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운의 클로즈업] 행복의 리추얼(의례)을 개발하라 : 월간조선

주말 오후였다. 갑자기 의사가 전화를 했다. 독일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의사는 “놀라지 말라”는 말부터 꺼냈다. 이건 완전히 놀라 뒤로 넘어갈 준비를 하라는 이야기다. 아니나 다를까. 아내가 뇌종양이란다. 작은 계란만한 종양이 뇌에 있단다. 陽性(양성)인지 惡性(악성)인지는 정밀검사를 해야 확인된다고 한다. 그는 “악성일 경우를 뇌암이라고 한다”고 친절하지만, 그리 고맙지는 않은 설명까지 덧붙인다. “월요일 아침 일찍 입원시킬 준비를 해 가지고 병원으로 오라”고 했다. 그는 “지금은 가능한 한 내색하지 말고, 아내가 원하는 맛있는 것 사주고, 좋은 주말을 보내라”고 했다. 내게는 “아내와 보내는 마지막 주말이 될 수도 있으니 행복한 시간을 보내라”는 이야기로 들렸다.

독일에서 유학할 때의 이야기다. 혼자 지내야 했던 유학 초기의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나는 한국으로 돌아가 과거에 사귀었던 여인들을 차례로 만났다. 그 중 가장 튼튼해 보이는 여인에게 독일에 함께 가자고 졸랐다. 당시 위장병을 앓아 몸무게가 52㎏에 불과했던 내겐 무엇보다도 튼튼한 아내가 필요했다.

나는 “스테이크도 마음대로 먹을 수 있고, 집안에는 벽난로가 있다”고 했다. 대학 4학년의 22살 먹은 이 용감한 여인은 대학교 졸업식이 끝나자마자 과감히 나를 따라 베를린으로 왔다. 내가 아내를 유혹하면서 한 이야기는 다 사실이었다. 베를린자유대학의 널찍한 학생식당에서는 항상 딱딱한 스테이크가 나왔고, 우리가 신혼을 시작한 집은 집안에서 석탄을 때야 하는 아주 낡고 좁은 독일식 연립주택이었다.

두뇌회전이 빠른 어린 아내는 독일생활에 빨리 적응했다. 한번은 독일인 가족과 함께 크리스마스 휴가를 보냈다. 그때 우리는 독일식 아침식사가 얼마나 훌륭한가를 깨달았다. 그 이후로 아내는 내게 항상 독일식 아침식사를 차려 줬다. 솔직히 독일의 음식문화는 허접스럽기 짝이 없다. 감자와 소시지가 전부다. 살벌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아침식사 상황은 전혀 다르다.

독일에서의 아침식사

대부분의 독일 가정의 아침 풍경은 이렇다. 남편은 갓 구운 주먹만한 브뢰첸(겉은 딱딱하고 속은 한없이 부드러운 아침식사용 빵)을 사오고, 아내는 온갖 치즈와 소시지, 계란, 그리고 꿀, 잼 등이 가득한 식탁을 차린다. 그리고 브뢰첸을 반으로 잘라 갖가지 것들을 얹거나 발라 먹는다. 그리고 한없이 진한 커피를 계속해서 들이켠다. 반숙한 계란은 위쪽 3분의 1 정도를 잘라 작은 숟갈로 떠먹는다. 중간중간 야채와 과일을 섞어 먹는다.

주중에 여유로운 아침식사를 못한 이들은 주말이 되면 브런치가 풍요로운 노천 카페를 찾아 나선다. 크로이츠베르크의 작은 강 주변에는 브런치를 전문으로 하는 카페들이 늘어서 있다.

휴일 늦잠을 즐긴 이들은 한결같이 옆구리에 두꺼운 주말판 신문을 끼고 그곳에 들어간다. 그곳에서는 브런치와 함께 꼭 카페라떼를 시켜야 한다. 그러면 사발만한 잔에 카페라떼가 듬뿍 담겨 나온다. 그리고 신문의 각 섹션을 하나씩 읽어 가며 천천히, 그리고 다양한 방식으로 빵을 먹는다. 아, 훈제연어를 빵에 얹어 먹는 것이 최고였다. 난 아직도 그 아침이 너무 그립다.

그때 우리 부부의 아침은 항상 이런 식이었다. 아직 아기도 없었고, 달리 어울릴 만한 친구도 없었던 어린 아내는 남편 아침식사를 화려한 독일식으로 차리는 것을 취미로 여겼다. 그 행복한 아침식사가 계속되던 때, 착하고 어린 아내의 머리에 종양이 생긴 것이다.

나는 수위실에 앉아 한동안 멍하니 있었다. 당시 나는 아르바이트로 주말마다 공장을 지키는 경비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리고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엉엉 울었다. 젊고 아름다운 아내가 갑자기 죽는 온갖 영화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런 종류의 영화 여주인공의 병명은 항상 뇌종양이었다.

다행히 아내의 뇌종양은 양성이었다. 그러나 수술 자체는 엄청 위험한 일이었다. 북한 金日成(김일성)의 혹을 떼어냈다는 최고의 독일 의사가 달라붙었는데도 꼬박 9시간이 걸렸다. 머리를 다 깎고, 칼로 두피를 떼어내고, 톱으로 두개골을 자르고, 혹을 떼어내고, 두개골의 잘린 부분을 시멘트 같은 것으로 메우고, 다시 두피를 덮고, 꿰매고…. 나는 수술이 진행되는 동안 병원 앞에서 발만 동동 굴렀다. 그때 나는 아내가 죽으면 바로 따라 죽으리라 결심했다. 정말이다. 진짜다. 그땐 그랬다.

모든 수술이 잘 끝났다. 다행히 후유증도 없었다. 뒤통수의 손바닥만한 크기의 두개골이 사라진 것 말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내는 멀쩡했다. 그러나 위험한 뇌를 건드렸기 때문에 1주일이 넘도록 아내는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그토록 멋졌던 아침식사 사라져

위기가 지나가자 내겐 일상의 황당함이 시작되었다. 그 풍성한 아침식사가 사라진 것이다. 요구르트와 우유 한 잔으로 아침을 때우며 나는 내 삶에서 아침식사와 아내가 서로 연결되어 있는 의미를 깨달았다. 내게 그 착한 아내는 아침식사의 리추얼(ritual·儀禮)로 존재했던 것이다. 사랑은 리추얼이다. 그런데 이제 그 아내가 집에 없고, 내 삶의 리추얼은 아침부터 망가져 버린 것이다.

리추얼은 일상에서 반복되는 일정한 행동패턴을 의미한다. 형태상으로는 습관과 리추얼은 같은 현상이다. 그러나 이 둘에는 심리적 차이가 존재한다. 습관에는 ‘의미부여’의 과정이 생략되어 있다. 습관은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고 반복되는 반복학습에 의한 행동패턴을 의미한다.

그러나 리추얼은 반복되는 행동패턴에 일정한 정서적 반응이 동반된다. ‘사랑 받는다는 느낌’, ‘가슴 설레는 느낌’ 등등. 내 아침식사에서 아내가 따뜻한 빵을 내 앞에 두고 내 어깨를 두드리며 맛있게 먹으라고 한다. 이때 뭔가 가슴 뿌듯한 느낌이 동반되면 그 행동은 리추얼이다. 그러나 그런 행동이 있었음에도 이후 전혀 기억에 없다면 그것은 습관일 따름이다. 사랑이 식으면 그렇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이 사라져도 마찬가지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으면 슬퍼지는 이유는 바로 이 리추얼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금실 좋은 노인 부부가 함께 지내다 할머니가 먼저 죽으면 할아버지는 평균 6개월 이내에 죽는다. 그러나 할아버지가 먼저 죽으면 할머니는 평균 4년 정도 더 산다고 한다. 그 이유는 의미 부여의 리추얼 차이 때문이다. 서로 상대방을 만져 주는 스킨십과 같은 가장 원초적인 상호작용의 리추얼부터 상대방을 위해 밥상을 차려 주고, 소소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서로 손잡고 산책하는 일상의 리추얼은 서로의 존재를 확인시켜 준다. 문제는 할아버지의 리추얼은 대부분 할머니와 연관되어 있는 반면에, 할머니의 리추얼은 할아버지 없이도 가능한 것이 많다는 사실이다.

리추얼이 다양한 삶은 풍요롭다. 느끼는 정서의 차원이 質的(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여성의 리추얼은 남성의 리추얼보다 훨씬 풍요롭다. 그래서 여성의 삶은 나이가 들수록 남성의 삶보다 정서적으로 훨씬 풍요롭다.

엘리아스라는 학자는 이러한 리추얼을 통한 정서적 경험을 획일화하고 합리화하여 통제하려는 근대화 과정을 문명화 과정론으로 설명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귀족들은 불필요한 정서적 반응을 억제하고, 자신들의 집단 내에서만 용인되는 특정한 정서적 반응만을 보이는 리추얼을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식탁예절로부터 인사예절과 같은 상호작용의 방식까지 규정하여 우아함과 품위와 같은 독특한 정서적 경험을 가능케 하는 궁정예절의 시작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한때 이 리추얼을 국민계몽의 수단으로 삼은 적이 있다. 국민의례가 바로 그것이다. 지금은 매우 축소되어 진행되지만, 한때 국기에 대한 애국가 4절까지 부르고, 국민교육헌장, 국기에 대한 맹세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면 어김없이 반복되었던 적이 있다. 국가에 대한 자부심, 헌신과 같은 정서를 만들어 내기 위해 국민의례처럼 훌륭한 수단은 없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도 텔레비전의 마지막 방송으로 나오는 애국가만 들어도 눈물이 난다. 내 생명에 위협이 오는 다급한 순간에도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해 태어난 내 삶의 의미를 기억해 낸다. 그만큼 리추얼과 동반되는 정서적 경험은 강력한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독일의 지식인들은 깊게 고뇌했다. 도대체 이 엄청난 야만이 어떻게 독일에서 나타날 수 있었단 말인가. 그들은 권위주의적 독일사회 구조에서 그 이유를 찾았다. 가족, 학교, 일터에서 반복되는 권위주의적 리추얼은 권력자에 대한 일방적 복종과 충성이 강요되었다는 것이다.

전쟁 이후, 독일인들은 사회 구석구석에 남겨진 이 집단 리추얼을 철저하게 해체했다. 그래서 독일의 대학에는 졸업식이 없고, 졸업식 가운도 물론 없다. 졸업식을 집단으로 모여 권위를 확인하는 세러모니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독일에서 석사, 박사학위를 받은 나는 그래서 한번도 졸업식 가운을 입어 본 적이 없다.

반성이 철저한 독일인들은 초등학교에서는 합창 시간도 없앴다. 함께 노래하는 행위가 집단에 대한 무의식적 충성으로 이어진다는 생각 때문이다. 대신 소리가 아주 착한 피리를 불게 한다.

리추얼이 반드시 이렇게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근대 사회에서 집단 리추얼은 문화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다. 문화심리학을 전공한 나는 문화를 ‘정서 共有(공유)의 리추얼’로 정의한다. 문화란 특정한 정서를 공유하는 방식이란 이야기다. 공유되는 정서와 리추얼이 없는 사회는 문화가 없다는 이야기다.

독일 사회가 정치적 집단 리추얼을 파괴하려고 그토록 애썼지만, 문학과 예술의 각 분야에서 진행되는 리추얼까지 파괴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리추얼은 반복 재생산되어야 하는 것들이다. 리추얼이 없는 삶은 정서가 메마른 건조한 삶이 되기 때문이다.

즐거운 리추얼이 우리의 삶을 구원한다

내 삶을 풍요롭게 만들고 싶다면 정서적 경험이 풍요로워야 한다. 우리가 음악회나 미술관을 찾는 이유는 그곳의 리추얼을 통해 생산되는 정서적 경험을 원하기 때문이다. 여행을 떠나는 이유도 낯선 곳의 낯선 문화에서 느끼게 되는 독특한 정서적 경험을 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정서적 경험이 꼭 일상을 벗어나야만 가능한 것은 아니다. 내 일상에서 다양한 리추얼을 개발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를 통해 우리의 삶은 행복해진다. 즐거운 정서적 경험이 동반되는 까닭이다. 하지만 우리의 일상은 짜증나고 답답한 리추얼로 가득 차 있을 뿐이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상사의 이야기를 참고 들으며 오늘 점심은 뭘로 할까를 고민하는 ‘회의 리추얼’, 삼겹살로 시작해서 노래방으로 끝나는 회사의 ‘회식 리추얼’이 반복된다. 지쳐 집에 돌아오면 젊은 얼짱 탤런트가 나오는 연속극에 빠져 있던 아내가 힐끔 돌아볼 뿐이다. 아이들은 공부방에 처박혀 나올 생각도 하지 않는다. 신문을 펼쳐 보고 있으면 아내는 옆에서 ‘아주 간단한 집안문제를 아주 어렵고 복잡하게’ 설명한다. 이 또한 매번 반복되는 부부의 리추얼이다. 성의 없이 대답하다가 침대로 가 웅크리고 잠을 청하는 이 중년 사내의 밤에는 어떠한 에로틱한 리추얼도 존재하지 않는다. 아직 켜 놓은 TV 홈쇼핑에서는 야한 속옷 광고가 언제나 같은 방식으로 돌아간다.

최근 부쩍 쓸쓸해진 나는 커피를 갈아 먹기 시작했다. 갓 볶은 싱싱한 원두를 사와 내 손으로 갈아 먹는다. 아들을 협박해서 생일선물로 받은 커피 핸드밀의 손잡이를 돌리면 원두가 갈리는 느낌이 참으로 상큼하다. 톱밥 정도의 굵기로 갈린 커피가루를 동으로 된 여과기의 여과종이 위에 넣는다. 그리고 다시 동으로 된 드립퍼 주전자로 병아리 오줌 누듯 물을 흘려 보낸다. ‘커피향이 참 좋다’는 표현은 이럴 때만 쓰는 것이다. 이렇게 커피를 끓일 수 있는 아침은 정말 행복하다.

잊지 말자. 나이가 들수록, 이런 사소하지만, 즐거운 리추얼이 우리의 삶을 구원해 준다. 대통령이 바뀐다고 우리 부부관계가 좋아지지 않는다. 국회의원의 여야 비율이 달라진다고 내 삶이 즐거워지는 일은 절대 없다. 내 즐거운 느낌이 반복되는 리추얼이 내가 정말 관심 가져야 할 대상이다.

아 참, 그때 그 젊고 착했던 내 아내 이야기를 마저 하자. 그녀는 지금은 너무너무 건강하다. 하지만 그 풍요로운 독일식 아침식사는 차려주지 않는다. “독일빵을 구할 수 없다”고 핑계대지만 그렇지 않다. 독일인들이 모여 사는 한남동에 가면 의좋고 친절한 형제가 구워내는 브뢰첸을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다. 성의가 없는 거다. 아니 사랑이 식은 거다. 그래서 나는 아내가 혹시 먼저 죽는다 해도 그 때처럼 따라 죽을 생각 같은 것은 절대 안 한다. 아침마다 커피를 갈며 악착같이 오래 살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