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 다르크 또는 제2의 5ㆍ16
살집이 전혀 없는 가느다란 손가락, 약간 부풀린듯 뒷머리를 살짝 올린 머리 모양, 쑥색 투피스 정장 속에 숨겨진 가녀린 몸매. 朴正熙 대통령과 陸英修 여사의 얼굴을 절반씩 섞어놓은 듯한 얼굴.
이 여인이 한국 정치판을 요동치게 만들고 있는 怪力(괴력)의 소유자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정치인 朴槿惠의 힘은 「朴正熙의 딸」이라는 상징에서 나온다. 주어진 것이지 자신이 이뤄낸 것이 아니다. 『朴槿惠 지가 뭘 한 게 있다고』라는 비아냥이 한나라당 李會昌 총재 주변에서 나오는 것은 그런 까닭에서다.
朴槿惠 의원을 처음 만나 얘기를 나누면서 「그것만은 아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에게선 어린 시절부터 내면화된 치열한 權力意志(권력의지)가 읽혀졌다.
남쪽 지방에 가뭄이 들었다고 새벽에 일어나 기도한 女高生, 스물두 살에 퍼스트 레이디(代役)가 돼 나라의 앞날을 밤낮없이 걱정해야 했던 20代…. 그녀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총탄에 잃었던 惡夢(악몽)의 청와대에 다시 들어가 나라를 바로세우겠다고 스스럼없이 얘기했다.
그녀는 『한국경제를 일으킨 아버지의 뒤를 이어 한국의 낡은 정치판을 뜯어고치겠다』고 했다.
『한국이 선진국이 되려면 이제는 歐美 수준의 선진 정치 정당 시스템을 도입해야 한다. 그걸 거부하는 사람은 그가 李會昌이 아니라 누구라도 맞서 싸우겠다. 1인 정당 지배체제를 지금 이곳 한국에서 끝장내겠다』
그런 요지의 당찬 얘기를 그녀는 높낮이가 없는 조용한 목소리로 쏟아냈다. 하늘의 召命(소명)을 받았다고 외친 잔 다르크를, 4000년 가난의 유산을 몰아내겠다며 漢江 다리를 건넌 아버지 朴正熙를 그녀의 얼굴에서 떠올렸다면, 기자만의 過敏(과민)일까?
朴의원은 1974년 봄 서강大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의 그르노블에서 유학하던 중 그해 8월15일 어머니 陸英修 여사의 죽음을 맞았다. 그리고 정치가 아닌 統治(통치)에 첫발을 내디뎠다.
―프랑스에서 전자공학을 공부하고 있었습니까.
『다른 방향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佛語(프랑스어)를 공부하면서 진로를 좀더 생각해 보는 시기였는데, 어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시니까 모든 걸 중단하고 온 거죠. 대학교수를 할까 생각하고 있었어요』
―인생계획에 큰 차질이 빚어졌군요.
『그럼요. 살아가면서 자기가 정해서 길을 가기도 하지만, 운명같이 도저히 자기 선택의 여지가 없는 때도 있어요. 그러면 가다가 확 바뀌어 버리는 거예요』
바른생활 少女
―朴의원이 서강대학에 다닐 때 한 남학생이 『근혜야, 빵 좀 사줘라』 하고 쫓아다녔더니 경호원이 그 남학생에게 빵을 한 보따리 갖다 주면서 『너 이거 다 먹고, 다시는 근혜한테 빵 사달라고 하지 마』 했다는 얘기가 유신시절 대학가에 떠돌아 다녔습니다.
『재미있네요. 그런 일이 있었겠어요? 상상해서 하는 얘기지. 대학시절이 특별히 유별난 건 없었어요. 하지만 미팅 같은 건 한 번도 못 해 봤어요』
―연애도 못 해 봤겠군요.
『그런 것도 없었습니다』
―젊은 시절에 재미가 별로 없었겠네요.
『여러 가지로 어려웠고 힘들었어요. 책을 많이 읽고, 종교문제를 깊이 생각하고, 그러면서 시간을 보냈어요』
―대학을 졸업할 무렵 무얼 하면서 살아야겠다,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런 생각이 있었을 것 아닙니까.
『저는요, 무얼 하든지 바르게 살고 싶었어요. 말하면 너무 평범한데, 모든 걸 바르게 사는 것, 무의식 중에 하는 행동도 올바르면서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공자님 말씀 그대로』
―「바르게 살자」가 인생의 신조군요.
『바르고 지혜롭게』
―바르게보다 지혜롭기가 더 어렵죠.
『바른 사람은 지혜롭지 못하게 행동할 수도 있어요. 지혜로운 사람은 반드시 바르게 살아요. 바르게 살지 않는 삶이 얼마나 손해고, 얼마나 결과적으로 고통스럽고 수치인지를 알기 때문에 바르게 살지 않을 수 없어요. 지혜가 바르게보다 큰 거죠』
―성심여고를 졸업할 때 가장 모범학생에게 주는 「백합상」을 받았다면서요.
『예, 개근상에다 우등상, 상을 많이 받았어요』
―朴의원이 1993년에 쓴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더라면」이라는 책을 읽었는데, 내용이 심심하더군요.
『金기자님이 마음고생을 많이 하셨으면, 그 책이 심심하지 않았을 텐데요』
―격렬하게 자기 주장을 하지 않고 글이 차분하다는 얘기입니다. 「바른생활 소녀」처럼 잔잔하게 쓰셨더군요. 머리는 늘 같은 모양인데 어떻게 손질하세요. 불편하지 않습니까.
『오래 해서 습관이 되니까 괜찮아요. 혼자 할 때가 많아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퍼스트 레이디를 하면서 그 머리 모양을 시작한 거죠. 그 모양을 고집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부터 이 스타일이었어요. 어머니가 「너는 뒤로 머리를 묶는 게 잘 어울린다. 어쩌면 그것까지 나하고 닮았냐」 하셨어요. 뒤로 머리를 묶어 약간 올린 건 똑같은데 사진을 보면 그 동안 스타일이 많이 변한 걸 아실 거예요. 정치권에 들어오기 전에는 단발머리로 하고 다녔어요』
朴대통령의 재혼 이야기
―1970년대 중반 이후 維新체제 운영에 참여한 셈인데, 維新체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아버지를 이해해요. 아버지는 어떤 경우든 사심이 없었고, 빈곤에서 우리나라를 탈출시켜서 선진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사는 나라를 꼭 만들고 싶었던 거예요. 무리한 부분도 있고 잘못된 부분도 있고 시행착오도 있었지만, 아버지는 조국근대화, 그러니까 자주국방·자립경제를 이루고 가신 거죠. 아버지의 선택이 그 당시 국가지도자로 최선을 다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유신이 국민의 인권과 기본권을 침해하고, 정치를 후퇴시킨 점은 어떻게 평가합니까.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추진해 완성한 나라는 없어요. 그때는 우리가 처한 안보상황이 지금과 근본적으로 달랐어요. 러시아와 중국이 모두 강력한 공산주의였고, 1970년대 初만 해도 경제력과 군사력에서 북한이 우리를 앞서 있었어요. 生存(생존)을 걱정하고, 굶지 않고 먹고사는 문제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에서 아버지는 지도자로서 산업화에 우선 순위를 둔 겁니다. 아버지 시대에 피해를 보신 분들에겐 마음 아프고 죄송스럽게 생각하죠. 하지만 아버지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는 아버지가 한반도를 만들어 간 방식과 그 당시 대한민국이 아버지를 만들어간 방식을 동시에 생각해야만 이뤄질 수 있을 거예요. 요즈음 여론조사를 보면 많은 분들이 그 시절을 긍정적으로 再평가하고 있잖아요』
―지난 1월 朴浚圭 前 국회의장을 인터뷰했고, 얼마 전 金龍泰 前 공화당 원내총무를 인터뷰했습니다. 두 분이 『朴대통령이 陸여사 돌아가시고 정서적으로 황폐해졌다』고 얘기하시더군요. 재혼하라고 권해 드리지 않았습니까.
『아버지는 저희에게 그러세요. 「재혼하라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나는 재혼할 생각이 없다. 너희 어머니 생각이 나서도 그렇지만 여기 이렇게 가족이 모여 있는데 갑자기 다른 사람이 들어와 앉아 있으면, 우리 가족의 분위기가 어떻게 되겠느냐」 하시더라구요』
―金龍泰 前 총무는 朴대통령이 돌아가기 전 1년 동안 朴대통령을 만날 수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車智澈 경호실장의 전횡을 알았습니까.
『다른 차원에서 문제가 있었어요. 청와대 출입기자들에게도 얘기를 듣고, 다른 쪽으로도 여론을 듣고, 아버지에게 말씀을 드렸어요. 돌아가시기 이틀 전에도 종합해서 보고해 드렸어요. 아버지가 분명히 어떤 결심을 단단히 하는 걸로 느꼈는데, 생각하신 걸 미처 못하고 가신 거죠』
가뭄이 들면 매일 아침 일어나서 기도
―퍼스트 레이디를 5년 했는데 힘들지 않았습니까.
『굉장히 바쁘고 벅차고, 그래도 내가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하고 최선을 다했어요. 부족한 대로 어머니 자리 메우면서 아버지를 보필해 드렸다는 걸 보람으로 알았어요. 많이 격려해 준 국민들에게 고맙죠. 그때 겪었던 일들이나 생활이 정치하는 데 도움이 많이 됩니다』
―청와대에서 대통령직이 어떤지, 정치권력이 어떤 건지 지켜봤는데, 다시 청와대에 들어가고 싶습니까. 부모님들이 거기서 다 돌아가시고, 惡夢 같은 경험이었을 텐데.
『개인적으로 얘기한다면 그 자리는 무지하게 힘든 자리예요. 말 한 마디, 행동 하나 자유가 없죠. 모든 것을 국가와 국민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 자리죠. 사소한 말 한 마디라도 엄청난 책임과 부담을 안고 해야 해요. 아버지의 고독, 노심초사를 저는 눈으로 봤어요. 개인적으로 어떠냐? 행복한 건 아니죠. 그렇지만 자기 혼자 편안하고 자유로운 게 인생의 전부는 아니잖아요. 자기가 태어난 나라가 선진국처럼 모두가 편안하고 많은 사람이 행복을 누릴 수 있는 나라로 만들고 싶은 마음은 있는 거죠』
―그런 마음이 강렬합니까.
『그럼요. 저는 있죠. 제가 대통령 자격이 있다 없다를 떠나서, 많은 사람들이 희망과 긍지를 갖고 더 행복한 나라를 만드는 데 뭔가 역할을 할 수 있다면 아무리 힘들더라도 그거야말로 얼마나 보람 있고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그런 생각을 언제부터 가졌습니까. 프랑스어를 배워서 대학교수를 하려고 할 때는 그런 생각을 못 했을 것 아닙니까.
『전혀 없었죠. 정치권에 들어오기 2~3년 전이 개인적으로는 참 행복했어요. 그 어느 때보다 자유로웠고, 마음에 부담 없이 가벼운 차림으로 유적지도 다니고 운동도 하고 그러면서 부담 없이 자유스럽게, 참 행복하다고 생각하며 살았거든요.
IMF 사태가 터지면서 굉장히 충격을 받았어요. 경제성장은 당연히 주어지는 과실로 생각했는데 이럴 수도 있구나, 나라경제가 망할 수도 있구나 생각이 들었어요. 나라가 반석 위에 서는 데 뭔가 역할을 하지 않으면 나중에 세상을 뜰 때 대단히 저를 自責(자책)할 것 같았어요. 정치권에 들어가 나라를 다시 반석 위에 올리는 데 힘을 보태자 생각했죠』
―IMF 맞았다고 갑자기 그런 생각이 불쑥 튀어 나온 건 아니겠죠.
『청와대 생활을 하면서 그런 아버지 어머니 밑에서 살지 않았다면 IMF 때 정치에 뛰어들었을까? 그렇지는 않았을 거예요. 청와대 생활이라는 게 매일 나라 걱정하는 거예요. 아버지가 식탁에서 「남쪽 지방에서 가뭄이 와 땅이 갈라지는데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얘기하시고, 손님들이 오셔도 「우리나라가 미래에는 뭘 먹고 사나. 어떤 산업을 키워야 하나」 그런 얘기예요. 그런 데 젖어서 살아요. 아버지가 여름에 휴가를 가시잖아요. 진해 저도에 가서 가뭄이 들면 매일 아침에 일어나 기도부터 했어요. 어린 나이에 나라 일이 걱정이었어요』
英國의 처녀王 엘리자베스 1세를 존경
―어떤 사람이 대통령이 돼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대통령은 확실한 국가관이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비전, 국가와 국민을 사랑하는 마음, 사심 없는 마음이 확실한 국가관 속에 포함될 거예요. 그래야 국민이 믿을 수가 있죠』
―정치인 朴正熙에게서 배운 겁니까.
『그래요. 조국근대화를 이루고 그걸 추진하실 때 아버지도 유혹이 없지 않으셨을 거예요. 그런 고독한 자리에서 아버지를 지탱한 것이 무엇이었을까? 그건 아버지의 확고한 국가관이었어요. 민족과 나라를 자기 몸처럼 사랑하셨고, 사심이 없었고, 그러니까 左顧右眄(좌고우면) 안 하고 그 일을 해낼 수 있었어요. 그걸 굉장히 깊이 느끼고 있어요』
―이런 정치인이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온 이가 있습니까. 존경하는 정치인이랄까.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 傳記(전기)를 읽고 공감하는 부분이 많았어요. 존경할 만한 지도자라고 생각했어요. 정치를 하면서 극단으로 가지 않고 의견을 모아 중용으로 가고, 어떤 것이 가장 합리적이고 바른 것인지를 찾으려고 애쓰는 것이 마음에 와 닿더라구요』
―엘리자베스 여왕이 처녀 여왕이었죠. 朴의원이 獨身(독신)인 게 대통령직 수행에 마이너스 요인이 될까요, 플러스 요인이 될까요.
『장점이 많이 있을 걸로 봐요. 제 경우 챙길 가족이나 부양할 식구가 없잖아요. 모든 걸 나라에 바칠 수 있고, 주변에 비리나 유혹이 들끓어 이상한 일이 생길 여지가 없으니까요』
―그래도 가족이 있고, 자식이 있어야 현실감각이나 균형감이 생기는 것 아닙니까.
『제가 현실감각이 없어 보여요? 현실감각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정치를 하고 정치개혁을 해요. 국민의 여망과 뜻을 모아서 대변하는 건데 현실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국민을 대변합니까』
―아시아에는 대통령이나 수상의 딸들이 자리를 이어받은 경우가 많습니다. 인도 네루 수상의 딸 인디라 간디 수상, 필리핀 마갈파갈 대통령의 딸 아로요 대통령, 인도네시아 수카르노 대통령의 딸 메가와티 대통령, 파키스탄 알리 부토 수상의 딸 부토 수상이 있습니다. 미얀마의 國父(국부) 아웅산 장군의 딸 아웅산 수지도 거의 그런 반열에 올라 있고요. 누구에게서 제일 친밀감을 느낍니까.
『그분들의 활동을 보면서 투명하고 깨끗한 정치를 하는 데 여성들이 상당히 장점이 많은 것 아니냐, 그런 면에서 주목하고 있어요. 다 한번 만나보고 누가 제일 마음에 드는지 말씀드릴게요』
『공주가 아니라 기구하게 자랐어요』
―살아오시면서 적금 들어 본 적 있습니까.
『예, 그것도 해 봤습니다』
―뭐 하시느라고 적금을 들었습니까.
『아뇨, 저금을 했죠. 적금을 든 게 아니라, 조금씩 예금을』
―장보러 다닌 적이 있습니까.
『청와대 시절에는 어려웠고, 청와대 나와서는 혼자도 많이 다녔어요』
―청와대서 18년 간 살면서 사춘기를 보내고, 대학을 나와 인격이 형성됐는데, 본인이 서민들의 情緖를 잘 안다고 생각하십니까.
『알려고 많이 노력하죠. 제 지역에 가면 많이 다녀요. 그런 데서도 많은 분을 만나고 집도 방문하고, 다 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잘 알려고 노력하죠』
―공주같이 자란 분인데 대중적인 정치지도자가 될 수 있겠나, 의구심을 보내는 분이 적지 않습니다.
『공주같이 자란 것도 아닙니다』
―그 정도면 공주같이 자란 겁니다.
『아니에요. 기구하게 자랐어요. 기구하게』
―왜 기구해요.
『저만치 고통을 많이 겪고 산 사람이 많지 않을 겁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그렇게 돌아가신 비극도 비극이지만, 그후에 겪은 일도 그렇고, 사람들은 나름대로 경험이 달라요. 소설을 쓸 정도로 어려움이 많아요』
―그걸 어떻게 이겨냈습니까.
『그만큼 제가 강하게 마음을 다졌고, 저 자신에 스스로 훈계를 많이 했고, 그걸 극복하려고 엄청난 노력을 한 겁니다. 그런 상황에서 좌절하기 쉽잖아요』
―동생 志晩(지만)씨가 약물중독으로 여러 차례 구속되는 걸 지켜보면서 마음이 아팠겠습니다.
『어려운 시절을 겪었죠. 상상이 되시잖아요』
―1998년 대구 달성 보선에서 당선됐고 이제 再選(재선) 국회의원입니다. 정치가 적성에 맞는 것 같습니까. 市井(시정)의 보통사람을 많이 만나야 하는데, 그분들을 만나면 편안합니까.
『정치 시작한 걸 후회하지 않아요. 그럼요. 항상 감사해요. 그분들이 저를 만나면 반가워하고, 저도 반갑고. 그분들이 다 나를 도와 주시니까, 믿고 도와 줬는데 배신하면 안 된다, 꼭 내가 말한 대로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이 들죠』
1979년의 10ㆍ26 이후 국민의 시야에서 사라졌던 朴槿惠씨는 1990년 育英財團(육영재단) 이사장 자리에서 물러나면서 언론, 특히 여성지들의 집중적인 조명을 받았다. 朴의원의 동생 書永(서영)씨와 일부 직원들은 육영재단 고문인 崔太敏(최태민)씨가 전횡을 일삼고 있다며, 그의 퇴진을 요구했다.
崔씨는 1975년 朴槿惠씨를 자신이 총재로 있는 「구국봉사단」의 명예총재로 추대했다. 구국봉사단은 뒤에 「새마음봉사단」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崔씨는 이 단체의 총재를 맡았다. 崔씨의 활동은 全斗煥 정권이 1980년 그를 강제로 강원도 인제에 쫓아 보낼 때까지 계속됐다. 崔씨는 1912년 생이다.
崔太敏 질문에 격앙, 『底意가 뭐예요』
崔씨가 槿惠씨를 등에 업고 각종 이권에 개입하고 있다는 풍문이 나돌아, 1977년 9월 朴正熙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崔씨 비리를 수사한 金載圭 중앙정보부장과 崔太敏씨를 대질신문시키는 희한한 광경이 펼쳐지기도 했다. 5·17 이후 합동수사본부의 李鶴捧(이학봉) 수사국장과 검찰도 崔씨 비리를 수사한 적이 있다.
朴의원에게 미스터리의 인물 崔太敏 목사에 대해 집중적으로 물었다.
잘 대답을 하던 朴의원은 崔太敏 관련 질문이 10분 이상 이어지자 『底意(저의)가 뭐예요』며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공인으로서 답변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건 알지만, 이런 식의 인터뷰는 더 이상 못 하겠다』는 그녀를 진정시켜 인터뷰를 계속했다.
―1980년대에는 뭘 했습니까.
『경로복지병원이라고, 나이드신 분들 무료로 침도 놔 드리고, 치료해 드리고, 육영재단, 장학재단 운영하고 수필집 내고, 아버지 기념사업도 2년여 했어요』
―1990년 육영재단 파동이 나면서, 퍼스트 레이디 시절에 있었던 崔太敏 목사와의 얘기가 흘러나왔습니다. 1975년 5월13일 崔목사가 임진강에서 2000여 명의 청중을 모아 놓고 구국기도회를 할 때 거기에 갔다가 그 자리에서 명예총재로 추대된 거죠.
『맞아요. 그때 나라가 어려웠어요. 월남사태도 있었고, 국민들이 굉장히 불안해 하고 북한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을 때였어요.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단결해서 나라를 구해야 한다」며 기독교 분들이 주축이 돼 하신 거예요. 퍼스트 레이디 역할 하면서 좋은 일 하시는 분들 있으면 격려해야 할 책임이 있잖아요』
―구국선교단(뒤에 구국봉사단)의 명예총재하는 걸 아버지에게 허락받았습니까.
『일일이 할 때마다 허락받는 건 아니에요. 하고 나면 말씀드리는 것도 있어요』
―崔太敏씨가 朴의원에게 「陸英修 여사가 꿈에 나타나 도와드리라고 했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 만나게 됐다는 얘기가 있는데 사실입니까.
『그런 건 아니에요. 만나서 여러 가지 얘기를 하고 싶어 하셔서 한 번 청와대에서 만났죠. 여러 가지로 나라를 걱정하시는 생각이 들어, 그분이 선교단을 할 적에 좋은 뜻으로 하니까 도와 드리기도 하고 일하는 사람을 격려하고 했어요』
―어머니가 現夢했다는 유의 얘기는 사실이 아닌가요.
『그건 아니에요. 이런 문제들이 왜 나오냐면, 제가 보궐선거와 총선을 치렀는데 그 상대가 안기부 출신이에요. 자료가 엄청나게 많아서 이런 것 저런 것 마구 공격을 했어요. 한 가지라도 사실이면 제가 국회의원 됐겠습니까. 말할 가치가 없는 주장들이에요』
朴대통령 주재 김재규, 최태민 대질심문 사건
―1975년 5월24일자 한 일간 신문 기사를 보면, 「기독십자군 창설을 위해 서부전선 5019부대에서 목사 100여 명이 3일 동안 군사훈련을 받았다. 명예총재인 근혜양이 참석한 가운데 부대장으로부터 수료증을 받고 퇴소했다」는 기사가 나옵니다. 朴의원은 「군사훈련을 통해 참 신앙이 무엇이며, 자기 민족국가를 사랑하는 마음이 무엇인가를 일깨워 주는 데 모범이 되었다」고 격려사를 하셨더군요. 목사들을 군사훈련시키고, 총참모장 총사령관까지 둔 군대식 「구국선교단」이라는 조직이 시대착오적인 게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한가하게 말할 일이 아닙니다. 나라가 어려울 때 비판하는 건 쉽죠. 목사님들이 훈련받고 하는 걸 유치하다고 보는 사람도 있을 수 있지만, 목사님들이 모두 공부한 분들이고 사회지도층인데 「나라 위기에 단결해야 한다. 정신무장하자」고 노력하는 걸 격려하지는 못할망정, 유치하다고 보면 안 되죠』
―청와대 비서관이었던 鮮于煉(선우련)씨의 증언에 따르면, 崔太敏씨가 道경찰국장, 道지사에게까지 호통을 칠 정도로 위세가 대단했고, 재벌 총수들이 崔씨에게 줄을 대기 위해 자신에게 청탁까지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한 마디로 말이 안 되죠. 5공 정권이 끝나고 청문회를 했잖아요. 아버지 돌아가시고 20년이 흘렀어요. 온갖 이야기를 끌어내서 그럴싸하게 만들어 중상모략을 할 수 있습니다. 들어 보면 「그러냐」 이럴 수도 있어요. 문제는 그게 사실이냐는 거예요. 세상에 비밀이 어디 있습니까. 崔목사가 큰소리 쳐서 권력을 휘두르고 남의 재산을 탈취했다면, 벌써 내가 이렇게 억울하게 당했다고 얘기가 다 나왔을 겁니다. 崔목사에게 사기당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하나도 안 나오잖아요. 그것 하나가 백 마디 얘기를 다 해주는 것 아닌가요』
―崔씨의 횡령건수가 14건, 2억2000만원이라는 합수부 수사기록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 감옥에 보내든지 책임을 물었겠죠. 말도 많고 모함도 많았지만 증거가 없잖아요. 아버지 살아계실 때는 권력이 무서워서 그랬다 쳐요. 그후 저도 청와대에 있다가 반대편에서 얼마나 어렵게 살았어요. 그때 저한테 무슨 말을 못 하겠어요. 당했다는 사람이 누가 있어요』
―1977년 9월 아버님께서 中情부장과 崔목사를 직접 심문했죠.
『謀略(모략)이 들어가니까. 아버지 성격에 가만 계실 분이십니까. 아버지는 분명히 조사시키고, 더군다나 딸 문젠데. 조사해서 뚜렷한 증거가 없으니까 없던 걸로 덮으신 거예요』
―中情을 제쳐두고 경호실 정보처에서 다시 崔목사를 조사하려니까, 朴의원이 밥도 안 먹고 1주일 간 두문불출해 조사를 포기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그런 적 없어요. 저는 두문불출하고 밥 안 먹고 그런 일 안 해요. 얼마나 엄청난 모략이에요. 제가 편안하게 온실에서 자랐다고 잘못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신데, 제가 여러 가지로 마음고생을 많이 했어요. 세상이 어떻다는 걸 잘 아는 이유가, 너무 많은 경험을 해서 일 거예요』
―국가정보기관에서 崔목사의 전력이 의심스럽다,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권고를 하면 따르는 게 온당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권고하던 사람이 아버지를 암살하지 않았습니까』
―崔太敏 목사가 신군부에 구속돼서 강원도 인제로 쫓겨 갔을 때 全斗煥 대통령을 상대로 석방운동을 하셨나요.
『그런 적이 없어요. 제가 말한다고 됩니까. 그때 「유신시절에 이런 일이 있었다」고 崔목사를 한 번 더 조사했지만, 혐의가 없으니까 뭘 할 수가 없었던 거예요. 그 양반이 감옥에 간 게 아니고 무슨 군부대에 가 있었어요. 문제가 있었으면 진짜 감옥에 갔든지, 돈을 물어냈든지 그렇게 됐겠죠』
『謀略한 사람들 얘기를 다 실어 줄 겁니까』
―지금도 대통령 주변의 친인척들이 大統領을 빙자해 축재를 하고 이권에 개입하는 일이 잦습니다. 사실상의 영부인을 자기 단체의 명예총재로 모신 崔목사가 위세를 이용해서 官에 압력을 가하거나, 건어물 도매상 허가를 내달라거나, 공금을 횡령했다는 주장은 개연성이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지금 이런 식으로 저한테 질문하시는 底意를 의심하고 있어요』
―저의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정말 저의를 의심합니다. 이분은 돌아가셨어요. 건어물 도매시장 허가를 받아 누가 손해를 봤다든지 한 사실이 있다면, 여러 가지 다 물으실 수 있어요. 그런데 한 건도 사기당한 사람이 없었어요. 金기자님은 수십년 간 떠돌았던 의혹을 다 열거하면서 묻고, 나는 「그런 일이 없었다」고 얘기하지만, 그게 그대로 기사로 나가면 돌아가신 분이나 그 가족은 또 피해를 보게 됩니다. 그렇게 해야 할 이유가 뭡니까. 월간조선이 그분과 무슨 억하심정이 있습니까』
―朴의원이 육영재단 이사장을 물러날 때도 崔목사가 전횡을 한다는 얘기가 나왔죠.
『그때도 별별 얘기가 다 나왔잖아요. 崔목사가 한 건이라도 감옥에 갈 만한 일을 했다든지, 피해본 사람이 있다든지, 권력을 빙자해서 뭐 한 게 없잖아요. 그게 없으면 그 다음에는 얘기하면 안 됩니다. 모략하는 사람들 얘기를 책에다 다 내실 겁니까. 왜 그러세요』
―왜 이런 식의 인터뷰가 필요하냐면, 이미 朴의원이 우리 국민이 생각하는 가장 유력한 大選후보의 한 사람이 됐기 때문입니다.
『좋아요. 제 개인에 관해 검증하는 것은 좋지만, 세상을 뜬 사람과 그 사람 가족들에 대한 거잖아요. 잘못했으면 세상 떠나고도 욕먹어야죠. 그러나 하나도 없는 것이 밝혀졌는데 모략을 쭉 나열한다는 건 안 되죠』
―쭉 나열 안 하겠습니다. 崔목사와 일한 것 때문에 유신시절, 5共시절 마음의 고초를 겪었는데 1990년까지 계속 崔목사의 도움을 받은 이유는 뭡니까.
『그때 저를 도와 주고 그런 분들이 별로 없었죠. 아버지가 매도당하던 시절이고, 누가 있었나요. 저를 와서 돕는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세상 인심이라는 게 그래요』
―육영재단 이사장을 물러날 때 다른 분도 아니고, 동생 분과 육영재단 직원들이 「최태민이 전횡을 하니까 물러나라」고 했지 않습니까.
『전횡해서 뭐 나쁜 일 한 게 있었어요? 그때 육영재단이 얼마나 잘 되고 있었는데. 전횡해서 사기를 치고 한 일이 있나요』
―같이 일을 한 사실만 있다는 말씀이죠.
『그렇죠. 그렇게 일할 수 있죠. 재단에 손해날 짓, 또는 사적으로 뭘 챙긴 게 한 건도 없는 겁니다. 10원 한 장이라도 잘못했으면 감옥에 백번이라도 갔을 분위기였어요』
―여성잡지들에 그런 얘기가 쏟아져 나왔는데 왜 법적 대응을 안 했습니까.
『인터뷰에 응하고, 텔레비전에까지 나가서 질문에 다 답했어요. 꼭 법적인 대응을 해야만 합니까』
―崔목사가 목사가 되기 전 사이비 종교의 지도자였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사이비 종교의 지도자가 아니고 정식 기독교 목사였어요. 그렇게 이상한 사람이면 내가 상대를 안 했고, 나도 알아볼 것 다 알아보고 했어요』
―그러면 마지막으로 하나만 묻겠습니다. 崔太敏 목사의 사위를 비서로 쓰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朴의원이 아직도 崔목사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능력이 되니까 쓰는 거예요. 대개 사람을 쓰고 일을 할 때 가까이 잘 알던 사람들을 쓰는 것 아닌가요』
―1980년 이후 동생들과의 사이가 소원해진 이유는 뭔가요.
『이런저런 게 겹쳤어요. 그후에는 다 없어지고, 동생들이 선거 때 와서 도와 주고, 지금은 제가 정치권에서 하는 일이 잘 되도록 안타까워도 하고 도움이 되려고 애를 써요』
―자주 만나십니까.
『자주 만나는 건 아닙니다. 저도 바쁘지만 동생들도 다 나름대로 바쁘거든요. 제사 때, 일이 있을 때 만나고 연락하죠』
「박근혜 신당」 태풍
한나라당 李會昌 총재와 朴槿惠 의원이 국민경선 개최 여부, 집단 지도체제 도입을 놓고 팽팽히 맞섰을 때 한나라당의 崔秉烈 부총재는 朴의원의 탈당 가능성을 점쳤다. 그러나 崔부총재는 『朴의원의 탈당으로 한나라당의 일각이 무너지는 일은 없을 것이고, 그런 점에서 李총재에게 큰 타격을 주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을 내놓았다.
그의 예상과 달리 朴槿惠 탈당은 미풍이 아니라 태풍으로 돌변하고 있다.
탈당 이후 朴槿惠씨의 발걸음은 의외로 한가해 보인다. 누구의 도움도 필요하지 않은 듯한 자세다. 「朴槿惠 신당」과의 연대를 모색하고 있는 金鍾泌 자민련 총재는, 朴의원이 개혁세력과의 연대를 모색하고 있다며, 『朴의원이 잘못 생각하고 있다』고 불만을 털어놓았다.
朴의원은 合縱連橫(합종연횡), 정치세력의 이합집산에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의 기준에 따르면 金鍾泌씨는 또 다른 1人지배 정당의 黨首에 불과했다. 朴의원은 서두르지 않았다. 朴의원은 『여건이 되면 地自體(지자체) 선거에 참여하고, 여의치 않으면 참여하지 않겠다』고 했다. 정당개혁의 깃발을 흔들면서, 자신의 원칙에 따르는 사람과 손을 잡겠다는 것이다.
―朴의원이 한나라당을 탈당하고 한국 정치판이 요동치고 있습니다. 한나라당의 金德龍(김덕룡), 姜三載(강삼재), 洪思德(홍사덕) 부총재가 들먹거리고, 崔秉烈 부총재는 黨 위기 수습을 위해 집단 지도체제를 大選 전에 실시하자고 나섰습니다. 민주당 경선에 참여한 민주당 후보들이 경선에서 탈락할 경우 「朴槿惠 신당」에 합류하는 방안을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朴의원이 한국정치를 상당히 불안정하게 만드셨습니다.
『안정됐다, 불안정됐다 단편적으로 볼 일은 아니에요. 이런 정치가 계속될 때 우리나라의 발전에 도움이 되겠느냐를 기준으로 봐야죠. 지금 정치가 국민들의 신뢰를 받고, 이대로 가면 잘 되겠다는 얘기를 듣고 있습니까? 「이런 정치는 못 믿겠다, 이런 정치를 바꿔라」는 게 국민의 여망입니다. 여론조사를 보면 우리 아이들이 대한민국을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은 나라」로 꼽고. 이민 가려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정치가 희망과 신뢰를 주지 못하기 때문이에요. 정치가 나라발전에 걸림돌이 되고 있으면 고쳐야죠』
―한국정치는 뭐가 문제고, 그걸 어떻게 고치려고 합니까.
『총선, 대선 때마다 정치를 바꾼다고 새 피 수혈했지만 정치가 하나도 안 바뀌었어요. 말만 바꿨지, 정당의 구조를 안 바꾼 거예요. 정당 1人지배구조가 문제예요. 모든 권한이 보스 한 사람에게 집중돼 있어요.
정당이 국고보조금을 받으면 그게 다 국민의 돈인데 투명하게 써야죠. 정책개발을 잘 해서 국민을 편안하게 하라는 돈 아닙니까. 저도 부총재였지만 어디에 어떻게 쓰는지 알지를 못해요. 黨 재정권, 공천권을 총재가 모두 쥐니까 당론을 정할 때도 총재 개인의 뜻에 맞추게 돼요. 여야간 극한 대결은 그래서 나와요. 이렇게 권력을 다 쥔 黨首(당수)가 대통령이 되면 막강한 제왕적 대통령이 되는 겁니다』
『대통령 되고 나서 정당개혁하겠다는 게 말이 됩니까』
―40년 고질병이 하루 아침에 다 치료가 되겠습니까. 朴의원이 정당개혁을 주장해 왔으니까, 한나라당에 머물면서 李총재를 견제하고, 조금씩 고쳐 가는 방안도 있지 않습니까.
『그동안 죽 얘기를 했죠. 그런데 「어느 개가 짖느냐」예요. 그래서 경선에 나가서 당 개혁도 하고 해 보겠다고 했죠. 그 전에 주장하던 걸 경선에 출마하면서 다시 했어요. 결국은 역부족이었어요. 제가 아무리 非주류고 勢가 없는 약자지만, 정당개혁은 명분이 뚜렷하니까 수용될 줄 알았어요』
―李총재가 일반 시민 50%가 참여하는 국민경선을 받아들였고, 집단 지도체제는 대통령 당선 2개월 안에 하겠다는 案을 내놓지 않았습니까. 李총재 측은 朴의원의 요구가 탈당명분 축적용이었지 眞情(진정)이 담긴 것은 아니었다고 주장합니다.
『국민경선제는 받아들였어요. 저는 선거인단 10만명을 주장했는데, 많다고 해서 7만으로 줄였어요. 3500만 유권자 가운데 적어도 0.1%는 참여해야 국민경선제지, 그것도 안 되면 국민이 경선에 들러리 서는 것이에요. 적어도 7만명으로 선거인단을 하자 합의했는데, 이걸 또 5만명으로 줄였어요. 국민 참여자는 2만5000명으로 줄었어요.
그건 좋아요. 그러나 정당개혁의 핵심은 총재직 폐지예요. 그걸 大選 끝난 다음에 하겠다는 거예요. 그게 가능하겠어요? 大選 직후에 대통령 당선자의 권한이 얼마나 막강해요. 장관 국영기업체 장 임명권을 쥔 대통령에게 전부 잘 보이려고 달려들 텐데. 누가 호랑이 목에 방울을 달겠어요』
―어떤 과정을 거쳤든 한나라당 안에서 李會昌 총재가 가장 큰 지분을 갖고 있는 것은 현실 아닐까요. 그런 현실을 인위적으로 단시간에 바꿔 달라는 요구는 무리 아닙니까.
『지분을 바꾸자는 건 아니죠. 黨 운영제도를 바꾸자는 거지. 더 이상 黨 재정과 공천권을 총재가 혼자 쥐어서는 안 돼요. 이건 시대적 요청입니다. 정치가 국민으로부터 불신을 당하는데 백번 정권 바꿔 봐야 그 정치가 나라에 무슨 도움이 되겠어요』
―한나라당에 몸담은 후 뭐가 제일 불만이었습니까.
『黨 운영 시스템이에요. 아무리 똑똑한 사람도 일단 들어오면, 줄서기를 해야 하고, 아무리 민주적인 사람도 이 시스템의 꼭대기에 서면 전횡을 하게 됩니다. 독단으로 빠지고 자기 이익만 챙기죠. 그분들이 훌륭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이런 시스템에 풍덩 빠지면 어떡할 수가 없어요. 정당개혁은 이 시스템, 이 패러다임을 바꾸자는 겁니다』
『나의 保守는 補修하자는 것』
―간단히 얘기하면, 歐美식 의회민주주의 정당체제를 강화하자는 거군요. 중앙당은 가급적 축소하고, 원내 중심으로 운영하고, 계파 없이, 정책대결 중심으로.
『그래요. 총재도 없고, 지역정당이 아닌 지역을 초월한 그런 정당, 그것이 바른 정치를 할 수 있는 정당의 모습이죠』
―새로운 정당을 만들면 총재를 없애고, 계파 지분 없애고, 상향식 공천을 하실 겁니까.
『당연히 그렇게 해야죠. 총재는 필요 없어요. 공천을 투명하게 하고, 재정을 투명하게 운영하면서 정책개발에 쓰고, 원내중심의 정책정당으로 전환해야죠. 이렇게 되면 당리당략을 앞세워 여야가 국회에서 싸울 까닭이 없어요』
―어떤 사람과 정당을 하실 겁니까. 이상과 꿈만으로 사람들을 충원할 수 있는 건 아니잖습니까. 자민련도 있고, 정치판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과 같이 일을 해야 하는 건데.
『사람보다 원칙이 중요하죠. 제가 얘기한 정당개혁을 같이 하겠다는 분이면 어떤 분이든 같이 할 수 있죠』
―자신이 左右(좌우) 어느 쪽에 위치해 있다고 생각합니까.
『딱 한 마디로 하자면 「건전 保守(보수)」예요. 어감이 「保守」 하면 있는 것 그대로 유지하고 전혀 안 변하는 것으로 생각이 돼요. 그런데 「保守」야말로 「補修(보수)」 하는 거예요. 개혁도 현실을 무시한 채 달려가다 보면 부작용이 너무 많이 생겨 改革보다는 改惡이 되기 쉬워요. 개혁은 자신이 서 있는 현실에 발을 디디고, 현실에 맞게 가야 해요』
―金潤煥 민국당 대표는 「反李會昌 세력」을 집결해 신당을 만들고, 국민후보로 朴槿惠 의원을 추대하자고 움직이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뵌 적이 없습니다』
―李壽成 前 총리를 지난 3월9일 만나서 신당 창당에 합의하셨죠.
『신당 창당에 합의했다는 건 너무 많이 나간 얘기예요. 합의를 특별히 본 것은 없습니다』
―국회의원들은 지역구도가 유지되면 편한 점이 많습니다. 총재 눈치만 보면 공천받고, 당선되기도 쉽습니다. 이런 정치권의 기득권이 있고, 오랫동안 쌓여 온 구조적인 문제점도 있고…. 匹馬單騎(필마단기)로 나서서 새로운 정치를 만들어 낼 자신이 있습니까.
『제가 다 짜놓고 나가고 있는 건 전혀 아닙니다. 「뭐 믿고 나갔냐」고 한나라당에서 누가 얘기했다는데, 뭐 믿고 나온 거 아니에요. 그런 상황에서 한나라당에 더 있을 수는 없잖아요. 이제 나는 끝났다, 정치개혁 못 한다고 손놓고 있을 수는 없잖아요. 뜻을 같이하는 사람과 힘을 모아서 해야죠』
―6월에 지방선거, 12월에 大選으로 정치 스케줄이 촉박한데.
『지방선거에 참여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어요. 지방선거에 꼭 참여해야겠다는 것도 아니에요. 이제부터 저와 생각을 같이하는 友軍들을 모아야죠. 그게 제가 할 일이고, 그러고 있습니다』
―누굴 만날 생각입니까.
『우선 전직 대통령을 한번 죽 뵈려고 해요』
『국민 지지 못 받으면 정치를 떠나야죠』
―자민련은 실체와 관계없이 朴대통령의 유업을 계승한다고 말을 하는 정당인데, 친밀감을 느끼십니까.
『기존 정당에는 어디에도 참여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자민련에서 「옳은 얘기다」 동의하는 부분도 있긴 합니다. 과거에 이랬고 저랬고 따질 시기가 아닙니다. 21세기 새로운 시대를 맞아서 산업화 민주화 길을 각각 걸은 사람들이 선진강국으로 가기 위해 힘을 모아야죠』
―대구·경북지역에서 朴의원에 대한 지지가 다른 지역에 비해 높지 않습니다. 지지율이 낮은 이유를 뭘로 보십니까.
『거기 분들이 정권교체를 간절히 바라고 계시죠. 충분히 이해합니다. 정당개혁도 하고 정권교체도 해야죠. 정권교체를 무조건 해야 한다는 건 위험한 생각이에요. 국민은 신뢰할 수 있는 정치와 정당을 원하는데, 어떻게든 정권만 잡으면 되나요. 정당개혁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에게 정권교체 때문에 표를 주면, 그 사람에게 나중에 책임을 물을 수도 없어요. 정치는 안 변할 거고. 그런 세상을 국민들이 원하는 겁니까』
―新黨(신당)을 만들어 지방선거를 치르자면, 주요 정당에서 떨어져 나온 공천탈락자들을 「이삭줍기」할 수밖에 없고 黨의 이미지가 크게 떨어질 겁니다. 민주당, 한나라당이 장악한 「人材 풀(Pool)」이 더 큰데, 그 틈바구니에서 국민들에게 과연 「아 이 사람이면 새정치 할 수 있겠다」는 사람을 내세울 수 있을까요.
『지금 당장 黨을 하겠다는 것이 아니잖아요. 상황을 봐서 地自體 선거에 참여하겠다는 것이에요. 미리 정해 놓고 하는 것이 아니니까, 어떻게 할지 지켜보세요』
―한나라당 탈당 후 여러 여론조사에서 朴의원의 지지율이 상당히 높습니다. 2위를 한 것도 있고, 이렇게 가다가 지지율이 꺼져 지지율 10% 안팎의 제3후보로 찌그러들면 어떡하실 겁니까.
『그러길 바라세요?』
―그런 상황이 올 수 있다는 건 염두에 두셔야죠.
『제가 정치계에 들어와서 소신 있게 일 할 수 있는 힘은 저한테서 나오는 게 아니고 국민의 지지에서 나왔어요. 그만큼 신뢰를 보내고 지지해 주시니까 힘있게 일할 수 있었고, 그만큼 신뢰를 받으니까 책임감이 커졌고. 국민의 지지를 못 받으면 정치를 그만둬야죠. 떠나야죠. 지지 못 받는데 정치판에 남아 있으면 국민이 얼마나 보기 싫겠어요』●
살집이 전혀 없는 가느다란 손가락, 약간 부풀린듯 뒷머리를 살짝 올린 머리 모양, 쑥색 투피스 정장 속에 숨겨진 가녀린 몸매. 朴正熙 대통령과 陸英修 여사의 얼굴을 절반씩 섞어놓은 듯한 얼굴.
이 여인이 한국 정치판을 요동치게 만들고 있는 怪力(괴력)의 소유자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정치인 朴槿惠의 힘은 「朴正熙의 딸」이라는 상징에서 나온다. 주어진 것이지 자신이 이뤄낸 것이 아니다. 『朴槿惠 지가 뭘 한 게 있다고』라는 비아냥이 한나라당 李會昌 총재 주변에서 나오는 것은 그런 까닭에서다.
朴槿惠 의원을 처음 만나 얘기를 나누면서 「그것만은 아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에게선 어린 시절부터 내면화된 치열한 權力意志(권력의지)가 읽혀졌다.
남쪽 지방에 가뭄이 들었다고 새벽에 일어나 기도한 女高生, 스물두 살에 퍼스트 레이디(代役)가 돼 나라의 앞날을 밤낮없이 걱정해야 했던 20代…. 그녀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총탄에 잃었던 惡夢(악몽)의 청와대에 다시 들어가 나라를 바로세우겠다고 스스럼없이 얘기했다.
그녀는 『한국경제를 일으킨 아버지의 뒤를 이어 한국의 낡은 정치판을 뜯어고치겠다』고 했다.
『한국이 선진국이 되려면 이제는 歐美 수준의 선진 정치 정당 시스템을 도입해야 한다. 그걸 거부하는 사람은 그가 李會昌이 아니라 누구라도 맞서 싸우겠다. 1인 정당 지배체제를 지금 이곳 한국에서 끝장내겠다』
그런 요지의 당찬 얘기를 그녀는 높낮이가 없는 조용한 목소리로 쏟아냈다. 하늘의 召命(소명)을 받았다고 외친 잔 다르크를, 4000년 가난의 유산을 몰아내겠다며 漢江 다리를 건넌 아버지 朴正熙를 그녀의 얼굴에서 떠올렸다면, 기자만의 過敏(과민)일까?
朴의원은 1974년 봄 서강大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의 그르노블에서 유학하던 중 그해 8월15일 어머니 陸英修 여사의 죽음을 맞았다. 그리고 정치가 아닌 統治(통치)에 첫발을 내디뎠다.
―프랑스에서 전자공학을 공부하고 있었습니까.
『다른 방향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佛語(프랑스어)를 공부하면서 진로를 좀더 생각해 보는 시기였는데, 어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시니까 모든 걸 중단하고 온 거죠. 대학교수를 할까 생각하고 있었어요』
―인생계획에 큰 차질이 빚어졌군요.
『그럼요. 살아가면서 자기가 정해서 길을 가기도 하지만, 운명같이 도저히 자기 선택의 여지가 없는 때도 있어요. 그러면 가다가 확 바뀌어 버리는 거예요』
바른생활 少女
―朴의원이 서강대학에 다닐 때 한 남학생이 『근혜야, 빵 좀 사줘라』 하고 쫓아다녔더니 경호원이 그 남학생에게 빵을 한 보따리 갖다 주면서 『너 이거 다 먹고, 다시는 근혜한테 빵 사달라고 하지 마』 했다는 얘기가 유신시절 대학가에 떠돌아 다녔습니다.
『재미있네요. 그런 일이 있었겠어요? 상상해서 하는 얘기지. 대학시절이 특별히 유별난 건 없었어요. 하지만 미팅 같은 건 한 번도 못 해 봤어요』
―연애도 못 해 봤겠군요.
『그런 것도 없었습니다』
―젊은 시절에 재미가 별로 없었겠네요.
『여러 가지로 어려웠고 힘들었어요. 책을 많이 읽고, 종교문제를 깊이 생각하고, 그러면서 시간을 보냈어요』
―대학을 졸업할 무렵 무얼 하면서 살아야겠다,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런 생각이 있었을 것 아닙니까.
『저는요, 무얼 하든지 바르게 살고 싶었어요. 말하면 너무 평범한데, 모든 걸 바르게 사는 것, 무의식 중에 하는 행동도 올바르면서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공자님 말씀 그대로』
―「바르게 살자」가 인생의 신조군요.
『바르고 지혜롭게』
―바르게보다 지혜롭기가 더 어렵죠.
『바른 사람은 지혜롭지 못하게 행동할 수도 있어요. 지혜로운 사람은 반드시 바르게 살아요. 바르게 살지 않는 삶이 얼마나 손해고, 얼마나 결과적으로 고통스럽고 수치인지를 알기 때문에 바르게 살지 않을 수 없어요. 지혜가 바르게보다 큰 거죠』
―성심여고를 졸업할 때 가장 모범학생에게 주는 「백합상」을 받았다면서요.
『예, 개근상에다 우등상, 상을 많이 받았어요』
―朴의원이 1993년에 쓴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더라면」이라는 책을 읽었는데, 내용이 심심하더군요.
『金기자님이 마음고생을 많이 하셨으면, 그 책이 심심하지 않았을 텐데요』
―격렬하게 자기 주장을 하지 않고 글이 차분하다는 얘기입니다. 「바른생활 소녀」처럼 잔잔하게 쓰셨더군요. 머리는 늘 같은 모양인데 어떻게 손질하세요. 불편하지 않습니까.
『오래 해서 습관이 되니까 괜찮아요. 혼자 할 때가 많아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퍼스트 레이디를 하면서 그 머리 모양을 시작한 거죠. 그 모양을 고집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부터 이 스타일이었어요. 어머니가 「너는 뒤로 머리를 묶는 게 잘 어울린다. 어쩌면 그것까지 나하고 닮았냐」 하셨어요. 뒤로 머리를 묶어 약간 올린 건 똑같은데 사진을 보면 그 동안 스타일이 많이 변한 걸 아실 거예요. 정치권에 들어오기 전에는 단발머리로 하고 다녔어요』
朴대통령의 재혼 이야기
―1970년대 중반 이후 維新체제 운영에 참여한 셈인데, 維新체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아버지를 이해해요. 아버지는 어떤 경우든 사심이 없었고, 빈곤에서 우리나라를 탈출시켜서 선진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사는 나라를 꼭 만들고 싶었던 거예요. 무리한 부분도 있고 잘못된 부분도 있고 시행착오도 있었지만, 아버지는 조국근대화, 그러니까 자주국방·자립경제를 이루고 가신 거죠. 아버지의 선택이 그 당시 국가지도자로 최선을 다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유신이 국민의 인권과 기본권을 침해하고, 정치를 후퇴시킨 점은 어떻게 평가합니까.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추진해 완성한 나라는 없어요. 그때는 우리가 처한 안보상황이 지금과 근본적으로 달랐어요. 러시아와 중국이 모두 강력한 공산주의였고, 1970년대 初만 해도 경제력과 군사력에서 북한이 우리를 앞서 있었어요. 生存(생존)을 걱정하고, 굶지 않고 먹고사는 문제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에서 아버지는 지도자로서 산업화에 우선 순위를 둔 겁니다. 아버지 시대에 피해를 보신 분들에겐 마음 아프고 죄송스럽게 생각하죠. 하지만 아버지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는 아버지가 한반도를 만들어 간 방식과 그 당시 대한민국이 아버지를 만들어간 방식을 동시에 생각해야만 이뤄질 수 있을 거예요. 요즈음 여론조사를 보면 많은 분들이 그 시절을 긍정적으로 再평가하고 있잖아요』
―지난 1월 朴浚圭 前 국회의장을 인터뷰했고, 얼마 전 金龍泰 前 공화당 원내총무를 인터뷰했습니다. 두 분이 『朴대통령이 陸여사 돌아가시고 정서적으로 황폐해졌다』고 얘기하시더군요. 재혼하라고 권해 드리지 않았습니까.
『아버지는 저희에게 그러세요. 「재혼하라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나는 재혼할 생각이 없다. 너희 어머니 생각이 나서도 그렇지만 여기 이렇게 가족이 모여 있는데 갑자기 다른 사람이 들어와 앉아 있으면, 우리 가족의 분위기가 어떻게 되겠느냐」 하시더라구요』
―金龍泰 前 총무는 朴대통령이 돌아가기 전 1년 동안 朴대통령을 만날 수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車智澈 경호실장의 전횡을 알았습니까.
『다른 차원에서 문제가 있었어요. 청와대 출입기자들에게도 얘기를 듣고, 다른 쪽으로도 여론을 듣고, 아버지에게 말씀을 드렸어요. 돌아가시기 이틀 전에도 종합해서 보고해 드렸어요. 아버지가 분명히 어떤 결심을 단단히 하는 걸로 느꼈는데, 생각하신 걸 미처 못하고 가신 거죠』
가뭄이 들면 매일 아침 일어나서 기도
―퍼스트 레이디를 5년 했는데 힘들지 않았습니까.
『굉장히 바쁘고 벅차고, 그래도 내가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하고 최선을 다했어요. 부족한 대로 어머니 자리 메우면서 아버지를 보필해 드렸다는 걸 보람으로 알았어요. 많이 격려해 준 국민들에게 고맙죠. 그때 겪었던 일들이나 생활이 정치하는 데 도움이 많이 됩니다』
―청와대에서 대통령직이 어떤지, 정치권력이 어떤 건지 지켜봤는데, 다시 청와대에 들어가고 싶습니까. 부모님들이 거기서 다 돌아가시고, 惡夢 같은 경험이었을 텐데.
『개인적으로 얘기한다면 그 자리는 무지하게 힘든 자리예요. 말 한 마디, 행동 하나 자유가 없죠. 모든 것을 국가와 국민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 자리죠. 사소한 말 한 마디라도 엄청난 책임과 부담을 안고 해야 해요. 아버지의 고독, 노심초사를 저는 눈으로 봤어요. 개인적으로 어떠냐? 행복한 건 아니죠. 그렇지만 자기 혼자 편안하고 자유로운 게 인생의 전부는 아니잖아요. 자기가 태어난 나라가 선진국처럼 모두가 편안하고 많은 사람이 행복을 누릴 수 있는 나라로 만들고 싶은 마음은 있는 거죠』
―그런 마음이 강렬합니까.
『그럼요. 저는 있죠. 제가 대통령 자격이 있다 없다를 떠나서, 많은 사람들이 희망과 긍지를 갖고 더 행복한 나라를 만드는 데 뭔가 역할을 할 수 있다면 아무리 힘들더라도 그거야말로 얼마나 보람 있고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그런 생각을 언제부터 가졌습니까. 프랑스어를 배워서 대학교수를 하려고 할 때는 그런 생각을 못 했을 것 아닙니까.
『전혀 없었죠. 정치권에 들어오기 2~3년 전이 개인적으로는 참 행복했어요. 그 어느 때보다 자유로웠고, 마음에 부담 없이 가벼운 차림으로 유적지도 다니고 운동도 하고 그러면서 부담 없이 자유스럽게, 참 행복하다고 생각하며 살았거든요.
IMF 사태가 터지면서 굉장히 충격을 받았어요. 경제성장은 당연히 주어지는 과실로 생각했는데 이럴 수도 있구나, 나라경제가 망할 수도 있구나 생각이 들었어요. 나라가 반석 위에 서는 데 뭔가 역할을 하지 않으면 나중에 세상을 뜰 때 대단히 저를 自責(자책)할 것 같았어요. 정치권에 들어가 나라를 다시 반석 위에 올리는 데 힘을 보태자 생각했죠』
―IMF 맞았다고 갑자기 그런 생각이 불쑥 튀어 나온 건 아니겠죠.
『청와대 생활을 하면서 그런 아버지 어머니 밑에서 살지 않았다면 IMF 때 정치에 뛰어들었을까? 그렇지는 않았을 거예요. 청와대 생활이라는 게 매일 나라 걱정하는 거예요. 아버지가 식탁에서 「남쪽 지방에서 가뭄이 와 땅이 갈라지는데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얘기하시고, 손님들이 오셔도 「우리나라가 미래에는 뭘 먹고 사나. 어떤 산업을 키워야 하나」 그런 얘기예요. 그런 데 젖어서 살아요. 아버지가 여름에 휴가를 가시잖아요. 진해 저도에 가서 가뭄이 들면 매일 아침에 일어나 기도부터 했어요. 어린 나이에 나라 일이 걱정이었어요』
英國의 처녀王 엘리자베스 1세를 존경
―어떤 사람이 대통령이 돼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대통령은 확실한 국가관이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비전, 국가와 국민을 사랑하는 마음, 사심 없는 마음이 확실한 국가관 속에 포함될 거예요. 그래야 국민이 믿을 수가 있죠』
―정치인 朴正熙에게서 배운 겁니까.
『그래요. 조국근대화를 이루고 그걸 추진하실 때 아버지도 유혹이 없지 않으셨을 거예요. 그런 고독한 자리에서 아버지를 지탱한 것이 무엇이었을까? 그건 아버지의 확고한 국가관이었어요. 민족과 나라를 자기 몸처럼 사랑하셨고, 사심이 없었고, 그러니까 左顧右眄(좌고우면) 안 하고 그 일을 해낼 수 있었어요. 그걸 굉장히 깊이 느끼고 있어요』
―이런 정치인이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온 이가 있습니까. 존경하는 정치인이랄까.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 傳記(전기)를 읽고 공감하는 부분이 많았어요. 존경할 만한 지도자라고 생각했어요. 정치를 하면서 극단으로 가지 않고 의견을 모아 중용으로 가고, 어떤 것이 가장 합리적이고 바른 것인지를 찾으려고 애쓰는 것이 마음에 와 닿더라구요』
―엘리자베스 여왕이 처녀 여왕이었죠. 朴의원이 獨身(독신)인 게 대통령직 수행에 마이너스 요인이 될까요, 플러스 요인이 될까요.
『장점이 많이 있을 걸로 봐요. 제 경우 챙길 가족이나 부양할 식구가 없잖아요. 모든 걸 나라에 바칠 수 있고, 주변에 비리나 유혹이 들끓어 이상한 일이 생길 여지가 없으니까요』
―그래도 가족이 있고, 자식이 있어야 현실감각이나 균형감이 생기는 것 아닙니까.
『제가 현실감각이 없어 보여요? 현실감각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정치를 하고 정치개혁을 해요. 국민의 여망과 뜻을 모아서 대변하는 건데 현실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국민을 대변합니까』
―아시아에는 대통령이나 수상의 딸들이 자리를 이어받은 경우가 많습니다. 인도 네루 수상의 딸 인디라 간디 수상, 필리핀 마갈파갈 대통령의 딸 아로요 대통령, 인도네시아 수카르노 대통령의 딸 메가와티 대통령, 파키스탄 알리 부토 수상의 딸 부토 수상이 있습니다. 미얀마의 國父(국부) 아웅산 장군의 딸 아웅산 수지도 거의 그런 반열에 올라 있고요. 누구에게서 제일 친밀감을 느낍니까.
『그분들의 활동을 보면서 투명하고 깨끗한 정치를 하는 데 여성들이 상당히 장점이 많은 것 아니냐, 그런 면에서 주목하고 있어요. 다 한번 만나보고 누가 제일 마음에 드는지 말씀드릴게요』
『공주가 아니라 기구하게 자랐어요』
―살아오시면서 적금 들어 본 적 있습니까.
『예, 그것도 해 봤습니다』
―뭐 하시느라고 적금을 들었습니까.
『아뇨, 저금을 했죠. 적금을 든 게 아니라, 조금씩 예금을』
―장보러 다닌 적이 있습니까.
『청와대 시절에는 어려웠고, 청와대 나와서는 혼자도 많이 다녔어요』
―청와대서 18년 간 살면서 사춘기를 보내고, 대학을 나와 인격이 형성됐는데, 본인이 서민들의 情緖를 잘 안다고 생각하십니까.
『알려고 많이 노력하죠. 제 지역에 가면 많이 다녀요. 그런 데서도 많은 분을 만나고 집도 방문하고, 다 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잘 알려고 노력하죠』
―공주같이 자란 분인데 대중적인 정치지도자가 될 수 있겠나, 의구심을 보내는 분이 적지 않습니다.
『공주같이 자란 것도 아닙니다』
―그 정도면 공주같이 자란 겁니다.
『아니에요. 기구하게 자랐어요. 기구하게』
―왜 기구해요.
『저만치 고통을 많이 겪고 산 사람이 많지 않을 겁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그렇게 돌아가신 비극도 비극이지만, 그후에 겪은 일도 그렇고, 사람들은 나름대로 경험이 달라요. 소설을 쓸 정도로 어려움이 많아요』
―그걸 어떻게 이겨냈습니까.
『그만큼 제가 강하게 마음을 다졌고, 저 자신에 스스로 훈계를 많이 했고, 그걸 극복하려고 엄청난 노력을 한 겁니다. 그런 상황에서 좌절하기 쉽잖아요』
―동생 志晩(지만)씨가 약물중독으로 여러 차례 구속되는 걸 지켜보면서 마음이 아팠겠습니다.
『어려운 시절을 겪었죠. 상상이 되시잖아요』
―1998년 대구 달성 보선에서 당선됐고 이제 再選(재선) 국회의원입니다. 정치가 적성에 맞는 것 같습니까. 市井(시정)의 보통사람을 많이 만나야 하는데, 그분들을 만나면 편안합니까.
『정치 시작한 걸 후회하지 않아요. 그럼요. 항상 감사해요. 그분들이 저를 만나면 반가워하고, 저도 반갑고. 그분들이 다 나를 도와 주시니까, 믿고 도와 줬는데 배신하면 안 된다, 꼭 내가 말한 대로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이 들죠』
1979년의 10ㆍ26 이후 국민의 시야에서 사라졌던 朴槿惠씨는 1990년 育英財團(육영재단) 이사장 자리에서 물러나면서 언론, 특히 여성지들의 집중적인 조명을 받았다. 朴의원의 동생 書永(서영)씨와 일부 직원들은 육영재단 고문인 崔太敏(최태민)씨가 전횡을 일삼고 있다며, 그의 퇴진을 요구했다.
崔씨는 1975년 朴槿惠씨를 자신이 총재로 있는 「구국봉사단」의 명예총재로 추대했다. 구국봉사단은 뒤에 「새마음봉사단」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崔씨는 이 단체의 총재를 맡았다. 崔씨의 활동은 全斗煥 정권이 1980년 그를 강제로 강원도 인제에 쫓아 보낼 때까지 계속됐다. 崔씨는 1912년 생이다.
崔太敏 질문에 격앙, 『底意가 뭐예요』
崔씨가 槿惠씨를 등에 업고 각종 이권에 개입하고 있다는 풍문이 나돌아, 1977년 9월 朴正熙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崔씨 비리를 수사한 金載圭 중앙정보부장과 崔太敏씨를 대질신문시키는 희한한 광경이 펼쳐지기도 했다. 5·17 이후 합동수사본부의 李鶴捧(이학봉) 수사국장과 검찰도 崔씨 비리를 수사한 적이 있다.
朴의원에게 미스터리의 인물 崔太敏 목사에 대해 집중적으로 물었다.
잘 대답을 하던 朴의원은 崔太敏 관련 질문이 10분 이상 이어지자 『底意(저의)가 뭐예요』며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공인으로서 답변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건 알지만, 이런 식의 인터뷰는 더 이상 못 하겠다』는 그녀를 진정시켜 인터뷰를 계속했다.
―1980년대에는 뭘 했습니까.
『경로복지병원이라고, 나이드신 분들 무료로 침도 놔 드리고, 치료해 드리고, 육영재단, 장학재단 운영하고 수필집 내고, 아버지 기념사업도 2년여 했어요』
―1990년 육영재단 파동이 나면서, 퍼스트 레이디 시절에 있었던 崔太敏 목사와의 얘기가 흘러나왔습니다. 1975년 5월13일 崔목사가 임진강에서 2000여 명의 청중을 모아 놓고 구국기도회를 할 때 거기에 갔다가 그 자리에서 명예총재로 추대된 거죠.
『맞아요. 그때 나라가 어려웠어요. 월남사태도 있었고, 국민들이 굉장히 불안해 하고 북한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을 때였어요.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단결해서 나라를 구해야 한다」며 기독교 분들이 주축이 돼 하신 거예요. 퍼스트 레이디 역할 하면서 좋은 일 하시는 분들 있으면 격려해야 할 책임이 있잖아요』
―구국선교단(뒤에 구국봉사단)의 명예총재하는 걸 아버지에게 허락받았습니까.
『일일이 할 때마다 허락받는 건 아니에요. 하고 나면 말씀드리는 것도 있어요』
―崔太敏씨가 朴의원에게 「陸英修 여사가 꿈에 나타나 도와드리라고 했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 만나게 됐다는 얘기가 있는데 사실입니까.
『그런 건 아니에요. 만나서 여러 가지 얘기를 하고 싶어 하셔서 한 번 청와대에서 만났죠. 여러 가지로 나라를 걱정하시는 생각이 들어, 그분이 선교단을 할 적에 좋은 뜻으로 하니까 도와 드리기도 하고 일하는 사람을 격려하고 했어요』
―어머니가 現夢했다는 유의 얘기는 사실이 아닌가요.
『그건 아니에요. 이런 문제들이 왜 나오냐면, 제가 보궐선거와 총선을 치렀는데 그 상대가 안기부 출신이에요. 자료가 엄청나게 많아서 이런 것 저런 것 마구 공격을 했어요. 한 가지라도 사실이면 제가 국회의원 됐겠습니까. 말할 가치가 없는 주장들이에요』
朴대통령 주재 김재규, 최태민 대질심문 사건
―1975년 5월24일자 한 일간 신문 기사를 보면, 「기독십자군 창설을 위해 서부전선 5019부대에서 목사 100여 명이 3일 동안 군사훈련을 받았다. 명예총재인 근혜양이 참석한 가운데 부대장으로부터 수료증을 받고 퇴소했다」는 기사가 나옵니다. 朴의원은 「군사훈련을 통해 참 신앙이 무엇이며, 자기 민족국가를 사랑하는 마음이 무엇인가를 일깨워 주는 데 모범이 되었다」고 격려사를 하셨더군요. 목사들을 군사훈련시키고, 총참모장 총사령관까지 둔 군대식 「구국선교단」이라는 조직이 시대착오적인 게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한가하게 말할 일이 아닙니다. 나라가 어려울 때 비판하는 건 쉽죠. 목사님들이 훈련받고 하는 걸 유치하다고 보는 사람도 있을 수 있지만, 목사님들이 모두 공부한 분들이고 사회지도층인데 「나라 위기에 단결해야 한다. 정신무장하자」고 노력하는 걸 격려하지는 못할망정, 유치하다고 보면 안 되죠』
―청와대 비서관이었던 鮮于煉(선우련)씨의 증언에 따르면, 崔太敏씨가 道경찰국장, 道지사에게까지 호통을 칠 정도로 위세가 대단했고, 재벌 총수들이 崔씨에게 줄을 대기 위해 자신에게 청탁까지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한 마디로 말이 안 되죠. 5공 정권이 끝나고 청문회를 했잖아요. 아버지 돌아가시고 20년이 흘렀어요. 온갖 이야기를 끌어내서 그럴싸하게 만들어 중상모략을 할 수 있습니다. 들어 보면 「그러냐」 이럴 수도 있어요. 문제는 그게 사실이냐는 거예요. 세상에 비밀이 어디 있습니까. 崔목사가 큰소리 쳐서 권력을 휘두르고 남의 재산을 탈취했다면, 벌써 내가 이렇게 억울하게 당했다고 얘기가 다 나왔을 겁니다. 崔목사에게 사기당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하나도 안 나오잖아요. 그것 하나가 백 마디 얘기를 다 해주는 것 아닌가요』
―崔씨의 횡령건수가 14건, 2억2000만원이라는 합수부 수사기록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 감옥에 보내든지 책임을 물었겠죠. 말도 많고 모함도 많았지만 증거가 없잖아요. 아버지 살아계실 때는 권력이 무서워서 그랬다 쳐요. 그후 저도 청와대에 있다가 반대편에서 얼마나 어렵게 살았어요. 그때 저한테 무슨 말을 못 하겠어요. 당했다는 사람이 누가 있어요』
―1977년 9월 아버님께서 中情부장과 崔목사를 직접 심문했죠.
『謀略(모략)이 들어가니까. 아버지 성격에 가만 계실 분이십니까. 아버지는 분명히 조사시키고, 더군다나 딸 문젠데. 조사해서 뚜렷한 증거가 없으니까 없던 걸로 덮으신 거예요』
―中情을 제쳐두고 경호실 정보처에서 다시 崔목사를 조사하려니까, 朴의원이 밥도 안 먹고 1주일 간 두문불출해 조사를 포기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그런 적 없어요. 저는 두문불출하고 밥 안 먹고 그런 일 안 해요. 얼마나 엄청난 모략이에요. 제가 편안하게 온실에서 자랐다고 잘못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신데, 제가 여러 가지로 마음고생을 많이 했어요. 세상이 어떻다는 걸 잘 아는 이유가, 너무 많은 경험을 해서 일 거예요』
―국가정보기관에서 崔목사의 전력이 의심스럽다,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권고를 하면 따르는 게 온당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권고하던 사람이 아버지를 암살하지 않았습니까』
―崔太敏 목사가 신군부에 구속돼서 강원도 인제로 쫓겨 갔을 때 全斗煥 대통령을 상대로 석방운동을 하셨나요.
『그런 적이 없어요. 제가 말한다고 됩니까. 그때 「유신시절에 이런 일이 있었다」고 崔목사를 한 번 더 조사했지만, 혐의가 없으니까 뭘 할 수가 없었던 거예요. 그 양반이 감옥에 간 게 아니고 무슨 군부대에 가 있었어요. 문제가 있었으면 진짜 감옥에 갔든지, 돈을 물어냈든지 그렇게 됐겠죠』
『謀略한 사람들 얘기를 다 실어 줄 겁니까』
―지금도 대통령 주변의 친인척들이 大統領을 빙자해 축재를 하고 이권에 개입하는 일이 잦습니다. 사실상의 영부인을 자기 단체의 명예총재로 모신 崔목사가 위세를 이용해서 官에 압력을 가하거나, 건어물 도매상 허가를 내달라거나, 공금을 횡령했다는 주장은 개연성이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지금 이런 식으로 저한테 질문하시는 底意를 의심하고 있어요』
―저의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정말 저의를 의심합니다. 이분은 돌아가셨어요. 건어물 도매시장 허가를 받아 누가 손해를 봤다든지 한 사실이 있다면, 여러 가지 다 물으실 수 있어요. 그런데 한 건도 사기당한 사람이 없었어요. 金기자님은 수십년 간 떠돌았던 의혹을 다 열거하면서 묻고, 나는 「그런 일이 없었다」고 얘기하지만, 그게 그대로 기사로 나가면 돌아가신 분이나 그 가족은 또 피해를 보게 됩니다. 그렇게 해야 할 이유가 뭡니까. 월간조선이 그분과 무슨 억하심정이 있습니까』
―朴의원이 육영재단 이사장을 물러날 때도 崔목사가 전횡을 한다는 얘기가 나왔죠.
『그때도 별별 얘기가 다 나왔잖아요. 崔목사가 한 건이라도 감옥에 갈 만한 일을 했다든지, 피해본 사람이 있다든지, 권력을 빙자해서 뭐 한 게 없잖아요. 그게 없으면 그 다음에는 얘기하면 안 됩니다. 모략하는 사람들 얘기를 책에다 다 내실 겁니까. 왜 그러세요』
―왜 이런 식의 인터뷰가 필요하냐면, 이미 朴의원이 우리 국민이 생각하는 가장 유력한 大選후보의 한 사람이 됐기 때문입니다.
『좋아요. 제 개인에 관해 검증하는 것은 좋지만, 세상을 뜬 사람과 그 사람 가족들에 대한 거잖아요. 잘못했으면 세상 떠나고도 욕먹어야죠. 그러나 하나도 없는 것이 밝혀졌는데 모략을 쭉 나열한다는 건 안 되죠』
―쭉 나열 안 하겠습니다. 崔목사와 일한 것 때문에 유신시절, 5共시절 마음의 고초를 겪었는데 1990년까지 계속 崔목사의 도움을 받은 이유는 뭡니까.
『그때 저를 도와 주고 그런 분들이 별로 없었죠. 아버지가 매도당하던 시절이고, 누가 있었나요. 저를 와서 돕는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세상 인심이라는 게 그래요』
―육영재단 이사장을 물러날 때 다른 분도 아니고, 동생 분과 육영재단 직원들이 「최태민이 전횡을 하니까 물러나라」고 했지 않습니까.
『전횡해서 뭐 나쁜 일 한 게 있었어요? 그때 육영재단이 얼마나 잘 되고 있었는데. 전횡해서 사기를 치고 한 일이 있나요』
―같이 일을 한 사실만 있다는 말씀이죠.
『그렇죠. 그렇게 일할 수 있죠. 재단에 손해날 짓, 또는 사적으로 뭘 챙긴 게 한 건도 없는 겁니다. 10원 한 장이라도 잘못했으면 감옥에 백번이라도 갔을 분위기였어요』
―여성잡지들에 그런 얘기가 쏟아져 나왔는데 왜 법적 대응을 안 했습니까.
『인터뷰에 응하고, 텔레비전에까지 나가서 질문에 다 답했어요. 꼭 법적인 대응을 해야만 합니까』
―崔목사가 목사가 되기 전 사이비 종교의 지도자였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사이비 종교의 지도자가 아니고 정식 기독교 목사였어요. 그렇게 이상한 사람이면 내가 상대를 안 했고, 나도 알아볼 것 다 알아보고 했어요』
―그러면 마지막으로 하나만 묻겠습니다. 崔太敏 목사의 사위를 비서로 쓰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朴의원이 아직도 崔목사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능력이 되니까 쓰는 거예요. 대개 사람을 쓰고 일을 할 때 가까이 잘 알던 사람들을 쓰는 것 아닌가요』
―1980년 이후 동생들과의 사이가 소원해진 이유는 뭔가요.
『이런저런 게 겹쳤어요. 그후에는 다 없어지고, 동생들이 선거 때 와서 도와 주고, 지금은 제가 정치권에서 하는 일이 잘 되도록 안타까워도 하고 도움이 되려고 애를 써요』
―자주 만나십니까.
『자주 만나는 건 아닙니다. 저도 바쁘지만 동생들도 다 나름대로 바쁘거든요. 제사 때, 일이 있을 때 만나고 연락하죠』
「박근혜 신당」 태풍
한나라당 李會昌 총재와 朴槿惠 의원이 국민경선 개최 여부, 집단 지도체제 도입을 놓고 팽팽히 맞섰을 때 한나라당의 崔秉烈 부총재는 朴의원의 탈당 가능성을 점쳤다. 그러나 崔부총재는 『朴의원의 탈당으로 한나라당의 일각이 무너지는 일은 없을 것이고, 그런 점에서 李총재에게 큰 타격을 주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을 내놓았다.
그의 예상과 달리 朴槿惠 탈당은 미풍이 아니라 태풍으로 돌변하고 있다.
탈당 이후 朴槿惠씨의 발걸음은 의외로 한가해 보인다. 누구의 도움도 필요하지 않은 듯한 자세다. 「朴槿惠 신당」과의 연대를 모색하고 있는 金鍾泌 자민련 총재는, 朴의원이 개혁세력과의 연대를 모색하고 있다며, 『朴의원이 잘못 생각하고 있다』고 불만을 털어놓았다.
朴의원은 合縱連橫(합종연횡), 정치세력의 이합집산에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의 기준에 따르면 金鍾泌씨는 또 다른 1人지배 정당의 黨首에 불과했다. 朴의원은 서두르지 않았다. 朴의원은 『여건이 되면 地自體(지자체) 선거에 참여하고, 여의치 않으면 참여하지 않겠다』고 했다. 정당개혁의 깃발을 흔들면서, 자신의 원칙에 따르는 사람과 손을 잡겠다는 것이다.
―朴의원이 한나라당을 탈당하고 한국 정치판이 요동치고 있습니다. 한나라당의 金德龍(김덕룡), 姜三載(강삼재), 洪思德(홍사덕) 부총재가 들먹거리고, 崔秉烈 부총재는 黨 위기 수습을 위해 집단 지도체제를 大選 전에 실시하자고 나섰습니다. 민주당 경선에 참여한 민주당 후보들이 경선에서 탈락할 경우 「朴槿惠 신당」에 합류하는 방안을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朴의원이 한국정치를 상당히 불안정하게 만드셨습니다.
『안정됐다, 불안정됐다 단편적으로 볼 일은 아니에요. 이런 정치가 계속될 때 우리나라의 발전에 도움이 되겠느냐를 기준으로 봐야죠. 지금 정치가 국민들의 신뢰를 받고, 이대로 가면 잘 되겠다는 얘기를 듣고 있습니까? 「이런 정치는 못 믿겠다, 이런 정치를 바꿔라」는 게 국민의 여망입니다. 여론조사를 보면 우리 아이들이 대한민국을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은 나라」로 꼽고. 이민 가려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정치가 희망과 신뢰를 주지 못하기 때문이에요. 정치가 나라발전에 걸림돌이 되고 있으면 고쳐야죠』
―한국정치는 뭐가 문제고, 그걸 어떻게 고치려고 합니까.
『총선, 대선 때마다 정치를 바꾼다고 새 피 수혈했지만 정치가 하나도 안 바뀌었어요. 말만 바꿨지, 정당의 구조를 안 바꾼 거예요. 정당 1人지배구조가 문제예요. 모든 권한이 보스 한 사람에게 집중돼 있어요.
정당이 국고보조금을 받으면 그게 다 국민의 돈인데 투명하게 써야죠. 정책개발을 잘 해서 국민을 편안하게 하라는 돈 아닙니까. 저도 부총재였지만 어디에 어떻게 쓰는지 알지를 못해요. 黨 재정권, 공천권을 총재가 모두 쥐니까 당론을 정할 때도 총재 개인의 뜻에 맞추게 돼요. 여야간 극한 대결은 그래서 나와요. 이렇게 권력을 다 쥔 黨首(당수)가 대통령이 되면 막강한 제왕적 대통령이 되는 겁니다』
『대통령 되고 나서 정당개혁하겠다는 게 말이 됩니까』
―40년 고질병이 하루 아침에 다 치료가 되겠습니까. 朴의원이 정당개혁을 주장해 왔으니까, 한나라당에 머물면서 李총재를 견제하고, 조금씩 고쳐 가는 방안도 있지 않습니까.
『그동안 죽 얘기를 했죠. 그런데 「어느 개가 짖느냐」예요. 그래서 경선에 나가서 당 개혁도 하고 해 보겠다고 했죠. 그 전에 주장하던 걸 경선에 출마하면서 다시 했어요. 결국은 역부족이었어요. 제가 아무리 非주류고 勢가 없는 약자지만, 정당개혁은 명분이 뚜렷하니까 수용될 줄 알았어요』
―李총재가 일반 시민 50%가 참여하는 국민경선을 받아들였고, 집단 지도체제는 대통령 당선 2개월 안에 하겠다는 案을 내놓지 않았습니까. 李총재 측은 朴의원의 요구가 탈당명분 축적용이었지 眞情(진정)이 담긴 것은 아니었다고 주장합니다.
『국민경선제는 받아들였어요. 저는 선거인단 10만명을 주장했는데, 많다고 해서 7만으로 줄였어요. 3500만 유권자 가운데 적어도 0.1%는 참여해야 국민경선제지, 그것도 안 되면 국민이 경선에 들러리 서는 것이에요. 적어도 7만명으로 선거인단을 하자 합의했는데, 이걸 또 5만명으로 줄였어요. 국민 참여자는 2만5000명으로 줄었어요.
그건 좋아요. 그러나 정당개혁의 핵심은 총재직 폐지예요. 그걸 大選 끝난 다음에 하겠다는 거예요. 그게 가능하겠어요? 大選 직후에 대통령 당선자의 권한이 얼마나 막강해요. 장관 국영기업체 장 임명권을 쥔 대통령에게 전부 잘 보이려고 달려들 텐데. 누가 호랑이 목에 방울을 달겠어요』
―어떤 과정을 거쳤든 한나라당 안에서 李會昌 총재가 가장 큰 지분을 갖고 있는 것은 현실 아닐까요. 그런 현실을 인위적으로 단시간에 바꿔 달라는 요구는 무리 아닙니까.
『지분을 바꾸자는 건 아니죠. 黨 운영제도를 바꾸자는 거지. 더 이상 黨 재정과 공천권을 총재가 혼자 쥐어서는 안 돼요. 이건 시대적 요청입니다. 정치가 국민으로부터 불신을 당하는데 백번 정권 바꿔 봐야 그 정치가 나라에 무슨 도움이 되겠어요』
―한나라당에 몸담은 후 뭐가 제일 불만이었습니까.
『黨 운영 시스템이에요. 아무리 똑똑한 사람도 일단 들어오면, 줄서기를 해야 하고, 아무리 민주적인 사람도 이 시스템의 꼭대기에 서면 전횡을 하게 됩니다. 독단으로 빠지고 자기 이익만 챙기죠. 그분들이 훌륭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이런 시스템에 풍덩 빠지면 어떡할 수가 없어요. 정당개혁은 이 시스템, 이 패러다임을 바꾸자는 겁니다』
『나의 保守는 補修하자는 것』
―간단히 얘기하면, 歐美식 의회민주주의 정당체제를 강화하자는 거군요. 중앙당은 가급적 축소하고, 원내 중심으로 운영하고, 계파 없이, 정책대결 중심으로.
『그래요. 총재도 없고, 지역정당이 아닌 지역을 초월한 그런 정당, 그것이 바른 정치를 할 수 있는 정당의 모습이죠』
―새로운 정당을 만들면 총재를 없애고, 계파 지분 없애고, 상향식 공천을 하실 겁니까.
『당연히 그렇게 해야죠. 총재는 필요 없어요. 공천을 투명하게 하고, 재정을 투명하게 운영하면서 정책개발에 쓰고, 원내중심의 정책정당으로 전환해야죠. 이렇게 되면 당리당략을 앞세워 여야가 국회에서 싸울 까닭이 없어요』
―어떤 사람과 정당을 하실 겁니까. 이상과 꿈만으로 사람들을 충원할 수 있는 건 아니잖습니까. 자민련도 있고, 정치판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과 같이 일을 해야 하는 건데.
『사람보다 원칙이 중요하죠. 제가 얘기한 정당개혁을 같이 하겠다는 분이면 어떤 분이든 같이 할 수 있죠』
―자신이 左右(좌우) 어느 쪽에 위치해 있다고 생각합니까.
『딱 한 마디로 하자면 「건전 保守(보수)」예요. 어감이 「保守」 하면 있는 것 그대로 유지하고 전혀 안 변하는 것으로 생각이 돼요. 그런데 「保守」야말로 「補修(보수)」 하는 거예요. 개혁도 현실을 무시한 채 달려가다 보면 부작용이 너무 많이 생겨 改革보다는 改惡이 되기 쉬워요. 개혁은 자신이 서 있는 현실에 발을 디디고, 현실에 맞게 가야 해요』
―金潤煥 민국당 대표는 「反李會昌 세력」을 집결해 신당을 만들고, 국민후보로 朴槿惠 의원을 추대하자고 움직이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뵌 적이 없습니다』
―李壽成 前 총리를 지난 3월9일 만나서 신당 창당에 합의하셨죠.
『신당 창당에 합의했다는 건 너무 많이 나간 얘기예요. 합의를 특별히 본 것은 없습니다』
―국회의원들은 지역구도가 유지되면 편한 점이 많습니다. 총재 눈치만 보면 공천받고, 당선되기도 쉽습니다. 이런 정치권의 기득권이 있고, 오랫동안 쌓여 온 구조적인 문제점도 있고…. 匹馬單騎(필마단기)로 나서서 새로운 정치를 만들어 낼 자신이 있습니까.
『제가 다 짜놓고 나가고 있는 건 전혀 아닙니다. 「뭐 믿고 나갔냐」고 한나라당에서 누가 얘기했다는데, 뭐 믿고 나온 거 아니에요. 그런 상황에서 한나라당에 더 있을 수는 없잖아요. 이제 나는 끝났다, 정치개혁 못 한다고 손놓고 있을 수는 없잖아요. 뜻을 같이하는 사람과 힘을 모아서 해야죠』
―6월에 지방선거, 12월에 大選으로 정치 스케줄이 촉박한데.
『지방선거에 참여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어요. 지방선거에 꼭 참여해야겠다는 것도 아니에요. 이제부터 저와 생각을 같이하는 友軍들을 모아야죠. 그게 제가 할 일이고, 그러고 있습니다』
―누굴 만날 생각입니까.
『우선 전직 대통령을 한번 죽 뵈려고 해요』
『국민 지지 못 받으면 정치를 떠나야죠』
―자민련은 실체와 관계없이 朴대통령의 유업을 계승한다고 말을 하는 정당인데, 친밀감을 느끼십니까.
『기존 정당에는 어디에도 참여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자민련에서 「옳은 얘기다」 동의하는 부분도 있긴 합니다. 과거에 이랬고 저랬고 따질 시기가 아닙니다. 21세기 새로운 시대를 맞아서 산업화 민주화 길을 각각 걸은 사람들이 선진강국으로 가기 위해 힘을 모아야죠』
―대구·경북지역에서 朴의원에 대한 지지가 다른 지역에 비해 높지 않습니다. 지지율이 낮은 이유를 뭘로 보십니까.
『거기 분들이 정권교체를 간절히 바라고 계시죠. 충분히 이해합니다. 정당개혁도 하고 정권교체도 해야죠. 정권교체를 무조건 해야 한다는 건 위험한 생각이에요. 국민은 신뢰할 수 있는 정치와 정당을 원하는데, 어떻게든 정권만 잡으면 되나요. 정당개혁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에게 정권교체 때문에 표를 주면, 그 사람에게 나중에 책임을 물을 수도 없어요. 정치는 안 변할 거고. 그런 세상을 국민들이 원하는 겁니까』
―新黨(신당)을 만들어 지방선거를 치르자면, 주요 정당에서 떨어져 나온 공천탈락자들을 「이삭줍기」할 수밖에 없고 黨의 이미지가 크게 떨어질 겁니다. 민주당, 한나라당이 장악한 「人材 풀(Pool)」이 더 큰데, 그 틈바구니에서 국민들에게 과연 「아 이 사람이면 새정치 할 수 있겠다」는 사람을 내세울 수 있을까요.
『지금 당장 黨을 하겠다는 것이 아니잖아요. 상황을 봐서 地自體 선거에 참여하겠다는 것이에요. 미리 정해 놓고 하는 것이 아니니까, 어떻게 할지 지켜보세요』
―한나라당 탈당 후 여러 여론조사에서 朴의원의 지지율이 상당히 높습니다. 2위를 한 것도 있고, 이렇게 가다가 지지율이 꺼져 지지율 10% 안팎의 제3후보로 찌그러들면 어떡하실 겁니까.
『그러길 바라세요?』
―그런 상황이 올 수 있다는 건 염두에 두셔야죠.
『제가 정치계에 들어와서 소신 있게 일 할 수 있는 힘은 저한테서 나오는 게 아니고 국민의 지지에서 나왔어요. 그만큼 신뢰를 보내고 지지해 주시니까 힘있게 일할 수 있었고, 그만큼 신뢰를 받으니까 책임감이 커졌고. 국민의 지지를 못 받으면 정치를 그만둬야죠. 떠나야죠. 지지 못 받는데 정치판에 남아 있으면 국민이 얼마나 보기 싫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