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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배우 김부선 눈물의 항변

『권력과 돈, 검찰이 나를 차례로 짓밟았다』

김남성    sulsul@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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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청와대에서도 여성 연예인들을 불러들인 술판이 정기적으로 벌어졌다』(前 청와대 경호 관계자)
세상을 향한 김부선의 계속된 항변
  영화배우 김부선(46)은 1985년 영화 「애마부인 3」에서 이정길의 상대역인 3代 애마부인으로 스타덤에 올랐다. 애마부인 「염해리」로서의 성공은 잠시, 그 후 그녀의 삶은 바람 같았다. 「드라마」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지 모르겠다.
 
  그녀는 1986년 필로폰 투약 혐의로 첫 구속됐고, 이후 2004년까지 대마초 흡연으로 네 번 구속됐다. 결혼을 하지 않은 채, 1988년 딸을 낳았다. 다섯 번 감옥살이를 한, 미혼모에게 돌아올 영화와 드라마의 배역은 없었다.
 
  자신을 싸늘하게 바라보는 사회를 향해, 김부선은 항변했다.
 
  자신을 따라다니는 「에로배우」라는 호칭에 대해 『영화에 장르가 있지, 영화배우에 장르가 있느냐? 나와 연기한 남자배우들도 「에로배우」냐』고 맞섰다. 그녀는 『대마초는 마약이 아니다』며, 10여 년간 「대마초 非범죄화 운동」을 벌이고 있다.
 
  2004년 7월 대마초 흡연으로 구속돼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자, 위헌법률 심판제청을 냈다. 「형법의 대마초 처벌 규정이 행복추구권과 과잉금지 원칙에 위배된다」는 주장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광야의 함성」처럼 허공을 맴돌았다. 몇몇 인터넷 매체와 群小(군소) 언론매체들이 그녀의 목소리를 담아 냈지만, 반향은 미미했다.
 
  그녀는 지난 5월15일 방영된 교육방송(EBS)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지난날을 쏟아 냈다. 그녀의 항변은 인터넷에서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다가 곧 잊혀졌다.
 
  이 인터뷰에서 그녀는 『1986년 내가 필로폰 투약 혐의로 구속된 것은 청와대 파티에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고 주장했다. 또 『필로폰과 대마초에 손대게 된 것은 당시 어울렸던 고관대작 자제들의 권유 때문이었다』고 밝혔다.
 
  그녀는 풍문으로만 떠돌던 5共 청와대의 연예인 초청 파티, 고관대작 자제들의 마약 파티는 사실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녀의 주장은 언론의 「가십」 정도로 취급됐다.
 
  그녀의 삶에 짙게 묻어 있는 지난 시절의 어두움이 어디까지 사실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지난 5월 말, 김부선씨에게 전화를 걸어 인터뷰를 요청했다. 걸걸한 그녀의 목소리가 왠지 낯설었다. 『지난 20여 년 동안 필로폰·대마초로 구속되면서, 나는 언론에 난도질당했습니다. 내가 왜 또 月刊朝鮮에 나가야 합니까』
 
  어렵게 설득해 인터뷰 날짜를 잡았다. 몇 시간 후 「정말 죄송합니다. 인터뷰를 할 수 없겠습니다」라는 문자 메시지가 왔다.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안티朝鮮」(朝鮮日報 반대) 모임의 회원이었다. 『주변의 안티朝鮮 친구들이 「절대로 月刊朝鮮과 인터뷰하면 안 된다」고 만류했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들었다.
 
  그녀는 『「대마초 非범죄화 운동」을 하고 있는 나를 月刊朝鮮에서 戱畵化(희화화)할까 두렵다』고 했다. 며칠 후 김부선씨가 전화를 걸어와 『인터뷰를 하겠다』고 했다. 그녀는 『곰곰이 생각해 보니, 月刊朝鮮이 내가 마지막으로 넘어야 할 산인 것 같다』고 했다.
 
  지난 6월10일 서울 남산 국립극장 야외 카페에서 그녀를 첫 대면했다.
 
  화장기 없는 그녀의 얼굴은 무척 수척해 보였다. 큰 키가 더 커 보였다.
 
  『최근에 큰 충격을 받아서 체중이 8kg이나 빠졌다가, 4kg을 겨우 회복했어요』
 
 
  연이은 드라마 출연 落馬
 
   ―무슨 충격을 받았습니까. 교육방송 인터뷰가 나가고 나서 비난 전화나 「악플」에 시달린 것은 아닙니까.
 
  그녀는 금세 눈물을 떨구었다. 당황스러웠다.
 
  『2004년 대마초로 구속되고 나서 3년간 드라마 제의가 전혀 없었어요. 그런데 올해 초 MBC에서 시트콤 출연 제의가 왔습니다. 제가 「대마초 때문에 괜찮겠냐」고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담당 PD(프로듀서)님이 「문제없다」고 해요. 결국 국장급에서 잘렸다고 해요.
 
  그러고 있는데 KBS에서 「오달자의 봄」이라는 드라마에 출연할 수 있겠느냐고 연락이 왔어요. 너무 좋아서 목이 메일 정도였어요. MBC 때처럼 처참해지기 싫어서, 「내가 출연 가능한지 확실하게 알아봐 달라」고 했어요. 담당 PD가 알아보더니, 「김부선씨가 출연하는 데 아무런 문제 없다」고 해요.
 
  너무 기뻐서 10년 된 차 코란도를 팔아서 유명 디자이너의 옷을 한 벌 샀어요. 옷을 사야, 드라마 출연할 때 그 디자이너에게서 협찬받을 수 있거든요. 그렇게까지 준비했는데, 결국 담당 국장이 안 된다고 했답니다』
 
  그녀는 이 드라마에 출연하기 위해 자신이 서울 이태원동에서 운영하던 카페를 처분했다. 지난 10여 년 자신과 딸을 먹여 살린 카페였다. 『어디 가서 몸 팔고, 아쉬운 소리 하기 싫어 악착같이 운영했던 카페가 혹시 드라마 출연에 방해될까 봐 시세보다 헐값에 팔았다』고 한다.
 
  그녀는 카페를 처분한 얘기를 하면서, 서럽게 많이 울었다.
 
  그녀가 필로폰과 대마초에 손을 댄 것은 1982년 무렵이었다. 1982년 고향인 제주도 모슬포에서 상경한 그녀는 당시 고모집에 살면서 재수를 했다. 영화배우가 되고 싶어서 제주도 출신인 영화배우 오수미, 윤영신씨 등을 무작정 찾아가 「도와달라」고 했다.
 
  『「미스코리아나 영화배우가 되고 싶어요 저 좀 도와주세요」 했죠. 그랬더니 언니들이 「너는 키가 커서 상대 남자 배우가 없으니, 패션모델을 하라」고 했어요. 그래서 헬스클럽에서 3개월간 워킹 연습을 했고, 디자이너 하용수씨의 패션 쇼에 서게 됐습니다. 그게 스물한 살 때였죠』
 
  큰 키에 서구적인 외모를 가진 그녀는 단숨에 1급 패션모델이 됐다. CF 광고가 밀려들어 왔다. 논노, 조다쉬, 태평양화장품, 프로스펙스 등.
 
  『패션모델은 지금보다 대우가 더 좋았어요. 패션 쇼가 많았고, 큰돈을 받았어요. 한 번 출연에 몇백만원씩 받는 언니들이 즐비했죠. 유혜영·박정옥·윤영실·김아현 등이 활동하던 그때가 한국 패션모델의 전성기였죠. 이 언니들 앞에서는 담배도 제대로 못 피웠어요.
 
  언니들이 저를 나이트클럽에 데리고 갔어요. 신라호텔 나이트… 어리고 뉴 페이스니까, 부킹이 잘 됐어요』
 
 
  박지만씨 등과 함께 필로폰에 손을 대다
 
  나이트클럽을 출입하면서 그녀는 당시 고관대작의 자제들을 만날 수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삼성家의 손자, 朴正熙 대통령의 아들 박지만씨, 보사부 장관의 아들 등 당시 내로라하는 집안 아들들은 다 만났죠. 이 남자들이 나한테 관심을 보이는데, 정말 죽겠더라고요』
 
  그녀의 아이 아버지인 L씨도 이때 만났다. 유명한 극장 오너 아들이었던 그를 「참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가 자신의 삶을 얼마나 바꿀지 모른 채.
 
  이들과 어울리면서 그녀는 필로폰과 대마초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선천적으로 술을 못 하는데다, 담배를 안 피웠던 그녀에게 필로폰은 술·담배보다 낯설었다.
 
  『그 오빠들 사이에서는 필로폰을 안 하면 촌스럽다는 분위기였어요. 함께 필로폰을 했던 보사부 장관 아들은 백수였는데, 그 사람 아버지가 대마관리법을 만들었답니다. 그런 사람이 옆에서 대마초를 피우고, 필로폰을 하는데 어떻게 생각했겠어요. 저는 거기서 「왕따」 당하지 않으려고 했지요』
 
  처음에는 그들과 어울리기 위해 필로폰과 대마초에 손을 댔지만, 점차 외로움을 잊기 위해 필로폰과 대마초를 찾았다. 패션모델, CF모델, 영화배우로 잘나가고 화려했지만, 그녀는 『너무 외로웠다』고 했다.
 
  『주위에 친구들, 선배들도 많았지만, 서울은 엄마가 있는 제주도와 너무 멀었어요. 전화도 자주 할 수 없었고. 나를 사랑해 준 남자가 있으면 한결 나았겠지만, 당시는 여자 연예인들이 스캔들 나면 바로 끝장이었어요. 언니들도 「절대 남자 사귀지 마라. 스캔들 일으키지 마라」고 신신당부했어요』
 
  그녀는 1983년에 처음으로 마약 단속에 걸렸다. 하지만 당시 언론에는 전혀 나오지 않았다. 앞서 말한 박지만씨, 삼성家의 손자, 보사부 장관의 아들 등과 함께 검거됐기 때문이다. 벌금만 내고 모두 풀려났다.
 
  패션모델과 CF모델을 하면서, 김부선은 꿈에 그리던 영화배우가 됐다. 「여자가 밤을 두려워하랴」, 「여자는 남자를 쏘았다」에서 주연을 맡았다. 그리고 「애마부인 3」에 캐스팅됐다. 이 영화로 그녀의 이름은 세상에 제대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후 20년 동안 여배우 김부선 앞에는 「에로배우」라는 족쇄가 달리게 됐다.
 
  「애마부인 3」로 영화·인터뷰 의뢰가 밀려들었다. 그 가운데 「은밀한 제안」이 있었다. 「청와대 파티에 참석하라」는 요구였다.
 
 
  『이 자식 대견하다, 청와대 파티 가지 마』
 
  『청와대 파티는 당시 연예인들 사이에서 알려진 비밀이었어요. 갔다 왔어도 말하지 않고, 대부분 거역하지 않고 간 것으로 알고 있어요. 친한 감독님이 저를 만나자고 해서 호텔 커피숍에 갔어요. 앉자마자 파티 얘기를 하더군요. 그래서 저는 싫다고 했어요』
 
  ―그분이 뭐라고 하던가요.
 
  『처음에는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이더니, 곧 「이 자식 대견하다. 가지 마」 그러더라고요. 당시는 영화사 쪽으로 청와대에서 연락이 가고 그랬나 봐요. 그 이상은 나는 모르니까』
 
  ―왜 안 갔습니까.
 
  『재미없으니까, 안 갔죠. 「노친네」들과 무슨 재미로 거기 가서 있어요. 내가 무슨 기생인가요. 나는 젊었으니까, 록 음악 들으면서 노는 게 좋았어요. 그런데 가서 花草(화초)처럼 있는 게 뭐가 좋겠어요』
 
  당시 재벌그룹 회장이나, 청와대에서 여자 연예인들을 술자리에 초대했다고 한다.
 
  그녀는 『재벌그룹 회장들이 주최하는 파티에 참석하면 100만원씩 줬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했다.
 
  『제 친구가 재벌그룹 회장이 주최한 파티에 참석했더니, 훗날 국무총리를 한 정치가가 왔더래요. 그 정치가는 분위기가 무르익자, 어린 여자 연예인을 데리고 어디론가 가더래요』
 
  ―당시 청와대 파티에 참석한 연예인들이 누구인지 아세요.
 
  『서로 비밀이라, 누가 갔는지 누가 거부했는지 정확히는 잘 몰라요. 저만 해도 이 얘기를 지금에서야 하잖습니까. 내가 아는 바로는, 제 위의 패션모델 언니들 몇 명이 갔었고, 영화배우 C씨는 유명하잖아요?』
 
 
 
청와대의 은밀한 술자리

 
   朴正熙 前 대통령은 육영수 여사가 서거한 뒤 김재규 前 중앙정보부장에게 살해될 때까지 가끔 여자 연예인들을 청와대로 불렀다. 파티 장소가 그 유명한 궁정동 安家(안가)였다. 김부선씨에 따르면, 유신 시절의 연예인 초청 술파티가 5共 시절까지 이어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김재규 前 중앙정보부장의 변호를 맡았던 安東壹(안동일·65) 변호사는 청와대 파티에 대해 2005년 新東亞 12월호 인터뷰에서 이렇게 정리했다.
 
  <중앙정보부장 의전과장인 박선호는 이른바 採紅使(채홍사) 역할을 했다.
 
  대통령이 궁정동 安家를 찾아오는 빈도가 높았고 그 정도가 너무 심했다. 상대하는 여자로는 영화배우와 탤런트, 연극배우, 모델 등 연예계 종사자가 가장 많았다. 그 수가 200명을 넘었다고 한다.
 
  궁정동 安家 술자리는 대통령 혼자 즐기는 소행사와 10·26 그날 밤처럼 경호실장, 중정부장 등 3, 4명의 최측근이 함께하는 대행사로 나눠졌다고 한다. 대행사에서 朴正熙 前 대통령이 맘에 드는 여성을 뽑아 따로 즐기는 일을 소행사라고 불렀다.
 
  대행사는 월 2회, 소행사는 월 8회 정도 치러졌다. 박선호는 말이 의전과장이지 궁정동 安家를 관리하고 소·대행사가 있을 때마다 대통령에게 쓸 만한 여자를 찾아내 바치는 게 主임무였다.
 
  김재규는 『박선호가 자식 키우는 아버지로서 할 일이 못 된다며 몇 번이나 내게 사표를 냈는데 만류했다』고 했다>
 
  全斗煥 前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은밀한 술자리를 열었다. 술자리는 「27파티」라는 이름으로 통했다.
 
  5共 청와대에서 경호분야를 담당했던 관계자의 증언이다.
 
 
  「27파티」
 
궁정동 安家.
  ―연예인을 부르는 술파티의 이름이 왜 「27파티」로 불렸습니까.
 
  『청와대에 영빈관이 있습니다. 영빈관 앞의 초소가 12초소인데, 12초소 옆에 기다란 기와집 형태의 막사가 있었어요. 그게 27부대 막사입니다. 27부대 막사 안에 파티장을 만들어서 全斗煥 대통령이 정치인, 軍 후배들을 불러서 놀았던 것으로 압니다』
 
  ―「27부대」라는 말을 처음 듣습니다. 무얼 하는 부대입니까.
 
  『27부대는 180명의 특전사 대원들을 차출해 만들었습니다. 대통령 경호실장의 직접 지휘를 받던 「607부대」가 前身(전신)입니다. 청와대 경호실의 별동대 성격으로 운용됐습니다. 정권을 잡은 全斗煥 대통령은 607부대를 27부대로 개칭하고, 대통령 경호업무를 맡게 했습니다. 27부대는 5共 정권의 근위대인 셈이죠』
 
  ―「27파티」는 얼마나 자주 열렸습니까.
 
  『한 달에 두세 번 정도 열렸어요. 저녁에 파티가 열리면, 유리창이 검은색으로 선팅된 자동차들이 줄줄이 들어왔어요. 군인, 정치인들과 여자 연예인들을 태운 차였어요』
 
  ―대통령이 주재하는 다른 술자리와 「27파티」는 다른 건가요.
 
  『공식적인 만찬이나 술자리라면 누가 오는지 알 수 있죠. 하지만 「27파티」는 극비리에 진행됐습니다』
 
  ―「27파티」에 여성 연예인들이 온 것을 봤습니까.
 
  『직접 보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2년 동안 청와대 안에서 근무했는데, 그 정도 내막을 모르겠습니까.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내부에서 의전과 서빙을 담당하는 청와대 부속실 직원들, 고위 비서관들만 알겠죠. 청와대 내부에서 그런 얘기를 하는 것은 금기였어요. 저도 어떤 여자 연예인이 왔는지는 모릅니다』
 
  ―왜 하필 27부대 안에서 술파티를 열었죠.
 
  『청와대에도 눈이 있습니다. 여자 연예인들 부르고 노는 게 눈치 보였겠죠. 군부대 안이니까 외부인 출입이 완벽히 통제되고, 그래서 마음이 편안했겠죠』
 
  ―朴正熙 대통령은 육영수 여사가 서거한 이후 연예인이 참석하는 「술파티」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영부인 이순자 여사가 있었는데, 여자 연예인들을 불러서 청와대에서 술파티를 하는 게 가능했나요.
 
  『그러니까, 「27파티」가 있는 날, 그 후 며칠은 영부인 이순자씨 기분이 완전히 「다운」이었죠. 그래서 청와대 직원들이나, 외부에서 보고하러 들어오는 장관들이 무척 조심했어요. 일부 장관이나 정치인들은 미리 부속실에 전화해서 「영부인 기분이 어떠시냐, 안 마주치게 해달라」고 부탁까지 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권력층의 보복?

 
   그는 『김부선씨가 1986년 당시 제의 받았던 파티는 「27파티」일 것』이라고 했다.
 
  『朴正熙 대통령 시절에는 청와대 바깥, 궁정동에 安家를 만들어서 파티를 즐겼잖아요. 全斗煥 대통령 시절 여자 연예인들을 부를 만한 장소는 27부대, 즉 「27파티」밖에 없어요』
 
  김부선씨는 청와대 파티 참가제의를 거절한 지 두 달 만인 1986년 겨울, 필로폰 상습복용 혐의로 구속됐다. 「빗물」로 유명했던 가수 채은옥씨와 함께 구속됐다. 그녀는 자신이 당시 구속된 이유가 청와대 파티 참석을 거절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청와대 파티 참석이 「필로폰 구속」의 직접적인 이유라고 믿는 근거가 뭡니까.
 
  『나름대로 확신이 있어요. 당시 필로폰을 저와 함께 했던 사람 가운데, 지방 유명 소주 회사의 오너가 있었어요. 나중에 그 회사 회장, 모 대학교 재단 이사장을 했죠. 그런데 이 사람이 검찰에서 제 이름을 불었더군요. 연예인을 불면 봐줬기 때문에, 분 걸 거예요』
 
  ―연예인을 말하면, 왜 봐줍니까.
 
  『당시 우리나라 정치 상황이 지금보다 더 어지러웠잖아요. 군사독재 시절이고. 그래서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이 생길 때, 연예인이 낀 마약 사건을 부각시켜 이른바 「물타기」를 하는 거죠.
 
  검찰이 저를 무슨 사람 죽인 것처럼 기자회견을 하고, 언론은 저를 완전히 마녀 취급을 하더군요. 위에서 그랬겠죠.
 
  「건방지게 영화배우 나부랭이가 청와대 초청을 거절해? 잘 걸렸다」
 
  검찰 발표 후 일간지들은 제가 상류층 사람들과 「섹스 커넥션」이 있는 것처럼 「소설」을 썼어요. 어디서 얘기를 듣고 그런 「소설」을 썼겠어요. 검찰이 의도적으로 흘린 것을, 아무 생각 없이 썼겠죠. 안 그래요?』
 
 
  아이 아버지 L씨
 
  1987년 출소 후, 김부선씨는 과거에 잠깐 어울리던 남자를 다시 만났다.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아이 아버지인 L씨였다.
 
  『1981년에 하얏트 호텔 나이트클럽에서 만났는데 별일 없이 헤어졌고, 「참 순수한 남자구나」라고 생각했죠. 그 이후 못 만났는데, 갑자기 연락이 온 거예요.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아무도 저를 이해해 주지 않고, 혼자서 장충동 근처에서 자취하고 있어 외로웠거든요. 그런데 그 사람이 알고 보니 제대로 된 「마약쟁이」였어요』
 
  출소 후 필로폰과 대마초, 담배까지 끊었던 그녀는 L씨의 권유에 마지못해 몇 번 피웠다. 그녀는 L씨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다.
 
  L씨는 아내와 이혼했다며 그녀에게 아이를 낳고 살자고 했다. 자신의 아들 두 명도 키워 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1988년 김부선씨는 임신을 했다. 그 무렵 L씨는 잠적을 했다. 그는 아내와 이혼을 하지 않은 상태였다. 사라졌던 L씨는 8개월 후에 나타나서는 『아이를 지우자』고 했다.
 
  L씨는 그녀에게 악담을 퍼붓고 다시 사라졌다. 김부선씨는 고향인 제주도로 내려가서 몸을 풀었다. 딸이었다. 딸을 낳고 100일이 지나 그녀는 아이 아빠를 찾아 서울로 갔다. 그에게 아이를 보여 주었다.
 
  『아이를 보여 주니, 저희 모녀를 강원도 산골짜기 민박집에 데리고 가더라고요. 거기서 4주쯤 있으니까, 나타나서는 「우리 엄마가 아기를 보겠다고 데리고 오래」 그래요. 너무 잘됐다 싶었죠. 아이 100일 때 오수미 선배 등이 금팔찌, 금반지 같은 걸 해줬거든요. 그거 다 싸가지고 아이 아빠한테 보냈어요. 3일만 맡기로 했는데, 아이를 돌려주지 않는 겁니다』
 
  그녀는 L씨의 집 주소를 알아내서 아이를 찾으러 갔다. 하지만 그의 저택 문은 굳게 닫힌 채 인터폰으로 『아이는 3개월간 고아원에 맡겼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완전히 정신이 나갔어요. 전국 고아원을 4개월 동안 돌아다녔어요. 아이를 뺏기기 전에 아이 아빠한테 맞아서 얼굴이 풍선같이 됐는데. 그런 얼굴을 한 채 다녔어요. 정말 미치겠더라고요』
 
  아이 얘기를 하면서, 그녀는 서럽게 울었다. 그렇게 미친 듯이 찾아다녔던 딸이 「올해 대학교에 입학했다」고 한다. 아이를 뺏기고 장충동 고모 집에 누워 있던 그녀에게 서울지검 마약과 수사관 세 명이 1989년 7월7일 찾아왔다. 그날은 그녀의 생일이다.
 
  사라진 아이 아버지 L씨가 서울지검 마약과에 대마초를 피운 혐의로 잡혀 있다고 했다. L씨가 「김부선도 함께 피웠다」고 진술했다는 것이었다.
 
  『아이 아빠를 찾아다녔는데, 서울지검에 있다는데 얼마나 기쁘겠어요. 그래서 당장 갔죠. 서울지검에 아이 아빠와 그 아내가 대마초를 피운 혐의로 함께 구속돼 있더군요. 하지만 저는 구속보다 아이를 찾는 일이 먼저였어요』
 
 
  『정의의 칼을 가져왔다. 어쩔래』
 
   그녀는 아이를 찾기 위해 당시 자신을 조사하던 朴 모 검사에게 탄원서를 제출했다. 아이를 찾아 달라는 내용이었다.
 
  『탄원서 첫 문장을 「정의의 칼을 든 검사님」으로 시작했어요. 저는 절박한 심정으로 탄원서를 보여 주고, 반응을 기다리는데 쭈욱 훑어 보더니 종이를 던져요. 그러더니 「어이, 金수사관 압수한 칼 좀 가져와」 이래요.
 
  그래서 「뭘 하려고 저러나」 했더니, 일본도를 꺼내서 제게 들이대며 「김부선, 정의의 칼을 가져왔다, 어쩔래」 이러더군요. 그러고 나서 막 웃어요. 한마디로 저를 사람으로 안 본 거죠. 그냥 가지고 논 거예요. 아이를 찾겠다는 어미 마음을… 』
 
  김부선씨는 서럽게 울었다. 朴 모 검사 얘기를 할 때는 그녀에게서 섬뜩한 적의와 살의가 느껴졌다.
 
  ―그 검사를 아직 용서하기 어렵습니까.
 
  『용서는 못 하죠. 그냥 잊는 거죠』
 
  ―그 검사는 어떻게 됐습니까.
 
  『그 검사는 저희를 구속시킨 뒤 잘나갔다고 해요. 1989년 제가 아이 아빠와 함께 구속될 때, 아이 아빠뿐만 아니라 국회의원, 잘나가는 집안 출신들이 꽤 있었어요. 그러니 큰 건 한 거죠』
 
 
  『나 몰라? 서울지검』
 
  ―그 검사를 다시 본 적은 없습니까.
 
  『그게 참 기가 막혀서. 한 번 본 적이 있는데, 저를 찾아왔더군요』
 
  2004년에 대마초 흡연으로 구속돼 성동구치소에 수감돼 있는데, 朴 모 검사가 변호사가 되어 그녀를 면회하러 왔다고 한다. 그는 자신을 면회 온 변호사의 이름을 듣고 「너무 황당했다」고 했다.
 
  『면회를 거부할까 하다, 무슨 낯으로 왔는지 알고 싶어서 면회실로 갔어요. 저를 처음 보더니 「나 몰라? 서울지검. 안녕하세요, 안 해?」 이래요. 그래서 화는 끓어오르는데, 15년 만에 한다는 복수가 「알아도 몰라요」 이러고 말았어요.
 
  나한테는 최고의 복수인데, 이 사람은 그것도 몰라. 그냥 당황하는 거야. 권력에 맛을 들여서 당연히 자기에게 벌떡 일어나서 「네, 검사님 안녕하세요」 이래야 하는데, 안 하니까』
 
  ―뭐라고 하던가요.
 
  『말 좀 하자고 하더군요. 그래서 「할 말 없어요」 하니까, 「얘기 좀 하자고」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막 퍼부었죠. 「고맙다. 당신이 나를 대한민국을 말아 먹는 년처럼 만든 것. 아이 찾으러 간 사람에게 칼을 들이대서 고통 준 것, 고맙다」 이랬어요. 그랬더니 「미안하다」고 하더군요』
 
  ―그 검사가 왜 김부선씨를 찾아온 겁니까.
 
  『모르겠어요. 자기 말로는 사과하려고 왔다고 하데요』
 
  국내 굴지의 법무법인에서 일하는 朴모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그는 인터뷰를 거부했다. 朴변호사는 비서를 통해 『김부선씨 사건과 관련한 나의 입장은 「노 코멘트」』라는 말을 전해왔다.
 
  1990년 김부선씨는 8개월 옥살이를 마치고 출소했다. 아이 아버지 L씨는 10개월을 복역한 후, 아내와 함께 미국으로 떠났다. 아이는 김부선씨에게 돌아왔다. L씨는 미국에서 이혼한 후, 재혼해 아이를 하나 더 뒀다. 그는 2000년 한국에 돌아왔지만 김부선은 그를 만나지 못했다.
 
  『아이 아버지는 결국 미국으로 가서 재혼까지 했어요. 저만 혼자 남겨진 겁니다. 대중들은 나 때문에 전처와 깨지고 가정 파탄이 난 줄 알아요. 언론에서 정확히 알아보지도 않고 기사를 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떤 소문이 난 줄 아세요. 아이 아빠한테 위자료를 왕창 받아 놓고 제대로 살지 못하고 「화냥기」 때문에 술집 한다고 해요. 아이 아버지한테 위자료는커녕, 양육비조차 못 받았습니다』
 
 
  『대마초는 痲藥이 아니다』
 
  김부선씨는 1998년부터 이태원에서 카페를 하나 열고 딸과 함께 살았다.
 
  그녀는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 TV드라마 「불새」에 단역으로 출연했다. 「에로배우와 대마초」라는 족쇄를 완전히 풀어 버리고, 「여배우 김부선」으로 다시 서기에는 20년 가까운 세월도 부족했다.
 
  그녀는 2004년 7월15일 대마초를 흡연한 혐의로 또 구속됐다. 몇 년 전, 몇 차례 대마초를 흡연한 것이 문제가 됐다.
 
  『제가 너무 순진했어요. 검찰에서 「자수를 하면, 기자들에게 안 알리고, 문제없다」고 했어요. 밖에서 만나서 얘기를 하다가 자리를 옮기자고 하더니 그대로 구속시키더군요. 검사가 「함께 피운 거물들이 누구냐」고 다그쳐요. 아무리 생각해도 생각이 안 났어요.
 
  그래서 저한테 대마초를 팔았던 트럭 운전사 얘기를 했거든요. 그랬더니 엄청 혼을 내더군요. 검사의 조사를 받고, 영장실질심사를 하는데 판사 앞에서 펑펑 울었어요. 너무 무서웠거든요. 또 감옥에 가고 딸에게 상처를 주게 되는 게 너무 무서웠어요』
 
  ―다른 사람들이 싫어하고, 딸에게 상처를 주는데 대마초를 계속 피우는 이유가 있습니까.
 
  『처음 필로폰과 대마초를 했을 때는 멋모르고 했어요. 필로폰은 1986년 구속된 이후 딱 끊었어요. 필로폰은 무섭거든요. 중독 가능성이 높고, 끊기 어려워요. 그래서 딱 끊었어요.
 
  그런데 대마초는 그렇지 않아요. 중독성도 담배나 술에 비해 덜해요. 세계보건기구에서는 대마가 커피에 해당하는 의존성과 중독성이 있다고 발표했어요. 제가 녹내장을 앓고 있는데, 유럽과 미국 13개주가 대마를 녹내장 치료약으로 허용했습니다. 또 단순 흡연자는 벌금만 냅니다. 대마초는 마약이 아닙니다. 오히려 술과 담배가 마약입니다』
 
 
  대마 非범죄화 운동
 
영화배우 김부선(왼쪽 첫 번째)씨 등 문화예술인들이 2004년 12월9일 서울 안국동「느티나무」카페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대마초 흡연에 대한 처벌완화를 요구했다.
  그녀는 「대마 합법화 및 문화적 권리 확대를 위한 문화예술인 모임」의 지원을 받아 「대마초 非범죄화 운동」에 열정을 쏟고 있다. 그녀는 『이 부분을 꼭 좀 알려 달라』고 했다.
 
  ―「대마초 非범죄화」는 어떤 운동입니까.
 
  『한마디로 대마초의 생산 유통에 대해서는 엄격하게 막되, 단순 흡연자를 무슨 마약중독자로 취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대마초가 마약에 포함돼, 대마초 흡연으로 걸렸을 경우, 징역 5년 미만에 집행유예 5000만원이에요. 살인미수로 잡혔을 경우와 형량이 같아요.
 
  대마초 피우는 게 어떤 피해를 줬다고 살인미수와 같은 벌을 줍니까. 아프리카 독재국가나 중국도 대마초 단순 투약자를 징역 보내지 않아요. 중국도 우리나라 돈으로 벌금 5만원만 내면 됩니다. 저희가 조사한 바로는 OECD 국가들 가운데 징역살이를 시키는 것은 한국이 유일해요』
 
  ―대마초를 피우는 사람들에게 전혀 제재를 가하지 말자는 건가요.
 
  『궁극적인 목표는 그렇죠. 네덜란드를 포함해서 유럽의 몇몇 국가들은 처벌하지 않아요. 하지만 우리 정서상 갑자기 그럴 수는 없겠죠. 하지만 대마초를 필로폰이나 코카인처럼 무시무시한 마약으로 만들지 말고, 벌금형 정도로 느슨하게 처벌하자는 겁니다.
 
  주위에서나 다른 나라 사례에서 보듯이, 대마초 피우고 범죄 저지르는 사람 없습니다. 본드를 흡입한 것처럼 눈에서 광선 나오고, 하늘을 나는 듯한 느낌이 없어요. 그냥 편안할 뿐입니다. 담배와 술 때문에 우리 사회가 버리는 비용이 수십조원이에요. 지금 이 시간도 술 마시고 음주운전하고 마누라 패는 일이 벌어집니다. 그런데 왜 술과 담배는 마약으로 지정하지 않죠』
 
  그녀는 「대마초 非범죄화」 얘기를 하면서, 사회운동가의 모습으로 변했다. 그러면서 자신에게 칼을 들이댔던 朴 모 前 검사의 얘기를 다시 했다.
 
  『2004년 구속됐을 때, 朴 모 검사가 찾아와서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대마초는 마약 아니야. 나도 알아. 우리가 필로폰에 맛이 간 애들 구속시키면 제일 먼저 하는 게 대마 먹이는 거야. 그러면 정신을 차리고 중화를 시켜 주거든. 대마초가 마약 아니라는 거 나도 알아」 이러더군요.
 
  제가 머리가 띵해지는 게 정말 미치겠더라고요. 아니 담당 검사도 마약이 아니라는데 「나는 왜 사회의 지탄을 받으면서 지난 세월을 썩혔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대마초 非범죄화 운동」을 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녀는 『朴검사 같은 검사들이나, 우리나라 기자들, 정치인들이 비겁하다』고 했다.
 
 
  『대마초 非범죄화 운동으로 인생 되돌리겠다』
 
   『1989년 대마초로 구속될 때, 저는 얼굴을 가리지 않았어요. 떳떳했기 때문입니다. 기자들한테 「대마초가 마약 아닌 거 아시잖아요. 왜들 이러세요」 했어요. 단순 대마 흡연자들을 「살인마」 유영철처럼 취급을 하는 게 비겁한 거 아닌가요』
 
  그녀는 친한 연예인들 때문에 「안티朝鮮」 모임에 가입했지만, 朝鮮日報를 미워하지 않는다고 했다.
 
  『주요 언론에서 제 얘기를 제대로 다뤄 준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月刊朝鮮에서 인터뷰를 하자고 할 때 처음에 겁이 덜컥 났습니다. 月刊朝鮮이라면 저를 희화화하거나 매도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어요. 제 진심을 제대로 전해 주셨으면 해요. 저는 대마초 때문에 사회에서 비난을 받았지만, 대마초 非범죄화 운동으로 제 인생을 돌이키고 싶어요. 月刊朝鮮이 도와주세요』●
 
  사진 : 이태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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