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韓永(金正日의 처조카) 살해는 김정남(金正日 장남)의 지시를 받은 李昌善(사회문화부장)이 지휘했다』
「脫北 로열패밀리 최측근」이 보낸 정보
23년 前이었다. 홍콩에서 북한 공작원에 납치돼 남포항에 도착한 영화배우 崔銀姬(최은희)씨는 매서운 겨울 바람이 몰아치는 선착장에서 두 남자 사이에 끼어 사진을 찍었다. 이들은 崔씨를 마중하러 남포항까지 나온 북한 金正日(김정일)의 수행원이었다.
崔銀姬씨 오른 편에는 중간 키에 퉁퉁한 남자가, 왼 편에는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남자가 섰다. 키작은 남자는 「이완기」란 이름의 북한 조사부 부장이라 했고, 왼 편은 강해룡이란 이름의 조사부 부부장이라 했다. 사진은 1978년 1월22일 오후 3시에 촬영됐다.
北측에서 찍어 崔銀姬씨에게 기념으로 준 이 사진은 崔銀姬·申相玉(신상옥)씨가 쓴 「조국은 저 하늘 저 멀리」라는 책을 통해 공개됐다. 이 사진을 입수한 한국 정보기관은 「이완기」가 북한 對外연락부장 李昌善(이창선)의 假名(가명)임을 알게 되었다. 對外연락부는 간첩 남파, 테러, 要人(요인) 암살 및 납치 전문의 對南 공작부서다.
李昌善은 북한에서 對南 사업의 영웅으로 통하는 「할머니 工作員」 정경희의 뒤를 이어 1976년에 대외연락부 책임자가 된 사람이다. 한국 정보기관은 崔銀姬씨 납치사건이 金正日의 직접 지시를 받은 북한 對外연락부가 실천에 옮겼고, 기획·실무 책임자가 李昌善이라고 결론지었다.
최근 月刊朝鮮은 「脫北한 북한 로열 패밀리의 최측근」이란 사람이 중국을 경유해 보낸 팩시밀리를 받았다. 팩시밀리 발신지는 베이징(北京)에 위치한 유명 호텔이었다.
A4용지 다섯 장 분량의 이 팩시밀리에는 金正日의 세 아내-成蕙琳(성혜림), 김영숙, 고영희-의 최근 근황과 金正日 자식들의 근황, 그리고 李韓永(이한영)씨 살해사건의 내막이 적혀 있었다. 李韓永씨는 金正日의 전처 成蕙琳의 언니 成蕙琅(성혜랑)씨의 아들로 1982년 한국으로 귀순했으나 1997년 북한 공작원에 의해 살해되었다.
李昌善은 金日成-金正日-김정남 3代에 걸친 忠僕
팩시밀리에는 金正日이 자식들을 공부시키기 위해 구입했다는 스위스 별장의 주소를 비롯해 북한 최고 권력층 내부 동향이 적혀 있었다. 이름과 직책도 구체적으로 적시돼 있었다. 지금까지 거의 공개되지 않은 내용이었다. 金正日의 여자 관계는 북한에서도 최고 기밀로 취급돼 일반인들은 그 내용을 알 수 없다.
이 팩시밀리를 對北(대북) 정보기관 관계자들에게 보여주고 내용의 진위여부를 물었다. 관계자들은 『90% 이상이 사실로 보인다. 특히 일반인들로서는 접근이 불가능한 북한 軍部의 정보기관 책임자들 이름이 정확하게 적혀 있다』면서 『金正日 주변의 로열패밀리가 아니면 알 수 없는 내용들이다』고 평가했다.
내용 중에서 가장 충격적인 것은 李韓永(40)씨 살해사건이 金正日의 아들 김정남(30)의 지시로 중앙당 사회문화부 부장 李昌善에 의해 자행되었다는 대목이다. 살해를 지시한 김정남은 金正日과 成蕙琳의 소생이고, 살해당한 李韓永씨는 김정남 어머니의 언니 아들이다. 이 提報(제보)가 사실이라면 결국 李韓永씨 살해사건은 이종 동생이 이종 형을 죽인 꼴이다.
김정남의 지시를 받아 이를 실행에 옮겼다는 「사회문화부 부장 李昌善」은 23년 전, 金正日의 지시를 받아 영화배우 崔銀姬씨 납치를 자행한 그 사람이다. 정보기관의 한 관계자는 『李昌善은 1925년 11월25일 전남 순천에서 태어났다. 스무 살에 金日成의 호위병이 되었고, 그후 對南 테러 전문가로 활동했다. 지금도 金正日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李昌善은 金日成-金正日-김정남 3代(대)에 걸친 忠僕(충복)이었다.
팩시밀리에는 李韓永씨 살해사건의 전말이 이렇게 기록돼 있다.
<金正日의 처조카인 李韓永이 手記(수기) 「대동강 로열패밀리 서울 잠행 14년」을 펴냈을 때 김정남은 자기의 해외 채널을 이용하여 金正日보다 먼저 책을 입수하였다고 한다. 김정남은 그후 인민무력부 문화연락실(북한 軍部내의 對南 공작부서) 장봉림 장군을 만나 李韓永을 제거하라는 지시를 준다. 김정남은 『李韓永을 죽이지 못하면 그 우종창이라는 기자라도 없애버리라』는 지시를 주었다고 한다.
이럴 때 보면 김정남은 버마 랑군 테러를 지시하던 金正日을 꼭같이 연상케 한다. 그후 장봉림이 김정남의 「명령」을 집행하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자 김정남은 아버지 몰래 같은 지시를 중앙당 사회문화부 李昌善에게 주었으며, 결과 사회문화부에서 「새끼 장군님」(편집자 주:金正日의 아들 김정남에 대한 북한 내부의 호칭)의 명령을 「집행」한 것이다.
「새끼 장군님」의 명령을 집행하지 못한 장봉림은 김정남이 인민군 보위사령부(남한의 기무사와 같은 軍內의 정보기관이자 金正日의 최고 독재수단-북한에서는 공포의 대명사로 불리고 있다) 김장성 부사령관에게 지시하여 간첩혐의로 체포, 숙청해 버렸다는 說도 있다>
테러범이 외교사절로 변신
李韓永씨는 1997년 2월15일 밤, 분당 아파트의 대학 선배 집으로 들어가다가 괴한이 쏜 권총 2발을 머리와 가슴에 맞고 살해되었다. 범인은 체포되지 않았다. 살해사건 7개월 후인 1997년 10월27일 안기부가 부부간첩 최정남(35), 강연정(28·체포 후 음독자살)을 체포하면서 李韓永씨를 살해한 괴한은 남파된 북한 공작원임이 확인되었다.
안기부는 1997년 11월20일 부부간첩 사건 발표에서 『남파간첩 최정남을 조사한 결과, 李韓永씨 피격 사망사건은 북한 사회문화부 소속 테러 전문요원인 「최순호」 등 2명의 특수 공작조가 사건 발생 한달 전에 남파돼 일으킨 사건으로 나타났으며, 이들은 북한으로 귀환한 뒤 영웅 칭호를 받았다』고 밝혔다.
부부간첩 사건은 1997년 대통령 선거 직전에 발표돼 북한 공작원이 李韓永씨를 살해했다는 내용은 크게 보도되지 않았다.
한국 정보기관 자료에 따르면 李韓永씨 살해를 지휘한 李昌善은 金日成 훈장을 두 차례나 받은 對南 공작과 협상 전문가였다. 그는 1960년에 북한 문화성 선전국장이 되고 1961년 黨 중앙위 선전선동부 부부장을 지냈다. 1973년 南北 연락대표회의 때 북측 대표단의 일원이었고, 1979년에는 북측의 민족통일준비위원회 대표 자격으로 南北접촉에 임했다고 한다.
李昌善은 崔銀姬ㆍ申相玉씨 탈출사건이 발생한 1986년 5월, 문화예술부 부장직에서 철직되었으나 실각된 것은 아니었다고 정보기관 관계자가 말했다. 李昌善은 金日成 사망시 국가장의위원으로 모습을 드러냈고, 1995년 2월 吳振宇(오진우) 인민무력부장 사망시에도 국가장의위원을 맡았다.
나이 70세가 되던 1995년, 李昌善은 재차 사회문화부 부장을 맡아 사회문화부가 대외연락부로 개칭되던 1997년 8월까지 對南 공작을 전담했다. 李韓永씨 살해사건은 이 기간중에 일어났다.
사회문화부는 간첩들을 특수 교육시키는 「초대소」를 운영한다. 대한항공 858기 폭파사건을 일으킨 金賢姬(김현희)도 초대소 출신이다. 사회문화부 산하 기관으로는 ▲문화예술부 ▲봉화정치대학 ▲남한지역 담당課 ▲남한사회 지도계층 담당課 ▲해외 담당課 등이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사회문화부는 노동당 비서국 對南 사업담당 비서의 지휘를 받는다. 對南 담당비서가 북한의 對南 공작 총책이다. 金大中 대통령이 金正日과 남북정상회담을 할 때 배석했던 金容淳(김용순)이 현재 對南 담당 비서를 맡고 있다. 對南 담당 비서는 사회문화부를 비롯, 국가안전보위부, 통일전선부, 인민무력부 등을 지휘한다(앞 페이지 도표 참조).
祖平統(조평통)이라 불리는 북한의 조국통일평화위원회는 통일전선부 산하 對南 공작기관인데, 통일전선부 산하에는 ▲남북회담課 ▲남조선 연구소 ▲만경봉 92호 등이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국가안전보위부 산하에는 미국·중국·러시아를 상대하는 해외 反探局(반탐국)과 남조선 담당局, 그리고 盜聽局(도청국) 등이 있다고 한다.
한국 정보기관은 李昌善의 동정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사회문화부장에서 물러난 李昌善은 1998년 2월12일 金正日 탄생 56돌을 기념하는 중앙연구 토론회에 참석했다고 북한의 조선중앙방송이 보도했다. 조선중앙방송 보도에 따르면 李昌善은 1999년 9월9일 「조선 근로자대표단」단장 으로 중국을 방문, 9월19일 평양에 도착했으며, 2000년 5월4일에도 같은 직책으로 중국을 방문했다.
李昌善은 세계를 경악시킨 崔銀姬씨 납치사건과 李韓永씨 살해사건을 주도한 테러범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독일 교포 吳吉男(오길남)씨 일가의 越北을 주도한 것으로 한국 정보기관은 파악하고 있다. 정보기관 관계자는 『吳吉男씨의 밀봉 교육을 李昌善이 담당했다』고 말했다. 이같은 테러범 李昌善이 지금은 북한 근로자를 대표한다는 「외교사절」로 변신, 중국을 무대로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살해 동기로 작용한 「대동강 로열패밀리 서울 잠행 14년」
金正日의 아들 김정남이 李昌善에게 李韓永씨 살해를 지시하게 된 결정적 동기로 작용한 것은 「대동강 로열패밀리 서울 잠행 14년」이란 책이다. 이 책에는 기쁨조를 비롯한 金正日의 문란한 사생활이 적나라하게 폭로돼 있다.
이 책이 나온 뒤 李씨는 본 기자에게 『金正日과 관련된 부분은 가급적 말하지 않으려고 했으나 출판사에서 요구해 그 부분이 많이 들어갔다. 金正日 위원장이 보면 매우 기분나빠 할 것이다. 보복을 당할까 겁난다』고 말하며 불안해 했었다.
金日成 부자에 대한 비난은 북한 사회의 최고 禁忌(금기) 사항이다. 남한 사회에 숨어있는 親北(친북) 세력들도 정체를 위장하기 위해 북한 사회나 북한체제를 비판하는 척은 하지만 어떤 경우든 金日成 부자의 이름을 거명하며 욕하지 않는다. 기자는 독일에서 지식인인양 위장하여 활동하는 북한 공작원들을 독일에서 만난 적이 있는데 이들 역시 북한체제는 비판해도 金日成 부자에 대해서는 욕하지 않았다.
「대동강 로열패밀리 서울 잠행 14년」은 1996년 6월7일 동아일보에서 출간했다. 그 8개월 후 李韓永씨는 살해됐다. 이 책의 저자는 李韓永씨로 되어 있으나 동아일보 출판부장이었던 金大坤(김대곤)씨가 대필했다. 金씨는 東亞日報를 퇴직하고 지금은 청와대 공보수석실에서 국내 언론담당 비서관으로 있다.
金씨는 『李韓永씨가 국내에서 총맞아 죽을 정도로 행동하거나 원한을 산 적이 없기 때문에 그가 피격된 직후부터 북한의 소행임을 의심하게 되었다』면서 『북한의 金正日이 책 내용에 분노해 李씨를 죽음으로 몰고간 것은 상식』이라고 말했다.
살해 지시자에 대해 金씨는 『金正日은 북한의 최고 통치자인데 그런 위치에 있는 사람이 자신의 조카뻘인 李씨를 살해하라고 직접 지시했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金正日과 관련된 내용은 동아일보측에서 요청했다는 李韓永씨 주장에 대해 金씨는 『남한에 와서 들은 것보다는 북한에서 직접 경험한 것만 이야기해달라고 요구한 적은 있으나 金正日 부분을 유독 강조한 적은 없다』고 말했다.
「작은 김정일」로 불리는 김정남
살해를 지시한 김정남은 1971년생이다. 이 김정남에 대해 「탈북한 북한 로열패밀리의 최측근」이란 사람은 前記의 팩시밀리에서 이렇게 적었다.
<김정남씨는 남한 언론들에 소개된 바와는 다소 틀리는 점도 있으나 유년 시절에 대한 증언은 서방으로 탈출한 成蕙琅씨의 증언이 정확하다. 귀순자 강명도씨(편집자 注:북한 총리 강성산의 사위로 알려진 사람) 자서전 「북한은 망명을 꿈꾼다」에 쓴 것처럼 (김정남이) 평양 고려호텔에서 총기 난동을 부린 것은 사실과 맞지 않다. 그러나 (김정남의) 성질이 金위원장(金正日)을 꼭 닮아 가끔 화가 나면 권총을 잘 뺀다는 것은 사실이다.
김정남씨는 현재 평양 15호 관저에 부인과 아들하고 살고 있다. 신병설, 알콜중독설, 성혜림 서방 탈출 보도 이후 숙청설은 사실과 무관하다. 김정남씨는 아버지인 金正日에게 컴퓨터를 다루도록 권장하는 등 컴퓨터와 인터넷에 능하며 북한 권력층과 군부 소장파들로부터 신망이 높아 실제로 후계자론까지 거론되고 있으나 고영희(편집자 注:金正日의 세번째 아내) 세력의 저항도 만만치 않아 권력싸움의 희생물로 될 수도 있다는 것이 측근들의 견해다.
김정남씨는 成蕙琅씨가 최근 남한 월간지 「여성중앙」과의 인터뷰에서 밝힌 것처럼 프랑스어, 영어, 로어(러시아어) 등 세 가지 어학을 소유하고 있으며, 취미는 사냥, 사격, 여행이다. 남한 인터넷에 지난해 김정남씨가 미모의 여자들과 어울려 유럽 등지를 여행한 사실이 있다고 한 것은 사실이다. 남한 정보 당국은 북한 金正日 위원장의 가족들에 대해서 비교적 정확한 정보를 얻고 있는 듯싶다.
김정남은 金위원장의 공식 부인이나 다름없는 고영희(47)씨의 제압이 있음에도 북한 권력 요직에 있는 일부 최고위층 및 군부 핵심 인물들과의 인맥이 좋은 편이어서 실제 「작은 김정일」로 불리고 있다. 북한 고위 엘리트들 가운데서 김정남은 「새끼 장군님」으로 불리며 김정남의 주변을 두고는 「새끼 비서실」이라고 부른다. 金正日 총비서의 서기실(남한의 비서실과 같은 것)이 현재 북한을 좌우하는 권력의 핵심인데 비추어 김정남과 그의 주변 세력 역시 무시 못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김정남은 자기 어머니 서방탈출 보도가 있은 뒤 심경이 매우 불안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가 제일 고심하였던 것이 자기 아버지와의 관계였을 것이다. 그러나 김정일은 김정남에게 『나에게만 충실하면 일 없다』는 한 마디로 정남의 심경을 달래주었다고 한다>
평양 고려호텔에서 만난 김정남
탈북자 유○○씨는 북한에 있을 때 김정남을 옆에서 목격한 사람이다. 유씨는 1998년까지 북한의 외화벌이 기관인 「38호실」 산하 「○○자재과」에서 근무했다. 「38호실」은 金正日의 비자금을 관리하는 「39호실」 산하 기관으로 외화상점과 외국인 전용 호텔을 운영하며 송이, 꿀, 성게 알 등 북한산 토산물을 해외로 수출하는 곳이라고 유씨는 말했다.
유씨는 1995년 봄, 평양 고려호텔 커피숍에서 김정남을 목격했다. 밤 9시 무렵이라고 한다. 고려호텔에는 1층과 지하에 커피숍이 각각 1개씩 있는데 김정남은 1층 커피숍에 나이 든 남자와 같이 앉아 있었다고 한다.
『나는 김정남과 등을 대고 커피숍에 앉아 있었다. 김정남은 50이 넘은 남자와 마주 앉아 있었다. 처음엔 김정남인 줄을 몰랐다. 그런데 김정남이 나이든 어른에게 「그랬나?」 「그 영감 일은 참 안 됐어」하며 반말을 하기에 어떤 사람인가 싶어 쳐다보게 되었다. 나이에 비해 조숙해 보였고, 잘 먹고 살이 쪄서 재일교포인줄 알았다.
커피숍 복무원에게 「저 젊은이가 누구기에 어른에게 반말하느냐」고 물어보았다. 복무원은 신경쓰지 말라고 하면서 「선생님의 아들」이라고 말했다. 「선생님의 아들」은 북한 젊은이들 사이에 통용되는 김정남에 대한 隱語(은어)다. 「장군님 아들」이라면 바로 신분이 드러나니까 「선생님의 아들」이라고 불렀다.
김정남은 머리를 바싹 치켜서 짧게 깎았고 양복 차림이었다. 키나 체형은 金正日을 빼다 박았다. 아버지를 닮아 김정남도 머리통이 컸다. 나처럼 대학을 나온 북한 젊은이들은 김정남이 아버지 金正日의 말도 안 듣는 자식으로 알고 있다. 김정남은 학교에 다니지 않고 교수들을 관저로 불러 개인교습을 받은 것으로 안다. 김정남은 술도 잘 먹고 난동기가 심한 사람으로 북한 사회에 알려져 있다』
―김정남은 고려호텔에 자주 나타났습니까.
『저는 그때 처음 보았고, 복무원 말은 자주 온다는 것이었어요』
―김정남이 술에 취해 고려호텔 나이트클럽에서 권총을 쏘고 난동을 부렸다는 말이 있는데요.
『난동기가 심하다는 말은 들었으나 권총 사건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한번은 김정남이 여자 친구를 만나기 위해 제 마음대로 국경을 넘어 중국에 갔다 온 일이 있다는 말은 들었습니다』
―김정남이 金正日의 후계자가 될 것 같습니까.
『金正日은 金日成의 후광을 워낙 많이 입었기에 후계자가 가능했습니다. 북한 사람들이 아무리 바보라 해도 김정남이 金正日의 후계자가 되기는 힘들 것으로 봅니다』
―김정남이 권력은 갖고 있습니까.
『국가보위부 內의 실력자라고 들었습니다. 국가보위부에 잡혀간 사람이 있었는데 그 가족들이 김정남에게 잘 이야기해 풀려나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본사가 濠洲에 있고, 평양에 지사를 두고 있는 어느 기업체의 간부는 김정남의 고려호텔 총기사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평양 지사 직원으로부터 들은 얘기다. 1993년 무렵인데 고려호텔 지하 디스코텍에서 술을 먹던 김정남이 갑자기 권총을 꺼내들고 천정을 향해 발사했다는 것이다. 사람은 다치지 않았다고 했다. 고려호텔에 투숙중인 외국인들이 총소리에 깜짝 놀라고 난리가 났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다가가니까 김정남은 승용차를 타고 사라졌다. 그가 타고간 승용차에 「빨간 별판」이 붙어 있었다고 목격자들이 얘기했다. 「빨간 별판」은 장군들이 타고 다니는 차다. 김정남은 아버지 金正日을 닮아서 총을 잘 다루고 사격술도 뛰어난 것으로 알고 있다』
북경에 있는 김정남의 「해외채널」
김정남은 李韓永씨의 책 「대동강 로열패밀리 서울 잠행 14년」을 자신의 「해외 채널」을 이용하여 金正日보다 먼저 구입한 것으로 되어 있다. 중국 북경에 거주하는 한 사업가는 김정남의 「해외채널」과 관련해 이렇게 말했다.
『김정남의 친구라는 북한인이 1996년에 북경에 사무실을 냈다. 40대로 추정되는 이 친구라는 사람은 수시로 북경에 나온다. 북한에서 골동품을 갖고 나와 팔기도 하고 북한에서 조립한 컴퓨터를 일본에 보내는 일도 한다. 돈이 굉장히 많은 사람이다. 이 친구라는 사람에 따르면 김정남은 컴퓨터 전문가다. 김정남이 일본에 가서 컴퓨터 공부를 했다는 말도 들었다』
정보기관 관계자는 『김정남의 측근이란 사람들이 북경, 상해, 마카오 등지에 수시로 나온다』며 『김정남 친구가 운영하는 북경 사무실이 김정남의 해외채널 본거지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서방으로 탈출한 成蕙琅씨는 2000년 12월26일에 출간된 「등나무집」이란 책에서 김정남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이래저래 비밀노출을 엄단하느라고 정남은 울타리 바깥 세상과 철저히 격리된 상태에서 단 한 명의 친구도 없이 어울려 뛰어노는 즐거움을 모르고 기형적으로 키워지고 있었다. 정남이는 갈 곳이 없었다. 합법적으로(金正日에게 욕 안먹고) 갈 수 있는 데는 병원밖에 없었다. 옥류관 국수도 집에 받아다만 먹을 수 있었다.
정치에 바빴던 그의 아버지(金正日)는 아들을 방임하였으며 교육을 시키지 않았다. 그는 무제한적인 권한과 호사속에서 어머니의 사랑도, 걱정도 그 누구의 간섭도 없이 본능만이 성장하였다. 그의 장점에 속하는 너그러움, 남을 좋게 대해주고 싶어하는 선심, 인정 깊음은 그의 타고난 성격, 혈통에 속한다고 본다. 그를 나쁜 인간으로 보게하는 과격함, 까다로움 등은 후천적 성격이라고 나는 보았다. 무제한 권력, 非교육, 어머니의 부재, 그 사회의 권위주의가 만든 성격이다. 이렇게 상반되는 성격은 그에게서 종잡기 힘든 난해한 기질로 표현되기도 한다. 정남이 목소리는 제 아버지를 꼭 닮아 그 애가 울화통을 터뜨리는 소리는 제 아버지 고함과 같았다>
1942년 生인 金正日은 올해 환갑이다. 그는 30대에 金日成에 의해 후계자로 지목돼 지금까지 북한을 통치하고 있다. 환갑을 맞은 金正日으로서는 자신의 후계자를 생각해야 될 때인 것 같다.
국내에서 金正日 후계 문제를 최초 거론한 사람은 안기부 3차장 嚴翼駿(엄익준·작고)씨다. 嚴차장은 2년 전, 외신특파원들과의 간담회에서 「김정남이 국가보위부에 근무하며 후계자 수업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정보기관의 한 관계자는 『김정남의 직책에 대해 북한이 공식적으로 발표한 것은 없다. 우리는 김정남의 계급이 「명예 장령(장군)」이며, 金正日이 아들을 軍 지도자로 키우고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여러 정보를 종합해 보면, 김정남은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않고 폐쇄적인 환경에서 자라나 모든 것을 자기 위주로 생각하며, 아버지 金正日을 닮아 즉흥적이며 급한 성격의 소유자로 추정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종 형을 죽이라는 상식밖의 지시도 내릴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李韓永씨 살해 현장 답사
李韓永씨 살해사건이 발생했을 때 기자는 對共 수사관과 함께 현장을 세밀히 조사했다. 이 사건은 기자 입장에서 「남의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1982년 한국으로 귀순해 14년 간 신분이 노출되지 않았던 李씨의 존재를 최초 공개하고, 李씨와 모스크바에 살고 있던 李씨의 어머니 成蕙琅씨와의 국제전화를 주선한 사람이 본 기자이기 때문이다.
14년 만에 이뤄진 이 전화가 계기가 되어 成蕙琅씨는 1996년 1월 서방으로 탈출하게 된다. 金正日의 아들 김정남이 李韓永씨 살해 지시를 내릴 때 『이한영을 죽이지 못하면 우종창이란 기자라도 없애버려라』며 본 기자의 이름을 거명했다는 것도 이러한 관계 때문이다.
李韓永씨 살해사건 발생을 전후해 기자에게도 이상한 조짐이 있었다. 살해사건 발생 며칠 전부터 누군가가 기자의 집에 전화를 걸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몇 분 간 수화기를 들고 있는 일이 계속됐다. 괴전화는 반드시 오후 7시 정각에 걸려왔다.
아내로부터 이상한 전화가 온다는 연락을 받고 기자는 오후 7시에 문제의 괴전화를 직접 받았다. 『여보세요』 『말씀하세요』를 여러 차례 반복했지만 상대방의 숨쉬는 소리만 전화기 속에서 들려 올 뿐이었다. 이런 상태가 5분 이상 계속되었다. 상대방은 말만 하지 않았을 뿐 계속 전화기를 들고 있었다.
그러던 중 李韓永씨 살해 사건이 발생했다. 안기부에 괴전화 사실을 알렸더니 『경찰관을 보내줄 수는 있지만 상대가 북한 공작원일 경우 신변안전이 어렵다』며 『당분간 全가족과 함께 집을 떠나는 것이 좋겠다』고 말해, 조심한 적도 있다.
李韓永씨가 살해됐던 분당 아파트는 아파트 단지 안에서 가장 외곽에 위치했고, 아파트 뒤는 경부고속도로와 바로 연결돼 있었다. 살해하고 현장을 빠져나가기가 아주 용이했다. 살해 현장은 14층짜리 아파트의 맨 꼭대기 층으로서, 거주하는 사람외에는 출입자가 없는 한적한 곳이었다.
이 아파트는 엘리베이터 양쪽에 두 집이 마주보는 구조였는데 계단으로 통하는 곳에 문이 설치돼 있는 점이 특징이었고, 복도의 전등은 센서가 설치돼 사람이 들어서면 켜지고 사람이 없으면 꺼지게 되어 있었다.
계단으로 통하는 문을 열고 나가면 옥상으로 올라가는 사다리가 놓여 있었다. 사다리를 타고 들어가보자 불도 없이 깜깜한 곳에 보일러용 관이 들어 있었다. 사람 몇 명은 너끈히 숨을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런데 수사기관에서는 이 공간에 대해 조사를 하지 않고 있었다. 초동수사가 엉성하게 이뤄지고 있음을 직감했다.
李韓永씨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아파트 초인종을 누르는 순간, 계단으로 통하는 문 뒤에 숨어서 대기중이던 북한 공작원 2명으로부터 기습을 받았다. 북한 공작원은 李씨를 향해 총 세 발을 쏘았다. 그러나 경찰은 현장에서 발견된 탄피 두 개를 근거로 두 발을 쏘았다고 발표했다. 총알 두 발은 머리와 가슴에 박힌 상태로 발견되었다. 나머지 총알 한 발은 나중에 李씨가 입고 있던 점퍼 안에서 발견됐다. 이 총알은 북한 공작원이 최초로 쏜 것으로, 李씨가 입고 있던 두꺼운 공군 파일럿 점퍼의 지퍼에 맞아 점퍼속에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李씨가 살았던 아파트의 건넛집에 살고 있던 주민은 사건 당시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 비디오 폰으로 밖을 보니 괴한 한 명은 李씨를 붙잡고 다른 한명이 李씨에게 총을 쏘았다』고 말했다. 동행한 對共 수사관은 현장 상황과 목격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피격 당시를 이렇게 추정했다.
『문 뒤에 숨어 있던 북한 공작원들이 문을 열고 나오자 李씨가 그쪽을 쳐다보았을 것이다. 북한 공작원은 李씨의 심장을 겨냥, 한 발을 쏘았으나 지퍼에 맞았다. 공작원이 소지한 권총은 22구경으로서 가까운 거리가 아니면 살상력이 떨어진다. 놀란 李씨가 반항하자 공작원들이 달려들어 저항하지 못하도록 하는 과정에서 소란이 벌어진 것으로 보인다. 첫 공격에 실패한 북한 공작원들은 권총을 李씨의 머리와 가슴에 바싹 대고 발사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는 계단을 통해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 대기해 놓은 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통해 빠져 나간 것으로 보인다』
『내 아들의 억울한 죽음 누가 호소해주나』
기자는 對共수사관과 함께 14층에서 지하 1층 주차장까지 뛰어서 내려가며 시간을 재보았다. 57초였다. 설령 아파트 경비원이 연락을 받았다 하더라도 14층까지 올라오기 전에 탈출이 가능했다.
李씨 앞집에 살던 사람이 비디오 폰으로 복도 밖에서 벌어진 살해 장면을 지켜보았다는 진술은 수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비디오 폰 안에 살해장면이 녹화돼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아파트는 현대건설에서 지었기 때문에 비디오 폰은 현대전자 제품일 가능성이 높았다. 현대전자 관계자에게 비디오 폰을 통한 녹화와 재생 가능성을 물어보았다.
그는 『아파트에 설치되는 비디오 폰에는 마이크로칩이 들어있는데, 이 마이크로칩에 화상이 녹화된다. 문제는 마이크로칩이 들어있는 비디오 폰을 설치하려면 별도 돈을 내야 한다는 점이다. 마이크로칩이 설치된 비디오 폰이라면 우리 기술로 화면을 재생할 수 있다. 당사자가 동의한다면 우리 기술진이 가서 떼오면 된다』고 말했다.
기자는 이 사실을 수사기관에 알리고 비디오 폰 조사를 부탁했다. 잘하면 李씨를 살해한 북한 공작원들의 얼굴을 확보할 수 있었다. 수사기관은 기자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비디오 폰을 조사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李韓永씨 살해사건에 대한 우리 정부의 수사는 소극적이었고 북한을 자극하는 발표는 가급적 하지 않았다.
李韓永씨 어머니 成蕙琅씨는 「등나무 집」이란 책에서 아들 李韓永씨 살해사건은 「지금도 未(미)해명」이라며 「불쌍한 내 아들의 그 억울한 죽음을 내가 호소해주지 않는다면 누가 해주랴」라고 썼다.
成蕙琅씨는 이 책에서 자신과 서울에 살고 있던 아들간의 국제전화를 주선한 본 기자를 비난했다.
<분별을 잃을 정도로 가난한 내 아들을 부추켜 전화를 걸게 하고 그것을 녹음하여 「특종의 명성」을 노린 상업주의 언론이 붙어 앉아 시킨 전화라는 것을 나는 알지 못했다. 이때 내 아들에게 전화를 걸게 하고 감청한 녹음 테이프가 거침없이 남한 일간지들에 공개되었다는 것을 나는 오랜 뒤에야 알게 되었다. 감청 내용을 팔아 「특종」의 명성을 날린 기자가 있는가 하면, 그 뒤에서 내 아들은 도덕적으로 참패당했고, 14년 만에 죽은 줄 알았던 아들과 나눈 「우리만의 말」, 엄마와 아들의 정은 무참히 능욕당했다. 정말 이래도 되는 건가!>
李韓永씨와 첫 만남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잃은 成蕙琅씨의 심정을 모르는 바 아니나, 상업적 목적으로 기사를 쓰지 않았다는 점은 밝히고 싶다. 기자는 1995년 10월 초, 조선일보사를 찾아온 李韓永씨를 처음 만났다. 金正日의 전처 成蕙琳의 오빠 성일기씨가 서울에 살고 있는 것을 알고 「金正日 처남 서울에 살고 있다」는 기사를 쓴 게 인연이 되었다. 초면의 李씨는 서울에 사는 成蕙琅씨의 오빠 성일기씨의 딸과 동행했다. 이렇게 해서 기자는 李씨의 신분을 믿을 수 있었다.
李씨가 기자를 찾아온 것은 급히 돈 500만원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일주일 안에 이 돈을 마련하지 못하면 李씨는 형사처벌을 받게 되어 있었다. 서울에 온 이후 李씨가 살아온 날들이 너무나 가슴아파 기자는 500만원을 만들어 주었다. 그때 기자는 李씨에게 『돈은 갚지 않아도 좋다. 대신에 이모(成蕙琳)가 살고 있는 모스크바 아파트의 주소와 전화번호를 알려 달라』고 부탁했다.
당시 기자는 모스크바에 거주하던 前 북한 문화상 許眞(허진·작고)씨로부터 『成蕙琳씨 남매가 모스크바에 살고 있는데 남과 북이 아닌 제3국 기자와 인터뷰할 용의가 있다』는 이야기를 성균관대 李命英(이명영·작고) 교수를 통해 듣고 있었다. 成蕙琳씨 인터뷰를 추진하고 있는 상황에서 李韓永씨가 등장하자 그에게 주소를 물었던 것이다. 李씨가 알고 있는 주소는 14년 전의 것이어서 成蕙琳씨가 지금도 그곳에 살고 있다는 보장이 없을 때였다.
아들을 향한 어머니 사랑
그리고 그 자리에서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모스크바에 국제전화를 걸기로 했던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李씨의 어머니 成蕙琅씨가 전화를 받은 것이다. 14년 만의 전화통화에서 南에 있는 아들과 北에 있던 어머니가 서로를 의심하는 힘든 과정을 거쳐 서로의 존재를 확인했을 때 그 옆에 있던 기자도 눈물을 흘렸다. 아들과 어머니의 통화는 그것 자체가 특종기사였으나 기자는 이를 기사화하지 않았다.
그 당시 기자가 기사로서 욕심을 낸 부분은 金正日의 전처 成蕙琳씨의 肉聲(육성)을 잡는 것이었다. 세계적인 독재자 金正日의 아내 목소리는 세계적인 특종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언니 成蕙琅씨와 아들간의 통화는 그 내용이 아무리 애끓는 것이라 해도 기사 비중에서 약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때까지 李씨의 신분은 공개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기사 욕심에 아무리 눈이 어두운 기자라 할지라도 공개할 경우, 개인의 신변안전과 직결되는 사안은 非공개가 원칙이며 어쩔 수 없이 공개할 경우에는 철저하게 익명으로 처리하는 것이 기자의 윤리이기도 하다.
李씨는 계속해서 기자의 사무실에 와서 모스크바와 국제전화를 가졌다. 그 과정에서 어머니 成蕙琅씨로부터 서방으로 탈출하겠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이 바람에 상황이 180도 달라졌다. 북한이 싫어 서방으로 오겠다면 어떤 식으로든 도와주고 싶었다.
그래서 기자는 안기부에 모스크바와 통화 사실을 알리고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를 상의했다. 당시 안기부는 李씨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어서 논의하는 것 자체를 거절했다. 그러나 아들과 어머니간의 통화내용 녹음을 듣고난 뒤 도와주겠다고 했다.
成蕙琅씨는 책에서 「내가 탈북하려고 한다는 것을 남한 당국에 전하면 살 길이 막힌 내 아들을 보살펴주겠지 하고 타산했다」며 탈북은 「의도적」으로 흘린 말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 통화를 옆에서 들으며 녹음했던 기자는 탈북 발언이 결코 의도적이라 생각지 않는다. 서울에서 사업에 실패하여 집도 없이 헤매는 아들을 향한 어머니의 목소리는 비탄에 젖어피를 토하는 듯했고, 그 목소리에는 한없는 아들 사랑이 담겨 있었다.
그 바람에 서울에 사는 成蕙琅씨의 오빠 성일기씨와 안기부 관계자가 모스크바를 방문, 成씨로부터 탈북 의사를 최종 확인하고 탈북 날짜는 成씨 뜻에 따라 정해졌던 것이다.
李韓永씨가 모스크바의 어머니와 첫 통화를 한 1995년 10월 초부터 成蕙琅씨가 모스크바를 탈출한 1996년 1월5일까지 석달 동안 기자는 단 한 줄의 기사도 쓰지 않았다. 모스크바를 탈출한 成蕙琅씨 일행의 신변이 안전하다는 것을 확인한 후인 1996년 2월13일에 처음으로 「金正日 전처 성혜림씨 일행 서방탈출」이란 기사가 보도됐던 것이다.
「탈북한 북한 로열패밀리의 최측근」이란 사람이 보낸 팩스에 따르면 金正日의 전처 成蕙琳씨는 현재 러시아 모스크바 교외의 한 安家에 머물며 신병치료를 계속하고 있다고 한다.
경남 창녕의 成씨 문중에서 만석지기의 딸로 태어난 成蕙琳씨는 부친 成有慶(성유경)씨가 월북하면서 따라 갔다. 북한에서 영화배우로 이름을 날리던 成蕙琳은 월북작가 이기영의 아들과 결혼했으나 金正日의 눈에 띄면서 남편과 이혼하고 金正日과 같이 살았다.
성혜랑은 그의 책에서 동생 성혜림과 金正日의 부부생활을 이렇게 묘사했다.
<성혜림은 밖에서는 수줍어도 집에서는 우스운 소리를 잘하는 익살꾼이었다. 사람 흉내 잘 내는 것은 그 애의 가장 큰 장기였다. 연출과를 졸업한 혜림이는 단순한 배우만이 아니라 영화전문가였다.
영화를 좋아하던 그(金正日)에게서 혜림의 전문가적 견해는 지식이 되어 주었고 그의 영화지도를 내조하였다. 영화라는 매체가 없었다면 그들은 만날 수도 없었고 좋아할 수도 없었다. 성혜림이 아름다움 하나로 그에게 선택된 것은 아니다>
성혜림은 金正日과 사이에 아들 김정남을 나았으나 金日成으로부터 결혼을 인정받지 못해 우울증에 빠진다. 김정남을 낳고 몇 년 지나지 않아 남편 金正日이 다른 여자를 맞자 成蕙琳은 불면증, 신경쇠약증, 불안발작 등 더욱 심한 우울증에 빠져 1974년부터 모스크바로 가, 병치료를 하며 살았다.
成蕙琅씨가 모스크바를 탈출할 때 成蕙琳도 스위스까지 동행했다가 모스크바로 돌아갔다. 成蕙琅씨는 책에서 여동생 成蕙琳을 두고 자기 혼자만 모스크바를 탈출하였다고 주장했으나 成蕙琳이 스위스까지 동행한 사실은 모스크바를 다녀왔던 안기부 직원이 탈출한 成씨 일가의 소재를 파악하기 위해 金正日의 스위스 별장에 국제전화를 걸어 成蕙琳과 통화하면서 확인되었다. 그후 成蕙琳의 행방은 알려지지 않았다.
金正日과 같이 사는 고영희
제 3국에서 보낸 前記 팩스에 따르면 金正日의 첫째 부인은 成蕙琳(63)이며, 두번째가 김영숙(50), 세번째는 고영희(47)라고 한다. 남한 사회에서 金正日의 공식 부인으로 알려진 김영숙은 두 딸과 함께 북한 호위사령부 초대소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납치된 영화배우 崔銀姬씨는 북한에서 김영숙을 만난 적이 있다고 했는데 成蕙琅씨는 책에서 「崔銀姬씨가 만난 사람은 김영숙이 아니고 성혜림」이라고 주장했다. 그 대목을 옮기면 이렇다.
<崔銀姬가 소개받았다는 동평양 「관저의 아내」, 「우리 집사람은 아무 것도 모르는…」 그것은 성혜림이었다. 의도적으로 최은희가 빗맞추었는지는 몰라도 그 집에서 정남과 그 애 어머니를 묘사하면서 그는 왜 정남의 어머니를 김영숙으로 판단했는지?
『저를 도와주세요. 사모님 저를 돌려 보내주세요』
혜림의 침실에서 무릎에 매달려 그녀는 애원하며 울었다. 물론 취해서 침실로 데리고 들어갔을 때다. 뒤따라 들어온 공주 김경희(김정일의 여동생)가 『최선생, 진정하세요. 여기가 얼마나 선생에게 살기 좋은 세상?』 운운하며 체제의 우월성을 선전하자 그는 취한 것을 빙자하고 경희 엉덩이를 차밀면서 『시끄럽다. 나가라』 자존을 과시했다. 혜림이를 본 서울 사람은 최은희 하나이다>
북한 상층부에서 金正日의 공식 부인으로 인정받으며 金正日과 같이 살고 있는 여자는 고영희다. 코가 커서 「방치코」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고영희는 金正日과 사이에 김정철(18), 김정운(16), 김일순(12) 등 2남 1녀를 낳았다. 이들은 金正日의 장자 김정남의 이복동생들이다. 고영희는 강원도 원산, 황해도 신천, 평안북도 창성, 양강도 삼지연, 함경남도 함흥 등지에 관저를 갖고 있다고 한다.
팩스에 따르면 고영희는 2000년 12월26일 신병치료차 고려항공 소속 金正日의 전용기편으로 북경에 도착, 그날 스위스 항공을 이용해 제네바에 갔다고 한다. 고영희는 오랫 동안 간질환과 乳線(유선)종양 치료를 받아왔다고 한다.
영국, 프랑스 여권을 위조
前記 팩스에 따르면 고영희의 세 자식은 스위스 베른에 유학중이며 방학 때마다 북한에서 보낸 특별항공기 편으로 평양을 내왕하고 있다는 것이다. 스위스 주재 북한대사이자 金正日의 최측근인 이철(본명 이수용·69) 대사가 동행한다고 한다. 스위스 베른 국제학교에 재학중인 김정철은 몇해 전, 일본 산케이신문 카메라에 모습이 잡혔다.
이 사건 후 이들은 베른에서 4,5㎞로 떨어진 리버필드란 곳의 초호화 2층 빌라로 이사했다고 한다. 이 별장은 제네바 주재 북한 대표부 외교관인 정일선(가명·42) 소유로 되어 있는데 정일선은 고영희의 여동생이라고 한다.
고영희를 비롯한 金正日의 가족 및 친척들은 영국 여권, 프랑스 여권, 브라질 여권 등으로 제3국을 드나드는데 브라질 여권은 1980년대 북유럽에서 마약밀매로 물의를 빚은 북한 대외연락부 공작원 김현구(가명)가 브라질 투자이민 형식으로 발급받았으며, 영국과 프랑스 여권은 위조 여권이라고 이 팩시밀리를 보낸 사람은 주장했다.
金正日의 차남 김정철은 美 프로농구(NBA)의 팬이라고 한다. 金正日은 김정철을 위하여 전국 도처의 초대소마다 농구장을 지어 주었고, 평양 신암체육관이라고 불리우는 북한 간부 전용 체육관을 개조하여 농구관으로 개축했다. 김정철의 영향으로 金正日도 농구에 관심이 크다고, 북경에서 온 이 팩스는 전했다.
살해된 李韓永씨는 경기도 광주군 오포면 광주공원묘지에 묻혀있다. 李씨의 아내는 딸 하나를 키우며 힘겹게 살아가고 있다. 李씨가 살해된 후 한국 정부는 이들 모녀를 외면했다. 李韓永씨 가족들은 『李씨가 북한공작원에 의해 살해된 점을 감안해 李씨 아내와 딸에게 국가 유공자의 혜택을 주었으면 하는 게 바람』이라고 말했다.
제3국에 살고 있는 李씨의 어머니 성혜랑씨는 1년 前에 성균관대 李命英 교수를 통해 『손녀를 보고 싶다』는 뜻을 전해 왔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23년 前이었다. 홍콩에서 북한 공작원에 납치돼 남포항에 도착한 영화배우 崔銀姬(최은희)씨는 매서운 겨울 바람이 몰아치는 선착장에서 두 남자 사이에 끼어 사진을 찍었다. 이들은 崔씨를 마중하러 남포항까지 나온 북한 金正日(김정일)의 수행원이었다.
崔銀姬씨 오른 편에는 중간 키에 퉁퉁한 남자가, 왼 편에는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남자가 섰다. 키작은 남자는 「이완기」란 이름의 북한 조사부 부장이라 했고, 왼 편은 강해룡이란 이름의 조사부 부부장이라 했다. 사진은 1978년 1월22일 오후 3시에 촬영됐다.
北측에서 찍어 崔銀姬씨에게 기념으로 준 이 사진은 崔銀姬·申相玉(신상옥)씨가 쓴 「조국은 저 하늘 저 멀리」라는 책을 통해 공개됐다. 이 사진을 입수한 한국 정보기관은 「이완기」가 북한 對外연락부장 李昌善(이창선)의 假名(가명)임을 알게 되었다. 對外연락부는 간첩 남파, 테러, 要人(요인) 암살 및 납치 전문의 對南 공작부서다.
李昌善은 북한에서 對南 사업의 영웅으로 통하는 「할머니 工作員」 정경희의 뒤를 이어 1976년에 대외연락부 책임자가 된 사람이다. 한국 정보기관은 崔銀姬씨 납치사건이 金正日의 직접 지시를 받은 북한 對外연락부가 실천에 옮겼고, 기획·실무 책임자가 李昌善이라고 결론지었다.
최근 月刊朝鮮은 「脫北한 북한 로열 패밀리의 최측근」이란 사람이 중국을 경유해 보낸 팩시밀리를 받았다. 팩시밀리 발신지는 베이징(北京)에 위치한 유명 호텔이었다.
A4용지 다섯 장 분량의 이 팩시밀리에는 金正日의 세 아내-成蕙琳(성혜림), 김영숙, 고영희-의 최근 근황과 金正日 자식들의 근황, 그리고 李韓永(이한영)씨 살해사건의 내막이 적혀 있었다. 李韓永씨는 金正日의 전처 成蕙琳의 언니 成蕙琅(성혜랑)씨의 아들로 1982년 한국으로 귀순했으나 1997년 북한 공작원에 의해 살해되었다.
李昌善은 金日成-金正日-김정남 3代에 걸친 忠僕
팩시밀리에는 金正日이 자식들을 공부시키기 위해 구입했다는 스위스 별장의 주소를 비롯해 북한 최고 권력층 내부 동향이 적혀 있었다. 이름과 직책도 구체적으로 적시돼 있었다. 지금까지 거의 공개되지 않은 내용이었다. 金正日의 여자 관계는 북한에서도 최고 기밀로 취급돼 일반인들은 그 내용을 알 수 없다.
이 팩시밀리를 對北(대북) 정보기관 관계자들에게 보여주고 내용의 진위여부를 물었다. 관계자들은 『90% 이상이 사실로 보인다. 특히 일반인들로서는 접근이 불가능한 북한 軍部의 정보기관 책임자들 이름이 정확하게 적혀 있다』면서 『金正日 주변의 로열패밀리가 아니면 알 수 없는 내용들이다』고 평가했다.
내용 중에서 가장 충격적인 것은 李韓永(40)씨 살해사건이 金正日의 아들 김정남(30)의 지시로 중앙당 사회문화부 부장 李昌善에 의해 자행되었다는 대목이다. 살해를 지시한 김정남은 金正日과 成蕙琳의 소생이고, 살해당한 李韓永씨는 김정남 어머니의 언니 아들이다. 이 提報(제보)가 사실이라면 결국 李韓永씨 살해사건은 이종 동생이 이종 형을 죽인 꼴이다.
김정남의 지시를 받아 이를 실행에 옮겼다는 「사회문화부 부장 李昌善」은 23년 전, 金正日의 지시를 받아 영화배우 崔銀姬씨 납치를 자행한 그 사람이다. 정보기관의 한 관계자는 『李昌善은 1925년 11월25일 전남 순천에서 태어났다. 스무 살에 金日成의 호위병이 되었고, 그후 對南 테러 전문가로 활동했다. 지금도 金正日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李昌善은 金日成-金正日-김정남 3代(대)에 걸친 忠僕(충복)이었다.
팩시밀리에는 李韓永씨 살해사건의 전말이 이렇게 기록돼 있다.
<金正日의 처조카인 李韓永이 手記(수기) 「대동강 로열패밀리 서울 잠행 14년」을 펴냈을 때 김정남은 자기의 해외 채널을 이용하여 金正日보다 먼저 책을 입수하였다고 한다. 김정남은 그후 인민무력부 문화연락실(북한 軍部내의 對南 공작부서) 장봉림 장군을 만나 李韓永을 제거하라는 지시를 준다. 김정남은 『李韓永을 죽이지 못하면 그 우종창이라는 기자라도 없애버리라』는 지시를 주었다고 한다.
이럴 때 보면 김정남은 버마 랑군 테러를 지시하던 金正日을 꼭같이 연상케 한다. 그후 장봉림이 김정남의 「명령」을 집행하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자 김정남은 아버지 몰래 같은 지시를 중앙당 사회문화부 李昌善에게 주었으며, 결과 사회문화부에서 「새끼 장군님」(편집자 주:金正日의 아들 김정남에 대한 북한 내부의 호칭)의 명령을 「집행」한 것이다.
「새끼 장군님」의 명령을 집행하지 못한 장봉림은 김정남이 인민군 보위사령부(남한의 기무사와 같은 軍內의 정보기관이자 金正日의 최고 독재수단-북한에서는 공포의 대명사로 불리고 있다) 김장성 부사령관에게 지시하여 간첩혐의로 체포, 숙청해 버렸다는 說도 있다>
테러범이 외교사절로 변신
李韓永씨는 1997년 2월15일 밤, 분당 아파트의 대학 선배 집으로 들어가다가 괴한이 쏜 권총 2발을 머리와 가슴에 맞고 살해되었다. 범인은 체포되지 않았다. 살해사건 7개월 후인 1997년 10월27일 안기부가 부부간첩 최정남(35), 강연정(28·체포 후 음독자살)을 체포하면서 李韓永씨를 살해한 괴한은 남파된 북한 공작원임이 확인되었다.
안기부는 1997년 11월20일 부부간첩 사건 발표에서 『남파간첩 최정남을 조사한 결과, 李韓永씨 피격 사망사건은 북한 사회문화부 소속 테러 전문요원인 「최순호」 등 2명의 특수 공작조가 사건 발생 한달 전에 남파돼 일으킨 사건으로 나타났으며, 이들은 북한으로 귀환한 뒤 영웅 칭호를 받았다』고 밝혔다.
부부간첩 사건은 1997년 대통령 선거 직전에 발표돼 북한 공작원이 李韓永씨를 살해했다는 내용은 크게 보도되지 않았다.
한국 정보기관 자료에 따르면 李韓永씨 살해를 지휘한 李昌善은 金日成 훈장을 두 차례나 받은 對南 공작과 협상 전문가였다. 그는 1960년에 북한 문화성 선전국장이 되고 1961년 黨 중앙위 선전선동부 부부장을 지냈다. 1973년 南北 연락대표회의 때 북측 대표단의 일원이었고, 1979년에는 북측의 민족통일준비위원회 대표 자격으로 南北접촉에 임했다고 한다.
李昌善은 崔銀姬ㆍ申相玉씨 탈출사건이 발생한 1986년 5월, 문화예술부 부장직에서 철직되었으나 실각된 것은 아니었다고 정보기관 관계자가 말했다. 李昌善은 金日成 사망시 국가장의위원으로 모습을 드러냈고, 1995년 2월 吳振宇(오진우) 인민무력부장 사망시에도 국가장의위원을 맡았다.
나이 70세가 되던 1995년, 李昌善은 재차 사회문화부 부장을 맡아 사회문화부가 대외연락부로 개칭되던 1997년 8월까지 對南 공작을 전담했다. 李韓永씨 살해사건은 이 기간중에 일어났다.
사회문화부는 간첩들을 특수 교육시키는 「초대소」를 운영한다. 대한항공 858기 폭파사건을 일으킨 金賢姬(김현희)도 초대소 출신이다. 사회문화부 산하 기관으로는 ▲문화예술부 ▲봉화정치대학 ▲남한지역 담당課 ▲남한사회 지도계층 담당課 ▲해외 담당課 등이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사회문화부는 노동당 비서국 對南 사업담당 비서의 지휘를 받는다. 對南 담당비서가 북한의 對南 공작 총책이다. 金大中 대통령이 金正日과 남북정상회담을 할 때 배석했던 金容淳(김용순)이 현재 對南 담당 비서를 맡고 있다. 對南 담당 비서는 사회문화부를 비롯, 국가안전보위부, 통일전선부, 인민무력부 등을 지휘한다(앞 페이지 도표 참조).
祖平統(조평통)이라 불리는 북한의 조국통일평화위원회는 통일전선부 산하 對南 공작기관인데, 통일전선부 산하에는 ▲남북회담課 ▲남조선 연구소 ▲만경봉 92호 등이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국가안전보위부 산하에는 미국·중국·러시아를 상대하는 해외 反探局(반탐국)과 남조선 담당局, 그리고 盜聽局(도청국) 등이 있다고 한다.
한국 정보기관은 李昌善의 동정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사회문화부장에서 물러난 李昌善은 1998년 2월12일 金正日 탄생 56돌을 기념하는 중앙연구 토론회에 참석했다고 북한의 조선중앙방송이 보도했다. 조선중앙방송 보도에 따르면 李昌善은 1999년 9월9일 「조선 근로자대표단」단장 으로 중국을 방문, 9월19일 평양에 도착했으며, 2000년 5월4일에도 같은 직책으로 중국을 방문했다.
李昌善은 세계를 경악시킨 崔銀姬씨 납치사건과 李韓永씨 살해사건을 주도한 테러범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독일 교포 吳吉男(오길남)씨 일가의 越北을 주도한 것으로 한국 정보기관은 파악하고 있다. 정보기관 관계자는 『吳吉男씨의 밀봉 교육을 李昌善이 담당했다』고 말했다. 이같은 테러범 李昌善이 지금은 북한 근로자를 대표한다는 「외교사절」로 변신, 중국을 무대로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金正日의 아들 김정남이 李昌善에게 李韓永씨 살해를 지시하게 된 결정적 동기로 작용한 것은 「대동강 로열패밀리 서울 잠행 14년」이란 책이다. 이 책에는 기쁨조를 비롯한 金正日의 문란한 사생활이 적나라하게 폭로돼 있다.
이 책이 나온 뒤 李씨는 본 기자에게 『金正日과 관련된 부분은 가급적 말하지 않으려고 했으나 출판사에서 요구해 그 부분이 많이 들어갔다. 金正日 위원장이 보면 매우 기분나빠 할 것이다. 보복을 당할까 겁난다』고 말하며 불안해 했었다.
金日成 부자에 대한 비난은 북한 사회의 최고 禁忌(금기) 사항이다. 남한 사회에 숨어있는 親北(친북) 세력들도 정체를 위장하기 위해 북한 사회나 북한체제를 비판하는 척은 하지만 어떤 경우든 金日成 부자의 이름을 거명하며 욕하지 않는다. 기자는 독일에서 지식인인양 위장하여 활동하는 북한 공작원들을 독일에서 만난 적이 있는데 이들 역시 북한체제는 비판해도 金日成 부자에 대해서는 욕하지 않았다.
「대동강 로열패밀리 서울 잠행 14년」은 1996년 6월7일 동아일보에서 출간했다. 그 8개월 후 李韓永씨는 살해됐다. 이 책의 저자는 李韓永씨로 되어 있으나 동아일보 출판부장이었던 金大坤(김대곤)씨가 대필했다. 金씨는 東亞日報를 퇴직하고 지금은 청와대 공보수석실에서 국내 언론담당 비서관으로 있다.
金씨는 『李韓永씨가 국내에서 총맞아 죽을 정도로 행동하거나 원한을 산 적이 없기 때문에 그가 피격된 직후부터 북한의 소행임을 의심하게 되었다』면서 『북한의 金正日이 책 내용에 분노해 李씨를 죽음으로 몰고간 것은 상식』이라고 말했다.
살해 지시자에 대해 金씨는 『金正日은 북한의 최고 통치자인데 그런 위치에 있는 사람이 자신의 조카뻘인 李씨를 살해하라고 직접 지시했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金正日과 관련된 내용은 동아일보측에서 요청했다는 李韓永씨 주장에 대해 金씨는 『남한에 와서 들은 것보다는 북한에서 직접 경험한 것만 이야기해달라고 요구한 적은 있으나 金正日 부분을 유독 강조한 적은 없다』고 말했다.
「작은 김정일」로 불리는 김정남
살해를 지시한 김정남은 1971년생이다. 이 김정남에 대해 「탈북한 북한 로열패밀리의 최측근」이란 사람은 前記의 팩시밀리에서 이렇게 적었다.
<김정남씨는 남한 언론들에 소개된 바와는 다소 틀리는 점도 있으나 유년 시절에 대한 증언은 서방으로 탈출한 成蕙琅씨의 증언이 정확하다. 귀순자 강명도씨(편집자 注:북한 총리 강성산의 사위로 알려진 사람) 자서전 「북한은 망명을 꿈꾼다」에 쓴 것처럼 (김정남이) 평양 고려호텔에서 총기 난동을 부린 것은 사실과 맞지 않다. 그러나 (김정남의) 성질이 金위원장(金正日)을 꼭 닮아 가끔 화가 나면 권총을 잘 뺀다는 것은 사실이다.
김정남씨는 현재 평양 15호 관저에 부인과 아들하고 살고 있다. 신병설, 알콜중독설, 성혜림 서방 탈출 보도 이후 숙청설은 사실과 무관하다. 김정남씨는 아버지인 金正日에게 컴퓨터를 다루도록 권장하는 등 컴퓨터와 인터넷에 능하며 북한 권력층과 군부 소장파들로부터 신망이 높아 실제로 후계자론까지 거론되고 있으나 고영희(편집자 注:金正日의 세번째 아내) 세력의 저항도 만만치 않아 권력싸움의 희생물로 될 수도 있다는 것이 측근들의 견해다.
김정남씨는 成蕙琅씨가 최근 남한 월간지 「여성중앙」과의 인터뷰에서 밝힌 것처럼 프랑스어, 영어, 로어(러시아어) 등 세 가지 어학을 소유하고 있으며, 취미는 사냥, 사격, 여행이다. 남한 인터넷에 지난해 김정남씨가 미모의 여자들과 어울려 유럽 등지를 여행한 사실이 있다고 한 것은 사실이다. 남한 정보 당국은 북한 金正日 위원장의 가족들에 대해서 비교적 정확한 정보를 얻고 있는 듯싶다.
김정남은 金위원장의 공식 부인이나 다름없는 고영희(47)씨의 제압이 있음에도 북한 권력 요직에 있는 일부 최고위층 및 군부 핵심 인물들과의 인맥이 좋은 편이어서 실제 「작은 김정일」로 불리고 있다. 북한 고위 엘리트들 가운데서 김정남은 「새끼 장군님」으로 불리며 김정남의 주변을 두고는 「새끼 비서실」이라고 부른다. 金正日 총비서의 서기실(남한의 비서실과 같은 것)이 현재 북한을 좌우하는 권력의 핵심인데 비추어 김정남과 그의 주변 세력 역시 무시 못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김정남은 자기 어머니 서방탈출 보도가 있은 뒤 심경이 매우 불안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가 제일 고심하였던 것이 자기 아버지와의 관계였을 것이다. 그러나 김정일은 김정남에게 『나에게만 충실하면 일 없다』는 한 마디로 정남의 심경을 달래주었다고 한다>
탈북자 유○○씨는 북한에 있을 때 김정남을 옆에서 목격한 사람이다. 유씨는 1998년까지 북한의 외화벌이 기관인 「38호실」 산하 「○○자재과」에서 근무했다. 「38호실」은 金正日의 비자금을 관리하는 「39호실」 산하 기관으로 외화상점과 외국인 전용 호텔을 운영하며 송이, 꿀, 성게 알 등 북한산 토산물을 해외로 수출하는 곳이라고 유씨는 말했다.
유씨는 1995년 봄, 평양 고려호텔 커피숍에서 김정남을 목격했다. 밤 9시 무렵이라고 한다. 고려호텔에는 1층과 지하에 커피숍이 각각 1개씩 있는데 김정남은 1층 커피숍에 나이 든 남자와 같이 앉아 있었다고 한다.
『나는 김정남과 등을 대고 커피숍에 앉아 있었다. 김정남은 50이 넘은 남자와 마주 앉아 있었다. 처음엔 김정남인 줄을 몰랐다. 그런데 김정남이 나이든 어른에게 「그랬나?」 「그 영감 일은 참 안 됐어」하며 반말을 하기에 어떤 사람인가 싶어 쳐다보게 되었다. 나이에 비해 조숙해 보였고, 잘 먹고 살이 쪄서 재일교포인줄 알았다.
커피숍 복무원에게 「저 젊은이가 누구기에 어른에게 반말하느냐」고 물어보았다. 복무원은 신경쓰지 말라고 하면서 「선생님의 아들」이라고 말했다. 「선생님의 아들」은 북한 젊은이들 사이에 통용되는 김정남에 대한 隱語(은어)다. 「장군님 아들」이라면 바로 신분이 드러나니까 「선생님의 아들」이라고 불렀다.
김정남은 머리를 바싹 치켜서 짧게 깎았고 양복 차림이었다. 키나 체형은 金正日을 빼다 박았다. 아버지를 닮아 김정남도 머리통이 컸다. 나처럼 대학을 나온 북한 젊은이들은 김정남이 아버지 金正日의 말도 안 듣는 자식으로 알고 있다. 김정남은 학교에 다니지 않고 교수들을 관저로 불러 개인교습을 받은 것으로 안다. 김정남은 술도 잘 먹고 난동기가 심한 사람으로 북한 사회에 알려져 있다』
―김정남은 고려호텔에 자주 나타났습니까.
『저는 그때 처음 보았고, 복무원 말은 자주 온다는 것이었어요』
―김정남이 술에 취해 고려호텔 나이트클럽에서 권총을 쏘고 난동을 부렸다는 말이 있는데요.
『난동기가 심하다는 말은 들었으나 권총 사건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한번은 김정남이 여자 친구를 만나기 위해 제 마음대로 국경을 넘어 중국에 갔다 온 일이 있다는 말은 들었습니다』
―김정남이 金正日의 후계자가 될 것 같습니까.
『金正日은 金日成의 후광을 워낙 많이 입었기에 후계자가 가능했습니다. 북한 사람들이 아무리 바보라 해도 김정남이 金正日의 후계자가 되기는 힘들 것으로 봅니다』
―김정남이 권력은 갖고 있습니까.
『국가보위부 內의 실력자라고 들었습니다. 국가보위부에 잡혀간 사람이 있었는데 그 가족들이 김정남에게 잘 이야기해 풀려나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본사가 濠洲에 있고, 평양에 지사를 두고 있는 어느 기업체의 간부는 김정남의 고려호텔 총기사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평양 지사 직원으로부터 들은 얘기다. 1993년 무렵인데 고려호텔 지하 디스코텍에서 술을 먹던 김정남이 갑자기 권총을 꺼내들고 천정을 향해 발사했다는 것이다. 사람은 다치지 않았다고 했다. 고려호텔에 투숙중인 외국인들이 총소리에 깜짝 놀라고 난리가 났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다가가니까 김정남은 승용차를 타고 사라졌다. 그가 타고간 승용차에 「빨간 별판」이 붙어 있었다고 목격자들이 얘기했다. 「빨간 별판」은 장군들이 타고 다니는 차다. 김정남은 아버지 金正日을 닮아서 총을 잘 다루고 사격술도 뛰어난 것으로 알고 있다』
북경에 있는 김정남의 「해외채널」
김정남은 李韓永씨의 책 「대동강 로열패밀리 서울 잠행 14년」을 자신의 「해외 채널」을 이용하여 金正日보다 먼저 구입한 것으로 되어 있다. 중국 북경에 거주하는 한 사업가는 김정남의 「해외채널」과 관련해 이렇게 말했다.
『김정남의 친구라는 북한인이 1996년에 북경에 사무실을 냈다. 40대로 추정되는 이 친구라는 사람은 수시로 북경에 나온다. 북한에서 골동품을 갖고 나와 팔기도 하고 북한에서 조립한 컴퓨터를 일본에 보내는 일도 한다. 돈이 굉장히 많은 사람이다. 이 친구라는 사람에 따르면 김정남은 컴퓨터 전문가다. 김정남이 일본에 가서 컴퓨터 공부를 했다는 말도 들었다』
정보기관 관계자는 『김정남의 측근이란 사람들이 북경, 상해, 마카오 등지에 수시로 나온다』며 『김정남 친구가 운영하는 북경 사무실이 김정남의 해외채널 본거지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서방으로 탈출한 成蕙琅씨는 2000년 12월26일에 출간된 「등나무집」이란 책에서 김정남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이래저래 비밀노출을 엄단하느라고 정남은 울타리 바깥 세상과 철저히 격리된 상태에서 단 한 명의 친구도 없이 어울려 뛰어노는 즐거움을 모르고 기형적으로 키워지고 있었다. 정남이는 갈 곳이 없었다. 합법적으로(金正日에게 욕 안먹고) 갈 수 있는 데는 병원밖에 없었다. 옥류관 국수도 집에 받아다만 먹을 수 있었다.
정치에 바빴던 그의 아버지(金正日)는 아들을 방임하였으며 교육을 시키지 않았다. 그는 무제한적인 권한과 호사속에서 어머니의 사랑도, 걱정도 그 누구의 간섭도 없이 본능만이 성장하였다. 그의 장점에 속하는 너그러움, 남을 좋게 대해주고 싶어하는 선심, 인정 깊음은 그의 타고난 성격, 혈통에 속한다고 본다. 그를 나쁜 인간으로 보게하는 과격함, 까다로움 등은 후천적 성격이라고 나는 보았다. 무제한 권력, 非교육, 어머니의 부재, 그 사회의 권위주의가 만든 성격이다. 이렇게 상반되는 성격은 그에게서 종잡기 힘든 난해한 기질로 표현되기도 한다. 정남이 목소리는 제 아버지를 꼭 닮아 그 애가 울화통을 터뜨리는 소리는 제 아버지 고함과 같았다>
1942년 生인 金正日은 올해 환갑이다. 그는 30대에 金日成에 의해 후계자로 지목돼 지금까지 북한을 통치하고 있다. 환갑을 맞은 金正日으로서는 자신의 후계자를 생각해야 될 때인 것 같다.
국내에서 金正日 후계 문제를 최초 거론한 사람은 안기부 3차장 嚴翼駿(엄익준·작고)씨다. 嚴차장은 2년 전, 외신특파원들과의 간담회에서 「김정남이 국가보위부에 근무하며 후계자 수업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정보기관의 한 관계자는 『김정남의 직책에 대해 북한이 공식적으로 발표한 것은 없다. 우리는 김정남의 계급이 「명예 장령(장군)」이며, 金正日이 아들을 軍 지도자로 키우고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여러 정보를 종합해 보면, 김정남은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않고 폐쇄적인 환경에서 자라나 모든 것을 자기 위주로 생각하며, 아버지 金正日을 닮아 즉흥적이며 급한 성격의 소유자로 추정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종 형을 죽이라는 상식밖의 지시도 내릴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李韓永씨 살해 현장 답사
李韓永씨 살해사건이 발생했을 때 기자는 對共 수사관과 함께 현장을 세밀히 조사했다. 이 사건은 기자 입장에서 「남의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1982년 한국으로 귀순해 14년 간 신분이 노출되지 않았던 李씨의 존재를 최초 공개하고, 李씨와 모스크바에 살고 있던 李씨의 어머니 成蕙琅씨와의 국제전화를 주선한 사람이 본 기자이기 때문이다.
14년 만에 이뤄진 이 전화가 계기가 되어 成蕙琅씨는 1996년 1월 서방으로 탈출하게 된다. 金正日의 아들 김정남이 李韓永씨 살해 지시를 내릴 때 『이한영을 죽이지 못하면 우종창이란 기자라도 없애버려라』며 본 기자의 이름을 거명했다는 것도 이러한 관계 때문이다.
李韓永씨 살해사건 발생을 전후해 기자에게도 이상한 조짐이 있었다. 살해사건 발생 며칠 전부터 누군가가 기자의 집에 전화를 걸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몇 분 간 수화기를 들고 있는 일이 계속됐다. 괴전화는 반드시 오후 7시 정각에 걸려왔다.
아내로부터 이상한 전화가 온다는 연락을 받고 기자는 오후 7시에 문제의 괴전화를 직접 받았다. 『여보세요』 『말씀하세요』를 여러 차례 반복했지만 상대방의 숨쉬는 소리만 전화기 속에서 들려 올 뿐이었다. 이런 상태가 5분 이상 계속되었다. 상대방은 말만 하지 않았을 뿐 계속 전화기를 들고 있었다.
그러던 중 李韓永씨 살해 사건이 발생했다. 안기부에 괴전화 사실을 알렸더니 『경찰관을 보내줄 수는 있지만 상대가 북한 공작원일 경우 신변안전이 어렵다』며 『당분간 全가족과 함께 집을 떠나는 것이 좋겠다』고 말해, 조심한 적도 있다.
李韓永씨가 살해됐던 분당 아파트는 아파트 단지 안에서 가장 외곽에 위치했고, 아파트 뒤는 경부고속도로와 바로 연결돼 있었다. 살해하고 현장을 빠져나가기가 아주 용이했다. 살해 현장은 14층짜리 아파트의 맨 꼭대기 층으로서, 거주하는 사람외에는 출입자가 없는 한적한 곳이었다.
이 아파트는 엘리베이터 양쪽에 두 집이 마주보는 구조였는데 계단으로 통하는 곳에 문이 설치돼 있는 점이 특징이었고, 복도의 전등은 센서가 설치돼 사람이 들어서면 켜지고 사람이 없으면 꺼지게 되어 있었다.
계단으로 통하는 문을 열고 나가면 옥상으로 올라가는 사다리가 놓여 있었다. 사다리를 타고 들어가보자 불도 없이 깜깜한 곳에 보일러용 관이 들어 있었다. 사람 몇 명은 너끈히 숨을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런데 수사기관에서는 이 공간에 대해 조사를 하지 않고 있었다. 초동수사가 엉성하게 이뤄지고 있음을 직감했다.
李韓永씨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아파트 초인종을 누르는 순간, 계단으로 통하는 문 뒤에 숨어서 대기중이던 북한 공작원 2명으로부터 기습을 받았다. 북한 공작원은 李씨를 향해 총 세 발을 쏘았다. 그러나 경찰은 현장에서 발견된 탄피 두 개를 근거로 두 발을 쏘았다고 발표했다. 총알 두 발은 머리와 가슴에 박힌 상태로 발견되었다. 나머지 총알 한 발은 나중에 李씨가 입고 있던 점퍼 안에서 발견됐다. 이 총알은 북한 공작원이 최초로 쏜 것으로, 李씨가 입고 있던 두꺼운 공군 파일럿 점퍼의 지퍼에 맞아 점퍼속에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李씨가 살았던 아파트의 건넛집에 살고 있던 주민은 사건 당시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 비디오 폰으로 밖을 보니 괴한 한 명은 李씨를 붙잡고 다른 한명이 李씨에게 총을 쏘았다』고 말했다. 동행한 對共 수사관은 현장 상황과 목격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피격 당시를 이렇게 추정했다.
『문 뒤에 숨어 있던 북한 공작원들이 문을 열고 나오자 李씨가 그쪽을 쳐다보았을 것이다. 북한 공작원은 李씨의 심장을 겨냥, 한 발을 쏘았으나 지퍼에 맞았다. 공작원이 소지한 권총은 22구경으로서 가까운 거리가 아니면 살상력이 떨어진다. 놀란 李씨가 반항하자 공작원들이 달려들어 저항하지 못하도록 하는 과정에서 소란이 벌어진 것으로 보인다. 첫 공격에 실패한 북한 공작원들은 권총을 李씨의 머리와 가슴에 바싹 대고 발사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는 계단을 통해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 대기해 놓은 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통해 빠져 나간 것으로 보인다』
『내 아들의 억울한 죽음 누가 호소해주나』
기자는 對共수사관과 함께 14층에서 지하 1층 주차장까지 뛰어서 내려가며 시간을 재보았다. 57초였다. 설령 아파트 경비원이 연락을 받았다 하더라도 14층까지 올라오기 전에 탈출이 가능했다.
李씨 앞집에 살던 사람이 비디오 폰으로 복도 밖에서 벌어진 살해 장면을 지켜보았다는 진술은 수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비디오 폰 안에 살해장면이 녹화돼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아파트는 현대건설에서 지었기 때문에 비디오 폰은 현대전자 제품일 가능성이 높았다. 현대전자 관계자에게 비디오 폰을 통한 녹화와 재생 가능성을 물어보았다.
그는 『아파트에 설치되는 비디오 폰에는 마이크로칩이 들어있는데, 이 마이크로칩에 화상이 녹화된다. 문제는 마이크로칩이 들어있는 비디오 폰을 설치하려면 별도 돈을 내야 한다는 점이다. 마이크로칩이 설치된 비디오 폰이라면 우리 기술로 화면을 재생할 수 있다. 당사자가 동의한다면 우리 기술진이 가서 떼오면 된다』고 말했다.
기자는 이 사실을 수사기관에 알리고 비디오 폰 조사를 부탁했다. 잘하면 李씨를 살해한 북한 공작원들의 얼굴을 확보할 수 있었다. 수사기관은 기자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비디오 폰을 조사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李韓永씨 살해사건에 대한 우리 정부의 수사는 소극적이었고 북한을 자극하는 발표는 가급적 하지 않았다.
李韓永씨 어머니 成蕙琅씨는 「등나무 집」이란 책에서 아들 李韓永씨 살해사건은 「지금도 未(미)해명」이라며 「불쌍한 내 아들의 그 억울한 죽음을 내가 호소해주지 않는다면 누가 해주랴」라고 썼다.
成蕙琅씨는 이 책에서 자신과 서울에 살고 있던 아들간의 국제전화를 주선한 본 기자를 비난했다.
<분별을 잃을 정도로 가난한 내 아들을 부추켜 전화를 걸게 하고 그것을 녹음하여 「특종의 명성」을 노린 상업주의 언론이 붙어 앉아 시킨 전화라는 것을 나는 알지 못했다. 이때 내 아들에게 전화를 걸게 하고 감청한 녹음 테이프가 거침없이 남한 일간지들에 공개되었다는 것을 나는 오랜 뒤에야 알게 되었다. 감청 내용을 팔아 「특종」의 명성을 날린 기자가 있는가 하면, 그 뒤에서 내 아들은 도덕적으로 참패당했고, 14년 만에 죽은 줄 알았던 아들과 나눈 「우리만의 말」, 엄마와 아들의 정은 무참히 능욕당했다. 정말 이래도 되는 건가!>
李韓永씨와 첫 만남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잃은 成蕙琅씨의 심정을 모르는 바 아니나, 상업적 목적으로 기사를 쓰지 않았다는 점은 밝히고 싶다. 기자는 1995년 10월 초, 조선일보사를 찾아온 李韓永씨를 처음 만났다. 金正日의 전처 成蕙琳의 오빠 성일기씨가 서울에 살고 있는 것을 알고 「金正日 처남 서울에 살고 있다」는 기사를 쓴 게 인연이 되었다. 초면의 李씨는 서울에 사는 成蕙琅씨의 오빠 성일기씨의 딸과 동행했다. 이렇게 해서 기자는 李씨의 신분을 믿을 수 있었다.
李씨가 기자를 찾아온 것은 급히 돈 500만원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일주일 안에 이 돈을 마련하지 못하면 李씨는 형사처벌을 받게 되어 있었다. 서울에 온 이후 李씨가 살아온 날들이 너무나 가슴아파 기자는 500만원을 만들어 주었다. 그때 기자는 李씨에게 『돈은 갚지 않아도 좋다. 대신에 이모(成蕙琳)가 살고 있는 모스크바 아파트의 주소와 전화번호를 알려 달라』고 부탁했다.
당시 기자는 모스크바에 거주하던 前 북한 문화상 許眞(허진·작고)씨로부터 『成蕙琳씨 남매가 모스크바에 살고 있는데 남과 북이 아닌 제3국 기자와 인터뷰할 용의가 있다』는 이야기를 성균관대 李命英(이명영·작고) 교수를 통해 듣고 있었다. 成蕙琳씨 인터뷰를 추진하고 있는 상황에서 李韓永씨가 등장하자 그에게 주소를 물었던 것이다. 李씨가 알고 있는 주소는 14년 전의 것이어서 成蕙琳씨가 지금도 그곳에 살고 있다는 보장이 없을 때였다.
아들을 향한 어머니 사랑
그리고 그 자리에서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모스크바에 국제전화를 걸기로 했던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李씨의 어머니 成蕙琅씨가 전화를 받은 것이다. 14년 만의 전화통화에서 南에 있는 아들과 北에 있던 어머니가 서로를 의심하는 힘든 과정을 거쳐 서로의 존재를 확인했을 때 그 옆에 있던 기자도 눈물을 흘렸다. 아들과 어머니의 통화는 그것 자체가 특종기사였으나 기자는 이를 기사화하지 않았다.
그 당시 기자가 기사로서 욕심을 낸 부분은 金正日의 전처 成蕙琳씨의 肉聲(육성)을 잡는 것이었다. 세계적인 독재자 金正日의 아내 목소리는 세계적인 특종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언니 成蕙琅씨와 아들간의 통화는 그 내용이 아무리 애끓는 것이라 해도 기사 비중에서 약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때까지 李씨의 신분은 공개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기사 욕심에 아무리 눈이 어두운 기자라 할지라도 공개할 경우, 개인의 신변안전과 직결되는 사안은 非공개가 원칙이며 어쩔 수 없이 공개할 경우에는 철저하게 익명으로 처리하는 것이 기자의 윤리이기도 하다.
李씨는 계속해서 기자의 사무실에 와서 모스크바와 국제전화를 가졌다. 그 과정에서 어머니 成蕙琅씨로부터 서방으로 탈출하겠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이 바람에 상황이 180도 달라졌다. 북한이 싫어 서방으로 오겠다면 어떤 식으로든 도와주고 싶었다.
그래서 기자는 안기부에 모스크바와 통화 사실을 알리고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를 상의했다. 당시 안기부는 李씨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어서 논의하는 것 자체를 거절했다. 그러나 아들과 어머니간의 통화내용 녹음을 듣고난 뒤 도와주겠다고 했다.
成蕙琅씨는 책에서 「내가 탈북하려고 한다는 것을 남한 당국에 전하면 살 길이 막힌 내 아들을 보살펴주겠지 하고 타산했다」며 탈북은 「의도적」으로 흘린 말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 통화를 옆에서 들으며 녹음했던 기자는 탈북 발언이 결코 의도적이라 생각지 않는다. 서울에서 사업에 실패하여 집도 없이 헤매는 아들을 향한 어머니의 목소리는 비탄에 젖어피를 토하는 듯했고, 그 목소리에는 한없는 아들 사랑이 담겨 있었다.
그 바람에 서울에 사는 成蕙琅씨의 오빠 성일기씨와 안기부 관계자가 모스크바를 방문, 成씨로부터 탈북 의사를 최종 확인하고 탈북 날짜는 成씨 뜻에 따라 정해졌던 것이다.
李韓永씨가 모스크바의 어머니와 첫 통화를 한 1995년 10월 초부터 成蕙琅씨가 모스크바를 탈출한 1996년 1월5일까지 석달 동안 기자는 단 한 줄의 기사도 쓰지 않았다. 모스크바를 탈출한 成蕙琅씨 일행의 신변이 안전하다는 것을 확인한 후인 1996년 2월13일에 처음으로 「金正日 전처 성혜림씨 일행 서방탈출」이란 기사가 보도됐던 것이다.
「탈북한 북한 로열패밀리의 최측근」이란 사람이 보낸 팩스에 따르면 金正日의 전처 成蕙琳씨는 현재 러시아 모스크바 교외의 한 安家에 머물며 신병치료를 계속하고 있다고 한다.
경남 창녕의 成씨 문중에서 만석지기의 딸로 태어난 成蕙琳씨는 부친 成有慶(성유경)씨가 월북하면서 따라 갔다. 북한에서 영화배우로 이름을 날리던 成蕙琳은 월북작가 이기영의 아들과 결혼했으나 金正日의 눈에 띄면서 남편과 이혼하고 金正日과 같이 살았다.
성혜랑은 그의 책에서 동생 성혜림과 金正日의 부부생활을 이렇게 묘사했다.
<성혜림은 밖에서는 수줍어도 집에서는 우스운 소리를 잘하는 익살꾼이었다. 사람 흉내 잘 내는 것은 그 애의 가장 큰 장기였다. 연출과를 졸업한 혜림이는 단순한 배우만이 아니라 영화전문가였다.
영화를 좋아하던 그(金正日)에게서 혜림의 전문가적 견해는 지식이 되어 주었고 그의 영화지도를 내조하였다. 영화라는 매체가 없었다면 그들은 만날 수도 없었고 좋아할 수도 없었다. 성혜림이 아름다움 하나로 그에게 선택된 것은 아니다>
성혜림은 金正日과 사이에 아들 김정남을 나았으나 金日成으로부터 결혼을 인정받지 못해 우울증에 빠진다. 김정남을 낳고 몇 년 지나지 않아 남편 金正日이 다른 여자를 맞자 成蕙琳은 불면증, 신경쇠약증, 불안발작 등 더욱 심한 우울증에 빠져 1974년부터 모스크바로 가, 병치료를 하며 살았다.
成蕙琅씨가 모스크바를 탈출할 때 成蕙琳도 스위스까지 동행했다가 모스크바로 돌아갔다. 成蕙琅씨는 책에서 여동생 成蕙琳을 두고 자기 혼자만 모스크바를 탈출하였다고 주장했으나 成蕙琳이 스위스까지 동행한 사실은 모스크바를 다녀왔던 안기부 직원이 탈출한 成씨 일가의 소재를 파악하기 위해 金正日의 스위스 별장에 국제전화를 걸어 成蕙琳과 통화하면서 확인되었다. 그후 成蕙琳의 행방은 알려지지 않았다.
金正日과 같이 사는 고영희
제 3국에서 보낸 前記 팩스에 따르면 金正日의 첫째 부인은 成蕙琳(63)이며, 두번째가 김영숙(50), 세번째는 고영희(47)라고 한다. 남한 사회에서 金正日의 공식 부인으로 알려진 김영숙은 두 딸과 함께 북한 호위사령부 초대소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납치된 영화배우 崔銀姬씨는 북한에서 김영숙을 만난 적이 있다고 했는데 成蕙琅씨는 책에서 「崔銀姬씨가 만난 사람은 김영숙이 아니고 성혜림」이라고 주장했다. 그 대목을 옮기면 이렇다.
<崔銀姬가 소개받았다는 동평양 「관저의 아내」, 「우리 집사람은 아무 것도 모르는…」 그것은 성혜림이었다. 의도적으로 최은희가 빗맞추었는지는 몰라도 그 집에서 정남과 그 애 어머니를 묘사하면서 그는 왜 정남의 어머니를 김영숙으로 판단했는지?
『저를 도와주세요. 사모님 저를 돌려 보내주세요』
혜림의 침실에서 무릎에 매달려 그녀는 애원하며 울었다. 물론 취해서 침실로 데리고 들어갔을 때다. 뒤따라 들어온 공주 김경희(김정일의 여동생)가 『최선생, 진정하세요. 여기가 얼마나 선생에게 살기 좋은 세상?』 운운하며 체제의 우월성을 선전하자 그는 취한 것을 빙자하고 경희 엉덩이를 차밀면서 『시끄럽다. 나가라』 자존을 과시했다. 혜림이를 본 서울 사람은 최은희 하나이다>
북한 상층부에서 金正日의 공식 부인으로 인정받으며 金正日과 같이 살고 있는 여자는 고영희다. 코가 커서 「방치코」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고영희는 金正日과 사이에 김정철(18), 김정운(16), 김일순(12) 등 2남 1녀를 낳았다. 이들은 金正日의 장자 김정남의 이복동생들이다. 고영희는 강원도 원산, 황해도 신천, 평안북도 창성, 양강도 삼지연, 함경남도 함흥 등지에 관저를 갖고 있다고 한다.
팩스에 따르면 고영희는 2000년 12월26일 신병치료차 고려항공 소속 金正日의 전용기편으로 북경에 도착, 그날 스위스 항공을 이용해 제네바에 갔다고 한다. 고영희는 오랫 동안 간질환과 乳線(유선)종양 치료를 받아왔다고 한다.
영국, 프랑스 여권을 위조
前記 팩스에 따르면 고영희의 세 자식은 스위스 베른에 유학중이며 방학 때마다 북한에서 보낸 특별항공기 편으로 평양을 내왕하고 있다는 것이다. 스위스 주재 북한대사이자 金正日의 최측근인 이철(본명 이수용·69) 대사가 동행한다고 한다. 스위스 베른 국제학교에 재학중인 김정철은 몇해 전, 일본 산케이신문 카메라에 모습이 잡혔다.
이 사건 후 이들은 베른에서 4,5㎞로 떨어진 리버필드란 곳의 초호화 2층 빌라로 이사했다고 한다. 이 별장은 제네바 주재 북한 대표부 외교관인 정일선(가명·42) 소유로 되어 있는데 정일선은 고영희의 여동생이라고 한다.
고영희를 비롯한 金正日의 가족 및 친척들은 영국 여권, 프랑스 여권, 브라질 여권 등으로 제3국을 드나드는데 브라질 여권은 1980년대 북유럽에서 마약밀매로 물의를 빚은 북한 대외연락부 공작원 김현구(가명)가 브라질 투자이민 형식으로 발급받았으며, 영국과 프랑스 여권은 위조 여권이라고 이 팩시밀리를 보낸 사람은 주장했다.
金正日의 차남 김정철은 美 프로농구(NBA)의 팬이라고 한다. 金正日은 김정철을 위하여 전국 도처의 초대소마다 농구장을 지어 주었고, 평양 신암체육관이라고 불리우는 북한 간부 전용 체육관을 개조하여 농구관으로 개축했다. 김정철의 영향으로 金正日도 농구에 관심이 크다고, 북경에서 온 이 팩스는 전했다.
살해된 李韓永씨는 경기도 광주군 오포면 광주공원묘지에 묻혀있다. 李씨의 아내는 딸 하나를 키우며 힘겹게 살아가고 있다. 李씨가 살해된 후 한국 정부는 이들 모녀를 외면했다. 李韓永씨 가족들은 『李씨가 북한공작원에 의해 살해된 점을 감안해 李씨 아내와 딸에게 국가 유공자의 혜택을 주었으면 하는 게 바람』이라고 말했다.
제3국에 살고 있는 李씨의 어머니 성혜랑씨는 1년 前에 성균관대 李命英 교수를 통해 『손녀를 보고 싶다』는 뜻을 전해 왔으나 실현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