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讓寧大君의 16대손
영락한 조선조 종친의 후손 李璜(이황)이 어떻게 해서 대대로 살아온 한양을 떠나 황해도 해주로 이주하게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1) 조선시대에 한양에 살던 양반 선비 가문이 지방으로 이주하는 경우는 대개 두 가지였다. 하나는 士禍(사화) 등에 연루되어 일족이 화를 피해 지방으로 피신하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생활이 궁핍해져서 낙향하는 경우였다. 李璜의 경우는 후자에 속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전설의 명산 首陽山을 뒤로 하고 망망한 바다에 면해 있는 해주는 고려조 이래로 해서지방의 군사요충지이자 행정의 중심지로 발달해 왔다. 栗谷(율곡) 李珥(이이)가 황해감사로 있을 때에 수양산 밑에서 아름다운 石潭(석담)을 발견하고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 여기에 집을 짓고 학문을 강론하자 경향 각지의 선비들이 몰려왔었다고 한다.
어떤 기록에는 해주가 「고을이 웅장하게 자리잡아 물산이 많고, 지역이 커서 四民(士, 農, 工, 商)이 모두 모여들고, 여러 고을을 관리하는 곳」이라고도 했다.2) 그리고 지리상으로 해주는 한양과도 그다지 두절된 곳이 아니었다. 이런 조건 때문에 李璜이 이곳을 이주지로 삼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李璜의 가문은 외로웠다. 자손이 많은 것이 곧 가문의 힘이던 시대에 李璜의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그리고 그 자신도 독자였다. 또 아들도 독자요 손자도 독자였다.
李璜의 손자 敬善은 용모가 수려하고, 정이 많고, 씀씀이에 인색하지 않으며, 활달한―그리고 태평스러운 인품이었다.3) 그것은 현존하는 그의 사진으로도 웬만큼 짐작할 수 있다.
敬善은 자신이 어려서 다니던 서당 훈장 金昌殷(김창은)의 외동딸 金海 金씨와 혼인하여 초년에 아들 둘을 낳았으나 천연두로 잃었다. 둘째 아들이 죽자 敬善은 격분한 나머지 역귀한테 올리는 터줏상을 몽둥이로 부수고, 역귀가 머문다는 사당 앞에서 큰 칼을 휘둘렀다. 그가 석달 동안 몸져 눕자 사람들은 그것이 그런 지각 없는 행동 때문이라고 말했다.4)
敬善에게는 딸이 둘 있었다. 큰 딸은 해주의 丹陽 禹氏 집으로, 작은 딸은 平山의 靑松 沈氏 집으로 시집을 보냈는데, 敬善은 뒷날 한양에 올라와 살면서도 이들 딸네 집을 찾아가곤 했다.
해가 거듭되어도 아들을 보지 못하는 敬善 내외가 얼마나 초조해 했을지는 짐작하기에 어렵지 않다. 敬善은 좋은 묏자리를 찾느라고 수천 냥의 돈을 썼다. 어떤 지관이 그에게 아버지의 뫼를 잘못 써서 아들이 없다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아내는 아내대로 열심히 불공을 드리러 절에 다녔다.5)
敬善은 집을 줄여 평산으로 이사했다. 황해도의 鎭山인 滅岳山(멸악산) 밑자락에 자리잡은 평산은 해주에 버금가는 큰 고을이다. 일찍이 平山都護府가 설치되어 있던 곳으로서, 「딴 지방에서 士族들이 흘러 와서 사는 자가 있다」는 기록도 있다.6) 또한 평산에는 유적지도 많은데, 馬山面의 慈母山城(자모산성)은 丙子胡亂(병자호란) 때에 적병이 공략하지 못했던 좋은 피난처로, 그리고 의적 林巨正(임꺽정)이 웅거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敬善은 이 자모산성에 가까운 大慶里 陵內洞(능안골)에 정주했다. 지명으로 보아 근처에 어떤 능이 있었을 법도 하나 어느 문헌에도 보이지 않는다. 풍수지리에 경도되었던 敬善이 이 자모산성의 지세와 함께 둘째 딸네 집과 가까운 곳이었기 때문에 이곳을 새 거주지로 택했는지 모른다.
돌상에서 붓을 잡아
敬善은 이 능안골에서 마침내 늦둥이 아들을 얻었다. 이렇게 李承晩은 6代 독자로 태어났다. 「은둔의 나라」 조선이 세계를 향해 문을 여는 계기가 된 雲揚號事件이 터지던 바로 그해인 1875년 2월19일(양력 3월26일)이었다. 敬善보다 네 살 위인 그의 아내는 손자를 볼 나이인 마흔 두 살에 아들을 낳은 것이었다.
뒷날 李承晩은 어머니가 자기는 한양 서쪽의 한 절에 모셔놓은 부처님이 주셨다고 말하곤 했었다고 적고 있다. 어머니는 그 절에 가서 불공을 드리고 난 어느 날 밤에 용이 품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고 했다. 그것이 태몽이었다. 그래서 李承晩은 어릴 적에 「용이」로 불렸다.7) 항렬이 承자였으므로 아버지는 承龍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金氏 부인이 아들을 낳기 위해 불공을 드리러 다녔던 한양 서쪽의 절이란 北漢山 기슭의 文殊庵(문수암:지금의 文殊寺)이었다. 文殊寺에 전해져 오는 말에 따르면 金氏부인은 文殊庵에서 100일기도를 드리고 나서 龍꿈을 꾸었다. 李承晩이 출생한 것은 敬善 내외가 평산에 살 때였는데, 어떻게 북한산의 문수암까지 불공을 드리러 왔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토록 바라던 아들을 얻자 敬善 내외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큰 잔치가 벌어졌고, 동네 사람들은 李씨 집안이 후사를 잇게 되었다고 축하했다. 돌날이 되어 承龍은 큰 돌상에 갖은 음식과 함께 늘어놓은 여러 가지 물건 가운데에서 붓을 잡았다.
李承晩 자신의 추측대로 아마 아기 손이 미칠 수 있는 가장 가까이에 붓을 놓아두었기 때문에 그랬을 것인데도, 金氏 부인은 여간 기뻐하지 않았다. 뒤에 金氏 부인은 承龍에게 커서 큰 학자가 될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8)
承龍이 세 살 나던 해에 敬善은 집을 정리하여 한양으로 올라왔다. 李承晩의 전기들에 따르면 敬善이 집을 정리하여 한양으로 올라 온 것은 집안 형편이 더욱 어려워졌기 때문이었다.
李承晩 자신은 그의 자서전 초고에서 『한때 그(아버지)도 부자였으나 젊은 시절에 모두 탕진해 버렸다. 어머니 말로는 내가 태어날 무렵에는 집에 재산이 없었다. 「너의 아버지는 여자나 도박에는 흥미가 없었으나 친구와 술을 위해서는 있는 대로 모두 내 놓았다」는 것이었다. 그가 친구들과 술잔을 주고받을 때에는 세상의 어떤 일도 그 보다 더 귀한 것이 없었다는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9) 다른 한 전기는 敬善이 술값으로 진 빚 때문에 陵內洞의 집마저 정리해야 할 형편이 되었기 때문이었다고 적고 있다.10)
그러나 한편으로는 어머니 金氏 부인이 외아들을 훌륭하게 키우기 위해 남편을 설득하여 한양으로 올라오게 되었다는 설명도 있다.11) 6代 독자로 태어난 承龍이 입신출세해야 가문이 살아날 수 있었으므로 敬善이 아들의 교육을 위해 조상들이 살아온 한양으로 올라올 결심을 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오로지 술빚 때문에 집을 처분해야 했을 만큼 가난하지는 않았던 것은 한양에 올라 와서도 承龍이 어릴 때에 집에 일하는 늙은 내외와 하녀 복녀를 부렸던 사실로도 짐작할 수 있다. 지금도 이화장에는 李承晩 명의로 된 평산의 임야 대장이 보존되어 있다.12)
『姓을 바꾸고 싶다』
한양으로 올라온 敬善은 처음에 남대문밖 鹽洞(염동)에 자리를 잡았다가 이태 뒤에 駱洞(낙동)으로 옮겼고, 承龍이 열한살 되던 해에 다시 至德祠(지덕사)가 있는 桃洞의 雩守峴(우수현) 밑으로 이사했다. 雩守峴은 오랫동안 비가 오지 않을 때에 기우제를 지내는 마루턱이었다. 李承晩은 이 雩守峴 밑의 오막살이집에서 어른이 될 때까지 살았다.
至德祠는 太宗의 적장자로서 세자에 책봉되기까지 했다가 아우 忠寧大君(충녕대군: 뒤의 世宗)에게 왕위를 넘겨 준 讓寧大君(양녕대군)의 유덕을 전하기 위해 肅宗(숙종) 원년(1675)에 세운 사당이다. 敬善이 至德祠 가까운 곳으로 이사한 것은 그곳에 讓寧大君의 奉祀孫(봉사손) 李根秀(이근수) 대감을 비롯하여 일가들이 모여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李承晩은 양친으로부터 들은 至德祠에 얽힌 이야기를 자서전 초고에 자세히 적고 있다.
<옛날 어느 추운 겨울날 남산골 가난한 이생원 집에 한 중이 동냥을 왔다. 그러나 그 집 주인은 장작이 없어서 추위에 불도 때지 못하고 있는 형편인데 무슨 동냥을 주느냐고 말했다. 그러자 중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건너편 至德祠 앞의 노가주나무를 가리키며 『저기 저 나무라도 베어 때시지요』하고 말했다. 그리하여 그 집에서는 그 겨울에 땔감 걱정을 하지 않게 되었다.
至德祠가 있는 골짜기 건너편 언덕에는 거창한 關帝廟(관제묘)가 있었는데, 노가주나무를 잘라버린 얼마 뒤에 임금이 그 關帝廟에 참배하러 행차하게 되었다. 이 행차는 해마다 한 번씩 있는 행사였다. 임금이 關帝廟를 나오다가 건너편에 못 보던 헌 사당이 있는 것을 보고 그 사당의 유래를 묻자 신하가 讓寧大君의 사당이라고 아뢰었다. 임금은 그 낡고 쓰러져 가는 사당을 헐고 새로 짓게 하고, 그 가난한 선비에게는 벼슬을 주고 재산을 하사했다.>
李承晩은 이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그 임금이 至德祠 중수를 명한 것은 만일 讓寧大君이 왕위 계승권을 포기하지 않았던들 지금 자기가 임금의 자리에 있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讓寧大君을 조선왕조를 창건한 太祖의 장남이라고 잘못 기술하고 있는 것은 흥미 있다.13)
이러한 至德祠는 李承晩의 어린 시절과 성장기의 교육, 특히 자신이 왕손의 후예라는 의식을 깊이 심어 주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至德祠는 1912년에 일본인들에 의해 영등포구 상도동 221번지의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다.
李承晩은 청년시절에 高宗과 조선의 조정에 대하여 누구보다도 과격한 비판자가 되는데, 그러한 비판 정신의 밑바탕에는 개혁에 대한 열정과 함께 자신이 왕위 계승권을 양보한 讓寧大君의 후예라는 의식이 미묘하게 작용하고 있었음은 그의 자서전 초고의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만일 16代 전의 나의 先祖가 그렇게 관대하게 王位繼承權을 동생에게 넘겨 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高宗의 위치에 놓여졌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高宗 치하에서 독립을 빼앗겼다. 그래서 나와 李氏 王族과의 먼 관계는 나에게는 영예가 아니라 치욕이다. 그러한 관계로 나는 姓을 바꿀 수 있는 것이라면 바꾸어 버리기라도 하겠다.14)〉
이러한 생각의 밑바탕에는 강화도령이었던 哲宗 이후의 王位繼承의 정통성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심리도 깔려 있었을지 모른다.
李承晩은 조상에 관해서 적어 놓기는 했으나 뒷날 자기의 전기를 쓰는 올리버에게 원고를 전할 때에 다음과 같은 메모를 첨부했다.
『나의 조상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말아주시오. 나의 政敵들은 내가 민주제도를 세우려고 하지 않고 (李氏)王朝를 부활시키려 한다는 자기들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서 나의 족보를 캐내려고 애를 많이 썼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적은 것은 윤곽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올리버는 李承晩의 이러한 당부에도 불구하고 李承晩 전기에서 「李承晩의 가계는 다년간 그의 울분의 대상이었고 또 어떤 점에서는 핸디캡이기도 했다」고 전제하고 나서 李承晩의 家系를 소개했다.15)
李承晩이 자신의 가계에 대해 울분을 느꼈다는 것은 자기 스스로 李씨 왕족과의 먼 관계를 『영예가 아니라 치욕이다』라고 한 위의 문장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인데, 그것은 결국 자신이 왕위 계승권을 포기한 讓寧大君의 후예라는 의식을 反證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정적들이 자기를 가리켜 (李氏)왕조를 부활시키려 한다고 했다는 말은, 李承晩을 반대한 하와이 동포 가운데 그러한 비난을 한 사람들이 없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확인하기는 어렵다.
族譜에 프란체스카 사항 적어
譜學(보학)에 능통했던 敬善은 아들에게 자기네가 王孫의 후예라는 것을 주입시키려고 노력했다. 李承晩이 어릴 때에는 말할 나위도 없고 성장하여 獨立協會의 급진 과격파로 萬民共同會를 주도할 때에도 그는 아들을 따라다니며 『너는 6代 독자이다』라는 말을 강조하곤 했다.
그는 24권으로 된 족보를 아름다운 책장에 넣어 놓고 늘 꺼내어보면서 直系는 어떻게 되고, 支派는 어떻게 되었다는 것을 훤히 꿰고 있었다. 그는 자기네 가문뿐만 아니라 다른 명문의 족보에 대해서도 밝았다.
그러나 그는 어린 承龍이 족보에 전혀 관심이 없는 것을 보고 실망했다. 그리하여 그는 아들에게 고려조 초기 이래의 직계 선조들에 관한 간략한 내용을 손수 적어서 자그마한 책자를 만들어 주었다. 그것이 「世系與四柱幷錄:璿源世譜(세계여 사주병록:선원세보)」인데, 李承晩은 이 책자를 평생동안 간직했을 뿐만 아니라 마지막 대목에 부모와 자기와 아내 프란체스카에 관한 사항을 자기 손으로 적어 넣고 있다.
그런데도 李承晩은 평생동안 족보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좋아하지 않게 된 이유라면서 어릴 때에 들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자서전 초고에 적고 있는 것은 흥미있는 일이다.
<어떤 사람이 죽은 뒤에 그의 혼이 저승에 가서 그곳 궁전의 구석구석을 안내받았다. 그러는 중에 양반들이 살고 있는 어느 한 곳에 들어갔더니 그곳에 있는 양반들은 어찌나 말라빠졌던지 뼈와 가죽만 남아 아주 가엾은 몰골들이었다. 어찌된 영문인가 하고 보고 있는데, 그 사람들이 다가왔다. 그리고 하는 말이, 자기들은 양반들의 유명한 조상들인데 자기네 후손들이 스스로 생계를 개척해 나가지 않고 늘 조상들만 뜯어먹어서 이렇게 되었으니 돌아가거든 제발 좀 그러지 말라고 일러달라고 부탁했다는 것이었다.16)>
사실 李承晩의 선조들은 李璜이 해주로 낙향하기 훨씬 전에 이미 몰락양반이 되어 있었다. 李承晩의 가계는 讓寧大君의 서자인 제5남 長平副正 (흔)의 후손들인데, 종친 예우는 讓寧大君의 증손자인 允仁으로 끝났었다.
允仁의 손자 元約이 병자호란 때에 무공을 세워 全豊君에 추증되고, 그 후광을 입은 몇몇 자손들이 무관직에 등용되기도 했으나, 李承晩의 6대조 徵夏(징하)가 陰職(음직)으로 縣令을 지내고 나서부터는 대대로 벼슬이 끊긴 채였다.17)
(2) 모반자 金自點의 방계 후손
金九의 선조들은 仁祖反正의 공신으로 仁祖 때에 크게 권세를 누렸던 金自點의 방계 후손이었다. 金自點이 孝宗 때에 역모를 꾀하여 일족이 멸문을 당하게 되자 金九의 11대조가 처자를 끌고 처음에는 고향인 경기도 高陽으로 피신했다가 그곳도 한양에 가까우므로 위험하다고 하여 다시 황해도 해주 서쪽 팔십리에 있는 白雲坊(백운방) 基洞(텃골)의 八峰山 楊哥峰(양가봉) 밑으로 옮겨 숨어 살게 되었다. 그러므로 金九 조상의 낙향은 李承晩 조상의 경우와 대조적으로 한양에 살던 양반 선비가문이 역모사건에 관련되어 화를 피해서 지방으로 이주한 경우에 해당하는 셈이다.
그리고 두 가문이 다 해주로 낙향했다는 사실은 매우 주목할 만한 일이다. 이때에 낙향한 金九의 11대조 大忠은 관직이 司果(사과)였는데, 司果란 직무가 없는 무장에게 녹봉을 주기 위해 마련한 직위로서 正6품에 해당했다. 大忠의 5대조 終智(종지)가 南平縣監을 지낸 이래로 대대로 副司直, 御侮將軍(어모장군) 등의 직무없는 무관 벼슬을 지냈다.18)
이들은 金自點의 일족임을 숨기기 위해 양반 행세를 단념하고 상민 생활을 했다. 그들은 농삿일을 하고 임야를 개간하여 생계를 유지하다가 軍役田을 경작하면서부터 아주 상놈의 패를 차게 되었다. 軍役田이란 땅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 이 땅을 부치다가 유사시에 나라에서 징병령을 내리면 병역에 응해야 하는 경작지를 말하는 것이었다. 조선조 때에는 병역이 賤役(천역)이었으므로 이러한 제도가 있었다.
『나는 상놈의 아들』
朝鮮 封建社會에서 常民은 아무런 권리가 없었다. 金九는 어려서부터 자기 집안이 그러한 「상놈」이라는 사실에 대해 심한 콤플렉스를 느끼면서 성장했다. 그의 자서전 「白凡逸志」는 여러 대목에서 그것을 토로하고 있다. 가령 뒤에서 보듯이, 그의 아버지가 숨을 거둘 때에 『연산으로 모시고 가서 만년에나 강씨, 이씨에게 상놈 대우를 받던 뼈에 사무치는 한을 면하시게 할까 하고 속으로 기대하였더니…』하고 슬퍼하고 있는 것 등은 그 대표적인 보기이다. 따라서 金九는 아마 위에 적은 직계 조상들의 신분도 모르고 자랐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뒷날 「白凡逸志」의 국내판(국사원본)을 낼 때에 원문에 없던 다음과 같은 문장을 서두에 적고 있는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한 일이다.
〈우리는 안동 金氏 敬順王의 자손이다. 신라의 마지막 임금 敬順王이 어떻게 고려 王建 太祖의 따님 樂浪公主의 부마가 되셔서 우리들의 조상이 되셨는지는 「三國史記」나 안동 金氏 족보를 보면 알 것이다. 敬順王의 8대손이 忠烈公이고, 忠烈公의 현손이 翼元公(익원공)인데, 이 어른이 우리의 시조요, 나는 翼元公에서 21대 손이다. 忠烈公과 翼元公은 다 고려조의 공신이거니와 李朝에 들어와서도 우리 조상은 대대로 서울에 살아서 글과 벼슬로 가업을 삼고 있었다.〉
그리고 이 책의 본문 앞에 있는 화보에는 金九가 귀국한 뒤에 敬順王陵을 참배하는 사진이 실려 있고, 「내 시조 敬順王陵에 제를 드렸다」는 설명이 붙어 있다. 이는 金九가 敬順王陵을 참배한 행동 그 자체와 함께 한국 사회의 권위주의적 가치관을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 이후로 金九의 가계와 관련된 모든 기록은 그가 「敬順王의 후손」임을 강조하고 있다.
가령 李承晩은 金九의 「屠倭實記(도왜실기)」의 국문판에 붙인 서문에서 金九가 「명문의 후예」라고 소개했고, 진보적 성향의 지식인이었던 安在鴻도 金九가 암살된 직후인 1949년 8월에 쓴 「白凡金九先生略史」에서 「선생의 본관은 안동이니 그 선조는 신라 마지막 임금 敬順王의 후예로서…」라고 서두에 적었다.19)
가짜 暗行御使 행세한 증조부
金氏 일족은 텃골 주위에 살고 있는 晉州(진주) 姜氏나 德水 李氏 등 토착양반들로부터 핍박과 괄시를 받으며 대대로 살았다. 金氏 집안의 처녀가 姜氏나 李氏 집안으로 시집가는 것은 영광이었으나, 두 집안의 처녀가 金氏 집안으로 시집오는 일은 없었다. 姜氏와 李氏 집안은 대대로 坊長(방장:지금의 面長)을 했으나 金氏 집안 사람은 기껏해야 尊位(존위)가 되는 것이 고작이었다. 존위란 방장의 지시에 따라 세금을 거두는 직책이었다. 姜氏와 李氏 집안 사람들은 비록 머리 땋은 어린 아이라도 칠팔십 세 되는 金氏 집안 노인에게 『하게』를 하는 한편 金氏 집안 노인들은 갓 상투를 튼 姜氏, 李氏집 아이에게도 반드시 존댓말을 썼다고 한다. 그러나 金九의 7대조 彦喊(언함)의 부인이 진주 姜氏였던 것은 퍽 예외적인 경우이기는 했겠으나 金氏 가문과 姜氏, 李氏 가문 사이에 통혼이 전혀 없지는 않았음을 보여 준다.20)
한때 金氏 집안이 꽤 창성한 때도 없지 않았다. 20여 호 되는 텃골의 金氏 집단취락에는 기와집이 즐비하고, 또 선산에는 큰 석물을 만들어 놓기도 했었다. 텃골 뒷개(後浦)에 있는 선영에는 金九의 11대조 大忠의 산소를 비롯하여 역대 선조들의 묘가 있었다.
그리고 世傳奴婢(세전노비)를 두고 있기까지 했다. 그러다가 생활이 궁핍해지자 이들 노비들을 해방시켜 주었는데, 그들 가운데에는 金氏 집안에 혼사나 장례 등 큰 일이 있을 때마다 와서 일을 보는 사람도 있었다.21)
金氏 집안은 해주에 온 이래로 글하는 사람도 없지는 않았으나 이름을 떨칠 만하지는 못했다. 그리하여 이웃 土班들의 핍박은 필연적으로 金氏 집안 사람들의 불평불만과 저항을 촉발시켰다. 金九의 증조부 榮元은 가짜로 暗行御使 행세를 하다가 체포되어 해주 관아에 갇히기도 했는데, 서울 어느 양반의 청탁편지로 형벌을 면했다고 한다.22) 그런데 그것이 사실이라면 金氏 집안은 金九의 증조부 대까지 서울의 영향력 있는 양반과 연결이 되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榮元에게 두 아들이 있었다. 큰 아들 萬默은 4남 1녀를 두었는데, 萬默의 둘째 아들 淳永은 소문난 효자였다. 淳永은 집안이 가난하여 오랫동안 장가를 들지 못하고 있다가 스물네 살이 되어서야 三角婚으로 長淵 牧甘坊 文山村의 열네살 난 玄風 郭氏(뒤에 이름을 「樂園」으로 지었다)와 혼인했다. 삼각혼이란 혼비를 절약하기 위해 세 집안이 서로 딸을 바꾸는 것으로서, 주로 하층사회의 혼인 풍습이었다. 이를 「물레 혼인」 또는 「물레 바꿈」이라고도 일컬었다.
아버지 품에 안겨 동냥젖 먹어
淳永은 혼인을 하고도 집을 마련하지 못하여 3년 동안 아들 하나뿐인 작은 아버지 집에 더부살이를 했다. 그리하여 따로 살림을 나던 해에 金九가 태어났다. 1876년 7월11일(양력 8월29일). 그것은 李承晩이 태어난 지 한 해 뒤이며, 이 나라의 역사가 크게 달라지는 丙子修好條約(한·일수호조약)이 채결되던 해였다. 郭氏 부인이 꿈에 푸른 밤송이에서 크고 붉은 밤 한 개를 얻어 깊이 감추어 둔 것이 태몽이었다. 그것은 용이 金氏 부인의 품속으로 들어왔다는 李承晩의 태몽과는 퍽 대조적이다.
金九 스스로 술회하고 있듯이, 기구한 일생의 조짐이었는지 그의 출생은 유례 없는 난산이었다. 사람들이 웅덩이 큰 댁이라고 부르는 할아버지와 큰아버지가 사는 집에서 해산을 했는데, 진통이 있은 지 일주일 가까이 되도록 아이는 태어나지 않았고 産母의 생명은 위험했다. 친척들이 모두 모여 온갖 의약을 쓰고 미신 방법을 시험해 보았으나 효력이 없었다.
사태가 황급해지자 집안 어른들은 淳永에게 소길마를 머리에 쓰고 지붕 꼭대기에 올라가 소울음 소리를 내라고 했다. 그것은 난산의 경우 産母의 고통을 나누기 위한 의식으로서 평안도와 해서지방의 풍속이었다. 淳永은 처음에 거절했으나 어른들의 호통으로 시키는 대로 했다. 그런 뒤에야 아기가 태어났다.
그런데 이날은 공교롭게도 淳永의 어머니가 숨을 거두는 날이기도 했다. 淳永은 이때에 왼손 무명지를 칼로 잘라 어머니의 입에 피를 흘려 넣어 사흘을 더 버티게 하고 있었다고 한다.23) 부모나 남편이 위독할 때에 피를 내어 먹이려고 자기의 손가락을 자르는 이른바 斷指(단지)는 허벅지의 살을 베는 割股(할고)와 함께 효행과 정절의 극치로 평가되는 행위이다. 뒤에서 보듯이 金九도 淳永이 죽을 때에 割股를 하고 있다.
郭氏 부인은 체구도 작은 데다가 어린 나이에 고된 일로 많은 고생을 하고 열일곱에 아들을 낳았던 것인데, 젖이 부족하여 암죽을 끓여 먹이면서 차라리 아이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한탄하곤 했다고 한다.
郭氏 부인은 그 뒤로는 아이를 낳지 못했다. 그러나 부부의 정분은 좋았다. 淳永은 갓난 아이를 품고 근처의 젖먹이 있는 집을 찾아다니며 젖을 얻어 먹였다. 淳永의 먼 친척 아주머니 뻘 되는 핏개댁(稷浦宅)은 밤중에 찾아가도 조금도 싫어하는 내색을 하지 않고 아이에게 젖을 물려 주었다.
그런데 이러한 모유의 부족은 金九의 유아기 잠재의식에 부족감과 불만을 심어 주었을 것이며, 그것이 그의 인격형성에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이때의 일과 관련하여 金九 자신은 「내 나이 열 살 남짓에 그분(핏개댁)이 돌아가셔서 텃골 동산에 묻혔는데, 나는 그 묘를 지날 때마다 경의를 표하였다」고 적고 있다.24)
(3) 어머니에게서 五百羅漢 이야기 들어
이처럼 李承晩과 金九는 두 사람 다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므로 그들의 유년기의 성장에는 부모들의 영향이 압도적으로 컸다. 李承晩이 어릴 때의 이야기를 적으면서 『이 모든 것은 어머니와 두 누이한테서 들은 것이다25)』라고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李承晩은 어릴 때에 두 누이의 사랑도 받고 자랐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두 누이는 李承晩이 태어나기 전에 이미 출가해 있어서 함께 생활하지는 않았다.
李承晩은 아버지를 닮아 강건한 체력을 타고 났는데, 이는 육체적 고초를 동반하는 뒷날의 파란만장한 생애에서 큰 자산이 된다. 또한 金氏 부인의 정성어린 양육도 그가 건강하게 자라는 데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李承晩은 어머니 품에서 어머니의 젖을 먹으며 자랐다.
여든이 넘어서도 누룽지 즐겨
金氏 부인은 음식솜씨가 좋았던 것 같다. 대통령 재임시에 李承晩은 이따금 비지찌개나 된장떡을 만들어 달라고 했는데, 주방에서 정성껏 만들어 올리면 『우리 어머니가 만들어 주시던 그 맛이 아니야』 하면서도 맛있게 먹었다고 한다. 작고하기 얼마 전에도 『내가 남의 나라 음식도 많이 먹어 보았지만 우리나라 음식이 제일이야. 그 중에서도 우리 어머니가 담그셨던 동치미는 정말 맛있었지』 하며 어머니 손맛을 그리워하기도 했다.
金氏 부인은 달걀찜과 두부찌개를 만들 때에는 새우젓 국물로 간을 맞추었는데, 그 맛에 길들여진 李承晩의 입맛에 맞도록 뒷날 프란체스카도 달걀찜과 두부찌개를 만들 때에는 새우젓을 썼다.
李承晩은 여든이 넘어서도 간식으로 누룽지를 먹을 정도로 이가 튼튼했는데, 李承晩은 자신이 이가 좋은 것은 어머니가 담근 동치미와 김치를 먹고 자란 덕분이라고 늘 자랑했다고 한다.26)
承龍은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놀기를 좋아하는 개구쟁이 소년으로 자랐다. 承龍은 끼니 때와 잠자는 시간과 책 읽는 시간을 빼놓고는 집 밖에 나가서 뛰놀았다. 장난은 심했으나 재미있고 용감한 아이였고, 친구들 사이에 인기가 있었다고 같이 자란 李丙胄는 회상하고 있다.27)
承龍은 나막신을 신고 다녔다. 나막신을 신고 성벽에 올라 아슬아슬하게 걷는 묘기로 친구들을 즐겁게 해주기도 했고, 대보름에는 성벽 위에서 돌을 던지며 놀았다. 그리하여 「나막신 선비」라는 별명이 붙었다. 설이 돌아오면 대나무를 다듬어서 연을 만들어 날렸다. 우수현 고갯마루는 바람이 세기 때문에 연날리기가 좋았을 것이다. 노년에 李承晩은 『참 연날리기를 많이 했지』라는 말을 자주 했다.
대통령의 바쁜 일정 속에서도 「한국일보」社 주최 전국 연날리기 대회에 하루 두 번씩이나 들러 손수 얼레짓을 해 보인 것도 이런 어린 시절의 향수에서였을 것이다. 그 얼레짓이 보통솜씨가 아니더라고 옆에서 지켜보았던 張基榮은 말했다.
承龍은 또 남사당패를 따라가 광대놀이를 구경하며 즐기기도 했다. 『어, 사당 놀이야…』하고 남사당패가 흥을 돋우면 구경꾼들은 엽전을 던져 주기도 했는데, 어린 承龍도 따라 엽전을 던져 주기도 했다. 뒷날 그는 『남사당 놀이는 참 재미있었어. 아마 그들(남사당패)은 행복했을 거야』하고 말하기도 했다.28)
흥과 장난기가 많은 承龍은 남사당놀이 구경을 하고 와서 사당패 흉내를 그대로 내며 신이 나서 사람들을 웃기기도 했는데, 어느 날 그런 장면을 아버지에게 들켰다. 敬善은 크게 노하여 『회초리 가지고 내 방으로 오너라』하고 불러 承龍의 걷어올린 종아리를 호되게 때렸다. 아들이 매를 맞을 때면 金氏 부인은 아들이 매를 다 맞을 때까지 문 밖에서 기다렸다.29)
敬善은 동네 사람들로부터 『샌님은 더할 나위 없는 양반이시다』는 말을 듣는 선비였다. 그는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신 뒤에도 비틀거리는 일이 없었다. 그가 만취했을 때에는 얼굴이 창백해져서 천천히, 그리고 침착하게 걸음을 걸었다.30) 그는 아들에게 고전 詩文이나 名家의 문장을 외우게 하고, 아들이 가다가 막힐라치면 머리를 설레설레 저으면서 자기가 이어 주곤 했다. 敬善은 어린 承龍에게 경전 말고도 실생활의 교훈이 되는 격언도 많이 가르쳐 주었다. 敬善은 아들에게 「고목에 꽃이 피랴」는 속담의 보기를 들면서 오지도 않을 복을 바라고 있지 말라고 가르치기도 했다고 李承晩의 전기 작가는 적고 있다.31)
아버지는 나귀 타고 周遊天下
그러나 敬善은 집을 비우는 때가 많았다. 그는 털빛이 서릿발처럼 흰 서산나귀 한 마리를 애지중지하며 먹이고 있었다. 그는 이 나귀를 타고 나침반을 차고 아버지의 뫼를 쓸 명당 자리를 찾느라고 金剛山이고 어디고 두루 찾아 다니는 것이 그의 오랜 습벽이었다. 敬善이 그토록 명당을 찾아 헤맨 것은 과거에 실패하여 가문을 일으키지 못한 한이 맺힌 그로서 늦둥이 외아들 承龍의 입신출세를 그만큼 간절히 바랐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처음에는 명당을 찾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으나 세월이 지나면서 세태를 벗어나 경계 좋은 산천을 周遊하는 것 자체가 그의 취향이 되어 버렸던 것 같다. 불시에 나귀등에 올라 앉아 방울소리를 울리며 집을 나가서는 서너 달, 때로는 한 해가 기울어도 소식이 없다가 문득 어느 눈내리는 날 밤에 다시 방울소리를 울리며 집에 돌아오는 때도 있었다고 한다.32)
이러한 아버지를 李承晩은 그다지 존경하지 않았던 것 같다. 죽은 조상들만 뜯어먹고 사는 양반들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는 데서 보듯이, 가난한 형편에 족보만 들여다 보고 앉았는가 하면 명당자리를 찾는다면서 오래 집을 비우는 아버지가 어린 承龍에게는 못 마땅했을 것이다. 성장해서도 李承晩은 아버지를 제대로 모시지 못했다.
노후의 敬善은 뒤에서 보듯이 동네아이들을 가르치며 혼자서 궁색하게 살다가 평산의 둘째 딸네집으로 내려가 생애를 마치게 된다. 李承晩이 자서전 초고에서 『그(아버지)는 만년에 나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른다. 나는 그때의 그를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33)』고 적고 있는 것도 아버지와의 관계에 대한 심리적 갈등을 말해 주는 것일 것이다.
이런 아버지였으므로 어린 承龍은 어머니로부터 훨씬 더 많은 영향을 받고 자랐다. 金氏 부인은 빗살이 작고 촘촘한 참빗으로 아들의 머리를 빗겨 주었는데, 承龍은 너무 아파서 울곤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李承晩은 이 참빗을 일생동안 저고리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사용했고, 운명하기 전 하와이의 병실에서도 이 빗을 만지며 고국을 그리워했다고 한다.34)
金氏 부인은 독실한 불교신자였고, 또 기본적인 한문소양을 지니고 있었다. 집안 살림도 金氏 부인이 몰래 삯바느질까지 해가며 꾸려 나갔다고 한다.
承龍이 어머니로부터 전수받은 가장 큰 정신적 영향은 불교였다. 承龍은 어머니에게서 들은 釋迦牟尼(석가모니)의 前生譚이나 五百羅漢의 이야기를 어른이 되어서도 자세히 기억했다.
절간에 들어서면 제 집에 온듯
金氏 부인은 아들에게 五百羅漢 설화를 다음과 같이 들려 주었다.
〈釋迦牟尼가 불교를 설법하고 기도할 때마다 「南無阿彌陀佛(남무아미타불)」을 300번 이상씩 되뇌이며 온 누리를 여행하고 있을 때였다. 어느 날 그는 피곤해서 기장 들판의 한 쪽 구석에 쉬려고 앉았다. 마침 곡식이 아주 잘 익어 이삭들은 낟알이 차서 늘어져 있었다. 지친 釋迦牟尼는 한창 수확 때인 들녘의 아름다운 정경에 감격하면서 무의식적으로 기장 이삭을 건드렸다. 낟알 세 개가 그의 손에 떨어졌다.
그는 소중한 낟알을 버리기가 아까워 별다른 생각 없이 그것을 입에 넣었다. 그러나 그는 이내 농부가 일년 내내 일해서 얻은 첫 수확을 자기가 먹어버려 농부에게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깜짝 놀랐다. 그는 즉시 제자들을 해산시키고 스스로 큰 소로 변신했다. 이 釋迦牟尼 소는 그 농부의 집으로 가서 낟알 셋을 먹은 代價(대가)로 3년 동안 일을 했다. 그 3년 동안에 농부는 널리 소문이 날 만큼 큰 부자가 되었다.
어느 날 아침에 농부는 그의 소가 자기를 찾아 와서 마치 사람처럼 말을 하는 것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소는 농부에게 그날 밤에 그 집을 찾아오는 손님 500명을 대접해야 한다고 말했다. 농부는 이상스럽고 두려운 마음으로 500명을 위한 잔치를 준비했다. 그날 밤에 500명의 도둑 떼가 그 집에 들이닥쳤다. 굶주린 밤손님들이 한참 음식을 즐길 때에 그 소는 외양간에서 나와 도둑들에게 낟알 셋을 먹었던 것과 그 代價로 3년 동안 일을 했던 것을 모두 이야기했다.
농부에게 충분히 보상을 했으므로 釋迦牟尼는 그와 작별하고 다시 설법에 나섰다. 그 노상강도들은 모두 자신들의 죄를 뉘우치고 釋迦牟尼를 따랐다. 그것이 羅漢들의 기원이었다.35)>
그런데 이러한 五百羅漢의 설화는 釋迦牟尼의 일생을 다룬 경전인 「佛所行讚(불소행찬)」이나 그밖의 불교 설화집 등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불교경전에 대한 지식이 대중화되지 못했던 당시의 상황으로 미루어 金氏 부인은 아마도 文殊庵의 승려 등을 통하여 불교 교리에 대해서도 웬만큼 통달해 있었던 것 같다.
어린 承龍은 어머니의 말을 사실로 믿었다. 金氏 부인은 承龍의 생일 때마다 그를 북한산 기슭의 文殊庵에 보내어 불공을 드리게 했는데, 불공을 드리러 갈 때에는 사흘 동안 집에서 금식을 하고 사람이나 짐승의 피라든가 시체와 같은 부정한 것을 보지 말아야 했다. 그렇게 한 다음 하녀인 복녀를 따라 文殊庵에 처음 갔을 때의 일을 李承晩은 그의 자서전 초고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북한산에 자리잡은 그 아름다운 절의 첫 인상은 어찌나 좋았던지 나의 기억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영적인 분위기와 금욕적인 환경 속에서 모든 것이 어찌나 속세와 다르던지 나는 꿈나라에 간 기분이었다. 형형색색의 옷을 입고 모자를 쓴 五百羅漢들이 웅장한 불당에 나란히 앉아 있었고, 벽에는 극락과 지옥의 그림들이 황홀하게 그려져 있었다.36)>
李承晩은 대통령 재임 때에도 노구를 무릅쓰고 이 文殊庵을 찾았다. 어린 시절 불교의 영향은 李承晩이 성장하여 일생동안 직접 간접으로 기독교와 관련된 생활을 하면서도 지워지지 않았다. 뒷날 대통령이 된 뒤에 타락한 사찰의 淨化에 크게 관심을 기울이는 것도 어린 시절에 불교로부터 받은 영향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李承晩은 심지어 자기는 교회에 나가지만 『교회에 가면 어쩐지 남의 집에 간 것 같고, 절간에 들르면 제집에 들어서는 것 같다』고까지 토로한 적이 있다.37)
여섯 살에 「千字文」 떼어
承龍은 한문교육도 어머니에게서 먼저 받았다. 맨 처음은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千字文」을 외우는 것이었는데, 金氏 부인은 어린 아들에게 매질을 해가면서 글을 가르쳤다. 承龍은 총명했다. 여섯 살에 「千字文」을 떼었는데, 그것이 무척이나 대견스러웠던 敬善 내외는 동네 사람들을 불러 잔치를 베풀었다. 「千字文」을 떼자 「童蒙先習」을 익혔다.
金氏 부인은 아들에게 詩도 가르쳤다. 李承晩은 뒷날 어떤 감회를 느낄 때마다 그 자리에서 漢詩를 짓곤 했는데, 이는 어릴 때에 어머니로부터 받은 교육이 원천이 되었던 것같다. 그것은 李承晩이 자서전 초고에서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는 것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나의 첫 詩想도 어머니가 가르쳐 주었다. 내가 어릴 때에 지은 한 구절의 아동시가 나의 마음속에 얼마나 깊이 새겨졌던지, 그 뒤에 나는 오랫동안 그런 詩를 지으려고 애를 쓰곤 했다.
風無手而木(바람은 손이 없어도 뭇 나무를 흔들고)/月無足而行空(달은 발이 없어도 하늘을 건너간다)38)〉
李承晩은 자서전 초고를 영어로 썼는데, 이 詩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The wind has no hands but it shakes all the trees;
The moon has no feet but travels across the sky.>
이 영문시는 올리버가 쓴 전기에는 그대로 인용되어 있으나39) 서정주가 쓴 것에는 없다. 金氏 부인은 承龍의 교육에 온 정성을 다 쏟았다. 金氏 부인은 承龍이 글씨를 쓰는 데 행여 지장이 있을까 하여 무거운 물건을 들지 못하게 하고, 돌팔매질도 못하게 했다.40)
承龍은 열심히 글씨를 썼는데, 敬善은 곧잘 사람들을 불러 아들의 글씨 쓰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많은 사람들이 둘러서서 『야, 그 도령 잘 쓴다』하고 탄성을 올릴 때면 承龍은 여간 기쁘고 자랑스럽지 않았다.41)
金氏 부인의 교육에 의한 빠른 학습의 성취는 「왕손 후예의 6代 독자」임을 강조하는 敬善의 훈계와 함께 承龍으로 하여금 상대적 우월감과 함께 자신의 존재에 대한 특별한 긍지를 느끼게 했으며, 그것이 일생을 두고 그를 남다른 사명감과 자신감에 찬 인간형으로 발전시켰을 것이다.
천연두로 視力 잃을 위기 겪어
어린 承龍이 여섯 살 때에 천연두를 앓고, 倂發症(병발증)으로 몇 달 동안 실명 상태에 빠졌던 것은 그의 생애 최초의 큰 시련이었다. 이때의 일을 그의 전기들은 매우 극적으로 서술하고 있는데, 그것은 李承晩이 그만큼 자세히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두창, 손님, 마마, 홍역 등 많은 이름으로 불리는 천연두는 무서운 전염병이었다. 조선조의 全시대에 걸쳐 계속 유행했었고 전염 규모도 엄청난 것이어서 사람들의 공포의 대상이 되어 왔다. 그리하여 肅宗, 英祖 때에는 내의원에 痘科(두과)의 전문의를 두기도 했었다. 천연두의 예방접종은 正祖 때에 丁若鏞(정약용)에 의하여 처음으로 도입되었으나, 불행하게도 西學 배척의 분위기에 밀려 중단되고, 池錫永(지석영)에 의하여 본격적인 種痘사업이 실시된 것은 1879년에 이르러서였다.42)
그러나 그 종두사업도 충분한 것은 아니었다. 承龍도 물론 예방접종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일찍이 천연두로 두 아들을 잃었던 敬善 내외가 承龍이 천연두를 앓고 게다가 눈까지 멀게 되자 얼마나 당황했을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承龍은 빨갛게 단 쇠붙이가 두 눈을 찌르는 것같이 아팠다고 했다.
소년은 아픔을 견디지 못하고 펄쩍펄쩍 뛰어서 한쪽 구들이 내려 앉았다. 집에서 일하는 늙은 부부가 두꺼운 포대기로 햇빛을 가리고 承龍을 업고 달래었다. 敬善 내외는 매일 치성을 드리고 약을 구하기 위해 의원들과 친지들을 찾아 다녔다. 100가지도 더 되는 약을 써 보았을 것이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敬善은 惠民署의 郎官을 지낸 친척 李浩善이 권하는 대로 아들을 외국인 의사에게 데려가 보이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그것은 여간 용기가 필요한 일이 아니었다. 承龍이 눈을 동여 맨 채 조그마한 가마를 타고 집을 나갈 때에 金氏 부인은 아들을 묻으러 보내기나 하는 것처럼 목을 놓고 울었다.
敬善이 찾아간 사람은 일본인 의사였다. 의사는 진찰을 마치고 물약 한 병을 주면서 하루에 세 번씩 承龍의 눈에 넣어 주라고 말하고, 사흘 뒤에 효과를 잘 살펴보라고 했다. 사흘째 되는 날은 공교롭게도 承龍이 일곱 살이 되는 생일이었다. 그리고 의사의 말대로 이날 承龍은 시력을 되찾았다. 그토록 심하게 앓던 눈병이 어떻게 이처럼 간단히 치료될 수 있었는지 적이 의심스러운 일이기는 하다.
敬善은 감사의 표시로서 달걀 한 꾸러미를 들고 아들과 함께 의사를 찾아갔다. 그러나 의사는 『댁의 아들이 나보다 더 달걀을 먹어야 합니다』하고 말하면서 사양했다. 이것이 承龍이 외국사람을 만난 첫 경험이었다.43) 李承晩은 대통령 재임 때에 李浩善의 후손을 찾았고, 1957년 6월15일에 경무대로 찾아온 浩善의 손자며느리 연안 金氏에게 어려서 눈병을 앓던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44)
그런데 올리버는 承龍이 천연두를 앓은 것이 아홉 살 때였고, 찾아간 의사는 초대 선교사인 호레이스 N. 알렌(Horace Newton Allen)이었다고 적고 있다.45) 그러나 이는 착오이다. 왜냐하면 알렌이 고종의 허락을 얻어 薺洞(제동)에 廣惠院을 설치한 것은 甲申政變이 나던 1884년의 일이고, 이때에 承龍은 열 살이 되어 있었다.
承龍이 진고개에 있는 일본인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았다는 徐廷柱의 기술46)이나 讓寧大君派 종회의 전 都有司 李丙圭의 증언47)도 정확하지 않아 보인다. 承龍이 천연두를 앓던 해인 1880년에는 하나부사 요시타다(花房義質) 일본 변리공사가 서대문 밖에 임시공사관을 설치하고 마에다 기요노리(前田淸則)라는 해군 군의관으로 하여금 배속 의관으로서 내왕하게 하고 있었고, 서울에 일본인 병원이 생기는 것은 3년 뒤인 1883년 6월에 일본 공사관 옆에 日本館醫院을 특설하고 거류 日人들과 함께 조선인들에게도 의료를 실시하기 시작하는 것이 효시였기 때문이다.48) 그러므로 李浩善의 주선으로 承龍을 치료해 준 의사는 일본 임시공사관의 군의관이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
(4) 「水滸誌」의 영웅 같은 아버지
金九도 아버지를 닮아서 건장한 체구와 강한 의협심과 용맹을 타고 났었고, 그것이 계속되는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면서, 李承晩과는 또 다른 풍운의 생애를 성공적으로 살아갈 수 있었던 저력이 되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金九 자신도 「白凡逸志」 상권을 마무리하면서 『내 일생에서 제일 행복이라 할 것은 기질이 튼튼한 것이다. 거의 5년의 감옥 고역을 하루도 병으로 쉰 적이 없고 인천 감옥에서 학질에 걸려 반나절 동안 역을 쉰 적이 있을 뿐이다』하고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49)
金九의 아명은 昌巖이었다. 昌巖도 서너 살 때에 천연두를 앓았는데, 「白凡逸志」에 그것과 관련한 특별한 내용이 없는 것으로 보아 심하게 앓지는 않았던 것 같다. 다만 어머니 郭氏 부인이 보통 종기를 치료할 때처럼 대나무 침으로 얼굴에 솟은 돌기에 고름이 맺힌 것을 따고 고름을 짜냈기 때문에 얼굴에 자국이 많이 생겼다고 한다.50)
昌巖은 어머니 郭氏 부인보다도 아버지 淳永으로부터 더 많은 영향을 받고 자랐다. 淳永은 金九 자신의 말로는 『학식은 이름 석 자를 쓸 줄 아는 정도』였다고 하나, 그보다는 나은 수준이었던 것 같으며, 허우대가 좋고 성격이 호방했다. 술이 한량이 없었는데, 취기가 오르면 이웃 양반 姜氏, 李氏네 사람들을 만나는 대로 두들겨 패서 1년에도 여러 차례 해주 관아에 구금되어 문중에 소동을 일으키곤 했다.
사람을 구타하여 상해를 입히면 맞은 사람을 떠메다가 때린 사람집에 눕혀 두고 죽는지 사는지를 지켜보는 것이 그 무렵의 지방 관습이었다. 그 때문에 한 달에도 몇 번씩 거의 죽게 된 사람이나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사람이 淳永의 집 사랑방에 누워 있기가 일쑤였다. 淳永이 사람을 잘 팬 것은 술기운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불평 불만이 남달리 컸고 의협심이 강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金九는 자기 아버지가 『마치 「水滸誌(수호지)」에 나오는 영웅처럼 강자가 약자를 능멸하는 것을 보면 친·불친을 불문하고 참지 못하는 불 같은 성격이었다』고 적고 있다.51) 그래서 淳永에 대해 인근 상민들은 두려워서 공경하고 양반들은 슬슬 피했다.
『너도 술을 먹으면 자살하겠다』
淳永 형제의 음주벽에 관한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는 어린 昌巖에게 준 가정환경의 영향이 어떠했는가를 짐작하게 한다.
昌巖의 넷째 삼촌 俊永도 淳永과 마찬가지로 술이 과했고, 취하면 곧잘 소란을 일으키는 것도 淳永과 비슷했다. 그러나 그는 淳永과 반대로 양반에게는 감히 덤비지 못하고 문중 친척들에게만 위 아래 없이 욕을 하면서 싸움을 걸었다.
昌巖이 아홉 살 때에 큰 아버지 伯永의 장례식이 있었는데,52) 俊永의 행패로 장례식이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 俊永이 술에 취해 상여꾼을 모조리 두들겨 패버려 낭패하자 인근 양반들이 큰 생색을 내느라고 노복을 한 사람씩 보내어 다시 상여를 메고 가게 했다. 그러자 俊永은 그들까지 때려서 모두 쫓아버리고 말았다.
마침내 俊永을 결박하여 집에 가두어 놓고 집안 사람끼리 운구하여 장례를 치르고 나서 가족회의를 열었다. 昌巖의 종증조부 주관으로 연 가족회의는 俊永을 앉은뱅이로 만들기로 결의하고 그의 두 발뒤꿈치를 베어버렸다. 다행히 힘줄이 상하지는 않아 병신은 되지 않았다. 아무리 홧김에 내린 결정이라고 하더라도 이러한 가족회의의 결정은 과격한 처사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뒷날 金九가 「白凡逸志」에서 이 사실을 두고 「지금 생각해 보면 이것이 상놈의 본색이요 所爲라 하겠다」라고 적고 있는 것은, 비록 조락한 시기의 臨時政府이기는 했으나 그 수반인 國務領까지 역임한 뒤인 이때까지도 그가 양반 콤플렉스를 불식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또한 그러면서도 이처럼 자랑스러울 수 없는 이야기를 자세히 소개하고 있는 데서 우리는 金九의 솔직한 성품을 느낄 수 있다.
俊永이 종증조부의 사랑에 누워 범같이 울부짖는 바람에 어린 昌巖은 무서워서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이때에 郭氏 부인은 아들을 보고 『우리 집에 허다한 풍파가 모두 술 때문에 생기는데, 두고 보아 네가 술을 먹는다면 나는 단연코 자살을 하여서도 네 꼴을 보지 않겠다』하고 말했다. 이때의 일을 회상하면서 金九는 『나는 이 말씀을 마음 깊이 새겼다』하고 맺고 있다.53)
해마다 세밑이 되면 淳永은 닭이며 달걀이며 담배 같은 것을 준비하여 營吏廳과 使令廳 사람들에게 선물을 보냈다. 그러면 그 답례로 책력이나 해주 먹 같은 것이 왔다. 이처럼 미리 손을 써두는 것을 禾契房(계방)이라고 했는데, 이렇게 계방을 해두면 소송을 하게 되는 경우에는 말할 것도 없고 만일에 營門이나 本衙(본아)에 잡혀가서 옥이나 영청에 갇히더라도 사실은 使令이나 營吏들과 같이 먹고 자는 것과 마찬가지이며, 비록 태장이나 곤장을 맞게 되더라도 아프지 않게 때리는 시늉만 하는 것이었다.
옥에서 나와 반대 소송을 제기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하여 양반토호들을 구속시키고 나면 그들은 재산을 있는 대로 써서 監司나 判官에게 뇌물을 주고 모면하더라도 使令이나 營屬들에게 별별 고통을 당하게 된다. 실제로 그런 수단으로 해서지방에서 1년 동안에 부호 10여 명이 낭패를 당하기도 했다고 한다.54)
이러한 淳永이 都尊位에 천거된 것은 인근 양반들의 회유책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淳永은 도존위가 된 뒤에도 양반들에게 고분고분한 다른 존위들과는 반대로 그들한테서는 엄격하게 세금을 거두고 빈천한 사람들한테서는 자기가 부담할망정 가혹하게 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양반들은 金淳永이라고 하면 부녀자나 아이들까지도 손가락질을 하며 미워했다고 한다. 淳永이 양반들 사랑에 들를라치면 그 주인이 다른 양반들과 같이 있을 때에는 『허, 金존위 왔는가』하고 낮춤말을 썼다가도, 혼자 있을 때에는 이따금 『이랬소』 『저랬소』하고 이른바 머드레 공대를 하곤 했다. 淳永은 결국 3년이 못 가서 공금을 축내었다고 해서 면직되고 말았다.
아버지 숟갈 분질러 엿 사먹어
이러한 아버지의 외아들로 태어난 昌巖은 말 없는 아이로 자랐다. 다음과 같은 몇 가지 金九의 어릴 때의 에피소드는 그의 타고난 성품과 성장기의 생활 환경을 잘 말해준다.
<昌巖이 네 살 때의 일이다. 郭氏 부인이 화로에 꽂아두고 쓰는 부서리(작은 부삽)를 가지고 놀다가 그만 그것이 손등에 쩍 달라붙었다. 그런데 아이는 울지도 않고 앉아서 『어, 부서리가 손등에 붙었다』하고 말했다.55)>
<郭氏 부인은 昌巖에게 따로 옷을 해 입힐 수 없어서 한참동안 어른의 헌 저고리를 입혀 밖으로 내보내었다. 하루는 날이 저물어 같이 놀던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 올 때에 昌巖이 보이지 않았다. 저쪽 풀밭에 혼자 엉거주춤 하고 서 있기에 아이들이 가 보았더니 『똥구멍에 나무가 박혔다』하고 말했다. 땅바닥에 앉다가 항문에 나무조각이 박혔던 것이다.56)
金九의 아들 金信은 아버지가 어릴 때에 가난해서 열 네 살이 되도록 바지를 입지 못하고 자랐다고 할머니한테서 들었다고 말하고 있으나57) 이 말은 조금 과장이다. 金九는 열두 살 때에 동네 아이들과 함께 훈장을 초빙하여 글공부를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金九가 어려서 한참동안 어른의 헌 저고리만 입고 자랐던 것은 金信의 말로도 확인할 수 있다.〉
위의 두 가지 이야기는 郭氏 부인으로부터 직접 들은 사람들이 전하는 말이다. 그리고 金九 자신은 그의 자서전에서 어릴 때의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다.
〈淳永은 昌巖이 다섯 살 때에 몇몇 일가집들과 함께 康翎의 삼거리로 이주하여 이태 동안 그곳에서 살았다. 일족이 어떻게 하여 강령으로 이주하게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경제적으로 궁핍하고 또 이웃 토반들을 피하여 새로운 開拓地를 찾아 나섰던 것으로 짐작된다.
淳永의 집은 밤에 호랑이가 사람을 물고 집 앞을 지나갈 만큼 적막한 산 어귀에 있었다. 그리하여 淳永 내외가 농삿일이나 해산물을 채취하러 나가고 나면 昌巖은 가까운 신풍 이생원 집에 가서 그 집 아이들과 놀다오는 것이 일과였다.
하루는 그 집 아이들이 『해줏놈 때려 주자』고 공모하여 昌巖은 몰매를 맞았다. 昌巖은 곧 집으로 돌아와 부엌칼을 가지고 아이들을 찔러 죽일 생각으로 그 집으로 달려갔다. 사랑 앞문으로 들어가면 아이들이 눈치챌까보아 뒤로 돌아 가서 칼로 울타리를 뜯고 안으로 들어갔는데, 마침 안마당에 있던 열 일여덟 살 난 그 집 처녀가 보고 놀라 큰 소리로 오라비에게 일렀다. 결국 昌巖은 다시 아이들에게 실컷 얻어맞고 칼만 빼앗기고 돌아왔다.
또 하루는 昌巖이 혼자 집에 있으면서 몹시 심심해 하고 있을 때에 엿장수가 『헌 유기나 부러진 숟갈로 엿들 사시오』하고 외치며 지나갔다. 소년은 엿이 먹고 싶었으나 엿장수가 아이들의 자지를 잘라간다는 말을 어른들에게서 들은 적이 있기 때문에 방문을 닫아 걸고 엿장수를 불렀다.
부러진 숟갈이라야 엿을 주는 줄 안 소년은 아버지의 좋은 숟갈을 밟아 분질러 반은 두고 반만 문구멍으로 내어 밀었다. 엿장수는 엿을 한 주먹 뭉쳐서 들이밀어 주었다. 엿을 한참 맛있게 먹고 있을 때에 아버지가 돌아왔다. 사실대로 말하자 淳永은 『다시 그런 짓을 하면 혼을 내겠다』고 꾸짖었다.
그 뒤 어느 날 淳永이 엽전 스무 냥을 방 아랫목 이부자리 속에 넣어 두고 나가는 것을 보고 昌巖이 그 돈을 모두 꺼내어 온몸에 감고 떡을 사먹으러 나섰다가 길에서 삼종조부를 만났다. 그는 돈을 빼앗으며 『네 아비가 보면 큰 매 맞는다. 어서 집으로 들어가거라』하고 昌巖을 집으로 돌려 보냈다.
얼마 뒤에 집에 돌아온 淳永은 말 한 마디 없이 다짜고짜로 빨랫줄로 어린 아들을 동여 들보에 달아매고 사정없이 매질을 했다.
그때에 마침 昌巖을 지극히 사랑하던 재종조부 長連 할아버지가 지나가다 昌巖의 비명소리를 듣고 달려 들어와 설명도 듣지 않은 채 『어린 것을 그토록 무지하게 때리느냐』하고 꾸짖으며 昌巖을 때리던 매를 빼앗아 그것으로 淳永을 때렸다. 長連 할아버지는 淳永과 동갑이었으나 親屬의 권위로 淳永을 책망한 것이었다.
어린 昌巖은 長連 할아버지가 고마웠고 자기 아버지가 매맞는 것이 시원하고 고소했다. 長連 할아버지는 昌巖을 업고 들로 나가서 수박과 참외를 사 먹이고 나서 자기 집으로 데려갔다. 昌巖은 그 집에서 여러 날 묵고 난 뒤에 집으로 돌아왔다.58)
한 번은 장마비로 집 근처에 샘이 솟아나 여러 갈래의 작은 시내를 이루었다. 昌巖은 빨강 파랑 물감을 집에서 통째로 꺼내어다가 한 시내에는 빨강이를, 다른 시내에는 파랑이를 풀어 붉은 시내 푸른 시내가 한데 어우러지는 모양을 보며 좋아하다가 어머니에게 몹시 매를 맞았다.59)〉
함지박 장수 딸을 며느리 삼기로
독자로 태어난 昌巖이 金氏 一家만 모여 사는 텃골 집성취락의 씨족주의 분위기 속에서 양친뿐만 아니라 집안 어른들로부터 특별한 귀여움을 받고 자랐던 것도 그의 성장기의 인격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사촌들이 있기는 했으나 어려서부터 집안 농삿일만 거드는 이들 사촌들과는 잘 어울렸던 것 같지 않다. 淳永은 빈한하면서도 어떻게 해서든지 외아들을 농사꾼으로 만들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뒷날 河浦事件(치하포사건)으로 구속되어 재판을 받을 때에 金九는 자신이 「7代 독자」라고 진술하고 있고, 淳永과 郭氏 부인이 각각 법부대신에게 올린 탄원서에도 아들이 「7代 독자」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흥미 있는 일이다.60)
金九의 과묵한 성품과 대담성과 강한 저항정신은 선천적인 강인한 체력과 함께 성장기의 생활환경에서 형성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金九의 과묵한 성품은 뒷날 사회활동 과정에서 더러는 오해를 사는 요인이 되기도 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은 복잡한 상황 속에서 지도자로 성장하는 데 오히려 강점이 되었을 것이다.
郭氏 부인은 金九의 말에 따르면 『비록 하향 농촌에서 생장하셨으나 무슨 일에나 잘 감당해 내시고 더욱 바느질이 능하신61)』 여성이었다. 郭氏 부인은 金九가 어려서 서당에 다닐 때에 김품과 길쌈품을 팔아서 아들의 紙筆墨 값을 벌기 시작하여, 먼 이국땅 重慶에서 『내 원통한 생각을 어찌하면 좋으냐!』 하고 숨을 거두기까지, 고난의 팔십 평생을 오로지 아들을 위해 바치는 것은 뒤에서 보는 바와 같다. 그러나 어릴 때에 金九는 어머니보다 아버지 淳永으로부터 훨씬 큰 영향을 받고 자랐고, 장성해서도 한참 동안 모든 중요한 결정은 아버지의 의견에 따랐다.
淳永은 昌巖이 열 두서너 살 때에 어떤 술집에서 金致景이라는 함경도 사람 함지박 장수를 만나 취중에 말이 오가다가 그에게 열아홉 살 난 딸이 있다는 말을 듣고 농담같이 며느리로 달라고 청혼을 했고 金致景도 승낙했다. 그리하여 淳永은 昌巖의 사주까지 보내고, 여자아이를 가끔 집에 데려오기도 했다. 이무렵 昌巖은 書堂에 다니고 있었는데, 동네 아이들이 그일을 알고 놀려대곤 했다.
『너는 함지박 장수 사위다. 너의 집에 데려온 처녀가 곱더냐?』
이런 놀림을 받을 때에는 昌巖은 몹시 불쾌했다. 하루는 추운 겨울 날 昌巖이 얼음판에서 팽이를 치며 놀고 있는데 그 여자아이가 곁에 와서 구경하다가 자기에게도 팽이를 한 개 깎아 달라고 말했다.
이 말에 昌巖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어머니를 졸라 그 여자아이를 돌려 보내버렸다. 그러나 딱히 약혼을 취소한 것은 아니었다. 金九는 이 일이 자기가 너더댓 살 때의 일이라고 적고 있으나62) 열두 살 때부터 서당에 다니고 있었으므로 그것은 착오일 것이다.
昌巖이 어머니를 졸라 그 여자 아이를 돌려 보낸 것은 그 여자 아이가 굳이 싫어서 그랬다기 보다는 함지박 장수 사위가 되는 것이 더 싫었기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이 무렵 昌巖은 「상놈」 신분을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科擧에 급제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아버지를 졸라 눈물겨운 書堂 공부를 시작하고 있었다.
그만큼 金九는 어릴 때부터 신분상승의 강한 욕구를 가지고 성장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몰락한 양반의 궁핍한 처지에서 立身出世를 위해 여섯 살 때부터 科擧를 목표로 서당공부를 시작하는 李承晩의 경우와 절박성에서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우리는 李承晩과 金九가 서당공부를 어떻게 했고 科擧에 어떻게 실패했는지를 다음호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그런데 淳永의 이 경박한 처사 때문에 金九가 평생의 스승인 유학자 高能善의 손자사위가 되는 연분이 깨어지고 마는 것은 뒤에서 보는 바와 같다.<계속>●
영락한 조선조 종친의 후손 李璜(이황)이 어떻게 해서 대대로 살아온 한양을 떠나 황해도 해주로 이주하게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1) 조선시대에 한양에 살던 양반 선비 가문이 지방으로 이주하는 경우는 대개 두 가지였다. 하나는 士禍(사화) 등에 연루되어 일족이 화를 피해 지방으로 피신하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생활이 궁핍해져서 낙향하는 경우였다. 李璜의 경우는 후자에 속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전설의 명산 首陽山을 뒤로 하고 망망한 바다에 면해 있는 해주는 고려조 이래로 해서지방의 군사요충지이자 행정의 중심지로 발달해 왔다. 栗谷(율곡) 李珥(이이)가 황해감사로 있을 때에 수양산 밑에서 아름다운 石潭(석담)을 발견하고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 여기에 집을 짓고 학문을 강론하자 경향 각지의 선비들이 몰려왔었다고 한다.
어떤 기록에는 해주가 「고을이 웅장하게 자리잡아 물산이 많고, 지역이 커서 四民(士, 農, 工, 商)이 모두 모여들고, 여러 고을을 관리하는 곳」이라고도 했다.2) 그리고 지리상으로 해주는 한양과도 그다지 두절된 곳이 아니었다. 이런 조건 때문에 李璜이 이곳을 이주지로 삼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李璜의 가문은 외로웠다. 자손이 많은 것이 곧 가문의 힘이던 시대에 李璜의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그리고 그 자신도 독자였다. 또 아들도 독자요 손자도 독자였다.
李璜의 손자 敬善은 용모가 수려하고, 정이 많고, 씀씀이에 인색하지 않으며, 활달한―그리고 태평스러운 인품이었다.3) 그것은 현존하는 그의 사진으로도 웬만큼 짐작할 수 있다.
敬善은 자신이 어려서 다니던 서당 훈장 金昌殷(김창은)의 외동딸 金海 金씨와 혼인하여 초년에 아들 둘을 낳았으나 천연두로 잃었다. 둘째 아들이 죽자 敬善은 격분한 나머지 역귀한테 올리는 터줏상을 몽둥이로 부수고, 역귀가 머문다는 사당 앞에서 큰 칼을 휘둘렀다. 그가 석달 동안 몸져 눕자 사람들은 그것이 그런 지각 없는 행동 때문이라고 말했다.4)
敬善에게는 딸이 둘 있었다. 큰 딸은 해주의 丹陽 禹氏 집으로, 작은 딸은 平山의 靑松 沈氏 집으로 시집을 보냈는데, 敬善은 뒷날 한양에 올라와 살면서도 이들 딸네 집을 찾아가곤 했다.
해가 거듭되어도 아들을 보지 못하는 敬善 내외가 얼마나 초조해 했을지는 짐작하기에 어렵지 않다. 敬善은 좋은 묏자리를 찾느라고 수천 냥의 돈을 썼다. 어떤 지관이 그에게 아버지의 뫼를 잘못 써서 아들이 없다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아내는 아내대로 열심히 불공을 드리러 절에 다녔다.5)
敬善은 집을 줄여 평산으로 이사했다. 황해도의 鎭山인 滅岳山(멸악산) 밑자락에 자리잡은 평산은 해주에 버금가는 큰 고을이다. 일찍이 平山都護府가 설치되어 있던 곳으로서, 「딴 지방에서 士族들이 흘러 와서 사는 자가 있다」는 기록도 있다.6) 또한 평산에는 유적지도 많은데, 馬山面의 慈母山城(자모산성)은 丙子胡亂(병자호란) 때에 적병이 공략하지 못했던 좋은 피난처로, 그리고 의적 林巨正(임꺽정)이 웅거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敬善은 이 자모산성에 가까운 大慶里 陵內洞(능안골)에 정주했다. 지명으로 보아 근처에 어떤 능이 있었을 법도 하나 어느 문헌에도 보이지 않는다. 풍수지리에 경도되었던 敬善이 이 자모산성의 지세와 함께 둘째 딸네 집과 가까운 곳이었기 때문에 이곳을 새 거주지로 택했는지 모른다.
돌상에서 붓을 잡아
敬善은 이 능안골에서 마침내 늦둥이 아들을 얻었다. 이렇게 李承晩은 6代 독자로 태어났다. 「은둔의 나라」 조선이 세계를 향해 문을 여는 계기가 된 雲揚號事件이 터지던 바로 그해인 1875년 2월19일(양력 3월26일)이었다. 敬善보다 네 살 위인 그의 아내는 손자를 볼 나이인 마흔 두 살에 아들을 낳은 것이었다.
뒷날 李承晩은 어머니가 자기는 한양 서쪽의 한 절에 모셔놓은 부처님이 주셨다고 말하곤 했었다고 적고 있다. 어머니는 그 절에 가서 불공을 드리고 난 어느 날 밤에 용이 품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고 했다. 그것이 태몽이었다. 그래서 李承晩은 어릴 적에 「용이」로 불렸다.7) 항렬이 承자였으므로 아버지는 承龍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金氏 부인이 아들을 낳기 위해 불공을 드리러 다녔던 한양 서쪽의 절이란 北漢山 기슭의 文殊庵(문수암:지금의 文殊寺)이었다. 文殊寺에 전해져 오는 말에 따르면 金氏부인은 文殊庵에서 100일기도를 드리고 나서 龍꿈을 꾸었다. 李承晩이 출생한 것은 敬善 내외가 평산에 살 때였는데, 어떻게 북한산의 문수암까지 불공을 드리러 왔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토록 바라던 아들을 얻자 敬善 내외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큰 잔치가 벌어졌고, 동네 사람들은 李씨 집안이 후사를 잇게 되었다고 축하했다. 돌날이 되어 承龍은 큰 돌상에 갖은 음식과 함께 늘어놓은 여러 가지 물건 가운데에서 붓을 잡았다.
李承晩 자신의 추측대로 아마 아기 손이 미칠 수 있는 가장 가까이에 붓을 놓아두었기 때문에 그랬을 것인데도, 金氏 부인은 여간 기뻐하지 않았다. 뒤에 金氏 부인은 承龍에게 커서 큰 학자가 될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8)
承龍이 세 살 나던 해에 敬善은 집을 정리하여 한양으로 올라왔다. 李承晩의 전기들에 따르면 敬善이 집을 정리하여 한양으로 올라 온 것은 집안 형편이 더욱 어려워졌기 때문이었다.
李承晩 자신은 그의 자서전 초고에서 『한때 그(아버지)도 부자였으나 젊은 시절에 모두 탕진해 버렸다. 어머니 말로는 내가 태어날 무렵에는 집에 재산이 없었다. 「너의 아버지는 여자나 도박에는 흥미가 없었으나 친구와 술을 위해서는 있는 대로 모두 내 놓았다」는 것이었다. 그가 친구들과 술잔을 주고받을 때에는 세상의 어떤 일도 그 보다 더 귀한 것이 없었다는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9) 다른 한 전기는 敬善이 술값으로 진 빚 때문에 陵內洞의 집마저 정리해야 할 형편이 되었기 때문이었다고 적고 있다.10)
그러나 한편으로는 어머니 金氏 부인이 외아들을 훌륭하게 키우기 위해 남편을 설득하여 한양으로 올라오게 되었다는 설명도 있다.11) 6代 독자로 태어난 承龍이 입신출세해야 가문이 살아날 수 있었으므로 敬善이 아들의 교육을 위해 조상들이 살아온 한양으로 올라올 결심을 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오로지 술빚 때문에 집을 처분해야 했을 만큼 가난하지는 않았던 것은 한양에 올라 와서도 承龍이 어릴 때에 집에 일하는 늙은 내외와 하녀 복녀를 부렸던 사실로도 짐작할 수 있다. 지금도 이화장에는 李承晩 명의로 된 평산의 임야 대장이 보존되어 있다.12)
『姓을 바꾸고 싶다』
한양으로 올라온 敬善은 처음에 남대문밖 鹽洞(염동)에 자리를 잡았다가 이태 뒤에 駱洞(낙동)으로 옮겼고, 承龍이 열한살 되던 해에 다시 至德祠(지덕사)가 있는 桃洞의 雩守峴(우수현) 밑으로 이사했다. 雩守峴은 오랫동안 비가 오지 않을 때에 기우제를 지내는 마루턱이었다. 李承晩은 이 雩守峴 밑의 오막살이집에서 어른이 될 때까지 살았다.
至德祠는 太宗의 적장자로서 세자에 책봉되기까지 했다가 아우 忠寧大君(충녕대군: 뒤의 世宗)에게 왕위를 넘겨 준 讓寧大君(양녕대군)의 유덕을 전하기 위해 肅宗(숙종) 원년(1675)에 세운 사당이다. 敬善이 至德祠 가까운 곳으로 이사한 것은 그곳에 讓寧大君의 奉祀孫(봉사손) 李根秀(이근수) 대감을 비롯하여 일가들이 모여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李承晩은 양친으로부터 들은 至德祠에 얽힌 이야기를 자서전 초고에 자세히 적고 있다.
<옛날 어느 추운 겨울날 남산골 가난한 이생원 집에 한 중이 동냥을 왔다. 그러나 그 집 주인은 장작이 없어서 추위에 불도 때지 못하고 있는 형편인데 무슨 동냥을 주느냐고 말했다. 그러자 중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건너편 至德祠 앞의 노가주나무를 가리키며 『저기 저 나무라도 베어 때시지요』하고 말했다. 그리하여 그 집에서는 그 겨울에 땔감 걱정을 하지 않게 되었다.
至德祠가 있는 골짜기 건너편 언덕에는 거창한 關帝廟(관제묘)가 있었는데, 노가주나무를 잘라버린 얼마 뒤에 임금이 그 關帝廟에 참배하러 행차하게 되었다. 이 행차는 해마다 한 번씩 있는 행사였다. 임금이 關帝廟를 나오다가 건너편에 못 보던 헌 사당이 있는 것을 보고 그 사당의 유래를 묻자 신하가 讓寧大君의 사당이라고 아뢰었다. 임금은 그 낡고 쓰러져 가는 사당을 헐고 새로 짓게 하고, 그 가난한 선비에게는 벼슬을 주고 재산을 하사했다.>
李承晩은 이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그 임금이 至德祠 중수를 명한 것은 만일 讓寧大君이 왕위 계승권을 포기하지 않았던들 지금 자기가 임금의 자리에 있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讓寧大君을 조선왕조를 창건한 太祖의 장남이라고 잘못 기술하고 있는 것은 흥미 있다.13)
이러한 至德祠는 李承晩의 어린 시절과 성장기의 교육, 특히 자신이 왕손의 후예라는 의식을 깊이 심어 주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至德祠는 1912년에 일본인들에 의해 영등포구 상도동 221번지의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다.
李承晩은 청년시절에 高宗과 조선의 조정에 대하여 누구보다도 과격한 비판자가 되는데, 그러한 비판 정신의 밑바탕에는 개혁에 대한 열정과 함께 자신이 왕위 계승권을 양보한 讓寧大君의 후예라는 의식이 미묘하게 작용하고 있었음은 그의 자서전 초고의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만일 16代 전의 나의 先祖가 그렇게 관대하게 王位繼承權을 동생에게 넘겨 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高宗의 위치에 놓여졌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高宗 치하에서 독립을 빼앗겼다. 그래서 나와 李氏 王族과의 먼 관계는 나에게는 영예가 아니라 치욕이다. 그러한 관계로 나는 姓을 바꿀 수 있는 것이라면 바꾸어 버리기라도 하겠다.14)〉
이러한 생각의 밑바탕에는 강화도령이었던 哲宗 이후의 王位繼承의 정통성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심리도 깔려 있었을지 모른다.
李承晩은 조상에 관해서 적어 놓기는 했으나 뒷날 자기의 전기를 쓰는 올리버에게 원고를 전할 때에 다음과 같은 메모를 첨부했다.
『나의 조상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말아주시오. 나의 政敵들은 내가 민주제도를 세우려고 하지 않고 (李氏)王朝를 부활시키려 한다는 자기들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서 나의 족보를 캐내려고 애를 많이 썼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적은 것은 윤곽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올리버는 李承晩의 이러한 당부에도 불구하고 李承晩 전기에서 「李承晩의 가계는 다년간 그의 울분의 대상이었고 또 어떤 점에서는 핸디캡이기도 했다」고 전제하고 나서 李承晩의 家系를 소개했다.15)
李承晩이 자신의 가계에 대해 울분을 느꼈다는 것은 자기 스스로 李씨 왕족과의 먼 관계를 『영예가 아니라 치욕이다』라고 한 위의 문장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인데, 그것은 결국 자신이 왕위 계승권을 포기한 讓寧大君의 후예라는 의식을 反證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정적들이 자기를 가리켜 (李氏)왕조를 부활시키려 한다고 했다는 말은, 李承晩을 반대한 하와이 동포 가운데 그러한 비난을 한 사람들이 없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확인하기는 어렵다.
族譜에 프란체스카 사항 적어
譜學(보학)에 능통했던 敬善은 아들에게 자기네가 王孫의 후예라는 것을 주입시키려고 노력했다. 李承晩이 어릴 때에는 말할 나위도 없고 성장하여 獨立協會의 급진 과격파로 萬民共同會를 주도할 때에도 그는 아들을 따라다니며 『너는 6代 독자이다』라는 말을 강조하곤 했다.
그는 24권으로 된 족보를 아름다운 책장에 넣어 놓고 늘 꺼내어보면서 直系는 어떻게 되고, 支派는 어떻게 되었다는 것을 훤히 꿰고 있었다. 그는 자기네 가문뿐만 아니라 다른 명문의 족보에 대해서도 밝았다.
그러나 그는 어린 承龍이 족보에 전혀 관심이 없는 것을 보고 실망했다. 그리하여 그는 아들에게 고려조 초기 이래의 직계 선조들에 관한 간략한 내용을 손수 적어서 자그마한 책자를 만들어 주었다. 그것이 「世系與四柱幷錄:璿源世譜(세계여 사주병록:선원세보)」인데, 李承晩은 이 책자를 평생동안 간직했을 뿐만 아니라 마지막 대목에 부모와 자기와 아내 프란체스카에 관한 사항을 자기 손으로 적어 넣고 있다.
그런데도 李承晩은 평생동안 족보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좋아하지 않게 된 이유라면서 어릴 때에 들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자서전 초고에 적고 있는 것은 흥미있는 일이다.
<어떤 사람이 죽은 뒤에 그의 혼이 저승에 가서 그곳 궁전의 구석구석을 안내받았다. 그러는 중에 양반들이 살고 있는 어느 한 곳에 들어갔더니 그곳에 있는 양반들은 어찌나 말라빠졌던지 뼈와 가죽만 남아 아주 가엾은 몰골들이었다. 어찌된 영문인가 하고 보고 있는데, 그 사람들이 다가왔다. 그리고 하는 말이, 자기들은 양반들의 유명한 조상들인데 자기네 후손들이 스스로 생계를 개척해 나가지 않고 늘 조상들만 뜯어먹어서 이렇게 되었으니 돌아가거든 제발 좀 그러지 말라고 일러달라고 부탁했다는 것이었다.16)>
사실 李承晩의 선조들은 李璜이 해주로 낙향하기 훨씬 전에 이미 몰락양반이 되어 있었다. 李承晩의 가계는 讓寧大君의 서자인 제5남 長平副正 (흔)의 후손들인데, 종친 예우는 讓寧大君의 증손자인 允仁으로 끝났었다.
允仁의 손자 元約이 병자호란 때에 무공을 세워 全豊君에 추증되고, 그 후광을 입은 몇몇 자손들이 무관직에 등용되기도 했으나, 李承晩의 6대조 徵夏(징하)가 陰職(음직)으로 縣令을 지내고 나서부터는 대대로 벼슬이 끊긴 채였다.17)
(2) 모반자 金自點의 방계 후손
金九의 선조들은 仁祖反正의 공신으로 仁祖 때에 크게 권세를 누렸던 金自點의 방계 후손이었다. 金自點이 孝宗 때에 역모를 꾀하여 일족이 멸문을 당하게 되자 金九의 11대조가 처자를 끌고 처음에는 고향인 경기도 高陽으로 피신했다가 그곳도 한양에 가까우므로 위험하다고 하여 다시 황해도 해주 서쪽 팔십리에 있는 白雲坊(백운방) 基洞(텃골)의 八峰山 楊哥峰(양가봉) 밑으로 옮겨 숨어 살게 되었다. 그러므로 金九 조상의 낙향은 李承晩 조상의 경우와 대조적으로 한양에 살던 양반 선비가문이 역모사건에 관련되어 화를 피해서 지방으로 이주한 경우에 해당하는 셈이다.
그리고 두 가문이 다 해주로 낙향했다는 사실은 매우 주목할 만한 일이다. 이때에 낙향한 金九의 11대조 大忠은 관직이 司果(사과)였는데, 司果란 직무가 없는 무장에게 녹봉을 주기 위해 마련한 직위로서 正6품에 해당했다. 大忠의 5대조 終智(종지)가 南平縣監을 지낸 이래로 대대로 副司直, 御侮將軍(어모장군) 등의 직무없는 무관 벼슬을 지냈다.18)
이들은 金自點의 일족임을 숨기기 위해 양반 행세를 단념하고 상민 생활을 했다. 그들은 농삿일을 하고 임야를 개간하여 생계를 유지하다가 軍役田을 경작하면서부터 아주 상놈의 패를 차게 되었다. 軍役田이란 땅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 이 땅을 부치다가 유사시에 나라에서 징병령을 내리면 병역에 응해야 하는 경작지를 말하는 것이었다. 조선조 때에는 병역이 賤役(천역)이었으므로 이러한 제도가 있었다.
『나는 상놈의 아들』
朝鮮 封建社會에서 常民은 아무런 권리가 없었다. 金九는 어려서부터 자기 집안이 그러한 「상놈」이라는 사실에 대해 심한 콤플렉스를 느끼면서 성장했다. 그의 자서전 「白凡逸志」는 여러 대목에서 그것을 토로하고 있다. 가령 뒤에서 보듯이, 그의 아버지가 숨을 거둘 때에 『연산으로 모시고 가서 만년에나 강씨, 이씨에게 상놈 대우를 받던 뼈에 사무치는 한을 면하시게 할까 하고 속으로 기대하였더니…』하고 슬퍼하고 있는 것 등은 그 대표적인 보기이다. 따라서 金九는 아마 위에 적은 직계 조상들의 신분도 모르고 자랐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뒷날 「白凡逸志」의 국내판(국사원본)을 낼 때에 원문에 없던 다음과 같은 문장을 서두에 적고 있는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한 일이다.
〈우리는 안동 金氏 敬順王의 자손이다. 신라의 마지막 임금 敬順王이 어떻게 고려 王建 太祖의 따님 樂浪公主의 부마가 되셔서 우리들의 조상이 되셨는지는 「三國史記」나 안동 金氏 족보를 보면 알 것이다. 敬順王의 8대손이 忠烈公이고, 忠烈公의 현손이 翼元公(익원공)인데, 이 어른이 우리의 시조요, 나는 翼元公에서 21대 손이다. 忠烈公과 翼元公은 다 고려조의 공신이거니와 李朝에 들어와서도 우리 조상은 대대로 서울에 살아서 글과 벼슬로 가업을 삼고 있었다.〉
그리고 이 책의 본문 앞에 있는 화보에는 金九가 귀국한 뒤에 敬順王陵을 참배하는 사진이 실려 있고, 「내 시조 敬順王陵에 제를 드렸다」는 설명이 붙어 있다. 이는 金九가 敬順王陵을 참배한 행동 그 자체와 함께 한국 사회의 권위주의적 가치관을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 이후로 金九의 가계와 관련된 모든 기록은 그가 「敬順王의 후손」임을 강조하고 있다.
가령 李承晩은 金九의 「屠倭實記(도왜실기)」의 국문판에 붙인 서문에서 金九가 「명문의 후예」라고 소개했고, 진보적 성향의 지식인이었던 安在鴻도 金九가 암살된 직후인 1949년 8월에 쓴 「白凡金九先生略史」에서 「선생의 본관은 안동이니 그 선조는 신라 마지막 임금 敬順王의 후예로서…」라고 서두에 적었다.19)
가짜 暗行御使 행세한 증조부
金氏 일족은 텃골 주위에 살고 있는 晉州(진주) 姜氏나 德水 李氏 등 토착양반들로부터 핍박과 괄시를 받으며 대대로 살았다. 金氏 집안의 처녀가 姜氏나 李氏 집안으로 시집가는 것은 영광이었으나, 두 집안의 처녀가 金氏 집안으로 시집오는 일은 없었다. 姜氏와 李氏 집안은 대대로 坊長(방장:지금의 面長)을 했으나 金氏 집안 사람은 기껏해야 尊位(존위)가 되는 것이 고작이었다. 존위란 방장의 지시에 따라 세금을 거두는 직책이었다. 姜氏와 李氏 집안 사람들은 비록 머리 땋은 어린 아이라도 칠팔십 세 되는 金氏 집안 노인에게 『하게』를 하는 한편 金氏 집안 노인들은 갓 상투를 튼 姜氏, 李氏집 아이에게도 반드시 존댓말을 썼다고 한다. 그러나 金九의 7대조 彦喊(언함)의 부인이 진주 姜氏였던 것은 퍽 예외적인 경우이기는 했겠으나 金氏 가문과 姜氏, 李氏 가문 사이에 통혼이 전혀 없지는 않았음을 보여 준다.20)
한때 金氏 집안이 꽤 창성한 때도 없지 않았다. 20여 호 되는 텃골의 金氏 집단취락에는 기와집이 즐비하고, 또 선산에는 큰 석물을 만들어 놓기도 했었다. 텃골 뒷개(後浦)에 있는 선영에는 金九의 11대조 大忠의 산소를 비롯하여 역대 선조들의 묘가 있었다.
그리고 世傳奴婢(세전노비)를 두고 있기까지 했다. 그러다가 생활이 궁핍해지자 이들 노비들을 해방시켜 주었는데, 그들 가운데에는 金氏 집안에 혼사나 장례 등 큰 일이 있을 때마다 와서 일을 보는 사람도 있었다.21)
金氏 집안은 해주에 온 이래로 글하는 사람도 없지는 않았으나 이름을 떨칠 만하지는 못했다. 그리하여 이웃 土班들의 핍박은 필연적으로 金氏 집안 사람들의 불평불만과 저항을 촉발시켰다. 金九의 증조부 榮元은 가짜로 暗行御使 행세를 하다가 체포되어 해주 관아에 갇히기도 했는데, 서울 어느 양반의 청탁편지로 형벌을 면했다고 한다.22) 그런데 그것이 사실이라면 金氏 집안은 金九의 증조부 대까지 서울의 영향력 있는 양반과 연결이 되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榮元에게 두 아들이 있었다. 큰 아들 萬默은 4남 1녀를 두었는데, 萬默의 둘째 아들 淳永은 소문난 효자였다. 淳永은 집안이 가난하여 오랫동안 장가를 들지 못하고 있다가 스물네 살이 되어서야 三角婚으로 長淵 牧甘坊 文山村의 열네살 난 玄風 郭氏(뒤에 이름을 「樂園」으로 지었다)와 혼인했다. 삼각혼이란 혼비를 절약하기 위해 세 집안이 서로 딸을 바꾸는 것으로서, 주로 하층사회의 혼인 풍습이었다. 이를 「물레 혼인」 또는 「물레 바꿈」이라고도 일컬었다.
아버지 품에 안겨 동냥젖 먹어
淳永은 혼인을 하고도 집을 마련하지 못하여 3년 동안 아들 하나뿐인 작은 아버지 집에 더부살이를 했다. 그리하여 따로 살림을 나던 해에 金九가 태어났다. 1876년 7월11일(양력 8월29일). 그것은 李承晩이 태어난 지 한 해 뒤이며, 이 나라의 역사가 크게 달라지는 丙子修好條約(한·일수호조약)이 채결되던 해였다. 郭氏 부인이 꿈에 푸른 밤송이에서 크고 붉은 밤 한 개를 얻어 깊이 감추어 둔 것이 태몽이었다. 그것은 용이 金氏 부인의 품속으로 들어왔다는 李承晩의 태몽과는 퍽 대조적이다.
金九 스스로 술회하고 있듯이, 기구한 일생의 조짐이었는지 그의 출생은 유례 없는 난산이었다. 사람들이 웅덩이 큰 댁이라고 부르는 할아버지와 큰아버지가 사는 집에서 해산을 했는데, 진통이 있은 지 일주일 가까이 되도록 아이는 태어나지 않았고 産母의 생명은 위험했다. 친척들이 모두 모여 온갖 의약을 쓰고 미신 방법을 시험해 보았으나 효력이 없었다.
사태가 황급해지자 집안 어른들은 淳永에게 소길마를 머리에 쓰고 지붕 꼭대기에 올라가 소울음 소리를 내라고 했다. 그것은 난산의 경우 産母의 고통을 나누기 위한 의식으로서 평안도와 해서지방의 풍속이었다. 淳永은 처음에 거절했으나 어른들의 호통으로 시키는 대로 했다. 그런 뒤에야 아기가 태어났다.
그런데 이날은 공교롭게도 淳永의 어머니가 숨을 거두는 날이기도 했다. 淳永은 이때에 왼손 무명지를 칼로 잘라 어머니의 입에 피를 흘려 넣어 사흘을 더 버티게 하고 있었다고 한다.23) 부모나 남편이 위독할 때에 피를 내어 먹이려고 자기의 손가락을 자르는 이른바 斷指(단지)는 허벅지의 살을 베는 割股(할고)와 함께 효행과 정절의 극치로 평가되는 행위이다. 뒤에서 보듯이 金九도 淳永이 죽을 때에 割股를 하고 있다.
郭氏 부인은 체구도 작은 데다가 어린 나이에 고된 일로 많은 고생을 하고 열일곱에 아들을 낳았던 것인데, 젖이 부족하여 암죽을 끓여 먹이면서 차라리 아이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한탄하곤 했다고 한다.
郭氏 부인은 그 뒤로는 아이를 낳지 못했다. 그러나 부부의 정분은 좋았다. 淳永은 갓난 아이를 품고 근처의 젖먹이 있는 집을 찾아다니며 젖을 얻어 먹였다. 淳永의 먼 친척 아주머니 뻘 되는 핏개댁(稷浦宅)은 밤중에 찾아가도 조금도 싫어하는 내색을 하지 않고 아이에게 젖을 물려 주었다.
그런데 이러한 모유의 부족은 金九의 유아기 잠재의식에 부족감과 불만을 심어 주었을 것이며, 그것이 그의 인격형성에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이때의 일과 관련하여 金九 자신은 「내 나이 열 살 남짓에 그분(핏개댁)이 돌아가셔서 텃골 동산에 묻혔는데, 나는 그 묘를 지날 때마다 경의를 표하였다」고 적고 있다.24)
(3) 어머니에게서 五百羅漢 이야기 들어
이처럼 李承晩과 金九는 두 사람 다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므로 그들의 유년기의 성장에는 부모들의 영향이 압도적으로 컸다. 李承晩이 어릴 때의 이야기를 적으면서 『이 모든 것은 어머니와 두 누이한테서 들은 것이다25)』라고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李承晩은 어릴 때에 두 누이의 사랑도 받고 자랐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두 누이는 李承晩이 태어나기 전에 이미 출가해 있어서 함께 생활하지는 않았다.
李承晩은 아버지를 닮아 강건한 체력을 타고 났는데, 이는 육체적 고초를 동반하는 뒷날의 파란만장한 생애에서 큰 자산이 된다. 또한 金氏 부인의 정성어린 양육도 그가 건강하게 자라는 데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李承晩은 어머니 품에서 어머니의 젖을 먹으며 자랐다.
여든이 넘어서도 누룽지 즐겨
金氏 부인은 음식솜씨가 좋았던 것 같다. 대통령 재임시에 李承晩은 이따금 비지찌개나 된장떡을 만들어 달라고 했는데, 주방에서 정성껏 만들어 올리면 『우리 어머니가 만들어 주시던 그 맛이 아니야』 하면서도 맛있게 먹었다고 한다. 작고하기 얼마 전에도 『내가 남의 나라 음식도 많이 먹어 보았지만 우리나라 음식이 제일이야. 그 중에서도 우리 어머니가 담그셨던 동치미는 정말 맛있었지』 하며 어머니 손맛을 그리워하기도 했다.
金氏 부인은 달걀찜과 두부찌개를 만들 때에는 새우젓 국물로 간을 맞추었는데, 그 맛에 길들여진 李承晩의 입맛에 맞도록 뒷날 프란체스카도 달걀찜과 두부찌개를 만들 때에는 새우젓을 썼다.
李承晩은 여든이 넘어서도 간식으로 누룽지를 먹을 정도로 이가 튼튼했는데, 李承晩은 자신이 이가 좋은 것은 어머니가 담근 동치미와 김치를 먹고 자란 덕분이라고 늘 자랑했다고 한다.26)
承龍은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놀기를 좋아하는 개구쟁이 소년으로 자랐다. 承龍은 끼니 때와 잠자는 시간과 책 읽는 시간을 빼놓고는 집 밖에 나가서 뛰놀았다. 장난은 심했으나 재미있고 용감한 아이였고, 친구들 사이에 인기가 있었다고 같이 자란 李丙胄는 회상하고 있다.27)
承龍은 나막신을 신고 다녔다. 나막신을 신고 성벽에 올라 아슬아슬하게 걷는 묘기로 친구들을 즐겁게 해주기도 했고, 대보름에는 성벽 위에서 돌을 던지며 놀았다. 그리하여 「나막신 선비」라는 별명이 붙었다. 설이 돌아오면 대나무를 다듬어서 연을 만들어 날렸다. 우수현 고갯마루는 바람이 세기 때문에 연날리기가 좋았을 것이다. 노년에 李承晩은 『참 연날리기를 많이 했지』라는 말을 자주 했다.
대통령의 바쁜 일정 속에서도 「한국일보」社 주최 전국 연날리기 대회에 하루 두 번씩이나 들러 손수 얼레짓을 해 보인 것도 이런 어린 시절의 향수에서였을 것이다. 그 얼레짓이 보통솜씨가 아니더라고 옆에서 지켜보았던 張基榮은 말했다.
承龍은 또 남사당패를 따라가 광대놀이를 구경하며 즐기기도 했다. 『어, 사당 놀이야…』하고 남사당패가 흥을 돋우면 구경꾼들은 엽전을 던져 주기도 했는데, 어린 承龍도 따라 엽전을 던져 주기도 했다. 뒷날 그는 『남사당 놀이는 참 재미있었어. 아마 그들(남사당패)은 행복했을 거야』하고 말하기도 했다.28)
흥과 장난기가 많은 承龍은 남사당놀이 구경을 하고 와서 사당패 흉내를 그대로 내며 신이 나서 사람들을 웃기기도 했는데, 어느 날 그런 장면을 아버지에게 들켰다. 敬善은 크게 노하여 『회초리 가지고 내 방으로 오너라』하고 불러 承龍의 걷어올린 종아리를 호되게 때렸다. 아들이 매를 맞을 때면 金氏 부인은 아들이 매를 다 맞을 때까지 문 밖에서 기다렸다.29)
敬善은 동네 사람들로부터 『샌님은 더할 나위 없는 양반이시다』는 말을 듣는 선비였다. 그는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신 뒤에도 비틀거리는 일이 없었다. 그가 만취했을 때에는 얼굴이 창백해져서 천천히, 그리고 침착하게 걸음을 걸었다.30) 그는 아들에게 고전 詩文이나 名家의 문장을 외우게 하고, 아들이 가다가 막힐라치면 머리를 설레설레 저으면서 자기가 이어 주곤 했다. 敬善은 어린 承龍에게 경전 말고도 실생활의 교훈이 되는 격언도 많이 가르쳐 주었다. 敬善은 아들에게 「고목에 꽃이 피랴」는 속담의 보기를 들면서 오지도 않을 복을 바라고 있지 말라고 가르치기도 했다고 李承晩의 전기 작가는 적고 있다.31)
아버지는 나귀 타고 周遊天下
그러나 敬善은 집을 비우는 때가 많았다. 그는 털빛이 서릿발처럼 흰 서산나귀 한 마리를 애지중지하며 먹이고 있었다. 그는 이 나귀를 타고 나침반을 차고 아버지의 뫼를 쓸 명당 자리를 찾느라고 金剛山이고 어디고 두루 찾아 다니는 것이 그의 오랜 습벽이었다. 敬善이 그토록 명당을 찾아 헤맨 것은 과거에 실패하여 가문을 일으키지 못한 한이 맺힌 그로서 늦둥이 외아들 承龍의 입신출세를 그만큼 간절히 바랐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처음에는 명당을 찾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으나 세월이 지나면서 세태를 벗어나 경계 좋은 산천을 周遊하는 것 자체가 그의 취향이 되어 버렸던 것 같다. 불시에 나귀등에 올라 앉아 방울소리를 울리며 집을 나가서는 서너 달, 때로는 한 해가 기울어도 소식이 없다가 문득 어느 눈내리는 날 밤에 다시 방울소리를 울리며 집에 돌아오는 때도 있었다고 한다.32)
이러한 아버지를 李承晩은 그다지 존경하지 않았던 것 같다. 죽은 조상들만 뜯어먹고 사는 양반들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는 데서 보듯이, 가난한 형편에 족보만 들여다 보고 앉았는가 하면 명당자리를 찾는다면서 오래 집을 비우는 아버지가 어린 承龍에게는 못 마땅했을 것이다. 성장해서도 李承晩은 아버지를 제대로 모시지 못했다.
노후의 敬善은 뒤에서 보듯이 동네아이들을 가르치며 혼자서 궁색하게 살다가 평산의 둘째 딸네집으로 내려가 생애를 마치게 된다. 李承晩이 자서전 초고에서 『그(아버지)는 만년에 나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른다. 나는 그때의 그를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33)』고 적고 있는 것도 아버지와의 관계에 대한 심리적 갈등을 말해 주는 것일 것이다.
이런 아버지였으므로 어린 承龍은 어머니로부터 훨씬 더 많은 영향을 받고 자랐다. 金氏 부인은 빗살이 작고 촘촘한 참빗으로 아들의 머리를 빗겨 주었는데, 承龍은 너무 아파서 울곤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李承晩은 이 참빗을 일생동안 저고리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사용했고, 운명하기 전 하와이의 병실에서도 이 빗을 만지며 고국을 그리워했다고 한다.34)
金氏 부인은 독실한 불교신자였고, 또 기본적인 한문소양을 지니고 있었다. 집안 살림도 金氏 부인이 몰래 삯바느질까지 해가며 꾸려 나갔다고 한다.
承龍이 어머니로부터 전수받은 가장 큰 정신적 영향은 불교였다. 承龍은 어머니에게서 들은 釋迦牟尼(석가모니)의 前生譚이나 五百羅漢의 이야기를 어른이 되어서도 자세히 기억했다.
절간에 들어서면 제 집에 온듯
金氏 부인은 아들에게 五百羅漢 설화를 다음과 같이 들려 주었다.
〈釋迦牟尼가 불교를 설법하고 기도할 때마다 「南無阿彌陀佛(남무아미타불)」을 300번 이상씩 되뇌이며 온 누리를 여행하고 있을 때였다. 어느 날 그는 피곤해서 기장 들판의 한 쪽 구석에 쉬려고 앉았다. 마침 곡식이 아주 잘 익어 이삭들은 낟알이 차서 늘어져 있었다. 지친 釋迦牟尼는 한창 수확 때인 들녘의 아름다운 정경에 감격하면서 무의식적으로 기장 이삭을 건드렸다. 낟알 세 개가 그의 손에 떨어졌다.
그는 소중한 낟알을 버리기가 아까워 별다른 생각 없이 그것을 입에 넣었다. 그러나 그는 이내 농부가 일년 내내 일해서 얻은 첫 수확을 자기가 먹어버려 농부에게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깜짝 놀랐다. 그는 즉시 제자들을 해산시키고 스스로 큰 소로 변신했다. 이 釋迦牟尼 소는 그 농부의 집으로 가서 낟알 셋을 먹은 代價(대가)로 3년 동안 일을 했다. 그 3년 동안에 농부는 널리 소문이 날 만큼 큰 부자가 되었다.
어느 날 아침에 농부는 그의 소가 자기를 찾아 와서 마치 사람처럼 말을 하는 것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소는 농부에게 그날 밤에 그 집을 찾아오는 손님 500명을 대접해야 한다고 말했다. 농부는 이상스럽고 두려운 마음으로 500명을 위한 잔치를 준비했다. 그날 밤에 500명의 도둑 떼가 그 집에 들이닥쳤다. 굶주린 밤손님들이 한참 음식을 즐길 때에 그 소는 외양간에서 나와 도둑들에게 낟알 셋을 먹었던 것과 그 代價로 3년 동안 일을 했던 것을 모두 이야기했다.
농부에게 충분히 보상을 했으므로 釋迦牟尼는 그와 작별하고 다시 설법에 나섰다. 그 노상강도들은 모두 자신들의 죄를 뉘우치고 釋迦牟尼를 따랐다. 그것이 羅漢들의 기원이었다.35)>
그런데 이러한 五百羅漢의 설화는 釋迦牟尼의 일생을 다룬 경전인 「佛所行讚(불소행찬)」이나 그밖의 불교 설화집 등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불교경전에 대한 지식이 대중화되지 못했던 당시의 상황으로 미루어 金氏 부인은 아마도 文殊庵의 승려 등을 통하여 불교 교리에 대해서도 웬만큼 통달해 있었던 것 같다.
어린 承龍은 어머니의 말을 사실로 믿었다. 金氏 부인은 承龍의 생일 때마다 그를 북한산 기슭의 文殊庵에 보내어 불공을 드리게 했는데, 불공을 드리러 갈 때에는 사흘 동안 집에서 금식을 하고 사람이나 짐승의 피라든가 시체와 같은 부정한 것을 보지 말아야 했다. 그렇게 한 다음 하녀인 복녀를 따라 文殊庵에 처음 갔을 때의 일을 李承晩은 그의 자서전 초고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북한산에 자리잡은 그 아름다운 절의 첫 인상은 어찌나 좋았던지 나의 기억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영적인 분위기와 금욕적인 환경 속에서 모든 것이 어찌나 속세와 다르던지 나는 꿈나라에 간 기분이었다. 형형색색의 옷을 입고 모자를 쓴 五百羅漢들이 웅장한 불당에 나란히 앉아 있었고, 벽에는 극락과 지옥의 그림들이 황홀하게 그려져 있었다.36)>
李承晩은 대통령 재임 때에도 노구를 무릅쓰고 이 文殊庵을 찾았다. 어린 시절 불교의 영향은 李承晩이 성장하여 일생동안 직접 간접으로 기독교와 관련된 생활을 하면서도 지워지지 않았다. 뒷날 대통령이 된 뒤에 타락한 사찰의 淨化에 크게 관심을 기울이는 것도 어린 시절에 불교로부터 받은 영향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李承晩은 심지어 자기는 교회에 나가지만 『교회에 가면 어쩐지 남의 집에 간 것 같고, 절간에 들르면 제집에 들어서는 것 같다』고까지 토로한 적이 있다.37)
여섯 살에 「千字文」 떼어
承龍은 한문교육도 어머니에게서 먼저 받았다. 맨 처음은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千字文」을 외우는 것이었는데, 金氏 부인은 어린 아들에게 매질을 해가면서 글을 가르쳤다. 承龍은 총명했다. 여섯 살에 「千字文」을 떼었는데, 그것이 무척이나 대견스러웠던 敬善 내외는 동네 사람들을 불러 잔치를 베풀었다. 「千字文」을 떼자 「童蒙先習」을 익혔다.
金氏 부인은 아들에게 詩도 가르쳤다. 李承晩은 뒷날 어떤 감회를 느낄 때마다 그 자리에서 漢詩를 짓곤 했는데, 이는 어릴 때에 어머니로부터 받은 교육이 원천이 되었던 것같다. 그것은 李承晩이 자서전 초고에서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는 것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나의 첫 詩想도 어머니가 가르쳐 주었다. 내가 어릴 때에 지은 한 구절의 아동시가 나의 마음속에 얼마나 깊이 새겨졌던지, 그 뒤에 나는 오랫동안 그런 詩를 지으려고 애를 쓰곤 했다.
風無手而木(바람은 손이 없어도 뭇 나무를 흔들고)/月無足而行空(달은 발이 없어도 하늘을 건너간다)38)〉
李承晩은 자서전 초고를 영어로 썼는데, 이 詩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The wind has no hands but it shakes all the trees;
The moon has no feet but travels across the sky.>
이 영문시는 올리버가 쓴 전기에는 그대로 인용되어 있으나39) 서정주가 쓴 것에는 없다. 金氏 부인은 承龍의 교육에 온 정성을 다 쏟았다. 金氏 부인은 承龍이 글씨를 쓰는 데 행여 지장이 있을까 하여 무거운 물건을 들지 못하게 하고, 돌팔매질도 못하게 했다.40)
承龍은 열심히 글씨를 썼는데, 敬善은 곧잘 사람들을 불러 아들의 글씨 쓰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많은 사람들이 둘러서서 『야, 그 도령 잘 쓴다』하고 탄성을 올릴 때면 承龍은 여간 기쁘고 자랑스럽지 않았다.41)
金氏 부인의 교육에 의한 빠른 학습의 성취는 「왕손 후예의 6代 독자」임을 강조하는 敬善의 훈계와 함께 承龍으로 하여금 상대적 우월감과 함께 자신의 존재에 대한 특별한 긍지를 느끼게 했으며, 그것이 일생을 두고 그를 남다른 사명감과 자신감에 찬 인간형으로 발전시켰을 것이다.
천연두로 視力 잃을 위기 겪어
어린 承龍이 여섯 살 때에 천연두를 앓고, 倂發症(병발증)으로 몇 달 동안 실명 상태에 빠졌던 것은 그의 생애 최초의 큰 시련이었다. 이때의 일을 그의 전기들은 매우 극적으로 서술하고 있는데, 그것은 李承晩이 그만큼 자세히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두창, 손님, 마마, 홍역 등 많은 이름으로 불리는 천연두는 무서운 전염병이었다. 조선조의 全시대에 걸쳐 계속 유행했었고 전염 규모도 엄청난 것이어서 사람들의 공포의 대상이 되어 왔다. 그리하여 肅宗, 英祖 때에는 내의원에 痘科(두과)의 전문의를 두기도 했었다. 천연두의 예방접종은 正祖 때에 丁若鏞(정약용)에 의하여 처음으로 도입되었으나, 불행하게도 西學 배척의 분위기에 밀려 중단되고, 池錫永(지석영)에 의하여 본격적인 種痘사업이 실시된 것은 1879년에 이르러서였다.42)
그러나 그 종두사업도 충분한 것은 아니었다. 承龍도 물론 예방접종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일찍이 천연두로 두 아들을 잃었던 敬善 내외가 承龍이 천연두를 앓고 게다가 눈까지 멀게 되자 얼마나 당황했을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承龍은 빨갛게 단 쇠붙이가 두 눈을 찌르는 것같이 아팠다고 했다.
소년은 아픔을 견디지 못하고 펄쩍펄쩍 뛰어서 한쪽 구들이 내려 앉았다. 집에서 일하는 늙은 부부가 두꺼운 포대기로 햇빛을 가리고 承龍을 업고 달래었다. 敬善 내외는 매일 치성을 드리고 약을 구하기 위해 의원들과 친지들을 찾아 다녔다. 100가지도 더 되는 약을 써 보았을 것이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敬善은 惠民署의 郎官을 지낸 친척 李浩善이 권하는 대로 아들을 외국인 의사에게 데려가 보이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그것은 여간 용기가 필요한 일이 아니었다. 承龍이 눈을 동여 맨 채 조그마한 가마를 타고 집을 나갈 때에 金氏 부인은 아들을 묻으러 보내기나 하는 것처럼 목을 놓고 울었다.
敬善이 찾아간 사람은 일본인 의사였다. 의사는 진찰을 마치고 물약 한 병을 주면서 하루에 세 번씩 承龍의 눈에 넣어 주라고 말하고, 사흘 뒤에 효과를 잘 살펴보라고 했다. 사흘째 되는 날은 공교롭게도 承龍이 일곱 살이 되는 생일이었다. 그리고 의사의 말대로 이날 承龍은 시력을 되찾았다. 그토록 심하게 앓던 눈병이 어떻게 이처럼 간단히 치료될 수 있었는지 적이 의심스러운 일이기는 하다.
敬善은 감사의 표시로서 달걀 한 꾸러미를 들고 아들과 함께 의사를 찾아갔다. 그러나 의사는 『댁의 아들이 나보다 더 달걀을 먹어야 합니다』하고 말하면서 사양했다. 이것이 承龍이 외국사람을 만난 첫 경험이었다.43) 李承晩은 대통령 재임 때에 李浩善의 후손을 찾았고, 1957년 6월15일에 경무대로 찾아온 浩善의 손자며느리 연안 金氏에게 어려서 눈병을 앓던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44)
그런데 올리버는 承龍이 천연두를 앓은 것이 아홉 살 때였고, 찾아간 의사는 초대 선교사인 호레이스 N. 알렌(Horace Newton Allen)이었다고 적고 있다.45) 그러나 이는 착오이다. 왜냐하면 알렌이 고종의 허락을 얻어 薺洞(제동)에 廣惠院을 설치한 것은 甲申政變이 나던 1884년의 일이고, 이때에 承龍은 열 살이 되어 있었다.
承龍이 진고개에 있는 일본인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았다는 徐廷柱의 기술46)이나 讓寧大君派 종회의 전 都有司 李丙圭의 증언47)도 정확하지 않아 보인다. 承龍이 천연두를 앓던 해인 1880년에는 하나부사 요시타다(花房義質) 일본 변리공사가 서대문 밖에 임시공사관을 설치하고 마에다 기요노리(前田淸則)라는 해군 군의관으로 하여금 배속 의관으로서 내왕하게 하고 있었고, 서울에 일본인 병원이 생기는 것은 3년 뒤인 1883년 6월에 일본 공사관 옆에 日本館醫院을 특설하고 거류 日人들과 함께 조선인들에게도 의료를 실시하기 시작하는 것이 효시였기 때문이다.48) 그러므로 李浩善의 주선으로 承龍을 치료해 준 의사는 일본 임시공사관의 군의관이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
(4) 「水滸誌」의 영웅 같은 아버지
金九도 아버지를 닮아서 건장한 체구와 강한 의협심과 용맹을 타고 났었고, 그것이 계속되는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면서, 李承晩과는 또 다른 풍운의 생애를 성공적으로 살아갈 수 있었던 저력이 되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金九 자신도 「白凡逸志」 상권을 마무리하면서 『내 일생에서 제일 행복이라 할 것은 기질이 튼튼한 것이다. 거의 5년의 감옥 고역을 하루도 병으로 쉰 적이 없고 인천 감옥에서 학질에 걸려 반나절 동안 역을 쉰 적이 있을 뿐이다』하고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49)
金九의 아명은 昌巖이었다. 昌巖도 서너 살 때에 천연두를 앓았는데, 「白凡逸志」에 그것과 관련한 특별한 내용이 없는 것으로 보아 심하게 앓지는 않았던 것 같다. 다만 어머니 郭氏 부인이 보통 종기를 치료할 때처럼 대나무 침으로 얼굴에 솟은 돌기에 고름이 맺힌 것을 따고 고름을 짜냈기 때문에 얼굴에 자국이 많이 생겼다고 한다.50)
昌巖은 어머니 郭氏 부인보다도 아버지 淳永으로부터 더 많은 영향을 받고 자랐다. 淳永은 金九 자신의 말로는 『학식은 이름 석 자를 쓸 줄 아는 정도』였다고 하나, 그보다는 나은 수준이었던 것 같으며, 허우대가 좋고 성격이 호방했다. 술이 한량이 없었는데, 취기가 오르면 이웃 양반 姜氏, 李氏네 사람들을 만나는 대로 두들겨 패서 1년에도 여러 차례 해주 관아에 구금되어 문중에 소동을 일으키곤 했다.
사람을 구타하여 상해를 입히면 맞은 사람을 떠메다가 때린 사람집에 눕혀 두고 죽는지 사는지를 지켜보는 것이 그 무렵의 지방 관습이었다. 그 때문에 한 달에도 몇 번씩 거의 죽게 된 사람이나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사람이 淳永의 집 사랑방에 누워 있기가 일쑤였다. 淳永이 사람을 잘 팬 것은 술기운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불평 불만이 남달리 컸고 의협심이 강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金九는 자기 아버지가 『마치 「水滸誌(수호지)」에 나오는 영웅처럼 강자가 약자를 능멸하는 것을 보면 친·불친을 불문하고 참지 못하는 불 같은 성격이었다』고 적고 있다.51) 그래서 淳永에 대해 인근 상민들은 두려워서 공경하고 양반들은 슬슬 피했다.
『너도 술을 먹으면 자살하겠다』
淳永 형제의 음주벽에 관한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는 어린 昌巖에게 준 가정환경의 영향이 어떠했는가를 짐작하게 한다.
昌巖의 넷째 삼촌 俊永도 淳永과 마찬가지로 술이 과했고, 취하면 곧잘 소란을 일으키는 것도 淳永과 비슷했다. 그러나 그는 淳永과 반대로 양반에게는 감히 덤비지 못하고 문중 친척들에게만 위 아래 없이 욕을 하면서 싸움을 걸었다.
昌巖이 아홉 살 때에 큰 아버지 伯永의 장례식이 있었는데,52) 俊永의 행패로 장례식이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 俊永이 술에 취해 상여꾼을 모조리 두들겨 패버려 낭패하자 인근 양반들이 큰 생색을 내느라고 노복을 한 사람씩 보내어 다시 상여를 메고 가게 했다. 그러자 俊永은 그들까지 때려서 모두 쫓아버리고 말았다.
마침내 俊永을 결박하여 집에 가두어 놓고 집안 사람끼리 운구하여 장례를 치르고 나서 가족회의를 열었다. 昌巖의 종증조부 주관으로 연 가족회의는 俊永을 앉은뱅이로 만들기로 결의하고 그의 두 발뒤꿈치를 베어버렸다. 다행히 힘줄이 상하지는 않아 병신은 되지 않았다. 아무리 홧김에 내린 결정이라고 하더라도 이러한 가족회의의 결정은 과격한 처사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뒷날 金九가 「白凡逸志」에서 이 사실을 두고 「지금 생각해 보면 이것이 상놈의 본색이요 所爲라 하겠다」라고 적고 있는 것은, 비록 조락한 시기의 臨時政府이기는 했으나 그 수반인 國務領까지 역임한 뒤인 이때까지도 그가 양반 콤플렉스를 불식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또한 그러면서도 이처럼 자랑스러울 수 없는 이야기를 자세히 소개하고 있는 데서 우리는 金九의 솔직한 성품을 느낄 수 있다.
俊永이 종증조부의 사랑에 누워 범같이 울부짖는 바람에 어린 昌巖은 무서워서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이때에 郭氏 부인은 아들을 보고 『우리 집에 허다한 풍파가 모두 술 때문에 생기는데, 두고 보아 네가 술을 먹는다면 나는 단연코 자살을 하여서도 네 꼴을 보지 않겠다』하고 말했다. 이때의 일을 회상하면서 金九는 『나는 이 말씀을 마음 깊이 새겼다』하고 맺고 있다.53)
해마다 세밑이 되면 淳永은 닭이며 달걀이며 담배 같은 것을 준비하여 營吏廳과 使令廳 사람들에게 선물을 보냈다. 그러면 그 답례로 책력이나 해주 먹 같은 것이 왔다. 이처럼 미리 손을 써두는 것을 禾契房(계방)이라고 했는데, 이렇게 계방을 해두면 소송을 하게 되는 경우에는 말할 것도 없고 만일에 營門이나 本衙(본아)에 잡혀가서 옥이나 영청에 갇히더라도 사실은 使令이나 營吏들과 같이 먹고 자는 것과 마찬가지이며, 비록 태장이나 곤장을 맞게 되더라도 아프지 않게 때리는 시늉만 하는 것이었다.
옥에서 나와 반대 소송을 제기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하여 양반토호들을 구속시키고 나면 그들은 재산을 있는 대로 써서 監司나 判官에게 뇌물을 주고 모면하더라도 使令이나 營屬들에게 별별 고통을 당하게 된다. 실제로 그런 수단으로 해서지방에서 1년 동안에 부호 10여 명이 낭패를 당하기도 했다고 한다.54)
이러한 淳永이 都尊位에 천거된 것은 인근 양반들의 회유책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淳永은 도존위가 된 뒤에도 양반들에게 고분고분한 다른 존위들과는 반대로 그들한테서는 엄격하게 세금을 거두고 빈천한 사람들한테서는 자기가 부담할망정 가혹하게 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양반들은 金淳永이라고 하면 부녀자나 아이들까지도 손가락질을 하며 미워했다고 한다. 淳永이 양반들 사랑에 들를라치면 그 주인이 다른 양반들과 같이 있을 때에는 『허, 金존위 왔는가』하고 낮춤말을 썼다가도, 혼자 있을 때에는 이따금 『이랬소』 『저랬소』하고 이른바 머드레 공대를 하곤 했다. 淳永은 결국 3년이 못 가서 공금을 축내었다고 해서 면직되고 말았다.
아버지 숟갈 분질러 엿 사먹어
이러한 아버지의 외아들로 태어난 昌巖은 말 없는 아이로 자랐다. 다음과 같은 몇 가지 金九의 어릴 때의 에피소드는 그의 타고난 성품과 성장기의 생활 환경을 잘 말해준다.
<昌巖이 네 살 때의 일이다. 郭氏 부인이 화로에 꽂아두고 쓰는 부서리(작은 부삽)를 가지고 놀다가 그만 그것이 손등에 쩍 달라붙었다. 그런데 아이는 울지도 않고 앉아서 『어, 부서리가 손등에 붙었다』하고 말했다.55)>
<郭氏 부인은 昌巖에게 따로 옷을 해 입힐 수 없어서 한참동안 어른의 헌 저고리를 입혀 밖으로 내보내었다. 하루는 날이 저물어 같이 놀던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 올 때에 昌巖이 보이지 않았다. 저쪽 풀밭에 혼자 엉거주춤 하고 서 있기에 아이들이 가 보았더니 『똥구멍에 나무가 박혔다』하고 말했다. 땅바닥에 앉다가 항문에 나무조각이 박혔던 것이다.56)
金九의 아들 金信은 아버지가 어릴 때에 가난해서 열 네 살이 되도록 바지를 입지 못하고 자랐다고 할머니한테서 들었다고 말하고 있으나57) 이 말은 조금 과장이다. 金九는 열두 살 때에 동네 아이들과 함께 훈장을 초빙하여 글공부를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金九가 어려서 한참동안 어른의 헌 저고리만 입고 자랐던 것은 金信의 말로도 확인할 수 있다.〉
위의 두 가지 이야기는 郭氏 부인으로부터 직접 들은 사람들이 전하는 말이다. 그리고 金九 자신은 그의 자서전에서 어릴 때의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다.
〈淳永은 昌巖이 다섯 살 때에 몇몇 일가집들과 함께 康翎의 삼거리로 이주하여 이태 동안 그곳에서 살았다. 일족이 어떻게 하여 강령으로 이주하게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경제적으로 궁핍하고 또 이웃 토반들을 피하여 새로운 開拓地를 찾아 나섰던 것으로 짐작된다.
淳永의 집은 밤에 호랑이가 사람을 물고 집 앞을 지나갈 만큼 적막한 산 어귀에 있었다. 그리하여 淳永 내외가 농삿일이나 해산물을 채취하러 나가고 나면 昌巖은 가까운 신풍 이생원 집에 가서 그 집 아이들과 놀다오는 것이 일과였다.
하루는 그 집 아이들이 『해줏놈 때려 주자』고 공모하여 昌巖은 몰매를 맞았다. 昌巖은 곧 집으로 돌아와 부엌칼을 가지고 아이들을 찔러 죽일 생각으로 그 집으로 달려갔다. 사랑 앞문으로 들어가면 아이들이 눈치챌까보아 뒤로 돌아 가서 칼로 울타리를 뜯고 안으로 들어갔는데, 마침 안마당에 있던 열 일여덟 살 난 그 집 처녀가 보고 놀라 큰 소리로 오라비에게 일렀다. 결국 昌巖은 다시 아이들에게 실컷 얻어맞고 칼만 빼앗기고 돌아왔다.
또 하루는 昌巖이 혼자 집에 있으면서 몹시 심심해 하고 있을 때에 엿장수가 『헌 유기나 부러진 숟갈로 엿들 사시오』하고 외치며 지나갔다. 소년은 엿이 먹고 싶었으나 엿장수가 아이들의 자지를 잘라간다는 말을 어른들에게서 들은 적이 있기 때문에 방문을 닫아 걸고 엿장수를 불렀다.
부러진 숟갈이라야 엿을 주는 줄 안 소년은 아버지의 좋은 숟갈을 밟아 분질러 반은 두고 반만 문구멍으로 내어 밀었다. 엿장수는 엿을 한 주먹 뭉쳐서 들이밀어 주었다. 엿을 한참 맛있게 먹고 있을 때에 아버지가 돌아왔다. 사실대로 말하자 淳永은 『다시 그런 짓을 하면 혼을 내겠다』고 꾸짖었다.
그 뒤 어느 날 淳永이 엽전 스무 냥을 방 아랫목 이부자리 속에 넣어 두고 나가는 것을 보고 昌巖이 그 돈을 모두 꺼내어 온몸에 감고 떡을 사먹으러 나섰다가 길에서 삼종조부를 만났다. 그는 돈을 빼앗으며 『네 아비가 보면 큰 매 맞는다. 어서 집으로 들어가거라』하고 昌巖을 집으로 돌려 보냈다.
얼마 뒤에 집에 돌아온 淳永은 말 한 마디 없이 다짜고짜로 빨랫줄로 어린 아들을 동여 들보에 달아매고 사정없이 매질을 했다.
그때에 마침 昌巖을 지극히 사랑하던 재종조부 長連 할아버지가 지나가다 昌巖의 비명소리를 듣고 달려 들어와 설명도 듣지 않은 채 『어린 것을 그토록 무지하게 때리느냐』하고 꾸짖으며 昌巖을 때리던 매를 빼앗아 그것으로 淳永을 때렸다. 長連 할아버지는 淳永과 동갑이었으나 親屬의 권위로 淳永을 책망한 것이었다.
어린 昌巖은 長連 할아버지가 고마웠고 자기 아버지가 매맞는 것이 시원하고 고소했다. 長連 할아버지는 昌巖을 업고 들로 나가서 수박과 참외를 사 먹이고 나서 자기 집으로 데려갔다. 昌巖은 그 집에서 여러 날 묵고 난 뒤에 집으로 돌아왔다.58)
한 번은 장마비로 집 근처에 샘이 솟아나 여러 갈래의 작은 시내를 이루었다. 昌巖은 빨강 파랑 물감을 집에서 통째로 꺼내어다가 한 시내에는 빨강이를, 다른 시내에는 파랑이를 풀어 붉은 시내 푸른 시내가 한데 어우러지는 모양을 보며 좋아하다가 어머니에게 몹시 매를 맞았다.59)〉
함지박 장수 딸을 며느리 삼기로
독자로 태어난 昌巖이 金氏 一家만 모여 사는 텃골 집성취락의 씨족주의 분위기 속에서 양친뿐만 아니라 집안 어른들로부터 특별한 귀여움을 받고 자랐던 것도 그의 성장기의 인격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사촌들이 있기는 했으나 어려서부터 집안 농삿일만 거드는 이들 사촌들과는 잘 어울렸던 것 같지 않다. 淳永은 빈한하면서도 어떻게 해서든지 외아들을 농사꾼으로 만들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뒷날 河浦事件(치하포사건)으로 구속되어 재판을 받을 때에 金九는 자신이 「7代 독자」라고 진술하고 있고, 淳永과 郭氏 부인이 각각 법부대신에게 올린 탄원서에도 아들이 「7代 독자」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흥미 있는 일이다.60)
金九의 과묵한 성품과 대담성과 강한 저항정신은 선천적인 강인한 체력과 함께 성장기의 생활환경에서 형성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金九의 과묵한 성품은 뒷날 사회활동 과정에서 더러는 오해를 사는 요인이 되기도 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은 복잡한 상황 속에서 지도자로 성장하는 데 오히려 강점이 되었을 것이다.
郭氏 부인은 金九의 말에 따르면 『비록 하향 농촌에서 생장하셨으나 무슨 일에나 잘 감당해 내시고 더욱 바느질이 능하신61)』 여성이었다. 郭氏 부인은 金九가 어려서 서당에 다닐 때에 김품과 길쌈품을 팔아서 아들의 紙筆墨 값을 벌기 시작하여, 먼 이국땅 重慶에서 『내 원통한 생각을 어찌하면 좋으냐!』 하고 숨을 거두기까지, 고난의 팔십 평생을 오로지 아들을 위해 바치는 것은 뒤에서 보는 바와 같다. 그러나 어릴 때에 金九는 어머니보다 아버지 淳永으로부터 훨씬 큰 영향을 받고 자랐고, 장성해서도 한참 동안 모든 중요한 결정은 아버지의 의견에 따랐다.
淳永은 昌巖이 열 두서너 살 때에 어떤 술집에서 金致景이라는 함경도 사람 함지박 장수를 만나 취중에 말이 오가다가 그에게 열아홉 살 난 딸이 있다는 말을 듣고 농담같이 며느리로 달라고 청혼을 했고 金致景도 승낙했다. 그리하여 淳永은 昌巖의 사주까지 보내고, 여자아이를 가끔 집에 데려오기도 했다. 이무렵 昌巖은 書堂에 다니고 있었는데, 동네 아이들이 그일을 알고 놀려대곤 했다.
『너는 함지박 장수 사위다. 너의 집에 데려온 처녀가 곱더냐?』
이런 놀림을 받을 때에는 昌巖은 몹시 불쾌했다. 하루는 추운 겨울 날 昌巖이 얼음판에서 팽이를 치며 놀고 있는데 그 여자아이가 곁에 와서 구경하다가 자기에게도 팽이를 한 개 깎아 달라고 말했다.
이 말에 昌巖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어머니를 졸라 그 여자아이를 돌려 보내버렸다. 그러나 딱히 약혼을 취소한 것은 아니었다. 金九는 이 일이 자기가 너더댓 살 때의 일이라고 적고 있으나62) 열두 살 때부터 서당에 다니고 있었으므로 그것은 착오일 것이다.
昌巖이 어머니를 졸라 그 여자 아이를 돌려 보낸 것은 그 여자 아이가 굳이 싫어서 그랬다기 보다는 함지박 장수 사위가 되는 것이 더 싫었기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이 무렵 昌巖은 「상놈」 신분을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科擧에 급제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아버지를 졸라 눈물겨운 書堂 공부를 시작하고 있었다.
그만큼 金九는 어릴 때부터 신분상승의 강한 욕구를 가지고 성장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몰락한 양반의 궁핍한 처지에서 立身出世를 위해 여섯 살 때부터 科擧를 목표로 서당공부를 시작하는 李承晩의 경우와 절박성에서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우리는 李承晩과 金九가 서당공부를 어떻게 했고 科擧에 어떻게 실패했는지를 다음호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그런데 淳永의 이 경박한 처사 때문에 金九가 평생의 스승인 유학자 高能善의 손자사위가 되는 연분이 깨어지고 마는 것은 뒤에서 보는 바와 같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