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正日은 核전쟁 나면 평양 근교 22호 초대소로 숨는다
● 金正日 주최 연회장에서 人民軍 대장들 일본 군가 부르고, 金正日은 콧노래로 따라 불러
● 金正日이 마시는 술은 평양관저 1층에 있는 거대창고에 보관돼… 세계의 명주 1만 병 이상 보관
● 金正日의 동생 金敬姬는 술자리에서 『장성택』이라고 남편의 이름을 부르고, 『자, 더 마셔!』라며 부하나 가정부 취급
후지모토 겐지(藤本健二)
[편집자 注]
「金正日의 요리사」후지모토 겐지(藤本健二)씨가 지난 7월 「핵과 여자를 사랑한 장군님」(小學館 刊)을 펴냈다. 이 책에서 후지모토 겐지는 金正日의 네 번째 여인으로 알려진 김옥, 金正日의 동생 김경희의 사생활 등에 대해 폭로하고 있다.
초밥(스시) 요리사인 著者는 1982년 북한으로 건너가 평양 「安山館」에서 1년간 일했다. 그 후 1987년 다시 북한으로 들어갔다가 金正日의 전속요리사로 발탁돼 13년간 일했다. 1996년 일본으로 귀국했다가 출입국관리법 위반으로 체포됐다가 석방됐다. 1998년 세 번째로 북한으로 들어갔으나, 간첩 혐의를 받고 1년간 軟禁(연금)생활을 했다.
2001년 북한을 탈출해 일본으로 돌아온 후, 자신이 본 북한 최고권력층의 裏面(이면)을 파헤친 책 「金正日의 요리사」, 「金正日의 사생활」을 펴냈다. 月刊朝鮮은 출판사 小學館의 동의를 얻어 「핵과 여자를 사랑한 장군님」을 발췌, 게재한다.
● 金正日 주최 연회장에서 人民軍 대장들 일본 군가 부르고, 金正日은 콧노래로 따라 불러
● 金正日이 마시는 술은 평양관저 1층에 있는 거대창고에 보관돼… 세계의 명주 1만 병 이상 보관
● 金正日의 동생 金敬姬는 술자리에서 『장성택』이라고 남편의 이름을 부르고, 『자, 더 마셔!』라며 부하나 가정부 취급
후지모토 겐지(藤本健二)
[편집자 注]
「金正日의 요리사」후지모토 겐지(藤本健二)씨가 지난 7월 「핵과 여자를 사랑한 장군님」(小學館 刊)을 펴냈다. 이 책에서 후지모토 겐지는 金正日의 네 번째 여인으로 알려진 김옥, 金正日의 동생 김경희의 사생활 등에 대해 폭로하고 있다.
초밥(스시) 요리사인 著者는 1982년 북한으로 건너가 평양 「安山館」에서 1년간 일했다. 그 후 1987년 다시 북한으로 들어갔다가 金正日의 전속요리사로 발탁돼 13년간 일했다. 1996년 일본으로 귀국했다가 출입국관리법 위반으로 체포됐다가 석방됐다. 1998년 세 번째로 북한으로 들어갔으나, 간첩 혐의를 받고 1년간 軟禁(연금)생활을 했다.
2001년 북한을 탈출해 일본으로 돌아온 후, 자신이 본 북한 최고권력층의 裏面(이면)을 파헤친 책 「金正日의 요리사」, 「金正日의 사생활」을 펴냈다. 月刊朝鮮은 출판사 小學館의 동의를 얻어 「핵과 여자를 사랑한 장군님」을 발췌, 게재한다.
비서 겸 애인 옥이 동지, 각선미도 발군
- 金正日의 새 여인 김옥 비서.
평양의 로열 패밀리에는 또 한 사람, 흠잡을 데 없는 여성이 있다. 흰 살결에 미소 띤 얼굴의 귀여운 여성비서 옥이 동지다. 그녀를 처음 본 것은 1987년. 내가 再방북해 金正日에게 수시로 호출을 당하면서부터다. 그 여성은 당시 20代 중반이었다.
高英姬(고영희) 부인이 있을 때에는 한쪽에서 대기하고 있었지만, 高英姬가 없을 때는 金正日 옆에 앉았다. 게다가 식사 때는 金正日과 사모님밖에 쓸 수 없는 프랑스제 최고급 식기를 사용했다.
「도대체 누굴까」 궁금해하던 차에 김창송이 『장군님의 제1비서』라고 귀띔해 주었다. 눈이 크고 치열이 고른 그녀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는 얼굴이 매력적이었다. 高英姬가 없을 경우 그 자리에 앉는 것으로 보아 예사로운 비서는 아닐 것이라 생각했다.
내가 옥이 동지를 처음 만난 것은 아내 嚴正女(엄정녀)와 알기 전이었다. 나는 옥이 동지에게 가볍게 戀心(연심)을 품고 있었다. 그 사실이 金正日에게 알려졌다면 큰일을 치렀을 것이다.
일본에 귀국해 안 사실이지만, 기자인 에야 오사무(惠谷治)씨의 저서 「金正日大圖鑑(김정일대도감)」에는 「사진에서 사라진 미녀」라는 페이지가 있다. 에야 오사무씨는 같은 크기의 사진을 연도별로 늘어놓고, 시간이 지나면서 金正日의 배후에 찍혀 있는 여성의 모습이 점차 사라져 가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거기서 「사라진」 여성이 옥이 동지였던 것이다.
옥이 동지의 키는 高英姬보다 작은, 158cm 정도였다. 한여름 수영장에서 高英姬가 차분한 느낌의 검은색 수영복을 입었다면, 옥이 동지는 언제나 귀여운 파란색 수영복을 입고 있었다. 高英姬에 비해 조금 마른 체형이지만 탄력 있는 몸으로 각선미도 발군이었다.
두 사람 모두 옅은 화장에 가벼운 웨이브 머리를 했고, 몸에 화려한 치장은 하지 않았다. 미니스커트도 입지 않았다. 이것은 金正日의 취향이기 때문에 절대적인 것이었다. 향수는 뿌리지 않았지만 여성스러운 감미로운 냄새를 듬뿍 풍겼다.
피아노 반주 능숙한 「삼지연조」 출신, 金正日의 「금고지기」
옥이 동지의 출생연도는 1960년이나 1961년 무렵일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옥이 동지의 본명을 몰랐다. 金正日은 『옥이』라고만 불렀으며, 다른 간부들도 『옥이 동지』라고밖에 부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력도 출신지도 모른다. 물론 그녀의 신원을 알려고 하면 바로 숙청될 것이다.
당초 나는 「玉姬(옥희)」가 아닐까 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최근에 이름이 「玉(옥)」이며, 조선어 발음상 애칭으로 「옥이」라고 부르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일본에 귀국하고 나서 읽은 「기쁨조」의 여성이 쓴 책에 이런 구절이 있기 때문이다.
<高英姬가 없을 때에는 김옥이라는 三池淵組(삼지연조)의 단원이 金正日 옆에 반드시 앉았다. 삼지연조는 전자피아노 한 명과 기타 두 사람으로 구성된 기악조였다. 김옥은 몸집이 작으며 둥근 얼굴을 한 귀여운 용모의 소유자였다. 金正日이 좋아하는 타입은 대체로 둥근 얼굴의 미인형이었다> (申英姬 「나는 김정일의 무용수였다」)
「김옥」이 옥이 동지와 동일 인물인지 아닌지는 모른다. 기쁨조 출신인 사람이 비서를 하고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일설에는 「柳(류)」라는 姓(성)을 가졌다는 정보도 있다. 그러나 옥이 동지는 틀림없이 몸집이 작으며 동그스름한 귀여운 얼굴이었다. 일본 여자배우로 말하면 미야자와 리에(宮澤里惠)를 닮았다고나 할까.
그녀는 노래와 춤은 그다지 능숙하지 않았지만, 피아노는 정말 잘 쳤다. 예를 들어 원산초대소에서 장군으로부터 갑자기 『후지모토, 「내일이 두려워」를 불러 봐』 라는 명령을 받은 적이 있다. 「내일이 두려워」라는 노래는 일본의 「사랑의 교감」이라는 노래의 후렴 부분 「내일이 두려워」를 조선어로 改詞(개사)한 곡이었다.
그곳에는 가라오케 세트가 없었기 때문에 나는 『가라오케가 없으면 못 부릅니다』 했다. 그러자 金正日은 『옥이가 있잖아!』 하며 옥이 동지를 지명했다. 옥이 동지는 바로 피아노 앞에 앉아 악보 없이 「내일이 두려워」 반주를 시작해, 결국 한 소절도 틀리지 않고 쳤다.
옥이 동지는 金正日 전용의 금고관리까지 했다. 金正日의 집무실에는 거대한 금고가 있으며, 우리들이 해외에 나갈 때 金正日의 지시로 금고에서 돈을 꺼내 주는 것이 옥이 동지였다. 내가 일본에 물건을 사러 갈 때도 그녀가 몇백만 엔 상당의 현금을 금고에서 꺼내 주었고, 다달이 월급을 받을 때도 그녀에게서 새하얀 봉투를 직접 건네받았다.
옥이 동지도 해외에 자주 나갔다. 외국어는 서툰 것 같지만 일본어는 조금 하는 것 같았다. 아마 로열 패밀리와 함께 일본에 온 적도 있지 않았을까. 1998년 6월, 일본에서 평양으로 돌아갈 때, 北京에서 1등석에 함께 동승한 적이 있다. 그녀도 혼자였지만 누가 감시하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대화 같은 것은 나누지 않고 눈짓으로 서로 모르는 사람인 척했다.
사랑스럽게 머리를 쓰다듬던 金正日
옥이 동지는 내가 만든 초밥을 아주 좋아했다. 어느 날 金正日이 산책할 때 옥이 동지가 우리 비서실 사람들과 동행했는데, 金正日의 뒤를 따라 걸으면서 나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하시모토씨가 만드는 초밥은 언제나 맛있어요』
그녀도 金正日과 마찬가지로 다랑어와 성게가 들어간 초밥을 좋아했다. 나고야 닭요리를 만들었을 때는 『이렇게 맛있는 요리는 하시모토씨가 아니면 만들 수 없을 거예요』라고 말했다. 내가 落馬(낙마)해 얼굴이 붉게 부어올랐을 때, 옥이 동지가 자신의 뺨에 아주 작게 남은 붉은 상흔을 가리키며 『하시모토씨, 약을 잘 바르고 태양을 많이 쪼이지 않는 게 좋아요. 이렇게 검게 돼버리니까요』라고 상냥하게 말했던 기억이 난다.
틀림없이 옥이 동지는 예사 비서가 아니었다. 金正日은 연회석상 같은 데서 취하기 시작하면 오른쪽에 앉힌 여성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버릇이 있다. 高英姬에게도 그랬지만, 高英姬가 없을 적에는 오른쪽에 앉아 있는 옥이 동지의 머리카락을 사랑스럽게 쓰다듬었다. 옥이 동지는 그다지 취하지 않았던 걸로 생각된다. 그러나 와인은 곧잘 함께 마셨고, 코냑도 따라 주면 조금은 입에 댔다.
金日成의 장례식 때 옥이 비서는 큰 기둥 뒤에 숨어 손수건을 손에 들고 울고 있었다. 그때는 일본인 요리사인 나에게 참석이 허용돼 당시 방영된 조선중앙 TV 화면에 내 모습이 나왔다. 그녀는 「비서」로서 그 장소에 있기는 했으나 金正日의 「애인」이기 때문이었을까, 공식석상에는 눈에 띄지 않으려고 한 것 같았다.
게다가 高英姬도 정식 부인은 아니었기 때문에 장례식에 나타나지 않았다. 내가 북한에 있을 때 옥이 동지는 金正日 관저로부터 200m 정도 북쪽에 위치한 간부 전용 12층 아파트에 혼자 살고 있었다. 아파트 최상층에 방이 8개나 되는 호화저택이었다. 그곳에서 매일 金正日의 거처까지 오갔던 것이다. 하지만 高英姬가 사망한 지금은 관저에서 金正日과 함께 생활하고 있지 않을까.
2004년 高英姬가 사망했다는 보도가 난 무렵, 마카오에 金正日의 애인이 있고, 6세 정도 된 딸이 있다는 정보가 한국의 매스컴에서 흘러나왔다. 당시 이 애인이 「옥이 동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여섯 살 된 아이가 있다면 내가 북조선에 있을 때, 옥이 동지가 임신했거나 출산했어야 하는데 앞뒤가 맞지 않는다. 나는 옥이 동지가 임신한 모습을 본 적이 없고, 그녀가 장기간 휴가를 다녀왔다는 것도 듣지 못했다. 게다가 부인이 후계싸움이 일어나지 않도록 옥이 동지가 아이 갖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본다.
아무튼 옥이 동지의 존재는 高英姬가 공인한 존재였다. 高英姬와 옥이 동지가 서로 으르렁대는 모습을 본 적도 없고, 뒷전에서 욕하는 것을 들은 적도 없다. 오히려 자매처럼 두 사람이 친근하게 이야기하던 모습이 아직까지 눈에 선하다. 高英姬의 세 아이도 그녀를 『옥이, 옥이』라고 부르며 따랐다. 병으로 쓰러진 高英姬가 옥이 동지에게 「장군과 아이들을 부탁한다」고 한 것은 아닐까.
최장 연회는 「4일간 내리 계속」
金正日은 아침 일찍 일어나는 데도 불구하고 밤에 실로 정력적이다. 평양에 있든 초대소에 있든 金正日의 밤 생활은 변함없었다. 오후 7시가 되면 저녁식사를 겸해 연회가 시작된다. 식사를 마치면 본격적인 술자리에 들어간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가장 긴 연회는 1992년, 1993년경 벌어진 「4일 연속」 연회였다. 이 정도로 연회가 길어지면 누구든 수면부족과 숙취로 녹초가 돼버릴 것이다. 金正日이 잠들지 않는 한 참석자는 잠들 수 없다. 金正日의 체력이 소진될 때까지 연회는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회장에서 담배를 피울 수 있는 사람은 金正日뿐이다. 간부들은 밖에 있는 거실에 나가 담배를 피울 수 있는데 金正日 앞에서만은 피울 수 없다. 그래서 장시간의 연회는 더욱 더 괴로웠던 것이다.
여름에는 연회장을 포함해 金正日이 있는 방은 어디든 에어컨이 켜 있고, 방 온도는 22℃로 설정돼 있다. 그럼에도 더운 여름 날씨에 술 마시기 시작한 지 다섯 시간 정도 지나면 더워지기 때문에 金正日은 늘상 입는 점퍼를 벗기 시작한다. 부하들에게도 『이봐, 당신들도 벗지? 윗도리 벗어!』 말하자 간부 전원이 윗도리를 벗고 셔츠 차림이 된다.
바야흐로 남자 냄새가 물씬 풍기는 연회가 되는 것이다. 연회 때 이런 일도 있었다. 金正日이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면 다들 이제 슬슬 끝나지 않을까 기대한다. 그러면 金正日이 갑자기 일어나 『너희들, 내가 자는 것을 기다렸지!』라고 해, 간부들이 당황해 부동자세를 취했었다. 金正日은 이런 식으로 즐기는 것이다.
金正日이 완전히 잠들면 전등을 하나 둘 끄고, 보조등만 켜 놓고 우리들은 연회장 밖으로 나와 분위기를 살핀다. 비서실 김창송이 시간을 적당히 보아 다시 한 번 金正日이 완전히 잠들었는지 확인한다. 그래서 「오케이」가 되면 네 명을 동원해 金正日을 전용 침실까지 데려가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새벽까지 마셔도 金正日은 반드시 네 시간 후에는 눈을 뜬다. 그리고 방송으로 『5분 후에 센터에 집합!』이라고 호령을 내린다. 여기에 늦으면 다시 「원샷 벌주 게임」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들도 金正日이 잠들면 바로 방으로 돌아가 네 시간 후에 일어날 준비를 하고 수면을 취한다.
며칠 밤을 새워 계속 마시게 되면 샤워를 할 수도 없다. 그러다 보니 金正日의 머리와 칼라에 비듬이 잔뜩 쌓여 있는 적도 있었다. 나는 그것을 손으로 털어 주는 게 좋을까, 망설이며 보고 있었다. 그토록 깨끗한 것을 좋아하며 냄새 나는 것을 싫어하는 金正日도 이러한 밤낮 없는 대연회를 벌이면 이렇듯 바뀌는 것이다.
「원샷」 하면 1500달러
본격적인 연회가 시작되면 金正日 앞에는 미화 100달러 뭉치가 여러 다발, 그리고 그 옆에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코냑 회사 헤네시의 고급 코냑 「XO」나 최고급품인 「파라디스(Paradis)」가 놓인다. 고급 코냑을 브랜디 잔에 찰랑찰랑 따르고 『내 앞으로 와서 이것을 마셔라! 단숨에 마시는 놈에게는 100달러를 주겠다』고 큰 소리로 외친다. 브랜디 한 잔은 100㎖ 정도다. 그것을 한 번에 마시는 거다.
사람 수가 적을 때는 경쟁하지 않아도 누구에게나 순번이 돌아가기 때문에 한두 잔 단숨에 비우고 간단하게 100달러, 200달러를 손에 쥐고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간다. 그런데 한두 번으로 金正日의 유희는 멈추지 않는다. 많이 마실수록 금액도 높아져 간다. 점점 고액화하면 그 달러가 갖고 싶은 측근들이 걸음걸이가 불안함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간다. 하지만 金正日 앞에서 쓰러지거나 토하면 모든 「상금」이 몰수돼 버린다.
원산초대소 연회에서 있었던 일이다. 『이 봉투에는 1500달러가 들어 있다. 오늘 이 파라디스 석 잔을 계속해서 단숨에 다 마신 놈에게는 이 봉투를 준다』고 金正日이 우리들에게 도발해 왔다. 이미 파라디스를 단숨에 마신 경험이 있는 사람은 그 위력에 주저하고 있었다.
金正日은 즉시 나와 당 경리부장인 林相鍾을 지명했다. 우리들은 우선 첫 번째 잔을 비웠다. 金正日은 봉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1500달러는 여기에 있지』라며 부추긴다. 나는 두 번째 잔을 마시고, 세 번째 잔을 허공에 치켜들었다. 金正日은 「잘 하면서」라는 표정을 지으며 내게 1500달러가 든 하얀 봉투를 내밀었다.
나는 술이 울컥 올라오려는 것을 참고 봉투를 받아들고 자리로 돌아왔다. 그런데 의자에 앉으려는 순간, 나는 화장실로 뛰어들어갔다. 그러자 측근 중 한 사람이 내 뒤를 따라와 화장실에서 토하고 있는 나를 보고 비난했다. 언제나 얼굴을 맞대고 지내는 측근들도 역시 남 잘 되는 꼴은 못 보는 것이다.
그는 연회장으로 가 金正日 앞에서 큰 소리로 고자질했다. 『장군님, 후지모토가 화장실에서 전부 토해 버렸습니다. 이 상금은 무효입니다』라며 내 주머니에 있는 봉투를 억지로 빼내려고 했다. 하지만 金正日은 『괜찮아, 내버려 둬. 후지모토는 한 번 마셨잖아. 그건 후지모토 돈이야』 했다. 한편 林相鍾은 그다지 술이 세지 않았지만 석 잔을 단숨에 마셨다. 그는 「짠돌이」라고 불린 만큼 1500달러를 타내려고 기를 쓴 것 같다.
金正日은 확실히 술이 세다. 술을 마시고 취해 얼굴이 빨개지는 일이 없었다. 아마 스스로를 자제하면서 마시는 것이겠지만, 간부들 앞에서 추태를 드러내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러나 취하면 말투가 억세지거나 잘 운다. 金日成 등 죽은 사람을 떠올리며 슬프게 운 적도 있고, 감동적인 이야기에 감명받아 운 적도 있다.
취할수록 잘 운다
高英姬가 죽은 다음부터는 연회에서 우는 횟수도 늘었을 것이다. 金正日이 마시는 술은 평양관저 1층에 있는 거대창고에 보관돼 있다. 세계의 銘酒(명주)를 1만 병 이상 모은 술 보관 창고다. 나는 이 술 보관 창고에 들어간 적이 있다.
8번 연회장에서의 연회가 끝나갈 무렵 金正日이 『너와 넌 남아』 라며 15~16명을 창고로 데리고 갔다. 창고 한가운데에는 15~16명이 앉을 수 있는 둥근 테이블이 있었다. 그리고 거기서 다시 마시기 시작한 것이다.
그곳에서 金正日은 『이봐, 후지모토, 일본 술 중에서 여기에 없는 좋은 술이 있는지 찾아 봐』 하고 명령했다. 넓은 창고 안에는 일본주와 소주도 있었지만, 산토리의 최고급 위스키 임페리얼이 없기에 내가 그렇게 보고하자, 『좋아, 이번에 일본에 가면 사와』 했다.
즉시 일본에 가서, 다섯 병 정도 구입해 金正日에게 가지고 갔다. 『이 술은 입 안에 들어가면 확 퍼져 부드럽게 넘어갑니다』 하며 따라 주자, 金正日은 마시면서 『응, 정말이네. 입 안에 확 퍼지네』 하며 기분 좋게 마셨다.
연회에서는 취한 軍 대장들이 어떤 이유에서인지 일본 군가를 불렀다. 金正日은 대장들이 노래하는 것을 들으면서 콧노래로 따라 부르기도 했다. 군대를 체험하지 않은 일본인인 나는 모르는 노래가 상당히 많았으나, 金正日이 가장 좋아했던 군가는 「라바울 노래」(라바울은 파푸아뉴기니령으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남태평양 최대 전략기지)였다. 이 노래가 나오면 함께 불렀다. 영화광인 金正日은 토라(寅)씨의 주제가를 함께 부른 적도 있는데, 노래를 잘 불렀다.
1992~1993년 무렵에는 일본주도 잘 마시게 되었다. 「켄비시」, 「켓케이캉」, 「키쿠마사무네」를 처음에는 『맛있네』 하며 한 잔 마시기 시작해 金正日 혼자서 1.8ℓ들이 병을 싹 비워 버린다.
그러고 나서 다음날이면 『후지모토, 일본주는 안 돼. 머리가 아파』 하고 투덜댄다. 누구라도 술 1.8ℓ를 마시면 다음날은 숙취로 머리가 아픈 게 당연하다.
일본 맥주에 대해서도 어느 상품이 맛있는지 물어왔다. 당시 金正日은 「기린」이나 「삿포로」를 좋아했지만, 내가 『생맥주라면 일본에서는 「아사히 슈퍼드라이」가 인기가 있습니다』라고 알려 주어 그때부터는 아사히 생맥주를 자주 마셨다.
한 병에 60만 엔짜리 고급술도 한꺼번에 구입
1994년 金日成이 사망하고 나서부터는 건강에 신경 쓰기 시작한 때문인지 와인이 몸에 좋다며 마시기 시작했다.
비서실 직원이 프랑스로부터 수십 종의 와인을 사와서 한꺼번에 테이스팅한다. 한 병에 1만5000~2만 달러 하는 최고급 와인을 그 자리에서 비우고, 『이것은 안 돼』, 『이것은 좋아』 하며 그 자리에서 평가를 내렸다. 물론 마시는 방법도 알고 있어서, 와인잔을 뱅글뱅글 돌려 가며 향을 즐기며 마셨다.
연회석에서 金正日이 자주 마셨던 것은 위스키 조니워커 「스윙」부터 시작해, 코냑은 헤네시 「XO」(당시 한 병에 5만 엔)나 헤네시 「파라디스」(당시 한 병에 10만 엔) 등 점점 등급을 올려 「넘버원」 등까지 마셨다.
넘버원은 당시 한 병에 5000달러(60만 엔)나 하는 술이었지만, 金正日은 100병을 한꺼번에 구입했기 때문에 프랑스의 양조장에서 기뻐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무엇보다 볼보에 구입한 자동차 대금을 지불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고급술 값도 제대로 지불했는지 확실치 않다. 연회에서 金正日이 북조선 술을 마시는 일은 거의 없었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바로는 金正日은 몇 번이나 禁酒(금주)를 했지만, 가장 오랜 기간 금주한 것은 4개월이었다. 하지만 金正日 자신이 술을 마시지 않아도 연회는 열렸다. 金正日이 술을 입에 대지 않으니 간부들은 마시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한 때에도 金正日은 웨이터에게 자꾸 참석자 모두에게 술을 부어 주라고 지시했다.
金正日이 금주 중일 때, 연회장의 바람잡이는 張成澤(장성택)이었다. 그는 연회 도중에 일어서서 큰 소리로 이렇게 외쳤다.
『위대한 장군님 앞으로 정렬!』
그 호령에 맞춰 우리들이 앞으로 나가 金正日 앞에 나란히 서면 『장군님에게 건배!』, 『장군님 만세!』 하며 브랜디나 와인을 쭉 들이킨다. 이것을 몇 번이나 반복시킨다. 張成澤이 마련한 연회는 정말 괴롭다. 예를 들면, 와인도 한 병에 1만 달러 이상이나 하는 고급 보르도산이지만, 그 한 병을 와인잔에 찰랑거리게 따라 세 사람이 나눠 마신다.
그것을 한 번에 원샷 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맛볼 여유도 없다. 그 덕분에 나는 브랜디나 와인 냄새를 맡는 것만으로도 구역질을 일으킬 정도가 됐다.
술버릇이 나쁜 동생 金敬姬
우리들에게 있어 공포의 마무리 역을 수행했던 張成澤 역시 처인 金敬姬에게는 꼼짝 못 했다. 연회에는 때때로 金敬姬도 참석한다. 남편인 張成澤에 대한 그녀의 태도는 매우 앙칼졌다. 『장성택!』 하며 누구 앞에서라도 남편의 이름을 부르며, 『자, 더 마셔!』 하며 마치 부하나 가정부 취급을 했다.
張成澤도 순순히 말하는 것을 듣고 있었다. 金敬姬는 술 마시는 방법도 압권이었다. 브랜디를 들이키듯 마셨다. 그녀는 결코 술버릇이 좋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연회석에서 그런 金敬姬에게 자주 괴롭힘을 당한 것은 비서실 김창송의 후처인 「姜옥이」다.
강옥이는 金正日 전속의 간호사인 까닭에 金正日의 엉덩이를 때려서 몇 번이나 주사를 놓은 여성이었다. 실은 김창송의 첫부인이 金敬姬의 절친한 친구이며, 두 사람은 자주 함께 술을 마셨다. 두 사람 모두 남편이 金正日을 따라 초대소로 가는 일이 많아, 평양에 남겨진 두 사람은 술판을 벌였다. 그러다 김창송의 처는 알코올 중독이 돼 손을 쓸 수 없게 됐다. 어느 날, 김창송이 출장에서 돌아오자 처는 이미 죽어 있었다. 침대 밑에는 두세 개의 빈 위스키병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金敬姬에게는 그녀가 유일하게 긴장을 풀어 주는 존재였던 것이다. 그녀가 죽고 나서 더욱 술 마시는 방법이 거칠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그 죽은 친구의 후임으로 김창송과 재혼한 강옥이를 괴롭히게 된 것이다. 연회에 부부동반으로 참석할 때, 金敬姬는 강옥이가 앉아 있는 곳으로 가 언더락 글라스에 브랜디를 가득 붓는다.
『이거 마시세요!』, 『이렇게 못 마셔요?』, 『안 마셔? 내가 따른 술을 마시지 않는 거야? 마셔!』 하며 金敬姬는 귀신 같은 몰골로 브랜디 잔을 강옥이의 입에 대고 강제로 마시게 하는 것이다.
강옥이는 고통스럽게 얼굴도 머리카락도 옷도 브랜디에 젖어 엉망진창이 돼버렸다. 옆에서 보고 있자니 정말 불쌍했지만 「장군님의 여동생」이 하는 것을 누구도 말릴 수는 없었다.
金敬姬와 張成澤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다. 하지만 1995년 무렵 어느 연회에 7~8세의 남자아이를 데리고 온 적이 있다. 당시 보육시설에서 아이를 데려다 기르는 게 일종의 유행이었으니 그렇게 데려온 양자 중 하나려니 생각했다.
金敬姬는 아이들에 대한 태도도 거칠어 『자, 인사해요, 인사!』 하며 아이의 머리를 쿡쿡 찔렀다. 거기엔 아이에 대한 애정이 손톱만큼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 부부에게는 또 하나의 여자아이가 있다.
그 여자아이도 그들의 딸은 아니었다. 金正日과 첫 번째 부인 사이에 태어난 雪松(설송)이라는 딸을 데려다 키웠다는 것이다. 나는 그녀를 한 번 보았다. 金日成의 1주기 식사모임 때였다. 金正日 오른쪽에는 여느 때처럼 高英姬 부인, 그 옆에는 여동생 金敬姬가 앉았고, 하던 대로라면 金敬姬의 옆에 張成澤이 앉아야 했지만 두 사람 사이에 18세 정도의 청초한 여자아이가 앉아 있었다.
그 아이가 金正日의 딸은 아닐까 생각이 들었었다. 당시는 10代로 보였으나 나이가 좀더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金正日의 鍊金術, 위조지폐 10만 달러도 간단히 자금세탁
나는 「로렌스 킴」, 「리카르도 박」이란 두 이름을 기억한다. 이것들은 비서실에서 뻔질나게 해외에 나가는 김창송, 박용무가 사용하는 도미니카공화국 여권에 기재돼 있는 이름이다. 박용무는 영어가 유창한 비서실 멤버다. 도미니카 여권 외에 김창송은 프랑스, 박용무는 포르투갈 위조 여권을 소지하고 상황에 따라 가려쓰고 있는 듯했다.
그들은 金正日의 개인자금을 스위스 은행에 입금하러 가는 임무도 담당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이 이것 때문에 몇 번인가 스위스에 간 것을 알고 있다. 金正日은 스위스 은행에 수천만 달러를 쌓아 두고 있다고 생각된다. 이렇듯 金正日의 개인 자산은 각국에 있는 북조선대사관 사람들이 조달해서 金正日에게 헌상하는 자금 외에, 위조지폐나 마약 밀매를 통해 자금을 조달하고 있는 것 같다.
위조지폐에 대해서는 이런 에피소드가 있다. 1996년경, 金正日이 내게 이런 말을 한 기억이 난다.
『최근 우리나라의 호텔이나 외화벌이 상점에서 위조달러가 나돌고 있다. 이 위조달러를 회수해서 지금 吉在京(길재경: 당시 비서실 부장)이 폴란드 인접국에 가고 있다. 잘 된다면 진짜 달러와 교환해서 10만 달러를 갖고 돌아올 것이다』
폴란드 인접국은 어느 나라일까, 또 어떤 경위로 金正日이 내게 이런 이야기를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원산초대소에 머물고 있는 金正日의 거처에 길재경이 돌아온 것은 그로부터 일주일 후였다.
오후 4시경, 金正日과 나는 오후 간식을 먹고 있었다. 득의만만한 얼굴로 원산초대소에 들어온 길재경은 金正日에게 허리를 깊숙이 구부려 인사를 하고 곁으로 다가갔다. 손에 들고 있던 외교행낭을 金正日에게 건넸다. 金正日이 외교행낭을 열자 그 안에는 100달러 지폐 다발 묶음이 10개나 들어 있었다.
『수고했어, 잘 했어』
내용물을 확인한 金正日은 기쁜 듯 길재경을 위로했다. 나는 그때부터 북조선이 국가차원에서 위조지폐를 제조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金正日은 마치 자신들은 피해자라고 말하고 싶을지도 모르겠지만, 10만 달러 정도의 대량 위조지폐가 평양호텔이나 외화벌이 상점에 한꺼번에 나돌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일본 1만 엔권 지폐는 위조가 어렵다』
길재경은 스웨덴·노르웨이 주재대사를 지냈고, 1976년 마약밀수와 관련해 노르웨이로부터 추방당한 인물이다. 그는 그 후 외무성 국장, 당 국제부부 부장 등으로 근무해 왔다. 이것도 내가 일본에 귀국해서 알게 된 것이지만, 1996년경이면 북조선 외교관이 각국에서 위조지폐 소지나 환전을 시도하려다 적발된 시기이다.
1996년 처음으로 베트남 주재 북조선대사관 직원이 적발, 추방당한 것을 시작으로 3월에는 태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캄보디아에서 북조선 외교관 여권을 소지하고 있던 前 요도호 멤버가 위조지폐 소지 혐의로 체포됐다.
더욱이 모스크바 주재, 몽골 울란바토르 주재, 루마니아 주재 북조선공관 관계자가 차례로 적발돼 추방당했다. 이런 일이 있었던 그해에 길재경이 10만 달러를 갖고 돌아온 것이다.
길재경은 각국 주재 외교관에게 위조지폐의 환전을 하게 해 그 회수 역할을 담당했던 것은 아닐까. 그 자신은 1998년 4월에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위조지폐를 환전하려다 적발돼 추방당했다. 길재경은 모스크바 주재 대사관 무역참사부의 「이문무」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었다.
나는 1996년 9월, 식재료를 구입하기 위해 일본에 일시 귀국했는데 그곳에서 체포돼 북조선으로 돌아가지 않는 조건으로 석방됐다. 그 후 1998년 6월에 북조선으로 돌아갈 때, 北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 바로 길재경이었다.
외국에서 적발·추방되더라도 金正日로부터 비난은 받지 않는 것일까. 길재경은 2000년에 위암으로 사망했다. 죽기 전에 입원 중인 그를 병문안한 적이 있다. 침대에서 일어날 수 없었던 길재경은 수척해진 두 손을 모아 내게 『미안해요, 후지모토씨』라며 울면서 사죄하는 것이었다. 병으로 괴로운 길재경의 갑작스런 사죄에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했었다.
그러자 괴로운 듯 그가 설명하는 것이었다. 내가 비서실 멤버가 되고 나서 길재경이 나의 감시원이었다는 것, 무슨 일이건 金正日에게 전부 보고했다는 것이다. 그런 보고로 인해, 내가 1년 반 동안 연금생활을 하게 됐다는 것을 알게 됐다.
취한 軍 간부가 『지하시설도…』 발설
1996년도 연회로 한 해가 시작됐다. 1월3일 9번 연회장에서 연회가 있었다. 목란관은 주로 해외 귀빈을 접대하는 장소이지만, 이날은 軍 관계자를 중심으로 모인 것이다. 연회가 절정에 이를 무렵, 참석자들도 언제나처럼 취하기 시작했다. 그런 중에 軍 대장 중 한 사람인 金明國(김명국)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金正日 앞으로 나가 부동자세로 경례를 했다.
『장군님, 안심하십시오. 전쟁이 시작돼도 우리들이 생명을 걸고 장군님을 지켜드리겠습니다. 지하실도 완성했습니다. 실내온도도 22℃로 잘 설정돼 있습니다』
이것을 듣던 金正日은 일순간 술이 깨는 듯했다. 軍 대장들은 당황했고, 당 간부들은 『에?』 하고 놀라며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마도 극히 일부 측근 이외에는 알려지면 안 되는 중요한 군사기밀이었음이 틀림없다. 실제 서너 달 후 金明國은 金正日의 연회로부터 멀어져 갔다.
전쟁이 시작돼도 金正日을 지킬 수 있는 지하실은 어디에 있는 걸까. 그것은 필시 金正日에게 있어 가장 알리고 싶지 않은 극비 중 하나일 것이다. 예를 들어 核폭탄으로 공격을 받아도 견뎌낼 수 있는 核대피 시설이 발각된다면 유사시에 몸을 숨길 장소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평양에서 차로 15분 정도 달리면 22호 초대소가 나온다. 나는 22호 초대소에 金正日의 核대피소가 있다고 생각한다. 22호 초대소는 3000m의 경마장과 사격장이 완비돼 金正日 부부가 평양에서 가볍게 오락을 즐기러 가는 장소다. 중앙관청 부지內 또는 어느 초대소라도 출입체크는 엄격하지만 22호 초대소 경비는 더 엄격했다.
22호 초대소
22호 초대소가 다른 초대소보다 엄격한 경비체제에 있는 이유는, 첫째 이곳이 金正日 전용열차의 발착지이기 때문이다.
지방에 갈 때에는 여기에서 열차에 金正日의 벤츠를 싣고 출발한다. 北京이나 러시아를 방문할 때에도 비행기를 싫어하는 金正日은 열차를 사용하는데, 이 22호 초대소에서 모든 화물을 실었을 것이다. 물론 金正日도 여기에서 승차했을 것이다.
22호 초대소는 평양의 金正日 관저로부터 지하도로 연결된다. 각 초대소에는 金正日과 가족이 숙박하는 金正日 전용 저택 「1호동」이 반드시 있지만, 22호 초대소의 金正日 관저는 표고 150m 정도의 상당히 견고한 암반 언덕 위에 세워져 있다. 나는 두 번 정도 22호 초대소의 金正日 관저에 들어간 적이 있는데 지상 2층, 지하 3층 건물이었다.
22호 초대소는 1992년 후반부터 2년간 출입이 통제된 적이 있었다. 그 2년간은 벤츠가 왕래하는 대신에 공사를 위한 군용트럭이 들락날락거렸다.
공사가 시작되기 전의 일이었다. 金正日이 낙마해서 한동안 안정을 취해야 했었다. 우리 측근들은 교대로 金正日이 입원해 있는 중앙당 부지內 병실에 매일 꽃을 바꿔 주었다. 나는 당번이 돼 22호 초대소 있는 곳에 꽃이 가득 피어 있는 것을 기억해 내고 그곳으로 차를 달리게 했다. 그리고 꽃을 따서 돌아오려고 했을 때, 초대소의 한 구역에 터널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 터널이 평양으로 향하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해 안으로 200m 정도 운전해 들어가자 돌연 셔터로 문이 차단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급브레이크를 밟아 충돌은 모면했지만 그때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뭔가 상당히 중요한 것을 만들고 있다고 생각했다. 金明國 대장의 「군사기밀 폭로 사건」으로 나의 뇌리에 떠오른 것이지만 이 22호 초대소는 金正日 관저였다.
2년간의 공사로 22호 金正日 관저의 지하를 核대피시설로 만든 것이 틀림없다. 金正日이 적에게 막다른 지경에 몰리게 됐을 때, 마지막 요새는 이 22호 초대소의 核대피소 이외에는 없다고 나는 확신한다.● <번역 金宣希>
※ 출판사의 요청에 따라 본 기사를 일부라도 발췌하는 것은 금지됩니다.
高英姬(고영희) 부인이 있을 때에는 한쪽에서 대기하고 있었지만, 高英姬가 없을 때는 金正日 옆에 앉았다. 게다가 식사 때는 金正日과 사모님밖에 쓸 수 없는 프랑스제 최고급 식기를 사용했다.
「도대체 누굴까」 궁금해하던 차에 김창송이 『장군님의 제1비서』라고 귀띔해 주었다. 눈이 크고 치열이 고른 그녀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는 얼굴이 매력적이었다. 高英姬가 없을 경우 그 자리에 앉는 것으로 보아 예사로운 비서는 아닐 것이라 생각했다.
내가 옥이 동지를 처음 만난 것은 아내 嚴正女(엄정녀)와 알기 전이었다. 나는 옥이 동지에게 가볍게 戀心(연심)을 품고 있었다. 그 사실이 金正日에게 알려졌다면 큰일을 치렀을 것이다.
일본에 귀국해 안 사실이지만, 기자인 에야 오사무(惠谷治)씨의 저서 「金正日大圖鑑(김정일대도감)」에는 「사진에서 사라진 미녀」라는 페이지가 있다. 에야 오사무씨는 같은 크기의 사진을 연도별로 늘어놓고, 시간이 지나면서 金正日의 배후에 찍혀 있는 여성의 모습이 점차 사라져 가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거기서 「사라진」 여성이 옥이 동지였던 것이다.
옥이 동지의 키는 高英姬보다 작은, 158cm 정도였다. 한여름 수영장에서 高英姬가 차분한 느낌의 검은색 수영복을 입었다면, 옥이 동지는 언제나 귀여운 파란색 수영복을 입고 있었다. 高英姬에 비해 조금 마른 체형이지만 탄력 있는 몸으로 각선미도 발군이었다.
두 사람 모두 옅은 화장에 가벼운 웨이브 머리를 했고, 몸에 화려한 치장은 하지 않았다. 미니스커트도 입지 않았다. 이것은 金正日의 취향이기 때문에 절대적인 것이었다. 향수는 뿌리지 않았지만 여성스러운 감미로운 냄새를 듬뿍 풍겼다.
피아노 반주 능숙한 「삼지연조」 출신, 金正日의 「금고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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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후지모토 겐지. |
당초 나는 「玉姬(옥희)」가 아닐까 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최근에 이름이 「玉(옥)」이며, 조선어 발음상 애칭으로 「옥이」라고 부르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일본에 귀국하고 나서 읽은 「기쁨조」의 여성이 쓴 책에 이런 구절이 있기 때문이다.
<高英姬가 없을 때에는 김옥이라는 三池淵組(삼지연조)의 단원이 金正日 옆에 반드시 앉았다. 삼지연조는 전자피아노 한 명과 기타 두 사람으로 구성된 기악조였다. 김옥은 몸집이 작으며 둥근 얼굴을 한 귀여운 용모의 소유자였다. 金正日이 좋아하는 타입은 대체로 둥근 얼굴의 미인형이었다> (申英姬 「나는 김정일의 무용수였다」)
「김옥」이 옥이 동지와 동일 인물인지 아닌지는 모른다. 기쁨조 출신인 사람이 비서를 하고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일설에는 「柳(류)」라는 姓(성)을 가졌다는 정보도 있다. 그러나 옥이 동지는 틀림없이 몸집이 작으며 동그스름한 귀여운 얼굴이었다. 일본 여자배우로 말하면 미야자와 리에(宮澤里惠)를 닮았다고나 할까.
그녀는 노래와 춤은 그다지 능숙하지 않았지만, 피아노는 정말 잘 쳤다. 예를 들어 원산초대소에서 장군으로부터 갑자기 『후지모토, 「내일이 두려워」를 불러 봐』 라는 명령을 받은 적이 있다. 「내일이 두려워」라는 노래는 일본의 「사랑의 교감」이라는 노래의 후렴 부분 「내일이 두려워」를 조선어로 改詞(개사)한 곡이었다.
그곳에는 가라오케 세트가 없었기 때문에 나는 『가라오케가 없으면 못 부릅니다』 했다. 그러자 金正日은 『옥이가 있잖아!』 하며 옥이 동지를 지명했다. 옥이 동지는 바로 피아노 앞에 앉아 악보 없이 「내일이 두려워」 반주를 시작해, 결국 한 소절도 틀리지 않고 쳤다.
옥이 동지는 金正日 전용의 금고관리까지 했다. 金正日의 집무실에는 거대한 금고가 있으며, 우리들이 해외에 나갈 때 金正日의 지시로 금고에서 돈을 꺼내 주는 것이 옥이 동지였다. 내가 일본에 물건을 사러 갈 때도 그녀가 몇백만 엔 상당의 현금을 금고에서 꺼내 주었고, 다달이 월급을 받을 때도 그녀에게서 새하얀 봉투를 직접 건네받았다.
옥이 동지도 해외에 자주 나갔다. 외국어는 서툰 것 같지만 일본어는 조금 하는 것 같았다. 아마 로열 패밀리와 함께 일본에 온 적도 있지 않았을까. 1998년 6월, 일본에서 평양으로 돌아갈 때, 北京에서 1등석에 함께 동승한 적이 있다. 그녀도 혼자였지만 누가 감시하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대화 같은 것은 나누지 않고 눈짓으로 서로 모르는 사람인 척했다.
사랑스럽게 머리를 쓰다듬던 金正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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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英姬 |
『하시모토씨가 만드는 초밥은 언제나 맛있어요』
그녀도 金正日과 마찬가지로 다랑어와 성게가 들어간 초밥을 좋아했다. 나고야 닭요리를 만들었을 때는 『이렇게 맛있는 요리는 하시모토씨가 아니면 만들 수 없을 거예요』라고 말했다. 내가 落馬(낙마)해 얼굴이 붉게 부어올랐을 때, 옥이 동지가 자신의 뺨에 아주 작게 남은 붉은 상흔을 가리키며 『하시모토씨, 약을 잘 바르고 태양을 많이 쪼이지 않는 게 좋아요. 이렇게 검게 돼버리니까요』라고 상냥하게 말했던 기억이 난다.
틀림없이 옥이 동지는 예사 비서가 아니었다. 金正日은 연회석상 같은 데서 취하기 시작하면 오른쪽에 앉힌 여성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버릇이 있다. 高英姬에게도 그랬지만, 高英姬가 없을 적에는 오른쪽에 앉아 있는 옥이 동지의 머리카락을 사랑스럽게 쓰다듬었다. 옥이 동지는 그다지 취하지 않았던 걸로 생각된다. 그러나 와인은 곧잘 함께 마셨고, 코냑도 따라 주면 조금은 입에 댔다.
金日成의 장례식 때 옥이 비서는 큰 기둥 뒤에 숨어 손수건을 손에 들고 울고 있었다. 그때는 일본인 요리사인 나에게 참석이 허용돼 당시 방영된 조선중앙 TV 화면에 내 모습이 나왔다. 그녀는 「비서」로서 그 장소에 있기는 했으나 金正日의 「애인」이기 때문이었을까, 공식석상에는 눈에 띄지 않으려고 한 것 같았다.
게다가 高英姬도 정식 부인은 아니었기 때문에 장례식에 나타나지 않았다. 내가 북한에 있을 때 옥이 동지는 金正日 관저로부터 200m 정도 북쪽에 위치한 간부 전용 12층 아파트에 혼자 살고 있었다. 아파트 최상층에 방이 8개나 되는 호화저택이었다. 그곳에서 매일 金正日의 거처까지 오갔던 것이다. 하지만 高英姬가 사망한 지금은 관저에서 金正日과 함께 생활하고 있지 않을까.
2004년 高英姬가 사망했다는 보도가 난 무렵, 마카오에 金正日의 애인이 있고, 6세 정도 된 딸이 있다는 정보가 한국의 매스컴에서 흘러나왔다. 당시 이 애인이 「옥이 동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여섯 살 된 아이가 있다면 내가 북조선에 있을 때, 옥이 동지가 임신했거나 출산했어야 하는데 앞뒤가 맞지 않는다. 나는 옥이 동지가 임신한 모습을 본 적이 없고, 그녀가 장기간 휴가를 다녀왔다는 것도 듣지 못했다. 게다가 부인이 후계싸움이 일어나지 않도록 옥이 동지가 아이 갖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본다.
아무튼 옥이 동지의 존재는 高英姬가 공인한 존재였다. 高英姬와 옥이 동지가 서로 으르렁대는 모습을 본 적도 없고, 뒷전에서 욕하는 것을 들은 적도 없다. 오히려 자매처럼 두 사람이 친근하게 이야기하던 모습이 아직까지 눈에 선하다. 高英姬의 세 아이도 그녀를 『옥이, 옥이』라고 부르며 따랐다. 병으로 쓰러진 高英姬가 옥이 동지에게 「장군과 아이들을 부탁한다」고 한 것은 아닐까.
최장 연회는 「4일간 내리 계속」
金正日은 아침 일찍 일어나는 데도 불구하고 밤에 실로 정력적이다. 평양에 있든 초대소에 있든 金正日의 밤 생활은 변함없었다. 오후 7시가 되면 저녁식사를 겸해 연회가 시작된다. 식사를 마치면 본격적인 술자리에 들어간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가장 긴 연회는 1992년, 1993년경 벌어진 「4일 연속」 연회였다. 이 정도로 연회가 길어지면 누구든 수면부족과 숙취로 녹초가 돼버릴 것이다. 金正日이 잠들지 않는 한 참석자는 잠들 수 없다. 金正日의 체력이 소진될 때까지 연회는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회장에서 담배를 피울 수 있는 사람은 金正日뿐이다. 간부들은 밖에 있는 거실에 나가 담배를 피울 수 있는데 金正日 앞에서만은 피울 수 없다. 그래서 장시간의 연회는 더욱 더 괴로웠던 것이다.
여름에는 연회장을 포함해 金正日이 있는 방은 어디든 에어컨이 켜 있고, 방 온도는 22℃로 설정돼 있다. 그럼에도 더운 여름 날씨에 술 마시기 시작한 지 다섯 시간 정도 지나면 더워지기 때문에 金正日은 늘상 입는 점퍼를 벗기 시작한다. 부하들에게도 『이봐, 당신들도 벗지? 윗도리 벗어!』 말하자 간부 전원이 윗도리를 벗고 셔츠 차림이 된다.
바야흐로 남자 냄새가 물씬 풍기는 연회가 되는 것이다. 연회 때 이런 일도 있었다. 金正日이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면 다들 이제 슬슬 끝나지 않을까 기대한다. 그러면 金正日이 갑자기 일어나 『너희들, 내가 자는 것을 기다렸지!』라고 해, 간부들이 당황해 부동자세를 취했었다. 金正日은 이런 식으로 즐기는 것이다.
金正日이 완전히 잠들면 전등을 하나 둘 끄고, 보조등만 켜 놓고 우리들은 연회장 밖으로 나와 분위기를 살핀다. 비서실 김창송이 시간을 적당히 보아 다시 한 번 金正日이 완전히 잠들었는지 확인한다. 그래서 「오케이」가 되면 네 명을 동원해 金正日을 전용 침실까지 데려가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새벽까지 마셔도 金正日은 반드시 네 시간 후에는 눈을 뜬다. 그리고 방송으로 『5분 후에 센터에 집합!』이라고 호령을 내린다. 여기에 늦으면 다시 「원샷 벌주 게임」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들도 金正日이 잠들면 바로 방으로 돌아가 네 시간 후에 일어날 준비를 하고 수면을 취한다.
며칠 밤을 새워 계속 마시게 되면 샤워를 할 수도 없다. 그러다 보니 金正日의 머리와 칼라에 비듬이 잔뜩 쌓여 있는 적도 있었다. 나는 그것을 손으로 털어 주는 게 좋을까, 망설이며 보고 있었다. 그토록 깨끗한 것을 좋아하며 냄새 나는 것을 싫어하는 金正日도 이러한 밤낮 없는 대연회를 벌이면 이렇듯 바뀌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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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壤 8번 연회장의 철판구이 코너에서 中央黨 간부들이 앉아 있는 모습. 후지모토 겐지氏는「金正日이 新기종 카메라로 직접 사진을 찍었다」고 한다. |
본격적인 연회가 시작되면 金正日 앞에는 미화 100달러 뭉치가 여러 다발, 그리고 그 옆에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코냑 회사 헤네시의 고급 코냑 「XO」나 최고급품인 「파라디스(Paradis)」가 놓인다. 고급 코냑을 브랜디 잔에 찰랑찰랑 따르고 『내 앞으로 와서 이것을 마셔라! 단숨에 마시는 놈에게는 100달러를 주겠다』고 큰 소리로 외친다. 브랜디 한 잔은 100㎖ 정도다. 그것을 한 번에 마시는 거다.
사람 수가 적을 때는 경쟁하지 않아도 누구에게나 순번이 돌아가기 때문에 한두 잔 단숨에 비우고 간단하게 100달러, 200달러를 손에 쥐고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간다. 그런데 한두 번으로 金正日의 유희는 멈추지 않는다. 많이 마실수록 금액도 높아져 간다. 점점 고액화하면 그 달러가 갖고 싶은 측근들이 걸음걸이가 불안함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간다. 하지만 金正日 앞에서 쓰러지거나 토하면 모든 「상금」이 몰수돼 버린다.
원산초대소 연회에서 있었던 일이다. 『이 봉투에는 1500달러가 들어 있다. 오늘 이 파라디스 석 잔을 계속해서 단숨에 다 마신 놈에게는 이 봉투를 준다』고 金正日이 우리들에게 도발해 왔다. 이미 파라디스를 단숨에 마신 경험이 있는 사람은 그 위력에 주저하고 있었다.
金正日은 즉시 나와 당 경리부장인 林相鍾을 지명했다. 우리들은 우선 첫 번째 잔을 비웠다. 金正日은 봉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1500달러는 여기에 있지』라며 부추긴다. 나는 두 번째 잔을 마시고, 세 번째 잔을 허공에 치켜들었다. 金正日은 「잘 하면서」라는 표정을 지으며 내게 1500달러가 든 하얀 봉투를 내밀었다.
나는 술이 울컥 올라오려는 것을 참고 봉투를 받아들고 자리로 돌아왔다. 그런데 의자에 앉으려는 순간, 나는 화장실로 뛰어들어갔다. 그러자 측근 중 한 사람이 내 뒤를 따라와 화장실에서 토하고 있는 나를 보고 비난했다. 언제나 얼굴을 맞대고 지내는 측근들도 역시 남 잘 되는 꼴은 못 보는 것이다.
그는 연회장으로 가 金正日 앞에서 큰 소리로 고자질했다. 『장군님, 후지모토가 화장실에서 전부 토해 버렸습니다. 이 상금은 무효입니다』라며 내 주머니에 있는 봉투를 억지로 빼내려고 했다. 하지만 金正日은 『괜찮아, 내버려 둬. 후지모토는 한 번 마셨잖아. 그건 후지모토 돈이야』 했다. 한편 林相鍾은 그다지 술이 세지 않았지만 석 잔을 단숨에 마셨다. 그는 「짠돌이」라고 불린 만큼 1500달러를 타내려고 기를 쓴 것 같다.
金正日은 확실히 술이 세다. 술을 마시고 취해 얼굴이 빨개지는 일이 없었다. 아마 스스로를 자제하면서 마시는 것이겠지만, 간부들 앞에서 추태를 드러내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러나 취하면 말투가 억세지거나 잘 운다. 金日成 등 죽은 사람을 떠올리며 슬프게 운 적도 있고, 감동적인 이야기에 감명받아 운 적도 있다.
취할수록 잘 운다

8번 연회장에서의 연회가 끝나갈 무렵 金正日이 『너와 넌 남아』 라며 15~16명을 창고로 데리고 갔다. 창고 한가운데에는 15~16명이 앉을 수 있는 둥근 테이블이 있었다. 그리고 거기서 다시 마시기 시작한 것이다.
그곳에서 金正日은 『이봐, 후지모토, 일본 술 중에서 여기에 없는 좋은 술이 있는지 찾아 봐』 하고 명령했다. 넓은 창고 안에는 일본주와 소주도 있었지만, 산토리의 최고급 위스키 임페리얼이 없기에 내가 그렇게 보고하자, 『좋아, 이번에 일본에 가면 사와』 했다.
즉시 일본에 가서, 다섯 병 정도 구입해 金正日에게 가지고 갔다. 『이 술은 입 안에 들어가면 확 퍼져 부드럽게 넘어갑니다』 하며 따라 주자, 金正日은 마시면서 『응, 정말이네. 입 안에 확 퍼지네』 하며 기분 좋게 마셨다.
연회에서는 취한 軍 대장들이 어떤 이유에서인지 일본 군가를 불렀다. 金正日은 대장들이 노래하는 것을 들으면서 콧노래로 따라 부르기도 했다. 군대를 체험하지 않은 일본인인 나는 모르는 노래가 상당히 많았으나, 金正日이 가장 좋아했던 군가는 「라바울 노래」(라바울은 파푸아뉴기니령으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남태평양 최대 전략기지)였다. 이 노래가 나오면 함께 불렀다. 영화광인 金正日은 토라(寅)씨의 주제가를 함께 부른 적도 있는데, 노래를 잘 불렀다.
1992~1993년 무렵에는 일본주도 잘 마시게 되었다. 「켄비시」, 「켓케이캉」, 「키쿠마사무네」를 처음에는 『맛있네』 하며 한 잔 마시기 시작해 金正日 혼자서 1.8ℓ들이 병을 싹 비워 버린다.
그러고 나서 다음날이면 『후지모토, 일본주는 안 돼. 머리가 아파』 하고 투덜댄다. 누구라도 술 1.8ℓ를 마시면 다음날은 숙취로 머리가 아픈 게 당연하다.
일본 맥주에 대해서도 어느 상품이 맛있는지 물어왔다. 당시 金正日은 「기린」이나 「삿포로」를 좋아했지만, 내가 『생맥주라면 일본에서는 「아사히 슈퍼드라이」가 인기가 있습니다』라고 알려 주어 그때부터는 아사히 생맥주를 자주 마셨다.
1994년 金日成이 사망하고 나서부터는 건강에 신경 쓰기 시작한 때문인지 와인이 몸에 좋다며 마시기 시작했다.
비서실 직원이 프랑스로부터 수십 종의 와인을 사와서 한꺼번에 테이스팅한다. 한 병에 1만5000~2만 달러 하는 최고급 와인을 그 자리에서 비우고, 『이것은 안 돼』, 『이것은 좋아』 하며 그 자리에서 평가를 내렸다. 물론 마시는 방법도 알고 있어서, 와인잔을 뱅글뱅글 돌려 가며 향을 즐기며 마셨다.
연회석에서 金正日이 자주 마셨던 것은 위스키 조니워커 「스윙」부터 시작해, 코냑은 헤네시 「XO」(당시 한 병에 5만 엔)나 헤네시 「파라디스」(당시 한 병에 10만 엔) 등 점점 등급을 올려 「넘버원」 등까지 마셨다.
넘버원은 당시 한 병에 5000달러(60만 엔)나 하는 술이었지만, 金正日은 100병을 한꺼번에 구입했기 때문에 프랑스의 양조장에서 기뻐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무엇보다 볼보에 구입한 자동차 대금을 지불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고급술 값도 제대로 지불했는지 확실치 않다. 연회에서 金正日이 북조선 술을 마시는 일은 거의 없었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바로는 金正日은 몇 번이나 禁酒(금주)를 했지만, 가장 오랜 기간 금주한 것은 4개월이었다. 하지만 金正日 자신이 술을 마시지 않아도 연회는 열렸다. 金正日이 술을 입에 대지 않으니 간부들은 마시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한 때에도 金正日은 웨이터에게 자꾸 참석자 모두에게 술을 부어 주라고 지시했다.
金正日이 금주 중일 때, 연회장의 바람잡이는 張成澤(장성택)이었다. 그는 연회 도중에 일어서서 큰 소리로 이렇게 외쳤다.
『위대한 장군님 앞으로 정렬!』
그 호령에 맞춰 우리들이 앞으로 나가 金正日 앞에 나란히 서면 『장군님에게 건배!』, 『장군님 만세!』 하며 브랜디나 와인을 쭉 들이킨다. 이것을 몇 번이나 반복시킨다. 張成澤이 마련한 연회는 정말 괴롭다. 예를 들면, 와인도 한 병에 1만 달러 이상이나 하는 고급 보르도산이지만, 그 한 병을 와인잔에 찰랑거리게 따라 세 사람이 나눠 마신다.
그것을 한 번에 원샷 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맛볼 여유도 없다. 그 덕분에 나는 브랜디나 와인 냄새를 맡는 것만으로도 구역질을 일으킬 정도가 됐다.
술버릇이 나쁜 동생 金敬姬
우리들에게 있어 공포의 마무리 역을 수행했던 張成澤 역시 처인 金敬姬에게는 꼼짝 못 했다. 연회에는 때때로 金敬姬도 참석한다. 남편인 張成澤에 대한 그녀의 태도는 매우 앙칼졌다. 『장성택!』 하며 누구 앞에서라도 남편의 이름을 부르며, 『자, 더 마셔!』 하며 마치 부하나 가정부 취급을 했다.
張成澤도 순순히 말하는 것을 듣고 있었다. 金敬姬는 술 마시는 방법도 압권이었다. 브랜디를 들이키듯 마셨다. 그녀는 결코 술버릇이 좋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연회석에서 그런 金敬姬에게 자주 괴롭힘을 당한 것은 비서실 김창송의 후처인 「姜옥이」다.
강옥이는 金正日 전속의 간호사인 까닭에 金正日의 엉덩이를 때려서 몇 번이나 주사를 놓은 여성이었다. 실은 김창송의 첫부인이 金敬姬의 절친한 친구이며, 두 사람은 자주 함께 술을 마셨다. 두 사람 모두 남편이 金正日을 따라 초대소로 가는 일이 많아, 평양에 남겨진 두 사람은 술판을 벌였다. 그러다 김창송의 처는 알코올 중독이 돼 손을 쓸 수 없게 됐다. 어느 날, 김창송이 출장에서 돌아오자 처는 이미 죽어 있었다. 침대 밑에는 두세 개의 빈 위스키병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金敬姬에게는 그녀가 유일하게 긴장을 풀어 주는 존재였던 것이다. 그녀가 죽고 나서 더욱 술 마시는 방법이 거칠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그 죽은 친구의 후임으로 김창송과 재혼한 강옥이를 괴롭히게 된 것이다. 연회에 부부동반으로 참석할 때, 金敬姬는 강옥이가 앉아 있는 곳으로 가 언더락 글라스에 브랜디를 가득 붓는다.
『이거 마시세요!』, 『이렇게 못 마셔요?』, 『안 마셔? 내가 따른 술을 마시지 않는 거야? 마셔!』 하며 金敬姬는 귀신 같은 몰골로 브랜디 잔을 강옥이의 입에 대고 강제로 마시게 하는 것이다.
강옥이는 고통스럽게 얼굴도 머리카락도 옷도 브랜디에 젖어 엉망진창이 돼버렸다. 옆에서 보고 있자니 정말 불쌍했지만 「장군님의 여동생」이 하는 것을 누구도 말릴 수는 없었다.
金敬姬와 張成澤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다. 하지만 1995년 무렵 어느 연회에 7~8세의 남자아이를 데리고 온 적이 있다. 당시 보육시설에서 아이를 데려다 기르는 게 일종의 유행이었으니 그렇게 데려온 양자 중 하나려니 생각했다.
金敬姬는 아이들에 대한 태도도 거칠어 『자, 인사해요, 인사!』 하며 아이의 머리를 쿡쿡 찔렀다. 거기엔 아이에 대한 애정이 손톱만큼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 부부에게는 또 하나의 여자아이가 있다.
그 여자아이도 그들의 딸은 아니었다. 金正日과 첫 번째 부인 사이에 태어난 雪松(설송)이라는 딸을 데려다 키웠다는 것이다. 나는 그녀를 한 번 보았다. 金日成의 1주기 식사모임 때였다. 金正日 오른쪽에는 여느 때처럼 高英姬 부인, 그 옆에는 여동생 金敬姬가 앉았고, 하던 대로라면 金敬姬의 옆에 張成澤이 앉아야 했지만 두 사람 사이에 18세 정도의 청초한 여자아이가 앉아 있었다.
그 아이가 金正日의 딸은 아닐까 생각이 들었었다. 당시는 10代로 보였으나 나이가 좀더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金正日의 鍊金術, 위조지폐 10만 달러도 간단히 자금세탁
나는 「로렌스 킴」, 「리카르도 박」이란 두 이름을 기억한다. 이것들은 비서실에서 뻔질나게 해외에 나가는 김창송, 박용무가 사용하는 도미니카공화국 여권에 기재돼 있는 이름이다. 박용무는 영어가 유창한 비서실 멤버다. 도미니카 여권 외에 김창송은 프랑스, 박용무는 포르투갈 위조 여권을 소지하고 상황에 따라 가려쓰고 있는 듯했다.
그들은 金正日의 개인자금을 스위스 은행에 입금하러 가는 임무도 담당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이 이것 때문에 몇 번인가 스위스에 간 것을 알고 있다. 金正日은 스위스 은행에 수천만 달러를 쌓아 두고 있다고 생각된다. 이렇듯 金正日의 개인 자산은 각국에 있는 북조선대사관 사람들이 조달해서 金正日에게 헌상하는 자금 외에, 위조지폐나 마약 밀매를 통해 자금을 조달하고 있는 것 같다.
위조지폐에 대해서는 이런 에피소드가 있다. 1996년경, 金正日이 내게 이런 말을 한 기억이 난다.
『최근 우리나라의 호텔이나 외화벌이 상점에서 위조달러가 나돌고 있다. 이 위조달러를 회수해서 지금 吉在京(길재경: 당시 비서실 부장)이 폴란드 인접국에 가고 있다. 잘 된다면 진짜 달러와 교환해서 10만 달러를 갖고 돌아올 것이다』
폴란드 인접국은 어느 나라일까, 또 어떤 경위로 金正日이 내게 이런 이야기를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원산초대소에 머물고 있는 金正日의 거처에 길재경이 돌아온 것은 그로부터 일주일 후였다.
오후 4시경, 金正日과 나는 오후 간식을 먹고 있었다. 득의만만한 얼굴로 원산초대소에 들어온 길재경은 金正日에게 허리를 깊숙이 구부려 인사를 하고 곁으로 다가갔다. 손에 들고 있던 외교행낭을 金正日에게 건넸다. 金正日이 외교행낭을 열자 그 안에는 100달러 지폐 다발 묶음이 10개나 들어 있었다.
『수고했어, 잘 했어』
내용물을 확인한 金正日은 기쁜 듯 길재경을 위로했다. 나는 그때부터 북조선이 국가차원에서 위조지폐를 제조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金正日은 마치 자신들은 피해자라고 말하고 싶을지도 모르겠지만, 10만 달러 정도의 대량 위조지폐가 평양호텔이나 외화벌이 상점에 한꺼번에 나돌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일본 1만 엔권 지폐는 위조가 어렵다』
길재경은 스웨덴·노르웨이 주재대사를 지냈고, 1976년 마약밀수와 관련해 노르웨이로부터 추방당한 인물이다. 그는 그 후 외무성 국장, 당 국제부부 부장 등으로 근무해 왔다. 이것도 내가 일본에 귀국해서 알게 된 것이지만, 1996년경이면 북조선 외교관이 각국에서 위조지폐 소지나 환전을 시도하려다 적발된 시기이다.
1996년 처음으로 베트남 주재 북조선대사관 직원이 적발, 추방당한 것을 시작으로 3월에는 태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캄보디아에서 북조선 외교관 여권을 소지하고 있던 前 요도호 멤버가 위조지폐 소지 혐의로 체포됐다.
더욱이 모스크바 주재, 몽골 울란바토르 주재, 루마니아 주재 북조선공관 관계자가 차례로 적발돼 추방당했다. 이런 일이 있었던 그해에 길재경이 10만 달러를 갖고 돌아온 것이다.
길재경은 각국 주재 외교관에게 위조지폐의 환전을 하게 해 그 회수 역할을 담당했던 것은 아닐까. 그 자신은 1998년 4월에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위조지폐를 환전하려다 적발돼 추방당했다. 길재경은 모스크바 주재 대사관 무역참사부의 「이문무」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었다.
나는 1996년 9월, 식재료를 구입하기 위해 일본에 일시 귀국했는데 그곳에서 체포돼 북조선으로 돌아가지 않는 조건으로 석방됐다. 그 후 1998년 6월에 북조선으로 돌아갈 때, 北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 바로 길재경이었다.
외국에서 적발·추방되더라도 金正日로부터 비난은 받지 않는 것일까. 길재경은 2000년에 위암으로 사망했다. 죽기 전에 입원 중인 그를 병문안한 적이 있다. 침대에서 일어날 수 없었던 길재경은 수척해진 두 손을 모아 내게 『미안해요, 후지모토씨』라며 울면서 사죄하는 것이었다. 병으로 괴로운 길재경의 갑작스런 사죄에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했었다.
그러자 괴로운 듯 그가 설명하는 것이었다. 내가 비서실 멤버가 되고 나서 길재경이 나의 감시원이었다는 것, 무슨 일이건 金正日에게 전부 보고했다는 것이다. 그런 보고로 인해, 내가 1년 반 동안 연금생활을 하게 됐다는 것을 알게 됐다.
취한 軍 간부가 『지하시설도…』 발설
1996년도 연회로 한 해가 시작됐다. 1월3일 9번 연회장에서 연회가 있었다. 목란관은 주로 해외 귀빈을 접대하는 장소이지만, 이날은 軍 관계자를 중심으로 모인 것이다. 연회가 절정에 이를 무렵, 참석자들도 언제나처럼 취하기 시작했다. 그런 중에 軍 대장 중 한 사람인 金明國(김명국)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金正日 앞으로 나가 부동자세로 경례를 했다.
『장군님, 안심하십시오. 전쟁이 시작돼도 우리들이 생명을 걸고 장군님을 지켜드리겠습니다. 지하실도 완성했습니다. 실내온도도 22℃로 잘 설정돼 있습니다』
이것을 듣던 金正日은 일순간 술이 깨는 듯했다. 軍 대장들은 당황했고, 당 간부들은 『에?』 하고 놀라며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마도 극히 일부 측근 이외에는 알려지면 안 되는 중요한 군사기밀이었음이 틀림없다. 실제 서너 달 후 金明國은 金正日의 연회로부터 멀어져 갔다.
전쟁이 시작돼도 金正日을 지킬 수 있는 지하실은 어디에 있는 걸까. 그것은 필시 金正日에게 있어 가장 알리고 싶지 않은 극비 중 하나일 것이다. 예를 들어 核폭탄으로 공격을 받아도 견뎌낼 수 있는 核대피 시설이 발각된다면 유사시에 몸을 숨길 장소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평양에서 차로 15분 정도 달리면 22호 초대소가 나온다. 나는 22호 초대소에 金正日의 核대피소가 있다고 생각한다. 22호 초대소는 3000m의 경마장과 사격장이 완비돼 金正日 부부가 평양에서 가볍게 오락을 즐기러 가는 장소다. 중앙관청 부지內 또는 어느 초대소라도 출입체크는 엄격하지만 22호 초대소 경비는 더 엄격했다.
22호 초대소
22호 초대소가 다른 초대소보다 엄격한 경비체제에 있는 이유는, 첫째 이곳이 金正日 전용열차의 발착지이기 때문이다.
지방에 갈 때에는 여기에서 열차에 金正日의 벤츠를 싣고 출발한다. 北京이나 러시아를 방문할 때에도 비행기를 싫어하는 金正日은 열차를 사용하는데, 이 22호 초대소에서 모든 화물을 실었을 것이다. 물론 金正日도 여기에서 승차했을 것이다.
22호 초대소는 평양의 金正日 관저로부터 지하도로 연결된다. 각 초대소에는 金正日과 가족이 숙박하는 金正日 전용 저택 「1호동」이 반드시 있지만, 22호 초대소의 金正日 관저는 표고 150m 정도의 상당히 견고한 암반 언덕 위에 세워져 있다. 나는 두 번 정도 22호 초대소의 金正日 관저에 들어간 적이 있는데 지상 2층, 지하 3층 건물이었다.
22호 초대소는 1992년 후반부터 2년간 출입이 통제된 적이 있었다. 그 2년간은 벤츠가 왕래하는 대신에 공사를 위한 군용트럭이 들락날락거렸다.
공사가 시작되기 전의 일이었다. 金正日이 낙마해서 한동안 안정을 취해야 했었다. 우리 측근들은 교대로 金正日이 입원해 있는 중앙당 부지內 병실에 매일 꽃을 바꿔 주었다. 나는 당번이 돼 22호 초대소 있는 곳에 꽃이 가득 피어 있는 것을 기억해 내고 그곳으로 차를 달리게 했다. 그리고 꽃을 따서 돌아오려고 했을 때, 초대소의 한 구역에 터널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 터널이 평양으로 향하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해 안으로 200m 정도 운전해 들어가자 돌연 셔터로 문이 차단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급브레이크를 밟아 충돌은 모면했지만 그때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뭔가 상당히 중요한 것을 만들고 있다고 생각했다. 金明國 대장의 「군사기밀 폭로 사건」으로 나의 뇌리에 떠오른 것이지만 이 22호 초대소는 金正日 관저였다.
2년간의 공사로 22호 金正日 관저의 지하를 核대피시설로 만든 것이 틀림없다. 金正日이 적에게 막다른 지경에 몰리게 됐을 때, 마지막 요새는 이 22호 초대소의 核대피소 이외에는 없다고 나는 확신한다.● <번역 金宣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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