 1985년 <타임>지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가족 중에서 후계자가 나오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1986년에는 후계자설이 떠돌던 장남 장샤오우(蔣孝武)를 싱가포르 주재 무역대표부 부대표로 내보내 3대 권력세습의 가능성을 차단했다.
1988년 1월 13일 장징궈는 7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고, 장징궈의 뜻대로 부총통 리덩후이가 총통직을 승계했다. 2000년에는 야당인 민주진보당(민진당)의 천수이볜(陳水扁) 후보가 총통에 당선돼 타이완 역사상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루었다.

리셴룽은 싱가포르軍(군) 장학금을 받아 영국 케임브리지대 트리니티 칼리지로 유학, 수학과 컴퓨터공학을 전공했다. 그는 졸업시 수학과 수석을 차지했고, 컴퓨터공학과에서도 우수한 성적을 받았다.
교수들은 그에게 수학자의 길을 걷도록 권했지만, 어린 시절부터 정치에 관심을 가졌던 리셴룽은 “싱가포르야말로 내가 속한 곳이며, 앞으로도 계속 인생을 보내고 싶은 곳”이라면서 귀국했다.
1971년 싱가포르군에 입대한 그는 빠른 속도로 승진해 1984년 준장으로 예편했다. 군복무 시절 그는 美(미) 하버드대 행정대학원(케네디스쿨)과 미 육군 지휘참모대에서 修學(수학)했다.
1984년 리셴룽은 당시 국방부 장관 겸 인민행동당 부서기장이었던 고촉통(吳作棟)의 권유로 총선에 출마,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이후 그는 통상산업부 장관, 국방부 장관 등을 거치면서 승승장구했다.
1990년 11월 리콴유가 31년 만에 총리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는 회고록에서 이렇게 술회했다.
“나는 31년간(말레이시아연방 내 싱가포르 자치정부 총리 시절 포함-필자 注) 총리를 역임했다. 임기를 한 번 더 연장해 총리 자리에 있는다고 해도, 내가 여전히 건강하고 효율성을 잃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얻을 것이 없었다. 하지만 만일 내가 물러난다면, 남은 세월 동안 나의 후계자가 자신의 업무를 파악해 성공적으로 일하는 것을 도울 수 있다. 그것은 내가 싱가포르에 바치는 마지막 봉사가 될 것이다.”
이 ‘마지막 봉사’를 위해 리콴유는 신설된 선임장관(senior minister)을 맡았고, 경제관료 출신인 고촉통 제1부총리가 총리직을 승계했다. 리셴룽은 고촉통이 맡았던 제1부총리가 됐다.
그러자 리콴유가 선임장관으로 수렴청정을 하면서 리셴룽에게 권력을 세습하려는 것이라는 관측이 무성했다. “리콴유는 물러나는 것(step down)이 아니라 옆으로 자리만 옮기는 것(step aside)”이라는 비아냥이 나오는가 하면, “리콴유 부자가 언제 고촉통을 몰아내느냐를 결정하는 일만 남았다”거나 “리콴유 총리가 1992년 총선까지는 고촉통 체제로 밀고 나가다가 총선 승리 후 리셴룽 부총리에게 정권을 넘겨주려는 그림을 그리고 있으며, 고촉통은 벤치 워머(bench warmer) 역할밖에 못할 것”이라는 분석도 나왔다.
14년간 부총리 지내면서 실적 쌓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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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 9일 독립기념일 퍼레이드를 관람하는 리셴룽 부총리(왼쪽)와 고촉통 총리(오른쪽). |
리콴유는 “내가 뛰어난 바이올린 연주자라면, 고촉통은 나와 같은 독주자들로 구성된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와 같은 인물”이라고 고촉통을 높이 평가했다.
리셴룽은 13년 동안 제1부총리, 싱가포르금융청(중앙은행) 총재, 재무부 장관 등을 지내면서 ‘역량’을 인정받았다. 그는 1997년 아시아를 덮친 금융위기를 극복한 것은 물론, 과감한 금융자유화 정책으로 싱가포르를 금융허브로 만들었다. 법인세 등의 세율을 큰 폭으로 내려 첨단기술투자를 유치하는 한편, 케임브리지에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한 공학도답게 세계 최고수준의 정보통신 인프라를 구축했다.
한편 그는 1999년부터 40대 각료와 군장성들로 구성된 ‘40인 전략팀’을 만들어 자신과 국가의 장래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2003년 8월, 고촉통 총리는 리셴룽을 후계자로 지명했다. 리콴유 전 총리도 “그는 13년간 부총리직에 있으면서 능력을 보여줬다”면서 “내가 그를 선택하거나 임명한 것이 아니며, 본인이 능력을 입증하지 않았다면 총리가 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2004년 8월 총리에 취임한 후 리셴룽은 싱가포르를 의료·교육·바이오허브로 키운다는 전략을 수립, 추진하고 있다. “싱가포르는 작은 나라이기 때문에 살아남으려면 늘 탁월해야 한다”는 것이 그가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다. 이런 노력에 힘입어 그는 집권 이후 4년 동안 평균 8%의 경제성장을 달성했다.
하지만 인민행동당 1당 통치와 지도자들의 엘리트주의는 좀처럼 변하지 않고 있다. 2005년 리셴룽은 “서구식 多黨制(다당제)는 싱가포르에 어울리지 않기 때문에 향후 20년 동안 이를 도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리셴룽은 작년 4월 “앞으로 나는 두 번 더 집권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는 최소한 2021년까지는 정권을 놓지 않겠다는 얘기다. 그는 “내 후계자는 장기간 정부 안에서 국정을 이끌 능력을 배양해야 한다”면서 “30대나 40대 초반의 젊은층에서 총리 후보감을 찾아 미리 키우겠다”고 말했다.
리셴룽의 부인인 호칭(何晶)은 현재 싱가포르 최대의 국영투자회사인 테마섹홀딩스 회장으로 활약하고 있다. 2005년 <월스트리트저널>이 선정한 ‘세계경제를 이끄는 파워 여성’ 7위에 오른 그는 싱가포르대학 공학과를 수석 졸업하고 국방부에서 근무하던 중 리셴룽과 만나 결혼했다. 리셴룽의 동생 리셴양은 싱가포르 최대 기업인 싱가포르텔레콤의 CEO를 맡고 있다.
부자 장기집권에도 싱가포르 국민들은 별 불만이 없는 듯하다. 지난 2006년 총선에서 리셴룽이 이끄는 인민행동당은 66.6%의 득표율로 84석의 국회의석 중 82석을 석권했다. 비결은 간단하다. 글자 그대로 ‘經國濟世(경국제세)’, 즉 경제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싱가포르 국민은 통치자와 ‘삶의 질을 올려주면 계속 권력을 보장해 주겠다’는 일종의 거래를 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타이완이나 싱가포르의 경우만 놓고 보면, 권력세습이라는 것도 그다지 나쁘지는 않은 것 같다. 하지만 권력을 세습한 통치자들 가운데 그들처럼 좋은 성적을 거둔 경우는 예외적이다. 다른 나라들의 경우를 보자.
■ 제3세계 국가들의 부자 세습 사례 ■
시리아: 대통령이 된 안과의사

하페즈의 뒤를 이은 것은 그의 둘째 아들 바샤르 알 아사드(44)였다. 그는 다마스쿠스 醫大(의대)를 졸업한 후 영국에서 안과 레지던트 과정을 밟고 있던 의사였다.
그가 처음부터 아버지의 후계자로 지목됐던 것은 아니었다. 원래 하페즈 알 아사드의 후계자는 바샤르의 형 바시르였다. 바시르는 대통령 경호와 레바논 문제 등을 담당하면서 후계자 수업을 받던 중 1994년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바시르가 사망하자 하페즈는 영국에 있던 바샤르를 불러들여 후계자 수업을 시키기 시작했다. 바샤르는 공화국수비대 대령으로 복무하면서 시리아에 인터넷과 휴대폰을 도입하고 각급 학교에 컴퓨터를 보급하는 등 ‘현대화의 기수’로 자신을 부각시켰다.
바샤르는 강력한 反(반)부패 캠페인도 벌였다. 이 와중에 국회의장으로 6년, 총리로 13년간 하페즈 알 아사드 대통령을 보좌했던 마르무드 알 조흐비 총리가 부패혐의로 실각했다가 자살했다.
하페즈가 사망한 후 바샤르의 권력승계는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하페즈가 죽은 다음날 집권 바트당은 바샤르를 대통령 후보로 추대했다. 긴급소집된 의회는 대통령 출마 제한 연령을 40세에서 바샤르의 나이인 34세로 낮추는 ‘爲人改憲(위인개헌)’을 단행했다.
같은 날 대통령 직무대행 압델 할림 카담 부통령은 바샤르를 대령에서 중장으로 진급시키면서 군총사령관에 임명했다. 국방장관, 참모총장 등 군 수뇌부도 즉각 바샤르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같은 달 19일 바트당은 바샤르를 당서기장으로 추대했다.
그해 7월 12일 바샤르는 단독 출마한 대통령선거(대통령 선거라기보다는 그의 추대를 확인하는 국민투표)에서 97.29%의 압도적 지지(?)를 받아 대통령에 당선됐다.
1983년에 하페즈 알 아사드가 병석에 누운 틈을 타서 쿠데타를 꾀하다가 해외로 축출됐던 바샤르의 삼촌 리파트가 바샤르의 권력세습은 違憲(위헌)이라고 주장하면서 바샤르에게 도전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으나,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없었다.
이후 바샤르는 대내외 정책에서 부친보다 다소 유연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아제르바이잔: 아들에게 권력 물려준 前 공산주의자

소련 붕괴 후 정계 일선에서 사라졌던 그는 1993년 최고회의(국회) 의장을 거쳐 內戰(내전)의 와중에 대통령이 됐다.
헤이다르 알리예프는 1999년 이후 심장병 등으로 고생했다. 2003년 4월에는 연설 도중 가슴을 움켜쥔 채 쓰러지는 모습이 TV를 통해 방영되기도 했다. 그가 터키의 군병원에 입원해 있던 2003년 8월 6일, 그의 아들 일함 알리예프(당시 48세)가 국회에서 총리로 선출됐다.
일함은 舊(구) 소련 시절 국립모스크바국제관계연구소에서 역사학 박사 학위를 받은 후 이 연구소에서 강사 생활을 하다가 소련 붕괴 후 기업인으로 변신했다. 그는 아버지가 정권을 잡은 후인 1994년 아제르바이잔 국영석유회사(SOCAR) 부사장이 됐고, 이듬해에는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같은 해 그는 아제르바이잔국가올림픽위원회(NOC) 위원장도 맡았다.
2003년 10월 15일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일함은 아버지의 지원에 힘입어 압도적 표차로 당선됐다. 그로부터 4개월 후 헤이다르 알리예프는 8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2013년 연임 임기가 끝나는 일함 알리예프의 후계자로는 그의 부인인 메흐리반 알리예바가 유력시되고 있다. 유네스코 친선대사, 아제르바이잔 체조협회 회장, 아제르바이잔 문화재단 이사장 등을 지낸 그녀는 2005년 총선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아프리카의 권력세습: 가봉·콩고민주공화국·토고

알리 벤 봉고의 권력세습은 오래전부터 예정되어 온 것이었다. 그는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후 1981년 집권 가봉민주당(PDG)에 입당, 일찌감치 후계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1983년에는 가봉민주당 중앙위원, 이듬해에는 당 정치국원으로 선출돼 아버지와 당 사이의 가교 역할을 맡았다.
알리는 1989년 사촌인 마틴 봉고의 뒤를 이어 외무부 장관에 임명됐으나, 1991년 개헌으로 장관의 나이를 35세 이상으로 제한하면서 정부를 떠났다. 같은 해 하원의원으로 선출된 그는 이후 4선을 기록했다. 1996년에는 가봉이슬람사무고등평의회 총재가 됐다. 1999년 국방장관으로 임명되면서 정부에 복귀한 알리는 2003년 가봉민주당 부총재로 선출되면서 후계자 자리로 한 걸음 더 다가섰다.
한때 체 게바라와 함께 게릴라전을 벌였고, 이웃 탄자니아에서 홍등가를 운영한 적도 있는 로랑 카빌라가 부룬디·우간다·르완다의 투치족 정부 지원 아래 모부투 정권을 타도하고 수도 자이르의 수도 킨샤사에 입성한 것은 1997년 5월 17일이었다. 시민들은 종려나무 잎을 흔들며 그의 군대를 환영했다.
카빌라는 나라 이름을 자이르에서 콩고민주공화국으로 바꾸면서 자유민주선거를 약속했지만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카빌라는 자신을 지원했던 르완다·우간다·부룬디의 투치족 정부를 적대시하는 정책을 폈고, 이들 나라는 콩고민주공화국 내 투치족을 부추겨 카빌라에 맞서게 했다. 결국 새로운 내전이 벌어졌다.

조제프는 탄자니아에서 군사학을 공부했고, 우간다에서 대학을 다녔다. 1996년 로랑 카빌라의 반군이 모부투 정권에 대한 공세를 시작한 후, 그는 반군 부대를 지휘해 킨샤사 공략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아버지가 정권을 잡은 후 조제프 카빌라는 중국으로 건너가 인민해방군 국방대학교에서 수학했다. 1998년 귀국한 후 조제프 카빌라는 육군소장 계급장을 받고 콩고군 합참차장에 임명됐고, 2000년에는 콩고 육군참모총장이 됐다.
아버지가 암살된 지 8일 후인 2001년 1월 26일, 조제프 카빌라는 대통령에 취임했다.
이듬해 그는 유엔의 중재 아래 반군단체들과 권력을 분점하는 내용의 평화협정을 체결, 1998년부터 시작된 내전을 끝냈다. 하지만 이미 330만~470만명의 인명이 희생된 후였다.
조제프 카빌라는 2006년 7월, 건국 이래 최초로 실시된 민주선거에서 대통령에 당선됐다. 하지만 아직도 이 나라의 밀림에서는 반군들이 준동하면서 약탈과 강간, 살인을 일삼고 있다.
서부 아프리카의 貧國(빈국) 토고의 포레 냐싱베(43) 대통령도 아버지로부터 권력을 이어받은 경우다. 그는 1967년 쿠데타로 집권한 후 38년 동안 철권통치를 했던 에야데마 냐싱베가 2005년 2월 5일 사망하자, 군부의 지지를 업고 대통령직을 계승했다.
그는 프랑스 소르본대학에서 금융경영학을 전공한 후 미국 조지 워싱턴대에서 MBA를 받고 귀국한 다음 아버지의 재정보좌관을 지내면서, 아버지가 해외로 빼돌린 재산을 관리했다. 2002년 36세의 나이로 국회의원에 선출된 그는 이듬해 광업통신장관이 됐다.
이때부터 그는 공식행사에 아버지를 자주 수행하면서 아버지의 후계자로 부각됐다. 아버지 에야데마는 헌법을 바꾸어 대통령 출마 가능 연령을 45세에서 35세로 낮추었다.
포레 냐싱베는 아버지가 사망한 직후 권력을 승계했지만, 야당세력은 대통령 유고 시 60일 내에 대선을 치를 것을 명시한 헌법규정을 준수할 것을 요구했다. 서아프리카경제공동체, 아프리카연합 등 국제기구도 헌법을 준수하라는 압력을 가해 왔다. 결국 포레는 권력을 승계한 지 3주 만에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난 후 그해 4월 대통령 선거를 통해 정식으로 대통령에 선출됐다. 하지만 야당세력은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하며 거세게 반발했고, 포레는 무력진압으로 맞서 100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이슬람 국가에서도 父子 세습 시도 중

1981년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이 암살된 후 권력을 승계한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은 아들 가말 무바라크(46)에게 권력을 물려주기 위한 준비를 착착 진행하고 있다.
이집트 공군사령관을 거쳐 사다트의 부통령으로 있다가 정권을 잡은 무바라크는 오랫동안 부통령 자리를 공석으로 비워놓았다. 그러다가 2002년 차남 가말을 집권 국민민주당의 정책위 의장으로 임명, 아들에게 권력을 넘겨주려는 뜻을 드러냈다.
가말은 이후 집권당 사무부총장을 거쳐 2007년 당 최고위원으로 임명됐다. 이집트 헌법은 대통령 후보는 무소속이거나 정당의 ‘지도부’에 속해 있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가말의 최고위원 임명은 그가 대권을 향해 한 발 더 전진한 것으로 평가됐다.
이러한 권력세습 기도를 이집트 국민들은 의외로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가말은 카이로 소재 아메리칸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후 ‘뱅크 오브 아메리카’ 카이로지점에 근무하면서 私募(사모)펀드를 운영해 본 금융인 출신. 때문에 1952년 나세르혁명 이후 군 출신이 계속 집권해 온 이집트에서는 부자세습이라고는 해도 ‘민간인’ 출신이 대통령이 된다는 것만으로도 하나의 진전으로 보는 시각이 적지 않다고 한다. “새 도둑이 들면 헌 도둑(무바라크 일가)보다 더 훔치는 데 열을 낼 테니, 차라리 가말이 정상적인 민주정부로 가는 다리 역할을 맡는 게 최선”, “지긋지긋한 군부통치를 끝내는 것이 먼저”라는 의견이다.
이집트의 다음 대선은 2011년이다. ‘현대의 파라오’ 무바라크의 아들이 권좌를 물려받을지 두고볼 일이다.

카다피의 6남3녀 중 후계자로 유력시되는 사람은 차남인 사이프 알 이슬람 카다피(37)다. 그는 미국 팬암기 폭파사건(로커비 사건) 해결, 리비아 내에서 에이즈 감염 혈액 수혈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던 불가리아 간호사 석방, 이탈리아의 리비아 식민지배 보상 협상 등 굵직한 대외협상을 맡아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으면서 카다피의 후계자로 주목을 받았다.
국내적으로는 도시공학도답게 주택 및 도시문제, 국영기업 민영화, 독립 민간언론매체 활성화 등을 추진했으나 보수파의 반대에 부딪히자 작년 8월 “국가는 상속이 가능한 농장 같은 것이 아니다”라면서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그는 지난 8월 말기전립선암을 이유로 스코틀랜드의 교도소에서 석방된 팬암기 폭파범 알 메그라히의 귀국길에 동행해 다시 주목을 받았다.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는 “사이프 알 이슬람이 알 메그라히와 함께 다시 대중 앞에 나타난 것은 그동안 자신이 갖지 못했던 보수층의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한 것”이라면서 “앞으로 그가 명실상부한 후계자가 될 조짐이 보인다”고 보도했다.
카다피의 셋째 아들 사디도 주목받는 인물이다. 리비아 국가대표 축구팀 선수로 국제대회에 출전한 적이 있는 그는 현역 육군 대령으로 2001년 1월 訪日(방일) 당시 일본 재계를 시찰하는 등 활발한 대외활동으로 눈길을 끌었다.
한편 카다피의 4남 한니발(32)은 프랑스 파리, 스위스 제네바 등지에서 음주운전, 여자친구 및 호텔종업원 폭행 등으로 말썽을 피우던 끝에 얼마 전 미국의 외교전문지 <포린 폴리시>가 선정한 ‘가장 골치 아픈 세계지도자 아들’ 다섯 명 가운데 한 명으로 꼽혔다.
이슬람 神政(신정)국가인 이란에서는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의 차남 모즈타바가 권력을 물려받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모즈타바(나이 불명)는 지난 6월 대선 부정에 항의하는 시위사태가 발생한 후 정권의 친위대인 혁명수비대의 민병대 조직 바시즈를 장악하고, 강경진압을 주도했다. ‘하메네이의 守門將(수문장)’이라고 불리는 그는 공개 석상에는 거의 나서지 않지만, 군부와 정보기관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이티의 ‘베이비 독’ 뒤발리에

왕조를 세운 프랑수아 뒤발리에는 아이티大(대) 의대를 나와 미국 미시간대에서 공중보건학을 전공한 의사 출신이었다. 보건노동부 장관 등을 역임하다 쿠데타 정권에 항의해 사임하기도 했던 그는 1957년 집권 후에는 독재자로 변신했다.
그는 ‘통통 마쿠트(마쿠트 아저씨)’라고 불리는 비밀경찰을 앞세워 공포정치를 자행했다. 비밀경찰은 부두교(아이티의 전통종교)의 무당들을 끄나풀로 활용했다. 그는 1964년 종신대통령이 됐다.
1971년 4월 21일 프랑수아가 64세로 사망한 후 그의 아들 장 클로드 뒤발리에가 권좌를 물려받았다. 이때 그의 나이 19세. ‘파파 독(Papa Doc)’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아버지와 비교해 그는 ‘베이비 독(Baby Doc)’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권력을 계승한 뒤부터 이 나이 어린 독재자는 세계 각국 언론의 해외토픽난을 심심찮게 장식하기 시작했다. 1972년 12월 2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베이비 독 뒤발리에’라는 8단짜리 기사를 보면, 그는 “스포츠용 승용차와 美人(미인) 수집벽, 文盲(문맹) 85%에 군림하는 21세 뚱보”로 소개됐다. 이 기사에는 한 손에 권총을 들고 어머니, 아내, 자식과 나란히 선 ‘베이비 독’ 뒤발리에의 사진이 함께 실렸다.
1985년 10월, 식량난에 항의하는 폭동이 발생했다. 상황이 점점 악화되자 미국 레이건 행정부는 뒤발리에에게 선거 실시 등 개혁을 요구했다. 뒤발리에는 “종신대통령제인데 선거는 무슨 선거냐”며 코웃음을 쳤지만, 사태가 악화되자 결국 1986년 2월 7일 망명길에 올랐다.
그 후 뒤발리에는 그동안 축재한 재산을 펑펑 쓰면서 파리에 망명 중이던 중앙아프리카의 식인황제 보카사 등과 어울려 ‘유유상종’이라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그가 축재한 재산은 2억 달러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 돈의 대부분은 1992년 아내와 이혼하면서 위자료로 날렸다. 이후 그는 집세는 그의 장모가 내 줬지만, 전화료를 못내 전화마저 끊기는 한심한 처지가 됐다.
1998년 12월, 칠레의 독재자 피노체트가 영국에서 체포된 후 뒤발리에가 병든 몸을 이끌고 사라졌다는 기사가 나왔다. 얼마 후에는 프랑스의 지방의원들이 그를 해외로 추방하자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는 기사가 나왔고, 이를 마지막으로 뒤발리에에 대한 뉴스는 더 이상 나오지 않고 있다.
니카라과 소모사 一家, 3대에 걸쳐 족벌통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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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로부터 권력을 물려받아 대통령을 지낸 루이스 소모사(오른쪽)와 아나스타시오 소모사(왼쪽). |
그가 죽은 후에는 아들 루이스 소모사 데바이예가 1956~63년 대통령을 지냈다. 그는 아버지에 비해서는 비교적 부드럽게 통치했다는 평을 들었다.
소모사 일가는 루이스의 임기가 끝난 후 대통령직을 잠시 다른 사람에게 맡겨 놓았다가, 1967년 루이스의 동생 아나스타시오가 다시 대통령직을 차지했다. 루이스 시절에도 군사령관으로 막후 실력자였던 그는 1972년 수도 마나과에서 5000여 명이 사망하는 지진이 발생하자, 세계 각국에서 보내온 구호금품들을 횡령했다.
그는 1974년 다시 대통령이 되어 계속 강권통치를 했으나, 1979년 7월 민중봉기로 실각했다. 그는 1980년 9월 망명지인 파라과이의 아순시온에서 산디니스타 정부가 보낸 특공대의 공격을 받고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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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델카스트로(왼쪽)는 혁명동지인 동생 라울(오른쪽)에게 권력을 넘겨줬다. |
피델의 집권 이후 줄곧 국방장관을 맡아 온 라울은 2006년 7월 피델이 쓰러지자 국가평의회 임시의장(임시대통령)을 맡아 국사를 처리했다. 그는 작년 2월 피델이 정식으로 공직 사임의사를 밝힌 지 6일 뒤인 2월 26일 국가평의회 의장에 선출됐다.
그가 권력을 계승하자 일부에서는 그를 ‘실용주의자’로 평가하면서 쿠바의 개혁개방 가능성을 점쳤다. 라울도 취임한 후 정부조직 개혁, 농업생산성 확대, 국영기업 경영 정상화, 식품배급제 개선 등 개혁 필요성을 강조했으나, 아직까지 가시적인 결과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변화가 있다면 라울의 옷차림이 군복에서 신사복으로 바뀐 것 정도랄까.
두 차례 부부간 권력승계 이뤄진 아르헨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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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간에 권력을 주고받은 후안 페론(오른쪽)과 이사벨 페론. |
첫 번째는 후안 도밍고 페론과 이사벨 페론 부부다. 군인 출신 정치가인 후안 도밍고 페론은 1946~1955년 대통령을 지내면서 포퓰리즘 정책을 펴서 노동자 등 대중의 인기를 끌었다. 1951년 그는 두 번째 대통령 출마를 앞두고 대중적 인기가 높던 아내 에바 페론(에비타)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가 군부가 반발하자 이를 철회했다. 에바는 이듬해 자궁암으로 사망했다.
페론은 그의 포퓰리즘 정책에 반발한 군부의 압력으로 1956년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파나마로 망명했다. 후안 페론은 망명지에서 만난 무용수 출신 이사벨 마르티네스를 비서로 채용했다가 1960년에 결혼했다. 이사벨은 후안보다 35세 연하였다.
이후 이사벨은 후안과 함께 스페인에서 망명생활을 하면서 여러 차례 아르헨티나를 방문해 국민들에게 ‘호시절’이었던 페론 시대를 상기시키며 남편의 정계 복귀 기반을 다졌다. 1972년 오랜 망명생활 끝에 귀국한 후안 페론은 이듬해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 화려하게 재기했다. 이때 그는 아내 이사벨을 부통령으로 지명했다.
1974년 후안 페론이 79세를 일기로 사망하자 이사벨이 대통령직을 승계, 세계 최초의 여성대통령이 됐다. 하지만 그녀는 내란을 방불케 하는 좌우 대립, 측근들의 부정부패, 인플레이션 등으로 표류하다가 1976년 군부쿠데타로 축출됐다. 그녀는 5년간 가택연금에 처해졌다가 1981년 석방되어 스페인으로 망명했다. 그녀는 수차 정계 복귀를 시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고, 2006년에는 재임 중 극우단체의 좌파인사 암살 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아르헨티나 법원으로부터 체포영장을 발부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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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2월 10일 대통령 취임식에서 남편인 네스토르 키르치네르 전 대통령(왼쪽)으로부터 대통령직을 상징하는 지팡이를 넘겨받는 크리스티나 키르치네르 아르헨티나 대통령. |
변호사 출신인 그녀는 1970년대에 페론주의 정당인 정의당의 청년조직에서 활동하면서 정치에 입문했고, 1989년 산타크루즈 주의회 의원으로 선출됐다. 이후 그녀는 연방하원의원과 상원의원을 지내면서 소외계층을 대변하는 정치활동을 펼치면서 미모와 카리스마, 뛰어난 언변으로 ‘파타고니아의 표범’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녀의 남편 네스토르 키르치네르(59)도 아내와 마찬가지로 1970년대 정의당 청년조직에서 정치적 이력을 쌓기 시작한 변호사 출신 정치인이다. 그는 1986년 고향인 리오가예고스 시장으로 당선되면서 본격적으로 정치활동을 시작했는데, 그를 정계에 입문시킨 것은 아내 크리스티나였다고 한다. 1991년 이후 세 차례 산타크루즈 주지사를 지냈으나, 정치인으로서 전국적인 지명도는 아내에게 미치지 못했다.
2003년 네스토르는 ‘승리를 위한 전선’ 후보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취임 후 그는 페론주의자답게 세제 개편을 통한 부의 재분배, 교육·연금·보건 부문의 국가통제 강화, 전임자들인 메넴 정권과 델라루아 정권 시절 민영화된 주요 기업들의 再(재)국유화 정책 등을 펴면서 신자유주의적 경제개혁을 강요하는 국제통화기금(IMF) 및 미국과 충돌했다. 그의 노력으로 2001년 국가부도위기에 몰렸던 아르헨티나는 2003년 하반기에는 8.3%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다. 실업률도 취임 초에 비해 절반으로 떨어졌다.
이러한 업적 때문에 그는 2007년 대선에 다시 나설 경우 재선이 유력시됐으나, 재선에 나서는 대신 아내 크리스티나를 대통령 후보로 내세웠다. 그해 대선에서 크리스티나는 남편의 인기에 힘입어 樂勝(낙승)했다. 부부가 정상적인 대통령 선거에 의해 권력을 승계한 것은 이들이 세계에서 처음이다. 이미 남편의 집권 기간 중 국정에 깊이 간여했던 그녀는 각료의 절반 이상을 남편이 쓰던 사람으로 채우는 등 남편의 정책을 계승하고 있다.
권력세습을 택한 사회주의자들
명색이 공화국이면서 부자 권력세습이 이루어진 나라들을 보면 그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1인 독재 혹은 1당 독재 국가인 경우가 많다.
특히 세습독재가 이루어진 나라 가운데는 사회주의 국가 혹은 사회주의 성향의 국가가 많은 것이 눈에 띈다. 북한과 쿠바, 루마니아가 대표적이다. 아제르바이잔은 사회주의 국가가 아니지만, 헤이다르 알리예프는 소련공산당 정치국원까지 지낸 前(전) 공산주의자였다. 시리아의 집권 바트당은 원래 아랍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정당이었다. 명색이 평등을 기치로 내건 사회주의 국가에서 부자세습이 빈번하게 발생하는 이율배반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권력을 물려받은 지도자들 가운데는 장징궈(타이완), 라울 카스트로(쿠바), 알리 벤 봉고(가봉), 조제프 카빌라(콩고민주공화국), 아나스타시오 소모사 데바이예(니카라과) 등에게서 보듯 군이나 공안기관에서 이력을 쌓은 경우가 많다. 시리아의 바샤르 알 아사드는 후계자로 지명된 후 서둘러 군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고 한 마오쩌둥(毛澤東)의 말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하지만 권력상속자들의 국정운영 성적표는 그리 좋지 않다. 이는 지난 7월 미국의 외교전문지 <폴린 폴리시>가 발표한 ‘실패국가 리스트’를 보면 여실히 드러난다.
콩고민주공화국(5위)과 아이티(12위)는 ‘치명적 국가’로, 북한(17위), 시리아(39위), 토고(50위), 아제르바이잔(56위), 쿠바(76위)는 ‘위험국가’로 분류됐다.
과거 부자세습이 있었던 니카라과(64위)나 부자세습이 시도되고 있는 이란(38위), 이집트(43위) 등도 ‘위험국가’로 분류됐다. 최근 권력세습이 이루어진 아프리카의 가봉(99위)은 ‘위험국가’ 다음 수준인 ‘경계국가’로 분류됐다. 싱가포르(160위)와 아르헨티나(149위)만이 ‘안정적 국가’로 분류됐다(‘실패국가 리스트’는 순위가 높을수록 상황이 나쁜 것임-필자 注).
북한의 3대 권력세습 성공할까?
부자세습을 한 나라 중 성적이 탁월한 타이완과 싱가포르가 中華圈(중화권) 국가라는 점도 눈에 띈다. 타이완의 장징궈나 싱가포르의 리셴룽 모두 장기간에 걸쳐 후계자 수업을 받으면서 능력을 검증받은 후 권좌에 올랐는데, 여기에는 5000년 중국 역사의 축적, 특히 帝王學(제왕학)의 전통이 알게 모르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북한의 김정일은 1964년 노동당에서 일을 하기 시작한 이래 1994년 金日成(김일성)이 죽을 때까지 30년, 1973년 ‘당중앙’으로 지칭되면서 사실상 후계자로 내정된 이래 21년 동안 권력승계를 준비했다. 김일성 말기에 이르러 그는 사실상 김일성과 공동통치자였다.
하지만 그의 후계자 수업은 인민을 먹여살리기 위한 수업이 아니라 김일성 유일사상체계 수립 등 순전히 권력을 保持(보지)하기 위한 수업이었다. 그 결과는 대량 餓死(아사) 사태와 북한의 국제적 고립이었다.
이제 김정운 후계체제설이 나돌고 있다. 김정운이 군이나 국가안전보위부에서 이력을 쌓고 있다는 소문도 있다. 그게 사실일 경우 김정운 체제도 인민들을 위한 체제가 아니라 ‘김씨 조선’ 왕조 그 자체를 위한 체제가 될 것이 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