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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世一의 비교 評傳 (71)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 李承晩과 金九

『아! 倭敵이 항복을!』

손세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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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년 4월25일부터 6월26일까지 샌프란시스코에서 國際聯合 창립을 위한 聯合國會議가 열렸다. 李承晩은 在美同胞團體들의 대표들로 臨時政府代表團을 구성하고 美國政府에 회의에 초청해 주도록 요청했다. 그러나 美國政府는 이를 거부했다. 韓族聯合委員會는 별도의 〈民衆代表團〉을 구성하여 李承晩과 대립했다.
 
  李承晩은 共産黨에서 전향한 러시아人 구베로(Emile Gouvereau)의 情報에 근거하여 얄타會談에서 韓國을 소련의 영향력 아래 두기로 秘密協約을 맺었다고 〈폭로〉하여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李承晩은 6월에 자신의 수중의 지지세력인 同志會를 大韓民主黨으로 개편했다.
 
  李承晩은 7월27일에 마닐라에 있는 맥아더(Douglas MacArthur) 장군과 태평양전선 해군사령관 니미츠(Chester Nimitz) 제독에게 마닐라로 가서 國內同胞들에게 방송을 하겠다고 제안했다.
 
  金九는 7월에 열린 韓國獨立黨 제4차 全黨代表大會에서 2년 만에 中央執行委員長으로 복귀했다.
 
  金九는 OSS訓練을 시찰하기 위하여 8월5일에 西安으로 갔다. 그곳에서 OSS국장 도노반(William J.Donovan) 장군과 光復軍의 國內進入計劃에 관한 회의를 가졌다.
 
  金九는 陝西省 主席 祝紹周로부터 8월10일의 만찬 초대를 받았다. 축소주에게 걸려 온 전화로 日本이 降服한다는 소식을 들은 金九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失望을 느꼈다.
 
 

  (1) 샌프란시스코 會議와 얄타密約說 제기
 
 
  담바튼오크스 제안(국제연합결성 제안)을 토의하여 이를 정식으로 채택하기 위해 1945년 4월25일부터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연합국회의에는 50개국의 대표가 참가했다. 회의는 6월26일에 역사적인 국제연합헌장을 채택하고 폐막되기까지 두 달 동안 계속되었다. 임시정부와 재미한인사회가 이 연합국회의에 큰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했다. 샌프란시스코는 미주한인사회의 발상지이자 큰 거점이기도 했다.
 
 
  聯合國會議에 파견할 臨時政府代表 선정
 
   임시정부는 2월25일에 李承晩에게 샌프란시스코 연합국회의에 참석할 대표를 선정하고, 회의에 제출할 안건을 준비하라고 훈령했다. 李承晩은 그날로 金乎, 韓始大, 金元容, 田耕武, 黃思容, 李薩音(이살음), 卞埈鎬, 宋憲澍, 尹炳求의 9명을 선정하여 임시정부에 보고했고,1) 임시정부는 3월8일의 국무위원회에서 그것을 추인했다. 3월22일의 국무위원회는 중경에서도 趙素昻과 金奎植을 회의에 파견하기로 결의했다.2)
 
  李承晩의 인선은, 중한민중동맹의 韓吉洙가 제외되기는 했으나, 대부분의 재미독립운동단체들을 대표하는 유명인사들을 망라한 것이었다. 김호, 한시대, 김원용, 전경무는 한족연합위원회의 핵심 멤버들이었고, 변준호는 조선민족혁명당 미주총지부의 중심인물이었으며, 이살음은 대한인동지회 북미총회장이었다. 李承晩 반대파였던 송헌주는 이때에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윤병구는 1904년에 李承晩과 함께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을 만난 이래 줄곧 李承晩과 가까웠다.
 
  임시정부는 2월28일에 독일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했다. 그것은 샌프란시스코 연합국회의에 참가하는 나라는 1945년 2월8일 현재 연합국에 속해 있는 나라 및 3월1일 이전에 독일과 일본에 선전포고를 한 나라에 한한다는 조건에 따른 것이었다.3) 이에 따라 9개국이 추축국에 선전포고를 했다. 임시정부가 대일선전포고를 한 것은 진주만 공격 직후였다.
 
  李承晩은 3월8일에 국무장관 스테티니어스(Edward R. Stettinius)에게 한국 임시정부가 공식으로 회의에 참가할 수 있게 초청해 줄 것을 요청했다. 스테티니어스는 건강이 악화되어 사임한 헐(Cordell Hall)의 후임으로 1944년 12월에 국무장관에 임명되어 있었다. 李承晩의 요청에 대해 국무부는 주최국들의 합의에 따라 1945년 3월1일 현재 연합국으로 승인되어 있는 나라들만이 회의에 초청받을 수 있다고 회답했다.4) 임시정부가 서둘러 대독 선전포고를 한 것도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임시정부는 3월13일에 기자회견을 갖고 연합국들에 한국이 45번째 참가국이 될 수 있도록 해줄 것을 촉구했다.5)
 
  중국 국민정부는 샌프란시스코회의에 참석하려는 임시정부의 계획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蔣介石은 외교부에 한국대표가 회의에 참석할 수 있도록 미국에 건의하라고 지시하고, 재정부에는 중국외교관 대우에 따라 한국대표 세 사람의 미국 왕복여비와 활동비로 1,534달러 22센트를 임시정부에 지원하게 했다.6) 그러나 주중미국대사관은 한국대표단의 입국비자 발급을 고의로 늦추어 회의가 끝날 때쯤에야 비자를 발급함으로써, 두 사람은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게 했다.7)
 
  李承晩은 4월20일에 스테티니어스에게 다시 편지를 보내어 아르헨티나, 시리아, 레바논이 그러한 조건에 부합되지 않는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초청받은 사실을 들어 대한민국도 초청국에 포함시킬 것을 요청했다. 李承晩은 한국에 대한 연합국 회원자격 부여문제와 국제연합헌장 기초작업 참여 문제를 총회에 제출하겠다고 밝혔다.8)
 
 
  올리버에게 팸플릿 집필 부탁
 
  李承晩은 샌프란시스코회의에 총력을 경주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1921년 겨울에 워싱턴에서 열린 군축회의 때에 무위로 끝난 쓰라린 경험이 되새겨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는 제국주의 국제질서에 새로이 등장하는 일본을 상대로 한 고독한 투쟁이었으나, 지금은 일본의 패망을 눈앞에 두고 벌이는 독립 한국의 비전과 관련된 활동이었다.
 
  李承晩은 3월18일에 올리버에게 회의장에서 각국대표들과 신문기자들에게 배포할 팸플릿 원고를 작성해 줄 수 있는지 묻는 편지를 썼다. 편지에는 워싱턴회의 때에 사용했던 네 종류의 팸플릿을 동봉했다. 그 밖의 참고문헌으로 그라즈단제프(Andrew J. Grajdanzev)의 저서를 예시하고 있는 것이 눈길을 끈다. 그것은 1944년에 출판된 태평양문제연구회(Institute of Pacific Relations)의 「현대한국(Modern Korea)」이라는 연구보고서였다.
 
  올리버가 집필을 응낙하자 李承晩은 4월4일에 팸플릿에 담을 내용을 자세히 적어 보냈다. 李承晩은 이 팸플릿의 목적은 한국에 빚이 되고 있는 미국의 의무가 무엇이며 한국을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묶어두기 위해 미국무부가 저질러 온 과오가 어떤 것인지를 폭로하고 모든 진실을 미국사회에 알리는 것이라고 했다.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을 이집트에 팔았던 것처럼, 세계 평화를 위한다는 미명 아래 한 난폭한 나라를 회유할 목적으로 약한 이웃 나라에 행한 부당한 행위 때문에 미국은 고난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해야 한다고 李承晩은 썼다. 그러면서 그는 진주만 공격 이래 줄곧 미국무부에 대해 한인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공산당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한국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으면 미국은 불리한 처지에 놓일 것이라고 경고해 왔는데, 현재 시베리아에 있는 한인 공산주의자들은 한 위원회를 구성했고, 중국에 있는 한인 공산주의자들도 별도의 당을 출범시키려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9)
 
 
 
『루스벨트 大統領이 蘇聯帝國主義 묵인해』

 
  李承晩이 4월에 그의 친지들에게 보낸 한 편지(메모랜덤)에 보면 이 무렵 그는 이미 소련의 대외정책의 본질을 〈소련제국주의〉라고 표현하고 있었다. 그는 루스벨트의 추축국들에 대한 〈무조건 항복〉 요구도 소련제국주의의 행동양식을 묵인하는 연합국의 다른 정책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스탈린이 카이로 회담에 실제로 참석하지는 않았으나 회담에는 그의 그림자가 크게 드리워져 있었고, 태평양 방면에 대한 소련의 야심이 전면적으로 고려되었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었습니다. … 카이로선언은 한국문제의 결정을 뒤로 미루기 위하여 고의로 애매하게 되어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애매한 표현의 가장 큰 이유가 아시아에서의 소련의 입장이 확정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던 것도 확실합니다.
 
  나는 평생 동안 아시아의 국제관계뿐만 아니라 유럽의 그것에 대해서 연구해 왔습니다. 나의 유럽여행도 그곳에서 발생하는 사태의 의미를 한결 정확하게 이해하게 해주었습니다. … 남동유럽에서 활동하고 있는 게릴라들은 공산계열과 비공산계열로 나뉘어 있습니다. 루스벨트와 처칠이 유럽대륙에 대한 진공작전지역에서 발칸반도를 제외한 것 역시 그 지역을 기본적으로 소련의 영향 아래 두기로 결정했음을 분명히 말해 줍니다. 그리스를 지원하기 위한 영국의 필사적인 노력은 이러한 정책의 한계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에 우호적인 정부를 유지함으로써 자국의 지중해 생명선을 보호하려는 영국의 필요성을 확실히 드러낸 것입니다. 그러나 소련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배려에서 이 지역이나 그밖의 지역의 공산당 문제의 토의를 봉쇄한 것은 남동유럽의 안전에 관한 정책의 진전을 저해했습니다.
 
  유럽에서 서서히 전개되고 있는 상황이 중국에서는 훨씬 공공연하고 현저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연합국은 중국 국민정부에 대해 공산주의자들과의 대립적 행동을 중지하고 타협하여 합작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루스벨트 대통령의 로마-베를린-도쿄 추축국에 대한 무조건 항복 정책은 소련 제국주의의 행동양식을 묵인하는 연합국의 다른 정책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었습니다.…〉10)
 
  李承晩은 소련의 한국점령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한국 임시정부를 승인하는 것이라고 자신과 동지들이 기자회견과 라디오방송과 잡지기고 등 온갖 방법으로 거듭 주장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정부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은 루스벨트와 처칠이 한국이 실제로는 소련의 지배를 받으면서 형식상으로만 독립정부의 형태를 갖추도록 결정했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했다.
 
 
  『이런 불의와 모욕을 생각하면 나는 자제력을 잃게 됩니다』
 
  李承晩은 미국무부가 한국대표들의 회의 참가를 거부하는 데 대해 억분을 참을 수 없었다. 시러큐스대학교(Syracuse University)로 돌아가 있는 올리버에게 보낸 4월9일자 편지에는 이때의 심경을 남김없이 드러내 보이고 있다.
 
  〈국무부 사람들은 일본인들이 하는 말을 근거로 하여 한국인들을 판단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그들은 아직도 한국인들을 무능하고 하잘것없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그 점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한국인들을 유순하고, 감정이 없고, 뼈대 없는 사람들로 다룹니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오랫동안 그들에게 가해진 모욕과 불의를 느끼고 있습니다. 그들은 1905년에 자신들에게 일본의 멍에를 지도록 한 미국정치가들의 배신행위에 분개하고 있습니다. 만일에 미국정치가들이 한국인들로 하여금 또다시 다른 나라의 멍에를 지게 만든다면 한국인들이 미국에 등을 돌리더라도 아무도 그들을 나무라지 못할 것입니다. 이런 일이 한국인들 사이에 선의를 조성하고 미국과의 상업관계를 증진시키는데 도움이 되겠습니까? 이런 일이 극동의 평화를 증진시킬 수 있겠습니까?
 
  연합국들이 한국인들을 한 억압자로부터 다른 억압자에게 넘기기로 획책하고 있는데, 왜 그들이 왜놈들에게 항거해야 하고 죽어야 합니까?…〉
 
  李承晩은 이어 미국 정부가 한국 임시정부에 무기대여법원조를 제공하는 것을 거부하고 있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한국은 공동교전국에도 들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한국인들은 공식적으로는 미국의 적입니다. 왜 그래야 합니까?
 
  나는 여기서 그만 적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런 불의와 모욕을 생각하기 시작하면 나는 자제력을 잃게 됩니다. 정말로 나는 화가 나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李承晩은 미국무부의 관료들을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국무부의 소인배 월급쟁이들은 동양의 상황에 대해 온갖 그릇된 정보를 공급하는 「전문가」들입니다. 고관들은 이 그릇된 정보에 입각하여 그들의 정책을 수립합니다. 결과는 어떻습니까? 진주만의 경우와 같은 재앙입니다.〉11)
 
  1932년부터 진주만 공격으로 귀국할 때까지 주일대사였던 그루(Joseph Grew)는 국무부 안의 대표적인 친일파였다. 귀국하자 국무차관으로 임명된 그는 1945년 1월부터 국무장관대리로서 국무부를 총괄하고 있었다. 그나마 李承晩에게 호의를 가지고 대해 주던 극동국장 혼벡(Stanley K. Hornbeck)은 1944년 말에 네덜란드 대사로 부임해 가고 없었다. 국무부의 대표적인 문제인물은 李承晩의 반공반소 주장을 모욕적인 태도로 비난했던 히스(Alger Hiss)였다. 매큔의 태도도 몹시 괘씸했을 것이다. 뒷날 소련의 간첩활동을 한 혐의로 기소되어 유죄판결을 받은 히스는 이때에 샌프란시스코회의의 사무국장으로서 소련대표들과 긴밀히 연락하면서 실무를 주관하고 있었다.
 
  올리버에게 부탁한 팸플릿 원고는 4월에 완성되었다. 「한국을 위한 변명: 미국외교의 한 역설(The Case for Korea: A Paradox of United States Diplomacy)」이라는 제목의 글이었다. 李承晩은 이 원고에 만족했다. 그는 원고료로 200달러를 올리버에게 송금했는데, 그것은 그가 올리버에게 지불한 첫 사례비였다.12)
 
  주미외교위원부는 이 팸플릿을 4,000부 인쇄하여 미국 상하의원 전원과 행정부의 중요 관리들과 신문 및 방송 책임자들에게 보냈다. 李承晩은 회의 개막에 맞추어 林炳稷을 대동하고 샌프란시스코로 가면서 이 팸플릿 1,000부를 가지고 갔다.13)
 
國際聯合 창립을 위한 연합국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샌프란시스코에 모인 臨時政府 대표들. 앞줄 왼쪽 끝에서부터 宋憲澍, 李承晩, 李薩音, 뒷줄 왼쪽 끝에서부터 尹炳求, 鄭翰景, 유경상, 林炳稷(1945년 5월22일)〔유영익, 「이승만의 삶과 꿈(1996)에서〕.
 
 
韓族委員會는 〈民衆代表團〉 구성해

 
  李承晩을 격분시킨 것은 미국무부의 관리들뿐만이 아니었다. 로스앤젤레스의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는 4월1일에 국민회 총회관에서 해외한족대회를 열고 샌프란시스코회의에 파견할 〈민중대표단〉을 선임했다. 선임된 사람들은 김호, 한시대, 전경무, 한길수, 김용성, 김병연, 박상엽의 7명이었는데, 이들 가운데 김호, 한시대, 전경무는 李承晩이 지명하여 임시정부의 대표로 임명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李承晩과 임시정부의 결정을 무시하고 별도의 대표단을 구성한 것이었다. 해외한족대회는 〈만일 임시정부대표가 공식으로 참가하는 경우에는 그들을 후원하고, 만일 정부대표가 참가하지 못하면 민중대표 참가를 주선하고, 만일 그것도 불가능하면 서류제정과 기타 선전방식을 취하기로 함〉이라고 결의했다.14) 그러나 그것은 반대파들의 군색한 어깃장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이보다 앞서 조소앙은 3월14일에 李承晩에게 전경무와 김원용은 정부대표로 임명되었으므로 다른 단체대표로 회의에 참석하지 않도록 이르라는 전보를 쳤는데, 김원용은 호놀룰루로 가기 때문에 대표단에 참가할 수 없다고 통보했었다. 그리하여 김원용은 〈민중대표단〉에서도 제외되었다. 또한 한국독립당과 조선민족혁명당을 포함한 중경에 있는 단체들은 연명으로 해외 각 단체가 합동하여 임시정부대표의 샌프란시스코회의 참가권을 청원하기로 결의하고, 그것을 재미한인단체들에 통보하라고 李承晩에게 타전했다. 이 통보를 받은 하와이의 한족연합위원회 의사부는 하와이의 각 단체들과 합동하여 연합운동으로 자금을 모집하겠다고 李承晩에게 알려왔다.15)
 
  그러나 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는 임시정부대표단이 샌프란시스코회의에 공식으로 참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고, 따라서 李承晩이나 임시정부와 관계없이 그들도 이 기회에 한번 선전활동을 펼쳐 보자는 것이 그들의 본심이었던 것이다.16) 한족연합위원회는 임시정부대표단에 맞서 자신들의 대표단을 〈해외한인대표〉로 부르기로 했다.17)
 
 
  轉向者 구베로가 얄타密約 情報 가져와
 
  李承晩이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자 중부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 새크라멘토 등지에서 동지회 회원들이 몰려와서 총재 李承晩을 환영했다. 李承晩은 포스트 스트리트(Post Street)에 있는 모리스 호텔(Maurice Hotel)에 본부를 정하고 한편으로는 각국 신문기자들을 상대로 선전활동을 하는 한편 한족연합위원회 대표들이 도착하는 대로 한 사람씩 만나서 그들을 설득하고 협조를 당부했다. 임시정부 대표로 임명된 윤병구, 송헌주, 이살음, 鄭翰景과 하와이동지회 대표로 온 유경상과 워싱턴에서부터 수행한 임병직이 李承晩의 활동을 도왔다. 회의 개막일인 4월25일에는 한인교회에서 임시정부대표단과 한족연합위원회 대표단이 함께 샌프란시스코 거주 동포들과 대책회의를 열었다.18) 그리하여 두 대표단은 같이 「공동성명서」를 발표했다.19) 李承晩은 4월30일에 임시정부대표단 회의를 열고 활동비 예산을 확정했다. 선전활동비 1,200달러(라디오 600달러, 신문 600달러), 접대비 500달러, 대표원 경비 2,280달러 등 5,000달러를 계상했다.20)
 
  李承晩 캠프에서 특이한 인물은 워싱턴에서 제이 윌리엄스(Jay Jerom Williams)가 보낸 구베로(Emile Gouvereau)였다. 그의 신원에 대해서는 공산당에서 전향한 러시아 사람으로만 알려져 있다.21) 그는 주로 외국기자들을 상대로 활동했다. 구베로는 처음에 그의 〈친구들〉인 소련사람들이 만나기조차 거부하여 여간 실망하지 않았다고 한다.22) 그런데 구베로는 李承晩으로 하여금 경악과 흥분을 억제할 수 없게 하는 정보를 가지고 왔다. 그것은 석 달 전에 있었던 얄타회담에서 루스벨트, 처칠, 스탈린 사이에 한국을 대일전이 종료될 때까지 소련의 영향력 아래 두고, 나아가 미국과 영국은 대일전이 종료될 때까지 한국에 아무런 약속을 하지 않기로 선언하는 비밀협정을 맺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스탈린의 요구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라고 했다.23) 李承晩은 정보의 진위를 따져 볼 겨를도 없었다. 자신이 품고 있던 의구심이 〈적중〉했기 때문이었다.24)
 
  구베로는 李承晩이 비밀협정을 폭로하도록 유력한 신문기자들과의 오찬회동을 준비했다. 李承晩은 올리버가 작성한 팸플릿 내용과 함께 별도의 성명을 작성하여 「뉴욕타임스(The New York Times)」를 비롯한 두세 신문에 전면 또는 2분의 1 면의 광고를 낼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는데, 구베로는 오찬회동 결과를 확인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李承晩은 이러한 사실을 워싱턴 사무실에 알리면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나는 그에게 우리가 만일 1905년에 구베로 같은 사람이 있었다면 시어도어 루스벨트도 결코 우리를 팔아 없애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소. 당시에 우리는 「세계 지도자들」의 부패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기 때문에 속수무책이었으나, 이제 우리는 그 사실을 알아냈으므로 세계의 양심이, 만일 그것이 있다면, 깨어날 때까지 싸워야 한다고 말했소.…〉25)
 
 
  美蘇 兩大國을 상대로 鬪爭 벌여
 
  李承晩의 저돌적인 기질은 71세의 나이도 아랑곳없었다. 그는 미국과 소련이라는 세계의 두 강대국을 상대로 칼을 뽑았다. 李承晩은 5월13일에 미국의 신문재벌 허스트(William R. Hearst)에게 편지를 썼다.
 
  〈한국이 비밀협정의 희생이 된 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것을 선생은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러한 국제적 노예무역의 비밀이 폭로된 이상, 미국 국민들의 아들들은 민주주의를 위하여 이 세계를 안전하게 하려고 최고의 희생을 하고 있는 때에 세계의 지도자들은 민주주의와 인간의 자유를 팔고 있다는 것을 미국 국민들에게 인식시킬 사람들은 선생과 같은 언론의 대지도자들입니다. 만일 미국 국민들이 이러한 일을 중지시키지 못한다면 그들의 아들들은 다음 15년 안에 제3차 세계전쟁을 치르기 위해 불려나갈 것입니다.…〉26)
 
  이튿날에는 구베로가 의회지도자들인 상원의 브루스터(Owen Brewster) 의원과 조지(Walter F. George) 의원, 하원의 호프만(Clare Hoffman) 의원에게 급전을 쳤다. 구베로는 이 전보에서, 이 비밀협정은 한국의 독립을 약속한 카이로 선언에 위배되며, 또 그것이 샌프란시스코회의에서 한국이 국제연합회원국이 되는 것을 가로막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한국인들은 1905년에 일본에 팔렸고, 지금은 러시아인들에게 팔리고 있다고 말하고, 이를 바로잡을 수 있도록 영향력을 행사해 줄 것을 당신이 지닌 미국의 정의감에 호소한다고 말했다.27)
 
  조지 의원의 의례적인 답전을 받은 구베로는 5월15일에 다시 그에게 〈하나님과 미국인의 정의의 이름으로 3,000만 기독교 국민이 러시아인들에게 팔리는 이 위급한 순간에 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무언가를 해주시지 않겠습니까?〉라고 타전했다. 조지는 구베로로부터 받은 두 통의 전보를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내면서 〈나는 이 전보들을 각하에게 보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그 주제에 관하여 전보 이외에 다른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각하께서 주의를 기울여야 할 문제라고 믿습니다.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으면 알려 주십시오〉라는 메모를 첨부했다.28) 트루먼은 4월12일에 루스벨트가 급사함에 따라 부통령에서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트루먼 大統領에게 편지 보내
 
  李承晩은 5월15일에 트루먼에게 편지를 썼다. 李承晩은 얄타회담에서 비밀협정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은 자신뿐 아니라 트루먼에게도 놀라운 일임이 틀림없을 것이라고 말하고, 그것은 1905년의 태프트-가쓰라(Taft-桂)협정에 이어 두 번째로 미국이 한국을 다른 나라에 팔아넘긴 비밀협정이라고 주장했다. 첫 번째 비밀협정은 20년 뒤까지도 비밀에 부쳐졌으나, 다행히 이번 얄타협정은 연합국회의 개최 중에 폭로되었다고 말하고, 트루먼이 그 일에 〈개입〉해 줄 것을 요청했다. 또한 李承晩은 한국인 대표가 연합국 총회에 참석하여 발언권을 얻게 도와 달라고 간청했다. 그는 또 다음과 같이 적었다.
 
  〈대통령 각하. 지금까지 우리가 누차 되풀이해 왔던 요청을 다시 한 번 말씀드릴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우리는 지금 우리의 막대한 인력을 정규군 및 다양한 지하운동 부문에서 사용할 수 있게 해 달라고 다시 한 번 요청합니다. 한국인들이야말로 일본에 대한 가장 극렬한 적입니다. 이들은 지난 40년 동안이나 고립무원의 항쟁을 계속해 왔습니다. 특히 태평양 전선이 차차 일본열도에 가까워지고 이에 따라 연합군에게 한국의 지하부대의 협력이 필요하게 될 것이므로, 이들은 더욱 광범위하고 효과적인 규모로 이번 전쟁에 참가하기를 열망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한결 조속한 일본의 패망을 도울 수 있고 미국인 사상자 수를 줄일 수 있을 것입니다.…〉29)
 
  백악관은 이 편지를 국무부로 회부했다.
 
  李承晩의 〈폭로〉는 큰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허스트계의 「샌프란시스코 익제미너(Sanfrancisco Exeminer)」는 李承晩의 주장을 자세히 소개하고 〈그 소위 각서가 만일 진짜라면 이곳에서 모이고 있는 연합국회의에 외교적 폭발물이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30) 북미동지회 기관지 「북미시보(The Korean American Times)」는 계속해서 한반도에 대한 소련의 야욕을 비방하는 기사를 실었다. 소련이 중국 공산당 소재지인 延安에 한인 공산당 임시정부를 조직해 두고 앞으로 폴란드의 루블린(Lublin) 정부처럼 승인을 주장하려고 준비 중이라는 것이었다.31)
 
  기독교인친한회 등의 단체와 개인들은 트루먼 대통령에게 얄타밀약설이 사실인지를 문의하는 전보와 편지를 보냈고,32) 미시간주 출신의 하원의원 섀퍼(Paul W. Shafer) 의원은 6월22일에 의회에서 얄타밀약설에 대한 국무장관의 해명을 요구했다.33)
 
 
  美國務部는 否認편지 보내와
 
  미국무부는 6월5일에 국무장관 대리 그루 명의로 극동국장 대리 록하트(Frank P. Lockhart)가 李承晩이 트루먼에게 보낸 편지에 대한 답장을 보냈다. 그것은 李承晩의 주장이 사실무근임을 밝히는 것이었다. 록하트는 이 편지에서 중경의 임시정부가 5월26일에 얄타밀약설을 근거 없는 낭설이라고 중국 「中央通信」에 밝힌 사실을 거론했는데, 임시정부는 주중 소련대사관과 가까운 인사들을 통하여 李承晩의 주장을 부인하는 소련의 입장을 확인했던 것 같다. 록하트는 또한 李承晩이 트루먼에게 요청한 한국 임시정부대표들의 회의 참석 문제와 대일전에 한국인을 활용하는 문제를 냉혹하게 거절했다.34)
 
  또 그루도 6월8일에 성명을 발표하고, 얄타회담에서 전후 한국의 독립을 약속한 카이로선언에 위배되는 어떠한 비밀협정도 체결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루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미국으로부터 통치당국으로 인정받기에 적합한 자격요건들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샌프란시스코회의에 초청받지 못했다고 설명했다.35)
 
  임시정부대표단과 공동으로 한인대표단 성명을 발표하고 실행위원회까지 구성한 뒤에도 방관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던 반대파들은 李承晩의 〈폭로〉를 비판하고 나섰다. 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는 6월2일에 각국대표단 앞으로 카이로선언을 신뢰하며 샌프란시스코연합국회의를 지지한다는 「비망록」을 보냈다. 이 「비망록」에 대해 회의 초청국인 미국, 영국, 소련, 중국, 프랑스 대표단은 의례적인 회답을 보냈다.36) 또한 한족연합위원회를 탈퇴하여 독자적인 행보를 취하고 있던 조선민족혁명당 미주총지부의 기관지 「독립」은 영문판에 그루의 성명서 전문을 싣고, 「사설」란을 통하여 李承晩이 〈이불 안의 활개 짓〉과 같은 어리석은 행동을 했다고 비아냥했다.37)
 
 
  同志會를 大韓民主黨으로
 
  李承晩의 얄타밀약설 주장으로 동포사회가 벌집 쑤셔놓은 것 같은 분위기인 5월26일 하오에 로스앤젤레스의 북미국민회총회관에서 제1회 대한인동지회 미포[미주·하와이]대표대회가 열렸다. 샌프란시스코에 와 있는 유경상이 하와이의 동지회 중앙부 전권대표로 참석했다. 이 대표대회는 李承晩의 지시에 따라 대한인동지회를 정당체제로 개편하기 위하여 소집된 회의였다. 이살음이 의장, 윤병구가 부의장이 되어 회의를 진행했다. 정당 이름은 대한민주당으로 하고, 영문으로는 ‘Korean Nationalist Democratic Party’로 표기하기로 했다.
 
  회의는 이날부터 6월24일까지 여섯 차례에 걸쳐서 개최되었는데, 채택된 정강과 정책은 다음과 같았다.
 
  〔정강〕
  (1)본당은 대한민족의 절대독립을 주장함.
  (2)본당은 민주주의를 수립하여 이로써 정체를 건설함.
  (3)본당은 활민운동으로써 대한인민의 자유와 생명 재산을 보장함.
 
  〔정책〕
  (1)임시정부가 한국에 들어가서 총선거를 실시할 때까지 절대로 봉대함.
  (2)선거권은 남녀평등으로 함.
  (3)국제통상을 장려함.
  (4)왜적의 불법소유는 국유로 몰수하고, 사유재산은 종법처결하기로 주장함.
  (5)독립주권을 손상하는 자는 종법 응징하기로 주장함.
  (6)의무교육을 전국적으로 실시키로 주장함.
  (7)한국국방을 위하여 의무 군사교련을 실시키로 주장함.
  (8)국제평화를 위하여 한국 군병으로 일본을 경찰하기를 주장함.
  (9)종교, 출판, 언론, 집회 등 자유를 보장하기를 주장함.38)
 
  3개항의 「정강」은 매우 조략한 것이었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대한인민의 자유와 생명 재산을 보장하는 방법으로 추진하겠다고 한 〈활민운동〉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뜻하는 것인지 애매하다.
 
  대한민주당의 「정책」 가운데에서 중경에 있는 정당들의 그것과 크게 다른 점은 사유재산의 보장을 전제로 하고 있는 점이다. 그리하여 한국에 있는 일본인 소유 재산이라도 〈불법소유〉만 국유로 한다고 했다. 흥미 있는 것은 전후 일본의 경찰권을 당분간 한국이 행사할 것을 주장하고 있는 점이다.
 
  李承晩이 이 시점에서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수중의 세력인 동지회를 왜 정당체제로 바꾸기로 했는지는 분명히 알 수 없다. 「新韓民報」는 대한민주당의 결성에 대해 그것은 李承晩이 〈금일까지 자기 활동의 유일한 무기로 쓰던 단체를 한 정당의 이름으로 고쳐 정당으로 표방하고, 내부적으로는 경제에 안목을 집중하고자 활동하며, …배신행동으로 자살적 과실을 취한 데서 회피하려는 것이라고 하겠다〉라고 비판했다.39) 그러나 이러한 비판도 모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차라리 아이오와로 가서 닭이나 기르겠소』
 
  李承晩의 얄타밀약설 제기와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기록이 있다. 임시정부대표단의 한 사람으로 샌프란시스코에 갔던 정한경이 1946년에 펴낸 「李承晩: 예언자와 정치가」라는 선전용 소책자가 그것이다. 李承晩의 주장이 큰 파문을 일으키고 있을 때에 정한경은 모리스 호텔의 본부에서 李承晩을 만났다.
 
  『박사님은 그러한 고발에 대해 아무런 증거도 가지고 있지 않으십니다. 그것이 실제로 근거 없는 것으로 밝혀지면 그 결과가 두렵지 않으십니까?』
 
  李承晩은 그러나 조근조근하게 설명했다.
 
  『나는 증거가 없소. 그것은 오직 나의 관찰에 따른 신념일 따름이오. 한국을 위하여 나는 내가 틀렸기를 바라오. 만일 비밀협정이 없다면, 그 결과에 대하여 나는 기꺼이 모든 책임을 지겠소. 사실이든 거짓이든, 우리나라가 어떤 위치에 있는가를 밝히기 위해 지금 그것을 터뜨릴 필요가 있소. 내가 바라는 것은 얄타협정에 서명한 국가수뇌들이 그것을 공식으로 부인하는 것이오. 그보다 더 나를 기쁘게 할 것이 없소』40)
 
  미국 정부의 공식부인에도 불구하고 李承晩은 구베로의 정보를 믿었던 것이 틀림없다. 李承晩은 구베로로부터 이 정보를 얻는 대가로 「뉴욕타임스」 등에 큰 광고를 내려고 동포들로부터 모금한 3,000달러를 모두 써버렸다.41)
 
  李承晩은 지방순회 예정을 취소하고 5월26일에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29일에 워싱턴으로 돌아왔다.42) 시러큐스에서 달려온 올리버는 李承晩에게 반대파들과 손잡을 것을 권했다. 그렇지 않으면 독립운동의 지도적 역할을 잃게 될 것이라고 그는 권고했다.
 
  『당신 말이 옳을지 모르지요. 집사람하고 그 문제를 상의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이익을 위해 한국을 팔아먹기보다는 차라리 은퇴하고 아이오와주의 조그마한 양계장에서 닭이나 기르자고 했어요』
 
  李承晩은 그 어느 때보다도 단호했다.43) 그는 반대파들은 공산주의자들이라고 인식했고, 공산주의자들과 손잡는 것은 한국을 팔아먹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포츠담에 가 있는 트루먼에게 전보 쳐
 
  李承晩은 7월21일에 수뇌회담을 위해 포츠담에 가 있는 트루먼에게 전보를 쳤다. 그는 이 전보에서 세 수뇌가 한국의 정치적, 행정적 주권과 영토적 통합에 영향을 미칠 어떠한 비밀협약이나 합의도 거부할 것을 보장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하고, 종전 뒤에 한국에서 공산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들 사이의 내전의 가능성을 배제하기 위하여 지금 즉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하며, 공동의 적인 일본과의 전투에서 더 큰 규모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한국인들에게 기회를 부여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연합국의 승리를 촉진시키고, 연합국의 사상자 수를 감소시키는 데 필요한 모든 인력을 공급하고, 일본이 또 다른 전쟁을 준비할지도 모르는 모든 가능성을 검토하여 일본을 감시하는 일을 지원하고, 귀국한 뒤 1년 이내에 전국 총선거를 실시하여 1919년의 서울선언〔기미독립선언〕에 따른 민주적 형태의 정부를 수립하고, 연합국들과 과거와 같은 우호협력관계를 복구하고 증진시키기 위한 모든 책임을 질 수 있는 입장에 서게 될 것이라고 장담했다.44)
 
  李承晩은 7월25일에 국무부에도 다시 편지를 썼다. 그것은 록하트의 6월5일자 해명편지를 반박하는 내용이었다. 李承晩은 다음과 같은 일을 볼 때에 여전히 의심이 해소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1) 비밀협정의 신빙성은 강직한 한 미국인에 의하여 입증되었고, 그는 그의 정보 출처를 밝힐 예정이다.
 
  (2) 소비에트 당국은 불길하게도 계속 침묵을 지키고 있다. 우리는 소련대사에게 해명을 요구했으나, 아직까지 아무런 회답을 받지 못했다.
 
  (3) 처칠 수상은 얄타에서 많은 주제가 논의되었으나, 현재로서는 밝힐 수 없다고 언명했다. 그는 그 속에 한국문제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4) 지난 40년 동안 일본과 싸워 온 한국은 막대한 인력을 연합국의 전쟁수행에 활용하도록 제의했고, 그 제의를 수락할 경우에 연합국의 사상자 수를 감소시킬 수 있는 여러 가지 방안을 채택하도록 제시했으나, 미국은 일관되게 우리의 요구 가운데 어느 것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은 얄타회담 훨씬 이전부터, 구두로건 서면으로건, 그것과 유사한 성격의 협정이 있었음을 말해 준다.
 
  (5) 한국은 1905년에 비밀외교의 희생물이 되었다. 그것은 너무나 오랜 시일이 지나서야 밝혀져서 한국인들은 항의조차 할 수 없었다. 그들이 외교적 항의나 부인 이상의 실질적인 보증을 요구한다고 해서 누가 그들을 비난할 수 있겠는가?45)
 
  李承晩은 이어 전쟁이 종결되기 전에 미국 정부가 임시정부를 승인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고 나서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반대로 만일 국무부가 한국공산주의자들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반대하여 또 하나의 정부를 구성할 수 있게 될 때까지 문제를 미결상태로 두기로 결정한다면, 그 결과는 한국에서 불가피하게 다수의 한국민족주의자들과 소수의 공산주의자들 사이에 유혈사태를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소비에트정부는 8만 명가량의 한국인들을 적기군(Korean Red Banner Army)으로부터 제대시켜 민간인 복장으로 한국에 들여보내고 있습니다. 중국과 여러 유럽 나라들에서와 마찬가지로 한국에서도 틀림없이 악랄한 선전활동이 심각한 문제를 야기시킬 것입니다. 유럽의 대부분의 해방국에서 일어난 사태에 비추어 보아, 만일 미국이 유럽에서 일어났던 사태가 아시아에서도 일어나도록 허용한다면, 한국 민중은 자신들 스스로의 정부 선택의 기회를 거의 갖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귀하께 분명히 밝혀 둡니다.…〉46)
 
  소련이 8만 명가량의 한인 공산군을 제대시켜 한국으로 들여보내고 있다는 李承晩의 주장은 물론 사실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 무렵에는 미국정부도 한반도 정세에 대해 李承晩과 비슷한 인식을 하고 있어서 흥미롭다.
 
포츠담會談에 참석한 세 首腦와 參謀들. 앞줄 왼쪽부터 애틀리 首相, 트루먼 大統領, 스탈린首相, 뒷줄 왼쪽부터 레이히 美海軍提督, 베빈 英外相, 번즈 美國務長官, 몰로토프 蘇外相.
 
  『韓國의 政治狀況은 共産主義 이데올로기의 溫床이 될 것』
 
  국무부의 견해는 6월22일에 작성된「전쟁종결 때의 아시아 태평양지역의 정세판단 및 미국의 목적과 정책」이라는 정책문서에 뚜렷이 나타나 있다. 이 문서는 서두에서 〈극동과 태평양에서의 승리는 미국의 거대한 군사력과 희생의 결과로 초래될 것이다. 미국은 그 대가로 이 광대한 지역의 평화와 안전과 경제적 번영의 적절한 보장을 요구한다〉고 전제하고, 그러한 평화와 안전과 경제적 번영을 좌우하게 될 조건으로 1) 주민들의 정부형태를 선택할 권리와 2) 세계평화수호국〔연합국〕 사이의 협조를 들었다. 그러한 인식에서 「한국」항에서는 예견되는 해방 뒤의 사태와 이에 대처할 미국의 정책방향을 명백히 하고 있는데, 그 요지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일본의 지배가 종결되면 정치, 경제, 사회의 심각한 혼란이 야기될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해방과 더불어 오랫동안 일본인 및 한국인 지주에 착취당해 온 소작인들은 철저한 농지개혁을 바랄 것이다. 한국인을 대표하는 정부는 현재 존재하지 않으며 치안의 마비는 동시에 경제의 혼란을 가져올 것이다. 군사작전에 의한 산업시설의 파괴에 따른 실업, 일본으로부터의 귀국자 등으로 말미암아 아마도 인구의 10% 이상이 실업자가 될 것이다. 소련은 극동전에 참가하고, 소련군은 한국의 전부 또는 일부를 점령하게 될 것이다. 소련은 한국의 일부에 군사정부를 수립하고 이어 소련에서 훈련된 한국인들이 참가하는 친소정부를 수립하려고 할지 모른다. 시민권을 가진 소련 태생을 포함하여 30만 명의 한국인이 시베리아에 살고 있고, 소련군에는 2만 내지 3만 명의 한국계 소련인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의 경제 및 정치상황은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의 온상이 될 것이고, 비록 한국인 일반이 친소적이지는 않으나 소련의 지원을 받는 사회주의체제의 정책과 활동은 쉽사리 일반의 지지를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미국의 대한정책의 기본은 카이로선언의 실현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의 정치적 장래와 관련하여 중국, 영국, 소련 등 강대국들과의 사전협약과 공동행동을 모색해야 한다. 미국은 군사정부와 과도 행정에 모두 참가해야 된다는 것이 미국정부의 정책이다. 뿐만 아니라 한국인들로 하여금 강력하고 민주적인 독립국가를 조속히 건설하도록 원조하는 것이 미국의 의도이다.47)
 
 
  『極東에 옮겨 놓은 폴란드 問題』
 
  이러한 대소련 경계심은 포츠담회담 개시 전날인 7월16일에 전쟁부장관 스팀슨(Henry L. Stimson)이 트루먼에게 제출한 보고서에도 표명되어 있다. 스팀슨은 다음과 같이 건의했다.
 
  〈제가 들은 바로는 소련은 4개국 신탁통치에 동의하였으나 아직 상세한 것은 합의된 바 없습니다. 스탈린은 외국 군대의 한국 주둔이 없기를 촉구하는 것으로 저는 알고 있습니다. 또한 제가 알기로는 소련은 이미 1, 2개 한국인 사단을 훈련 완료했는데, 이 병력을 한국에서 사용할 것으로 추측됩니다. 만일 한국에 국제신탁통치가 실시되지 않거나, 또는 실시되더라도, 이들 한국인사단은 아마 지배력을 장악하여 독립정부보다는 오히려 소련 지배 아래의 지방정부가 될 정권을 수립하는 데 영향력을 행사할 것입니다. 이는 바로 극동에 옮겨 놓은 폴란드 문제입니다.
 
  저의 제안은 신탁통치안의 강력한 추진입니다. 또한 저는 신탁통치 기간 동안 미국의 육군 또는 해병의 최소한의 상징적 병력을 한국에 주둔시킬 것을 제안합니다.〉48)
 
  앞에서 보았듯이, 얄타회담에서 李承晩이 주장하는 것과 같은 한반도의 장래문제와 관련된 비밀협정은 없었다. 루스벨트와 스탈린 사이에 한국에 신탁통치를 실시한다는 구두양해가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소련의 대일전쟁 참가와 관련된 비밀협정 이야기는 계속해서 세계의 신문지상과 전파를 타고 논란이 되고 있었다.
 
  얄타회담에서 루스벨트, 처칠, 스탈린 세 수뇌 사이에 서명된 소련의 대일참전 조건에 대한 비밀 협정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1)외몽고〔몽고인민공화국〕의 현상은 지속될 것이다.
 
  (2)1904년에 일본의 배신적 공격으로 침해된 소련의 다음과 같은 종전의 권익은 회복될 것이다.
 
  a)남부 사할린 및 그 주변의 모든 섬은 소련에 반환될 것이다.
 
  b)大連港은 국제항이 되고, 이 항구에서의 소련의 우선적인 권익은 보장되며, 또한 소련해군 군항으로서의 조차권은 회복될 것이다.
 
  c)대련에 이르는 출구인 東支鐵道와 南滿洲鐵道는 中-蘇合辦會社의 설립에 의하여 양국이 공동으로 운영한다. 곧, 이 지역의 소련의 우선권을 보장하고 중국은 만주 전역에 걸쳐서 주권을 행사할 것이다.
 
  (3)쿠릴열도[Kuril islands: 치시마(千島)열도]는 소련에 양도된 것이다.49)
 
  이 비밀협정은 1년 뒤인 1946년 2월11일에 공개되었다. 그러나 얄타회담의 전모는 10년 뒤인 1955년에 가서야 공개되었다.
 
 
  포츠담會談에서는 韓國問題 討議 안 돼
 
  포츠담회담에서는 한국문제는 수뇌회담에서나 외무장관회담에서 따로 토의되지 않았다. 회담 뒤에 작성된 미국 쪽의 토의내용 요약에는 〈한국신탁통치 문제는 소련에 의하여 제기되었으나 토의되지 않았다〉라고 적고 있다.50) 미국은 이 무렵에는 폴란드 사태 등에서 드러난 소련의 정치적 기도에 대한 경계심이 팽배하여 대일전 종결에는 소련의 참전이 필요불가결한 것은 아니라는 판단을 하고 있었는데, 포츠담회담 중에 있었던 원자탄 실험의 성공은 미국으로 하여금 대소교섭에서 단호한 태도를 취하게 했다. 3국의 참모장회담에서 소련의 안토노프(A. I. Antonov) 적군참모총장이 소련군의 작전에 대응한 미군의 한반도연안작전의 가능성을 물었을 때에 마셜(George C. Marshall) 장군은 병참상의 이유를 들어 『이러한 육해공작전은 아직 계획된 바 없으며, 특히 가까운 장래에는 없을 것이다』라고 상륙작전의 가능성을 부인했다.51) 그러나 그런 다음 회담 중에 마셜 장군이 작전부장 헐(John E. Hull) 중장에게 미군의 한국진공계획을 준비하라고 명령한 것52)도 그러한 인식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참모장회의에서는 미군과 소련군의 작전상의 혼란을 피하기 위한 공군과 해군의 작전구역 설정에 대해서는 합의를 보았으나 한반도의 내륙부에서의 작전구역에 대한 토의나 그것과 당연히 결부되는 분할점령은 대일전의 종결단계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인 계획을 확정하지 않고 있었다.
 
  7월26일에 발표된 포츠담선언은 제8항에서 〈카이로선언의 조항은 이행될 것이며 또 일본의 주권은 본토, 홋카이도(北海道), 규슈(九州), 시코쿠(四國)와 우리가 결정하는 여러 작은 도서에 국한될 것이다〉라고 천명함으로써 한국문제에 대한 연합국의 기본정책을 재확인했다.
 
 
  맥아더와 니미츠에게 마닐라로 가겠다고 打電
 
  李承晩은 국무부 관리들을 상대로 논쟁만 벌이고 있지 않았다. 그는 포츠담선언이 발표된 이튿날인 7월27일에 마닐라에 있는 맥아더(Douglas MacArthur) 장군과 태평양전선 해군사령관 니미츠(Chester Nimitz) 제독에게 자신이 마닐라로 가서 국내동포들에게 방송할 것을 제안하는 전보를 쳤다.
 
  〈조상 대대로 일본의 적인 우리는 40년 동안 왜놈들과 싸워 왔습니다. 진주만 공격 이래로 우리는 되풀이하여 태평양전쟁에서 연합국을 위해 우리의 인력과 계획을 제공하겠다고 제의해 왔습니다. 그러나 소련의 영향 때문에 지금까지 미루어져 왔습니다. 1942년 7월의 방송에서 나는 한국인들에게 항거하지 말고 지시를 기다리라고 말했습니다. 여러 경로를 통하여 나에게 전해지는 정보에 따르면 그들은 나의 메시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언제 봉기할 것인지를 말해 주고 싶습니다. 로물로(Carlos P. Romulo) 장군은 제가 마닐라로 가서 그곳에서 한국인들에게 방송을 할 수 있게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주선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나는 한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었고 지금은 워싱턴에 있는 그 대표기관인 한국외교위원부(Korean Commission)의 위원장으로서 우리에게 우리 몫의 투쟁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실 것을 간곡히 바랍니다. 우리는 성심껏 협조할 것을 약속합니다.〉53)
 
  1942년에 아시아인 최초로 퓰리처(Pulitzer)상을 수상한 언론인 출신의 로물로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맥아더의 무관으로 활동했고, 샌프란시스코 국제연합창립총회에는 필리핀 대표로 참석했다. 李承晩은 그러한 로물로를 설득했던 것이다.
 
  李承晩의 전보를 받은 니미츠는 이튿날로 李承晩에게 합동참모본부와 상의하라고 답전했고,54) 맥아더는 7월30일에 전쟁부를 통하여 그것은 최고의 정부정책에 관한 사항이므로 워싱턴의 해당기관이 결정할 문제라고 회답했다.55)
 
 
  (2) 光復軍의 國內挺進作戰과 日本의 降服
 
 
  1945년 3월9일에 蔣介石의 승인을 거쳐 4월4일에 임시정부에 송부된 「援助韓國光復軍辦法」은 5월1일부터 정식으로 효력을 발휘함으로써 광복군은 비로소 완전한 자주성을 되찾게 되었다.56) 이날 李靑天은 광복군총사령부 대례당에 태극기와 함께 걸려 있던 청천백일기[중국 국기]를 즉각 내리게 했다.
 
 
  美軍은 『오직 金九를 交涉相對로 한다』고 通報
 
  金九는 이 사실을 미군 당국에 알려 주기 위해 5월1일 오후에 趙素昻과 함께 주중미군사령부를 찾아갔다. 金九는 참모장 그로스(Mervin E. Gross) 장군을 만나서 앞으로 미국 쪽에서 군사상으로 한국의 협조가 필요할 경우, 한국광복군 총사령부와 교섭하면 되고 중국 군사위원회를 거칠 필요는 없다는 영문공문을 수교했다.57)
 
  그런데 이날 金九가 주중미군사령부에 수교한 영문공문의 내용을 둘러싸고 한국독립당과 조선민족혁명당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다. 金元鳳이 이 영문공문의 내용이 처음에 자신과 합의한 국문공문의 그것과 다르다고 이의를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동의한 국문공문에는 교섭의 주체가 〈임시정부 군무부〉로 되어 있는데, 영문공문에는 〈광복군총사령부〉로 바뀌었다는 것이었다. 김원봉은 5월5일에 조소앙을 찾아가서 항의하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대미 군사외교권이 이청천에게 넘어가게 되었다고 항의했다. 조소앙은 아무런 답변도 하지 않았다. 화가 난 김원봉은 웨드마이어(Albert C. Wedmeyer)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어 자신이 협상대상이라고 통보했다. 임시정부는 하는 수 없이 웨드마이어에게 군사방면 교섭은 광복군총사령 이청천과 군무부장 김원봉 두 사람이 책임지고 처리할 수 있도록 요망하는 서신을 보냈다. 며칠 뒤에 미군사령부는 〈이른바 부장이나 총사령의 존재는 승인하지 않으며 오직 金九를 교섭상대로 한다〉는 답장을 보내왔다.58)
 
  그러나 이것으로 광복군의 지휘권을 둘러싼 한국독립당과 조선민족혁명당의 갈등이 해소된 것은 아니었다. 6월8일에 열린 국무위원회에서는 한국독립당과 조선민족혁명당 사이에 광복군과 관련된 사안의 대미교섭을 군무부장이 담당할 것인가, 광복군총사령이 담당할 것인가의 문제를 두고 격론이 벌어졌다.59) 조선민족혁명당은 6월11일에 1)임시정부 재정의 즉시 공개, 2)비밀외교의 즉각 중지, 3)미국부용(美國附庸)의 즉각 중지, 4)광복군 인사의 임면은 양당이 협의한 뒤에 발표할 것, 5)광복군의 제반사항 처리는 총사령이 먼저 참모장과 협의한 뒤에 처리하고 갑작스럽게 명령하지 말 것의 5개항의 요구조건을 제시하고, 그것이 원만히 해결되지 않을 경우 임시정부와 광복군에서 탈퇴하여 별도의 조직을 설립하겠다고 선언했다.60) 그 뒤에도 제1지대 및 제2지대와 제3지대의 활동구역 문제, 군무부장 김원봉과 총사령 이청천과 참모장 金弘壹 사이의 직권분규문제, 광복군 각 지대 사이의 경비분배의 불균형, 한국인 포로의 접수문제 등을 둘러싸고 알력은 계속되었다.61)
 
光復軍 제2支隊員과 OSS訓練敎官들(1945년 8월). 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사전트 대위, 세 번째가 李範奭 지대장〔白凡記念館 제공〕.
 
  제1기 訓練生으로 50名 뽑아
 
  「독수리작전」은 4월 하순에 이르러 궤도에 올랐다. OSS는 4월26일 아침에 군수물자를 실은 트럭 두 대를 「독수리작전」에 할당하여 서안으로 보냈다. 이어 4월29일에는 李範奭과 「독수리작전」 요원으로 선발된 25명의 탈출 학병청년들이 특별기편으로 서안으로 갔다.62) 이들은 5월1일부터 일주일 동안 예비훈련을 받고 각자의 자질과 적성에 따라 임무와 훈련 내용이 결정되었다.63)
 
  처음 「독수리작전」에 참여한 미군요원은 사전트를 비롯하여 모두 5명이었다. 사전트는 5월9일에 서안으로 가서 5월11일에 정식으로 독수리작전 야전사령관에 취임했다. 훈련에 필요한 모든 장비도 사전트와 함께 훈련본부에 도착했다.64) OSS는 훈련을 담당할 인원을 10명으로 정했으나 요원 부족으로 5명이 먼저 부임하여 훈련을 실시하도록 한 것이었다. 그 뒤로 점점 요원들이 보충되어 OSS대원 40여 명이 제2지대에 상주하면서 협동작업을 수행하게 되었다.65) 이들 가운데에는 유일한 한국인 출신 현역 미군장교 鄭雲樹 소위를 비롯하여 10여 명의 동포들이 군속으로 참여했는데, 그들은 주로 통역을 담당했다.66) 주미외교위원부에서 일하던 정운수는 李承晩의 권고로 미군에 입대했다.
 
  예비훈련을 거쳐 제1기 훈련생으로 50명이 선발되었다. 토교에서 온 학병청년들 19명은 제1기 훈련생으로 선발되었다.67) 제1기 훈련생들은 첩보훈련반과 통신반(무전교신반)으로 나뉘어 5월21일부터 훈련을 받았다. 훈련은 엄격했다. 하루 8시간 교육을 받고, 1주일 훈련이 끝나면 시험을 쳐서 성적이 부진하면 부적격 판정을 내리고 내어보냈다. 7월 말까지 9명이 불합격 판정을 받았다.68)
 
  훈련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여러 가지 문제점이 드러났다. 한국 훈련대원들과 OSS요원들 사이의 언어소통 문제, 훈련기지의 보안 문제, 곤명 OSS본부와의 연락 문제, 부양의 광복군 제3지대와의 무선연락 문제, 재정 문제, 본국으로의 침투방법 문제, 훈련생 모집과 충원 문제 등이 그것이었다. 이 가운데에서 가장 심각한 것은 언어소통 문제였다. 경험 있고 능력 있는 통역요원이 크게 부족했다. 언어소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원들의 요청과 이범석의 제안으로 훈련교관 마이어스(Robert Myers)가 영어회화반을 만들어 이범석 이하 많은 대원들이 자발적으로 영어학습을 실시했다.69) 또한 OSS 중국본부는 1945년 3월에 「독수리작전」 계획서를 제출하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워싱턴본부에 한국어와 영어를 구사할 줄 아는 한국계 장교와 사병을 보내줄 것을 요청했었다. 워싱턴 본부에서는 咸龍俊 대위 등 10명을 6월 말에 현지에 파견했다.70)
 
  이범석과 사전트는 일본밀정의 잠입과 중국 정보조직의 침투를 막기 위해 훈련기지의 보안유지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또한 훈련의 보안유지를 위해 업무상 목적 이외에는 대원들의 서안시내 외출을 억제하고, 우편검열도 실시했다. 이범석은 OSS의 파우치나 통신시설을 이용하여 중경의 임시정부와 연락했다.71)
 
  제1기 훈련은 8월4일에 끝났다. 훈련생 50명 가운데 38명이 수료했는데, 전체적으로 고학력이었기 때문에 개인별 평가는 대체로 우수했다.72) 훈련을 마친 대원들은 8월20일 안으로 4, 5명씩을 한 조로 하는 8개조의 공작반을 편성하여 국내로 침투시키기로 했다. 이범석은 국내로 투입되는 대원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8월1일자로 전 대원을 대위로 발령했다.73) 제2기 훈련은 8월13일에 시작하여 9월 말에 끝낼 계획이었다.
 
 
  第3支隊는 安徽省立煌에서 訓練 받아
 
  金學奎는 4월28일에 嚴道海[嚴弘燮]와 함께 임천을 거쳐 제2지대 본부가 있는 부양에 도착했다.74) 무전기술에 능숙한 엄도해를 데려온 것은 OSS의 무전훈련을 위한 준비였다. 중경에 함께 갔던 金祐銓은 OSS와의 연락업무를 위해 곤명의 OSS본부에 파견했다.75)
 
  제3지대의 OSS훈련은 제2지대보다 늦은 7월 초에 가서야 시작되었다. 김학규가 지대본부를 떠나 있는 사이에 많은 대원들이 새로 들어와 있었으므로 그들을 개별적으로 면담하여 훈련대상자를 선발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던 것이다. 김학규는 총책임자 엄도해, 훈련대장 尹永茂, 연락관 金君南 등 22명을 훈련요원으로 선발했다. 훈련장소는 부양에서 동남쪽으로 500리쯤 떨어진 立煌으로 정했다. 입황은 사방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이자 전략적 요충지였다. 당시 이곳에는 안휘성 정부를 비롯하여 江蘇省, 山東省의 피란정부와 중국군 제10전구사령부와 미 제14항공대의 입황파견대가 몰려 있었다.76) 소수의 인원을 선발한 것은 입황이 일본군의 포위망 안에 위치하고 있어서 모든 물자를 비행기로 운반해야 하는 어려움을 고려한 것이었다. 선발된 대원들은 6월30일에 제3지대 창설식이 끝난 이튿날 부양을 출발하여 7월7일에 입황에 도착했다.77)
 
  미군복과 미군용 보급품을 지급받은 대원들은 3개월 예정의 훈련에 들어갔다. 드러먼드(William Drummond) 대위를 책임자로 하고, 윔스(Clarence N. Weems) 대위가 훈련반 지도관이 되어 대원들을 훈련시켰다. 훈련의 주요 내용은 국내침투에 대비하는 각종 특수훈련과 첩보, 파괴 훈련이었다.78) 정보학, 독도법, 첩보수집, 무전기 조작법, 송수신법, 암호해독법, 무기조작법, 폭약사용법 등과 게릴라전에 필요한 폭파, 파괴, 납치, 민중선동, 암살에 관한 특수훈련과 공중낙하훈련을 받았다.79)
 
光復軍 제3支隊의 OSS훈련교관 윔즈 大尉와 隊員들. 윔즈 왼쪽이 金學奎 지대장(1945년 8월)〔白凡記念館 제공〕.
 
  中國政府에 알리고 協助 요청
 
  金九는 OSS와의 합동작전을 추진하면서도 중국 정부와의 관계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金九는 2월6일에 중국국민당 비서장 吳鐵城에게 탈출 학병청년들의 구제비로 300만원을 지원해 줄 것을 요청했다.80) 오철성은 3월24일에 탈출 학병청년들을 광복군에 배치하도록 하고 계속하여 탈출해 오는 한국청년들을 수용하기 위해 서안과 老河口 등 전방 지역에 신속하게 한국광복군 훈련반을 설치할 것을 중국군사위원회에 요청했다.81) 또한 金九는 이와는 별도로 3월26일에 오철성에게 임시정부에 지급하는 중국 정부의 보조비를 매달 500만원으로 증액해 줄 것을 요청했다.82)
 
  오철성은 4월10일에 긴급명령으로 재정부에서 200만원을 발급하여 진재위원회에서 수령하도록 허락했다고 金九에게 통보했다.83) 중국군사위원회는 한국광복군 간부훈련반 개설에 적극 협조하기로 했다. 각지의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어 있는 한국인 사병들을 편성 조직하여 훈련시키는 것이 적의 사기를 와해시키는 데 큰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판단한 장개석은 한인 사병들의 활용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장개석은 5월11일에 오철성에게 주관 부서에 명하여 구체적인 방법을 연구하여 실시하라고 지시했다.84)
 
  한편 金九는 OSS와의 합동작전에 대해 중국 정부의 동의와 협조를 요청했다. 金九는 5월28일에 장개석에게 편지를 보내어 서안과 부양에 광복군훈련반을 개설하기로 한 사실을 알리고 두 지역의 군정 당국에 그곳에 설치할 광복군훈련반에 긴밀히 협조하라는 전문을 보내 줄 것을 요청했다.85) 장개석은 金九의 요청을 받아들여 6월30일에 서안의 제1전구 胡宗南 대리사령장관, 서안의 祝紹周 주석, 입황의 제10전구 李品仙 사령장관, 임천지휘소의 何柱國 주임에게 서안과 부양에 설치하는 광복군훈련반에 적극 협조하라고 지시했다.86)
 
 
  金九가 다시 韓國獨立黨 中央執行委員長으로 뽑혀
 
光復軍의 國內進攻計劃에 관한 會議를 마치고 光復軍 第2支隊 본부를 나오는 金九와 OSS局長 도노반 장군. 뒤에는 李靑天 광복군 총사령과 李範奭 광복군 제2지대장〔白凡記念館 제공〕.
  신한민주당의 결성으로 조소앙을 지지하던 당내 합작파들이 탈당함에 따라 한국독립당의 체제정비가 불가피해졌다. 黨章에는 매 격년 5월 중에 정기 전당대표대회를 소집하도록 되어 있으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7월 초에야 대회를 소집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7월1일부터 11일까지 한국독립당 제4차 전당대표대회가 열렸다. 대회에서는 대일작전협동안, 통일단결문제방안, 독립운동대표대회의 소집원칙안 등 많은 중요 안건들이 채택되었다고 하는데, 회의록이 보존되어 있지 않아서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조소앙이 외교보고에서 『조만간 미군이 한국에 상륙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시급하게 중국대륙에서 한국으로 진입할 준비를 갖추어야 합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을 보면,87) 긴박한 과제들이 꽤 심도 있게 논의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대회에서는 金九, 李承晩, 이청천, 조소앙 등 19명을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하고, 黃學秀, 李象萬 등 5명을 중앙감찰위원으로 선출했다. 李承晩이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된 것이 눈길을 끈다. 이어 7월16일 하오 2시에 제1차 중앙집행위원회를 열고, 金九를 중앙집행위원장, 조소앙을 부위원장으로 선출하고, 趙琬九, 趙擎韓, 嚴恒燮, 楊宇朝, 崔用德을 중앙상무집행위원으로 선출했다. 그리고 중앙감찰위원회에서는 황학수를 중앙감찰위원장, 閔弼鎬와 王仲良을 중앙상무감찰위원으로 선출했다.88) 이렇게 하여 金九는 2년 만에 중앙집행위원장에 복귀했다.
 
  이 무렵에 중국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에 접수된 정보 보고서에는 金九가 웨드마이어장군에게 보낸 편지 내용이 포함되어 있어서 매우 흥미롭다. 보고서에 따르면 金九는 웨드마이어에게 일단 미군이 조선 남부의 제주도를 해방시키면 한국 임시정부는 미군의 협조 아래 제주도에 진입하여 모든 한국인들을 지휘하여 미군의 작전에 협조할 것이라는 뜻을 미국 정부에 전해 달라고 요청했다.89)
 
  이처럼 金九나 임시정부 인사들은 이 시점에서는 미군의 한반도 상륙작전이 임박했다는 인식 아래 광복군과 임시정부의 국내 진입을 서두르고 있었던 것이다.
 
 
  OSS訓練 視察하러 西安 방문
 
  8월 초에 OSS 제1기 훈련생의 훈련이 종료되자 金九는 서안을 방문하기로 했다. OSS훈련을 마친 청년들을 격려하고, 도노반(William J. Donovan) 장군을 만나서 광복군과 OSS의 합동작전문제를 협의하기 위해서였다.90) 金九는 8월3일에 오철성에게 1주일 예정으로 서안을 다녀온다고 알리고 8월5일 새벽에 이청천, 이범석, 엄항섭 등 일행 19명과 함께 미군이 제공한 특별기편으로 서안으로 갔다. 일행 가운데에는 「독수리작전」 훈련을 받을 후보 11명도 포함되어 있었다.
 
  두곡에는 미군이 광복군 수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건물을 짓느라고 벽돌이며 목재를 나르는 트럭들이 부산하게 오가고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그날 밤 제2지대 영내에서 金九 일행의 환영회가 열렸다. 환영회 행사는 임시로 마련된 무대에서 거행되었다. 특기를 가진 훈련생들이 흥을 돋우었고 노래와 춤으로 무대는 활기에 넘쳤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이범석과 이청천까지 무대에 뛰어올라 노래를 부르면서 훈련생들과 함께 어울렸다.91)
 
  金九는 사전트에게 도노반 장군을 만나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사전트는 「독수리기지」가 건설 중이어서 문제가 있기는 하나 도노반이 기지를 방문하여 임시정부의 지위와 명예를 존중하는 뜻으로 金九와 점심이나 저녁을 같이하기를 도노반에게 권고했다.92) 이때에 도노반은 세 번째로 중국을 방문하고 있었다. 그는 「독수리작전」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도노반은 8월4일에 웨드마이어의 주선으로 蔣介石을 만나 만주와 한국에 대한 OSS의 침투계획을 지원해 줄 것을 요청했고, 장개석은 크게 기뻐하면서 무조건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도노반은 8월7일에 서안으로 왔다.93)
 
  도노반이 도착하자마자 두곡의 제2지대 본부에서 광복군과 OSS의 합동작전회의가 열렸다. 광복군 쪽에서는 金九와 이청천과 이범석이, OSS 쪽에서는 도노반과 첩보책임자 헬리웰(Paul Helliwell) 대령과 사전트가 참석했다. 그리고 김준엽과 도노반의 부관이 양쪽의 기록담당자로 배석했다.94) 회의는 마치 국가대표 사이의 회담 분위기였다. 양쪽 대표 뒤에는 각각 태극기와 성조기가 걸렸다. 도노반은 『앞으로 우리 정부와 당신네 정부가 긴밀히 일해 나가자』고 말했다. 金九는 『내가 말할 것을 장군께서 먼저 하신다』고 응수했다.95)
 
  도노반은 金九에게 「보아 작전(BOA Project)」에 서명할 것을 제안했다. 「보아작전」이란 광복군 제2지대의 선전위원회가 「독수리작전」과 병행하여 실시하기 위해 준비한 선무공작 활동계획서였다.96) 도노반은 이 계획서의 서명자로서 金九를 활용하고자 했다. 金九는 물론 이 계획에 기꺼이 동의했다.
 
  金九는 도노반과의 회담에 흡족해했다. 그는 도노반과의 접촉을 미국 정부가 임시정부를 승인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했다. 도노반도 빠른 시일 안에 「독수리」 공작원들의 한반도 침투가 실현되기를 희망했다. 金九는 벅찬 감개를 억제하지 못했다. 이곳에서 훈련을 마친 광복군 제2지대원들을 먼저 국내로 들여보내고, 부양으로 가서 그곳에서 훈련받은 제3지대원들도 국내에 침투시킬 계획이었다.97) 그런데 이날은 역설적이게도 바로 일본의 군사기지 히로시마(廣島)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날이었다.
 
  도노반과의 회담에 고무된 金九는 며칠 뒤에 도노반에게 자신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명의로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내는 장문의 전보를 전달해 줄 것을 부탁했다. 金九는 이 전보에서 〈중국에서 시작되어 지난 몇 달 동안 지속된 항일전에서의 미국과 한국의 적극적인 협조가 앞으로도 계속되고 더욱 증진되기를 우리는 희망합니다〉라고 천명했다. 도노반은 金九의 전보를 트루먼에게 전달했다. 그러나 金九의 전문을 받은 트루먼은 도노반에 대해 격노했다. 그는 8월25일에 도노반에게 〈미합중국 정부가 승인하지 않은 자칭 정부의 대표가 본인에게 보내는 메시지의 경로 역할을 한 귀관 휘하 직원들의 부적절한 행동을 시정시키기 바랍니다〉라는 편지를 보냈다. 그리고 25일 뒤에 트루먼은 OSS를 해체했다.98)
 
 
  光復軍의 OSS訓練 評價 참관
 
  이튿날 金九는 제1기생들의 훈련평가과정을 시찰하기 위해 두곡에서 동남쪽으로 40리 떨어진 終南山 훈련장을 방문했다. 산 어귀에서 차에서 내려 다시 5리가량 걸어서 훈련소에 도착했다. 마침 정오라서 훈련생들과 함께 미국 군대식으로 점심을 먹었다. 맨 먼저 냉수 여러 통을 뜰에 가져다 놓고 군대용 국그릇과 물그릇을 겸용하는 쇠그릇을 한 사람 앞에 한 개씩 나누어 준 다음 종이상자를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종이상자 속에는 과자 비슷한 것 다섯 개, 여러 가지 통조림통, 담배 네 갑, 그리고 휴지까지 들어 있었다. 종이로 싼 가루 한 봉지를 냉수에 타자 훌륭한 고깃국이 되어 점심으로 충분했다.
 
  식사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꽝!』 하는 폭발소리가 났다. 혼비백산하는 훈련생도 있었고, 이청천까지 너무 놀라서 들고 있던 점심 밥그릇을 땅에 떨어뜨렸다. 그러나 金九는 폭발소리에도 태연하게 『허허… 이게 무슨 소린고?』할 뿐이었다.99) 그것은 훈련생들의 담력을 시험하기 위한 훈련의 하나였다.
 
  식사를 끝내고 나서 金九는 심리학자 허드슨(Hudson) 박사가 이끄는 평가단의 평가과정을 시찰했다. 8월6일부터 14일까지 제1기생과 새로 훈련받을 제2기생 11명이 독수리기지와 근처 중국인 마을에서 1.6km쯤 떨어져 있는 빈 사찰에서 평가를 받았다. 평가는 하루 한 차례씩 10명을 대상으로 실시되었다. 평가는 개인이력서 작성, 문장 채우기, 기억력 테스트 등의 필기시험과 절벽오르기, 등산, 권총 조립, 폭파 등을 통한 훈련생의 적성, 리더십, 담력 등을 시험하는 실기시험으로 진행되었다.100) 허드슨 박사는 훈련생들의 시험 성적을 金九에게 보고하면서 특히 한국 청년들의 앞날이 촉망된다고 말했다.
 
  이어 청년 일곱 명을 데리고 종남산 봉우리에 올라가서 몇백 길 절벽 아래로 내려가 적의 정황을 탐지하고 올라오는 작전을 시험했다. 소지품은 단지 수백 길 되는 熟麻(숙마)밧줄[잿물에 담갔다가 솥에 찐 삼껍질을 꼬아서 만든 밧줄로서 질기고 튼튼함] 하나뿐이었다. 일곱 명의 청년들이 상의한 결과, 수백 길 되는 밧줄을 여러 번 매듭지은 다음 한쪽 끝은 봉우리 바위 위에 매고, 다른 한쪽 끝은 절벽 아래로 떨어뜨린 뒤에 그 줄을 타고 내려갔다. 그리고는 나뭇가지를 하나씩 입에 물고 올라왔다. 임무를 완수한 것이었다.
 
  교관은 매우 흡족해하면서 金九를 보고 말했다.
 
  『내가 앞서 중국 학생 400명을 모아놓고 시험했을 때에도 발견하지 못한 해답을 귀국 청년 7명에게서 찾아냈습니다』
 
  이어 폭파술, 사격술, 비밀도강술 등을 차례로 시험했다. 시찰을 마친 金九는 그날로 두곡으로 돌아왔다.101)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소식〉
 
  OSS훈련생들의 시찰을 마친 金九는 서안에 있는 중국 주요인사들을 찾아보기로 했다. 金九는 8월9일에 제1전구 대리사령장관 胡宗南 장군을 찾아갔으나 출장 중이어서 만나지 못하고 섬서성 정부를 방문했다. 성 주석 祝紹周는 金九를 반갑게 맞이하고 이튿날 저녁식사에 초대했다. 축소주는 金九가 尹奉吉의 홍구공원 폭파사건 이후에 한국청년들의 군사교육을 위탁했던 낙양군관학교 분교의 교장이었다.
 
  8월10일 저녁에 金九는 이범석 등 광복군 간부들과 함께 축소주의 집을 방문했다.102) 무더운 여름밤이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객실에 앉아서 후식으로 수박을 먹으면서 담소를 나누고 있을 때에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축소주는 『중경에서 무슨 소식이 있는 것 같습니다』하며 전화를 받으러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뒤에 축소주는 만면에 웃음을 가득 띠고 나오면서 말했다.
 
  『왜적이 항복한답니다』
 
  축소주는 마치 실신한 사람처럼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러나 金九는 축소주의 말을 듣는 순간 「아! 왜적이 항복을!」하고 마음속으로 외쳤다. 그것은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백범일지」는 이때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이 소식은 내게 희소식이라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일이었다. 수년 동안 애를 써서 참전을 준비한 것도 모두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다. 서안훈련소와 부양훈련소에서 훈련받은 우리 청년들을 조직적, 계획적으로 각종 비밀무기와 무전기를 휴대시켜 산동반도에서 미국 잠수함에 태워 본국으로 침입하게 하여 국내 요소에서 각종 공작을 개시하여 인심을 선동하게 하고, 전신으로 통지하여 무기를 비행기로 운반하여 사용할 것을 미국 육군부와 긴밀히 협의하였다. 그런데 그러한 계획을 한번 실시해 보지도 못하고 왜적이 항복하였으니, 지금까지 들인 정성이 아깝고 다가올 일이 걱정되었다.〉103)
 
  金九는 축소주에게 『선생의 음식은 이 다음 조선 금강산에 가서 갚겠습니다』라고 작별인사를 하고 돌아서 나왔다.104) 그토록 갈구하던 해방은 金九에게 이처럼 잔인하게 들이닥쳤다.●
 
 

  1) 「주미외교위원부통신」(제108호), 1945년 2월26일자, 「중경전보」. 2) 「聯合國會議 代表派遣案」, 「대한민국임시정부 자료집(6) 임시의정원 Ⅴ」, 2005, 국사편찬위원회, 151쪽. 3) 「對德宣戰案」, 「대한민국임시정부 자료집(6) 임시의정원 Ⅴ」, 150쪽.
 
  4) Department of State, 「United States Policy Regarding Korea, 1834~1950, 한림대 아시아문화연구소 자료총서 1」, 1987, 91~92쪽, 번역문은 한철호, 「미국의 대한정책: 1834~1950」, 1998, 한림대 아시아문화연구소, 81~82쪽 . 5) 胡春惠著, 辛勝夏譯, 「中國안의 韓國獨立運動」, 1978, 檀國大出版部, 260쪽. 6) 위의 책, 282쪽. 7) 같은 책, 283쪽. 8) Rhee to Stettinius, Apr. 20, 1945, Department of States, Foreign Relations of United States(이하 FRUS) 1945, vol.Ⅵ., British Commonwealth, The Far East, Government Printing Office, 1969, pp.1027~1028. 9) Rhee to Oliver, Apr. 4, 1945, 「大韓民國史資料集(28) 李承晩關係書翰資料集 1 (1944~1948)」, 1996, 國史編纂委員會, 9~13쪽.
 
  10) Robert T. Oliver, Syngman Rhee―The Man Behind the Mith, 1960, Dodd Meed & Company, pp.196~198. 11) Robert T. Oliver, Syngman Rhee and American Involvement in Korea, 1942~1960, Panmun Book Company, 1978, pp.12~13.
 
  12) Rhee to Oliver, Apr. 14, 1945, 「大韓民國史資料集(28)」, 19쪽; Robert T. Oliver, The Way It was ―― All The Way (unpublished), p.28. 13) Francesca Rhee to Oliver, Apr. 27, 1945, 「大韓民國史資料集(28)」, 20쪽. 14) 「新韓民報」 1945년 4월5일자, 「해외한족대회 경과사항」. 15) 「주미외교위원부통신」(제110호), 1945년 3월19일자, 「임시정부의 전훈」. 16) 고정휴, 「샌프란시스코회의(1945)와 얄타밀약설――이승만의 반소·반공노선과 관련하여」, 연세대 국학연구원 편, 「미주한인의 민족운동」, 2003, 혜안, 292쪽. 17) 「新韓民報」 1945년 5월17일자, 「한인대표단의 합동공작운동」.
 
  18) 「新韓民報」 1945년 5월3일자, 「국제조직회의」. 19) 「新韓民報」 1945년 5월17일자, 「한인대표단의 성명서」. 20) 「북미시보」 1945년 6월15일자. 「림정대표단의 예산」. 21) 林炳稷 , 「林炳稷回顧錄」, 1964, 女苑社, 276쪽; 李元淳, 「世紀를 넘어서――海史 李元淳自傳」, 1989, 新太陽社, 301~302쪽. 22) 「李承晩이 워싱턴 사무실에 보낸 1945년 5월11일자 편지」. 23) Gouvereau to Owen Brewster, Walter F. George, Clare E. Hoffman, 「大韓民國史資料集(28)」, 23쪽. 24) 이정식, 「해방전후의 이승만과 미국」, 「대한민국의 기원」, 2006, 일조각, 310쪽. 25) 「李承晩이 워싱턴사무실에 보낸 1945년 5월11일자 편지」. 26) 「독립」 1945년 5월30일자, 「리승만씨의 편지」. 27) Gouvereau to Owen Brewster, Walter F. George, Clare E. Hoffman, 「大韓民國史資料集(28)」, 23쪽.
 
  28) 미국무부 문서번호 500/5-1645, Walter F. George to Truman, May 16, 1945, 고정휴, 「이승만과 한국독립운동」, 2004, 연세대 출판부, 458~459쪽에서 재인용. 29) Rhee to Truman, May 15, 1945, FRUS, 1945, vol.Ⅵ., pp.1028~1029. 30) 「독립」 1945년 5월30일자, 「리승만씨의 주장」. 31) 「북미시보」 1945년 6월1일자, 6월15일자, 7월15일자, 8월1일자 참조. 32) 고정휴, 「이승만과 한국독립운동」, 2004, 460쪽. 33) The Korea American Times, Aug. 1, 1945, “Excerpts from Congressional Record: Korea”. 34) Lockhart to Rhee, June 5, 1945, FRUS, 1945, vol.Ⅵ., pp.1029~1030. 35) Department of State, United States Policy Regarding Korea 1834~1950, p.94. 번역문은 한철호 역, 「미국의 대한정책: 1834~1950」, 83~84쪽. 36) 「新韓民報」 1945년 6월14일자, 「비망록」 및 6월21일자,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성명서에 대한 각국대표 회답」.
 
  37) 「독립」 1945년 6월13일자, 「그루씨의 성명과 우리의 생각할 점」. 38) 「북미시보」 1945년 7월1일자, 「동지회 제1회 미포대표대회 결의안」. 39) 「新韓民報」 1945년 6월14일자,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연합국대표단에 비망록을 교부」. 40) Henry Chung, Syngman Rhee――Prophet and Statesman, The Korean American Council, 1946, pp.2~3. 41) Robert T. Oliver, The Way It was――All The Way, p.12. 42) 「북미시보」 1945년 6월1일자, 「리박사 화부안착」.
 
  43) Robert T. Oliver, The Way It was――All The Way, p.12. 44) Rhee to Truman, Jul. 21, 1945, FRUS, 1945, vol.Ⅵ., pp. 1031~1032. 45) Rhee to Lockhart, Jul. 25, 1945, FRUS, 1945, vol.Ⅵ., pp.1032~1033. 46) ibid., p.1035.
 
  47) Department of States, “An Estimate of Conditions in Asia and the Pacific at the Close of the War in the Far East and the Objective Policies of the Unites States”, FRUS, 1945, vol.Ⅵ., pp.556~580. 48) Stimson to Truman, Jul.16,1945, FRUS, 1945, Confrences of Berlin (Potsdam), vol.Ⅱ., 1960, p.631.
 
  49) “Agreement Regarding Entry of the Soviet Union Into the War Against Japan”, FRUS, 1945, The Conferences of Malta and Yalta, 1955, p. 984. 50) ibid,. p.606. 51) ibid,. p.348. 52) Roy E. Appleman, United States Army in Korean War: 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 Department of the Army, 1961, pp.2~3. 53) Rhee to MacArthur, Jul. 27, 1945 and Rhee to Nimitz, Jul. 27, 1945. 54) Nimitz to Rhee, Jul. 28, 1945. 55) MacArthur to Rhee, Jul. 30, 1945. 56) 「새로 정해진 韓國光復軍援助辦法 및 行文辦法을 알리는 公函」(1945.6.8), 「대한민국임시정부 자료집(10) 한국광복군Ⅰ」, 2006, 국사편찬위원회, 194쪽.
 
  57) 「韓美關係와 臨政의 最近動態」(1945.5.5), 秋憲樹編, 「資料韓國獨立運動(1)」, 1971, 延世大出版部, 432~433쪽. 58) 「韓美關係와 臨政의 最近動態」(1945.5.5), 「웨드마이어將軍에게 보낸 照會文 內容으로 因한 紛糾」(1945.5.12), 「韓國臨時政府軍務部長與外務部長紛糾續情(1945.5.12), 「最近의 臨政動態」(1945.6.8), 秋憲樹編, 「資料韓國獨立運動(1)」, 432~433쪽, 433쪽, 404쪽. 59) 胡春惠著, 辛勝夏譯, 「中國안의 韓國獨立運動」, 154쪽. 60) 「韓獨黨에 對한 民革黨의 主張」, 秋憲樹編, 「資料韓國獨立運動(2)」, 1972, 延世大出版部, 82~83쪽. 61) 胡春惠著, 辛勝夏譯, 앞의 책, 180~181쪽. 62) 「이범석과 한국청년들의 서안도착과 관련한 전문(2급 비밀)」(1945.4.26), 「대한민국임시정부 자료집(12) 한국광복군Ⅲ」, 180쪽. 63) 張俊河, 「돌베개」, 1971, 禾多出版社, 334~335쪽 ; 金俊燁, 「長征(2) 나의 光復軍時節(上)」, 1989, 나남, 503쪽.
 
  64) 「독수리작전 5월 월례보고서」(1945.5.28), 「대한민국임시정부 자료집(13) 한국광복군Ⅳ」, 2006, 국사편찬위원회, 65~67쪽. 65) 李範奭, 「光復軍」, 「新東亞」 1969년 4월호, 198쪽. 66) 太倫基, 「回想의 黃河」, 1975, 甲寅出版社, 211쪽. 67) 金俊燁, 앞의 책, 504쪽. 68) 「독수리작전 7월 월례보고서」(1945.7.31), 「대한민국임시정부 자료집(13) 한국광복군Ⅳ」, 152쪽. 69) 金俊燁, 앞의 책, 506쪽; 金光載, 「韓國光復軍의 活動硏究――美戰略諜報局(OSS)과의 合作訓練을 중심으로」, 東國大 博士學位論文, 1999, 77쪽. 70) 金光載, 「韓國光復軍의 韓·美合作訓練」, 「한국민족운동사연구(25)」, 2000, 한국민족운동사학회, 363~365쪽. 71) 金光載, 「韓國光復軍의 活動硏究」, 79~80쪽. 72) 金光載, 「韓國光復軍의 韓·美合作訓練」, 370~372쪽. 73) 金俊燁, 앞의 책, 524쪽. 74) 「김구주석에게 보낸 김학규의 진행보고」, 「대한민국임시정부 자료집(13) 한국광복군Ⅳ」, 59쪽. 75) 金學奎, 「白波自敍傳」,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2집, 1988,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602쪽; 金祐銓, 「韓國光復軍과 美國 OSS의 共同作戰에 관한 硏究」, 朴永錫敎授華甲紀念論叢刊行委員會, 「韓民族獨立運動史論叢」, 1992, 探求堂, 1501~1502쪽; 金光載, 「韓國光復軍의 活動硏究」, 98쪽.
 
  76) 金文澤, 「回顧光復軍時期」,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2집, 1988, 독립기념관 독립운동사연구소, 637~638쪽. 77) 金學奎, 앞의 글, 601~602쪽; 金文澤, 앞의 글, 658~662쪽; 金光載, 「韓國光復軍의 活動硏究」, 98~100쪽. 78) 李範奭, 앞의 글, 198쪽. 79) 金祐銓, 앞의 글, 1504쪽; 金光載, 「韓國光復軍의 活動硏究」, 100~101쪽. 80) 「重慶에 온 청년들의 구제비 지원을 요청하는 서함」(1945.2.6), 「대한민국임시정부 자료집(10) 한국광복군Ⅰ」, 2006, 국사편찬위원회, 180~181쪽. 81) 「來歸靑年을 수용키 위한 광복군훈련반 설립 의뢰」(1945.3.24), 「대한민국임시정부 자료집(10) 한국광복군Ⅰ」, 183~184쪽. 82) 「한국광복군 훈련반 설치 제의에 관한 書函」, 「대한민국임시정부 자료집(11) 한국광복군Ⅱ」, 112쪽. 83)「來歸靑年 47인을 위한 보조비 지급에 관한 函」(1945.4.10), 「대한민국임시정부 자료집(10) 한국광복군Ⅰ」, 184~185쪽. 84) 「來歸靑年 편성에 관한 구체안 연구 지시」(1945.5.11), 「대한민국임시정부 자료집(10) 한국광복군Ⅰ」, 189쪽. 85) 「蔣介石에게 보낸 협조요청 편지」(1945.5.28), 「대한민국임시정부 자료집(10) 한국광복군Ⅰ」, 191쪽. 86) 「金九주석이 요청한 훈련반 개설에 협조를 청하는 會電」(1945.6.30), 「대한민국임시정부 자료집(10) 한국광복군Ⅰ」, 198쪽. 87) 「最近의 臨政動態」(1945.7.25), 秋憲樹編, 「資料韓國獨立運動(1)」, 406쪽; 「대한민국임시정부 자료집(13) 한국광복군Ⅳ」, 2006, 국사편찬위원회, 267쪽.
 
  88) 「韓國獨立黨代表大會」(1945.7.17), 白凡金九先生全集編纂委員會編, 「白凡金九先生全集(6)」, 1999, 대한매일신보사, 241쪽. 89) 「最近의 臨政動態」(1945.7.25), 秋憲樹編, 「資料韓國獨立運動(1)」, 405~406쪽; 「대한민국임시정부 자료집(13) 한국광복군Ⅳ」, 266~267쪽. 90) 「最近의 臨政動態」(1945.8.15), 秋憲樹編, 「資料韓國獨立運動(1)」, 406쪽; 「西安훈련반 시찰을 위해 重慶으로 떠남을 알리는 편지」(1945.8.3)」, 「대한민국임시정부 자료집(10) 한국광복군Ⅰ」, 205쪽; 도진순주해, 「백범일지」, 1997, 돌베개, 396쪽. 91) 張俊河, 앞의 책, 356~357쪽; 金俊燁, 앞의 책, 525쪽. 92) 「도노반의 방문요청에 대한 추가서신」(1945.8.5), 「대한민국임시정부 자료집(13) 한국광복군 Ⅳ」, 180~181쪽. 93) Maochun Yu, OSS In China, Yale University Press., 1996, pp.228~229.
 
  94) 金俊燁, 앞의 책, 525쪽. 95) 「臨時議政院會議 第39回」, 「대한민국임시정부 자료집(4) 임시의정원Ⅲ」, 151쪽. 96) 「한국내 목표물에 대한 선무공작」(1945.8.9), 「대한민국임시정부 자료집(13) 한국광복군Ⅳ」, 185~186쪽. 97) 「백범일지」, 399쪽. 98) Maochun Yu, op. cit., p.230; 金光載, 「韓國光復軍의 活動硏究」, 164쪽. 99) 張俊河, 앞의 책, 357쪽. 100) 金光載, 「韓國光復軍의 活動硏究」, 89~90쪽; 金光載, 「韓國光復軍의 韓·美合作訓練」, 373쪽.
 
  101) 「백범일지」, 397~398쪽. 102) 李範奭, 앞의 글, 201쪽. 103) 「백범일지」, 399쪽. 104) 「臨時議政院會議 第39回」, 「대한민국임시정부 자료집(4) 임시의정원Ⅲ」, 1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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