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시인탐험; (21) 朴利道; 「民譚詩」에 빠지다 : 월간조선

경희大 국문과 교수로 있던 朴利道(박이도·65) 시인이 지난 봄 정년퇴직했다. 퇴직하면서 그는 40여 년 동안 발간한 10권의 詩集(시집) 가운데 대표작이라고 생각되는 詩 89편을 自選(자선)해 詩選集「반추」를 냈다.

은퇴했다고 해서 쉬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모교와 몇몇 대학에서 週當 다섯 강좌를 맡아서 분주하게 다니고 있기 때문이다. 1개의 강좌가 3시간이 소요되므로, 每週 15시간을 학생들과 함께 보내고 있는 셈이다.

『먼저 정년을 맞은 사람들이 충고하더군. 첫 3년 동안이 중요하니까, 일을 하면서 견뎌야 한다고 말이야. 그래서 경희大와 한국외국어大 등에서 강의를 얻어 시간을 보내고 있는 거요. 수입이야 보잘것없지만』

연전 발간된 한국시인협회의 주소록에 근거해서 내가 그에게 보냈던 책과 편지가 되돌아온 적이 있어, 이후 우리는 소식을 끊고 지내고 있었다. 어쩌다 문단 모임이 있으면 만날 수 있으려니 했는데 그런 기회도 우리 사이엔 닿지 않았다.

그가 용인의 수지 쪽으로 이사를 가 있다는 것과, 대학에서 정년을 맞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문예지 신년호 문인 주소록을 뒤져 전화 연락을 했더니 마침 그가 집에 있어서 통화가 되었다.

우리는 종로2가의 YMCA 지하 커피숍에서 만났다. 동그랗고 흰 얼굴에 동그란 눈, 코끝이 알코올 중독자의 그것처럼 빨간 그는 은퇴자의 모습 같지가 않았다. 안 쓰던 안경을 끼고 있는 것을 제외하곤 40대 중반 같았다. 원래가 童顔(동안)인 그는 주름살 하나 잡혀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가 나에게는 낯선 자신의 신간 3권을 내밀었다. 詩選集과 「民譚詩集」, 시집 「을숙도에 가면 보금자리가 있을까」가 그것이었다. 최근 3년 동안 낸 것인데 『당신이 부산에 내려가 있다는 등 주소가 불분명해서 그때그때 발송을 못 했던 것』이라고 했다.

『이 詩選集은 지난 40여 년 동안 쓴 詩 가운데 정선한 것이라고 자부하며 낸 것이야. 출판사에서 신문사마다 책을 보냈던 모양인데, 끝내 신간 소개난에 나의 것은 단 한 줄도 비쳐 주지 않더구먼. 한동안 심한 비감까지 들더라고』

한때 신문기자였던 그와 나는 신문기사의 속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어느 듯 나이를 먹어 버린 탓 때문이 아니냐고, 서로를 위로했다.

우리는 근처 「里門 설렁탕」에 가서 점심을 하고 조용한 커피숍을 찾아 詩 이야기를 계속하기로 했다.

큰 반향 일으켰던 당선 시 「皇帝와 나」

그는 1938년 평북 선천에서 태어나 거기서 초등학교 1학년을 다니다 광복을 맞았고, 아버지가 목사였으므로 공산당으로부터 축출되어 결국 월남하게 된다. 어렸을 때는 유치원에 다닐 정도로 집안이 비교적 유복했는데, 이 무렵 그가 보고 느낀 사물에 대한 인식이나, 터득한 언어가 나이 60이 되어서까지 지속되어 나타나고 있다.

초등학교 6년 동안 광복과 월남, 피란 등을 겪으면서 세 차례나 전학을 다녔고, 정규수업을 받은 것은 그 절반인 3년에 지나지 않았다. 동란 중엔 부산과 통영, 나중엔 제주도까지 피란을 다녔으므로 그의 중학교 3년 과정 역시 피란살이에 박탈되다시피 한다.

그의 위로는 형이 한 사람 있었는데 대단한 문학 청년이었다. 朴利道가 문학을 하게 된 배경에는 형의 작용이 컸다. 그의 형은 학교 공부는 않고 매양 일본어로 된 세계명작이나 詩들을 읽고 있었는데, 광복 이후 한글로 된 책은 대부분 朴利道 차지가 되었다.

피란의 와중에서 부산 국제시장 헌 책 더미에서 구한 鄭飛石(정비석)의 「文學槪論(문학개론)」은 그의 앞으로의 인생에 많은 시사를 주었다. 현실적으로 학교를 다니지 못한 그는 그 책을 송두리째 베껴 적었고, 모르는 많은 단어들을 일일이 사전을 찾아 익혔다. 빽빽한 한자어와 난해한 문학 용어들을 외우다시피 한 것이다. 아예 문학개론 자체를 독학한 셈이었는데 10代 초반에 그는 이미 성숙한 문학 이론가가 되어 있었다.

―196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詩「皇帝와 나」가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했을 땐 대단한 반향을 일으킨 걸로 기억하는데 그때 이야기부터 해 봅시다.

『한국일보 詩 당선이 있기 전인 1959년에 자유신문 신춘문예에 「音聲」이란 작품을 응모해 당선한 적이 있어요. 잘 알려져 있는 신문이 아니어서, 반향이랄 것도 없었지. 그래서 3년 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작품 「皇帝와 나」를 응모해 1962년 1월1일자로 당선이 된 것이야. 그때가 경희大 3학년에 재학 중일 때였어요. 朴斗鎭(박두진), 朴南秀(박남수)씨가 詩를 심사했는데, 작품이 뛰어나다는 심사평을 해줍디다.

나의 당선 詩가 신문에 게재되고 며칠 후 집으로 시집 한 권이 배달됩디다. 시집 속엔 편지도 들어 있었고, 봉투의 발신자를 보니까, 정중한 붓글씨로 金光均(김광균)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는 거예요. 「瓦斯燈(와사등)」, 「寄港地(기항지)」의 시인 金光均이 분명하다 싶어 조심조심 뜯어 보았는데, 유명한 모더니스트 시인이었던 그가 장문의 편지를 보낸 것이야. 편지 내용을 다 기억은 못 하겠지만, 귀하의 「皇帝와 나」란 詩는 지금까지 자신이 읽어 온 한국詩 가운데 가장 감동적이라는 요지의 말이 인상적이었어. 그 편지를 지금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게 참 안타까운 일인데, 당시 내가 자랑삼아 李祭夏(이제하)와 宋相玉(송상옥) 등 신촌에 모여 살던 마산 출신 글쓰는 이들에게 그 편지를 보여 줬더니 이 친구, 저 친구 돌려보다 그만 없어진 거야. 그 후 한동안 나도 잊고 있다가 뒤늦게 수소문을 해 찾아 봤지만 모두 모른다는 거야. 그래서 영영 잃어버리게 된 거예요』

당선 詩「皇帝와 나」는 모두 90행에 가까운 긴 시다. 황제라는 한 고독한 정복자의 노쇠함을 노래하면서 「나는 그 안에 살고 싶다」는 내용의, 다소 이국적인 취향의 감성적인 모더니즘이 화려하게 드러난 작품이다.

「新春詩」, 「四季」 동인으로 활동

처음엔 漢字語에서 나온 모든 글자를 漢字 위주로 썼는데, 지난 봄에 나온 詩選集「반추」에는 漢字가 말끔히 거세되어 있다. 시 「皇帝와 나」 가운데 가장 많이 거론되는 <2>의 전문을 인용한다.

<성 밖으로 성 밖으로 병정만 내어 보내고/ 그는 잠시도 나설 수가 없구나/ 가난한 농부의 미소를, 그리고/ 해마다 자라는 아이들의 노래를 들을 수가 없구나/ 무성해 가는 수목의 의지를/ 노을 빛 더불어 영글어가는 과실의 풍경을 그는 볼 수가 없구나/ 아 황제여 울고 싶어라 울고 싶어라// 우리 황제는 모른다 성 밖의/ 그 황토(黃土)와/ 이슬과/ 구름과/ 햇빛으로 생성되는/ 찬란한 또 하나의 영토를/ 그는 모른다// 파아란 하늘, 그 주변에 팽창하며/ 푸른 이파리를 거느리고/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을 잡아먹고/ 확장해 가는 고요한 영토를/ 그는 진정 모른다// 그것은 하나의 우주/ 제삼(第三)의 왕령(王領)이다// 원시의 숲 그대로 이글대는 태양과/ 서천(西天)에 빗든 원색의 성 밖에/ 무지개를 잇대고 공중에 떠 있는/ 제 삼의 왕령>

―「新春詩」 동인활동을 주도한 걸로 아는데 주요 멤버는 누구누구였지? 그리고 1966년 무렵이던가, 黃東奎(황동규), 鄭玄宗(정종현), 김현, 金柱演(김주연) 등과 함께 「四季」란 동인지에도 관여했고….

『알다시피 동인지 「新春詩」는 신문사의 신춘문예 출신 시인들로 구성된 것이니까 개성이 있을 수는 없었어. 멤버들 대부분이 대학생이거나 백수들이라 늘 가난했는데, 그 중엔 직장생활을 하던 黃命(황명), 동아일보 기자로 있던 姜仁燮(강인섭)이 주로 우리들을 이끌고 다니며 커피값도 내고 술도 사고 그랬어. 洪潤基(홍윤기)형과 내가 4호까지인가를 주도하다가 서울사대를 나와 교편을 잡고 있던 金源浩(김원호)에게 넘겨 주었는데, 나중엔 李根培(이근배)가 맡아 16호까지 내고 나선 흐지부지된 것 같아. 나는 「四季」 동인이 되어 활동을 하고 있었고』

―「四季」는 몇 호까지 나왔나? 동인지치고는 스타일도 특이했고 책이 꽤 두꺼웠던 걸로 기억이 나는데.

『3호까지라고 기억나는군. 황동규, 나, 정현종, 金華榮(김화영)이 詩를 썼고, 불문학을 전공한 김현과 독문학을 전공한 김주연은 주로 詩에 관한 평론을 썼어. 김화영은 지금 불문학자로 이름을 날리고 있지만 당시엔 좋은 詩를 썼던 걸로 기억해. 첫 호와 둘째 호의 경우는 동인들이 그해 발표한 시들 중 6편에서 8편까지 골라서 실었어요. 나중엔 신작들로 꾸몄지만 말이야. 책을 내는 데는 김현이 상당히 열심이었는데, 전주에 있는 소설가 姜好武(강호무)에게 부탁해 거기서 책을 만들어 서울역으로 부치면 당시 시청 앞의 현대경제일보 기자로 있던 내가 가서 택시로 싣고 와 돌려보곤 했지요.

「四季」가 발전해서 1968년에 「68문학」이 되었고, 동아일보 문화부 기자로 있던 金炳翼(김병익)이 가담하면서 「文學과 知性」으로 발전한 거야』

5·16 쿠데타군에 낀 사연

―박형의 경우 고등학교 다닐 땐 「學園」에 시를 발표하든가 하지 않았나? 특별하게 따르던 스승은 없었는지.

『누구의 詩를 좋아했다든가, 시를 써서 하다 못해 국어선생에게 보였다든가 하지는 않았어. 다들 학원잡지를 통해 문명을 날리고 그랬는데 나의 경우 담을 쌓다시피 한 거야. 서라벌 예대에 간 건 문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에게 장학금을 주었기 때문이었어. 거기서 未堂徐廷柱(미당 서정주), 金東里(김동리) 선생으로부터 문학 강의를 들으며 체계적인 詩 공부를 하게 되었지만. 권영근, 金文洙(김문수), 송상옥 등과 친하게 되고 金敏夫(김민부), 千勝世(천승세), 朴敬用(박경용) ,金榮俊(김영준) 등과도 교류를 했는데, 유명한 가곡 「기다리는 마음」을 作詩한 부산 출신 김민부의 재능은 뛰어났던 걸로 기억나는 군. 미당 선생이 그를 아주 좋아하고 높이 평가했었어. 한데 개성이 강한 사람이었어요. 스스로를 「한국의 보들레르」니 하며 떠들고 다니다 제 풀에 무너진 느낌도 있어. 그는 30代 중반에 요절했지, 아마』

4년제 대학을 나왔어도 갈 곳이 없던 무렵이어서 그는 많은 갈등을 겪었다. 마침 당시 신흥대학이란 이름의 경희大 국문과엔 金珖燮(김광섭), 黃順元(황순원), 趙炳華(조병화) 같은 문인들이 있고, 문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는 제도가 생겨 朴利道는 국문과 3학년에 편입하게 된다. 그때 경희대로 편입학한 것이 그에게는 오랫동안 행운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1959년 학보병으로 군에 입대한다. 학보병은 ROTC 제도가 생기면서 없어진 제도로, 대학 재학 중 군에 갈 경우 1년6개월만 복무하면 제대를 시켜주었다. 학보병의 군번이 「00 …」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에 당시 군에서는 이들을 「빵빵 군번」이라고 불렀다.

그는 제대 9일을 앞두고 5·16 쿠데타를 직접 체험한다. 그가 소속된 전투사단이 마침 서울로 진입하게 되어, 쿠데타가 실패했더라면 그는 제대고 뭐고 목숨까지 위험할 뻔했던 것이다.

사선을 넘어 남녘 땅으로

그의 첫 시집 「回想의 숲」 속에 있는 同名(동명)의 연작시 5편은 아름답다. 「皇帝와 나」란 詩가 이국취향의 다소 관념적인 어투가 성하다면 詩「回想의 숲」은 차분하고 감각적이며 전통적 이미지가 강하게 떠올라 있다. 그래서 한 詩人의 유년 시절에의 회상이 비애처럼 젖어오는 詩인 것이다. 아마도 그 「回想의 숲」은 그의 부모와 형과 더불어 어쩔 수 없이 탈출해야 했던 고향 평북 선천의 산하일 것이다.

「回想의 숲―1」의 全文을 소개한다.

<내 回想의 숲 속엔/ 이제 아무도 거닐지 않는다/ 밤바다에 닻을 내린/ 木船의 꿈처럼/ 뒤척이는 물소리에 사라진/ 내 어린 그림자의 행방을/ 이제 아무도 모른다// 조그만 손으로 눈을 가리고/ 호랑이 흉내를 내던 나의 과거를,/ 옥수수대로 안경을 만들어 끼고/ 新房을 차리던 토담에/ 까치 옷과 부딪쳐 눈물 흘리고/ 나의 生家를 둘러 선/ 밤나무 숲 속에서/ 가슴 조이던 유년시대// 내 사랑의 싹이 움트고/ 내 지혜의 銀刀가 빛나던/ 밤나무 숲 속,/ 새의 노래는 퍼져가고/ 노을 속에 물드는 강물의 꿈은/ 멀리 멀리 요단강으로 흘러가듯/ 그때 發聲하던 내 목소리를/ 이제 누가 기억하고 있으랴>

『나의 유·소년 시절은 우리 현대사의 가장 어려웠던 시절과 일치하는 것 같아요. 일제 식민지下 때 초등학교에 입학해 1학기 마치고 광복을 맞았고, 이어 남북 분단 뒤에서 공산주의자들에게 쫓겨 고향을 탈출해야 했고, 전쟁을 피해 제주도까지 내려간 것이니까 말입니다. 그 난리판에 학교를 제대로 다닐 수 없었으니까.

처음 초등학교에 들어갔을 때 담임선생이 출석을 부르면서 날더러 「보꾸리도(朴利道)!」 하더군요. 「네!」 했더니 「하이!」라고 대답하라면서 왜 창씨개명을 안 했느냐고 따지는 거였어요. 어떻게 설명을 합니까? 「궁성요배(宮城遙拜)」니 「신사참배(神社參拜)」를 하다 광복을 맞았고, 일본군이 물러가자 이번엔 소련군, 즉 로스케들이 들이닥치는 거였어요. 그들은 우리의 식량을 빼앗고 부녀자들을 마구잡이로 겁탈했기 때문에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38선 이북이 공산주의자들 천지가 되더군요. 우리 집은 기독교 집안이어서, 무신론자인 그들에게는 당장 추방 대상이었지요. 이 무렵을 회상해서 쓴 詩로 「빨간딱지」란 게 있습니다. 비교적 짧아요.

<소문대로 우리 집 대문에/ 빨간딱지가 붙었다/ 살던 집을 두고/ 가재도 그대로 두고/ 몸만 나가라는 명령서이다// 우리는 고향을 떠났다/ 몸만 나가라는 명령을 어기고/ 소 두 마리에 살림살이를 싣고/ 칠흑의 한밤에/ 집을 떠났다// 기차로 평양 고모 댁으로 갔다/ 여기는 중간 기착지/ 골목마다 석탄가루 풀풀 날고/ 전쟁에 사그랑이가 된 건물들/ 타이루를 주워 소꿉놀이를 즐겼지>

평양의 보통강변에 있는 고모 댁에서 몇 달 머무르다 아버지는 더 이상 북쪽에 머물 수 없게 됐다면서 남쪽으로 간다고 하시더군요. 내륙의 38선을 넘으려면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다면서 뱃길이 훨씬 안전하니까 해주까지 가야 한다는 거였지요. 전쟁 훨씬 전이었으니까 해주까지 가는 기차여행이나 배를 구하는 일은 비교적 쉬웠다고 하더군요. 마침 우리 가족은 어린아기가 없어서 다행이었어.

우리 가족을 태운 배는 썰물을 기다려 한 바다로 나가 비로소 남쪽으로 뱃머리를 돌립디다. 그믐날 한밤중이었어요. 숨막힌 항해 끝에 우리를 갯벌에 내려주고 뭍으로까지 데려다 준 안내원이 처음으로 말문을 엽디다. 「여기가 남한 땅이오. 다들 무사히 왔수다」라고요. 그야말로 우린 필사적으로 38선을 넘었던 거예요』

―학력난에 보니까 1951년 2월 이태원초등학교 졸업으로 돼 있는데, 전쟁 전 서울에 와선 그러니까 남산 중턱의 그 「해방촌」이란 동네에서 살았던 모양이지?

『서울에 왔지만 돈이 없어서 집을 구할 수 있어야지요. 먼저 월남한 친척에게 북한 돈을 다 주어 남한 화폐로 바꿔 놓으라고 했는데, 이 양반이 옹진으로 가서 살고 있다는 거예요. 우리는 하는 수 없이 옹진으로 가야 했습니다. 마포나루에서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옹진에 닿았습니다. 옹진에선 바다와 해변이 나의 친구였습니다.

…그리고선 남산 밑의 해방촌으로 이사를 오게 된 것입니다. 거기다가 우리 모두 움막 같은 집을 지어 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서울에서 1년여를 지나 동란이 일어나 다시 남쪽으로 피란을 갔고요.옹진군 용연면에서 난 비로소 정상적인 학교공부를 시작한 것 같습니다. 해방촌에서 가까운 학교는 삼광초등학교가 있었지만 학생들이 너무 많아 받아주지 않더군요. 고개 넘어 이태원초등학교로 간 것이지요. 이태원 초등학교 5학년에 편입해서 졸업하고 大光中에 입학했지. 중학에 입학하고 바로 6·25가 터져 부산으로 피란 갔고, 그곳에선 2학년 1학기만 마치고 환도해 바로 고등학교 1학년으로 등록했지요. 그런 형편이었으니 나는 중학 동창 하나 제대로 갖고 있지 않습니다』

용인 아파트촌에서 한적하게 지내

시내에서 1차 만나고 열흘이 지나 이번엔 朴利道 시인이 사는 집을 찾아갔다.

경기도 용인시 수지읍 상현마을 쌍룡APT 173동 1504호. 그의 집 주소다.

거실은 깨끗하게 정돈이 돼 있었다. 어른 주먹만 한 수석들이 유리문이 있는 장식장 안에 10층 가득 진열돼 있고, 좀 큰 것들은 거실 밖에 있는 장식장에 전시돼 있었다. 수집한 수석이 몇 개쯤 되느냐고 했더니 한 200개는 될 것이라고 했다.

『서울에 수석 붐이 일기 훨씬 전에 박두진 선생과 단양 일대를 헤매고 다녔던 거야. 朴선생은 큰 걸 선호했고 나는 작은 걸 많이 수집했어. 한두 해 지나니까 붐이 일더군. 全鳳健(전봉건) 시인도 그때 수집하러 다닌다고 해서 수석 밭에서 한두 번 만난 적이 있었지. 경희大 교수들이나 직원들과 함께 수석 채집하러 많이 다녔는데, 그땐 내가 탐석(探石) 경험이 많아 돌 고르는 요령 따위를 지도하기도 했어. 하지만 나는 지금도 수석에 대해 이론적으로 잘 알진 못해. 그냥 상징적이거나 시적인 의미가 있어 보이는 것을 캔 것이지』

그의 서재에는 책이 많지 않았다. 학교에 쌓아 두었던 시집 등은 모두 그의 후진이며 경희사이버大 교수인 박주택 시인에게 넘겨 주었다고 했다. 집에 있는 것들은 문학 평론서나 자신의 저서들이 대부분이었고 기독교 관계 연구서 몇 권이 유독 눈에 띄었다. 목사의 아들인 그가 독실한 기독교 신자라는 사실이 상기되는 부분이었다.

컴퓨터 한 대가 그의 책상 위에 놓여 있어서 인터넷도 하느냐고 하자, 『아직은 배우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그의 아내 元惠旭(원혜욱·55)씨가 원고정리해서 보내는 일련의 작업을 도맡아 해주기 때문에 불편이 없다고 했다. 그는 지금 아내의 도움으로 컴퓨터를 익히고 있다고 했다.

―부인하고는 연애결혼을 했나? 두 사람 나이 차이가 많은 것 같던데.

『중매 결혼이었어. 그 사람과 만나기 전엔 선을 여러 번 봤는데, 결국 이 사람과 연이 닿았던 것 같아. 첫눈에 반했던 것이지. 우리는 딸만 둘 낳았는데 둘 다 출가를 했어. 큰딸은 포항제철에 근무하는 사위를 따라 포항에 살아, 그러니까 외손자 녀석이 지금 집에 와 있는 거야. 작은딸은 미국에서 교포 1.5세와 결혼해 살고 있구』

―박형은 1960년대 말에는 신문기자로, 1970년대 초반엔 고등학교 선생이 되어 있었고, 1980년대 들어서는 대학교수로, 말하자면 어려운 시절을 용하게 헤쳐온 시인 같아요. 순수니 참여니 하던 시류의 어느 편에도 휩쓸리지 않았고….

『이상하게도 나에겐 직장 운이란 게 있었나 봐요. 윗사람들이 잘 봐준 것도 있지만 크게 노력하지 않았는데도 일이 풀리는 거였어. 「현대경제」에 있을 때, 사실 그 무렵 신문기자 봉급이란 게 형편없는데다 특히 경제지 기자는 출입처에서도 늘 찬밥신세였잖아요. 어느 날 고등학교 때 친구 하나를 만나 차를 마셨는데, 그가 어떻게 지내느냐고 물어 기자 생활의 고달픔을 이야기했더니 학교로 올 생각이 없느냐는 거였어요. 옛날의 우리 은사가 사립고교의 교장으로 있으니 나를 그 학교의 국어선생으로 천거하겠다는 거야. 내가 詩 쓰는 것을 그 은사도 잘 알거든. 대학 때 교사자격증 따놓은 것도 있고 해서 며칠 후 은사를 만나 뵙고 그래서 선생이 된 거예요. 고교선생으로 있으면서 숭실대학 교수로 와 있던 茶兄金顯承(다형 김현승) 시인이 대학원 진학을 권유하더군. 학위 받고 얼마 있다가 다시 경희大 대학원에 가서 박사학위도 받고, 그럭저럭 전임대우에서 전임, 그리고 승진을 거듭한 셈이지』

자연에서 「나」의 존재이유 깨달아

―화제를 詩로 돌려보지요. 박형은 지금까지 「무엇 때문에 나는 시를 쓰는가」 하고 고민했거나 갈등을 겪었던 적이 있는지?

『詩가 잘 써지지 않을 때 특히 갈등을 겪었어요. 그땐 이미 내가 발표했던 작품까지도 무의미하게 느껴질 때가 있더군요. 이럴 때에는 작품 속의 구문이 마치 풀기라곤 하나 없는 밥처럼 느껴지고, 유기적이지 못한 언어로 괴로워해야 했던 것입니다. 이런 때에는 이미 읽었던 시인들의 작품 중 기억에 남는 것을 다시 찾아 읽으면서 시적인 의욕을 살려 내기도 했지요.

젊었을 적에는 인간 삶에서 빚어지는 감정을 시적인 형식으로 짜내는 것이 詩라고 생각했었어요. 그런데 근자에는 자연이 사물의 대상으로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神의 섭리에 의해 존재한다는 데 감탄하고 엄숙해지고 있습니다. 자연을 보며 함께 호흡한다는 생각, 즉 그 생명감이나 역동성에서 나 자신의 종교적 존재의미까지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엇 때문에 詩를 쓰는가 하는 문제는 결국 「나 자신을 확인하기 위해, 나를 발견하기 위해서였다」고 할 수 있겠지요』

―지금까지 열 권의 신작 시집을 냈습니다. 스스로의 詩를 어떻게 구분하고 있습니까? 또 가장 마음에 드는 책은 어떤 것인지?

『첫 시집 「回想의 숲」에서부터 「暴雪」, 「바람의 손끝이 되어」, 「안개주의보」 그리고 일곱 번째 시집 「홀로 상수리나무를 바라볼 때」까지의 詩들은 특별한 기획의도에 의해 쓰인 것들이 아니었어. 내가 보고 듣고 함께 살아온 사람들과의 인연에서 비롯된 일종의 「反應詩」였다고나 할까, 느낌과 생각을 내 나름의 언어와 문법으로 쓴 서정시였던 것이지요. 그리고 「약속의 땅」, 「乙淑島에 가면 보금자리가 있을까」, 「民譚詩集」 등 최근 세 권의 경우는 의도적으로 기획된 시집입니다. 어느 시집에 애착이 가느냐고 한다면 나로선 난감하다고 할 수밖에 없어요. 나의 詩에 대한 평가는 비평가나 나의 詩를 읽는 독자가 할 것이니까』

朴利道의 詩세계에 대한 비평가들의 일관된 평가의 초점은 순수한 서정시인, 혹은 종교적인 결벽성에 두고 있다.

평론가 金載弘은 시집 「상수리나무를 홀로 바라볼 때」를 해설하면서 『朴利道의 시는 순수하고 서정적이다. 非정치적이라는 말이다. 그렇지만 그의 詩는 非정치적이라는 점에서 가장 정치적일는지도 모른다. 사실 詩에서 가장 큰 힘은 순수한 것이고 진실한 것에서 우러나온다』고 썼다.

그러나 이런 순수 서정시인으로 알려진 朴利道詩에 대해 나는 일대 수정을 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가 나에게 전해 준 「民譚詩集」 때문이었다. 뒤적거리면서 최초로 온 느낌은 「아니, 이 양반이 왜 이러나?」였다. 전날 「참여시」의 한 전형이 읽혔던 것이다.

서정시에서 참여시로

―전번에 전해 준 「民譚詩集」을 대충 읽어 보니 정치적인 내용이나 이데올로기적인 것에 대해 해학과 증오감이 많이 드러나 있는 것 같던데, 지금도 그 시집에 대해 만족하고 있는지? 만족한다면 어떤 점에서….

『만족하고 있어요. 정치·문화 등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관심을 민담시란 형식을 빌려 내 나름의 사회비평을 한 것이지요. 한 편 한 편이 「내 나름의 칼럼」입니다. 아시겠지만 민담이란, 글자 그대로 우리 선조로부터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온 노래요 이야기 아닙니까? 물론 특정한 작자가 있을 수 없지요. 따라서 이야기꾼들의 창의성이 많이 가해졌던 것이야. 같은 내용의 이야기일지라도 고장에 따라, 또 이야기꾼에 따라 상황 설정이나 인물에 대한 표현 방법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민담의 매력이 있는 것입니다. 내가 시도한 민담시의 요체는 민담 속의 이야기 형식을 빌려 그 속의 특유의 어법을 살려 현대의 상황으로 재현한 것으로 보면 됩니다.

자신의 「비교문학론」에서 가야르는 인류의 상상력이나 사고력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신화시대의 이야기 꾸미는 솜씨나 오늘날 문명인의 이야기 꾸미는 솜씨에는 아무 차이가 없다는 주장을 펴고 있습니다. 그것은 특정민족의 신화적 소재가 타민족권의 현대인이 쓴 이야기 속에 그대로 재현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지요. 전혀 언어가 틀리고 불통인 상태에서 비슷한 이야기가 재현된다는 것은 인간의 상상력이나 사고력의 한계를 인정한 것이라는 말이지요.

민담에서 오늘을 보고자하는 것은 바로 이런 상상력의 한계를 극복해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오늘의 시대를 비판하는 詩가 있어야 하는데 나는 나의 민담시가 그 대안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앞으로 어느 시대이건 이런 정치詩나 이념詩는 계속 나오리라고 믿습니다』

―어떻게 민담시를 쓰겠다는 착상을 했는지요.

『1980년대 들어서부터 나는 「새」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어요. 새도 우리나라 텃새들을 눈여겨보았는데 참새, 까치, 꿩 등 10여 종에 관해 詩를 쓰고 나니까 벽에 부딪히는 거였어요. 그래서 눈을 돌린 것이 민담 속에 존재하는 텃새들입니다. 민담집을 열심히 읽다 보니까 이번엔 자연스럽게 우리말과 옛사람들의 생각과 쓰던 어투에 진한 흥미가 가더라고요. 나로선 오늘의 젊은이들의 번역식 문장, 어법 등에 회의감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에게 우리 선조는 이런 풍부한 어휘를 갖고 있었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라도 민담시에 천착했던 것입니다. 이런 시들을 발표하자 어떤 친구는 재미있다고 했고, 다른 친구는 장난치는 것 같다고 화를 내더군』

민담에서 「오늘」을 구사하다

「민담시집」은 2002년 9월에 초판을 냈고 지난 2월에 재판을 냈다. 기왕 재판을 하면서 그는 일부 작품순서를 바꾸고 각주를 보완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 시집에 실린 「민담시」는 모두 35편이다. 중요한 내용은 2000년 6·15남북頂上회담 이후의 오늘의 상황에 대한 민담적 혹은 우화적 접근이다. 초두에 나오는 「나의 소원은 통일」이란 詩가 그것을 암시하고 있다. 다음은 全文.

<나의 소원은 통일 /우리의 소원은 통일/ 김대중의 소원은 통일/ 대한민국의 소원은 통일// 김일성의 소원도 통일/ 김정일의 소원도 통일// 김대중의 소원도 통일/ 김정일의 소원도 통일/ 통일 통일 만만세// 어느 날 아침 세상을 살펴보니/ 나는 반 통일분자가 되어 있구나/ 내가?/ 우리가?>

이 詩 이외의 詩들은 일단 난삽하게 여겨진다. 그러나 찬찬히, 각종 사투리나 민담식 화법을 꿰뚫고 읽어 보면 해독에 어려움은 없다.

詩의 제목만 훑어봐도 그렇다. 「각하 시원하시겠습니다」, 「똥싼 놈이나 잡아주세요」, 「이팝에 소고기국을…」, 「피양에선 돈 지고 오라네」, 「거짓말 法」, 「무엇이 무서워 못 오시나요?」「금강산도 식후경이라네」 등이 그런 냄새를 짙게 풍기고 있는 것이다.

이 가운데 「무엇이 무서워 못 오시나요?」란 詩는 北의 金正日이 서울 答訪을 약속해 놓고 못 오는 것을 직격탄으로 조롱하고 있어 흥미롭다. 해인사와 송광사 중이 쌍방의 큰 솥과 높은 측간을 구경하러 가다 중간에서 만나 나눈 우스갯소리를 먼저 소개하고, 그가 이를 빗대, 이어 쓴 詩는 다음과 같이 매듭지어져 있다.

<…먼저 피양에 간 서울 나라님/ 융숭한 대접받고 돌아오며/ 「서울 答訪」을 꼭 꼭 약속 받아 왔겄다// 헌데/ 아직도 못 오는 이유가 뭐여?/ 못 올 수밖에 없지/ 왜?// 서울엔/ 집집이 核가족이요/ 먹였다 하면 칼국수인데/ 목이 열이래두 못 오지// 술집마다/ 폭탄주를 준비하고/ 뒷골목 골목에/ 대포 집이 포진하고/ 거리마다 총알택시가 달린다니/ 아! 피양동무 목이 열이래두 못 오지>

―「민담시집」에 대해 다소 오해가 있었던 것 같군. 한국 현대시에 대한 현황과 전망을 들려 주십시오.

『현대시가 난해하게 된 원인에는 복잡해진 과학문명 탓이 많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국가 간에 벌어지는 문명의 혜택은 인간 삶의 질에도 큰 차이가 나게 한 것 아닙니까? 생존의 조건에서 가치관 역시 다원화됨으로써 복잡한 의식을 가진 시인의 시적 표상에도 한계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고 봅니다. 자기 도그마에 빠진 시인 의식과, 詩의 특성이라 할 압축, 비약의 한계가 결국 詩를 더욱 난해하게 만든 것이지요. 이 문제는 시인과 독자, 나아가서 비평가들이 노력하면 해소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한국 현대시의 문제점은 한국어의 활용에 있다고 봅니다. 뜻글자인 한자어와 소리글자인 한글을 혼합해서 쓸 때 그 두 가지 언어의 특성을 합해서 활용함으로써 창조적 상상력이나 언어구조가 한 가지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보다 월등한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을 것입니다.

광복 이후 우리 언어에서 한자어가 점점 사라졌습니다. 대신 번역문 투가 모든 읽을거리를 잠식했습니다. 근자엔 인터넷상으로 횡행하는 언어들, 예를 들면 채팅을 하면서 주고받는 비속어랄까, 약식의 말들 있지 않습니까? 「당연하다」는 것을 「당근이지」 한다던가 심지어는 웃음을 표현하면서 말 같지도 않는 「ㅋㅋㅋ」 하고 말예요. 10代들의 인터넷 언어는 대부분이 그런 것 같아요. 공중파 TV의 드라마까지도 언어정화는커녕 비속언어 확산에 가세를 하고 있어요. 우리말을 엄청나게 훼손시키는 한심한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당장이라도 초등학교에서부터 대학 교육과정에 이르기까지 국어에 대한 확고한 정책 목표가 세워지지 않으면 우리말과 글은 곧 국적불명의 것이 될 것이 자명합니다.

우리 시인들이 이런 문제를 극복해 가는 데 선구자적 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소리글과 뜻글의 조화로 한국어의 불확실한 의미나 구문을 수정해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젊은 시인들이 무작정 어렵게만, 그리고 우리말 같지 않은 언어로 장황하게 詩를 쓰는 것은 오히려 모국어를 훼손시키는 행위라고 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