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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어머니 추억(1) 車凡錫, 張 裳, 李潤澤, 李東洵, 金光雄, 高廷旭, 卜鉅一, 李季振

『神은 모든 곳에 있을 수 없기에 어머니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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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久遠의 여인상/어머니는 大地이다/「삶의 戰士」어머니/나의 思母曲이 나의 詩가 되었다/어머니에게 마지막 업힌 날/당신은 나의 사랑입니다/자신의 운명을 탓하지 않은 분/아직도 冊 읽는 老母
 
 
  ◈ 천석꾼집에 시집온 소작인의 막내딸
 
  내 久遠의 여인상
 
  車 凡 錫 극작가·前 예술원 회장
  1924년 전남 목포 출생. 연세大 영문과 졸업. 同 대학원 영문학 석사.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문화방송 편성부국장, 극단 산하 대표, 연극협회 이사장, 극작가협회장, 청주大 예술대학장 등 역임. 희곡 「산불」, 「학고방」, 「옥단어」 등.
 
 
 
 몸도 마음도 한국형 美人
 
   우리 엄니가 살아 계시다면 올해 113세다. 세상을 뜨신 지 30년이 지났지만 우리 집 거실에는 아버지의 회갑 때 두 분이 나란히 앉아 찍은 사진, 우리 엄니가 운명하실 때 함께 가지고 있던 默珠(묵주)와 주민등록증이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러니 우리 엄니는 아직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실 것이 분명하다.
 
  우리 엄니는 미인이었다. 작달막한 키에 살결이 흰데다가 이목구비가 端麗(단려)하며, 검은 반곱슬머리가 시원한 이마를 가린, 문자 그대로 한국형 미인이었다.
 
  할아버지가 穀收(곡수)를 치러 가셨다가 우연히 눈에 들게 된 소작인의 막내딸 金南午. 엄니는 田畓(전답)깨나 있었던 소농의 자식이었지만 家運(가운)이 기운데다가 제대로 교육도 못 받았던 16세 처자였다.
 
  할아버지는 그 길로 맏며느릿감으로 우리 엄니를 점찍었다는데, 그때 아버지는 나이 14세였다던가.
 
  우리 엄니가 層層侍下(층층시하)에서 고초(고추의 원말) 唐椒(당초: 고추를 가리킴)보다 맵다는 시집살이를 이겨 냈다는 후일담은 우리 문중에서는 널리 알려진 무지개 같은 옛 얘기였다. 예쁘고, 부지런하고, 어른 공경하고, 손끝 솜씨 얌전한데다가 가난한 친척이며 소작인들에게도 上下를 가리지 않고 대했던 새댁의 온정을 누가 들어도 느낄 수 있었다.
 
  배운 것도, 지닌 것도, 자랑할 것도 없다 못해 무력해 보이기까지 했던 우리 엄니, 평생 몸치장도 제대로 할 줄 모르고, 나들이도 모르고, 일 속에 파묻혀 청춘을 바치셨다던 옛 이야기를 나는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다.
 
  먼 훗날 천석꾼 부자로 통했던 지주댁 마나님이면서도 과묵하고 겸손함이 넘쳐 오히려 어리숙해 보였던 우리 엄니. 어쩌다가 아버지와 同夫人(동부인·동행)할 때면 나란히 걷는 게 아니라 한 두어 발짝 떨어져 졸졸 따라가던 우리 엄니. 그것이 열등감인지 무의식인지 분간이 안 되었던 내 사춘기 시절의 인상은 먼 훗날 내가 작품 속의 여인을 묘사하는 데 적지 않게 영향을 미쳤다.
 
  아버지는 宗家(종가)의 종손이었다. 결혼 후에도 할아버지의 음덕으로 일본 明治(메이지)대학 법학부를 마치셨다. 당시에 街人 金炳魯(가인 김병로), 毅齊 許百鍊(의제 허백연) 등과도 친교가 있었다.
 
  그러나 우리 엄니는 겨우 한글을 터득한 처지이고 보면 두 분의 언밸런스와 엄니의 콤플렉스는 알게 모르게 뿌리가 깊었으련만, 엄니는 그런 일을 한 번도 입 밖에 내본 적이 없었다. 몸 깊숙이 배어 있었음에도 그것을 깨물고 삼키며 3男3女를 키워 낸 우리 엄니는 내 영원한 여인상이다.
 
 
 
 지식인 시동생, 新여성 동서들
 
   우리 엄니는 그런 감상적인 감정을 극복할 의지력이 있었다. 宗家의 맏며느리라는 긍지나 자부심 따위를 의식해서가 아니라, 대가족제도라는 질서 안에서 묵묵히 자기 위상을 지킨다는 상식의 소유자였기 때문이다.
 
  그 증거로 세 명의 시동생이 모두 대학을 마칠 때까지 우리 엄니는 형수가 아니라 한 학부모 자격으로 헌신했다. 그러나 일본 센슈(專修)대학, 규슈(九州)대학 의학부, 교토(京都)제국대학 경제학부를 각각 수학한 세 시동생의 눈에 비친 우리 엄니는 어찌 보면 한낱 무지랭이 시골 주부로 보였을 것이다.
 
  우리 엄니의 세 시동생이 결혼한 뒤 새 식구가 된 동서들 또한 유식한 新여성들이었다. 그분들의 학식이나 교양이나 사회적 안목에 비한다면 우리 엄니는 그 발꿈치에도 못 미치는지라 열등감과 피해의식에 잠시도 마음 편한 날이라곤 없었다.
 
  하지만 내가 아는 한 우리 엄니와 세 동서 간에 어떤 반목이나 갈등도 없었다. 우리 엄니는 손위 동서이자 시어머니 격이었지만, 한 번도 그런 눈치나 교만을 보이거나 자긍심을 내세운 적이 없었다. 어쩌다가 언짢은 풍문을 들어도 대꾸하지 않았다. 형제 간의 화목을 어려서부터 익혀 왔기 때문이다.
 
  新지식 여성과 舊지식 여성의 갈등은 남의 화젯거리가 될 법도 했으련만 우리 엄니는 시종 침묵으로 일관했다. 나는 그런 엄니가 때로는 불만스러웠고, 분노가 치밀 때도 있었다. 따질 건 따지고, 흑백을 가릴 건 가려야 했는데도 우리 엄니는 끝내 입을 조개처럼 다물었던 것이다. 결국 나는 그것이 엄니에게 쏟아지는 찬사가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 한 채 나이를 먹었다.
 
  다만 한 가지 납득이 안 가는 일이 있었다. 세 숙부의 결혼은 모두 재취가 아니면 蓄妾(축첩)이거나 본처를 박대한 재혼이었다. 결혼의 신성함이나 사랑의 순결성을 놓고 본다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우리 아버지의 부부생활은 형제들 사이에서 예외였다. 사회적 지위나 富의 무게로 본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으련만, 우리 아버지가 蓄妾을 했다는 기억이라곤 없다. 우리 엄니가 아버지의 여자관계 때문에 속앓이를 했다는 기억도 없다.
 
 
 
 性에 눈 뜬 소년의 수수께끼
 
  어린 마음에 한 가지 이해하지 못할 부분이 있었는데, 당시 아버지와 엄니는 각방을 쓰셨다. 아버지는 사랑방에, 엄니는 큰방(안방)에 계셨다. 나는 국민학교 고학년 때까지도 안방에서 엄니의 젖가슴을 만지면서 잠들었다. 중학생이 되자 객지(光州西中)에서 하숙 생활을 했다. 방학 때 고향에 돌아온 뒤에는 사랑채에서 기거했다.
 
  나는 우리 부모님이 침실을 함께 쓰지 않는 이유가 궁금했다. 체면과 권위주의에서 오는 관념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인지, 性에 눈 뜨기 시작한 소년에겐 하나의 수수께끼였다.
 
  어느 날 밤 잠결에 나는 무슨 소리를 들었다. 아버지가 거처하시던 사랑방에서 놋으로 만든 唾具(타구)에 가래를 뱉는 소리가 났다. 이윽고 미닫이가 열리며 대청을 지나 안채로 건너가는 고무신 끄는 소리가 나고, 다시 마른기침 소리가 들렸다. 곧 안방 앞마루의 유리 미닫이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이내 조용해지는 것이었다.
 
  나는 이상할 정도로 눈만 말똥거리며 잠을 청할 수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다시 미닫이가 열리고 고무신 끄는 소리가 가까이 들려오고….
 
  방학 때가 되면 나는 안방 아랫목에서 뒹굴며 소설을 읽는 게 일과였다. 엄니는 그런 아들의 조용한 모습이 대견한 듯 미소를 지으며 간식을 내오곤 했다.
 
  『책만 읽지 말고 밖에 나가서 놀제 그러냐? 늬 성(형)이랑 동생하고 놀다 오랑께. 너는 천상(천생) 우렁각시인갑다잉? 호호』
 
  우리 엄니의 그 웃음도 결코 간드러지지 않고 안으로 숨어드는 듯 조용했다. 좀처럼 정색을 하거나 노골적으로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 분이었다. 나는 먼 훗날에 가서 그 뜻을 알게 되었다. 어머니의 묵묵함은 무언 중에 전해지는 진실의 전달인 것이다. 말 잘하는 사람일수록 거짓 빚이 많다는 것도, 그런 사람일수록 믿음성이 없다는 것도 우리 엄니가 내게 가르쳐 준 人生訓(인생훈)이었다.
 
  무엇보다 내가 엄니의 생활에서 배운 교훈은 「안 쓰고 모으는」 근검절약의 생활이다.
 
  『어째든지 애껴사(아껴야) 쓴다. 옛말에 토방 아래 짚신 두 켤레 있을 때 살림 모으라고 했느니라. 많이 벌려고 말고 안 쓰고 모으는 게 살림이니라』
 
  부잣집 마나님이면서 손수 버선을 꿰매고 아버지의 헌 바지를 속바지로 지어 입으며 날마다 주방에서 텃밭으로, 샘가에서 목욕탕으로, 안방에서 사랑방으로 다니시던 우리 엄니는 내게 살아가는 뜻과 보람을 일깨워 주신 久遠의 여인상이다.●
 
 
 

 
  ◈ 어머니는 「누더기 걸쳐도 빛이 나는 사람」
 
  정직함이 母女의 목숨을 살리다
 
  張 裳 前 이화女大 총장
  1939년 평북 용천 출생. 이화女大 수학과, 연세大 신학대 졸업. 美 프린스턴 신학大 신학박사. 이화女大 기독교학과 교수, 대한YMCA연합회 부회장, 現 이화女大 기독교학 전공 교수. 저서 「여성학이 신학에 미친 영향」,「한국문화와 기독교 윤리」 등.
 
 
 
 『사람이 먹고 입는 게 전부간?』
 
   나의 어머니, 김봉현 권사께서 떠나신 지 15년. 무심히 흐른 세월의 저 심연에는 여전히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孝를 다하지 못한 아쉬움이 자리 잡고 있다. 일찍 홀로 되신 나의 어머니는 딸 형제를 두셨으나, 언니는 나와 열 살 터울이 지는데다, 일찌감치 서울에서 여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나는 서너 살부터 어머니와 단둘이 살았다. 어머니는 키가 크고, 목이 길고 가냘픈데다 피부도 희어서 鶴(학)과 같은 분이었다.
 
  나의 고향은 평안북도 용천이다. 월남하기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그곳에서 남부럽지 않게 생활했다. 그러나 1947년 작은딸인 나를 데리고 월남한 이후 어머니의 삶은 경제적으로 지극히 어려웠다.
 
  학교 근처에도 못 가본 분이니 배운 것은 없고 몸은 천성적으로 좀 약하고, 월남한 피란민이라 빈손이었으니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으리라. 어머니는 남의 집 바느질을 많이 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한 번도 내게 변변히 못 먹여서 안쓰럽다던가, 제대로 못 입혀서 안 됐다고 하신 적이 없다. 오히려 『사람이 입고 먹는 게 전부간? 누더기를 걸쳐도 속에서 빛이 나는 사람이어야지』 하시는 말씀에 나 역시 먹고 입는 문제에 별로 무게를 두지 않고 자랐다.
 
  나의 어머니는 신앙으로 사셨다. 어머니와 함께했던 가장 오랜 기억의 하나는 새벽녘 어머니를 따라 교회를 가던 일이다. 압록강 변 용천의 겨울은 몹시 춥고, 바람은 차다 못해 살을 에이는 듯이 날카로웠다. 매일같이 새벽기도에 가시는 어머니를 따라 나선 나는 교회에 가서는 어머니 품에서 한잠 잘 자곤 했다. 어머니의 삶의 중심은 교회였고, 교육의 중심은 신앙교육이었다. 모든 일에 있어서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끝이 났다. 나는 유학을 가기 전까지는 주일에 공부를 하지 않았다. 그것이 어머니의 교육철학이었다.
 
  나의 어머니는 이야기를 즐겨 들려 주셨다. 학교 교육은 못 받으셨으나, 어머니는 한글은 물론 한문을 읽으셨다. 틈만 나면 성경은 물론, 당시의 신소설·역사소설을 즐겨 읽으셨고 그 내용을 문장 그대로 외우실 만큼 총명하셨다. 어머니는 그렇게 읽은 내용들, 성경 이야기며 이광수의 「유정」과 「무정」과 같은 소설, 또 「삼국지」 이야기를 저녁마다 내게 들려 주시곤 하셨다. 하기야 가족이 어머니와 나 단둘 뿐이었으니 당연히 대화 상대는 내가 될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삼국지」를 읽으면서 작은딸이 그 장부들을 닮았으면 하셨던 것 같다. 나는 웃음이 많은 아이였다. 어머니는 희로애락을 쉽게 드러내는 건 小人이라고 하시면서 내가 웃음이 많다고 야단을 치셨다.
 
 
 
 『따라오라우, 이남으로 가는 길을 알려줄테니…』
 
  내가 가끔 어머니에게 『어머니는 정말 주체성이 강하세요』라고 말씀드리면, 『알았다. 고집이 세단 말이지?』 하고 웃으시곤 했다. 어머니는 나름대로 일가견이 있고, 원칙을 지키고 타협하지 않는 올곧은 성격이었다. 어머니는 정말 고집스러울 만큼 정직하셨다. 어머니의 정직함이 주변 사람들을 민망하게 할 적도 많았다. 삼팔선을 넘던 때의 일이다.
 
  우리는 어렵사리 안내자를 구해 드디어 월남을 하게 되었다. 안내자는 우리더러 빨래를 하러 가는 모녀인 척하라고 말했다. 우리는 산길에서 안내자를 자꾸 놓쳤다. 안내자는 몇 번이나 빨리 따라오라고 재촉하더니만 결국 어디선가 우리 모녀를 두고 사라져 버렸다. 당황한 어머니와 내가 우왕좌왕하며 산길을 헤맬 때, 『거 누구요?』 하는 소리와 함께, 길고 검은 총을 든 세 남자가 나타났다. 인민군이었다. 우리는 막사로 끌려갔다.
 
  『어디 갑네까?』
 
  인민군 중 하나가 어머니에게 물었다.
 
  『엄마… 빨래터…』
 
  나는 치맛자락 뒤에 숨어서 어머니를 쿡쿡 찔렀다. 그런데 어머니는 한순간의 주저함 없이 『이남에 갑네다』 하시는 게 아닌가. 내게 어머니는 너무나 철없는 사람같이 보였다.
 
  『이남은 왜 갑네까?』
 
  인민군이 다시 물었다.
 
  『우리는 예수를 믿는 기독교인입네다』
 
  어머니는 정말 말릴 수 없는 분이었다. 한 점 흐트러짐 없이 당당하신 것이었다. 인민군들은 「이 아낙이 왜 이리 겁이 없는가?」 하는 의아한 표정이었다.
 
  『남쪽엔 누가 있소?』
 
  『큰딸이 있습네다』
 
  『게서 뭘 합네까?』
 
  『신학교에 다닙니다』
 
  나는 하느님께 기도를 드렸다.
 
  『하느님, 더러운 곳에서 기도해서 죄송해요. 살려주세요』
 
  기도를 하고 눈을 뜨고 보니 뒷간 옆에는 시체가 있었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막사로 돌아오니 인민군들이 여전히 어머니를 한가운데 세우고 총을 들고 서 있었다. 바로 그때 마을에서 한 아주머니가 먹을 것을 담은 광주리를 들고 들어왔다. 아주머니는 나를 보더니 측은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 아주머니는 점심 광주리를 내려 놓으면서 인민군에게 『저 사람들 처치하고 나면 밥맛도 없을 테니 그냥 보내는 것이 어떻갔소?』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아주머니는 또 『아무것도 모르는 저 사람들 죽여 봤자 뭐하갔소? 그냥 보내 주면 내 오후에 중참을 더 가져오리다』
 
  내 기억에 그 아주머니는 지금도 천사로 입력되어 있다. 인민군들은 한참 눈으로 이야기를 주고받더니 느닷없이 『따라오라우. 이남으로 가는 길을 알려줄 테니』라고 했다. 우리 모녀는 어쩔 수 없이 그들을 따라 나섰다. 곧 두 갈래 길을 만났다. 하나는 로스케(소련)가 지키는 길이고, 하나는 이남으로 가는 길이라고 했다. 그 길을 계속 가기만 하면 된다고 인민군이 말해 주었다.
 
  우리는 그렇게 해서 죽음의 골짜기, 삼팔선을 넘어왔다. 왜 인민군들이 우리 모녀를 죽이지 않고 삼팔선까지 데려다 주었는지 설명할 길이 없다. 어머니가 정직하게 대처하지 않고 각본대로 빨래터에 간다고 거짓말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무모할 정도로 고지식한 어머니의 정직함이 오히려 우리 모녀를 살렸다는 생각이 짙다. 나의 어머니는 평생을 그렇게 살다가 가셨다.
 
 
 
 어머니는 大地와 같다
 
  나는 어머니와 시어머니를 함께 모시고 살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전혀 효녀가 되어 드리지 못했다. 언제나 바쁘다는 핑계로 어렸을 적 그토록 재미있게 들려 주시던 것처럼, 어머니께 좋은 말벗이 되어 드리지 못했다. 『딸이 박사가 되어 좋으시겠다』는 주위분들의 칭찬에, 어머니께서 『박사면 뭐하갔소? 얼굴을 보고 이야기할 시간이 있어야지』 하며 아쉬워하셨던 순간순간들이 떠오른다. 그저 죄송한 마음뿐이다.
 
  어머니는 大地(대지)와 같다. 자식은 그 어머니에게서 영양을 받고, 氣를 받고 그 품에서 꿈을 꾸면서 성장한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물살같이 밀려오는 것 같다. 자랑스러운 나의 어머니!●
 
 
 

 
  ◈ 췌장암 말기를 유쾌하게 버티시는 「삶의 戰士」 어머니
 
  『내가 네 스케줄 따라 죽어 주어야 하나』
 
  李 潤 澤 국립극단 예술감독
  1952년 부산 출생. 서울 연극학교 중퇴, 한국방송통신대 초등교육과 졸업. 現 성균관大 연기예술학과 겸임교수, 우리극연구소장. 연극 「오구」, 「햄릿」. 희곡집 「문제적 인간 연산」 등.
 
 
 
 『내가 언제 연애질 했노』
 
   어머니에 대한 근황을 글로 발표하게 되었다. 아마 이 글이 어머니에 대한 마지막 소식이 될 것 같다.
 
  나의 어머니는 이미 연극 「오구」, 「어머니」의 실제 모델로 세상에 알려졌고, 연극배우 孫淑(손숙) 선생이 1997년 부산 문화회관 대극장 공연時 『제가 연기한 역할의 실제 인물이신 黃斗祺(황두기) 여사를 소개하겠습니다』 했을 때, 의연하게 객석에서 일어나셔서 두 손을 번쩍 쳐드셨던 분이다. 그러나 그날 밤 나는 밤새도록 어머니에게 추궁을 당했다.
 
  『내가 언제 연애질했노. 양산복이라고? 그놈 한번 데려와 봐라. 지금이라도 연애 한번 해 보게. 네놈이 어미 망신시키는 극을 꾸며서 인자마 친척들 보기 부끄러버서 집 밖에도 못 나가겠다』 하며 장탄식을 늘어 놓으셨다. 연극은 실제와 다르다는 나의 변명을 전혀 수용하시지 않으셨다.
 
  연극쟁이 아들을 둔 덕분에 어머니는 텔레비전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도 모습을 보이셨다. 택시기사가 어머니를 흘낏 보면서 『할머니 어디서 뵌 분 같소』 하면, 『응, 내가 텔레비전 프로에 두서너 번 나갔지』 하시면서 은근히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기셨다. 『맞다. 할머니 TV 탤런트지요?』 하면 묵묵부답. 택시에서 내리시면서 『내가 연기하라카믄 몬할 줄 아나, 헤헤』 하면서 자신을 알아주는 세상을 즐겁게 여기셨다.
 
  문화관광부에서 주는 「장한 어머니 상」 시상식장에서는 기어코 좌중을 폭소의 도가니로 몰아넣으셨다. 문화부 장관께서 인사를 하시자, 『연극하는 어린 학생, 청년들 내 아들한테만 떠맡기지 말고 나라에서 좀 돌봐 주시오. 내 아들이 그놈들 멕여 살린다고 머리칼이 허옇게 세었소…』 했다.
 
  지금 어머니는 자신의 죽음을 기다리고 계신다. 방바닥에 요를 깔고 모로 누워 잠자듯 계시다가 내가 들어서면 눈을 스르륵 뜨시고 『애비 왔다. 밥상 차려라』 하신다. 여전히 쩌렁쩌렁한 음성이다. 그리고 『여기 앉아 봐라』 하시고는 시시콜콜 잔소리를 늘어놓으신다.
 
  『내 듣기에 네가 에미 죽으믄 에미 사망 기념공연으로 초상집에서 「오구」를 공연한다는데 함부로 그런 짓 하지 마라. 초상은 소리 소문 없이 검소하게 치러야 한다』
 
  『누가 쓸데없이 그런 말 합디까』
 
  『내 연극촌 아이들한테 다 들었다. 그라고 꼭 밀양연극촌에서 초상을 치러야 되겠나? 요새 예전처럼 초상 치르려믄 돈이 많이 들 텐데…』
 
  『병원 영안실은 절대 안 돼요』
 
  『나도 그 생각에는 동의한다마는 초상집에서 연극은 절대 하지 마라』
 
  『알았소』
 
  『그라고 내가 준 돈 1000만원 그거 꼭 사십구재 비용으로 써야 한다. 절에 돈 태우기 아깝다고 딴 데 써 버리믄 내가 천당에 못 간다 알것나? 그라고 니 꼬라지가 이기 뭐꼬. 나이 오십이 넘은 놈이 아직도 맨발로 다니나. 양말 신고 다니라. 니 마누라가 조강지처다. 볼 때마다 궁둥이 두드려 주고, 집에 온 김에 의사한테 한번 찾아가 물어보거라. 내가 언제 죽을란지 알 수가 없다…』
 
 
 
 『아무래도 니 안 바쁠 때 가야 안 되것나』
 
   어머니는 88세의 고령에 췌장암 말기 증상을 선고받으셨다. 늑골 밑에 큰 혹이 만져지고 등까지 부었다. 의사들은 고통이 여간 아니라고 진통제를 주는데, 아프지 않다고 하시면서 약을 잘 드시지 않는다. 그러나 밤새 신음 소리가 들리고 아침에 보면 고통을 참느라 얼마나 이빨을 앙다물었는지 입술이 찢어지고 피가 배어 나오는데도 자식들에게는 아프지 않다고 하신다. 물 한 모금 마셔도 토하기 일쑨데 김밥도 시켜서 먹고 딱딱한 오징어까지 씹어 삼키신다. 그리고는 이내 다 토해 버리신다.
 
  며칠 전 비몽사몽 간에 이상한 말을 늘어 놓으시기에 다시 대학병원 응급실로 모시고 갔다. 의사는 담낭 쪽이 막혀서 이대로 두면 며칠 내 사망하실 거라는 진단을 내렸다. 이대로 두지 않는다면? 하고 내가 물으니까 막힌 관을 뚫어 주면 생명은 한두 달 연장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어떻게 하겠느냐는 것이다.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당장 뚫으시오… 그래서 88세 고령에 수술을 하시고 코와 허리 쪽에 고무호스를 끼고 집으로 생환하셨다.
 
  어머니는 이미 4월을 넘기기 어려울 것이란 진단을 받으셨지만 지금 글을 쓰고 있는 6월 말까지 투쟁하고 계신다. 지난 봄, 3월에 어머니가 내게 물으셨다.
 
  『내가 아무래도 갈 것 같다. 꿈에 염라대왕이 옷 한번 거창하게 차려 입으시고 오셨다』(이건 완전히 연극 「오구」의 재연이다)
 
  그래서 내가 좀 매정한 느낌으로 『안 돼요. 4월에 국립극단 공연 막 올려야 되고, 5월에도 밀양연극촌 애들 「리어왕」 공연한다고 서울 다 올라가요. 좀 한가할 때까지 버티고 있어야 돼요』 그러니까, 『예라 이 후레자식아. 내가 네 스케줄 따라 죽어 주어야 하나』 하시면서 돌아 누우셨다. 그러나 그 다음 날 아침 또 그러셨다.
 
  『내가 또 꿈을 꾸었는데, 선녀들 대여섯이 나를 데리고 배를 탈라꼬 하다가 마… 돌리보내 주더라. 내가 아무래도 니 안 바쁠 때 가야 안 되것나…』
 
  그렇게 해서 5월을 넘기시다가 수술 한 번 받고 다시 6월을 버티고 계신다. 6월 생존설에 대해서는 아내의 해석이 맞는 것 같다. 아내의 말대로라면 영국 어학연수 중인 큰손녀를 한번 보고 가려고 기다린다는 것이다. 그 말을 제 에미한테서 전해 들었는지 영국에 가 있던 큰딸이 어학연수 기간을 다 채우지도 않고 돌아왔다.
 
  『그래, 니 잘 왔다. 내 죽을 때까지 어데 가지 말고 내 옆에 꼭 붙어 있거라』
 
  그래서 지금 어머니는 두 손녀를 곁에 두고 계신다. 요즈음 어머니는 그 고통 속에서 무슨 낙으로 사실까? 간병인을 한 달새 여덟 명이나 갈아 치웠고, 난동성에 가까운 소란 때문에 이 병원 저 병원을 轉轉(전전)하시면서도 김밥과 오징어를 즐겨 드시는 어머니. 외가 쪽 팔남매 가족을 다 불러 모으고 누나집, 작은집, 사돈집, 팔촌집까지 불러 모으신다. 그래서 요즈음 우리 어머니는 친척들의 관심을 한몸에 받는 입장이 되셨다. 언제 저 세상 떠날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입담은 여전하셔서 유쾌한 이야기꾼으로 건재하시면서 친척들 간의 조정자 역할까지 하신다.
 
  『네 사촌 형수 돌아갈 때 용돈 10만원 꽂아 주거라. 그 집안 요새 형편 안 좋다. 광안리 대선이 집 둘째 아들이 환경공학과 출신인데 직장을 못 구하고 있다. 네가 꼭 구해 주거라…』
 
  매사 이런 식이다. 올해 들어 어머니 간병을 오시던 서너 살 아래 둘째 외삼촌이 먼저 세상을 뜨셨고, 또 그 아래인 셋째 외삼촌이 지금 부산 침례병원에서 산소 호흡기에 의존하고 계시면서도 어머니의 근황을 물으신다고 한다.
 
  『우리 누나 괜찮소?…』
 
 
 
 「삶의 戰士」인 어머니
 
  나는 지금 어머니의 삶이야말로 절정의 시기라고 생각한다. 온 가족 친지의 주목을 받으면서 삶의 마지막 순간을 유쾌하게 버티시는 어머니. 언제부터인가 노망들기 싫다고 초등학생인 막내 손녀와 민화투를 치셨던 어머니. 토할 줄 알면서도 오징어를 씹으시면서 살아 있는 시간의 소중함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어머니야 말로 「삶의 戰士(전사)」란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불굴의 戰士라 할지라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 어디 있겠는가. 어머니가 온종일 말이 없으실 때 우리 집은 적막강산처럼 우울해진다. 어머니의 우울증은 곧 침묵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내가 가만히 옆에 다가가서 뼈만 남은 손을 만져 본다. 그러면 늑골 깊은 곳에서 탄식이 새어 나온다.
 
  『하이고, 빨리 가야 되는데… 내가 언제 갈지 모르겠다… 부처가 될라고 했다. 내가 부처가 될라꼬 했는데… 부처되기가 그리 쉽나…』
 
  죽음까지도 의연하게 통과하시려는 어머니의 마지막 투쟁의지가 사그라지는 것을 차마 못 보아 조용히 방을 나서면, 난데없는 외침이 적막강산 같던 집안을 졸지에 흔들어 깨운다. 그건 바로 어머니의 비명이었다.
 
  『아야~』
 
  그러면 집안은 일시에 비상이 걸리고 아내, 손녀 할 것 없이 우당탕 어머니 방으로 달려 들어가면, 그제사 눈을 빤히 뜨시고 가족들을 본다. 그리고 다시 한 번 힘주어 외치시는 것이다.
 
  『아야아~』
 
  그 비명은 「나는 아직 살아 있다!」 는 시위처럼 들린다. 그러면 다시 우리 집은 어머니의 입담으로 시끌벅적 들쑤셔지고 여러 사람 피곤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 어머니와 나눈 영혼의 對話
 
  얼굴도 뵙지 못한 어머니께 보내는 思母曲이 나의 詩였다
 
  李 東 洵 詩人·영남大 국문과 교수
  1950년 김천 출생. 경북大 국문학과·同 대학원 졸업. 영남大 민족문화연구소 소장. 제1회 난고 문학상, 제8회 「시와 시학상」 수상. 저서 「시와 시인 이야기」, 「시가 있는 미국 기행」, 「실크로드에서의 600시간」 등.
 
 
 
 어머니와의 20개월 인연
 
   어머니는 나를 낳은 지 열 달 만에 세상을 떠나셨다.
 
  난리통에 사진이 한 장도 남지 않았으니, 나는 어머니의 얼굴조차 모른 채 살아왔다. 이승의 인연이란 워낙 중한 것이고, 또 母子 간의 인연이 될 수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우주의 기운과 기운이 비상하게 모여서야 가능한 일이리라 여겨진다.
 
  어머니와 나의 인연은 고작 스무 달 안팎이었다. 내가 태어나기 전 어머니 뱃속에서의 열 달과 출생 후의 열 달이 고작이다. 인연의 막중함을 굳이 함께 지낸 시간의 많고 적음으로 따질 바 아니로되, 가슴속에서 어머니에 대한 허전함과 아쉬움이 남는 것은 어찌할 도리가 없다. 이런 기분은 내 나이 칠십을 넘긴 지금 더욱 간절하다.
 
  어머니가 계시지 않았던 어린 시절, 나는 얼마나 외롭고 쓸쓸하며, 보잘것없는 아이였던가. 가족들이 모두 나가고 없는 빈 집에서, 초등학교 시절 방과후에 집으로 돌아와도 맞이해 주는 사람 하나 없는 텅 빈 방이 나는 그지없이 두려웠다.
 
  모든 것이 새삼스럽게 애틋하고 그리워지던 사춘기 시절, 마당의 벽오동나무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보름달을 보면서 눈물짓던 날이 얼마나 많았던가? 어머니를 향한 엄청난 그리움, 그 사무치는 정념을 가눌 길이 없었다.
 
  내가 오늘날 詩를 쓰고, 문학을 하게 된 것은 하염없이 솟구치는 그리움을 내 스스로 풀기 위하여 저절로 그리된 것이라 여긴다.
 
  어머니와 내가 서로 이승의 인연은 비록 짧았으나 어머니께서는 「父母恩重經(부모은중경: 부모의 은혜를 강조한 불교 경전)」의 열 가지 은혜로움을 지금도 여전히 나에게 베풀고 계신다고 나는 확신한다. 몸속에 나를 품으시고 열 달 동안 잘 보호해 주셨으니 懷眈守護恩(회탐수호은)이요, 6·25의 전란 중에 피란지에서 나를 낳는 고통을 겪으셨으니 그 臨産受苦恩(임산수고은)을 어찌 잊으리.
 
  나를 낳고 산후조리를 제대로 못 해서 병을 얻으셨고, 그 길로 바로 세상을 떠나게 되셨으니 이 生子忘憂恩(생자망우은)을 생각하면 몽매 간에도 눈물이 흐른다. 나는 때로 나를 두고 먼저 떠나신 어머니가 야속하기도 했고, 원망스럽다는 생각도 했으나, 포대기에 싸인 어린 핏덩이를 남기고 떠나실 즈음 어머니의 속마음이 어떠하셨을까를 생각하면 내 가슴속의 원망은 눈 녹듯이 사라진다.
 
  어머니께서는 임종하실 때에 어린 나를 가리키며 『저것은 곧 나를 따라 올 것이니…』라고 하시며, 형과 누나들의 장래를 걱정하셨다고 한다. 어머니께서 세상을 떠나신 후 아버지는 어린 나를 품에 안고 비슷한 시기에 아기를 낳은 마을 아낙네들을 찾아다니며 동냥젖을 먹이셨다고 한다.
 
  홍합과 쌀가루를 넣고 끓인 암죽을 떠 먹여서 내가 어머니를 뒤따라가지 않도록 겨우겨우 말리셨다. 두 누나들이 어머니대신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주고, 맛난 음식은 따로 두었다가 몰래 주었으니 回乾就濕恩(회건취습은)과 回苦吐甘恩(회고토감은)은 모두 그분들의 몫이다.
 
  아버지께서는 주로 젖을 먹여서 길러 주시는 乳哺養育恩(유포양육은)을 맡으셨고, 누나들은 나에게서 나오는 온갖 빨래를 모두 해주었으니 洗濯不淨恩(세탁부정은)을 전담했다. 이렇게 죽을 목숨인 내가 다시 살아나자 세 살 되던 해에 우리 가족은 도회지로 이사했다. 그로부터는 새로운 고통의 시작이자 반복이었다.
 
 
 
 언제나 들려오던 어머니의 목소리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아슬아슬하게 위기를 느낀 적도 있었고, 가서는 아니 될 곳도 더러 갔다. 멀고 가까운 곳을 두루 여행하기도 했었고, 때로는 생사의 위험한 고비를 겪기도 했었다. 무릇 사람 사는 일이 다 그런 경로와 과정이 아니던가.
 
  이런 때에도 어느 한순간이건 내가 어머니의 목소리를 듣지 않은 때가 없었다. 어머니께서 귓전에 나직이 소근거리는 말씀은 대개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얘야, 너 그런 곳에 가서는 아니 된다』
 
  『좀더 조심할 수 없겠니?』
 
  『그만한 걸 고생이라고 힘들어 하느냐?』
 
  『해로운 것을 입에 대서는 못 쓴단다』
 
  『잘 살펴보고 다니거라』
 
  『매사에 더욱 힘쓰고 노력해야지』
 
  『너 언제까지 이렇게 늘어져 있을 것이냐?』
 
  내가 삶에 의욕을 잃고 있거나, 방심하고 있을 때 어머니께서는 마음에서 마음으로 이런 말씀을 들려주셨다.
 
  옛적에 어떤 홀어머니와 함께 살던 패륜아가 집을 뛰쳐나가 도적의 굴에 들었는데, 드디어 두령이 되기 위한 시험으로 제 어머니의 목을 베어 오는 과정이 있었다. 도적은 천리 길을 달려서 옛 고향집으로 왔건만 그날 밤 늙으신 어머니는 아들이 돌아왔을 때 입힐 옷을 손질하고 계셨다.
 
  도적은 한순간 움찔했건만 욕심이 그의 양심을 가렸다. 드디어 방을 박차고 들어가 어머니의 목을 베었다. 그리곤 곧바로 피가 뚝뚝 흐르는 어머니의 머리를 허리에 차고 정신없이 달려갔다. 어느 낭떠러지에서 아들은 실족하여 굴러 떨어졌다. 정신이 혼미한 아들의 귀에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얘야, 어디 다친 데는 없느냐? 조심해서 다녀야지』
 
  정신을 차리고 본즉 허리에 찬 어머니의 목에서 들려오는 말씀이었다. 어머니는 아들의 손에 죽었지만, 죽은 뒤에도 못난 자식의 앞길을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어려서 누구에게선가 들었던 이 古談(고담)을 잊지 못한다. 어머니께서 시시때때로 바람결에 들려주시는 귓속말도 이야기 속에 나오는 어머니 말씀과 꼭 같을 것이라고 나는 여긴다. 먼길을 떠난 자식이 이제나 저제나 돌아올까 하고 기다리는 遠行憶念恩(원행억념원), 나쁜 일에 가담하지 말라고 항상 타이르시는 爲造惡業恩(위조악업은), 그리고 언제까지나 자식의 모든 것을 걱정하시는 究竟憐愍恩(구경연민은)까지 어머니의 정성과 사랑은 이승과 저승을 초월하여 그 따뜻한 손길로 쓰다듬어 주신다고 나는 믿는다.
 
  〈사진도 한 장 없고/ 어찌 생기셨는지 얼굴조차 모르지만/ 그 어머니께서/ 늘 내 속에 와 계시고/ 또 자식 옆을 잠시도 떠나지 않으시며/ 살아 계실 때처럼 이것저것/ 보살펴 주신다는 것을/ 나는 안다
 
  (필자의 詩 「어머니」 중에서)〉
 
  일본의 詩人 이시카와 타쿠보쿠가 어느 날 모처럼 고향집에 돌아가서 장난 삼아 어머니를 등에 업었는데, 등에 업힌 어머니의 체중이 너무도 가벼워서 세 걸음을 채 못 걷고 발등에 눈물을 떨구고 말았다는 감동적인 詩가 있었다. 나도 소원이 있다면 이시카와처럼 내 어머니를 등에 한번 업어 보는 것이다.
 
  아, 어머니는 내 삶과 문학의 영원한 갈망이요, 목표 그 자체이다. 나의 삶에서 추구하는 모든 지향과 노력이란 모두 어머니를 내 속에 넘실거리도록 하기 위해서, 아니 내가 어머니에게 가 닿기 위해서 애쓰는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어머니를 주제로 한 詩작품을 더러 썼지만 아직도 흡족한 작품을 제대로 써내지 못했다. 오늘 아침에도 자리에서 일어나 눈을 감고 어머니에게 『어머니, 오늘 하루도 저를 잘 보살펴 주세요』라고 마치 어린아이가 응석을 부리듯 은근히 부탁한다.●
 
 
 

 
  ◈ 45년 만의 편지
 
  당신은 나의 사랑입니다
 
  金 光 雄 서울大 행정대학원 교수
  1941년 서울 출생. 서울大 법대 졸업. 美 하와이大 대학원 정치학 박사. 美 미시간大 객원교수, 한국행정학회장, 서울大 행정대학원장, 중앙인사위원장 역임.
 
 
 
 교육을 강조한 新여성
 
   「참 좋은 당신」께.
 
  당신(朴和奎·1907~1959)이 가신 지 만 45년이라는 긴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매년 당신이 거처하시는 幽宅(유택)에 가서 가족들과 생활의 변화를 포함해 많은 이야기를 들려드리곤 했지만, 오늘은 유독 지난 세월을 자세히 말씀드리고 싶어집니다.
 
  그러니까 제가 서울大에 입학한 지 한 해가 좀 지난 대학 2학년 1학기 때의 일이었습니다. 당신이 자전거에 부닥쳐 넘어지면서 부서진 오른팔의 캐스트가 못마땅하여 수술을 강권한 것이 저에게는 천추의 恨(한)이 되고 말았습니다. 마취 후 깨어나지 못하고 서울역 앞 연세大 세브란스 병원에서 유명을 달리하셨을 때만 해도 저는 슬픔이 무엇인지를 몰랐습니다. 세상의 어려움이 무엇인지는 더욱 몰랐습니다.
 
  대학 1학년을 마치고 성적이 제일 나아 장학금을 타서 살림의 부담을 덜어드렸을 땐 그리도 기뻐하셨습니다. 그 후 법과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것을 당신이 저 세상에서라도 알고 기뻐하셨기를 바랍니다. 대학 내내 공부를 잘했던 것은 아마도 틈만 나면 망우리 묘소에 가서 노트를 펴놓고 당신 앞에서 공부를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릴 적부터 갱지 공책에 당신이 먼저 점선으로 「가 나 다 라」를 써 주신 위에 덧칠을 하면서 배운 글씨가 너무 예뻐서 선생님들의 눈길부터 끈 덕을 보았을 듯싶습니다.
 
  1945년 광복이 되고 나서 덕수국민학교에 입학할 때는 좀 무리를 하셨지요. 한 살이 모자라 안 된다고 하는 것을 누나만큼 한다며 억지로 남매를 같이 입학시키셨습니다. 그 일로 학교 강당의 의자를 새로 바꾸어 헌납하셨으니 기여입학의 효시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당신은 아마도 치맛바람의 원조쯤 되실 것입니다.
 
  일본 동네에 살았기 때문에 제가 우리말을 몰라 당신이 1학년 학기 초 내내 교실에 함께 앉아 공부를 했고, 집에 돌아오면 일본말로 하루 배운 공부를 번역해 주시던 일도 생생히 기억합니다. 허나 지금 제 일본어 실력은 초등학생 수준도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일본에 여행 가 음식점에서 주문을 할 때면 발음이나 억양이 일본 사람 같다고 합니다. 일찍 학교에 들어간 탓으로 지금 대학에서 정년을 앞두고 동료교수들의 놀림감이 되고 있습니다. 왜 아직도 정년이 남아 있느냐고 하며 후배라고 괴롭힙니다.
 
  연전에 당신이 다니신 元山高女(원산고녀)에 관한 책을 친척이 가져다 주었습니다. 여러 장의 사진과 졸업생 이름, 그리고 특징이 적혀 있는데, 당신은 얌전하고 공부 잘하는 학생으로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당신은 늘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루씨고녀(원산에 있는 학교)가 서울의 이화여고라면 『우린 서울의 경기여고에 견줄 수 있다』고 자랑하셨습니다.
 
  당신이 남달리 교육을 강조하셨던 것은 그 어려운 시절 일본에 잠시 가셨다가 귀국하여 4년제가 된 이화여전 가사과 1회에 입학하신 그 향학열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당신은 졸업 후 작은 제약회사인 신기신성당이 출간한 월간지 「중앙공론」의 기자가 되어 당시 원고를 얻으러 春園(춘원)도 만났던 일을 자랑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1930년대 新여성의 결혼생활이 원만하지 못했던 그 시절, 당신도 예외가 아니었음을 지금도 안타까워합니다.
 
 
 
 사랑과 아름다움
 
   당신이 이화여전 졸업식 때 又月 金活蘭(김활란) 선생이 가운데 앉으시고 찍은 20여 명의 교수와 학생이 어울린 예복 사진을 기억합니다. 가정관에서 「보배」라는 어린아이를 당신이 안고 실습생들이 育兒(육아)실습하던 사진은 「이화 100주년 기념 백서」에 실려 옛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가끔 또 다른 자랑을 하셨습니다. 그때부터 있었나요. 이화학당은 매년 5월 말일이면 축제를 열고 「메이퀸(May Queen)」을 뽑는데, 퀸은 못 되었고 퀸 옆에 서서 수석 시녀라며 으스대던 사진도 아직 간직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고생하시던 그 시절, 소위 말하는 新여성보다 이 시대 여성들은 훨씬 나은 조건에서 일하고 있지만 여성에게 세상이 더 나아졌다고 말하는 사람은 그리 흔치 않습니다. 여성들은 아직도 가부장적 권위주의의 그늘에서 겨우겨우 힘겹게 매일을 지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존재의 의미가 性의 다름이나 지위의 높낮이나 가진 것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존재보다는 존재되어짐에, 그리고 지금의 문제를 보는 시각의 바꿈에 더 큰 무게를 둡니다. 그것은 다양한 경험, 다양한 생각을 갖는 것이 더 소중하다고 강조하신 당신의 가르침이 아직도 제 피 속에 흐르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당신이 제게 가르쳐 주신 것은 「정의」도 「자유」도 「민주」도 아니었습니다. 오로지 하나, 「사랑」과 「아름다움」이었습니다. 그러나 저에겐 아직도 흠이 많습니다. 미워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세상과 사람을 아름답게 보려는 노력은 계속하고 있습니다.
 
  오늘 당신에게 처음으로 보내는 편지의 시작은 김용택 詩人의 「사랑 詩 모음집」에서 따온 것입니다. 당신의 가없는 사랑이 오늘까지 살아온 힘이 되었기에 세상을 사는 힘은 오로지 사랑이라는 것을 지울 길이 없습니다. 대학의 리더십 강의에서도 사랑과 아름다움을 모르는 사람은 리더가 될 생각을 하지 말라고 할 정도로 매사에 그 교훈을 강조하는 것은 애오라지 당신의 사랑 때문입니다.
 
 
 
 때가 되면 다시 섬길 것
 
  사랑하는 어머니!
 
  당신이 가신 이 세상은 여전히 그때와 다름없습니다. 생활의 편익이 좀 달라지고 거창해진 것말고는 변함이 없습니다. 즐거울 때도 많지만 어렵고 힘들 때가 더 많습니다. 당신과 같이 지내지 못한 세월이 많아 이처럼 안타까워하면서도 이 힘든 세상을 일찍 떠나신 당신이 부러울 때도 있습니다. 그렇게 위로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어느 해 5월 당신이 가신 忌日(기일)에 쓴 제 일기에는 이렇게 적기도 했습니다.
 
  「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어머니가 살고 계신 세상에 갈 수 있으니까」
 
  때가 되면 가서 이승에서 못 다한 섬김을 두고두고 하겠습니다.
 
  지금도 아침에 집을 나설 때면 서재에 모신 당신의 초상화에 인사를 하고 나옵니다. 저녁에 大醉(대취)해서 집에 돌아와도 반드시 당신 앞에 조아려 당신을 부릅니다. 당신은 참 좋은 나의 사랑입니다.●
 
 
 

 
  ◈ 어머니의 무거운 짐
 
  내가 어머니에게 마지막으로 업힌 날
 
  高 廷 旭 소설가·아동문학가
  1960년 서울 출생. 성균관大 국문과 졸업. 同대학원 문학박사. 문화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한국장애인인권포럼 대표. 저서 「아주 특별한 우리 형」, 「안내견 탄실이」, 「네 손가락의 피아니스트」 등.
 
 
 
 소아마비에 걸린 아들
 
   어머니가 가쁜 숨을 몰아 쉬며 날 업고 1학년 15반에 들어섰을 때, 학생들에게 주의사항을 일러주고 있던 담임선생님이나 학생들은 모두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죄, 죄송합니다. 우, 우리 아들이 몸이 불편해서…』
 
  숨가쁜 어머니의 말에 당황한 선생님은 나를 황급히 맨 앞자리에 앉게 하셨다. 그렇게 나는 다시 한 번 나의 장애로 인해 많은 사람의 구경거리가 되어야만 했다.
 
  지금은 사라진 질병, 소아마비. 그 바이러스가 내 몸을 공격한 것은 돌 무렵이었다. 걷진 못 해도 제법 다리에 힘을 줄 수 있던 내가 어느 날 열병을 심하게 앓았다. 다음날 아침, 어머니가 내 몸통을 잡고 세워 보니 발에 힘을 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황급히 달려간 병원에서는 급성회백수염, 소위 어린이들이 잘 걸린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 소아마비라는 진단을 내렸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심정으로 어머니는 나를 업고 전국 방방곡곡, 용하다는 병원과 한의원을 찾아 다녔다. 몸에 좋다는 것은 어떻게 해서든 구해 먹이며 어머니는 내 몸을 고쳐 보려 애썼지만 백약이 무효였다. 결국 그때부터 나는 두 다리를 쓰지 못하는 장애인이 되고 말았다. 혼자 힘으로 서지도 못하고, 한 치도 움직이지 못해 까딱하면 사람 구실 못 할 위기에 빠진 장애인, 그게 바로 나의 모습이었다.
 
  주위에서는 그런 나를 갖다 버리라고까지 했단다. 먹고살기가 그만치 어렵던 시절, 나 같은 장애아는 외국으로 입양을 가거나 수용시설에 팽개쳐져 짐승처럼 사는 경우가 많았다. 어머니는 자식을 내다버릴 거면 차라리 같이 죽겠다는 각오로 나를 키우셨다. 그것이 아슬아슬하게 넘긴 나의 첫 번째 위기였다.
 
  두 번째 위기는 학교를 입학할 때 왔다. 혼자서는 어디에도 갈 수 없는 내가 학교를 다닌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가정 형편이 좋은 집은 나 같은 애를 장애아동을 위한 특수학교에 입학시켰다. 일반학교에서 철없는 아이들로부터 놀림과 차별, 따돌림의 대상이 되는 것을 부모들이 못 견디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집은 그런 정도로 부유하지 않았다. 결국 나의 선택은 일반학교를 다니느냐 마느냐였다. 어머니는 당신이 아들을 매일 업어서 다니겠노라고 결심을 하셨고, 나는 동네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그 뒤 어머니는 아침에 나를 한번 업어서 학교에 데려다 놓은 뒤 학교가 파할 무렵, 학교에 와서 날 업고 집에 오셨다. 그러다 고학년이 되어 도시락을 싸가게 되자 나에게 찬밥을 먹일 수 없다면서 직접 밥을 해서 점심 때 한번 더 오셨다. 하루에 세 번을 오로지 아들을 위해 걸음을 하시는 것이었다.
 
  그러다 다른 아이들이 찬 도시락을 먹느라 목이 메는 것을 보시고는 다음날부터 커다란 주전자에 보리차를 끓여 들고 오셨다. 아이들의 양은 도시락 뚜껑에 어머니는 일일이 보리차를 따라 주셨다. 오로지 장애가 있는 아들이 아이들과 잘 어울리며 공부하고 커 나가길 바라는 마음이셨다.
 
 
 
 망설임 없이 등을 대시다
 
   무사히 초등학교를 졸업한 나는 집에서 가까운 중학교에 진학을 했다. 다행히 중학교부터는 내가 목발을 짚고 걸어다닐 수 있게 되었다. 그건 오래도록 이어진 피나는 훈련의 결과였다. 어머니의 무거운 짐인 내가 스스로 어머니의 등에서 내려온 거였다. 중학교에서는 1층에 교실을 배정받아 별 어려움 없이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첫날 입학식을 마치자 모든 학생들이 자신이 배정받은 반으로 들어가 담임선생님의 지시를 따르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운동장은 순식간에 비워졌다. 규율이 바짝 든 신입생들이 눈 깜짝할 사이에 각자의 반을 찾아갔기 때문이다. 내 손에 쥐어진 배정표는 1학년 15반. 4층 꼭대기의 교실이었다.
 
  어머니는 이미 덩치가 커진 나에게 아무 망설임 없이 등을 대셨다. 어머니의 등에 업힌 나는 손으로 목발 드는 일밖에 할 게 없었다. 이미 조용해진 교사 계단을 어머니는 한 칸씩 힘겹게 올라가셨다. 울컥 내 목구멍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다. 「왜 하필 나는 장애인이 되어서 이렇게 어머니를 고생시키나」, 「이런 고통이 언제까지 계속되어야 하나」 대상을 알지 못할 분노가 내 어린 뇌리에 가득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당신의 벗어 버릴 수 없는 숙명처럼 나를 업고 2층, 3층, 4층을 차례로 오르셨다. 어머니의 마음에 무엇이 들어 있었는지 나는 알 길이 없다. 그저 주어지는 대로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어렴풋한 각오만 가득했다.
 
  담임선생님은 종례가 끝나자 다가와 어머니에게 말했다.
 
  『이 교실에서 공부하는 건 무리네요. 내일은 아래층 교실로 바꿔 드리겠습니다』
 
  다음날 나는 1학년 3반으로 반 배정이 바뀌었다. 2층에 있는 반이었다. 나 대신 한 아이가 15반으로 가방을 싸서 올라갔다. 그 후 나는 계단 오르는 법을 익혀 혼자 힘으로 고등학교를 다녔다. 그 덕에 내 손바닥은 목발을 짚느라 온통 굳은살이 박혔지만 어머니의 등에 다시 업히지 않아도 되는 것이 좋기만 했다.
 
  흔히 사람들은 불편한 턱과 계단 앞에서 장애인을 업어 주거나 들고 나르는 것이 가장 간단한, 그러면서 인간적이고 감동적이기까지 한 해결책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틀린 생각이다. 적절한 편의시설만 갖춰진다면 장애인들 대부분은 혼자서 모든 일을 해결할 수 있다. 그리고 그건 모든 장애인들이 원하는 바다. 남의 도움을 매일 받으며 『미안하다』, 『고맙다』를 입에 달고 다니며 살고 싶은 사람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까지 나는 독립적인 장애인으로, 남에게 의존하지 않으며 내 가족을 부양하는 자유로운 한 인간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것은 모두 강인함을 몸소 실천함으로써 나에게 보여 주신 어머니의 희생과 노력 덕분이다.
 
  아, 빠뜨린 게 있다. 나는 그런 어머니 덕에 초·중·고 12년 내내 개근상을 받았다.●
 
 
 

 
  ◈ 亂世의 어머니
 
  한 번도 자신의 운명을 탓하지 않은 분
 
  卜 鉅 一 소설가
  1946년 충남 아산 출생. 서울大 경제학과 졸업. 소설 「碑銘을 찾아서」로 등단. 소설 「목성잠언집」, 「캠프세네카의 기지촌」, 시집 「오장원의 가을」, 「나이들어가는 아내를 위한 자장가」. 평론집 「자유주의 정당의 정책」 등.
 
 
 
 가난과 걱정 속에서 생계 유지
 
   어머니에 관한 아마도 가장 오랜 기억은 절구질을 하던 모습이다. 햇살 따가운 어느 늦봄, 아직 푸른 기운이 도는 보리를 잡아서 절구통에 넣고 절굿공이로 대끼시던 모습이다. 그 모습은 보릿고개를 힘들게 넘었던 당시 사람들의 삶을 상징한다. 쌀은 이미 떨어졌는데, 보리는 아직 나오지 않은 그 두어 달은 배고픔으로 허리가 휘었다.
 
  그러고 보면, 어머니에 관한 기억들이 대부분 가난과 앞날에 대한 걱정 속에서 생계를 꾸리려 애쓰던 모습들이다. 어머니의 그런 삶은 그 세대 한국 여인들의 평균적 모습일 터이다. 우리 세대를 낳으시고 키우신 어머니들은 전쟁으로 찢겨진 세상에서 극심한 가난을 지혜와 참을성으로 헤치면서 가족의 삶을 꾸리셨다. 어머니를 떠올리면, 어릴 적 동무들의 어머니들이 겹친다. 어머니들의 찌들고 지친 얼굴에선 지혜와 참을성이 은은하게 배어 나온다. 그리고 어머니에 대한 애틋함과 고마움은 그 모든 어머니들에게로 번져 나간다.
 
  한 여인의 삶은 남편의 삶에서 결정적 영향을 받게 마련이다. 어머니의 경우, 아버지의 삶이 평탄치 못했다는 사정 때문에, 특히 그러했다. 두 분이 혼인하셨을 때, 아버지는 고향인 충남 아산의 소학교 교사이셨다. 아버지는 1940년대 초 충남 북동지역에 있었던 민족주의 조직의 일원이셨다. 주로 학교 교사들로 이루어진 비밀조직이었다고 한다. 그 조직을 이끈 분이 維石(유석) 趙炳玉(조병옥) 선생이셨다는 얘기를 뒤에 마을 어른들로부터 들은 적이 있다. 維石 선생의 고향인 천안이 바로 이웃이니, 그럴 듯한 얘기다.
 
  그 조직이 한 일들 가운데 두드러진 것은 학병 징집을 피해 지리산으로 들어간 사람들을 도운 일이었다. 아버지는 도피하는 사람들을 曲橋川(곡교천)의 나루인 강척골에서 屯浦(둔포) 지역 조직원으로부터 인수해 남쪽으로 안내한 다음 이웃 지역 조직원에게 인계했다. 지금 내 기억은 흐릿하나, 아버지께서 도피자들을 인계한 조직원은 예산군 大述面(대술면) 사람이었던 것 같다.
 
  당시 조선에서 反체제운동은 불가능했고 학병 징집을 피해 도망하는 사람들을 돕는 것은 일본의 식민 체제에 대한 정면 도전으로, 그런 비밀조직의 활동은 무척 대담한 일이었다.
 
  광복 뒤 이 조직의 상당 부분이 남로당에 흡수됐다. 그 과정은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그 조직이 상당했던 것은 분명하다. 전쟁 전에 자신을 함흥고보 출신이라고 밝힌 사람이 아버지를 찾아와 조직 점검차 내려왔다고 했다는 것이다.
 
  북한군이 우리 고향을 점령했을 때, 아버지께선 두드러진 역할을 하셨다. 수복이 되자, 아버지께선 고향을 떠나 몸을 숨겨야 했다. 우리 고향의 부역자 명단 맨 앞에 아버지 이름이 있었다. 대한민국 사회엔 숨을 만한 곳은 없었으므로, 아버지께선 美軍 부대의 종업원으로 들어가셨다. 그렇게 해서, 우리 가족은 美軍 기지촌들을 떠돌게 됐다.
 
  뒤에 아버지는 무죄 처분을 받았다. 부역한 것은 분명하지만, 죄질이 나쁜 것은 아니었다는 점이 참작됐다고 했다. 아버지의 영향력으로 여러 고향 사람들을 구했다는 구체적 증언들이 적힌 탄원서가 그런 처분의 근거가 됐다. 그래도 부역 사실 자체가 지워지는 것은 아니어서, 아버지는 평생 그늘에서 살아야 했다.
 
  아버지는 목숨을 구하셨고 우리 가족은 삶의 터전을 얻었다. 기지촌은 살기 좋은 곳은 아니었다. 다른 곳에서 살 수 없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었다. 그들은 모두 맨몸으로 왔고 생업이 변변치 않았다. 무엇보다 다툼이 심했다. 서로 모르는 사이였으므로 예의나 도덕이 제대로 자리 잡을 수 없었다. 다행히 기지촌 사람들의 소득의 원천인 美軍들은 아주 점잖고 친절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너그러울 수 있는 심리적·경제적 여유가 있었다.
 
  어머니는 마을 사람들의 끊임없는 다툼으로부터 묘하게 초연하셨다. 많은 사람들을 상대하시면서도, 어머니는 다투는 일이 거의 없었다. 아마도 어머니의 인품은 그 사실로 요약될 수 있을 터이다.
 
 
 
 美軍 기지촌의 약방
 
  美軍 부대 일을 그만 두셨을 때, 아버지께선 약방을 내셨다. 당시엔 약을 팔기만 하는 약종상 제도가 있었는데, 아버지께선 시험을 치르고 그 면허를 받으셨다. 처음엔 아버지께서 약방을 관리하셨지만, 차츰 어머니께서 약방을 맡게 되었다. 기지촌에서 약방의 가장 큰 손님들은 색시들이었는데, 그들은 어머니하고 얘기하기를 바랐다.
 
  기지촌의 삶에서 기준일은 미군들의 봉급날이다. 그날 미군들은 기세 좋게 나와 빚을 갚고 색시들에게 월급을 주었다. 마을 사람들도 그동안 쌓인 외상 빚들을 서로 갚았다. 그리고 다시 다음달 월급날까지 외상 거래가 시작된다.
 
  미군들이 무슨 일로 부대에서 오래 나오지 못하면, 기지촌은 물을 주지 않은 화초처럼 시들었다. 평시에도 신랑을 찾지 못한 색시들은 처지가 어려웠다. 그래서 막다른 처지로 몰린 색시가 빚을 남겨 둔 채 밤을 틈타 도망치는 일이 흔했다. 자연히 누구에게 얼마나 외상을 주느냐 하는 문제가 기지촌에선 특히 어려웠다.
 
  우리 약방이 마을에선 유일한 의료기관이었다는 사정이 그 문제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외상 빚이 너무 많은 색시가 초췌한 몰골로 찾아와 외상으로 약을 달라고 하면, 어머니는 아주 곤혹스러워했다. 약이 필요한 사람을 외상이 많다고 그냥 돌려보낼 수는 없었지만, 인심 좋다는 소리를 들으면서 할 수 있는 장사는 이 세상에 없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매몰참과 헤픔 사이의 그 미묘한 경계를 잘 찾으셨다. 워낙 어려운 처지로 몰리고 사람들의 괄시를 받는 터라, 색시들은 일반적으로 예의를 차리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래도 우리 마을을 떠나게 된 색시가 어머니에게 그동안 고마웠다고 인사하는 광경을 나는 여러 번 보았다.
 
  어머니는 한 번도 자신의 운명을 한탄한 적이 없다. 가족을 기지촌으로 내몬 아버지를 원망한 적도 없다. 『넌 절대로 정치에 발을 들여 놓지 마라』고 내게 하신 당부가 전부였다.
 
  내가 어머니를 많이 拓(탁)했고 내 딸은 나를 많이 拓한 터라, 딸아이의 얼굴에 어머니의 얼굴이 겹치는 일이 많다. 그럴 때 나는 속으로 바란다. 내 어머니가 맞은 어려움이 내 딸에겐 닥치지 않기를…. 딸이 할머니의 지혜와 참을성을 지니기를….●
 
 
 

 
  ◈ 아흔 살 어머니의 讀書
 
  老母는 오늘도 노인용 기저귀를 차고 앉아 책을 읽으신다
 
  李 季 振 국회의원
  1946년 강원 원주 출생. 고려大 국문학과 졸업. 중앙大 신문방송 대학원 수료. KBS 아나운서, SBS 아나운서실장(부국장대우) 역임. 저서 「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딸꾹!」, 「솔베이지의 노래」 등.
 
 
 
 네 남매를 데리고 피란길로
 
   우리 어머니, 올해 꼭 아흔, 흰머리에 깊은 주름, 틀니를 하고 앉아 출입을 못 하시지만 어머니에게도 꽃 같은 시절은 있었다.
 
  하지만 「양반 집」 잘 배운 신랑에게 한풀 꺾여 시집 오신 것이 행복하지 못한 결혼 생활의 출발점이었다. 그렇다고 불행한 결혼 생활은 아니었지만, 『여보』, 『당신』 부르며 위로받고 사랑받으며 산 세월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세월이 그러했고, 아버지의 성격이 그러하셨고, 부모님이 짝지워 주신 「부엌데기용」 며느리로 우리 가문에 들어오신 것이 그 이유라면 이유였다.
 
  일곱 남매 낳아서 키워 어머니의 몫을 다 하셨고, 가난한 살림 일으키며 꽃다운 인생 다 보내셨으니, 어머니는 이제 우리 앞에 당당하고 자랑스러운 존재이시다.
 
  어머니와의 옛일을 회상해 보니 내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기억이 없으나 내 종아리를 사정 없이 치시던 초등학교 시절이 떠오른다. 왜 그러셨을까? 딸 셋을 낳고 네 번째서야 낳은 귀한 아들이었다는데 왜 그렇게 혹독한 매를 치셨을까?
 
  그 매를 치시던 때로부터 6~7년 전 6·25 때 나는 어머니의 등에 업혀 그 먼 피란길을 떠났었다. 열다섯 살 누이와 열 살 누이에겐 괴나리봇짐 하나씩 지우고, 일곱 살 누이는 아장아장 걸리고, 나는 다섯 살이나 먹었지만 귀한 아들이라고 업으셨다고 했다. 얼음판이 된 충주 달래江을 건너던 겨울이 또렷한 영상으로 남아 있다.
 
  다섯 살인 나까지 네 남매를 책임지고 피란길에 오르셨던 어머니의 그때 나이가 겨우 서른여섯! 지금의 서른여섯이면 탱탱한 청바지 입고 시집을 가네마네 독신이 좋으네, 청춘이 아까우네 하며 테이크 아웃 커피를 손에 들고 살 빼는 이야기에 열을 올릴 나이가 아닌가?
 
  그때 어머니는 네 남매를 걸리고 업고 보국대 끌려 가신 아버지 대신 가족의 총책임자가 되셨다. 그것도 生死가 오락가락하는 전쟁의 아수라장에서… 어머니는, 나의 어머니는 그런 세월을 사셨다. 아버지의 사랑도 따뜻하게 못 받으시며…. 그래서 어머니는 「아들」의 잘못을 그냥 넘기지 못하셨을 것이다.
 
 
 
 『새가 되고 싶다』
 
  나는 가끔 어머니에게 여쭙는다. 『다음 세상에 태어나시면 뭘로 태어나고 싶으시냐』고. 그러면 어머니는 『너무 힘들어서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다』고 하신다. 『그래도 다시 태어나면 뭘로 태어나고 싶으시냐』고 여쭈면 『새가 되고 싶다』고 하신다. 이리저리 속박 없이 훨훨 날고 이 나무 저 가지에 맘대로 앉고, 가고 싶은 곳에 돈 없어도 맘대로 갈 수 있는 새가 되고 싶다고 하신다. 어머니가 늘 그리웠던 건 「자유」였다.
 
  또 하나, 어머니의 가슴속에 恨이 된 것은 배우고 싶었던 열망을 꼭꼭 묻어 두어야 했던 「세월」에 대한 원망이다.
 
  학교 다니는 오빠가 부러웠으나 완고하신 외할아버지의 뜻을 꺾지 못하고, 오라버니가 대신 깨우쳐 주신 한글로 일생 책을 읽으며 사셨다.
 
  오래된 나의 기억 속에 어머니는 식구들이 모두 잠든 깊은 밤에 버선과 양말을 다 꿰매시고는 반짇고리에 묻어 두었던 소설 책을 꺼내 두런두런 감정을 섞어 밤이 이슥토록 읽으셨다. 책을 새로 살 여유가 안 되면 읽었던 책들을 다시 읽더라도 항상 책을 놓지 않으셨다.
 
  달걀 몇 줄 팔아 오시는 장터에서 거금을 내어 소설책(이야기책)을 사 오곤 하셨다. 소위 「딱지본」이라는 책들이었다. 상대적으로 많이 배우신 아버지는 책을 멀리하며 公務(공무)에만 열심이었으나 어머니는 언제나 책을 갈망하셨다. 학교가 가고 싶었던 어린 시절의 그 간절한 소원을 이루지 못한 때문이다.
 
  그 어머니가 근간 몇 년 동안 책을 놓으셨었는데 건강과 眼力(안력) 때문이었다. 기력이 떨어지는 백내장이 진행되면서 돋보기로도 글자가 희미하다고 하셨다. 작년에 백내장 수술을 하고 시력이 회복되는가 했는데, 낙상 때문에 골절이 되었고 지난 겨울부터는 거동을 못 하게 되셨다.
 
  그러시던 어머니가, 지난 총선 때 여러날 못 뵙다가 집에 돌아와 보니 다시 책을 읽고 계신 게 아닌가! 아들이 읽다가 거실에 둔, 朴鍾世(박종세) 아나운서 선배의 회고록 「방송, 야구 그리고 나의 삶」이었다.
 
  어머니가 다시 피어나신 것이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느냐고 여쭈었더니 재밌고 훌륭한 사람의 이야기라고 정확한 독후감도 말씀하셨다. 아흔 연세에….
 
  어머니는 불사조이시다. 며칠 후에 서점에 들러 「父母恩重經(부모은중경)」과 「金剛經(금강경)」을 사다 드렸다. 「父母恩重經」을 슬픈 마음으로 읽고 또 읽으셨을 것이다. 어머니에게도 보고 싶은 어머니가 계시니까.
 
  <두 눈썹을 다듬어서 푸른 버들 잎과 같고 두 볼을 붉게 하여 홍련화와 방불했네. 옥과 같이 곱던 얼굴 아들 딸을 키우노라 해쓱하고 주름졌다…>
 
  어제 무면허 이발을 해드렸다. 한 10년 전에 배운 솜씨인데 어머니는 아들이 해드리는 이발을 좋아하신다. 남들이 해드린다면 싫다고 하신다. 스타일이라야 돌아가신 아버지와 비슷한 스타일이다. 이제 몇 번의 이발을 더 해드릴지, 몇 권의 책이나 더 사다 드릴지 모르지만 항상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한다.
 
  노인용 기저귀를 차고 앉아 오늘도 책을 읽으시는 모습에 아들은 그저 고개를 숙일 뿐이다.
 
  <옥과 같이 곱던 얼굴 아들 딸을 키우노라 해쓱하고 주름졌다…>
 
  「父母恩重經」에 그렇게 써 있다. 우리 어머니를 보고 쓴 글 같다.
 
  이 글이 어머니에 대한 아들의 마지막 회상이 될 것 같아 가슴이 저리다. 독서를 좋아하시지만 月刊朝鮮까지는 못 보시니,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 이 글을 추념문으로 쓸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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