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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밀추적] 鄭夢憲 사망 사건의 5大 미스터리

2003년 8월4일 새벽, 현대사옥 12층 鄭夢憲 회장 사무실.
경찰이 도착하기 전에 누군가 들어와 유서 한 장을 들고 나갔다.
창문틀에는 쓸려 나간 흔적과 玄貞恩 회장의 지문만 발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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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회장이 자살하기 직전에 회사 사람들과 자살소동을 벌이려 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만약 당시 그런 내용이 밝혀졌더라면 다른 각도에서 수사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경찰 관계자)

金成東 月刊朝鮮 기자〈ksdhan@chosun.com〉
白承俱 月刊朝鮮 기자〈eaglebsk@chosun.com〉
새로 드러난 두 가지 내용
  月刊朝鮮은 2006년 2월호에서 『鄭夢憲(정몽헌) 현대그룹 회장이 2003년 8월 사망하기 직전 검찰관계자를 만나 유서 5장을 보여 주었고, 자살소동을 벌이려 했다』는 내용을 보도했다.
 
  月刊朝鮮은 검찰관계자의 증언을 통해 鄭회장이 사건 당일 자신의 사무실에서 유서를 쓴 것이 아니라 측근들과 상의해 미리 써 놓았고, 당시 경찰이 발표한 유서 4장 이외에 DJ 정권 핵심인사에게 보내는 유서 1장이 추가로 존재했다는 점에서 그의 죽음에 의문이 있다고 기사화했다.
 
  이 보도가 나간 후 朝鮮日報(조선일보)는 당초 알려진 내용과 달리 鄭夢憲 회장의 사무실 책상에 유서가 든 봉투 외에 빈 봉투 하나가 존재했다는 사실 등을 밝혀 내 鄭夢憲 회장이 자살이 아니라 타살됐을 수 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月刊朝鮮은 검찰·경찰 등 수사기관이 당시 최대 관심사항이었던 鄭夢憲 사망 사건을 신속하고 면밀하게 死因(사인)에 대해 조사했음에도 鄭夢憲 회장이 자살 직전 만났던 사람을 수사기관이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사실, 유서 1장이 사라지고 빈 봉투만 존재했다는 점 등이 석연치 않다고 판단해 정밀취재에 들어갔다.
 
정몽헌 회장이 쓰러져 숨져 있는 상태로 발견된 현대 계동사옥 뒤편 화단과 현대사옥 12층 鄭회장 사무실의 배치도. 창문의 크기는 가로 95cm, 세로 54cm이다.
  月刊朝鮮은 취재과정에서 의미 있는 두 가지 사실을 추가로 확보했다.
 
  하나는 2003년 8월4일 오전 6시경 서울 종로경찰서 관계자가 변사자 발생신고를 받고 鄭회장 사무실(계동 현대사옥 12층)에서 유서 4장을 발견하기 전 鄭회장의 책상에는 유서가 5장이 있었다는 鄭회장 최측근의 증언이다.
 
  이는 月刊朝鮮 2월호에서 鄭회장의 유서가 경찰이 발표한 4장이 아닌 5장이라는 검찰 관계자의 증언과 일치한다.
 
  月刊朝鮮이 확인한 또하나의 사실은 鄭회장이 자신의 책상 옆에 있던 창문을 통해 자살했음에도 그의 지문은 발견되지 않고 무언가에 쓸려 나간 흔적과 鄭회장의 부인 玄貞恩(현정은) 회장의 지문만 발견됐다는 점이다.
 
  사건 당시 분위기가 鄭夢憲 회장이 자살한 배경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기 때문에 이런 사실은 그동안 베일 속에 감춰져 왔다.
 
  경찰이 출동하기 전 鄭夢憲 회장 사무실에는 과연 누가 어떤 경로를 통해 들어갔으며 유서 1장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또 鄭회장의 지문은 온데간데 없고 쓸려 나간 흔적과 玄貞恩 회장의 지문은 언제 어떻게 남겨진 것일까?
 

 

  [의혹 1] 두 차례의 현장감식에서 鄭夢憲의 지문은 왜 발견되지 않았나?
 
  『두 차례의 현장 지문감식을 했다. 鄭회장이 뛰어내린 창문틀에서 무언가에 쓸려 나간 흔적과 玄貞恩 회장의 지문만 발견됐다. 우리로서는 최선을 다해 지문감식을 했다』 (경찰 관계자)
 
 
 
 사건 당일 자살로 판단한 경찰
 
  기자는 이같은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사건 당시의 기억을 더듬을 수밖에 없었다. 우선 鄭夢憲 회장의 죽음이 있기 직전의 전후과정을 살펴봤다.
 
  鄭夢憲 회장은 2003년 8월3일 밤 11시40분 청담동 소재 W바에서 술을 같이 마시던 친구 박기수씨를 하얏트호텔에 데려다 준 후 성북동 집으로 향했다. 鄭회장은 밤 11시52분경 성북동을 향하다가 갑자기 운전사 金모씨에게 『현대사옥으로 가자』며 행선지를 바꿨다.
 
  사옥에 도착한 그는 운전사에게 『20~30분 있다가 나오겠다』고 말한 뒤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12층에 있는 자신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여섯 시간이 지난 8월4일 오전 5시52분경, 건물 미화원과 보안요원이 1층 화단에서 鄭회장의 주검을 발견했다.
 
  현대사옥 건너편에 있는 서울 종로경찰서는 오전 6시경 변사자 발생신고를 접수, 경찰관 세 명이 현장에 출동해 곧바로 死因 조사에 들어갔다. 「鄭夢憲」이라는 인물의 비중 때문에 종로경찰서는 비상이 걸리다시피 했다.
 
  종로경찰서 담당과장은 물론 서장까지 출동했고, 서울지방경찰청 관계자와 담당 검사도 현장에 나왔다. 경찰은 鄭회장의 부인 玄貞恩 회장과 비서 최모씨, 운전사 金씨, 친구 박기수씨, 현관 안내원 위모씨, 건물 미화원 윤모씨, 건물 보안요원 경모씨 등을 상대로 조사를 벌였다.
 
  경찰은 사건 당일 오후 『외부 요인에 의한 사망이 아닌 투신자살로, 자살동기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는 중간발표를 했고, 다음날 8월5일 동일한 내용으로 사건을 매듭지었다. 경찰은 당시 사건 현장에 제3의 인물이 들어와 유서에 손댔을 가능성과 鄭夢憲 회장이 측근들과 자살소동을 벌이려 했다는 내용을 확인하지 못한 채 鄭회장의 죽음을 자살로 판단했던 것이다. 타살 가능성에는 무게를 두지 않았다.
 
  기자는 지난 2월11일 오후 종로경찰서를 찾았다. 2003년 8월4일 오전 6시경 변사자 신고를 받고 현장에 최초로 출동했던 경찰관과 당시 사건을 맡았던 관계자들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기자는 경찰서를 방문하기 며칠 전 전화상으로 사건 담당 경찰관과 몇 차례 통화를 했다. 그러나 경찰은 『할 말이 없다』며 만나기를 꺼려해 직접 찾아가야만 했다. 강력·폭력사건을 담당하는 종로경찰서 사무실에 토요일 늦은 오후에도 경찰관들은 주말을 잊고 근무하고 있었다. 계속되는 사건으로 그들의 얼굴에는 「피로」가 얼룩져 있었다.
 
 
 
 
『타살 증거 거의 없었다』

 
2003년 8월4일 오전 현대 계동사옥 1층 화단에서 鄭夢憲 회장의 시신을 경찰 과학수사요원들이 수습하고 있다.
  鄭夢憲 사망이 당시 대형 사건이었던 터라 사건 현장에 처음 출동했던 경찰관을 비롯해 과학수사팀 요원 등 사건 담당 경찰관 수명을 만날 수 있었다.
 
  이들은 「당시 상황에 대해 몇 가지 궁금한 게 있어 찾아왔다」는 기자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이미 다 알려진 사건인데 지금 와서 취재할 필요가 있느냐. 타살의혹을 보도한 것을 봤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이다. 이미 발표된 사항 이상은 알지도 못하고 기억도 나지 않는다』고 했다.
 
  다음은 사무실에 있던 여러 명의 경찰관과의 일문일답이다.
 
  ―변사자 신고를 받은 후 몇 명의 경찰관이 출동했습니까.
 
  『오전 6시경 신고를 받고 현장감식 요원이랑 세 명이 출동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1층 화단에서 鄭夢憲 회장의 주검을 확인한 후 현대사옥 12층 鄭회장 사무실로 올라갔지요. 출동 경찰관 중 두 명이 회장실에 들어갔는데 현장에는 여자 비서가 먼저 와 있었습니다. 그 외 다른 사람은 없었어요』
 
  ―사건 발생 직후 鄭회장 사무실은 어떤 상태였습니까.
 
  『창문 쪽에 의자가 하나 놓여 있었고, 책상에는 鄭회장의 것으로 보이는 안경과 시계가 놓여 있었습니다. 책상에는 또 4장의 유서가 들어 있는 편지봉투 3장과 그 위쪽에 빈 봉투 한 개가 있었지요. 빈 봉투 옆에는 현대 마크가 찍힌 편지지가 있었습니다』
 
  ―유서가 적힌 종이와 편지지는 동일한 것이었습니까.
 
  『편지지와 봉투는 모두 동일한 것이었습니다』
 
  ―경찰은 사건 당일 바로 자살이라고 중간발표를 했습니다. 그 근거는 무엇이었습니까.
 
  『유서의 필체를 감정해 보니 鄭夢憲 회장의 것이 맞았습니다. 또 변사사건의 경우 유서가 증거능력이 있을 경우 자살로 결론 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요. 그리고 당시 사무실 정황과 부검 결과 등 자살로 인정될 만한 증거는 수없이 나왔어요. 반대로 타살로 볼 만한 증거는 거의 없었습니다』
 
 
 
 특별한 경우 아니면 유서 지문감식 안 해
 
  ―月刊朝鮮 2월호에 증언을 했던 검찰 관계자는 「유서를 지문감정했더라면 자신의 지문이 나왔을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鄭회장이 미리 유서를 써서 자신의 안쪽 주머니에 가지고 다녔다』고 증언했는데 당시 유서를 지문감식했습니까.
 
  『하지 않았습니다』
 
  ―지문감식을 별도로 할 필요가 없었던 겁니까.
 
  『유서를 적은 종이와 鄭회장 책상 위에 놓여 있던 편지지가 동일한 것이었고, 필체가 鄭회장의 것으로 확인돼 鄭회장 본인이 작성한 유서임이 확실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지문감식할 경우 화학약품을 사용하는데 그럴 경우 유서가 손상됩니다. 아주 특별한 상황이 아닌 이상 유서를 지문감식을 하지는 않습니다』
 
  ―여러 가지 증거들 때문에 경찰이 자살로 판단한 데는 별 무리가 없었을 듯 합니다. 이 말은 타살 가능성에 대해서는 전혀 수사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말도 됩니다만….
 
  『그렇게 추론하지 마세요. 우리는 할 수 있는 부분까지 다 수사했습니다. 통상 변사자가 발생하면 초동수사를 마친 후 사체부검 여부를 결정한 후 곧바로 처리합니다. 鄭夢憲 사망 사건은 사안의 중대성 때문에 우리가 자체적으로 사건을 처리할 상황이 못 되었습니다. 당시 서울지방경찰청에서도 나왔고, 검사도 여러 명 나왔습니다. 우리는 과학적 수사를 통해 합리적으로 처리했습니다』
 
  ―현장감식은 어떻게 이루어졌습니까.
 
  『우리가 1차로 하고, 서울지방경찰청이 2차로 했습니다. 鄭회장 주검이 발견된 1층 화단 부근과 12층 사무실에 대해 면밀히 감식했습니다』
 
 
 
 
두 차례의 현장감식에도 발견되지 않은 鄭夢憲 지문

 
  ―12층 창문틀에 대해서도 지문감식을 했습니까.
 
  『물론입니다. 두 차례를 지문감식을 실시했는데 무언가에 쓸려 나간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사건 당시 경찰은 「鄭회장이 창문을 짚고 빠져나가 투신자살했다」는 요지로 발표했습니다. 그렇다면 창문틀에는 鄭회장의 지문이 뚜렷이 남아 있었을 텐데요.
 
  『그 부분은 정확히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무언가에 쓸려 나간 흔적이 있었습니다』
 
  ―두 차례의 지문감식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鄭회장의 지문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은 쉽게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사건 현장을 제대로 확보하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까.
 
  『우리로서는 최선을 다해 지문감식을 했습니다』
 
  ―쓸려 나간 흔적 외에 또 다른 지문은 발견되지 않았습니까.
 
  『鄭회장의 부인 玄貞恩 회장의 지문이 발견되었습니다』
 
  ―창문틀로 투신자살한 사람의 지문은 발견되지 않고, 몇 시간 뒤에 찾아와서 현장을 보려다가 창틀을 짚은 玄貞恩 회장의 지문만 남는 일이 가능합니까.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것 아니겠습니까. 12층 창문을 통해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남긴 흔적 같습니다』
 
  ―玄貞恩 회장 지문이 발견됐다는 사실은 왜 언론에 알려지지 않았나요.
 
  『알렸어요』
 
  ―우리가 확인한 바로는 단 한 번도 이 사실은 언론에 보도된 적이 없습니다.
 
  『그건 저도 모르겠어요』
 
  경찰은 창문틀에 대한 두 차례의 현장감식에서 쓸려 나간 흔적과 玄貞恩 회장의 지문 외에 鄭회장의 지문을 확보하는 데 실패했다. 창문틀을 잡지 않고 다이빙하듯 뛰어내렸다면 지문이 발견되지 않겠지만, 알려졌다시피 鄭회장이 투신한 현대 계동 사옥 12층의 창문틀은 가로 95cm, 세로 54cm의 半(반)개폐식의 창문이다. 어른 한 명이 겨우 빠져나갈 만한 좁은 공간이다.
 
  당시 사무실 현장의 상황을 종합해 볼 때, 鄭회장은 의자를 딛고 창문틀 사이를 빠져나가면서 창문틀 여러 군데를 잡아야 했고, 아래로 뛰어내리기 전까지 그 손은 놓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경찰은 쓸려 나간 흔적과 나중에 사건 현장을 찾은 玄貞恩 회장의 지문만 발견했다고 지금 와서야 밝혔다.
 
  키 174cm에 70kg이 넘는 鄭회장이 성인이 통과하기 어려운 半개폐식 창문틀을 통과하면서 지문을 남기지 않았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말해 주는 걸까?두 차례에 걸쳐 현장 지문감식을 실시한 경찰도 鄭회장의 지문을 확보하지 못해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을까? 창문틀에는 산 자의 지문만 남았을 뿐, 죽은 자의 지문은 없었다. 鄭회장의 지문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
 
 

  [의혹 2] 사라진 유서 한 장은 누가, 왜 가져갔나?
 
  『유서 한 장은 鄭회장 주변 인물이 경찰이 현장에 도착하기 전 없앤 걸로 안다. 공개되면 곤란한 상황이 발생하거나 아니면 누군가가 다치기 때문일 것이다』(鄭회장 최측근 인사)
 
 
 
 『鄭회장 책상에는 5장의 유서가 놓여 있었다』
 
  취재 도중 기자는 익명을 요구한 鄭夢憲 회장의 최측근으로부터 사라진 유서에 대한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최초 鄭회장의 사무실에는 경찰이 발표한 것과 달리 유서 5장이 鄭회장의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는 내용이다. 이 대목은 月刊朝鮮 2월호의 검찰관계자 증언과 일치하는 부분이다.
 
  鄭회장의 최측근으로 일했던 한 인사는 『애초 鄭회장이 투신한 사무실의 책상에는 月刊朝鮮 2월호에서 검찰관계자가 증언한 대로 유서가 4장이 아니라 5장이 놓여 있었다』며 『유서 1장은 鄭회장 주변 인물이 경찰이 현장에 도착하기 전 없앤 걸로 안다』고 했다. 다음은 이 인사와의 일문일답이다.
 
  ―경찰이 사건 현장에 도착하기 전 그곳에 먼저 도착한 사람은 누구누구인지 기억하십니까.
 
  『鄭夢憲 회장 주변 인물 여러 명이 먼저 도착한 걸로 압니다』
 
  ―月刊朝鮮 2월호에서 검찰관계자는 鄭회장이 남긴 유서가 5장이었다고 주장했는데요.
 
  『그분 말이 맞아요. 애초 유서는 5장이었습니다』
 
  ―그렇다면 玄貞恩 회장도 유서가 5장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을 가능성이 크네요.
 
  『그렇다고 봐요. 분명히 유서는 5장이었어요』
 
  ―그렇다면 경찰이 유서가 4장이라고 발표했을 당시에 유서가 5장이었다는 이야기를 왜 하지 않았습니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죠. 그렇게 따지면 안 한 얘기가 많아요』
 
  ―나머지 1장에 적힌 유서의 내용도 압니까.
 
  『그 내용 하나로 여러 사람이 불편해지는 내용이겠죠. 내용을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그런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럼 그 1장을 누가 가져간 겁니까. 鄭회장 주변 인물이라면 너무 막연한데 혹시 玄貞恩 회장입니까, 아니면 金潤圭 사장입니까, 여비서입니까.
 
  『그건 답변하기 곤란합니다』
 
  ―밝히기 곤란하다면 그 사람이 유서 1장을 가져간 이유는 압니까.
 
  『공개되면 곤란한 상황이 발생하거나 아니면 누군가가 다치기 때문이겠지요』
 
  이 최측근 인사는 기자에게 『鄭회장이 뛰어내린 창문틀과 그 부근에서 鄭회장의 지문이 정말 안 나왔나요』라고 물었다. 「玄貞恩 회장의 지문만 나왔다」고 알려 주자 『지문이 없었다면 정말 문제네요』라면서 목소리를 낮췄다.
 
  그러면서 그는 『鄭회장님이 얼마나 공손하고 겸손하신 분이었는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경찰이 신고를 받고 현장에 도착하기 전 鄭회장 주변 인물이 鄭회장 사무실에 먼저 다녀갔다. 그 과정에서 유서 1장이 없어졌다』는 증언에 대해 경찰관계자에게 다시 물었다.
 
 
 
 『현장에는 여비서 외에 아무도 없었다』
 
2003년 8월4일 오전 金潤圭씨가 鄭夢憲 회장의 죽음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에 침통한 표정으로 답하고 있다.
  ―사건 당시 12층 회장 사무실에 여비서 외에 다른 사람이 다녀갔다는 얘기를 들었습니까.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 여비서를 빼고 다른 현대 관계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만약 현장에 누군가 먼저 와 있었다면 어떻게 연락받고 왔는지 당연히 물어봤을 것 아닙니까? 현장을 확보한 후에는 아무나 출입할 수 없습니다. 수사관계자가 아니고서는 외부인은 출입할 수 없습니다. 경찰에 신고하기 전에 현장에 누가 있었는지는 모르는 일입니다』
 
  ―玄貞恩 회장은 사건 발생 직후 몇 시쯤 현장에 왔습니까.
 
  『우리가 玄貞恩 회장 얼굴을 모르는 것도 아닙니다. 남편이 돌아가셨으니 현장에 당연히 왔지요.
 
  물론 玄貞恩 회장이나 가족들, 친구 박기수와 동서 등이 일반인들보다 일찍 온 것은 사실입니다. 사건 현장이 종로경찰서에서 가깝다 보니 경찰서 출입 기자들이 사건 발생 직후 바로 왔는데, 그들보다는 조금 늦게 왔지만 방송기자들보다는 玄貞恩 회장측이 먼저 왔습니다』
 
  ―鄭회장의 책상에는 분명 5장의 유서가 있었다는 증언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그 유서 1장을 빼돌렸다는 얘기인데….
 
  『글쎄요. 아무튼 우리는 현장을 철저히 감식했고, 현장에는 여비서 외에는 아무도 없었으며, 유서는 4장이었고, 그 위에 빈 봉투 하나가 있었다는 사실 외에는 더 이상 말씀드릴 게 없고, 아는 것도 없습니다』
 
  鄭회장 측근과 경찰 관계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도대체 누가 무슨 이유로 유서 한 장을 빼돌렸을까?
 
  『사건 현장에 경찰보다 누군가가 먼저 왔다. 그 사람이 유서 1장을 공개하지 않기 위해 빼돌렸다』는 증언에 대해 玄貞恩 회장의 입장이 궁금했다. 기자는 여러 경로를 통해 玄회장과의 접촉을 시도했다.
 
  하지만 玄회장 측으로부터 반응이 곧바로 오지 않았다. 몇 차례 시도 끝에 간접적으로 玄회장의 견해를 전해들을 수 있었다. 玄회장의 주변 인사가 전해 준 玄貞恩 회장의 간접 증언이다.
 
  『玄회장은 당시 상황에 대해 경황이 없어 기억을 못 하고 있어요. 심지어 자신이 현대사옥으로 몇 시쯤 출발했는지도 모르고 있어요.
 
  분명한 것은 玄회장이 경찰로부터 유서를 받았고, 얼마 있다가 金潤圭 사장이 유서를 달라고 해서 가져갔다고 합니다.
 
  한두 달 후쯤에 아무 소식이 없기에 玄회장이 金潤圭 사장에게 본인 것은 빼고 유서를 돌려 달라고 했더니 자기 관련 부분은 빼고 돌려줬다고 합디다. 玄회장은 「사건 당일 유서 한 장이 사라졌다」는 얘기를 전혀 듣지 못했다고 합니다』
 
 

  [의혹 3] 타살 가능성은 왜 배제했나?
 
  『鄭회장이 자살하기 직전에 회사 사람들과 자살소동을 벌이려 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만약 당시 그런 내용이 밝혀졌더라면 다른 각도에서 수사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경찰 관계자)
 
 
 
 중요 단서 놓친 경찰
 
2003년 8월4일 오후 鄭夢憲 회장의 자살사건에 대해 이길범 당시 종로경찰서장이 브리핑을 하고 있다.
  月刊朝鮮 2006년 2월호에서 鄭夢憲 죽음 미스터리 기사가 나간 후 사건을 맡았던 수사 관계자들은 『타살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했다.
 
  부검을 맡았던 국립과학수사연구소측도 『추락 등에 의해 肝(간)과 비장 등 장기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손상되어 사망했다』는 확고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부검결과 약물이나 폭행 흔적도 검출되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부검에 참여했던 金會宗(김회종) 검사는 『가족들은 부검에 반대했지만 「타살의혹」 등 문제가 불거질까 봐 일부러 부검을 실시했고, 타살로 의심할 외상이 전혀 없었다』고 했다.
 
  당시 사건을 맡았던 수사 관계자들은 여러 가지 증거와 정황을 들어 『자살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하지만 鄭夢憲 회장 주변 사람들의 주장은 다르다. 자살인지 타살인지 여부를 떠나 경찰이 사건 발생 후 맨 처음에 「단순 변사 사건」으로 보고함으로써 타살 가능성을 배제한 채 수사가 이루어졌다는 주장이다.
 
  鄭夢憲 회장 주변 사람들의 주장처럼, 당시 사건을 맡았던 관계기관의 수사상의 문제점이 2년6개월이 지난 現 시점에서 하나둘 확인되고 있다.
 
  우선 검찰·경찰 등 수사기관은 鄭夢憲 회장의 사망 사건을 자살로 추정하고 사건을 처리했다. 당시 수사기관은 『현대 비자금 수사를 받고 있던 鄭회장이 심리적 압박을 이기지 못해 유서를 남겨 놓고 자신의 사무실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는 입장을 보였다.
 
  그러나 수사 관계자들은 사망 직전 鄭夢憲 회장이 자살소동을 벌이려고 했고, 유서까지 써 놓았다는 사실을 파악하지 못했다. 이런 사실이 그 당시에 드러났더라면 鄭회장의 사망 사건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당시 사건을 맡았던 한 경찰관계자는 『鄭회장이 자살하기 직전에 회사 사람들과 자살소동을 벌이려 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며 『만약 당시 그런 내용이 밝혀졌더라면 다른 각도에서 수사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鄭회장 사망 사건 취재 과정에서 만난 정보기관의 한 관계자는 빈 봉투가 1장 있었다는 사실과 관련해 기자에게 이런 추론을 제시했다.
 
  『타살을 전제로 한다면 빈 봉투에 들어 있던 유서는 범행 후 증거로 삼기 위해 범인이 가져갔을 가능성이 크다. 자신이 범행을 했다는 증거를 가지고 있어야 배후에서 조종한 사람과 거래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사전에 거래를 했을 가능성이 더 크지만』
 
  그는 또 鄭회장의 타살설을 주장하는 사람에게 들었다며 이런 이야기를 했다.
 
  『鄭회장 타살에는 組暴(조폭)이 동원됐다. 폭력조직으로부터 사주를 받은 하수인은 범행 후 한국을 떠나 뉴욕으로 갔다. 뉴욕으로 간 후 폐인처럼 생활했다고 한다. 그가 양심선언을 하겠다고 하자, 이 사건의 배후 인물로 거론되는 인물 중 한 인사가 그 하수인을 만나기 위해 급히 미국으로 갔다고 한다. 그는 이 인사의 이름만 들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로 깜짝깜짝 놀랐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 정보기관 관계자는 농담처럼 『金기자도 몸조심해』라고 했다. 기자가 鄭회장 사망 사건을 취재하면서 『몸조심하라』는 이야기는 鄭회장의 또다른 측근으로부터 듣기도 했다.
 
 

  [의혹 4] 鄭夢憲은 金潤圭를 신뢰하지 않았다. 그러나 유서 내용은…
 
  『鄭夢憲 회장이 金潤圭 사장에게 그토록 애틋한 유서를 쓸 이유가 없어 처음 타살 가능성 이야기가 나왔다. 鄭회장은 사망 1년 전부터 金사장을 신뢰하지 않았다』(현대 관계자)
 
 
 
 金潤圭를 옹호한 北韓
 
鄭夢憲 회장의 운구를 옮긴 2003년 8월8일 경기도 하남시 창우리 선영에서 玄貞恩 회장과 金潤圭씨가 장례 절차에 관해 상의를 하고 있다. 그러나 2년 후 玄회장은 金씨를 「종기」라고 비유하며 회사에서 내보냈다.
  鄭夢憲 회장의 죽음에 의문을 갖게 하는 것 중 하나가 鄭회장이 金潤圭씨에게 남긴 유서의 내용이다. 다음은 鄭회장이 金씨에게 남긴 유서 내용이다.
 
  <명예회장님께서는 당신이 누구보다 진실한 자식이었습니다. 당신이 회장님을 모실 때 저희 자식의 한 사람으로서 부끄러웠을 뿐입니다. 명예회장님께서 원하는 대로 모든 대북 사업을 강력히 추진하기를 바랍니다>
 
  현대아산 직원들은 鄭회장이 金씨에게 이런 내용의 「애틋한 유서」를 남길 정도로 친밀한 관계는 아니었다고 증언한다. 현대아산 관계자의 증언이다.
 
  『訪北할 때 수없이 鄭회장님과 金潤圭 사장을 수행한 적이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단 한 번도 鄭회장님이 金사장을 칭찬하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어요. 두 분이 그 정도로 친밀하지도 않았고요. 鄭회장님의 스타일상 그런 애틋한 유서를 쓸 분도 아니었고요. 그런 이유 때문에 鄭회장님의 사망 사건 후 우리 현대아산 직원들 사이에서 타살설이 제기되기도 했던 겁니다』
 
  또 다른 현대 핵심관계자의 증언도 현대아산 관계자의 증언과 일치한다.
 
  『鄭夢憲 회장은 유서에다 그 정도의 신뢰를 보이는 글을 남길 정도로 金潤圭 사장을 믿지 않았습니다. 사망하기 1년 전부터 두 분 사이는 소원해져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鄭회장은 왜 金潤圭씨를 진작 내보내지 않았을까?
 
  玄회장의 한 知人(지인)은 『玄회장은 金씨에 대한 鄭회장의 유서내용이 평소 鄭회장으로부터 직접 듣던 것과는 너무나 달라 鄭회장이 자의로 쓴 유서인지 의심하는 것 같았다』고 전했다.
 
  그 해답은 2005년 8월 金씨를 현대아산 대표이사직에서 물러나게 하면서 촉발된 이른바 「金潤圭 사태」 때 북한이 보여 준 태도와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2005년 10월 초 현대가 金潤圭씨 보직을 박탈하자 같은 달 20일 조선아태평양위원회 대변인 명의의 담화를 발표하고 이를 강력 비난했다. 이 담화문은 북한의 金潤圭씨에 대한 신뢰가 어느 정도인지를 잘 보여 준다. 다음은 金潤圭 前 부회장과 관련된 부분을 발췌한 것이다.
 
  <최근 남조선의 현대그룹은 지금까지 대북경제협력사업의 주역으로 활약해온 현대아산 대표이사이며 부회장인 金潤圭를 그 무슨 「비리」라는 데 걸어 모든 공직을 박탈함으로써 물의를 일으키고 있다.
 
  우리는 「김윤규 문제」가 제기되자 현대 측이 신중을 기할 것을 거듭 권고했으며, 그들이 리성적 사고를 가지고 올바르게 처신할 것을 기대하였다.
 
  우리는 항상 의리의 견지에서 정주영 정몽헌 김윤규 선생들을 하나로 생각해왔고 따라서 그들과의 관계에서 의리는 어느 한 사람에게 국한된 의리로만 지켜오지 않았다.
 
  정주영 선생에 대한 의리는 곧 정몽헌 선생에게도 똑같이 지켜졌고 또 김윤규선생에게도 그대로 이어졌다.
 
  따라서 우리는 남조선에서 세론이 김윤규를 죽인 것은 곧 정주영 명예회장을 죽인 것이며 김윤규 부회장에게 매질한 것은 곧 정몽헌 회장에게 매질한 것이라고 비분강개하고 있는 것이 결코 무리는 아니라고 인정한다>
 
  현대아산 관계자나 다른 현대 핵심관계자의 증언이 맞다면, 鄭회장이 金潤圭씨를 내보내지 못한 이유는 「북한의 金潤圭 前 부회장에 대한 신뢰」 때문이 아니었을까.
 
  鄭夢憲 회장이 사망한 후 경영 일선에 나선 玄貞恩 회장은 초기에 金潤圭씨에게 전폭적인 신뢰를 보냈다고 한다. 당시 KCC측과 경영권 분쟁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에 玄회장은 對北사업을 金潤圭씨에게 일임했다는 것이다.
 
  두 사람 사이가 벌어지게 된 것은 2004년 중반부터 金씨의 비리가 하나 둘 씩 드러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는 것이다.
 
  결국에는 「金潤圭 사태」가 진행되고 있는 와중인 2005년 10월10일 玄貞恩 회장이 직원들에게 보낸 이메일에서 金潤圭씨를 「종기」에 비유하게까지 되었다.
 
  <얼마 전 우리는 몸 내부의 종기를 제거하는 커다란 수술을 받았다. 수술을 받지 않는다면 나중에 팔다리를 잘라 내야 했을지도 모른다>
 
  鄭夢憲 회장이 유서에서 「명예회장님(정주영)의 진실한 자식」으로 비유한 金潤圭씨를 玄貞恩 회장은 무슨 이유로 「종기」로 비유했던 것일까.
 
 
 
 운전사 金씨의 증언
 
  사망 사건 당시 鄭회장의 운전기사였던 金모씨는 『두 분의 사이가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며 『鄭회장이 돌아가신 지금 상황에서 두 분의 관계를 더 이상 이야기한다는 것은 돌아가신 분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다』고 했다.
 
  운전사 金씨는 鄭회장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 이승에서 만났던 최후의 인물이다. 그에게 鄭회장의 마지막 모습을 물었다.
 
  그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참 좋은 분이었는데』라고 했다.
 
  ―사건 발생 전날 밤 鄭회장이 성북동 자택으로 향하던 중 갑자기 현대 계동사옥으로 가자고 했는데, 집으로 가는 도중 鄭회장이 누군가와 전화통화를 하지는 않았나요.
 
  『오래돼서 기억은 안 나지만 전화받은 일은 없어요』
 
  ―鄭회장이 술을 먹은 후 밤늦은 시각에 사무실로 가는 일은 자주 있었나요.
 
  『간혹 있었죠』
 
  ―혹시 사건 발생 당시 타살이라는 의혹을 갖지는 않았나요.
 
  『세상에 알려진 그대로죠. 月刊朝鮮이 검찰관계자의 증언을 통해 보도한 그만큼만 알려졌으면 됐지, 저는 그 일에 대해 말할 수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아요』
 
 

  [의혹 5] 鄭夢憲 측근들은 왜 기자에게 『몸조심하라』고 경고했나?
 
  『그 사람들은 무서운 사람들이다』(玄회장의 知人)
 
 
 
 취재 만류하는 사람들
 
鄭夢憲 회장의 100일 탈상제가 2003년 11월11일 서울 우이동 도선사에서 열렸다. 이날 행사에는 玄貞恩 회장 등 유족과 강명구·노전익 등 현대그룹 계열사 임직원 200여 명이 참석했다.
  검찰 관계자들은 月刊朝鮮 2006년 2월호에서 鄭夢憲 회장이 죽기 전 유서를 보았다는 검찰 관계자의 증언에 의문을 던지기도 한다. 현대 비자금 사건 주임 검사를 맡았던 南基春(남기춘) 청주지검 차장검사의 말이다.
 
  『기사를 읽어 보니까 검찰 관계자라는 사람이 검사로 보이는데, 제 상식으로는 이런 일이 있을 수 없다고 봐요. 기자가 거짓말을 했거나 검찰 관계자가 거짓말을 했거나 둘 중 하나라고 봅니다.
 
  타살 의혹을 주장한다면 범죄혐의와 관련된 일인데, 지금까지 가만히 있다가 이제 와서 얘기한다는 것은 법을 집행하는 검사로서 직업윤리에 맞지 않아요. 그 사람이 의도를 갖고 거짓말을 했다고 봐요』
 
  그 검찰 관계자는 南차장검사의 의문 제기와 관련, 月刊朝鮮 2월호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鄭회장 사망 사건 직후 왜 그같은 사실을 말하지 않았습니까.
 
  『두려움이었죠. 그랬다가는 무슨 일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무슨 일을요.
 
  그는 한참 동안 대답을 하지 않고 생각에 잠겼다.
 
  『金기자가 내 존재를 어떻게 찾아냈는지 제가 미루어 짐작은 할 수 있어요. 제가 잘 아는 사람에게 이 이야기를 한 적이 있기 때문이죠. 제가 그분에게 鄭회장님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게 된 것은 제 자신이 답답하고 두렵고 그런 이유들 때문이었어요. 가까운 사람에게 이야기를 하고 나면 시원해지지나 않을까 해서, 그런데 이게 더 곤란하게 됐군요』
 
  그러면서 그는 체념한 듯 이렇게 덧붙였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다 말하죠. 그게 돌아가신 鄭회장님을 위한 일인 것 같기도 하고…』>
 
  당시 검찰 관계자는 기사에 수록된 내용 외에도 왜 그가 사건 발생 당시 그 이야기를 할 수 없었는지에 대한 상황을 길게 이야기했다. 기자는 수긍했고 그 정황을 쓰지 않기로 약속했다. 기자는 알면서도 못 쓸 때와 안 쓸 때가 있다.
 
  기자는 月刊朝鮮 2월호에 鄭회장의 죽음과 관련된 검찰 관계자의 증언이 보도된 이후 부인인 玄貞恩 회장과 金潤圭씨의 소회가 어떤지 궁금했다. 여러 경로를 통해 玄회장과 金씨의 직접적인 인터뷰를 시도했지만 인터뷰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金潤圭씨에게는 여러 차례 전화를 했고, 그의 아들에게 인터뷰 요청을 했다. 그러나 金씨로부터 답변은 오지 않았다. 다행히 玄회장의 소회는 주변 인물들에게 들을 수 있었다.
 
 
 
 『우리 남편에게 왜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玄회장의 知人들은 대부분 月刊朝鮮의 기사를 읽은 상태였지만 기자와의 만남을 꺼렸다. 그 가운데 한 知人은 기자에게 이런 말을 했다.
 
  『玄회장은 온화하고 순수한 가정주부에 가까운 분이에요. 때가 안 묻은 인물이죠. 비록 대기업을 이끄는 회장이지만 가끔 그런 분이 남편 없이 산다는 게 안타까워 보일 때가 있어요.
 
  돌아가신 鄭회장님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하는 편은 아니지만 이런 말씀을 한 게 기억나네요. 「우리 남편에게 왜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아내로서 믿어지지 않아」라고요. 제가 해줄 수 있는 이야기는 여기까지예요』
 
 
 
 『그 사람들은 무서운 사람들이에요』
 
  그러면서 그는 이런 말을 덧붙였다.
 
  『이 사건(鄭회장 사망 사건)에 너무 파고들지 마세요. 다른 취재를 하는 게 나을 겁니다. 정말 해야 한다면 기자도 몸조심해야 될 거예요』
 
  ―제가 왜 몸조심을 해야죠.
 
  『그 사람들은 무서운 사람들이에요』
 
  ―「그 사람들」은 누구를 지칭하는 겁니까.
 
  『묻지 마세요』
 
  기자는 玄회장의 주변 사람들이 鄭회장 사망 사건과 관련, 두려움 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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