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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成東의 인간탐험] 제주지사 출마 준비하고 있는 玄明官 삼성물산 회장

만두 한 개 원가 계산시킨 李秉喆, 수천억 투자도 믿고 맡긴 李健熙
두 사람의 공통점은 人材 욕심

김성동    ksdha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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玄明官
1941년 제주 성산읍 출생. 제주 제일中·서울高·서울大 법학과 졸업. 일본 게이오大 경제학 석사. 제4회 행정고시 합격. 감사원 제3국 부감사관, 호텔신라 대표이사 사장, 삼성건설 대표이사 사장, 삼성그룹 회장 비서실장, 대한상공회의소 부회장, 전국경제인연합회 상근 부회장, 제주국제자유도시포럼 공동대표, 제주대학교발전후원회 회장.
「현통」
  삼성물산 玄明官(현명관·65) 회장의 별명은 「현통」이다. 삼성 계열사인 호텔신라에 재직 중일 때 직원들이 붙여 준 것으로, 「현 고집통」을 줄인 말이다.
 
  玄회장은 대학 졸업 직후인 1966년 행정고시에 합격, 부산市에서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감사원 재직時 퇴직한 후 일본 게이오大에 유학, 경제학 석사를 받고 감사원에 복직했다. 복직 1년 반 만에 퇴직하고 1978년 전주제지 총무부장으로 입사하면서 삼성과 인연을 맺었다. 전주제지를 거쳐 호텔신라 이사·대표이사 사장, 삼성종합건설 대표이사 사장을 역임했다.
 
  1993년부터 3년간 삼성그룹 비서실장을 지냈다. 비서실장 재직時 李健熙(이건희) 회장의 삼성개혁운동인 「마누라 말고는 다 바꾸자」는 「新(신)경영」의 전도사 역할을 했다. 「세계기업 삼성」은 이때 胎動(태동)했다.
 
  玄회장이 비서실장으로 근무할 당시 삼성그룹은 삼성車 진출 허가를 따냈고, 삼성정밀화학(舊한국비료)과 분당 서현역사를 인수하는 등 공격적인 경영을 펼쳤다. 성균관大 운영과 삼성병원 설립 등 삼성이 본격적으로 공익사업에 뛰어든 때도 이 무렵이다.
 
  2003년 3월부터 2005년 5월까지는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상근 부회장으로 있으면서 재계를 대변했다. 기업도시 건설도 玄회장이 전경련 상근 부회장 시절에 내놓은 아이디어다.
 
  요즘 玄회장은 그의 고향인 제주도에서 2006년 5월 지사 출마를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2005년 12월6일 오후 서울 중구 태평로 소재 태평로 빌딩 5층에 자리한 삼성물산 회장실에서 玄明官 회장을 만났다. 굵은 선의 얼굴이 주는 느낌대로 그는 시원시원했다.
 
  ―제주지사 출마는 공식 선언하신 겁니까.
 
  『안 했습니다』
 
  ―출마하실 생각은 있습니까.
 
  『주변에서 제가 기업을 경영했던 마인드로 제주 경제를 살리면 좋지 않겠느냐고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입장을 최종적으로 정리는 안 했지만 긍정적인 방향으로 고민하고 있습니다』
 
  ―삼성그룹의 CEO 중에서는 공직 선거 출마가 처음이죠.
 
  『CEO 중에는 처음인 것으로 알아요』
 
  ―李健熙 회장의 양해는 구하셨습니까.
 
  『확실한 결심을 한 다음에 회장께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아직 양해를 구하는 절차를 밟지 않았습니다』
 
  ―李회장님이 玄회장님의 제주지사 출마 준비를 알고 계실 것 같은데요.
 
  『「아, 저 친구가 지금 고민하고 있구나」 하는 정도 알고 계실 거예요』
 
 
 
 『제주도민들이 웃음을 잃었다』
 
  ―제주가 고향이기는 하지만 이왕이면 서울이나 경기도 등 수도권 단체장에 도전해 보시지요.
 
  『제가 (제주지사 출마를) 고민하고 있으니까 주변에서 두 가지 이야기를 해요. 기업체에서 경영에 전념했던 사람이 정치 일선에 나가는 것이 바람직한가, 하는 이야기가 있어요. 두 번째는 지금 질문처럼 자치단체의 경영이라는 차원에서 나간다면 서울시나 경기도나 이런 데 나가는 게 어떻겠느냐, 하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저는 조금 시각을 달리합니다. 제주도는 고향이고, 오늘날의 「현명관」이 있게 된 것은 당연히 첫째가 부모고 그 다음이 고향 제주도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으로서 고향이 지금 어려운데 나 몰라라 하는 것은 무책임한 것이 아니냐, 하는 생각이죠』
 
  ―제주도의 어떤 상황이 회장님에게 책임감과 사명감을 느끼게 만듭니까.
 
  『제주도민들은 지금 미소를 잃고 있어요. 1970년대, 1980년대만 하더라도 제주도의 1인당 국민소득은 서울 다음이었어요. 해외여행이 자유화되기 전에는 신혼여행객이 제주도로 몰려왔어요. 밀감 나무는 「대학 나무」라고 했을 정도로 귤로 인한 소득도 아주 높았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 호황을 맞았던 제주도가 20년이 지난 오늘날은 1인당 소득이 16개 광역자치단체 중에서 꼴찌에서 세 번째인가 그래요. 제주 경제를 재건해야 할 책임감과 사명감이 제게 있다는 거죠』
 
  ―제주지사를 꿈꾸는 다른 분들도 그런 생각은 갖고 있지 않을까요.
 
  玄회장은 살짝 미소를 띠며 자세를 곧추세웠다.
 
  『제주도 지역경제의 회복과 활력을 찾는 것은 단순한 지역경제 차원을 넘어서 우리나라 경제가 가야 할 길을 테스트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세계적으로 열한 번째, 열두 번째의 GDP를 갖고 있는 경제 강국이 된 것은 「한강의 기적」 때문 아닙니까. 한강의 기적을 만든 엔진은 제조업이에요. 반도체·자동차·선박 그런 것 아닙니까. 그런데 지금 제조업 발전의 엔진은 한계에 와 있어요.
 
  중국·인도 등 큰 잠재력을 가진 나라들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이제 우리는 서비스업을 제2의 성장 엔진으로 대체해야 돼요. 선진국이 되려면, 관광·무역·교육·금융·물류 등의 분야가 발전해야 해요. 그걸 시험할 수 있는 곳이 제주도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제주도는 서비스업 가지고 먹고살아야 해요. 저는 제주도지사라는 자리에 그런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특별자치도, 국제자유도시 이런 여건하의 제주도지사라면 하나의 지역경제의 리더와 자치단체의 長(장)을 넘는 중요한 역할과 임무가 있지 않겠느냐, 하는 생각입니다』
 
  ―소속 정당은 선택하셨습니까.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제가 왜 확정적으로 출마하는 것을 지금 고민 중에 있느냐, 하면 바로 정당 선택 문제도 패키지로 얽혀 있어요』
 
  ―전통적으로 제주도는 무소속 강세 지역이죠.
 
  『옛날엔 그랬죠. 사람 위주로 많이 뽑았죠. 그런데 지금은 다른 것 같아요. 선거법이 무소속 가지고는 많은 핸디캡이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나간다면 정당은 선택해야 할 것 같습니다』
 
 
 
 경제인을 국회로 보내고 싶었지만…
 
   ―열린당이든 한나라당이든 「서울시장 후보로 추대할 테니까 우리 당 후보로 출마해 달라」는 부탁이 오면 받아들일 겁니까.
 
  안경테를 매만지며 잠시 고민에 빠졌지만, 답변은 시원했다.
 
  『그거 참 어려운 이야기네요. 그런데 당선 가능성이 없는 데도 그런 제의를 수락하면 사람이 병신되는 거니까 받아들일 수 없겠죠. 당선 가능성이 있다고 하면 받아들이는 것도 괜찮죠. 단, 제게 지금은 제주도지사가 더 중요해요』
 
  ―2004년 4월 치른 17代 總選(총선)에서 열린당 비례대표 선정위원을 하셨는데, 자발적이었습니까.
 
  『자발적 선택은 아니었습니다. 전경련 상근 부회장할 때였는데, 열린당에서 비례대표 심사위원을 맡아 달라는 연락이 왔어요. 응낙을 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전경련 간부들과 의논을 했죠. 「국회에 기업을 이해하고 경제를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이 갔으면 좋겠다」는 이야기가 많았죠. 그래서 응낙을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경제를 잘 아는 분을 국회로 보내셨습니까.
 
  『보내려고 애를 썼는데 열린당 측의 사정보다는 의외로 기업에 몸담고 있는 사람, 경제계에 몸담고 있는 사람 가운데 응낙을 하는 사람이 별로 없더라구요. 놀랐어요』
 
  ―비례대표를 주겠다는 데도요.
 
  『아니오, 「한번 해보면 어떻겠느냐」고 설득했는데 응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어요』
 
  ―경제학자들 중에는 없었나요.
 
  『저는 솔직히 경제학자는 선호하지 않습니다』
 
  ―어떤 이유 때문입니까.
 
  『실물경제를 아는 사람이 제일 중요하죠. 우리나라가 경제이론을 몰라서 경제가 나빠진 게 아니에요. 실물경제를 이해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실물경제 아는 사람이 국정 맡아야
 
玄회장은 크로아티아 명예대사다. 크로아티아의 도시 마카르스카 사진을 가리키고 있는 玄회장.
  ―회장님 보시기에 지금 정치인 중에 실물경제를 가장 잘 이해하는 분은 어떤 분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글쎄요, 누굴까』
 
  ―그럼 범위를 좁혀서 요즘 大權(대권) 후보로 거론되는 분들 가운데는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글쎄요, 서울시 李明博 시장은 현대건설의 사장·회장을 했죠. 아무래도 CEO 했던 사람은 좀 필드 감각이 있지 않을까요?』
 
  玄明官 회장은 1941년 제주도 남제주군 성산읍에서 아버지 玄麗芳(현여방·작고)씨와 어머니 정갑순(92)씨 사이에 6남1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집안 형편이 어려웠지만 제주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유학, 서울고등학교로 진학했다. 高3 때 부친이 직장을 그만두게 됨으로써 집안형편은 더 어려워졌다. 탈출구는 공부밖에 없었다. 3학년 1학기에는 전체 수석을 차지했다.
 
  이번에는 病魔(병마)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어린 시절의 오랜 객지생활로 인해 폐가 나빠졌다. 고향 제주도로 내려가 3개월을 요양해야 했다. 다행히 스스로 자신이 가진 唯二(유이)한 재산이라고 믿는 「실력」과 「인간성」 덕인지 서울大 법대에 진학할 수 있었다. 가정교사 생활을 하면서 대학을 다녔다. 그때의 자취생활 경험으로 아내(오영자·64)가 없을 때는 혼자서 밥을 차려먹을 수 있을 정도의 「부엌살림 실력」을 지금도 유지하고 있다.
 
  대학 2학년 때 어머니 친구의 딸인 지금의 아내를 만났고, 졸업 무렵에 결혼했다. 둘이 누우면 딱 맞는, 부엌도 없는 방에서 신혼생활을 했다. 대학 졸업 후 제주도로 내려가 6개월여간 고등학교 전임강사(독일어)를 하다가 고시 공부를 위해 경기도 양평의 용문산으로 들어갔다. 6개월간 준비해 행정고시에 합격했다.
 
  행정고시 합격 후에는 부산시청에서 2년간 근무하다가 감사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감사원 근무 중 퇴직하고 일본 게이오大로 유학을 갔다.
 
  ―공무원 생활에 염증을 느끼신 겁니까.
 
  『그런 것도 있었어요. 처음에 1, 2년 동안은 감사원에서 아주 신나게 일했어요. 목에 힘도 좀 주고. 새로운 업무도 배우고, 그런 데 보람을 느끼면서 열심히 일했죠. 그런데 5, 6년 지나니까 과연 이 일이 국가를 위해서 어떤 의미가 있느냐,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감사원 업무가 어떤 면에서는 소극적 의미의 사전 행정이라 진취성이 없다는 판단도 들었고요. 또 잘못된 일만 계속 좇아가면서 그 사람들에 대해서 주의를 촉구하고, 징계하는 업무에서 개인적으로 성취동기를 느낄 수 없으니까 회의감도 들었어요』
 
 
 
 
삼성과의 인연

 
   ―게이오大에서는 경제학을 전공하셨던데요.
 
  『제가 법과대학을 나왔잖아요. 앞으로의 세상은 경제를 모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법률만 전공한 사람은 한계가 있겠다는 생각을 했죠. 처음에는 휴직하고 갈 생각이었는데 감사원에서 받아들여 주질 않았어요. 화가 나서 사표를 쓰고 감사원의 동료이자 선배인 분하고 함께 유학을 떠났어요. 정식으로 유학 시험을 보고 비자를 받고 일본 유학을 간 사람은 국내에서 그분이 1호, 제가 2호예요. 그 이전 분들은 상사 주재원이나 언론사 특파원으로 갔다가 그곳에 남아 공부를 했던 분들이죠』
 
  ―일본 유학이 삼성과 인연을 맺는 계기가 된 겁니까.
 
  『곧바로 이어지지는 않았어요. 게이오大에서 석사 논문을 쓸 때 감사원 사무총장이 미안했던지 편지를 보냈어요. 「졸업하면 바로 감사원으로 복직해 주었으면 좋겠다. 국가를 위해서 다시 한 번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겠느냐」고 그래요. 고맙기도 하고 그래서 복직을 했죠. 복직을 해서 1년 반인가 다녔어요. 그런데 복직을 해서 보니까 진짜 일을 못 하겠어요. 완전히 기름과 물 격이었어요. 다니긴 다니는데 영 능률이 안 오르던 차에 삼성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있었어요』
 
  ―흔쾌히 응했습니까.
 
  『고민을 했죠. 감사원에서 같이 근무하다가 저보다 3~4년 전에 대우그룹으로 간 친구가 있었어요. 그 친구와 상의를 했는데 일언지하에 옮기는 게 좋겠다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삼성 계열사인 전주제지로 가셨군요. 스카우트 제의를 수락할 때 조건은 없었습니까.
 
  『그 당시 송수창씨가 삼성그룹 비서실장을 하고, 소병해씨가 비서실 차장할 때인데 제가 조건을 딱 한 가지만 걸었어요. 「나는 감사업무가 싫어서 온 사람이다. 그룹의 감사팀이라든가 어떤 계열사의 감사업무라든가 이런 거는 안 한다. 나머지는 당신들이 알아서 해주쇼」 그랬더니 처음 간 곳이 전주제지 총무부장이었죠』
 
  ―李秉喆(이병철) 회장이 직접 스카우트한 겁니까.
 
  『물론 李秉喆 회장한테 보고하고 승낙은 받았겠지만 李회장이 「스카우트하라」고 했던 것은 아닌 것 같아요. 삼성에 제 대학이나 고등학교 친구들이 많았던 게 인연이 된 것 같습니다』
 
  ―李秉喆 회장을 많이 겪어 보셨을 텐데 玄회장님이 겪은 「인간 李秉喆」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전주제지에서 3년 보내고 부장 떼고 처음 관리이사로 호텔신라에 갔어요. 평이사는 李회장님을 만나기가 쉽지 않아요. 그 당시에는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 일주일에 두 번 점심을 李秉喆 회장이 사장단들과 함께 했어요. 점심을 끝낸 다음에는 회의장에 들어가서 회의를 해요. 호텔신라 상무 시절이었는데, 사장이 출장을 갔기 때문에 李회장을 제가 식당으로 모시게 됐어요. 그때 李회장하고 처음 대화를 했는데, 지금도 기억이 나요. 「호텔로 와 보니까 어떻노」 경상도 말로 물어봐요. 「재미있습니다」 그랬죠. 「재미있으니까 됐다. 일은 재미가 있어서 해야지 억지로 하려면 안 된다. 재미가 있다니까 됐다」 딱 그 두 마디였어요. 그게 첫 대면이었어요』
 
 
 
 『커피 한 잔을 팔면 얼마가 남나』(李秉喆)
 
  ―李회장님의 성격이 무뚝뚝하셨나보죠.
 
  『철두철미한 분이셨죠. 李秉喆 회장 하면 생각나는 게 있는데, 李회장이 그룹 사장단 회의에 내놓은 주제였어요. 한 번은 「회장인 나하고 사장인 당신들 하고 왜 이렇게 차이가 많이 나느냐, 그 원인이 뭐냐」는 주제를 던지시더군요』
 
  ―능력의 차이를 말한 겁니까.
 
  『사장들이 못 마땅한 거예요. 말귀를 못 알아듣는다고 생각하신 거고. 그 주제에 대한 토론을 한 번에 끝내지 않고 몇 번씩 토론을 하더라구요』
 
  ―그 토론의 결론은 어떻게 났습니까.
 
  『지금 생각하면 그게 간단한 질문이 아니에요. 미친 듯이 일하는 데는 두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이 조건이 충족돼야 기업이 성장하고 국가가 발전하는데, 「주인의식」과 「경쟁의식」이 그것입니다. 그게 바로 「사유재산」 제도하고 「시장경제」입니다. 자유민주주의의 사유재산과 시장경제라는 두 가지 가치관이 우리나라 경제발전의 원동력이거든요. 중국 사람들이 왜 그렇게 우리보다 지금도 1인당 소득이 떨어지고, 북한이 왜 그렇습니까. 해방될 때 북한이 우리보다 경제가 훨씬 좋았어요. 원인이 그거예요. 李회장님은 그걸 깨닫게 하고 싶었던 겁니다. 「당신들과 나의 차이는 주인의식의 차이다」라는 것이죠』
 
  玄明官 회장은 李秉喆 회장의 경영철학을 보여 주는 에피소드를 들려주었다. 「만두」와 관련된 사건이다.
 
  玄회장이 호텔신라 이사로 재직할 때의 일이다. 호텔신라에서는 새로운 음식이나 제품을 개발하면 李회장 집으로 보내 시식을 하게 했다. 하루는 李회장이 「중국식 만두를 가져다 달라」고 했다. 호텔 중국식당에서 만든 만두를 갖다 주었다. 호텔신라가 발칵 뒤집혔다. 李회장은 『만두가 맛이 없다』며, 『왜 만두가 맛이 없는지, 만두 한 개의 원가 계산을 하고 경쟁업체와 원가를 비교하고 맛을 비교해서 보고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玄회장은 당장 하얏트 호텔, 롯데 호텔, 플라자 호텔 등 경쟁 호텔에서 판매하는 만두를 사다가 분석에 들어갔다. 사용하는 밀가루는 무엇인지, 녹두는 몇 g이 들어갔는지, 돼지고기는 얼마가 들어갔는지를 분석해 만두 한 개당 원가를 경쟁 호텔 만두의 원가와 비교해 보고했다. 물론 제품 개선을 어떡할지에 대한 보고도 함께였다.
 
  ―바보같은 짓이라는 생각은 안 들었습니까. 최고 요리사를 데려오면 해결될 일인데.
 
  『지시를 받고 처음에는 이해를 못 했어요. 「시간 낭비되게 왜 이런 일을 하게 하느냐」며 짜증을 내기도 했어요. 그런데 분석작업을 하면서 많은 공부를 했습니다. 그게 상대방 제품, 상대방 강점에 대한 철저한 분석이죠. 李秉喆 회장은 기본이 상대방의 강약점에 대한 철저한 분석이라는 걸 우리한테 보여 주신 거죠』
 
  玄회장은 李회장의 경영철학을 엿볼 수 있는 이야기를 하나 더 들려주었다.
 
  『한번은 「커피 한 잔을 팔면 이익이 얼마 남는지」를 물으시는 거예요. 당연히 모르죠. 커피 한 잔의 원가 계산도 안 했는데. 「커피숍을 경영하는 웨이터나 웨이트레스는 커피 한 잔 팔면 이익이 얼마가 떨어지느냐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걸 모르고 습관적으로 일하는 것은 문제다. 커피숍에 많은 상품이 있는데 커피도 있고, 홍차도 있고, 유자차도 있고. 그 가운데 어느 것이 가장 이익이 많이 남느냐. 그걸 알아야 이익의 극대화도 도모할 수 있고 개인사업도 목표 달성할 수 있지 않느냐, 회사도 마찬가지다」 그런 말씀이었던 겁니다』
 
 
 
 
『사고 싶은 물건은 비싸게 산다』(李健熙)

 
  ―말씀을 듣고 보니 李秉喆 회장이 철저하고 꼼꼼한 분이었던 것 같습니다.
 
  『기초와 기본을 강조하셨어요. 철저함도 마찬가지입니다. 벤치마킹이라는 게 있잖아요. 자기와의 경쟁 상대, 자기 회사보다 더 잘 나가는 일류회사를 철저하게 분석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셨죠』
 
  ―李健熙 회장 스타일은 어떻습니까.
 
  『李健熙 회장은 스케일이 커요』
 
  ―李秉喆 회장하고는 성격이 반대라고도 볼 수가 있네요.
 
  『반대라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조금 달라요. 스케일이 커요. 한국비료를 인수할 때였어요. 산업은행이 대주주였는데 그 지분을 민영화할 때였어요. 그때 제가 비서실장이었는데 한국비료는 삼성하고는 인연이 많은 회사입니다. 회장님이나 저나 민영화 방침이 서면 반드시 인수해야 되겠다, 하고 생각하고 있었죠. 주식 매각에 공개 입찰을 했는데 그 당시에 두 번째로 높은 가격을 써 낸 곳보다 거의 300억원 정도를 더 써서 낙찰받았어요. 응찰에는 성공했지만 실패한 거예요. 두 번째 하고 액수 차가 너무나 컸으니까.
 
  해외 출장 가 있는 李健熙 회장에게 보고하기 전에 어떻게 보고해야 하는가를 놓고 전전긍긍했어요. 보고를 했죠.
 
  「한국비료 응찰해서 낙찰은 됐습니다만 대단히 죄송합니다. 저희들이 치밀하게 분석하고 정보도 입수해야 했는데 소홀히 해서 2번 입찰자 하고 300억 가까이의 갭이 생겼습니다. 정말 비효율적으로 됐습니다」』
 
 
 
 李秉喆·李健熙의 사람 욕심
 
  ―李健熙 회장께서 화를 내셨겠네요.
 
  『통상인의 경우라면 버럭 화는 안 내더라도 「그거 철저히 하지 말야, 무슨 일을 그렇게 하나」 했겠지요. 그런데 李健熙 회장 하는 얘기가, 「아니, 이 사람아 우리가 시장에서 사고 싶은 물건을 사는데 비싸게 주고 사는 것은 당연한 거 아닌가, 고생했어요」 오히려 그러는 거예요. 그때 「야, 李회장 참 통이 크구나」 그런 생각을 했어요』
 
  ―항상 그렇게 통이 크십니까.
 
  『언제나 통이 큰 것은 아니에요. 정말 화를 낼 때가 있어요. 우수한 두뇌를 유출당할 때, 그때는 정말 엄청 신경 씁니다. 李秉喆 회장도 그랬어요. 李健熙 회장도 그건 투철해요. 人材제일이죠. 우수한 두뇌를 빼앗긴다거나 스카우트당할 때는 진짜 못 참을 정도의 알레르기 반응을 보여요』
 
  ―대표적 사례를 든다면 어떤 게 있습니까.
 
  『반도체 분야에서 유명한 金光浩(김광호)씨가 있어요. 이분이 1980년대에 현대에 스카우트된 적이 있어요. 그때 李秉喆 회장께서 대통령한테까지 가서 하소연했다고 그래요. 「人材를 키워 났는데 이런 식으로 스카우트를 하면 우리나라 산업발전에 역행하는 겁니다」 하고 말이죠. 결국 金光浩씨는 돌아와서 삼성전자 대표이사 부회장까지 지내셨죠. 李秉喆 회장이나 李健熙 회장 두 분 모두 우수한 人材에 욕심은 엄청 많은 사람이에요』
 
  ―玄회장님은 그런 경험 없으십니까.
 
  『있어요. 호텔신라에 대표이사 전무로 있을 때였는데, 그 무렵은 88올림픽에 대비해서 힐튼호텔이 생기고 그랬어요. 한번은 대우그룹의 힐튼호텔에서 우리 호텔신라의 우수한 직원 30명을 스카우트해 가는 일이 벌어졌어요. 李健熙 회장이 저한테 화를 굉장히 냈어요. 그래서 저는 힐튼에서 50명을 스카우트해 버렸어요』
 
 
 
 李健熙 회장의 강점은 예측력
 
  ―李秉喆 회장은 현장 위주의 철저함이 있는 관리형이고, 李健熙 회장은 맡길 것은 맡기는 자율형으로 두 분의 리더십을 비교하는 분들도 있던데요.
 
  『저는 언제나 그런 이야기를 하죠. 「세계에서 재량권이 가장 강한 CEO는 삼성의 CEO일 거다」라는 말이죠. 李健熙 회장은 몇백억원 투자는 그냥 맡겨요. 사장들이 李회장한테 브리핑 안 해요. 그냥 비서실하고 의논만 하죠. 그 정도로 책임경영을 강조하죠』
 
  ―비서실장으로서 가까이서 지켜보셨는데, 李健熙 회장의 강점은 무어라고 생각하십니까.
 
  『선견력이라고 할까. 경영환경에 대한 예측력이 탁월해요. 한 예를 들면 반도체 D램이 세계적인 불황을 맞자 일본 반도체 업계는 전부 투자계획을 취소하고 축소하는 때가 있었어요. 우리 삼성전자도 반도체 D램에 대한 투자계획을 연기하거나 축소, 조정하기로 실무자 선에서 의견을 모았어요. 그렇게 회장께 보고를 했죠. 반도체 투자는 한 라인에 1조원 규모가 들어가는 엄청난 규모의 투자예요.
 
  그런데 李健熙 회장이 한참을 고민하더니 회의를 같이 하자고 하는 거예요. 삼성전자팀하고 우리 비서팀하고 한 세 번을 같이 회의를 했어요. 최종적인 결론은 실무진들은 「축소합시다」였고 李회장은 「아니다, 이때야 말로 기회다, 치고 나가자」는 결론을 내는 거예요. 정말 걱정했어요. 이러다가 큰일 나겠다. 그런데 李회장이 확고하게 밀고 나가니까 할 수 없이 했잖아요. 그 선견력이 맞아떨어진 겁니다. 그때부터 삼성반도체가 세계 일류기업으로 업(Up)을 한 겁니다』
 
  ―李在鎔(이재용) 상무는 두 분 선대 회장 중 어느 쪽에 가까워 보입니까.
 
  『글쎄 그건 잘 모르겠어요. 지금 경영수업을 하고 있는 입장이라 뭐라고 말할 수는 없잖아요?』
 
  ―그래도 품성이라든가 이런 차원에서.
 
  『품성은 겸손하고, 공부하려고 애를 써요. 놀랄 정도로 겸손하고 스마트하다고 할까요. 경영능력이나 스타일은 지금 판단하기가 어렵죠』
 
 
 
 『「국내 1등주의」가 삼성을 병들게 했다』
 
  ―삼성그룹 비서실장으로서 李健熙 회장을 도와 삼성의 개혁을 주도했다는 평가를 받는데, 처음에 생각하셨던 삼성그룹 개혁의 방향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그 당시 삼성그룹의 문화라는 게 「제일주의」예요. 설탕도 제일, 골프장도 제일, 모든 게 제일주의란 말이에요. 또 대부분 제일주의에 의해서 성취를 했어요. 「제일주의 病」이 걸린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국내에서나 제일이지 세계 제일은 아니죠. 그게 「병균」이 된 거예요. 환경은 국내 제일이 아니라 글로벌 환경화되면서 세계 제일이 아니면 죽는 판인데 말입니다. 「국내 제일이란 제일病, 과거부터 우리나라 기업경영에서 내려왔던 매출액·마켓셰어(시장점유율)를 중시하는 量(양) 위주의 경영, 이런 병을 치료하고 質(질) 위주로 전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세계 제일이 아니면 죽는다」 하는 위기의식이 삼성의 개혁운동인 「新경영」의 스타트입니다』
 
  ―원래 뜻했던 대로 삼성그룹의 개혁이 다 이루어졌다고 보십니까.
 
  『저는 이루어졌다고 보지만 완벽하게 이루어졌는가에 대해서는 이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삼성그룹의 경영 방향의 개혁이 이루어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지금 오늘날의 삼성은 어림없었다고 봅니다』
 
  ―개혁을 추진하다 보면 저항이 있게 마련인데, 가장 어려웠던 점은 어떤 겁니까.
 
  『삼성의 개혁은 과거 전통적인 조류와 반대되는 것이었거든요. 「量에서 質 위주로, 매출액보다 이익을 중시하자. 상품을 얼마나 수출한 게 중요한 게 아니라 質 위주로 가자」는 것이었으니까요. 과거 수십 년 동안의 관행과 관습을 하루아침에 깨기가 어려웠습니다. 물론 개혁은 자기 부정이죠. 과거와 현재의 부정이 개혁인데 어렵죠. 개혁과정에는 반드시 혼란이 있게 마련입니다. 이 혼란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쳐다보는 불안심리의 팽배, 이런 것들이 추진력을 저하시키는 하나의 정신적인 장애였죠』
 
  ―삼성은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들로부터 집요한 공격을 받아 왔습니다. 시민단체들은 「기업의 지배구조를 글로벌 스탠더드化하자」는 것 아닙니까.
 
  『삼성도 깊이 있게 생각할 일이 있죠. 그걸 「전혀 없다」 그렇게 얘기하고 싶지는 않아요. 그런데 「지배구조」가 문제라는데, 저는 지배구조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지배구조는 수단입니다. 기업이 살아남기 위한, 경쟁력 강화를 위한 수단입니다. 목적은 「경쟁력」이에요. 그거 없으면 기업은 죽습니다. 경쟁력 없으면 기업은 죽습니다』
 
  玄明官 회장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지배구조에는 글로벌 스탠더드가 없다 이겁니다. 서구식 지배구조, 일본식 지배구조, 독일식 다 달라요. 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현대그룹과 LG그룹과 삼성그룹이 왜 지배구조가 똑같아야 하느냐, 왜 획일적이어야 합니까. 한국의 특수한 역사와 문화와 인식, 경제발전 단계와 경쟁상황은 던져 버리고 꼭 미국식 지배구조가 우리에게 적용돼야 합니까. 획일주의예요. 아쉬워요. 이런 얘기가 나오면 내가 열을 받아요(웃음)』
 
  ―비서실장으로 재직하실 때 삼성이 자동차 시장에 진출했는데, 결과적으로 실패라는 평가를 받는 것 아닌가요.
 
  玄회장은 질문을 자르며 답했다. 기업 지배구조를 이야기할 때보다 목소리는 더 높아졌다.
 
 
 
 三星자동차 실패에 대한 울분
 
   『삼성이 자동차에 진입할 때 李健熙 회장을 비롯해서 당장 이익이 날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일본이나 미국이나 여타 선진국가가 걸어온 길을 보면 전자와 자동차 두 큰 기둥이 경제를 뒷받침하고 있어요.
 
  일본의 경우에도 수출액이 전자와 자동차가 거의 비슷해요. 자동차 공업이라는 것은 산업에 파급효과가 굉장히 큰 거고, 자동차 강국이 되려면 경쟁을 해야 됩니다. 「삼성이 자동차에 들어가서 서로 경쟁을 하게 되면 우리 국가의 자동차 공업이 발전하지 않겠느냐, 대신에 자동차 공업은 반드시 10년 동안 적자일 거다」 그런 점을 감안해서 시작한 겁니다. 그런데 2년 만인가, 3년 만에 IMF 외환위기가 딱 터져 버린 거예요.
 
  삼성반도체는 삼성전자 혼자 한 게 아닙니다. 삼성그룹이 만들었고, 현대자동차는 현대그룹이 만든 겁니다. 그런데 IMF 되고 나서는 글로벌 스탠더드라고 해서 그룹 차원의 자금, 인력자원을 지원하는 걸 하지 말라고 했잖습니까.
 
  자동차를 할 때 우리는 그룹 차원에서 자금을 동원해서 투자하면 10년 후에는 흑자로 반전될 것으로 예상했던 거죠. 그런데 IMF에서 안 된다는 거예요. 한 회사만 가지고 하라는데 그때까지 삼성자동차는 실적이 없는 회사 아닙니까. 그러니까 접을 수밖에 없는 일이었는데 저로서는 굉장히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지금도 많이 아쉽습니까.
 
  『아쉽죠. 만일에 IMF 외환위기를 맞지 않았다면 우리나라 자동차 산업은 삼성자동차와 현대자동차가 경쟁하면서 지금보다 훨씬 발전했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李健熙 회장도 많이 아쉬워하십니까.
 
  『그렇겠죠, 뭐(웃음)』
 
  ―길 가다가 SM5 지나가는 거 보면 많이 속상하시겠습니다.
 
  『좀 그런 면이 있죠』
 
  ―「삼성공화국」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삼성공화국은 만들어지는 겁니까.
 
  『(웃음) 글쎄, 나는 그 「공화국」이라는 의미를 모르겠는데, 「잘 한다」는 의미의 공화국인지』
 
  ―삼성의 거대한 권력과 힘을 비판적으로 이야기하는 거겠죠.
 
  『(웃음) 좋은 의미나 나쁜 의미나 다 내포된 양면성이 있는 얘기인 것 같은데, 삼성이 근자에 스포츠에서도 1등 하고 그래서 일반 국민들한테 너무 독주한다는 인상을 심어주는 것 같아요. 그런 인식이 심어지지 않도록 노력할 필요는 있죠』
 
  ―전경련 상근 부회장으로 가실 때 그룹 비서실장, 삼성물산 회장이라는 경력 때문에 格(격)이 안 맞는다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그룹에서 가 주었으면 하는 강력한 희망이 있어서 제가 몇 번 고사하다가 본의 아니게 갔죠』
 
  ―玄회장님이 전경련 상근 부회장으로 재직時 삼성의 입김이 세다는 이유 때문에 「삼경련」이라는 이야기도 나왔었는데, 그런 이야기는 들었습니까.
 
  『세상 일이 내 뜻대로만 되는 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내가 어떤 마음을 먹든 간에 그것이 왜곡될 수 있구나」 하는 공부도 했고, 경험도 많이 했습니다. 오히려 저는 그 당시 삼성 출신이기 때문에 삼성 사람들은 덜 만났고, 어떤 이해관계가 상충될 때는 삼성의 이해를 희생하는 쪽으로 했습니다. 사람들의 고정관념이나 선입견을 풀기는 참 어렵다는 것을 느꼈어요』
 
  ―2005년에 전경련을 떠날 때는 자발적이었습니까.
 
  『자발적이었죠』
 
 
 
 현행법 아래서 기업도시는 성공 못 해
 
공무원 시절의 가족사진.
  ―그룹에서 부른 것은 아니고요.
 
  『저는 처음 갈 때부터 분명히 2년만 하겠다고 약속을 했어요. 강신호 전경련 회장께도 임기 종료 6개월 전부터 「저는 임기 끝나면 그만둡니다」 하는 말씀을 분명히 드렸어요』
 
  ―상근 부회장으로 계시면서 기업도시 아이디어를 내셨는데, 그 문제가 잘 풀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기업이 투자를 하지 않으면 우리나라 경제는 침체될 수밖에 없어요. 당연히 일자리 창출도 안 되는 거구요. 그런데 기업들은 돈은 많지만 투자는 안 하려고 해요. 투자유인책이 없어요. 기업도시 건설은 기업의 투자유인책으로 제안한 것이었습니다. 기업이 이제는 공장 하나를 짓고 빌딩 하나를 짓는 일에는 메리트가 없기 때문에 투자를 안 해요.
 
  그렇다면 도시설계도 기업이 하고, 그 도시에 어떤 시설물을 들여 놓고 녹지 비율을 얼마나 하고 그런 것을 전부 기업에 맡기면 신나서 투자를 할 것이라는 판단을 했어요. 그런데 실제로 정부와 협의하고 국회 입법과정에서 이것 잘리고 저것 잘리고 다 잘렸어요. 자율성이 없어졌어요. 형식적인 기업도시법이 돼 버렸어요. 그러니 침체될 수밖에 없어요』
 
  ―현행법 아래서는 기업도시가 성공할 수 없다는 말씀인가요.
 
  『네』
 
  ―「대한민국에서 기업하기가 어렵다」고들 하는데, 그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기업은 왜 합니까. 돈 벌기 위해서 합니다. 정당한 방법에 의해서 富를 축적하는 것을 존경할 줄 알아야 자본주의죠. 그런데 지금은 돈을 많이 가지면 죄인 취급하는 사회 분위기 때문에 열심히 기업 안 하려고 하는 정서가 있어요. 또 하나는 기업인들이 신나게 하도록 촉진하는 게 없고 오히려 규제만 많죠』
 
  ―바람직한 정부와 기업의 관계는 어떻게 해야 만들어질까요.
 
  『바람직한 관계는 「최소한의 간섭」입니다. 기업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열심히 번 돈을 자기가 투자하고, 자기가 팔아야 합니다. 돈을 가장 아까워하고 하는 것은 그 돈을 가진 주인인 기업이지 정부는 몰라요. 그런데 모르는 사람들이 「팥 놔라 콩 놔라」 하니까 이게 문제예요』
 
  ―株價(주가)가 오르고 있지만 자영업자들이나 서민의 체감경기는 바닥인데, 이런 현상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株價가 올라서 이득을 올리는 사람들을 가만히 보면 돈 있는 사람, 외국인입니다. 株價 상승하고 일반 서민들이나 자영업자의 경제는 관계가 없어요. 가처분 소득이 늘어나는 것은 외국인하고 기존의 돈 많은 사람들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소위 高소득자의 가처분이 늘어나서 그런 의미에서 소비는 늘어날 것입니다. 그러나 일반 서민이나 자영업자를 상대로 하는 소비는 늘어나지 않죠. 소득의 양극화죠』
 
  ―일반 서민들이 느끼는 체감경기는 언제 좋아질까요.
 
  『저는 그걸 느끼기에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우리나라의 가계 부채가 500조를 넘었잖습니까. 한 가구당 부채가 3000만원을 넘은 지 오래됐어요. 신용불량자가 360만 명이 넘고 돈을 벌면 부채 갚고 하는 데 정신이 없어요. 그런데 어떻게 일반 서민 가계들이 소비 진작에 나설 수 있겠어요. 그런 구조적인 문제 때문에 최소한 1년은 더 걸리겠죠』
 
  ―현 단계에서 침체를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 경제에 가장 큰 걸림돌은 어떤 겁니까.
 
  『기업들의 소극적인 투자입니다』
 
  ―정부의 규제나 우리 사회의 反기업 정서 때문입니까.
 
  『그것도 그렇고, IMF 외환위기 이후 기업이 신경 쓰는 분야가 전부 부채비율과 株價 아닙니까. 株價가 많이 올라갔느냐, 株價가 많이 올라가면 이익 배당을 많이 하는 것 아닙니까. 이 모든 것은 전부 투자와는 반대 방향입니다. 투자하면 차입금 빌리고 이자 나가죠, 감가상각비 나가죠. 이익이 줄어듭니다.
 
  그러니까 투자하고 단기 순이익하고는 상극관계예요. 그렇기 때문에 단기 순이익, 소위 株價 증시 경영을 IMF 외환위기 이후에는 글로벌 스탠더드 경영이라고 들여왔잖습니까. IMF 이후 기업인들의 사고방식을 소극적인 경영을 하도록 만들어 놨어요. 적극적인 경영을 하던 大宇가 망하는 걸 봤거든요. 결국은 「현금 가지고 있는 게 최고더라」는 걸 피부로 느꼈죠. 그래서 기업들이 웬만해서는 현금을 안 쓰려고 해요』
 
 
 
 외환보유고 증가는 투자를 위한 수입을 않기 때문
 
  ―그 정도 상황이라면 우리가 IMF 외환위기에서 벗어난 게 아니라고 볼 수 있겠네요.
 
  『끝난 게 아니죠. IMF 외환위기가 왜 나왔는데요. 단순한 외환위기가 아니잖아요. 외환위기의 근본원인은 무엇입니까. 우리나라 경제의 상품 경쟁력이 없어서 수출을 해서 달러를 못 벌어오니까 외환위기가 온 것 아닙니까. 외환위기가 극복됐다고 하려면 우리나라 경쟁력이 회복돼서 수출이 더 확대돼야 하는데, 그게 아닙니다. IMF 외환위기를 극복했다고들 하는데 웃기는 얘깁니다』
 
  ―외화가 한 푼도 없던 우리나라가 지금은 외환보유액이 2070억 달러가 넘지 않습니까.
 
  『외환보유고는 많다고 좋은 게 아니에요. 국가 입장에서 외환보유고가 늘어난 이유는 수출을 하는 데 돈을 덜 썼기 때문 아닙니까. 왜 덜 쓰느냐, 돈 많이 쓰는 것을 안 한다는 거죠. 수입을 안 한다는 겁니다. 기계장치라든가 하는 데 돈을 안 쓴다는 겁니다. 기껏 돈을 쓴다는 것은 관광 가서 쓰는 것 그런 것 외에는 없어요』
 
  ―최근에는 어떤 분들과 자주 어울리십니까.
 
  『요즘에는 없어요. 제주에 왔다 갔다 하느라고 정신이 없네요』
 
  玄明官 회장의 취미는 30여 년부터 시작한 등산이다. 전주제지에 입사한 직후 정강이가 부러지는 부상을 당해 다리에 철판을 대고 있지만, 등산 초보자들에게 등산時의 호흡법·보행법을 가르쳐 줄 정도로 등산 전문가다. 그는 휴일 새벽 산행을 즐긴다.
 
  인터뷰를 마치고 玄회장이 손을 내밀었다. 강한 손아귀의 힘이 전달돼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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