林俊秀 언론인·성균관大 겸임교수
벽안의 코리안 나무사랑 50년
미군 장교로 이 땅에 처음 발을 디딘 그는 독신으로 지내며 수목원을 가꾸었고 1979년 한국인으로 귀화했다. 그의 50년 나무사랑의 결실인 천리포 수목원은 이제 국제적으로 알아 주는 「나무 박물관」이 됐다. 세계수목협회는 이곳을 아시아 최초로 「세계의 아름다운 수목원」으로 선정했다. 30년 간 가꾼 수목원에 대해 민병갈씨는 『300년을 내다보고 한 일』이라고 말한다. 그는 또 『이 수목들이 내가 제2의 조국인 한국에 바친 마지막 선물로 남기 바란다』고도 했다
「워낙 독한 노인네」
4~5월이 되면 세계에서 가장 다양한 품종의 목련들이 봉오리를 터뜨려 일대 장관을 이루는 桃園景(도원경)이 있다. 충남 태안반도 갯마을에 자리 잡은 천리포 수목원이다. 이곳은 56년째 한국에 정착하여 살고 있는 이방인 閔丙(민병갈·Carl Ferris Miller) 의 오랜 정성과 땀이 배어 있다. 올해 81세로 미국 태생인 그는 특이한 경력 때문에 식목철이 되면 어김없이 「나무사랑」의 표상으로 매스컴에 오르내렸다. 그런데 화제의 이 「나무 할아버지」가 올봄엔 이례적으로 대중매체에서 멀어져 있다. 금년따라 그가 매스컴을 타지 않은 이유는 지난 1월 중순 치료가 어려운 병명의 진단을 받고 4개월째 정기적인 입원치료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겐 두 개의 직함이 있는데 하나는 천리포 수목원 원장이고 다른 하나는 굿모닝증권社 고문직이다.
서울과 천리포 등 두 개의 직장이 있는 셈이나, 고문직은 원장직을 원만히 수행하기 위한 보조수단일 뿐이다. 투병 중에도 수목원을 잘 가꾸려는 그의 마음가짐엔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다.
5월 중순, 여섯 번째 입원치료를 마치고 천리포에 내려온 閔원장은 예년에 볼수 없던 쓸쓸한 모습이다. 그는 지금 올 봄에 핀 목련들이 어쩌면 자기 생애에서 마지막으로 보는 봄꽃이 될지 모른다는 서글픔에 잠겨 있다. 별목련의 눈부신 꽃잎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그의 주름진 얼굴엔 「 내가 떠난 뒤엔 이 어린 것들은 어떻게 자랄 것인가」라는 걱정과 염려의 기색이 역력하다.
병상에서 지켜 본 閔원장의 모습은 병이 깊은 환자처럼 뵈지 않는다. 머리맡엔 항상 수목 관련 잡지와 서적들이 놓여 있고, 낮이나 밤이나 눈만 뜨면 책을 놓지 않는다. 고통이 따르는 투약중에도 그는 변함없이 독서에 열중한다. 그를 그림자처럼 따르는 李揆賢(이규현·천리포 수목원 관리부장)씨의 말에 따르면 「워낙 독한 노인네」라서 정신력으로 아픔을 숨기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병원食 쟁반에는 「노 치킨(No Chicken)」이라고 쓰여진 메모가 항상 따라 다닌다. 환자가 닭고기를 몹시 싫어하기 때문이다. 닭을 싫어하는 그의 성미는 그가 운영하는 천리포 수목원의 땅 이름까지 바꿔 놓았다. 18만 평(60ha)에 이르는 그의 천리포 수목원에는 1만2000평(4ha) 규모의 섬이 하나가 있는데 그 섬의 원래 이름은 「닭섬」이었으나 20여년 전 수목원 지도를 만들면서 「낭새섬」으로 이름을 바꿔 버렸다. 이 섬에 낭새(학명:바다직바구리)라는 희귀한 조류가 서식하는 것에 착안하여 이같이 지명을 바꾼 것인데 외국인으로서 땅 이름을 짓는 그의 한국어 감각은 가히 수준급이라고 할 만하다.
閔원장의 작명술은 그의 한국 이름에도 나타난다. 그의 「민병갈」이라는 한국 이름은 1970년대 한국은행 근무시절에 지은 것이다. 그의 본래 이름은 칼 밀러 (Carl Miller)인데 姓을 앞세운 「밀러 칼」을 한국식 발음으로 바꿔 이같이 정한 것이다.
그가 이같이 한국 이름을 지어 閔丙로 한자를 쓰게 된 사연 뒤에는 韓銀에서 근무할 때 절친했던 閔丙燾(민병도) 前 한은 총재와의 우정도 깔려 있다. 성과 돌림자가 같은 두 사람은 그로부터 지금까지 40년이 넘게 우정을 나누고 있다. 그는 한국신문들이 자신의 한자 이름 중 을 渴로 잘못 쓰는 사례가 많다고 불만이 많다. 그래서 기자들에게 「초두 밑에 쓰는 맑을 갈 자」로 쓰라는 당부를 잊지 않는다.
「펜실베이니아 閔씨」에서 「여흥 閔씨」로
그의 한자 이름엔 또 하나의 흥미 있는 일화가 담겨 있다. 그가 1979년 한국으로 귀화하면서 천리포 수목원의 행정관청인 태안읍에 호적신청을 할 때 서류에 閔씨의 본관을 써 넣어야 할 문제가 생겼다. 한국의 족보학에도 상당한 지식이 있던 그는 자신의 本貫을 새로 정하기로 마음 먹고 그의 미국 출생지 이름을 빌어 「펜실베이니아 閔씨」로 해달라고 주문했다. 담당 공무원이 난색을 표명하고 접수를 거부하자 할 수 없이 그는 閔 前 총재의 본관을 따르기로 했다. 그 바람에 그는 여흥 閔씨 종친회 회원이 되었고, 몇 년 후에는 천리포수목원에서 성대한 종친회 잔치를 베풀어 주기도 했다.
그가 펜실베이니아 閔씨로 본관을 정하지 않은 것은 결과적으로 잘한 일이었다. 그후 81세에 이르도록 그는 결혼을 하지 않아서 그의 姓을 따를 二世를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일 그의 뜻대로 호적등재가 이뤄졌다면 그 「엉뚱한 본관」은 한 代로 끝남으로써 우리나라 족보사에 「1인 본관」이라는 진기록을 남겼을 것이다. 그에겐 1961년에 입양한 양자가 있지만 자신의 한국姓을 따르게 하지 않았다.
閔원장의 병실을 찾는 문병객들은 반세기 넘게 한국에서 살아온 그의 폭넓은 인간관계를 말해 준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있는가 하면, 손자 뻘의 대학생도 있다. 강원도 산골의 營林員(영림원)이 있는가 하면, 전북 익산에서 올라온 여성佛子가 있다. 학창 때 환자로부터 학비를 보조받았다는 중년의 변호사도 보인다. 늦추위가 심했던 지난 3월 어느 날, 꽃바구니를 들고 온 70代 할머니의 문병이 꽤나 은근하고 다정했다. 한때 장안에서 명성을 날린 기생이었다는 그녀는 젊어서 사귄 이방인 청년을 변함없이 마음에 두고 閔원장을 찾아 본다. 이런 인간관계에 대해 한 측근은 『우리 원장님은 모르는 사람도 없지만 특별히 친한 사람도 없다』고 설명한다.
각계의 문병객이 말하듯, 그는 25세 때 미군 청년장교로 한국에 첫발을 디딘 이래 56년 간 수많은 한국인 친구들을 사귀었다. 그가 친했던 한국인들은 정·재계의 유명인사들보다 청년 지식인이나 가난한 예술가 등 보통 사람들이 더 많다. 특히 그는 농부들을 좋아하여 젊었을 땐 시골 마을을 많이 찾았다. 작년 12월24일 천리포에서 베풀어진 그의 팔순 잔치에는 추위속에도 많은 마을 촌로들이 찾아와 무병장수를 빌어줬다. 이 땅에서의 오랜 交遊에 대해 그는 「나는 人德이 많은 사람」이라는 표현으로 한국인 친구들에게 고마움을 나타낸다.
閔원장은 팔십고개를 넘어서도 여전히 현역이다. 평일 아침 9시엔 서울 명동의 증권사 고문실로 어김없이 출근하며, 증권시장이 쉬는 금요일 오후가 되면 천리포로 떠나 수목원에서 나무를 돌본다. 30년 이상 계속된 그런 생활은 최근의 투병기간에도 예외가 없다. 주변에서 만류하지만 『일을 안 하면 병세가 더 나빠진다』며 두 곳을 계속 왕래하고 있다. 그는 치료의 공백기간을 이용하여 지난 3월18일에는 비서와 함께 2주 동안의 해외여행 길에 올랐다. 처음엔 의료진이 난색을 표명했지만 본인의 뜻이 간절하니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벗은 한국의 草木
유럽행 여장을 꾸리면서 閔원장은 이렇게 말했다. 『이번이 내 생애 마지막 해외여행이 될지도 모른다』고. 마음속으로는 비장하고 서글펐겠지만 병색이 완연한 이 80노인의 표정엔 어떤 비감이나 쓸쓸함도 엿보이지 않았다. 만리 타국에 나가 있으면서도 그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사무실에 전화연락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김포공항을 통해 출국한 지 15일 만인 4월3일 저녁, 그는 영종도 신공항을 통해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그리고 하루 뒤에는 입원치료를 받는 투병의지를 보였다.
팔순을 넘겨 중병이라는 진단을 받고도 노익장의 모습을 잃지 않는 그의 근성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지금은 그의 투병의지가 놀랍지만 그와 오랜 친분을 나눈 입장에서 보면 「의지의 사나이」로서 갖는 그의 진면목은 다른 곳에 있다. 그것은 오십여 년에 걸쳐 변함 없는 한국 사랑과 나무 사랑이다. 많은 외국인들이 한국의 자연과 문물을 사랑했지만 閔원장만큼 생애의 종반까지 한국에 남아 그것을 지킨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 한국을 좋아한 외국인이 그랬듯이 그 역시 한국의 서화나 민예품을 좋아했지만 그것을 수집하기 보다는 보고 즐기는 것으로 끝났다.
그가 평생을 통해 이 땅에서 심취한 것은 전통문화재가 아니라 이례적으로 한국의 풍물이나 自然이다. 그래서 한국의 웬만한 자연의 명소 치고 그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남해의 다도해나 서해의 낙도는 젊었을 때부터 그가 즐겨 찾던 곳이다. 그에겐 한국의 초목들이 더할 수 없는 정다운 벗이다.
봄만 되면 산에 올라 야생화를 탐사하는 것이 큰 즐거움이었다. 그리고 가을이 되면 어김없이 수목원 직원들과 함께 종자 채집에 나선다. 야생목에서 씨를 받을 땐 나무가 상하지 않도록 특별히 이르는 그의 모습에서 그의 나무사랑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그가 이렇듯 정성을 들여 채집한 한국의 수많은 초목들은 천리포 수목원(www.chollipo.org) 한 곳에 모아져 있다.
밀러 중위가 느낀 한국에서의 첫날 밤
미국인 칼 밀러가 한국을 알게 된 경위는 매우 극적이며 서사적이다. 그는 일종의 점령군 장교로 한국에 첫 발을 디뎠다. 1945년 9월8일 이른 아침. 美 해군 중위였던 그는 적대국 일본의 식민지를 접수하는 연합군 1진에 끼어 인천에 상륙했다. 오키나와를 출발한 연합군함대는 인천 상륙 후 열차를 동원하여 서울로 진주했다. 일본군은 23일 전에 이미 항복을 했기 때문에 전투 위험은 없었지만 상륙 미군은 모두 완전무장을 한 상태였다. 이때 밀러 중위가 인솔한 12명의 CCIG-K(Civil Censorship Intelligence Group-Korea)부대원은 쫓겨가는 일본인들이 재산반출을 못하도록 감시하고 그들의 재산을 관리하는 특수 임무를 맡고 있었다. 대원들은 거의 일본계 미국인들이었다.
인천에서 군용차편으로 서울로 오는 두 시간 동안, 밀러 중위는 한국의 氣運(기운)을 온 몸으로 느꼈다. 그것은 매우 신선하면서도 향기롭고 따뜻했다. 맑은 하늘, 온화한 기후, 순박한 대지 등 한국의 자연 모두가 그의 몸과 마음을 포근하게 감쌌다. 그의 눈에 스쳐 가는 야트막한 산과 평화로운 들녘도 정겹기만 했다.
특히 그의 시선을 끈 것은 옹기종기 군락을 이루고 있는 시골마을의 초가집들이었다. 그로부터 세월이 50년 이상 흐른 지금까지도 그는 한국 땅을 처음 밟았을 때 느꼈던 야릇한 기분을 잊지 못한다. 그것은 형언할 수 없는 의식의 세계에서 체험한 신비한 감동이었다.
밀러가 소속된 선발대의 1차 주둔지는 지금도 남아있는 서울 명동의 중앙우체국으로 예정돼 있었다. 서울에 도착한 대원들은 건물 「접수」에 앞서 가까운 조선호텔 앞마당에 陣地(진지)를 구축했다. 밀러 중위는 이날 차가운 야영 군막 속에서 생애 최초로 한국의 밤을 맞았다. 그날 밤 밀러 중위는 밤 하늘에 떠 있는 수많은 별들을 바라보며 또 한 차례 온 몸으로 스며드는 한국의 기운을 느꼈다.
그날로부터 정확히 반세기 뒤인 1995년 9월8일 저녁. 웨스틴 조선호텔은 이제 한국인이 된 민병갈 예비역 대위에게 그의 한국 첫날 밤의 50주년을 기념하는 성대한 파티를 열어 주었다. 전투복이 아닌 전통한복을 차려 입고 손님을 접대하는 그의 모습은 왕년의 청년장교에서 어느덧 백발이 성성한 75세의 노인으로 변해 있었다. 그는 자못 상기된 표정으로 150여 명의 국내외 초청인사들 앞에서 감회 어린 인사말을 하면서도 유머를 잊지 않았다.
『이 호텔 앞에서 야영을 하며 한국에서의 첫 밤을 보낸 지가 50년이 됐다니 세월이 무상합니다. 오키나와 맥아더 사령부에서 작성한 한국파견 CCIG-K의 첫 명단엔 내 이름이 없었는데, 한 장교가 한국으로 가는 것을 꺼려해 대신 가겠다고 자원해 지휘관으로 오게 됐지요. 지금 생각하면 내가 한국에 오게 된 것은 前生(전생)의 인연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내 모습은 변함없이 큰 코에 노랑 머리를 지닌 서양인이지만 생각이나 마음은 한국인이 다 돼 있습니다. 오늘 조선호텔의 음식을 먹어 보니 50년 전의 차림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맛이 있군요. 아무쪼록 많이 드세요』
鄭周永 형제와의 교유
1979년 한국 국적을 취득한 閔원장의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애착은 남다른 데가 있다. 그는 식당 등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 가면 곧잘 「한국인」을 찾아낸다. 특정인을 가리키며 이목구비가 전통 한국인이라는 것이다.
그가 지목하는 사람을 보면 대개 눈빛이 선량하고 얼굴 윤곽이 길며 체구가 약간 마른 편이다. 같은 동양인이라도 중국인이나 일본인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요컨대 음험해 보이고 약삭빠른 인상은 싫다는 것인데, 심성이 너그러운 그도 인종에 관한 한 편견이 있는 듯하다. 그가 좋아하는 한국인의 장점은 선량하고 여유가 있는 모습이다.
밀러 중위가 한국인을 처음 만난 곳은 한국이 아닌 또다른 미군의 점령지역이었던 오키나와였다. 그곳은 그가 한국에 오기 전에 미 해군의 CCIG 요원으로 근무하던 일본 최남단의 섬인데 이곳에 포로로 잡혀 온 한국인 종군위안부를 보게 것이다.
연합군의 일본어 통역장교로서 포로를 심문하는 자리에 있던 그의 심문 대상엔 종군위안부가 포함돼 있었다. 그가 만난 한국 여성들은 대부분 부산지역에서 강제로 끌려온 10代 후반의 소녀들이었다. 그들은 공포에 질려 있었지만 밀러 중위는 이들의 모습에서 연민과 함께 순박하고 따뜻한 인간미를 느꼈다. 이때 받은 「선량한 코리안」의 첫 인상은 한국인의 原形처럼 지금까지 그의 뇌리에 남아 있다.
독일계 이민의 후손인 그는 일본어 통역장교라는 특이한 경력을 갖고 있다. 그의 전공은 원래 화학이었다. 1943년 펜실베이니아의 버크넬(Bucknell)대학 화학과를 졸업 후 콜로라도 대학원에 진학하여 이곳에서 1년 간 일본어 특수과정을 이수했다.
이 과정은 당시 일본과 전쟁을 하던 미국 국방부가 「작전상 필요」에 따라 개설한 위탁교육으로 IQ 150 이상의 英才만 선발하여 교육시키는 엘리트 코스였다. 그는 1년 동안 일본말만 써야 하는 유폐교육을 마친 뒤 1944년 해군 장교로 임관돼 오키나와의 맥아더 장군 사령부로 배치됐다. 그의 日語 및 漢子 실력은 이때 익힌 것이다. 70代 이후 청력이 떨어져 보청기를 사용하는 그는 모르는 한국어 낱말을 한자로 써 보이면 금방 알아 차린다.
일종의 정보장교로 오키나와 맥아더 사령부에 배치된 그가 하는 일이란 일본군에 관련된 정보를 분석하고 日軍 포로를 심문하는 일이었다. 1945년 8월15일 일본이 연합군에게 항복하자 미군 장교로선 이례적으로 일본通이었던 그는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국에 배치돼 「일본인의 재산반출 감시」라는 새로운 임무를 맡게 됐다. 그가 이끄는 CCIG-K 부대는 명동의 옛 증권거래소 건물에 본부를 두고 1946년 여름까지 10개월 동안 임무를 수행했다. 이 때 밀러 중위가 채용한 한국인 직원중의 한 사람이 鄭仁永 한라그룹 명예회장이다. 일본 靑山학원 영문과를 나온 鄭씨는 영어를 잘해 쉽게 미군부대에 취직할 수 있었다.
1945년 9월 말, 출근 2주쯤 후에 鄭씨는 친형인 鄭周永씨(前 현대그룹 명예회장)를 데려와 밀러 중위에게 소개했다. 이때 밀러는 鄭씨 형제에게 호감을 느끼고 셋이서 함께 뚝섬으로 놀러가 유쾌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얼마 뒤엔 자신의 군용지프로 周永씨의 이삿짐을 두 차례 날라주기도 했다. 그 후 형 周永씨와의 관계는 특별히 진전되지 않았지만 동생 仁永씨와의 우정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1950년대 仁永씨는 영어실력을 바탕으로 兄을 도와 막사 건설 등 미군 공사를 따내 현대그룹의 母기업인 현대건설을 국제적인 회사로 키우는 데 큰 공헌을 했다고 閔원장은 전한다.
어디서 본 듯한 얼굴들
밀러는 1946년 제대를 결심했지만 한국을 떠나기 싫었다. 같은 해 7월 군복을 벗은 그는 美 군정청에 요청하여 사법부 정책고문관으로 한국근무를 연장했다. 그때 나이 26세. 이제 부대규율에 얽매이지 않는 민간인이 된 그는 이곳에 근무하는 2년 동안 본격적인 「한국수업」에 들어갔다. 광복 후 美 軍政하의 국내사정은 극심한 경제난 속에 미국의 신탁통치 여부를 놓고 贊託-反託의 국론분열로 사회 전체가 시끄러웠지만 점령국의 관리로서 거칠 것이 없던 그는 시국의 혼란에 관계없이 여유 만만하게 한국의 풍물을 즐겼다.
1950년대 閔원장은 한국인에겐 꿈도 꿀 수 없던 자동차가 있었기 때문에 못 갈 데가 없었다. 더구나 그의 차는 4륜 구동이라서 열악했던 당시 도로사정의 구애를 받지 않았다. 첫발을 디딜 때부터 한국의 자연에 깊이 빠졌던 그는 전국의 산골과 두메를 돌며 신비롭게만 느껴졌던 「隱者(은자)의 나라」를 샅샅이 두 눈으로 확인했다.
딸린 가족도 없는 독신인 데다가 한국인과 비교가 안 되는 고소득 봉급자이다 보니 그에겐 「시간과 돈의 여유」가 풍족했다. 그는 그 모든 것을 한국의 자연과 풍물을 섭렵하는 일에 쏟았다. 아마 그는 內·外國人을 통틀어 한국 내 자동차 여행을 가장 많이 한 최초의 인물일 것이다.
한국의 자연을 찾아 자동차 여행을 즐기는 동안 그는 한국의 새로운 매력에 빠져들게 된다. 그것은 정겨운 한국의 풍물과 따뜻한 한국인의 인심이었다. 그를 더욱 사로잡은 것은 초가집과 장독대, 시골장터와 난장판, 사물놀이와 판소리 등 도회에서 볼 수 없는 한국의 서민생활과 풍습이었다. 애초부터 한국의 자연풍취에 매료된 그였지만 한국의 문화와 전통, 한국인의 인심과 풍속이라는 매력 포인트가 새롭게 그를 사로잡은 것이다. 생판 모르던 나라의 풍물에까지 탐닉하게 된 그의 배경설명이 흥미를 끈다.
『인천에 첫발을 디딘 순간 마력처럼 나를 사로잡았던 신비한 영감이 점점 현실로 나타나기 시작했어요. 군용 열차를 타고 인천에서 서울로 오는 동안 나의 눈에 비친 한국의 자연이 전혀 낯설지 않았던 것처럼 그 자연 속에서 사는 한국인이 또한 친숙하게만 느껴졌습니다. 선량한 얼굴은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모습이었고 세상에 급할 것이 없는 듯한 유유한 걸음걸이는 더 없이 정다웠습니다. 韓屋을 찾았을 땐 언젠가 한번 살았던 느낌이 드는가 하면, 김치 깍두기 등 전통 음식은 처음부터 나의 혀끝을 녹였지요. 한국에 온 것은 내 마음의 고향을 찾은 것과 다름 없다고 생각해요. 그러고 보면 나의 前生은 분명히 한국인이었나 봅니다』
어머니 설득 1979년 귀화
1948년 軍政이 끝나자 美 군정청 관리였던 그는 한국에 더 머무르기 위해선 새 직장을 찾아야 했다. 이듬해 유엔산하의 원조협조처(ECA)에 들어갔다가 1950년 6·25 전쟁 직전에 美 한국경제협조처(AID)로 자리를 옮겼다. 민간인으로 신분을 바꿔 한국에서 일한 그의 근무지는 미국의 對韓원조와 관련이 깊다. 그래서 그는 1950년대 한국 경제개발 정책에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본인은 그 점에 관해서 일체 입을 열지 않는다. 정보장교 출신인 때문일까. 그가 화제로 삼는 것은 한국의 자연과 풍물·인물일 뿐이다. 그리고 한국은행 시절을 많이 회고한다. 이곳에서 정년까지 24년 간 근무한 그는 사실상 韓銀 초창기 역사의 산 증인이다. 閔丙燾 申秉鉉(신병현·작고) 등 역대 韓銀 총재와 張基榮(장기영·작고) 宋仁相(송인상) 등 부총재들은 모두 그가 이 은행에서 일하면서 사귄 오랜 한국인 친구들이다.
칼 밀러가 민병갈로 바뀐 것은 그가 한국은행에 들어간 지 얼마 뒤의 일이다. 이미 말한 대로 1960년대 초에 閔丙燾 총재의 성과 돌림자로 한자 이름을 지었다. 그러나 실제로 그가 韓銀과 인연을 맺은 시점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이었다. 당시 韓銀 고문은 프라이어드라는 미국인이었는데 그의 보좌관이던 베이커가 휴직을 하는 바람에 그 자리에 임시로 들어간 것이 韓銀맨의 시초였다. 그는 이곳에서 韓銀 조사월보 등의 자료를 영문으로 번역하고 영문 보고서의 교열을 맡는 등 조사부 일을 많이 맡았다. 그때의 조사부 인재로 꼽히는 사람이 金正廉(김정렴) 前 청와대 비서실장, 申秉鉉 前 한은 총재 등이다.
그가 인재로 꼽는 또 하나의 韓銀 맨이 있다. 張基榮 부총재가 한국일보를 창간하면서 데려간 崔秉宇(최병우) 전 코리아 타임스 편집국장이다. 영어를 잘했던 崔씨는 그의 한국어 교사이자 술 친구였다.
두 사람은 1950년대 서울 관철동 술집에서 자주 어울렸는데 「한국에서 사는 재미 중의 하나는 술 먹고 길거리에 오줌 누는 것」 이라는 崔씨의 말에 따라 함께 노상방뇨를 하는 객기를 부린 적도 있다.
崔씨는 불행히도 1958년 8월 중국과 대만 간의 金門島 분쟁 현장을 취재하다가 순직했다. 그는 현재 사회적으로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언론단체 「관훈클럽」을 만든 인물이다.
閔원장이 한국생활 56년 중에 한국을 가장 오랫동안 떠나 있던 시기는 韓銀 촉탁직을 그만두고 본국에 돌아가 있던 1953∼54년의 1년 간이다. 이 시기는 한국전쟁이 휴전에 들어간 시점으로 학업을 계속할 생각으로 고향인 펜실베이니아에 머물던 그를 다시 한국으로 불러낸 사람은 당시 미국 유학중이던 申秉鉉 前 한은총재였다.
그는 1954년 가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이듬해 정식으로 韓銀 직원으로 발령을 받았다. 이때 그는 어느덧 35세의 노총각이 돼 있었다. 그로부터 1983년 정년퇴임 때까지 28년 동안 한국의 중앙은행에서 일하며 필생의 사업인 천리포 수목원의 터전을 잡았다. 수목원 조성이 본 궤도에 오른 1979년 그는 한국에 귀화하여 법적으로도 확실한 한국인이 됐다.
『나무란 자식 키우듯 돌봐야』
閔원장이 충남 태안반도의 천리포에 수목원의 근거지를 잡게 된 것은 극히 우연이었다. 그는 일찍부터 서해바다에 홀려 韓銀에 취직한 1950년대 후반부터 여름이면 버릇처럼 한국인 친구들과 만리포 해수욕장을 찾아 바다의 낭만과 해안의 落照를 즐겼다. 그때 자주 묵던 곳은 韓銀 부총재를 지낸 張基榮씨와 宋仁相씨의 만리포 별장이었는데 한국인 村老(촌로)들을 좋아했던 그는 마을 사람들과도 스스럼없이 어울렸다.
1962년 여름, 직장동료 申秉鉉씨(당시 韓銀 조사부 차장)와 宋씨 별장에 머물고 있을 때 한 마을노인이 찾아왔다. 그 노인은 이곳을 자주 찾는 낯선 외국인에게 자신의 천리포 야산을 사달라고 끈질기게 졸랐다. 당시 시골 야산은 매우 헐값이었기 때문에 그는 돕는 셈치고 부담없이 2000 평을 매입했다. 이 땅이 바로 현재의 18만평 규모로 성장한 천리포 수목원의 근거지가 됐다.
외국인이 땅을 샀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주민들로부터 자기 땅을 사 달라는 주문이 잇달아 1966년에 1만3000평을 추가로 매입했다. 1975년에 매입한 근처의 무인도(닭섬- 1만2000평)를 포함하여 그가 이곳에서 사들인 야산과 농토는 1978년까지 현재 수목원 규모인 18만 평으로 늘어나게 됐다.
이들 토지는 여러 차례에 걸쳐 매입했기 때문에 한 곳에 몰려 있지 않고 분산돼 있다. 그래서 현재의 수목원은 모두 7개 구역으로 나눠져 관리에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구역별로 수목들의 특성을 보일 수 있는 장점도 있다.
閔원장이 당초에 사들인 천리포 야산은 나무가 거의 없는 민둥산이었다. 토질도 나빠 30cm만 파도 염분 섞인 황토가 나오는 박토였다. 다행히 따뜻한 해양성 기후가 다양한 식물을 키우는 데는 바람직한 자연환경이었다. 그런데 이곳에 여러 가지 나무를 심고 싶은 그의 마음을 괴롭게 한 것은 식목에 관한 지식과 경험이 거의 없다는 점이었다. 그에겐 단지 나무에 대한 관심과 애정만 있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그가 사들인 천리포 2만여 평은 8년 동안 방치됐다. 그러나 그 공백기간은 그에게 망설임의 기간이 아니라 준비기간이었다. 그는 끊임없이 식물 답사여행과 전문서적을 탐독하여 식물 지식을 얻는 한편 수목관련 전문가를 물색했다.
수목연구가가 된 閔원장에겐 몇 사람의 한국인 「은사」가 있다. 그중 대표적인 두 사람이 李昌福(이창복) 서울대학교 임학과 교수와 趙武衍(조무연·1987년 작고) 임업시험장 연구관이다. 한국 식물학계의 원로인 李교수와 최고의 수목전문가인 趙연구관은 그가 백방으로 수소문한 수목의 大家(대가)들이었다. 李교수와의 관계는 산에서 사귄 李교수의 제자 洪性珏(홍성각·현재 건국대학 교수)씨가 다리를 놔 주었다. 이들 네 사람은 1960년대 중반부터 짝을 짓거나 또는 함께 어울려 식물탐사를 자주 했다. 이 때 이미 한글과 한자를 익힌 閔원장은 李교수의 저서 「대한식물도감」을 얼마나 많이 읽었는지 닳아서 못보게 될 정도였다.
수목원의 명물―100년된 초가집
수목에 관한 지식을 어느 정도 쌓은 그는 1970년부터 본격적인 수목원 조성사업에 들어 갔다. 당시 천리포는 車道가 제대로 뚫리지 않고 전기도 들어오지 않아 나무를 반입해 심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무엇보다 植樹用(식수용) 물을 쉽게 얻을 수 없는 해안지대가 문제였다.
궁리 끝에 自家(자가)발전기를 가동하여 급수시설을 갖추는 한편 나무 수송로는 썰물 시간의 갯벌을 이용했다. 干滿의 차가 심하고 갯벌이 단단한 모래밭인 천리포 자연조건이 천만 다행이었다. 이듬해(1971년) 봄엔 임업시험장의 趙연구관으로부터 한국 재래종 묘목 한 트럭분을 받아 천리포에 처음으로 외부지역 나무가 심어졌다.
閔원장은 천리포에 나무만 옮겨 심은 것이 아니다. 서울에서 韓屋까지 옮겨 지었다. 그는 1970년 이곳에 수목원을 조성할 때 세 채의 기와집을 이축했다. 서울 홍제동에서 도시계획으로 철거되는 것을 해체하여 옮긴 집인데 그중 한 채가 작년 11월 화재로 소실됐다.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수목원 내 최고의 명당에 자리잡았던 이 집은 현재 사는 한옥이 移築(이축) 되기 전까지 10년 넘게 머물던 곳이라서 추억이 담긴 옛집을 잃은 그의 상심은 매우 컸다.
1980년대에도 두 채의 韓屋을 이축했는데 하나는 서울 효자동에서, 다른 한 채는 경북 安東에서 옮겨 지은 것이다.
천리포 수목원에는 초가집과 자재 창고를 포함하여 韓屋이 15채가 있다. 그중 다섯 채는 외지에서 移築한 것으로 집집마다 나무이름이 붙어 있다. 소나무집·소사나무집·목련집·감탕나무집이 그런 이름이다. 나머지 韓屋들은 원래 있던 집이거나 직원용으로 신축한 것들인데, 싼 값으로 韓屋을 짓는 비결을 안다는 閔원장은 한국사람들이 살기 좋은 韓屋을 기피하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말한다. 그의 집에 가보면 주인 방은 온돌이고 가정부 방은 침대방이다.
그의 韓屋 사랑엔 남다른 데가 있다. 1945년 9월 한국땅을 처음 밟았을 때 첫 눈에 그를 사로잡은 것은 바로 韓屋이었다. 그의 한옥 집착은 그후 반세기 동안 이어졌다. 그가 1977년부터 4년 동안 기와집 생활을 즐긴 서울 가회동은 전통 韓屋촌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그에 앞서 1967년부터 9년 동안 머문 서대문구 현저동 집도 韓屋이다. 1980년부터 현재까지 살고 있는 연희동 자택은 양옥이지만 대문과 담은 韓式이다. 집에 비해 좀 커 보이는 이 집 대문은 15년 전 경북 안동에서 옮긴 것이다. 명동 사무실에서 틈만 나면 필동의 「韓屋마을」로 산책을 나가는 것도 그의 남다른 韓屋사랑의 한 모습이다.
그는 韓屋중에서도 초가집을 사랑한다. 천리포 수목원에는 100년이 넘은 초가집 한 채가 있는데 2년에 한 번씩 지붕을 갈아준다. 이 집은 실습생들의 숙소로 활용한다. 자재 창고로 쓰이는 또 한 채의 한옥은 실험 대상이다. 閔원장은 쉽게 안 썩는 지붕 재료를 찾기 위해 이 집에 짚 대신 갈대를 실험적으로 사용해 봤으나 기대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수목원 사무실은 지붕이 초가집 모양으로 설계돼 있다. 독특한 二連式(이연식) 韓屋구조로 지어진 이 본부 사무실은 건축사인 그의 양아들이 설계한 것으로 비록 콘크리트 건물이지만 원장의 초가집 사랑을 반영하며 수목원의 명물로 꼽히고 있다.
閔원장은 韓屋만 좋아할 뿐 아니라 한국음식도 즐긴다. 그와 함께 식사를 나눠 보면 한국의 어떤 노인보다 더 한국적인 식성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김치가 없으면 아예 식사를 못할 정도인데, 어쩌다가 양식당에 들르게 되면 어김없이 김치를 찾는다. 지난 3월 말 아일랜드 여행을 했을 땐 入國 전 런던에 들러 김치를 사 갔다고 한다. 1970년대 현저동에서 살 때는 외국인 친구들을 초대하여 김치 담기 파티를 열기도 했다. 그는 또한 된장과 함께 얼큰한 육개장을 즐기는데 그것도 싱거우면 안 되며 맵고 짜야 직성이 풀린다. 저녁에 집에 있을 때면 반주로 소주 몇 잔을 들고 잠자리를 드는 것이 습관화돼 있다.
學者나무의 火傷
다시 閔원장의 수목원 이야기로 돌아가자. 실제로 나무를 심어 보니 천리포는 해풍이 심하고 염해가 많아 수목원 조건으로는 썩 좋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끊임없는 연구와 노력으로 천연의 장애를 극복했다.
그가 일차로 손댄 것은 해안을 따라 방풍림을 심는 것이었다. 그 바람에 서해 바다가 한눈에 굽어 보이는 자리에 옮겨 지은 韓屋은 20년이 지나니 울창하게 자란 防風林 때문에 전망이 가려져 버렸다. 閔원장에겐 「전망 좋은 방」을 잃은 것이 아쉬웠지만 나무가 바람막이로 자란 것이 더 유쾌했다. 그런데 그중의 하나인 소사나무집이 작년 겨울에 화재로 소실됐다. 이제 그 옆엔 불에 그을린 아름드리 회화나무 한 그루가 주인의 오랜 나무사랑을 상징적으로 말해 주고 있다.
회화나무는 집안에 심으면 고명한 선비가 나온다 하여 우리나라 사대부 집안에서 사랑받던 상서로운 나무이다. 서양에서도 學者나무(scholar tree)로 대접받는 이 나무는 천리포 수목원에 한 그루가 있는데 그 元祖는 서울 한국은행의 뜰에 있다.
26년 전 閔원장이 이곳에서 근무할 때 가지 하나를 가져와 삽목하여 키운 것이 소사나무집 앞의 회화나무다. 이 나무는 작년 가을 유례없이 서해를 강타한 태풍에 가지가 잘리고 몸통이 휘더니 지난 겨울엔 화재까지 만나 몸통 일부를 그슬렸다.
閔원장은 자신이 화상을 입은 것처럼 안타까워하며 나무가 정상적으로 자라기를 마음속으로 빌고 있다. 이 나무는 잎이 늦게 나오기 때문에 6월이나 돼야 제 모습을 볼 수 있다.
閔원장은 회화나무에서 보듯이 풀 포기 하나도 자식처럼 소중하게 생각한다. 1972년 봄 시험식재한 외국산 종자와 묘목이 싹이 트지 않고 죽는 것에 그는 매우 낙심했다. 미국 팅글(Tingle) 묘목재배소에서 구입한 꽃산딸 줄사철 등 18種 39그루의 일부에 生長의 문제가 생긴 것이다. 그는 다시 유럽호랑가시 등 10종 28그루를 추가로 구입하고 전북 임업시험장과 묘목원에서 한국산 묘목을 들여다 같은 시기에 심어 보았다.
이때 그는 같은 緯度(위도)에서 자라는 비슷한 식물이라도 지역에 따라 生長의 차이가 있음을 발견하고 외국에서 관계서적을 구입하여 처방 연구에 몰두하는 한편 전문가를 찾아 자문을 구했다.
閔원장이 밤을 새며 수목학을 본격적으로 독학한 것은 이때부터였다. 한국에서 자라는 모든 나무에 대한 공부도 병행했다. 수시로 李昌福 교수(당시 관악 수목원 원장)와 趙武衍 연구관을 만나 지식을 넓혀 갔다. 그에겐 또 한사람의 「은사」가 있는데 그는 임업시험장 촉탁직원이던 金二萬씨(작고)이다.
1970년대에 70세가 넘은 노인이었던 그는 일제 시대를 포함하여 50여 년 간 말단직에 있으면서 나무와 함께 평생을 보낸 나무 할아버지였다. 학문적인 지식은 없었지만 그는 우리나라 나무에 관한 한 모르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閔원장은 그를 진짜 「나무박사」로 여긴다. 현사시나무로 유명한 玄愼圭(현신규·1986년 작고) 박사에게서도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1973년부터 본격적으로 수목원을 개발하기 시작한 그는 세계에서 가장 큰 영국의 힐리어(Hillier) 수목원 등 10여 개국 수목원과 제휴관계를 갖고 묘목과 씨앗을 들여왔다. 국내에선 충북 한림농원(소장 한태현)에서 모감주 계수나무 등 8종 33그루를. 대전 만수원(묘목농장)에서 산목련 고수시목련 등 8종 31그루를 구입했다. 한국 풍토에 낯선 외국나무를 심었을 땐 1972년의 시련을 거울삼아 뿌리가 잡힐 때까지 모든 직원들이 번갈아 가며 보호 관찰하는 정성을 쏟았다. 이들의 定植기간은 통상 6개월인데 어떤 나무는 3년이나 걸리기도 했다. 이들 나무는 7개 온실의 묘목장을 옮겨 다니며 적응력을 키워 나갔다. 閔원장은 당시의 어려웠던 상황을 이렇게 설명한다.
『나무란 자식을 키우듯이 돌봐야 한다는 것을 이때 처음 알았습니다. 특히 풍토가 다른 외국식물을 키울 땐 우리나라 식물을 키우는 것보다 몇 배의 공을 더 들여야 했습니다. 내가 외국 식물을 많이 들여온 것은 우리 수목원이 세계 수목의 전시장처럼 되도록 하기 위한 뜻에서였습니다. 물론 생태적 조건이 근본적으로 맞지 않는 식물은 어렵겠지만 온실을 잘 활용하면 웬만한 수종은 다 키울 수 있습니다. 문제는 기술과 정성인데 식목의 노하우가 백지인 상태에서 수목원 사업을 시작하고 보니 그 시행착오는 말할 수 없이 많았지요. 다행히 한국 사람은 머리가 좋은 탓으로 수목원 직원들의 기술 습득이 예상 외로 빨라서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한국 고유식물, 세계에 알리다
수목원 사업이 본 궤도에 오르자 閔원장은 국내에서 자라는 야생식물의 탐사와 수집에 나섰다. 1976년부터 식물 탐사 팀을 구성하고 전국의 山野(산야)를 돌며 야생 식물의 생장과정을 관찰하고 가을만 되면 종자채집에 나섰다.
閔원장은 남부지방에서 自生되는 호랑가시나무·동백·노각나무 등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이들을 체계적으로 수집하여 수목원에 옮겨 놓았다. 그가 특히 자랑하는 것은 1978년 전남 완도로 식물 탐사를 갔을 때 감탕나무와 호랑가시나무 사이에 자연 교접된 희귀종을 찾아내 이를 「완도 호랑가시나무」로 이름지어 세계 식물학계에 보고한 것이다. 1979년 가을엔 울릉도 탐사에 나서 추석을 이곳 산림 속에서 보내기도 했다.
천리포 수목원은 식재사업을 시작한 지 8년 만인 1978년엔 전체 면적을 18만 평으로 확장하여 본격적인 수목원의 틀이 잡혔다. 이해 本園을 비롯한 7개 구역의 마스터 플랜을 완성하고 다국적 종자교환 사업에 들어갔다.
이때는 이미 36개국 140개 기관과 교류 협약을 맺은 상태였다. 1979년 11월엔 대만에서 200여 종의 씨앗을 도입하여 동남아 樹種도 천리포 수목원의 가족이 됐다. 1978년 당시 수목원의 樹種 규모는 한국산 1000여 종을 포함한 6000여 종에 이르렀다. 이중엔 목련과 호랑가시가 각각 400여 종에 달해 세계 유명 수목원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1979년은 천리포 수목원에게 뜻깊은 해로 기억된다. 7월엔 산림청의 허가를 받아 재단법인으로 새 출발을 했고 9월엔 閔원장이 한국에 귀화하여 영원한 한국인이 됐기 때문이다.
그는 한국 귀화를 계기로 제휴관계를 맺은 세계 유수의 수목원 및 연구기관과의 종자교환 사업에 집중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외국으로부터 도입하는 종자는 稀貴樹(희귀수) 와 觀賞樹(관상수)에 치중하고 그 대신 한국 고유의 樹種을 내보내 세계 식물학계에서 한국나무의 가치와 중요성을 인식시키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중국과 國交(국교)가 없던 1970년대엔 미국을 통해 중국산 씨앗 30여 종을 도입했다. 해외에서 들여온 종자로 키운 묘목들을 일차로 瑞山郡의 각급 학교와 陸士 등에 분배했다.
그런데 閔원장의 이런 종자교류사업을 못 마땅하게 보는 일부의 시각이 있었다. 몇해 전 어떤 TV방송국에서 귀중한 국내 식물자원을 해외에 유출한 것으로 문제제기를 한 것이다. 평생을 통해 한국의 식물을 세계에 알리려고 노력한 閔원장은 이에 대해 매우 서운한 표정을 지으며 『몰라도 한참 모르는 우물안 개구리 발상』이라고 씁쓸해 했다.
그는 한국 언론이 유전자공학은 알면서 다국적간 종자교류(Index Seminum)의 의미는 모르는 것 같다며 식물 선진국이 아니면 참여할 수 없는 학문적 사업을 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일부 한국 토종식물이 해외에서 變種돼 한국으로 逆수출되는 사례가 있음을 인정하고, 한국도 다양한 외국 식물을 연구해 이를 잘 활용하면 더 큰 국가적 이익을 얻을 수 있다고 강조한다.
천리포 수목원에서 교접 배양한 외국산 목련이 국내에서 대량 유통되고 있다고 말하는 그는 종자교류를 통해 한국의 고유식물을 세계에 널리 알리고 외국 식물에 대한 지식을 늘리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 점에 대해선 李昌福 서울대 명예교수도 의견이 같다. 국내 식물학계의 원로학자인 그는 최근 閔원장의 와병을 걱정하며 『세계 식물지도에 한국이 편입된 것은 전적으로 민병갈씨의 공로』라고 말한다. 1999년에 발족한 「우리식물 살리기 운동본부」 공동대표이기도 한 그는 한국에 수목원이 있다는 것을 세계에 알린 사람은 閔원장이라고 밝히고 그가 세계의 희귀식물을 들여와 국내학계에게 연구자료를 제공한 것도 잘한 일이지만, 완도 호랑가시 등 한국의 고유식물을 세계에 알린 공로는 높이 평가할 만하다고 말한다. 그는 한국 自生식물의 해외 반출을 반대하는 논리에는 식물학자로서 찬성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세계의 아름다운 수목원」으로 꼽혀
이제 천리포 수목원은 국제적으로 알아주는 「나무 박물관」으로 성장했다. 2001년 5월1일 현재 보유수종이 6972종(172과 857속)에 이르고 있는데 외국 수종은 국립 임업시험연구원의 보유 규모를 훨씬 능가한다. 특히 목련류는 410종이나 돼 이 분야에선 세계 최대규모로 알려져 있다. 호랑가시류 350여 종과 동백류 300여종의 규모도 이에 필적할 만한 수목원이 전세계적으로 찾아보기 어렵다. 88개 회원국을 거느린 세계수목협회(DCI, Dendrology Society International)는 천리포 수목원의 이같은 업적과 위상을 평가하여 1998년 총회를 이곳에서 개최했다. 세계 목련학회(The Magnolia Society)와 세계 호랑가시학회(The Holly Society)도 1997년과 1998년에 각각 천리포에서 총회를 열었다. 특히 DCI는 작년 10월 아시아에서는 최초로 이곳을 「세계의 아름다운 수목원」으로 선정했다.
천리포 수목원에는 세계적 희귀종 수목이 여러 그루 있다. 그 중엔 지구상에 세 그루만 존재한다는 「히플레카 윌소니(학명Goteoburgensis)」라는 목련 하나가 끼어 있다. 스웨덴 요테보리 대학의 나젤리우스 토르 명예교수가 10여년 전 배양에 성공한 이 품종은 일본목련과 월손목련의 교배종으로 세 개 중 하나는 스웨덴 대학에 두고 다른 둘은 영국과 한국의 천리포 수목원에 기증한 것이다.
이밖에 나무 중 수명이 가장 길다는 미국産 「가이루사기아」가 있는가 하면 한겨울에도 연보라 꽃을 피우는 진달래과 「에리카」가 있다. 남아프리카에서 들여온 「유리프스」와 뉴질랜드가 원산지인 「히비」는 추위에 약해 온실에서만 키운다.
해충에게도 생명의 존엄성을 보장
천리포 수목원에서 자라는 수만 그루의 나무와 화초들엔 모두 戶籍을 알리는 명패가 달려 있다. 이름과 학명은 물론, 원산지 도입일자가 적혀 있다. 그리고 별도로 수목 대장을 만들어 나무마다 도입경로와 생장상의 특징을 기록해 둔다. 허약한 나무의 목록엔 병상일지까지 적혀 있다. 이러니 천리포 수목원은 가히 나무들의 천국이라고 할 만하다. 이곳은 나무뿐만 아니라 야생동물에게도 낙원이다. 심지어 해충에게도 생명의 존엄성이 보장된다. 농약 사용을 말라는 閔원장의 엄명에 따라 송충이도 이곳에선 박멸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을만 되면 사무실 앞에 있는 열 마지기 논엔 메뚜기가 가득하다.
본원에 조성된 연못은 흰뺨 검둥오리, 청호반새 등 철새들의 보금자리다. 이들이 새끼라도 갖게 되면 수목원은 비상이 걸린다. 직원들은 아기 철새들이 놀랄까 봐 근처에도 못 가고 망원경으로 관찰 보호한다. 1998년 여름 큰 비가 내렸을 때 연못이 범람한 적이 있다. 이 때 연못 속에서 수십년 간 자란 장어 수백 마리가 논 속으로 흘러 들어왔다. 수목원 직원들은 팔뚝만한 자연산 민물 장어들을 보고 군침을 삼켰지만 閔원장의 명령에 따라 모두 연못 속으로 되돌려 보내야 했다. 「야생」이라면 동·식물을 불문하고 철저히 보호해야 한다는 閔원장의 철학을 잘 아는 직원들은 바닷가에 살면서도 공공연히 낚싯대를 들고 다니거나 생선횟집을 가지 못한다.
閔원장은 한국인들이 자연을 제대로 보호하지 않는 것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다. 특히 나무를 사랑하지 않는 것에 유감이 많다. 수목원 초창기인 1970년 4월, 낙도에 놀러간 직원들이 야생 후박나무 일곱 그루를 캐다가 심은 것을 보고 매우 역정을 낸 적이 있다. 문제의 나무들은 서산 앞바다의 학암포 근처에 있는 무인도 대뱅이섬에서 자라는 自生木이었는데 후박나무 群落地였던 이 섬을 몇 해 뒤에 가보니 한 그루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 많던 희귀나무들이 무참히 잘려나간 것을 본 그는 더 많이 캐오지 않은 것이 아쉽기만 했다. 그때 수목원에 옮겨 심은 후박나무들은 한 그루도 손상없이 지금까지 잘 자라고 있다.
1970년대부터 閔원장은 언론을 통해 한국의 자연보호와 전통문화 보존을 역설했다. 그는 1980년 식목일을 앞두고 한 신문기고에서 한국인의 나무에 대한 무관심과 자연훼손을 이렇게 나무랐다.
『한국은 산악지대가 全국토의 66%나 되는 데도 산림자원에 대한 관심이 너무 미약하다. 내가 아는 한, 소나무와 잣나무를 구분할 줄 아는 성인들은 10%도 안 된다. 자연보호를 한다고 어깨에 띠를 두르고 거리나 등산로 입구에서 캠페인을 하는 것도 이상하다. 더욱 한심한 것은 쓰레기를 줍게 한다고 봄철에 수백명의 청소년들을 산 속에 풀어 놓는 것이다. 쓰레기는 줄어들지 모르지만 자라는 새싹들이 그들의 발길에 밟혀 죽을 테니 얼마나 애석한 일인가』
柳一韓 사장의 도움 받아
천리포 수목원은 1962년 터를 잡은 이래 지금까지 39년 간 전적으로 閔원장 개인의 힘으로 운영돼 왔다. 18만 평 규모의 수목원을 누구의 도움도 없이 혼자서 유지 발전시켰다는 것은 아무래도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그 주인은 기업인이나 거액 상속자도 아니고, 그가 손 댄 수목원은 영리단체나 투자기구가 아니다. 거기에다 그는 식물에는 문외한인 데다가 말과 생각이 다른 이방인이었다. 그런 인물이 自力으로 대단위 수목원을 일으키고 獨學으로 세계적 식물 見本단지를 꾸민 것이다.
그렇다면 閔원장은 무슨 돈으로 광활한 해안 별장지를 매입하여 그곳을 국제적인 수목원으로 키웠는가. 기업가가 아닌 봉급자로 이 땅에서 반세기를 살아온 그의 前歷을 생각하면 쉽게 납득이 안 간다.
그가 지난 30여 년 간 수목원에 쏟은 돈은 어림잡아 현재시세로 300억 원 가까이 될 것이다. 그것도 어떤 果實도 기대하지 않고 해마다 쏟아 붓기만 한 돈이었다. 굳이 투자이익을 찾는다면 개인의 성취감과 자기만족만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그의 주변사람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그의 자금력에 궁금증이 많다.
閔원장은 이때까지 수목원의 운영자금을 어떻게 마련했는지 공개한 적이 없다. 언론과의 몇 차례 인터뷰에서 밝힌 내용과 주변사람의 추측을 종합하면 이렇다. 미국에서 약간의 자금을 가져와 그것을 증권투자로 부풀린 것이 기본자금이 됐다. 1960년대에 가깝게 지내던 柳一韓(유일한) 유한양행 사장으로부터 액면가로 배정받은 상당량의 유한양행 주식이 몇 년 만에 수십 배로 뛰어 재력 확보의 轉機를 마련했다. 1960년대 증권파동 때 재미를 봤다는 설도 있지만 본인은 『파산을 겨우 면했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재산증식에 대해 「부양가족이 없는 평생독신의 넉넉한 여유자금을 저축한 것」 이상으로 밝힌 것이 없다.
閔원장의 재력과 관련하여 확실히 알려진 것은 그가 돈을 버는 탁월한 재능을 가졌다는 사실이다. 사실상 한국 최초의 펀드 매니저였던 그는 1980년대 초에 홍콩 경제지 파 이스트 이코노믹 리뷰誌에서 「아시아에서 가장 유능한 투자 자문역」으로 소개될 만큼 증권투자에 일가견이 있다. 그는 1982년 한국은행 퇴직 후 83년부터 한양증권 고문으로 있다가 굿모닝 증권으로 옮겨 현재까지 고문직을 맡고 있다.
올해 81세인 그는 국내에서 가장 나이 많은 봉급자에 들어갈 것이다. 그가 관리하는 자금은 350억원 정도로 알려져 있다.
그는 돈을 잘 벌 뿐 아니라 돈을 아끼는 것에서도 프로급이다. 버는 기술이 9단 이라면 아끼는 기술은 10단 수준이다. 부자가 대개 그렇듯이 그의 절약 습관은 철두철미하다. 그가 현재 타고 있는 승용차는 베이지 색의 대우 브로엄인데 출고된 지 9년이 넘는 고물차이다. 또 한 대 소유했던 대우 듀크는 13년 동안 타다가 더 이상 사용이 불가능해 2년 전에 폐차시켰다. 10여 년 전까지 타던 일제 도요타 승용차의 폐차 때 車齡(차령)은 23년이었다. 그는 달력도 함부로 떼어 버리지 않는다. 시기가 지난 낱장을 모아 두었다가 잘라서 이면지로 활용한다. 그에게는 식당에서 음식 남기는 것도 아깝다. 더 못 먹겠으면 개 먹이로 집에 가져간다.
6000여 種 식물 이름 學名까지 외우기도
閔원장은 돈 버는 재주 말고도 또 하나의 특출한 재능이 있다. 그것은 남의 추종을 불허하는 비상한 기억력이다. 주변사람 말에 의하면 1980년대까지는 수목원에서 자라는 6000여 종의 식물 이름을 學名까지 줄줄 외웠다고 한다. 특히 그는 우리나라 야생화라면 俗名을 포함하여 어떤 식물의 이름도 알아맞힌다. 한번 만난 사람이라도 좀처럼 이름을 잊지 않으며 과거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났던 수많은 일들의 연대를 확실히 기억한다.
젊어선 일본어를 1년 만에 마스터했으며 이때 익힌 漢字실력은 지금까지 남아 있다. 한때는 독일어 프랑스어 러시아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했으며, 지금도 중국어와 스페인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보통사람의 눈으로 볼 땐 불가사의가 많은 그에게 따라다니는 또 하나의 의문사항은 평생 독신이라는 점이다. 『왜 장가를 안 가느냐』라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그는 준비된 답변 두 개로 얼버무린다. 『한국과 결혼했다』 또는 『나무와 결혼했다』가 그의 공식적인 대답이다. 때로는 『나는 여자보다 남자를 좋아한다』로 대꾸하기도 하는데 그 말이 가장 맞는 것 같다. 기본적으로 독신주의자인 그는 가까운 사람이 결혼하려 할 땐 농담 비슷하게 만류한다. 그에겐 청년장교 시절 한국 여성과의 염문이 있었으나 구체적인 사연은 밝히지 않는다. 그의 고향인 펜실베이니아엔 그를 못 잊어 평생 결혼을 하지 않고 사는 할머니가 있다. 그녀는 천리포 수목원을 두 차례 다녀 갔다.
한국인을 많이 닮은 閔원장의 의식 중엔 갸륵한(?) 孝心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미국에서 홀로 떨어져 살았던 노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다. 재작년 어머니가 104세로 타계할 때까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펜실베이니아의 양로원으로 찾아가 生日문안을 했다.
1954년 韓銀에 들어갈 땐 고용계약서에 매년 두 차례 어머니를 만날 수 있도록 특별 휴가와 항공료 편의를 제공해야 한다는 단서를 달 정도였다. 그는 한국에 귀화하는 것을 반대하는 어머니를 7년 동안 설득하여 1979년에 뜻을 이루었다.
老母의 장례를 치르고 귀국한 이후 그의 표정엔 눈에 띄게 쓸쓸함이 늘었다. 지난 1월엔 병석에서 金基昶(김기창) 화백의 부음을 듣고 『雲甫(운보)가 雨鄕(우향-부인 朴來賢의 號)따라 갔구나』라며 40여 년 전 고인 부부와 나눈 우정을 회고했다. 한국畵를 좋아했던 그는 1960∼70년대 국내 미술가들과 교분이 두터웠다. 朴壽根(박수근) 李應魯(이응로)와도 친했는데 특히 李화백이 동백림 간첩단사건에 연루돼 고생하고 있을 때 많이 도와 준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모두 세상을 떠났다.
지난 4월3일, 해외여행을 마치고 귀국한 그는 자신의 여행 중에 鄭周永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작고했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애석해 했다. 鄭명예회장과는 1945년 그가 한국에 처음 왔을 때 잠깐 친분을 나눈 사이다. 그는 인생무상을 느낄 땐 나무와 관련하여 자신의 수목원 사업을 이렇게 설명한다.
『인생은 길어야 백년이지만 나무는 천년을 삽니다. 한국에선 재목으로도 뛰어난 품질을 갖는 朱木을 가리켜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이라고 말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내가 하는 수목원 사업은 이제 겨우 30년이 됐지만 적어도 300년은 내다 보고 시작한 것입니다. 내가 죽은 뒤에도 자식처럼 키운 천리포 수목들은 몇 백년 더 살며 내가 「제2의 조국」으로 삼은 한국에 바친 마지막 선물로 남기를 바랍니다. 평생을 바쳐 이 사업을 하면서 실감한 것은 수목원이란 영원한 미완성 사업이라는 엄숙한 진리였습니다』
나무 다칠까봐 일반 공개도 꺼려
계절의 여왕 5월을 맞은 천리포 수목원은 자연의 섭리가 총출동한 모습이다. 온갖 수목들이 신록의 파노라마를 연출하는가 하면 수많은 기화요초들이 꽃의 제전을 펼친다. 수목원의 자연경관은 6월에 절정을 이룬다.
자신의 건강이 몹시 나빠져 있음을 잘 아는 閔원장은 투병 중에도 입원기간만 지나면 수목원을 찾아 나무와 함께 산다. 비록 자신은 병약해졌어도 막 움트는 새싹들의 건강에 이상이 없기를 바라는 것이 그의 마음이다. 그는 지금 계속되는 가뭄을 걱정하며 자식 같은 수목을 위하여 기우제라도 지내고 싶은 심정이다.
病苦를 치르는 閔원장은 지금 「포스트 민병갈」 문제의 해법을 찾는 고민에 빠져 있는 것 같다. 그에겐 자신이 세상을 떠난 뒤의 수목원 운영문제가 최대의 과제가 아닐 수 없다. 81세라는 고령의 나이로 봐도 그렇고, 마음을 놓을 수 없는 병세로 봐도 또한 그렇다.
그는 유언장을 써 놓긴 했지만 현재까지 수목원의 장래문제를 공개적으로 밝힌 적이 없다. IMF 사태로 자금난에 봉착했던 그는 1998년 초 오랜 친구인 李昌福 명예교수의 주선으로 당시 鮮于仲皓(선우중호) 서울대학 총장을 만나 수목원을 대학에 기증하는 문제를 협의했으나 어떤 결론도 얻지 못했다. 당시 수목원 직원들은 수익사업을 벌여서라도 자체운영을 하자는 의견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18만평의 수목원은 철책으로 둘러쌓아 외부인의 출입을 막고 있다.
목숨 다 하는 날까지
閔원장은 1998년 10월 외국을 본받아 후원자를 공모했으나 현재까지 2년반 동안 들어 온 금액은 1억2000만원에 그치고 있다. 그만한 액수를 모아 준 회원들이 고맙지만 연간 4억원의 운영비를 감당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다행히 작년부터 2년째 산림청으로부터 매년 3억원씩 지원금이 나와 큰 도움이 되고 있다.
3년 전에 구성된 천리포 수목원 후원회(회장 김무열-전북대학 생물학과 교수)는 5월1일 현재 회원수가 401명이다. 그 중 절반이 넘는 228명이 年회비 6만원의 일반회원이고, 98명이 年회비 10만원의 가족회원이다.
평생회원을 보장하는 100만원 이상의 기부회원은 38명뿐이고, 나머지는 年 3만원의 학생회원 37명과 年 40만원의 기관회원 7명이다. 명단엔 알 만한 기업체나 재력가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이에 대해 후원회비를 관리하는 李揆賢(이규현) 관리부장은 세계에 자랑할 만한 수목원의 존립을 돕겠다는 명망 있는 기부자가 없는 것은 국가적인 불행이라고 말한다. 후원회는 5월5일 어린이 날을 「후원회 회원 우정의 날」로 정하고 300여 명이 가족동반으로 수목원에 모여 모금행사를 가졌다.
閔원장은 1979년 수목원의 재단인가를 받은 때부터 다각도로 사회환원을 구상했다. 1996년 8월5일엔 공익법인으로 전환한 뒤 1998년 초엔 財源의 한계를 느끼고 서울대학교에 기증하는 문제까지 고려했다. 그리고 얼마 후인 4월 식목철을 맞아 후원회 결성으로 재원조달의 방향을 바꿨다. 미국이나 영국처럼 「큰손」의 지원은 기대하지 않았지만 해가 지날수록 관심도가 떨어지는 것에 적이 실망한 기색이다. 그가 대학 등 공공기관에 기증하는 문제를 보류한 이면엔 평생을 바쳐 가꾼 「보배」를 생전에 선뜻 남의 손에 넘기고 싶지 않은 인간적 심리도 적잖이 작용했다. 직원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有料 공개로 재원을 마련하는 길도 있으나 그렇게 되면 무엇보다도 수목훼손이 우려된다.
5월 초, 후원회 우정의 날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천리포에 내려온 閔원장은 눈에 띄게 수척해 있었다. 본원 수목원의 연못가에 나와 꽃잎이 지기 시작한 별목련을 바라보는 그의 표정은 자연의 순환섭리에서 자신의 운명을 예견한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늘진 얼굴에도 목숨이 다 하는 날까지 나무 한 그루나 풀 한 포기라도 돌보겠다는 굳은 의지가 엿보인다.
閔원장의 그런 마음가짐은 곧 「내일 지구에 종말이 와도 오늘 사과나무를 심는다」 는 스피노자의 철학을 몸소 실천하는 자세일 것이다. 나무사랑으로 이국에서 평생을 보낸 이 老신사는 자신의 「미완성 작품」 천리포 수목원의 일천년 후를 내다 보며 오늘도 나무 가꾸는 손길을 멈추지 않는다.●
「워낙 독한 노인네」 4~5월이 되면 세계에서 가장 다양한 품종의 목련들이 봉오리를 터뜨려 일대 장관을 이루는 桃園景(도원경)이 있다. 충남 태안반도 갯마을에 자리 잡은 천리포 수목원이다. 이곳은 56년째 한국에 정착하여 살고 있는 이방인 閔丙(민병갈·Carl Ferris Miller) 의 오랜 정성과 땀이 배어 있다. 올해 81세로 미국 태생인 그는 특이한 경력 때문에 식목철이 되면 어김없이 「나무사랑」의 표상으로 매스컴에 오르내렸다. 그런데 화제의 이 「나무 할아버지」가 올봄엔 이례적으로 대중매체에서 멀어져 있다. 금년따라 그가 매스컴을 타지 않은 이유는 지난 1월 중순 치료가 어려운 병명의 진단을 받고 4개월째 정기적인 입원치료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겐 두 개의 직함이 있는데 하나는 천리포 수목원 원장이고 다른 하나는 굿모닝증권社 고문직이다.
서울과 천리포 등 두 개의 직장이 있는 셈이나, 고문직은 원장직을 원만히 수행하기 위한 보조수단일 뿐이다. 투병 중에도 수목원을 잘 가꾸려는 그의 마음가짐엔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다.
5월 중순, 여섯 번째 입원치료를 마치고 천리포에 내려온 閔원장은 예년에 볼수 없던 쓸쓸한 모습이다. 그는 지금 올 봄에 핀 목련들이 어쩌면 자기 생애에서 마지막으로 보는 봄꽃이 될지 모른다는 서글픔에 잠겨 있다. 별목련의 눈부신 꽃잎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그의 주름진 얼굴엔 「 내가 떠난 뒤엔 이 어린 것들은 어떻게 자랄 것인가」라는 걱정과 염려의 기색이 역력하다.
병상에서 지켜 본 閔원장의 모습은 병이 깊은 환자처럼 뵈지 않는다. 머리맡엔 항상 수목 관련 잡지와 서적들이 놓여 있고, 낮이나 밤이나 눈만 뜨면 책을 놓지 않는다. 고통이 따르는 투약중에도 그는 변함없이 독서에 열중한다. 그를 그림자처럼 따르는 李揆賢(이규현·천리포 수목원 관리부장)씨의 말에 따르면 「워낙 독한 노인네」라서 정신력으로 아픔을 숨기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병원食 쟁반에는 「노 치킨(No Chicken)」이라고 쓰여진 메모가 항상 따라 다닌다. 환자가 닭고기를 몹시 싫어하기 때문이다. 닭을 싫어하는 그의 성미는 그가 운영하는 천리포 수목원의 땅 이름까지 바꿔 놓았다. 18만 평(60ha)에 이르는 그의 천리포 수목원에는 1만2000평(4ha) 규모의 섬이 하나가 있는데 그 섬의 원래 이름은 「닭섬」이었으나 20여년 전 수목원 지도를 만들면서 「낭새섬」으로 이름을 바꿔 버렸다. 이 섬에 낭새(학명:바다직바구리)라는 희귀한 조류가 서식하는 것에 착안하여 이같이 지명을 바꾼 것인데 외국인으로서 땅 이름을 짓는 그의 한국어 감각은 가히 수준급이라고 할 만하다.
閔원장의 작명술은 그의 한국 이름에도 나타난다. 그의 「민병갈」이라는 한국 이름은 1970년대 한국은행 근무시절에 지은 것이다. 그의 본래 이름은 칼 밀러 (Carl Miller)인데 姓을 앞세운 「밀러 칼」을 한국식 발음으로 바꿔 이같이 정한 것이다.
그가 이같이 한국 이름을 지어 閔丙로 한자를 쓰게 된 사연 뒤에는 韓銀에서 근무할 때 절친했던 閔丙燾(민병도) 前 한은 총재와의 우정도 깔려 있다. 성과 돌림자가 같은 두 사람은 그로부터 지금까지 40년이 넘게 우정을 나누고 있다. 그는 한국신문들이 자신의 한자 이름 중 을 渴로 잘못 쓰는 사례가 많다고 불만이 많다. 그래서 기자들에게 「초두 밑에 쓰는 맑을 갈 자」로 쓰라는 당부를 잊지 않는다.
「펜실베이니아 閔씨」에서 「여흥 閔씨」로그의 한자 이름엔 또 하나의 흥미 있는 일화가 담겨 있다. 그가 1979년 한국으로 귀화하면서 천리포 수목원의 행정관청인 태안읍에 호적신청을 할 때 서류에 閔씨의 본관을 써 넣어야 할 문제가 생겼다. 한국의 족보학에도 상당한 지식이 있던 그는 자신의 本貫을 새로 정하기로 마음 먹고 그의 미국 출생지 이름을 빌어 「펜실베이니아 閔씨」로 해달라고 주문했다. 담당 공무원이 난색을 표명하고 접수를 거부하자 할 수 없이 그는 閔 前 총재의 본관을 따르기로 했다. 그 바람에 그는 여흥 閔씨 종친회 회원이 되었고, 몇 년 후에는 천리포수목원에서 성대한 종친회 잔치를 베풀어 주기도 했다.
그가 펜실베이니아 閔씨로 본관을 정하지 않은 것은 결과적으로 잘한 일이었다. 그후 81세에 이르도록 그는 결혼을 하지 않아서 그의 姓을 따를 二世를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일 그의 뜻대로 호적등재가 이뤄졌다면 그 「엉뚱한 본관」은 한 代로 끝남으로써 우리나라 족보사에 「1인 본관」이라는 진기록을 남겼을 것이다. 그에겐 1961년에 입양한 양자가 있지만 자신의 한국姓을 따르게 하지 않았다.
閔원장의 병실을 찾는 문병객들은 반세기 넘게 한국에서 살아온 그의 폭넓은 인간관계를 말해 준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있는가 하면, 손자 뻘의 대학생도 있다. 강원도 산골의 營林員(영림원)이 있는가 하면, 전북 익산에서 올라온 여성佛子가 있다. 학창 때 환자로부터 학비를 보조받았다는 중년의 변호사도 보인다. 늦추위가 심했던 지난 3월 어느 날, 꽃바구니를 들고 온 70代 할머니의 문병이 꽤나 은근하고 다정했다. 한때 장안에서 명성을 날린 기생이었다는 그녀는 젊어서 사귄 이방인 청년을 변함없이 마음에 두고 閔원장을 찾아 본다. 이런 인간관계에 대해 한 측근은 『우리 원장님은 모르는 사람도 없지만 특별히 친한 사람도 없다』고 설명한다.
각계의 문병객이 말하듯, 그는 25세 때 미군 청년장교로 한국에 첫발을 디딘 이래 56년 간 수많은 한국인 친구들을 사귀었다. 그가 친했던 한국인들은 정·재계의 유명인사들보다 청년 지식인이나 가난한 예술가 등 보통 사람들이 더 많다. 특히 그는 농부들을 좋아하여 젊었을 땐 시골 마을을 많이 찾았다. 작년 12월24일 천리포에서 베풀어진 그의 팔순 잔치에는 추위속에도 많은 마을 촌로들이 찾아와 무병장수를 빌어줬다. 이 땅에서의 오랜 交遊에 대해 그는 「나는 人德이 많은 사람」이라는 표현으로 한국인 친구들에게 고마움을 나타낸다.
閔원장은 팔십고개를 넘어서도 여전히 현역이다. 평일 아침 9시엔 서울 명동의 증권사 고문실로 어김없이 출근하며, 증권시장이 쉬는 금요일 오후가 되면 천리포로 떠나 수목원에서 나무를 돌본다. 30년 이상 계속된 그런 생활은 최근의 투병기간에도 예외가 없다. 주변에서 만류하지만 『일을 안 하면 병세가 더 나빠진다』며 두 곳을 계속 왕래하고 있다. 그는 치료의 공백기간을 이용하여 지난 3월18일에는 비서와 함께 2주 동안의 해외여행 길에 올랐다. 처음엔 의료진이 난색을 표명했지만 본인의 뜻이 간절하니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벗은 한국의 草木 유럽행 여장을 꾸리면서 閔원장은 이렇게 말했다. 『이번이 내 생애 마지막 해외여행이 될지도 모른다』고. 마음속으로는 비장하고 서글펐겠지만 병색이 완연한 이 80노인의 표정엔 어떤 비감이나 쓸쓸함도 엿보이지 않았다. 만리 타국에 나가 있으면서도 그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사무실에 전화연락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김포공항을 통해 출국한 지 15일 만인 4월3일 저녁, 그는 영종도 신공항을 통해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그리고 하루 뒤에는 입원치료를 받는 투병의지를 보였다.
팔순을 넘겨 중병이라는 진단을 받고도 노익장의 모습을 잃지 않는 그의 근성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지금은 그의 투병의지가 놀랍지만 그와 오랜 친분을 나눈 입장에서 보면 「의지의 사나이」로서 갖는 그의 진면목은 다른 곳에 있다. 그것은 오십여 년에 걸쳐 변함 없는 한국 사랑과 나무 사랑이다. 많은 외국인들이 한국의 자연과 문물을 사랑했지만 閔원장만큼 생애의 종반까지 한국에 남아 그것을 지킨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 한국을 좋아한 외국인이 그랬듯이 그 역시 한국의 서화나 민예품을 좋아했지만 그것을 수집하기 보다는 보고 즐기는 것으로 끝났다.
그가 평생을 통해 이 땅에서 심취한 것은 전통문화재가 아니라 이례적으로 한국의 풍물이나 自然이다. 그래서 한국의 웬만한 자연의 명소 치고 그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남해의 다도해나 서해의 낙도는 젊었을 때부터 그가 즐겨 찾던 곳이다. 그에겐 한국의 초목들이 더할 수 없는 정다운 벗이다.
봄만 되면 산에 올라 야생화를 탐사하는 것이 큰 즐거움이었다. 그리고 가을이 되면 어김없이 수목원 직원들과 함께 종자 채집에 나선다. 야생목에서 씨를 받을 땐 나무가 상하지 않도록 특별히 이르는 그의 모습에서 그의 나무사랑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그가 이렇듯 정성을 들여 채집한 한국의 수많은 초목들은 천리포 수목원(www.chollipo.org) 한 곳에 모아져 있다.
밀러 중위가 느낀 한국에서의 첫날 밤 미국인 칼 밀러가 한국을 알게 된 경위는 매우 극적이며 서사적이다. 그는 일종의 점령군 장교로 한국에 첫 발을 디뎠다. 1945년 9월8일 이른 아침. 美 해군 중위였던 그는 적대국 일본의 식민지를 접수하는 연합군 1진에 끼어 인천에 상륙했다. 오키나와를 출발한 연합군함대는 인천 상륙 후 열차를 동원하여 서울로 진주했다. 일본군은 23일 전에 이미 항복을 했기 때문에 전투 위험은 없었지만 상륙 미군은 모두 완전무장을 한 상태였다. 이때 밀러 중위가 인솔한 12명의 CCIG-K(Civil Censorship Intelligence Group-Korea)부대원은 쫓겨가는 일본인들이 재산반출을 못하도록 감시하고 그들의 재산을 관리하는 특수 임무를 맡고 있었다. 대원들은 거의 일본계 미국인들이었다.
인천에서 군용차편으로 서울로 오는 두 시간 동안, 밀러 중위는 한국의 氣運(기운)을 온 몸으로 느꼈다. 그것은 매우 신선하면서도 향기롭고 따뜻했다. 맑은 하늘, 온화한 기후, 순박한 대지 등 한국의 자연 모두가 그의 몸과 마음을 포근하게 감쌌다. 그의 눈에 스쳐 가는 야트막한 산과 평화로운 들녘도 정겹기만 했다.
특히 그의 시선을 끈 것은 옹기종기 군락을 이루고 있는 시골마을의 초가집들이었다. 그로부터 세월이 50년 이상 흐른 지금까지도 그는 한국 땅을 처음 밟았을 때 느꼈던 야릇한 기분을 잊지 못한다. 그것은 형언할 수 없는 의식의 세계에서 체험한 신비한 감동이었다.
밀러가 소속된 선발대의 1차 주둔지는 지금도 남아있는 서울 명동의 중앙우체국으로 예정돼 있었다. 서울에 도착한 대원들은 건물 「접수」에 앞서 가까운 조선호텔 앞마당에 陣地(진지)를 구축했다. 밀러 중위는 이날 차가운 야영 군막 속에서 생애 최초로 한국의 밤을 맞았다. 그날 밤 밀러 중위는 밤 하늘에 떠 있는 수많은 별들을 바라보며 또 한 차례 온 몸으로 스며드는 한국의 기운을 느꼈다.
그날로부터 정확히 반세기 뒤인 1995년 9월8일 저녁. 웨스틴 조선호텔은 이제 한국인이 된 민병갈 예비역 대위에게 그의 한국 첫날 밤의 50주년을 기념하는 성대한 파티를 열어 주었다. 전투복이 아닌 전통한복을 차려 입고 손님을 접대하는 그의 모습은 왕년의 청년장교에서 어느덧 백발이 성성한 75세의 노인으로 변해 있었다. 그는 자못 상기된 표정으로 150여 명의 국내외 초청인사들 앞에서 감회 어린 인사말을 하면서도 유머를 잊지 않았다.
『이 호텔 앞에서 야영을 하며 한국에서의 첫 밤을 보낸 지가 50년이 됐다니 세월이 무상합니다. 오키나와 맥아더 사령부에서 작성한 한국파견 CCIG-K의 첫 명단엔 내 이름이 없었는데, 한 장교가 한국으로 가는 것을 꺼려해 대신 가겠다고 자원해 지휘관으로 오게 됐지요. 지금 생각하면 내가 한국에 오게 된 것은 前生(전생)의 인연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내 모습은 변함없이 큰 코에 노랑 머리를 지닌 서양인이지만 생각이나 마음은 한국인이 다 돼 있습니다. 오늘 조선호텔의 음식을 먹어 보니 50년 전의 차림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맛이 있군요. 아무쪼록 많이 드세요』
鄭周永 형제와의 교유 1979년 한국 국적을 취득한 閔원장의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애착은 남다른 데가 있다. 그는 식당 등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 가면 곧잘 「한국인」을 찾아낸다. 특정인을 가리키며 이목구비가 전통 한국인이라는 것이다.
그가 지목하는 사람을 보면 대개 눈빛이 선량하고 얼굴 윤곽이 길며 체구가 약간 마른 편이다. 같은 동양인이라도 중국인이나 일본인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요컨대 음험해 보이고 약삭빠른 인상은 싫다는 것인데, 심성이 너그러운 그도 인종에 관한 한 편견이 있는 듯하다. 그가 좋아하는 한국인의 장점은 선량하고 여유가 있는 모습이다.
밀러 중위가 한국인을 처음 만난 곳은 한국이 아닌 또다른 미군의 점령지역이었던 오키나와였다. 그곳은 그가 한국에 오기 전에 미 해군의 CCIG 요원으로 근무하던 일본 최남단의 섬인데 이곳에 포로로 잡혀 온 한국인 종군위안부를 보게 것이다.
연합군의 일본어 통역장교로서 포로를 심문하는 자리에 있던 그의 심문 대상엔 종군위안부가 포함돼 있었다. 그가 만난 한국 여성들은 대부분 부산지역에서 강제로 끌려온 10代 후반의 소녀들이었다. 그들은 공포에 질려 있었지만 밀러 중위는 이들의 모습에서 연민과 함께 순박하고 따뜻한 인간미를 느꼈다. 이때 받은 「선량한 코리안」의 첫 인상은 한국인의 原形처럼 지금까지 그의 뇌리에 남아 있다.
독일계 이민의 후손인 그는 일본어 통역장교라는 특이한 경력을 갖고 있다. 그의 전공은 원래 화학이었다. 1943년 펜실베이니아의 버크넬(Bucknell)대학 화학과를 졸업 후 콜로라도 대학원에 진학하여 이곳에서 1년 간 일본어 특수과정을 이수했다.
이 과정은 당시 일본과 전쟁을 하던 미국 국방부가 「작전상 필요」에 따라 개설한 위탁교육으로 IQ 150 이상의 英才만 선발하여 교육시키는 엘리트 코스였다. 그는 1년 동안 일본말만 써야 하는 유폐교육을 마친 뒤 1944년 해군 장교로 임관돼 오키나와의 맥아더 장군 사령부로 배치됐다. 그의 日語 및 漢子 실력은 이때 익힌 것이다. 70代 이후 청력이 떨어져 보청기를 사용하는 그는 모르는 한국어 낱말을 한자로 써 보이면 금방 알아 차린다.
일종의 정보장교로 오키나와 맥아더 사령부에 배치된 그가 하는 일이란 일본군에 관련된 정보를 분석하고 日軍 포로를 심문하는 일이었다. 1945년 8월15일 일본이 연합군에게 항복하자 미군 장교로선 이례적으로 일본通이었던 그는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국에 배치돼 「일본인의 재산반출 감시」라는 새로운 임무를 맡게 됐다. 그가 이끄는 CCIG-K 부대는 명동의 옛 증권거래소 건물에 본부를 두고 1946년 여름까지 10개월 동안 임무를 수행했다. 이 때 밀러 중위가 채용한 한국인 직원중의 한 사람이 鄭仁永 한라그룹 명예회장이다. 일본 靑山학원 영문과를 나온 鄭씨는 영어를 잘해 쉽게 미군부대에 취직할 수 있었다.
1945년 9월 말, 출근 2주쯤 후에 鄭씨는 친형인 鄭周永씨(前 현대그룹 명예회장)를 데려와 밀러 중위에게 소개했다. 이때 밀러는 鄭씨 형제에게 호감을 느끼고 셋이서 함께 뚝섬으로 놀러가 유쾌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얼마 뒤엔 자신의 군용지프로 周永씨의 이삿짐을 두 차례 날라주기도 했다. 그 후 형 周永씨와의 관계는 특별히 진전되지 않았지만 동생 仁永씨와의 우정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1950년대 仁永씨는 영어실력을 바탕으로 兄을 도와 막사 건설 등 미군 공사를 따내 현대그룹의 母기업인 현대건설을 국제적인 회사로 키우는 데 큰 공헌을 했다고 閔원장은 전한다.
어디서 본 듯한 얼굴들 밀러는 1946년 제대를 결심했지만 한국을 떠나기 싫었다. 같은 해 7월 군복을 벗은 그는 美 군정청에 요청하여 사법부 정책고문관으로 한국근무를 연장했다. 그때 나이 26세. 이제 부대규율에 얽매이지 않는 민간인이 된 그는 이곳에 근무하는 2년 동안 본격적인 「한국수업」에 들어갔다. 광복 후 美 軍政하의 국내사정은 극심한 경제난 속에 미국의 신탁통치 여부를 놓고 贊託-反託의 국론분열로 사회 전체가 시끄러웠지만 점령국의 관리로서 거칠 것이 없던 그는 시국의 혼란에 관계없이 여유 만만하게 한국의 풍물을 즐겼다.
1950년대 閔원장은 한국인에겐 꿈도 꿀 수 없던 자동차가 있었기 때문에 못 갈 데가 없었다. 더구나 그의 차는 4륜 구동이라서 열악했던 당시 도로사정의 구애를 받지 않았다. 첫발을 디딜 때부터 한국의 자연에 깊이 빠졌던 그는 전국의 산골과 두메를 돌며 신비롭게만 느껴졌던 「隱者(은자)의 나라」를 샅샅이 두 눈으로 확인했다.
딸린 가족도 없는 독신인 데다가 한국인과 비교가 안 되는 고소득 봉급자이다 보니 그에겐 「시간과 돈의 여유」가 풍족했다. 그는 그 모든 것을 한국의 자연과 풍물을 섭렵하는 일에 쏟았다. 아마 그는 內·外國人을 통틀어 한국 내 자동차 여행을 가장 많이 한 최초의 인물일 것이다.
한국의 자연을 찾아 자동차 여행을 즐기는 동안 그는 한국의 새로운 매력에 빠져들게 된다. 그것은 정겨운 한국의 풍물과 따뜻한 한국인의 인심이었다. 그를 더욱 사로잡은 것은 초가집과 장독대, 시골장터와 난장판, 사물놀이와 판소리 등 도회에서 볼 수 없는 한국의 서민생활과 풍습이었다. 애초부터 한국의 자연풍취에 매료된 그였지만 한국의 문화와 전통, 한국인의 인심과 풍속이라는 매력 포인트가 새롭게 그를 사로잡은 것이다. 생판 모르던 나라의 풍물에까지 탐닉하게 된 그의 배경설명이 흥미를 끈다.
『인천에 첫발을 디딘 순간 마력처럼 나를 사로잡았던 신비한 영감이 점점 현실로 나타나기 시작했어요. 군용 열차를 타고 인천에서 서울로 오는 동안 나의 눈에 비친 한국의 자연이 전혀 낯설지 않았던 것처럼 그 자연 속에서 사는 한국인이 또한 친숙하게만 느껴졌습니다. 선량한 얼굴은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모습이었고 세상에 급할 것이 없는 듯한 유유한 걸음걸이는 더 없이 정다웠습니다. 韓屋을 찾았을 땐 언젠가 한번 살았던 느낌이 드는가 하면, 김치 깍두기 등 전통 음식은 처음부터 나의 혀끝을 녹였지요. 한국에 온 것은 내 마음의 고향을 찾은 것과 다름 없다고 생각해요. 그러고 보면 나의 前生은 분명히 한국인이었나 봅니다』
어머니 설득 1979년 귀화 1948년 軍政이 끝나자 美 군정청 관리였던 그는 한국에 더 머무르기 위해선 새 직장을 찾아야 했다. 이듬해 유엔산하의 원조협조처(ECA)에 들어갔다가 1950년 6·25 전쟁 직전에 美 한국경제협조처(AID)로 자리를 옮겼다. 민간인으로 신분을 바꿔 한국에서 일한 그의 근무지는 미국의 對韓원조와 관련이 깊다. 그래서 그는 1950년대 한국 경제개발 정책에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본인은 그 점에 관해서 일체 입을 열지 않는다. 정보장교 출신인 때문일까. 그가 화제로 삼는 것은 한국의 자연과 풍물·인물일 뿐이다. 그리고 한국은행 시절을 많이 회고한다. 이곳에서 정년까지 24년 간 근무한 그는 사실상 韓銀 초창기 역사의 산 증인이다. 閔丙燾 申秉鉉(신병현·작고) 등 역대 韓銀 총재와 張基榮(장기영·작고) 宋仁相(송인상) 등 부총재들은 모두 그가 이 은행에서 일하면서 사귄 오랜 한국인 친구들이다.
칼 밀러가 민병갈로 바뀐 것은 그가 한국은행에 들어간 지 얼마 뒤의 일이다. 이미 말한 대로 1960년대 초에 閔丙燾 총재의 성과 돌림자로 한자 이름을 지었다. 그러나 실제로 그가 韓銀과 인연을 맺은 시점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이었다. 당시 韓銀 고문은 프라이어드라는 미국인이었는데 그의 보좌관이던 베이커가 휴직을 하는 바람에 그 자리에 임시로 들어간 것이 韓銀맨의 시초였다. 그는 이곳에서 韓銀 조사월보 등의 자료를 영문으로 번역하고 영문 보고서의 교열을 맡는 등 조사부 일을 많이 맡았다. 그때의 조사부 인재로 꼽히는 사람이 金正廉(김정렴) 前 청와대 비서실장, 申秉鉉 前 한은 총재 등이다.
그가 인재로 꼽는 또 하나의 韓銀 맨이 있다. 張基榮 부총재가 한국일보를 창간하면서 데려간 崔秉宇(최병우) 전 코리아 타임스 편집국장이다. 영어를 잘했던 崔씨는 그의 한국어 교사이자 술 친구였다.
두 사람은 1950년대 서울 관철동 술집에서 자주 어울렸는데 「한국에서 사는 재미 중의 하나는 술 먹고 길거리에 오줌 누는 것」 이라는 崔씨의 말에 따라 함께 노상방뇨를 하는 객기를 부린 적도 있다.
崔씨는 불행히도 1958년 8월 중국과 대만 간의 金門島 분쟁 현장을 취재하다가 순직했다. 그는 현재 사회적으로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언론단체 「관훈클럽」을 만든 인물이다.
閔원장이 한국생활 56년 중에 한국을 가장 오랫동안 떠나 있던 시기는 韓銀 촉탁직을 그만두고 본국에 돌아가 있던 1953∼54년의 1년 간이다. 이 시기는 한국전쟁이 휴전에 들어간 시점으로 학업을 계속할 생각으로 고향인 펜실베이니아에 머물던 그를 다시 한국으로 불러낸 사람은 당시 미국 유학중이던 申秉鉉 前 한은총재였다.
그는 1954년 가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이듬해 정식으로 韓銀 직원으로 발령을 받았다. 이때 그는 어느덧 35세의 노총각이 돼 있었다. 그로부터 1983년 정년퇴임 때까지 28년 동안 한국의 중앙은행에서 일하며 필생의 사업인 천리포 수목원의 터전을 잡았다. 수목원 조성이 본 궤도에 오른 1979년 그는 한국에 귀화하여 법적으로도 확실한 한국인이 됐다.
『나무란 자식 키우듯 돌봐야』閔원장이 충남 태안반도의 천리포에 수목원의 근거지를 잡게 된 것은 극히 우연이었다. 그는 일찍부터 서해바다에 홀려 韓銀에 취직한 1950년대 후반부터 여름이면 버릇처럼 한국인 친구들과 만리포 해수욕장을 찾아 바다의 낭만과 해안의 落照를 즐겼다. 그때 자주 묵던 곳은 韓銀 부총재를 지낸 張基榮씨와 宋仁相씨의 만리포 별장이었는데 한국인 村老(촌로)들을 좋아했던 그는 마을 사람들과도 스스럼없이 어울렸다.
1962년 여름, 직장동료 申秉鉉씨(당시 韓銀 조사부 차장)와 宋씨 별장에 머물고 있을 때 한 마을노인이 찾아왔다. 그 노인은 이곳을 자주 찾는 낯선 외국인에게 자신의 천리포 야산을 사달라고 끈질기게 졸랐다. 당시 시골 야산은 매우 헐값이었기 때문에 그는 돕는 셈치고 부담없이 2000 평을 매입했다. 이 땅이 바로 현재의 18만평 규모로 성장한 천리포 수목원의 근거지가 됐다.
외국인이 땅을 샀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주민들로부터 자기 땅을 사 달라는 주문이 잇달아 1966년에 1만3000평을 추가로 매입했다. 1975년에 매입한 근처의 무인도(닭섬- 1만2000평)를 포함하여 그가 이곳에서 사들인 야산과 농토는 1978년까지 현재 수목원 규모인 18만 평으로 늘어나게 됐다.
이들 토지는 여러 차례에 걸쳐 매입했기 때문에 한 곳에 몰려 있지 않고 분산돼 있다. 그래서 현재의 수목원은 모두 7개 구역으로 나눠져 관리에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구역별로 수목들의 특성을 보일 수 있는 장점도 있다.
閔원장이 당초에 사들인 천리포 야산은 나무가 거의 없는 민둥산이었다. 토질도 나빠 30cm만 파도 염분 섞인 황토가 나오는 박토였다. 다행히 따뜻한 해양성 기후가 다양한 식물을 키우는 데는 바람직한 자연환경이었다. 그런데 이곳에 여러 가지 나무를 심고 싶은 그의 마음을 괴롭게 한 것은 식목에 관한 지식과 경험이 거의 없다는 점이었다. 그에겐 단지 나무에 대한 관심과 애정만 있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그가 사들인 천리포 2만여 평은 8년 동안 방치됐다. 그러나 그 공백기간은 그에게 망설임의 기간이 아니라 준비기간이었다. 그는 끊임없이 식물 답사여행과 전문서적을 탐독하여 식물 지식을 얻는 한편 수목관련 전문가를 물색했다.
수목연구가가 된 閔원장에겐 몇 사람의 한국인 「은사」가 있다. 그중 대표적인 두 사람이 李昌福(이창복) 서울대학교 임학과 교수와 趙武衍(조무연·1987년 작고) 임업시험장 연구관이다. 한국 식물학계의 원로인 李교수와 최고의 수목전문가인 趙연구관은 그가 백방으로 수소문한 수목의 大家(대가)들이었다. 李교수와의 관계는 산에서 사귄 李교수의 제자 洪性珏(홍성각·현재 건국대학 교수)씨가 다리를 놔 주었다. 이들 네 사람은 1960년대 중반부터 짝을 짓거나 또는 함께 어울려 식물탐사를 자주 했다. 이 때 이미 한글과 한자를 익힌 閔원장은 李교수의 저서 「대한식물도감」을 얼마나 많이 읽었는지 닳아서 못보게 될 정도였다.
수목원의 명물―100년된 초가집 수목에 관한 지식을 어느 정도 쌓은 그는 1970년부터 본격적인 수목원 조성사업에 들어 갔다. 당시 천리포는 車道가 제대로 뚫리지 않고 전기도 들어오지 않아 나무를 반입해 심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무엇보다 植樹用(식수용) 물을 쉽게 얻을 수 없는 해안지대가 문제였다.
궁리 끝에 自家(자가)발전기를 가동하여 급수시설을 갖추는 한편 나무 수송로는 썰물 시간의 갯벌을 이용했다. 干滿의 차가 심하고 갯벌이 단단한 모래밭인 천리포 자연조건이 천만 다행이었다. 이듬해(1971년) 봄엔 임업시험장의 趙연구관으로부터 한국 재래종 묘목 한 트럭분을 받아 천리포에 처음으로 외부지역 나무가 심어졌다.
閔원장은 천리포에 나무만 옮겨 심은 것이 아니다. 서울에서 韓屋까지 옮겨 지었다. 그는 1970년 이곳에 수목원을 조성할 때 세 채의 기와집을 이축했다. 서울 홍제동에서 도시계획으로 철거되는 것을 해체하여 옮긴 집인데 그중 한 채가 작년 11월 화재로 소실됐다.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수목원 내 최고의 명당에 자리잡았던 이 집은 현재 사는 한옥이 移築(이축) 되기 전까지 10년 넘게 머물던 곳이라서 추억이 담긴 옛집을 잃은 그의 상심은 매우 컸다.
1980년대에도 두 채의 韓屋을 이축했는데 하나는 서울 효자동에서, 다른 한 채는 경북 安東에서 옮겨 지은 것이다.
천리포 수목원에는 초가집과 자재 창고를 포함하여 韓屋이 15채가 있다. 그중 다섯 채는 외지에서 移築한 것으로 집집마다 나무이름이 붙어 있다. 소나무집·소사나무집·목련집·감탕나무집이 그런 이름이다. 나머지 韓屋들은 원래 있던 집이거나 직원용으로 신축한 것들인데, 싼 값으로 韓屋을 짓는 비결을 안다는 閔원장은 한국사람들이 살기 좋은 韓屋을 기피하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말한다. 그의 집에 가보면 주인 방은 온돌이고 가정부 방은 침대방이다.
그의 韓屋 사랑엔 남다른 데가 있다. 1945년 9월 한국땅을 처음 밟았을 때 첫 눈에 그를 사로잡은 것은 바로 韓屋이었다. 그의 한옥 집착은 그후 반세기 동안 이어졌다. 그가 1977년부터 4년 동안 기와집 생활을 즐긴 서울 가회동은 전통 韓屋촌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그에 앞서 1967년부터 9년 동안 머문 서대문구 현저동 집도 韓屋이다. 1980년부터 현재까지 살고 있는 연희동 자택은 양옥이지만 대문과 담은 韓式이다. 집에 비해 좀 커 보이는 이 집 대문은 15년 전 경북 안동에서 옮긴 것이다. 명동 사무실에서 틈만 나면 필동의 「韓屋마을」로 산책을 나가는 것도 그의 남다른 韓屋사랑의 한 모습이다.
그는 韓屋중에서도 초가집을 사랑한다. 천리포 수목원에는 100년이 넘은 초가집 한 채가 있는데 2년에 한 번씩 지붕을 갈아준다. 이 집은 실습생들의 숙소로 활용한다. 자재 창고로 쓰이는 또 한 채의 한옥은 실험 대상이다. 閔원장은 쉽게 안 썩는 지붕 재료를 찾기 위해 이 집에 짚 대신 갈대를 실험적으로 사용해 봤으나 기대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수목원 사무실은 지붕이 초가집 모양으로 설계돼 있다. 독특한 二連式(이연식) 韓屋구조로 지어진 이 본부 사무실은 건축사인 그의 양아들이 설계한 것으로 비록 콘크리트 건물이지만 원장의 초가집 사랑을 반영하며 수목원의 명물로 꼽히고 있다.
閔원장은 韓屋만 좋아할 뿐 아니라 한국음식도 즐긴다. 그와 함께 식사를 나눠 보면 한국의 어떤 노인보다 더 한국적인 식성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김치가 없으면 아예 식사를 못할 정도인데, 어쩌다가 양식당에 들르게 되면 어김없이 김치를 찾는다. 지난 3월 말 아일랜드 여행을 했을 땐 入國 전 런던에 들러 김치를 사 갔다고 한다. 1970년대 현저동에서 살 때는 외국인 친구들을 초대하여 김치 담기 파티를 열기도 했다. 그는 또한 된장과 함께 얼큰한 육개장을 즐기는데 그것도 싱거우면 안 되며 맵고 짜야 직성이 풀린다. 저녁에 집에 있을 때면 반주로 소주 몇 잔을 들고 잠자리를 드는 것이 습관화돼 있다.
學者나무의 火傷 다시 閔원장의 수목원 이야기로 돌아가자. 실제로 나무를 심어 보니 천리포는 해풍이 심하고 염해가 많아 수목원 조건으로는 썩 좋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끊임없는 연구와 노력으로 천연의 장애를 극복했다.
그가 일차로 손댄 것은 해안을 따라 방풍림을 심는 것이었다. 그 바람에 서해 바다가 한눈에 굽어 보이는 자리에 옮겨 지은 韓屋은 20년이 지나니 울창하게 자란 防風林 때문에 전망이 가려져 버렸다. 閔원장에겐 「전망 좋은 방」을 잃은 것이 아쉬웠지만 나무가 바람막이로 자란 것이 더 유쾌했다. 그런데 그중의 하나인 소사나무집이 작년 겨울에 화재로 소실됐다. 이제 그 옆엔 불에 그을린 아름드리 회화나무 한 그루가 주인의 오랜 나무사랑을 상징적으로 말해 주고 있다.
회화나무는 집안에 심으면 고명한 선비가 나온다 하여 우리나라 사대부 집안에서 사랑받던 상서로운 나무이다. 서양에서도 學者나무(scholar tree)로 대접받는 이 나무는 천리포 수목원에 한 그루가 있는데 그 元祖는 서울 한국은행의 뜰에 있다.
26년 전 閔원장이 이곳에서 근무할 때 가지 하나를 가져와 삽목하여 키운 것이 소사나무집 앞의 회화나무다. 이 나무는 작년 가을 유례없이 서해를 강타한 태풍에 가지가 잘리고 몸통이 휘더니 지난 겨울엔 화재까지 만나 몸통 일부를 그슬렸다.
閔원장은 자신이 화상을 입은 것처럼 안타까워하며 나무가 정상적으로 자라기를 마음속으로 빌고 있다. 이 나무는 잎이 늦게 나오기 때문에 6월이나 돼야 제 모습을 볼 수 있다.
閔원장은 회화나무에서 보듯이 풀 포기 하나도 자식처럼 소중하게 생각한다. 1972년 봄 시험식재한 외국산 종자와 묘목이 싹이 트지 않고 죽는 것에 그는 매우 낙심했다. 미국 팅글(Tingle) 묘목재배소에서 구입한 꽃산딸 줄사철 등 18種 39그루의 일부에 生長의 문제가 생긴 것이다. 그는 다시 유럽호랑가시 등 10종 28그루를 추가로 구입하고 전북 임업시험장과 묘목원에서 한국산 묘목을 들여다 같은 시기에 심어 보았다.
이때 그는 같은 緯度(위도)에서 자라는 비슷한 식물이라도 지역에 따라 生長의 차이가 있음을 발견하고 외국에서 관계서적을 구입하여 처방 연구에 몰두하는 한편 전문가를 찾아 자문을 구했다.
閔원장이 밤을 새며 수목학을 본격적으로 독학한 것은 이때부터였다. 한국에서 자라는 모든 나무에 대한 공부도 병행했다. 수시로 李昌福 교수(당시 관악 수목원 원장)와 趙武衍 연구관을 만나 지식을 넓혀 갔다. 그에겐 또 한사람의 「은사」가 있는데 그는 임업시험장 촉탁직원이던 金二萬씨(작고)이다.
1970년대에 70세가 넘은 노인이었던 그는 일제 시대를 포함하여 50여 년 간 말단직에 있으면서 나무와 함께 평생을 보낸 나무 할아버지였다. 학문적인 지식은 없었지만 그는 우리나라 나무에 관한 한 모르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閔원장은 그를 진짜 「나무박사」로 여긴다. 현사시나무로 유명한 玄愼圭(현신규·1986년 작고) 박사에게서도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1973년부터 본격적으로 수목원을 개발하기 시작한 그는 세계에서 가장 큰 영국의 힐리어(Hillier) 수목원 등 10여 개국 수목원과 제휴관계를 갖고 묘목과 씨앗을 들여왔다. 국내에선 충북 한림농원(소장 한태현)에서 모감주 계수나무 등 8종 33그루를. 대전 만수원(묘목농장)에서 산목련 고수시목련 등 8종 31그루를 구입했다. 한국 풍토에 낯선 외국나무를 심었을 땐 1972년의 시련을 거울삼아 뿌리가 잡힐 때까지 모든 직원들이 번갈아 가며 보호 관찰하는 정성을 쏟았다. 이들의 定植기간은 통상 6개월인데 어떤 나무는 3년이나 걸리기도 했다. 이들 나무는 7개 온실의 묘목장을 옮겨 다니며 적응력을 키워 나갔다. 閔원장은 당시의 어려웠던 상황을 이렇게 설명한다.
『나무란 자식을 키우듯이 돌봐야 한다는 것을 이때 처음 알았습니다. 특히 풍토가 다른 외국식물을 키울 땐 우리나라 식물을 키우는 것보다 몇 배의 공을 더 들여야 했습니다. 내가 외국 식물을 많이 들여온 것은 우리 수목원이 세계 수목의 전시장처럼 되도록 하기 위한 뜻에서였습니다. 물론 생태적 조건이 근본적으로 맞지 않는 식물은 어렵겠지만 온실을 잘 활용하면 웬만한 수종은 다 키울 수 있습니다. 문제는 기술과 정성인데 식목의 노하우가 백지인 상태에서 수목원 사업을 시작하고 보니 그 시행착오는 말할 수 없이 많았지요. 다행히 한국 사람은 머리가 좋은 탓으로 수목원 직원들의 기술 습득이 예상 외로 빨라서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한국 고유식물, 세계에 알리다 수목원 사업이 본 궤도에 오르자 閔원장은 국내에서 자라는 야생식물의 탐사와 수집에 나섰다. 1976년부터 식물 탐사 팀을 구성하고 전국의 山野(산야)를 돌며 야생 식물의 생장과정을 관찰하고 가을만 되면 종자채집에 나섰다.
閔원장은 남부지방에서 自生되는 호랑가시나무·동백·노각나무 등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이들을 체계적으로 수집하여 수목원에 옮겨 놓았다. 그가 특히 자랑하는 것은 1978년 전남 완도로 식물 탐사를 갔을 때 감탕나무와 호랑가시나무 사이에 자연 교접된 희귀종을 찾아내 이를 「완도 호랑가시나무」로 이름지어 세계 식물학계에 보고한 것이다. 1979년 가을엔 울릉도 탐사에 나서 추석을 이곳 산림 속에서 보내기도 했다.
천리포 수목원은 식재사업을 시작한 지 8년 만인 1978년엔 전체 면적을 18만 평으로 확장하여 본격적인 수목원의 틀이 잡혔다. 이해 本園을 비롯한 7개 구역의 마스터 플랜을 완성하고 다국적 종자교환 사업에 들어갔다.
이때는 이미 36개국 140개 기관과 교류 협약을 맺은 상태였다. 1979년 11월엔 대만에서 200여 종의 씨앗을 도입하여 동남아 樹種도 천리포 수목원의 가족이 됐다. 1978년 당시 수목원의 樹種 규모는 한국산 1000여 종을 포함한 6000여 종에 이르렀다. 이중엔 목련과 호랑가시가 각각 400여 종에 달해 세계 유명 수목원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1979년은 천리포 수목원에게 뜻깊은 해로 기억된다. 7월엔 산림청의 허가를 받아 재단법인으로 새 출발을 했고 9월엔 閔원장이 한국에 귀화하여 영원한 한국인이 됐기 때문이다.
그는 한국 귀화를 계기로 제휴관계를 맺은 세계 유수의 수목원 및 연구기관과의 종자교환 사업에 집중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외국으로부터 도입하는 종자는 稀貴樹(희귀수) 와 觀賞樹(관상수)에 치중하고 그 대신 한국 고유의 樹種을 내보내 세계 식물학계에서 한국나무의 가치와 중요성을 인식시키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중국과 國交(국교)가 없던 1970년대엔 미국을 통해 중국산 씨앗 30여 종을 도입했다. 해외에서 들여온 종자로 키운 묘목들을 일차로 瑞山郡의 각급 학교와 陸士 등에 분배했다.
그런데 閔원장의 이런 종자교류사업을 못 마땅하게 보는 일부의 시각이 있었다. 몇해 전 어떤 TV방송국에서 귀중한 국내 식물자원을 해외에 유출한 것으로 문제제기를 한 것이다. 평생을 통해 한국의 식물을 세계에 알리려고 노력한 閔원장은 이에 대해 매우 서운한 표정을 지으며 『몰라도 한참 모르는 우물안 개구리 발상』이라고 씁쓸해 했다.
그는 한국 언론이 유전자공학은 알면서 다국적간 종자교류(Index Seminum)의 의미는 모르는 것 같다며 식물 선진국이 아니면 참여할 수 없는 학문적 사업을 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일부 한국 토종식물이 해외에서 變種돼 한국으로 逆수출되는 사례가 있음을 인정하고, 한국도 다양한 외국 식물을 연구해 이를 잘 활용하면 더 큰 국가적 이익을 얻을 수 있다고 강조한다.
천리포 수목원에서 교접 배양한 외국산 목련이 국내에서 대량 유통되고 있다고 말하는 그는 종자교류를 통해 한국의 고유식물을 세계에 널리 알리고 외국 식물에 대한 지식을 늘리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 점에 대해선 李昌福 서울대 명예교수도 의견이 같다. 국내 식물학계의 원로학자인 그는 최근 閔원장의 와병을 걱정하며 『세계 식물지도에 한국이 편입된 것은 전적으로 민병갈씨의 공로』라고 말한다. 1999년에 발족한 「우리식물 살리기 운동본부」 공동대표이기도 한 그는 한국에 수목원이 있다는 것을 세계에 알린 사람은 閔원장이라고 밝히고 그가 세계의 희귀식물을 들여와 국내학계에게 연구자료를 제공한 것도 잘한 일이지만, 완도 호랑가시 등 한국의 고유식물을 세계에 알린 공로는 높이 평가할 만하다고 말한다. 그는 한국 自生식물의 해외 반출을 반대하는 논리에는 식물학자로서 찬성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세계의 아름다운 수목원」으로 꼽혀 이제 천리포 수목원은 국제적으로 알아주는 「나무 박물관」으로 성장했다. 2001년 5월1일 현재 보유수종이 6972종(172과 857속)에 이르고 있는데 외국 수종은 국립 임업시험연구원의 보유 규모를 훨씬 능가한다. 특히 목련류는 410종이나 돼 이 분야에선 세계 최대규모로 알려져 있다. 호랑가시류 350여 종과 동백류 300여종의 규모도 이에 필적할 만한 수목원이 전세계적으로 찾아보기 어렵다. 88개 회원국을 거느린 세계수목협회(DCI, Dendrology Society International)는 천리포 수목원의 이같은 업적과 위상을 평가하여 1998년 총회를 이곳에서 개최했다. 세계 목련학회(The Magnolia Society)와 세계 호랑가시학회(The Holly Society)도 1997년과 1998년에 각각 천리포에서 총회를 열었다. 특히 DCI는 작년 10월 아시아에서는 최초로 이곳을 「세계의 아름다운 수목원」으로 선정했다.
천리포 수목원에는 세계적 희귀종 수목이 여러 그루 있다. 그 중엔 지구상에 세 그루만 존재한다는 「히플레카 윌소니(학명Goteoburgensis)」라는 목련 하나가 끼어 있다. 스웨덴 요테보리 대학의 나젤리우스 토르 명예교수가 10여년 전 배양에 성공한 이 품종은 일본목련과 월손목련의 교배종으로 세 개 중 하나는 스웨덴 대학에 두고 다른 둘은 영국과 한국의 천리포 수목원에 기증한 것이다.
이밖에 나무 중 수명이 가장 길다는 미국産 「가이루사기아」가 있는가 하면 한겨울에도 연보라 꽃을 피우는 진달래과 「에리카」가 있다. 남아프리카에서 들여온 「유리프스」와 뉴질랜드가 원산지인 「히비」는 추위에 약해 온실에서만 키운다.
해충에게도 생명의 존엄성을 보장 천리포 수목원에서 자라는 수만 그루의 나무와 화초들엔 모두 戶籍을 알리는 명패가 달려 있다. 이름과 학명은 물론, 원산지 도입일자가 적혀 있다. 그리고 별도로 수목 대장을 만들어 나무마다 도입경로와 생장상의 특징을 기록해 둔다. 허약한 나무의 목록엔 병상일지까지 적혀 있다. 이러니 천리포 수목원은 가히 나무들의 천국이라고 할 만하다. 이곳은 나무뿐만 아니라 야생동물에게도 낙원이다. 심지어 해충에게도 생명의 존엄성이 보장된다. 농약 사용을 말라는 閔원장의 엄명에 따라 송충이도 이곳에선 박멸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을만 되면 사무실 앞에 있는 열 마지기 논엔 메뚜기가 가득하다.
본원에 조성된 연못은 흰뺨 검둥오리, 청호반새 등 철새들의 보금자리다. 이들이 새끼라도 갖게 되면 수목원은 비상이 걸린다. 직원들은 아기 철새들이 놀랄까 봐 근처에도 못 가고 망원경으로 관찰 보호한다. 1998년 여름 큰 비가 내렸을 때 연못이 범람한 적이 있다. 이 때 연못 속에서 수십년 간 자란 장어 수백 마리가 논 속으로 흘러 들어왔다. 수목원 직원들은 팔뚝만한 자연산 민물 장어들을 보고 군침을 삼켰지만 閔원장의 명령에 따라 모두 연못 속으로 되돌려 보내야 했다. 「야생」이라면 동·식물을 불문하고 철저히 보호해야 한다는 閔원장의 철학을 잘 아는 직원들은 바닷가에 살면서도 공공연히 낚싯대를 들고 다니거나 생선횟집을 가지 못한다.
閔원장은 한국인들이 자연을 제대로 보호하지 않는 것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다. 특히 나무를 사랑하지 않는 것에 유감이 많다. 수목원 초창기인 1970년 4월, 낙도에 놀러간 직원들이 야생 후박나무 일곱 그루를 캐다가 심은 것을 보고 매우 역정을 낸 적이 있다. 문제의 나무들은 서산 앞바다의 학암포 근처에 있는 무인도 대뱅이섬에서 자라는 自生木이었는데 후박나무 群落地였던 이 섬을 몇 해 뒤에 가보니 한 그루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 많던 희귀나무들이 무참히 잘려나간 것을 본 그는 더 많이 캐오지 않은 것이 아쉽기만 했다. 그때 수목원에 옮겨 심은 후박나무들은 한 그루도 손상없이 지금까지 잘 자라고 있다.
1970년대부터 閔원장은 언론을 통해 한국의 자연보호와 전통문화 보존을 역설했다. 그는 1980년 식목일을 앞두고 한 신문기고에서 한국인의 나무에 대한 무관심과 자연훼손을 이렇게 나무랐다.
『한국은 산악지대가 全국토의 66%나 되는 데도 산림자원에 대한 관심이 너무 미약하다. 내가 아는 한, 소나무와 잣나무를 구분할 줄 아는 성인들은 10%도 안 된다. 자연보호를 한다고 어깨에 띠를 두르고 거리나 등산로 입구에서 캠페인을 하는 것도 이상하다. 더욱 한심한 것은 쓰레기를 줍게 한다고 봄철에 수백명의 청소년들을 산 속에 풀어 놓는 것이다. 쓰레기는 줄어들지 모르지만 자라는 새싹들이 그들의 발길에 밟혀 죽을 테니 얼마나 애석한 일인가』
柳一韓 사장의 도움 받아 천리포 수목원은 1962년 터를 잡은 이래 지금까지 39년 간 전적으로 閔원장 개인의 힘으로 운영돼 왔다. 18만 평 규모의 수목원을 누구의 도움도 없이 혼자서 유지 발전시켰다는 것은 아무래도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그 주인은 기업인이나 거액 상속자도 아니고, 그가 손 댄 수목원은 영리단체나 투자기구가 아니다. 거기에다 그는 식물에는 문외한인 데다가 말과 생각이 다른 이방인이었다. 그런 인물이 自力으로 대단위 수목원을 일으키고 獨學으로 세계적 식물 見本단지를 꾸민 것이다.
그렇다면 閔원장은 무슨 돈으로 광활한 해안 별장지를 매입하여 그곳을 국제적인 수목원으로 키웠는가. 기업가가 아닌 봉급자로 이 땅에서 반세기를 살아온 그의 前歷을 생각하면 쉽게 납득이 안 간다.
그가 지난 30여 년 간 수목원에 쏟은 돈은 어림잡아 현재시세로 300억 원 가까이 될 것이다. 그것도 어떤 果實도 기대하지 않고 해마다 쏟아 붓기만 한 돈이었다. 굳이 투자이익을 찾는다면 개인의 성취감과 자기만족만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그의 주변사람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그의 자금력에 궁금증이 많다.
閔원장은 이때까지 수목원의 운영자금을 어떻게 마련했는지 공개한 적이 없다. 언론과의 몇 차례 인터뷰에서 밝힌 내용과 주변사람의 추측을 종합하면 이렇다. 미국에서 약간의 자금을 가져와 그것을 증권투자로 부풀린 것이 기본자금이 됐다. 1960년대에 가깝게 지내던 柳一韓(유일한) 유한양행 사장으로부터 액면가로 배정받은 상당량의 유한양행 주식이 몇 년 만에 수십 배로 뛰어 재력 확보의 轉機를 마련했다. 1960년대 증권파동 때 재미를 봤다는 설도 있지만 본인은 『파산을 겨우 면했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재산증식에 대해 「부양가족이 없는 평생독신의 넉넉한 여유자금을 저축한 것」 이상으로 밝힌 것이 없다.
閔원장의 재력과 관련하여 확실히 알려진 것은 그가 돈을 버는 탁월한 재능을 가졌다는 사실이다. 사실상 한국 최초의 펀드 매니저였던 그는 1980년대 초에 홍콩 경제지 파 이스트 이코노믹 리뷰誌에서 「아시아에서 가장 유능한 투자 자문역」으로 소개될 만큼 증권투자에 일가견이 있다. 그는 1982년 한국은행 퇴직 후 83년부터 한양증권 고문으로 있다가 굿모닝 증권으로 옮겨 현재까지 고문직을 맡고 있다.
올해 81세인 그는 국내에서 가장 나이 많은 봉급자에 들어갈 것이다. 그가 관리하는 자금은 350억원 정도로 알려져 있다.
그는 돈을 잘 벌 뿐 아니라 돈을 아끼는 것에서도 프로급이다. 버는 기술이 9단 이라면 아끼는 기술은 10단 수준이다. 부자가 대개 그렇듯이 그의 절약 습관은 철두철미하다. 그가 현재 타고 있는 승용차는 베이지 색의 대우 브로엄인데 출고된 지 9년이 넘는 고물차이다. 또 한 대 소유했던 대우 듀크는 13년 동안 타다가 더 이상 사용이 불가능해 2년 전에 폐차시켰다. 10여 년 전까지 타던 일제 도요타 승용차의 폐차 때 車齡(차령)은 23년이었다. 그는 달력도 함부로 떼어 버리지 않는다. 시기가 지난 낱장을 모아 두었다가 잘라서 이면지로 활용한다. 그에게는 식당에서 음식 남기는 것도 아깝다. 더 못 먹겠으면 개 먹이로 집에 가져간다.
6000여 種 식물 이름 學名까지 외우기도 閔원장은 돈 버는 재주 말고도 또 하나의 특출한 재능이 있다. 그것은 남의 추종을 불허하는 비상한 기억력이다. 주변사람 말에 의하면 1980년대까지는 수목원에서 자라는 6000여 종의 식물 이름을 學名까지 줄줄 외웠다고 한다. 특히 그는 우리나라 야생화라면 俗名을 포함하여 어떤 식물의 이름도 알아맞힌다. 한번 만난 사람이라도 좀처럼 이름을 잊지 않으며 과거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났던 수많은 일들의 연대를 확실히 기억한다.
젊어선 일본어를 1년 만에 마스터했으며 이때 익힌 漢字실력은 지금까지 남아 있다. 한때는 독일어 프랑스어 러시아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했으며, 지금도 중국어와 스페인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보통사람의 눈으로 볼 땐 불가사의가 많은 그에게 따라다니는 또 하나의 의문사항은 평생 독신이라는 점이다. 『왜 장가를 안 가느냐』라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그는 준비된 답변 두 개로 얼버무린다. 『한국과 결혼했다』 또는 『나무와 결혼했다』가 그의 공식적인 대답이다. 때로는 『나는 여자보다 남자를 좋아한다』로 대꾸하기도 하는데 그 말이 가장 맞는 것 같다. 기본적으로 독신주의자인 그는 가까운 사람이 결혼하려 할 땐 농담 비슷하게 만류한다. 그에겐 청년장교 시절 한국 여성과의 염문이 있었으나 구체적인 사연은 밝히지 않는다. 그의 고향인 펜실베이니아엔 그를 못 잊어 평생 결혼을 하지 않고 사는 할머니가 있다. 그녀는 천리포 수목원을 두 차례 다녀 갔다.
한국인을 많이 닮은 閔원장의 의식 중엔 갸륵한(?) 孝心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미국에서 홀로 떨어져 살았던 노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다. 재작년 어머니가 104세로 타계할 때까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펜실베이니아의 양로원으로 찾아가 生日문안을 했다.
1954년 韓銀에 들어갈 땐 고용계약서에 매년 두 차례 어머니를 만날 수 있도록 특별 휴가와 항공료 편의를 제공해야 한다는 단서를 달 정도였다. 그는 한국에 귀화하는 것을 반대하는 어머니를 7년 동안 설득하여 1979년에 뜻을 이루었다.
老母의 장례를 치르고 귀국한 이후 그의 표정엔 눈에 띄게 쓸쓸함이 늘었다. 지난 1월엔 병석에서 金基昶(김기창) 화백의 부음을 듣고 『雲甫(운보)가 雨鄕(우향-부인 朴來賢의 號)따라 갔구나』라며 40여 년 전 고인 부부와 나눈 우정을 회고했다. 한국畵를 좋아했던 그는 1960∼70년대 국내 미술가들과 교분이 두터웠다. 朴壽根(박수근) 李應魯(이응로)와도 친했는데 특히 李화백이 동백림 간첩단사건에 연루돼 고생하고 있을 때 많이 도와 준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모두 세상을 떠났다.
지난 4월3일, 해외여행을 마치고 귀국한 그는 자신의 여행 중에 鄭周永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작고했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애석해 했다. 鄭명예회장과는 1945년 그가 한국에 처음 왔을 때 잠깐 친분을 나눈 사이다. 그는 인생무상을 느낄 땐 나무와 관련하여 자신의 수목원 사업을 이렇게 설명한다.
『인생은 길어야 백년이지만 나무는 천년을 삽니다. 한국에선 재목으로도 뛰어난 품질을 갖는 朱木을 가리켜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이라고 말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내가 하는 수목원 사업은 이제 겨우 30년이 됐지만 적어도 300년은 내다 보고 시작한 것입니다. 내가 죽은 뒤에도 자식처럼 키운 천리포 수목들은 몇 백년 더 살며 내가 「제2의 조국」으로 삼은 한국에 바친 마지막 선물로 남기를 바랍니다. 평생을 바쳐 이 사업을 하면서 실감한 것은 수목원이란 영원한 미완성 사업이라는 엄숙한 진리였습니다』
나무 다칠까봐 일반 공개도 꺼려 계절의 여왕 5월을 맞은 천리포 수목원은 자연의 섭리가 총출동한 모습이다. 온갖 수목들이 신록의 파노라마를 연출하는가 하면 수많은 기화요초들이 꽃의 제전을 펼친다. 수목원의 자연경관은 6월에 절정을 이룬다.
자신의 건강이 몹시 나빠져 있음을 잘 아는 閔원장은 투병 중에도 입원기간만 지나면 수목원을 찾아 나무와 함께 산다. 비록 자신은 병약해졌어도 막 움트는 새싹들의 건강에 이상이 없기를 바라는 것이 그의 마음이다. 그는 지금 계속되는 가뭄을 걱정하며 자식 같은 수목을 위하여 기우제라도 지내고 싶은 심정이다.
病苦를 치르는 閔원장은 지금 「포스트 민병갈」 문제의 해법을 찾는 고민에 빠져 있는 것 같다. 그에겐 자신이 세상을 떠난 뒤의 수목원 운영문제가 최대의 과제가 아닐 수 없다. 81세라는 고령의 나이로 봐도 그렇고, 마음을 놓을 수 없는 병세로 봐도 또한 그렇다.
그는 유언장을 써 놓긴 했지만 현재까지 수목원의 장래문제를 공개적으로 밝힌 적이 없다. IMF 사태로 자금난에 봉착했던 그는 1998년 초 오랜 친구인 李昌福 명예교수의 주선으로 당시 鮮于仲皓(선우중호) 서울대학 총장을 만나 수목원을 대학에 기증하는 문제를 협의했으나 어떤 결론도 얻지 못했다. 당시 수목원 직원들은 수익사업을 벌여서라도 자체운영을 하자는 의견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18만평의 수목원은 철책으로 둘러쌓아 외부인의 출입을 막고 있다.
목숨 다 하는 날까지 閔원장은 1998년 10월 외국을 본받아 후원자를 공모했으나 현재까지 2년반 동안 들어 온 금액은 1억2000만원에 그치고 있다. 그만한 액수를 모아 준 회원들이 고맙지만 연간 4억원의 운영비를 감당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다행히 작년부터 2년째 산림청으로부터 매년 3억원씩 지원금이 나와 큰 도움이 되고 있다.
3년 전에 구성된 천리포 수목원 후원회(회장 김무열-전북대학 생물학과 교수)는 5월1일 현재 회원수가 401명이다. 그 중 절반이 넘는 228명이 年회비 6만원의 일반회원이고, 98명이 年회비 10만원의 가족회원이다.
평생회원을 보장하는 100만원 이상의 기부회원은 38명뿐이고, 나머지는 年 3만원의 학생회원 37명과 年 40만원의 기관회원 7명이다. 명단엔 알 만한 기업체나 재력가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이에 대해 후원회비를 관리하는 李揆賢(이규현) 관리부장은 세계에 자랑할 만한 수목원의 존립을 돕겠다는 명망 있는 기부자가 없는 것은 국가적인 불행이라고 말한다. 후원회는 5월5일 어린이 날을 「후원회 회원 우정의 날」로 정하고 300여 명이 가족동반으로 수목원에 모여 모금행사를 가졌다.
閔원장은 1979년 수목원의 재단인가를 받은 때부터 다각도로 사회환원을 구상했다. 1996년 8월5일엔 공익법인으로 전환한 뒤 1998년 초엔 財源의 한계를 느끼고 서울대학교에 기증하는 문제까지 고려했다. 그리고 얼마 후인 4월 식목철을 맞아 후원회 결성으로 재원조달의 방향을 바꿨다. 미국이나 영국처럼 「큰손」의 지원은 기대하지 않았지만 해가 지날수록 관심도가 떨어지는 것에 적이 실망한 기색이다. 그가 대학 등 공공기관에 기증하는 문제를 보류한 이면엔 평생을 바쳐 가꾼 「보배」를 생전에 선뜻 남의 손에 넘기고 싶지 않은 인간적 심리도 적잖이 작용했다. 직원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有料 공개로 재원을 마련하는 길도 있으나 그렇게 되면 무엇보다도 수목훼손이 우려된다.
5월 초, 후원회 우정의 날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천리포에 내려온 閔원장은 눈에 띄게 수척해 있었다. 본원 수목원의 연못가에 나와 꽃잎이 지기 시작한 별목련을 바라보는 그의 표정은 자연의 순환섭리에서 자신의 운명을 예견한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늘진 얼굴에도 목숨이 다 하는 날까지 나무 한 그루나 풀 한 포기라도 돌보겠다는 굳은 의지가 엿보인다.
閔원장의 그런 마음가짐은 곧 「내일 지구에 종말이 와도 오늘 사과나무를 심는다」 는 스피노자의 철학을 몸소 실천하는 자세일 것이다. 나무사랑으로 이국에서 평생을 보낸 이 老신사는 자신의 「미완성 작품」 천리포 수목원의 일천년 후를 내다 보며 오늘도 나무 가꾸는 손길을 멈추지 않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