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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世一의 비교 評傳 (64)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 李承晩과 金九

『나는 李承晩입니다!』― 短波방송으로 破壞공작 선동

손세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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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2년 3월 中國外交部長 宋子文이 루스벨트 大統領에게 5만 명 규모의 韓國人 게릴라部隊를 조직하고, 韓國臨時政府를 승인하자고 제의한 데 이어 中國軍事委員會는 4월6일에 臨時政府 승인문제를 정식으로 논의했다. 蔣介石은 美國이 먼저 臨時政府를 승인할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美國은 臨時政府 승인을 반대하면서 中國政府의 움직임에 제동을 걸었다.
 
  金九는 美-日戰爭을 전후해서 「白凡逸志」 하권을 집필했다. 상권에 비해 獨立運動史의 성격이 짙은 회고록이었다.
 
  中國軍事委員會의 명령으로 5월15일에 朝鮮義勇隊는 光復軍 제1지대로 편입되고 金元鳳은 光復軍副司令으로 임명되었다.
 
  李承晩은 韓美協會를 내세워 美國務部에 임시정부 승인 압력을 넣었다. 크롬웰과 헐 長官 사이에 論爭이 벌어졌다.
 
  李承晩은 전략첩보국(OSS)의 전신인 정보조정국(COI)의 특수공작 사업에 참여하고, 張錫潤을 추천하여 101支隊員으로 버마戰線에 보냈다.
 
  李承晩은 1942년 6월13일부터 「美國의 소리」 短波放送으로 국내 동포들에게 日本에 대한 파괴공작을 호소했다. 이 放送은 그의 名聲을 드높이는 說話가 되었다.
 
 

  (1) 中國의 臨時政府 승인을 美國이 저지
 
 
  중국 국민정부의 입법원 원장 孫科가 한국 임시정부를 즉시 승인할 것을 주장한 것과 때를 같이하여 워싱턴에 머물고 있던 중국 외교부장 宋子文은 1942년 3월25일에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나서 한국의 독립운동과 임시정부 승인문제에 대한 중국 정부의 의견을 밝힌 각서를 수교했다. 송자문은 각서에서 러시아인들은 시베리아에 있는 극동군에 몇 해 동안 2개 내지 3개의 한국인 연대(regiment)를 편입시켜 놓고 있다고 지적하고, 그러나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전쟁이 개시되기 전에 이들의 활동이 격렬해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것은 러시아가 대일전쟁에 참가하게 되면 러시아 극동군 안의 한국인 병력이 한반도에서 큰 활동을 하게 될 것을 예견하고 경계를 표명한 것이었다.
 
 
  宋子文이 5만 명 규모의 韓國人 게릴라部隊 결성 제의
 
   송자문은 연합국, 특히 태평양전쟁협의회(the Pacific War Council) 참가국들이 한국의 독립을 촉성하고자 한다면 두 가지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제의했다. 하나는 중국에 있는 한국의 두 혁명정당을 통합시키고, 5만 명 규모의 한국인 비정규군(유격대)을 조직하여 화북지방에 배치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태평양전쟁협의회가 전후에 한국의 독립을 성취시킬 것을 선언하는 동시에 한국 임시정부의 승인을 공표하는 것이었다.1)
 
  루스벨트는 4월8일에 송자문의 각서를 웰스(Sumner Welles) 국무차관에게 보내면서 14일까지 검토보고를 하도록 지시했다. 루스벨트는 다음 주에 송자문과 회담하기로 되어 있었다. 웰스는 4월13일에 검토보고를 제출했다. 웰스는 보고에서 연합국, 특히 태평양전쟁협의회 회원국들이 한국인 비정규군의 조직과 무장을 지원하자는 제의에 찬성하며, 중국이 그러한 활동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중심지가 될 수 있다고 적었다. 그러나 중경에 있는 경쟁적인 두 혁명정당만을 통합시켜 한국 임시정부를 승인하는 것이나 태평양전쟁협의회가 한국의 독립을 보장하는 성명을 발표하는 것은 현 시점에서 적절하지 않다고 했다.2)
 
  태평양전쟁협의회는 미국, 영국, 중국 및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네덜란드, 캐나다의 대표들이 태평양지역에서의 대일전략에 대하여 의견을 교환하기 위하여 결성된 기구로서, 1942년 4월1일부터 워싱턴에서 회의를 열기로 되어 있었다.3)
 
 
  軍事委員會가 세 時間 동안 臨政承認問題 토론
 
  중국 정부에서는 4월6일에 군사위원회를 열어 한국 임시정부 승인문제를 정식으로 논의했다. 임시정부를 즉시 승인하자는 손과의 제의를 듣고 세 시간 동안 토론을 벌였으나 결론이 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출장 중인 蔣介石에게 최종 결정을 위임했다.
 
  중국 외교부 정무차장 傅秉常(부병상)은 이날의 군사위원회의 상황을 주중미국대사 고우스(Clarence E. Gauss)에게 극비로 알려 주면서, 한국 임시정부의 승인문제와 관련된 중국 정부의 기본적인 고려사항은 다음 두 가지라고 말했다. 하나는 소련이 한국 임시정부 승인에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에 대한 고려라고 했다. 시베리아의 극동군에 두 한국인 사단(division)이 있는데, 일본과 소련 사이의 전쟁이 벌어질 경우 이 사단병력은 한반도로 투입될 가능성이 있고 소련이 한반도에 어떤 형태의 정부를 수립하는 데 사용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만일에 중경의 한국 임시정부가 승인되면 어려운 상황이 벌어질 것이었다. 또 하나는 말레이, 네덜란드령 동인도[지금의 인도네시아] 및 그밖의 지역 식민지 인민들의 독립 요구에 대한 영국과 그밖의 국가들의 반응에 대한 고려라고 했다.4) 군사위원회의 논점도 이 두 문제였다.
 
  이러한 상황을 알지 못하는 조소앙은 4월9일에 주미외교위원부에 다음과 같이 타전했다.
 
  〈중국 외교부의 모든 중요 인물은 그 정부를 향하야 한국 임시정부 승인을 요구하였고 중국 국방위원장 王寵惠(왕총혜) 박사도 또한 한국 임시정부를 신속히 승인할 것을 요구하였으며, 한국의용군[중국 각지에 있는 모든 의용군]은 장차 한국 국군 기치하에 고쳐 편성할 터이올시다.〉
 
  조소앙이 말한 왕총혜는 중국 국방위원장이 아니라 장개석이 위원장인 국방최고위원회의 상무위원 겸 비서장이었다.5) 조소앙의 전보를 받은 李承晩은 바로 왕총혜에게 감사의 전보를 쳤고, 왕총혜는 李承晩에게 다음과 같은 답전을 보내왔다.
 
  〈李承晩 박사. 보내신 전보를 받고 많이 감사하얏습니다. 우리는 한국 인사의 제창을 참 마음으로 동정합니다. 왕총혜.〉6)
 
  중국 정부의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미국무부는 민감하게 반응했다. 국무차관 웰스는 4월11일에 고우스에게 중국 정부가 임시정부의 승인문제에 관한 어떤 결정적 행동을 하기 전에 이 문제에 관한 중국 정부의 견해와 결론을 미국 정부에 알려 주도록 하고,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다른 연합국들과 공동보조를 취하도록 중국 외교부 차장에게 〈긴급히〉 알리라고 훈령했다.7)
 
 
 
『蘇聯의 態度를 미연에 防止하기 위해…』

 
下院의원과 上院의원을 거쳐 1933년부터 1944년까지 美國務長官을 지낸 코델 헐.
  중국 정부는 장개석이 귀경한 뒤에 이 문제를 다시 검토하여, 4월10일에 한국임시정부를 지체없이 승인하기로 결정을 내리고, 미국의 의향을 타진했다. 외교부 차장 부병상은 고우스 대사에게 중국 정부의 이러한 결정은 중국 정부가 한국뿐만 아니라 타일랜드와 버마 등의 나라들에 대한 영토 확장의 의도가 전혀 없다는 것과 중국이 대서양헌장의 원칙을 준수하고 있다는 증거가 될 것이라고 설명하고, 아울러 장개석 총통은 이 문제에 대하여 미국 정부가 조속히 입장을 표명해 줄 것을 원하고 있다고 말했다.8)
 
  그러나 미국 정부는 단호히 반대했다. 국무장관 헐(Cordell Hull)은 중국 정부에 보낼 회답을 고우스에게 훈령하기에 앞서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제출하면서, 중국 정부가 한국 임시정부를 승인하려는 동기를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소련 정부도 한국문제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소련이 아직 대일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상황에서 한국 임시정부 승인문제를 가지고 소련에 접근하면 소련 정부는 당혹스러워할 것이다. 중국 정부가 중경에 있는 한국 임시정부를 승인할 경우 소련은 그들과 이념적으로 결합된 다른 어떤 한국인 그룹을 지원할 가능성이 있다. 중국 정부가 한국 임시정부를 승인하려는 의도는 소련이 지원하는 한국인 그룹의 발전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동기에서 나온 것일지 모른다. 한국의 독립과 한국 임시정부의 승인문제는 많은 복잡하고 델리케이트한 측면이 있다.〉9)
 
  이처럼 미국 정부는 중국이 자국의 영향력 아래 있는 한국 임시정부를 승인함으로써 소련이 그들이 지원하는 한국인 그룹을 한반도에 투입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려고 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중국 정부가 소련이 한국문제에 개입하는 것을 의식하여 한국 임시정부의 승인문제를 적극적으로 검토했던 것은 국민당 조직부장 朱家?가 6월11일에 장개석 총통에게 보낸 건의서에 더욱 구체적으로 표명되어 있다. 주가화는 소-일전쟁이 아직 발발하지 않은 이 시기에 중국 정부가 한국 임시정부를 때맞추어 승인하는 것이 가할 것 같다고 건의하면서, 그 이유로 다음 네 가지를 들었다. 첫째로, 우리는 항일전쟁을 5년이나 했으므로 아시아 문제에 대한 우리의 의견을 동맹국은 반드시 중시할 것이고 반대할 이유가 없다. 둘째로, 소련은 영국과 미국의 지원이 매우 급하고, 현재 일본과 중립협정을 맺고 있는 관계도 있어서, 어떤 의사표시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셋째로, 우리가 만일 승인한 뒤에 일본이 대소전쟁을 도발해도 소련은 한국 소비에트정부를 만들 수 없고, 그때 가서는 오직 우리를 따라 한국 임시정부를 승인할 수밖에 없다. 넷째로, 듣기에 소련이 훈련시킨 한국인 병력이 이미 수개 사단에 이른다고 하는데, 앞으로 일본을 상대로 작전할 때에는 반드시 한국 소비에트정부를 수립하고 각국이 승인하도록 요구할 것이다. 지금 우리가 먼저 승인하지 않는다면 그때 가서는 우리와 오랜 역사관계를 가진 한국 임시정부에 대해 대응하기가 필경 어려울 것이다.10)
 
  그러나 미국은 중국의 이러한 태도가 소련을 자극하여 한국문제를 더욱 어렵게 만들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미국으로서 더욱 중요한 고려사항은 항일전을 수행하는 데 소련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韓國의 獨立을 옹호하는 것과 특정그룹을 臨時政府로 승인하는 것은 별개 문제
 
  국무장관 헐은 5월1일에 중국 정부에 회답할 한국 임시정부 승인문제에 대한 미국 정부의 입장을 고우스에게 훈령했다. 회답의 내용은 미국은 한국 임시정부의 승인을 찬동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미국 정부는 한국의 독립을 옹호하는 것과 어떤 특정 그룹을 한국 임시정부로 승인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하며, 1) 한국 독립운동 그룹 사이에 통합이 결여되어 있고, 2) 한국 국외에 있는 그룹들과 국내의 한국인들의 연결도 거의 없을 가능성이 있는 점 등을 고려하여 한국의 어떤 특정 그룹을 즉시 승인할 의사가 없음을 중국 정부에 분명하게 알리라고 훈령한 것이었다. 또한 헐은 미국은 독일이나 일본군 점령지역 인민들이 자신들이 원하는 정부를 선택하고 수립할 수 있는 완전한 자유를 박탈할지도 모를 어떤 조치도 원하지 않는다는 원칙에 입각해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나 헐은 한국문제가 지리적 및 인종적 요인으로 미국보다는 중국에 더 직접적인 관심사일 것이라는 점을 인정하고, 만일 중국 정부가 한국 임시정부를 승인한다면 미국 정부도 지금의 입장을 재검토하겠다는 뜻을 중국 정부에 전하라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언설은 의례적인 외교사령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헐은 또한 미국 정부는 미국으로부터 정부로서의 공식승인을 바라는 미국 안의 다른 자유운동에 끼칠 파급효과 때문에 한국상황에 대해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되는 특수 사정을 아울러 중국 정부에 설명하라고 지시했다.11)
 
  고우스는 본국 정부의 훈령을 전달하기 위하여 5월6일에 외교부 차장 부병상을 만났는데, 이때는 이미 중국 정부가 한국 임시정부의 승인을 보류하기로 방침을 정해 놓고 있었다. 부병상은 고우스에게 은밀히 루스벨트 대통령과 송자문 외교부장 사이에 있었던 최근의 논의에 따라 그 사안은 이곳에서 재검토되고 있으며, 승인은 적어도 좀더 유리한 시점까지 연기될 것 같다고 말했다.12) 이렇게 하여 미국 정부는 물론 영국 정부도 안심했다.13)
 
  이처럼 중국 정부가 임시정부 승인을 간단히 포기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임시정부의 집요한 요구에도 불구하고 승인을 미루어 온 중국 정부가 승인문제를 적극적으로 검토하게 된 것은 미국 정부가 주중대사관을 통하여 임시정부의 존재와 국내외 동포들에 대한 영향력 등을 문의해 온 것이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중국 정부는 미국 정부의 그러한 관심이 임시정부에 대한 승인문제를 전제로 한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임시정부의 승인을 서둘렀고, 그러한 움직임을 미국 정부가 제지하고 나오자 쉽사리 태도를 바꾸어 버린 것이었다.14)
 
  그 뒤에도 미국무부는 임시정부 승인문제에 대하여 중국 정부가 미국 정부와 공동보조를 취하도록 외교적 압력을 행사했다. 미국무부는 표면적으로는 〈중국 정부의 정책에 맞추어〉 대한정책을 추진하는 듯했으나, 실제로는 중국이 미국과 사전에 의견을 교환하지 않고는 임시정부 승인과 관련된 어떠한 조치도 취할 수 없게 했다.15)
 
 
 
韓美協會 내세워 國務部에 壓力

 
  임시정부의 승인문제를 두고 중국 정부와 미국 정부 사이에 이러한 교섭이 진행되고 있는 것을 李承晩이나 임시정부는 알지 못했다. 헐 장관이 중국 정부에 통보할 미국 정부의 공식회답을 주중 미국대사에게 훈령한 바로 이튿날인 5월2일에 李承晩은 임시정부로 〈조만간에 미하원이 승인조치를 취할 것임〉이라고 타전했다. 이러한 李承晩의 근거 없는 전보는 국무부 극동국을 질색하게 만들었다. 그러지 않아도 극동국은 미국에서 발신되는 이러한 통신에 대한 사전 검열을 강화할 것을 제의하고 있었다.16)
 
  李承晩은 5월 들어 주미외교위원부 대신에 한미협회를 전면에 내세워 〈공격적인 캠페인〉을 벌였다. 李承晩은 2월 중순에 국무부의 호스킨스(Harold B. Hoskins)와의 전화통화에서 앞으로 더욱 공격적인 캠페인을 벌일 것이라고 예고했었다.17)
 
  한미협회 회장 크롬웰(James H. R. Cromwell)은 5월5일에 국무장관 헐에게 편지를 보내어, 한국인들이 참고 견디는 데에도 한계가 있다고 말하고, 대한민국의 사실상의 정부를 승인하는 것은 세계의 모든 인민들에게 대서양헌장이 말뿐이 아니라 실행임을 입증하는 절호의 기회라고 주장했다. 그러한 조치는 2,300만 한국인이 〈일본의 뒷마당에 화톳불을 지피는〉 군사적 이익을 더하게 될 것이라고 크롬웰은 적었다. 한국인은 모든 준비가 되어 있는데, 미국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음으로써 그것이 지연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었다. 크롬웰은 다음과 같이 적었다.
 
  〈그러나 한국 애국지사들의 봉사는 값싼 것이 아니다. 그들은 연합국의 앞잡이로 이용당할 수 있는 용병들이 아니다. 한국 젊은이들은 그 멍에에서 벗어나려고 하고 있다. 그러나 李承晩 박사는 국무부가 대한민국의 사실상의 정부에 대한 승인을 통하여 미합중국 대통령과 영국 수상이 『자신들의 주권과 자치를 강제로 박탈당한 민족들에게 그것이 반환되는 것을 보고 싶다』고 한 약속이 이행될 때까지 그들을 놓아 주지 않을 것이다.〉18)
 
  헐은 5월20일에 크롬웰에게 답신을 보냈다. 헐은 먼저 루스벨트 대통령이 2월23일의 라디오 연설에서 한국인에 대해 언급했던 사실을 상기시킨 다음, 한국의 독립운동 그룹들뿐만 아니라 추축국의 점령 아래 있는 나라의 망명그룹들이 저마다 대표성을 주장하고 있으나, 미국 정부의 희망은 이 나라들이 해방되었을 때에 국민들이 자유로운 선택에 의하여 정부가 세워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헐은 모든 망명그룹들이 그들의 능력범위 안에서 전쟁의 승리를 위하여 투쟁할 때에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들은 그것에 상응하는 지원을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것은 크롬웰이 대일투쟁의 전제조건으로 강조한 임시정부의 승인을 거부한 것이었다.19)
 
 
  韓國에 長期滯留한 16명의 證言
 
  크롬웰은 6월3일에 다시 헐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는 먼저 대일전을 치르는 지난 6개월 동안 우리는 귀중한 한국동맹자들에게 그들이 우리에게 간절히 요망한 실질적인 지원을 하지 않았다고 지적하고, 이러한 지연정책이 미국과 일본의 어느 쪽에 이익이 되겠느냐고 물었다. 그는 〈우리의 목적은 명백하고 단순하다. 한국이 우리를 도울 수 있도록 그들을 도와주기를 원할 뿐이다〉라고 적었다. 크롬웰은 미국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하고 실질적인 원조를 해준다면 한국 안에서 〈잘 조직된 혁명활동〉이 쉽게 진전될 수 있을 것이고, 결과적으로 대일전에서 승리하는 데 기여할 것이라고 강조했다.20) 그러면서 크롬웰은 자료 두 가지를 첨부했다. 하나는 한국에 장기 체류한 미국인들의 증언이었고, 다른 하나는 임시정부의 역사를 기록한 장문의 문건이었다. 증언자 16명은 길게는 41년, 짧게는 13년 동안 한국에 거주했던 것으로 미루어 이들은 거의가 선교사들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21) 이 자료들은 임시정부와 李承晩의 대표성을 부각시키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장기 체류자들의 증언은 다음과 같은 종류의 내용이었다.
 
  〈李承晩 박사만이 한국의 일반 대중에게 알려져 있다. 나는 한국에 30년 남짓 있다가 지난 여름에 귀국했다. 나는 아주 드물게 평범한 한국사람들과 가까이 지낼 수 있었고, 따라서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안다고 생각한다. 내가 아는 한 李박사를 제외하고는 그들에게 알려졌거나 그들이 신뢰하는 사람은 없다. 李박사의 이름은 일반사회에서 자연스럽게 회자되고 있다.〉22)
 
  헐은 크롬웰에게 다시 답장을 썼다. 그는 크롬웰이 불충분한 정보와 정부가 정책결정에서 고려해야 할 다양한 요소들을 무시하고 자기의 주장만 내세워 한미협회가 국무부와 논쟁을 벌이려는 듯한 인상을 준다고 비판했다. 그는 한국임시정부의 승인문제는 적절한 상황에서 처리되어야 하며, 특정한 그룹의 요청은 추축국들의 지배 아래 있는 국가들을 대변하는 책임을 맡고 있는 〈모든 그룹에 대한 정책을 감안하여〉 검토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헐은 또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승인을 고려할 때에는 중국과 영국 및 다른 국가 정부의 태도를 반드시 감안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헐은 편지 끝에 국무차관보 벌(Adolf A. Berle)을 만나서 이야기하라고 했다.23)
 
  벌은 개인적인 면담에서 크롬웰에게 실질적으로 자신들의 영토를 소유하고 있지 않은 정부들을 승인하는 것과 관련해서는 많은 문제가 있고, 승인은 중대한 사안이며, 또 어떤 정부가 다른 어떤 정부를 승인하는 경우에는 감당해야 할 일정한 책임이 뒤따른다는 점을 설명했다.24)
 
 
  헐과 크롬웰의 왕복편지를 팸플릿으로 발간
 
  그러나 한미협회는 임시정부를 승인하라는 압력을 늦추지 않았다. 1942년 8월14일에 대서양헌장 선포 1주년을 맞아 한미협회는 미국무부의 대한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보도자료를 발표했다. 이어 한미협회는 미국 정부가 임시정부를 승인하도록 공개적인 압력을 가하는 홍보활동을 벌일 목적으로 한 광고회사와 교섭했다. 그러나 이 광고회사는 한 국무부 관리를 만나 본 뒤에 한미협회의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기로 결정했다.25)
 
  李承晩은 8월14일에 로스앤젤레스의 재미한족연합회 집행위원장 金乎에게 편지를 보내어, 미국무부와의 〈우호적〉인 교섭이 끝난 지난 3월 중순 이후로 한미협회가 미국무부와 접촉한 완벽한 기록을 모았고 이제 그것을 일반에 공개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했다. 다음 단계는 전국적인 캠페인을 벌이는 일인데, 그것을 위하여 최소한 5,000달러가 소요된다면서 지원을 요청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임시정부의 승인을 얻어 낼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고 그는 적었다.26) 李承晩은 또 하와이의 재미한족연합회 이사부에도 같은 내용의 전보를 보냈다.27) 李承晩이 말한 완벽한 기록이란 크롬웰과 헐이 주고 받은 편지와 첨부 자료들이었다. 李承晩은 그것들을 모아서 「한국은 왜 승인을 받지 못하는가(Why isn’t Korea Recognized?)」라는 팸플릿을 발간했다. 팸플릿은 「요약」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첫째, 국무부는 〈여러 한인 그룹들〉이 존재하고 있고, 이들 가운데 어느 그룹을 승인할지 결정할 수 없다는 이유로 임시정부에 대한 승인을 거부하고 있다. 둘째, 한미협회는 그러한 그룹들의 존재를 부인해 왔고, 따라서 국무부에 임시정부에 대한 충성을 거부하는 그룹의 이름을 제시할 것을 요구했다. 셋째, 국무부는 이러한 질의에 대하여 답변을 하지 않고 있다. 결론적으로 한미협회는 국무부가 임시정부에 대한 불승인 이유를 밝히기를 거부하는 한 더 이상의 의견교환은 시간낭비일 뿐이라고 단정했다.28)
 
  다음 단계로 李承晩이 구상한 방안은 미국 의회를 통하여 국무부와 대통령에게 압력을 넣는 것이었다.
 
 
  (2) 朝鮮義勇隊를 光復軍 第一支隊로
 
 
  美-日戰爭 발발을 전후하여 金九가 개인적으로 심혈을 기울였던 일은 「백범일지」 하권을 집필한 것이었다. 상권을 쓰고 나서 13년이 지난 때였다. 상권과는 달리 「백범일지」 하권은 집필을 시작한 때와 끝낸 때를 적어 놓지 않아서, 언제 집필을 시작하여 언제 끝냈는지 알 수 없다. 상권을 집필하는 데에는 1년 2개월이 걸렸다. 하권은 상권 분량의 3분의 1 정도밖에 되지 않고 또 金九의 일정이 상권을 집필할 때와는 비교가 안 되게 바빴기 때문에 긴 시간을 들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하권을 탈고하고 나서 적은 「白凡逸志下卷自引言」에 〈하권은 重慶 和平路 吳師爺港 1호 임시정부 청사에서 67세 때 집필〉이라고 적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1942년에 집필을 마친 것은 확실하나 구체적인 시점은 알 수 없다. 1942년 2월25일에 사망한 임시의정원 의장 宋秉祚의 이야기를 적고 있고 「自引言」이 1942년 3월22일의 중국 입법원장 손과의 연설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본문의 탈고시점은 1942년 2월 말에서 3월 중순 사이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白凡逸志」 下卷을 집필
 
  「백범일지」 하권은 金九가 1919년 4월에 상해에 도착하여 경무국장으로 일하기 시작할 때부터 임시정부를 중경으로 옮기고 광복군을 창설할 때까지의 사실을 기술했다. 따라서 서술내용도 상권의 그것과 중복되는 것이 많다. 상권의 경우 탈고한 뒤에도 여러 차례 퇴고를 하면서 적절한 중간제목들을 달았으나, 하권에는 중간제목이 첫머리의 「上海到着」이라는 것뿐이다. 집필을 끝낸 뒤에 손질할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백범일지」 하권을 집필할 때의 사정을 金九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전후 사정을 논하면 상권을 기술하던 때에 임시정부는 외국인은 고사하고 한인도 국무위원들과 10여 명의 의정원 의원 이외에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으니, 당시 일반의 평판과 같이 임시정부는 이름만 있고 실체가 없었다. 그런데 하권을 쓸 무렵에는 의정원 의원과 국무위원들의 얼굴에서 수심에 찬 기색도 가시고 내무, 외무, 군무, 재무 등 4부 행정이 비약적으로 진전되었다.〉29)
 
  집필동기도 상권을 쓸 때와 하권을 쓸 때와는 큰 차이가 있다. 상권은 고국에 있는 두 아들에게 남기는 유서의 성격이 강했기 때문에 주로 개인사에 초점을 맞추어 기술했다. 특히 상권을 탈고하고 난 뒤에 원고를 베껴서 재미동포에게 보내면서 쓴 편지에서 자식들에게 전해지기 이전에는 회사 창고에 넣어 두고 공표하지 말아 달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상권은 공개되지 않는 것을 전제로 집필했다. 그러나 하권은 처음부터 여러 사람에게 읽히기를 바라고 썼다.
 
  〈그 뒤에 이봉창의 동경사건과 윤봉길의 홍구폭파사건 등이 진행되어 천만다행으로 성공하였으므로 쓸모없는 이 몸도 최후를 고할까 하여, 본국에 있는 자식들이 성장하여 해외로 나오거든 반드시 전해 달라는 부탁으로, 상권을 등사하여 미국과 하와이의 몇몇 동지에게 보냈다. 그런데 하권을 쓰는 지금에는 불행히도 비천한 목숨이 잠시 보존되고 자식들도 이미 성장하였으니, 상권을 등사하여 부탁한 것은 문제가 없게 되었다. 지금 하권을 쓰는 목적은 내가 50년 동안 분투한 사적을 기록하여, 숱한 과오를 거울 삼아 다시는 이 같은 전철을 밟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다.〉30)
 
「白凡逸志」下卷의 집필을 끝내고 쓴 金九의 自筆「白凡逸志自引言」.
 
  共産主義者들과의 대결로 일관해
 
  이처럼 「백범일지」 하권은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金九 자신의 활동과 함께 주변 인물들의 행적에 관해서도 비교적 상세히 기술한 독립운동사의 성격이 짙은 회고록이다. 金九는 평생을 항일운동에 헌신하면서도 내부적으로는 공산주의자들과의 대결로 일관했다. 따라서 「백범일지」 하권에서는 독립운동사에 대한 金九 자신의 입장을 확실하게 표명하고 있다. 임시정부 수립 초창기부터 격심하게 대립해 왔던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비판이 여러 가지 에피소드를 곁들여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경무국장 시절에 국무총리 李東輝가 같이 공산주의운동을 하자고 권유하는 것을 크게 나무라면서 공산주의에 대한 논쟁을 벌인 일들도 상권에는 언급하지 않았으나, 20여 년이 지나서 쓰는 하권에서 자세히 적었다. 그 뒤의 일들도 마찬가지였다. 상해 독립운동자들의 좌우합작운동이었던 1923년의 國民代表大會나 뒤이은 한국유일당운동, 1930년대의 좌우익진영의 협동전선운동과 朝鮮民族革命黨 결성 등에 대해 반대 입장을 취했고, 1940년대에 들어서도 중국 정부의 강력한 통합종용에도 불구하고 金元鳳이 공산주의자이기 때문에 임시정부에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반대한 일 등을 솔직하게 적고 있다. 공산주의에 대한 金九의 이러한 인식과 대응은 李承晩의 그것과 일치하는 것이어서 흥미롭다.
 
  만주지역의 무장독립운동이 분열하게 된 근본 원인도 공산주의자들의 책동 때문이었다고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공산당들은 상해의 민족운동자들이 자기의 수단에 농락되지 않음을 깨닫고 남북 만주로 진출해서, 상해에서보다 십백 배 더 맹렬하게 활동하였다. 李相龍의 자손은 殺父會까지 조직하고 있었다. 살부회에서도 체면을 생각해서인지 회원이 자신의 손으로 직접 아비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너는 내 아비를 죽이고 나는 네 아비를 죽이는 것이 규칙이라 하였다.
 
  남북 만주의 독립운동단체로 正義府, 新民府, 參議府 외에 南軍政署, 北軍政署 등 각 기관에 공산당이 침입하여 각 기관을 여지없이 파괴 훼손하고 인명을 살해하였다. 白狂雲, 鄭一雨, 金佐鎭, 金奎植 등 우리 운동계에 다시없는 건강한 장군들을 다 잃어버렸고, 그로 인하여 내외지 동포의 독립사상이 날로 미약해져 갔다.〉31)
 
  여기서 언급한 金奎植은 조선민족혁명당의 김규식과는 동명이인으로서 청산리 전투에도 참가했던 만주 무장단체의 지휘관이었다. 그리고 金九가 말한 공산주의 테러리스트 집단인 살부회의 존재를 확인할 만한 다른 자료는 발견되지 않는다.
 
  金九는 만주지역의 무장단체들과 임시정부의 관계가 제대로 발전하지 못한 것도 공산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들의 알력 때문이었다고 적었다.
 
  〈동북 3성[만주]의 정의부, 신민부, 참의부와 임시정부의 관계는 어떠하였던가. 임시정부가 처음 조직되었을 때에 3부는 임시정부를 최고기관으로 인정하고 추대하였다. 그러나 그 뒤 3부가 점차 할거하여 군정과 민정을 합작하지 않고 세력을 다투어 서로 전쟁까지 하였다. 『스스로 업신여기면 다른 사람도 나를 업신여기게 된다』 함은 바로 이를 가리킨 격언이라 할 수 있다.…
 
  종전의 정의, 참의, 신민 3부 중 참의부는 임시정부를 시종일관 옹호 추대하였다. 그런데 3부가 통일하여 정의부로 되자 서로 짓밟아 종막을 고하게 된 데에는 공산당과 민족당의 충돌이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그리하여 공산진영이나 민족진영의 말로는 같은 운명으로 귀결되었다.〉32)
 
  그런데 만주의 무장세력들의 활동이 중단된 이후의 정세변화를 설명하면서 1930년대 후반의 항일무장부대의 활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는 것이 눈길을 끈다.
 
  〈정세로 말하면 동북 3성 방면에 우리 독립군이 벌써 자취를 감추었을 터이나, 30여 년(독립선언 이전 근 10년 신흥학교 시대부터 무장대가 있었다) 오늘까지 오히려 金一○33) 등 무장부대가 의연히 산악지대에 의거하고, 압록과 두만을 넘어 왜병과 전쟁을 할 수 있는 데에는 중국의용군과도 연합작전을 하며 러시아의 후원도 받아서 현상을 유지하는 정세이고, 관내 임시정부 방면과의 연락은 극히 곤란하게 되었다.〉34)
 
  「金一○」은 金日成을 지칭하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金九가 「백범일지」 하권을 집필할 때에는 김일성 부대는 시베리아로 퇴각한 뒤였고, 만주에는 한인 무장부대가 없었다.
 
 
  바다 가운데 떨어져서 물고기 뱃속에 장사하는 것이 소원
 
  영양실조 때문에 각기병을 앓기도 한 金九는 어두컴컴한 오사야항 1호의 임시정부 청사에서 생명의 위협과 갖은 고난을 감내하며 살아온 67년의 생애를 회고하면서 처연한 감회를 느꼈다. 그는 상해시대를 〈죽자꾸나 시대〉였다면 중경시대는 〈죽어가는 시대〉라고 묘사했다. 그는 「자인서」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누가 나에게 어떻게 죽기를 원하느냐고 물으면, 나의 최대 욕망은 독립이 성공한 뒤에 본국에 들어가서 入城式을 하고 죽는 것이나, 작게는 미주 하와이의 동포들을 만나 보고 돌아오다가 비행기 위에서 죽으면 시신을 아래로 던져 산에 떨어지면 짐승들의 뱃속에, 바다 가운데 떨어지면 물고기 뱃속에 영원히 장사하는 것이다.…
 
  나의 칠십 평생을 회고하면 살려고 하여 산 것이 아니고 살아져서 산 것이고, 죽으려고 하여도 죽지 못한 이 몸이 필경은 죽어져서 죽게 되었도다.〉35)
 
  金九는 「백범일지」 상권은 펜으로 썼으나, 하권은 전문을 가는 붓으로 썼다. 이 무렵 중국 정부와 주고받는 문서는 모두 붓글씨로 작성했으므로 金九도 세필에 그만큼 익숙해져 있었던 것이다.
 
 
  蔣介石에게 面談 요청
 
  중국 정부는 1942년 들어 광복군과 조선의용대가 통합할 것을 강력히 종용했다. 외교부장 송자문이 루스벨트에게 5만 명 규모의 한국인 비정규군(유격대) 조직을 제의한 것도 광복군과 의용대의 통합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조선민족혁명당의 김원봉그룹은 처음에 군사통일보다도 정치통일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한국광복군과 조선의용대를 합병하여 조선민족혁명군을 편성하자고 주장했다. 광복군은 각 당파의 합작의 기초 위에서 설립된 것이 아닐 뿐 아니라 여러 가지 조건을 보더라도 명실상부한 국군이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이름까지도 복고적 색채가 짙고 혁명적 의의를 지니지 못했다고 주장했다.36)
 
  조선의용군 편성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김원봉그룹은 조선의용대를 한국광복군과 동등한 지위를 갖는 군대로 개편해 줄 것을 중국군사위원회에 요구했다. 李靑天과 李範奭은 2월8일에 주가화에게 편지를 보내어 그러한 조처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중경에 남아 있는 조선의용대 인원을 광복군에 편입하도록 독촉해 줄 것을 요망했다.37)
 
  金九는 2월9일에 장개석에게 「中國政府援助韓國獨立問題種種」이라는 공문을 보내어 세 가지 사항을 요청했다.
 
  (1) 조선의용대는 1, 2, 3 각 구대 대원 전원이 자발적으로 황하를 건너서 북쪽으로 갔으므로 남아 있는 소수 간부 10여 명은 마땅히 한국광복군에 편입시켜 무장통일을 기해야 한다. 중국 군사당국이 조선의용군을 새로 편조하여 한국광복군과 별도로 병행시키려 한다는 말이 있는데, 그것이 사실이라면 한국 무장대오의 통일을 저해할 뿐 아니라 내부 마찰을 일으킬 우려가 있다. 속히 소관기관에 명하여 다른 명의의 군대를 편성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래야 군령의 통일을 기할 수 있다. 金九 등은 책임지고 조선의용대의 잔여 간부인원을 접수하여 공평한 방법으로 광복군대열의 상당한 지위에 나누어 배치하겠다.
 
  (2) 한국광복군은 명령을 받고 정식으로 편조한 지가 이미 수개월이 지났으나 아직도 사령부 편제와 사병 훈련을 실시하지 못하고 있다. 태평양전쟁이 긴급한 상황에 있는 이때에 언제 항전의 대열에 참가할 수 있을지 기약이 없어서 초조하다. 주관기관에 명령하여 속히 편제와 훈련을 실시하게 하는 동시에 이미 훈련된 자에게는 무장을 발급해 주어 항전대열에 편입시켜 활동을 개시할 수 있게 조치해 주기 바란다. 또 현재 광복군에 편제되어 있는 인원의 급양도 매월 지급해 주어 기아를 면하게 해 주기 바란다.
 
  (3) 한국광복군의 항전참가와 전후의 한국독립 및 新東亞의 안정 등 중대 문제에 관해 대면해서 진언하기 위해 각하와의 회견을 바란다.38)
 
  주가화는 2월11일에 金九의 공문을 그대로 장개석에게 전하면서 金九의 제안이 타당하다고 말하고, 이른 시일 안에 金九를 면담하도록 건의했다.
 
  〈조선의용대의 인원은 복잡하고 다수의 대원은 공산대열에 가담해 간 것도 사실입니다. 연내에 한국 동지들 사이에 의사가 집중되지 않고 그들의 단결과 통일도 촉성시킬 수 없었던 것은 실로 좌경분자의 이용 때문이었습니다. 조선의용대의 잔여 소수인원을 광복군에 귀속시켜 정리하려는 金군의 요청은 필요한 것 같습니다. 회고하건대 광복군의 성립 준허를 받은 지 벌써 1년 반이나 지났고, 한국 인민의 기대는 매우 크며 재미 한교들이 이에 대해 더욱 중시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태평양전쟁의 긴급으로 보아 한국혁명을 발동시키는 것이 절실히 필요한 시기이므로 그 일을 적극적으로 진행하는 것이 적절할 것 같습니다. 군사위원회로 하여금 빨리 기왕의 명령에 따라 적절하게 처리하라고 해 주셨으면 합니다. 또 金군의 면담요청에 대해 시간을 내어 주시는 것이 좋으리라고 생각합니다.〉39)
 
  장개석은 何應欽 참모총장에게 金九의 요청사항을 심의하여 보고하라고 지시했다.40) 그러나 金九의 면담 요청에 대해서는 아무런 답변도 하지 않았다.
 
 
  臨時政府 수립기념식에서 中國政府의 臨政承認 촉구
 
中國軍參謀總長 何應欽.
  임시정부는 4월10일 오후 3시에 嘉陵賓館에서 임시정부 수립 23주년 기념식을 성대하게 거행했다. 이날의 기념식에는 손과, 주가화, 吳鐵城 및 국방최고위원회 상무위원 于右任, 白崇禧, 위원 馮玉祥(풍옥상) 등 많은 중국 인사들을 비롯하여 중경주재 각국 대사관 대표, 각국 신문기자 등 300여 명이 참석했다. 미정보조정국(COI) 사절단 대표 게일(Esson M. Gale)도 참석했다. 金九는 기념사에서 〈한국민중은 이미 반추축국전쟁에 참가하였으며, 한국인이 바라는 것은 중국 정부가 최단기간에 한국 임시정부를 승인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金九는 〈총동원령을 내려 3천만 인구를 책동하여 침략에 대항하여 세계가 진정한, 그리고 영구적인 평화를 누릴 때까지 싸울 것〉이라고 언명했다. 중국 국민당 비서장 오철성은 〈중국의 항전은 다만 잃어버린 땅을 회복하기 위할 뿐 아니라 또한 침략을 반항하기 위함이므로 우리가 최후 승리를 얻는 날이 즉 한국이 해방하는 때이다〉라는 요지의 연설을 했다.41)
 
  가릉빈관에서 외국인을 초대하여 기념식을 거행한 다음 날인 4월11일에는 중경의 한국동포들이 모두 참석한 별도의 기념식을 거행했다. 이날의 기념식에는 한국독립당 인사들뿐만 아니라 김원봉, 尹琦燮, 崔東旿 등 민족혁명당 인사들과 申翼熙 등 임시정부에 참여하지 않고 있는 인사들까지 참석하여 축사를 했다. 이들은 축사에서 임시정부에 절대로 충성하며 金九 주석의 영도 아래 모든 역량을 집중하여 다 같이 독립자유의 대도로 매진하자고 역설했다.42)
 
  광복군과 조선의용대의 통합문제가 거론되고 있는 상황에서 임시정부는 4월20일에 제28차 국무회의를 열고 조선의용대를 광복군에 합편하기로 결의했다.43)
 
 
  金元鳳을 光復軍副司令으로
 
  장개석의 검토지시를 받은 하응흠은 여러 차례 김원봉을 만나서 광복군과 조선의용대의 통합문제를 상의하고 나서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김원봉은 자신이 광복군 부사령에 취임하고 조선의용대는 광복군의 1개 지대로 개편하는 조건으로 광복군과 합병할 것을 수락했다. 하응흠은 또 金九가 광복군의 무기와 급양의 지원을 요청한 것에 대해서는, 광복군은 현재 총사령부만 성립되어 있고 아직 부대 편성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당장 무기를 공급해 줄 필요는 없을 것이라면서, 장래 간부에 대한 훈련이 성숙되고 부대 편성이 완료된 때에 다시 책정하겠다고 보고했다. 그리고 급양과 경비 등은 지금도 매월 지급하고 있으므로 편제가 확정된 뒤에 실제 상황에 맞추어 지급하겠다고 했다.44)
 
  金九는 중국군사위원회가 조선의용대를 광복군의 1개 지대로 편입시키고, 김원봉을 광복군부사령으로 임명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는 것을 朴贊翊을 통하여 알았다. 문제는 김원봉을 부사령으로 임명하는 일이었다. 부사령은 광복군 편제에 없는 직책이었다. 중국 군사위원회의 논의는 심각한 인사권 침해임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金九가 5월1일에 주가화에게 보낸 편지는 그의 곤혹스러운 심정이 그대로 표명되어 있다.
 
  〈최근에 군사위원회 쪽에서 조선의용대를 한국광복군에 귀속시켜 1개 지대로 개편하고, 그 대의 대장인 陳國彬[김원봉]을 방법을 강구하여 광복군부사령의 명의로 임용하겠다는 주장에 우리 쪽 동료 일동은 다같이 찬동하는 뜻을 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사령이라는 명의는 현 편제 중에 그러한 직책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이미 설치되어 있는 3개 처 가운데에도 적당한 인재가 없어 공떠 있으나, 보충을 기다리는 인원은 많습니다. 사람을 위해 자리를 만든다는 것은 혁명과정에 있어서는 하나의 나쁜 사례가 되겠으나, 이미 통일단결을 위해 합하여 편성하기로 도모했다면 마땅히 眞實無私로 선후를 위해 서로 상의해야 하고, 개인의 위치에만 근근할 일은 아닙니다. 그리고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직원 중의 한국인 인원의 임용은 다 우리 쪽에서 신중히 선택하여 보충한 다음에 광복군총사령이 보고하여 처리케 하겠습니다. 이상 각항에 대해 제만사하시고 전도를 위하여 전해 올림으로써 염려되지 않도록 해 주셨으면 합니다.〉45)
 
  그러나 이러한 金九의 의견은 심각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장개석은 하응흠의 보고를 타당하게 생각하고 5월8일에 주가화에게 하응흠의 보고대로 처리하라고 지시했다.46) 주가화는 5월11일에 장개석의 지시사항을 金九에게 알려주었다.47)
 
 
  『光復軍은 志願兵이나 義勇隊와 달라…』
 
  광복군에 대한 중국정부의 지원이 절실한 상황에서 임시정부는 중국 군사위원회의 결정사항을 거절할 수 없었다. 임시정부는 군사위원회의 결정에 따르기로 하고 5월13일에 국무회의를 열어 한국광복군에 부사령 직제를 증설하여 총사령을 보좌하고, 총사령이 유고할 때에 그를 대리하게 하기로 결의했다.48)
 
  이로써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으로 편입됨과 동시에 김원봉을 제1지대장 겸 부사령으로 임명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마련되었다.
 
  金九는 5월17일에 하응흠에게 편지를 보내어 국무회의 의결사항을 알려 주면서 다음과 같은 의견을 첨부했다.
 
  〈한국광복군 소속 인원 가운데 한국인 인원의 임면은 마땅히 우리 쪽에서 결정한 뒤에 한국광복군총사령이 군사위원회에 보고하여 처리하면 될 것입니다. 이는 주권국가가 우방을 원조하여 독립군이나 혁명군을 편조한 사례에 따른 것이오니 양찰해 주시기 바랍니다.〉49)
 
  金九는 또 이튿날에는 군사위원회 시종실 주임 賀耀祖(하요조)에게도 편지를 보내어 국무회의의 의결사항을 알리고, 광복군총사령부의 한국인 인원의 임면권에 대한 임시정부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거듭 밝혔다.
 
  〈한국광복군은 장래 신한국의 건국군대가 될 집단입니다. 중국 경내에서 항전에 참가하는 기간에는 중국 최고통수부의 지휘와 절제를 받는 것이 당연하나, 한국광복군의 성질은 분명 현재 중국항전에 참가하고 있는 각국의 지원병이나 의용대와는 다른 것입니다. 따라서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소속 인원 가운데 한국인 인원의 임면은 마땅히 우리 쪽에서 결정한 뒤에 한국광복군 총사령이 군사위원회에 보고하여 처리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장 위원장님께 전해 주시기 바랍니다.…〉50)
 
  그러나 중국 군사위원회는 金九의 정중한 이의를 묵살했다. 金九가 하응흠에게 편지를 보낸 바로 그날 군사위원회는 한국광복군 총사령부에 부사령 직제를 증설하고 김원봉을 부사령으로 파견하는 동시에 본래의 조선의용대를 광복군 제1지대로 개편한다는 임용명령을 일방적으로 통보해 왔다.51) 金九는 몹시 불쾌했다. 그러나 참을 수밖에 없었다. 金九는 5월21일에 주가화에게 광복군 부사령 임명문제로 분란이 일어나지 않게 조정해 줄 것을 부탁하는 편지를 썼다.
 
  〈이러한 인사문제로 필요없는 분란이 발생할 수 있어서 앞날이 실로 우려됩니다. 그러므로 이달 18일에 저는 하총장과 하주임에게 각각 편지를 보내어 한국인 인원 임명문제에 대해 명확한 규정을 지시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결과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사오니 귀하께서 중간에서 알선하고 시정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52)
 
  그러나 중국군사위원회는 광복군 9개준승 2항, 곧 〈한국광복군이 본회 통할지휘에 귀속한 뒤에 우리나라 경내에서 계속 항전하는 기간 동안과 한국독립당 임시정부가 한국 경내에 진입하기 전까지는 오직 우리나라 최고통수의 유일한 군령만 접수해야 한다〉는 규정에 저촉된다면서 인사와 편제에 대한 金九의 요청을 들어 줄 수 없다고 통보했다.53)
 
 
  金元鳳도 밤새워 술 마시며 울어
 
  김원봉도 중국군사위원회의 일방적인 명령이 불만이었다. 중국군사위원회의 광복군 편입 통고를 받은 5월15일 저녁에 김원봉은 밤새워 술을 마시며 울었다고 한다.54) 그리하여 김원봉은 광복군부사령과 지대장에 취임하지 않고 미루다가 12월5일에 가서야 취임했다. 조선의용대의 광복군 편입은 중경에 잔류한 간부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는데, 군무부장 曺成煥이 작성한 편제표에 따르면, 이때에 광복군에 편입된 조선의용대는 모두 23명이었다.55) 그런데 이 명단에는 이미 팔로군 지역으로 이동한 朴孝三, 李益星, 王子仁, 楊民山, 趙烈光 등의 이름도 들어 있어서 실제로 중경에 남아 있던 조선의용대 대원의 수는 이보다 훨씬 적었을 것이다.
 
  임시정부가 9개준승을 받아들인 이후 중국군사위원회는 광복군 기구를 대폭 축소하고, 부족한 인재를 보충한다는 명목으로 중국인을 광복군에 파견했다. 그것은 광복군 간부를 중국군으로 임명하여 광복군의 통할을 확고하게 하겠다는 의도에서 나온 조치였다. 중국군사위원회는 3월13일자로 참모장 이범석 대신에 중국군사위원회 고급 참모인 尹呈輔를 임명한 것을 비롯하여 광복군 각 부서에 중국군 장교를 간부로 임명했고, 이들은 4월1일부터 광복군에서 근무하기 시작했다.56) 그리고 9월에는 중국군사위원회의 지시에 따라 서안에 있던 광복군 총사령부를 중경으로 다시 옮겼다. 1942년 10월에 열린 제34차 임시의정원회의에 군무부장 曺成煥이 제출한 「군무부군사보고」에 따르면,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에 편입된 뒤의 광복군 총사령부 간부 인원은 45명이었는데, 이 가운데 한국인은 12명이고, 나머지 33명이 중국인이었다. 3개 참모부서 가운데에서 참모처와 정훈처에는 거의 중국인이 배치되었고, 사상교육을 담당하는 정훈처는 전원이 중국인으로 충원되었다.57) 이처럼 중국군사위원회는 중국군 장교 파견을 통하여 광복군의 작전권, 운영권, 인사권, 정훈사업 등 모든 분야를 자신들의 뜻대로 통제하고 간섭할 수 있도록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광복군이 독자적인 활동과 발전을 도모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이러한 상황을 시정하기 위해 군무부에서는 1) 광복군을 우방군대로 인정하거든 한국인 임용은 우리 정부의 임명으로 상당하게 수용할 것을 간섭하지 말 것, 2) 정훈사무는 한국인이 주관할 것, 3) 군수물자는 국제차관으로 중국의 역량껏 공급할 것의 3개항을 중국군사위원회에 제출했다.58)
 
  이 무렵에 李承晩이 金九에게 비밀히 보낸 편지에서 광복군을 미국 당국의 지휘 아래 두자고 제의한 것은 이러한 사정을 李承晩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3) 「美國의 소리」 통하여 國內同胞들에게 放送
 
 
  李承晩은 미국무부를 상대로 임시정부 승인교섭 외교에만 전력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오히려 한인 무장부대를 조직하여 국내와 일본 본토에 침투시켜 파괴활동을 벌이는 계획을 추진하는 일에 더 몰두하고 있었다. 임시정부의 승인문제는 그러한 활동을 효과적으로 전개하기 위하여 필요한 일일 뿐이었다. 이 무렵 李承晩이 폭파할 철도터널을 표시한 한국지도를 가지고 다닌 것도 그 때문이었다.
 
  미국 정부는 한국 임시정부에 대한 불승인 정책을 견지하면서도 군사적으로는 한국인 무장조직을 활용하는 문제에 대해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었다. 대륙방면에서 일본 본토와 일본의 점령지역에 접근하고자 할 때에 한반도가 갖는 전략적 중요성 때문이었다.59)
 
 
  情報調整局(COI)의 特殊工作事業 도와
 
情報調整局(COI)을 창설한 도노반 장군.
  한국인 무장부대의 활용문제에 대하여 적극적인 태도를 보인 기관은 정보조정국(Cordinator of Information : 이하 COI)이었다. COI는 루스벨트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진주만 공격이 있기 전인 1941년 7월11일에 국가안보와 관련된 정보수집과 분석을 전담하는 기구로 발족했다. 책임자는 루스벨트의 신임을 받고 있던 공화당의 도노반(William J. Donovan)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때에 뉴욕의 「싸우는 제69부대」 지휘관이었던 도노반은 월스트리트의 영향력 있는 변호사였다. 처음에 설치된 COI의 주요부서는 대외홍보처(Foreign Information Service: FIS)와 조사분석과(Reserch and Analysis: R&A)였다. 셔우드(Robert Sherwood) 휘하의 FIS는 반추축국 선전을 위한 단파 라디오 방송을 주로 담당했고, 박스터 3세(James P. Baxter Ⅲ) 휘하의 R&A는 공개된 첩보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COI는 비밀첩보(Secret Intelligence : SI)와 특수공작(Special Operation : SO)의 두 가지 사업을 추진했다. 먼저 추진된 것은 비밀첩보 분야의 작업이었다. COI는 중국을 통한 대일정보수집 계획을 추진했는데, 그 임무를 담당할 적임자로 도노반이 위촉한 사람이 李承晩을 잘 아는 게일(Esson McDowell Gale)이었다. 게일은 일찍이 李承晩이 그에게서 세례를 받고 싶어 했을 만큼 옥중의 李承晩을 돌보았고, 출옥한 李承晩이 1904년에 도미할 때에는 친지들에게 소개장을 써 주었던 캐나다 출신의 장로교회 선교사 게일[James Scarth Gale, 奇一]의 조카였다.
 
  1908년에 중국 북경미국공사관의 학생통역관으로 임명되었던 게일은 1911년부터 1913년까지는 부총영사로 일했고, 1914년에 鹽稅局(Chines Salt Tax Services)에 취직한 뒤에, 1927년부터 1932년까지 귀국하여 수학과 교수생활을 한 것 말고는, 1937년에 일본인들에 의해서 출국당할 때까지 23년 동안 그곳에서 근무한 중국통이었다.60)
 
 
  게일使節團 파견 위한 대규모 部間會議에 참석
 
  COI는 게일 사절단(Gale Mission)의 중국 파견을 위해 1941년 9월부터 12월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대규모 부간회의(interdepartmental conferences)를 개최했고, 그해 11월에는 중국 상해를 거점으로 비밀첩보기관을 설치하는 방안을 검토했다.61) 李承晩은 바로 이 회의에 참석함으로써 COI와 관계를 맺게 되었다. 李承晩이 이 회의에 참석하게 된 것은 게일뿐만 아니라 COI의 제2인자인 굿펠로(Preston M. Goodfellow)가 李承晩과 친분을 맺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李承晩은 1941년 여름에 게일의 소개로 굿펠로와 알게 된 이래 이미 진주만사건이 나기 전에 여러 차례 저녁을 같이했고, 1942년 1월1일에는 자신의 저서 「日本內幕記(Japan Inside Out)」를 증정하기도 했다.62) 굿펠로는 1942년 2월27일부터 3월1일까지 워싱턴의 라파예트 호텔에서 열린 한인자유대회(Korean Liberty Conference)에 중경과 하와이 대표를 출석시키기 위해 국무부와 교섭했을 만큼 열성적으로 李承晩을 지원했다.63)
 
  게일은 1942년 1월16일에 「미국에 거주하는 한국인 및 그들의 활동」이라는 조사보고서를 작성했다. 보고서에는 李承晩과 함께 徐載弼, 韓吉洙, 安昌浩, 姜鏞訖, 韓舜敎 등에 대해서 언급했는데, 李承晩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李博士의 오랜 기간에 걸친 혁명활동은 의심의 여지없이 풍부한 경험을 가져다 주었고, 그것이 그의 급진주의를 원숙하게 만들므로써 그는 정치가로서의 자질을 갖추게 되었다. 나는 그가 「중화민국의 아버지」 孫文이 만년에 했던 역할을 한국을 위해 하고 있는 인물로 간주한다.〉64)
 
  미-일전쟁의 발발 이후로, 李承晩이 「공포서」에서 천명한 바와 같은, 한국인들을 대일특수작전 및 정보 공작에 활용하자는 제안은 COI를 포함한 미국 정부기관에서 활발히 논의되었다.
 
  1941년 12월23일에 워싱턴의 변호사 체임벌린(Culver B. Chamberlain)이 한국전선(Korean Front)을 결성하여, 블라디보스토크를 통하여 한국으로 침투하는 계획서를 국무부 극동국에 제출했다. 국무부 극동국과 전쟁부 군사정보국은 이 제의를 검토했으나, 실행에 필요한 정보부족으로 보류되었다.65)
 
  1942년 1월17일에는 브루스터(Francis T. Brewster)가 전쟁부 군정보국 책임자 마일스(Sherman Miles) 준장에게 중국군의 승리를 위해 한국군을 제5열로 준비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66)
 
 
  「敵後工作을 위한 韓國人 고용」
 
  1월24일에 게일은 「적후공작을 위한 한국인 고용」이라는 건의서를 도노반에게 제출했다. 그는 일본 본토와 한반도와 만주에 있는 한국인들을 대일정보수집과 사보타주에 활용하는 방안을 건의했다. 게일은 일본 점령지역에서 특수공작을 수행할 민족으로는 한국인이 가장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설명했다. 공작 거점은 임시정부가 있는 중경으로 정했다. 게일은 이 건의서에서 의심스럽기는 하다면서도, 임시정부가 3만5,000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고 그 가운데 9,250명이 중경에 있다는 한국인 소스의 정보를 인용했다. 9,250명이라는 숫자는 金九가 1월3일에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 앞으로 보낸 전보에서 언급한 숫자와 일치하는 것이었다(「月刊朝鮮」 2007년 6월호, 「美-日戰爭으로 슬픔의 눈물은 끝났다!」 참조). 게일은 이러한 인적 자원을 대일공작에 활용하기 위하여 미국에서 선발된 요원들을 중경에 보내어 중경의 한국청년들을 대상으로 한 특수훈련학교를 설립할 것을 건의한 것이었다.67) 이 건의서는 그날로 도노반에 의해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보고되었다.68)
 
  사흘 뒤인 1월27일에는 드패스 2세(M. B. Defass Jr.)가 「올리비아(Olivia)」라는 이름이 붙여진 구체적인 작전계획서를 도노반에게 제출했다. 대상지역은 한반도, 화북, 양자강, 대만, 인도차이나, 타일랜드, 필리핀 군도, 네덜란드령 동인도[지금의 인도네시아] 등이었다.69) 한반도가 작전구역의 우선순위에서 첫 번째로 꼽힌 것은 COI가 한반도의 지리적 이점과 아울러 李承晩과 임시정부의 과장된 선전에 따른 광복군 병력에 대한 기대가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한미협회의 해리스(Frederick B. Harris)와 스태거스(John W. staggers)와 윌리엄스(Jay Jerome Williams)는 2월4일에 공동명의로 스팀슨(Henry L. Stimson) 전쟁부장관에게 편지를 보내어 전복활동을 할 한국인을 조직하는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李承晩을 책임자로 임명하라고 요청했다.70)
 
 
  中國情報機關에서 게일使節團 活動에 반발
 
  게일사절단은 1942년 2월8일에 뉴욕을 출발하여 3월8일에 중경에 도착했다. 그리고 8월까지 다섯 달 동안 중국에 머물렀다.
 
  중경에 머무는 동안 게일은 金九를 비롯한 임시정부 인사들과 접촉하면서 그들에 대한 지지의사를 공개적으로 표명하곤 했고,71) 임시정부에서도 게일에게 임시정부의 국내공작과 관련된 정보를 제공했다.72)
 
  그러나 게일사절단의 활동은 여러 가지 장애요인으로 말미암아 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장애요인이란 첫째로, 중국에서 한국인들을 미국 첩보활동의 요원들로 활용한다는 계획이 중국 정계의 실력자로서 정보기관인 조사통계국 국장을 맡고 있던 戴笠(대립)의 강력한 반발을 산 점, 둘째로, 李承晩을 중국 내 대리인으로 설정하여 대립이 지원하는 임시정부 및 광복군 쪽을 배제한 점, 셋째로, 주중미국대사 고우스와 게일 사이의 경쟁과 대립, 넷째로, 영국 비밀정보기관 SOE(Special Operations Executive)와 밀착함으로써 영국의 식민주의를 혐오하던 중국을 자극한 점, 다섯째로, 미국 정보처 명함을 가지고 다닌 게일의 개인적 실수 등이었다.73) 이 무렵 미국과 중국 사이에는, 장개석이 중국의 장래와 다대한 관련이 있는 작전 결정에 대해 미국이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는다고 불만을 표명하고 있는 데서 보듯이, 대일작전에서 긴밀한 협력체제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고우스 주중미국대사는 국민정부의 통솔능력과 경제정책을 비난하는 보고를 본국 정부에 보내고 있었다.
 
  게일은 7월 중순에 그의 공작요원으로 보이는 캉팅(T. H. Kangting)에게 〈워싱턴 COI의 전면적인 재조직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전에 논의했던 모든 계획은 취소되어야 한다〉라고 타전하고 있다.74) COI는 6월22일에 합동참모부 산하의 전략첩보국(Office of Strategic Service : OSS)로 재조직되었고,75) 굿펠로는 8월에 대령으로 승진하면서 OSS의 부국장이 되었다.76) 게일은 8월에 워싱턴으로 돌아왔다.
 
 
  101支隊에 張錫潤을 추천해
 
101支隊의 책임자 아이플러 소령과 대원들.
  COI는 비밀첩보 활동을 목적으로 게일사절단을 중경에 파견한 데 이어 특수공작(SO)활동을 위한 중국파견단도 준비했다. 드패스가 제안한 「올리비아 계획」을 구체화하여 최초의 특수작전부대를 창설한 것이었다. 부대는 먼저 중국과 한반도에서 활동하다가 최종적으로는 일본에 침투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것은 李承晩을 비롯한 재미한인들의 집요한 요구와 건의의 결과였다. 굿펠로는 중국, 버마, 인도 전구 미군사령관이자 장개석 연합군총사령관의 참모장으로 중국에 파견되어 있는 스틸웰(Joseph W. Stilwell) 장군과도 협의하여 하와이에 있는 아이플러(Carl Eifler) 대위를 이 부대의 지휘자로 임명했고, 1942년 3월에 1기 훈련생 21명을 선발했다. 李承晩은 몬태나에 있는 유학생 張錫潤을 이 부대의 대원으로 추천했는데, 장석윤은 유일한 외국인으로 선발된 것이었다. 장석윤은 강원도 횡성군 출신으로서, 1923년에 도미하여 밴더빌트 대학교(Vanderbilt University)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대학원 재학 중에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독립운동에 헌신하기로 결심하고 학업을 중단했다. 張基永의 연락을 받고 몬태나주 대표로 워싱턴 자유한인대회에 참석한 그는 3·1절 전날 밤에 李承晩의 지시에 따라 장기영과 李文相과 함께 워싱턴의 일본대사관 정문에 태극기를 내걸었고, 대회에서는 기미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대회를 마치고 몬태나로 돌아갈 때에 李承晩이 그를 불렀다.
 
  『자네 아무데도 가지 말고 기다려 주게』
 
  장석윤은 내용은 물어보지도 않고 『쓸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아무 때고 불러 주십시오』 라고 대답하고 헤어졌다. 장기영은 장석윤에게 李承晩이 미국 정부와 무엇인가 교섭을 벌이고 있다고 귀띔해 주었다. 몬태나의 농장으로 돌아가 있는 장석윤에게 李承晩의 전보가 도착한 것은 열흘 뒤였다.77) 장석윤은 서른여덟 살이었다.
 
  훈련생들은 메릴랜드주의 격리된 산중 캠프에서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았다. 이 캠프는 뒷날 캠프 데이비드(Camp David)로 개명되었다. 훈련은 정보첩보에 관한 것부터 폭탄·무기·통신의 이론과 사용법, 게릴라전법, 사보타주, 선무, 탈주와 도피 등 파괴공작에 필요한 모든 분야에 걸친 것이었다.
 
  훈련을 마친 대원들의 임무는 중경에 가서 한국독립청년단을 조직하고 이들을 훈련시키는 일이었다. 그리고 장석윤의 사명은 미군의 전세가 호전될 때를 기다렸다가 이들을 인솔하고 한국으로 잠입하는 것이었다. 또 한 가지 미국 정부에는 비밀히 李承晩과 金九 사이에 연락을 취하는 것도 그의 중요한 임무였다.78)
 
  4월 말에 교육을 마친 부대원들은 5월 말에 극동으로 출발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들은 COI의 특수부대 101지대(Special Unit Detachment 101: SUDET 101)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나, 정식 명칭은 기동부대 5405-A(Task Force 5405-A)였다. 101지대는 미군함 편으로 대서양을 건넜고, 아프리카를 거쳐 7월 8일에 인도의 뉴델리에 도착했다.
 
 
  光復軍을 美國當局의 指揮아래 두자고 金九에게 편지
 
컬럼비아 大學校에 유학 중인 전「東亞日報」主筆 張德秀(오른쪽)와 張錫潤. 1929년의 사진이다.
  아이플러는 중경으로 가서 8월 내내 그곳에 머물면서 金九와 조소앙 등을 만났고, 한국에 침투하는 루트를 개척하는 데 8,000달러의 경비와 4개월의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101지대는 중국에 정착할 수 없었다. 게일사절단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중국 조사통계국장 대립의 반대뿐만 아니라 COI에 대항의식을 지니고 있던 해군 중국파견단(Naval Group China: NGC)의 마일스(Milton Miles) 해군소령의 막후작용, 스틸웰의 거부 등 때문이었다. 미해군 비밀사절단으로 1942년 4월에 중국으로 파견된 NGC는 1943년 3월에 대립을 총사령관, 마일스를 부사령관으로 하는 중미합작기구(Sino-American Cooperative Organization)로 개편되었다. 그리하여 101지대는 버마의 산악지대로 들어가서 일본군을 상대로 유격전, 심리전, 정보전, 파괴공작 등의 활동을 벌이게 되었고, 소속도 COI의 직할부대에서 스틸웰의 지휘통제 아래 들어갔다. 이 부대는 1943년까지 버마와 중경을 오가며 특수공작활동을 벌였다.79)
 
  아이플러의 101지대 활동에 대해서는 李承晩뿐만 아니라 金九를 비롯한 임시정부 인사들의 기대도 컸다. 李承晩이 1942년 6월 무렵에 굿펠로에게 보낸 편지는 이때에 李承晩은 광복군의 통수권을 미국 당국의 지휘 아래 두는 것이 낫겠다는 판단을 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굿펠로 대령 귀하.
 
  나는 金九씨에게 한국군을 미국 당국의 지휘 아래 두는 문제를 이청천 장군과 극비로 의논해 달라고 편지를 썼습니다. 그리고 만일 그들이 동의한다면 아이플러 소령을 통하여 곧바로 나에게 알려 달라고 했습니다. 또 누구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했습니다. 李承晩.〉80)
 
  李承晩이 金九에게 보냈다는 편지는 장석윤이 지참하고 갔을 개연성이 크다. 그동안 李承晩과 金九 사이에 오가는 편지나 전보는 중국 정부 특무기관에서 검열하고 차단하는 경우가 많았다. 1942년 8월12일에 중경에서 스틸웰 장군이 전쟁부에 보낸 기밀전보에는 〈金九 장군은 李承晩 박사의 5월19일자, 6월1일자, 6월12일자 전보를 받지 못했다고 함. 아이플러가 굿펠로 중령에게 전해 달라는 요망사항임. 金九는 전심전력으로 협력할 것을 다짐함. 단 이곳의 정치상황을 고려하여 서서히 진행하려 함〉이라는 내용이 있는데, 그것은 아이플러가 미국을 떠나기 전에 李承晩으로부터 金九에게 전보를 친 날짜를 알아가지고 갔음을 시사해 준다.81) 金九는 아이플러를 위해 애국적인 청년 15명을 엄선하여 훈련시키게 하겠다고 했고, 이청천은 아이플러 소령의 계획에 전적으로 협조하겠다고 약속했다.82)
 
 
  국내에 전해진 「美國의 소리」 短波放送
 
金九에게 광복군을 美國의 지휘 아래 두자고 제의한 사실을 굿펠로에게 알리는 李承晩의 親筆 편지.
  李承晩은 COI의 요청에 따라 1942년 6월13일부터 7월에 걸쳐 개국한 지 얼마되지 않는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 한국어 단파방송을 통하여 여러 차례 국내외 동포들에게 우리 말과 영어로 육성방송을 했다. 내용은 진주만 공격이 있은 직후에 발표한 주미외교위원장 명의의 「공포서」의 그것과 비슷한 것이었다.
 
  「미국의 소리」 방송은 샌프란시스코에 위치한 COI의 대외홍보처의 후신인 전시정보국(Office of War Information: OWI)이 담당했는데, 5월에 한국에서 미국 간첩 혐의로 체포되어 20여 일 동안 감금되었다가 추방되어 귀국한 선교사 쿤스〔Edwin Wade Koons: 君芮彬〕가 한국어 방송을 감독했다. 한국어 방송 아나운서는 한국인 유학생들 가운데에서 선발했고, 뒤에 메릴랜드 주립대학 도서관에 근무하던 劉慶商(Kingsley Lyu)과 黃聖秀(S. S. Whang) 목사 등이 담당했다.83) 1903년에 북장로교회 선교사로 내한했던 쿤스는 1913년부터 서울의 敬信學校 교장으로 근무하다가 조선총독부의 신사참배 강요에 반대하여 교장직을 사퇴한 반일적인 선교사였다.84) 쿤스는 귀국하자마자 한국사정에 관한 장문의 보고서를 작성했고, OWI의 해외부 태평양국 한국과의 고문이 되었다.85)
 
  「미국의 소리」 전파를 타고 국내에 전해진 李承晩의 목소리는 67세의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낭랑했다. 그리고 선동적이었다. 내용은 여러 가지를 면밀히 배려하여 준비한 것이었다.
 
  李承晩은 먼저 자신이 전하는 말이 2,500만 민족의 〈생명의 소식〉이라고 강조했다.
 
  〈나는 李承晩입니다.
 
  미국 워싱턴에서 해내 해외에 산재한 우리 이천삼백만 동포에게 말합니다. 어데서든지 내 말 듣난 이는 잘 들으시오. 들으면 아시려니와 내가 말허랴는 것은 제일 긴요하고 제일 기쁜 소식입니다. 자세히 들어서 다른 동포에게 일일히 전하시오. 또 다른 동포를 시켜서 모든 동포에게 다 알게 하시오.
 
  나 李承晩이 지금 말하는 것은 우리 이천삼백만의 생명의 소식이오 자유의 소식입니다. 저 포학무도한 왜적의 철망철사 중에서 호흡을 자유로 못하는 우리 민족에게 이 자유의 소식을 일일히 전하시오. 감옥 철창에서 백방 악형과 학대를 받는 우리 忠愛男女에게 이 소식을 전하시오. 독립의 소식이니 곧 생명의 소식입니다.〉
 
  李承晩이 자신의 방송을 〈생명의 소식〉이라고 한 것은 무엇보다도 일본의 패망을 확언한 메시지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머지않아 일본에 벼락불이 쏟아질 것이라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왜적이 저의 멸망을 재촉하느라고 미국의 준비 없는 것을 이용해서 하와이와 필리핀을 일시에 침략하야 여러 천 명의 인명을 살해한 것을 미국 정부와 백성이 잊지 아니하고 보복할 결심입니다. 아직은 미국이 몇 가지 관계로 하야 大兵을 동하지 아니하였으매 왜적이 揚揚自得[양양자득: 뜻을 이루어 뽐내며 거들먹거림]하야 왼 세상이 다 저의 것으로 알지만은 얼마 아니해서 벼락불이 쏟아질 것이니, 日皇 히로히토(裕仁)의 멸망이 멀지 아니한 것을 세상이 다 아는 것입니다.〉
 
 
  『왜적의 군기창은 낱낱이 타파하시오!』
 
  李承晩은 이어 임시정부와 광복군의 활동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우리 임시정부는 중국 중경에 있어 애국열사 金九, 李始榮, 趙琬九, 趙素昻 제씨가 합심행정하여 가는 중이며, 우리 광복군은 李靑天, 金若山[金元鳳], 柳東說, 曺成煥 여러 장군의 지휘하에서 총사령부를 세우고 각방으로 왜적을 항거하는 중이니, 중국총사령장 蔣介石 장군과 그 부인의 원조로 군비 군물을 지배하며 정식으로 승인하야 완전한 독립국 군대의 자격을 가지게 되었으며, 미주와 하와이와 멕시코와 쿠바의 각지의 우리 동포가 재정을 연속 부송하는 중이며, 따라서 군비 군물의 거대한 후원을 연속히 보내게 되리니, 우리 광복군의 수효가 날로 늘 것이며, 우리 군대의 용기가 날로 자랄 것입니다.
 
  苦盡甘來(고진감래)가 쉬지 아니하니, 삼십칠 년간을 남의 나라 영지에서 숨어서 근거를 삼고 얼고 주리며 원수를 대적하던 우리 독립군이 지금은 중국과 영미국의 당당한 연맹군으로 왜적을 타격할 기회를 가졌으니, 우리 군인의 의기와 용맹을 세계에 드러내며 우리 민족의 정신을 천추에 발포할 것이 이 기회에 있다 합니다.〉
 
  국무위원들의 이름을 들면서 金九에 대해서도 〈주석〉이라고 별도로 호칭하지 않고 〈애국열사〉라고 뭉뚱그려서 같이 거명하고 있는 것이 눈길을 끈다. 그리고 광복군을 지휘하는 장군들로 李範奭의 이름을 생략하면서도 김원봉을 거명하고 있는 것은 김원봉 휘하의 조선의용대가 5월 말에 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된 상황과 韓吉洙 등 김원봉과 연계되어 있는 미주동포들을 배려한 데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면서 국내와 아시아 각지의 동포들에게 일본군의 군기창과 철로를 파괴하라고 힘주어 외쳤다.
 
  〈우리 내지와 일본과 만주와 중국과 시베리아 각처에 있는 동포들은 각각 행할 직책이 있으니,
 
  왜적의 군기창은 낱낱이 타파하시오!
 
  왜적의 철로는 일일히 파상하시오!
 
  적병의 지날 길은 처처에 끊어 바리시오!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할 수 있는 경우에는 왜적을 없이 해야만 될 것입니다.
 
  李舜臣, 林慶業, 金德齡 등 우리 역사의 열렬한 명장 의사들의 공훈으로 강포무도한 왜적을 타파하야 저의 섬 속에 몰아넣은 것이 역사에 한두 번이 아니었나니, 우리 민족의 용기를 발휘하는 날은 지금도 또다시 이와 같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지에서는 아직 비밀히 준비하야 숨겨 두었다가 내외의 준비가 다 되는 날에는 우리가 여기서 공포할 터이니, 그제는 일시에 일어나서 우리 금수강산에 발붙이고 있는 왜적은 일제히 陷沒(함몰)하고야 말 것입니다.〉
 
  우리 역사상의 〈열렬한 명장 의사〉의 대표적 인물로 임진왜란 때의 명장 이순신과 함께 많은 설화를 남긴 임진왜란 때의 김덕령과 병자호란 때의 임경업을 들고 있는 것이 눈길을 끈다.
 
  李承晩은 이어 자신의 활동 결과로 미국 정부가 임시정부를 승인할 날이 가까워 왔다고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내가 워싱턴에서 몇몇 동포와 미국 친구 친우들의 도움을 받아 미국 정부와 교섭하는 중이매, 우리 임시정부의 승인을 얻을 날이 가까워 옵니다. 승인을 얻는 대로 군비 군물의 후원을 얻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희망을 가지고 이 소식을 전하니, 이것이 즉 자유의 소식입니다.
 
  미국대통령 루스벨트 씨의 선언과 같이 우리의 목적은 왜적을 파한 후에야 말 것입니다.
 
  우리는 백배나 용기를 내어 우리 민족성을 세계에 한번 표시하기로 결심합시다.
 
  우리 독립의 서광이 비치나니, 일심합력으로 왜적을 파하고 우리 자유를 우리 손으로 회복합시다.
 
  나의 사랑하는 동포여, 이 말을 잊지말고 전파하며 준행하시오.
 
  일후에 또다시 말할 기회가 있으려니와, 우리의 자유를 회복할 것이 이때 우리 손에 달렸으니, 분투하라! 싸워라!
 
  우리가 피를 흘려야 자손만대의 자유기초를 회복할 것이다.
 
  싸워라, 나의 사랑하는 이천삼백만 동포여!〉86)
 
 
  「東亞日報」의 洪翼範이 短波放送內容 퍼뜨려
 
李承晩의 短波放送 내용을 지도급 인사들에게 전파한 전「東亞日報」기자 洪翼範.
  李承晩의 단파방송은 국내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제국주의 일본은 1940년 2월에 이른바 창씨개명을 강제하고 8월10일에는 「朝鮮日報」와 「東亞日報」를 폐간했다. 그리고 1942년 4월27일부터는 방송전파관제를 실시하고, 일반인은 물론 외국인 소유의 단파수신기를 모두 압수했다.87) 미국 선교사들이 가지고 있던 단파수신기도 압수되었다. 선교사들은 한국에 올 때에 본국 소식과 세계정세를 알기 위해 단파수신기를 생활필수품의 하나로 가지고 왔다. 선교사들의 사택은 대개 비교적 높은 지대에 자리 잡았고, 옥상에는 단파수신용 안테나가 가설되어 있었다. 선교사들은 단파방송에서 들은 뉴스를 지도적인 한국기독교인들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東亞日報」 정치부 기자 洪翼範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홍익범은 1897년에 함경남도 정평 출생으로서, 서울의 경신학교를 거쳐 1925년에 일본 와세다(早稻田) 대학을 졸업하고 1926년에 도미하여, 1930년에 오하이오 주의 테니슨 대학을 졸업한 뒤에 컬럼비아 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하여 외교학 전공으로 석사학위(MA)를 받고, 1932년 11월에 귀국했다.88) 홍익범은 미국에 유학하는 동안 李承晩의 同志會 활동에도 참가했다. 국가보훈처의 「獨立有功者功勳錄」에는 1924년에 시카고 동지회 회장으로 일했다고 했으나,89) 그가 도미한 것이 1926년이므로 이는 착오이다.
 
  홍익범은 1933년 10월에 동아일보사에 입사하여 「東亞日報」가 폐간될 때까지 정치부 기자로 활동했다. 홍익범은 입사 직후부터 국제관계 해설기사를 여러 편 기명기사로 집필했다. 그는 「東亞日報」가 폐간된 뒤에도 경신학교의 쿤스 선교사 등과 교류하면서 선교사들이 가지고 있는 단파수신기를 통해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이를 지도층 인사들에게 은밀히 전달하고 있었다. 단파수신기가 압수되자 홍익범은 전황 정보를 수집하는 일이 어려워졌다. 외국 선교사들이 추방되면서 그들이 사용하던 단파수신기는 모두 몰수되어 경성방송국을 비롯한 지방방송국과 방송소에 비치되었다. 홍익범은 아동문학가로서 경성방송국의 방송원고를 쓰고 있던 宋南憲과 접촉했고, 그를 통해 방송편성원 楊濟賢을 알게 되었다. 양제현은 중경 임시정부에서 활동하고 있던 楊宇朝의 사촌동생이었다. 양제현은 경성방송국의 단파수신기로 청취한 중경방송국의 한국어 방송과 샌프란시스코의 「미국의 소리」 방송내용을 송남헌을 통해 홍익범에게 알려 주었다. 홍익범이 李承晩의 방송내용을 얼마나 정확하게 전해 들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그는 이렇게 입수한 정보에다 자기의 재미 시절의 李承晩과의 경험과 시국전망 등을 곁들여서 전 동아일보사 사장 宋鎭禹와 白寬洙, 전 편집국장 咸尙熏, 전 영업국장 菊泰一, 항일 변호사 許憲, 金炳魯, 李仁, 그리고 尹潽善 등에게 정보를 제공했다.90)
 
 
  『李承晩이 美國에서 臨時政府를 수립하고 聯合國의 승인을 얻어…』
 
  조선총독부의 경찰과 검찰조사기록에 따르면, 홍익범이 李承晩 등 해외 독립운동자들의 근황과 전황의 추이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는 상황은 허헌과의 대화내용에 잘 드러나 있다. 홍익범은 1942년 8월에 삼청동의 자택으로 허헌을 찾아갔다. 허헌은 동아일보사의 감사, 취체역[이사] 등을 역임했었다. 홍익범은 허헌에게 『미국에 있는 李承晩 일파가 미국의 원조 아래 조선 임시정부를 조직하고, 연합국의 승인을 얻어 조선독립운동을 하고 있는데, 이번 독립운동은 반드시 성공할 것이므로 우리도 호기를 잃지 말고 궐기할 준비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허헌 역시 『서전에서는 미국이 불리하나 미국은 물질이 풍부하고 실력이 있기 때문에 승리는 미영 연합국 쪽에 있다. 이번 전쟁이 끝나면 연합국의 힘에 의해 조선은 독립에 이르게 될 것이다』라고 응답했다. 허헌은 9월쯤에 소련에서 중경을 거쳐 국내에 침투한 鄭憲國(일명 鄭三得)을 통하여, 현재 러시아에 한국인 의용군 4만 명이 있고, 소련과 일본 사이에 전쟁이 발발하면 조선으로 진격할 것이라는 말을 들었고 이를 홍익범에게 전했다. 홍익범은 12월20일쯤에도 허헌에게 李承晩의 조선 임시정부가 미국의 경제적 원조를 받는 한편, 군사동맹을 체결하고 적극적으로 활동 중이라고 전했다.
 
  홍익범이 1943년 1월에 의사 景祺鉉(경기현)과 나눈 대화는 더욱 흥미롭다. 홍익범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미국에 있는 李承晩 일파는 미국 정부의 원조를 얻어 그곳에 조선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미국과 군사동맹을 체결하여 조선독립운동을 하고 있다. … 그러므로 이번 대전이 반추축국의 승리로 끝나면 조선은 당연히 독립된다. 이번 독립은 제3국의 힘에 의해 실현되는 것이고, 조선 전체의 실력에 의한 것이 아니므로 국내에서는 이를 위해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위험을 무릅쓸 필요는 없다』
 
  경기현이 국내에서도 미리 독립에 대비한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李承晩의 임시정부를 이전할 때에 이와 합류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느냐고 하자 홍익범은 그럴 필요 없다고 대답했다.
 
  『나는 미국 유학 당시부터 李承晩과 알고 있는데, 李承晩 일파가 국내에 들어와서 조선독립을 단행할 때에 국내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정치적 인물을 소개하여 정부조직에 참가케 하려고 내가 이미 우수한 정치가를 물색 중이므로 하등 염려할 필요가 없다』91)
 
  이처럼 홍익범의 활동은 李承晩의 임시정부가 국내에 들어올 때를 대비하여 국내의 정치인들을 포섭하는 작업이었던 것이다.
 
 
  許憲이 「朝鮮日報」의 文錫俊에 전해
 
  허헌은 홍익범에게서 들은 李承晩에 관한 이야기를 12월 하순에 청진동에 있는 친구 변호사 韓永煜(한영욱)의 사무실에서 한영욱과 조선일보사 영업국장을 지내고 광산업에 종사하고 있는 文錫俊에게 전했다. 문석준은 허헌과 같은 함경남도 함주군 출신으로서 동경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할 무렵부터 공산주의에 경도해 있었다. 허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신문은 일본군이 대승하고 있는 것처럼 보도하고 있으나,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李承晩이 미국에서 전하는 정확한 대일방송에 따르면 재미 李承晩일파가 미국의 원조하에 조선 임시정부를 조직하고 李承晩이 대통령이 되어 조선독립운동을 하고 있는데, 미국과 군사동맹을 맺고 미국을 위해 활동하는 동시에 미국의 적극적인 비호를 받고 있다. 이번 전쟁이 미국과 영국의 승리로 끝날 것이 틀림없으므로 조선동포는 조선의 독립을 기대하고 일본의 전쟁수행에 협력하지 말고, 기회가 오면 궐기하라고 방송했다』92)
 
  문석준은 허헌에게서 들은 李承晩에 관한 이야기를 동향 친구들과 제자인 공산주의자들에게 전했다. 1943년 4월쯤에는 함흥공립학교 훈도생활을 할 때의 제자였던 韓雪野와 함흥의 李增林에게 전했다. 한설야는 대표적인 좌익 문인이고, 이증림은 고려공산당 중앙위원과 조선공산당 제3차대회 중앙집행위원을 지낸 공산주의자였다. 허헌과 이증림은 모두 呂運亨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93)
 
 
  呂運亨도 李承晩이 美國에서 大統領 대우를 받고 있다고 말해
 
  좌파 정치인의 거두인 여운형은 별도로 李承晩의 활동에 관한 뉴스를 파악하고 있었다. 여운형은 1942년 들어 두 차례 일본을 방문하고 왔는데, 조선총독부의 검찰기록에 따르면, 두 번째 방일을 마치고 돌아온 뒤인 8월 말에 친구인 洪植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동아일보사와 조선일보사의 영업국장을 역임한 홍증식은 제1차 조선공산당사건 때에 4년 형을 선고받았던 공산주의자였다.
 
  『일본이 인도와 버마를 해방시킨다는 취지를 성명한 데 대해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이 미국은 조선을 독립시킬 것이라는 취지로 방송하는 것을 들었는데, 만약 대동아전쟁에서 일본이 패하면 조선이 독립되는 것이 판명될 것이다. 李承晩은 미국에서 조선독립운동을 하고 있으며 조선대통령의 대우를 받고 있다. 나도 중경이나 미국에 거주한다면 독립운동을 하고 있을 것이다』94)
 
  여운형이 일본에서 李承晩의 육성방송을 직접 들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가 李承晩이 미국에서 조선대통령의 대우를 받으면서 독립운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는 사실은, 앞에서 본 허헌의 인식과 함께,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왜냐하면 두 사람은 해방 직후에 李承晩을 주석으로 추대한 조선인민공화국을 조직한 두 주동자였기 때문이다.95)
 
 
  『총통은 李承晩이라고 하더냐?』
 
  단파수신기로 전해지는 李承晩과 중경 임시정부에 관한 뉴스를 접하고 있던 사람들은 지도층 인사들뿐만이 아니었다. 중앙과 지방의 방송국과 방송소에 고급 단파수신기가 비치되어 단파방송으로 교신을 하게 되어 방송국의 한국인 직원들은 단파수신기 조작에 익숙했다. 개중에는 단파수신기를 만드는 사람도 생겨났다. 단파수신기를 만들어 해외 독립운동 소식을 맨 먼저 청취한 사람은 경성방송국 기술자 成基錫이었다. 그가 처음 들은 것은 임시정부에서 주관하는 중경방송국의 한국어 방송이었다. 흥분한 성기석은 중경방송을 들은 이야기를 저녁에 부친 成禧慶에게 말했다. 성희경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면서 『아니 뭐라고!』 하고 놀랐다. 그러고는 아들에게 물었다.
 
  『총통은 李承晩이라고 하더냐?』
 
  金九 주석이라고 하더라고 아들은 말했다.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교편생활도 하고 금융계에서 일했던 성희경은 이인, 김병로, 조병옥, 李範昇 등과 교유가 있었다.96)
 
  방송국을 중심으로 단파방송 비밀청취 내용은 입에서 입으로 퍼져 나갔다. 그리하여 일반국민들 사이에서는 거의 잊혀지다시피 했던 李承晩에 대한 정보는 단파방송을 계기로 좌우 정치지도자들과 여론주도층, 교회 등을 통하여 실제 이상의 새로운 설화가 되어 유포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이 오래 지속될 수는 없었다. 1942년 12월27일부터 단파방송 비밀청취와 관련된 대대적인 검거선풍이 불어닥쳤다. 경성방송국의 한국인 기술자, 아나운서, 편성원 등 약 40명이 체포된 데 이어, 부산, 이리 등 여러 지방 방송국까지 확대되어 150명 가까운 방송인들이 검거되거나 조사를 받았다. 이 밖에도 지도급 인사들과 민간인으로 체포되거나 조사를 받은 사람들도 150여 명에 이르러 이들을 합치면 300명가량이 사건에 관련하여 수난을 당했다.97) 이들 가운데 41명이 육군형법, 해군형법, 조선임시보안법, 무선전신법 등의 위반으로 유죄판결을 받은 것이 확인된다.98) 조선어학회사건이 있은 지 두 달 만에 발생한 단파방송수신사건이었다. 두 사건은 잔혹한 고문으로도 악명이 높았다. 홍익범과 문석준은 각각 2년과 1년 2개월의 형을 선고받았다. 심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문석준은 병으로 보석된 이튿날 새벽에 사망했고, 홍익범은 병보석 되어 요양생활을 하다가 1944년에 사망했다. ●
 
 

  1) Roosevelt to Welles, Apr. 7, 1942, “Memorandum by the Chines Minister for Foreign Affairs(Soong)”,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이하 FRUS) 1942, vol. 1, United States Government Printing Office, 1960, pp.867~869. 2) Welles to Roosevelt, Apr. 13, 1942, FRUS 1942, vol. 1, pp.870~872.
 
  3) Robert E. Sherwood, Roosevelt and Hopkins――An Initimate History, Harper & Brothers, 1950, pp.515~517. 4) Gauss to Hull, Apr. 10, 1942, FRUS 1942, vol. 1, p.869. 5) 劉壽林外編, 「民國職官年表」, 1995, 中華書局, 397쪽. 6) 「新韓民報」 1942년 4월23일자, 「韓國獨立光復軍」 7) Welles to Gauss, Apr. 11, 1942, FRUS 1942, vol. 1, p.870. 8) Gauss to Hull, Apr. 18, 1942, FRUS 1942, vol. 1, pp.872~873. 9) “Memorandum by the Secretary of State to President Roosevelt”, Apr. 29, 1942, FRUS 1942, vol. 1, p.873.
 
  10) 「朱家?가 蔣介石에게 보낸 1942년 6월11일자 편지」, 「韓國獨立運動史 資料(27) 臨政篇ⅩⅡ」, 1994, 國史編纂委員會, 2쪽. 11) Hull to Gauss, May 1, 1942, FRUS 1942, vol. 1, pp.873~875. 12) Gauss to Hull, May 7, 1942, FRUS 1942, vol. 1, p.875. 13) Department of State, United States Policy Regarding Korea 1834--1950, 1987, 한림대 아시아文化硏究所, pp.70~71.
 
  14) 이정식, 「열강의 한국임시정부에 대한 태도, 1937~1945」, 「대한민국의 기원」, 2006, 일조각, 85~86쪽. 15) Department of State, op. cit., 82쪽. 16) ibid., 71쪽. 17) 미국무부 문서번호 895. 01/72, Hoskins, “Memorandum of Conversation”, Feb. 12, 1942. 18) 미국무부 문서번호 895. 01/123, Cromwell to Hull, May 5, 1942. 19) 미국무부 문서번호 895. 01/123, Hull to Cromwell, May 20, 1942. 20) 미국무부 문서번호 895. 01/149, Cromwell to Hull, June 3, 1942. 21) 고정휴, 「이승만과 한국독립운동」, 2004, 연세대출판부, 437쪽.
 
  22) 미국무부 문서번호 895. 01/149, Exhibit A. “Testimony of Former American Residents of Korea.” 23) 미국무부 문서번호 895. 01/149, Hull to Cromwell, June 23, 1942. 24)미국무부 문서번호 895. 01/152, Berle, “Memorandum of Conversation”, June 30, 1942. 25) Department of State, op. cit, p.78. 26) 독립기념관 소장, 문서번호 A00893, 도893-1, Rhee to Kim, Aug. 14, 1942. 27) 미국무부 문서번호 895. 01/177, Rhee to United Korean Committee, Honolulu, Aug. 13, 1942. 28) Why isn’t Korea Recognized?, “Summation”, United Korean Committee, 1942.
 
  29) 도진순 주해, 「백범일지」, 1997, 돌베개, 296쪽. 30) 위와 같음.
 
  31) 「백범일지」, 314쪽. 32) 「백범일지」, 315쪽. 33) 판독이 어려운 金九의 親筆을 1948년의 筆寫本은 「金一靜」으로 판독했으나, 그 뒤의 직해본이나 번역본들은 「金一聲」, 곧 金日成의 별칭으로 판독했다. 34) 「金九自敍傳 白凡逸志」(親筆影印本), 1994, 集文堂, 185~186쪽. 35) 「백범일지」, 298쪽.
 
  36) 「朝鮮義勇隊改編宣言」, 「韓國獨立運動史 資料(3) 臨政篇 Ⅲ」, 1973, 국사편찬위원회, 523쪽. 37) 「李靑天과 李範奭이 朱家?에게 보낸 1942년 2월8일자 편지」, 「韓國獨立運動史 資料(26) 臨政篇 ⅩⅠ」, 1994, 국사편찬위원회, 101~102쪽. 38) 「金九가 蔣介石에게 보낸 1942년 2월9일자 편지」, 「韓國獨立運動史 資料(26) 臨政篇 ⅩⅠ」, 102쪽. 39) 「朱家?가 蔣介石에게 보낸 1942년 2월11일자 편지」, 「韓國獨立運動史 資料(26) 臨政篇 ⅩⅠ」, 103~104쪽. 40) 「蔣介石이 朱家?에게 보낸 1942년 5월8일자 편지」, 「韓國獨立運動史 資料(26) 臨政篇 ⅩⅠ」, 107~108쪽.
 
  41) 石源華編著, 「韓國獨立運動與中國」, 1995, 上海人民出版社, 365쪽: 「新韓民報」, 1942년 4월16일자, 「韓國臨時政府」. 42) 石源華編著, 앞의 책, 365쪽. 43) 「대한민국 임시정부 자료집(1) 헌법·공보」, 2005, 국사편찬위원회, 260쪽. 44) 「蔣介石이 朱家?에게 보낸 1942년 5월8일자 편지」, 「韓國獨立運動史 資料(26) 臨政篇 ⅩⅠ」, 107~108쪽. 45) 「金九가 朱家?에게 보낸 1942년 5월1일자 편지」, 「韓國獨立運動史 資料(26) 臨政篇 ⅩⅠ」, 107쪽. 46) 「蔣介石이 朱家?에게 보낸 1942년 5월8일자 편지」, 「韓國獨立運動史 資料(26) 臨政篇 ⅩⅠ」, 107~108쪽. 47) 「朱家?가 金九에게 보낸 1942년 5월11일자 편지」, 「韓國獨立運動史 資料(26) 臨政篇 ⅩⅠ」, 108쪽. 48) 「대한민국 임시정부 자료집(1) 헌법·공보」, 260쪽.
 
  49) 「金九가 何應欽에게 보낸 1942년 5월17일자 편지」, 「韓國獨立運動史 資料(26) 臨政篇 ⅩⅠ」, 109쪽. 50) 金九가 賀耀祖에게 보낸 1942년 5월18일자 편지」, 「韓國獨立運動史 資料(26) 臨政篇 ⅩⅠ」, 110~111쪽. 51) 「金九가 朱家?에게 보낸 1942년 5월21일자 편지」, 「韓國獨立運動史 資料(26) 臨政篇 ⅩⅠ」, 111쪽. 52) 「金九가 朱家?에게 보낸 1942년 5월21일자 편지」, 「韓國獨立運動史 資料(26) 臨政篇 ⅩⅠ」, 111쪽. 53) 「軍事委員會辦公廳軍事處가 金九에게 보낸 1942년 5월25일자 공함」, 「韓國獨立運動史 資料(26) 臨政篇 ⅩⅠ」, 113쪽. 54) 조동걸, 「독립군의 길따라 대륙을 가다」, 1994, 지식산업사, 267쪽. 55) 「大韓民國臨時政府議政院文書」, 1974, 國會圖書館, 780쪽. 56) 韓詩俊, 「韓國光復軍硏究」, 1993, 一潮閣, 118~119쪽. 57) 「大韓民國臨時政府議政院文書」, 778~780쪽.
 
  58) 「大韓民國臨時政府議政院文書」, 777~778쪽. 59) 고정휴, 앞의 책, 442쪽. 60) Clarence Weems, “Washington’s First Steps Toward Korean-American Joint Action(1941~1943)”, 「韓國獨立運動에 關한 國際學術大會論文集」, 1988, 韓國獨立有功者協會, 325~326쪽. 61) “Proposals for an Unofficial U. S. Agency in China”, Nov. 10, 1941, 「韓國獨立運動史 資料(25) 臨政篇Ⅹ」, 5~13쪽. 이 문서는 작성자의 이름 없이 도노반에게 제출되었다.
 
  62) 정병준, 「우남 이승만 연구――한국근대국가의 형성과 우파의 길」, 2005, 역사비평사, 242쪽. 63) Goodfellow to Donovan, “Memorandum to Colonel Donovan” Feb. 17, 1942, 「韓國獨立運動史 資料(25) 臨政篇Ⅹ」, 76쪽. 64) Gale to Wiley, “Koreans and their activities in the United States” Jan. 16, 1942, 「韓國獨立運動史 資料(25) 臨政篇Ⅹ」, 50쪽. 65) Chamberlain to Honbeck, “Memorandum : Diversion of Japanes Offensive by Establishing a Korean Front” Dec. 23, 1941 and Moore to Bratton, “Memorandum : Diversion of Japanes Offensive by Establishing a Korean Front” Jan. 8, 1942, 「韓國獨立運動史 資料(25) 臨政篇 Ⅹ」, 24~29쪽, 40쪽. 66) Brewster to Miles, “Use of Koreans in the Japanes War”, Jan. 17, 1942, 「韓國獨立運動史 資料(24) 臨政篇 Ⅸ」, 15쪽. 67) Gale to Donovan, “Employment of Koreans for S. O. Operation”, Jan. 24, 1942, 「韓國獨立運動史 資料(25) 臨政篇Ⅹ」, 58~59쪽. 68) Donovan to Roosevelt, “Memorandum for the President, Jan. 24, 1942, 「Napko Project of OSS: 海外의 韓國獨立運動史料(ⅩⅩⅣ) 美洲篇」 ⑥」, 2001, 國家報勳處, 28~29쪽. 69) “Memorandum for Colonel Donovan; Subject――Scheme ‘Olivia’, Jan. 27, 1942, 위의 책, 32~33쪽. 70) Harris, Staggers, Williams to Stimson, Feb. 4, 1942, 「韓國獨立運動史 資料(24) 臨政篇 Ⅸ」, 21쪽.
 
  71) 方善柱,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미국」,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독립운동――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80주년기념 국제학술회의 논문집」, 1999, 31~32쪽. 72) 「韓國獨立運動史 資料(25) 臨政篇Ⅹ」, 122쪽, 133~137쪽. 73) Maochun Yu, OSS in China : Prelude to Cold War, Yale University Press, 1996, pp.12~26. 74) Gale to T. H. Kangting, 「韓國獨立運動史 資料(25) 臨政篇Ⅹ」, 131쪽. 75) Maochun Yu, op. cit., p.264. 76) Donovan to the Adjustant General, War Department, “Recommendation for Promotion”, May 5, 1945, 「大韓民國史資料集(28) 李承晩關係書翰資料集 1」, 1996, 국사편찬위원회, 25~27쪽. 77) 張錫潤, 「張錫潤 回顧錄」(未刊行組版本), 53~54쪽.
 
  78) 위의 책, 59쪽. 79) 정병준, 「해제 Ⅱ 한미공동작전」, 「대한민국 임시정부 자료집(12) 한국광복군 Ⅲ」, 2006, 국사편찬위원회, xiv~xv쪽. 80) Rhee to Goodfellow, NAPKO PROJET of OSS, op. cit., p.41. 81) 方善柱, 「아이플러機關과 在美韓人의 復國運動」, 「解放50周年, 世界속의 韓國學――仁荷大學校40周年紀念 第2回 韓國學國際學術會議論文集」, 1995, 仁荷大韓國學硏究所, 166쪽. 82) 方善柱, 위의 글, 167쪽.
 
  83) 兪炳殷著, 「短波放送連絡運動――日帝下京城放送局」, 1991, KBS文化事業團, 61쪽. 84) 김승태-박혜진 편, 「내한선교사총람 1884~1984」, 1996,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334쪽. 85) Edwin W. Koons, “Some Items to be Kept in Mind in Preparing Korean Propaganda”, 「韓國獨立運動史 資料(25) 臨政篇Ⅹ」, 209~219쪽.
 
  86) 梨花莊 소장, 李承晩 육성 녹음 테이프. 87) 韓國放送史編纂委員會, 「韓國放送史」, 1977, 한국방송공사, 55~56쪽. 88) 「東亞日報」1932년 11월26일자, 「在米苦學生前途는 暗澹… 錦衣還鄕한 洪翼範氏談」.
 
  89) 國家報勳處, 「國家有功者功勳錄 (9)」, 1991, 528~529쪽. 90) 兪炳殷, 「日帝末 『短波盜聽사건」의 全貌」, 「新東亞」 1988년 3월호, 588~589쪽. 91) 정병준, 앞의 책, 415~416쪽.
 
  92) 정병준, 앞의 책, 407~408쪽 ; 鄭晋錫, 「日帝末 短波放送事件으로 獄死한 신문기자 文錫俊-洪翼範」, 「月刊朝鮮」 2007년 4월호, 372~383쪽. 93) 정병준, 앞의 책, 409~410쪽. 94) 위의 책, 403~404쪽. 95) 같은 책, 404쪽. 96) 兪炳殷, 앞의 글, 591쪽. 97) 鄭晋錫, 앞의 글, 375쪽. 98) 兪炳殷, 앞의 책, 288~301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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