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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世一의 비교 評傳 (66)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 李承晩과 金九

臨時政府의 左右合作과 韓人게릴라部隊 創設計劃

손세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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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左右合作으로 1942년 10월25일에 열린 제34회 臨時議政院은 초창기의 上海臨時政府를 방불케 하는 성왕을 이루었다. 회의에서는 對美外交와 관련된 韓吉洙와 李承晩문제, 建國綱領 개정문제, 光復軍 9개준승 취소문제, 臨時約憲 개정문제 등의 현안문제에 대한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또한 臨時政府를 美國으로 이전하는 문제도 심각하게 논의되었다.
 
  李承晩이 추천한 12명의 韓人靑年들이 OSS(美國戰略諜報局)의 한국인 게릴라部隊 창설계획에 따라 특수작전훈련을 받은 것은 對日戰 수행을 위한 韓美間의 軍事協力의 효시였다.
 
  李承晩은 美國政府가 臨時政府를 승인할 것을 촉구하는 決議案을 美國上下院에 제출하게 하고, 基督敎人親韓會를 중심으로 上下議員들에게 편지를 쓰는 캠페인을 벌였다.
 
  李承晩은 헐 國務長官과 루스벨트 大統領에게 韓國에 共産主義政權이 수립될 可能性을 경고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美國情報機關들은 李承晩이 「元老」로서 명예롭게 은퇴하고 젊은 指導者들에게 권한을 맡기는 것이 在美韓人들을 단결시킬 수 있다고 분석했다.
 
 

  (1) 初創期 臨時政府 때와 같은 盛旺
 
 
  1942년 10월의 제34회 임시의정원 정기회의가 다가오면서 중경 독립운동자들 사이에서는 조선민족혁명당의 임시정부 참여문제가 중대한 관심사가 되었다. 그동안 金九를 비롯한 한국독립당 간부들은 조선민족혁명당 등 좌파의 임시정부 참여요구를 단호하게 거부해 왔었는데, 중한문화협회 등을 통한 중국 국민정부의 압력 때문에 한국독립당으로서도 마냥 버틸 수 없게 된 것이었다.
 
 
  朝鮮民族革命黨의 議政院 진출 허용하기로
 
   갖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20년 넘어 임시정부의 간판을 지켜 온 한국독립당 원로들은 임시정부 활동을 방해해 오던 조선민족혁명당이 임시정부에 들어오면 임시정부가 어떤 곤경에 빠질지 모른다고 우려했다. 그러나 이미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에 편입되고 金元鳳이 광복군 부사령으로 임명된 상황에서, 조선민족혁명당의 임시정부 참여를 배제하는 것은 오히려 편협한 배타주의로 인식될 수밖에 없었다. 한국독립당 간부들은 조선민족혁명당 인사들이 임시의정원에 들어오더라도 한국독립당이 과반수 의석을 차지할 수 있고, 임시정부에 참여하고 있지는 않으면서도 임시정부에 대해 호의적인 태도를 취해 온 몇몇 인사들을 끌어들인다면 반대파를 충분히 제압할 수 있다는 판단 아래 조선민족혁명당의 임시정부 참여를 허용하기로 했다.
 
  임시정부 참여란 구체적으로 임시의정원에 들어오는 것이었다. 조선민족혁명당은 1941년에도 의정원 의장 金朋濬과 결탁하고 보궐선거를 실시하여 의정원 진출을 시도했다가 실패했던 것은 앞에서 본 바와 같다(「月刊朝鮮」 2007년 5월호, 「光復軍을 中國軍事委員會 직속으로」 참조). 그러므로 조선민족혁명당의 임시정부 참여를 허용한다는 것은 임시정부 주관으로 임시의정원 의원 보궐선거를 실시하고, 민족혁명당에도 선거에 참여할 기회를 준다는 뜻이었다. 이때의 임시의정원은 정원 57명(경기·충청·경상·전라·함경·평안 각도와 중국령·러시아령 교민 대표 각 6명, 강원도·황해도와 미주교민 대표 각 3명) 가운데 재적의원은 23명이었다.
 
 
  左右合作으로 抗日統一戰線 구축
 
  임시정부는 임시의정원 의원 보궐선거에 대비하여 「임시의정원 의원 선거규정」을 제정하여 8월4일에 공포했다. 임시정부가 「임시의정원 의원 선거규정」을 제정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의원 정원 57명은 3·1운동 직후에 독립 열기가 하늘을 찌르던 1919년 4월에 제정한 「임시의정원법」에 규정된 것이었는데, 그때에는 국내 또는 해외 동포들이 의정원 의원들을 직접 선거해서 보내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어서 특별히 선거규정을 제정하지 않았었다. 임시의정원법에는 의원의 임기가 2년으로 규정되어 있었으나, 이 규정은 사문화된 지 오래였다. 조선민족혁명당 인사들이 임시정부를 부인하면서 임시정부와 대립해 온 20여 년 동안 임시의정원은 현재의 한국독립당 간부들인 민족주의 인사들만으로 운영되어 왔다. 그러느라고 국무위원들이 임시의정원 의원을 겸할 수밖에 없었다. 金九는 국무위원회 주석이자 미주지역 대표의 의정원 의원이었다. 그러한 상황이 곧 임시정부의 혁명정부 내지 위기정부의 성격을 말해 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1942년의 임시의정원 의원 보궐선거는 단순한 보궐선거가 아니라 법률적으로는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한결 강화하고 정치적으로는 좌우합작으로 항일통일전선을 구축한다는 의미가 있었다.
 
  임시정부가 제정한 「선거규정」은 선거권과 피선거권의 범위를 임시정부의 법령을 준수하는 사람으로 제한했는데, 이에 따라 정부에서 반포한 법령을 준수하지 않는 자, 정부나 의정원을 비법적으로 변경코자 하는 행위가 있는 자, 언론이나 행동으로 정부나 의정원을 위해하거나 파괴하는 자, 적과 내통한 혐의가 있는 자 등은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없었다.1)
 
  한국독립당은 9월20일에 제2차 전당대표대회를 소집하여 임시의정원의 문호를 개방하기로 결의하고, 임시정부 주관으로 각 선거구의 형편에 따른 보궐선거를 실시하기로 했다.2) 조선민족혁명당도 임시정부 참여를 통하여 조선의용대 주력의 화북이동으로 약화된 당세를 만회하고자 했다. 민족혁명당은 한국독립당에서 탈당하여 통일동지회를 조직한 김붕준, 孫斗煥, 金鐵男 등과 조선민족해방투쟁동맹의 李貞浩 등과 연대하여 이들과의 〈초보적인 합작의 기초 위에〉 임시의정원 선거에 참여하기로 했다.3) 그리하여 10월20일부터 23일까지 11개 선거구 가운데 경기도와 러시아령을 제외한 9개 선거구에서 실시된 보궐선거에서 모두 23명의 의원을 보선했다.4) 경기도는 결원이 없어서 선거를 실시하지 않았고, 러시아령 대표는 사람이 없어서 한 명도 선출할 수 없었다. 이로써 23명이었던 의원 수는 두 배인 46명으로 늘어났다.
 
 
 
申翼熙는 방청석에서 會議 지켜봐

 
  23명의 의원보선은 1923년 1월에 개원한 제11회 임시의정원 회의 때의 26명의 의원보선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숫자였다. 그러나 1919년의 임시정부 초창기에 헌법 제정 작업을 담당했었고, 그 뒤에도 내무총장, 외무총장 등으로 활동했던 申翼熙는 경기도가 보궐선거지역이 아니었으므로 이때에도 임시의정원에 참여하지 못하고 방청석에서 회의진행을 지켜보아야 했다.
 
  선거과정은 자세히 밝혀져 있지 않으나, 한국독립당과 조선민족혁명당은 서로 상반된 주장을 하고 있다. 내무부장 趙琬九는 내무부 정무보고에서 『이번 선거결과는 양호하다고 생각합니다』라고 하여 선거과정에서 별다른 문제가 없었던 것으로 보고했으나,5) 처음으로 의정원 의원이 된 김원봉은 〈이번 의회에 신의원을 보충 않을 수 없어 보충시키는데, 우리 파 인사의 보선을 온갖 방법을 다하야 보선되지 않게 했다〉면서 한국독립당의 방해공작이 극심했다고 주장했다.6)
 
  이렇게 하여 한국독립당 이외의 다양한 정파들이 임시의정원에 참여하게 되었다. 「당선의원 명단」에 따르면, 조선 민족혁명당이 8명(김원봉, 宋旭東, 李仁洪, 金尙德, 崔錫淳, 申榮三, 王通[金鐸], 李海鳴)으로 가장 많고, 그 다음으로 한국독립당 6명(沈光植, 金鉉九, 姜弘周, 金冠五, 曺成煥, 閔弼鎬), 한국독립당 통일동지회 2명(손두환, 김철남), 해방동맹 2명(朴建雄, 金在浩), 조선혁명자연맹 2명(柳子明, 柳林), 광복군 2명(이정호, 韓志成), 기타 1명(李然皓)이 당선되었다.7) 민족혁명당 당선자들은 김원봉을 비롯한 당내 원로와 조선의용대 소속으로 광복군에 편입된 젊은 간부들이었다. 광복군으로 당선된 한지성이 실제로 민족혁명당원이었고, 〈초보적 합작〉으로 선거에 임했던 통일동지회 소속의 손두환, 김철남과 광복군으로 당선된 이정호 등이 1943년 2월에 민족혁명당에 입당하는 것으로 보아 민족혁명당 계열의 세력은 처음부터 당선자 수보다 컸었음을 알 수 있다. 김원봉은 韓吉洙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때의 보궐선거에서 민족혁명당원 13명이 당선되었다고 말하고 있다.8)
 
朝鮮民族革命黨 등도 함께 참가하여 1942년 10월25일 개원된 제34회 臨時議政院 議員들〔「白凡金九全集(5)」(1999)에서〕.
 
  『이번 議政院 회의는 국내에 들어가서 開會하기 바랐는데…』
 
  1942년 10월25일 오전 8시에 吳師爺巷 1호의 임시정부 청사에서 열린 제34회 임시의정원 회의 개원식에는 중경에 있던 의원 19명과 새로 선출된 의원 23명 전원이 참석했다. 金學奎, 安勳[趙擎韓], 李復源 등 광복군 관계로 다른 지방에 파견되어 있던 의원들은 참석하지 못했다. 부의장 崔東旿의 개회사는 이 무렵의 한국독립운동자들의 시국전망과 그것에 따른 감회가 어떠했는지를 보여 준다.
 
  『작년 우리의 희망이 이번 의정원 회의는 국내에 들어가서 개회한다는 것이었는데, 오늘날 또다시 이곳에서 열게 되어 마음속으로 대단히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번 세계대전이 날로 긴장미를 더하고 있는 동시에 민주전선도 점차 강화되고 있습니다. 우리도 광복군을 건설한 후로 나날이 그 지반이 견고해지고 우리의 임시정부도 국제무대에까지 올라 우리의 앞날에도 서광이 비쳐지는 오늘입니다.…
 
  오늘 이 모임은 1919년 우리 임시정부 설립 이래 최초로 성왕을 이룬 것으로 느껴집니다. … 금번에 당선되신 新到議員은 과거 오랫동안 투쟁전선에서 씩씩하게 싸워 왔던 투사이며 그 투쟁 가운데에서 얻으신 경험이 풍부하시므로 이번 이 회의에 많은 공헌과 도움이 있을 줄 믿습니다.…』9)
 
  최동오의 개회사에 이어 축사에 나선 金九는 단결을 강조했다.
 
  『나는 본래 말주변이 없기 때문에 나의 마음 가운데에 있는 말을 다 표현해 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이 회의가 성왕을 이루게 되어 마음속 진심으로 기쁨을 이기지 못하는 바입니다. 우리 운동은 3·1운동 이래 많은 분열 상태로 오늘 이곳에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부르짖고 있는 통일문제는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가 정성으로 임무를 다하는 데에서 해결될 것입니다. 내가 오늘 이곳에서 느끼는 바는 이번 새로 선거된 신도의원이 다 지사로서 망라되어 퍼그나 성왕을 이루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하며, 더욱 나의 임무상으로 보아 기쁨을 마지않는 바입니다. 우리가 이 회의에서 참 좋은 결과를 얻으려면 두 가지를 해야 합니다. 첫째 대내로 정성 단결할 것, 둘째 대외로는 우리의 통일문제는 우리의 정성합심으로써 국제적 지위를 획득해야 되겠다 하는 것입니다.…』10)
 
  의원을 대표하여 답사에 나선 趙素昻은 이제 지난날의 무수한 방법의 대립, 단체의 대립, 각 당파의 대립이 임시의정원으로 통합되었다고 강조했다.11) 이튿날 사망한 宋秉祚 후임으로 洪震을 의장으로 선출하고, 10월27일 회의에서는 4개 분과위원회를 설치하기로 하여, 10월30일 회의에서 각 당파를 망라한 20명(각 분과위원회별로 5명)의 상임위원을 선출했다. 이어 의정원과 임시정부 각부의 정무보고를 접수하고, 10월31일 회의부터 의원 보선과 선거규정에 관한 문제, 대미외교와 관련된 한길수와 李承晩문제, 건국강령 개정문제, 광복군 9개준승 취소문제, 임시약헌 개정문제 등 현안문제에 대한 열띤 질의응답이 벌어졌다. 제34회 임시의정원 회의부터는 비교적 잘 정리된 속기록이 보존되어 있어서 회의내용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韓吉洙는 국제적 第五縱隊

 
  10월31일 회의부터 대정부질문이 시작되었다. 외교문제 질의에서 조선민족혁명당의 젊은 이론가 王通 의원이 먼저 한미협회 회장 크롬웰(James H. R. Cromwell)과 헐 국무장관 사이에 오간 편지문제를 들고 나왔다. 한길수의 문제제기가 임시의정원에서까지 논란을 불러일으킨 것이었다. 한길수는 자기가 발표하는 글들을 김원봉에게 보내고 있었다.
 
  조소앙은 크롬웰은 우리에게 호의를 가지고 미국 시민 자격으로 국무장관과 논쟁을 벌인 것 뿐이므로 우리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고, 이것을 가지고 파동을 일으킨 것은 우리 내부의 대립적 단체의 소행인 것 같다고 답변했다. 그러자 한길수의 활동에 대한 다른 의원의 질문이 이어졌다. 조소앙이 답변을 애매하게 하자 金九가 나섰다.
 
  『한길수의 신분에 대하여 계통적으로 보충을 하겠습니다. 그 사람은 하와이에서 일본영사관에서 공작하다가 미국 의원단이 하와이에 왔을 때에 일본인의 비밀을 폭로했습니다. 무엇을 원하느냐는 미국 의원단의 물음에, 그는 독립을 원하는데 화평적 수단으로 동경에 가서 청원해서 하겠다고 했습니다. 워싱턴으로 간 뒤에 한길수의 사진까지도 파는 상점이 생기게 되었고, 그 뒤에 중한동맹단을 그가 조직했는데, 이것은 자기 자신이 차모 등과 합하야서 조직한 바, 9개 단체가 연합해서 활동하며 로스앤젤레스와 워싱턴 등 각지에서 지부를 두고 사무를 보게 해서 그를 국방봉사원이라고 했습니다. 한길수는 이것으로 인하여 出風□를 하게 되어 곧 국방봉사원의 명의를 취소당했습니다. 이 한길수란 사람은 국제적 제5종대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한길수에 대한 金九의 이러한 인식은 李承晩의 정보에 따른 것이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국제적 제5종대〉란 국제간첩이라는 뜻이다. 왕통이 金九의 말을 반박했다.
 
  『한길수에 대하여 좀더 자세히 금후에 말하겠소이다. 재미한인들이 불연합관계로 물론 분규가 있었으나, 그는 현재나 과거에나 광복노력을 하고 있는 이상 좀더 신중히 말하면 좋겠습니다』
 
  그러자 嚴恒燮이 金九의 말을 보충했다.
 
  『미주에서 온 통신을 보면 한길수는 임시정부 승인을 방해하였고 각 신문에도 그 사람의 사실을 폭로하여 겨우 미주한교 중 백분의 2가 그를 지지한다고 하였고, 또 한길수는 일본 스파이이며, 그밖에 금년에 각 신문상에 발표된, 즉 우리 국내폭동, 도조 히데키(東條英機)암살의 건 등 모호한 사실을 발표한 것이 있습니다. 또 馬超俊이 저더러 한길수가 발표하는 소식은 중국쪽 정보에 의하면 불확실하므로 곧 부인을 발표하라고 요구한 적도 있었소』
 
  마초준은 중국국민당의 중앙조직부차장이었다. 왕통이 말했다.
 
  『방금 백분의 2 인민이 지지한다고 했는데, 엄의원이 가보지 못한 이상, 또한 피차 서로 불리한 점을 말하는 만큼 그것에 대해서는 좀더 연구해 봅시다』
 
  『백분의 2라는 숫자는 잡지에 의하여 말한 것입니다』
 
  엄항섭의 말에 이어 민족해방동맹의 박건웅이 말했다.
 
  『우리는 한길수의 인격을 승인 불가능한 것입니다』
 
  논란이 계속되자 조소앙이 정부에서는 한길수에 대한 조사가 불충분하므로 앞으로 다시 알아보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왕통은 물러서지 않았다.
 
  『한길수가 임시정부 승인을 방해했다는 사실은 잘 조사해야 하겠고, 제5종대라는 말은 신중히 합시다. 한길수가 제5종대라면 우리도 동일하오』
 
  같은 민족혁명당의 최석순이 왕통의 말을 거들었다.
 
  『한길수는 한 개인인 만큼 정부와 관계가 없으니 의회에서 거론할 바가 못 됩니다. 과거에 이박사의 맨대토리(위임통치) 문제로 분열이 있었으니, 곧 개인문제는 정지합시다』
 
  조완구가 한길수가 제5종대라면 우리도 같다고 한 왕통의 말을 즉각 취소하라고 요구했다. 왕통은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취소했다.
 
  『한길수도 광복운동자의 한 사람인 이상 우리도 역시 광복운동자입니다. 그러나 의장이 실언이라고 결정하니 본 의원은 이를 취소하는 바입니다』12)
 
  이러한 논란은 李承晩과 한길수의 관계가 그대로 중경 독립운동자 사회에 연계되어 있었음을 보여 준다.
 
 
  金元鳳이 李承晩의 非暴力主義 비판
 
  이승만의 대미외교가 논란된 것은 이틀 뒤인 11월2일 회의에서였다. 김원봉이 문제의 크롬웰의 편지와 관련하여 李承晩의 외교정책을 거론했다. 그는 은근히 조소앙을 추어올리면서 말했다.
 
  『외교부의 보고에 근거하여도 정부의 외교성적을 잘 알 수 있고, 또 중한문화협회 할 때에 중국 각 요인은 한국임시정부를 사실상 승인했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보더라도 우리 외교의 성공이요, 또 조부장의 공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미주에서는 李承晩 박사가 크롬웰과 상의하여 미국 헐 국무장관에게 보낸 서신 중에 〈미국이 한국 정부를 승인하기 전에는 한국은 연맹국과 함께 작전하지 않겠다〉는 의사의 어구로 인하여 헐의 소위 「경고」가 통신사를 통하여 전세계에 선포되었으니, 이것은 우리 외교상 일대 잠시적 좌절입니다. 또 李박사는 임시정부를 대표하여 미국에서 활동하면서 개인적인 말로나 혹은 「태평양주보」에 비폭력주의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정부는 무슨 보장이 있다고 생각합니까?』13)
 
  조소앙이 답변했다.
 
  『만일 李박사가 이 편지를 발표하였든지 혹 李박사가 크롬웰을 시켜 그와 같은 편지를 보내게 했다면 물론 정부는 李박사를 견책하여야지요. 물론 李박사의 정견은 나도 반대하는 바입니다. 만일 그가 총사령이 된다면 나는 반대하겠지요. 그러나 외교관 되는 데에는 별 관계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크롬웰과 헐 사이의 편지에 대한 한길수의 왜곡된 선전은 이처럼 당치 않은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그리고 실상에 대하여 확신이 없는 조소앙은 이렇듯 답변을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이어 손두환이 질의했다.
 
  『크롬웰 서신의 내용이 한국인과 우리 정부의 의사가 아니라는 것을 해내외에 선포했습니까?』
 
  『헐에게는 전보로 성명했습니다』
 
  『비폭력주의를 신앙하는 李박사로서 어떻게 무기대여법에 의한 원조를 요구할 수 있습니까?』
 
  엄항섭이 나섰다.
 
  『李박사는 최근에 와서 확실히 사상이 바뀌었고, 또 화평의 멸망이라 하는 제목으로 문장을 발표한 일이 있습니다』14)
 
 
  「建國綱領」의 土地國有化政策 논란
 
  제34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조선민족혁명당이 가장 역점을 두고 제기한 문제의 하나는 건국강령 개정문제였다. 조선민족혁명당 의원들은 먼저 건국강령을 임시의정원의 결의 없이 국무위원회가 일방적으로 공포한 것은 위헌이 아니냐고 따졌고, 건국강령의 기초자인 조소앙은 그것은 약헌 제26조에 규정된 국무위원회의 직권의 하나(광복운동방략과 건국방안의 의결)에 속하는 행위라고 답변했다. 건국강령문제가 야당 의원들의 심기를 더욱 불쾌하게 만든 것은 보궐선거를 실시할 때에 건국강령의 준수를 후보자 등록조건으로 강제한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민족혁명당도 건국강령의 폐지를 주장하지는 않았다. 그 필요성은 인정하고, 일부 내용을 개정하여 임시의정원의 결의를 거쳐서 시행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조선민족혁명당이 건국강령의 내용 가운데에서 문제삼은 것은 삼균주의에 기초한 사유재산보호와 토지국유화 문제였다. 1941년에 임시정부가 공포한 「대한민국 건국강령」은 대생산기관과 토지 및 광산 등을 국유로 하고 소규모 또는 중등기업은 私營으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제34회 임시의정원회의에서 있었던 이 문제에 대한 논란의 쟁점은 명확하지 않다. 속기록에 따르면, 孫斗煥 의원과 조소앙 정부위원 사이의 질의응답은 다음과 같았다.
 
  손두환 『토지국유문제와 같은 중대문제는 확실히 의회를 통과해야 하겠소』
 
  조소앙 『임시약법을 본다면 토지국유한다는 것이 없으나, 조국을 광복하고 사회를 개혁할 책임이 있는 것은 아직 우리 약법에 있음을 알아야 되겠소』
 
  손두환 『약법상 평등은 법률상 적용할 것이요, 토지국유는 정부에서 프로그램식으로 한다면 불법이오』
 
  조소앙 『물론 그렇습니다. 실행시에 대내 대외 정세 여하에 의하여 실행될 것입니다. 건국방안은 광복 후에 할 것이고 約法은 외지운동 당시에 적용되는 것이오』15)
 
  이러한 애매한 논쟁은 속기록의 부정확성 때문이기도 하겠으나, 기간산업과 토지의 국유화 문제에 대한 조선민족혁명당의 정책이 불확실한 점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이때의 의정원 회의를 속기록으로 보도했던 조선민족혁명당 기관지 「우리通信」은 손두환과 조소앙의 이때의 질의응답은 생략하고 있다.16)
 
  조선민족혁명당은 1935년 7월의 창당 때에 발표한 강령에서는 〈토지는 국유로 하여 농민에게 분급한다〉17)고 하여 토지국유화의 원칙을 분명히 천명했었다. 그러나 조선의용대의 주력이 화북으로 이동한 뒤에 열린 1941년 12월의 제6차 전당대표대회에서 발표한 강령에서는 〈토지혁명을 힘써 행하며 장차 경작지를 소작농민에게 분급한다〉18)라고 하여 토지국유화 항목을 삭제했다. 그 뒤에 1943년 2월의 제7차 전당대표대회에서 발표한 강령과 1945년 해방 직후에 발표한 강령에서도 1941년 강령을 바꾸지 않았다.19) 조선민족혁명당이 1941년 강령에서 왜 토지국유화정책을 삭제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제34회 의정원 회의가 끝난 직후에 열린 약헌개정위원회 회의 석상에서 민족혁명당의 申榮三 의원이 건국강령의 토지국유화 강령에 대해 『토지국유 강령은 전 민족의 동원에 방해됩니다』라고 주장하고, 이에 대해 조소앙이 『자본주의사회를 건설한다면 따라올 사람이 하나도 없어요』라고 반박하고 있는 것20)은 엄밀히 톺아볼 만한 대목이다.
 
 
  與野가 함께 「光復軍 行動準繩 取消案」 채택
 
  11월3일 회의에서 李然晧 등 16명의 의원이 「광복군 9개조항조건 취소안」을 제출하면서 여야당을 막론한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조선민족혁명당은 광복군 9개준승을 접수한 정부의 책임을 추궁했다. 조소앙도 정부의 역량이 불충분하여 그렇게 되었다고 변명하고, 의회와 정부의 합작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광복군 총사령 李靑天은 남의 땅에서 군사활동을 해야 하는 어쩔 수 없는 정세에서 부득이하게 접수한 사실을 설명하고 나서, 9개조항은 확실히 가혹한 조항이기 때문에 이번 의회에서 결정되면 고칠 수 있다고 말했다. 다시 책임문제가 거론되자 토론을 지켜보던 金九는 일어났다.
 
  『나는 며칠 동안을 참으로 흥미 있고도 기쁘게 됩니다. 다시 주석의 자격으로 말합니다. 본 제안 문제의 책임은 하늘을 보고 땅을 보아도 본 주석에게 있습니다. 현재 광복군 9개항을 취소하여야 되겠다는 것은 전 의원 의견이 동일할 줄 믿습니다. 제가 혁명운동에 참가한 이래 민족을 해하려고 해본 적이 없다는 것은 여러분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러나 국가대계를 불완전하게 한다면 공의 여하를 막론하고 책임져야 할 것입니다. 이것을 세상에 발표하여 가지고 다시 좋은 광복군을 성립시킴이 좋겠소』21)
 
  이처럼 9개준승 취소의 필요성에 대해 한국독립당과 조선민족혁명당의 의견이 일치된 가운데 이연호 의원 등 16명이 제출한 「9개준승 취소안」을 수정하기로 하고, 김상덕, 손두환, 안훈, 유자명, 公震遠의 5명을 수정위원으로 선출했다. 그리하여 11월9일 회의에서 다음과 같은 수정안이 채택되었다.
 
  〈임시정부는 중화민국 국민정부에 향하야 현하 중화민국 국민정부 군사위원회에서 한국광복군에 暫用(잠용)하는 소위 행동준승 9개조항을 최단기간에 폐기하고 국제간 절대평등과 互助(호조)의 입장에서 우의적으로 적극 원조하기를 요구할 것이며, 또한 중국 영토내에서 침략국가에 대하야 공동작전을 계속하는 기간 내에 있어서는 광복군의 지휘를 임시로 태평양전구 중국구 사령장관에게 위임할 것.〉22)
 
 
  約憲 고쳐 原籍地별 選擧制度 폐지해야
 
  제34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가장 논쟁이 뜨거웠던 안건은 임시약헌 개정문제였다. 11월4일 회의에서 최동오, 엄항섭 등 26의원이 약헌개정 위원 9인을 선출하여 약헌을 개정하게 한 뒤에 차기(명년) 의회에 개정안을 제출하게 하자고 한 제의를 중심으로 토론이 전개되었다. 한국독립당에서 약헌개정문제를 먼저 제의한 것은 조선민족혁명당이 이 문제를 들고 나올 것이 틀림없으므로 기선을 잡기 위해서였다.23) 한국독립당은 현행 약헌이 현실에 맞지 않는 점이 많은 것은 인정하면서도 약헌을 단시일 안에 고치기는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기초위원을 선정하여 충분히 논의한 다음에 내년에 고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민족혁명당은 약헌개정 문제를 〈우리 운동을 앞으로 발전시키고 군중과 연계를 확보하느냐 아니하느냐〉를 판가름하는 핵심문제로 인식하고 반드시 올해 안에 고쳐야 한다고 주장했다.24) 조선민족혁명당이 요구한 약헌개정의 핵심은 임시약헌 제2장 제4조 제2항(내지 각 선거구에서 선거할 수 없을 때에는 각 해당 선거구에 원적을 두고 임시정부 소재지에 僑居하는 광복운동자가 각 해당 구 선거인의 선거권을 대행할 수 있음)을 고치는 문제였다. 이 조문에서 규정한 〈광복운동자〉의 개념도 모호한데다가, 선거는 중경에 거주하는 동포들이 그들의 원적지에 따라 실시해야 하기 때문에 중경 이외의 전방과 후방, 미주 등에 있는 광범위한 동포와 광복운동자, 무장대오는 선거에 참여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이 규정을 폐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대안으로 조선민족혁명당은 1) 세 개의 선거구(전후방 적후에 있는 각종 무장대오를 위한 군대특별선거구, 임시정부 소재지 특별선거구, 미주와 러시아령 등의 보통선거구) 설치, 2) 각지 선거인의 등기, 3) 의원 임기 규정의 제정을 제안했다. 또한 조선민족혁명당은 정부의 기구에 각 당파의 인사를 골고루 참가시켜 임시정부를 실제 정형에 맞도록 개편하고, 부장제를 위원제로 고칠 것을 주장했다.25)
 
  약헌개정문제를 두고 한국독립당과 조선민족혁명당 사이에 열띤 논쟁이 벌어졌다. 그런데 임시약헌개정안이 제출된 11월4일 회의의 속기록을 끝으로 임시의정원 속기록이 중단되어 있다. 속기록이 중단된 이유는 분명하지 않으나, 약헌개정문제를 둘러싸고 한국독립당과 조선민족혁명당의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된 것으로 보아 속기록을 작성하지 않았을 개연성이 크다. 그리하여 11월5일부터 11월19일의 폐원식까지의 회의 경과는 조선민족혁명당의 기관지 「우리通信」에 실린 「會場 速寫」의 기록과 「대한민국임시정부공보」를 통하여 짐작할 수밖에 없다.
 
  한국독립당은 시간적으로 이번 의회에서 약헌을 개정하기는 어렵다고 주장했으나 조선민족혁명당은 그것은 이유가 되지 않는다고 반박했다. 이번 의회 중에 약헌을 개정해야 내년 의회에 만주나 미주에서 신헌법에 의거하여 선거된 의원들이 참여할 수 있고, 그렇게 해야 비로소 임시정부는 인민의 토대 위에 건립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조선민족혁명당은 명년에 약헌을 수정하자는 것은 내명년까지 임시정부가 중경에서 유망생활을 계속할 것을 상상하는 비관주의적 태도라고 힐난했다.26)
 
 
  中韓文化協會가 議員들 초청하여 團結 촉구
 
  11월10일은 제4,274주년 단군건국기원절이었다. 이날의 휴회를 이용하여 중한문화협회가 의정원 의원 전원을 초청하여 다과회를 열었다. 좌우합작을 이룬 임시의정원이 생산적으로 운영되기를 바라는 뜻에서였다. 이 자리에는 중국 쪽에서도 孫科, 馮玉祥(풍옥상), 吳鐵城, 마초준, 周恩來 등 많은 인사들이 참석했다. 손과 회장은 임시의정원 의원을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을 초청한 것은 한국혁명동지들이 합작 단결하여 하루 속히 독립과 해방을 획득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라고 전제하고, 중국이 최근 5년 동안 항전할 수 있는 것도 국민당과 공산당이 단결했기 때문이라면서 한국독립운동 단체들의 단결을 촉구했다. 또한 주은래는 한국 인민은 중국을 위해서는 용감히 피를 흘렸으면서도 정작 조선혁명과 복국과 같은 자신들의 문제에 대해서는 방법의 차이로 합작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날카롭게 지적했다.27) 金九, 홍진, 조소앙 등이 차례로 답사를 했다. 金九는 『한국 임시의정원의 회의 정신은 넉넉히 한국의 통일을 표시할 수 있다』고 말했고, 조소앙은 『분열하면 망하고, 단결하면 존재한다』는 격언을 인용하면서 한인의 단결을 표시했다.28)
 
  중국 인사들의 단결 촉구는 효력이 있었다. 11월11일에 속개된 회의에서 홍진 의장은 어제 다과회에서의 중국 인사들의 연설을 상기시키면서 『뼈에 사무치고, 마음에 찔리는 이 말을 들은 우리 의원들은 누구 하나 스스로 반성하고 결심하지 않은 자 없었다』면서 단결을 호소했다. 홍진 의장의 간곡한 연설로 회의장은 숙연해졌다.29)
 
  회의는 약헌개정기초위원 9인을 선출하여 앞으로 6개월 이내에 개정안을 작성한 뒤에 임시의회를 소집하여 통과시키기로 타협하고, 11월18일 회의에서 조소앙을 위원장으로 하는 9인의 약헌개정위원을 선출했다.30) 이를 당파별로 살펴보면, 한국독립당 4명(조완구, 조소앙, 차이석, 안훈), 민족혁명당 3명(최석순, 김상덕, 신영삼), 조선민족해방동맹 1명(박건웅), 조선혁명자연맹 1명(유자명)으로 정당별로 고루 안배되었다.
 
 
  (2) 臨時政府를 美國으로 옮기기로
 
 
  형식상으로는 중경에 있는 한국독립운동 단체들이 모두 참여하여 초창기의 상해 임시정부를 방불케 하는 성황을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임시정부의 처지는 절박했다. 그리하여 金九를 비롯한 임시정부 간부들은 여러 가지 고려에서 임시정부를 미국으로 이전하는 문제를 심각하게 검토했다.
 
 
  非公式座談會로 臨時政府 移轉問題 논의
 
  임시정부 이전문제가 의정원 회의에 정식으로 상정된 것은 11월14일 회의에서였다.31) 이날 회의는 방청을 금지하고 속기록 작성을 생략한 가운데 오전과 오후에 걸쳐 공식좌담회로 열렸다. 일요일인 15일의 휴회에 이어 16일과 17일에도 비공식좌담회로 논의된 것을 보면 많은 이야기가 오간 것 같다.32) 계속해서 방청을 금지하고 속기록 작성도 생략했기 때문에 상세한 회의내용이 전해지지 않으나, 회의 분위기가 얼마나 심각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김원봉은 미주의 한길수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한국독립당이 임시정부를 미국으로 옮기자고 주장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현 국무위원으로는 중국 당국에 대해서 외교가 실패이다. 중국 당국은 삼민주의를 접수해야 임정을 승인하겠고 금전도 1천만원을 공급하겠다 한다. 그러니 우리 국무위원으로는 이것을 접수할 수 없고, 이런 요구를 접수하지 않고는 중국의 원조를 쟁취할 방법이 절대적으로 없다. 그러나 임정을 미국으로 옮긴다면 미국은 자유의 나라이니 이런 요구도 없을 것이요, 또 화평회의가 개최될 시는 워싱턴이 중심지가 될 것이니 정부가 그곳에 가서 미리 활동하는 것이 좋다는 것이며, 정부를 옮기는 방법은 이곳에 있는 임정 국무위원이나 의정원 인원은 가지 않고 이번 의정원에서 재미동포 중 국무위원을 선출해서 전보로 그곳 연합회에 통지해서 그곳서 정부를 조직케 하고, 그곳 지시에 의하야 이곳에는 군사기구만을 두자는 주장입니다.〉
 
  그러면서 김원봉은 한국독립당이 이런 주장을 낸 동기를 자신들의 대중국외교의 실패에 따른 감정적인 대응이라고 보았다.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에 편입된 뒤에 중국군 당국에서 총사령인 이청천이나 광복군 제2지대보다 부사령인 자신과 조선의용대원으로 구성된 제1지대를 더 중시하고, 민족혁명당에도 한국독립당과 똑같이 원조를 하게 되자, 종래와 같이 민족혁명당을 공산당이라고 공격하던 것이 더 이상 효력을 발휘할 수 없게 되어 이를 모면하고 도피하기 위한 방안으로 제안했다는 것이었다. 또 하나는 제34회 의정원 회의에서 민족혁명당이 대행선거제를 폐지하고 직접 선거를 주장하자, 이론적으로는 그것을 반박할 수 없게 되고 장차 직접 선거를 실시하게 되면 한국독립당이 보선될 희망이 적다는 우려에서 자신들의 세력이 우세한 미국으로 정부를 옮기자고 주장한다는 것이었다.33)
 
 
  激論 끝에 臨時政府 移轉問題는 보류하기로
 
  11월3일 金九가 李承晩에게 보낸 다음과 같은 전보는 이 무렵에 임시정부관계자들이 임시정부를 미국으로 이전하는 문제를 구체적으로 검토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우리는 임시정부 이전을 검토하고 있음. 이 문제가 해결되기 전에는 金乎와 田耕武가 와서는 안 됨.〉34)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전체위원회의 결의에 따라 중경특파원으로 선정된 연합위원회의 집행위원장 김호와 하와이 의사부의 전경무는 이때에 미국정부에 출국허가를 교섭하기 위하여 워싱턴에 와 있었다.
 
  조소앙도 12월2일에 미국대사관 직원을 만나서 중경에서는 한국인들의 활동에 대한 제약이 심해서 정부를 워싱턴으로 이전할 것을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다.35)
 
  중국국민당은 임시정부이전 문제의 도화선이 된 것은 광복군 9개준승 문제라고 파악했다. 중국정부와의 9개준승 철폐 교섭이 제대로 안 되면 현 집행부는 인책사퇴하고 李承晩에게 연락해서 정부를 이전하는 형식으로 그곳에서 임시정부를 새로 조직하게 한다는 것이었다.36)
 
  그러나 한편으로 임시정부가 미국이전문제를 제기한 것은 광복군 9개준승을 폐기하기 위해서 취한 일종의 충격요법이었다는 설도 있다. 중국 국민당과의 교섭실무를 담당했던 朴贊翊의 전기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중국 군사당국의 실무자들을 설득하기에 지친 金九는 박찬익과 함께 주가화를 찾아가서 불쑥 서류 봉투를 내밀었다. 여권신청서류였다.
 
  주가화는 놀라면서 만류했다. 金九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중국은 여러 해 동안 항일전쟁을 수행하느라고 수요가 막대하지 않습니까? 거기에 우리 임시정부가 많은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해 달라고 요청하기가 우리로서도 부담스럽습니다. 그래서 미국으로 건너가서 독립운동 자금을 요청해 보려고 합니다. 미국에는 우리 동포들도 많으니까 모금도 가능할 줄 압니다』
 
  주가화는 말했다.
 
  『꼭 미국에 가셔야만 합니까? 제가 힘을 써서 좋은 결과가 있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십시다』
 
  이 일이 있은 뒤 중국 정부와 외교가에는 임시정부가 미국으로 건너가려 한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얼마 뒤에 주가화로부터 연락이 왔다. 중국 정부에서 한국 독립운동에 필요한 자금을 충분히 제공하고, 임시정부 쪽이 불만을 갖고 있는 광복군 9개준승을 폐지하기 위한 실무교섭을 진행하라는 蔣介石의 언질이 있었다는 것이었다.37)
 
  의정원에서는 며칠 동안 격론을 벌이다가 결국 회의 마지막 날인 18일 회의에서 임시정부 이전문제는 보류하기로 결정했다.38)
 
 
  金奎植, 張建相 등 4명을 國務委員으로 選任
 
左右合作으로 1942년 11월에 새로 國務委員으로 선출된 張建相.
  조선민족혁명당을 비롯한 여러 정치그룹이 임시정부에 참여함에 따라 임시정부 조직도 확대될 수밖에 없었다. 1월6일 회의에서는 李復源 등 5명의 의원이 제출한 임시정부의 각부 부서에 차장제를 채용하자는 의안이 가결되고, 11월12일 회의에서는 李始榮 등 12의원이 제출한 국무위원 4인 증설안이, 11월13일 회의에서는 현재의 5부 이외에 학무, 교통, 선전, 생계의 4부 증설안이 가결되었다. 그리고 11월18일 회의에서 金奎植, 柳東說, 張建相, 黃學洙를 국무위원으로 선출했다.39) 김규식은 이때까지도 사천성 成都大學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일찍이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에 가담하여 1921년에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 제3차 대회에 참석하고 의열단 고문으로 활동했던 장건상은 1939년에 상해에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었다. 그는 3년 동안 옥고를 치르고 석방된 뒤에 다시 국내를 탈출하여 만주와 상해를 거쳐 1941년 가을에 홍콩에서 항공편으로 중경에 왔다. 장건상이 중경에 나타나자 金九는 일본경찰의 감시망을 어떻게 피해 왔느냐면서 그를 의심했다. 장건상이 자신의 탈출과정을 소상히 말하자 金九는 오해를 풀었다. 장건상은 김규식과 함께 좌파와 우파 양쪽에서 신뢰받는 인물들이었으므로 한국독립당과 조선민족혁명당의 중재를 위해 노력했다.40)
 
  임시정부 국무위원에 선임된 김규식이 부인과 함께 중경에 도착한 것은 1943년 1월10일이었다. 중경에 도착한 김규식은 다음과 같은 요지의 담화를 발표했다.
 
  『내가 늘 느끼는 것은 재미한인이다. 재미한인은 이왕부터 충성을 다하여 임시정부를 봉대하였고 지금까지 변치 않고 임시정부를 봉대하니 이것이 내가 재미한인을 느끼는 것이다. 나는 항상 재미한인을 생각하고 잊지 아니한다. 나는 이제 교편을 던졌고 나의 여생을 가져 나라에 바치고 임시정부에 충성을 다하기로 결심하였다. 일체의 과거사를 다 쓸어버리고 임시정부에 들어와 모든 동지들과 합작하기를 원하며 재미한인에게 대해서는 임시정부를 위하여 노력하기를 바란다. 나는 정식 임명을 받기를 기다려 다시 공중에 대한 발표가 있을 터이다』41)
 
  김규식이 중경에 도착한 뒤에 金九는 몇 차례 그를 은밀하게 만났다. 김규식이 통일문제에 힘써 줄 것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마지막 회담을 끝내면서 김규식은 한길수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중-한민중동맹은 상해에서 조직되어 자기를 주미대표로 임명했었는데, 미국에 갔다가 돌아오면서 한길수를 자기가 없는 동안의 대리로 임명했었으나, 지금은 그 조직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金九는 김규식이 한 이야기를 2월15일에 편지로 李承晩에게 알렸다.42)
 
  1월20일에 김규식은 임시정부 선전부장에, 장건상은 교육부장에, 유동열은 교통부장에 임명되었다.43) 3월4일의 국무회의에서는 각부 부장의 추천에 의해 내무부 차장에 金星淑, 외무부 차장에 신익희, 군무부 차장에 尹琦燮, 법무부 차장에 李顯洙, 재무부 차장에 申桓, 교통부 차장에 김철남, 학무부 차장에 柳興湜(유흥식)이 각각 임명되었다.44) 이렇게 하여 임시의정원에 이어 임시정부도 한국독립당 일색에서 벗어나서 좌우합작에 의한 통일전선 정부를 이루었다.
 
  그러나 이때에 李承晩은 金九에게 편지로 이들 좌파인물들을 임시정부에 들이지 말 것을 권고했다. 李承晩은 金九가 자신의 권고를 듣지 않는 것은 그가 고립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1945년 6월11일자 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1942년 12월7일 金九는 중경의 임시정부 내각에 일부 공산주의자들을 받아들였다. 그때에 나는 金九에게 그렇게 하지 말 것을 권고했으나, 그는 아마 이를 저지할 수 없었던 것 같다. 이 무렵 蔣介石은 중국 공산주의자들의 합작요구를 미국이 지지함으로써 큰 난관에 봉착해 있었다. 宋子文을 포함하여 실권을 쥐고 있는 중국의 고위관리들은 장개석에게는 불안한 사태를 조성하고 있었다.… 그 결과 중국 정부 안에서의 장개석과 한국 정부 안에서의 金九 양인은 고립되고 있었다.〉45)
 
 
  金元鳳의 光復軍 副司令 취임과 朝鮮民族革命黨 改組代表大會
 
  조선민족혁명당은 제34회 임시의정원 회의 결과에 대해 〈원만한 결과를 회득하였다〉46)고 자평하고 임시정부 옹호의 입장을 명확히 밝혔다. 김원봉은 12월1일에 중경 라디오 방송을 통하여 국내외 동포들에게 독립군에 가담하여 조국의 해방을 위해 분투할 것을 호소한데 이어, 12월5일에는 金九 등이 배석한 가운데 그동안 취임을 미루고 있던 광복군 부사령에 정식으로 취임했다.47)
 
  또한 조선민족혁명당은 쇠퇴해 있는 당세의 만회를 위해 힘을 집중했다. 2월15일부터 20일까지 열린 조선민족혁명당 제7차 전당대표대회에서는 「4개당 통일 협정안」을 통과시키고 조선민족혁명당을 개조하는 형식으로 이정호, 金仁哲 등의 조선민족해방투쟁동맹, 김붕준, 손두환 등의 한국독립당 통일동지회, 文逸民, 申基彦 등의 조선민족당해외전권위원회의 세 군소그룹을 흡수하여 〈4당 통합〉을 했다. 대회에서는 또 앞으로의 공작 방침으로, 1) 민족운동의 통일·확대·공고화, 2) 국내 및 적후 공작 강화, 3) 임정 옹호, 4) 광복군 확대 등을 결의하고, 김규식, 김원봉 등 17명을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했다. 이어 24일에 열린 중앙집행위원회 회의에서는 김규식을 주석으로, 김원봉을 총서기로 추대했다.48) 대회에서는 조선민족혁명당의 성격을 민족자유, 정치자유, 경제자유, 사상자유를 지향하며 민족해방을 주장하는 공·농·소자산계급에 기초를 둔 정치연맹이라고 규정하고, 12개항의 강령을 발표했다. 강령은 1941년 12월에 제6차 대표대회에서 제시한 11개 강령과 거의 같은 것이었으나, 〈조국독립 후 1년 이내에 국민대표대회를 소집하여 헌법을 제정하고 보통선거를 실시한다〉(제2항)는 조항을 신설하여 해방된 뒤의 정권수립과정에 대비하고 있는 것이 주목된다. 이러한 조항은 〈임시정부를 국내외 혁명집단과 혁명군중의 기초 위에 확립하여 전 민족독립사업을 총영도하는 혁명정권기구로 발전하도록 하고 아울러 각국이 최단기간 내에 우리 임시정부를 승인하게 하고, 전후 우리나라의 완전독립을 위해 노력하도록 한다〉는 것을 정책의 하나로 천명하면서도,49) 해방 이후의 정부수립과정에서는 임시정부가 일정한 역할을 하는 것은 부정하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루스벨트-이든會談에서 信託統治問題 논의돼
 
1943년 3월에 美國에 와서 루스벨트와 會談한 이든 英國外相.
  1943년 3월에 접어들어 한국의 전후처리문제에 대한 연합국 사이의 협의가 시작되었다. 3월12일에 미국을 방문한 이든(Anthony Eden) 영국 외상은 3월27일에 루스벨트 대통령과 헐 장관과 함께 정식 회담을 가졌다. 전후 한국의 처리문제가 양국 수뇌 사이에서 논의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한국문제는 극동 및 태평양 지역의 처리 문제와 함께 논의되었다. 만주와 대만은 중국에 반환하고, 남부 사할린은 러시아에 반환하며, 태평양에 있는 일본 위임통치 섬들은 연합국의 위임통치 아래 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는 신탁통치(trusteeship) 아래 둔다고 했다. 이어 한국문제에 대해 루스벨트는 『한국은 미국과 중국 및 그 밖의 한두 나라가 참여하는 국제신탁통치(international trusteeship) 아래 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고 말했고, 이든은 그러한 제안에 대해 호의적으로 생각한다고 대답했다.50)
 
  회담내용은 물론 공표되지 않았다. 회담에 배석했던 웰스(Sumne Welles) 국무차관은 3월29일에 찾아 온 송자문 중국 외교부장에게 회담 내용을 알려 주었다.51) 그러나 송자문은 李承晩이나 다른 어떤 한국인들에게도 그 내용을 말해 주지 않았고, 송자문의 보고를 받은 중국정부도 임시정부에 전혀 알려 주지 않았기 때문에 한 달 뒤에 「시카고 선(The Chicago Sun)」이 런던발 특전기사로 보도할 때까지 李承晩과 金九는 이러한 내용을 알지 못했다.
 
  중경에서 발행되는 「中央日報」는 4월27일에 워싱턴의 전문으로 「시카고 선」런던특파원이 〈루스벨트 대통령과 이든 영국 외상의 워싱턴 회담에서, 전쟁 후의 평화 계획 중의 하나로서 한국을 독립되기 전에 잠시 동안 국제호위(international guardship) 아래 두기로 결정했다〉고 보도했다.52)
 
  이 기사를 보고 임시정부는 크게 분노했다. 곧바로 국무회의를 소집하여 다음과 같은 사항을 결정했다.
 
  1) 우리 외무부에서 중국 외교부에 향하여 그 사실의 유무를 질문하고 아울러 반대 의사를 표시할 것.
 
  2) 미·영·소 각국 원수에게 반대하는 전보를 보내고, 중국에서는 당국자에 향하여 정식으로 그리고 신문지상에 반대성명서를 발표하도록 요구할 것.
 
  3) 선전부에서는 우리 쪽 간행물과 외국 간행물을 이용하여 반대하는 논문을 발표하고 아울러 반대하는 의사를 널리 알릴 것.
 
  4) 정치·경제·군사 각 수뇌자를 소집하여 그 진상을 보고하고 대책을 연구할 것.53)
 
 
  中韓文化協會 주최로 國際共同管理反對 座談會 열려
 
  조소앙은 외무부장의 자격으로 5월1일자로 모든 한국인은 전후에 오직 완전독립만을 원하며 어떠한 국제감시도 반대한다는 내용의 루스벨트 대통령 앞으로 보내는 전보를 주중 미국대사관에 전하고, 또 李承晩에게도 타전했다.54) 김규식도 선전부장 명의로 「우리는 한국의 국제적 공동관리를 반대한다」라는 성명을 발표했다.55)
 
  5월9일에는 한중문화협회 주최로 「전쟁 후의 한국독립문제」를 주제로 좌담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는 임시정부를 대표하여 김규식, 조소앙, 장건상 등과 중국 정부와 학계를 대표하여 司徒德, 胡秋原, 程希孟, 謝仁釗 등 70~80명이 참가하여 한국 독립의 필요성과 국제공동관리를 반대하는 연설을 했다. 호추원은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뒤에 수십 년 동안 반일투쟁을 전개하고 임시정부를 수립한 것은 한국 인민이 남의 노예가 되지 않기를 원하는 증거라면서 한국에 국제공동관리를 실시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사인쇠는 한국이 자유를 얻지 못하면 중국은 영원히 남의 나라의 침략을 받을 것이며, 영국과 미국이 한국을 국제관리하자는 것은 일본에 침략의 기회를 주는 잘못된 관점이라면서, 중국인들은 그러한 잘못된 관점을 결코 찬성하지 않으며, 마땅히 그러한 잘못된 관점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했다.56)
 
  이튿날에는 중경에 있는 각 단체가 연합하여 재중국자유한인대회를 열었다. 대회에는 300여 명의 동포들이 참가했다. 연설에 나선 인사들은 한결같이 〈한국은 완전한 독립을 요구하며 어떤 형식의 외래 압박이나 간섭도 반대한다〉고 역설했다. 대회에서는 한국독립당, 조선민족혁명당,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무정부주의자총연맹, 한국애국부인회, 한국청년회의 명의로 「선언문」과 「4개 조항의 결의문」을 채택하고, 대회 명의로 각 동맹국 영수들에게 전보를 쳐서 한국인의 간절한 독립의사와 요구를 밝혔다.57)
 
1943년 5월10일에 중경에서 열린 在中國 自由韓人大會. 앞줄 왼쪽에 다리를 뻗고 앉아 있는 사람이 金奎植이다〔우당기념관·박도, 「사진으로 엮은 한국독립운동사」(2005)에서〕.
 
  韓國獨立黨은 趙素昻 체제로 개편
 
  중경 동포사회가 신탁통치문제로 어런더런한 속에서 한국독립당은 당 지도부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1940년 5월에 金九를 중앙집행위원장으로 하여 출범한 한국독립당은 조선민족혁명당 등이 임시정부에 참여하면서 합작문제를 둘러싸고 두 파로 갈라졌다. 金九를 중심으로 조완구, 박찬익 등은 기존의 단일당을 주장하면서 다른 당파와의 합작을 반대했으나, 홍진, 유동열, 조소앙 등은 당의 문호를 개방하여 다른 당파와 합작할 것을 주장했다. 이 과정에서 1942년 6월에 金佐卿, 趙重哲이 당 정책에 불만을 품고 탈당한 데 이어, 임시의정원 의장에서 제명된 김붕준과 孫健 등도 한국독립당을 탈당했다. 중국 국민당 쪽 기록은 金九계를 「國粹派」로, 조소앙계를 「合作派」로 분류했다.58) 다른 당파에서 합작파의 주장을 크게 환영하고 당내에서도 합작파가 청년층의 지지를 받으면서 양 파의 대립은 더욱 심해졌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43년 5월8일에 홍진, 조완구, 조소앙, 유동열 등 17명이 참석한 제3차 전당대표대회가 개최되었다. 그런데 이 대표대회에 金九를 비롯하여 이시영, 박찬익, 엄항섭 등 金九계의 핵심인사들이 참석하지 않은 것을 보면 대회 자체에 대하여 金九계에서는 소극적이었던 것 같다. 대회에서는 정당, 정부, 군부에 대한 토론을 하고, 전 민족적 단결 방안을 논의했다.59) 전당대표대회의 가장 중요한 안건은 합작문제였는데, 이를 두고 양 파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다. 중국 국민당 쪽의 보고서는 이 대회에서 합작파가 통일방안으로 「統一或聯合各黨派鞏固革命陣線」안을 제안했으나, 반통일파의 반대로 부결되었다고 적고 있다. 대회는 金九, 홍진, 조소앙, 이청천 등 15명을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하고, 최동오, 金毅漢, 안훈, 宋冕秀, 楊墨[楊宇朝]을 중앙상무위원으로 선임했다. 그러나 이어 진행된 당 간부 선거에서 기존 집행부가 개편되면서 소장파의 지지를 받는 조소앙이 金九를 누르고 중앙집행위원장에 선출되는 이변이 일어났다. 이렇게 하여 합작파의 조소앙 체제가 출범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의 재정권은 여전히 金九파가 장악하고 있어서 불신의 골은 더욱 깊어져 갔다.60)
 
 
  (3) OSS(美戰略諜報局)의 韓人게릴라部隊 창설계획 중단
 
 
  李承晩이 추천한 한국인 청년 12명이 미국 전략첩보국(Office of Strategic Service: OSS)의 한국인 게릴라부대 창설계획에 따라 특수작전훈련을 받은 것은 미국과 한국 사이의 대일전 수행을 위한 군사 협력의 효시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韓-美軍事協力의 효시가 된 「FE-6 프로젝트」
 
  비록 李承晩이 1942년 10월10일에 굿펠로(Preston M. Goodfellow) 대령을 통하여 미국 합동참모본부에 제출한 계획서의 내용보다는 크게 축소된 것이었으나 그것은 OSS의 극동부장 레머(Charles Remer)의 승인 아래 「FE-6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추진되었다. 李承晩은 OSS의 특별작전과장 데블린(Francis T. Devlin)의 요청에 따라 지원자 60명 가운데에서 24명을 선발하여 1942년 11월17일에 통보했다. 데블린 대위는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12명을 선발했는데, 이들은 특수작전훈련을 받은 뒤에 <코리언 프로젝트의 핵심(nucleus)>으로 중경으로 파견될 계획이었다.61) 그곳에서 「FE-4」 및 극동 OSS 국장의 지휘 아래 궁극적으로는 한국으로 진입할 그 기관의 교관 겸 핵심 역할을 하게 한다는 것이었다.62) 이들은 오랫동안 李承晩의 비서로 활동해 온 張基永을 비롯하여 로스앤젤레스의 피터 현, 李淳鎔, 李相文, 조종익, 현승엽, 黃得逸 등 李承晩이 신뢰하는 사람들이었다.63) 워싱턴으로 소집된 12명 가운데에서 한 사람이 신체적 이유로 제외되고, 나머지 11명이 12월7일부터 강도높은 훈련에 들어갔다.
 
  李承晩은 12월10일에 이 사실을 타자등사판 통지문으로 지지자들에게 알리면서 소문이 나지 않도록 조심하라면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주의할 사실
 
  금번에 12인 피선된 데 대하야 소문이 많이 나지 아니할수록 우리 일에 좋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에 극히 주의하야 이 일에 대하야는 함구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독립운동에 가장 위험한 분자는 임시정부와 외교위원부를 은근히 갖은수단을 쓰며 반대하는 한인들이니 무슨 일이든지 잘되어가는 것을 저들이 알면 백방으로 음해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인 사이에 더욱 조심하여 이 일에 대한 비밀을 지키시기를 바라나니다.>64)
 
  李承晩은 이 편지를 지원자 모집에 협조해 준 한족연합위원회 간부들에게도 알렸던 것 같다. 그러므로 이러한 편지는 사실은 자기의 활동성과를 선전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李承晩은 또 탈락된 지원자들에게도 위로의 말과 함께 대기하고 있으라는 편지를 썼다.65)
 
  OSS는 훈련을 받는 한국 청년들에게 그들이 어떤 일을 하게 될 것인지에 대해 정확하게 알려주지 않았고, 李承晩에게도 공개해도 좋다는 OSS 당국의 판단이 나올 때까지 비밀을 지킬 것을 요청했다.
 
 
  OSS의 매큔이 李承晩을 비난
 
  그러나 李承晩의 통지문은 OSS 내부에서 큰 문제가 되었다. 조사분석과(Research & Analysis Section: RA) 극동 그룹의 조지 매큔(George M. McCune)이 이 통지문과 관련하여 李承晩을 비난하는 기관 내부용 메모를 배포했기 때문이다. 매큔은 1905년에 교육선교사로 내한하여 1936년에 신사참배거부로 추방당할 때까지 평양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선교사 매큔(George S. McCune: 尹山溫)의 큰아들로 한국에서 태어나서 옥시덴탈 대학교(Occidental University)와 버클리 대학교(The University of California at Berkely)에서 공부한 다음 1942년 2월부터 OSS에서 근무하고 있었다.66) 미국정부에서 대표적인 한국전문가로 꼽혔던 그는 李承晩에 대하여 비판적이었다. 그는 한족연합위원회의 김호와 워싱턴에 와 있던 1942년 10월22일 저녁에 두 사람의 초대로 동생 샤논 매큔(Shanon McCune)과 함께 그들을 만나고, 두 사람이 <재미한국인 다수를 대표하고, 한국인들로부터 훌륭한 지도자이며 대변자로 인정받고 있다>는 보고서를 작성하기도 했었다.67)
 
  매큔이 李承晩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것은 한국민족운동의 두 주도세력인 畿湖派(기호파)와 서북파의 해묵은 대결의식이 선교사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김호와 전경무는 興士團 단원으로서 서북파의 대표적 인물들이었다. 매큔은 또한 독립운동자들 가운데서도 좌파들에게 동정적이었다. 그는 1944년 5월에 국무부의 일본과로 자리를 옮겼는데, 소련의 유일한 학술잡지인 「태평양(Tikhi Okean)」지에 1937년에 실린 金日成에 관한 기사를 번역시켜 국무부 관리들에게 읽히고 있다.68)
 
  「한국인 훈련생 선정의 정치적 반응」이라는 제목의 매큔의 기관 내부용 메모는, 李承晩이 이 작업을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증진시키기 위하여 이용했고, 어느 정도는 그 프로젝트를 위장하기 위하여, 그리고 어느 정도는 자기 명성을 제고시키기 위하여 자신의 임무를 그릇 활용했다고 비판했다. 매큔은 샌프란시스코와 로스앤젤레스의 한국인 7명이 <특무공작>에 응모하여 워싱턴으로 갔다는「新韓民報」의 기사를 증빙자료로 메모에 첨부했다. 그러면서 그는 과장되거나 사실과 다른 이야기들을 열거했다. 이승만이 한국지도자들에게 미국 정부로부터 한인 부대의 핵심이 될 50명의 명단을 제출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고 말하면서 일을 추진하기 위한 특별자금으로 5,000달러를 요구했고, 한국지도자들이 의아해하자 OSS가 이 일에 관심이 있다고 말했다고 적었다. 또 李承晩이 11월에 OSS로부터 훈련생 12명의 선발요청을 받은 뒤에 자기가 한국 프로그램을 위해 무기대여법자금(Lend-Lease fund)을 확보했다고 말했다고도 했다. 매큔은 李承晩의 통신문도 소개하면서 추종자들 600명가량에게 그것을 보낸 것으로 전해진다고 적었다.
 
  매큔은 결론으로, 한국인들이 <특수임무>를 위한 훈련을 받고 있고 그 책임기관이 OSS라는 사실이 널리 알려졌고, 李承晩에게 선발과 통지의 임무를 맡겼기 때문에 한국인 정치무대는 혼란에 빠졌으며, 이러한 상황을 빚은 원인들이 제거되지 않는 한 장래의 발전은 난관에 봉착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69)
 
 
  『수프를 휘젓는 쿡들이 너무 많아…』
 
  훈련생들이 자기네를 훈련시키는 기관이 OSS라는 사실을 안 것은 1943년 1월2일이었다. 훈련생들이 캠프를 떠날 때에 지시사항이 들어 있는 봉합된 봉투를 주었는데,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인 李淳鎔(Wylie)이 봉투를 뜯어보고 OSS라는 문자를 처음 보았다. 그는 그 문자의 뜻을 몰랐기 때문에 동료에게 물어보았고,70) 그것이 훈련생들이 OSS를 알게 된 계기가 되었다. 2월5일 아침에 데블린이 주미외교위원부 사무실에 예고 없이 나타났다. 그동안 데블린은 소령으로 승진해 있었다. 李承晩은 훈련지망자들에게 보낸 자신의 전보 사본을 데블린에게 보여 주었다. 데블린은 李承晩의 전보에 잘못이 없음을 확인하고 돌아갔다.71)
 
  주미외교위원부 사무실을 오가면서 李承晩과 단 둘이서만 작업을 추진해 온 데블린 대위는 1943년 1월9일자 기관 내부용 메모로 작업추진 과정과 현황을 밝히면서 매큔이 제기한 문제점들을 해명하고, 매큔의 주장을 반박했다. 그러나 OSS가 한국인 특수작전훈련의 책임기관이라는 사실이 노출되는 것에 대해서는 그 역시 심각한 우려를 표명했다.72)
 
  OSS 안에서 李承晩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자 굿펠로는 1월28일에 데블린에게 李承晩만이 한국인을 대변할 수 있다면서 李承晩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편지를 썼다. 그는 한국상황을 어렵게 만드는 것은 미국 정부 기관들이 각기 다른 인물을 통하여 한국문제를 다루어 왔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한길수의 경우를 보기로 들었다. <한국인들 탓으로 돌리는 혼란은 수프를 휘젓는 쿡들이 너무 많은 이 나라의 우리가 만들어낸 혼란이다>라고 굿펠로는 적었다. 그는 李承晩이 중경의 한국 임시정부와 재미한국인들의 일반적인 승인을 받고 있고, 재미한족위원회는 한국인들의 모금을 통과시키는 깔때기 같은 단순한 기관이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미국 정부기관들이 계속해서 李承晩을 인정하는 것이 다른 어떤 방법보다 빨리 여러 의견을 달리하는 파벌들을 결속시킬 것이라고 굿펠로는 주장했다.73)
 
  한국인 훈련반은 1월6일에 기초훈련 과정을 마쳤다. 훈련을 마친 11명 가운데에서 3명이 탈락하고, 나머지 8명은 계속해서 고급반 훈련을 받았다. 고급반 과정에 1명이 추가되어 9명이 2월6일에 소정의 훈련을 모두 완료했다.74)
 
 
  헐 長官과 스팀슨 長官에게 잇달아 편지 써
 
  李承晩은 2월9일에 굿펠로에게 자기가 특수훈련을 지원한 12명을 잘못 다루었다고 보고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싶다는 편지를 보냈는데, 이 편지의 다음과 같은 문면은 이때에 李承晩이 얼마나 당혹해하고 있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친애하는 대령. 나는 정적들이 한국인들뿐만 아니라 나의 평판을 떨어뜨릴 언행을 일삼는 미국인들 사이에도 많다는 것을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나는 실수를 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만일 내가 어떤 잘못을 저질렀다는 보고가 있으면 그 잘못을 시정하거나 반증할 기회를 갖도록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75)
 
  李承晩은 2월16일에 헐(Cordell Hull) 국무장관에게 다시 편지를 썼다. 그는 일찍이 클리블랜드(Grover Cleveland) 행정부 때의 그레셤(Walter Q. Gresham) 국무장관이 조선 공사를 만나서 1882년의 조-미 조약에 따른 거중조정을 강력히 요구하는 공사의 말을 경청했던 선례를 들면서, 만나서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거듭 면담을 요청했다. 그는 이 조약은 결코 파기되지 않았다고 말하고, 우리는 지난 15개월 가까이 공동의 적에 대항하여 싸우는 동안 미국 정부로부터 한마디의 격려나 어떠한 원조나 우리와 의견을 같이하거나, 우리를 돕겠다는 의사나, 심지어 우리의 협조 제의를 받아들이겠다는 의사도 들은 적이 없다고 유감을 털어놓았다. 李承晩은 다음과 같이 못박았다.
 
  <저는 이 편지에서 다음의 사실을 기록으로 남기고자 합니다. 러시아의 목표는 한국 소비에트 공화국을 수립하는 것이라는 신문보도와 관련하여, 1년도 더 전에 저와 미국인 한국 친우들은 귀부를 방문하고 보좌관들과의 대화를 통하여 민주주의 이상을 목표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경멸하는 미국 정부의 행동의 결과는 필연적으로 공산주의국가의 수립으로 귀결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76)
 
  이튿날 李承晩은 또 스팀슨(Henry L. Stimson) 전쟁부 장관에게 편지를 썼다. 그는 1942년 2월4일과 3월6일에 자신이 스팀슨에게 편지를 썼고 그때마다 관심을 표명하는 회답을 받았던 일을 상기시킨 다음, 그때의 진지한 관심이 아직도 존재하는지, 그렇다면 전쟁부의 어떤 조치가 있을 것으로 기대해도 좋겠는지 물었다. 그는 OSS의 「FE-6 프로젝트」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은 채 1942년 10월10일에 자신이 제출한 계획서에 대하여 합동참모본부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있어서 그 계획서를 장관에게 직접 보낸다면서 동봉했다. 그리고 전날 헐 국무장관에게 보낸 편지도 동봉했다.77)
 
  李承晩은 스팀슨 장관의 회답을 기다리는 동안 굿펠로로 하여금 전쟁부 정보참모부에 재촉 비망록을 보내도록 부탁했다.78) 스팀슨은 2월25일에 李承晩에게 그가 제출한 한국인 게릴라부대 창설계획은 신중한 연구와 검토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회신을 보냈다.79)
 
  한편 헐 국무장관은 3월1일에 벌(Adolf A. Berle, Jr.) 차관보를 시켜 李承晩의 면담요청을 거절하면서 국무부의 다른 사람을 만나라고 회답했다. 벌은 헐 장관의 회답을 전하면서 그동안 미국 정부가 재미한국인에 대해서 취한 여러 가지 조치 등을 장황하게 열거했다.80)
 
 
  戰爭部次官補에게 다시 電報 보내
 
  그러나 재미한국인 청년들을 무슨 방법으로든지 대일전에 참가시키고자 하는 李承晩의 집념은 끈질겼다. 그는 3월16일에는 전쟁부의 매클로이(John J. McCloy) 차관보에게 다음과 같은 전보를 쳤다.
 
  〈하와이군도와 미국 본토의 한국인 인력을 군사력으로 이용하는 이점을 고려해 보지 않겠습니까? 한국인들은 일본 말을 할 수 있고 쓸 수 있으며 동시에 일본인으로서 통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세계에서 가장 일본인들을 증오하는 민족입니다. 미국에서 성장하고 훈련받은 한국인들로 구성되는 일개 대대는 동양에 있는 미군 또는 연합군에 헤아릴 수 없는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81)
 
  전쟁부는 李承晩의 제안을 꽤 구체적으로 검토했던 것 같다. 매클로이는 3월20일에 그러한 부대의 조직은 결국 인력의 비효율적인 사용이 될 것이라는 견지에서 바람직하지 않다고 회답하고 나서,82) 군사정보국의 검토보고를 토대로 하여 3월25일에 다시 구체적으로 문제점을 들어 李承晩의 제안을 정중하게 거절하는 회답을 보냈다.83) 미군 정보당국의 인구조사에 따르면 1940년 현재 하와이 거주 한국인 인구 6,851명 가운데에서 군에 입대할 수 있는 적정연령(18~44세)의 남자 인구수는 1,027명(시민권 가진 사람 928명, 시민권 없는 사람 99명)이었고, 미국 본토의 경우는 연령별 통계는 없으나 한국인 인구 1,711명 가운데에서 300명쯤이 입대 가능 인구로 추산되었다. 그런데 통상 신체검사 통과자 비율이 55%였으므로 실제로 군에 입대할 수 있는 적격자 수는 하와이와 미국 본토를 통틀어 600명쯤밖에 되지 않았다. 소모병력의 보충 등을 예상할 때에 이러한 규모의 인력으로는 한국인 대대의 창설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뿐만 아니라 부대원의 유지, 모병, 훈련에서 전문화와 전개대상지역의 제한 등을 고려할 때에 이러한 부대의 창설은 합당하지 않다는 것이 군사정보국의 검토보고 내용이었다.84)
 
  매클로이는 3월25일자 편지에서 한국인들을 한 부대로 활용할 길은 없다고 하더라도 전쟁부는 미군에 입대해 있거나 앞으로 입대할 한국인들이 정보분야에서 하게 될 특별한 자격을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美上下 兩院에 臨時政府承認決議案 제출
 
  李承晩은 OSS의 한국청년 특수훈련과 관련된 말썽 때문에 부심하면서도 3·1절을 맞이하여 두 가지 행사를 계획했다. 하나는 3월1일에 참가자들이 검은 예복을 입고 백악관과 국무부 앞에서 추도시위(mourning parade)를 벌이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상하원의 의원들에게 편지쓰기 운동을 벌이는 것이었다. 그것은 미국 의회를 통하여 임시정부를 승인하도록 미국 정부에 압력을 넣기 위한 방안으로 생각해 낸 것이었다. 그러나 추도시위는 한족연합위원회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했다. 연합위원회는 그러한 행사가 미국 정부의 반감을 살 것이라면서 반대했기 때문이다.85)
 
  편지쓰기운동에는 기독교인 친한회가 주동적으로 참여했다. 친한회 회장인 더글러스(Paul F. Douglass) 아메리칸대학교 총장과 서기인 에비슨(O. R. Avison) 목사는 2월9일에 <친우>들에게 보낸 공동명의의 편지에서 조선총독부가 선교사들에게 추방명령을 내린 사실을 지적하면서 한국에서 기독교가 말살되고 있다고 말하고, 동양의 기독교는 자유한국이 필요하고 한국은 미국 여론의 즉각적인 지지가 필요하다고 적었다. 그 방법이 한국 임시정부의 승인을 위하여 자기 지역 출신의 상하 양원 의원들에게 편지나 전보를 보내는 일이라는 것이었다.86)
 
  미시간주 출신의 오브라이언(George D. O’brien) 의원이 3월31일에 상하 양원 합동결의안(H. J. Res. 109)을 하원에 제출했다. 결의안의 내용은 <미합중국 상원과 하원의 의원들은 의회에 회집하여 미합중국 정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할 것을 결의한다>87)라는 것이었다.
 
  4월22일에는 위스콘신주 출신의 와일리(Alexander Wiley) 의원이 같은 내용의 결의안을 상원에 제출했다. 이 두 결의안은 각각 하원과 상원의 외교위원회에 회부되었다. 李承晩은 「주미외교위원부통신」을 통하여 재미동포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면서 다음과 같이 당부했다.
 
  <이상과 같이 미국 국회 상하의원들과 미국인으로 한국 친우들이 우리 한국 임시정부 승인문제를 위하여 적극적으로 운동하고 있다. 이에 한족으로서의 우리는 책임이 중차대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할 일은 우리의 정성과 물질을 이에 기울여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하야 첫째로 우리 한인은 각각 시기를 놓치지 말고 즉시 편지나 전보로 상하의원 외무부위원장 톰 코널리(Tom Connally) 각하와 솔 블룸(Sol Bloom) 각하에게 공개토론, 퍼블릭 히어링(public hearing)을 속히 시작하여 주기를 요청하는 동시에 임시정부가 속히 승인되게 하여주기를 요청할 것이다. 둘째로 우리 한인은 각각 자기의 미국 친우들에게 동봉한 영문 원문들을 보이는 동시에 그들에게 편지나 전보 한 장을 이상 두 상하의원에게 하여 주는 것이 우리 임시정부 승인문제에 대하여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역설 설복하여 그들의 협조를 얻어야 될 것이다.…>88)
 
 
  過速運轉으로 地方法院에서 裁判받아
 
  李承晩은 이처럼 미국 의회의 공개청문회를 통하여 임시정부 승인문제가 미국 지식인 사회에서 공론화되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청문회가 열리면 자신도 진술인으로 출석하게 될 것이고, 미국의 상하 양원 의원들 앞에서 한국인들의 대일전쟁 참여와 관련된 자신의 비전을 피력할 수 있는 기회가 있을 것이었다. 그렇게 하여 양원에 제출된 결의안이 가결된다면 미국 국무부도 한국 임시정부에 대한 불승인정책을 계속 견지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李承晩은 미국 의회가 임시정부 승인결의안을 채택하도록 하는 캠페인을 준비하느라고 분망했다. 자동차도 과속으로 몰고 다녔다. 그러다가 교통법규위반으로 2월16일에 컬럼비아 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았다. 李承晩은 자신은 외교사절이라고 주장하여 재판은 연기되었다. 담당판사는 4월7일자로 국무부에 李承晩이 면책특권이 있는 등록된 외교관인지 조회하는 공문을 보내고 있는데,89) 그 뒤의 관련문서가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재판은 흐지부지되었던 것 같다.
 
  상하 양원의 외교위원회는 한국 임시정부 승인에 대한 결의안을 심의하기에 앞서 국무부의 의견을 조회했다. 전쟁기간 동안 미국의회는 전시초당외교를 표방하고 행정부의 외교정책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고 있었다. 헐 국무장관은 현 시점에서 그러한 결의안이 의회를 통과한다는 것은 어떠한 효과적인 목적도 기대할 수 없고 미국의 대외정책에 혼란만 초래할 뿐이라고 단호하게 반대했다.90) 국무부의 이러한 태도 때문에 결의안은 본회의에 상정되지 않았다.
 
 
  루스벨트 大統領에게 警告편지 보내
 
  李承晩은 5월15일자로 루스벨트에게 편지를 써서 조소앙이 보내온 전보를 동봉하여 백악관으로 보냈다. 李承晩의 편지는 공격적이었다.
 
  그는 먼저 지금이 지난날 미국이 한국에 대해 취해 온 부당한 조치를 시정할 적기라고 다음과 같이 적었다.
 
  〈저는 지금이 지난 38년 동안 미국이 한국인과 그들 나라에 행사해 온 과오와 부정을 시정할 때라는 사실에 대해 각하의 관심을 환기시키고자 합니다. 각하께서 기억하시는 바와 같이, 미국은 1882년의 조-미조약을 위반하여 일본이 1905년에 한국을 점령하고 1910년에 그 나라를 병탄하는 것을 허용했습니다. 각하께서 한 공중연설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한국 인민은 그 이후로 세계의 모든 피정복민족들보다 더 심하고 더 오랫동안의 수난을 받아왔습니다.…〉
 
  이렇게 말을 시작한 李承晩은 이어 한국의 파괴는 일본의 정복 행진의 시작에 지나지 않았다고 말하고, 진주만 공격 이래 문명과 민주주의를 구하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미국인들의 피와 자금을 희생했는가라고 물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단언했다.
 
  〈이 모든 것은 서방 정치가들이 독립된 한국이 동양 평화의 보루로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인식하지 못하는 데에 연유한 것입니다. 이들 정치가들은 한국인들이, 오직 한국인들만이 지난 몇세기 동안 거듭하여 자행된 일본의 침략을 물리쳤다는 역사적 사실을 간과했습니다. 이들 정치가들은 한국이 강직한 독립국가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대신에 일본제국의 세계적 위협을 조성시키는 데에 그들의 도덕적 및 물질적 지원을 아낌없이 제공했습니다.…〉
 
  李承晩은 지금이 미국이 한국에 대한 그릇된 관념을 고칠 때라고 거듭 강조했다. 그러한 관념은 일본의 선전기관의 영향으로 조성된 것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만일 미국 정치가들이 이러한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면 전후처리는 또 다른, 어쩌면 지금의 세계적 큰불보다도 더 큰 재앙의 길을 열어놓을지 모른다고 주장했다.
 
  마지막으로 李承晩은 미국 정부의 한국 임시정부에 대한 불승인정책을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진주만사건 이래――거의 1년 반 동안, 우리는 국무부에 가장 오래된 망명정부인 한국 민족주의 정부를 승인할 것을 촉구해 왔습니다. 우리가 받은 회답은 불합리한 변명뿐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한국 소비에트공화국을 수립하는 것이 러시아의 목적이라고 지적하는 보도를 접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보도들이 근거없는 것이기를 충심으로 바랍니다. 그와 동시에 40년 전에 미국이 그토록 걱정하고 두려워했던 극동에서의 러시아의 팽창위협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91)
 
  그것은 2월16일에 헐 장관에게 보낸 편지에서 한 경고와 비슷한 것이었다. 백악관은 5월17일에 이 편지의 처리문제를 국무부로 넘겼고,92) 국무부는 대통령이 회답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고 백악관 비서관 이름으로 회신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면서 회신초안을 적어 보냈다.93)
 
  백악관의 왓슨(Edwin W. Watson)소장 명의 회신은 극히 의례적인 짤막한 것이었다.94)
 
 
  「FE-6 프로젝트」의 처음 계획 중지돼
 
  「FE-6 프로젝트」의 특수작전훈련을 마친 장기영 등 9명은 4월15일에 중경으로 파견하기로 되어 있던 애초의 계획이 중지되었다는 통고를 받았다. 시설부족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민간인으로 돌아갈 수도 있고 미군에 입대할 수도 있다고 했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입대를 희망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워싱턴 근교의 캠프에서 다음 조치를 기다렸다.95)
 
  「FE-6 프로젝트」가 중지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기본적으로는 미국의 대일군사전략의 전환이었다. 일본은 최후까지 싸울 것이기 때문에 미군은 일본 본토에 진공해야 한다는 것이 미국의 전략구상이었는데, 1943년에 이르면 태평양 전구의 전황이 유리해져서 미군은 중국에 상륙할 필요없이 섬들을 연결하여 일본 본토를 공격할 수 있는 상황이 되고 있었다.
 
  둘째는 OSS의 도노반(William J. Donovan) 국장과 중-미 합작기구(Sino-American Cooperation Organization: SACO), 특히 SACO의 부사령관인 해군중국파견단(Naval Group China: NGC) 단장 마일스(Milton Miles) 해군 소령 사이의 알력 때문이었다. 마일스가 OSS의 전신인 COI(Coordinator of Information: 정보조정국)의 101지대가 중국 안에서 활동하는 것을 강력히 반대했던 중국 조사통계국의 戴笠(대립)과 협의하여 해군중국파견단을 중-미 합작기구로 개편한 것은, 「FE-6 프로젝트」의 훈련이 막 끝난 1943년 3월이었다. 대립이나 마일스가 OSS가의 훈련을 마친 한인청년들이 〈코리언 프로젝트의 핵심〉으로서 중경에 파견되는 것을 반대했을 것은 당연하다.
 
  셋째로 매큔이 OSS의 한국인 활용계획을 李承晩이 정치적으로 이용한다고 문제를 제기한 것을 계기로 도노반을 비롯한 OSS 간부들로부터 李承晩이 적지 않은 불신을 사게 된 것도 「FE-6 프로젝트」의 처음 계획의 중단을 결정한 원인으로 작용했을 수 있다. 아무튼 이렇게 하여 李承晩과 OSS의 협력관계는 공식적으로 중단되고 말았다. 그러나 굿펠로와의 개인적인 신뢰와 친분관계는 계속 유지되었다.
 
 
  情報機關 代表들이 韓國問題에 대한 連續會議 열려
 
  5월7일부터 6월14일까지 네 차례에 걸쳐서 정보기관 실무책임자들의 한국문제에 대한 연속회의가 열렸다. 회의는 해군정보국(Office of Naval Intelligence: ONI)의 데이비스(Donald M. Davise) 대위가 소집한 것이었는데, 비록 비공식 회의이기는 했으나, 미국 정보기관 대표들이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여 재미한인들의 활용문제와 전후 한국의 지위문제를 집중적으로 논의한 매우 중요한 회의였다.
 
  5월7일에 해군부에서 열린 첫 회의에는 육군정보국(Military Intelligence Service: MIS) 동양담당 콜드웰(A. B. Caldwell) 대위와 그린웨이(George Greenway) 대위 및 극동과의 키니(Robert Kinney), OSS 조사분석실 극동그룹의 매큔, 연방수사국(Federal Bureau of Investigation: FBI)의 틸만(Fred G. Tillman)이 참석했다. 의장을 맡은 데이비스는 한국문제는 두 가지 실질적인 이유에서 미국의 중요한 관심사라고 말했다. 하나는 한반도 주변에서 미군이 최후로 작전을 하게 될 것인가, 그럴 경우 한국인들을 어느 정도 군사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전후 한국에 대한 방침, 곧 적이 철수한 뒤의 정치적 공백지대에 미국에 우호적이고, 잘 조직되고, 효율적으로 기능하는 현지인 기관을 준비하는 일이라는 것이었다. 회의는 미국 정부가 상당한 기간 동안 미주지역에서 있어 온 한국인들의 정치운동을 관찰하고 조사하고 분석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재미한인을 동원하기 위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결론은 만일에 한국인들이 1) 미국의 안보에 위협적이지 않고 2) 그들을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면, 미국 정부는 한국문제를 가지고 시간낭비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첫 번째 문제에 대하여 참석자들은 모두 재미한인사회가 미국의 안보에 위협이 아니라는 데 동의했다. 그러나 두 번째 문제에 대해서는 덜 낙관적이었다. 먼저 한인 당파들이 통합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참석자들은 모든 재미한인들을 대표할 특별단체의 결성을 지지했는데, 그러나 한길수는 분열을 조장하는 인물이므로 배제되어야 한다고 했다.
 
  매큔과 키니는 李承晩은 새로 결성될 재미한인 특별조직의 회장이라는 명예직을 갖고, 실질적인 집행권은 더 젊고, 책임감이 있고, 훌륭한 성품을 지닌 공격적인 한국인에게 넘겨야 한다고 주장했다.96) 아무튼 미국정보기관대표들의 회의에서 재미 한인들을 대표할 새로운 기관을 설립할 필요가 있다는 데 의견일치를 보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韓吉洙는 國外로 追放하고 李承晩은 隱退시켜야
 
  두 번째 회의는 6월7일에 열렸다. 참석자들은 같은 멤버였다. 이날의 회의에는 미국 국무부 극동국의 솔즈베리(Lawrence Salisbury)도 초청했으나 그는 다른 일로 참석하지 못했다. 회의에서는 대일전에 한국인들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한국인들 사이의 트러블 메이커들, 특히 한길수의 처리문제가 집중적으로 논의되었다. 참석자들은 한길수의 선전과 행동은 일본정부가 바라는 것과 같은 것이며, 그는 한국인들 사이에 혼란과 분열의 씨를 뿌리고 연합국의 목적을 지지하는 한국인 운동의 효과적인 제휴를 방해하고 있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그러나 그에 대하여 당장 취할 수 있는 조치는 없어 보였다. FBI의 틸먼은 법무부는 한길수를 기소할 만한 확실한 근거를 갖고 있지 못하다고 말했다. 한길수는 아마도 상황을 이용하여 돈벌이를 하는 교활한 선동가 같다는 것이 그의 의견이었다. 참석자들은 한길수를 추방해도 별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매큔은 중국에 있는 한국지도자들이나 재미한국인 8,000명 가운데 60명쯤밖에 되지 않는 좌파들조차도 한길수를 완전히 신뢰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회의에서는 당연히 李承晩도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한길수가 추방되고 李承晩을 설득하여 한국독립운동의 <원로>라는 얼마쯤 명예적인 지위로 <은퇴>하게 한다면, 더 젊고 유능한 한국인들이 재미한국인들의 운동을 더욱 효과적으로 지도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 대체적인 생각이었다. 회의에서는 또한 동북아지역에 산재해 있는 한국인들을 선전활동에 활용하는 문제가 심도 있게 검토되었다.97)
 
 
  中國과 러시아와 協議하기 전에 韓國獨立 보증해선 안 돼
 
  6월11일에 열린 세 번째 회의에는 OSS의 작전과장 호프만(Carl O. Hoffman) 대위와 국무부의 솔즈베리도 참석했다. 이날의 회의에서는 OSS 작전과와 국무부의 관심사가 논의의 초점이 되었다. 호프만 대위는 1) 일부 한국인들이 높은 계급을 따는 데만 너무 집착하여 군대생활에 만족스럽게 적응하는 데 문제가 있다는 점과 2) 그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중국 국민정부는 중국인들에 의하여 훈련되고 통제받고 있는 한국인들과 함께 일하는 것을 더 선호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므로 미국이 훈련한 한국인들을 앞으로 동북아시아에서 비밀임무에 활용하기 위해서는 중국의 전폭적인 협력을 얻을 수 있는 협상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솔즈베리는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미국의 정책은, 미국은 추축국의 점령 아래 있는 모든 국민들을 지원할 것이라고 한 1942년 7월의 헐 국무장관의 포괄적인 성명에 포함되어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미국의 대한정책은 앞으로 아시아 전체의 구도라는 더 넓은 관점에서 검토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미국은 중국과 러시아와 협의하기 전에 한국 독립을 보증하는 일은 피해야 한다고 했다.
 
 
  『<방관(hand off)> 정책이 바람직해』
 
  6월14일에 열린 마지막 회의는 연합국의 전쟁노력에 한국계 미국인들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고, 궁극적으로 재외한국인들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를 결정하는 회의였다.
 
  미국 안에서 통합된 한국인 전선을 구축하는 것이 아무리 바람직하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들의 본성이 그러한 시도를 <다이너마이트>로 만들 것이고, 그렇게 되면 정부의 다른 부서와 마찬가지로 국무부를 곤혹스럽게 만들 수 있다는 데 참석자들의 의견이 일치했다. 호프만 대위는 OSS가 한국인들에게 특수작전훈련을 실시했던 경험을 설명하면서, 한국인들을 활용하는 모든 계획이 중국에서 실시되어야 한다고 상정한다면 미국계 한국인들을 훈련시킬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첫째로 중국인들이 그들을 불신하고 있어서 그들의 작전은 제약을 받을 것이고, 둘째로 중국에는 풍부한 한국인 공급인력이 있으므로 이들 가운데에서 중국인들의 신뢰를 받는 사람들을 미국인들이 중국에서 전문적으로 훈련시키면 된다는 것이었다. 호프만은 한국인 대표자들이 많은 수의 한국계 미국인들을 훈련시키기 위하여 여러가지 <거래> 제의를 못하게 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고, 또 자기들이 훈련시킨 한국인들은 언제나 특진을 요구했으며, 그들은 다루기가 좀 어려웠다고 덧붙였다.
 
  호프만은 위와 같은 회의 내용을 도노반에게 상세히 보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건의했다.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말씀드리는 것은 국장께서 앞으로 한국인들에 관한 결정을 내리시는 데 그러한 일들이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 생각으로는 국무부와 MIS(육군정보국)와 ONI(해군정보국)는 당분간 〈방관(hand off)〉 정책이 바람직하다고 믿고 있습니다. 한국인 지도부가 형성되었을 때에, 그리고 그것이 추종세력들 사이의 통합을 이룰 수 있다면 그러한 지도부와의 협력은 바람직할 것입니다.〉98)
 
  도노반이 중국지역에 투입할 한국인 게릴라부대의 창설계획을 중단한 것은 이러한 정보기관들의 공통된 의견과 같은 맥락의 판단에서 취해진 것이었다.
 
 
  軍事情報言語學校에 張基永 등 다시 추천
 
  난감해하고 있는 李承晩에게 6월4일에 눈이 번쩍 뜨이는 편지 한 통이 날아왔다. 미네소타주 새비지(Savage)의 군사정보 언어학교(Military Intelligence Service Language School)의 인사부장 굴드(Karl T. Gould) 중령이 보낸 편지였다. 이 학교에서 한국계 미국인부대를 편성하고 있는데, 적합한 사람들을 추천해 달라는 것이었다. 자격 요건은 한국어가 유창하고 일본어를 웬만큼 사용해 본 경험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학교에서는 자격이 있어 보이는 147명에게 편지를 보냈으나 응답자가 20명도 되지 않았고, 게다가 거의 대부분이 장교지망자라는 것이었다. 물론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99)
 
  李承晩은 6월11일에 OSS의 「FE-6 프로젝트」의 특수작전훈련에 응모했던 60명 가운데에서 30명의 명단을 선정해서 굴드 중령에게 보냈다. 명단을 보내면서 李承晩은 필요하다면 자신이 그들에게 사전에 알려 주겠고, 더 많은 사람이 필요하다면 알려 달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李承晩은 미-일전쟁이 발발한 뒤로 많은 한국인들과 한국계 미국인들이 자기에게 대일전에 참가할 길을 열어 달라고 해서 전쟁부에 스틸웰(Joseph W. Stillwell) 중장 휘하에 한국인부대를 창설할 계획서를 제출했으나, 그 계획서는 서랍 속에 잠자고 있다고 말하고, 「FE-6 프로젝트」의 자초지종을 자세히 설명했다. 그는 하와이에는 7,000명의 한국인이 있는데, 하와이를 포함한다면 군사언어학교에서 원하는 자격자는 얼마든지 충원할 수 있으니까 제발 계획을 포기할 생각은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100) 한편 굿펠로는 6월9일에 「FE-6 프로젝트」의 특수작전훈련을 받은 장기영, 피터 현, 이순용, 조종익, 윌리엄 B.권 5명이 포함된 27명의 명단을 군사 언어학교 입학 자격자로 전쟁부의 에드워즈(W. B. Edwards) 소령에게 보냈다.101) 李承晩도 30명의 명단에 장기영, 피터 현, 조종익, 이순용 네 사람을 포함시켰다. 李承晩은 6월28일에 다시 굴드에게 이 네 사람을 강력히 추천하는 편지를 썼다.102) 이때에 군사 언어학교에 입학했던 장기영은 6개월 훈련코스를 끝낸 다음 메릴랜드주에 있는 특수군사정보훈련소에서 훈련을 다시 받고 호놀룰루에 있는 부대에 배치되어 태평양전쟁이 끝날 때까지 괌, 사이판 등 태평양의 격전지에서 정보요원으로 활동했다.103)●
 
 

  1)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1) 헌법·공보」, 2005, 국사편찬위원회, 265~266쪽. 2) 양우조, 최선화 지음, 김현주 정리, 「제시의 일기」, 1999, 혜윰, 192쪽 ; 趙擎韓, 「白岡回顧錄」, 1979, 韓國宗敎協議會, 328쪽. 趙擎韓은 대회의 명칭을 한국독립당의 「임시중앙집행위원회」라고 했으나, 1941년 5월의 제1차 전당대표대회 이후 1943년 5월의 제3차 전당대표대회 기록만 보존되어 있고 제2차 전당대회에 관한 기록이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서 양우조의 일기대로 이 대회를 한국독립당 제2차 전당대표대회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3) 秋憲樹編, 「資料 韓國獨立運動(2)」, 「韓國黨派之調査與分析」 및 「朝鮮民族革命黨第七次代表大會」, 1972, 延世大出版部, 70쪽, 212쪽. 4)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1) 헌법·공보」, 268~269쪽. 5)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3) 임시의정원Ⅱ」, 2005, 국사편찬위원회, 33쪽. 6) 「金元鳳이 韓吉洙에게 보낸 1942년 11월18일자 편지」. 7)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6) 임시의정원Ⅴ」, 2005, 국사편찬위원회, 45쪽. 8) 「金元鳳이 韓吉洙에게 보낸 1942년 11월18일자 편지」.
 
  9)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3) 임시의정원Ⅱ」, 24쪽. 10)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3) 임시의정원Ⅱ」, 24~25쪽. 11)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3) 임시의정원Ⅱ」, 25쪽.
 
  12)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3) 임시의정원Ⅱ」, 35~37쪽.
 
  13)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3) 임시의정원Ⅱ」, 49쪽, 「우리通信」 제8호, 86쪽. 14)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3) 임시의정원Ⅱ」, 49쪽, 「우리通信」 제8호, 86쪽. 15)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3) 임시의정원Ⅱ」, 44~45쪽. 16)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3) 임시의정원Ⅱ」, 「우리通信」 제8호, 85~86쪽. 17) 金正明編, 「朝鮮獨立運動Ⅱ」, 1967, 原書房, 541쪽. 18) 秋憲樹編, 「資料 韓國獨立運動(2)」, 「朝鮮民族革命黨第六屆全黨代表大會宣言」, 209쪽. 19) 秋憲樹編, 「資料 韓國獨立運動(2)」, 213쪽, 252쪽. 「朝鮮民族革命黨第七次代表大會」 및 「朝鮮民族革命黨綱領及政策」, 20)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3) 임시의정원Ⅱ」, 123쪽.
 
  21)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3) 임시의정원Ⅱ」, 50~53쪽. 22)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1) 헌법·공보」, 270쪽. 23) 趙擎韓, 앞의 책, 330쪽. 24)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3) 임시의정원Ⅱ」, 61~62쪽, 「우리通信」 제10호, 93쪽. 25)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3) 임시의정원Ⅱ」, 「우리通信」 제6호 81~82쪽, 「우리通信」 제10호, 94~95쪽.
 
  26)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3) 임시의정원Ⅱ」, 「우리通信」 제9호, 92쪽. 27)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3) 임시의정원Ⅱ」, 「우리通信」 제12호, 102쪽 ; 楊昭全 等編,, 「關內地區反日朝鮮人獨立運動資料匯編(下)」, 1987, 遼寧民族出版社, 1592쪽. 28) 「新韓民報」 1942년 11월19일자, 「중한문화협회는 한국 의정원 의원을 환영」 ; 石源華編著, 「韓國獨立運動與 中國」, 1995, 上海人民出版社, 396쪽. 29)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3) 임시의정원Ⅱ」, 「우리通信」 제12호, 102쪽. 30)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1) 헌법·공보」, 273쪽 ;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3) 임시의정원Ⅱ」, 「우리通信」 제12호, 102~104쪽, 「우리通信」 제14호, 110쪽. 31)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1) 헌법·공보」, 273쪽. 32)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3) 임시의정원Ⅱ」, 「우리通信」 제13호, 106~107쪽.
 
  33) 「金元鳳이 韓吉洙에게 보낸 1942년 11월18일자 편지」. 34) Kingstone(Kim Ku) to Rhee, Nov. 3,1942, 「韓國獨立運動史 資料(25) 臨政篇」 Ⅹ」, 1944, 國史編纂委員會, 254쪽. 35) Gauss to Hull, Dec. 9,1942,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이하 FRUS) 1942(Ⅰ) The British Commonwealth, The Far East, Government Prining Office, 1960, p.880. 36) 秋憲樹編, 「資料 韓國獨立運動(1)」, 「臨政의 美國移轉에 關한 消息」, 393쪽. 37) 南坡朴贊翊傳記刊行委員會, 「南坡朴贊翊傳記」, 1989, 乙酉文化社, 264~265쪽. 38)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1) 헌법·공보」, 273쪽. 39)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1) 헌법·공보」, 272~273쪽 ;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3) 임시의정원Ⅱ」, 「우리通信」 제13호, 106쪽.
 
  40) 면담 이정식, 편집해설 김학준, 「혁명가들의 항일회상」(개정판), 2005, 민음사, 243~251쪽 ; 정정화, 「녹두꽃」, 1987, 未完, 159~160쪽 , 162쪽. 41) 「新韓民報」 1943년 1월21일자, 「최근 중경에 온 김규식의 담화」. 42) Kim Ku to Syngman Rhee, Feb. 15, 1943, 「韓國獨立運動史 資料(25) 臨政篇Ⅹ」, 272쪽. 43)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1) 헌법·공보」, 275쪽 ; 「新韓民報」 1943년 1월28일자, 「임시정부 중요관원 서임」. 44)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1) 헌법·공보」, 277쪽. 45) Robert T. Oliver, Syngman Rhee ; The Man Behind the Myth, Dodd Mead Company, 1954, p.210. 46) 秋憲樹編, 「資料 韓國獨立運動(2)」, 「朝鮮民族革命黨第七次代表大會宣言」, 212쪽. 47) 「新韓民報」 1942년 12월10일자, 「김약산 장군의 취임과 선서」 및 「김약산 장군의 연설」.
 
  48) 秋憲樹編, 「資料 韓國獨立運動(2)」, 「大公報」 1943년 2월26일자, 「朝鮮革命運動進入統一階段」, 215~216쪽. 49) 「韓國獨立運動史 資料(3) 臨政篇Ⅲ」, 1973, 國史編纂委員會, 491~493쪽. 50) Hull, “Memorandum of Conversation”, Mar. 27, 1943, FRUS. 1943(Ⅲ) The British Commonwerlth, The Far East, p.37, ; Cordell Hull, Memoirs, vol. Ⅱ, MacMillan Company, 1948, p.1596. 이든은 처칠에게 보낸 보고전문에서 루스벨트는 인도차이나와 한국 두 나라 다 국제신탁통치 아래 둔다고 말했다고 적었다(Anthony Eden, The Eden Memoirs――The Reckoning, Cassell&Company, 1965, p.378). 51) Welles, “Memorandum of Conversalion”, Mar. 29, 1943, FRUS. 1943, China, p.845. 52) 「獨立新聞」 1943년 6월1일자, 「한국 임시정부에서 정당, 정부, 군부의 수뇌회의 소집」.
 
  53)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1) 헌법·공보」, 290~291쪽. 54) 미국무부 문서 895.01/ 265, Vincent to Hull, May 11, 1943. 55) 「獨立新聞」 1943년 6월1일자, 「우리는 한국의 국제적 공동관리를 반대한다」. 56) 「獨立新聞」 1943년 6월1일자, 「중한문화협회 거행, 전후의 한국독립문제 좌담회」. 57) 「獨立新聞」 1943년 6월1일자, 「중국에 있는 자유한인대회」. 58) 秋憲樹編, 「資料 韓國獨立運動(2)」, 「韓國黨派之調査與分析」, 70쪽.
 
  59) 「獨立新聞」 1943년 6월1일자, 「한국독립당 제3차 전당 대표대회 개막」. 60) 秋憲樹編, 「資料 韓國獨立運動(2)」, 「韓國黨派之調査與分析」 및 「第三次全黨大會의 意義와 執行部名單」, 70쪽, 159~160쪽. 61) Capt. F. T. Devlin to Lt. Warwick Potter, Nov. 17, 1942,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 재미한인자료」, 2005, 國家報勳處, 521쪽. 62) Capt. F. T. Devlin to Edwin Putzell, Dec. 18, 1942, 위의 책, 526쪽. 63) 張基永, 「OSS의 韓國人」, 「新東亞」, 1967년 9월호, 263~264쪽. 64) 독립기념관 소장문서 도1182-2, 「주의할 사실」, 1942년 12월10일. 65) 독립기념관 소장문서 도1182, “Syngman Rhee to Choon Har Kim”, Dec. 2, 1942.
 
  66) An, Jong-chol, “Making Korea Distinct: George M. McCune and His Korean Studies”, Seoul Journal of Korean Studies, vol.17, Seoul National University, 2004. 12, pp. 162~169; 안종철, 「식민지시기 평양지역 윤산온(George S. McCune) 선교사의 활동과 그의 가족의 한국학연구」,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소식」 제70호, 2005. 4. 2,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35~40쪽. 67) G. M. McCune to C. F. Remer, “Conversation with Korean Leaders”, Oct. 29, 1942,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 재미한인자료」, 4쪽. 68) Bruce Cumings,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 Liberation and the Emergence of Separate Regimes 1945-1947,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81, p. 37. 69) McCune to Allman, “Political repercussion of choosing Korean trainees”, Dec. 24, 1942,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 재미한인자료」, 528~532쪽. 70) Rhee to Goodfellow, Feb. 9, 1943, 「韓國獨立運動史 資料(25) 臨政篇Ⅹ」, 271쪽. 71) Rhee to Goodfellow, Feb. 5, 1943,「韓國獨立運動史 資料(25) 臨政篇Ⅹ」, 270쪽. 72) Capt. F. T. Devlin to R. Davis Halliwell, “McCune report on Korean political repercussion”, Jan. 9, 1943,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 재미한인자료」, 540쪽.
 
  73) Col. Goodfellow to Major Devlin, “Attached J. I. C. Recommendations”, Jan. 28, 1943, 「韓國獨立運動史 資料(25) 臨政篇Ⅹ」, 269쪽. 74) Francis T. Davlin to Major Henry Painter, “Weekly Report, F.E.-6”, Feb. 8, 1943,「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 재미한인자료」, 559쪽. 75) Rhee to Goodfellow, Feb.9,1943, 「韓國獨立運動史 資料(25) 臨政篇Ⅹ」, 271쪽. 76) 미국무부 문서번호 895.01/214, Rhee to Hull, Feb. 16, 1943. 77) Rhee to Stimson, Feb. 17, 1943, 「韓國獨立運動史 資料(24) 臨政篇Ⅸ」, 1994, 國史編纂委員會, 223쪽. 78) Goodfellow to the Chief of Japan-Manchuria Branch, “Memorandum”, Feb. 23, 1943, 「韓國獨立運動史 資料(24) 臨政篇Ⅸ」, 234쪽. 79) Stimson to Rhee, Feb. 25, 1943, 「韓國獨立運動史 資料(24) 臨政篇Ⅸ」, 244~245쪽. 80) 미국무부 문서번호 895.01/214, Berle to Rhee, Mar. 1, 1943. 81) Rhee to McCloy, Mar. 16, 1943, 「韓國獨立運動史 資料(25) 臨政篇Ⅹ」, 280쪽. 82) McCloy to Rhee, Mar. 20, 1943, 「韓國獨立運動史 資料(25) 臨政篇Ⅹ」, 283쪽. 83) McCloy to Rhee, Mar. 25, 1943, 「韓國獨立運動史 資料(24) 臨政篇Ⅸ」, 288쪽.
 
  84) Military Intelligence Service, “Memorandum for the Chief, Far East Unit”; “Subject : Koreans in the United States and Hawii”, Mar. 19, 1943; “Subject : Korean troops units”, Mar. 22, 1943; “Memorandum for Mr. McCloy”, “Subject : Korean Troop Units”, Mar. 22, 1943, 「韓國獨立運動史 資料(24) 臨政篇Ⅸ」, 279~283쪽. 85) 독립기념관 소장문서 도1074, United Korean Committee to Korean Commission, Feb. 13, 1943, 도1084, United Korean Committee to Korean Commission, Feb. 19, 1943. 86) 미국무부 문서번호 895.01/230, Douglass and Avison, “Dear Friend”, Feb. 9, 1943. 87) 미국무부 문서번호 895.01/232, “Joint Resolution”, Mar. 31, 1943. 88) 「주미외교위원부통신」(제34호), 1943년 5월10일자.
 
  89) 미국무부 문서번호 895.01/241, “The Municipal Court for the District of Columbia to Department on Diplomatic Community, Apr. 7, 1943. 90) 미국무부 문서번호 895.01/232, Hull to Bloom, Apr. 15, 1943 ; 미국무부 문서번호 895.01/263, Hull to Connally, June 18, 1943. 91) 미국무부 문서번호 895.01/257, Rhee to Roosevelt, May 15, 1943. 92) 미국무부 문서번호 895.01/257, M. M. McIntyre to Department of States, May 17, 1943. 93) 미국무부 문서번호 895.01/257, Adolf A. Berle, Jr. to General Watson, May 26, 1943. 94) 미국무부 문서번호 895.01/257, Edwin W. Watson to Rhee, May 26, 1943.
 
  95) Rhee to Colonel Karl T. Gould, June 11, 1943, 「韓國獨立運動史 資料(25) 臨政篇Ⅹ」, 332쪽. 96) Donald M. Davise, “Memorandum : Conference on Korean Situation”, June 8, 1943.
 
  97) Robert A. Kinney, “Memorandum for the Chief, Japan Branch”, “Subject : Conference on Koreans and Korean Situation, June 7, 1943,” June 9, 1943,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 재미한인자료」, 15~17쪽. 98) Hoffman to Donovan, “Memorandum” “subject: Korean Situation”, June 15, 1943, 「Napko Project of OSS――재미한인들의 조국정진계획」, 2001, 國家報勳處, 85~86쪽.
 
  99) Karl T. Gould to Rhee, June 4, 1943, 「韓國獨立運動史 資料(25) 臨政篇Ⅹ」, 325~326쪽. 100) Rhee to Lt. Colonel Karl T. Gould, June 11, 1943, 「韓國獨立運動史 資料(25) 臨政篇Ⅹ」, 331~332쪽. 101) Goodfellow to Major W. B. Edwards, June 9, 1943,「韓國獨立運動史 資料(25) 臨政篇Ⅹ」, 327~329쪽. 102) Rhee to Col. Karl T. Gould, June 28, 1943, 「韓國獨立運動史 資料(25) 臨政篇Ⅹ」, 335쪽. 103) 張基永, 「李博士와 함께한 半生」, 「激浪半世紀 1」, 1988, 江原日報社, 206~2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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