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人의 詩人 탐험(18) - 李秀翼의 에로틱한 모험 : 월간조선

고려大 교수인 吳鐸藩(오탁번) 시인은 어느 글에서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유일한 詩人」으로 李秀翼(이수익·61) 시인을 꼽은 적이 있다. 그 이유로 李秀翼의 詩가 한국현대시사의 중심문맥인 金素月(김소월)과 鄭芝溶(정지용)의 양 날개를 거치면서 知的 서정의 절제를 실현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1990년대에 들어서부터 李秀翼詩에 대한 또 하나의 평가로, 우수와 슬픔을 수반한 에로티시즘 추구에 두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완벽한 서정시를 써왔던 그에게 있어서는 좀 엉뚱한 지적이랄 수도 있다.

詩에 있어서 에로티시즘이라니, 마치 싸구려 연애감정이나 섹스 詩를 연상할 수도 있겠지만 李秀翼의 경우는 사물의 근원적인 관계로서의, 생명력이 가득 찬 노래로서의 에로티시즘이다.

한때 술좌석에서 술이 거나해지면 金鍾海(김종해) 시인이 감흥에 젖어 스테레오 조로 읊조리는 李秀翼의 詩 구절 두 개가 있었다. <부딪쳐라 술잔이여, 한때는 우리들도/은빛 살로 날으던 새를 쏘지 않았던가>와, <숨겨둔 情婦 하나/있으면 좋겠다>가 그것인데, 전자는 「술집에서」란 제목의 詩에 나오는 말이고 후자는 「그리운 악마」란 詩의 초두에 있는 말이다.

「숨겨둔 情婦…」 운운에 이르면 우리 모두 좌석의 한 구석에 말없이 앉아 있는 李秀翼 시인을 돌아보게 되는데, 이 「탐욕스러운 표현」의 주인공인 그는 그러나 이때마다 소리 안 나게 씩 웃고 만다.

李秀翼의 트레이드 마크는 까맣게 물들인 머리칼과 거의 언제나 검정에 가까운 정장 차림의 단아한 자세다. 아무리 시끄러운 곳에서도 그의 주변은 조용하다. 누군가 그를 호명하고 이야기를 청하지 않으면 좀체 입을 열지 않는 과묵함이 몸에 배어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가 입을 열면 상당히 논리적이고 깊이 있는 말이 길게 나오기도 한다.

굵은 바리톤의 목소리를 갖고 있어, 노래 부르는 자리가 되면 왕년의 명가수 南一海(남일해)의 「빨간 구두 아가씨」를 남일해 뺨 칠 지경으로 뽑아대지만, 노래할 때도 노래가 끝나고서도, 노래의 피안에 있는 사람 같은 표정을 하던 것이 또한 李秀翼 시인이다.

이런 李秀翼으로선 파격적 발상 같은 「그리운 악마」란 詩를 일단 읽어보자. 50代 후반에 쓴 그의 에로티즘 詩의 대표작 중 하나다. 중년에 든 남녀의 내면에 잠재해 있는 어떤 성적욕구를 건드려 큰 반응을 얻은 詩다.

<숨겨둔 情婦 하나/있으면 좋겠다./몰래 나 혼자 찾아드는/외진 골목길 끝, 그 집/불 밝은 窓門/그리고 우리 둘 사이/숨막히는 暗號 하나 가졌으면 좋겠다.//아무도 눈치 못 챌/비밀 사랑,/둘만이 나눠 마시는 죄의 달디 단/祝杯 끝에/싱그러운 젊은 심장의 피가 뛴다면!//찾아가는 발길의 고통스런 기쁨이/만나면 곧 헤어져야 할 아픔으로/끝내 우리 침묵해야 할지라도,//숨겨둔 情婦 하나/있으면 좋겠다./머언 기다림이 하루 종일 전류처럼 흘러/끝없이 나를 충전시키는 여자,/그/악마 같은 여자.>

그에게 제일 궁금했던 것은 이 詩를 발표하고 나서 그의 부인과 아이들의 반응이 어땠었느냐는 것이었다. 나의 어리석은 물음에 그가 씩 웃으며 말했다.

『아이들은 재미있다 하고, 집사람은 뭐 그런 걸 다 詩에 썼느냐고 하더군요. 한번 발표된 걸 또 어쩝니까? 내가 情婦나 숨겨 두고 다니고 싶은 사람이 아니란 걸 누구보다 집사람이 잘 아니까 그 정도로 참아주는 것 같았습니다. 지금도 여럿이 모인 자리에서 남들이 그 詩 이야기를 하면 집사람은 곤혹스런 표정을 지으며 자리를 피하곤 합디다』

회갑을 맞은 지난해 그는 「불과 얼음의 콘서트」란 詩 선집을 냈다. 40년 동안 써온 시집 여덟 권 「우울한 샹송」, 「夜間列車」, 「슬픔의 核」, 「단순한 기쁨」, 「그리고 너를 위하여」, 「아득한 봄」, 「푸른 추억의 빵」, 「눈부신 마음으로 사랑했던」 등에서 自選(자선)한 65편의 대표작이 이 선집에 실려 있다.

詩 선집의 自序에서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詩作(시작)에 대한 이야기를 이렇게 밝혀두고 있다.

<내가 삶과 사물을 바라보는 마음에는 그 존재의 속성 중에는 뜨겁고 치열하고 극단적인 면을 탐색하여 이를 형상화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 나의 유미주의적 시작 관점이 관련되는 부분이다. 그러나 실제로 이를 작품으로 표현하고자 할 때는 신중하고 차갑고 절제된 자세를 견지하고자 한다. 이렇듯 상반된 에너지와 정서가 상호 대립하고 조화를 모색해 가는 가운데 나의 詩는 만들어진다>

『KBS 라디오의 원로PD 출신』

서울 서대문구 북가좌2동 삼호아파트 102동 1206호. 李秀翼 시인이 사는 집이다. 오래된 주택가 언덕배기에 헌집들을 헐고 다섯 동의 흰 고층 아파트가 벽에 그림을 붙이고 웅기중기 서 있다. 녹번동 삼거리에서 북가좌동 가는 205번 버스를 타고 20여 분, 골목길 같은 2차선 도로를 꼬불꼬불 따라가다 모래네 시장 쪽으로 꺾어지는가 싶더니 왼편에 아파트촌이 불쑥 나타난다. 아름다운 감성의 詩人이 사는 동네치고는 좀 황당한 풍경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버스를 내려 아파트 입구를 찾아 올라갔다.

오후 2시까지는 도착하겠다고 미리 전화를 해두었지만 그의 문 앞에 섰을 땐 30분이나 늦어 있었다. 부인 金美愛(김미애·54)씨와 둘이서 나를 맞아 주었다. 이 부부는 더욱 창백하게 여위어 있었다. 키가 훌쩍 크고 말수가 적은 부인이 수줍게 인사를 하고는 얼른 부엌으로 들어갔다. 3년에 가까운 연애 끝에 1971년 결혼한 이들 부부는 32년 동안 1남1녀를 두고 키워왔다. 3년 전에 딸 世京이 출가했으며, 서울사대 독어과를 나온 장남 宜城은 직장에 다니면서 42평짜리 이 아파트에 부모와 함께 기거하고 있는 것이다.

―얼굴색이 말이 아니네? 어디 아픈 데 있는 거 아니오?

『위가 안 좋아요. 며칠 전 큰집에 가서 제사 지내고 음식 먹은 게 영 소화도 안 되고 속이 거북했어요. 내 아버님이 위암으로 예순다섯인가 돌아가셨습니다. 나도 그 나이에 근접해 가니, 괜히 겁이 나더라고요. 그래서 집 근처 내과병원에 가서 내시경 검사를 해 두었어요. 어떤 결과가 나올지 걱정입니다』

(일주일 후 다시 그의 집을 찾아 맨 먼저 내시경 검사 결과부터 물었더니 밝은 표정으로 『헬리코바트라고 하던가 그런 세균이 있다는 건데, 종양과는 관계가 없고…. 생겼다가 없어지고, 재발하기도 하는 그런 것이랍디다』고 말했다)

안경 뒤의 얼굴은 창백하다 못해 누렇게 바랜 것 같았다. 눈썹이 한 오라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 새까맣게 물들인 머리 밑으로 새 흰머리가 무성하게 돋아 나오는 것이 조금 보였다.

―KBS를 그만둔 것이 지난 2월이었던가 그렇죠? 「백수」가 되고 나니까 시간이 정말 잘 안 가는 것 같지요?

『아니 1월이었어요. 요즈음은 어느 정도 규칙적인 생활은 하고 있습니다. 월요일엔 경기도 화성에 있는 협성대학교에서, 수요일엔 고려大 사회과학원에서 詩 창작 강의를 세 시간씩 합니다. 강의료는 얼마 되지 않지만 학생들에게 詩를 강의하는 재미가 있고 나름으로 보람도 느껴요. 詩에 대한 이론도 새삼스럽게 가다듬을 수 있고…』

―당신은 다니던 회사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던데, 도대체 방송국에서 무엇을 맡고 있었어요?

『부산 MBC에 있을 때도 교양물 생활정보를 맡아 진행했고, 1981년 KBS로 올라와 정년퇴직할 때까지도 주로 그런 일을 해왔는데, 직책은 라디오정보센터주간, 라디오편성주간, TV편성주간, 제2라디오국장이었지요. 그러니까 KBS 라디오 PD로 있다 나온 셈입니다』

40년 넘게 詩 하나만 열심히 써와

―196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했 는데 당시 서울신문엔 당선작이 2개였죠? 다른 당선자는 누구였어요?

『張潤宇(장윤우)씨였어요. 응모 때의 그의 필명이 木薰이 아니었나 싶은데, 발표된 그의 두 편의 詩가 모두 길고 멋이 있었어요. 사실 난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먼저 詩를 보내 놓고 있었는데 서울신문 모집광고를 보니 응모하고 싶은 욕심이 생깁디다. 상금도 동아에 비해 2만원이 많은 5만원이었고요. 한데 서울신문에선 응모 詩를 다섯 편 이상 요구합디다. 하루 만에 다섯 편을 벼락치기로 써서 마감 직전 신문사 문화부에 직접 들고 가서 접수시켰지요.

詩 당선자가 둘이 된 건 아마 심사위원이었던 徐廷柱(서정주)씨와 朴南秀(박남수)씨가 팽팽히 맞섰기 때문인 것 같았어요. 남수 선생은 나를 밀었고, 未堂(미당)은 장윤우씨를 밀었겠지요. 그때부터 나는 남수 선생의 총애를 받기 시작했고, 現代詩 동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서울師大 영어과 다닐 때였겠군요. 金光協(김광협) 시인하고 金源浩(김원호) 시인이 師大에 같이 다녔고, 셋이 비슷한 시기에 문단에 나온 것 아닙니까? 동급생 사이였잖아요?

『그들이 한 해 선배였고 科도 그 둘은 국어과였어요. 김원호는 1962년에, 김광협은 1965년 동아일보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했고, 나는 2학년 때인 1963년에 서울신문으로 데뷔한 겁니다.

입학해서 사대문학회가 구성돼 있다기에 본격적인 문학 수업을 하고 싶어 동참했지요. 이 두 사람 외에 지금은 사업을 하는 유학영, 정준섭이 들어와 우리는 「師大文學」이란 정기간행물도 만드는 등 열심히 문학활동을 했지요』

―부산사범 병설중학, 부산사범, 서울사대 등 줄곧 사범 계열 학교를 다녔는데, 그러나 정작 졸업하고선 교단에 선 적이 없었던 것 같던데?

『아니, 잠깐 교단에 선 적이 있어요. 師大 졸업하고 군대 가기 직전에 충북 진천군의 진천중학에서 한 학기 동안 영어를 가르쳤습니다』

그의 詩에는 아버지에 관한 내용이 더러 눈에 뜨인다. 65세에 타계한 그의 아버지는 그러니까 李秀翼의 인생에서 많은 영향력을 끼쳤던 사람이다. 가난하게 살면서도 꿋꿋하게, 작은 일이지만 늘 남을 위해 부지런히 일한 소시민이라고, 그가 지금도 믿고 있기 때문이다.

가난한 집안의 둘째 아들

李秀翼의 고향인 경남 함안군 여항면은 산골. 함안군에서도 가장 벽촌으로 알려진 곳이다. 거기서 면서기 일을 하던 아버지는 아이들 공부를 위해 부산으로 나온다. 중구 대청동 영주동 고갯길 아래쪽의 일가친척이 사는 적산가옥 2층 단칸방에 세를 얻어 입주한다. 李秀翼이 다섯 살 나던 때였다.

『부산에 온 아버지는 수상경찰로 근무하다 마침 지리산 빨치산 토벌작전에 차출돼 갔다 되돌아 온 것입니다. 총 쏘는 법도 제대로 익히지 못하고 싸움터에 휩쓸려 갔었는데 사람들이 죽어 가니 두려워서 사표를 내고 만 것이지요.

그리고는 6·25가 일어나자 부모님은 부산 같은 큰 도시가 먼저 폭격을 당할지 모른다며 형과 나를 함안으로 피란 보냈습니다. 내가 부산 남일초등학교 2학년 때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괴뢰군」이 낙동강을 건너 함안 쪽으로 넘어오는 바람에 형과 나는 도로 부산 친척집으로 피란을 왔었지요. 그때 한 고생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당시엔 일자리 구하기가 몹시 어려웠다고 하더군요. 아버지는 부두의 美 군수품 하역 반장을 하며 생활을 꾸려 나갔는데, 전쟁 직후라 매우 가난하게 생활했던 기억이 납니다. 나는 신문팔이도 나서 보았어요. 우리 집은 대청동 산 중턱에 겨우 집을 마련했고, 아버지는 말단공무원이 되어 가난하지만 조금은 안정된 생활을 이어갔던 것입니다. 대청동 동사무소의 사무장이 내 아버지의 마지막 직책이었지요.

어렸을 때 대청동의 그 2층 단칸방은 일본인이 쓰던 것이었어요. 누나를 함안 할아버지 댁에 맡겨두고 형과 나 여동생, 아버지 어머니 등 다섯 명이 그 방에 함께 머물었어요. 다다미방이라 겨울엔 엄청 춥더라고요. 잠을 자다 얼결에 아버지의 품속을 파고들어 가 있었던가 봐요. 아버지에 대해선 그 기억이 언제나 눈물겹게 되살아나곤 해서 詩로 쓴 적이 있어요』

어린 시절의 한 풍경

그의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쓴 詩「結氷의 아버지」는 가난하게 산 광복 전 세대의 어린 시절의 한 풍경이 아름답게 그려져 있다. 李秀翼이 가장 아끼는 詩라고 했다. 다음은 그 全文.

<어머님,/제 예닐곱 살 적 겨울은/목조 적산가옥 이층 다다미방의/벌거숭이 유리창 깨질 듯 울어대던 외풍 탓으로/한없이 추웠지요, 밤마다 나는 벌벌 떨면서/아버지 가랑이 사이로 발을 밀어 넣고/그 가슴팍에 벌레처럼 파고들어 얼굴을 묻은 채/겨우 잠이 들곤 했지요./요즈음도 추운 밤이면/곁에서 잠든 아이들 이불깃을 덮어주며/늘 그런 추억으로 마음이 아프고,/나를 품어 주던 그 가슴이 이제는 한 줌 뼛가루로 삭아/붉은 흙에 자취 없이 뒤섞여 있음을 생각하면/옛날처럼 나는 다시 아버지 곁에 눕고 싶습니다./그런데 어머님,/오늘은 영하의 한강교를 지나면서 문득/나를 품에 안고 추위를 막아 주던/예닐곱 살 적 그 겨울밤의 아버지가/이승의 물로 화신해 있음을 보았습니다./품 안에 부드럽고 여린 물살은 무사히 흘러/바다로 가라고,/꽝 꽝 얼어붙은 잔등으로 혹한을 막으며/하얗게 얼음으로 엎드려 있던 아버지,/아버지, 아버지…>

―초등학교나 중학 땐 공부를 잘했겠네? 부산사범 병설중학이나 사범학교 합격하기가 꽤 어려웠을 무렵이었으니까.

『그냥 반에서나 학년에서 상위그룹에 속해 있는 평범한 모범생이었지요. 부모님 말씀 잘 듣고, 학교 공부나 열심히 하는…. 키도 작고 연약해서 남을 이끌어 가는 역할은 못했습니다』

―詩는 중학 때부터 썼던가요? 내가 李秀翼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은 李형의 부산사범 한 해 선배인 文育子(문육자)를 통해서였는데…. 문육자와 나는 高3 때 합동시집도 냈었지요.

『병설중학에 다닐 때 처음 詩를 써서 국어를 맡고 있던 구필순이라고 하는 여선생님께 보여드렸더니 참 잘 썼다고 수업시간에 칭찬을 합디다. 그게 얼마나 큰 자극이 됐던지. 그때부터 나는 혼자 詩를 쓰기 시작했지요』

―고등학교 때도 그랬고 대학 시절에 특히 그랬을 텐데, 영향을 받았다거나 좋아했던 선배 詩人은 누구누구였습니까?

『중·고등학교 때는 특별히 누구의 詩를 특히 좋아했다거나 영향을 받은 일은 없어요. 굳이 들자면, 詩의 언어에 남다른 감각을 지닌 분이라고 생각되었던 朴木月(박목월) 서정주 詩人 정도라고 할까요. 대학에 들어가서 문학하는 친구들과 토론하고 그러면서 주로 많이 읽게 되고 좋아했던 것이 金春洙(김춘수) 全鳳健(전봉건) 金宗三(김종삼) 朴成龍(박성룡) 등 당시 언어를 중시하는 분들의 詩였습니다. 게다가 나는 영문학을 공부하고 있었으니까, 未堂(미당)이나 朴在森(박재삼) 등이 주로 시도했던 전통적인 가락엔 관심이 없었지요. 우리 친구들 사이에서도 그런 공통된 경향이 다분히 있었는데, 그건 서구적인 정서에의 추구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지금도 크게 달라진 것이 없지만』

그의 서재는 좀 색달랐다. 한쪽 벽에다 모든 책을 쌓아두었는데, 겉으로 보기엔 삼각형이었다. 아래쪽은 넓고, 위로 올라갈수록 좁아지는 형식이었다. 그러니까, 그가 필요로 하는 책들은 밖에서 쉽게 찾을 수 있도록 정리해 두고 당장 필요없는 것들은 뒤에 쌓아둔 것이다. 차곡차곡 쌓은 책더미는 천장까지 닿아 있었다. 책더미 가운데서 詩 창작에 관한 개론서 같은 것이 몇 권 눈에 띄었다. 그가 최근부터 하고 있는 대학 강의에 필요한 것일 게다.

서재의 한가운데에 작은 테이블을 놓고, 거기서 그는 글을 쓰는 것 같았다.

거실도 깨끗하게 정돈돼 있었는데 지저분한 것은 하나도 눈에 띄지 않았다. 화가 李滿益(이만익)의 낯익은 판화가 한 점 걸려 있는 것과 오래된 문짝과 고아한 전기 스탠드가 거실 분위기를 한결 깊게 가라앉게 하고 있었다.

『詩 쓰기는 사진사가 사진을 박듯』

―李형은 詩를 어떻게 씁니까?

『솔직히 말해서 어떤 확고한 패턴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내 나름의 시론을 정립해 두고 거기에 준해서 쓰지도 않고요. 굳이 무엇을, 왜 쓰느냐고 묻는다면 사물이나 현상의 내면에 존재하고 있는 비극적 속성을 우리의 삶에 비유해서 쓰려고 하고, 그런 존재의 아픔이 나와 독자에게 정서적 울림을 줄 수 있도록 쓰고자 해왔습니다. 사물을 보고, 혹은 책을 읽다가, 심지어는 TV드라마를 보다가도 심상이 떠오르면 詩로 씁니다. 당장에 안 쓴다고 해도 머리 속에 쌓아두었다가 나중에 되새김질을 해서 쓰기도 하지만.

제 詩 가운데 1970년대 초에 쓴 「寫眞師」란 詩가 있습니다. 그 詩는 내가 詩를 인식하는 방법 모두를 보여 주고 있다고 생각되어 여기 全文을 소개해 보겠습니다. 詩는 이렇습니다.

<처음엔 버릴 것부터/잘라가면서/나중에야 나무의 美學을 손질하는/園丁의/剪枝(전지)作業처럼.//시야에 비친 풍경 속에서 寫眞師는/먼저/버릴 것부터 생각한다.//버리고 버리고 버리다가/결코/버릴 수 없는,/그 一瞬交感을 영상에 담으면/나머지 공허한 虛像의 풍경들이/울음 우는/카메라의 저 바깥 外界>

사진사는 하나의 절묘한 순간을 카메라에 잡기 위해 그의 총체적인 영감과 지혜를 바친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사진사는 또 절묘한 순간 이외의 영상은 모두 간과해 버립니다. 이런 절묘한 순간에의 포착을 위해 문득 만나는 사물이나 간접적으로 만나는 일체를 나는 나의 내면 속에 캐치해 가고자 했습니다. 사진사가 화려한 축제의 전 장면 가운데 자신의 언어가 될 만한 장면에다 앵글을 맞추고 작품의 중심 주제를 파악해 가는 것과 같은 방식이 나의 詩 쓰는 방식이라 할까요』

―詩보다 설명이 어렵네. 쉽게 말해서 사물이나 사건을 보고 갖게 된 감동을 「사진사가 절묘한 순간을 캐치하듯」 표현한다는 이야기겠습니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나는 그런 감동을 행복한 만남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나는 정서적 울림을 받지 않는 사실에 대하여는 표현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전에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를 여행한 적이 있었는데 아주 아름다운 풍경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것들을 소재로 해서 詩 한 편도 쓰지 않았습니다. 감동이 없었고, 그냥 감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체국에 가면 잃어버린 사랑을 찾을 수 있을까

아마도 「詩人 이수익」의 대표작으로, 「우울한 샹송」을 꼽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이 詩는 그가 스물세 살 때 쓴 것으로, 1965년 정부에서 시상한 「신인예술상」詩 부문 수상작이기도 하다. 스스로 이 작품에 대해 애착이 많이 가서 첫 시집 제목을 이 詩로 했다.

정결하고 다감한 언어, 애잔한 서정과 폭넓은 상상력으로 인해 지금까지 클래식한 감동을 주는 詩「우울한 샹송」을 읽어보자. 소리내 읽어보면 우체국이라는 장소를 소재로 삼은 이별의 아픔과, 사랑에의 그리움이 감미로운 샹송처럼 들려 올 것이다.

<우체국에 가면/잃어버린 사랑을 찾을 수 있을까/그곳에서 발견한 내 사랑의/풀잎 되어 젖어 있는/비애를/지금은 혼미하여 내가 찾는다면/사랑은 또 처음의 의상으로/돌아올까//우체국에 오는 사람들은 가슴에 꽃을 달고 오는데/그 꽃들은 바람에/얼굴이 터져 웃고 있는데/어쩌면 나도 웃고 싶은 것일까/얼굴을 다치면서라도/소리내어/나도 웃고 싶은 것일까//사람들은/그리움을 가득 담은 편지 위에/애정의 핀을 꽂고 돌아들 간다/그때 머리 위에서는/꽃불처럼/밝은 빛이 잠시/어리는데/그것은 저려오는 내 발등 위에/행복에 찬 글씨를 써서 보이는데/나는 자꾸만 어두워져서/읽질 못하고,//우체국에 가면/잃어버린 사랑을 찾을 수 있을까/그곳에서 발견한 내 사랑의/기진한 발걸음이 다시/도어를 노크/하면,/그때 나는 어떤 미소를 띠어/돌아온 사랑을 맞이할까>

『내 마음에 드는 나의 詩는「廢家」』

―자신의 대표작으로 「우울한 샹송」은 들고 싶지 않다고 한 걸 어디서 읽은 기억이 납니다. 이제 회갑을 넘긴 나이에 들어 생각나는 대표작을 한 편 든다면 어느 것입니까?

『어느 詩人에게도 자신의 유일무이하다 싶은 대표작을 내세운다는 건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본인이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간에 작품 쓰기의 모양새는 조금씩 변하게 마련인데, 그런 변화의 전체가 뭉뚱그려져서 詩人의 한 생애가 그려진다고 나는 봅니다.

대표작 운운하는 건 건방지고, 그래서 나는 그 글에서 차라리 「내 마음에 드는 나의 詩」로 몇 편을 꼽았던 것입니다. 「말」, 「폐가」, 「다시 보는 나무」 등 세 편이 가장 마음에 드는 詩들인데, 방법론에서 마음에 드는 것으로 「폐가」를 들고 싶어요. 이 詩는 썩어 문드러져 가는 한 채의 山幕(산막)을 향기로운 술로 발효되는 정경으로 상정해서 쓴 것인데, 詩가 발표되고 나서 金宗吉(김종길) 선생께서 전화를 해주셨습니다. 詩가 아주 좋다고, 그렇지만 마지막의 띄어 쓴 한 구절이 차라리 없었더라면 더 함축적일 텐데 하고 말이지요. 나로선 그 구절이 있으므로 해서 폐가의 모습을 더욱 잘 드러낼 것으로 보았습니다만』

李秀翼이 가장 사랑하는 詩, 혹은 좋은 詩로 내세우는 「廢家」는 다음과 같다. 그의 詩로선 짧은 편에 속한다.

<빈 山幕엔/능구렁이처럼 살찐 고요가/땅바닥에 배를 깔고 숨을 몰아쉬고 있다./흙담이 무너져내려 썩고, 나무기둥이며 문살이/오랜 비바람에 썩고 썩어/향기로운 부식의 냄새를 피워 올리는,/이 버려진 山幕 하나가 고스란히 해묵은 포도주처럼/맑은 달빛과 바람소리와 이슬을 먹고 발효하는/深山의 특산품인 것을.//神이 가끔 그 속을 들여다보신다>

―「숨겨둔 情婦 하나…」로 시작되는 「그리운 악마」에서 李秀翼詩의 에로티즘 요소가 좀 극단적으로 표현되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30代 중반에 쓴 「야간열차」란 詩에서 이미 에로티즘 적 요소가 확연하게 드러나 있더군요. 「풀어헤친 들판의 裸身을 뚫고」 달리는 밤 열차의 기적 소리를 오르가슴의 신음소리로 표현한 것이 그렇습니다. 李형은 詩를 쓰면서 에로틱한 것을 의식하거나 의도적으로 쓴 적이 있습니까?

『나는 작품을 쓸 때 일정한 주제를 염두에 두고 쓰지는 않습니다. 우연히 대상과 만났을 때 그 대상이 뿜어내는 詩的 이미지가 우리의 삶의 모습과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살펴봅니다. 내 작품 속에 보이는 에로티시즘의 詩들도 그렇습니다. 사물이나 현상이 지니고 있는 속성 중에서 가장 선명한 이미지로 나와 연결된 부분이 바로 에로티시즘이었기 때문입니다. 「야간열차」란 詩가 그런 것이 아닌가 합니다. 밤 열차를 타고 들판을 여행하는 느낌은 詩人마다 다를 수도 있겠습니다만, 내게 있어선 들판과 기차의 만남이 주는 이미지를 에로티시즘으로 표현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고 느껴졌던 것입니다』

―남들이 李秀翼은 에로티시즘 詩人이라고 주장한다면?

『나의 생각과는 다르지만, 그렇다고 아니라고 반박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2000년대 들어 시집이 통 팔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젠 詩에서 사람들이 감동이나 위안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보는데 어떻습니까?

『골치 아프게 책이나 읽으며 생각하기보다는 놀이의 즉흥성에 쉽게 빠지고 있지요. 책 읽기 중에서도 소설이나 수필보다 더 어려운 詩는 점점 독자들로부터 외면을 받게 됐고요. 더군다나 詩도 옛날에 비해서 너무 난해하고 딱딱해져서 독자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詩로서 덜 된, 미숙아 같은 詩가 오히려 사랑을 받는 기형적인 현상도 나타나더군요. 詩의 본질은 언어의 절제며 정서라고 생각하는데, 한국 詩는 詩의 본질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그와 헤어져 언덕을 내려오면서 나는 우리의 선배며 친구인 「부산의 金圭泰(김규태)-許萬夏(허만하) 시인에게」란 부제가 붙은 李秀翼의 詩「그리움에 起立하다」를 새삼 되새겨 보았다. 읽을수록 이 단아한 詩人의 그리움, 혹은 삶을 인식하는 속내가 깊이 울려오기 때문이다.

<내 몸의 일부는 당신의 것이다/당신과 함께 나눈 음식,/내 영혼의 일부는 당신의 것이다/당신과 함께 나눈 對話,//당신은 달처럼/나도 달처럼//멀리 떨어져서 더욱 환히 보이는/생각,/푸른 추억의 빵 하얀 스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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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人의 詩人 탐험(18) - 李秀翼의 에로틱한 모험

『숨겨둔 情婦 하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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