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연구] 바람의 아들 가수 윤수일 : 월간조선

변화무쌍한 삶을 살아온 남자를 흔히 「바람의 아들」이라고 부른다. 가수 가운데 이 표현이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은 아마 윤수일일 것이다. 그는 혼혈을 극복하고 당대 최고 가수로 우뚝 섰다. 어려운 시절들을 음악으로 정면 돌파한 그는 사업가로 변신했다. 그리고 사업 실패의 어려움을 딛고 다시 가수로 일어섰다.

그는 인생의 어느 지점에서든 무한질주하듯 살아왔다. 그의 음악도 마찬가지다. 1970년대 후반 데뷔해서는 비애감이 가득한 낭만의 노래를 불렀고, 1980년대 들어서는 록의 경쾌함을 선사했다. 팬들이 기억하는 윤수일의 노래는 시차가 존재한다.

40代 후반부터 50代까지의 팬들은 「사랑만은 않겠어요」, 「갈대」, 「유랑자」, 「추억」 같은 곡의 흐느끼듯 부르는 선율을 기억한다. 30代 초반부터 40代 중반까지의 팬들은 윤수일이 선글라스에 가죽 바지를 입고 포효하듯 부른 「제2의 고향」, 「아파트」, 「황홀한 고백」 등을 떠올린다.

그는 『이미 있는 것, 흔한 것은 하기 싫어하는 성격』이라고 말한다.

그가 다시 가수로 돌아왔다. 새 앨범을 내놓은 것이다. 그가 마지막으로 낸 앨범은 1999년 싱글음반 「도시의 이별」이었다. 타이틀곡인 「숲바다 섬마을」을 비롯해 모두 열 곡이 수록된 이번 「리모델링」 음반은 7년 만의 新作(신작)이다.

수록곡은 모두 자신이 직접 작사·작곡했다.

MBC 라디오 「싱글벙글 쇼」에 게스트로 출연해, 「숲바다 섬마을」과 「아파트」를 라이브로 부르는 그의 모습은 전성기 시절처럼 화려하고 준수했다. 50代의 나이를 느낄 수 없었다. 스튜디오에는 그의 팬 10여 명이 나와, 그의 컴백을 열띠게 응원했다.

그는 『과거에는 인터뷰를 의식적으로 피해 왔지만 지금은 마음이 조금 열렸다』고 했다. 가슴 아팠던 옛 이야기를 담담하게 되짚었다. 그의 대답은 편안하고 솔직했다. 한 시대를 풍미한 스타 가수 같지 않았다.

─새 앨범에 대한 반응은 어떤가요.

『좋아요. 新譜(신보) 주문량이 예상보다 많습니다. 음반업계가 붕괴된 상태라 「아무리 윤수일이라도 어려울 것이다」는 회의적인 시선이 있었지만, 저는 앨범을 잘 만들면 괜찮을 것이라고 믿었어요. 반응을 보니까 「역시 음악은 속이지 않는다」는 것을 절감합니다. 사실 2년 동안 꽤 功(공)을 들여 만들었어요. 한곡 한곡이 마치 제 손가락처럼, 자식처럼 정이 갑니다』

도시 탈출을 주제로 한 新譜

─앨범을 보니까 全曲(전곡)이 윤수일 작사·작곡에다가 新曲(신곡)이더군요. 한두 곡쯤 옛 노래를 담았으면 어땠을까요. 상당한 모험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가수는 과거에 연연해서는 안 되고 항상 현재와 부딪혀야 해요. 이번 앨범은 베스트와 싱글 음반을 포함해 통산 스물한 번째 독집입니다. 新譜니까 예전의 히트 곡이 하나라도 들어갈 수 없죠. 저는 음악을 하면서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다, 후퇴할 수 없다」는 것을 하나의 신조로 삼아 왔습니다』

─그렇다면 신작도 과거와는 다른 점을 부각하고 있을 텐데요, 과연 어떤 콘셉트로 앨범작업에 임했습니까.

『지금까지 제 노래는 「아파트」나 「제2의 고향」이 말해 주듯 도시인들의 고독과 사랑을 메시지로 했습니다. 콘크리트 문화에 대한 표현이었다고 할까요.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아파트만 해도 주거공간에서 환경녹지의 생태적 공간으로 바뀌었잖아요.

사람 사는 게 바뀌듯 음악도 달라져야죠. 그래서 도시 탈출을 꾀해 보자는 쪽으로 방향을 정했습니다. 「숲바다 섬마을」이 그것을 구체화한 곡인데요, 실은 강화에 있는 제 스튜디오에서 구상한 겁니다. 그곳은 숲이 먼저 보이고 거기 너머에 바다가 있고 강화 섬이 보이고, 그 안에 마을이 있는 곳이죠. 親환경적이고, 뭐랄까 요즘 말하는 웰빙의 분위기를 그려 내고 싶었습니다』

─꺼내고 싶지 않은 얘기인 줄 압니다만, 2002년에 사업상의 문제로 사기와 연루되어 소송에 휘말리고 언론에 공개되는 곤욕을 치렀습니다. 다시 가수로 돌아오기까지 이 문제를 정리하느라 꽤 고생한 것으로 압니다.

『2000년 초반에 흔히 「다단계」라고 하는 네트워크 판매회사를 운영했죠. 사기가 아니라 행정적 실수로 인한 사건이었습니다. 무척이나 복잡하게 엉켜 있었지만 깨끗하게 정리하자는 판단 아래 결국 벌금형으로 마무리를 지었죠. 「속내의만 남겨 놓고 다 내놓자」는 심정으로 집과 건물을 다 팔아 수습했습니다.

그땐 정말 눈앞이 캄캄했어요. 더구나 말씀하신 대로 언론에 공개되면서 公人으로서 생명이 끝이다 싶었죠. 그러면서 제게는 사업이 안 맞는다는 것을 깨닫고 음악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결심을 굳혔습니다. 강화의 스튜디오에 2년 동안 칩거하듯 두문불출하며 음악에만 매달렸어요. 역시 노래가 천직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타이틀곡 「숲바다 섬마을」은 밴드음악이더군요. 이제 나이도 들고, 또 기성세대 음악 팬들이 트로트 성향의 멜로디를 좋아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젊은 취향의 이 곡을 타이틀로 하는 것은 과감한 결정이라고 봅니다. 역시 윤수일이다 싶었죠. 하지만 선택에 어려움을 겪었을 것 같습니다.

『잘 보셨습니다. 고민을 했지만 결국 제가 하고 싶은 방향으로 갔습니다. 「사랑만은 않겠어요」의 윤수일이 아니라 「환상의 섬」의 윤수일밴드 쪽을 택한 거죠. 트로트 성향의 곡을 하면 대중적 반향은 빠르지만 사운드의 질이나 범위에 한계가 있습니다. 과거 윤수일밴드 때의 음악은 세대를 아우르진 못했지만 젊은 층으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죠. 그래서 김건모·박상민·김장훈 등 후배 가수들이 제 곡을 많이 리메이크하는 것 같습니다. 지금도 긍지를 느끼는 부분이죠』

─저는 새 앨범의 곡 가운데에서 트로트 맛이 나는 「만추」나 「완벽한 행복」이 귀에 잘 들리던데요.

『후속타로 고려하고 있습니다. 조금 시간이 지나면 가을에 맞는 노래로 완벽하게 변신할 생각입니다. 기대해도 좋습니다』

지독한 외로움

새 앨범의 귀퉁이에는 「앨범 수익금은 어린이 난치병 치료를 위한 기금 마련을 위해 쓰일 것」이라는 딱지가 붙어 있다. 황우석 교수 사건 이후 난치병 어린이들이 실의에 빠진 것 같아 힘을 보태기로 했다고 한다. 오는 6월10일 윤수일은 서울 올림픽공원 내 역도경기장에서 컴백 콘서트를 갖는다.

윤수일의 음악에 면면히 흐르는 정서는 지독한 외로움이다. 新譜를 관통하는 큰 흐름 역시 그 고독의 정서다.

「지금보다도 내일에 더욱 더 외로운 나는/또 다른 고독에 야위어 가고…」(「만추」中), 「어차피 산다는 건 외로움이죠/사랑도 외로움인 걸…」(「완벽한 행복」中)

그의 노랫말에는 외로움의 언어들이 질펀하다. 가요계를 한창 누비던 시절에도 윤수일은 발표하는 앨범마다 「유랑자」를 비롯해 「외로운 밤」, 「외로워요」, 「내 마음 외로워」 같은 고독의 노래를 빼놓지 않고 삽입했다.

『고독 하면 윤수일이죠』

─「외로움」을 주제로 한 노래가 예나 지금이나 참 많습니다. 「고독」이 윤수일 음악의 키워드인가 봅니다.

『(이 말에 순간 눈물이 핑 도는 듯 보였다) 고독 하면 윤수일이죠. 고독은 저의 가장 오래된 친구입니다. 아무도 모르는 고독이었죠. 이렇게 마음이 열리기 전까지 나만의 가슴앓이로 무척 고통을 받았습니다. 제가 1977년 데뷔했던 때에 혼혈인은 「외국인도 아닌 것이, 한국인이 아닌 것이」였습니다. 한마디로 「이방인」이었죠. 가령 무대에 나와서 가요를 부르면 마치 외국인 노래자랑과 같은 어색함이 퍼졌어요. 고독에 몸부림을 친 성장기를 거치고도 항상 가슴속에는 그런 감정의 찌꺼기가 남아 있었어요』

─스타 가수가 되어 엄청난 인기를 누렸을 때도 그런 느낌이었나요.

『무수한 환호와 박수세례를 받았지만 외로움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어요. 사라질 수가 없죠. 그게 음악 속에 그대로 용해되었던 것 같습니다. 신나는 곡을 부르면 리듬이 그렇게 경쾌해도 나도 모르게 쓸쓸하고 슬픈 느낌이 묻어납니다.

「아파트」가 그렇잖아요. 언뜻 듣기에는 빠르고 즐거운데 사람들은 허전하고 외로운 느낌이 남는다고들 해요. 어쩌면 이게 윤수일 음악의 강점으로 나타난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경쾌한 리듬과 외로움의 정서를 잘 믹스했다는 거죠』

─혼혈인이라는 신분이 가져온 차별이 곧 외로움을 가져왔을 텐데요, 그래서 그동안 인터뷰를 의식적으로 피해 온 건가요. 인터넷상에도 인터뷰 자료를 찾기 어렵더군요.

『의식적으로 피했죠. 인터뷰만 했다하면 꼭 혼혈 얘기가 나왔으니까요. 저는 스스로 극복해 가고 있었는데 매스컴과 주변인들은 저의 출신 문제에만 집중하더라고요. 그게 저의 음악과 연관되는 것이 싫었습니다. 혼혈 문제가 지금은 많이 나아졌죠. 多人種(다인종) 시대의 영향으로 그 인식이 달라지고 개선되고 있다고 하지만 솔직히 그래도 개운하지는 않습니다』

─지난 4월 미국 슈퍼볼의 영웅 「하인즈 워드」의 내한으로 혼혈 문제가 사회적 관심사로 대두되었습니다. 상당히 긍정적인 방향으로 전개되었다고 보는데, 하인즈 워드를 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나요.

『여러 가지 생각이 스쳤습니다. 우선 다행이라는 느낌이었지만, 행여 일시적인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도 생겼어요. 이 문제를 제가 논하는 건 좀 그렇고, 저 개인만을 말한다면 혼혈이라는 출신 때문에 제가 핍박받고 차별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에 결코 분노하지는 않았습니다. 내가 차별받는 입장에 서는 것을 나 스스로 용서하지 않았어요.

공부를 해도, 음악을 해도 뒤떨어지지 않겠다고 다짐했고, 또 실천해 왔습니다. 부당한 이유로 「바보」 소리를 듣기 싫었습니다. 곡을 발표해서 만약 그 노래가 상위권에 오르지 않거나, 그 자리를 유지하지 못하면 아마 숨어 버렸을 거예요. 혼혈인이란 신분이 장애가 되지 않도록 모든 점에서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1977년 「사랑만은 않겠어요」가 크게 히트하면서 국민가요가 됐습니다. 혼혈 문제가 그때로부터 3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야 이슈로 등장한 것과 비교하면, 그나마 가요계는 혼혈인에게 너그러웠던 것 아닐까요.

『그럼요.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가요계에 감사드립니다. 다른 분야에서 성공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혼혈 출신들이 가요계에 많이 진출했다는 점도 있었지만, 가요계는 혼혈인들이 설 자리를 주었습니다. 음악계가 앞선 거죠. 조금 저 자신을 치켜세운다면, 저와 인순이씨 등에 의해 혼혈인에 대한 높은 벽이 조금이나마 깨졌다고 할 수 있을 거예요.

사람들이 「사랑만은 않겠어요」를 윤수일 개인 곡으로 아는데, 실은 「윤수일과 솜사탕」, 정확히 하면 「골든 그레이프스」라는 그룹의 이름으로 발표한 곡이에요. 당시 「골든 그레이프스」 멤버 여섯 중 네 명이 혼혈인이었습니다』

혼혈과 유복자라는 운명

윤수일은 한국전쟁에 참여했던 미국 공군장교(칼 보룸 어케스트)와 지복희씨 사이에 1955년 울산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 얼굴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어머니가 임신한 상태에서 그 시절 많은 주한미군이 그랬듯이 「곧 미국에 데려 가겠다」는 약속을 남긴 채 아버지는 본국으로 갔고, 불행히도 얼마 후 시험비행을 하다 추락사했다.

윤수일은 혼혈과 遺腹子(유복자)라는 두 가지 핸디캡을 안고 태어났다. 숱한 서러움 속에 성장했다. 이후 義父(의부)를 만나 「공부 잘하는 학생」으로 울산중학교와 학성고교를 졸업했고, 울산工大에 입학했다. 외로웠던 소년 시절 유일한 벗은 「음악」이었다.

제대로 음악을 하려면 서울로 가야 했고, 그는 대학을 포기한 채 「골든 그레이프스라는 그룹이 도우미를 필요로 한다」는 광고 하나만을 믿고 겁 없이 상경했다.

「골든 그레이프스」는 펄 벅 재단의 주선으로 신중현씨가 지휘하던 밴드였다. 1973년 윤수일이 그룹의 헬퍼로 들어갔을 때, 이미 신중현씨는 자신의 활동 때문에 떠났고 혼혈인 함중아씨가 멤버로 있었다.

함중아씨가 「골든 그레이프스」에서 나가 「양키스」란 새 그룹을 만들면서, 그 빈자리가 윤수일에게 돌아왔다. 이때까지 음악을 체계적으로 접하지 못했던 그는, 1974년 서울 망우리의 움막집에서 본격적인 음악공부에 들어갔다. 당시 이회택 감독, 아마추어 레슬러였던 故 맹성호씨 등이 후원자였다고 한다.

안치행과의 운명적 만남

1977년 한 그룹 사운드 경연대회에 참가했던 윤수일은 행사를 주최한 당대 최고의 작곡자이자 제작자였던 안치행씨에게 픽업됐다. 그리고 스타덤을 향한 飛上(비상)이 시작됐다.

서둘러 제작한 「윤수일과 솜사탕」(그 무렵 언어순화 운동의 영향으로 골든 그레이프스라는 외래어를 못 쓰게 되어 붙여진 이름이었다)의 첫 앨범에 담긴 곡이 「사랑만은 않겠어요」였다.

이 노래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음반은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고 윤수일은 단박에 인기 정상가수로 점프했다. 방송사가 주는 최고가요상, 10대 가수상 등을 휩쓸면서 연말 시상식은 그의 독무대가 되었다. 그 뒤 「갈대」, 「추억」, 「나나」, 「유랑자」 등의 히트 곡이 줄줄이 이어졌다.

─활동 초기의 히트 곡들은 중년들도 좋아하는 노래들이었죠. 하지만 1980년대 들어서면서 록으로 음악의 궤도를 수정했습니다. 왜 방향 전환을 한 거죠.

『안치행씨가 만들어 준 노래들은 대부분 트로트에 고고(록) 리듬을 가미한 스타일이었어요. 그 시절의 유행이었죠. 그러니까 「돌아와요 부산항에」의 조용필, 「오동잎」의 최헌, 「나를 두고 아리랑」의 김훈, 「내게도 사랑이」의 함중아 등과 같은 계열이었던 셈이죠. 그 음악으로 인기를 얻게 되었지만 「트로트 고고」풍 음악에 결코 안주할 수 없었습니다.

내 음악, 내가 꿈꿔 온 음악을 하고 싶었어요. 그것은 트로트풍을 깨지 않으면 해낼 수 없는 작업이었어요. 1980년대가 개막되었을 때 안치행 사장에게 「그룹을 결성해 내가 쓴 곡으로 음반을 만들겠다」는 제안을 했죠』

─기획 작품에 의존하는 가수가 아닌 自立(자립)형 뮤지션, 즉 「윤수일밴드」시대를 연 셈인데, 제작자의 반대는 없었나요.

『안치행씨는 반신반의했지만 과감하게 결정을 했어요. 한번 해보자는 거였죠. 그래서 록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제2의 고향」이 나오게 되었죠. 1981년에 나온 이 앨범은 제가 지금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앨범입니다. 내 음악을 한다는 기쁨이 담겨 있음은 물론이고, 변화의 동기를 찾았다는 점에서도 그렇습니다』

5분 만에 완성한 「아파트」

─「제2의 고향」이나 「아파트」가 전한 록의 울림은 대단했습니다. 한 번 들어도 기억에 남을 만큼 강한 흡수력을 발휘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곡들이 나왔는지 궁금합니다.

『「아파트」는 5분 만에 완성했어요. 별 어려움 없이 곡을 만들었습니다. 「제2의 고향」은 한 달 동안 지방공연을 다녀온 뒤 한남대교를 건너오게 됐을 때, 남산의 야경을 보면서 쓴 곡입니다. 「이게 고향이구나, 왜 이렇게 서울이 따뜻한 거야」 하는 생각이 들었죠』

─당시 곡은 어떻게 썼나요. 쉽게 술술 써낸 것 같은데요.

『창작하는 사람의 공통점이라고 생각하는데, 항상 메모하는 자세가 중요해요. 잠을 자다가도 꿈을 꾸다가도 멜로디가 떠오르면 일어나 메모를 하고 나중에 붙잡고 늘어지죠. 그 무렵의 곡들은 다 그렇게 해서 썼어요. 지금도 골프를 치다가 곡의 테마가 떠오르면 뒤에서 기다리는 사람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고 돌아서서 메모를 합니다. 그땐 정말 음악적 욕심이 대단했어요. 미국에 건너가서 버클리音大의 「和聲樂(화성악)」 교재를 구해서 록·펑키·재즈 등 여러 음악을 연구했습니다』

─윤수일 음악이 어땠기에 그토록 우리 대중의 사랑을 만끽한 것일까요.

『제가 경쾌한 리듬과 외로움의 정서를 잘 섞어 냈다는 말을 했는데, 바로 그것인 것 같습니다. 데뷔 때나, 1980년대 록을 추구했을 때나 제 곡의 겉은 서구 음악이었지만 내면에 흐르는 멜로디와 곡조는 지극히 한국적이었다고 봐요.

근래의 전문적인 용어로 한다면 「퓨전」이라고 할 수 있고, 음식으로 비유한다면 「김치 햄버거」였다고 할까요. 피는 절대로 못 속이죠. 굳이 나누자면 서양의 피가 「리듬」과 「비트」로 표현되었고, 어머니의 피는 「멜로디」로 나타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두 음악의 강점이 잘 섞인 新가요가 될 수 있었겠지요』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은 「아파트」의 경우 1982년에 발표한 앨범에 수록되어 있지만 정작 대중적인 히트가 난 것은 그로부터 한참 지난 1984년경이었습니다. 어떻게 해서 그런 시차가 있는 거죠.

『제 음악 인생의 중대 위기였습니다. 「아파트」를 만들기 전인 1981년 초반에 MBC TV 쇼 프로그램에 출연했어요. 여름 내내 밴드와 땀을 흘리며 라이브를 어떻게 할까 준비하고, 선글라스와 표범무늬 가죽옷 등 파격적인 의상을 갖추어서 「제2의 고향」을 녹화했습니다.

잘하려는 욕심에 신입 프로듀서와 의견충돌이 생겨 끝내 다투는 불미스런 사건이 터졌어요. 방송사 출연이 금지됐고, 노래가 전파를 탈 수 없게 돼버렸죠. 노래를 틀 수 없도록 제 모든 LP에 금이 그어졌으니까요. 가수로서는 사형선고나 다름없었습니다. 가수를 포기하느냐, 再도전하느냐의 중대 갈림길에 섰어요. 그래서 사건 후에 나온 「아파트」는 MBC에서 전혀 부르지 못했죠. 곡의 반응이 느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방송금지된 「아파트」

─「아파트」는 노래방 레퍼토리 1위 자리를 내주지 않을 만큼 全 국민의 애창가요로 사랑받고 있습니다. 방송이 안 되는 상황에서 어떻게 곡을 알릴 수 있었던 거죠.

『방송에 못 나가니까 매니저 김성일씨와 함께 전국을 순회하면서 음악다방의 DJ들에게 음반을 홍보했어요. 다리품을 판 거죠. 동시에 각 대학의 학생회를 통해 응원가로 채택할 수 있도록 악보와 테이프를 만들어 배포하기도 했죠. 그래서 연세大·고려大의 응원가가 될 수 있었습니다. 결국 부산의 DJ들 사이에서, 또 대학의 응원가로 인기가 폭발했고 그 결과 팬들의 신청이 쇄도하니까 KBS에서 곡을 수용했죠. 「아파트」는 앨범이 나오고 20개월이 흐른 1984년 2월에 5週 동안 「가요 톱10」 1위를 차지했습니다』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중요한 「모멘트」 셋 정도를 꼽아 달라고 하면 무엇을 들겠습니까. 지금 말한 사건도 거기에 들어가겠는데요.

『그래요. 방송금지를 당해 여차했으면 음악계를 떠나야만 했을 때 「아파트」의 커다란 호응으로 다시 기운을 모을 수 있었어요. 잊을 수 없는 순간이죠. 그 전에 가방 하나 들고 무작정 상경한 때도 중요한 사건으로 꼽고 싶습니다. 밑바닥 생활을 뻔히 알면서도 괘념치 않고 과감하게 결단을 했으니까요.

세 번째 모멘트는 아까도 말했지만 근래 사업을 정리했을 때입니다. 묘하게도 한강에 뛰어든 사람이 많았던 시점이었어요. 강화의 스튜디오에 갈 때 귀양 가는 참담한 심정이었습니다』

─음악적으로도 어려운 때가 있었을 텐데.

『1980년대 초·중반 록음악에 집중해서 「아파트」, 「아름다워」, 「환상의 섬」을 연달아 히트시켰지요. 그런데 「환상의 섬」을 발표한 1985년에 어머니와 의부가 다 돌아가셨어요. 한동안 침체기를 맞았지요. 다음 앨범은 조금 느린 곡인 「도시의 천사」로 가는 것이 맞지 않을까 해서 애초 타이틀곡으로 내정했지만, 음악성에 중점을 두자는 판단하에 과감하게 빠른 곡인 「황홀한 고백」으로 바꿨어요. 결과는 대성공이었죠』

「아름다워」, 「환상의 섬」 등 사랑스러워

─지금까지 발표한 21장의 앨범 가운데 가장 맘에 드는 작품은 뭔가요. 1981년 앨범인 「제2의 고향」이 가장 소중하다고 했는데, 어떤 곡이 가장 맘에 듭니까.

『역시 「제2의 고향」 앨범이 가장 맘에 들고, 「아름다워」가 수록된 1984년 앨범도 자랑스러운 앨범입니다. 故 김명곤씨의 편곡이 돋보이죠. 세련된 사운드였다고 봅니다. 「아름다워」는 「아파트」에 이어 그해 다시 한 번 「가요 톱10」에서 5週 연속 1위에 올랐어요. 단일 곡으로는 「환상의 섬」을 꼽겠습니다. 분위기가 잘 정제된 곡이라서 지금 들어도 괜찮은 것 같습니다』

─자신의 음악에 영향을 준 음악인은 누군가요.

『너무 많죠.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의 꿈은 가수가 아니라 기타리스트였어요. 그래서 「기타의 神(신)」으로 불리는 에릭 클랩튼을 제일 좋아했죠. 딥 퍼플, 비틀스, 이글스 음악도 열렬히 청취하고 흉내를 냈죠. 톰 존스도 빼놓을 수 없어요. 연주에 중점을 두다가 간혹 이 사람 노래를 부르면 반응이 좋더라고요. 밴드에서 리드싱어로 자리를 굳히는 데 도움을 받은 거죠. 그때 들었던 팝 음악도 그렇고, 우리 가요도 그렇지만 감동하면 눈물이 났습니다. 그런데 요즘의 팝과 최신 가요를 듣고는 눈물이 안 나요』

─후배 가수들에게 딱 한마디 충고를 한다면.

『실망스러운 점이 많아요. 글쎄요, 후배 가수들이 분명한 자기 색깔을 가졌으면 합니다. 그것이 없으면 굳이 힘들게 음악할 이유가 없죠. 한마디 더 한다면 노래는 테크닉이 아니에요. 진실하게 불러야 한다는 점을 주문하고 싶어요. 요즘 인기 있는 가요 상당수가 한 번은 듣겠는데 두 번은 듣기가 싫어요』

아들이 곧 로커로 데뷔

그는 『나의 음악을 이해하고 객관적으로 재단하는 음악평론가를 만나 유난히 편하게 이야기를 했다』고 소감을 밝혔다. 던지는 모든 질문에 소상하게 답하고 의외로 소탈하게 털어놓은 그였지만, 딱 하나 경계의 울타리를 치는 부분이 있었다. 가족과 사생활에 관한 대목이었다.

자녀는 스물여섯 살의 아들과 딸이 하나 있다. 『아들이 곧 아버지의 代를 이어 로커로 데뷔한다』는 소식을 전할 뿐 구체적인 가족의 신상은 공개하지 않았다. 데뷔하고 2년 뒤에 팬으로 만나 결혼한 아내 김선아씨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자신의 음악, 그리고 음악 인생 이야기에 집중했다. 마땅한 정보를 얻지 못해 안타까운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었다.

─워낙 준수하고 섹시한 외모에다 달콤한 목소리 때문에 여성 팬들이 많았던 걸로 압니다. 유혹도 많았을 거예요. 여성 관련 스캔들은 제가 알기로는 전혀 없습니다.

『여성 팬들은 많았죠. 하지만 집사람을 일찍 만나 음악에만 집중할 수 있었어요. 당연히 여자문제를 절제할 수 있었고…. 팬은 팬이죠. 그 점에 그쳐야 합니다. 결코 의식적으로 관리했다고는 할 수 없어요. 어쩌면 그래 왔기 때문에 지금도 팬들이, 그것도 행동하는 팬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 라디오 출연 때도 팬들과 함께 출연했지만, 지난번 KBS의 「콘서트 7080」 녹화 때도 전국에서 100명의 팬이 찾아 주셨어요. 고마운 일이죠』

─세월이 많이 흘렀습니다. 지금은 아버지에 대해 어떤 심정인지 궁금하네요. 윤수일씨를 보면 아버지도 상당한 미남이었을 것 같습니다.

『워낙 어렸기 때문에 판단할 수는 없었지만, 아버지는 어머니를 임신시키고 분명 도망치듯 나 몰라라 하고 미국에 간 것이겠죠. 당시 많은 미군들이 그랬으니까요. 아버지에 대한 분노 속에서 소년기·청소년기를 보낸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가끔 아버지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기도 하네요. 단순한 호기심에서 그렇습니다』

─아들의 앨범이 곧 나온다고 했는데, 아버지로서 듣기에 어떤가요.

『음악적으로 나보다 나은 것 같습니다. 제 뒤를 이어 음악을 한다는 것은 뿌듯한 일이죠. 사실 이번 제 앨범도 아들이 프로듀서를 맡아 수고해 주었습니다. 아들에 대해 지금 신상 공개를 하지 않는 것은, 앨범을 발표하고 그때 정당한 심판을 받으라는 거죠. 제가 먼저 이러쿵저러쿵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외로운 강을 건넌다』

그는 新譜에 수록된 「인생의 강」의 노랫말에 주목해 달라고 했다.

「사랑이라는 다리를 놓아/인생의 강 건너요/그대와 내가 다리를 놓아/외로운 강 건너요/때로는 웃으며/때로는 울면서/살아가야 할 많은 날들…」

이 곡에 대해 윤수일은 이렇게 말한다.

『인생이라는 시간도 강입니다. 음악도 최선을 다했고, 사업도 해볼 만큼 해봤지만 혼자서 되는 일은 하나도 없더라고요. 그래서 가족·연인·친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들과의 관계에서 사랑하는 마음만이 외로운 강을 건널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는 비록 외로움에 시달렸지만 그걸 음악의 동력으로 전환했다. 외로움에 쓰러지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여 주변 세계와 화해했다.

우리 음악계에서 「고독」이라는 정서를 윤수일만큼 진지하게 묘사해 낸 가수는 없을 것이다. 1970년대와 1980년대의 음악 팬들이 윤수일 음악에 감동한 이유는 그의 외로움에 공감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