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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문화부 담당기자가 본 박광수

「광수생각」이 중도 하차한 진짜 이유는 그(박광수)의 우유부단함 탓

한현우    hwha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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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 끝나는구나』
 
  지난 11월19일 일요일 오후, 「광수생각」을 담당하는 후배 기자가 내게 다가왔다.
 
  『광수 일을 여성지에서 취재해 갔대요. 그래서 본인이 아무 것도 못하겠다고 해요. 화요일자를 끝으로 접기로 했어요』
 
  나는 잠시 멍한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無名 일러스트레이터 朴光洙(박광수)가 스타 박광수로 성장하기까지의 과정, 또 그간 재미있고 즐거운 사연들부터 이런저런 불미스러운 일들까지, 朝鮮日報 안에서는 가장 잘 알고 있는 나로서는 우선 착잡한 심정이었다. 그래서 그런 소식을 듣고 난 뒤 내 입 속에선 『이렇게 끝나는구나, 결국 이렇게 끝나는구나』 하는 말만 맴돌았다.
 
  그날 오후 「광수생각이 빠진 지면을 어떻게 메울 것인가」를 놓고 회의가 열렸다. 나는 박광수의 퇴장 풍경이 너무나 맘에 들지 않아 속이 잔뜩 상해 있었다. 회의 내내 그저 건성으로 『예, 예』 하고 말았다.
 
  박광수는 현재 부인과 별거 중이다. 작년에 만난 한 여자 때문이다. 아직 이혼하지는 않았지만, 결혼하면서 마련했던 아파트는 팔았고, 자신은 오피스텔을 새로 얻었다. 부인은 아이 둘(5세, 4세)을 데리고 다른 아파트로 이사갔다.
 
  이 소식을 한 여성지가 포착했고, 박광수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다. 일단 요청을 거절한 박광수는 괜히 없는 일까지 부풀려지지 않을까 싶어 나중에 인터뷰를 자청했다. 그렇지 않아도 부인과의 불화를 비롯한 이런저런 일들 때문에 「휴식」을 원했던 박광수는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잡지에 나게 된 사실을 알면서 「광수생각 중단」을 거의 일방적으로 선언했다. 朝鮮日報에서도 차마 붙들기 어려웠다. 여성지는 남의 사생활을 까발려 이른바 「特種(특종)」을 했지만, 박광수와 수많은 광수생각 독자들은 매일 아침 만나던 만화를 잃었다.
 
  허무하달까, 섭섭하달까. 뭐라고 간단히 표현하기 어려운 복잡한 심사가 됐다. 1997년 4월4일, 박광수가 「바퀴벌레 퇴치법」이란 만화로 데뷔하던 때부터 지난 11월21일 1095회를 끝으로 막을 내릴 때까지 3년 8개월 남짓 사이에 벌어졌던 이런저런 일들이 그야말로 走馬燈(주마등)처럼 눈앞을 지나갔다.
 
 
  조선일보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만화 「광수생각」
 
  박광수를 처음 만난 건 1997년 3월의 일이었다. 당시 朝鮮日報는 「레인보우」라는 섹션 창간을 앞두고 있었다. 편집회의의 끝은 항상 「가장 조선일보답지 않은 지면」 「신문의 모든 형식을 파괴하라」 같은 「과격한」 결론이었다. 『창간호를 보고 「이게 신문이냐」 하고 내던질 정도로 한번 바꿔보라』는 주문도 나왔다. 조선일보 문화부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이고 유례없는 만화를 싣기로 하고 물색 중이었다.
 
  박광수는 당시 「페이퍼」라는 무료 월간지에 「광수만가」라는 두 페이지짜리 만화를 그리고 있었다. 이 책이 조선일보 문화부에 입수됐고, 섹션 「레인보우」 창간 준비팀의 눈을 사로잡았다. 우리는 박광수에게 연락해 『만화를 몇 개 그려와 보라』고 주문했다. 그리고 어느 날 퉁퉁한 몸집에 안경을 낀 만화 캐릭터처럼 생긴 친구가 조선일보 편집국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때 박광수는 10편 정도 만화를 그려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만화에는 저 유명한 「지금 달에는 암스트롱이 산다」부터 「바퀴벌레 퇴치법」 「채변 이야기」 등 말 그대로 「신문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만화들이 포함돼 있었다.
 
  『이 정도면 「이게 조선일보냐」 하며 집어 던질 만하다』고 판단한 조선일보 문화부는 박광수에게 만화를 주문했다. 그래서 시작된 것이 「광수생각」이다. 처음 박광수는 만화 밑에 아무런 글도 쓰지 않고 가져왔고, 맨 밑 오른쪽에 「광수만가」라는 글씨를 써왔다. 여기에 조선일보 문화부가 「광수생각」이란 이름을 달아주었다.
 
  광수생각은 그야말로 선풍적인 인기를 몰고 왔다. 특유의 유머와 따뜻한 메시지는 아침 식탁과 사무실을 훈훈하고 쾌활하게 만들었다. 팬클럽이 생겨나는가 하면, 신문 만화를 오려 암 투병중인 어머니 병상 곁에 붙여놓은 중학생이 있었다. 중학교 1학년 시험문제에 광수생각 한 편을 제시하고 「다음 만화가 암시하는 속담은?」 하는 문제가 출제되기도 했다.
 
  그에 따라 박광수의 有名稅(유명세)는 나날이 높아져갔다. 이곳저곳에서 박광수를 강사로 초청하기 시작했고, 다른 일간지에 비슷한 포맷 만화들이 하나 둘씩 생겨났다. 급기야 FM 라디오 프로그램을 시작으로 광수생각은 신문 지면을 뛰쳐나와 전파매체로 옮아갔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건 그가 처음으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하던 날이다. 그날 나는 취재 건으로 대전에 출장중이었다. 일과가 끝나 저녁식사를 마치고 충남도청 주차장에 차를 세우던 참이었다. 내 휴대전화가 울렸다.
 
 
  보통사람에서 인기인으로
 
  『형(나보다 두 살 어린 박광수는 늘 나를 「형」이라고 불렀다), 나 조금 있으면 라디오에 나와요』
 
  『그래? 내가 꼭 들어볼게. 떨리지 않냐?』
 
  『떨리죠. 그런데 라디오니까 다행이에요. 그렇죠?』
 
  『그럼, 너는 TV 나가는 순간 팬이 절반으로 줄어들 거야』
 
  『그런데 ×××라는 프로그램이 KBS예요, MBC예요? 어딘지 몰라서 방송국에 갈 수가 없네』
 
  『야, 너 그것도 모르고 지금까지 있었어? 그럼 어떡해?』
 
  『에이, 그쪽에서 연락이 오겠죠, 뭐』
 
  이런 실없는 농담이 오가는 車 안에서 나는 얼마나 뿌듯했는지 모른다. 내가 광수생각에 기여한 것이라곤 그의 만화를 배달받아 신문제작 과정에 넘긴 역할밖에 없지만, 어찌됐든 조선일보 「광수생각 담당기자」로서 그의 「전파매체 출연」은 나에게도 무척 즐거운 일이었다.
 
  이후로 그는 슬슬 TV에 출연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정미홍이 만난 사람」 같은 프로그램에 「단발성」으로 초청받았고, 조금 지나니까 이런저런 프로그램에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다. 1997년 11월엔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한국성폭력상담소가 PC통신 상에서 가진 「성폭력 토론회」에 대통령 후보들과 나란히 참여하기도 했다.
 
  이렇게 저렇게 얼굴이 알려지자 박광수는 점점 유명세를 체감해갔다. 종로통에서 그가 좋아하는 떡볶이를 같이 사먹다가 옆에 있던 사람들에게 눈짓받는 것을 시작으로, 나는 박광수가 「보통사람」에서 「인기인」이 돼 가는 것을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었다. 그의 말대로, 그렇게 퇴짜맞던 미국 비자도 유명해지면서 바로 나왔다.
 
  주점이나 음식점에서 사인을 해주느라 할 이야기를 방해받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 한번은 서울 교보문고에서 그의 사인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슬쩍 놀러간 일이 있었다. 그는 대충 사인하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각각 다른 내용의 「짧은 그림 편지」를 써주는 것으로 이름났다. 20대 남녀가 책을 내밀면 『애인이세요?』하고 묻는다. 그쪽에서 『예』하는 대답이 돌아오면, 이름을 묻고 책 안 표지에 이렇게 쓴다.
 
  「영희야, 철수가 너 무지무지 사랑하고 좋아한대. 밥 많이 먹고 똥두 잘 싸고 꼭꼭×2 행복해야 돼. 2000. 12. 광수의 영희 생각」
 
  결국 「새로운 사랑」 때문에 그의 생활도 혼란스러워지고 만화도 중단됐지만, 곁에서 보기에 그는 보기 드물게 부인과 아들 딸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가족 이야기를 만화로 옮기길 즐겼고, 이런 만화는 그런 가족 구성원을 갖고 있는 家長(가장)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그는 TV 출연과 초청 강의를 좋아했다. 아무리 먼 지방도시라도 찾아가 1~2시간 특강을 하고 그곳 학생들과 어울려 식사를 하거나 술자리를 함께 하기 좋아했다. 누구에게나 그런 속성이 있겠지만, 박광수는 특히 「박 선생」 같은 호칭을 들으며 어깨가 많이 으쓱해졌던 것 같다. 문제는 그러면서 만화의 「打率(타율)」이 낮아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내가 직접 경험했거나 주변에서 들은 이야기를 전해주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PC 통신 유머를 만화로 옮겨 그리기를 즐겼다. 나는 이걸 썩 맘에 들어 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뜯어말리지도 않았다. 그 스스로도 『시중에 나도는 유머를 만화로 표현하는 게 순수 창작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표절이라고 할 수도 없지 않느냐』고 주장했고, 나 역시 시사만화도 아닌 만화를 매일 그려야 한다는 게 여간 어렵지 않은 일임을 알기에 나마저 그에게 「표절 스트레스」를 주고 싶지는 않았다.
 
 
 
타의로 시작한 직업 - 만화가

 
  내가 아는 한 박광수는 애초 「만화가」가 아니었다. 다만 만화에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는 사람일 뿐이었다. 그가 조선일보에 스카우트되기 전까지의 활동 역시 「만화」가 主業은 아니었다.
 
  그는 단국대학교에서 시각디자인을 공부했다. 다른 과목 성적은 영 좋지 않아서, 농담인지 진담인지 『엄청나게 공부를 못해서 재수해서 본 학력고사 성적이 100점(만점 340점)도 안 나왔다』고 말한 적도 있다.
 
  그는 예전에 주변 도움으로 작은 작업실을 하나 마련해서 음반 디자인, 공연 포스터 디자인 같은 대중문화와 관련된 디자인과 잡지 일러스트레이션 작업을 生業으로 삼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현재 「페이퍼」 편집장인 황경신씨가 기자로 일하던 한 잡지의 독자 사은 이벤트에 참여하게 됐다. 그 이벤트란 독자 몇 명을 뽑아 호주 여행을 보내주는 것이었는데, 「내가 호주에 가야만 하는 이유」를 써서 잡지사에 보내야 했다. 박광수는 자신이 호주 여행에 참여해야 하는 이유를 만화로 그려보냈다. 이 만화가 걸작이었다.
 
  만화에 반한 그 잡지 편집진은 박광수를 호주에 보내 주었고, 호주 여행 이후 그에게 『우리 잡지에 만화를 그려보지 않겠느냐』고 해서 월간 만화 연재를 맡겼다. 그후 어떤 이유로 그 잡지가 폐간되면서 황경신씨는 월간 「페이퍼」로 옮기게 됐고, 박광수를 이 잡지의 「편집위원」으로 데려갔다. 결국 박광수가 돈을 받고 만화를 그리게 된 것은 自意라기보다 他意에 가까웠다. 나는 박광수의 썩 유쾌하지 않은 조선일보 퇴장이 바로 이런 점에서 비롯됐다고 본다. 그는 만화보다는 디자인에 더 관심이 많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만화적 상상력과 친밀감을 주는 線(선) 처리, 「광수체」라고 이름까지 붙어 상용화된 그의 만화적 글씨체는 분명 커다란 장점이었다. 특히 조선일보 문화부가 높이 샀던 부분은 色에 대한 그의 타고난 感(감)이었다. 올 컬러 만화에서 색감은 매우 중요했다. 박광수는 이 부분을 거의 완벽하게 커버해주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썰렁하다」고 반응했던 한 컷짜리 만화들도, 色感(색감)면에서는 훌륭한 교범 역할을 하기도 했다는 것이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실제로 「월간 디자인」이란 잡지 1998년 1월호는 박광수를 「차세대 디자이너」 15명 가운데 1명으로 선정하고, 1997년 한 해 디자인계 5大 뉴스에 「광수생각」을 꼽았다. 그런 박광수가 어느 날 조선일보에 만화를 연재하면서 「만화가」로 변신한 것이다.
 
  박광수 스스로도 『만화를 직업적으로 그릴 줄은 몰랐고, 지금도 그러고 싶지는 않다』고 늘 말해왔다. 그런 그가 어떻게 일간지 연재만화를 선택했을까.
 
  그는 1998년 4월 「광수생각 첫 돌」 특집 지면에 실린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우스갯소리처럼 들리겠지만 저는 꽤 클 때까지 우리나라 신문은 조선일보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특별한 사연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아버지께서 습관처럼 줄곧 조선일보만을 보셨기 때문이었지요. 신문에 연재를 하면서 가장 기뻤던 일은, 속만 썩혀드렸던 막내아들이 아버지가 늘 보시는 신문에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는 자랑스러움이었습니다」
 
 
  『내가 알아서 잘 할게요』
 
  박광수가 TV에 고정출연하면서부터 나는 그를 여러 번 찾아가 만났다. 그의 방송활동을 말릴 생각은 없었지만, 「만화를 본업으로 생각한다면 만화에 일단 모든 걸 쏟아붓고, 남는 시간에 다른 활동을 해야한다」는 게 내 주장의 요지였다. 나는 보통 이렇게 이야기했다.
 
  『네가 만화를 열심히 그려야 하는 건 분명히 너를 위해서 필수적인 일이야. 네가 방송에 나가는 것도, 네가 광고 만화를 그리거나 캐릭터 사업을 생각하는 것도 「광수생각」이 있기 때문이잖아. 그렇다면 네가 다른 사업이나 활동을 하지 않고 만화만 열심히 그려도 돈을 벌거나 할 기회는 저절로 찾아오게 돼 있어. 매일 네가 그린 만화가 그렇게 큰 사이즈로 신문에 찍혀 250만 부씩 배달되는 거잖아. 그렇다면 네가 뭘 한다 해도 돈을 들여서 광고를 낼 필요도 없고. 네 만화의 인기가 떨어지면, TV에서 널 부를 일도 없고 광고도 들어오지 않을 거야. 대학이나 기업체에서 특강해달라고 하지도 않을 것이고』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걸 딱 질색하는 박광수는 그때마다 『형, 알았어요. 내가 알아서 잘 할게요』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그는 잘 알아들은 것 같지도 않았고, 실제 알아서 잘 하지도 않았다. 그는 굉장한 고집불통이었다.
 
  1998년 10월 「예비군 훈련 불참」을 이유로 경찰서에 들락거리다 불구속 입건됐을 때, 나는 그에게 크게 화를 냈다. 이미 예비군 훈련을 반복해서 불참하면 처벌받을 수 있음을 수 차례에 걸쳐 경고했던 터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박광수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인간형이었다. 내가 수차 전화해 『지난번에 안 간 거 또 안 가면 큰일 난다』고 말하면, 『에이, 다음 번에 받으면 되는 것 아니에요?』 하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리고 나서 또 불참해 그 이유를 다그치면, 『걱정 말아요. 벌금 얼마 내면 될 거예요』 하고 전혀 근거 없는 대꾸를 했다.
 
  난생 처음 경찰서에서 조서를 쓰고 구속영장까지 신청되는 경험을 한 박광수는 나만 쳐다보고 있는 형국이었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수사가 어떻게 진행되나 지켜보는 일밖에 없었다. 구속영장이 신청되던 날 박광수의 부인은 나에게 전화를 걸어 『이제 어떻게 되는 거냐』면서 엉엉 울기도 했다.
 
  이 사건은 박광수의 도덕성에 커다란 흠집을 낸 첫 사건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는 짚고 넘어가야겠다. 박광수의 예비군 훈련 불참은 물론 잘못이지만, 타 신문·방송들은 정확한 사실 확인 절차 없이 「박광수, 입건 이후에도 또 예비군 훈련 불참」이란 誤報(오보)를 쏟아냈다.
 
  예비군 훈련이란, 정해진 기회에 참가하지 않으면 향토예비군 설치법에 따라 처벌을 받게 된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예비군 훈련이 돌아오면 또다시 별개의 件으로 취급받는다. 박광수가 「입건 후에도 예비군 훈련 불참」이란 오보 직격탄을 맞은 것은, 이미 오래 전 훈련 불참 건으로 구속이 되느냐 마느냐 하는 와중에, 최근 훈련 불참이 순차적으로 고발 절차를 거쳐 다시 입건 대상이 됐기 때문이었다.
 
  결국 「숱한 예비군 훈련」에 불참한 것은 사실이지만, 「입건 후에도 불참」한 것은 아니었다. 『도대체 몇 번이나 빠졌냐』는 물음에 『몰라요, 한 열 번 되나?』 하고 대답하는 「무디고 더딘」 박광수이긴 하지만, 도하 각 언론에 기사가 난 뒤에도 예비군 훈련에 불참할 만큼 강심장인 사람은 아니다.
 
 
 
무척 감성적이고 약한 사람 박광수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수생각의 인기는 쉽게 식을 줄 몰랐다. 그의 만화에 그의 짧은 글을 붙이고, 그가 직접 디자인한 단행본 「광수생각」 1권은 총 40여 만 권이나 팔렸다. 이 책을 내놓은 출판사는 숱한 출판사와 총판이 쓰러진 IMF 와중에 거의 유일하게 성공한 출판사가 됐다. 이 단행본은 3권까지 출간됐다.
 
  사실 요즘도 가끔 잠자리 들기 전 이 단행본 「광수생각」을 읽으며 상념에 잠기곤 한다. 어쩜 그렇게 기발하고 독특한 만화가 많은지 박광수의 재주가 너무나 아깝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더 집요하게 말리고 설득하지 못한 나 자신을 책망도 해 본다. 그런 생각이 「조선일보가 박광수를 스카우트하지 않았다면 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겠지」 하는 데까지 이르면 책임감 같은 것도 느낀다.
 
  개인적으로 박광수라는 인간을 조금 안다고 생각하는 나는, 그의 조선일보 데뷔부터 부인과의 별거, 그리고 조선일보 퇴장에 이르는 모든 과정이 그의 독특한 캐릭터에서 비롯됐다고 생각한다. 그는 철저하게 非논리적이고 약속과 규율에 무감각한 사람이다.
 
  그는 마감시각을 안 지키기로 유명하다. 그는 광수생각 담당 기자는 물론, 만화가 실리는 지면의 편집자를 비롯해 여러 사람을 괴롭혔다. 마감시각이 생명과도 같은 신문사에서는 당연히 「해고」 대상이었다. 그러나 그를 조금씩 알아가면서 그의 이런 행동은 거의 「습관」처럼 굳어져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 다음부터는 그를 재촉하거나 그에게 화를 내지 않았다. 게다가 연락이 한번 끊기면 도저히 찾아낼 수가 없어서, 마감시간에 연락이 안 될 때면 그의 집과 사무실, 휴대전화, 호출기, 本家(본가)에까지 전화를 걸곤 했다.
 
  그는 또 합리적이지 못한 사람이다. 예를 들어, 아주 최근까지 그는 만화를 그린 파일을 E메일로 보내지 않고 사람을 시켜 배달했다. 내가 『인터넷 전용선을 깔고 E메일로 보내면 돈도 절약되고 시간도 절약되니까 그렇게 하자』고 제의한 건 이미 3년 전쯤이다.
 
  그는 또 게으르다. 광수생각 2주년이던 1999년 4월, 그와 그의 부인, 나 이렇게 셋이서 9박10일간 미국 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다. 이 여행에서 그와 나는 얼굴을 붉히고 언쟁을 했다. 그는 아침부터 한식을 꼭 먹어야겠다는 것이었고, 나는 낯선 곳에서 낯선 음식을 먹을 수도 있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그는 샌프란시스코 금문교에 가서 『미국까지 와서 왜 다리를 구경하느냐』고 말했고, 가까운 거리도 걸으려 하지 않아 택시를 타야만 했다.
 
 
  『광수야, 나는 그래도 네 편이다』
 
  하지만 박광수는 무척 감성적이고 약한 사람이다. 그가 한 대기업의 광고를 그린 적이 있다. 그런데 그 광고 계약에 「동종 업계 다른 회사 광고를 그리면 위약금을 물어낸다」는 조항이 있었다. 그런데 다른 동종 업계 타 회사 직원의 잘못으로 그 조항을 위반하게 됐다. 『이것이 내 잘못이란 걸 회사에서 알게 되면 난 해고당한다』는 담당 직원 호소에, 박광수는 광고 개런티로 받은 1000만원을 위약금으로 내놓아 담당 직원의 자리를 지켜주었다.
 
  그는 항상 자기 만화를 통해 「따뜻함」을 전달하고 싶어했다. 때로 한 편의 추상화 같은 만화들이 독자들을 어리둥절케 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따뜻함」을 박광수 식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그의 의도처럼 『만화가 따뜻해서 좋다』는 반응이 나타날 때 그는 가장 큰 보람을 느끼곤 했다.
 
  그는 또 아주 가정적인 사람이다. 이번 일을 계기로 내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분도 계시겠지만, 나는 그가 아직도 가정적인 사람이라고 믿는다. 그는 늘 부인과 아들-딸 이야기를 했으며, 그의 모든 가족은 일요일마다 항상 본가에 모여 식사를 했다. 그리고 만화에 늘 가족 이야기가 등장했다. 그는 줄곧 『돈 많이 벌어서 모든 식구들이 마당 넓은 집에서 배드민턴 치면서 사는 게 소원』이라고 말해왔다. 사실 이런 것이 소원인 사람은 생각보다 그리 많지 않다.
 
  그가 「허락되지 않는 사랑」을 함으로써 중도 하차를 했지만, 나는 이것이 그의 잘못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의 非논리성과 우유부단함, 감성에 치우친 판단, 자르거나 거절하지 못하는 성격이 일을 이렇게 몰고 왔다고 본다. 잘못된 판단, 잘못된 선택은 그가 늘 해오던 것이다. 모든 사람이 그렇듯이.
 
  11월 21일자 그의 마지막 「광수생각」은 이런 내용이었다. 두 사람이 산에 오른다. 힘들여 정상에 오르고 보니 태극기를 가져오지 않았다. 할 수 없이 태극기를 포기하고 두 사람은 만세를 부른다. 그리고 만세를 부른 자세로 눈을 맞고 굳어져 버린다. 그는 밑에다 이렇게 썼다.
 
  「태극기를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이제 하산하겠습니다. 광수생각」
 
  박광수가 이 만화를 그리면서 얼마나 고민을 했을까 생각하니 가슴 한 구석이 찡해졌다. 너무나 하고 싶은 말이 많았을 그는, 이 만화에서 웅변보다 더 많은 메시지를 주고 있는 것이다.
 
  3년 8개월간 박광수는 나를 즐겁게도 해주고 속상하게도 한 친구였다. 나는 그와 함께 떠들고 웃고, 또는 다투면서 늘 그렇게 말했다. 『광수야, 나는 그래도 네 편이다』라고. 그도 늘 『형은 정말 내 편인 것 같애』라고 말했다. 지금 생각해봐도 그런 것 같다. 나는 여전히 박광수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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