軍 원로들의 우려
『북한의 미사일·핵·對南정책 등이 검증되지 않은 상태에서 主敵論을 삭제 또는 수정하면 향후 장관의 軍 통솔력을 잃게 될 것입니다. 기존 방침을 고수해 주길 바랍니다』(白善燁 前 육군참모총장)
『북한이 적화를 포기하고 긴장완화 조치가 없는 한 主敵論을 지켜가야 할 것입니다』(金聖恩 前 국방장관)
『북한의 「主敵 삭제」 주장은 南南갈등을 야기하고 국군 장병들의 사기를 저하시키려는 획책입니다. 장관과 각군 총장은 「主敵論」에서 밀리면 지휘권을 상실할 수도 있으므로 절대로 삭제 또는 대체해서는 안 됩니다』(李相薰 재향군인회장)
『林東源(임동원) 특보가 북한의 압력을 받고 軍 당국에 삭제를 종용한다면 이는 우리 軍이 북한의 지시를 받고 움직이는 꼴이 됩니다. 국방부는 결코 低자세가 돼서는 안 되며 국민과 국군의 사기를 고려, 의연하게 대처해야 할 것입니다』(孔正植 前 해병대사령관)
지난 5월6일 오전 국방부 장관 접견실. 육해공군 및 해병대 예비역 장성들의 모임인 성우회 간부들이 金東信(김동신) 국방장관을 만나 국방백서상의 主敵개념 표현 삭제문제에 대해 일제히 우려를 표명했다. 이들은 이날 主敵 표현의 삭제 또는 변경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입장을 국방부에 강력히 전달하기 위해 金장관을 면담했다.
시종 긴장된 표정으로 듣고 있던 金장관은 삭제 및 변경 여부에 대해선 구체적인 언급을 피한 채 『원로 선배님들의 충정 어린 충고와 자문을 깊이 받아들여 국민과 선배들께 실망시켜드리지 않겠다』고 밝혔다. 성우회 관계자는 金장관의 이같은 발언에 대해 『국방부가 고민을 많이 하고 있지만 主敵개념 표현을 고수하겠다는 입장표명으로 받아들여졌다』고 말했다.
이로부터 2주일여가 지난 5월24일 국방부는 돌연 국방백서 발간 연기를 발표했다. 국방부는 지난해 11월 예산절감 등을 이유로 「2001년도 국방백서」 발간을 금년 5월로 연기한다고 발표한 뒤 국회 국방위 답변 등을 통해 5월 말 백서 발간을 공언해 오던 터였다.
黃義敦(황의돈) 국방부 대변인은 발간연기를 발표하면서 언제 다시 발간하겠다는 것을 못박지 않아 사실상 다음 정권으로 발간을 무기연기할 것임을 강력히 시사했다. 黃대변인이 밝힌 공식적인 연기 이유는 두 가지였다.
▲우선 금년은 국민의 정부를 마감하는 해로서 그동안의 국방업무 실적을 종합적으로 평가하고 결산하는 형태로 발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했고 ▲국방백서 발간의 주요 목적은 국민들에게 국방정책과 추진현황을 소상하게 제공해 국민적 안보공감대를 형성하는 데 있으나 백서의 「특정 표현」과 관련해 다양한 의견이 표출되고 있다는 점도 유의했다는 것이다.
국방부의 궁색한 명분
국방부 고위 관계자는 부연 설명을 통해 『主敵 表記 유지 또는 변경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된 상황에서 어느 방안을 선택하더라도 문제가 있으므로 국론분열을 자초하기보다는 백서 발간을 연기하는 것이 국가적으로 도움이 된다는 국방부 자체 판단에 따른 것』이라고 밝혔다. 백서 발간 연기가 主敵 표현 논란에 따른 고육지책임을 시인한 셈이다.
국방부는 그러나 발간 연기와 主敵 표현 논란이 연관지어지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모습을 보였다. 국방부는 당초 대변인이 아닌 국방부 고위 당국자가 직접 발표하고 主敵을 명시하지 않은 세계 각국 사례를 참고자료로 배포할 예정이었으나 자료를 일절 배포하지 않고 대변인이 말로 설명하는 것으로 끝냈던 것. 이는 主敵 문제가 부각되지 않도록 각별히 유의하라는 청와대의 강력한 지시에 따른 것으로 알려졌다.
이로 인해 발간 연기 배경도 主敵 표현 논란 대신 「국민의 정부 국방업무 실적 평가서 발간」이 부각됐다. 그러나 국방부의 발표과정을 보면 이 명분이 얼마나 궁색한 것인가를 알 수 있다.
국방부는 공식발표 이틀 전인 5월22일 백서 발간 연기와 관련, 24일 오후까지 엠바고(보도자제)를 국방부 출입 기자단에 요청했다. 이유는 23일 오후 국가안보회의(NSC) 상임위에서 연기문제가 결정되는데 사전에 보도될 경우 소모적인 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
당시 엠바고를 요청하면서 국방부 관계자는 『백서상의 主敵 표기문제와 관련해 다양한 의견이 표출되고, 主敵 표기에 대한 찬반 양론으로 국론을 분열시키고 있다는 판단에 따라 무기한 연기키로 했다』고 발간 연기 이유를 설명했다. 이틀 뒤 주된 이유로 부각됐던 「국민의 정부 국방업무 실적 평가서 발간」은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국방부 주변에선 청와대와 국방부가 主敵 표현 논란이 부각될 것을 우려, 부랴부랴 새로운 명분을 만들었다는 관측이 설득력 있게 제기되고 있다.
이번 백서 발간 연기 결정엔 우여곡절이 많았다. 主敵 표현 고수·표현 삭제 또는 변경·고수·발간 연기 과정을 밟는 등 고수와 삭제(변경) 사이를 몇 차례나 왔다갔다 했기 때문이다.
국방부 관계자들이 『백서상 主敵 표현 문제는 지난 1년여 동안 국방부를 가장 「괴롭힌」 사안』이라고 토로할 정도로 국방부는 이 문제로 골머리를 앓아 왔다. 북한이 남북 頂上회담 이후 「主敵인 북한」이라는 백서상의 표현을 문제삼아 『6·15 공동선언에 대한 노골적인 배신행위』라며 기회 있을 때마다 삭제를 요구해 왔고, 지난해 2월 합의된 남북 군사보장 합의서 서명 교환도 이 문제를 내세워 미뤄왔기 때문이다.
정부 일각에서도 남북 화해분위기 조성을 위해 표현을 삭제하거나 바꿔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정부 內에선 특히 林東源 청와대 외교안보통일 특보 등 對北 화해협력 정책 추진파가 主敵 표현 삭제 또는 변경을 국방부에 종용해 온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林특보 측은 이를 강력히 부인하고 있다.
표현 변경 및 삭제 문제를 고심하던 국방부는 지난해 11월 2001년도 국방백서 발간 연기를 발표했다. 표면상 이유는 『국방업무의 효율성과 백서 발간의 세계적 추세 등을 고려해 격년제 발간으로 조정했고 對테러 전쟁 등 안보상황이 유동적이어서 5월중 발간키로 했다』는 것이었다. 主敵 표현 논란 문제는 단 한마디도 언급되지 않았으나 당국자들은 非공식적으로 이 문제가 연기의 주된 배경이었음을 부인하지 않았다. 당시 국방부는 백서 인쇄준비까지 마쳤으나 막판에 연기를 결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와 국방부의 입장 차이
금년 들어서도 지난 4월 초 林東源 특보가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북한을 방문했을 때 북한 측이 主敵 표현 문제를 다시 강력히 제기하고, 정부 일각에서도 主敵 표현이 경의선 연내 연결 등 남북관계 진전의 장애물이 된다며 삭제 또는 수정을 국방부에 요구, 국방부는 다시 적극적인 삭제 또는 변경 검토작업에 들어갔다.
4월 말 이 내용이 언론에 보도되자 국방부는 공식적으로 『主敵 표현에 대한 삭제 또는 대체를 검토한 바 없다』고 부인했으나 당국자들은 非공식적으로 『국방부는 삭제 또는 변경에 반대하는 입장이지만 변경이 불가피할 경우 다른 표현으로 완화하는 방안을 검토중』이라고 말했다.
국방부는 主敵 표현을 바꿀 경우 「主敵」이라는 표현이 처음 사용된 1995년 국방백서 이전의 「敵」이란 표현이나 「외부의 침략」, 「안보위협 세력」 등 우회적인 표현을 사용하는 방안을 검토했다.
그러나 언론에 보도된 뒤 보수층과 야당 등에서 크게 반발하자 국방부는 현재 표현을 고수키로 하고 백서 발간 준비를 마무리했다. 이에 대해 청와대 측에선 국방부가 언론 플레이를 해 主敵 표현을 고수하려 한 것이 아니냐며 의혹의 시선을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발간 연기」가 국방부로서는 최선?
당시 국방부 고위관계자들은 사석에서 『국방부로선 (主敵 표현을) 바꾸지 않는 것이 최선이다. 주요 언론에서도 사설을 통해 그런 것이 바람직하다고 방향을 잡아주지 않았느냐』고 반문했다. 국방부의 한 장성은 『세계적으로 자국의 主敵을 공개적으로 명시한 나라는 없기 때문에 삭제할 필요가 있다』며 『그러나 現 정권下에서 그럴 경우 국론분열 등 부작용이 클 것이기 때문에 바람직하지 않으며 다음 정권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지난 5월7일 북한의 불참으로 남북 경제협력추진위원회 제2차 회의가 무산된 데 이어 5월15일 조선중앙통신이 主敵 표현 삭제를 공개적으로 요구하고 나서면서 분위기가 다시 달라졌다. 主敵 표현이 바뀌지 않을 경우, 남북관계에 냉기류가 거세질 것이라는 정부 일각의 목소리가 커진 것.
안팎의 「압박」에 시달리던 국방부는 결국 제3의 방안, 즉 우선순위에서 뒤에 밀려 있던 「발간 연기」를 택했다. 국방부로선 金장관의 국회 국방위 답변 등 그동안의 「공언」을 뒤집는 것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비판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별로 내키지 않는 선택이었다.
한 고위 소식통은 『여론과 정권 핵심부의 의중을 모두 의식할 수밖에 없는 국방부로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며 『現 상황에서 표현을 삭제 또는 변경하지 않고 버틴 것만 해도 그나마 다행』이라고 주장했다. 정부 일각으로부터의 압력이 대단했음을 강력히 시사하는 대목이다.
한나라당 金容甲(김용갑) 의원 등 「바른 통일과 튼튼한 안보를 생각하는 국회의원 모임」은 성명을 통해 『국민 앞에 약속했던 국방백서 발간계획을 즉각 정상화시키라』고 촉구했다. 재향군인회는 성명을 통해 『現 국방백서에 표현된 主敵論이 계속 유지될 수 있도록 조치한 국방부 결정을 환영한다』며 『국방백서 발간을 기대했으나 對北정책 추진 논리에 밀려 차선 방책을 채택한 데 대해 아쉬움이 없지 않다』고 밝혔다.
김판태 민족화해자주통일협의회 투쟁국장은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사회단체를 비롯해 많은 국민이 主敵 개념을 철회하는 것이 민족과 한반도 평화, 그리고 통일을 위해서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며 『국방부가 이런 국민의 바람을 외면하고 보수세력의 눈치만 살핀다면 보신주의라는 비판을 면할 수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홍만희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조직국장도 역시 연합뉴스 인터뷰에서 『월드컵, 6·13 지자체 선거, 大選 등 주요 일정이 목전에 다가와 있는 만큼 主敵 개념이 들어 있는 백서 발간을 연기한 것은 특히 남북간 화해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좋은 결정이라고 생각한다』고 환영했다.
몇 년째 계속되고 있는 主敵 논란에 대해 전문가들은 많은 사람들이 혼동하고 있는 부분이 있으며 主敵 표현에 대한 역사적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우선 「主敵개념」과 「主敵개념 표현」을 같은 것으로 혼동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 백서상의 「主敵인 북한」이라는 것은 표현일 뿐 主敵개념 자체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 표현을 빼더라도 북한을 主敵으로 하는 軍의 작전개념이라든지, 정신교육 내용 등은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主敵 표현 삭제 또는 변경은 장병들의 對敵의지 약화 초래』
국방부 관계자는 『표현을 삭제하는 것을 主敵개념 자체를 바꾸는 것으로 잘못 알고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며 『主敵개념 자체를 바꾼다면 정말 심각한 문제이겠지만 그럴 계획이 전혀 없고 현실적으로 그렇게 할 수도 없다』고 주장했다.
반면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그동안 북한 측이 主敵 표현 삭제 또는 변경을 요구해 왔다는 점에서 삭제 또는 변경은 북측의 요구에 굴복한 것으로 비춰져 결과적으로 장병들의 對敵(대적)의지가 약해지는 등 主敵개념의 약화를 초래할 것이며, 정치적으로도 표현 이상의 의미를 갖는 중대한 사안이 됐다는 것이다.
몇몇 중앙일간지에서 최근 인터넷 여론조사를 한 결과 찬반 양론이 맞서고 있는데 主敵 개념 자체에 대해 질문한 경우와, 主敵 표현에 대해 질문한 경우 상이한 반응을 보였다.
J일보가 지난 4월29일~5월2일 인터넷을 통해 主敵論 삭제에 대한 의견을 물은 결과 「찬성 6112명(35%), 반대 1만1209명(63%), 모름 391명(2%)」으로, H일보가 5월24일~6월7일 대한민국의 主敵은 북한이라는 입장에 대한 견해를 물은 결과 「반드시 유지 5457명(43%), 완전철폐 3449명(27%), 신중히 사용 3542명(28%)」으로 각각 나타났다.
반면 H신문이 지난 4월30일~5월3일 『북한을 主敵으로 규정하는 대신 「敵」 또는 「안보위협」 등의 포괄적 용어로 바꾸자는 주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인터넷 여론조사를 한 결과 「찬성 4216명(85%), 반대 745명(15%)」로 나타났다.
백서상 主敵 표현이 문제가 된 경우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金泳三(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4~95년에도 한바탕 큰 홍역을 치렀다. 1994년 3월10일 국방부는 군사력 건설 및 보유의 목표를 규정한 국방목표를 개정했다. 종전엔 「敵의 무력침공으로부터 국가를 보위하고 평화통일을 뒷받침하며 지역적인 안정과 평화에 기여한다」는 것에서 「외부의 군사적 위협과 침략으로부터 국가를 보위하고 평화통일을 뒷받침하며 지역의 안정과 평화에 기여한다」로 바뀐 것. 즉 「敵의 무력침공」이 「외부의 군사적 위협과 침략」으로 변경됐던 것이다.
이에 대해 북한을 主敵으로 하는 主敵 개념이 일본 등 주변국을 主敵으로 상정하는 것으로 바뀐 것 아닌가 하는 의문들이 제기됐다. 더구나 1주일여 뒤인 1994년 3월19일 남북 특사교환을 위한 판문점 실무접촉에서 큰 파장을 일으킨 「서울 불바다」 발언이 나왔다. 접촉 도중 북측 박영수 단장이 남측 宋榮大(송영대) 수석대표를 향해 『대화에는 대화, 전쟁에는 전쟁으로 대응할 준비가 돼있다』며 『전쟁이 일어나면 서울은 불바다가 될 것이고 宋선생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고 극언을 했던 것.
그뒤 북한이 군사정전위 일방철수를 통보하고 북한 핵문제로 한반도에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자 국회와 보수층을 중심으로 달라진 主敵 표현에 대해 너무 성급한 것이 아니었냐는 비판이 고조됐다.
「敵」과 「외부의 군사적 위협」
韓鏞燮(한용섭) 국방대학교 교수는 최근 발간된 「국방정책의 이론과 실제」(편저)에서 그 경과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종전엔 단순히 북한의 군사적 무력침공만을 국가 보위의 대상으로 해 왔으나 안보 개념이 군사 위주의 개념에서 정치·경제·외교·문화 등을 포함한 총체적 안보개념으로 변화함에 따라 예상할 수 있는 모든 형태의 위협에 대처한다는 포괄적 개념으로 안보대상의 범주를 확대한 것이다.
그러나 종래 북한을 「敵」으로 한다는 명시적 표현에서 「외부의 군사적 위협」으로 표현을 바꾸자 국내외에서 많은 의문점이 제기됐다. 그것은 主敵을 바꾸었느냐 아니냐의 여부와 일본 등지에서 일본을 위협으로 간주하느냐의 여부였다. 이에 대해 국방부는 다음과 같은 자료를 내놓았다. 「敵」을 「외부」로 수정한 것은 우리나라의 主敵 개념이 변화된 것이 아니라 총체적 국가안보를 위한 광의적 개념으로 모든 형태의 위협에 대처하겠다는 포괄적 뜻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안팎의 비판이 높아지자 국방부는 국회 국방위 요구대로 1995년도 국방백서에 북한이 主敵이라는 표현을 포함시켰다. 1988년 국방백서가 발간된 이래 처음으로 북한이 主敵임을 명시적으로 밝힌 것이었다.
당시 국방백서는 국방목표 해설에서 「북한이 기존의 對南 적화전략을 포기하지 않고 있는 가운데 공격형 부대배치와 군사동원 태세 강화, 통일전선 형성을 위한 對南 공작활동 등을 멈추지 않고 있는 사실을 감안, 북한을 主敵으로 상정하면서 우리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외부의 군사위협으로부터 국가를 보위…」라고 표현했다.
「북한을 主敵으로 상정하면서」라는 표현은 1996년도 국방백서에서도 지속되다가 1997년 국방백서에는 삭제됐다. 즉 1997년도 국방백서는 국방목표 해설에서 『 「외부의 군사적 위협과 침략으로부터 국가를 보위한다」함은 북한의 현실적 군사위협뿐 아니라 우리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모든 외부의 군사적 위협으로부터 국가를 보위하는 것을 말한다』고 밝힌 것. 그러나 당시 국회나 언론은 이에 대해 전혀 주목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용히」 넘어갔다. 삭제 배경은 정확히 확인되지 않고 있으나 실무자의 「실수」였던 것으로 전해졌다.
現 정부 출범 첫해인 1998년도 국방백서엔 국방목표 해설에 「主敵인 북한」이라는 표현이 삽입, 2000년도 국방백서까지 이어졌고 이 부분이 지금까지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이다.
軍 당국자들은 이런 배경을 들어 「主敵인 북한」이라는 표현은 정치권 등 외부의 입김에 의해 잘못 포함된 것이며 세계적인 사례를 살펴보더라도 언젠가는 삭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한다.
과거 냉전시대에 서독은 바르샤바조약기구에 대해 「소련의 군사적 위협」으로, 일본은 러시아에 대해 「잠재적 위협」으로 표기했으나 냉전 종식 이후 이런 표현은 사라졌다는 것이다.
主敵 표현문제는 사실상 차기정권으로
냉전시대에 미국은 舊소련에 대해 「敵(adversary)」(소련 군사태세 의회보고서 등), 「악의 제국(evil empire)」(레이건 대통령 연설) 등으로 표현했고, 소련은 미국 및 나토(NATO)를 主敵으로 간주했다.
미국은 현재 북한, 이라크 등에 대해 각종 공식문서에서 「敵(adversary)」, 「위협(threat)」 등으로 표현하고 있고, 북한은 미국을 「원쑤」, 「미제」 등으로 규정해 왔다.
현재 대만은 중국에 대해 「대만에 대한 주요 위협(Major Threat)은 중국」으로 명시(2000년 대만 국방보고서)하고 있으며, 일본은 중국에 대해서 「군사력 현대화의 목표가 중국의 방위에 필요한 범위를 넘는 것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2001년 방위백서)고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 보수진영에선 북한이 對南 적화통일을 규정한 노동당 규약을 아직 바꾸지 않고 있고, 북한의 군사적 위협엔 변화가 없기 때문에 삭제 또는 수정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반박한다. 즉 철저히 상호주의를 적용, 북한이 노동당 규약 등을 수정하고 남북한 간에 가시적인 군사적 신뢰구축 조치가 이뤄질 경우에만 삭제 문제를 전향적으로 검토해야 한다는 것이다.
국방부도 공식적으로는 남북한 간에 군사적인 신뢰구축 조치가 취해질 경우 남북한 군사당국자 간 회담을 통해 主敵 표현 삭제 문제를 논의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혀왔다.
이런 과정을 살펴볼 때 국방부는 1995년 외부의 입김에 의해 主敵 표현에 대한 「족쇄」를 찬 뒤 다시 정치논리와 「외압」에 의해 국방백서 발간을 연기했다는 비판을 면키 어려울 것 같다. 국방부 고위 관계자가 토로한 대로 主敵 표현 문제는 결국 다음 정권이 풀어야 할 숙제로 남게 됐다.●
『북한의 미사일·핵·對南정책 등이 검증되지 않은 상태에서 主敵論을 삭제 또는 수정하면 향후 장관의 軍 통솔력을 잃게 될 것입니다. 기존 방침을 고수해 주길 바랍니다』(白善燁 前 육군참모총장)
『북한이 적화를 포기하고 긴장완화 조치가 없는 한 主敵論을 지켜가야 할 것입니다』(金聖恩 前 국방장관)
『북한의 「主敵 삭제」 주장은 南南갈등을 야기하고 국군 장병들의 사기를 저하시키려는 획책입니다. 장관과 각군 총장은 「主敵論」에서 밀리면 지휘권을 상실할 수도 있으므로 절대로 삭제 또는 대체해서는 안 됩니다』(李相薰 재향군인회장)
『林東源(임동원) 특보가 북한의 압력을 받고 軍 당국에 삭제를 종용한다면 이는 우리 軍이 북한의 지시를 받고 움직이는 꼴이 됩니다. 국방부는 결코 低자세가 돼서는 안 되며 국민과 국군의 사기를 고려, 의연하게 대처해야 할 것입니다』(孔正植 前 해병대사령관)
지난 5월6일 오전 국방부 장관 접견실. 육해공군 및 해병대 예비역 장성들의 모임인 성우회 간부들이 金東信(김동신) 국방장관을 만나 국방백서상의 主敵개념 표현 삭제문제에 대해 일제히 우려를 표명했다. 이들은 이날 主敵 표현의 삭제 또는 변경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입장을 국방부에 강력히 전달하기 위해 金장관을 면담했다.
시종 긴장된 표정으로 듣고 있던 金장관은 삭제 및 변경 여부에 대해선 구체적인 언급을 피한 채 『원로 선배님들의 충정 어린 충고와 자문을 깊이 받아들여 국민과 선배들께 실망시켜드리지 않겠다』고 밝혔다. 성우회 관계자는 金장관의 이같은 발언에 대해 『국방부가 고민을 많이 하고 있지만 主敵개념 표현을 고수하겠다는 입장표명으로 받아들여졌다』고 말했다.
이로부터 2주일여가 지난 5월24일 국방부는 돌연 국방백서 발간 연기를 발표했다. 국방부는 지난해 11월 예산절감 등을 이유로 「2001년도 국방백서」 발간을 금년 5월로 연기한다고 발표한 뒤 국회 국방위 답변 등을 통해 5월 말 백서 발간을 공언해 오던 터였다.
黃義敦(황의돈) 국방부 대변인은 발간연기를 발표하면서 언제 다시 발간하겠다는 것을 못박지 않아 사실상 다음 정권으로 발간을 무기연기할 것임을 강력히 시사했다. 黃대변인이 밝힌 공식적인 연기 이유는 두 가지였다.
▲우선 금년은 국민의 정부를 마감하는 해로서 그동안의 국방업무 실적을 종합적으로 평가하고 결산하는 형태로 발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했고 ▲국방백서 발간의 주요 목적은 국민들에게 국방정책과 추진현황을 소상하게 제공해 국민적 안보공감대를 형성하는 데 있으나 백서의 「특정 표현」과 관련해 다양한 의견이 표출되고 있다는 점도 유의했다는 것이다.
국방부의 궁색한 명분
국방부 고위 관계자는 부연 설명을 통해 『主敵 表記 유지 또는 변경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된 상황에서 어느 방안을 선택하더라도 문제가 있으므로 국론분열을 자초하기보다는 백서 발간을 연기하는 것이 국가적으로 도움이 된다는 국방부 자체 판단에 따른 것』이라고 밝혔다. 백서 발간 연기가 主敵 표현 논란에 따른 고육지책임을 시인한 셈이다.
국방부는 그러나 발간 연기와 主敵 표현 논란이 연관지어지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모습을 보였다. 국방부는 당초 대변인이 아닌 국방부 고위 당국자가 직접 발표하고 主敵을 명시하지 않은 세계 각국 사례를 참고자료로 배포할 예정이었으나 자료를 일절 배포하지 않고 대변인이 말로 설명하는 것으로 끝냈던 것. 이는 主敵 문제가 부각되지 않도록 각별히 유의하라는 청와대의 강력한 지시에 따른 것으로 알려졌다.
이로 인해 발간 연기 배경도 主敵 표현 논란 대신 「국민의 정부 국방업무 실적 평가서 발간」이 부각됐다. 그러나 국방부의 발표과정을 보면 이 명분이 얼마나 궁색한 것인가를 알 수 있다.
국방부는 공식발표 이틀 전인 5월22일 백서 발간 연기와 관련, 24일 오후까지 엠바고(보도자제)를 국방부 출입 기자단에 요청했다. 이유는 23일 오후 국가안보회의(NSC) 상임위에서 연기문제가 결정되는데 사전에 보도될 경우 소모적인 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
당시 엠바고를 요청하면서 국방부 관계자는 『백서상의 主敵 표기문제와 관련해 다양한 의견이 표출되고, 主敵 표기에 대한 찬반 양론으로 국론을 분열시키고 있다는 판단에 따라 무기한 연기키로 했다』고 발간 연기 이유를 설명했다. 이틀 뒤 주된 이유로 부각됐던 「국민의 정부 국방업무 실적 평가서 발간」은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국방부 주변에선 청와대와 국방부가 主敵 표현 논란이 부각될 것을 우려, 부랴부랴 새로운 명분을 만들었다는 관측이 설득력 있게 제기되고 있다.
이번 백서 발간 연기 결정엔 우여곡절이 많았다. 主敵 표현 고수·표현 삭제 또는 변경·고수·발간 연기 과정을 밟는 등 고수와 삭제(변경) 사이를 몇 차례나 왔다갔다 했기 때문이다.
국방부 관계자들이 『백서상 主敵 표현 문제는 지난 1년여 동안 국방부를 가장 「괴롭힌」 사안』이라고 토로할 정도로 국방부는 이 문제로 골머리를 앓아 왔다. 북한이 남북 頂上회담 이후 「主敵인 북한」이라는 백서상의 표현을 문제삼아 『6·15 공동선언에 대한 노골적인 배신행위』라며 기회 있을 때마다 삭제를 요구해 왔고, 지난해 2월 합의된 남북 군사보장 합의서 서명 교환도 이 문제를 내세워 미뤄왔기 때문이다.
정부 일각에서도 남북 화해분위기 조성을 위해 표현을 삭제하거나 바꿔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정부 內에선 특히 林東源 청와대 외교안보통일 특보 등 對北 화해협력 정책 추진파가 主敵 표현 삭제 또는 변경을 국방부에 종용해 온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林특보 측은 이를 강력히 부인하고 있다.
표현 변경 및 삭제 문제를 고심하던 국방부는 지난해 11월 2001년도 국방백서 발간 연기를 발표했다. 표면상 이유는 『국방업무의 효율성과 백서 발간의 세계적 추세 등을 고려해 격년제 발간으로 조정했고 對테러 전쟁 등 안보상황이 유동적이어서 5월중 발간키로 했다』는 것이었다. 主敵 표현 논란 문제는 단 한마디도 언급되지 않았으나 당국자들은 非공식적으로 이 문제가 연기의 주된 배경이었음을 부인하지 않았다. 당시 국방부는 백서 인쇄준비까지 마쳤으나 막판에 연기를 결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와 국방부의 입장 차이
금년 들어서도 지난 4월 초 林東源 특보가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북한을 방문했을 때 북한 측이 主敵 표현 문제를 다시 강력히 제기하고, 정부 일각에서도 主敵 표현이 경의선 연내 연결 등 남북관계 진전의 장애물이 된다며 삭제 또는 수정을 국방부에 요구, 국방부는 다시 적극적인 삭제 또는 변경 검토작업에 들어갔다.
4월 말 이 내용이 언론에 보도되자 국방부는 공식적으로 『主敵 표현에 대한 삭제 또는 대체를 검토한 바 없다』고 부인했으나 당국자들은 非공식적으로 『국방부는 삭제 또는 변경에 반대하는 입장이지만 변경이 불가피할 경우 다른 표현으로 완화하는 방안을 검토중』이라고 말했다.
국방부는 主敵 표현을 바꿀 경우 「主敵」이라는 표현이 처음 사용된 1995년 국방백서 이전의 「敵」이란 표현이나 「외부의 침략」, 「안보위협 세력」 등 우회적인 표현을 사용하는 방안을 검토했다.
그러나 언론에 보도된 뒤 보수층과 야당 등에서 크게 반발하자 국방부는 현재 표현을 고수키로 하고 백서 발간 준비를 마무리했다. 이에 대해 청와대 측에선 국방부가 언론 플레이를 해 主敵 표현을 고수하려 한 것이 아니냐며 의혹의 시선을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발간 연기」가 국방부로서는 최선?
당시 국방부 고위관계자들은 사석에서 『국방부로선 (主敵 표현을) 바꾸지 않는 것이 최선이다. 주요 언론에서도 사설을 통해 그런 것이 바람직하다고 방향을 잡아주지 않았느냐』고 반문했다. 국방부의 한 장성은 『세계적으로 자국의 主敵을 공개적으로 명시한 나라는 없기 때문에 삭제할 필요가 있다』며 『그러나 現 정권下에서 그럴 경우 국론분열 등 부작용이 클 것이기 때문에 바람직하지 않으며 다음 정권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지난 5월7일 북한의 불참으로 남북 경제협력추진위원회 제2차 회의가 무산된 데 이어 5월15일 조선중앙통신이 主敵 표현 삭제를 공개적으로 요구하고 나서면서 분위기가 다시 달라졌다. 主敵 표현이 바뀌지 않을 경우, 남북관계에 냉기류가 거세질 것이라는 정부 일각의 목소리가 커진 것.
안팎의 「압박」에 시달리던 국방부는 결국 제3의 방안, 즉 우선순위에서 뒤에 밀려 있던 「발간 연기」를 택했다. 국방부로선 金장관의 국회 국방위 답변 등 그동안의 「공언」을 뒤집는 것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비판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별로 내키지 않는 선택이었다.
한 고위 소식통은 『여론과 정권 핵심부의 의중을 모두 의식할 수밖에 없는 국방부로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며 『現 상황에서 표현을 삭제 또는 변경하지 않고 버틴 것만 해도 그나마 다행』이라고 주장했다. 정부 일각으로부터의 압력이 대단했음을 강력히 시사하는 대목이다.
한나라당 金容甲(김용갑) 의원 등 「바른 통일과 튼튼한 안보를 생각하는 국회의원 모임」은 성명을 통해 『국민 앞에 약속했던 국방백서 발간계획을 즉각 정상화시키라』고 촉구했다. 재향군인회는 성명을 통해 『現 국방백서에 표현된 主敵論이 계속 유지될 수 있도록 조치한 국방부 결정을 환영한다』며 『국방백서 발간을 기대했으나 對北정책 추진 논리에 밀려 차선 방책을 채택한 데 대해 아쉬움이 없지 않다』고 밝혔다.
김판태 민족화해자주통일협의회 투쟁국장은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사회단체를 비롯해 많은 국민이 主敵 개념을 철회하는 것이 민족과 한반도 평화, 그리고 통일을 위해서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며 『국방부가 이런 국민의 바람을 외면하고 보수세력의 눈치만 살핀다면 보신주의라는 비판을 면할 수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홍만희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조직국장도 역시 연합뉴스 인터뷰에서 『월드컵, 6·13 지자체 선거, 大選 등 주요 일정이 목전에 다가와 있는 만큼 主敵 개념이 들어 있는 백서 발간을 연기한 것은 특히 남북간 화해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좋은 결정이라고 생각한다』고 환영했다.
몇 년째 계속되고 있는 主敵 논란에 대해 전문가들은 많은 사람들이 혼동하고 있는 부분이 있으며 主敵 표현에 대한 역사적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우선 「主敵개념」과 「主敵개념 표현」을 같은 것으로 혼동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 백서상의 「主敵인 북한」이라는 것은 표현일 뿐 主敵개념 자체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 표현을 빼더라도 북한을 主敵으로 하는 軍의 작전개념이라든지, 정신교육 내용 등은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主敵 표현 삭제 또는 변경은 장병들의 對敵의지 약화 초래』
국방부 관계자는 『표현을 삭제하는 것을 主敵개념 자체를 바꾸는 것으로 잘못 알고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며 『主敵개념 자체를 바꾼다면 정말 심각한 문제이겠지만 그럴 계획이 전혀 없고 현실적으로 그렇게 할 수도 없다』고 주장했다.
반면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그동안 북한 측이 主敵 표현 삭제 또는 변경을 요구해 왔다는 점에서 삭제 또는 변경은 북측의 요구에 굴복한 것으로 비춰져 결과적으로 장병들의 對敵(대적)의지가 약해지는 등 主敵개념의 약화를 초래할 것이며, 정치적으로도 표현 이상의 의미를 갖는 중대한 사안이 됐다는 것이다.
몇몇 중앙일간지에서 최근 인터넷 여론조사를 한 결과 찬반 양론이 맞서고 있는데 主敵 개념 자체에 대해 질문한 경우와, 主敵 표현에 대해 질문한 경우 상이한 반응을 보였다.
J일보가 지난 4월29일~5월2일 인터넷을 통해 主敵論 삭제에 대한 의견을 물은 결과 「찬성 6112명(35%), 반대 1만1209명(63%), 모름 391명(2%)」으로, H일보가 5월24일~6월7일 대한민국의 主敵은 북한이라는 입장에 대한 견해를 물은 결과 「반드시 유지 5457명(43%), 완전철폐 3449명(27%), 신중히 사용 3542명(28%)」으로 각각 나타났다.
반면 H신문이 지난 4월30일~5월3일 『북한을 主敵으로 규정하는 대신 「敵」 또는 「안보위협」 등의 포괄적 용어로 바꾸자는 주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인터넷 여론조사를 한 결과 「찬성 4216명(85%), 반대 745명(15%)」로 나타났다.
백서상 主敵 표현이 문제가 된 경우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金泳三(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4~95년에도 한바탕 큰 홍역을 치렀다. 1994년 3월10일 국방부는 군사력 건설 및 보유의 목표를 규정한 국방목표를 개정했다. 종전엔 「敵의 무력침공으로부터 국가를 보위하고 평화통일을 뒷받침하며 지역적인 안정과 평화에 기여한다」는 것에서 「외부의 군사적 위협과 침략으로부터 국가를 보위하고 평화통일을 뒷받침하며 지역의 안정과 평화에 기여한다」로 바뀐 것. 즉 「敵의 무력침공」이 「외부의 군사적 위협과 침략」으로 변경됐던 것이다.
이에 대해 북한을 主敵으로 하는 主敵 개념이 일본 등 주변국을 主敵으로 상정하는 것으로 바뀐 것 아닌가 하는 의문들이 제기됐다. 더구나 1주일여 뒤인 1994년 3월19일 남북 특사교환을 위한 판문점 실무접촉에서 큰 파장을 일으킨 「서울 불바다」 발언이 나왔다. 접촉 도중 북측 박영수 단장이 남측 宋榮大(송영대) 수석대표를 향해 『대화에는 대화, 전쟁에는 전쟁으로 대응할 준비가 돼있다』며 『전쟁이 일어나면 서울은 불바다가 될 것이고 宋선생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고 극언을 했던 것.
그뒤 북한이 군사정전위 일방철수를 통보하고 북한 핵문제로 한반도에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자 국회와 보수층을 중심으로 달라진 主敵 표현에 대해 너무 성급한 것이 아니었냐는 비판이 고조됐다.
「敵」과 「외부의 군사적 위협」
韓鏞燮(한용섭) 국방대학교 교수는 최근 발간된 「국방정책의 이론과 실제」(편저)에서 그 경과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종전엔 단순히 북한의 군사적 무력침공만을 국가 보위의 대상으로 해 왔으나 안보 개념이 군사 위주의 개념에서 정치·경제·외교·문화 등을 포함한 총체적 안보개념으로 변화함에 따라 예상할 수 있는 모든 형태의 위협에 대처한다는 포괄적 개념으로 안보대상의 범주를 확대한 것이다.
그러나 종래 북한을 「敵」으로 한다는 명시적 표현에서 「외부의 군사적 위협」으로 표현을 바꾸자 국내외에서 많은 의문점이 제기됐다. 그것은 主敵을 바꾸었느냐 아니냐의 여부와 일본 등지에서 일본을 위협으로 간주하느냐의 여부였다. 이에 대해 국방부는 다음과 같은 자료를 내놓았다. 「敵」을 「외부」로 수정한 것은 우리나라의 主敵 개념이 변화된 것이 아니라 총체적 국가안보를 위한 광의적 개념으로 모든 형태의 위협에 대처하겠다는 포괄적 뜻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안팎의 비판이 높아지자 국방부는 국회 국방위 요구대로 1995년도 국방백서에 북한이 主敵이라는 표현을 포함시켰다. 1988년 국방백서가 발간된 이래 처음으로 북한이 主敵임을 명시적으로 밝힌 것이었다.
당시 국방백서는 국방목표 해설에서 「북한이 기존의 對南 적화전략을 포기하지 않고 있는 가운데 공격형 부대배치와 군사동원 태세 강화, 통일전선 형성을 위한 對南 공작활동 등을 멈추지 않고 있는 사실을 감안, 북한을 主敵으로 상정하면서 우리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외부의 군사위협으로부터 국가를 보위…」라고 표현했다.
「북한을 主敵으로 상정하면서」라는 표현은 1996년도 국방백서에서도 지속되다가 1997년 국방백서에는 삭제됐다. 즉 1997년도 국방백서는 국방목표 해설에서 『 「외부의 군사적 위협과 침략으로부터 국가를 보위한다」함은 북한의 현실적 군사위협뿐 아니라 우리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모든 외부의 군사적 위협으로부터 국가를 보위하는 것을 말한다』고 밝힌 것. 그러나 당시 국회나 언론은 이에 대해 전혀 주목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용히」 넘어갔다. 삭제 배경은 정확히 확인되지 않고 있으나 실무자의 「실수」였던 것으로 전해졌다.
現 정부 출범 첫해인 1998년도 국방백서엔 국방목표 해설에 「主敵인 북한」이라는 표현이 삽입, 2000년도 국방백서까지 이어졌고 이 부분이 지금까지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이다.
軍 당국자들은 이런 배경을 들어 「主敵인 북한」이라는 표현은 정치권 등 외부의 입김에 의해 잘못 포함된 것이며 세계적인 사례를 살펴보더라도 언젠가는 삭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한다.
과거 냉전시대에 서독은 바르샤바조약기구에 대해 「소련의 군사적 위협」으로, 일본은 러시아에 대해 「잠재적 위협」으로 표기했으나 냉전 종식 이후 이런 표현은 사라졌다는 것이다.
主敵 표현문제는 사실상 차기정권으로
냉전시대에 미국은 舊소련에 대해 「敵(adversary)」(소련 군사태세 의회보고서 등), 「악의 제국(evil empire)」(레이건 대통령 연설) 등으로 표현했고, 소련은 미국 및 나토(NATO)를 主敵으로 간주했다.
미국은 현재 북한, 이라크 등에 대해 각종 공식문서에서 「敵(adversary)」, 「위협(threat)」 등으로 표현하고 있고, 북한은 미국을 「원쑤」, 「미제」 등으로 규정해 왔다.
현재 대만은 중국에 대해 「대만에 대한 주요 위협(Major Threat)은 중국」으로 명시(2000년 대만 국방보고서)하고 있으며, 일본은 중국에 대해서 「군사력 현대화의 목표가 중국의 방위에 필요한 범위를 넘는 것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2001년 방위백서)고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 보수진영에선 북한이 對南 적화통일을 규정한 노동당 규약을 아직 바꾸지 않고 있고, 북한의 군사적 위협엔 변화가 없기 때문에 삭제 또는 수정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반박한다. 즉 철저히 상호주의를 적용, 북한이 노동당 규약 등을 수정하고 남북한 간에 가시적인 군사적 신뢰구축 조치가 이뤄질 경우에만 삭제 문제를 전향적으로 검토해야 한다는 것이다.
국방부도 공식적으로는 남북한 간에 군사적인 신뢰구축 조치가 취해질 경우 남북한 군사당국자 간 회담을 통해 主敵 표현 삭제 문제를 논의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혀왔다.
이런 과정을 살펴볼 때 국방부는 1995년 외부의 입김에 의해 主敵 표현에 대한 「족쇄」를 찬 뒤 다시 정치논리와 「외압」에 의해 국방백서 발간을 연기했다는 비판을 면키 어려울 것 같다. 국방부 고위 관계자가 토로한 대로 主敵 표현 문제는 결국 다음 정권이 풀어야 할 숙제로 남게 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