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正日은 고춘행(고영희)과 본격적으로 사귀기 시작한 무렵인 1971년 첫부인인 성혜림에게서 첫아들 김정남을 얻었고, 둘째 부인이자 본부인인 김영숙과 결혼생활을 하고 있었다.
고춘행, 즉 高英姬는 金正日의 세 번째 부인이 됐다.
고춘행, 즉 高英姬는 金正日의 세 번째 부인이 됐다.
高英姬 아버지 高太文의 전기
- 金正日의 세 번째 부인 高英姬(1953~2004).
북한 金正日(김정일)의 세 번째 부인이었던 高英姬(고영희·1953~2004)씨의 이름으로 북한의 유도계를 창설하고 이끌어 왔던 부친 高太文(고태문)의 傳記(전기) 「유술애국자」가 출간됐다.
이 책은 2006년 7월20일 북한의 체육출판사가 출간했고, 저자의 이름은 高英姬가 아니라 그녀의 어릴 적 본명으로 보이는 高春幸(고춘행)으로 돼 있다.
일본의 마이니치 신문은 최근 이 책을 근거로, 「이 책은 高英姬가 쓴 아버지 고태문의 傳記이며, 책 안에 金正日과 高英姬의 로맨스가 담겨 있다」고 보도했다. 조선일보 동경특파원 鄭權鉉(정권현) 기자가 이 책을 단독 입수, 月刊朝鮮에 전달했다.
국정원 측은 지난 12월1일 마이니치 신문의 보도에 대해 『고영희와 고춘행은 같은 사람이 아닌 것으로 보고 있다. 북한 내각의 기관지 민주조선 2005년 10월4일자에 「고춘행 동무는 조선예술교류협회 부원으로 일하고 있다」는 내용이 보도된 적이 있다』고 밝혔다.
『「유술애국자」의 저자는 高英姬가 아니다』는 국정원의 공식 否認(부인)이었던 셈이다. 국정원의 이같은 주장은 「고태문의 딸이 高英姬」라는 在日교포 출신 북한 귀국자들의 공통적인 지식에 어긋나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국정원이 金正日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억지를 부리고 있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227페이지에 이르는 「유술애국자」의 내용을 읽어 보면, 이 글의 저자가 북한의 평범한 예술단원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고춘행은 이 책에서 「내가 스무 살 때인 1973년 1월28일 추운 겨울 밤 11시 온통 눈가루를 뒤집어 쓴 누군가가 우리 집(고태문의 집)을 방문했는데, 나는 그 사람이 金正日임을 알고 깜짝 놀랐다」고 밝혔다.
이 전기에 따르면, 그 당시 노동당 조직부부장으로 「위대한 수령」 金日成의 후계자로 확정됐던 金正日은 밤 11시에 고춘행을 찾아왔다. 그리고 눈을 맞으며 외국어대학에 진학할 예정이었던 그녀의 진로를 상담했다.
『고춘행은 고영희, 의문의 여지 없다』
金正日은 고춘행에게 『건강이 좋지 않아 외국어대학에 보내 달라는 의견을 받고 동무의 의견대로 외국어대학에 보내려 한다』고 말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자애로운 그이(金正日)께서는 나(고춘행)를 정겹게 바라보시며 동무를 대학에 보내기 전에 한번 만나보자고 했는데 짬을 내지 못하다가 오늘에 이렇게 왔다」
이 글의 저자인 고춘행과 북한 최고 권력자 金正日은 한밤중에 만나서 따뜻한 눈길을 나누던 연인 사이였고, 그런 점에서 고춘행은 高英姬일 수밖에 없다. 설사 고춘행이라는 예술단원이 있어서 金正日과 「戀情(연정)」을 잠시 나누었다고 하더라도, 북한 사회에서 그런 사실을 공개할 수는 없다.
스탈린·히틀러·모택동 같은 절대 권력자들의 사생활은 그들이 살아 있는 동안 국가 1급 기밀로 취급됐다. 북한에서도 마찬가지다. 高英姬가 아닌 한 예술단원 고춘행이 이런 내용을 담아 책으로 냈다면, 그녀는 쥐도 새도 모르게 북한 사회에서 사라졌을 게 분명하다.
고춘행이 金正日을 처음 만난 것은 그녀가 18세이던 1971년 10월27일 「영화 축구단」을 위한 연회장에서였다. 金正日이 그녀를 옆자리로 부른 것으로 이 책에 서술돼 있다.
「高英姬가 이름 없는 예술단에서 근무하다가 우연히 金正日의 눈에 들어 북한 최고의 예술단인 만수대예술단 단원으로 스카우트됐다」고 알려졌던 바로 그 시점이다.
金正日은 고춘행과 본격적으로 사귀기 시작한 무렵인 1971년 첫부인인 성혜림과의 사이에서 첫아들 김정남을 얻었고, 둘째 부인이자 본부인인 김영숙과 결혼생활을 하고 있었다. 고춘행, 즉 高英姬는 金正日의 세 번째 부인이 됐다.
前 북한축구대표팀 윤명찬 감독의 증언
고태문은 북송 재일교포로 1961년 5월 제58차 귀국선을 타고 북한으로 건너가 사실상 북한 유도계를 창설한 인물이다. 그와 함께 북한으로 갔던 유도인 김안홍과 함께 북한 체육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다.
고태문의 제자였던 김안홍은 북한 유도선수로서 국제대회에서 첫 메달을 획득한 선수이다. 고태문이 더욱 유명해진 것은 그의 딸 高英姬가 金正日의 눈에 들어 세 번째 부인이 됐기 때문이다. 북한 체육계에서는 「高英姬는 고태문의 딸」로 널리 알려져 있다.
高英姬의 부친 고태문과 절친한 사이였던 前 북한축구대표팀 윤명찬 감독은 『고태문에게는 高英姬와 고영숙 두 딸이 있다』며 『고춘행이 高英姬의 본명인지는 모르겠지만, 전기에서 金正日의 사랑을 듬뿍 받은 상대는 高英姬가 분명하다』고 밝혔다.
윤명찬 감독은 『고춘행이 高英姬가 아니라면, 이런 책은 나올 수 없다』고 못박았다.
金正日 후계작업 본격화의 신호탄
재일 조총련이 1989년 11월에 발간한 「조국의 품에 안겨」라는 책자는 고태문과 그의 딸 고춘행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김일성 주석은 1961년 (북한으로) 귀국한 고태문에게 그의 희망대로 유도 후진양성 사업을 맡겼다. 고태문은 1963년 柔術協會(유술협회)의 초대위원장이 됐고, 다음해인 1964년 공화국 공훈체육인 호칭을 받았다.
김정일 서기는 주석의 뜻에 따라 고태문 일가를 여러 가지로 배려했다. 고태문의 딸 春幸은 재능 있는 예술가이다」
고태문의 전기가 그의 딸 高英姬가 죽은 지 2년이 지나서야 출간된 데 대해, 「金正日의 후계자 옹립 작업이 시작된 것」이라는 관측이 제기되고 있다. 1970년대 초반 金正日이 후계자로 지명될 당시 함북 회령 출신인 金正日의 母親(모친) 김정숙에 대한 우상화 작업이 본격화된 것과 유사하다.
이 때문에 고태문의 전기 「유술애국자」는 金正日-高英姬의 소생인 김정철·김정운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을 金正日의 후계자로 세우기 위한 사전 작업이 본격화됐음을 보여 준다.
또한 이 책은 절대 권력자 金正日의 혼외 정사를 상세하게 밝힌 희귀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金正日에 대한 찬양 일변도로 구성돼 있지만, 독재자 金正日의 독특한 애정행각과 심리를 엿볼 수 있다.
▣ 「유술 애국자」中 金正日·高英姬 관련 부분
〔편집자 注〕아래 발췌한 내용의 표기는「유술 애국자」原文(원문)의 표기방식에 따른 것임.
주체62(1973)년 1월28일이였다.
그날은 대한이 지났다고 하지만 밖은 몹시도 추웠다.
눈보라가 눈을 미처 뜨지 못할 정도로 기승을 부렸고 창가 마다엔 허연 성에가 두툼하게 시리여 있었다.
아버지는 훈련장에서 아직 돌아오시지 않았고, 어머니도 동생들과 함께 승행오빠네 집에 간지라 집에는 나혼자 있었다.
밤이 퍽 깊었으니 이젠 자라고 벽에 걸어놓은 시계가 11점을 여무지게 쳐냈다.
내가 방의 불을 끄고 잠자리에 들려는데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아버지가 돌아 오신 거라고 생각한 나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불을 켜고 천천히 전실로 나가 문을 열었다.
아버지냐고 물으며 문을 열던 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문 밖에 온통 눈가루를 뒤집어 쓴 낯이 익은 한 일군(일꾼)이 서있었기 때문이였다.
경애하는 장군님의 가까이에서 일을 보는 그 일군은 깜짝 놀라는 나를 보며 빙긋 웃더니 어서 옷을 입고 나오라는 것이였다.
무슨 일인가 하여 어리둥절해 있는 나에게 그 일군은 「지금 밖에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눈보라를 맞으시며 기다리신다」고 알려 주었다.
나는 몹시 당황하여 헤덤벼치며 옷차림새를 바로 하고 급히 밖으로 달려나갔다.
모진 추위 속에서도 백두산장군의 자세로 끄떡하지 않으시고 서 계시던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황황히 달려나온 저에게 정다운 미소를 보내시며 「그 사이 잘 있었는가」고, 「몸이 아프다고 하던데 어떻느냐」고 다정히 물어 주시였다.
나는 눈보라가 몰아치는 추운 밖에서 장군님을 뵙게 된지라 너무도 송구스러워 어찌할 바를 몰라 제대로 대답을 올리지 못하였다.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송구스럽기 그지없다.
어버이수령님의 혁명사업을 보좌해 드리시느라 온 나라 인민이 요람 속에 깊이 잠든 밤에도 쉬지 않으시고 불철주야하시는 경애하는 장군님을 뜨끈한 집에 들어가시자고 하지 못할망정 인사도 제바로 올리지 못하였으니 이보다 더 큰 죄가 어디 있으랴.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동무가 건강이 좋지 못하여 예술활동을 하기 어렵게 되였으므로 외국어대학에 보내 달라고 한다는 의견을 보고받았다」고 하시면서 「그래서 동무의 의사대로 외국어대학에 보내려고 한다」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평범한 배우를 크게 믿으시고 일류급 예술단인 만수대예술단에 소환하시여 훌륭한 무용배우가 되기를 그처럼 기대하시였는데 그 사랑에 보답할 생각은 못 하고 오히려 제 몸만 생각하며 대학에 보내 달라고 제기한 철없는 나를 탓할 대신 사랑을 돌려 주시는 경애하는 장군님 앞에서 나는 죄책감에 차마 머리를 들 수가 없었다.
그러는 나를 정겹게 바라보시며 자애로운 그이께서는 「동무를 대학에 보내기 전에 한번 만나보자고 하였는데 짬을 내지 못하다가 오늘에야 이렇게 왔다」고 하시면서 「공부를 잘해야 한다」고 당부하시였다.
한참 동안을 두시였던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수령님께서는 동무뿐 아니라 동무의 아버지에 대해서도 잘 알고 계시며 우리나라 유술발전을 위해 한몫 단단히 한 사람이라고 늘 관심을 돌리고 계십니다. 수령님께서 동무아버지와 동무에 대하여 잘 알고 계시며 당에서 동무를 공부시키자고 결심한 것만큼 동무는 앞으로 대학에 가서 공부를 잘하고 생활도 잘해야 하겠습니다」라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의 다심하신 말씀에 나는 신심에 넘쳐 씩씩하게 대답을 올리였다.
「친애하는 지도자동지, 제 꼭 대학에 가서 공부를 잘하겠습니다. 믿어 주십시오」
나의 신심에 넘친 대답을 들으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기뻐하시며 「동무의 그 결의가 좋다」고, 「당은 언제나 동무의 그 결의를 믿겠다」고 하시면서 「대학을 졸업하면 앞으로 당을 위하여 한몫 단단히 하는 훌륭한 일군이 되여야 하겠습니다. 앞으로 공부하는 데 애로되는 문제가 있으면 언제나 나를 찾아오시오」라고 뜨거운 육친적 사랑을 부어 주시였다.
사랑이면 이런 사랑이 어데 있고 믿음이면 이런 믿음이 또 어데 있겠는가.
나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그 뜨거운 사랑과 세심한 보살피심에 목이 메여올랐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사랑을 부어 주시고 떠나가신 뒤 한참 후에 아버지가 퇴근해 왔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밖에 혼자 서있는 나를 본 아버지가 의아해서 물었다.
「이 추운데 밖에 왜 나와 서있는 거냐?」
나는 벅찬 감정을 안고 방금 전에 있었던 감격적인 사연을 아버지에게 그대로 이야기하였다.
「뭐라구?」
아버지는 너무도 뜻밖의 감격적인 사랑에 가방을 떨구며 못박힌 듯 서 버렸다.
그러다가 불시에 무릎을 꿇고 주저앉으며 두 손으로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딛고 서계셨던 자리에 새겨져 있는 그이의 발자욱이 눈가루에 묻힐가 보아 꼭 덮었다.
그리고는 고마움의 파도가 이는 마음을 진정하지 못하였다.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서 이 아버지뿐만 아닌 네 운명도 지켜 주시며 보살피고 계시는구나.
춘행아. 너나 나나 다 어버이 수령님께서 아시고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서 보살펴주신다는 걸 명심하구 그 사랑, 그 믿음에 보답하기 위해 혁명의 한 길을 탈선 없이 곧바로 가자꾸나」
아버지는 감격에 북받치면 말을 많이 하지 않았다. 마음속에 깊이 묻어 두고 오래오래 새겨 보는 것이 아버지의 습관이였다. 아버지와 나는 그날밤 눈보라가 아무리 기승을 부렸지만 추운 것도 모르고 오래도록 밖에 서있었다. 봄의 훈향과도 같은 따사로움을 뿌려 주신 경애하는 장군님의 사랑을 마음속에 깊이 안으며 말보다 생각에 잠기여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이름 없던 한 체육인에게 이 세상 친부모들의 사랑을 다 합쳐도 비길 수 없는 그렇듯 숭고한 사랑을 부어 주시고도 그것이 부족하신 듯 거듭거듭 은정을 베풀어 주시고 그 자녀들까지 살뜰히 돌봐 주시는 그처럼 고결한 사랑과 의리를 어떻게 한두마디로 다 이야기할 수 있으랴.
하기에 아버지는 눈을 감으면서도 우리 자식들의 운명 문제에 대하여 한마디의 말도 남기지 않았다. 그것은 바로 경애하는 장군님의 한없이 따사로운 품에 맡긴 이 자식들의 운명에 행복과 기쁨만이 있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였다.
아버지의 생은 말 그대로 애국으로 빛나는 삶이였다.
주체76(1987)년 4월,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아버지의 공로를 높이 평가하시여 어버이수령님의 명의로 된 애국렬사증을 수여하도록 하여 주시였다.
애국렬사! 누구나 쉬이 부를 수도 받아안을 수도 없는 그 숭고한 영예를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이름 없는 한 체육인에게 안겨 주시고 죽어서도 영원히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도록 빛나는 삶의 언덕에 내세워 주시였다.
어버이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의 은혜로운 품이 있기에 아버지는 참된 삶과 행복을 마음껏 누릴 수 있었으며 오늘도 체육인대오와 함께 애국의 길을 걸어가는 참다운 혁명전사로 그 이름 길이 빛나고 있는 것이다.
애국렬사증을 수여받던 그날 우리 자식들은 어버이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의 그 사랑에 목매여 흐느끼며 정녕 그 품은 전사에게 영생의 삶을 안겨 주는 위대한 품임을 다시한번 가슴 뜨거이 절감하였다.
돌이켜 보면 어제날 한낱 보잘것없는 식민지 체육인으로 버림받던 아버지가 주체체육발전의 거창한 흐름에 합류하여 나가는 축복받은 조선의 체육인으로 긍지 높은 혁명의 전사로 성장하여 복된 삶을 누린 것은 전적으로 어버이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일깨워 주시고 가르쳐 주시고 손잡아 이끌어 주신 덕분이다.
어버이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을 떠나서는 아버지의 모든 영예와 행복 그리고 아버지의 존재가치에 대하여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사랑과 은혜를 받을 줄만 알고 그에 천만분의 하나도 보답하지 못한 변변치 못한 전사를 잊지 않으시고 길이길이 추억하시며 애국자라는 크나큰 칭호를 안겨 주셨으니 그 고마움과 은혜로움을 이 자식인들 진정 무엇으로 다 표현할 수 있겠는가.
그저 고맙다는, 고맙다는 감사의 절을 드리고 또 드리고 될 뿐이니 말이다.
아버지도 아마 알 것이다.
생은 비록 고동은 멈추었다 해도 자신의 삶이 어느 분에 의해 애국으로 빛나게 됐는가를, 경애하는 장군님 계시여 떠나간 이 나라 수많은 혁명전사들의 삶이 어떻게 영생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경애하는 장군님의 그 사랑은 앞에서도 이야기하였지만 끝을 모르는 사랑이다.
아버지처럼 나도 경애하는 장군님의 사랑을 그 누구보다도 많이 받으며 성장하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나의 혁명적 성장을 위하여 따뜻한 지도를 주시고 극진히 사랑하여 주신 이야기는 몇 권의 책으로도 다 담지 못할 것이다. 나는 그 하많은 이야기 중에서 몇 가지 사실만을 여기에 적으려고 한다.
주체60(1971)년 10월27일, 나는 상상할 수 없는 크나큰 영광을 받아안게 되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영화축구단 선수들을 위한 연회에 참가한 나를 몸소 자신의 옆자리에 불러 주신 것이였다.
해빛같이 따사로우신 경애하는 장군님을 모시고 진행되는 연회에 참가한 것만도 영광스러운 일인데 글쎄 자신의 옆자리에 불러 주시니 영광이면 이보다 큰 영광이 어데 또 있겠는가.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송구스러워하면서도 기뻐 어쩔 줄 몰라 하는 나를 옆자리에 앉히시고 「예술활동이 힘들지 않는가」고, 「동무가 사업과 생활을 잘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긴 하였는데 그게 사실인지 모르겠다」고 웃음을 지으시며 물으시였다.
나는 언제나 나의 사업과 생활을 세심히 돌봐 주시고 보살피시는 경애하는 그이의 사랑에 무한한 행복감으로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하며 어리광조로 「일을 쓰게 못합니다」 하고 대답을 올렸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일을 잘하지 못한단 말이지요. 그것을 알면 되였습니다」 하시며 「지도일군들이 동무를 기특히 여기고 평가해 준다고 하여 그것이 자기가 특별히 잘나서 그러는 줄만 알면 안 된다」고 따뜻이 깨우쳐 주시였다.
그러시면서 경애하는 金正日 장군님께서는 「우리가 직접 동무를 만수대예술단에 소환하였는데 당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하여야 하겠습니다」라고 당부하신 다음 춤을 잘 춘다는 것이 헐한 일이 아니라고, 여기 모인 축구선수들 못지않게 동무들이 수고한다고 나뿐이 아닌 우리 무용배우들을 높이 평가하여 주시였다.
우리의 전체 무용배우들의 마음은 파도처럼 세차게 설레이였다.
주체예술의 화원 속에 품어 주시여 예술인이라면 누구나 부러워 할 화려한 극장무대에 세워 주신 것만 해도 고마운 일인데 춤추는 것이 헐한 일이 아니라시며 그처럼 평가해 주시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그 사랑의 말씀에 우리 무용배우들의 얼굴마다에는 다함없는 경모와 감사의 정만이 비끼여 있었다.
비상한 예술적 식견을 지니신 어버이장군님께서는 우렁우렁하신 음성으로 「춤을 잘 추자면 정열이 있어야 한다」고 하시면서 「무용가는 정열적이면서도 정서가 풍부하여야 하며 섬세하면서도 강기가 있어야 한다」고 가르쳐 주시였다.
나는 지금도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발표하신 무용예술의 총서인 「무용예술론」을 펼칠 때면 이날에 하신 그이의 말씀을 되새겨보군 한다. 참말로 경애하는 장군님은 예술의 천재이시다. 나는 끝없는 감격으로 설레이는 무용배우들의 다함없는 경모와 감사의 정을 담아 경애하는 장군님께 축배잔을 삼가 올리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이름 없는 평범한 예술인이 올리는 감사의 축배잔을 받으시고 「고맙습니다. 춘행 동무도 건강하여 일을 잘하기 바랍니다」라는 뜨거운 믿음의 말씀을 하시였다.
순간 끓어오르는 감격과 경탄이 만장을 휩쓸고 박수는 우뢰 소리로 터져올랐다. 영광에 영광이 겹쳤던 그날을 추억할 때면 나는 지금 이 자리에서도 생각해 본다.
내 언제면 붉은기를 높이 드시고 선군장정의 천만리 길을 걷고 또 걸으시는 우리 장군님께 다시 축배잔을 올릴 영광의 그날이 올가 하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아직 신인배우에 불과한 나를 따뜻한 손길로 보살펴 주시며 만수대예술단의 한 성원으로 외국공연의 무대에서 세워 주시였다.
나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따사로운 사랑과 믿음 속에 싱가포르, 이라크 등 아시아는 물론 프랑스, 스위스를 비롯한 서유럽 나라들을 방문하여 주체조선의 예술인이 된 크나큰 긍지와 자부심에 넘쳐 춤을 추고 또 추었다.
나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사랑과 믿음을 받아안을 때마다 사람이 가질 수 있는 행복 중에서 제일 큰 행복을 내가 누리고 있다는 생각만 들었다. 이 은혜로운 사랑의 품속에서라면 그 누가 조국과 혁명을 위한 참다운 인민의 배우로 자라나지 못하겠는가!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이처럼 손잡아 이끌어 주시고 믿음을 주시고 힘을 주시고 기쁨을 안겨 주시는데 민족예술 발전을 위한 길에서 장군님께 나의 깨끗한 마음을 바치자! 이런 결의가 가슴 가득히 차오를 뿐이였다.
아마 독자들은 덕성실기를 통하여 어버이수령님의 탄생 60돐 경축공연시연회 때 소개자가 엄청난 실수를 한 사실을 잘 알 것이다. 그때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엄청난 실수를 한 소개자가 바로 나 고춘행이였다.
어버이수령님의 탄생 60돐 경축공연 소개를 맡은 나는 그때 집에 와서도 련습을 거듭하였다.
소개는 공연의 첫 얼굴인 것만큼 나는 어떻게 하나 소개를 잘하여 탄생일을 맞으시는 어버이수령님께 기쁨을 드리려고 극장에서나 집에 들어와서나 련습을 중단하지 않았다.
거울 앞에 마주 서서 소개련습을 거듭하는 나를 바라보던 아버지가 「벌써 우리 수령님께서 환갑을 맞으시다니. 이럴 때 보면 세월도 참 무정도 하지. 우리 수령님년세가 환갑이 아니라 쉰돐로 탄생일을 맞으시면 얼마나 좋겠니」 하고 말하는 것이였다.
나는 그때 아버지의 말을 들으면서 정말 우리 수령님께서 이번 탄생일을 쉰돐로 맞이했으면 하는 아쉬운 마음을 가지였다. 그러다 나는 시연회 때 큰 실수를 하게 되였다. 그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몸소 경축공연시연회를 지도하시기 위해 극장에 나오시였다. 나는 언제나 뵙고 또 뵙고 싶은 한없이 자애로우신 경애하는 장군님의 지도를 받는다는 기쁨으로 하여 마음이 막 울렁거렸었다. 겨우 마음을 다잡으며 나는 무대 앞에 나섰다. 다소곳이 인사를 올린 나는 경애하는 장군님 앞에서 첫 소개를 하였다.
「지금부터 위대한 수령 金日成 동지의 탄생 50돐 경축예술공연을 시작하겠습니다」
순간 무대도 관람석도 숨죽은 듯 정적이 깃들었다. 첫 소개를 제딴엔 잘했다고 생각하며 돌아서던 나는 극장일군들과 배우들의 얼굴이 새하얘진 것을 보고서야 엄청난 실수를 했다는것을 느끼였다. 어버이수령님의 탄생일이 60돐인데 50돐이라고 소개했으니 실수면 이런 대실수가 어데 있겠는가. 그것도 경애하는 장군님 앞에서.
나는 본의아닌 실수로 하여 경축공연시연회를 파탄시켰다는 생각으로 눈앞이 막 아찔해 왔다. 당장이라도 울고 싶었다. 일군들도 배우들도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런데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첫 소개에서부터 실수한 나를 탓하신 대신 일군들과 창작가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공연소개를 맡은 배우가 위대한 수령님탄생 60돐을 50돐로 잘못 소개하였는데 그가 소개한 대로 수령님께서 올해에 탄생 50돐을 맞으신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도 아마 수령님께서 탄생 50돐을 맞으신다면 얼마나 좋겠는가고 생각하다가 실수를 하였을 것입니다. 수령님께서 영원히 젊어 계셨으면 하는 것은 우리 인민의 한결같은 마음입니다. 그러니 그가 실수를 하였지만 우리 인민의 심정을 그대로 말한 셈입니다』
실수를 해도 이마지게 실수를 한 나를 꾸지람할 대신 너그럽고도 아량 있게 대해 주시는 자애로운 경애하는 장군님의 그 말씀에 나와 시연회에 참가한 모든 예술인들은 격정에 휩싸였다.
사실 어버이수령님께서 영원토록 젊어 계시기만을 제일로 바라시는 분은 다름아닌 우리의 장군님이시다.
그러나 세월은 현실인 것만큼 그대로 환갑을 맞으시는 어버이수령님의 년세를 정확히 밝혀야 하니 우리 장군님인들 왜 가슴 아프지 않으시랴. 어버이수령님의 안녕이라면 하늘의 별도 따오시는 분이 우리 장군님이시다.
나는 그날 경애하는 장군님의 사랑과 믿음 속에 다시 무대로 나가 소개를 하였으며 어버이수령님을 모시고 진행하는 공연을 성과적으로 보장하는 데 자신의 적은 기량이나마 바칠 수 있었다.
참으로 어버이장군님의 해빛과도 같은 사랑은 그야말로 마를 줄 모르는 샘줄기였다. 경애하는 장군님의 세심한 보살피심 속에 만수대예술단 배우로 사업하던 나는 그후 평양외국어대학에서 마음껏 배웠으며 졸업 후에는 조선민속박물관 외국어강사로, 오늘날엔 조선예술교류협회 부원으로 성장하였다.
또한 나의 동생들도 모두 경애하는 장군님의 사랑 속에 나라의 어엿한 일군으로 자라났다. 사랑의 바다는 끝이 없다. 출렁이고 출렁이며. 세상에는 사랑과 의례에 대한 이야기들이 수많이 전해 오건만 우리의 경애하는 金正日 장군님처럼 이름 없던 한 체육인을 한품에 안으시여 애국자로 키워 주시고 그 자녀들까지 살뜰히 돌봐주시는 그처럼 고결한 사랑과 의리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삶을 빛내여 주는 위대한 사랑.
이것은 이 세상에서 인간을 가장 귀중히 여기는 참다운 사랑, 혁명전사들을 사랑의 중심에 세워 주시는 가장 고결하고 숭고한 혁명적 의리를 베풀고 계시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품이라는 것을 나는 온 세상에 소리 높이 웨치고 싶다.●
이 책은 2006년 7월20일 북한의 체육출판사가 출간했고, 저자의 이름은 高英姬가 아니라 그녀의 어릴 적 본명으로 보이는 高春幸(고춘행)으로 돼 있다.
일본의 마이니치 신문은 최근 이 책을 근거로, 「이 책은 高英姬가 쓴 아버지 고태문의 傳記이며, 책 안에 金正日과 高英姬의 로맨스가 담겨 있다」고 보도했다. 조선일보 동경특파원 鄭權鉉(정권현) 기자가 이 책을 단독 입수, 月刊朝鮮에 전달했다.
국정원 측은 지난 12월1일 마이니치 신문의 보도에 대해 『고영희와 고춘행은 같은 사람이 아닌 것으로 보고 있다. 북한 내각의 기관지 민주조선 2005년 10월4일자에 「고춘행 동무는 조선예술교류협회 부원으로 일하고 있다」는 내용이 보도된 적이 있다』고 밝혔다.
『「유술애국자」의 저자는 高英姬가 아니다』는 국정원의 공식 否認(부인)이었던 셈이다. 국정원의 이같은 주장은 「고태문의 딸이 高英姬」라는 在日교포 출신 북한 귀국자들의 공통적인 지식에 어긋나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국정원이 金正日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억지를 부리고 있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227페이지에 이르는 「유술애국자」의 내용을 읽어 보면, 이 글의 저자가 북한의 평범한 예술단원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고춘행은 이 책에서 「내가 스무 살 때인 1973년 1월28일 추운 겨울 밤 11시 온통 눈가루를 뒤집어 쓴 누군가가 우리 집(고태문의 집)을 방문했는데, 나는 그 사람이 金正日임을 알고 깜짝 놀랐다」고 밝혔다.
이 전기에 따르면, 그 당시 노동당 조직부부장으로 「위대한 수령」 金日成의 후계자로 확정됐던 金正日은 밤 11시에 고춘행을 찾아왔다. 그리고 눈을 맞으며 외국어대학에 진학할 예정이었던 그녀의 진로를 상담했다.
『고춘행은 고영희, 의문의 여지 없다』
![]() |
북한 체육출판사가 2006년 발간한 유도인 고태문의 전기「유술애국자」. 고태문의 딸 고영희가 아버지의 일생을 회고하는 형식이다. |
「자애로운 그이(金正日)께서는 나(고춘행)를 정겹게 바라보시며 동무를 대학에 보내기 전에 한번 만나보자고 했는데 짬을 내지 못하다가 오늘에 이렇게 왔다」
이 글의 저자인 고춘행과 북한 최고 권력자 金正日은 한밤중에 만나서 따뜻한 눈길을 나누던 연인 사이였고, 그런 점에서 고춘행은 高英姬일 수밖에 없다. 설사 고춘행이라는 예술단원이 있어서 金正日과 「戀情(연정)」을 잠시 나누었다고 하더라도, 북한 사회에서 그런 사실을 공개할 수는 없다.
스탈린·히틀러·모택동 같은 절대 권력자들의 사생활은 그들이 살아 있는 동안 국가 1급 기밀로 취급됐다. 북한에서도 마찬가지다. 高英姬가 아닌 한 예술단원 고춘행이 이런 내용을 담아 책으로 냈다면, 그녀는 쥐도 새도 모르게 북한 사회에서 사라졌을 게 분명하다.
고춘행이 金正日을 처음 만난 것은 그녀가 18세이던 1971년 10월27일 「영화 축구단」을 위한 연회장에서였다. 金正日이 그녀를 옆자리로 부른 것으로 이 책에 서술돼 있다.
「高英姬가 이름 없는 예술단에서 근무하다가 우연히 金正日의 눈에 들어 북한 최고의 예술단인 만수대예술단 단원으로 스카우트됐다」고 알려졌던 바로 그 시점이다.
金正日은 고춘행과 본격적으로 사귀기 시작한 무렵인 1971년 첫부인인 성혜림과의 사이에서 첫아들 김정남을 얻었고, 둘째 부인이자 본부인인 김영숙과 결혼생활을 하고 있었다. 고춘행, 즉 高英姬는 金正日의 세 번째 부인이 됐다.
前 북한축구대표팀 윤명찬 감독의 증언
![]() |
「유술애국자」 판권에 저자는「고춘행」으로 되어 있다. 고영희가 죽은 지 2년 후 그녀의 이름으로「고태문 전기」가 출간된 것이 눈길을 끈다 |
고태문의 제자였던 김안홍은 북한 유도선수로서 국제대회에서 첫 메달을 획득한 선수이다. 고태문이 더욱 유명해진 것은 그의 딸 高英姬가 金正日의 눈에 들어 세 번째 부인이 됐기 때문이다. 북한 체육계에서는 「高英姬는 고태문의 딸」로 널리 알려져 있다.
高英姬의 부친 고태문과 절친한 사이였던 前 북한축구대표팀 윤명찬 감독은 『고태문에게는 高英姬와 고영숙 두 딸이 있다』며 『고춘행이 高英姬의 본명인지는 모르겠지만, 전기에서 金正日의 사랑을 듬뿍 받은 상대는 高英姬가 분명하다』고 밝혔다.
윤명찬 감독은 『고춘행이 高英姬가 아니라면, 이런 책은 나올 수 없다』고 못박았다.
金正日 후계작업 본격화의 신호탄
재일 조총련이 1989년 11월에 발간한 「조국의 품에 안겨」라는 책자는 고태문과 그의 딸 고춘행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김일성 주석은 1961년 (북한으로) 귀국한 고태문에게 그의 희망대로 유도 후진양성 사업을 맡겼다. 고태문은 1963년 柔術協會(유술협회)의 초대위원장이 됐고, 다음해인 1964년 공화국 공훈체육인 호칭을 받았다.
김정일 서기는 주석의 뜻에 따라 고태문 일가를 여러 가지로 배려했다. 고태문의 딸 春幸은 재능 있는 예술가이다」
고태문의 전기가 그의 딸 高英姬가 죽은 지 2년이 지나서야 출간된 데 대해, 「金正日의 후계자 옹립 작업이 시작된 것」이라는 관측이 제기되고 있다. 1970년대 초반 金正日이 후계자로 지명될 당시 함북 회령 출신인 金正日의 母親(모친) 김정숙에 대한 우상화 작업이 본격화된 것과 유사하다.
이 때문에 고태문의 전기 「유술애국자」는 金正日-高英姬의 소생인 김정철·김정운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을 金正日의 후계자로 세우기 위한 사전 작업이 본격화됐음을 보여 준다.
또한 이 책은 절대 권력자 金正日의 혼외 정사를 상세하게 밝힌 희귀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金正日에 대한 찬양 일변도로 구성돼 있지만, 독재자 金正日의 독특한 애정행각과 심리를 엿볼 수 있다.
〔편집자 注〕아래 발췌한 내용의 표기는「유술 애국자」原文(원문)의 표기방식에 따른 것임.
주체62(1973)년 1월28일이였다.
그날은 대한이 지났다고 하지만 밖은 몹시도 추웠다.
눈보라가 눈을 미처 뜨지 못할 정도로 기승을 부렸고 창가 마다엔 허연 성에가 두툼하게 시리여 있었다.
아버지는 훈련장에서 아직 돌아오시지 않았고, 어머니도 동생들과 함께 승행오빠네 집에 간지라 집에는 나혼자 있었다.
밤이 퍽 깊었으니 이젠 자라고 벽에 걸어놓은 시계가 11점을 여무지게 쳐냈다.
내가 방의 불을 끄고 잠자리에 들려는데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아버지가 돌아 오신 거라고 생각한 나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불을 켜고 천천히 전실로 나가 문을 열었다.
아버지냐고 물으며 문을 열던 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문 밖에 온통 눈가루를 뒤집어 쓴 낯이 익은 한 일군(일꾼)이 서있었기 때문이였다.
경애하는 장군님의 가까이에서 일을 보는 그 일군은 깜짝 놀라는 나를 보며 빙긋 웃더니 어서 옷을 입고 나오라는 것이였다.
무슨 일인가 하여 어리둥절해 있는 나에게 그 일군은 「지금 밖에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눈보라를 맞으시며 기다리신다」고 알려 주었다.
나는 몹시 당황하여 헤덤벼치며 옷차림새를 바로 하고 급히 밖으로 달려나갔다.
모진 추위 속에서도 백두산장군의 자세로 끄떡하지 않으시고 서 계시던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황황히 달려나온 저에게 정다운 미소를 보내시며 「그 사이 잘 있었는가」고, 「몸이 아프다고 하던데 어떻느냐」고 다정히 물어 주시였다.
나는 눈보라가 몰아치는 추운 밖에서 장군님을 뵙게 된지라 너무도 송구스러워 어찌할 바를 몰라 제대로 대답을 올리지 못하였다.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송구스럽기 그지없다.
![]() |
영화 현지지도하는 金正日. |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동무가 건강이 좋지 못하여 예술활동을 하기 어렵게 되였으므로 외국어대학에 보내 달라고 한다는 의견을 보고받았다」고 하시면서 「그래서 동무의 의사대로 외국어대학에 보내려고 한다」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평범한 배우를 크게 믿으시고 일류급 예술단인 만수대예술단에 소환하시여 훌륭한 무용배우가 되기를 그처럼 기대하시였는데 그 사랑에 보답할 생각은 못 하고 오히려 제 몸만 생각하며 대학에 보내 달라고 제기한 철없는 나를 탓할 대신 사랑을 돌려 주시는 경애하는 장군님 앞에서 나는 죄책감에 차마 머리를 들 수가 없었다.
그러는 나를 정겹게 바라보시며 자애로운 그이께서는 「동무를 대학에 보내기 전에 한번 만나보자고 하였는데 짬을 내지 못하다가 오늘에야 이렇게 왔다」고 하시면서 「공부를 잘해야 한다」고 당부하시였다.
한참 동안을 두시였던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수령님께서는 동무뿐 아니라 동무의 아버지에 대해서도 잘 알고 계시며 우리나라 유술발전을 위해 한몫 단단히 한 사람이라고 늘 관심을 돌리고 계십니다. 수령님께서 동무아버지와 동무에 대하여 잘 알고 계시며 당에서 동무를 공부시키자고 결심한 것만큼 동무는 앞으로 대학에 가서 공부를 잘하고 생활도 잘해야 하겠습니다」라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의 다심하신 말씀에 나는 신심에 넘쳐 씩씩하게 대답을 올리였다.
「친애하는 지도자동지, 제 꼭 대학에 가서 공부를 잘하겠습니다. 믿어 주십시오」
나의 신심에 넘친 대답을 들으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기뻐하시며 「동무의 그 결의가 좋다」고, 「당은 언제나 동무의 그 결의를 믿겠다」고 하시면서 「대학을 졸업하면 앞으로 당을 위하여 한몫 단단히 하는 훌륭한 일군이 되여야 하겠습니다. 앞으로 공부하는 데 애로되는 문제가 있으면 언제나 나를 찾아오시오」라고 뜨거운 육친적 사랑을 부어 주시였다.
사랑이면 이런 사랑이 어데 있고 믿음이면 이런 믿음이 또 어데 있겠는가.
나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그 뜨거운 사랑과 세심한 보살피심에 목이 메여올랐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사랑을 부어 주시고 떠나가신 뒤 한참 후에 아버지가 퇴근해 왔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밖에 혼자 서있는 나를 본 아버지가 의아해서 물었다.
「이 추운데 밖에 왜 나와 서있는 거냐?」
나는 벅찬 감정을 안고 방금 전에 있었던 감격적인 사연을 아버지에게 그대로 이야기하였다.
「뭐라구?」
아버지는 너무도 뜻밖의 감격적인 사랑에 가방을 떨구며 못박힌 듯 서 버렸다.
그러다가 불시에 무릎을 꿇고 주저앉으며 두 손으로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딛고 서계셨던 자리에 새겨져 있는 그이의 발자욱이 눈가루에 묻힐가 보아 꼭 덮었다.
그리고는 고마움의 파도가 이는 마음을 진정하지 못하였다.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서 이 아버지뿐만 아닌 네 운명도 지켜 주시며 보살피고 계시는구나.
춘행아. 너나 나나 다 어버이 수령님께서 아시고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서 보살펴주신다는 걸 명심하구 그 사랑, 그 믿음에 보답하기 위해 혁명의 한 길을 탈선 없이 곧바로 가자꾸나」
아버지는 감격에 북받치면 말을 많이 하지 않았다. 마음속에 깊이 묻어 두고 오래오래 새겨 보는 것이 아버지의 습관이였다. 아버지와 나는 그날밤 눈보라가 아무리 기승을 부렸지만 추운 것도 모르고 오래도록 밖에 서있었다. 봄의 훈향과도 같은 따사로움을 뿌려 주신 경애하는 장군님의 사랑을 마음속에 깊이 안으며 말보다 생각에 잠기여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이름 없던 한 체육인에게 이 세상 친부모들의 사랑을 다 합쳐도 비길 수 없는 그렇듯 숭고한 사랑을 부어 주시고도 그것이 부족하신 듯 거듭거듭 은정을 베풀어 주시고 그 자녀들까지 살뜰히 돌봐 주시는 그처럼 고결한 사랑과 의리를 어떻게 한두마디로 다 이야기할 수 있으랴.
하기에 아버지는 눈을 감으면서도 우리 자식들의 운명 문제에 대하여 한마디의 말도 남기지 않았다. 그것은 바로 경애하는 장군님의 한없이 따사로운 품에 맡긴 이 자식들의 운명에 행복과 기쁨만이 있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였다.
아버지의 생은 말 그대로 애국으로 빛나는 삶이였다.
주체76(1987)년 4월,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아버지의 공로를 높이 평가하시여 어버이수령님의 명의로 된 애국렬사증을 수여하도록 하여 주시였다.
애국렬사! 누구나 쉬이 부를 수도 받아안을 수도 없는 그 숭고한 영예를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이름 없는 한 체육인에게 안겨 주시고 죽어서도 영원히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도록 빛나는 삶의 언덕에 내세워 주시였다.
어버이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의 은혜로운 품이 있기에 아버지는 참된 삶과 행복을 마음껏 누릴 수 있었으며 오늘도 체육인대오와 함께 애국의 길을 걸어가는 참다운 혁명전사로 그 이름 길이 빛나고 있는 것이다.
애국렬사증을 수여받던 그날 우리 자식들은 어버이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의 그 사랑에 목매여 흐느끼며 정녕 그 품은 전사에게 영생의 삶을 안겨 주는 위대한 품임을 다시한번 가슴 뜨거이 절감하였다.
돌이켜 보면 어제날 한낱 보잘것없는 식민지 체육인으로 버림받던 아버지가 주체체육발전의 거창한 흐름에 합류하여 나가는 축복받은 조선의 체육인으로 긍지 높은 혁명의 전사로 성장하여 복된 삶을 누린 것은 전적으로 어버이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일깨워 주시고 가르쳐 주시고 손잡아 이끌어 주신 덕분이다.
어버이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을 떠나서는 아버지의 모든 영예와 행복 그리고 아버지의 존재가치에 대하여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사랑과 은혜를 받을 줄만 알고 그에 천만분의 하나도 보답하지 못한 변변치 못한 전사를 잊지 않으시고 길이길이 추억하시며 애국자라는 크나큰 칭호를 안겨 주셨으니 그 고마움과 은혜로움을 이 자식인들 진정 무엇으로 다 표현할 수 있겠는가.
그저 고맙다는, 고맙다는 감사의 절을 드리고 또 드리고 될 뿐이니 말이다.
아버지도 아마 알 것이다.
생은 비록 고동은 멈추었다 해도 자신의 삶이 어느 분에 의해 애국으로 빛나게 됐는가를, 경애하는 장군님 계시여 떠나간 이 나라 수많은 혁명전사들의 삶이 어떻게 영생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경애하는 장군님의 그 사랑은 앞에서도 이야기하였지만 끝을 모르는 사랑이다.
아버지처럼 나도 경애하는 장군님의 사랑을 그 누구보다도 많이 받으며 성장하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나의 혁명적 성장을 위하여 따뜻한 지도를 주시고 극진히 사랑하여 주신 이야기는 몇 권의 책으로도 다 담지 못할 것이다. 나는 그 하많은 이야기 중에서 몇 가지 사실만을 여기에 적으려고 한다.
![]() |
24세의 金正日, 황해제철소에서 |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영화축구단 선수들을 위한 연회에 참가한 나를 몸소 자신의 옆자리에 불러 주신 것이였다.
해빛같이 따사로우신 경애하는 장군님을 모시고 진행되는 연회에 참가한 것만도 영광스러운 일인데 글쎄 자신의 옆자리에 불러 주시니 영광이면 이보다 큰 영광이 어데 또 있겠는가.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송구스러워하면서도 기뻐 어쩔 줄 몰라 하는 나를 옆자리에 앉히시고 「예술활동이 힘들지 않는가」고, 「동무가 사업과 생활을 잘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긴 하였는데 그게 사실인지 모르겠다」고 웃음을 지으시며 물으시였다.
나는 언제나 나의 사업과 생활을 세심히 돌봐 주시고 보살피시는 경애하는 그이의 사랑에 무한한 행복감으로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하며 어리광조로 「일을 쓰게 못합니다」 하고 대답을 올렸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일을 잘하지 못한단 말이지요. 그것을 알면 되였습니다」 하시며 「지도일군들이 동무를 기특히 여기고 평가해 준다고 하여 그것이 자기가 특별히 잘나서 그러는 줄만 알면 안 된다」고 따뜻이 깨우쳐 주시였다.
그러시면서 경애하는 金正日 장군님께서는 「우리가 직접 동무를 만수대예술단에 소환하였는데 당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하여야 하겠습니다」라고 당부하신 다음 춤을 잘 춘다는 것이 헐한 일이 아니라고, 여기 모인 축구선수들 못지않게 동무들이 수고한다고 나뿐이 아닌 우리 무용배우들을 높이 평가하여 주시였다.
우리의 전체 무용배우들의 마음은 파도처럼 세차게 설레이였다.
주체예술의 화원 속에 품어 주시여 예술인이라면 누구나 부러워 할 화려한 극장무대에 세워 주신 것만 해도 고마운 일인데 춤추는 것이 헐한 일이 아니라시며 그처럼 평가해 주시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그 사랑의 말씀에 우리 무용배우들의 얼굴마다에는 다함없는 경모와 감사의 정만이 비끼여 있었다.
비상한 예술적 식견을 지니신 어버이장군님께서는 우렁우렁하신 음성으로 「춤을 잘 추자면 정열이 있어야 한다」고 하시면서 「무용가는 정열적이면서도 정서가 풍부하여야 하며 섬세하면서도 강기가 있어야 한다」고 가르쳐 주시였다.
나는 지금도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발표하신 무용예술의 총서인 「무용예술론」을 펼칠 때면 이날에 하신 그이의 말씀을 되새겨보군 한다. 참말로 경애하는 장군님은 예술의 천재이시다. 나는 끝없는 감격으로 설레이는 무용배우들의 다함없는 경모와 감사의 정을 담아 경애하는 장군님께 축배잔을 삼가 올리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이름 없는 평범한 예술인이 올리는 감사의 축배잔을 받으시고 「고맙습니다. 춘행 동무도 건강하여 일을 잘하기 바랍니다」라는 뜨거운 믿음의 말씀을 하시였다.
순간 끓어오르는 감격과 경탄이 만장을 휩쓸고 박수는 우뢰 소리로 터져올랐다. 영광에 영광이 겹쳤던 그날을 추억할 때면 나는 지금 이 자리에서도 생각해 본다.
내 언제면 붉은기를 높이 드시고 선군장정의 천만리 길을 걷고 또 걸으시는 우리 장군님께 다시 축배잔을 올릴 영광의 그날이 올가 하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아직 신인배우에 불과한 나를 따뜻한 손길로 보살펴 주시며 만수대예술단의 한 성원으로 외국공연의 무대에서 세워 주시였다.
나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따사로운 사랑과 믿음 속에 싱가포르, 이라크 등 아시아는 물론 프랑스, 스위스를 비롯한 서유럽 나라들을 방문하여 주체조선의 예술인이 된 크나큰 긍지와 자부심에 넘쳐 춤을 추고 또 추었다.
나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사랑과 믿음을 받아안을 때마다 사람이 가질 수 있는 행복 중에서 제일 큰 행복을 내가 누리고 있다는 생각만 들었다. 이 은혜로운 사랑의 품속에서라면 그 누가 조국과 혁명을 위한 참다운 인민의 배우로 자라나지 못하겠는가!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이처럼 손잡아 이끌어 주시고 믿음을 주시고 힘을 주시고 기쁨을 안겨 주시는데 민족예술 발전을 위한 길에서 장군님께 나의 깨끗한 마음을 바치자! 이런 결의가 가슴 가득히 차오를 뿐이였다.
아마 독자들은 덕성실기를 통하여 어버이수령님의 탄생 60돐 경축공연시연회 때 소개자가 엄청난 실수를 한 사실을 잘 알 것이다. 그때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엄청난 실수를 한 소개자가 바로 나 고춘행이였다.
어버이수령님의 탄생 60돐 경축공연 소개를 맡은 나는 그때 집에 와서도 련습을 거듭하였다.
소개는 공연의 첫 얼굴인 것만큼 나는 어떻게 하나 소개를 잘하여 탄생일을 맞으시는 어버이수령님께 기쁨을 드리려고 극장에서나 집에 들어와서나 련습을 중단하지 않았다.
거울 앞에 마주 서서 소개련습을 거듭하는 나를 바라보던 아버지가 「벌써 우리 수령님께서 환갑을 맞으시다니. 이럴 때 보면 세월도 참 무정도 하지. 우리 수령님년세가 환갑이 아니라 쉰돐로 탄생일을 맞으시면 얼마나 좋겠니」 하고 말하는 것이였다.
나는 그때 아버지의 말을 들으면서 정말 우리 수령님께서 이번 탄생일을 쉰돐로 맞이했으면 하는 아쉬운 마음을 가지였다. 그러다 나는 시연회 때 큰 실수를 하게 되였다. 그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몸소 경축공연시연회를 지도하시기 위해 극장에 나오시였다. 나는 언제나 뵙고 또 뵙고 싶은 한없이 자애로우신 경애하는 장군님의 지도를 받는다는 기쁨으로 하여 마음이 막 울렁거렸었다. 겨우 마음을 다잡으며 나는 무대 앞에 나섰다. 다소곳이 인사를 올린 나는 경애하는 장군님 앞에서 첫 소개를 하였다.
「지금부터 위대한 수령 金日成 동지의 탄생 50돐 경축예술공연을 시작하겠습니다」
순간 무대도 관람석도 숨죽은 듯 정적이 깃들었다. 첫 소개를 제딴엔 잘했다고 생각하며 돌아서던 나는 극장일군들과 배우들의 얼굴이 새하얘진 것을 보고서야 엄청난 실수를 했다는것을 느끼였다. 어버이수령님의 탄생일이 60돐인데 50돐이라고 소개했으니 실수면 이런 대실수가 어데 있겠는가. 그것도 경애하는 장군님 앞에서.
나는 본의아닌 실수로 하여 경축공연시연회를 파탄시켰다는 생각으로 눈앞이 막 아찔해 왔다. 당장이라도 울고 싶었다. 일군들도 배우들도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런데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첫 소개에서부터 실수한 나를 탓하신 대신 일군들과 창작가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공연소개를 맡은 배우가 위대한 수령님탄생 60돐을 50돐로 잘못 소개하였는데 그가 소개한 대로 수령님께서 올해에 탄생 50돐을 맞으신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도 아마 수령님께서 탄생 50돐을 맞으신다면 얼마나 좋겠는가고 생각하다가 실수를 하였을 것입니다. 수령님께서 영원히 젊어 계셨으면 하는 것은 우리 인민의 한결같은 마음입니다. 그러니 그가 실수를 하였지만 우리 인민의 심정을 그대로 말한 셈입니다』
실수를 해도 이마지게 실수를 한 나를 꾸지람할 대신 너그럽고도 아량 있게 대해 주시는 자애로운 경애하는 장군님의 그 말씀에 나와 시연회에 참가한 모든 예술인들은 격정에 휩싸였다.
사실 어버이수령님께서 영원토록 젊어 계시기만을 제일로 바라시는 분은 다름아닌 우리의 장군님이시다.
그러나 세월은 현실인 것만큼 그대로 환갑을 맞으시는 어버이수령님의 년세를 정확히 밝혀야 하니 우리 장군님인들 왜 가슴 아프지 않으시랴. 어버이수령님의 안녕이라면 하늘의 별도 따오시는 분이 우리 장군님이시다.
나는 그날 경애하는 장군님의 사랑과 믿음 속에 다시 무대로 나가 소개를 하였으며 어버이수령님을 모시고 진행하는 공연을 성과적으로 보장하는 데 자신의 적은 기량이나마 바칠 수 있었다.
참으로 어버이장군님의 해빛과도 같은 사랑은 그야말로 마를 줄 모르는 샘줄기였다. 경애하는 장군님의 세심한 보살피심 속에 만수대예술단 배우로 사업하던 나는 그후 평양외국어대학에서 마음껏 배웠으며 졸업 후에는 조선민속박물관 외국어강사로, 오늘날엔 조선예술교류협회 부원으로 성장하였다.
또한 나의 동생들도 모두 경애하는 장군님의 사랑 속에 나라의 어엿한 일군으로 자라났다. 사랑의 바다는 끝이 없다. 출렁이고 출렁이며. 세상에는 사랑과 의례에 대한 이야기들이 수많이 전해 오건만 우리의 경애하는 金正日 장군님처럼 이름 없던 한 체육인을 한품에 안으시여 애국자로 키워 주시고 그 자녀들까지 살뜰히 돌봐주시는 그처럼 고결한 사랑과 의리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삶을 빛내여 주는 위대한 사랑.
이것은 이 세상에서 인간을 가장 귀중히 여기는 참다운 사랑, 혁명전사들을 사랑의 중심에 세워 주시는 가장 고결하고 숭고한 혁명적 의리를 베풀고 계시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품이라는 것을 나는 온 세상에 소리 높이 웨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