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음악원 등 6개 院으로 구성,「전문예술가 양성」이 목표
● 국제 콩쿠르 입상은 일상적인 일
● 유니버설 발레단의 프리마돈나 3분의 2가 한국예술종합학교 출신
● 재학생 수 2806명에 1년 예산은 536억원
● 국제 콩쿠르 입상은 일상적인 일
● 유니버설 발레단의 프리마돈나 3분의 2가 한국예술종합학교 출신
● 재학생 수 2806명에 1년 예산은 536억원
진짜 예술가 될 사람만 오라
『초기에는 우리 학교 학생이 해외의 유명 콩쿠르에서 입상하면 학교에 플래카드를 걸고 언론 보도에 신경을 쓰는 등 흥분했었지요. 지금은 그런 일이 흔해서 일상처럼 돼 버렸습니다. 우리 학교와 우리 예술은 어느덧 세계의 변방이 아니라 중심에서 함께 가고 있습니다』(金南潤·음악원 원장)
『춤은 제 삶이에요. 춤으로 무엇이 되는가 하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고요. 춤을 추고 싶은 사람에게 이 학교는 최고예요. 좋은 선생님들, 좋은 시설, 아무런 틀도 강요하지 않는 열린 마인드의 교육이 있거든요. 제 꿈은 원장 선생님처럼 되는 것입니다』(河恩智·19·2002년 프라하 콩쿠르에서 금상, 2003년 룩셈부르크 콩쿠르에서 금상 수상하고 한국예술종합학교 3학년 휴학, 현재 미국 네바다 발레단에서 활동 중)
1993년 개교, 올해 12년째를 맞는 한국예술종합학교는 한 마디로 「젊은 학교」다. 한국 예술을 세계의 主流로 끌어올리는 견인차로서의 역할을 한다는 자긍심과 자신감에 차 있다. 교수들도 학생들도 겁이 없다. 엄연한 대학 또는 그 이상이면서도 교육법상 「각종학교」에 해당하는 예술종합학교라는 어정쩡한 간판을 떼지 못하고 있는 것이 조금 마음에 걸리고 불편하지만 그런 형식적인 것들이 이들의 예술을 향한 열정에 결정적인 장애물은 되지 못한다.
1990년 6월 문화부는 「문화발전 10개년 계획」을 통하여 국립예술학교 설립계획을 공포했다.
그해 12월 말에 문화부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설립의 근거가 되는 한국예술종합학교설치령(대통령령 제13528호)을 제정하여 법적 근거를 마련하고 음악원, 무용원, 연극원, 영상원, 미술원, 전통예술원 등을 1993년부터 차례로 설치하기로 하고 준비작업에 들어가 개교 첫해인 1993년 일차적으로 음악원부터 문을 열었다.
학교 건물(학습장)은 예술의 전당 일부를 사용했다. 초대교장에는 서울 음대 李康淑(이강숙) 교수가 추대됐다. 개교일은 1993년 3월8일. 음악원內 4개 학과(현재 5개 학과) 98명의 예술사 과정(일반대학 학사과정) 신입생을 받아들여 문을 열었다.
현재 음악원 원장인 金南潤 교수도 초창기 개교 멤버로 참여, 서울 음대에서 옮겨왔는데 이때 서울 음대 2학년 재학 중이던 학생 3명이 서울 음대를 떠나 한국예술종합학교 1학년으로 따라왔다.
李建鏞 총장(작곡과)은 『초창기 이 학교의 미래상이 불투명할 때 서울 음대 2학년생 3명이 金교수를 따라 이 학교 신입생으로 들어온 사건은 이 학교 출범에 대한 젊은 예술도들의 기대를 반영한 것이었고, 학교 측과 학생들의 사기를 올리는 데 큰 추동력이 되었다』고 했고, 당사자인 金南潤 원장은 『나는 학생들이 따라오는 것을 원하지 않았는데, 서울대학 측으로부터 욕을 들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한국예술종합학교를 구성하는 6개의 院(일반대학의 단과대학) 중 먼저 출범한 음악원이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자 종합대학 체제로 본격 돌입하기 위하여 1994년 3월 두 번째로 연극원이 문을 열었고, 1995년에는 영상원이, 1996년에는 무용원이 개원했다. 1997년에는 미술원, 1998년 전통예술원을 마지막으로 6개의 院이 모두 문을 열었다.
그리고 일반대학의 대학원(석사 및 박사과정)에 해당하는 예술전문사 과정도 1994년 음악원을 시작으로 2000년까지 6개 院에 모두 개설하였고, 중학교 3학년부터 고등학교 재학생(1, 2학년)을 대상으로 한 예술英才 선발제도를 채택하여 英才의 조기발굴 시스템도 완비하였다.
학교의 캠퍼스는 둘로 나뉘어 있다. 본부와 미술·연극·영상·전통예술 등 4개 院은 서울 석관동의 옛 안기부 본부 자리에 들어가 안기부가 쓰던 건물을 일부 개조하여 사용하고 있다.
2006년 완공 예정으로 현재의 건물 옆에 캠퍼스 신축공사가 진행 중인데 이 공사가 마무리되면 명실공히 종합예술학교에 어울리는 각종 시설이 마련될 듯하다. 한편 음악·무용의 2개 院은 서울 서초동 예술의 전당 서쪽에 1999년 따로 校舍(교사)를 신축하여 사용하고 있다. 이 두 단과대학의 경우 예술의 전당 자체가 산 교육장이기도 하기 때문에 서초동을 떠나 굳이 석관동 캠퍼스에 합류할 필요가 없다는 판단에서다.
일반대학 예술교육의 허상
하나의 대학이 설립되어 12년째를 맞는 시점에서 그 성과를 제대로 평가하기에는 너무 이른 감이 있다. 특히 이 학교를 구성하는 6개의 院 중에서 가장 먼저 문을 연 음악원이 올해 8회 졸업생을 배출할 예정이나 가장 늦게 문을 연 미술원과 전통예술원의 경우 올해 겨우 4회 또는 3회 졸업생을 배출할 예정이므로 아직은 「전통」을 이야기하기 어려운 형편이다.
그러나 이처럼 세월이 일천함에도 불구하고 이 학교를 중심으로 일어나는 예술계의 조용한 변화의 흐름은 각 분야에서 분명히 감지되고 있다. 음악, 무용 등 일부 분야에서는 각종 국제 콩쿠르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둠으로써 세계의 관심권 속으로 진입하였고, 미술처럼 오랜 숙성이 필요한 분야에서도 한국 미술의 새로운 흐름을 형성하는 변화의 한가운데서 이 학교의 역동성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런 학교가 왜 필요했으며 예술의 어떤 요구가 이런 학교를 낳았을까. 李建鏞총장은 기존 대학의 예술교육과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육 사이에 선을 분명하게 그었다.
『종래 우리나라 대학의 예술 학과들, 특히 음악의 경우 음대들은 미국의 주립대학을 모델로 했는데 그 목표가 「예술을 공부한 중간지도자 양성」에 있었어요.
건국 후 줄곧 그런 방식으로 예술을 가르쳐 온 것입니다. 우리는 달라요. 여기서는 「예술을 공부한 중간지도자」가 아니라 처음부터 「전문예술가 양성」을 목표로 합니다. 6개 院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 院마다 특성이 있지만 공통된 이 학교의 기조는 이것입니다』
이 학교의 탄생 배경에는 일반대학의 예술교육이 「예술가 양성」과는 동떨어지거나 예술가가 되려는 학생들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데 대한 반작용도 컸다는 분석이다. 다음은 李총장의 계속되는 말이다.
『일반대학의 예술 학과 커리큘럼의 30%는 교양과목입니다. 좋은 아이디어이기는 하나 자발적인 교양이 아니라 강요된 교양은 정신과 예술의 자양분이 되지 못하거든요. 대학의 예술 학과에 입학한다는 것은 특별한 선택인데 그저 입학이 목적이고 예술가로서의 전문적인 수련은 뒷전이 되고 말았어요. 실기시험을 보기는 하지만 한 가지 능력만 길러서 입학한 후에는 허송세월하니 대학생은 많으나 예술가는 없는 빈곤현상이 일어날 수밖에요.
이러한 문화적 빈곤, 예술교육의 왜곡에 대한 반성에서 이 학교가 탄생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시대적 요구였다고 봅니다. 백남준과 정경화 같은 세계적인 예술가들도 이 땅에서 태어났으나 외국에서 공부한 다음에야 세계적인 예술가가 될 수 있었지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예술적 소양은 깊은데 교육 시스템이 잘못돼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그 잘못된 것을 제대로 하자는 것이 이 학교의 존재 이유입니다』
치맛바람으로는 안 된다
학생의 선발 과정도 교육에 못지않은 중요성을 가진다.
손열음(18·음악원 3학년)양이 그 좋은 예다. 피아노로 11세 때 영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최연소 2위 입상, 1999년 미국 오벌린 피아노 콩쿠르 최연소 1위, 2000년 독일 에틀링겐 피아노 콩쿠르 최연소 1위, 2002년 이탈리아 비오티 콩쿠르 최연소 우승의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다.
孫양이 처음 피아노를 잡은 것은 초등학교 5학년 때. 중학교 1학년 때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실시하는 예비학교에 입학한 것을 시작으로 이 학교와 인연을 맺었고, 중학교 졸업과 함께 英才코스 시험에 합격하여 정식으로 한국예술종합학교의 학생으로 입학했다.
예술고등학교를 다닌 일도 없이 고등학교를 건너뛰어 중학 졸업과 함께 한국예술종합학교로 들어온 것이 피아노 수업의 전부였다. 외국에 가서 공부를 한 일은 물론 없었다. 순수 국내파로서 세계를 제패했다는 점이 孫양 자신은 물론이고 孫양이 재학 중인 한국예술종합학교의 국제적 위상을 가늠케 하는 사례로서 손꼽힌다.
孫양이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선택한 이유는 분명했다.
『첫째는 선생님(김대진 교수)이 좋아서, 둘째는 예술중학교가 아닌 일반 중학교(강원도 원주中) 출신으로서 선택할 길을 여러 방향으로 생각하다가 고등학교에 가서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싫어서 이 학교를 택했으며, 셋째 입학 후에도 음악과 관계 없는 수업을 받지 않고 온전히 음악에 몰두할 수 있는 환경이 좋아서 이 학교를 택했다』
무용의 河恩智양의 경우도 비슷하다. 河양은 2003년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과 학생들의 미국 순회공연 때 네바다 발레단 단장의 눈에 들어 학교를 쉬고 네바다 발레단에 입단, 솔리스트로 좋은 대우를 받고 있다. 河양이 무용을 처음 시작한 나이도 초등학교 5학년 때, 이 분야에서는 이른 나이가 아니었다. 초등학교 때 국립발레단의 예비학교를 다니고 예원중학교와 서울예고를 다니다가 고등학교 2학년에 올라갈 때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진학했다. 역시 국내파로서 세계 무대 진출의 가능성을 보여준 재원이다.
『이 학교에서 배운 것이 세계 무대에서 통한다는 것이 정말 자랑스러워요. 세계 어디를 가도 우리 학교보다 좋은 시스템과 연습환경을 본 일이 없어요. 훌륭한 선생님들도 많고, 해외에서 초빙도 해 오고, 수업 내용도 최고예요. 고등학교 1학년 말기에 제가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지원하려 하자 선생님이 「너는 정상적으로 졸업한 후 梨大나 가지 뭣하러 거길 가냐」고 했어요. 그게 일반적인 생각이었지요. 그러나 지금 친구들이 모두 저를 부러워해요. 이 학교를 선택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저는 없었지요』
孫양과 河양 모두 한국예술종합학교의 英才 선발과정을 통해 입학한 예로서 이 학교의 수월성 엘리트 교육이 제대로 맥을 짚었음을 입증해 준다.
입학관리를 맡고 있는 허영한 교수는 『예술의 경우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의 부유층 자녀들이 압도적일 것이라는 일반의 예상과는 달리 지방 출신 학생들이 의외로 많고 부유층 자녀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고 했다.
예술의 소규모 명품점
예술의 경우 英才교육이 바람직하나 분야에 따라서는 예술적 재능의 원숙기가 다르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어릴 때부터 집중적으로 가르쳐야 한다』는 말은 옳지 않다. 교학처장 金奉烈(김봉렬) 교수(건축학 박사)는 『음악은 조기졸업도 가능하나 미술 쪽에서는 오히려 1년씩 유급하여 학교 생활을 연장하는 사례가 많다』고 했다. 미술원의 건축과는 수업연한이 5년제로 되어 있다.
『무용은 몸으로 하기 때문에 20代가 원숙기입니다. 조기교육, 조기졸업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그러나 미술은 연륜이 쌓일수록 원숙해지니 30代에 비로소 기량이 원숙해지고 40~50代에 가서야 예술가로서 一家를 이루는 경우가 많아요. 그러므로 예술종합학교의 테두리 안에 있지만 예술 분야에 따라 교육 방법과 내용은 모두 다릅니다』
金교수는 이 학교의 학사관리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해마다 10%는 유급합니다. 3학기를 유급하면 자동 퇴학당해요. 퇴학률이 5%에 달하므로 학생들의 스트레스도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그래도 학생들은 「이대로가 좋다」고 불만이 없습니다. 학교의 질적 수준 유지에 찬동하고 있어요. 학생들이 그만큼 성숙했다는 반증이기도 하고요』
이어지는 金교수의 말이다.
『현대 예술의 특징 중 하나는 장르 간 벽이 허물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를 교육적 체계 속에서 어떻게 조화시켜 나가느냐 하는 것이 우리 학교가 당면한 과제입니다.
음악은 1대 1의 교육이 중심이고 연극은 그룹 지도가 중심인데, 이처럼 각기 다른 장르의 특성을 살리면서도 전체적인 통일을 유지해 나가자니 학교 경영이 또한 복잡하고 어렵습니다. 일반 종합대학이 대형할인점이라면 우리 학교는 소규모 명품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6개 院의 26개 학과가 전부 나름대로의 독립체로 운영되고 있으므로 26개의 명품점을 가진 쇼핑몰인 셈이지요』
학교 교육에 대한 평가는 결국 졸업생들이 어떻게 활동하느냐에 따라서 성패가 갈린다. 『초기 졸업생들이 일반 필드에서 배척을 당하여 고전했던 것은 사실』이라면서 金奉烈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年 2만 명의 美大 졸업자 중 10명이 작가 돼
『무용의 경우 유니버설발레단의 프리마돈나 중 3분의 2가 우리 학교 출신들입니다. 영화 쪽에서는 4학년 때 각 영화사에서 스카우트하러 옵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취업률은 낮은 편입니다. 예술 창작이라는 것이 어느 집단에 취직하는 것보다는 개인적인 고독한 작업을 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일반적인 「취업」의 잣대로 낸 통계상으로는 우리 졸업생들의 취업률이 낮은 것은 부인할 수 없어요.
미술의 경우 취업의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당당하게 나서는 것은 예술가로서의 길에 대한 자신감과 자부심이 있기 때문이지요. 해마다 쏟아져 나오는 2만 명의 美大 졸업생들 중 작가가 나올 확률은 10명 미만이라고 볼 때 나머지는 그저 대학 나왔다는 졸업장에 만족하거나 아니면 학원 등 私교육에 투입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이는 예술의 확산이 아닌 악순환일 뿐입니다. 우리 학생들은 이런 순환의 고리를 끊고 나가고 있습니다』
한국예술종합학교는 졸업생들이 현실의 장벽을 뚫고 나가 예술가로서의 지속적인 작업이 가능할 수 있도록 「기지」 역할도 하고 있다.
재학생과 졸업생들로 이루어진 극단, 교향악단, 영상예술단, 무용단 등이 이미 다수 만들어져 활동 중이거나 앞으로 만들 예정이다. 2002년 연극원이 창단한 극단 「돌곶이」, 전통예술원이 창단한 「영산예술단」은 대표적인 사례다.
예술의 소비구조를 창출해 내고 공급자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기 위해서다. 졸업생이나 재학생의 활동무대를 학교 차원에서 만들어가는 작업이기도 하다. 여건이 좋아지면 스튜디오를 만들어 가난한 미술과 졸업생들에게 제공할 계획도 세워져 있다.
미술과 言語의 만남
安奎哲 교수는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교육의 독특한 색깔로 『변화에 개방적』이라는 점을 꼽았다.
미술 교육의 또 하나 특징으로 安교수는 「미술과 言語의 결합」을 든다.
『지금까지의 예술교육에서는 언어가 배척되어 왔거나 등한시되어 왔습니다. 음악이나 미술을 언어로 명료하게 설명하고 표현하는 일의 가치를 우습게 보았던 것이지요. 학생이 작업을 하고 있으면 교수가 와서 「여기가 느낌이 좋은데…」 선문답 같은 이런 얘기가 전부였습니다. 왜 느낌이 좋은지, 느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도 없었고 그런 설명을 하는 것 자체가 미술행위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처럼 잘못 인식되기도 했지요. 그건 아닙니다. 어떤 그림이 좋거나 나쁘면 왜 좋고 나쁜지 이유를 언어로 설명할 수 있어야 좋은 작가입니다.
이런 점은 국제적 경쟁력 차원에서도 절실하게 필요한 일입니다. 우리 학교 미술교육의 60%가 토론으로 이뤄지고 있는 까닭이 여기 있어요. 의식적으로 그런 방식으로 가르쳐 보니 그 결과가 좋아요. 다른 대학 출신들과 비교해 보면 현저한 차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전통예술원의 元一 교수는 『졸업생을 위한 직장도 없고 있어도 빈 자리가 없다. 스스로 개척해 나가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10년쯤 지나 우리 아이들이 본격적인 활동을 하면 전통예술의 조류가 바뀔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그 이유를 元교수는 다음과 같이 들었다.
『전통예술은 춤, 노래, 무용(樂, 歌, 舞)이 일체를 이룬 총체적 예술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으나 현대에 와서 각 분야가 세분화되어 전통 연희는 거의 가르치지 않고 있는 실정입니다. 우리 전통예술원의 목표는 전통예술을 종합적으로 가르친다는 점에 있어요. 어느 과를 나오든 전반적인 실기를 익히도록 하는 통합교육이 특징입니다. 전통예술 자체가 도제적 성격을 띠고 있으므로 그런 가르침과 현대적 레슨을 조화시키고 있어요.
그러나 가장 큰 장점은 역시 미래 예술가를 기른다는 점입니다. 창의적인 예술가를 기르는 것이 전통예술원의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전통 자체에 머물면 과거에 갇히는 것이므로 미래 한국음악을 이끌어 갈 사람을 기르는 것이 목표지요.
당연히 창작 측면이 강조됩니다. 부수적으로 사단법인 영산예술단을 만들어 졸업생들을 소화시키고 독립적인 새 작품을 만들어 내고 있어요』
이 학교는 교수가 학생을 개인별로 지도하는 튜터리얼 시스템과 학생들과 교수가 예술제작 과정에 함께 참여하는 실천적 스튜디오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어 전공분야의 실습시간이 국내 다른 대학의 2배 수준에 이른다.
그러나 전임교수의 법적 정원은 180명이나 현재 교수 정원 확보율은 138명으로 법적 정원의 77%에 머물고 있다. 따라서 계속하여 공채 위주의 엄격한 심사를 거쳐 우수한 교수진을 확보해 나가는 한편 국제무대에서 활약하고 있는 在外 한국인 예술가, 저명 외국인 예술가들을 적극 영입하는 특별채용방식도 병행하여 훌륭한 교수진을 구성하려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는 중이다.
절정기의 교수들

현재 재직 중인 교수진만으로도 국내 최고 수준이라는 평가에는 손색없다. 음학원은 李建鏞 총장(작곡과)을 비롯하여 송광선·김영미·최현수·임웅균·김청자·최상호·김홍승(이상 성악과), 김남윤·오광호·이성주·정명화·임대진·강충모·김대진·오순화·오자경·박광서·양성원·츠베레프·클리체프스키(이상 기악과), 이영조·유병은·황성호(이상 작곡과), 서현석·정치용·베어만(이상 지휘과), 허영한·주성혜·민경찬·김춘미(이상 음악학과) 등이 포진해 있다.
연극원에는 최영애·김수기·서충식·남궁호·톰스텔·오순택(이상 연기과), 김석만·윤영선·이상우(이상 연출과), 김광림·황지우(이상 극작과), 윤정섭·최상철·고희선(이상 무대미술과), 김윤철·이미원·최준호·김미희·이승엽(이상 연극학과) 등이 있다.
영상원에는 박종원·편장완·이승무·박광수·오명훈·김흥준·박현철·김형구·이규석·이창동(現 문화부 장관, 이상 영화과), 홍순철·한성수(이상 방송영상과), 이성은·장윤희(이상 멀티미디어영상과), 박세형·박재동·주완수·이정민(이상 애니메이션과), 심광현·최민·김소영(이상 영상이론과), 무용원에는 김혜식·정승희·김현자·유정옥·김선희·전미숙·우광혁·블라미드 김·마가리타 쿨릭·라스칼루·마르코·모더리마(이상 실기과), 남정호·김삼진·안성수(이상 창작과), 김종원·허영일·홍승찬·김용이(이상 이론과) 등이 있다.
미술원에는 오경환·전수천·배진환·이주용·곽남신·설원기·안규철·윤동구·정정화·박성원(이상 조형예술과), 김성룡·양승무·박인석·이영희(이상 디자인과), 김봉렬·민현식·김종규·박선우·우동선·정기용(이상 건축과), 권영필·강태희·양정무(이상 미술이론과) 등이 미래 예술가 양성과 자신들의 창작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전통예술원에는 송방송(한국예술학과), 백대웅·김영재·정재국·박용호·안숙선·김혜숙·박승률·정수년·민의식·원일(이상 음악과), 양성옥(무용과), 김덕수·최창주(이상 연희과) 등이 교수진에 참여하고 있다.
교수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교수이기 이전에 국내 최고 수준의 예술가들이라는 점, 그 때문에 가르치는 일 못지않게 창작활동도 왕성하여 절정기에 이른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일반대학들의 종합대학 승격 반대
개교 12년째인 이 학교의 재학생 수는 2806명이다. 2004년 예산 규모는 536억원으로 전년 대비 64.6% 증가했다. 열매를 따먹기보다는 아직은 비상의 바탕을 만드는 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젊은 학교다. 그러면서도 세계의 예술계로부터 『크누아(KNUA)를 보고 싶다』는 강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학교이지만 발전의 발걸음을 잡고 있는 결정적인 장애물이 있다. 바로 학교의 格(격)이다.
그 格은 학교의 이름에서부터 풍긴다. 한국예술종합학교(THE KOREA NATIONAL UNIVERSITY OF ARTS ·약칭 KNUA)라는 명칭에는 「대학교」라는 말이 없다. 교육법에 근거하여 설치된 학교가 아니라 문화부 소관의 특별법에 의하여 설치된 학교, 즉 「각종학교」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각종학교란 옛날의 전수학교, 골목 안의 학원 등과 같은 격의 이름이다.
그러므로 4년 또는 5년의 대학 과정을 수료하고도 「학사」 대신에 「예술사」 자격을 얻고, 이어서 대학원에 해당하는 전문예술사 과정을 마쳐도 석사·박사 대신에 전문예술사라는 자격을 얻는 데 그치고 있다.
1999년 이 학교를 국립 예술종합대학교로 승격시키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러나 법제화하는 과정에서 일반대학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혀 좌절되고 말았다. 따라서 이 문제는 국가적인 숙제로 여전히 남아 있다.
손열음양은 『예술가에게 있어 출신 학교의 격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그래도 내가 다니는 학교가 정식 대학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면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학생들이나 교수들이나 『실력으로 말한다』고 하면서도 내심으로는 대학 승격을 간절히 바라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국예술종합학교가 대학으로 승격하지 못하는 이유는 물론 기존의 일반대학의 반대 때문이다. 일반대학에서는 『전문예술가를 키운다는 목적으로 출발한 학교가 왜 학벌주의 시대의 학교로 돌아가려느냐』고 묻는다. 이는 드러내놓는 명분이고 실제로는 일반대학 예술부문의 위상이 위태로워질 수도 있다는 강한 위기감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즉 대학의 기존 예술교육과 완전히 다른 교육을 국가가 실시하되 예외적인 틀 속에서 하라는 얘기다.
李建鏞 총장은 일반대학들이 한국종합예술학교의 종합대학 승격을 반대하는 이유가 오해에서 비롯되었다고 분석했다.
『우리 학교가 학위를 받을 수 있게 하자는 것은 교육의 내용을 기존 대학처럼 바꾸려는 것이 아니라 교육의 일정한 틀을 만들자는 것입니다. 실질을 바꾸지 않고 상응하는 이름을 달라는 것뿐인데 이것을 교육의 내용과 결부시켜 반대하는 것은 오해입니다.
두 번째 오해는 정서적인 것입니다. 우리 학교는 문화부 소관으로 특별하게 만든 학교로, 획일화한 기존의 교육 시스템에 신선한 충격을 준 것은 사실입니다. 한편으로 교육이 앞으로도 이런 다양한 모습으로 발전되어 나가야 한다는 의견이 있고 다른 한편에서는 반대의 의견도 있을 수 있습니다.
오늘날 특목고에 대한 비판처럼 엘리트 교육을 확대하느냐 평준화를 지지하느냐 하는 주장의 엇갈림이 상당부분 정서적인 관점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종합예술대학으로 가는 추세』
한국예술종합학교도 학교인 이상 교육을 관장하는 교육인적자원부의 통제를 받지 않을 수 없다. 중요한 사안의 경우 문광부의 허락을 받은 후 다시 교육인적자원부의 동의를 얻어야 하므로 이중의 통제 속에 놓여 있는 셈이다.
학교는 학교이되 교육인적자원부의 소관이 아닌 특별한 학교가 하나 더 있다. 과학기술부 소관의 KAIST가 바로 그것이다. 과학 한국의 기치를 내걸고 20여 년 전에 출범한 이 학교는 명실공히 국내 과학기술의 요람으로 나라의 발전을 이끌어 온 산실이자 미래 한국의 견인차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역시 KAIST와 비슷한 格과 내용으로 국가의 지원을 받는다면 장차 그 결실이 한국의 국가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게 이 학교 교수들과 학생들의 한결같은 바람이었다.
허영한 교수는 『종합예술대학으로 가는 추세가 세계적인 경향』이라고 했다.
『조사를 해 보니 우리 학교와 같은 학교가 全세계에 12개 학교가 있는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두세 군데 있을 것으로 예상했는데 결과를 보고 우리도 놀랐어요. 이 학교들이 다 최근에 설립되었다는 점도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예술 간의 장르 통합과 새로운 예술의 창조가 미래 예술의 큰 축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암시해 주기도 하고, 국가가 나서서 예술에 과감하게 투자해야 한다는 마인드가 확산되고 있다는 점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출발할 때는 몰랐던 사실이지만 지나고 보니 우리 학교가 존재한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새삼 느끼게 됩니다. 그에 상응하는 위상의 정립이 필요한 때입니다』●
『춤은 제 삶이에요. 춤으로 무엇이 되는가 하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고요. 춤을 추고 싶은 사람에게 이 학교는 최고예요. 좋은 선생님들, 좋은 시설, 아무런 틀도 강요하지 않는 열린 마인드의 교육이 있거든요. 제 꿈은 원장 선생님처럼 되는 것입니다』(河恩智·19·2002년 프라하 콩쿠르에서 금상, 2003년 룩셈부르크 콩쿠르에서 금상 수상하고 한국예술종합학교 3학년 휴학, 현재 미국 네바다 발레단에서 활동 중)
1993년 개교, 올해 12년째를 맞는 한국예술종합학교는 한 마디로 「젊은 학교」다. 한국 예술을 세계의 主流로 끌어올리는 견인차로서의 역할을 한다는 자긍심과 자신감에 차 있다. 교수들도 학생들도 겁이 없다. 엄연한 대학 또는 그 이상이면서도 교육법상 「각종학교」에 해당하는 예술종합학교라는 어정쩡한 간판을 떼지 못하고 있는 것이 조금 마음에 걸리고 불편하지만 그런 형식적인 것들이 이들의 예술을 향한 열정에 결정적인 장애물은 되지 못한다.
1990년 6월 문화부는 「문화발전 10개년 계획」을 통하여 국립예술학교 설립계획을 공포했다.
그해 12월 말에 문화부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설립의 근거가 되는 한국예술종합학교설치령(대통령령 제13528호)을 제정하여 법적 근거를 마련하고 음악원, 무용원, 연극원, 영상원, 미술원, 전통예술원 등을 1993년부터 차례로 설치하기로 하고 준비작업에 들어가 개교 첫해인 1993년 일차적으로 음악원부터 문을 열었다.
학교 건물(학습장)은 예술의 전당 일부를 사용했다. 초대교장에는 서울 음대 李康淑(이강숙) 교수가 추대됐다. 개교일은 1993년 3월8일. 음악원內 4개 학과(현재 5개 학과) 98명의 예술사 과정(일반대학 학사과정) 신입생을 받아들여 문을 열었다.
현재 음악원 원장인 金南潤 교수도 초창기 개교 멤버로 참여, 서울 음대에서 옮겨왔는데 이때 서울 음대 2학년 재학 중이던 학생 3명이 서울 음대를 떠나 한국예술종합학교 1학년으로 따라왔다.
李建鏞 총장(작곡과)은 『초창기 이 학교의 미래상이 불투명할 때 서울 음대 2학년생 3명이 金교수를 따라 이 학교 신입생으로 들어온 사건은 이 학교 출범에 대한 젊은 예술도들의 기대를 반영한 것이었고, 학교 측과 학생들의 사기를 올리는 데 큰 추동력이 되었다』고 했고, 당사자인 金南潤 원장은 『나는 학생들이 따라오는 것을 원하지 않았는데, 서울대학 측으로부터 욕을 들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한국예술종합학교를 구성하는 6개의 院(일반대학의 단과대학) 중 먼저 출범한 음악원이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자 종합대학 체제로 본격 돌입하기 위하여 1994년 3월 두 번째로 연극원이 문을 열었고, 1995년에는 영상원이, 1996년에는 무용원이 개원했다. 1997년에는 미술원, 1998년 전통예술원을 마지막으로 6개의 院이 모두 문을 열었다.
그리고 일반대학의 대학원(석사 및 박사과정)에 해당하는 예술전문사 과정도 1994년 음악원을 시작으로 2000년까지 6개 院에 모두 개설하였고, 중학교 3학년부터 고등학교 재학생(1, 2학년)을 대상으로 한 예술英才 선발제도를 채택하여 英才의 조기발굴 시스템도 완비하였다.
학교의 캠퍼스는 둘로 나뉘어 있다. 본부와 미술·연극·영상·전통예술 등 4개 院은 서울 석관동의 옛 안기부 본부 자리에 들어가 안기부가 쓰던 건물을 일부 개조하여 사용하고 있다.
2006년 완공 예정으로 현재의 건물 옆에 캠퍼스 신축공사가 진행 중인데 이 공사가 마무리되면 명실공히 종합예술학교에 어울리는 각종 시설이 마련될 듯하다. 한편 음악·무용의 2개 院은 서울 서초동 예술의 전당 서쪽에 1999년 따로 校舍(교사)를 신축하여 사용하고 있다. 이 두 단과대학의 경우 예술의 전당 자체가 산 교육장이기도 하기 때문에 서초동을 떠나 굳이 석관동 캠퍼스에 합류할 필요가 없다는 판단에서다.


그러나 이처럼 세월이 일천함에도 불구하고 이 학교를 중심으로 일어나는 예술계의 조용한 변화의 흐름은 각 분야에서 분명히 감지되고 있다. 음악, 무용 등 일부 분야에서는 각종 국제 콩쿠르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둠으로써 세계의 관심권 속으로 진입하였고, 미술처럼 오랜 숙성이 필요한 분야에서도 한국 미술의 새로운 흐름을 형성하는 변화의 한가운데서 이 학교의 역동성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런 학교가 왜 필요했으며 예술의 어떤 요구가 이런 학교를 낳았을까. 李建鏞총장은 기존 대학의 예술교육과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육 사이에 선을 분명하게 그었다.
『종래 우리나라 대학의 예술 학과들, 특히 음악의 경우 음대들은 미국의 주립대학을 모델로 했는데 그 목표가 「예술을 공부한 중간지도자 양성」에 있었어요.
건국 후 줄곧 그런 방식으로 예술을 가르쳐 온 것입니다. 우리는 달라요. 여기서는 「예술을 공부한 중간지도자」가 아니라 처음부터 「전문예술가 양성」을 목표로 합니다. 6개 院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 院마다 특성이 있지만 공통된 이 학교의 기조는 이것입니다』
이 학교의 탄생 배경에는 일반대학의 예술교육이 「예술가 양성」과는 동떨어지거나 예술가가 되려는 학생들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데 대한 반작용도 컸다는 분석이다. 다음은 李총장의 계속되는 말이다.
『일반대학의 예술 학과 커리큘럼의 30%는 교양과목입니다. 좋은 아이디어이기는 하나 자발적인 교양이 아니라 강요된 교양은 정신과 예술의 자양분이 되지 못하거든요. 대학의 예술 학과에 입학한다는 것은 특별한 선택인데 그저 입학이 목적이고 예술가로서의 전문적인 수련은 뒷전이 되고 말았어요. 실기시험을 보기는 하지만 한 가지 능력만 길러서 입학한 후에는 허송세월하니 대학생은 많으나 예술가는 없는 빈곤현상이 일어날 수밖에요.
이러한 문화적 빈곤, 예술교육의 왜곡에 대한 반성에서 이 학교가 탄생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시대적 요구였다고 봅니다. 백남준과 정경화 같은 세계적인 예술가들도 이 땅에서 태어났으나 외국에서 공부한 다음에야 세계적인 예술가가 될 수 있었지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예술적 소양은 깊은데 교육 시스템이 잘못돼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그 잘못된 것을 제대로 하자는 것이 이 학교의 존재 이유입니다』


손열음(18·음악원 3학년)양이 그 좋은 예다. 피아노로 11세 때 영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최연소 2위 입상, 1999년 미국 오벌린 피아노 콩쿠르 최연소 1위, 2000년 독일 에틀링겐 피아노 콩쿠르 최연소 1위, 2002년 이탈리아 비오티 콩쿠르 최연소 우승의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다.
孫양이 처음 피아노를 잡은 것은 초등학교 5학년 때. 중학교 1학년 때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실시하는 예비학교에 입학한 것을 시작으로 이 학교와 인연을 맺었고, 중학교 졸업과 함께 英才코스 시험에 합격하여 정식으로 한국예술종합학교의 학생으로 입학했다.
예술고등학교를 다닌 일도 없이 고등학교를 건너뛰어 중학 졸업과 함께 한국예술종합학교로 들어온 것이 피아노 수업의 전부였다. 외국에 가서 공부를 한 일은 물론 없었다. 순수 국내파로서 세계를 제패했다는 점이 孫양 자신은 물론이고 孫양이 재학 중인 한국예술종합학교의 국제적 위상을 가늠케 하는 사례로서 손꼽힌다.
孫양이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선택한 이유는 분명했다.
『첫째는 선생님(김대진 교수)이 좋아서, 둘째는 예술중학교가 아닌 일반 중학교(강원도 원주中) 출신으로서 선택할 길을 여러 방향으로 생각하다가 고등학교에 가서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싫어서 이 학교를 택했으며, 셋째 입학 후에도 음악과 관계 없는 수업을 받지 않고 온전히 음악에 몰두할 수 있는 환경이 좋아서 이 학교를 택했다』
무용의 河恩智양의 경우도 비슷하다. 河양은 2003년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과 학생들의 미국 순회공연 때 네바다 발레단 단장의 눈에 들어 학교를 쉬고 네바다 발레단에 입단, 솔리스트로 좋은 대우를 받고 있다. 河양이 무용을 처음 시작한 나이도 초등학교 5학년 때, 이 분야에서는 이른 나이가 아니었다. 초등학교 때 국립발레단의 예비학교를 다니고 예원중학교와 서울예고를 다니다가 고등학교 2학년에 올라갈 때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진학했다. 역시 국내파로서 세계 무대 진출의 가능성을 보여준 재원이다.
『이 학교에서 배운 것이 세계 무대에서 통한다는 것이 정말 자랑스러워요. 세계 어디를 가도 우리 학교보다 좋은 시스템과 연습환경을 본 일이 없어요. 훌륭한 선생님들도 많고, 해외에서 초빙도 해 오고, 수업 내용도 최고예요. 고등학교 1학년 말기에 제가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지원하려 하자 선생님이 「너는 정상적으로 졸업한 후 梨大나 가지 뭣하러 거길 가냐」고 했어요. 그게 일반적인 생각이었지요. 그러나 지금 친구들이 모두 저를 부러워해요. 이 학교를 선택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저는 없었지요』
孫양과 河양 모두 한국예술종합학교의 英才 선발과정을 통해 입학한 예로서 이 학교의 수월성 엘리트 교육이 제대로 맥을 짚었음을 입증해 준다.
입학관리를 맡고 있는 허영한 교수는 『예술의 경우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의 부유층 자녀들이 압도적일 것이라는 일반의 예상과는 달리 지방 출신 학생들이 의외로 많고 부유층 자녀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고 했다.

예술의 경우 英才교육이 바람직하나 분야에 따라서는 예술적 재능의 원숙기가 다르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어릴 때부터 집중적으로 가르쳐야 한다』는 말은 옳지 않다. 교학처장 金奉烈(김봉렬) 교수(건축학 박사)는 『음악은 조기졸업도 가능하나 미술 쪽에서는 오히려 1년씩 유급하여 학교 생활을 연장하는 사례가 많다』고 했다. 미술원의 건축과는 수업연한이 5년제로 되어 있다.
『무용은 몸으로 하기 때문에 20代가 원숙기입니다. 조기교육, 조기졸업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그러나 미술은 연륜이 쌓일수록 원숙해지니 30代에 비로소 기량이 원숙해지고 40~50代에 가서야 예술가로서 一家를 이루는 경우가 많아요. 그러므로 예술종합학교의 테두리 안에 있지만 예술 분야에 따라 교육 방법과 내용은 모두 다릅니다』
金교수는 이 학교의 학사관리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해마다 10%는 유급합니다. 3학기를 유급하면 자동 퇴학당해요. 퇴학률이 5%에 달하므로 학생들의 스트레스도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그래도 학생들은 「이대로가 좋다」고 불만이 없습니다. 학교의 질적 수준 유지에 찬동하고 있어요. 학생들이 그만큼 성숙했다는 반증이기도 하고요』
이어지는 金교수의 말이다.
『현대 예술의 특징 중 하나는 장르 간 벽이 허물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를 교육적 체계 속에서 어떻게 조화시켜 나가느냐 하는 것이 우리 학교가 당면한 과제입니다.
음악은 1대 1의 교육이 중심이고 연극은 그룹 지도가 중심인데, 이처럼 각기 다른 장르의 특성을 살리면서도 전체적인 통일을 유지해 나가자니 학교 경영이 또한 복잡하고 어렵습니다. 일반 종합대학이 대형할인점이라면 우리 학교는 소규모 명품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6개 院의 26개 학과가 전부 나름대로의 독립체로 운영되고 있으므로 26개의 명품점을 가진 쇼핑몰인 셈이지요』
학교 교육에 대한 평가는 결국 졸업생들이 어떻게 활동하느냐에 따라서 성패가 갈린다. 『초기 졸업생들이 일반 필드에서 배척을 당하여 고전했던 것은 사실』이라면서 金奉烈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무용의 경우 유니버설발레단의 프리마돈나 중 3분의 2가 우리 학교 출신들입니다. 영화 쪽에서는 4학년 때 각 영화사에서 스카우트하러 옵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취업률은 낮은 편입니다. 예술 창작이라는 것이 어느 집단에 취직하는 것보다는 개인적인 고독한 작업을 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일반적인 「취업」의 잣대로 낸 통계상으로는 우리 졸업생들의 취업률이 낮은 것은 부인할 수 없어요.
미술의 경우 취업의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당당하게 나서는 것은 예술가로서의 길에 대한 자신감과 자부심이 있기 때문이지요. 해마다 쏟아져 나오는 2만 명의 美大 졸업생들 중 작가가 나올 확률은 10명 미만이라고 볼 때 나머지는 그저 대학 나왔다는 졸업장에 만족하거나 아니면 학원 등 私교육에 투입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이는 예술의 확산이 아닌 악순환일 뿐입니다. 우리 학생들은 이런 순환의 고리를 끊고 나가고 있습니다』
한국예술종합학교는 졸업생들이 현실의 장벽을 뚫고 나가 예술가로서의 지속적인 작업이 가능할 수 있도록 「기지」 역할도 하고 있다.
재학생과 졸업생들로 이루어진 극단, 교향악단, 영상예술단, 무용단 등이 이미 다수 만들어져 활동 중이거나 앞으로 만들 예정이다. 2002년 연극원이 창단한 극단 「돌곶이」, 전통예술원이 창단한 「영산예술단」은 대표적인 사례다.
예술의 소비구조를 창출해 내고 공급자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기 위해서다. 졸업생이나 재학생의 활동무대를 학교 차원에서 만들어가는 작업이기도 하다. 여건이 좋아지면 스튜디오를 만들어 가난한 미술과 졸업생들에게 제공할 계획도 세워져 있다.

安奎哲 교수는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교육의 독특한 색깔로 『변화에 개방적』이라는 점을 꼽았다.
미술 교육의 또 하나 특징으로 安교수는 「미술과 言語의 결합」을 든다.
『지금까지의 예술교육에서는 언어가 배척되어 왔거나 등한시되어 왔습니다. 음악이나 미술을 언어로 명료하게 설명하고 표현하는 일의 가치를 우습게 보았던 것이지요. 학생이 작업을 하고 있으면 교수가 와서 「여기가 느낌이 좋은데…」 선문답 같은 이런 얘기가 전부였습니다. 왜 느낌이 좋은지, 느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도 없었고 그런 설명을 하는 것 자체가 미술행위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처럼 잘못 인식되기도 했지요. 그건 아닙니다. 어떤 그림이 좋거나 나쁘면 왜 좋고 나쁜지 이유를 언어로 설명할 수 있어야 좋은 작가입니다.
이런 점은 국제적 경쟁력 차원에서도 절실하게 필요한 일입니다. 우리 학교 미술교육의 60%가 토론으로 이뤄지고 있는 까닭이 여기 있어요. 의식적으로 그런 방식으로 가르쳐 보니 그 결과가 좋아요. 다른 대학 출신들과 비교해 보면 현저한 차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전통예술원의 元一 교수는 『졸업생을 위한 직장도 없고 있어도 빈 자리가 없다. 스스로 개척해 나가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10년쯤 지나 우리 아이들이 본격적인 활동을 하면 전통예술의 조류가 바뀔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그 이유를 元교수는 다음과 같이 들었다.
『전통예술은 춤, 노래, 무용(樂, 歌, 舞)이 일체를 이룬 총체적 예술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으나 현대에 와서 각 분야가 세분화되어 전통 연희는 거의 가르치지 않고 있는 실정입니다. 우리 전통예술원의 목표는 전통예술을 종합적으로 가르친다는 점에 있어요. 어느 과를 나오든 전반적인 실기를 익히도록 하는 통합교육이 특징입니다. 전통예술 자체가 도제적 성격을 띠고 있으므로 그런 가르침과 현대적 레슨을 조화시키고 있어요.
그러나 가장 큰 장점은 역시 미래 예술가를 기른다는 점입니다. 창의적인 예술가를 기르는 것이 전통예술원의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전통 자체에 머물면 과거에 갇히는 것이므로 미래 한국음악을 이끌어 갈 사람을 기르는 것이 목표지요.
당연히 창작 측면이 강조됩니다. 부수적으로 사단법인 영산예술단을 만들어 졸업생들을 소화시키고 독립적인 새 작품을 만들어 내고 있어요』
이 학교는 교수가 학생을 개인별로 지도하는 튜터리얼 시스템과 학생들과 교수가 예술제작 과정에 함께 참여하는 실천적 스튜디오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어 전공분야의 실습시간이 국내 다른 대학의 2배 수준에 이른다.
그러나 전임교수의 법적 정원은 180명이나 현재 교수 정원 확보율은 138명으로 법적 정원의 77%에 머물고 있다. 따라서 계속하여 공채 위주의 엄격한 심사를 거쳐 우수한 교수진을 확보해 나가는 한편 국제무대에서 활약하고 있는 在外 한국인 예술가, 저명 외국인 예술가들을 적극 영입하는 특별채용방식도 병행하여 훌륭한 교수진을 구성하려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는 중이다.


현재 재직 중인 교수진만으로도 국내 최고 수준이라는 평가에는 손색없다. 음학원은 李建鏞 총장(작곡과)을 비롯하여 송광선·김영미·최현수·임웅균·김청자·최상호·김홍승(이상 성악과), 김남윤·오광호·이성주·정명화·임대진·강충모·김대진·오순화·오자경·박광서·양성원·츠베레프·클리체프스키(이상 기악과), 이영조·유병은·황성호(이상 작곡과), 서현석·정치용·베어만(이상 지휘과), 허영한·주성혜·민경찬·김춘미(이상 음악학과) 등이 포진해 있다.
연극원에는 최영애·김수기·서충식·남궁호·톰스텔·오순택(이상 연기과), 김석만·윤영선·이상우(이상 연출과), 김광림·황지우(이상 극작과), 윤정섭·최상철·고희선(이상 무대미술과), 김윤철·이미원·최준호·김미희·이승엽(이상 연극학과) 등이 있다.
영상원에는 박종원·편장완·이승무·박광수·오명훈·김흥준·박현철·김형구·이규석·이창동(現 문화부 장관, 이상 영화과), 홍순철·한성수(이상 방송영상과), 이성은·장윤희(이상 멀티미디어영상과), 박세형·박재동·주완수·이정민(이상 애니메이션과), 심광현·최민·김소영(이상 영상이론과), 무용원에는 김혜식·정승희·김현자·유정옥·김선희·전미숙·우광혁·블라미드 김·마가리타 쿨릭·라스칼루·마르코·모더리마(이상 실기과), 남정호·김삼진·안성수(이상 창작과), 김종원·허영일·홍승찬·김용이(이상 이론과) 등이 있다.
미술원에는 오경환·전수천·배진환·이주용·곽남신·설원기·안규철·윤동구·정정화·박성원(이상 조형예술과), 김성룡·양승무·박인석·이영희(이상 디자인과), 김봉렬·민현식·김종규·박선우·우동선·정기용(이상 건축과), 권영필·강태희·양정무(이상 미술이론과) 등이 미래 예술가 양성과 자신들의 창작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전통예술원에는 송방송(한국예술학과), 백대웅·김영재·정재국·박용호·안숙선·김혜숙·박승률·정수년·민의식·원일(이상 음악과), 양성옥(무용과), 김덕수·최창주(이상 연희과) 등이 교수진에 참여하고 있다.
교수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교수이기 이전에 국내 최고 수준의 예술가들이라는 점, 그 때문에 가르치는 일 못지않게 창작활동도 왕성하여 절정기에 이른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개교 12년째인 이 학교의 재학생 수는 2806명이다. 2004년 예산 규모는 536억원으로 전년 대비 64.6% 증가했다. 열매를 따먹기보다는 아직은 비상의 바탕을 만드는 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젊은 학교다. 그러면서도 세계의 예술계로부터 『크누아(KNUA)를 보고 싶다』는 강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학교이지만 발전의 발걸음을 잡고 있는 결정적인 장애물이 있다. 바로 학교의 格(격)이다.
그 格은 학교의 이름에서부터 풍긴다. 한국예술종합학교(THE KOREA NATIONAL UNIVERSITY OF ARTS ·약칭 KNUA)라는 명칭에는 「대학교」라는 말이 없다. 교육법에 근거하여 설치된 학교가 아니라 문화부 소관의 특별법에 의하여 설치된 학교, 즉 「각종학교」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각종학교란 옛날의 전수학교, 골목 안의 학원 등과 같은 격의 이름이다.
그러므로 4년 또는 5년의 대학 과정을 수료하고도 「학사」 대신에 「예술사」 자격을 얻고, 이어서 대학원에 해당하는 전문예술사 과정을 마쳐도 석사·박사 대신에 전문예술사라는 자격을 얻는 데 그치고 있다.
1999년 이 학교를 국립 예술종합대학교로 승격시키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러나 법제화하는 과정에서 일반대학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혀 좌절되고 말았다. 따라서 이 문제는 국가적인 숙제로 여전히 남아 있다.
손열음양은 『예술가에게 있어 출신 학교의 격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그래도 내가 다니는 학교가 정식 대학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면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학생들이나 교수들이나 『실력으로 말한다』고 하면서도 내심으로는 대학 승격을 간절히 바라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국예술종합학교가 대학으로 승격하지 못하는 이유는 물론 기존의 일반대학의 반대 때문이다. 일반대학에서는 『전문예술가를 키운다는 목적으로 출발한 학교가 왜 학벌주의 시대의 학교로 돌아가려느냐』고 묻는다. 이는 드러내놓는 명분이고 실제로는 일반대학 예술부문의 위상이 위태로워질 수도 있다는 강한 위기감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즉 대학의 기존 예술교육과 완전히 다른 교육을 국가가 실시하되 예외적인 틀 속에서 하라는 얘기다.
李建鏞 총장은 일반대학들이 한국종합예술학교의 종합대학 승격을 반대하는 이유가 오해에서 비롯되었다고 분석했다.
『우리 학교가 학위를 받을 수 있게 하자는 것은 교육의 내용을 기존 대학처럼 바꾸려는 것이 아니라 교육의 일정한 틀을 만들자는 것입니다. 실질을 바꾸지 않고 상응하는 이름을 달라는 것뿐인데 이것을 교육의 내용과 결부시켜 반대하는 것은 오해입니다.
두 번째 오해는 정서적인 것입니다. 우리 학교는 문화부 소관으로 특별하게 만든 학교로, 획일화한 기존의 교육 시스템에 신선한 충격을 준 것은 사실입니다. 한편으로 교육이 앞으로도 이런 다양한 모습으로 발전되어 나가야 한다는 의견이 있고 다른 한편에서는 반대의 의견도 있을 수 있습니다.
오늘날 특목고에 대한 비판처럼 엘리트 교육을 확대하느냐 평준화를 지지하느냐 하는 주장의 엇갈림이 상당부분 정서적인 관점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한국예술종합학교도 학교인 이상 교육을 관장하는 교육인적자원부의 통제를 받지 않을 수 없다. 중요한 사안의 경우 문광부의 허락을 받은 후 다시 교육인적자원부의 동의를 얻어야 하므로 이중의 통제 속에 놓여 있는 셈이다.
학교는 학교이되 교육인적자원부의 소관이 아닌 특별한 학교가 하나 더 있다. 과학기술부 소관의 KAIST가 바로 그것이다. 과학 한국의 기치를 내걸고 20여 년 전에 출범한 이 학교는 명실공히 국내 과학기술의 요람으로 나라의 발전을 이끌어 온 산실이자 미래 한국의 견인차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역시 KAIST와 비슷한 格과 내용으로 국가의 지원을 받는다면 장차 그 결실이 한국의 국가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게 이 학교 교수들과 학생들의 한결같은 바람이었다.
허영한 교수는 『종합예술대학으로 가는 추세가 세계적인 경향』이라고 했다.
『조사를 해 보니 우리 학교와 같은 학교가 全세계에 12개 학교가 있는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두세 군데 있을 것으로 예상했는데 결과를 보고 우리도 놀랐어요. 이 학교들이 다 최근에 설립되었다는 점도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예술 간의 장르 통합과 새로운 예술의 창조가 미래 예술의 큰 축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암시해 주기도 하고, 국가가 나서서 예술에 과감하게 투자해야 한다는 마인드가 확산되고 있다는 점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출발할 때는 몰랐던 사실이지만 지나고 보니 우리 학교가 존재한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새삼 느끼게 됩니다. 그에 상응하는 위상의 정립이 필요한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