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격 인터뷰 - 朴槿惠의 非타협적 권력의지

  • 글 : 김연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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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 다르크 또는 제2의 5ㆍ16
 
 
  살집이 전혀 없는 가느다란 손가락, 약간 부풀린듯 뒷머리를 살짝 올린 머리 모양, 쑥색 투피스 정장 속에 숨겨진 가녀린 몸매. 朴正熙 대통령과 陸英修 여사의 얼굴을 절반씩 섞어놓은 듯한 얼굴.
 
  이 여인이 한국 정치판을 요동치게 만들고 있는 怪力(괴력)의 소유자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정치인 朴槿惠의 힘은 「朴正熙의 딸」이라는 상징에서 나온다. 주어진 것이지 자신이 이뤄낸 것이 아니다. 『朴槿惠 지가 뭘 한 게 있다고』라는 비아냥이 한나라당 李會昌 총재 주변에서 나오는 것은 그런 까닭에서다.
 
 
  朴槿惠 의원을 처음 만나 얘기를 나누면서 「그것만은 아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에게선 어린 시절부터 내면화된 치열한 權力意志(권력의지)가 읽혀졌다.
 
  남쪽 지방에 가뭄이 들었다고 새벽에 일어나 기도한 女高生, 스물두 살에 퍼스트 레이디(代役)가 돼 나라의 앞날을 밤낮없이 걱정해야 했던 20代…. 그녀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총탄에 잃었던 惡夢(악몽)의 청와대에 다시 들어가 나라를 바로세우겠다고 스스럼없이 얘기했다.
 
  그녀는 『한국경제를 일으킨 아버지의 뒤를 이어 한국의 낡은 정치판을 뜯어고치겠다』고 했다.
 
  『한국이 선진국이 되려면 이제는 歐美 수준의 선진 정치 정당 시스템을 도입해야 한다. 그걸 거부하는 사람은 그가 李會昌이 아니라 누구라도 맞서 싸우겠다. 1인 정당 지배체제를 지금 이곳 한국에서 끝장내겠다』
 
  그런 요지의 당찬 얘기를 그녀는 높낮이가 없는 조용한 목소리로 쏟아냈다. 하늘의 召命(소명)을 받았다고 외친 잔 다르크를, 4000년 가난의 유산을 몰아내겠다며 漢江 다리를 건넌 아버지 朴正熙를 그녀의 얼굴에서 떠올렸다면, 기자만의 過敏(과민)일까?
 
  朴의원은 1974년 봄 서강大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의 그르노블에서 유학하던 중 그해 8월15일 어머니 陸英修 여사의 죽음을 맞았다. 그리고 정치가 아닌 統治(통치)에 첫발을 내디뎠다.
 
  ―프랑스에서 전자공학을 공부하고 있었습니까.
 
  『다른 방향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佛語(프랑스어)를 공부하면서 진로를 좀더 생각해 보는 시기였는데, 어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시니까 모든 걸 중단하고 온 거죠. 대학교수를 할까 생각하고 있었어요』
 
  ―인생계획에 큰 차질이 빚어졌군요.
 
  『그럼요. 살아가면서 자기가 정해서 길을 가기도 하지만, 운명같이 도저히 자기 선택의 여지가 없는 때도 있어요. 그러면 가다가 확 바뀌어 버리는 거예요』
 
 
  바른생활 少女
 
 
  ―朴의원이 서강대학에 다닐 때 한 남학생이 『근혜야, 빵 좀 사줘라』 하고 쫓아다녔더니 경호원이 그 남학생에게 빵을 한 보따리 갖다 주면서 『너 이거 다 먹고, 다시는 근혜한테 빵 사달라고 하지 마』 했다는 얘기가 유신시절 대학가에 떠돌아 다녔습니다.
 
  『재미있네요. 그런 일이 있었겠어요? 상상해서 하는 얘기지. 대학시절이 특별히 유별난 건 없었어요. 하지만 미팅 같은 건 한 번도 못 해 봤어요』
 
  ―연애도 못 해 봤겠군요.
 
  『그런 것도 없었습니다』
 
  ―젊은 시절에 재미가 별로 없었겠네요.
 
  『여러 가지로 어려웠고 힘들었어요. 책을 많이 읽고, 종교문제를 깊이 생각하고, 그러면서 시간을 보냈어요』
 
  ―대학을 졸업할 무렵 무얼 하면서 살아야겠다,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런 생각이 있었을 것 아닙니까.
 
  『저는요, 무얼 하든지 바르게 살고 싶었어요. 말하면 너무 평범한데, 모든 걸 바르게 사는 것, 무의식 중에 하는 행동도 올바르면서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공자님 말씀 그대로』
 
  ―「바르게 살자」가 인생의 신조군요.
 
  『바르고 지혜롭게』
 
  ―바르게보다 지혜롭기가 더 어렵죠.
 
  『바른 사람은 지혜롭지 못하게 행동할 수도 있어요. 지혜로운 사람은 반드시 바르게 살아요. 바르게 살지 않는 삶이 얼마나 손해고, 얼마나 결과적으로 고통스럽고 수치인지를 알기 때문에 바르게 살지 않을 수 없어요. 지혜가 바르게보다 큰 거죠』
 
  ―성심여고를 졸업할 때 가장 모범학생에게 주는 「백합상」을 받았다면서요.
 
  『예, 개근상에다 우등상, 상을 많이 받았어요』
 
  ―朴의원이 1993년에 쓴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더라면」이라는 책을 읽었는데, 내용이 심심하더군요.
 
  『金기자님이 마음고생을 많이 하셨으면, 그 책이 심심하지 않았을 텐데요』
 
  ―격렬하게 자기 주장을 하지 않고 글이 차분하다는 얘기입니다. 「바른생활 소녀」처럼 잔잔하게 쓰셨더군요. 머리는 늘 같은 모양인데 어떻게 손질하세요. 불편하지 않습니까.
 
  『오래 해서 습관이 되니까 괜찮아요. 혼자 할 때가 많아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퍼스트 레이디를 하면서 그 머리 모양을 시작한 거죠. 그 모양을 고집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부터 이 스타일이었어요. 어머니가 「너는 뒤로 머리를 묶는 게 잘 어울린다. 어쩌면 그것까지 나하고 닮았냐」 하셨어요. 뒤로 머리를 묶어 약간 올린 건 똑같은데 사진을 보면 그 동안 스타일이 많이 변한 걸 아실 거예요. 정치권에 들어오기 전에는 단발머리로 하고 다녔어요』
 
 
  朴대통령의 재혼 이야기
 
 
  ―1970년대 중반 이후 維新체제 운영에 참여한 셈인데, 維新체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아버지를 이해해요. 아버지는 어떤 경우든 사심이 없었고, 빈곤에서 우리나라를 탈출시켜서 선진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사는 나라를 꼭 만들고 싶었던 거예요. 무리한 부분도 있고 잘못된 부분도 있고 시행착오도 있었지만, 아버지는 조국근대화, 그러니까 자주국방·자립경제를 이루고 가신 거죠. 아버지의 선택이 그 당시 국가지도자로 최선을 다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유신이 국민의 인권과 기본권을 침해하고, 정치를 후퇴시킨 점은 어떻게 평가합니까.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추진해 완성한 나라는 없어요. 그때는 우리가 처한 안보상황이 지금과 근본적으로 달랐어요. 러시아와 중국이 모두 강력한 공산주의였고, 1970년대 初만 해도 경제력과 군사력에서 북한이 우리를 앞서 있었어요. 生存(생존)을 걱정하고, 굶지 않고 먹고사는 문제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에서 아버지는 지도자로서 산업화에 우선 순위를 둔 겁니다. 아버지 시대에 피해를 보신 분들에겐 마음 아프고 죄송스럽게 생각하죠. 하지만 아버지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는 아버지가 한반도를 만들어 간 방식과 그 당시 대한민국이 아버지를 만들어간 방식을 동시에 생각해야만 이뤄질 수 있을 거예요. 요즈음 여론조사를 보면 많은 분들이 그 시절을 긍정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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