孫世一
1935년 釜山 출생. 서울大 문리과대학 정치학과 졸업 후 美國 인디애나대학 저널리즘 스쿨, 日本 東京大 법학부 대학원에서 修學. 思想界, 新東亞 편집장과 東亞日報 논설위원을 거쳐 1980년 「서울의 봄」 때에 政界에 투신해, 11·14·15代 국회의원을 역임하는 동안 民韓黨 外交安保特委長, 서울시지부장, 民推協 상임운영위원, 民主黨 통일국제위원장, 國會通商産業委員長, 國民會議 정책위 의장, 원내총무, 전당대회 의장, 韓日議員聯盟 부회장 등을 역임했다. 주요 논문으로 「大韓民國臨時政府의 政治指導體系」, 「韓國戰爭勃發背景 연구」, 「金九의 民族主義」 등이 있고, 著書로 「李承晩과 金九」, 「人權과 民族主義」, 「韓國論爭史(編)」, 譯書로 「트루먼 回顧錄(上, 下)」, 「現代政治의 다섯 가지 思想」 등이 있다.
1935년 釜山 출생. 서울大 문리과대학 정치학과 졸업 후 美國 인디애나대학 저널리즘 스쿨, 日本 東京大 법학부 대학원에서 修學. 思想界, 新東亞 편집장과 東亞日報 논설위원을 거쳐 1980년 「서울의 봄」 때에 政界에 투신해, 11·14·15代 국회의원을 역임하는 동안 民韓黨 外交安保特委長, 서울시지부장, 民推協 상임운영위원, 民主黨 통일국제위원장, 國會通商産業委員長, 國民會議 정책위 의장, 원내총무, 전당대회 의장, 韓日議員聯盟 부회장 등을 역임했다. 주요 논문으로 「大韓民國臨時政府의 政治指導體系」, 「韓國戰爭勃發背景 연구」, 「金九의 民族主義」 등이 있고, 著書로 「李承晩과 金九」, 「人權과 民族主義」, 「韓國論爭史(編)」, 譯書로 「트루먼 回顧錄(上, 下)」, 「現代政治의 다섯 가지 思想」 등이 있다.
1931년 1월 초순의 어느 날 저녁에 임시정부청사 겸 교민단 사무실로 쓰고 있는 집으로 낯선 동포 한 사람이 찾아왔다. 日本에서 건너온 李奉昌이었다.
金九는 李奉昌이 일본 천황을 죽일 수 있다는 말을 듣고 곧 決行할 준비를 했다.
萬寶山事件에 이어 滿洲事變이 발발하자 臨時政府는 特務工作을 벌이기로 하고 그 임무를 金九에게 일임했다.
資金은 하와이의 愛國團 간부들이 보내 주었다. 金九는 중국군 병공창의 책임장교 金弘壹과 중국 군인을 통하여 수류탄 두 개를 입수했다.
韓人愛國團 제1호 단원이 된 李奉昌은 日本으로 건너가서 1932년 1월8일에 陸軍始觀兵式에 참석하고 돌아가는 日本天皇에게 수류탄을 던졌다.
거사가 있던 이틀 뒤에 李承晩은 미국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美國의 한 방송국에 가서 日本의 滿洲侵略을 규탄하는 라디오 演說을 했다.
(1) 밤중에 「假政府」 찾아온 「일본영감」
「광기의 1930년대」는 아시아에서는 滿洲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만주를 이른바 특수권익지대로 설정하고 있던 제국주의 일본은 만주 군벌의 거두 張作霖(장작림) 정권을 내세워 만주를 중국으로부터 분리한다는 방침을 추진해 왔었는데, 關東軍(관동군)은 장작림마저 추방하고 만주를 일본의 괴뢰국가로 독립시킨다는 강경방침을 굳히고 1928년 7월에 장작림이 탄 열차를 폭파하여 그를 죽여 버렸다. 그러나 이 사건은 장작림의 아들 張學良(장학량)으로 하여금 그동안 장작림 정권과 대립관계에 있던 중국 국민당과 결합하게 했다. 장학량은 국민정부의 東三省保安司令官이 되어 장작림 정권의 5색기를 국민정부의 청천백일기로 바꾸었다. 그리고 국민정부의 외교 기본정책인 외국이권의 회수와 불평등조약의 철폐를 표방했다.
1930년 5월30일에 間島에서 발생한 대규모의 폭동사건은 관동군을 더욱 자극했다. 이 폭동은 중국공산당 연변당부 주관 아래 이미 중국공산당에 가입해 있던 한인공산주의자들이 일으킨 것이었다.1)
『勞動하면서 獨立運動할 수 없습니까』
사위스러운 1931년 1월 초순의 어느날 저녁이었다. 임시정부청사 겸 교민단 사무실로 쓰고 있는 프랑스조계 보경리 4호의 으슥한 골목 안 집에 서른 살쯤 되어 보이는 한 낯선 동포가 찾아왔다. 그는 일본말 섞인 한국말을 하고 있었다. 아래층에 있던 몇몇 청년들은 그를 일본의 밀정이 아닌가 의심하고 문 밖으로 내어 쫓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물러가지 않으려고 우겨 양쪽 목소리가 높아졌다. 2층에 있던 金九가 소란스러운 소리를 듣고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그 낯선 동포는 말했다.
『저는 일본에서 노동을 하다가 독립운동을 하고 싶어 상해에 假政府(가정부)가 있다기에 며칠 전에 상해로 왔습니다. 여기저기 다니다가 전차표 검사원이 가정부의 위치를 가르쳐 주어 찾아왔습니다』
「가정부」란 일본인들이 임시정부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낯선 동포는 자기는 서울 용산 태생이며 이름은 李奉昌(이봉창)이라고 했다. 金九는 이봉창에게 상해에 독립정부가 있기는하나 아직 독립운동자들을 먹이고 입힐 역량이 없으므로 독립운동을 하려면 가지고 있는 돈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돈이 있느냐고 물었다. 이봉창은 대답했다.
『지금 가지고 있는 돈은 여비하고 남은 것이 10여 원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생활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있소?』
『그런 것은 걱정 없습니다. 저는 철공장에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노동을 하면서는 독립운동을 할 수 없습니까?』
金九는 이 말에는 대답하지 않은 채 오늘은 늦었으니까 근처 여관에 가서 자고 내일 다시 이야기하자고 말하고, 민단 사무원 金東宇(김동우)에게 여관을 잡아 주라고 지시했다. 金九는 그의 언행이 일본인과 비슷하여 특별히 조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2)
이봉창의 「신문조서」에는 그가 임시정부를 처음 방문했을 때의 상황이 좀 다르게 서술되어 있다. 이봉창이 1931년 1월 초에 민단사무소를 찾아갔을 때에 그를 맞이한 사람은 민단 사무원 金東浩[金東宇의 오기]였다. 이봉창은 김동호에게 자신의 경력을 말하고 영국전차회사에 취직할 수 있도록 주선해 달라고 부탁했다. 김동호는 영어와 중국어를 하지 못하면 채용해 주지 않는다면서 먼저 두 나라 말을 배워야 한다고 했다. 이봉창은 그러고 싶었으나 그럴 만한 돈이 없었다. 결국 일본에서처럼 다시 일본인을 상대로 일자리를 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3) 이봉창의 이러한 진술내용은 아마 여관에서 자고 난 이튿날의 일이었을 것이다.
金九는 이봉창에게 자신을 白貞善이라고 소개했다. 이봉창은 金九에게도 영국전차회사에 취직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부탁해 보았으나 金九의 대답도 김동호와 마찬가지였다.4) 이봉창은 임시정부와 교민단의 주의·강령·목적이 어떤 것인지 물었다. 그것이 자기가 희망하고 있는 한국의 독립운동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단원으로 가입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물었던 것이다.
그러나 金九는 교민단은 상해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의 직업소개와 상호친목을 도모하는 것을 사업의 목적으로 하고 있고, 매월 각자 1원 정도의 회비를 모아 부인회·어린이회와 그밖의 한국인이 개최하는 여러 가지 행사를 후원하고 있다는 정도밖에 말해 주지 않았다. 이 말에 대해 이봉창은 金九가 자신이 어떤 인물인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어물어물 둘러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5)
며칠 뒤에 이봉창이 술과 국수를 사 가지고 와서 민단 식당에서 몇몇 직원들과 술자리가 벌어졌다. 술이 거나해지자 이봉창이 목소리를 높여 동지들에게 물었다.
『일본 천황을 죽이기는 아주 쉬운 일인데, 왜 독립운동자들이 이 일을 실행하지 아니합니까?』
앉아 있던 사람들은 냉소했다.
『그렇게 쉬운 일이라면 왜 여태까지 못 죽였겠소』
그러자 이봉창이 말했다.
『내가 연전에 동경 있을 때에 하루는 일본 천황이 하야마[葉山 : 일본 가나가와(神奈川)현의 해수욕장으로 유명한 별장지. 천황의 별장이 있다]에 간다기에 구경하러 가서 보았는데, 천황이 바로 내 앞으로 지나가는 것을 보고 〈이때에 내게 총이나 폭탄이 있으면 어찌할까〉 하는 생각이 얼른 들었습니다』6)
2층에서 이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金九는 이봉창이 비범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金九는 그날 저녁에 이봉창이 머무는 여관을 찾아가서 속마음을 털어놓고 솔직한 대화를 나누었다. 과연 이봉창은 의기남아로서 살신성인할 큰 결심을 가슴에 품고 상해로 건너와서 임시정부를 찾아온 것이었다.7)
「新日本人」으로 살려고 노력했으나
1901년 8월10일에 지금의 서울 용산구 효창동에서 태어난 이봉창은 집안 형편이 어려워서 보통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돈벌이에 나서야 했다. 처음에는 일본인 상점의 점원으로 일하다가, 용산역 連結手로 취직했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도록 승진이 되지 않고 월급이나 상여금 지급에서 일본인과 심한 차별을 받았다. 결국 그는 친구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사직서를 내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1925년 11월 하순에 오사카(大阪)에 도착한 이봉창은 국내에 있을 때보다 더 나은 일자리를 찾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으나,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쉽게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을 일본인과 똑같은 「신일본인」이라고 생각했으나 일본인들은 그를 조선인으로 차별했다. 그러나 그는 이내 취직을 하게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인과 동등한 대우를 받으면서 어려움 없이 생활하게 되었다.
「신일본인」으로 살아가던 이봉창의 삶과 의식을 바꾸어 놓은 것은 스스로 〈완전한 일본인〉이 되기 위해서 천황 즉위식을 보러 갔다가 구금된 사건이었다. 이봉창은 1928년 11월에 교토(京都)에서 히로히토(裕仁)의 즉위식을 거행한다는 소식을 듣고 「신일본인」으로 살고자 하는 자신이 천황의 얼굴도 모르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하고 친구들과 함께 즉위식을 구경하기 위해 교토로 갔다.
그러나 고향친구로부터 온 국한문혼용의 편지가 주머니 속에 들어 있었던 것이 문제가 되어 천황은 구경도 하지 못한 채 경찰서 유치장에 11일 동안이나 구금되었다가 풀려났다.8) 이 사건을 계기로 그는 비로소 자신이 조선인이라는 것을 의식하게 되었고 「신일본인」으로 살아가고자 한 것을 반성하게 되었다.
이봉창은 누군가 자신을 이끌어 줄 지도자만 만난다면 조선독립을 위해서 일할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일본인 행색을 하면서 평범한 노동자로 살아가는 그에게 그런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결국 그는 생각을 고쳐먹고 다시 일본인으로 살아가는 길을 택했다.
그는 1929년 2월부터 오사카의 쓰루하시(鶴橋)에 있는 비누도매상에 일본인이라고 속이고 취직했다. 그는 기노시타 쇼오조(木下昌藏)라는 일본 이름을 사용하면서 조선인과의 교제를 완전히 끊었다. 〈사랑하는 조카딸의 집조차 출입을 하지 않고 지냈다〉9)고 했을 만큼 철저하게 일본사람으로 행세했다.
그러나 자신의 그러한 행위가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깨닫게 되었다. 비누가게에 물건을 사러 온 조선인이 일본 말이 서툴러 주인한테서 곤욕을 당하는 것을 보면서도 그것을 그냥 지켜보았던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는 〈조선인이 조선인으로 행세하지 않는 것은 거짓이다〉라고 후회하게 되었다.10)
이봉창은 1929년 10월에 도쿄로 가서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일을 하다가 1930년 11월에 다시 오사카로 돌아왔으나,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다. 어느 친구로부터 상해의 영국전차회사에서 조선인을 우대하여 채용한다는 말을 들었다. 마침내 그는 2년 동안 일본인으로 속이고 살던 고통을 떨쳐 버리고 〈이제부터는 본명인 이봉창으로, 차별이나 압박을 받아도 두려워하지 않는 조선인으로 생활할 각오〉11)를 하고 상해로 갔다.
이봉창은 1930년 12월6일에 쓰이코(築港)에서 일본인 옷차림을 하고, 「기노시타 쇼오조」라는 이름으로 여객선에 올라 나흘 뒤인 12월10일에 상해에 도착했다. 이봉창은 배 안에서 알게 된 일본인들과 여관에서 2, 3일 묵은 뒤에 중국인 여인숙으로 옮겨서 일자리를 찾아다녔다. 그러나 한 달이 되도록 일자리를 구할 수 없어서 상해로 올 때에 가지고 있던 18원가량의 돈도 다 떨어졌다. 할 수 없이 그는 어느 일본인 양복점 주인이 운영하는 무료 숙박소에서 잠을 자면서 임시정부를 찾아가 보기로 했다. 임시정부를 찾아가면 취직을 도와줄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12)
『영원한 快樂 도모하러 上海에 왔습니다』
이봉창은 金九에게 다음과 같이 자신의 포부를 털어놓았다.
『제 나이 서른한 살입니다. 앞으로 다시 서른한 살을 더 산다 하여도 과거 반생 동안 방랑생활에서 맛본 것에 비한다면 늙은 생활이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31년 동안 육신으로는 인생쾌락은 대강 맛보았으니, 이제는 영원한 쾌락을 도모하기 위해 우리 독립사업에 헌신할 목적으로 상해로 왔습니다』
이봉창의 이 말을 듣고 金九는 〈이씨의 위대한 인생관을 보고 감동의 눈물이 벅차오름을 금할 길이 없었다〉13)고 적고 있다.
이봉창은 겸손한 태도로 나라 일에 몸 바칠 수 있도록 지도해 달라고 金九에게 청했다. 金九는 쾌히 승낙했다.
『1년 이내에 군의 행동에 대한 준비를 하겠소. 그런데 지금 우리 정부의 형편이 어려워서 군이 살아갈 방도를 마련해 주기가 어렵고, 군의 장래 행동을 위해서는 우리 기관 가까이 있는 것이 불리하니 어찌하면 좋겠소』
『그러시다면 더욱 좋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일본어를 익혔으므로 일본에서 지낼 때에 일본사람의 양자가 되어 기노시타 쇼오조로 행세했습니다. 이번에 상해로 오는 도중에도 이봉창이라는 본래 이름을 쓰지 않았으니까 계속 일본인 행세를 하겠습니다. 일을 준비하실 동안은 제가 철공일을 할 줄 아니 일본인의 철공장에 취직하겠습니다. 그러면 봉급도 많이 받을 수 있습니다』
金九는 그 말에 찬성하고, 특별히 다음과 같이 당부했다.
『우리 기관이나 우리 사람들과의 교제를 빈번히 하지 말고 순전히 일본인으로 행세하고, 한 달에 한 번씩 밤중에만 찾아오시오』
그리고는 일본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虹口로 가서 일본인 행세를 하여 세간의 이목을 피하도록 했다.14) 이봉창은 일본인이 경영하는 YMCA에서 소개해 준 明華[또는 明善]철공소에 대장장이로 취직했다. 처음에는 용돈 정도의 돈을 받았으나 두 달이 지나면서 하루 2원의 임금을 받았다.15)
李奉昌 말 듣고 金弘壹 찾아가
金九가 이봉창을 다시 만난 것은 그로부터 두어 달 지난 3월이었다. 일본인 철공소에 취직하여 어느 정도 생활이 안정된 이봉창이 다시 임시정부를 찾아온 것이었다. 이때에 金九는 이봉창에게 일본의 사정을 두루 물었다. 일본에 거주하는 한국인의 대우와 생활상태 등을 묻고, 東京에서 얼마 동안 살았는지를 물었다. 그러고 나서 천황이 나들이할 때에 경계가 얼마나 엄중한지, 무엇인가 세상을 놀라게 할 만한 사건을 일으킬 수 있겠는지 등을 캐물었다. 그리고 한번 더 일본에 갈 일은 없느냐고 물었다.
이봉창이 그 까닭을 묻자 金九는 진담 반 농담 반의 말투로, 폭탄을 들고 일본으로 건너가서 큰일을 한번 해 볼 생각이 없느냐고 말했다. 이봉창은 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하지 못할 것도 없다고 대답했다. 이봉창은 불현듯 자신이 교토의 경찰서에 검속되었던 일이 떠올랐다. 그리고 자신이 일본인으로 속이고 살았으나 만족하지 못해 떳떳하게 한국인으로 살기 위해서 상해로 왔는데, 이곳에서도 뜻대로 살지 못하고 다시 일본인으로 속이고 살 수밖에 없게 된 자신의 처지를 말했다. 그러면서 金九에게 폭탄이든 무엇이든 적당한 무기만 있으면 일본으로 가서 「사건」을 일으켜도 좋다고 했다.16)
천황을 죽일 수 있다는 이봉창의 말에 金九는 흥분했다. 그는 곧바로 金弘壹(김홍일)을 찾아갔다. 중국군에 근무하던 김홍일은 이때에 상해 병공창 주임으로서 중국군의 무기를 관리하는 책임장교였다. 두 사람은 설레는 가슴을 억누르며 장시간 진지하게 대책을 논의했다. 金九는 김홍일에게 다음과 같은 계획을 말했다. 관병식에 참석하기 위해 천황이 마차를 타고 니주우바시(二重橋)를 거쳐 큰길로 나설 때에 이봉창은 그 맞은편 길가에서 군중과 함께 일본 천황에게 공손히 절을 하는 체하다가 번개처럼 날쌔게 폭발물을 던진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관례로 보아서 천황이 타고 가는 마차와 군중이 도열한 곳과의 거리는 적어도 100m 이상은 될 것이었다. 김홍일은 그 점에 대하여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100m 이상이나 떨어져 있는 표적물을 보통의 수류탄으로 명중시키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김홍일은 약간 구식이기는 하더라도 麻尾(마미)수류탄을 사용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마미수류탄은 보통 수류탄보다 폭발력이 약한 것이 단점이었으나 무게가 가벼워서 멀리 던질 수 있는 데다가 불발탄이 없고 휴대하기가 간편한 이점이 있었다.17)
同志들은 李奉昌을 못마땅히 여겨
이봉창은 4월 말쯤에 金九를 다시 찾아왔다. 이때에 金九는 이봉창에게 정말로 일본 천황에게 폭탄을 던질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金九는 전번에 만났을 때에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묻던 것과는 달리 진지하고 엄숙했다. 이봉창도 金九와 같은 어조와 태도로 자신이 일본에 오래 살았고 도쿄의 지리도 잘 알기 때문에 폭탄만 있으면 천황이 지나갈 때에 던지는 것은 쉬운 일이라고 대답했다.
金九는 한국 독립을 위해서 일본 천황을 죽이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이봉창에게 설명했다. 이때에 이봉창은 교토의 천황 즉위식에 갔다가 검속되었던 일, 이를 계기로 자신의 사상경향이 현저하게 바뀐 일, 그리고 독립운동을 할 의욕이 생겼다는 이야기도 했다.18) 이봉창은 감옥에서 쓴 「上申書」(수기)에서 金九가 자신의 사상변화에 미친 영향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나의 사정도 이야기하고 일본의 사정도 들려주고 또 사상 문제에 대해 의견을 나누는 가운데 白(곧 金九)이 권하는 사상에 대해 논의하게 되었고, 나의 교토에서의 검속에 대한 원한도 회상하는 등 하여 점점 사상에 감염되어 갔는데…〉19)
이처럼 金九와의 만남은 이봉창의 운명을 바꾸어 놓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한 달쯤 뒤에 이봉창이 다시 金九를 찾아왔다. 이봉창은 상해에 독립운동단체가 있으면 가입하고 싶다면서 그러한 단체가 있는지, 혹시 임시정부에 참가할 수는 없는지 물었다. 金九는 독립운동단체가 두세 개 있기는 하나 어느 것도 착실하지 못하므로 그런 단체에 가입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으며, 임시정부도 형식적이어서 별로 힘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천황의 목숨을 빼앗겠다는 의지만 굳건하다면 단독으로 실행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러한 단체에 들어가서 거기에 의지할 필요가 없소. 단독으로 실행할 결심이 있으면 내가 후원자가 되어 주겠소』
『폭탄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 폭탄만 구할 수 있으면 일본으로 가서 일을 해보겠습니다』
金九는 폭탄을 구할 수 있다고 자신 있게 장담했고, 이봉창은 폭탄이 입수되면 알려 달라고 말하고 돌아갔다.20) 金九가 비밀 독립운동단체로 韓人愛國團을 조직할 필요성을 느낀 것은 이봉창과의 이러한 대화를 나눈 뒤였던 것 같다.
이봉창은 金九와 약속한 대로 서너 달에 한 번씩 金九와 비밀리에 만났다. 이봉창은 한 번 찾아올 때마다 반드시 술과 고기, 국수 등을 사 가지고 와서 민단 직원들과 어울려 술을 마셨다. 그는 취하면 곧잘 일본 노래를 유창하게 부르며 호방하게 놀았다. 그 때문에 여러 사람으로부터 더욱 더 의심을 받았으나, 이봉창은 그런 것을 개의치 않았다. 어떤 날은 일본인 행색으로 하오리에 게다를 신고 왔다가 정부 문을 지키는 중국인 경비원에게 쫓겨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일본영감」이라고 부르며 웃었다.
金九는 李東寧과 다른 국무원들로부터 한국인인지 일본인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인물을 정부 문 안으로 출입시켜 직무에 소홀하다는 꾸지람도 들었다. 金九는 조사 연구하는 사건이 있다고만 답변했다. 그러자 크게 꾸짖지는 못했으나, 여러 동지들이 불쾌하게 생각하기는 마찬가지였다.21)
李奉昌은 爆彈의 성능 실험 제의
이봉창은 8월 말쯤에 다니던 철공소를 그만두었다. 임금 지급이 좋지 않고, 일에 싫증이 나서 성실하게 근무하지 않자 주인이 그만두라고 했다. 이봉창은 전에 묵었던 무료 숙박소에서 열흘가량 있다가 다시 일본인이 경영하는 축음기 상점 榮昌公司에 점원으로 취직했다. 이봉창은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 9월 중순 무렵에 민단사무소로 金九를 찾아왔다.
이봉창은 金九에게 폭탄을 입수할 가망이 있는지 없는지 확실한 대답을 듣고 싶다고 말했다. 그로서는 폭탄입수 여부에 따라 자신의 앞날의 계획을 세워야 했기 때문이었다. 金九는 폭탄은 틀림없이 입수할 수 있고, 이봉창이 일본에 가는 여비도 마련할 수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리고는 오히려 이봉창이 결행할 결심이 섰는지를 되물었다. 그러자 이봉창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5년이나 10년을 더 사는 것도 흥미가 없습니다. 오히려 나는 빨리 죽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으므로 폭탄이 손에 들어온다면 반드시 책임지고 결행하겠습니다. 저는 어떤 일이든 중간에 흐지부지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폭탄이 틀림없는 것인지, 그리고 그 효력이 어떠한지를 확인한 다음 일본에 갈 생각을 하고 있으니 폭탄이 입수되면 곧바로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언제든지 오겠습니다』22)
이봉창이 폭탄의 성능을 실험할 것을 제의한 것은 천황을 반드시 처치하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金九는 폭탄은 자기의 경험으로 보아 6~7칸[13~15m] 거리 안에 있는 물건을 모두 파괴할 수 있는 위력이 있으므로 시험하지 않아도 문제가 없으니까 믿으라고 말하고, 폭탄과 여비가 준비되면 연락하겠다고 했다. 이봉창은 가능하면 연내에 입수되었으면 좋겠으나, 그것이 힘들면 다음해 3, 4월로 연기해도 좋다고 말했다.
이봉창의 이러한 말은 그 나름대로의 계산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동안 金九와 접촉하면서 金九의 형편이 매우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거사 자금이라야 기껏 여비 정도밖에는 마련할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한 그는 金九가 주는 돈은 일본까지 가는 교통비로 쓰고 일본에 가서는 적당한 일자리를 구해서 생활하면서 천황이 나들이하는 기회를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12월은 일본이 바쁜 때라서 바로 일자리를 구할 수 있을 것이므로 연내로 들어가는 것이 좋겠으나 1, 2월은 한산한 시기로서 쉽게 일자리를 구할 수 없을 것 같아, 연내에 준비가 안 되면 일자리가 많이 나는 3, 4월로 연기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金九는 모두 연내에 된다고 확답했다. 이봉창은 그 뒤에 민단사무소에 여러 차례 놀러 왔으나 11월 하순까지 한 번도 金九를 만나지 못했다.23)
(2) 萬寶山事件과 韓人愛國團
金九가 이봉창을 만나면서 일본 천황 폭살계획을 준비하고 있을 무렵에 뜻밖의 사태가 발생했다. 그것은 만주와 국내는 물론 상해의 동포사회에도 큰 영향을 미친 이른바 萬寶山事件이었다.
과장보도 되게 關東軍이 사주
1931년 7월2일에 中國 吉林省 長春縣의 萬寶山 지역에서 한인 농민들과 중국 농민들 사이에 농수로 건설문제를 두고 발생한 충돌사건은, 그 규모는 사소한 것이었으나 일본인들의 모략과 관련된 것이었던 만큼, 크나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일본인들은 중국인 ?永德(학영덕)을 매수하여 일본 자금으로 長農稻田公司를 설립하게 하고 그를 지배인 자리에 앉혔다. 학영덕은 만보산 지역의 미개간지 약 200ha를 지주들과 10년 기한으로 조차 계약을 맺은 다음 장춘현 정부의 개간 승인을 얻기도 전에 이 땅을 한인 농민 李昇薰(이승훈) 등에게 10년간 조차하기로 계약을 맺었다. 이승훈은 한인 농민 180여 명을 그곳으로 불러들여 관개수로공사를 시작했다.
그런데 이 수로개척과 제방축조의 피해를 우려한 중국 농민들이 반대운동을 일으키고 장춘현 당국에 진정하여 공사를 강제로 중지시켰다. 그러나 한인 농민들은 일본영사관 경찰의 지원을 받아 중국 농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수로공사를 강행하여, 6월 말에 완공시켰다. 감정이 극도로 격화된 중국 농민 약 400명이 7월2일에 관개수로를 파괴했다. 그러자 한인 농민 및 일본영사관 경찰과 중국인 지주 및 주민 사이에 충돌이 일어났다.24) 그러나 이 충돌로 인명피해는 없었다.25)
만주점령을 계획하고 있던 關東軍에게 이 사건은 여간 호재가 아니었다. 관동군 당국은 長春 일본영사관에 지시하여 이 사건으로 많은 한인 농민들이 피해를 입은 것처럼 국내에 보도되게 했다. 그리하여 국내 몇몇 언론들은 정확한 사실 확인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과장되게 보도했고, 그 때문에 당장 화교배척운동이 광범위하게 일어났다.
화교배척운동은 7월2일 당일로 인천에서 시작하여 서울·원산·평양 등 각지에서 잇따랐다. 평양에서는 대낮에 화교상점과 가옥을 파괴하고 구타 학살하는 사건이 며칠간 계속되었다. 조선총독부는 이러한 사태를 방관하면서 화교들을 서둘러 귀국시켰다. 본국으로 돌아간 화교들은 자신들의 피해상황을 중국인들에게 호소했고, 이에 따라 이번에는 만주에 있는 한인 동포들에 대한 중국인들의 보복이 자행되었다.
사태가 점점 악화되자 민족 지도자들과 사회단체 등이 발벗고 사태수습에 나섰다. 이들은 화교습격의 중지를 호소하면서 피란민 구제와 화교들의 생활안전 회복, 만보산 사건의 진상조사와 재만동포들의 보호를 위한 대책에 부심했다. 「東亞日報」와 「朝鮮日報」에서는 사건의 진상을 자세히 밝히고 흥분한 국민들을 진정시키는 데 앞장섰다.26)
柳條溝에서 鐵道 폭파하여 滿洲事變 일으켜
만보산 사건이 발생한 지 두 달 뒤인 9월18일 밤에 관동군의 奉天(瀋陽)수비대는 柳條溝에서 일본의 滿鐵(남만주철도회사) 선로를 폭파했다. 유조구는 蔣介石(장개석)과 제휴하고 있던 張學良의 근거지인 北大營 남쪽에 위치해 있었다. 그것은 미리 계획된 관동군의 모략에 따른 것이었다. 관동군은 그 폭파가 현지 중국군의 공격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그것을 구실삼아 전쟁을 도발했다. 이른바 滿洲事變〔9·18戰爭〕이었다.
국민당 정부는 9월21일에 국제연맹에 이를 제소하고, 이튿날에는 상해에서 反日대회를 열어 抗日구국회를 결성했다. 미국 정부는 11월29일에 일본 정부에 강력히 항의했고, 국제연맹은 12월에 영국의 리튼(Victor Robert Lytton)을 단장으로 하는 조사위원회를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이무렵에는 관동군은 이미 만주의 중앙부를 점령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관동군은 전쟁을 도발한 지 다섯 달밖에 되지 않아서 만주의 거의 대부분을 장악했다.
金九는 이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1년 전부터 우리 임시정부에서는 운동이 매우 침체한즉, 군사공작을 못 한다면 테러공작이라도 하는 것이 절대필요하게 되었다. 그런데 왜놈이 중국과 한국 두 민족의 감정을 악화시키기 위해 이른바 萬寶山事件을 날조하여 조선과 중국에서 대학살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다. 인천·평양·경성·원산 등 각지에서 조선인 무뢰배들이 일본인의 사주를 받아가지고 중국인을 닥치는 대로 타살하였다. 또한 만주에서 1931년에 9·18전쟁[만주사변]이 일어나 중국이 굴욕적으로 강화했다. 이 전쟁 중에 한인 부랑자들이 왜의 권세를 빌려 중국인에게 극단의 악행을 저질렀기 때문에, 중국인의 무식계급은 물론이고 유식계급 인사들까지도 이따금 민족감정을 말하는 자를 보게 되었다. 사태가 이에 이르니 우리 정부에서는 지극히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27)
만보산 사건과 만주사변으로 상해 동포사회는 아연 긴장했다. 만보산 사건이 발생하자 이동녕을 비롯한 임시정부 국무위원들과 흥사단장 安昌浩 등이 임시정부 사무실에서 회의를 열고 대책을 강구했다. 국민정부에 대해 국내 사태가 오로지 일본의 사주와 선동에 의한 것임을 이해시키고, 외무장 趙素昻(조소앙)의 이름으로 중국신문에 성명서를 발표했다. 임시정부는 7월9일자로 상해한인각단체연합회 명의로 국민정부와 중국의 중요단체 앞으로 「通電」을 발송하여 만주의 한인들을 차별 없이 보호하여 일본인들이 농간을 부릴 기회를 주지 말 것을 촉구했다.28)
國民政府와 中國 중요기관에 「通電」 보내
뒤이어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임시정부는 9월20일에 긴급회의를 열고 우선 중국의 각 기관과 신문사에 한인단체연합회 명의로 일본을 비판하는 「통전」을 보내고 다음날 상해에 있는 각 단체 대표회의를 소집하기로 결의했다. 이튿날 오후 3시에 임시정부 사무실에서 열린 대표회의에는 임시정부를 비롯하여 僑民團, 丙寅義勇隊, 韓國勞兵會, 興士團, 愛國婦人會 등 9개 단체 대표들이 모였다.
金九는 교민단 대표로 회의에 참석했다. 회의에서는 중국을 지원하고 제국주의 일본을 타도하기 위하여 상해한인각단체연합회를 조직하기로 합의하고, 교민단과 연합회의 공동명의로 上海韓僑전체대회를 소집하기로 했다. 또한 회의 결의에 따라 연합회는 국민정부, 국민당 중앙당부, 중국의 각 신문사에 대하여 국제연맹에 의존하지만 말고 對日전쟁을 결행할 것을 촉구하는 「통전」을 발송했다.29)
병인의용대는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극비리에 대원들을 소집하여 그들로 하여금 중국인으로 변장하고 일본총영사관 등 일본 관계 중요기관을 폭파하여 中·日 간의 분규를 확대시킬 것과 각 요소에 비밀 수사반을 잠복시켜 일본탐정을 암살하기로 결의했다.30)
9월25일에 열린 상해한교전체대회에는 300여 명의 동포들이 모였다. 金九의 개회사에 이어 이동녕이 의장이 되어 회의를 진행했다. 일본 만주침략의 배경에 대한 외무장 조소앙의 자세한 보고에 이어 安昌浩, 車利錫, 趙琬九 등의 비분강개한 연설이 있은 다음 6개항의 결의안을 채택했다.
1) 중국 동삼성을 침략하는 일본을 대항할 일, 2) 국내외 동포는 당연히 선언서를 발표하여 한·중 양 민족의 연합전선을 구체적으로 실현케 할 일, 3) 동삼성에 있는 2백만 교포로 하여금 중국 민중과 생사영욕을 같이하여 걸음을 일치케 할 일, 4) 적의 세력하에 있어서 그 침략의 도구와 사냥개가 되는 무리를 소탕할 일, 5) 중국이 일본에 대하여 속히 무력행동을 취하는데 노력할 일, 6) 한·중 양 민족의 국토 광복과 주권 회복에 공동분투하기 위하여 급히 동맹군 조직을 도모할 일.31)
한·중 양 민족의 연합전선 구축의 필요성을 강조함과 아울러 일본의 대륙침략의 앞잡이가 되고 있는 한인들의 척결을 강조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韓人共産主義者들의 金九 비판
임시정부도 10월1일자로 「국내외 동포에게 고하노라」는 성명서를 발표하여 〈민족적 혁명역량을 최단기에 집중하여 중원의 호걸과 세계우방의 혁명동지로 더불어 완실한 연합전선을 체결하여 적의 심장을 직도할진저〉라고 호소했다.32)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도 상해에 있는 한국독립운동자들의 태도는 일치하지 않았다. 한인공산주의운동 단체들은 별도로 행동했다. 그들은 등사한 인쇄물을 시내 각처에 살포하여 제국주의 일본이 세계혁명의 총본영인 소비에트연방을 공격하기 위해 제2차 세계대전의 전초전을 개시했다고 말하고, 〈제국주의의 주구 중국 국민당과 군벌을 타도하자〉고 주장했다.33) 金九는 한인공산주의자들의 집중적인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그들은 上海大韓僑民團稅不納同盟을 결성하고 교민단세 납부거부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12월28일에는 교민단세 불납동맹 명의로 「재상해 소위 대한교민단의 민단세 강제징수에 대하여 전 상해 한인동포 제군에 檄함」이라는 성명서와 함께, 제국주의와 결탁하는 민단을 타도하고 민단세를 절대로 납부하지 말라는 「선언서」를 발표했다.34)
상해한교연합회의 결성과 임시정부의 선언문은 미주한인사회에도 큰 호응을 불러일으켰다. 중가주한인공동회는 10월17일에 회의를 열고 1)상해한교연합회와 행동을 같이하고 임시정부를 후원하고, 2)그러기 위하여 우선 후원금을 수합하여 임시정부에 보내고 응원을 계속하며, 3)재미한인의 총역량 집중을 위하여 재미한교연합회 조직을 발기한다는 3개항의 결의안을 채택했다.35) 11월2일에 중가주한인공동회 대표 김정진은 국민회 총회장 및 선전부 위원들과 합석회의를 열어 재미한인들의 행동을 일치시키기로 하고, 11월9일에 미주한인연합회 발기문과 임시규약을 작성하여 대외에 공포했다.36)
비밀리에 韓人愛國團 조직
金九가 비밀리에 한인애국단을 조직한 것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였다. 그러나 한인애국단의 조직경위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없다. 金九도 한인애국단의 조직과 관련해서 다음과 같이 아주 간략하게 적어 놓았을 뿐이다.
〈상해의 길거리에서도 중국과 한국 노동자들 사이에 종종 충돌이 일어나던 때에 나는 정부 국무회의에서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암살, 파괴 등의 공작을 시행하게 되었다. 공작에 사용하는 돈과 인물의 출처에 대해서는 일체의 전권을 위임받았고, 다만 성공·실패의 결과는 보고하라는 특권을 얻었다. 그리하여 제1차적으로 이봉창의 동경사건을 주관하였다.〉37)
〈그러나 최근 수년 내로는 경제의 極困과 사상의 혼란이 계속하여 사업진행에 지장이 적지 않았고, 인재를 널리 구할 길까지 없었다. 나는 이를 개탄하여 권토중래의 세로써 나의 사업을 부흥시키고자 하여 쇄신한 정신과 삼엄한 훈련하에 한인애국단을 비밀히 조직하였다.〉38)
이봉창의 거사가 있고 난 2년 뒤에 상해의 일본총영사가 국무위원 金澈의 조카 金晳을 체포하고 그의 진술에 근거하여 본국 정부에 보낸 보고서에 따르면, 한인애국단이 조직되기까지에는 임시정부 안에서 알력이 없지 않았다. 만주사변 뒤에 임시정부는 누차 국무원회의를 열고 협의한 결과 임시정부의 퇴세를 만회하기 위한 방책을 논의했다. 그리하여 중국 민중의 항일기세가 오른 것을 기회 삼아 중국 쪽으로부터 자금지원을 얻어서 테러공작을 감행할 특무대라는 기관을 설치했다. 金九를 대장으로 임명하고, 사업의 계획과 실행 일체를 그에게 일임함과 아울러 임시정부 수입의 반액을 특무대에 지급하기로 했다.
조소앙은 특무대의 명칭을 義生團이라고 하고, 선언·강령·규약을 작성하여 金九에게 주었다. 그러나 金九는 安恭根의 집에서 잠을 자다가 어린아이가 문서를 찢어 버려서 없어졌다.39) 특무대의 명칭이 한인애국단으로 바뀌게 된 것은 金九 자신도 언급하고 있듯이, 이봉창이 한인애국단에 입단하면서부터였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한인애국단은 철저한 비밀결사조직이었기 때문에 그 실체나 명칭은 대외적으로 공개되지 않았다. 그것이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32년 10월에 金九가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 전모를 밝히는 성명서를 발표했을 때였다.
그런데 특무대 조직과정에서 金九파와 조소앙파 사이에 알력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외무장 조소앙은 1931년 11월 상순에 중국 국민당 중앙당부 조직부장 陳立夫로부터 중국돈 5,000달러를 지원받아서 그 반액을 金九에게 주었다고 한다. 나머지 반액도 재무장인 金九에게 주어야 했으나, 조소앙은 그러지 않고 그 자금으로 자기 주도하에 활동할 별도의 기관을 설치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조소앙은 2,500달러를 자기가 보관하고 있다가 朴昌世·김철 등과 의논한 다음 12월 중순에 김동우·李德柱·柳相根, 李秀峰 등을 규합하여 한국의용대를 조직하기로 하고 임시정부에 승인을 요청했다고 한다.
그러나 金九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조소앙의 계획은 임시정부의 승인을 얻지 못했다. 그런데도 조소앙은 자신의 계획을 포기하지 않고 金九와 대립했다. 이 과정에서 金九의 부하인 김동우·유상근·이덕주 등이 조소앙에게 포섭되고 金九는 고립상태에 빠졌다고 한다. 그러나 이봉창의 도쿄거사가 있고 난 뒤에 김석은 의용대를 해체했다는 것이다.40) 그런데 상해 일본총영사의 이러한 보고를 확인할 만한 다른 자료는 없다.
하와이의 유지 동포들이 자금 보내와
그러구러 11월이 되었다. 安昌鎬·林成雨 등 하와이의 유지 동포들이 약속한 대로 1,000달러의 자금을 보내왔다.41) 이때까지는 거사에 사용할 폭탄(수류탄)도 확보해 놓고 있었다. 金九는 수류탄 두 개를 마련했는데, 하나는 김홍일을 통하여 중국군 병공창에서 구한 것이었고, 또 하나는 金鉉을 통하여 河南省의 劉峙(유치)에게서 구한 것이었다. 하나는 일본 천황에게 던질 것이고, 또 하나는 이봉창의 자살용이었다. 마침내 12월6일 밤에 임시정부 청사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金九는 이봉창의 일본 천황 폭살계획을 보고했다.
『이봉창이라는 사람을 도쿄에 파견하여 왜황에게 폭탄을 투척하도록 하기 위한 준비를 완료했습니다. 승낙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 놀라운 보고에 대하여 조소앙과 김철은 반대했다. 공연히 경비만 들 뿐이고 성공할 가망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자금도 확보했고 모든 준비가 완료된 뒤였으므로 결국 전원이 이를 승인했다.42)
국무회의의 승인을 받은 金九는 이봉창을 불렀다. 金九는 이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때는 작년 말 12월 초이다. 우리가 고대하던 기회는 왔다. 여러 개의 작탄을 만드는 동시에 약간의 금전도 얻었다. 그 돈은 미주·하와이·멕시코에서 노동하는 교포들의 피땀으로 된 것이니, 본래 그들이 특무에 사용하라는 조건하에 정부에 보낸 것이다. 전월 11일에 열강의 군대는 黃浦부두 平和神像 앞에서 허위의 화평을 축하하였는데, 나는 진정한 화평을 실현할 준비를 하고자 중흥여관에서 방을 정하고 이의사를 불러왔다. 그에게 만반의 준비됨을 고하니 그는 매우 기뻐하였다. 그 밤에 敵皇을 작살하는 우리의 실제 계획을 의정한 뒤 나는 걸인의 의복같이 더럽고 떨어진 두루마기에서 은전 다량을 내어주고 곧 홍구로 돌아가서 동경으로 출발할 행장을 급히 정돈하게 하였다.〉43)
12월13일 밤에 두 사람은 프랑스 공원 근처의 어느 한국인 집에서 만났다.44) 金九는 거기에서 이봉창을 근처의 러시아인의 식당으로 데려가서 음식을 먹으면서 마침내 준비가 다 되었음을 알렸다. 그러면서 金九는 이봉창에게 언제 일본에 가겠는지를 물었다.
『언제든지 좋습니다. 모든 준비가 갖추어지면 오는 12월17일에 고베(神戶)로 바로 가는 배가 있는데, 그 배에는 일본으로 돌아가는 방적회사 친구들이 여러 명 타고 가므로 이왕이면 그 배로 가는 편이 좋겠습니다』
金九는 이봉창의 말을 듣고 나서 중국 지폐로 300달러를 이봉창에게 주면서 여비와 그밖에 일본에 가는 데 필요한 경비에 쓰라고 했다. 이봉창은 金九가 폭탄 준비나 그 밖의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 없이 너무나 갑작스럽게 거사를 실행하려고 하는 데다가 생각보다 많은 돈을 주는 데 놀랐다. 저녁을 먹은 뒤에 金九는 이봉창을 어느 사진관인 듯한 집으로 데리고 갔다. 그곳은 安恭根의 집이었다. 그곳에는 폭탄 두 개와 선서문과 태극기가 놓여 있었다. 선서문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나는 赤誠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야 韓人愛國團의 일원이 되어 적국의 수괴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
선서식이 끝난 뒤에 이봉창은 선서문을 가슴에 달고 수류탄을 양손에 들고 태극기를 배경으로 하여 환하게 웃는 표정으로 사진을 찍었다. 이렇게 하여 이봉창의 한인애국단 가입절차가 끝났다. 그는 한인애국단 제1호 단원이 된 것이다.
사진을 찍고 난 뒤에 두 사람은 잠시 걸으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때에 이봉창은 金九에게 폭탄 사용법을 가르쳐 달라고 했다. 金九는 시간이 늦었으니 내일이나 모레쯤 와 주면 그때에 가르쳐 주겠다고 하고 그날은 그냥 헤어졌다.45)
臨時政府가 送別會 해주기 바라
이봉창은 이틀 뒤인 12월15일 밤에 필요 없게 된 이불 등을 싸들고 新天祥里 20호로 金九를 찾아왔다. 金九는 이봉창을 어느 중국요리집으로 데리고 가서 같이 저녁을 먹었다. 식사가 거의 끝날 무렵 金九는 잠깐 기다리라면서 밖으로 나갔다가 무엇인가를 싼 보자기를 가지고 왔다. 신문지에 싼 폭탄 두 개였다. 12월13일 사진을 찍을 때에 가지고 찍은 그 수류탄이었다. 저녁을 먹은 뒤에 金九는 이봉창을 중흥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폭탄 사용법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46) 金九는 김홍일에게서 수류탄 사용법을 익혀 두었던 것 같다.
그날 밤에 두 사람은 여관에서 같이 자면서 미진한 계획을 구체적으로 보완했다. 金九는 이봉창에게 말했다.
『동경에 도착하자마자 전보하시면 다시 송금하리다』
그러자 이봉창은 이렇게 말했다.
『저는 그저께 그 돈을 받아 가지고 온 밤을 자지 못했습니다. 대관절 나를 어떻게 믿고 거액을 주셨습니까. 그날 부르심을 받고 먼저 정부기관 집으로 간즉 직원들이 밥을 굶는 모양이기로 제가 돈을 내 놓았는데, 그 밤에 선생님이 남루한 의상 중에서 거액을 나에게 주시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선생께서는 프랑스조계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시니 만약 제가 이 돈을 가지고 가서 제 마음대로 써버리고 다시 오지 아니하면 어찌하시려 했습니까. 과연 관대한 도량과 엄정한 공심을 뵙고 탄복하여 긴 밤을 그대로 새웠습니다』47)
이봉창은 이날 金九에게 임시정부에서 송별회를 열어 줄 것을 요구했다. 그 자리를 빌려 자신의 결행의지와 거사의 의의를 밝히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일본인은 관헌까지도 우리 조선인을 차별대우하며 학대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 나라를 독립시켜 조선인의 국가를 갖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터에 金九로부터 천황을 죽이는 것이 조선의 독립을 촉진시키는 첩경이라는 말을 듣고 과연 그렇다고 생각되어 2천만 동포를 위해 천황을 죽이기로 결심하기에 이르렀던 경위와, 이 일이 결코 이봉창 한 사람의 난폭이 아니라 민족을 대표한 희생자로서의 결행이라는 자신의 각오를 발표할 기회를 얻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金九는 그런 말을 하면 시끄러워질 뿐이므로 이 일은 오직 두 사람만의 문제이며 임시정부나 어떤 단체와도 전혀 관계 없는 일이라면서, 이봉창의 요구를 받아 주지 않았다.48)
다음날 이봉창은 영창공사에 가서 짐을 싸고 신변을 정리한 뒤에 날이 저물어서 다시 金九를 찾아왔다. 金九는 이봉창과 함께 저녁을 먹은 뒤에 시계점으로 가서 손목시계를 사서 이봉창에게 주면서 같이 여관으로 갔다.
이봉창은 체포될 경우 취할 방법을 金九에게 물었다. 金九는 선서문을 가슴에 달고 수류탄을 들고 찍은 사진을 보여 주고 선서문 그대로라고만 말하고 그 밖의 일은 될 수 있는 대로 입 밖에 내지 말고 버티라고 했다. 그러나 온갖 수단을 동원한 고문과 취조로 무엇이라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되면 金九 자신에 관한 것과 그 밖의 사실을 털어놓고 말해도 괜찮다고 덧붙였다. 이봉창이 거사에 관한 趣意書(취의서) 같은 것이 없으면 곤란할 것 같다고 하자, 金九는 선서문 내용이 사진에 찍혀 있으므로 모든 것은 그것으로 판명될 것이니까 특별히 그런 문서를 가지고 있을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金九는 폭탄을 지니고 가는 방법을 자세히 설명했다. 두 개의 폭탄을 중국 비단으로 만든 좁고 긴 주머니에 하나씩 넣고 폭탄이 양 허벅지에 끼이도록 한 다음 주머니 끝을 배에 묶고 그 위로 팬츠를 입어 감추도록 했다.
이어 金九는 이봉창에게 그의 행적을 영원히 남기기 위해 이력서를 쓰라고 했다. 재판을 받을 때의 주의사항도 이야기해 주었다. 재판정에 나갈 때에는 일본인들이 선임해 준 관선 변호사를 거절하고 자신이 생각하는 것만 진술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49)
기쁜 표정으로 사진 찍자고 권고
12월17일 아침이 밝았다. 이봉창은 아침 8시30분쯤에 일어나서 金九가 가르쳐 준 대로 폭탄 두 개를 사타구니에 차고 양복을 입었다. 그리고는 金九와 함께 여관을 나섰다.50) 두 사람은 중국음식점으로 가서 최후의 축배를 들어 성공을 기원하며 다음 세상에서 다시 만날 것을 기약했다. 음식점에서 나온 金九는 다시 만나지는 못할지라도 사진으로나 함께 있자는 뜻에서 마지막 기념사진을 찍기로 했다. 사진을 찍으려 할 때에 자신도 모르게 金九의 얼굴에 처참한 기색이 보였는지 이봉창이 金九에게 말했다.
『저는 영원한 쾌락을 누리고자 이 길을 떠나는 것이니, 우리 두 사람이 기쁜 얼굴을 하고 사진을 찍으십시다』
金九는 그 말에 감동되어 마음을 굳게 가지고 억지로 미소를 띠고 사진을 찍었다. 두 사람은 악수로 작별하고 이봉창은 택시에 올랐다.51)
상해부두에는 많은 일본사람들이 이봉창을 배웅하러 나와 있었다. 金九는 이봉창의 성품을 설명하면서 그가 상해부두를 떠날 때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익살스럽게 적어 놓았다.
〈이의사의 성행은 춘풍같이 화애하지만은 그 기개는 화염같이 강하다. 그러므로 對人談論에 극히 인자하고 호쾌하되 한 번 진노하면 비수로 사람 찌르기는 다반사였다. 술은 한량 없고 色은 제한이 없었다. 더구나 일본가곡은 못 하는 것이 없었다. 그러므로 홍구에 거주한 지 1년도 못 되어 그가 친하게 사귄 친구가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였다. 심지어 倭警察까지 그의 손아귀에서 현혹되기도 하고, ○○영사의 내정에는 무상출입이었다. 그가 상해를 떠날 때에 그의 옷깃을 쥐고 눈물지은 아녀자도 적지 아니하였지마는 부두까지 나와 가는 길이 평안하기를 기원하는 친우 중에는 왜경찰도 있었다.…〉52)
이봉창은 상해주재 일본총영사관의 경찰간부와도 친한 사이여서 그 경찰간부는 자기 명함에 이봉창을 위한 소개장을 써 주었다. 그 소개장의 수신인은 상해에서 일본에 들어가는 관문인 나가사키(長崎)의 경찰서장이었다. 소개장에는 이봉창이 동경으로 유학 가는 착실한 청년이니 잘 인도하여 주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봉창 의거 뒤에 소개장을 써 준 영사관 경찰간부는 즉시 파면되어 일본으로 소환된 뒤에 자살했다고 한다.53)
(3) 「韓國志士」 李奉昌이 日皇을 狙擊
이봉창은 12월17일 오후 3시에 고베(神戶)로 가는 우편선 고오리가와 마루(氷川丸)에 올랐다. 폭탄은 끌러서 트렁크에 넣었다. 12월19일 밤 8시경에 고베에 도착한 이봉창은 오사카를 거쳐 12월22일 도쿄에 도착하여 여관에 투숙했다. 다음날 이봉창은 金九에게 100원을 송금해 달라는 전보를 쳤다. 고베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7, 80원의 돈이 남아 있었으나 오사카의 술집에서 다 써 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돈이 오지 않고 아무런 회답도 없자 이봉창은 다시 싸구려 여인숙으로 옮겼다. 이봉창은 수중의 돈이 다 떨어져서 金九가 상해에서 사준 손목시계를 전당포에 잡혔다. 그것으로도 돈이 모자라자 이봉창은 여관 근처의 직업소개소를 찾아가서 취직알선을 부탁했다. 12월28일에 직업소개소는 초밥을 만드는 데 쓰이는 재료와 기계를 다루는 상점을 소개했다. 이봉창은 그곳에서 일하기로 작정하고 짐을 찾으러 여관으로 돌아왔다가 100엔을 보냈다는 金九의 전보를 받았다.54) 과연 金九는 12월28일에 100엔을 보냈다.55) 이봉창은 〈돈을 미친 것처럼 다 써 버려서 밥값까지 빚이 져 있었는데, 돈을 받아 빚을 다 갚고도 남겠습니다〉라는 편지를 썼다.56)
『아! 그는 獨立黨員이겠지!』
이봉창은 12월28일(또는 29일)에 「도쿄 아사히신문(東京朝日新聞)」에서 1932년 1월8일에 요요기(代代木) 연병장에서 陸軍始觀兵式이 거행되고 이 행사에 일본 천황이 임석한다는 기사를 보았다. 이봉창은 이날에 거사를 결행하기로 결심했다. 1932년의 육군 시관병식은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점령한 육군의 사기를 높여 주고 그 임무수행을 다짐받는 행사였기 때문이다.57)
이봉창의 거사소식을 초조하게 기다리던 金九는 1932년 1월 초에 〈상품은 1월8일에 꼭 팔릴 터이니 안심하라〉는 전보를 받고,58) 그날이 거사일임을 알았다.
거사일을 결정하자 이봉창은 金九가 지시한 대로 준비를 치밀하게 했다. 먼저 수류탄을 손질했다. 수류탄 주둥이에서 나무마개를 뽑고 쇠로 된 기계를 끼워 넣은 다음 안전핀을 뽑아서 언제 어디서든지 바로 던질 수 있게 해 놓았다. 이봉창은 1월6일에는 관병식이 열릴 요요기 연병장을 사전 답사했다. 이때에 그는 승합차 운전사로부터 뜻밖에도 도쿄헌병대 본부 소속의 한 헌병 명함을 얻어서 소중히 간직했다. 연병장은 너무 넓어서 천황에게 접근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는 천황이 오고 가는 길가에서 결행하기로 계획을 바꾸었다. 이날 이봉창은 여관을 옮겼다.
그는 그동안 묵던 여관에서 자신의 출생과 경력 등을 자세히 적은 수기를 썼다. 그러나 그런 것을 남기는 것이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날 저녁을 먹은 식당의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리고 엿이 든 종이상자 두 개를 사 가지고 여관으로 돌아왔다. 수류탄을 거사 현장까지 담아 가지고 가기 위해서였다.
거사 하루 전인 7일 저녁에는 가와사키(川崎)로 가서 그곳 유곽에서 잤다.59) 도쿄에서는 모든 여관, 음식점, 유곽 등 일반인들이 출입하는 장소와 진자(神社), 절, 빈 집 등에 대한 경계 검색이 심했기 때문이었다.60) 1월8일 아침 8시50분에 관병식 현장인 하라주쿠(原宿)역에 도착한 이봉창은 역 앞 중국음식점에서 아침을 먹으면서 기다렸다. 그러나 경비가 너무 엄중하여 하라주쿠에서 거사하는 것을 포기했다.61)
이봉창은 다시 전철을 타고 요쓰야(四谷)에서 내려 거기에서 거사하고자 했다. 그러나 신문팔이 소년으로부터 천황은 그곳으로 지나가지 않고 아카사카미쓰케(赤坂見附)를 지나간다는 말을 들었다. 이봉창은 오전 9시40분경에 아카사카미쓰케에 도착했으나 천황은 이미 그곳을 지나 요요기 연병장으로 간 뒤였다. 이봉창은 할 수 없이 천황이 돌아올 때에 거사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봉창이 일부러 시간을 맞추느라고 늑장을 부리다가 다시 아카사카미쓰케에 갔을 때에는 천황의 행렬이 막 지나간 뒤였다.
이봉창은 〈오늘은 틀렸나 보다〉고 낙담하며 마침 옆에 있던 선로인부에게 천황의 행렬을 보려면 어떻게 하면 되느냐고 물었다. 선로인부는 지름길을 가르쳐 주었다. 빈 택시 한 대가 이봉창이 서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그는 황급히 택시에 올라 천황의 행렬을 볼 수 있는 데까지 가자고 운전사를 재촉했다.
그러나 택시는 참모본부 앞을 거쳐 내리막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경찰의 제지로 멈추어 섰다. 차에서 내린 이봉창은 경찰이 없는 쪽으로 달려서 경시청 앞에 도착했다. 여기서도 경찰이 가로막았다. 이봉창은 일본 헌병의 명함을 보여 주면서 천황의 행렬을 보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허락을 받은 그는 단숨에 경시청 현관 앞 잔디밭으로 달려갔다.
그곳에는 천황의 행렬을 보려는 사람들이 여러 겹으로 모여 있었다. 이봉창은 사람들을 비집고 두세 겹 앞으로 나아갔다. 천황의 행렬이 막 사람들 앞을 지나서 궁성의 남문인 사쿠라다문(櫻田門) 쪽으로 가고 있었다. 이봉창은 재빨리 오른쪽 바지주머니에서 수류탄을 꺼내어 행렬을 향해서 던졌다. 수류탄은 두 번째 마차 뒤쪽의 마부가 서는 받침대 아래에 떨어졌다. 꽝 하는 소리와 함께 수류탄이 터졌다. 그러나 수류탄의 성능이 약해서 마차 밑바닥과 바퀴의 타이어가 파손되었을 뿐이었다. 인명피해는 없었다. 이봉창은 金九가 성능이 강한 수류탄이라면서 실험할 필요가 없다고 했던 것이 원망스러웠다.
일본경찰들이 옆에 있는 사람을 체포하자 이봉창은 『아니야! 나야!』 하고 자신이 수류탄을 던졌음을 밝히고 곧바로 체포되었다. 그는 경황이 없어서 남은 수류탄은 던질 것을 잊어 버렸다. 이봉창은 두 번째 마차가 천황이 탄 마차라고 생각했으나, 경시청에 연행되어 그곳에서 신문 호외를 보고서야 두 번째 마차에 천황이 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두 번째 마차에는 궁내부대신이 타고 있었다.62)
궁성으로 돌아간 히로히토가 점심을 먹고 나자 시종장이 허리를 굽히고 말했다.
『폐하, 오늘은 죄송합니다. 범인은 조선인으로서, 이봉창이라는 자입니다』
그러자 히로히토는 이렇게 말했다.
『아, 그는 독립당원이겠지! … 그런데 오늘 오후에 미국대사가 총리대신에게 온다고 했는데, 어떻게 되었나?』
히로히토는 그 일이 더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이날 주일 미국대사는 일본 총리대신을 만나서 「미국 정부는 1928년의 不戰條約의 약속과 의무에 위반되는 일체의 사태, 조약, 협정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국무장관 스팀슨(Henry L. Stimson)의 선언을 전달한 것이었다. 그것이 이른바 「스팀슨 독트린」이었다.63) 이날은 말하자면 제국주의 일본의 정책에 반대하는 미국과 한국의 뜻이 동시에 일본에 전달된 날이었던 셈이다.
中國新聞의 報道에 日人들이 暴動 일으켜
이봉창의 일본 천황 저격사건은 일본사회를 경악케 했다. 신성불가침의 「살아 있는 신」으로 추앙되고 있던 천황에게 폭탄이 던져지고, 그것을 많은 군중이 보았다는 사실은 일본으로서는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당일 오후 5시12분에 이누카이 쓰요시(犬養毅) 총리대신은 사건의 책임을 지고 내각 총사직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히로히토는 이누카이 내각의 사직서를 반려했다. 이누카이 내각은 와카쓰키 레이지로(若槻禮次郞) 내각이 8개월의 단명으로 물러나고 들어선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때였으므로 또다시 내각이 총사직하게 되면 일본 국민들에게 불안을 가중시킬 염려가 있기 때문이었다.64) 이누카이 내각은 유임되었으나 치안 책임자들에 대한 문책은 준엄했다.65)
이봉창은 「大逆罪」의 피고로 기소되었다. 천황제를 지키기 위하여 1907년에 일본형법에 새로 규정된 「대역죄」는 통상의 범죄와 달리 3심죄가 보장되지 않고 오직 大審院(현재의 최고재판소)의 심리만으로 유무죄를 가리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1947년에 폐지될 때까지 「대역죄」로 재판을 받은 사건은 이봉창의 경우를 포함하여 4건(다른 3건은 1910년의 幸德秋水 사건, 1923년의 朴烈 사건, 1923년의 難波大助 사건)뿐이었다.66)
한국 청년 이봉창이 일본 천황에게 폭탄을 던졌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1월9일 새벽부터 중국의 각 신문과 라디오방송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중국시민들도 거리로 몰려나와서는 공연히 우왕좌왕하며 제각기 한국인에 대한 찬사의 말을 한마디씩 늘어놓았다.67)
중국 신문들은 사건이 일어난 다음날인 1월9일부터 1월 말까지 사실보도와 함께 그 여파에 대한 보도를 계속했다. 상해의 국민당 기관지 「民國日報」는 〈한인이 日皇을 저격했는데 맞지 않았다. 일황이 열병을 마치고 도쿄로 돌아올 때에 갑자기 저격을 받았으나, 불행히 겨우 副車에 맞았고 범인은 곧 체포되었다(韓人刺日皇未中. 不幸僅炸副車兇手卽被逮)〉라는 표제로 보도했고, 靑島의 「民國日報」도 〈한국의 죽지 않은 의사 이봉창이 일황을 저격했으나 이루지 못했다(韓國不亡義士李奉昌炸日皇未遂)〉라는 표제로 보도했다.
다른 각 지방의 신문들도 비슷한 뉘앙스의 말로 사건을 보도했다. 상해에서 발행되던 「申報」는 이봉창을 「韓國志士」로 지칭했다.68) 중국 신문들의 이러한 보도태도는 만보산 사건으로 격화된 중국인들과 한국동포들 사이의 반감을 해소하고 반일 연대의식을 고취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반면에 중국에 있던 일본인들은 중국신문의 이러한 보도태도에 격분했다. 청도의 일본인들은 「민국일보」의 보도에 항의하여 폭동을 일으켰다. 폭동은 두 군함에 있던 일본 육전대 600여 명이 상륙한 가운데 1월12일부터 1주일 넘어 계속되었다. 중국 국민당 시당부가 파괴되고, 「민국일보」도 큰 피해를 입어 결국 폐간되었다. 상해에서는 일본총영사관과 상해시장 吳鐵城 사이에 외교분쟁이 벌어지고, 일본인들의 난동이 잇따랐다.
韓國獨立黨이 한 일로 聲明
金九는 거사 소식을 접했을 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과연 1월9일 아침에 기쁜 소식은 신문지상으로 전래되었다. 이때의 쾌감이야 과연 형언할 수 없었다. 불행히 명중치 못하고 다른 차에 떨어져 敵皇은 죽음을 면했으나 이것만으로도 우리의 정신은 충분히 발휘하고 우리의 계획은 성공하였다 할 수 있다. …〉69)
〈나는 천황을 죽이지 못한 사실이 극히 불쾌하였으나 여러 동지들은 오히려 나를 위로하였다. 그들은 일황이 즉사한 것만은 못하나, 정신적으로는 우리 한인이 일본의 신성불가침인 천황을 죽였으며, 이것은 한인이 일본에 동화되지 않은 것을 세계만방에 확실히 보여 주는 증명이니 족히 성공으로 칠 수 있다고 하였다.〉70)
동지들은 金九의 신변안전을 염려했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날 아침에 프랑스 공무국으로부터 비밀통지가 왔다. 지난 10년 동안 프랑스는 金九를 극진히 보호해 왔으나, 이번 일로 일본이 반드시 金九를 체포하려고 협조를 구해 올 것이므로, 프랑스가 일본과 전쟁을 할 결심을 하기 전에는 金九를 더 이상 보호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71) 金九는 서둘러 피신했다.
임시정부는 곧바로 국무회의를 열고 대책을 협의했다. 회의에서는 이번 거사를 한국독립당이 한 일로 성명하기로 결정했다. 한국독립당은 1930년 1월에 조직된 뒤에 이렇다 할 사업을 추진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72)
한국독립당은 1월9일에 이봉창 의거에 대한 짤막한 성명을 발표했다. 이 성명은 1월11일에 중국인이 경영하는 「國聞通信」을 통하여 전문이 보도되었다.
〈본당은 삼가 한국 혁명용사 이봉창이 일본 황제를 저격하는 霹靂一聲(벽력일성)으로 전 세계 피압박 민족에게 신년의 행운을 축복하고, 이것과 같은 소리로 환호하며, 바로 제국주의자의 아성을 향하여 돌격하여, 모든 폭군과 악정치의 首犯을 삼제하고 민족적 자유와 독립의 실현을 도모할 것을 바란다.〉73)
한국독립당은 다음날인 1월10일에 다시 「이봉창이 일황을 저격한 데 대한 한국독립당선언」이라는 장문의 중국어 선언문을 발표했다.
〈한국독립당은 이번에 이봉창이 일본 천황을 저격한 사건에 대하여 한국민족과 여러 독립운동자의 입장에서 저 포악한 일본의 죄상을 파헤쳐 이 사건이 일어나게 된 원인과 뒤이어 있게 될 결과를 밝혀 두고자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이렇게 시작된 「선언문」은 천황제를 핵심으로 하는 제국주의 일본의 정치체제에 대한 상해 독립운동자들의 인식을 보여 주는 것이어서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흉악한 저 섬나라 도적무리는 이미 한국을 합병하고 우리 동포를 어육으로 삼았으며 滿蒙까지도 남김없이 병탄하려고 우리의 우방을 쓸모없는 짚신 버리듯 하고 있다. 저들은 혈족끼리 서로 결혼한 괴수를 내세워 스스로 萬世一系라 부르며 자랑삼고 있으며, 저들은 온갖 나쁜 짓을 횡행하는 우두머리로 앉아 인민들의 고혈을 먹고 있으면서 스스로를 천황이라 일컫고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아 있다. 저들은 악덕으로써 한국과 중국을 병탄하고자 못된 짓을 더해 가고 있으면서도 뉘우치는 바 없으니 천인을 공노하게 했다. 어찌 한국인에게만 머리에 옻 칠을 하려고 할 뿐이랴. 중국인도 쪼개서 물그릇을 만들고 있으나, 저 일본 황제는 본래 죽일 만한 가치도 없다. 그의 智力은 시세를 가늠하기에 모자라고, 그의 권력은 군벌을 통제하기에 모자라고, 그의 위엄은 원로와 정당 당수를 거느리기에 모자란다. 물론 明治와 大正과 昭和할 것 없이 저들은 모두가 같은 소굴의 한패거리요 괴뢰일 뿐이다.…〉
日本天皇을 죽여야 할 9가지 理由
그러면서 「선언문」은 〈죽일 만한 가치도 없는〉 일본 천황을 죽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다음과 같은 아홉 가지로 설명했다.
〈그가 元首의 자리에 있으며 온갖 죄악이 모이는 자리에 있는 것이 그 첫째요, 그 賊徒를 사로잡으려면 먼저 그의 왕을 사로잡아야 하는 것이 그 둘째요, 우리 조국을 위해 원수를 갚는 것이 그 셋째요, 천벌을 내리고 인권을 신장하는 것이 그 넷째요, 우방을 위해 치욕을 풀어 주기 위함이 그 다섯째요, 백성들이 참을 길이 없으면 無道한 임금을 주살하는 것이 그 여섯째요, 그들의 國體를 고쳐 우리 주권을 회복하기 위함이 그 일곱째요, 못된 오랑캐에게는 응당한 벌을 내리고 온 누리 사람에게는 뉘우침을 주기 위함이 그 여덟째요, 하늘에 順하고 사람에 應하며 천하를 고동케하여 인류를 해방시키려 함이 그 아홉째이다. 이번 이봉창의 저격은 그 동기를 살펴보면 바로 이에서 나온 것이다. 이는 오직 일본 군벌과 원로와 제국주의자들의 선봉자가 밤낮으로 그 원인을 만들었다.…〉
「선언문」은 이어 이봉창 의거는 30년 동안 이어져 온 張仁煥·安重根·李在明·新民會·姜宇奎·梁瑾煥·金益湘·金祉燮·宋學先·趙明河 등과 같은 의인과 열사의 뜻을 계승한 것이라고 천명하고, 일본인은 실로 한국인의 손을 빌려서 자신의 천황을 죽이려 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선언문」은 다음과 같은 말로 마무리했다.
〈오직 이봉창 한 사람만이 이 같은 뜻을 지니고 있는 것만은 아니며 2천3백만의 가슴속에 다 이봉창과 같은 결의가 깃들여 있어서 제2, 제3, 아니 2천만 모두가 이봉창과 같은 사람으로 될 것이다.〉74)
이 「선언문」은 중국의 여러 신문에 게재되었고, 天津·奉天·間島 등 각지에 흩어져 있는 동포사회의 여러 기관에 우송되었다.75)
이봉창의 취조과정에서 사건의 주모자가 金九라는 것이 곧바로 밝혀졌다. 일본 검찰은 이봉창과 함께 金九를 대심원에 기소하고, 상해 일본총영사관에 金九의 수사를 지시했다.76) 일본총영사관은 이봉창 의거가 있기 전인 1월4일(또는 5일)에도 보경리 4호의 임시정부청사를 수색했으나 金九는 피신하고 없었다.77) 이 일이 있고 나서 임시정부는 사무실을 옮겼다.
일본총영사관은 金九를 비롯하여 사건의 공범자로 생각되는 조소앙·김철 등의 임시정부 간부들도 수배했다. 일본총영사는 1월9일에 상해주재 프랑스총영사를 만나서 金九 수사에 대한 협조를 요청했다. 이어 양쪽 실무자들의 협의가 있었는데, 양쪽이 합의한 것은 우선 金九의 거처를 찾아내기 위하여 신중하게 내사를 벌인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프랑스총영사관이 일본의 요청을 사실상 거부한 것이었다. 金九에 대한 수사가 부진하자 일본 사법성은 이봉창을 취조한 도쿄 지방재판소 검사 가메야마 싱이치(龜山愼一)를 상해에 파견하여 수사를 지휘하게 했다. 가메야마는 회사원으로 위장하고 1월21일에 고베를 출발하여 1월23일 오후에 상해에 도착했다.78)
李承晩은 라디오 演說로 日本 공격
이봉창 의거에 대한 재미동포 사회의 반응이 어떠했는지는 공교롭게도 이때의 신문이나 잡지가 거의 보존되고 있지 않아서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유일하게 보존되어 있는 「新韓民報」는 사건이 나고 닷새 뒤인 1월14일자에 만주사변과 관련하여 연속기사를 싣고 있던 「滿洲倭亂記」의 앞머리에서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동경 8일. 오늘 아침 10시경에 왜황제가 관병식을 거행하고 돌아오는 길에 거의 궐문에 도착하자 난데없는 폭탄이 터지며 연기가 자욱한 바람에 황제의 거동은 일시 수라장을 이루었었다. 궁내부 대신 마키노가 탔던 수레가 자칫하면 맞을 뻔하였으나 피상자는 없었다고 한다. 필경 경관대가 범인을 체포하였는데, 조선 의사 리봉창씨로 판명이 되었다. 상해임시정부에서 파견한 사람인데, 여비까지 150달러를 주어서 보내었다고 한다. 황제가 위험하게 될 뻔한 이번 사건으로 내각은 총사직을 하였으나 황제의 요구로 내각은 다시 시무케 되었다더라.〉79)
그리고 1월28일자에는 치안책임자들에 대한 처벌 내용만 보도했다.80)
이봉창 의거가 있었을 때에 李承晩은 뉴욕의 한 호텔에 머물고 있었다. 1931년 11월21일에 하와이를 떠났던 그는 로스앤젤레스와 시카고를 거쳐서 12월7일에 워싱턴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연말을 보내고 나서 1932년 1월3일에 뉴욕으로 갔다.
이봉창 의거가 있자 李承晩은 한 미국 방송국의 요청으로 2월22일에 라디오에 출연하여 일본의 만주침략을 규탄하는 연설을 했는데, 미국 정부는 일본인들이 李承晩을 암살할 것을 염려하여 형사 두 사람으로 하여금 그의 신변을 보호하게 했다고 한다.81)
그러나 李承晩의 「여행일기」 2월22일조에는 그러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그가 라디오에 출연한 것은 이봉창 의거가 있고 이틀 뒤인 1월9일이었다. 이 날짜 그의 「여행일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WOR 라디오방송국 신문기자들은 호텔에서 누군가가 소란을 피운 사건에 대하여 알고 싶어 했다. 경찰청장은 나를 뱀버거(Bamberger) 스튜디오까지 호위할 형사 두 사람을 보냈다. 말러우니(Mulroney) 경찰청장. 펜실베이니어 호텔 부지배인은 스위트룸 710호와 708호를 권했다. 그래서 나는 그 방으로 옮겼다.〉82)
이러한 기록으로 미루어 보면 이때에 李承晩은 흥분한 일본인들로부터 심한 공격을 받았던 것 같다.
「屠倭實記」 서문에서 金九 격찬
뒷날 李承晩은 「도왜실기」의 「서문」을 다음과 같이 썼다.
〈「도왜실기」는 김구 선생의 자서전이며 한국 독립운동의 표면사일뿐더러 대한임시정부의 측면사라고도 할 수 있으니, 수많은 순국열사 중에서도 본편의 주인공인 이봉창·윤봉길 의사가 한국독립사상에 얼마나 지대한 역할과 공헌을 하였는가를 고려한다면 이 책의 의의도 또한 심상하지 않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왜황 裕仁을 향하여 이의사가 던진 폭탄 한 개는 비록 성공은 하지 못하였으나 한국 민족이 일본에 대하여 금일까지 꾸준히 반항하고 있다는 증거를 세계에 표명하였으며, 윤의사의 상해사건은 중국 군대 중에서도 최정예를 자랑하는 19로군이 수개월을 두고 악전고투하였건만 일찍이 머리카락 하나 건드려 보지도 못한 왜군관민의 수뇌부를 한국의 청년이 일거에 도륙하고 말았으니, 갈수록 더 심한 침략으로 왜에 대한 원한이 골수에 사무쳤던 당시 4억만 중국 민중의 환호와 감격은 넉넉히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다. 즉 자기네의 원수를 무명의 한국 청년이 갚아 준 격이니, 어시호, 중국 관민은 한민족의 열렬한 조국혼과 한인의 독립운동이 엄연히 상존해 있음을 다시금 인식하게 되었고, 세계도 또한 한국독립의 난문제가 아직도 해결되지 못하고 있음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었다. …
이로써 미루어 본다면 윤의사가 던진 폭탄 한 개는 단순히 테러사건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그 의의와 영향이 중대하니, 김구 선생이 말씀하신 바 소위 「최소의 희생으로써 최대의 효과」를 얻고도 오히려 남음이 있다고 할 것이다.…〉83)
이 글은 1946년에 「도왜실기」의 한글 번역본을 출판할 때에 金九의 공적을 한껏 추켜올리면서 쓴 글인데, 독립운동 기간에 그가 줄곧 반대했던 테러리즘의 정치적 효과를 높이 평가하는 듯한 문투여서 흥미롭다. 이때는 李承晩과 金九의 협조가 가장 돈독하던 때였다.●
1) 金昌順·金俊燁, 「韓國共産主義運動史(4)」, 1986, 청계연구소, 420~435쪽 참조.
2) 金九, 「東京炸案의 眞相」, 이봉창의사장학회 엮음, 「이봉창의사와 한국독립운동」, 2002, 단국대 출판부, 190쪽; 도진순 주해, 「백범일지」, 1997, 돌베개, 322~323쪽. 3) 「제6회 신문조서」, 단국대 동양학연구소 편, 「이봉창의사 재판관련 자료집」, 2005, 단국대 출판부, 440~441쪽. 4) 「공판조서」, 「이봉창의사 재판관련 자료집」, 511쪽. 5) 「제2회 신문조서」, 「청취서」, 「이봉창의사 재판관련 자료집」, 395쪽, 534쪽. 6) 「東京炸案의 眞相」, 이봉창의사장학회 엮음, 앞의 책, 190쪽. 7) 「백범일지」, 323쪽.
8) 「제2회 신문조서」, 「제4회 신문조서」, 「공판조서」, 「이봉창의사 재판관련 자료집」, 392~393쪽, 415~416쪽, 508~509쪽. 9) 「上申書」, 위의 책, 551쪽. 10) 「上申書」, 같은 책, 551쪽. 11) 「上申書」, 같은 책, 552쪽. 12) 「제6회 신문조서」, 같은 책, 439~440쪽. 13) 「백범일지」, 323쪽.
14) 「백범일지」, 324쪽. 15) 「제6회 신문조서」, 「이봉창의사 재판관련 자료집」, 441쪽. 16) 「제6회 신문조서」, 위의 책, 442~443쪽. 17) 金弘壹, 「大陸의 憤怒」, 1972, 文潮社, 272~273쪽. 18) 「제6회 신문조서」, 「이봉창의사 재판관련 자료집」, 442~443쪽. 19) 「上申書」, 위의 책, 552쪽.
20) 「제6회 신문조서」, 같은 책, 444~445쪽. 21) 「東京炸案의 眞相」, 이봉창의사장학회 엮음, 앞의 책, 191쪽; 「백범일지」, 324쪽. 22) 「제6회 신문조서」, 「이봉창의사 재판관련 자료집」, 445쪽. 23) 「제6회 신문조서」, 위의 책, 446~447쪽.
24) 만보산 사건의 경과에 대해서는 朴永錫, 「萬寶山事件硏究」, 1978, 亞細亞文化社 80~97쪽 참조. 25) 閔斗基, 「萬寶山事件(1931)과 韓國言論의 對應」, 「東洋史學硏究」 제65집, 154쪽. 26) 「朝鮮日報」와 「東亞日報」의 보도에 대해서는 閔斗基, 앞의 논문, 152~171쪽 참조. 27) 「백범일지」, 327쪽.
28) 「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篇), 1976, 國會圖書館, 687~688쪽. 29) 위의 책, 691~692쪽. 30) 같은 책, 689~691쪽. 31) 「新韓民報」 1931년 11월5일자, 「상해한교전체대회」. 32) 「新韓民報」 1931년 11월5일자, 「國內外同胞에게 告하노라」. 33) 「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篇), 691~692쪽. 34) 在上海日本總領事館 警察部, 「朝鮮民族運動年鑑」 1931년 12월28일조. 35) 「新韓民報」 1931년 10월22일자, 「중가주공동회의 결의」.
36) 「新韓民報」 1931년 11월12일자, 「미주한인연합회 발기문」. 37) 「백범일지」, 327쪽. 38) 「東京炸案의 眞相」, 이봉창의사장학회 엮음, 앞의 책, 186쪽. 39) 國史編纂委員會, 「韓國獨立運動史 資料2 臨政篇Ⅱ」, 1971, 探求堂, 256~258쪽. 40) 위의 책, 256~257쪽. 41) 「백범일지」, 321쪽, 325쪽; 金元容, 「在美韓人五十年史」, 1959, Reedlely, Calif., 215~216쪽. 42) 國史編纂委員會, 「韓國獨立運動史 資料2 臨政篇Ⅱ」, 257쪽.
43) 「東京炸案의 眞相」, 이봉창의사장학회 엮음, 앞의 책, 192~193쪽. 44) 「제7회 신문조서」, 「이봉창의사 재판관련 자료집」, 448~449쪽. 45) 「제7회 신문조서」, 위의 책, 449~450쪽. 46) 「제2회신문조서」, 「제7회 신문조서」, 같은 책, 397쪽, 450~451쪽.
47) 「東京炸案의 眞相」, 이봉창의사장학회 엮음, 앞의 책, 193쪽; 「백범일지」, 327쪽. 48) 「제7회 신문조서」, 「이봉창의사 재판관련 자료집」, 455쪽. 49) 「백범일지」, 325쪽; 「제2회 신문조서」, 「제7회 신문조서」, 「제8회 신문조서」, 「이봉창의사 재판관련 자료집」, 396~398쪽, 450~451쪽, 461쪽. 50) 「제7회 신문조서」, 「이봉창의사 재판관련 자료집」, 451쪽. 51) 「東京炸案의 眞相」, 이봉창의사장학회 엮음, 앞의 책, 193쪽; 「백범일지」, 326쪽.
52) 「東京炸案의 眞相」, 이봉창의사장학회 엮음, 앞의 책, 192쪽. 53) 金弘壹, 앞의 책, 274쪽. 54) 「제3회 신문조서」, 「이봉창의사 재판관련 자료집」, 404~405쪽. 55) 「白貞善이 木下昌藏에게 송금한 Yokohama Specic Bank의 영수증」, 白凡金九先生全集編纂委員會, 「白凡金九全集 (4)」, 1999, 대한매일신보사, 196쪽. 56) 「백범일지」, 326쪽. 57) 崔書勉, 「이봉창의거 연구서설」,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80주년기념 논문집(하)」, 1999, 國家報勳處, 150쪽. 58) 「東京炸案의 眞相」, 이봉창의사장학회 편, 앞의 책, 194쪽. 59) 「제2회 신문조서」, 「제3회 신문조서」, 「제7회 신문조서」, 「청취서」, 「이봉창의사 재판관련 자료집」, 391쪽, 407~411쪽, 457쪽, 538~539쪽. 60) 崔書勉, 앞의 글, 153쪽.
61) 「제3회 신문조서」, 「청취서」, 「이봉창의사 재판관련 자료집」, 411쪽, 540쪽. 62) 「제2회 신문조서」, 「제3회 신문조서」, 「청취서」, 「이봉창의사 재판관련 자료집」, 389~392쪽, 411~413쪽, 539~541쪽. 63) 崔書勉, 앞의 글, 155~156쪽.
64) 「日本近現代史辭典」, 1978, 東洋經濟新報社, 111~112쪽. 65)홍인근, 「이봉창평전」, 2002, 나남, 232~234쪽. 66) 崔書勉, 「자료의 수집경위와 가치」, 「이봉창의사 재판관련 자료집」, 5~6쪽. 67) 金弘壹, 앞의 책, 275쪽. 68) 한시준, 「이봉창의거에 대한 중국신문의 보도」, 「한국근현대사연구」 제36집, 2006, 한울, 155~161쪽. 金九는 청도의 「민국일보」가 〈한인 이봉창이 일황을 저격했으나 불행히도 명중하지 않았다(韓人李奉昌狙擊日皇不幸不中)〉라고 보도했다고 적었다(「백범일지」, 328쪽). 69) 「東京炸案의 眞相」, 이봉창의사장학회 엮음, 앞의 책, 194쪽. 70) 「백범일지」, 327쪽. 71) 「백범일지」, 327~328쪽.
72) 國史編纂委員會, 「韓國獨立運動史 資料2 臨政篇Ⅱ」, 257쪽. 73) 홍인근, 앞의 책, 161쪽.
74) 「韓國獨立黨宣言對李奉昌狙擊日皇事件」, 「白凡金九全集 (4)」, 197~198쪽; 홍인근, 앞의 책, 164~166쪽. 75) 홍인근, 앞의 책, 167쪽. 76) 「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篇), 697쪽. 77) 國史編纂委員會, 「韓國獨立運動史 資料2 臨政篇Ⅱ」, 257쪽. 78) 「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篇), 697쪽 ; 홍인근, 앞의 책, 122~123쪽. 79) 「新韓民報」 1932년 1월14일자, 「滿洲倭亂記: 리봉창씨의 폭탄소리에 왜황이 놀래고」. 80) 「新韓民報」 1932년 1월28일자, 「리봉창씨사건에 처벌」. 81) 崔書勉, 앞의 글(1999), 156쪽. 崔書勉씨는 이 정보를 전후에 일본에서 발행된 한 사진자료집에서 얻었다고 했다.
82) Syngman Rhee, Log Book of S. R. 1932년 1월9일조. 83) 「屠倭實記(國內版)」, 「白凡金九全集(1)」, 666~667쪽.
金九는 李奉昌이 일본 천황을 죽일 수 있다는 말을 듣고 곧 決行할 준비를 했다.
萬寶山事件에 이어 滿洲事變이 발발하자 臨時政府는 特務工作을 벌이기로 하고 그 임무를 金九에게 일임했다.
資金은 하와이의 愛國團 간부들이 보내 주었다. 金九는 중국군 병공창의 책임장교 金弘壹과 중국 군인을 통하여 수류탄 두 개를 입수했다.
韓人愛國團 제1호 단원이 된 李奉昌은 日本으로 건너가서 1932년 1월8일에 陸軍始觀兵式에 참석하고 돌아가는 日本天皇에게 수류탄을 던졌다.
거사가 있던 이틀 뒤에 李承晩은 미국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美國의 한 방송국에 가서 日本의 滿洲侵略을 규탄하는 라디오 演說을 했다.
(1) 밤중에 「假政府」 찾아온 「일본영감」

1930년 5월30일에 間島에서 발생한 대규모의 폭동사건은 관동군을 더욱 자극했다. 이 폭동은 중국공산당 연변당부 주관 아래 이미 중국공산당에 가입해 있던 한인공산주의자들이 일으킨 것이었다.1)

사위스러운 1931년 1월 초순의 어느날 저녁이었다. 임시정부청사 겸 교민단 사무실로 쓰고 있는 프랑스조계 보경리 4호의 으슥한 골목 안 집에 서른 살쯤 되어 보이는 한 낯선 동포가 찾아왔다. 그는 일본말 섞인 한국말을 하고 있었다. 아래층에 있던 몇몇 청년들은 그를 일본의 밀정이 아닌가 의심하고 문 밖으로 내어 쫓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물러가지 않으려고 우겨 양쪽 목소리가 높아졌다. 2층에 있던 金九가 소란스러운 소리를 듣고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그 낯선 동포는 말했다.
『저는 일본에서 노동을 하다가 독립운동을 하고 싶어 상해에 假政府(가정부)가 있다기에 며칠 전에 상해로 왔습니다. 여기저기 다니다가 전차표 검사원이 가정부의 위치를 가르쳐 주어 찾아왔습니다』
「가정부」란 일본인들이 임시정부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낯선 동포는 자기는 서울 용산 태생이며 이름은 李奉昌(이봉창)이라고 했다. 金九는 이봉창에게 상해에 독립정부가 있기는하나 아직 독립운동자들을 먹이고 입힐 역량이 없으므로 독립운동을 하려면 가지고 있는 돈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돈이 있느냐고 물었다. 이봉창은 대답했다.
『지금 가지고 있는 돈은 여비하고 남은 것이 10여 원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생활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있소?』
『그런 것은 걱정 없습니다. 저는 철공장에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노동을 하면서는 독립운동을 할 수 없습니까?』
金九는 이 말에는 대답하지 않은 채 오늘은 늦었으니까 근처 여관에 가서 자고 내일 다시 이야기하자고 말하고, 민단 사무원 金東宇(김동우)에게 여관을 잡아 주라고 지시했다. 金九는 그의 언행이 일본인과 비슷하여 특별히 조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2)
이봉창의 「신문조서」에는 그가 임시정부를 처음 방문했을 때의 상황이 좀 다르게 서술되어 있다. 이봉창이 1931년 1월 초에 민단사무소를 찾아갔을 때에 그를 맞이한 사람은 민단 사무원 金東浩[金東宇의 오기]였다. 이봉창은 김동호에게 자신의 경력을 말하고 영국전차회사에 취직할 수 있도록 주선해 달라고 부탁했다. 김동호는 영어와 중국어를 하지 못하면 채용해 주지 않는다면서 먼저 두 나라 말을 배워야 한다고 했다. 이봉창은 그러고 싶었으나 그럴 만한 돈이 없었다. 결국 일본에서처럼 다시 일본인을 상대로 일자리를 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3) 이봉창의 이러한 진술내용은 아마 여관에서 자고 난 이튿날의 일이었을 것이다.
金九는 이봉창에게 자신을 白貞善이라고 소개했다. 이봉창은 金九에게도 영국전차회사에 취직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부탁해 보았으나 金九의 대답도 김동호와 마찬가지였다.4) 이봉창은 임시정부와 교민단의 주의·강령·목적이 어떤 것인지 물었다. 그것이 자기가 희망하고 있는 한국의 독립운동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단원으로 가입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물었던 것이다.
그러나 金九는 교민단은 상해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의 직업소개와 상호친목을 도모하는 것을 사업의 목적으로 하고 있고, 매월 각자 1원 정도의 회비를 모아 부인회·어린이회와 그밖의 한국인이 개최하는 여러 가지 행사를 후원하고 있다는 정도밖에 말해 주지 않았다. 이 말에 대해 이봉창은 金九가 자신이 어떤 인물인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어물어물 둘러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5)
며칠 뒤에 이봉창이 술과 국수를 사 가지고 와서 민단 식당에서 몇몇 직원들과 술자리가 벌어졌다. 술이 거나해지자 이봉창이 목소리를 높여 동지들에게 물었다.
『일본 천황을 죽이기는 아주 쉬운 일인데, 왜 독립운동자들이 이 일을 실행하지 아니합니까?』
앉아 있던 사람들은 냉소했다.
『그렇게 쉬운 일이라면 왜 여태까지 못 죽였겠소』
그러자 이봉창이 말했다.
『내가 연전에 동경 있을 때에 하루는 일본 천황이 하야마[葉山 : 일본 가나가와(神奈川)현의 해수욕장으로 유명한 별장지. 천황의 별장이 있다]에 간다기에 구경하러 가서 보았는데, 천황이 바로 내 앞으로 지나가는 것을 보고 〈이때에 내게 총이나 폭탄이 있으면 어찌할까〉 하는 생각이 얼른 들었습니다』6)
2층에서 이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金九는 이봉창이 비범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金九는 그날 저녁에 이봉창이 머무는 여관을 찾아가서 속마음을 털어놓고 솔직한 대화를 나누었다. 과연 이봉창은 의기남아로서 살신성인할 큰 결심을 가슴에 품고 상해로 건너와서 임시정부를 찾아온 것이었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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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奉昌은 성격이 쾌활하고 친화력이 있었다. 그는 日本말도 잘했다. |
1925년 11월 하순에 오사카(大阪)에 도착한 이봉창은 국내에 있을 때보다 더 나은 일자리를 찾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으나,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쉽게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을 일본인과 똑같은 「신일본인」이라고 생각했으나 일본인들은 그를 조선인으로 차별했다. 그러나 그는 이내 취직을 하게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인과 동등한 대우를 받으면서 어려움 없이 생활하게 되었다.
「신일본인」으로 살아가던 이봉창의 삶과 의식을 바꾸어 놓은 것은 스스로 〈완전한 일본인〉이 되기 위해서 천황 즉위식을 보러 갔다가 구금된 사건이었다. 이봉창은 1928년 11월에 교토(京都)에서 히로히토(裕仁)의 즉위식을 거행한다는 소식을 듣고 「신일본인」으로 살고자 하는 자신이 천황의 얼굴도 모르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하고 친구들과 함께 즉위식을 구경하기 위해 교토로 갔다.
그러나 고향친구로부터 온 국한문혼용의 편지가 주머니 속에 들어 있었던 것이 문제가 되어 천황은 구경도 하지 못한 채 경찰서 유치장에 11일 동안이나 구금되었다가 풀려났다.8) 이 사건을 계기로 그는 비로소 자신이 조선인이라는 것을 의식하게 되었고 「신일본인」으로 살아가고자 한 것을 반성하게 되었다.
이봉창은 누군가 자신을 이끌어 줄 지도자만 만난다면 조선독립을 위해서 일할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일본인 행색을 하면서 평범한 노동자로 살아가는 그에게 그런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결국 그는 생각을 고쳐먹고 다시 일본인으로 살아가는 길을 택했다.
그는 1929년 2월부터 오사카의 쓰루하시(鶴橋)에 있는 비누도매상에 일본인이라고 속이고 취직했다. 그는 기노시타 쇼오조(木下昌藏)라는 일본 이름을 사용하면서 조선인과의 교제를 완전히 끊었다. 〈사랑하는 조카딸의 집조차 출입을 하지 않고 지냈다〉9)고 했을 만큼 철저하게 일본사람으로 행세했다.
그러나 자신의 그러한 행위가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깨닫게 되었다. 비누가게에 물건을 사러 온 조선인이 일본 말이 서툴러 주인한테서 곤욕을 당하는 것을 보면서도 그것을 그냥 지켜보았던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는 〈조선인이 조선인으로 행세하지 않는 것은 거짓이다〉라고 후회하게 되었다.10)
이봉창은 1929년 10월에 도쿄로 가서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일을 하다가 1930년 11월에 다시 오사카로 돌아왔으나,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다. 어느 친구로부터 상해의 영국전차회사에서 조선인을 우대하여 채용한다는 말을 들었다. 마침내 그는 2년 동안 일본인으로 속이고 살던 고통을 떨쳐 버리고 〈이제부터는 본명인 이봉창으로, 차별이나 압박을 받아도 두려워하지 않는 조선인으로 생활할 각오〉11)를 하고 상해로 갔다.
이봉창은 1930년 12월6일에 쓰이코(築港)에서 일본인 옷차림을 하고, 「기노시타 쇼오조」라는 이름으로 여객선에 올라 나흘 뒤인 12월10일에 상해에 도착했다. 이봉창은 배 안에서 알게 된 일본인들과 여관에서 2, 3일 묵은 뒤에 중국인 여인숙으로 옮겨서 일자리를 찾아다녔다. 그러나 한 달이 되도록 일자리를 구할 수 없어서 상해로 올 때에 가지고 있던 18원가량의 돈도 다 떨어졌다. 할 수 없이 그는 어느 일본인 양복점 주인이 운영하는 무료 숙박소에서 잠을 자면서 임시정부를 찾아가 보기로 했다. 임시정부를 찾아가면 취직을 도와줄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12)

이봉창은 金九에게 다음과 같이 자신의 포부를 털어놓았다.
『제 나이 서른한 살입니다. 앞으로 다시 서른한 살을 더 산다 하여도 과거 반생 동안 방랑생활에서 맛본 것에 비한다면 늙은 생활이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31년 동안 육신으로는 인생쾌락은 대강 맛보았으니, 이제는 영원한 쾌락을 도모하기 위해 우리 독립사업에 헌신할 목적으로 상해로 왔습니다』
이봉창의 이 말을 듣고 金九는 〈이씨의 위대한 인생관을 보고 감동의 눈물이 벅차오름을 금할 길이 없었다〉13)고 적고 있다.
이봉창은 겸손한 태도로 나라 일에 몸 바칠 수 있도록 지도해 달라고 金九에게 청했다. 金九는 쾌히 승낙했다.
『1년 이내에 군의 행동에 대한 준비를 하겠소. 그런데 지금 우리 정부의 형편이 어려워서 군이 살아갈 방도를 마련해 주기가 어렵고, 군의 장래 행동을 위해서는 우리 기관 가까이 있는 것이 불리하니 어찌하면 좋겠소』
『그러시다면 더욱 좋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일본어를 익혔으므로 일본에서 지낼 때에 일본사람의 양자가 되어 기노시타 쇼오조로 행세했습니다. 이번에 상해로 오는 도중에도 이봉창이라는 본래 이름을 쓰지 않았으니까 계속 일본인 행세를 하겠습니다. 일을 준비하실 동안은 제가 철공일을 할 줄 아니 일본인의 철공장에 취직하겠습니다. 그러면 봉급도 많이 받을 수 있습니다』
金九는 그 말에 찬성하고, 특별히 다음과 같이 당부했다.
『우리 기관이나 우리 사람들과의 교제를 빈번히 하지 말고 순전히 일본인으로 행세하고, 한 달에 한 번씩 밤중에만 찾아오시오』
그리고는 일본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虹口로 가서 일본인 행세를 하여 세간의 이목을 피하도록 했다.14) 이봉창은 일본인이 경영하는 YMCA에서 소개해 준 明華[또는 明善]철공소에 대장장이로 취직했다. 처음에는 용돈 정도의 돈을 받았으나 두 달이 지나면서 하루 2원의 임금을 받았다.15)

金九가 이봉창을 다시 만난 것은 그로부터 두어 달 지난 3월이었다. 일본인 철공소에 취직하여 어느 정도 생활이 안정된 이봉창이 다시 임시정부를 찾아온 것이었다. 이때에 金九는 이봉창에게 일본의 사정을 두루 물었다. 일본에 거주하는 한국인의 대우와 생활상태 등을 묻고, 東京에서 얼마 동안 살았는지를 물었다. 그러고 나서 천황이 나들이할 때에 경계가 얼마나 엄중한지, 무엇인가 세상을 놀라게 할 만한 사건을 일으킬 수 있겠는지 등을 캐물었다. 그리고 한번 더 일본에 갈 일은 없느냐고 물었다.
이봉창이 그 까닭을 묻자 金九는 진담 반 농담 반의 말투로, 폭탄을 들고 일본으로 건너가서 큰일을 한번 해 볼 생각이 없느냐고 말했다. 이봉창은 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하지 못할 것도 없다고 대답했다. 이봉창은 불현듯 자신이 교토의 경찰서에 검속되었던 일이 떠올랐다. 그리고 자신이 일본인으로 속이고 살았으나 만족하지 못해 떳떳하게 한국인으로 살기 위해서 상해로 왔는데, 이곳에서도 뜻대로 살지 못하고 다시 일본인으로 속이고 살 수밖에 없게 된 자신의 처지를 말했다. 그러면서 金九에게 폭탄이든 무엇이든 적당한 무기만 있으면 일본으로 가서 「사건」을 일으켜도 좋다고 했다.16)
천황을 죽일 수 있다는 이봉창의 말에 金九는 흥분했다. 그는 곧바로 金弘壹(김홍일)을 찾아갔다. 중국군에 근무하던 김홍일은 이때에 상해 병공창 주임으로서 중국군의 무기를 관리하는 책임장교였다. 두 사람은 설레는 가슴을 억누르며 장시간 진지하게 대책을 논의했다. 金九는 김홍일에게 다음과 같은 계획을 말했다. 관병식에 참석하기 위해 천황이 마차를 타고 니주우바시(二重橋)를 거쳐 큰길로 나설 때에 이봉창은 그 맞은편 길가에서 군중과 함께 일본 천황에게 공손히 절을 하는 체하다가 번개처럼 날쌔게 폭발물을 던진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관례로 보아서 천황이 타고 가는 마차와 군중이 도열한 곳과의 거리는 적어도 100m 이상은 될 것이었다. 김홍일은 그 점에 대하여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100m 이상이나 떨어져 있는 표적물을 보통의 수류탄으로 명중시키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김홍일은 약간 구식이기는 하더라도 麻尾(마미)수류탄을 사용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마미수류탄은 보통 수류탄보다 폭발력이 약한 것이 단점이었으나 무게가 가벼워서 멀리 던질 수 있는 데다가 불발탄이 없고 휴대하기가 간편한 이점이 있었다.17)

이봉창은 4월 말쯤에 金九를 다시 찾아왔다. 이때에 金九는 이봉창에게 정말로 일본 천황에게 폭탄을 던질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金九는 전번에 만났을 때에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묻던 것과는 달리 진지하고 엄숙했다. 이봉창도 金九와 같은 어조와 태도로 자신이 일본에 오래 살았고 도쿄의 지리도 잘 알기 때문에 폭탄만 있으면 천황이 지나갈 때에 던지는 것은 쉬운 일이라고 대답했다.
金九는 한국 독립을 위해서 일본 천황을 죽이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이봉창에게 설명했다. 이때에 이봉창은 교토의 천황 즉위식에 갔다가 검속되었던 일, 이를 계기로 자신의 사상경향이 현저하게 바뀐 일, 그리고 독립운동을 할 의욕이 생겼다는 이야기도 했다.18) 이봉창은 감옥에서 쓴 「上申書」(수기)에서 金九가 자신의 사상변화에 미친 영향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나의 사정도 이야기하고 일본의 사정도 들려주고 또 사상 문제에 대해 의견을 나누는 가운데 白(곧 金九)이 권하는 사상에 대해 논의하게 되었고, 나의 교토에서의 검속에 대한 원한도 회상하는 등 하여 점점 사상에 감염되어 갔는데…〉19)
이처럼 金九와의 만남은 이봉창의 운명을 바꾸어 놓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한 달쯤 뒤에 이봉창이 다시 金九를 찾아왔다. 이봉창은 상해에 독립운동단체가 있으면 가입하고 싶다면서 그러한 단체가 있는지, 혹시 임시정부에 참가할 수는 없는지 물었다. 金九는 독립운동단체가 두세 개 있기는 하나 어느 것도 착실하지 못하므로 그런 단체에 가입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으며, 임시정부도 형식적이어서 별로 힘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천황의 목숨을 빼앗겠다는 의지만 굳건하다면 단독으로 실행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러한 단체에 들어가서 거기에 의지할 필요가 없소. 단독으로 실행할 결심이 있으면 내가 후원자가 되어 주겠소』
『폭탄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 폭탄만 구할 수 있으면 일본으로 가서 일을 해보겠습니다』
金九는 폭탄을 구할 수 있다고 자신 있게 장담했고, 이봉창은 폭탄이 입수되면 알려 달라고 말하고 돌아갔다.20) 金九가 비밀 독립운동단체로 韓人愛國團을 조직할 필요성을 느낀 것은 이봉창과의 이러한 대화를 나눈 뒤였던 것 같다.
이봉창은 金九와 약속한 대로 서너 달에 한 번씩 金九와 비밀리에 만났다. 이봉창은 한 번 찾아올 때마다 반드시 술과 고기, 국수 등을 사 가지고 와서 민단 직원들과 어울려 술을 마셨다. 그는 취하면 곧잘 일본 노래를 유창하게 부르며 호방하게 놀았다. 그 때문에 여러 사람으로부터 더욱 더 의심을 받았으나, 이봉창은 그런 것을 개의치 않았다. 어떤 날은 일본인 행색으로 하오리에 게다를 신고 왔다가 정부 문을 지키는 중국인 경비원에게 쫓겨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일본영감」이라고 부르며 웃었다.
金九는 李東寧과 다른 국무원들로부터 한국인인지 일본인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인물을 정부 문 안으로 출입시켜 직무에 소홀하다는 꾸지람도 들었다. 金九는 조사 연구하는 사건이 있다고만 답변했다. 그러자 크게 꾸짖지는 못했으나, 여러 동지들이 불쾌하게 생각하기는 마찬가지였다.21)

이봉창은 8월 말쯤에 다니던 철공소를 그만두었다. 임금 지급이 좋지 않고, 일에 싫증이 나서 성실하게 근무하지 않자 주인이 그만두라고 했다. 이봉창은 전에 묵었던 무료 숙박소에서 열흘가량 있다가 다시 일본인이 경영하는 축음기 상점 榮昌公司에 점원으로 취직했다. 이봉창은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 9월 중순 무렵에 민단사무소로 金九를 찾아왔다.
이봉창은 金九에게 폭탄을 입수할 가망이 있는지 없는지 확실한 대답을 듣고 싶다고 말했다. 그로서는 폭탄입수 여부에 따라 자신의 앞날의 계획을 세워야 했기 때문이었다. 金九는 폭탄은 틀림없이 입수할 수 있고, 이봉창이 일본에 가는 여비도 마련할 수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리고는 오히려 이봉창이 결행할 결심이 섰는지를 되물었다. 그러자 이봉창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5년이나 10년을 더 사는 것도 흥미가 없습니다. 오히려 나는 빨리 죽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으므로 폭탄이 손에 들어온다면 반드시 책임지고 결행하겠습니다. 저는 어떤 일이든 중간에 흐지부지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폭탄이 틀림없는 것인지, 그리고 그 효력이 어떠한지를 확인한 다음 일본에 갈 생각을 하고 있으니 폭탄이 입수되면 곧바로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언제든지 오겠습니다』22)
이봉창이 폭탄의 성능을 실험할 것을 제의한 것은 천황을 반드시 처치하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金九는 폭탄은 자기의 경험으로 보아 6~7칸[13~15m] 거리 안에 있는 물건을 모두 파괴할 수 있는 위력이 있으므로 시험하지 않아도 문제가 없으니까 믿으라고 말하고, 폭탄과 여비가 준비되면 연락하겠다고 했다. 이봉창은 가능하면 연내에 입수되었으면 좋겠으나, 그것이 힘들면 다음해 3, 4월로 연기해도 좋다고 말했다.
이봉창의 이러한 말은 그 나름대로의 계산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동안 金九와 접촉하면서 金九의 형편이 매우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거사 자금이라야 기껏 여비 정도밖에는 마련할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한 그는 金九가 주는 돈은 일본까지 가는 교통비로 쓰고 일본에 가서는 적당한 일자리를 구해서 생활하면서 천황이 나들이하는 기회를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12월은 일본이 바쁜 때라서 바로 일자리를 구할 수 있을 것이므로 연내로 들어가는 것이 좋겠으나 1, 2월은 한산한 시기로서 쉽게 일자리를 구할 수 없을 것 같아, 연내에 준비가 안 되면 일자리가 많이 나는 3, 4월로 연기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金九는 모두 연내에 된다고 확답했다. 이봉창은 그 뒤에 민단사무소에 여러 차례 놀러 왔으나 11월 하순까지 한 번도 金九를 만나지 못했다.23)
(2) 萬寶山事件과 韓人愛國團
金九가 이봉창을 만나면서 일본 천황 폭살계획을 준비하고 있을 무렵에 뜻밖의 사태가 발생했다. 그것은 만주와 국내는 물론 상해의 동포사회에도 큰 영향을 미친 이른바 萬寶山事件이었다.

1931년 7월2일에 中國 吉林省 長春縣의 萬寶山 지역에서 한인 농민들과 중국 농민들 사이에 농수로 건설문제를 두고 발생한 충돌사건은, 그 규모는 사소한 것이었으나 일본인들의 모략과 관련된 것이었던 만큼, 크나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일본인들은 중국인 ?永德(학영덕)을 매수하여 일본 자금으로 長農稻田公司를 설립하게 하고 그를 지배인 자리에 앉혔다. 학영덕은 만보산 지역의 미개간지 약 200ha를 지주들과 10년 기한으로 조차 계약을 맺은 다음 장춘현 정부의 개간 승인을 얻기도 전에 이 땅을 한인 농민 李昇薰(이승훈) 등에게 10년간 조차하기로 계약을 맺었다. 이승훈은 한인 농민 180여 명을 그곳으로 불러들여 관개수로공사를 시작했다.
그런데 이 수로개척과 제방축조의 피해를 우려한 중국 농민들이 반대운동을 일으키고 장춘현 당국에 진정하여 공사를 강제로 중지시켰다. 그러나 한인 농민들은 일본영사관 경찰의 지원을 받아 중국 농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수로공사를 강행하여, 6월 말에 완공시켰다. 감정이 극도로 격화된 중국 농민 약 400명이 7월2일에 관개수로를 파괴했다. 그러자 한인 농민 및 일본영사관 경찰과 중국인 지주 및 주민 사이에 충돌이 일어났다.24) 그러나 이 충돌로 인명피해는 없었다.25)
만주점령을 계획하고 있던 關東軍에게 이 사건은 여간 호재가 아니었다. 관동군 당국은 長春 일본영사관에 지시하여 이 사건으로 많은 한인 농민들이 피해를 입은 것처럼 국내에 보도되게 했다. 그리하여 국내 몇몇 언론들은 정확한 사실 확인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과장되게 보도했고, 그 때문에 당장 화교배척운동이 광범위하게 일어났다.
화교배척운동은 7월2일 당일로 인천에서 시작하여 서울·원산·평양 등 각지에서 잇따랐다. 평양에서는 대낮에 화교상점과 가옥을 파괴하고 구타 학살하는 사건이 며칠간 계속되었다. 조선총독부는 이러한 사태를 방관하면서 화교들을 서둘러 귀국시켰다. 본국으로 돌아간 화교들은 자신들의 피해상황을 중국인들에게 호소했고, 이에 따라 이번에는 만주에 있는 한인 동포들에 대한 중국인들의 보복이 자행되었다.
사태가 점점 악화되자 민족 지도자들과 사회단체 등이 발벗고 사태수습에 나섰다. 이들은 화교습격의 중지를 호소하면서 피란민 구제와 화교들의 생활안전 회복, 만보산 사건의 진상조사와 재만동포들의 보호를 위한 대책에 부심했다. 「東亞日報」와 「朝鮮日報」에서는 사건의 진상을 자세히 밝히고 흥분한 국민들을 진정시키는 데 앞장섰다.26)

만보산 사건이 발생한 지 두 달 뒤인 9월18일 밤에 관동군의 奉天(瀋陽)수비대는 柳條溝에서 일본의 滿鐵(남만주철도회사) 선로를 폭파했다. 유조구는 蔣介石(장개석)과 제휴하고 있던 張學良의 근거지인 北大營 남쪽에 위치해 있었다. 그것은 미리 계획된 관동군의 모략에 따른 것이었다. 관동군은 그 폭파가 현지 중국군의 공격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그것을 구실삼아 전쟁을 도발했다. 이른바 滿洲事變〔9·18戰爭〕이었다.
국민당 정부는 9월21일에 국제연맹에 이를 제소하고, 이튿날에는 상해에서 反日대회를 열어 抗日구국회를 결성했다. 미국 정부는 11월29일에 일본 정부에 강력히 항의했고, 국제연맹은 12월에 영국의 리튼(Victor Robert Lytton)을 단장으로 하는 조사위원회를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이무렵에는 관동군은 이미 만주의 중앙부를 점령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관동군은 전쟁을 도발한 지 다섯 달밖에 되지 않아서 만주의 거의 대부분을 장악했다.
金九는 이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1년 전부터 우리 임시정부에서는 운동이 매우 침체한즉, 군사공작을 못 한다면 테러공작이라도 하는 것이 절대필요하게 되었다. 그런데 왜놈이 중국과 한국 두 민족의 감정을 악화시키기 위해 이른바 萬寶山事件을 날조하여 조선과 중국에서 대학살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다. 인천·평양·경성·원산 등 각지에서 조선인 무뢰배들이 일본인의 사주를 받아가지고 중국인을 닥치는 대로 타살하였다. 또한 만주에서 1931년에 9·18전쟁[만주사변]이 일어나 중국이 굴욕적으로 강화했다. 이 전쟁 중에 한인 부랑자들이 왜의 권세를 빌려 중국인에게 극단의 악행을 저질렀기 때문에, 중국인의 무식계급은 물론이고 유식계급 인사들까지도 이따금 민족감정을 말하는 자를 보게 되었다. 사태가 이에 이르니 우리 정부에서는 지극히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27)
만보산 사건과 만주사변으로 상해 동포사회는 아연 긴장했다. 만보산 사건이 발생하자 이동녕을 비롯한 임시정부 국무위원들과 흥사단장 安昌浩 등이 임시정부 사무실에서 회의를 열고 대책을 강구했다. 국민정부에 대해 국내 사태가 오로지 일본의 사주와 선동에 의한 것임을 이해시키고, 외무장 趙素昻(조소앙)의 이름으로 중국신문에 성명서를 발표했다. 임시정부는 7월9일자로 상해한인각단체연합회 명의로 국민정부와 중국의 중요단체 앞으로 「通電」을 발송하여 만주의 한인들을 차별 없이 보호하여 일본인들이 농간을 부릴 기회를 주지 말 것을 촉구했다.28)

뒤이어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임시정부는 9월20일에 긴급회의를 열고 우선 중국의 각 기관과 신문사에 한인단체연합회 명의로 일본을 비판하는 「통전」을 보내고 다음날 상해에 있는 각 단체 대표회의를 소집하기로 결의했다. 이튿날 오후 3시에 임시정부 사무실에서 열린 대표회의에는 임시정부를 비롯하여 僑民團, 丙寅義勇隊, 韓國勞兵會, 興士團, 愛國婦人會 등 9개 단체 대표들이 모였다.
金九는 교민단 대표로 회의에 참석했다. 회의에서는 중국을 지원하고 제국주의 일본을 타도하기 위하여 상해한인각단체연합회를 조직하기로 합의하고, 교민단과 연합회의 공동명의로 上海韓僑전체대회를 소집하기로 했다. 또한 회의 결의에 따라 연합회는 국민정부, 국민당 중앙당부, 중국의 각 신문사에 대하여 국제연맹에 의존하지만 말고 對日전쟁을 결행할 것을 촉구하는 「통전」을 발송했다.29)
병인의용대는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극비리에 대원들을 소집하여 그들로 하여금 중국인으로 변장하고 일본총영사관 등 일본 관계 중요기관을 폭파하여 中·日 간의 분규를 확대시킬 것과 각 요소에 비밀 수사반을 잠복시켜 일본탐정을 암살하기로 결의했다.30)
9월25일에 열린 상해한교전체대회에는 300여 명의 동포들이 모였다. 金九의 개회사에 이어 이동녕이 의장이 되어 회의를 진행했다. 일본 만주침략의 배경에 대한 외무장 조소앙의 자세한 보고에 이어 安昌浩, 車利錫, 趙琬九 등의 비분강개한 연설이 있은 다음 6개항의 결의안을 채택했다.
1) 중국 동삼성을 침략하는 일본을 대항할 일, 2) 국내외 동포는 당연히 선언서를 발표하여 한·중 양 민족의 연합전선을 구체적으로 실현케 할 일, 3) 동삼성에 있는 2백만 교포로 하여금 중국 민중과 생사영욕을 같이하여 걸음을 일치케 할 일, 4) 적의 세력하에 있어서 그 침략의 도구와 사냥개가 되는 무리를 소탕할 일, 5) 중국이 일본에 대하여 속히 무력행동을 취하는데 노력할 일, 6) 한·중 양 민족의 국토 광복과 주권 회복에 공동분투하기 위하여 급히 동맹군 조직을 도모할 일.31)
한·중 양 민족의 연합전선 구축의 필요성을 강조함과 아울러 일본의 대륙침략의 앞잡이가 되고 있는 한인들의 척결을 강조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임시정부도 10월1일자로 「국내외 동포에게 고하노라」는 성명서를 발표하여 〈민족적 혁명역량을 최단기에 집중하여 중원의 호걸과 세계우방의 혁명동지로 더불어 완실한 연합전선을 체결하여 적의 심장을 직도할진저〉라고 호소했다.32)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도 상해에 있는 한국독립운동자들의 태도는 일치하지 않았다. 한인공산주의운동 단체들은 별도로 행동했다. 그들은 등사한 인쇄물을 시내 각처에 살포하여 제국주의 일본이 세계혁명의 총본영인 소비에트연방을 공격하기 위해 제2차 세계대전의 전초전을 개시했다고 말하고, 〈제국주의의 주구 중국 국민당과 군벌을 타도하자〉고 주장했다.33) 金九는 한인공산주의자들의 집중적인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그들은 上海大韓僑民團稅不納同盟을 결성하고 교민단세 납부거부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12월28일에는 교민단세 불납동맹 명의로 「재상해 소위 대한교민단의 민단세 강제징수에 대하여 전 상해 한인동포 제군에 檄함」이라는 성명서와 함께, 제국주의와 결탁하는 민단을 타도하고 민단세를 절대로 납부하지 말라는 「선언서」를 발표했다.34)
상해한교연합회의 결성과 임시정부의 선언문은 미주한인사회에도 큰 호응을 불러일으켰다. 중가주한인공동회는 10월17일에 회의를 열고 1)상해한교연합회와 행동을 같이하고 임시정부를 후원하고, 2)그러기 위하여 우선 후원금을 수합하여 임시정부에 보내고 응원을 계속하며, 3)재미한인의 총역량 집중을 위하여 재미한교연합회 조직을 발기한다는 3개항의 결의안을 채택했다.35) 11월2일에 중가주한인공동회 대표 김정진은 국민회 총회장 및 선전부 위원들과 합석회의를 열어 재미한인들의 행동을 일치시키기로 하고, 11월9일에 미주한인연합회 발기문과 임시규약을 작성하여 대외에 공포했다.36)

金九가 비밀리에 한인애국단을 조직한 것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였다. 그러나 한인애국단의 조직경위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없다. 金九도 한인애국단의 조직과 관련해서 다음과 같이 아주 간략하게 적어 놓았을 뿐이다.
〈상해의 길거리에서도 중국과 한국 노동자들 사이에 종종 충돌이 일어나던 때에 나는 정부 국무회의에서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암살, 파괴 등의 공작을 시행하게 되었다. 공작에 사용하는 돈과 인물의 출처에 대해서는 일체의 전권을 위임받았고, 다만 성공·실패의 결과는 보고하라는 특권을 얻었다. 그리하여 제1차적으로 이봉창의 동경사건을 주관하였다.〉37)
〈그러나 최근 수년 내로는 경제의 極困과 사상의 혼란이 계속하여 사업진행에 지장이 적지 않았고, 인재를 널리 구할 길까지 없었다. 나는 이를 개탄하여 권토중래의 세로써 나의 사업을 부흥시키고자 하여 쇄신한 정신과 삼엄한 훈련하에 한인애국단을 비밀히 조직하였다.〉38)
이봉창의 거사가 있고 난 2년 뒤에 상해의 일본총영사가 국무위원 金澈의 조카 金晳을 체포하고 그의 진술에 근거하여 본국 정부에 보낸 보고서에 따르면, 한인애국단이 조직되기까지에는 임시정부 안에서 알력이 없지 않았다. 만주사변 뒤에 임시정부는 누차 국무원회의를 열고 협의한 결과 임시정부의 퇴세를 만회하기 위한 방책을 논의했다. 그리하여 중국 민중의 항일기세가 오른 것을 기회 삼아 중국 쪽으로부터 자금지원을 얻어서 테러공작을 감행할 특무대라는 기관을 설치했다. 金九를 대장으로 임명하고, 사업의 계획과 실행 일체를 그에게 일임함과 아울러 임시정부 수입의 반액을 특무대에 지급하기로 했다.
조소앙은 특무대의 명칭을 義生團이라고 하고, 선언·강령·규약을 작성하여 金九에게 주었다. 그러나 金九는 安恭根의 집에서 잠을 자다가 어린아이가 문서를 찢어 버려서 없어졌다.39) 특무대의 명칭이 한인애국단으로 바뀌게 된 것은 金九 자신도 언급하고 있듯이, 이봉창이 한인애국단에 입단하면서부터였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한인애국단은 철저한 비밀결사조직이었기 때문에 그 실체나 명칭은 대외적으로 공개되지 않았다. 그것이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32년 10월에 金九가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 전모를 밝히는 성명서를 발표했을 때였다.
그런데 특무대 조직과정에서 金九파와 조소앙파 사이에 알력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외무장 조소앙은 1931년 11월 상순에 중국 국민당 중앙당부 조직부장 陳立夫로부터 중국돈 5,000달러를 지원받아서 그 반액을 金九에게 주었다고 한다. 나머지 반액도 재무장인 金九에게 주어야 했으나, 조소앙은 그러지 않고 그 자금으로 자기 주도하에 활동할 별도의 기관을 설치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조소앙은 2,500달러를 자기가 보관하고 있다가 朴昌世·김철 등과 의논한 다음 12월 중순에 김동우·李德柱·柳相根, 李秀峰 등을 규합하여 한국의용대를 조직하기로 하고 임시정부에 승인을 요청했다고 한다.
그러나 金九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조소앙의 계획은 임시정부의 승인을 얻지 못했다. 그런데도 조소앙은 자신의 계획을 포기하지 않고 金九와 대립했다. 이 과정에서 金九의 부하인 김동우·유상근·이덕주 등이 조소앙에게 포섭되고 金九는 고립상태에 빠졌다고 한다. 그러나 이봉창의 도쿄거사가 있고 난 뒤에 김석은 의용대를 해체했다는 것이다.40) 그런데 상해 일본총영사의 이러한 보고를 확인할 만한 다른 자료는 없다.

그러구러 11월이 되었다. 安昌鎬·林成雨 등 하와이의 유지 동포들이 약속한 대로 1,000달러의 자금을 보내왔다.41) 이때까지는 거사에 사용할 폭탄(수류탄)도 확보해 놓고 있었다. 金九는 수류탄 두 개를 마련했는데, 하나는 김홍일을 통하여 중국군 병공창에서 구한 것이었고, 또 하나는 金鉉을 통하여 河南省의 劉峙(유치)에게서 구한 것이었다. 하나는 일본 천황에게 던질 것이고, 또 하나는 이봉창의 자살용이었다. 마침내 12월6일 밤에 임시정부 청사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金九는 이봉창의 일본 천황 폭살계획을 보고했다.
『이봉창이라는 사람을 도쿄에 파견하여 왜황에게 폭탄을 투척하도록 하기 위한 준비를 완료했습니다. 승낙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 놀라운 보고에 대하여 조소앙과 김철은 반대했다. 공연히 경비만 들 뿐이고 성공할 가망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자금도 확보했고 모든 준비가 완료된 뒤였으므로 결국 전원이 이를 승인했다.42)
국무회의의 승인을 받은 金九는 이봉창을 불렀다. 金九는 이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때는 작년 말 12월 초이다. 우리가 고대하던 기회는 왔다. 여러 개의 작탄을 만드는 동시에 약간의 금전도 얻었다. 그 돈은 미주·하와이·멕시코에서 노동하는 교포들의 피땀으로 된 것이니, 본래 그들이 특무에 사용하라는 조건하에 정부에 보낸 것이다. 전월 11일에 열강의 군대는 黃浦부두 平和神像 앞에서 허위의 화평을 축하하였는데, 나는 진정한 화평을 실현할 준비를 하고자 중흥여관에서 방을 정하고 이의사를 불러왔다. 그에게 만반의 준비됨을 고하니 그는 매우 기뻐하였다. 그 밤에 敵皇을 작살하는 우리의 실제 계획을 의정한 뒤 나는 걸인의 의복같이 더럽고 떨어진 두루마기에서 은전 다량을 내어주고 곧 홍구로 돌아가서 동경으로 출발할 행장을 급히 정돈하게 하였다.〉43)
12월13일 밤에 두 사람은 프랑스 공원 근처의 어느 한국인 집에서 만났다.44) 金九는 거기에서 이봉창을 근처의 러시아인의 식당으로 데려가서 음식을 먹으면서 마침내 준비가 다 되었음을 알렸다. 그러면서 金九는 이봉창에게 언제 일본에 가겠는지를 물었다.
『언제든지 좋습니다. 모든 준비가 갖추어지면 오는 12월17일에 고베(神戶)로 바로 가는 배가 있는데, 그 배에는 일본으로 돌아가는 방적회사 친구들이 여러 명 타고 가므로 이왕이면 그 배로 가는 편이 좋겠습니다』
金九는 이봉창의 말을 듣고 나서 중국 지폐로 300달러를 이봉창에게 주면서 여비와 그밖에 일본에 가는 데 필요한 경비에 쓰라고 했다. 이봉창은 金九가 폭탄 준비나 그 밖의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 없이 너무나 갑작스럽게 거사를 실행하려고 하는 데다가 생각보다 많은 돈을 주는 데 놀랐다. 저녁을 먹은 뒤에 金九는 이봉창을 어느 사진관인 듯한 집으로 데리고 갔다. 그곳은 安恭根의 집이었다. 그곳에는 폭탄 두 개와 선서문과 태극기가 놓여 있었다. 선서문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나는 赤誠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야 韓人愛國團의 일원이 되어 적국의 수괴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
선서식이 끝난 뒤에 이봉창은 선서문을 가슴에 달고 수류탄을 양손에 들고 태극기를 배경으로 하여 환하게 웃는 표정으로 사진을 찍었다. 이렇게 하여 이봉창의 한인애국단 가입절차가 끝났다. 그는 한인애국단 제1호 단원이 된 것이다.
사진을 찍고 난 뒤에 두 사람은 잠시 걸으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때에 이봉창은 金九에게 폭탄 사용법을 가르쳐 달라고 했다. 金九는 시간이 늦었으니 내일이나 모레쯤 와 주면 그때에 가르쳐 주겠다고 하고 그날은 그냥 헤어졌다.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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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손에 수류탄을 들고 태극기 앞에서 웃으면서 기념촬영을 한 李奉昌(왼쪽)과 韓人愛國團 가입 선서문(오른쪽). |

이봉창은 이틀 뒤인 12월15일 밤에 필요 없게 된 이불 등을 싸들고 新天祥里 20호로 金九를 찾아왔다. 金九는 이봉창을 어느 중국요리집으로 데리고 가서 같이 저녁을 먹었다. 식사가 거의 끝날 무렵 金九는 잠깐 기다리라면서 밖으로 나갔다가 무엇인가를 싼 보자기를 가지고 왔다. 신문지에 싼 폭탄 두 개였다. 12월13일 사진을 찍을 때에 가지고 찍은 그 수류탄이었다. 저녁을 먹은 뒤에 金九는 이봉창을 중흥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폭탄 사용법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46) 金九는 김홍일에게서 수류탄 사용법을 익혀 두었던 것 같다.
그날 밤에 두 사람은 여관에서 같이 자면서 미진한 계획을 구체적으로 보완했다. 金九는 이봉창에게 말했다.
『동경에 도착하자마자 전보하시면 다시 송금하리다』
그러자 이봉창은 이렇게 말했다.
『저는 그저께 그 돈을 받아 가지고 온 밤을 자지 못했습니다. 대관절 나를 어떻게 믿고 거액을 주셨습니까. 그날 부르심을 받고 먼저 정부기관 집으로 간즉 직원들이 밥을 굶는 모양이기로 제가 돈을 내 놓았는데, 그 밤에 선생님이 남루한 의상 중에서 거액을 나에게 주시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선생께서는 프랑스조계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시니 만약 제가 이 돈을 가지고 가서 제 마음대로 써버리고 다시 오지 아니하면 어찌하시려 했습니까. 과연 관대한 도량과 엄정한 공심을 뵙고 탄복하여 긴 밤을 그대로 새웠습니다』47)
이봉창은 이날 金九에게 임시정부에서 송별회를 열어 줄 것을 요구했다. 그 자리를 빌려 자신의 결행의지와 거사의 의의를 밝히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일본인은 관헌까지도 우리 조선인을 차별대우하며 학대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 나라를 독립시켜 조선인의 국가를 갖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터에 金九로부터 천황을 죽이는 것이 조선의 독립을 촉진시키는 첩경이라는 말을 듣고 과연 그렇다고 생각되어 2천만 동포를 위해 천황을 죽이기로 결심하기에 이르렀던 경위와, 이 일이 결코 이봉창 한 사람의 난폭이 아니라 민족을 대표한 희생자로서의 결행이라는 자신의 각오를 발표할 기회를 얻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金九는 그런 말을 하면 시끄러워질 뿐이므로 이 일은 오직 두 사람만의 문제이며 임시정부나 어떤 단체와도 전혀 관계 없는 일이라면서, 이봉창의 요구를 받아 주지 않았다.48)
다음날 이봉창은 영창공사에 가서 짐을 싸고 신변을 정리한 뒤에 날이 저물어서 다시 金九를 찾아왔다. 金九는 이봉창과 함께 저녁을 먹은 뒤에 시계점으로 가서 손목시계를 사서 이봉창에게 주면서 같이 여관으로 갔다.
이봉창은 체포될 경우 취할 방법을 金九에게 물었다. 金九는 선서문을 가슴에 달고 수류탄을 들고 찍은 사진을 보여 주고 선서문 그대로라고만 말하고 그 밖의 일은 될 수 있는 대로 입 밖에 내지 말고 버티라고 했다. 그러나 온갖 수단을 동원한 고문과 취조로 무엇이라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되면 金九 자신에 관한 것과 그 밖의 사실을 털어놓고 말해도 괜찮다고 덧붙였다. 이봉창이 거사에 관한 趣意書(취의서) 같은 것이 없으면 곤란할 것 같다고 하자, 金九는 선서문 내용이 사진에 찍혀 있으므로 모든 것은 그것으로 판명될 것이니까 특별히 그런 문서를 가지고 있을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金九는 폭탄을 지니고 가는 방법을 자세히 설명했다. 두 개의 폭탄을 중국 비단으로 만든 좁고 긴 주머니에 하나씩 넣고 폭탄이 양 허벅지에 끼이도록 한 다음 주머니 끝을 배에 묶고 그 위로 팬츠를 입어 감추도록 했다.
이어 金九는 이봉창에게 그의 행적을 영원히 남기기 위해 이력서를 쓰라고 했다. 재판을 받을 때의 주의사항도 이야기해 주었다. 재판정에 나갈 때에는 일본인들이 선임해 준 관선 변호사를 거절하고 자신이 생각하는 것만 진술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49)

12월17일 아침이 밝았다. 이봉창은 아침 8시30분쯤에 일어나서 金九가 가르쳐 준 대로 폭탄 두 개를 사타구니에 차고 양복을 입었다. 그리고는 金九와 함께 여관을 나섰다.50) 두 사람은 중국음식점으로 가서 최후의 축배를 들어 성공을 기원하며 다음 세상에서 다시 만날 것을 기약했다. 음식점에서 나온 金九는 다시 만나지는 못할지라도 사진으로나 함께 있자는 뜻에서 마지막 기념사진을 찍기로 했다. 사진을 찍으려 할 때에 자신도 모르게 金九의 얼굴에 처참한 기색이 보였는지 이봉창이 金九에게 말했다.
『저는 영원한 쾌락을 누리고자 이 길을 떠나는 것이니, 우리 두 사람이 기쁜 얼굴을 하고 사진을 찍으십시다』
金九는 그 말에 감동되어 마음을 굳게 가지고 억지로 미소를 띠고 사진을 찍었다. 두 사람은 악수로 작별하고 이봉창은 택시에 올랐다.51)
상해부두에는 많은 일본사람들이 이봉창을 배웅하러 나와 있었다. 金九는 이봉창의 성품을 설명하면서 그가 상해부두를 떠날 때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익살스럽게 적어 놓았다.
〈이의사의 성행은 춘풍같이 화애하지만은 그 기개는 화염같이 강하다. 그러므로 對人談論에 극히 인자하고 호쾌하되 한 번 진노하면 비수로 사람 찌르기는 다반사였다. 술은 한량 없고 色은 제한이 없었다. 더구나 일본가곡은 못 하는 것이 없었다. 그러므로 홍구에 거주한 지 1년도 못 되어 그가 친하게 사귄 친구가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였다. 심지어 倭警察까지 그의 손아귀에서 현혹되기도 하고, ○○영사의 내정에는 무상출입이었다. 그가 상해를 떠날 때에 그의 옷깃을 쥐고 눈물지은 아녀자도 적지 아니하였지마는 부두까지 나와 가는 길이 평안하기를 기원하는 친우 중에는 왜경찰도 있었다.…〉52)
이봉창은 상해주재 일본총영사관의 경찰간부와도 친한 사이여서 그 경찰간부는 자기 명함에 이봉창을 위한 소개장을 써 주었다. 그 소개장의 수신인은 상해에서 일본에 들어가는 관문인 나가사키(長崎)의 경찰서장이었다. 소개장에는 이봉창이 동경으로 유학 가는 착실한 청년이니 잘 인도하여 주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봉창 의거 뒤에 소개장을 써 준 영사관 경찰간부는 즉시 파면되어 일본으로 소환된 뒤에 자살했다고 한다.53)
(3) 「韓國志士」 李奉昌이 日皇을 狙擊
이봉창은 12월17일 오후 3시에 고베(神戶)로 가는 우편선 고오리가와 마루(氷川丸)에 올랐다. 폭탄은 끌러서 트렁크에 넣었다. 12월19일 밤 8시경에 고베에 도착한 이봉창은 오사카를 거쳐 12월22일 도쿄에 도착하여 여관에 투숙했다. 다음날 이봉창은 金九에게 100원을 송금해 달라는 전보를 쳤다. 고베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7, 80원의 돈이 남아 있었으나 오사카의 술집에서 다 써 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돈이 오지 않고 아무런 회답도 없자 이봉창은 다시 싸구려 여인숙으로 옮겼다. 이봉창은 수중의 돈이 다 떨어져서 金九가 상해에서 사준 손목시계를 전당포에 잡혔다. 그것으로도 돈이 모자라자 이봉창은 여관 근처의 직업소개소를 찾아가서 취직알선을 부탁했다. 12월28일에 직업소개소는 초밥을 만드는 데 쓰이는 재료와 기계를 다루는 상점을 소개했다. 이봉창은 그곳에서 일하기로 작정하고 짐을 찾으러 여관으로 돌아왔다가 100엔을 보냈다는 金九의 전보를 받았다.54) 과연 金九는 12월28일에 100엔을 보냈다.55) 이봉창은 〈돈을 미친 것처럼 다 써 버려서 밥값까지 빚이 져 있었는데, 돈을 받아 빚을 다 갚고도 남겠습니다〉라는 편지를 썼다.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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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警視廳 앞의 거사 현장을 검증하는 日本警察들. |
이봉창의 거사소식을 초조하게 기다리던 金九는 1932년 1월 초에 〈상품은 1월8일에 꼭 팔릴 터이니 안심하라〉는 전보를 받고,58) 그날이 거사일임을 알았다.
거사일을 결정하자 이봉창은 金九가 지시한 대로 준비를 치밀하게 했다. 먼저 수류탄을 손질했다. 수류탄 주둥이에서 나무마개를 뽑고 쇠로 된 기계를 끼워 넣은 다음 안전핀을 뽑아서 언제 어디서든지 바로 던질 수 있게 해 놓았다. 이봉창은 1월6일에는 관병식이 열릴 요요기 연병장을 사전 답사했다. 이때에 그는 승합차 운전사로부터 뜻밖에도 도쿄헌병대 본부 소속의 한 헌병 명함을 얻어서 소중히 간직했다. 연병장은 너무 넓어서 천황에게 접근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는 천황이 오고 가는 길가에서 결행하기로 계획을 바꾸었다. 이날 이봉창은 여관을 옮겼다.
그는 그동안 묵던 여관에서 자신의 출생과 경력 등을 자세히 적은 수기를 썼다. 그러나 그런 것을 남기는 것이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날 저녁을 먹은 식당의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리고 엿이 든 종이상자 두 개를 사 가지고 여관으로 돌아왔다. 수류탄을 거사 현장까지 담아 가지고 가기 위해서였다.
거사 하루 전인 7일 저녁에는 가와사키(川崎)로 가서 그곳 유곽에서 잤다.59) 도쿄에서는 모든 여관, 음식점, 유곽 등 일반인들이 출입하는 장소와 진자(神社), 절, 빈 집 등에 대한 경계 검색이 심했기 때문이었다.60) 1월8일 아침 8시50분에 관병식 현장인 하라주쿠(原宿)역에 도착한 이봉창은 역 앞 중국음식점에서 아침을 먹으면서 기다렸다. 그러나 경비가 너무 엄중하여 하라주쿠에서 거사하는 것을 포기했다.61)
이봉창은 다시 전철을 타고 요쓰야(四谷)에서 내려 거기에서 거사하고자 했다. 그러나 신문팔이 소년으로부터 천황은 그곳으로 지나가지 않고 아카사카미쓰케(赤坂見附)를 지나간다는 말을 들었다. 이봉창은 오전 9시40분경에 아카사카미쓰케에 도착했으나 천황은 이미 그곳을 지나 요요기 연병장으로 간 뒤였다. 이봉창은 할 수 없이 천황이 돌아올 때에 거사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봉창이 일부러 시간을 맞추느라고 늑장을 부리다가 다시 아카사카미쓰케에 갔을 때에는 천황의 행렬이 막 지나간 뒤였다.
이봉창은 〈오늘은 틀렸나 보다〉고 낙담하며 마침 옆에 있던 선로인부에게 천황의 행렬을 보려면 어떻게 하면 되느냐고 물었다. 선로인부는 지름길을 가르쳐 주었다. 빈 택시 한 대가 이봉창이 서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그는 황급히 택시에 올라 천황의 행렬을 볼 수 있는 데까지 가자고 운전사를 재촉했다.
그러나 택시는 참모본부 앞을 거쳐 내리막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경찰의 제지로 멈추어 섰다. 차에서 내린 이봉창은 경찰이 없는 쪽으로 달려서 경시청 앞에 도착했다. 여기서도 경찰이 가로막았다. 이봉창은 일본 헌병의 명함을 보여 주면서 천황의 행렬을 보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허락을 받은 그는 단숨에 경시청 현관 앞 잔디밭으로 달려갔다.
그곳에는 천황의 행렬을 보려는 사람들이 여러 겹으로 모여 있었다. 이봉창은 사람들을 비집고 두세 겹 앞으로 나아갔다. 천황의 행렬이 막 사람들 앞을 지나서 궁성의 남문인 사쿠라다문(櫻田門) 쪽으로 가고 있었다. 이봉창은 재빨리 오른쪽 바지주머니에서 수류탄을 꺼내어 행렬을 향해서 던졌다. 수류탄은 두 번째 마차 뒤쪽의 마부가 서는 받침대 아래에 떨어졌다. 꽝 하는 소리와 함께 수류탄이 터졌다. 그러나 수류탄의 성능이 약해서 마차 밑바닥과 바퀴의 타이어가 파손되었을 뿐이었다. 인명피해는 없었다. 이봉창은 金九가 성능이 강한 수류탄이라면서 실험할 필요가 없다고 했던 것이 원망스러웠다.
일본경찰들이 옆에 있는 사람을 체포하자 이봉창은 『아니야! 나야!』 하고 자신이 수류탄을 던졌음을 밝히고 곧바로 체포되었다. 그는 경황이 없어서 남은 수류탄은 던질 것을 잊어 버렸다. 이봉창은 두 번째 마차가 천황이 탄 마차라고 생각했으나, 경시청에 연행되어 그곳에서 신문 호외를 보고서야 두 번째 마차에 천황이 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두 번째 마차에는 궁내부대신이 타고 있었다.62)
궁성으로 돌아간 히로히토가 점심을 먹고 나자 시종장이 허리를 굽히고 말했다.
『폐하, 오늘은 죄송합니다. 범인은 조선인으로서, 이봉창이라는 자입니다』
그러자 히로히토는 이렇게 말했다.
『아, 그는 독립당원이겠지! … 그런데 오늘 오후에 미국대사가 총리대신에게 온다고 했는데, 어떻게 되었나?』
히로히토는 그 일이 더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이날 주일 미국대사는 일본 총리대신을 만나서 「미국 정부는 1928년의 不戰條約의 약속과 의무에 위반되는 일체의 사태, 조약, 협정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국무장관 스팀슨(Henry L. Stimson)의 선언을 전달한 것이었다. 그것이 이른바 「스팀슨 독트린」이었다.63) 이날은 말하자면 제국주의 일본의 정책에 반대하는 미국과 한국의 뜻이 동시에 일본에 전달된 날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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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奉昌 의거를 보도한 1932년 1월9일자「東亞日報」 호외. |
그러나 히로히토는 이누카이 내각의 사직서를 반려했다. 이누카이 내각은 와카쓰키 레이지로(若槻禮次郞) 내각이 8개월의 단명으로 물러나고 들어선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때였으므로 또다시 내각이 총사직하게 되면 일본 국민들에게 불안을 가중시킬 염려가 있기 때문이었다.64) 이누카이 내각은 유임되었으나 치안 책임자들에 대한 문책은 준엄했다.65)
이봉창은 「大逆罪」의 피고로 기소되었다. 천황제를 지키기 위하여 1907년에 일본형법에 새로 규정된 「대역죄」는 통상의 범죄와 달리 3심죄가 보장되지 않고 오직 大審院(현재의 최고재판소)의 심리만으로 유무죄를 가리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1947년에 폐지될 때까지 「대역죄」로 재판을 받은 사건은 이봉창의 경우를 포함하여 4건(다른 3건은 1910년의 幸德秋水 사건, 1923년의 朴烈 사건, 1923년의 難波大助 사건)뿐이었다.66)
한국 청년 이봉창이 일본 천황에게 폭탄을 던졌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1월9일 새벽부터 중국의 각 신문과 라디오방송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중국시민들도 거리로 몰려나와서는 공연히 우왕좌왕하며 제각기 한국인에 대한 찬사의 말을 한마디씩 늘어놓았다.67)
중국 신문들은 사건이 일어난 다음날인 1월9일부터 1월 말까지 사실보도와 함께 그 여파에 대한 보도를 계속했다. 상해의 국민당 기관지 「民國日報」는 〈한인이 日皇을 저격했는데 맞지 않았다. 일황이 열병을 마치고 도쿄로 돌아올 때에 갑자기 저격을 받았으나, 불행히 겨우 副車에 맞았고 범인은 곧 체포되었다(韓人刺日皇未中. 不幸僅炸副車兇手卽被逮)〉라는 표제로 보도했고, 靑島의 「民國日報」도 〈한국의 죽지 않은 의사 이봉창이 일황을 저격했으나 이루지 못했다(韓國不亡義士李奉昌炸日皇未遂)〉라는 표제로 보도했다.
다른 각 지방의 신문들도 비슷한 뉘앙스의 말로 사건을 보도했다. 상해에서 발행되던 「申報」는 이봉창을 「韓國志士」로 지칭했다.68) 중국 신문들의 이러한 보도태도는 만보산 사건으로 격화된 중국인들과 한국동포들 사이의 반감을 해소하고 반일 연대의식을 고취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반면에 중국에 있던 일본인들은 중국신문의 이러한 보도태도에 격분했다. 청도의 일본인들은 「민국일보」의 보도에 항의하여 폭동을 일으켰다. 폭동은 두 군함에 있던 일본 육전대 600여 명이 상륙한 가운데 1월12일부터 1주일 넘어 계속되었다. 중국 국민당 시당부가 파괴되고, 「민국일보」도 큰 피해를 입어 결국 폐간되었다. 상해에서는 일본총영사관과 상해시장 吳鐵城 사이에 외교분쟁이 벌어지고, 일본인들의 난동이 잇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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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奉昌 의거를 보도한 1932년 1월9일자「東京朝日新聞」과「每日新聞」호외. |

金九는 거사 소식을 접했을 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과연 1월9일 아침에 기쁜 소식은 신문지상으로 전래되었다. 이때의 쾌감이야 과연 형언할 수 없었다. 불행히 명중치 못하고 다른 차에 떨어져 敵皇은 죽음을 면했으나 이것만으로도 우리의 정신은 충분히 발휘하고 우리의 계획은 성공하였다 할 수 있다. …〉69)
〈나는 천황을 죽이지 못한 사실이 극히 불쾌하였으나 여러 동지들은 오히려 나를 위로하였다. 그들은 일황이 즉사한 것만은 못하나, 정신적으로는 우리 한인이 일본의 신성불가침인 천황을 죽였으며, 이것은 한인이 일본에 동화되지 않은 것을 세계만방에 확실히 보여 주는 증명이니 족히 성공으로 칠 수 있다고 하였다.〉70)
동지들은 金九의 신변안전을 염려했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날 아침에 프랑스 공무국으로부터 비밀통지가 왔다. 지난 10년 동안 프랑스는 金九를 극진히 보호해 왔으나, 이번 일로 일본이 반드시 金九를 체포하려고 협조를 구해 올 것이므로, 프랑스가 일본과 전쟁을 할 결심을 하기 전에는 金九를 더 이상 보호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71) 金九는 서둘러 피신했다.
임시정부는 곧바로 국무회의를 열고 대책을 협의했다. 회의에서는 이번 거사를 한국독립당이 한 일로 성명하기로 결정했다. 한국독립당은 1930년 1월에 조직된 뒤에 이렇다 할 사업을 추진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72)
한국독립당은 1월9일에 이봉창 의거에 대한 짤막한 성명을 발표했다. 이 성명은 1월11일에 중국인이 경영하는 「國聞通信」을 통하여 전문이 보도되었다.
〈본당은 삼가 한국 혁명용사 이봉창이 일본 황제를 저격하는 霹靂一聲(벽력일성)으로 전 세계 피압박 민족에게 신년의 행운을 축복하고, 이것과 같은 소리로 환호하며, 바로 제국주의자의 아성을 향하여 돌격하여, 모든 폭군과 악정치의 首犯을 삼제하고 민족적 자유와 독립의 실현을 도모할 것을 바란다.〉73)
한국독립당은 다음날인 1월10일에 다시 「이봉창이 일황을 저격한 데 대한 한국독립당선언」이라는 장문의 중국어 선언문을 발표했다.
〈한국독립당은 이번에 이봉창이 일본 천황을 저격한 사건에 대하여 한국민족과 여러 독립운동자의 입장에서 저 포악한 일본의 죄상을 파헤쳐 이 사건이 일어나게 된 원인과 뒤이어 있게 될 결과를 밝혀 두고자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이렇게 시작된 「선언문」은 천황제를 핵심으로 하는 제국주의 일본의 정치체제에 대한 상해 독립운동자들의 인식을 보여 주는 것이어서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흉악한 저 섬나라 도적무리는 이미 한국을 합병하고 우리 동포를 어육으로 삼았으며 滿蒙까지도 남김없이 병탄하려고 우리의 우방을 쓸모없는 짚신 버리듯 하고 있다. 저들은 혈족끼리 서로 결혼한 괴수를 내세워 스스로 萬世一系라 부르며 자랑삼고 있으며, 저들은 온갖 나쁜 짓을 횡행하는 우두머리로 앉아 인민들의 고혈을 먹고 있으면서 스스로를 천황이라 일컫고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아 있다. 저들은 악덕으로써 한국과 중국을 병탄하고자 못된 짓을 더해 가고 있으면서도 뉘우치는 바 없으니 천인을 공노하게 했다. 어찌 한국인에게만 머리에 옻 칠을 하려고 할 뿐이랴. 중국인도 쪼개서 물그릇을 만들고 있으나, 저 일본 황제는 본래 죽일 만한 가치도 없다. 그의 智力은 시세를 가늠하기에 모자라고, 그의 권력은 군벌을 통제하기에 모자라고, 그의 위엄은 원로와 정당 당수를 거느리기에 모자란다. 물론 明治와 大正과 昭和할 것 없이 저들은 모두가 같은 소굴의 한패거리요 괴뢰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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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奉昌 의거를 보도한 1932년 1월9일자「國民日報」(上海)와「申報」의 기사. |

그러면서 「선언문」은 〈죽일 만한 가치도 없는〉 일본 천황을 죽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다음과 같은 아홉 가지로 설명했다.
〈그가 元首의 자리에 있으며 온갖 죄악이 모이는 자리에 있는 것이 그 첫째요, 그 賊徒를 사로잡으려면 먼저 그의 왕을 사로잡아야 하는 것이 그 둘째요, 우리 조국을 위해 원수를 갚는 것이 그 셋째요, 천벌을 내리고 인권을 신장하는 것이 그 넷째요, 우방을 위해 치욕을 풀어 주기 위함이 그 다섯째요, 백성들이 참을 길이 없으면 無道한 임금을 주살하는 것이 그 여섯째요, 그들의 國體를 고쳐 우리 주권을 회복하기 위함이 그 일곱째요, 못된 오랑캐에게는 응당한 벌을 내리고 온 누리 사람에게는 뉘우침을 주기 위함이 그 여덟째요, 하늘에 順하고 사람에 應하며 천하를 고동케하여 인류를 해방시키려 함이 그 아홉째이다. 이번 이봉창의 저격은 그 동기를 살펴보면 바로 이에서 나온 것이다. 이는 오직 일본 군벌과 원로와 제국주의자들의 선봉자가 밤낮으로 그 원인을 만들었다.…〉
「선언문」은 이어 이봉창 의거는 30년 동안 이어져 온 張仁煥·安重根·李在明·新民會·姜宇奎·梁瑾煥·金益湘·金祉燮·宋學先·趙明河 등과 같은 의인과 열사의 뜻을 계승한 것이라고 천명하고, 일본인은 실로 한국인의 손을 빌려서 자신의 천황을 죽이려 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선언문」은 다음과 같은 말로 마무리했다.
〈오직 이봉창 한 사람만이 이 같은 뜻을 지니고 있는 것만은 아니며 2천3백만의 가슴속에 다 이봉창과 같은 결의가 깃들여 있어서 제2, 제3, 아니 2천만 모두가 이봉창과 같은 사람으로 될 것이다.〉74)
이 「선언문」은 중국의 여러 신문에 게재되었고, 天津·奉天·間島 등 각지에 흩어져 있는 동포사회의 여러 기관에 우송되었다.75)
이봉창의 취조과정에서 사건의 주모자가 金九라는 것이 곧바로 밝혀졌다. 일본 검찰은 이봉창과 함께 金九를 대심원에 기소하고, 상해 일본총영사관에 金九의 수사를 지시했다.76) 일본총영사관은 이봉창 의거가 있기 전인 1월4일(또는 5일)에도 보경리 4호의 임시정부청사를 수색했으나 金九는 피신하고 없었다.77) 이 일이 있고 나서 임시정부는 사무실을 옮겼다.
일본총영사관은 金九를 비롯하여 사건의 공범자로 생각되는 조소앙·김철 등의 임시정부 간부들도 수배했다. 일본총영사는 1월9일에 상해주재 프랑스총영사를 만나서 金九 수사에 대한 협조를 요청했다. 이어 양쪽 실무자들의 협의가 있었는데, 양쪽이 합의한 것은 우선 金九의 거처를 찾아내기 위하여 신중하게 내사를 벌인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프랑스총영사관이 일본의 요청을 사실상 거부한 것이었다. 金九에 대한 수사가 부진하자 일본 사법성은 이봉창을 취조한 도쿄 지방재판소 검사 가메야마 싱이치(龜山愼一)를 상해에 파견하여 수사를 지휘하게 했다. 가메야마는 회사원으로 위장하고 1월21일에 고베를 출발하여 1월23일 오후에 상해에 도착했다.78)

이봉창 의거에 대한 재미동포 사회의 반응이 어떠했는지는 공교롭게도 이때의 신문이나 잡지가 거의 보존되고 있지 않아서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유일하게 보존되어 있는 「新韓民報」는 사건이 나고 닷새 뒤인 1월14일자에 만주사변과 관련하여 연속기사를 싣고 있던 「滿洲倭亂記」의 앞머리에서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동경 8일. 오늘 아침 10시경에 왜황제가 관병식을 거행하고 돌아오는 길에 거의 궐문에 도착하자 난데없는 폭탄이 터지며 연기가 자욱한 바람에 황제의 거동은 일시 수라장을 이루었었다. 궁내부 대신 마키노가 탔던 수레가 자칫하면 맞을 뻔하였으나 피상자는 없었다고 한다. 필경 경관대가 범인을 체포하였는데, 조선 의사 리봉창씨로 판명이 되었다. 상해임시정부에서 파견한 사람인데, 여비까지 150달러를 주어서 보내었다고 한다. 황제가 위험하게 될 뻔한 이번 사건으로 내각은 총사직을 하였으나 황제의 요구로 내각은 다시 시무케 되었다더라.〉79)
그리고 1월28일자에는 치안책임자들에 대한 처벌 내용만 보도했다.80)
이봉창 의거가 있었을 때에 李承晩은 뉴욕의 한 호텔에 머물고 있었다. 1931년 11월21일에 하와이를 떠났던 그는 로스앤젤레스와 시카고를 거쳐서 12월7일에 워싱턴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연말을 보내고 나서 1932년 1월3일에 뉴욕으로 갔다.
이봉창 의거가 있자 李承晩은 한 미국 방송국의 요청으로 2월22일에 라디오에 출연하여 일본의 만주침략을 규탄하는 연설을 했는데, 미국 정부는 일본인들이 李承晩을 암살할 것을 염려하여 형사 두 사람으로 하여금 그의 신변을 보호하게 했다고 한다.81)
그러나 李承晩의 「여행일기」 2월22일조에는 그러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그가 라디오에 출연한 것은 이봉창 의거가 있고 이틀 뒤인 1월9일이었다. 이 날짜 그의 「여행일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WOR 라디오방송국 신문기자들은 호텔에서 누군가가 소란을 피운 사건에 대하여 알고 싶어 했다. 경찰청장은 나를 뱀버거(Bamberger) 스튜디오까지 호위할 형사 두 사람을 보냈다. 말러우니(Mulroney) 경찰청장. 펜실베이니어 호텔 부지배인은 스위트룸 710호와 708호를 권했다. 그래서 나는 그 방으로 옮겼다.〉82)
이러한 기록으로 미루어 보면 이때에 李承晩은 흥분한 일본인들로부터 심한 공격을 받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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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奉昌이 감옥에서 자필로 쓴「上申書」의 표지와 끝의 서명 및 무인. |

뒷날 李承晩은 「도왜실기」의 「서문」을 다음과 같이 썼다.
〈「도왜실기」는 김구 선생의 자서전이며 한국 독립운동의 표면사일뿐더러 대한임시정부의 측면사라고도 할 수 있으니, 수많은 순국열사 중에서도 본편의 주인공인 이봉창·윤봉길 의사가 한국독립사상에 얼마나 지대한 역할과 공헌을 하였는가를 고려한다면 이 책의 의의도 또한 심상하지 않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왜황 裕仁을 향하여 이의사가 던진 폭탄 한 개는 비록 성공은 하지 못하였으나 한국 민족이 일본에 대하여 금일까지 꾸준히 반항하고 있다는 증거를 세계에 표명하였으며, 윤의사의 상해사건은 중국 군대 중에서도 최정예를 자랑하는 19로군이 수개월을 두고 악전고투하였건만 일찍이 머리카락 하나 건드려 보지도 못한 왜군관민의 수뇌부를 한국의 청년이 일거에 도륙하고 말았으니, 갈수록 더 심한 침략으로 왜에 대한 원한이 골수에 사무쳤던 당시 4억만 중국 민중의 환호와 감격은 넉넉히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다. 즉 자기네의 원수를 무명의 한국 청년이 갚아 준 격이니, 어시호, 중국 관민은 한민족의 열렬한 조국혼과 한인의 독립운동이 엄연히 상존해 있음을 다시금 인식하게 되었고, 세계도 또한 한국독립의 난문제가 아직도 해결되지 못하고 있음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었다. …
이로써 미루어 본다면 윤의사가 던진 폭탄 한 개는 단순히 테러사건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그 의의와 영향이 중대하니, 김구 선생이 말씀하신 바 소위 「최소의 희생으로써 최대의 효과」를 얻고도 오히려 남음이 있다고 할 것이다.…〉83)
이 글은 1946년에 「도왜실기」의 한글 번역본을 출판할 때에 金九의 공적을 한껏 추켜올리면서 쓴 글인데, 독립운동 기간에 그가 줄곧 반대했던 테러리즘의 정치적 효과를 높이 평가하는 듯한 문투여서 흥미롭다. 이때는 李承晩과 金九의 협조가 가장 돈독하던 때였다.●
1) 金昌順·金俊燁, 「韓國共産主義運動史(4)」, 1986, 청계연구소, 420~435쪽 참조.
2) 金九, 「東京炸案의 眞相」, 이봉창의사장학회 엮음, 「이봉창의사와 한국독립운동」, 2002, 단국대 출판부, 190쪽; 도진순 주해, 「백범일지」, 1997, 돌베개, 322~323쪽. 3) 「제6회 신문조서」, 단국대 동양학연구소 편, 「이봉창의사 재판관련 자료집」, 2005, 단국대 출판부, 440~441쪽. 4) 「공판조서」, 「이봉창의사 재판관련 자료집」, 511쪽. 5) 「제2회 신문조서」, 「청취서」, 「이봉창의사 재판관련 자료집」, 395쪽, 534쪽. 6) 「東京炸案의 眞相」, 이봉창의사장학회 엮음, 앞의 책, 190쪽. 7) 「백범일지」, 323쪽.
8) 「제2회 신문조서」, 「제4회 신문조서」, 「공판조서」, 「이봉창의사 재판관련 자료집」, 392~393쪽, 415~416쪽, 508~509쪽. 9) 「上申書」, 위의 책, 551쪽. 10) 「上申書」, 같은 책, 551쪽. 11) 「上申書」, 같은 책, 552쪽. 12) 「제6회 신문조서」, 같은 책, 439~440쪽. 13) 「백범일지」, 323쪽.
14) 「백범일지」, 324쪽. 15) 「제6회 신문조서」, 「이봉창의사 재판관련 자료집」, 441쪽. 16) 「제6회 신문조서」, 위의 책, 442~443쪽. 17) 金弘壹, 「大陸의 憤怒」, 1972, 文潮社, 272~273쪽. 18) 「제6회 신문조서」, 「이봉창의사 재판관련 자료집」, 442~443쪽. 19) 「上申書」, 위의 책, 552쪽.
20) 「제6회 신문조서」, 같은 책, 444~445쪽. 21) 「東京炸案의 眞相」, 이봉창의사장학회 엮음, 앞의 책, 191쪽; 「백범일지」, 324쪽. 22) 「제6회 신문조서」, 「이봉창의사 재판관련 자료집」, 445쪽. 23) 「제6회 신문조서」, 위의 책, 446~447쪽.
24) 만보산 사건의 경과에 대해서는 朴永錫, 「萬寶山事件硏究」, 1978, 亞細亞文化社 80~97쪽 참조. 25) 閔斗基, 「萬寶山事件(1931)과 韓國言論의 對應」, 「東洋史學硏究」 제65집, 154쪽. 26) 「朝鮮日報」와 「東亞日報」의 보도에 대해서는 閔斗基, 앞의 논문, 152~171쪽 참조. 27) 「백범일지」, 327쪽.
28) 「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篇), 1976, 國會圖書館, 687~688쪽. 29) 위의 책, 691~692쪽. 30) 같은 책, 689~691쪽. 31) 「新韓民報」 1931년 11월5일자, 「상해한교전체대회」. 32) 「新韓民報」 1931년 11월5일자, 「國內外同胞에게 告하노라」. 33) 「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篇), 691~692쪽. 34) 在上海日本總領事館 警察部, 「朝鮮民族運動年鑑」 1931년 12월28일조. 35) 「新韓民報」 1931년 10월22일자, 「중가주공동회의 결의」.
36) 「新韓民報」 1931년 11월12일자, 「미주한인연합회 발기문」. 37) 「백범일지」, 327쪽. 38) 「東京炸案의 眞相」, 이봉창의사장학회 엮음, 앞의 책, 186쪽. 39) 國史編纂委員會, 「韓國獨立運動史 資料2 臨政篇Ⅱ」, 1971, 探求堂, 256~258쪽. 40) 위의 책, 256~257쪽. 41) 「백범일지」, 321쪽, 325쪽; 金元容, 「在美韓人五十年史」, 1959, Reedlely, Calif., 215~216쪽. 42) 國史編纂委員會, 「韓國獨立運動史 資料2 臨政篇Ⅱ」, 257쪽.
43) 「東京炸案의 眞相」, 이봉창의사장학회 엮음, 앞의 책, 192~193쪽. 44) 「제7회 신문조서」, 「이봉창의사 재판관련 자료집」, 448~449쪽. 45) 「제7회 신문조서」, 위의 책, 449~450쪽. 46) 「제2회신문조서」, 「제7회 신문조서」, 같은 책, 397쪽, 450~451쪽.
47) 「東京炸案의 眞相」, 이봉창의사장학회 엮음, 앞의 책, 193쪽; 「백범일지」, 327쪽. 48) 「제7회 신문조서」, 「이봉창의사 재판관련 자료집」, 455쪽. 49) 「백범일지」, 325쪽; 「제2회 신문조서」, 「제7회 신문조서」, 「제8회 신문조서」, 「이봉창의사 재판관련 자료집」, 396~398쪽, 450~451쪽, 461쪽. 50) 「제7회 신문조서」, 「이봉창의사 재판관련 자료집」, 451쪽. 51) 「東京炸案의 眞相」, 이봉창의사장학회 엮음, 앞의 책, 193쪽; 「백범일지」, 326쪽.
52) 「東京炸案의 眞相」, 이봉창의사장학회 엮음, 앞의 책, 192쪽. 53) 金弘壹, 앞의 책, 274쪽. 54) 「제3회 신문조서」, 「이봉창의사 재판관련 자료집」, 404~405쪽. 55) 「白貞善이 木下昌藏에게 송금한 Yokohama Specic Bank의 영수증」, 白凡金九先生全集編纂委員會, 「白凡金九全集 (4)」, 1999, 대한매일신보사, 196쪽. 56) 「백범일지」, 326쪽. 57) 崔書勉, 「이봉창의거 연구서설」,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80주년기념 논문집(하)」, 1999, 國家報勳處, 150쪽. 58) 「東京炸案의 眞相」, 이봉창의사장학회 편, 앞의 책, 194쪽. 59) 「제2회 신문조서」, 「제3회 신문조서」, 「제7회 신문조서」, 「청취서」, 「이봉창의사 재판관련 자료집」, 391쪽, 407~411쪽, 457쪽, 538~539쪽. 60) 崔書勉, 앞의 글, 153쪽.
61) 「제3회 신문조서」, 「청취서」, 「이봉창의사 재판관련 자료집」, 411쪽, 540쪽. 62) 「제2회 신문조서」, 「제3회 신문조서」, 「청취서」, 「이봉창의사 재판관련 자료집」, 389~392쪽, 411~413쪽, 539~541쪽. 63) 崔書勉, 앞의 글, 155~156쪽.
64) 「日本近現代史辭典」, 1978, 東洋經濟新報社, 111~112쪽. 65)홍인근, 「이봉창평전」, 2002, 나남, 232~234쪽. 66) 崔書勉, 「자료의 수집경위와 가치」, 「이봉창의사 재판관련 자료집」, 5~6쪽. 67) 金弘壹, 앞의 책, 275쪽. 68) 한시준, 「이봉창의거에 대한 중국신문의 보도」, 「한국근현대사연구」 제36집, 2006, 한울, 155~161쪽. 金九는 청도의 「민국일보」가 〈한인 이봉창이 일황을 저격했으나 불행히도 명중하지 않았다(韓人李奉昌狙擊日皇不幸不中)〉라고 보도했다고 적었다(「백범일지」, 328쪽). 69) 「東京炸案의 眞相」, 이봉창의사장학회 엮음, 앞의 책, 194쪽. 70) 「백범일지」, 327쪽. 71) 「백범일지」, 327~328쪽.
72) 國史編纂委員會, 「韓國獨立運動史 資料2 臨政篇Ⅱ」, 257쪽. 73) 홍인근, 앞의 책, 161쪽.
74) 「韓國獨立黨宣言對李奉昌狙擊日皇事件」, 「白凡金九全集 (4)」, 197~198쪽; 홍인근, 앞의 책, 164~166쪽. 75) 홍인근, 앞의 책, 167쪽. 76) 「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篇), 697쪽. 77) 國史編纂委員會, 「韓國獨立運動史 資料2 臨政篇Ⅱ」, 257쪽. 78) 「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篇), 697쪽 ; 홍인근, 앞의 책, 122~123쪽. 79) 「新韓民報」 1932년 1월14일자, 「滿洲倭亂記: 리봉창씨의 폭탄소리에 왜황이 놀래고」. 80) 「新韓民報」 1932년 1월28일자, 「리봉창씨사건에 처벌」. 81) 崔書勉, 앞의 글(1999), 156쪽. 崔書勉씨는 이 정보를 전후에 일본에서 발행된 한 사진자료집에서 얻었다고 했다.
82) Syngman Rhee, Log Book of S. R. 1932년 1월9일조. 83) 「屠倭實記(國內版)」, 「白凡金九全集(1)」, 666~66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