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미수 혐의로 구치소에 갇힌 「英雄」
偶像(우상)은 무너졌다. 反日(반일)의 상징으로 金大中 대통령을 비롯 金泳三 前 대통령 등 대한민국의 내로라 하는 명망가들이 日本 정부에 그의 석방을 탄원했을 뿐만 아니라 한때 언론에 의해 英雄(영웅)으로 떠받들어졌던 재일동포 무기수 출신의 權禧老(권희로·72)씨. 그는 지금 치정극에 휘말린 피의자가 되어 차디찬 겨울을 구치소에서 보내고 있다. 구속 사유는 현주건조물방화와 살인 미수. 감옥에서도 일본에 굴하지 않고 민족 차별에 항의하며 용감하게 싸웠다는 그의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그의 구속 사유는 너무나 어처구니없고 믿기 힘든 것이었다. 게다가 70代의 노인이 가정이 있는 40대 여자와의 사랑 때문에 그런 일을 저질렀다니 더욱 기가 막힐 일이었다.
2000년 9월3일, 權씨는 귀국 1주년을 며칠 앞두고 화려하게 스포트라이트를 받던 귀국 당시와는 정반대의 모습으로 취재진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경찰 조사를 받는 피의자 신분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날 오전 10시, 權씨는 부산 범일동 소재 H아파트를 찾았다. 내연의 여인으로 알려진 朴모(43) 여인의 집이었다. 朴여인의 집을 찾는 權씨의 손에는 끝 부분에 식칼을 청테이프로 묶어 고정시킨 길이 1m가 넘는 나무 막대기와 칼날길이 10cm, 손잡이 13cm 길이의 등산용 칼이 들려 있었다. 朴여인과 자신의 사랑을 가로막는 朴여인의 남편 安모(지렁이 양식업·46)씨를 살해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경찰 조서). 權씨는 들고 간 칼로 安씨의 팔과 다리를 찔러 전치 10일의 상처를 입히고, 거실과 안방에 있는 장롱 등에 불을 지르는 등 1시간 가량 소동을 벌였다. 소동 중에 잠옷 바람으로 있던 朴씨도 찰과상을 입었고 權씨 자신도 턱 밑 부분을 심하게 다쳤다.
사건이 발생하기 나흘 전인 2000년 8월30일에도 權씨는 막대기 끝에 묶은 회칼과 휘발유 한 통을 들고 安씨를 찾아가 칼을 가슴에 들이대는 등 소동을 벌였다. 이때는 安씨가 사건의 확대를 원치 않아 조용히 마무리되었다고 한다. 9월3일의 사건이 우발적이 아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權씨가 살았던 부산 연제구 거제동 소재 H아파트의 경비원도 權씨가 사전에 이번 사건을 준비해왔다고 증언하고 있다. 사건 발생 20일 전쯤에 權씨가 자신에게 휘발유 구입을 부탁했으나 거절한 바 있었고, 그 일주일 후쯤에 권씨가 휘발유를 사가지고 와 보관을 부탁해 거절하자 權씨가 자신의 차 트렁크에 휘발유를 보관했다고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경찰 조사에서도 權씨와 朴씨는 사건 발생 前 달인 8월25일에 인천시 연수구 옥련동 소재 한 모텔에 함께 투숙하며 安씨 살해를 공모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朴씨는 權씨와 함께 남편 살해를 공모했다는 경찰의 조사 결과를 부인하고 있으며 이같은 사실이 영장 실질심사에서 받아들여져 불구속됐다.
한국적인 상식으로는 權씨, 朴씨, 安씨의 3각 관계에서 살의를 느낄 정도로 분노를 느껴야 하는 쪽은 安씨가 돼야 한다. 그러나 이 사건에서는 거꾸로 情夫(정부)의 입장인 權씨가 安씨를 살해하려 했다. 또 權씨가 安씨를 살해했다면 그의 나이를 감안할 때 남은 여생을 감옥에서 보내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權씨는 왜 상식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는 이런 소동을 벌인 것인가. 잠시 자신은 무슨 짓을 해도 국민들의 이해를 구할 수 있으리라는 「英雄心(영웅심)이 만들어낸 착각」에 빠졌던 것일까, 아니면 원래 그런 사람이었던 것일까.
『英雄 權禧老」는 일본 좌파 지식인들에 의해 만들어졌다』(구로다 기자)
사건 발생 후 일본 언론은 權씨 사건을 주요 기사로 다루며 높은 관심을 보였다. 權씨가 귀국 후 한국에서 국민적 영웅 대접을 받는데 대해 『단순 인질 살인범에 대해 너무 지나치다』는 평가가 없잖았던 일본 언론들에게 이 사건은 호재였다. 직접 비꼬지는 않았지만 한국에서 국민적 영웅으로 떠받들여지던 權씨의 사건을 보도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한국민의 權씨에 대한 평가가 잘못돼 있다는 지적을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었다.
산케이(産經)신문 서울 지국장 구로다 가쓰히로(黑田勝弘)기자는 權씨 사건과 관련한 일본의 분위기를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특성 때문에 직접적으로 말은 하지 않고 있지만 「코웃음 치는 분위기」라고 말할 수 있다』고 전했다. 權씨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權씨를 영웅으로 떠받들었던 일부 한국인들에 대한 비웃음이 있다는 것이다.
구로다 기자는 『「英雄 權禧老」는 한국인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실은 일본인들에 의해서 만들어졌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1968년 2월20일, 權禧老씨는 일본인 야쿠자 2명을 엽총으로 살해하고 사건 현장에서 80㎞ 떨어진 후지미야 여관에서 투숙객과 여관 주인 등을 억류하고 인질극을 벌였다. 權씨가 살해한 야쿠자는 일본에서 전국적인 규모의 조직폭력단인 이나가와구미의 지역 중간 보스쯤 되는 소가와 그의 부하였다. 權씨 주장에 따르면 그들은 권총을 보여주며 강제로 38만 엔의 차용증서를 쓰게 했고, 이 돈을 받기 위해 權씨는 물론 權씨의 어머니까지 괴롭혔다고 한다. 견디다 못한 權씨가 울분을 참지 못하고 돈을 갚는다며 카바레로 소가 일당을 불러내 살해한 것이다.
후지미야 여관에서 일본 경찰과 88시간 대치하며 權씨는 조선인에 대해 모멸적인 발언을 한 일본 경찰관의 사과를 요구하는 등 일본의 조선인에 대한 민족 차별 문제를 이슈화하는 데 성공한다.
구로다 기자는 權씨의 인질극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일본 경찰과의 대치라고 말한다. 일본 경찰과의 대치는 곧 국가 권력에 대한 도전이었고 權씨의 그런 행동은 일본의 특정 정파가 당시 가지고 있던 이념에 부합되는 것이었다는 것이다.
그 특정 정파는 1960년대 일본 사회에 폭풍처럼 몰아닥쳤던 신좌파 운동을 벌인 그룹들이다. 1960년代 말의 신좌파 운동은 급진 지식인들과 학생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특히 폭력적 학생운동에 이념적 토대가 되기도 했다.
反국가, 反체제를 내세웠던 신좌파로서는 일본 경찰과의 대치가 권력에 도전하는 영웅적 행동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權禧老는 민족 차별 문제라는 명분도 제공하고 있었다. 이런 인연으로 인질극이 끝난 후에도 일본 신좌파 지식인들은 일본 사회 內에 이 문제를 이슈화하고 특별 변호인을 선정하는 등 權씨에 대한 지원을 지속적으로 전개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특이한 점은 전통적으로 일본 좌파의 본류라고 자부해왔던 공산당이 權씨를 지원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유는 權禧老씨가 살인과 인질이라는 폭력적 방법을 동원했기 때문이다. 당시 공산당은 폭력주의를 반대하며 폭력주의에 찬성하는 신좌파와 결별한 상태였다.
재일교포들은 權씨의 민족차별 문제 제기를 쇼로 보았다
구로다 기자는 일본 지식인 사회의 權씨에 대한 지속적인 지원은 『조선을 식민 지배했다는 채무감 같은 것을 지식인 사회와 언론이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또 그는 『權씨가 재판 과정이나 감옥 생활을 통해 일본 지식인 사회와 언론의 그런 풍토를 100% 이용했다고 본다』고 덧붙였다. 일본 지식인 사회와 언론의 한반도 강점에 대한 원죄 의식이 결국은 「英雄 權禧老」 탄생의 밑거름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시해야 할 것은 당시 일본 지식인 사회의 權씨 지원 운동과 신좌파 운동이 대중 속으로 뿌리내리지 못했다는 점이다. 일본의 대중적 정서는 權씨가 살인자이자 인질범이라는 「드러난 범죄적 사실」만을 받아들였고, 그것은 權씨의 귀국시 『단순 살인·인질범에 대해 한국 언론이 너무 호들갑을 떤다』는 반응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재일교포 사회의 분위기도 일본 사회의 일반적 분위기와 비슷했던 것 같다. 權씨의 석방과 한국으로의 영주 귀국에 결정적 역할을 한 朴三中 스님은 자신이 「김희로 석방 운동」을 벌일 당시의 재일교포 사회 분위기를 이렇게 전한다.
『교포들은 권희로의 민족차별 문제 제기를 쇼라고 보는 분위기가 팽배했어요. 권희로가 어려서부터 폭행, 절도, 사기 등으로 감옥을 들락날락한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내가 구명 운동을 벌이며 그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을 때 대부분은 냉담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들은 도움을 요청하는 내게 「스님이 권희로에 대해 뭔가 잘못 알고 있다」며 내 부탁을 거절했습니다. 재일교포 누구와도 救命운동을 놓고 상의할 수 없는 분위기였죠. 나는 그때 재일교포들을 민족의식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판단하고 그들 도움 없이 救命운동을 벌여나갔습니다. 권희로씨가 귀국할 때도 교포사회는 우리 한국사회와는 달리 냉담한 반응을 보였는데 그때까지도 나는 그들의 그런 태도에 실망했고 정말 민족의식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판단이 경솔했던 것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어 안타깝습니다』
이처럼 權씨와 가까이 있어 그를 지켜볼 수 있었던 대다수의 사람들은 權씨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權씨가 형무소와 최초로 「인연」을 맺은 것은 그의 나이 14세 때로 손목시계를 훔쳤다는 이유에서다. 본인은 지금까지 그때 손목시계를 훔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후에도 그는 지갑을 훔치다 경찰서 유치장 신세를 졌고, 쌀 암거래를 하다 붙잡혀 감옥에 가는 등 자질구레한 일로 감옥을 들락거렸다. 죄목은 주로 절도, 사기, 횡령 등이었다. 이 외에도 권총으로 택시강도를 하다 붙잡혀 8년 형을 받은 기록도 있다. 이런 이력이 재일교포 사회는 물론 일본사회에 權씨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심게 된 것이다.
구로다 기자는 일본인들의 權씨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한국민 전체에 대한 부정적 인식으로 이어졌다고 주장했다. 인질극과 재판을 통해 조선인에 대한 민족 차별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權씨가 한국인의 대명사가 됐고, 이로 인해 權씨의 범죄 사실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대다수 일본인들은 한국인들이 폭력적이고 싸움만 하며 변명을 잘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 여기에다가 한국인은 책임회피를 잘 하고 가난하다는 인식도 함께 심어주었다는 것이 구로다 기자의 지적이다. 그런 이미지가 바뀐 계기가 된 것은 서울 올림픽으로서 일본인들의 對한국 이미지가 바뀌는데 장장 20년이 걸렸다는 게 구로다 기자의 주장이다.
시즈오카(靜岡) 형무소의 간수는 왜 자살했나
權씨는 감옥생활의 대부분을 구마모토(熊本) 형무소 독방에서 보냈지만 1심 재판 중에 수용돼 있던 곳은 시즈오카(靜岡) 형무소였다. 이 형무소에는 구리타 가나메라는 간수가 있었다. 그의 임무는 權씨를 감시하고 재판 때마다 權씨를 호송하는 일이었다. 1999년 11월에 발간된 權씨의 회고록 「어머니, 미움을 넘어섰어요」에서 權씨는 구리타 간수와 인간적으로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런데 1심 재판이 진행중이던 1970년 5월 구리타 간수가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해 3월27일 權씨가 법정에서 자신이 수감돼 있는 방에 흉기(칼)가 반입됐다는 사실을 폭로하자, 權씨의 감시를 담당했던 구리타가 자살을 한 것이었다. 칼 반입과 구리타 간수와는 무슨 관련이 있었을까. 權씨는 「어머니, 미움을 넘어섰어요」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1970년 4월에는 구리타 간수가 내게 또 칼 한 자루와 줄을 넣어주었다. 짜증나는 재판에 잔뜩 화가 난 내가 『칼만 있으면 저따위 소리를 지껄이는 검찰관을 죽이고 나도 그 자리에서 자결할 텐데…』라고 말하자 정말 칼을 넣어두고 간 것이었다. …구리타 간수는 왜 내게 칼과 줄을 넣어주었을까. 독약은 대체 누가 넣어주었을까. 무슨 거대한 음모가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점점 불안해졌다>
權씨는 이 책에서 『요즘도 일본 기자들이 계속 찾아와 진상을 캐묻고 있지만 지금으로서는 그 일의 숨겨진 내막을 죽을 때까지 가슴속에 묻어둘 생각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지 않은 것이다.
진실이 밝혀지지 않은 이 사건에 대한 추측은 두 갈래다. 하나는 權씨가 책에서 암시하고 있듯이 일본의 공권력이 權씨의 입을 막기 위해 칼 등을 고의로 반입시켰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權씨가 간수의 약점을 잡아 칼을 반입시켰다가 들키자 거꾸로 법정에서 흉기반입을 폭로했다는 추측이다.
산케이 신문 구로다 기자의 입장은 후자 쪽이다. 『감옥에서 하고 싶은 일을 다 했던 權씨가 생선을 구해 회를 뜨기 위해 칼이 필요해 반입했다가 들키자 변명으로 자결용 칼을 보냈다고 주장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면서 구로다 기자는 『그는 간수에게 불법을 시켜놓고 약점을 잡아 그의 협력자로 만들었다』고 덧붙였다. 구로다 기자의 주장은 많은 일본인들의 생각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權씨는 책에서 간수의 약점을 잡아 이용했다는 주장에 대해 반박하고 있다. 『당시 일본 검찰은 진상을 규명하기보다는 덮어두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시즈오카 형무소 쪽은 나에게 「검찰에 잘 말해서 刑을 가볍게 해줄 테니 민족차별 문제로 더 이상 시끄럽게 하지 말고 살인행위를 사죄하라」고 설득하면서 일종의 특별 대우를 해주었기 때문에 구리타 간수가 담배 반입 때문에 약점을 잡혔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나는 담배뿐만 아니라 감방 안에서 형무소 쪽이 마련해준 불고기판으로 고기를 구워 먹을 정도였으니까』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이 사건은 열쇠를 쥐고 있는 구리타 간수가 자살함으로써 미궁에 빠졌고, 權씨 사건을 보는 입장에 따른 「추측의 차」만 남아 있다.
감옥에서 태극기를 배경으로 한복을 입고 사진 촬영까지 할 수 있었던 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쪽의 주장이 진실에 근접하는 가를 따져볼 수는 있을 것 같다.
權씨의 경우 자신의 책에서 밝힌 대로 감옥에서 불고기판으로 고기를 구워 먹을 수 있을 정도로 갇혀 있는 상태에서도 비교적 자유롭게 생활했던 것 같다.
그 한 예가 태극기의 반입이다. 1999년 9월 權씨의 귀국을 전후로 우리 언론에는 태극기를 배경으로 한복을 입은 모습으로 사진을 찍은 權씨의 모습이 소개됐다. 감옥에서 찍은 것이고 이 사진은 그의 회고록에도 실려 있다. 감옥에서 포즈를 취하고 사진을 찍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다른 나라의 국기가 감옥에 반입돼 버젓이 걸려 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한다. 그러나 權씨가 옥살이를 한 감옥에는 분명 태극기가 있었고, 그는 죄수복이 아닌 한복을 입고 사진을 촬영했다.
구로다 기자는 이 사실을 들어 『감옥에 갇힌 김(권)희로가 자신이 원하는 모든 물건을 감옥에 들여 놓을 수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결국 칼 정도는 「김희로의 의지에 의해」 쉽게 반입이 가능했을 것이라는 주장인 것이다. 물론 이 역시 구로다 기자의 추론일 뿐이다. 분명한 것은 權씨에게는 간수의 협조든 아니면 문제가 시끄러워지기를 원치 않는 그 윗선에서의 보호든 「무언가 특별한 힘」이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결국 실마리는 구리타가 스스로 죽음을 택하며 남겼을 말에서 풀어야 할 것이다.
權씨는 회고록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사실 구리타 간수가 자살할 때 머리맡에 유서를 남겼지만, 일본 검찰은 「유서 비슷한 것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부인이 무심코 다른 쓰레기와 함께 휴지통에 버렸으며, 그 뒤 청소부가 수거해갔기 때문에 확인할 길이 없다」는 옹색한 발표로 얼버무렸다>
유서가 없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朴三中 스님은 기자에게 이런 말을 했다.
『어느 재일 교포가 자료를 보여주며 얘기해서 그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자살한 간수의 유서에는 권희로씨를 원망하는 글이 적혀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작년 귀국길에 이유야 어쨌든 그때 자살한 간수를 위해 천도제를 지내자는 이야기를 권희로씨에게 했는데 그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權씨는 그의 회고록에서 구리타 간수에 대한 감정을 이렇게 적고 있다.
<구리타의 속마음까지는 알 수 없지만, 그가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는 생각에는 지금까지 변함이 없다>
스톡홀름 증후군
오늘의 權禧老씨의 존재를 있게 한 것은 후지미야 여관에서 여관주인과 투숙객 등 13명을 붙잡아놓고 벌인 88시간 동안의 인질극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야쿠자 2명을 살해한 후 인질극을 벌이면서 민족 차별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그는 뉴스의 초점이 됐을 뿐만 아니라 뉴스를 움직일 수 있었다. 적어도 88시간 동안 그는 민족 차별이라는 명분을 가지고 자신의 의지에 의해 뉴스를 생산할 수 있었고, 그 약효는 8년여의 재판 기간을 포함한 감옥생활 31년 7개월 동안 줄곧 이어졌다.
인질극을 벌이지 않았다면 그는 단순히「범죄자를 죽인 살인범」에 지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들은 그가 인질극을 벌이기 前 사기, 절도 등으로 소년원을 포함해 20여 년을, 인질극을 일으키던 나이 마흔 살의 정확히 절반 가량을 감옥에서 보냈다는 사실을 잊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한국과 일본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영웅의 위치로 올려놓은 인질극에 대해 『인질극이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회고록에 이렇게 적고 있다.
<나는 사람들이 후지미야 여관의 그 일을 쉽게 「인질극」이라고 말하는 데에는 동의할 수 없다. 물론 무고한 사람들의 자유를 한정된 시간이지만 본의 아니게 구속한 것은 입이 열이라도 할말이 없지만, 세상에서 흔히 인식하고 있는 그런 인질극은 분명 아니었다. …재판과정에서도 그곳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스스로 「인질」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고 증언하고 있다>
權씨는 또 인질들이 자신의 입장을 이해해주었으며 심지어 기자로 가장한 경찰들이 그를 체포할 당시 「도망가라」고 소리칠 정도로 자신에게 우호적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權씨의 말대로 88시간 동안 잡혀 있던 인질들은 權씨에게 우호적인 감정을 가졌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그러나 인질들이 인질범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고 심지어 재판정에서 유리한 증언을 해주었다고 해서 인질극이 아니라는 주장은 심리학적 상식에서 어긋나는 것이다.
심리학자들은 당시 인질들이 보여준 權씨에 대한 태도를 스톡홀름 증후군(Stockholm Syndrome)이라는 심리학 용어로 설명한다. 스톡홀름 증후군이란 인질들이 자신들이 억류되던 당시의 폭력을 잊어버리고 강자의 논리에 동화돼 경찰이나 사회보다는 그들을 잡고 있는 인질범들의 편을 드는 현상을 설명하는 용어다. 이 용어는 1973년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발생한 은행 인질강도 사건에서 유래됐다.
은행 강도들이 4명의 인질을 잡고 경찰과 대치한 이 사건은 6일 동안 계속됐다. 강도 사건 발생 초기에 인질들은 강도들을 무서워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가고 강도극이 진행될수록 인질들은 강도들에게 호감을 갖게 되었고, 점차 경찰보다는 은행 강도들에게 충성하게 된다. 이러한 상태에서 인질극은 끝났다. 인질들은 경찰이 인질범들에 대한 증언을 요구했을 때 인질범들에게 불리한 증언을 전혀 하지 않았다. 심지어 한 여자 인질은 강도들 중 한 명에게 애정을 느껴 그 사건 이후 약혼자와 파혼까지 하게 된다. 이때부터 인질이 인질범들의 편을 드는 현상을 스톡홀름 증후군이라는 말로 설명하기 시작한 것이고, 이런 현상은 인질극에서 자주 발견되고 있다.
「후지미야 증후군」
페루 좌익반군 투팍아마루 혁명운동(MRTA) 게릴라들이 1996년 12월17일부터 이듬해인 1997년 4월23일까지 126일 동안 500여 명을 인질로 잡고 벌인 페루 수도 리마 일본대사관 인질사건에서도 이 같은 일이 벌어진다. 사건이 벌어지던 중 게릴라들은 인질 가운데 225명을 12월22일에 풀어주는데, 이때 풀려난 인질들 중 상당수가 투팍아마루 혁명운동 게릴라들에게 동정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행운까지 빌어주는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심리학자들은 이 사건도 스톡홀름 증후군 범주에 넣고 있으며, 때로는 사건이 벌어진 地名에서 이름을 따 「리마 증후군」으로 부르기도 한다.
심리학자들은 이런 심리변화가 세 단계를 거치며 일어난다고 설명한다. 첫 번째 단계에서 인질들은 자신들의 생사를 가름할 인질범들이 자신을 해치지 않는 것을 고마워하면서 그들에게 온정을 느끼기 시작한다. 두 번째 단계에서는 인질들은 자신들을 구출하려는 경찰들에게 오히려 반감을 느끼게 된다. 오히려 경찰의 그러한 행동이 자신들에게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마지막 단계에서는 인질과 인질범들이 동화되는 과정이다. 인질과 인질범들 사이에 함께 고립되어 있고, 두려움을 함께 하는 「우리」라는 믿음이 생겨나는 것이다.
심리학자들이 權씨의 인질극 사건에 진작 주목했다면 스톡홀름 증후군이라는 용어 이전에 「후지미야 증후군」이라는 말이 만들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權씨는 회고록에서 인질들에게 『내가 왜 아무 관계도 없는 여러분께 이런 짓을 해야만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러나 죄송하다는 말만으로 끝낼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여러분께 죽음으로 사죄할 생각입니다』라고 말했다고 적고 있다.
장동환 共譯(공역) 「심리학 입문」(박영사 刊) 672쪽에는 인질범들의 심리를 설명하는 이런 구절이 있다.
<그들의 대의명분을 위해서는 기꺼이 죽을 수도 있다고 선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흔히 자신들의 생각을 굽히게 된다. 살아남기 위해서 그들은 흔히 인질들을 해치는 행동은 삼간다>
그는 스스로를 英雄이라고 생각했다:아내에게도 선생님이라 부르도록 시켜
權禧老씨는 인질극을 벌이는 동안 일본 경찰이 『공권력에 의한 민족차별이 있었다』는 것을 시인만 했으면 곧바로 자결을 결행할 마음이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그는 자결에 실패했다. 만약 그때 權씨가 자결에 성공했다면 「英雄 權禧老」의 존재는 없었을 지도 모른다. 「英雄 權禧老」의 모습은 일본 지식인들의 도움을 받으며 진행된 8년여의 재판과 감옥 생활 31년7개월 동안 줄기차게 한국과 일본에서 진행된 구명과 석방 운동을 통해 만들어진 이미지로 보이기 때문이다. 자결을 했다면 한복을 입고 태극기를 배경으로 감옥에서 찍은 사진에서 느껴지는「烈士(열사)」 「義士(의사)」의 이미지는 아예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적어도 그는 태극기를 미리 준비한 상태에서 인질극을 벌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權씨의 주변을 취재하면서 기자는 權씨 자신도 스스로를 「英雄」으로 생각했나가 궁금했다. 자신을 英雄으로 호칭한 적은 없어도 그는 스스로를 「남들로부터 대우를 받아야 할 특별한 사람」으로 생각했던 것만은 분명하다.
權씨와는 1981년 3월부터 지난 11월 말까지 20여 년 간 법적인 부부였으면서, 2000년 2월부터 4월까지 부부로 함께 산 적이 있는 頓(돈)모(52) 여인은 『그 사람은 자기를 대단한 사람으로 여겼다』면서 『심지어 부인인 내게도 자신을 부를 때 선생님이라고 부르라고 했고, 그렇게 부르지 않으면 화를 냈다』고 말한다. 頓여인은 또 『그 사람의 영웅심은 박삼중 스님이 구명운동에 참여하면서 더 심해졌다』면서 『옥중에 있을 때 면회를 가서 한 번은 「나는 영웅이 아니고 죄인이다 하는 마음으로 있어야 석방이 빨라질 수 있다」고 했다가 그 사람이 너무 심하게 화를 내서 당황한 적이 있었다』는 일화도 소개했다. 三中 스님도 頓여인의 말을 인정했다. 三中 스님의 말이다.
『권희로씨는 자신을 안중근 의사에 견주는 영웅으로 생각했어요. 일본의 어떤 사전에 그렇게 기록돼 있다며 일제에 직접적으로 맞서 싸운 것은 자신과 안중근 의사뿐이라는 말을 하곤 했죠. 그런 마음을 갖도록 내가 부추긴 측면이 있다는 걸 인정하고 지금에 와서는 책임을 통감합니다. 후회스럽기도 하고요. 면회를 가서 권희로씨가 한국 정치인들이 싸움질 하지 말고 담합해야 일본을 물리칠 수 있다고 한국 국민에게 전해달라고 하면 내가 그의 말이 한국의 매스컴을 타도록 하고, 그 사람 이름으로 수재의연금도 내서 그의 존재를 다시 한 번 국민들에게 일깨우기도 하고 하는 식으로 민족의 영웅을 만들려고 했었죠. 그렇게 만들어진 모습을 권희로씨는 자신의 진짜 모습으로 착각했을 지도 모르지요. 한국 사람들이 그를 잊어가고 있을 때 나는 그런 식으로 그의 존재를 알렸어요. 그래야 석방 운동이 힘을 얻게 될 뿐만 아니라 민족주의자인 권희로씨를 차디찬 감옥에서 꺼내는 것은 국민을 위한 내 사명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지금은 국민들의 가슴을, 내가 결과적으로 멍들게 한 것 같아 마음이 무겁습니다』
석방을 놓고 二重的 태도로 일관하다
權禧老씨에 대한 취재를 하면서 기자가 처음으로 만난 사람은 三中 스님이었다. 權씨를 석방시키는 데 일등공신이었고, 한국사회에서 權씨를 가장 잘 아는 것으로 알려진 三中 스님을 제일 먼저 찾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를 만나러 가면서 기자는 두 사람의 인연으로 미루어 짐작컨대 權씨의 최근 사건에도 불구하고 그가 權씨를 옹호하려 할 것이라는 예단을 가졌었다. 기자를 만난 三中 스님의 첫 마디는 『누군가에게 김희로에 대해 탁 터놓고 이야기하고 싶었다』였다. 그는 할 말이 많아 보였고, 정말 할 말이 많았다.
그는 기자의 예단에서 벗어나 네 시간 가까이를 權씨에 대한 섭섭함과 석방운동을 벌인 것에 대한 후회, 權씨의 본질을 제대로 보지 못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정신적 피해를 입힌 국민들에 대한 송구스러움을 이야기하는 데 할애했다.
그는 인터뷰 내내 자기가 덧칠해 만든 權禧老라는 偶像을 하나 둘 허물어버렸다. 물론 그는 權씨가 옥에 갇히게 될 경우 한때 인연을 맺었던 사람으로서 그를 계속 도울 것이라는 입장은 분명히 했다. 다만 『權씨가 일본 형무소에 갇혀 있을 때만큼 열정적인 도움을 줄 자신이 현재로서는 솔직히 없다』는 말도 덧붙였다.
三中 스님이 털어놓는 權씨에 대한 불평의 주조는 權씨의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이었다.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이라고는 했지만, 정확히 표현하면 이중적인 성격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때(權씨 구명 운동을 할 때)는 몰랐지만」이라는 말을 단서로 붙이면서 三中 스님은 權씨의 종잡을 수 없었던 행동에 대해 이야기했다.
三中 스님은 權씨가 감옥에 있는 동안 50여 차례 그를 면회했다. 1990년부터였다. 權씨의 존재는 그에게 「꼭 구출해야 할 애국 동포」였고, 그런 마음은 權씨가 한국으로 영구 귀국할 때까지 이어졌다. 權씨의 석방을 위해 노력하면서 그는 權씨가 석방되기 위해서는 行刑(행형) 성적이 좋아야 한다고 판단하게 됐다. 權씨는 行刑 성적 중 최하위인 4급에 자주 머물러 있었다. 무기수가 석방되기 위해서는 모범수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아는 三中 스님은 權씨를 만날 때마다 權씨의 어머니 이야기를 해가며 살아서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서는 우선 行刑 성적이 좋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때로는 行刑 성적이 좋아지기도 했지만 민족차별 문제를 내세우며 간수들과 자주 다툼으로써 行刑 성적은 다시 4급으로 곤두박질치기 일쑤였다.
석방되기보다는 감옥에서 일제와 싸우다 죽는 길을 택하겠다며 간수들과 다툼을 했던 것이다. 때문에 일본 법무성에 지인들을 내세워 權씨 석방 운동을 돕던 丁海昌(정해창) 前 법무장관조차 석방운동을 포기하라는 충고를 할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 일본에 있는 丁 前 장관의 지인들이 權씨의 行刑 성적이 4급인 이상 석방은 어려울 것이라는 의견을 丁 前 장관에게 보내왔기 때문이었다. 三中 스님은 丁 前 장관을 다시 설득해 權씨 석방 운동을 벌였고, 석방과정에서 丁 前 장관의 일본 內 지인들이 큰 역할을 했다. 그리고 權씨는 마침내 석방돼 한국으로 영주 귀국을 했다.
죽음을 말하면서도 석방을 꿈꿨다
앞서 밝힌대로 權씨는 입버릇처럼 『일본놈들에게 굴하지 않고 감옥에서 죽겠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三中 스님은 『당시에는 권희로씨의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혹시 죽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런 權씨의 말이 진심만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그는 살고 싶어했고, 오히려 그런 태도를 유지함으로써 자신이 처한 상황을 유리한 국면으로 이끌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權씨가 귀국을 할 때였다. 三中 스님은 방탄조끼를 준비했다. 석방되면 살해하겠다는 일본 야쿠자의 위협도 있었지만, 權씨가 미리 방탄조끼를 준비해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에 마련한 것이었다. 하지만 三中 스님은 방탄조끼를 가지고 공항에 나갔다가 무안을 당한다. 權씨가 주변에 있는 사람들 앞에서 『내가 방탄조끼를 입어서야 되겠습니까』라며, 방탄조끼 착용을 거부했던 것이다.
三中 스님은 이 외에도 權씨가 『감옥에서 죽겠다』는 말을 하는 한편에서는 자신의 석방 여부에 대해 많은 신경을 썼다고 전한다.
三中 스님의 말대로 적어도 權씨가 감옥밖에서 벌어지는 구명운동에 초연한 입장이 아니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오히려 그는 구명운동을 요구하기도 했다. 「김희로 석방 후원회장」을 지낸 李在鉉(이재현·54)씨는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1988년에 내가 권희로씨를 면회했습니다. 그때 권희로씨가 우리나라 저명 인사들의 서명을 받아 일본 당국에 제출하면 석방이 가능하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돌아오는 그 길로 김대중 대통령과, 김영삼 전 대통령 등 우리 사회의 저명 인사들을 찾아다니며 서명을 받아 일본에 보낸 일이 있습니다』
三中 스님은 權씨가 주변 사람들을, 자신의 감옥 생활은 물론이고 석방에 이용했다고 말한다. 그 한 예로 드는 것이 종교다.
三中 스님이 權씨 구명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서기 전까지 權씨는 기독교 신자였다. 權씨의 구속 직후 도와준 사람들이 주로 목사였던 인연 때문이었다. 「김희로 후원회장」이었던 李在鉉씨도 『權씨가 기독교 신자였기 때문에 원효로 심원정 교회 이석순 목사의 도움을 받아 성경과 찬송가 등을 보내주었다』고 당시를 술회했다.
三中 스님은 1992년에 權씨를 처음으로 면회했다. 權씨가 기독교 신자인 것을 알고 있던 三中 스님은 조심스럽게 자신은 스님으로서가 아니라 한국인으로서 면회를 온 것이라는 설명부터 했다. 혹시 기독교인으로서 타종교에 대한 거부감을 가질까봐서였다. 한국어에 익숙치 못한 權씨와의 대화를 위해 통역이 함께 있었는데 그 분은 목사였다. 權씨는 어떻게 들었는지 모르지만 三中 스님이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三中 스님이 사형수를 살려내는 등 재소자 교화에 힘쓰고 있는 종교인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종교인이 아닌 한국인으로서 왔다는 三中 스님의 말에 權씨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나는 기독교나 불교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내게 중요한 것은 민족입니다』
당시 너무나 그럴 듯한 말에 三中 스님은 감격했다고 한다.
감정의 기복이 심한성격
三中 스님은 權씨가 병적일 정도로 감정의 기복이 심하고 화를 참지 못하는 성격이라고 말한다. 기자가 權씨 취재를 위해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도 三中 스님과 비슷한 입장이었다.
權씨가 귀국한 후 가깝게 지낸 白承判(백승판·55)씨는 『감옥 생활을 오래 해서인지 우리 상식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는 행동을 할 때가 간혹 있었다』면서 『감정의 기복이 심했다』고 말한다. 白씨는 그 이유를 『귀국 후 마음을 풀어줄 상대가 주변에 많지 않은 것도 한 원인』이라고 진단했다. 權씨가 거주하던 아파트의 경비원도 『금방 기분 좋았다가도 금방 기분이 나빠지고 했다』면서 『화가 나면 참으려는 노력도 했지만 쉽게 마음을 다스리지는 못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어쨌든 權씨 주변의 말을 종합해 보면 權씨의 현재 정신상태가 非정상인 것은 틀림없는 것 같다. 검찰 역시 9월3일에 벌어진 사건과 관련해 權씨의 정신감정을 의뢰하기도 했다. 검찰의 의뢰를 받아 權씨의 정신을 감정한 공주치료감호소의 崔相燮(최상섭·51) 소장은 『권희로씨는 심신 미약 상태』라면서 『심신 미약이란 정신질환이나 알콜, 약물 등의 영향으로 인격에 장애가 와 사물에 대한 변별과 판단 능력이 저하된 상태를 말한다』고 설명했다.
崔소장에 의하면 심신 미약 상태는 보통은 정상이다가도 환경 변화시 주관적으로 판단하거나 충동적 반응을 보이는 경계선 인격장애를 일으키기도 한다고 한다. 경계선 장애의 특징은 사실이 아닌 현상을 사실로 믿는 망상, 이를테면 영웅이 아닌데도 자신을 영웅이라고 믿는 증상과 심한 감정의 기복이라고 한다. 또 이런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임기응변에 강하고 현상을 주관적으로 판단하면서 거짓말을 쉽게 하는 특성도 지니고 있다고 한다.
崔소장은 權씨가 심신 미약 상태에 빠지게 된 원인에 대해 『어릴 때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繼父 밑에서 자라야 했던 환경과 일찍부터 범죄에 빠져 정상적인 생활을 못한 것과 오랜 囚刑 생활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崔소장은 『권씨는 충동적으로 범행을 저질렀으며 앞으로도 재범의 위험성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고 덧붙였다.
두 번의 옥중 결혼
權禧老씨의 이력 중에 특이한 것은 옥중에서도 두 번씩이나 결혼을 했다는 사실이다. 權씨는 인질극을 벌이기 전 일본에서 한 여자와는 정식 결혼을 했고, 그 여자와 헤어진 뒤에는 두 여자와 차례로 동거를 했다. 물론 인질극을 벌이고 감옥에 갔을 때 그의 어머니 외에 그를 옥바라지해준 여자는 없었다.
감옥생활 5년여가 넘었을 때 권씨는 한국 여자와 결혼을 한다. 1973년 6월의 일이다. 權씨의 아내가 된 사람은 金모 여인으로 당시 「김희로 석방후원회장」을 맡고 있던 조중태(사망)씨의 중매로 맺어졌다. 그러나 두 사람의 결혼은 얼마 안 가서 없던 일이 돼 버린다. 李在鉉씨가 전하는 말에 의하면 金여인이 귀국하면서 두 사람 사이에 오해가 생겼고, 그 오해가 끝내 두 사람을 갈라서게 했다는 것이다. 이 일로 후원회 회장이던 조중태씨와 權씨의 사이도 벌어지게 된다.
두 번째의 옥중 결혼은 현해탄을 건너는 무기수와 무기수의 결혼으로 화제를 뿌렸다. 지난 11월 말까지 權씨의 법적 아내였던 頓씨가 그 주인공이다. 일본인의 현지처였던 頓여인은 1974년 8월 한국을 찾아온 일본인의 본처를 살해한 죄로 대전교도소에서 무기수로 복역중이었다. 權씨가 頓여인을 알게 된 것은 1978년이었다. 「김희로 후원회」에서 보내주는 한 신문에 頓여인의 기사를 읽게 된 것이다.
權씨는 한국인으로서 일본인을 죽였다는 점과 똑같은 무기수라는 점에 마음이 끌렸다. 權씨는 당장 李在鉉씨를 통해 頓여인의 연락처를 알아봐 달라고 했다. 대전교도소에서 頓여인을 찾은 李씨는 頓여인에게 權씨가 편지를 교환하고 싶어한다는 말을 전했다. 頓씨는 『내가 왜 그 사람과 편지를 주고받느냐』며 펄쩍 뛰었다고 한다. 결국 李씨가 서너 번의 면회를 더 한 다음에야 頓여인은 權씨와의 서신 교환을 승낙했다. 그렇게 편지를 주고받던 두 사람은 1981년 3월28일에는 혼인신고까지 마침으로써 법적 부부가 되었다.
그 후 무기에서 20년형으로 감형된 후 頓여인은 석방되었다. 석방 후 頓 여인은 일본을 다니며 權씨의 옥바라지를 했다. 그러다가 頓여인은 갑자기 아무 말 없이 1993년에 權씨가 모아둔 돈을 가지고 한국으로 돌아간 후 연락을 끊었다. 이 사건으로 權씨는 頓여인을 죽이겠다고 별렀고,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일본 당국은 權씨를 석방하면서 三中 스님에게 頓여인과 만나지 말게 할 것을 다짐받는다. 頓여인은 그 당시 자신이 아무 말도 없이 잠적한 게 아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국에 오면 그때 다시 만나자, 그때까지 연락을 않겠다는 편지를 나는 분명히 보냈어요』라고 말하고 있는 것.
재결합과 頓여인의 잠적
어쨌든 頓씨는 權씨가 영주 귀국한 후 그에게 연락한다. 법률상 부부로 돼 있기 때문에 어차피 호적 정리를 위해서라도 만날 수밖에 없었다는 頓여인의 설명이다. 두 사람이 다시 만났을 때 權씨 곁에는 귀국 후 三中 스님이 소개해준 진모(56)여인이 있었다. 권씨와 진여인은 이미 주변에는 부부로 공인돼 있었다. 그러나 權씨는 지난 2월 서울 사당동에서 어린이방을 운영하고 있던 頓씨를 데려왔다. 진여인은 그 길로 짐을 싸서 나가야 했다.
그렇게 돌아왔던 頓여인은 權씨와 함께 산지 두 달여 만인 4월25일에 權씨의 돈을 가지고 집을 나갔다. 頓여인은 자기가 가지고 나간 돈은 자신의 정신적 피해에 대한 보상이라고 말하고 있다. 頓여인의 말이다.
『옥중 결혼을 하고 내가 석방된 후 일본에서 그 사람의 옥바라지를 할 때 나는 그 사람이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았어요. 그 사람은 광인이었어요. 나한테 못되게 굴고 소리쳤다가는 금방 돌아서서 무릎 꿇고 빌고 1993년에 연락을 끊을 수밖에 없었던 것도 다 그 때문이었어요. 그 사람이 귀국 후 함께 살자는 말에 응했던 것은 감옥밖으로 나왔으니까 변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어요. 하지만 그는 하나도 안 변했어요. 여전히 난폭했고 나한테 말로 할 수 없는 정신적 고통을 수 없이 주었어요. 그래서 다시 뛰쳐나온 겁니다』
頓여인의 가출 후 등장하는 여인이 朴모(44)여인이다. 부산 범일동에서 꽃집을 운영하는 朴여인과 權씨가 알고 지낸 것은 權씨가 귀국한 지 얼마 안 돼서다. 범일동 소재 한 식당에서 權씨를 만난 朴씨는 權씨 어머니의 영정에 매주 한 번씩 꽃을 바치기로 약속했다. 그때가 1999년 9월22일이었다. 두 사람의 관계는 그 이상 가까워지지 않다가 頓여인이 잠적한 후 朴여인이 權씨에게 위로 전화를 하고, 權씨 집을 위로 방문하는 정도로 발전한다. 수사 관계자에 따르면 權씨는 이 무렵에 2회에 걸쳐 구혼을 했고, 첫 구혼 때는 거절했던 朴여인이 고민 끝에 權씨의 구혼을 받아들이면서 급속도로 가까워졌다고 한다.
두 사람은 함께 여행을 다니기도 했고 7월부터는 일본어를 배운다는 명목으로 이틀에 한 번씩 朴여인이 權씨의 아파트를 찾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朴여인의 남편이 눈치를 채게 됨으로써 살인미수 사건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權禧老씨와 같은 구치소에 수감돼 있는 한 재소자는 三中스님에게 보낸 편지에서 權씨의 근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희로씨의 하루 일과로는 오전 朴00씨의 접견으로부터 시작하여 朴씨께 편지 쓰는 것으로 하루를 마감하는 것 같아요. 참 늘그막에 사랑에 푹 빠졌나 봐요. 朴씨의 사진을 온벽에 가득 붙여놓고 朴씨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족한 지 매일매일 기쁨으로 충만해 있습니다>
權禧老의 행복
편지에 적힌 대로 朴여인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權씨를 면회하고 있었다. 朴여인은 『그분이 나를 매일 기다리는 게 희망이듯 나도 그분을 매일 만나는 게 희망』이라면서 앞으로의 계획을 묻자, 『그분을 위해서 살 것』이라고 말했다.
朴여인은 현재 남편과 별거상태로 지내고 있다. 항간에는 朴여인이 사건 후 權씨의 아파트에서 기거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과 다르다. 朴여인은 부산에 있는 한 절에서 묵고 있고, 權씨의 아파트에는 우편물 등을 챙기기 위해 간혹 들른다고 한다.
權씨가 사는 아파트 경비원도 朴여인이 그곳에 머물지 않고 가끔 들르기만 한다고 전했다. 사건 후 종업원에게 가게를 맡겼다가 한 달 전부터 다시 직접 장사를 시작했다는 朴여인의 모습은 의외로 밝았다. 그녀는 『나로 인해 그분이 이렇게 됐고, 세상이 우리를 주목하고 있다』면서 『나는 이런 일들이 자업자득이고 업보라고 생각하며 그분 곁에서 살아갈 것』이라고 다짐하듯 말했다.
權씨는 朴여인을 가리켜 『이 세상에서 나를 다스릴 수 있는 유일한 여자』라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權씨가 朴여인의 말을 잘 듣는다는 말이다. 朴여인은 權씨와의 만남을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 朴여인에게 權씨에게 지금 당장 절실한 게 무엇인지를 물었다. 그녀의 대답은 이랬다.
『그 분의 가장 큰 문제는 애정결핍이에요. 그 분이 영웅으로 떠받들어졌을 때 그 분 곁에는 많은 사람이 있었지만 그 분은 외로웠습니다. 그 분이 감옥에서 나오면, 아니 지금부터 그 분은 영웅이 아니고 자연인 권희로입니다. 하지만 그는 지금 행복하고 앞으로도 행복할 겁니다. 내가 그 분을 외롭게 만들지 않을 겁니다』
기자는 權禧老씨를 취재하면서 품었던 의문, 감옥에서도 일본에 굴하지 않는 한국인의 기개를 보여준 權禧老와 유부녀와 사랑에 빠져 그 유부녀의 남편을 살해하려고 했던 한 노인의 모습 중 어느 것이 진짜 權禧老인가에 대한 답을 끝내 얻지 못했다. 분명한 것은 의문의 前者(전자), 즉「감옥에서도 일본에 굴하지 않는 한국인의 기개를 보여준 權禧老」라는 偶像은 무너졌다는 것이다.●
2000년 9월3일, 權씨는 귀국 1주년을 며칠 앞두고 화려하게 스포트라이트를 받던 귀국 당시와는 정반대의 모습으로 취재진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경찰 조사를 받는 피의자 신분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날 오전 10시, 權씨는 부산 범일동 소재 H아파트를 찾았다. 내연의 여인으로 알려진 朴모(43) 여인의 집이었다. 朴여인의 집을 찾는 權씨의 손에는 끝 부분에 식칼을 청테이프로 묶어 고정시킨 길이 1m가 넘는 나무 막대기와 칼날길이 10cm, 손잡이 13cm 길이의 등산용 칼이 들려 있었다. 朴여인과 자신의 사랑을 가로막는 朴여인의 남편 安모(지렁이 양식업·46)씨를 살해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경찰 조서). 權씨는 들고 간 칼로 安씨의 팔과 다리를 찔러 전치 10일의 상처를 입히고, 거실과 안방에 있는 장롱 등에 불을 지르는 등 1시간 가량 소동을 벌였다. 소동 중에 잠옷 바람으로 있던 朴씨도 찰과상을 입었고 權씨 자신도 턱 밑 부분을 심하게 다쳤다.
사건이 발생하기 나흘 전인 2000년 8월30일에도 權씨는 막대기 끝에 묶은 회칼과 휘발유 한 통을 들고 安씨를 찾아가 칼을 가슴에 들이대는 등 소동을 벌였다. 이때는 安씨가 사건의 확대를 원치 않아 조용히 마무리되었다고 한다. 9월3일의 사건이 우발적이 아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權씨가 살았던 부산 연제구 거제동 소재 H아파트의 경비원도 權씨가 사전에 이번 사건을 준비해왔다고 증언하고 있다. 사건 발생 20일 전쯤에 權씨가 자신에게 휘발유 구입을 부탁했으나 거절한 바 있었고, 그 일주일 후쯤에 권씨가 휘발유를 사가지고 와 보관을 부탁해 거절하자 權씨가 자신의 차 트렁크에 휘발유를 보관했다고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경찰 조사에서도 權씨와 朴씨는 사건 발생 前 달인 8월25일에 인천시 연수구 옥련동 소재 한 모텔에 함께 투숙하며 安씨 살해를 공모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朴씨는 權씨와 함께 남편 살해를 공모했다는 경찰의 조사 결과를 부인하고 있으며 이같은 사실이 영장 실질심사에서 받아들여져 불구속됐다.
한국적인 상식으로는 權씨, 朴씨, 安씨의 3각 관계에서 살의를 느낄 정도로 분노를 느껴야 하는 쪽은 安씨가 돼야 한다. 그러나 이 사건에서는 거꾸로 情夫(정부)의 입장인 權씨가 安씨를 살해하려 했다. 또 權씨가 安씨를 살해했다면 그의 나이를 감안할 때 남은 여생을 감옥에서 보내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權씨는 왜 상식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는 이런 소동을 벌인 것인가. 잠시 자신은 무슨 짓을 해도 국민들의 이해를 구할 수 있으리라는 「英雄心(영웅심)이 만들어낸 착각」에 빠졌던 것일까, 아니면 원래 그런 사람이었던 것일까.
『英雄 權禧老」는 일본 좌파 지식인들에 의해 만들어졌다』(구로다 기자)
사건 발생 후 일본 언론은 權씨 사건을 주요 기사로 다루며 높은 관심을 보였다. 權씨가 귀국 후 한국에서 국민적 영웅 대접을 받는데 대해 『단순 인질 살인범에 대해 너무 지나치다』는 평가가 없잖았던 일본 언론들에게 이 사건은 호재였다. 직접 비꼬지는 않았지만 한국에서 국민적 영웅으로 떠받들여지던 權씨의 사건을 보도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한국민의 權씨에 대한 평가가 잘못돼 있다는 지적을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었다.
산케이(産經)신문 서울 지국장 구로다 가쓰히로(黑田勝弘)기자는 權씨 사건과 관련한 일본의 분위기를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특성 때문에 직접적으로 말은 하지 않고 있지만 「코웃음 치는 분위기」라고 말할 수 있다』고 전했다. 權씨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權씨를 영웅으로 떠받들었던 일부 한국인들에 대한 비웃음이 있다는 것이다.
구로다 기자는 『「英雄 權禧老」는 한국인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실은 일본인들에 의해서 만들어졌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1968년 2월20일, 權禧老씨는 일본인 야쿠자 2명을 엽총으로 살해하고 사건 현장에서 80㎞ 떨어진 후지미야 여관에서 투숙객과 여관 주인 등을 억류하고 인질극을 벌였다. 權씨가 살해한 야쿠자는 일본에서 전국적인 규모의 조직폭력단인 이나가와구미의 지역 중간 보스쯤 되는 소가와 그의 부하였다. 權씨 주장에 따르면 그들은 권총을 보여주며 강제로 38만 엔의 차용증서를 쓰게 했고, 이 돈을 받기 위해 權씨는 물론 權씨의 어머니까지 괴롭혔다고 한다. 견디다 못한 權씨가 울분을 참지 못하고 돈을 갚는다며 카바레로 소가 일당을 불러내 살해한 것이다.
후지미야 여관에서 일본 경찰과 88시간 대치하며 權씨는 조선인에 대해 모멸적인 발언을 한 일본 경찰관의 사과를 요구하는 등 일본의 조선인에 대한 민족 차별 문제를 이슈화하는 데 성공한다.
구로다 기자는 權씨의 인질극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일본 경찰과의 대치라고 말한다. 일본 경찰과의 대치는 곧 국가 권력에 대한 도전이었고 權씨의 그런 행동은 일본의 특정 정파가 당시 가지고 있던 이념에 부합되는 것이었다는 것이다.
그 특정 정파는 1960년대 일본 사회에 폭풍처럼 몰아닥쳤던 신좌파 운동을 벌인 그룹들이다. 1960년代 말의 신좌파 운동은 급진 지식인들과 학생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특히 폭력적 학생운동에 이념적 토대가 되기도 했다.
反국가, 反체제를 내세웠던 신좌파로서는 일본 경찰과의 대치가 권력에 도전하는 영웅적 행동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權禧老는 민족 차별 문제라는 명분도 제공하고 있었다. 이런 인연으로 인질극이 끝난 후에도 일본 신좌파 지식인들은 일본 사회 內에 이 문제를 이슈화하고 특별 변호인을 선정하는 등 權씨에 대한 지원을 지속적으로 전개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특이한 점은 전통적으로 일본 좌파의 본류라고 자부해왔던 공산당이 權씨를 지원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유는 權禧老씨가 살인과 인질이라는 폭력적 방법을 동원했기 때문이다. 당시 공산당은 폭력주의를 반대하며 폭력주의에 찬성하는 신좌파와 결별한 상태였다.
재일교포들은 權씨의 민족차별 문제 제기를 쇼로 보았다
구로다 기자는 일본 지식인 사회의 權씨에 대한 지속적인 지원은 『조선을 식민 지배했다는 채무감 같은 것을 지식인 사회와 언론이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또 그는 『權씨가 재판 과정이나 감옥 생활을 통해 일본 지식인 사회와 언론의 그런 풍토를 100% 이용했다고 본다』고 덧붙였다. 일본 지식인 사회와 언론의 한반도 강점에 대한 원죄 의식이 결국은 「英雄 權禧老」 탄생의 밑거름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시해야 할 것은 당시 일본 지식인 사회의 權씨 지원 운동과 신좌파 운동이 대중 속으로 뿌리내리지 못했다는 점이다. 일본의 대중적 정서는 權씨가 살인자이자 인질범이라는 「드러난 범죄적 사실」만을 받아들였고, 그것은 權씨의 귀국시 『단순 살인·인질범에 대해 한국 언론이 너무 호들갑을 떤다』는 반응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재일교포 사회의 분위기도 일본 사회의 일반적 분위기와 비슷했던 것 같다. 權씨의 석방과 한국으로의 영주 귀국에 결정적 역할을 한 朴三中 스님은 자신이 「김희로 석방 운동」을 벌일 당시의 재일교포 사회 분위기를 이렇게 전한다.
『교포들은 권희로의 민족차별 문제 제기를 쇼라고 보는 분위기가 팽배했어요. 권희로가 어려서부터 폭행, 절도, 사기 등으로 감옥을 들락날락한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내가 구명 운동을 벌이며 그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을 때 대부분은 냉담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들은 도움을 요청하는 내게 「스님이 권희로에 대해 뭔가 잘못 알고 있다」며 내 부탁을 거절했습니다. 재일교포 누구와도 救命운동을 놓고 상의할 수 없는 분위기였죠. 나는 그때 재일교포들을 민족의식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판단하고 그들 도움 없이 救命운동을 벌여나갔습니다. 권희로씨가 귀국할 때도 교포사회는 우리 한국사회와는 달리 냉담한 반응을 보였는데 그때까지도 나는 그들의 그런 태도에 실망했고 정말 민족의식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판단이 경솔했던 것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어 안타깝습니다』
이처럼 權씨와 가까이 있어 그를 지켜볼 수 있었던 대다수의 사람들은 權씨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權씨가 형무소와 최초로 「인연」을 맺은 것은 그의 나이 14세 때로 손목시계를 훔쳤다는 이유에서다. 본인은 지금까지 그때 손목시계를 훔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후에도 그는 지갑을 훔치다 경찰서 유치장 신세를 졌고, 쌀 암거래를 하다 붙잡혀 감옥에 가는 등 자질구레한 일로 감옥을 들락거렸다. 죄목은 주로 절도, 사기, 횡령 등이었다. 이 외에도 권총으로 택시강도를 하다 붙잡혀 8년 형을 받은 기록도 있다. 이런 이력이 재일교포 사회는 물론 일본사회에 權씨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심게 된 것이다.
구로다 기자는 일본인들의 權씨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한국민 전체에 대한 부정적 인식으로 이어졌다고 주장했다. 인질극과 재판을 통해 조선인에 대한 민족 차별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權씨가 한국인의 대명사가 됐고, 이로 인해 權씨의 범죄 사실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대다수 일본인들은 한국인들이 폭력적이고 싸움만 하며 변명을 잘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 여기에다가 한국인은 책임회피를 잘 하고 가난하다는 인식도 함께 심어주었다는 것이 구로다 기자의 지적이다. 그런 이미지가 바뀐 계기가 된 것은 서울 올림픽으로서 일본인들의 對한국 이미지가 바뀌는데 장장 20년이 걸렸다는 게 구로다 기자의 주장이다.
시즈오카(靜岡) 형무소의 간수는 왜 자살했나
權씨는 감옥생활의 대부분을 구마모토(熊本) 형무소 독방에서 보냈지만 1심 재판 중에 수용돼 있던 곳은 시즈오카(靜岡) 형무소였다. 이 형무소에는 구리타 가나메라는 간수가 있었다. 그의 임무는 權씨를 감시하고 재판 때마다 權씨를 호송하는 일이었다. 1999년 11월에 발간된 權씨의 회고록 「어머니, 미움을 넘어섰어요」에서 權씨는 구리타 간수와 인간적으로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런데 1심 재판이 진행중이던 1970년 5월 구리타 간수가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해 3월27일 權씨가 법정에서 자신이 수감돼 있는 방에 흉기(칼)가 반입됐다는 사실을 폭로하자, 權씨의 감시를 담당했던 구리타가 자살을 한 것이었다. 칼 반입과 구리타 간수와는 무슨 관련이 있었을까. 權씨는 「어머니, 미움을 넘어섰어요」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1970년 4월에는 구리타 간수가 내게 또 칼 한 자루와 줄을 넣어주었다. 짜증나는 재판에 잔뜩 화가 난 내가 『칼만 있으면 저따위 소리를 지껄이는 검찰관을 죽이고 나도 그 자리에서 자결할 텐데…』라고 말하자 정말 칼을 넣어두고 간 것이었다. …구리타 간수는 왜 내게 칼과 줄을 넣어주었을까. 독약은 대체 누가 넣어주었을까. 무슨 거대한 음모가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점점 불안해졌다>
權씨는 이 책에서 『요즘도 일본 기자들이 계속 찾아와 진상을 캐묻고 있지만 지금으로서는 그 일의 숨겨진 내막을 죽을 때까지 가슴속에 묻어둘 생각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지 않은 것이다.
진실이 밝혀지지 않은 이 사건에 대한 추측은 두 갈래다. 하나는 權씨가 책에서 암시하고 있듯이 일본의 공권력이 權씨의 입을 막기 위해 칼 등을 고의로 반입시켰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權씨가 간수의 약점을 잡아 칼을 반입시켰다가 들키자 거꾸로 법정에서 흉기반입을 폭로했다는 추측이다.
산케이 신문 구로다 기자의 입장은 후자 쪽이다. 『감옥에서 하고 싶은 일을 다 했던 權씨가 생선을 구해 회를 뜨기 위해 칼이 필요해 반입했다가 들키자 변명으로 자결용 칼을 보냈다고 주장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면서 구로다 기자는 『그는 간수에게 불법을 시켜놓고 약점을 잡아 그의 협력자로 만들었다』고 덧붙였다. 구로다 기자의 주장은 많은 일본인들의 생각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權씨는 책에서 간수의 약점을 잡아 이용했다는 주장에 대해 반박하고 있다. 『당시 일본 검찰은 진상을 규명하기보다는 덮어두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시즈오카 형무소 쪽은 나에게 「검찰에 잘 말해서 刑을 가볍게 해줄 테니 민족차별 문제로 더 이상 시끄럽게 하지 말고 살인행위를 사죄하라」고 설득하면서 일종의 특별 대우를 해주었기 때문에 구리타 간수가 담배 반입 때문에 약점을 잡혔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나는 담배뿐만 아니라 감방 안에서 형무소 쪽이 마련해준 불고기판으로 고기를 구워 먹을 정도였으니까』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이 사건은 열쇠를 쥐고 있는 구리타 간수가 자살함으로써 미궁에 빠졌고, 權씨 사건을 보는 입장에 따른 「추측의 차」만 남아 있다.
감옥에서 태극기를 배경으로 한복을 입고 사진 촬영까지 할 수 있었던 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쪽의 주장이 진실에 근접하는 가를 따져볼 수는 있을 것 같다.
權씨의 경우 자신의 책에서 밝힌 대로 감옥에서 불고기판으로 고기를 구워 먹을 수 있을 정도로 갇혀 있는 상태에서도 비교적 자유롭게 생활했던 것 같다.
그 한 예가 태극기의 반입이다. 1999년 9월 權씨의 귀국을 전후로 우리 언론에는 태극기를 배경으로 한복을 입은 모습으로 사진을 찍은 權씨의 모습이 소개됐다. 감옥에서 찍은 것이고 이 사진은 그의 회고록에도 실려 있다. 감옥에서 포즈를 취하고 사진을 찍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다른 나라의 국기가 감옥에 반입돼 버젓이 걸려 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한다. 그러나 權씨가 옥살이를 한 감옥에는 분명 태극기가 있었고, 그는 죄수복이 아닌 한복을 입고 사진을 촬영했다.
구로다 기자는 이 사실을 들어 『감옥에 갇힌 김(권)희로가 자신이 원하는 모든 물건을 감옥에 들여 놓을 수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결국 칼 정도는 「김희로의 의지에 의해」 쉽게 반입이 가능했을 것이라는 주장인 것이다. 물론 이 역시 구로다 기자의 추론일 뿐이다. 분명한 것은 權씨에게는 간수의 협조든 아니면 문제가 시끄러워지기를 원치 않는 그 윗선에서의 보호든 「무언가 특별한 힘」이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결국 실마리는 구리타가 스스로 죽음을 택하며 남겼을 말에서 풀어야 할 것이다.
權씨는 회고록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사실 구리타 간수가 자살할 때 머리맡에 유서를 남겼지만, 일본 검찰은 「유서 비슷한 것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부인이 무심코 다른 쓰레기와 함께 휴지통에 버렸으며, 그 뒤 청소부가 수거해갔기 때문에 확인할 길이 없다」는 옹색한 발표로 얼버무렸다>
유서가 없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朴三中 스님은 기자에게 이런 말을 했다.
『어느 재일 교포가 자료를 보여주며 얘기해서 그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자살한 간수의 유서에는 권희로씨를 원망하는 글이 적혀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작년 귀국길에 이유야 어쨌든 그때 자살한 간수를 위해 천도제를 지내자는 이야기를 권희로씨에게 했는데 그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權씨는 그의 회고록에서 구리타 간수에 대한 감정을 이렇게 적고 있다.
<구리타의 속마음까지는 알 수 없지만, 그가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는 생각에는 지금까지 변함이 없다>
스톡홀름 증후군
오늘의 權禧老씨의 존재를 있게 한 것은 후지미야 여관에서 여관주인과 투숙객 등 13명을 붙잡아놓고 벌인 88시간 동안의 인질극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야쿠자 2명을 살해한 후 인질극을 벌이면서 민족 차별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그는 뉴스의 초점이 됐을 뿐만 아니라 뉴스를 움직일 수 있었다. 적어도 88시간 동안 그는 민족 차별이라는 명분을 가지고 자신의 의지에 의해 뉴스를 생산할 수 있었고, 그 약효는 8년여의 재판 기간을 포함한 감옥생활 31년 7개월 동안 줄곧 이어졌다.
인질극을 벌이지 않았다면 그는 단순히「범죄자를 죽인 살인범」에 지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들은 그가 인질극을 벌이기 前 사기, 절도 등으로 소년원을 포함해 20여 년을, 인질극을 일으키던 나이 마흔 살의 정확히 절반 가량을 감옥에서 보냈다는 사실을 잊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한국과 일본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영웅의 위치로 올려놓은 인질극에 대해 『인질극이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회고록에 이렇게 적고 있다.
<나는 사람들이 후지미야 여관의 그 일을 쉽게 「인질극」이라고 말하는 데에는 동의할 수 없다. 물론 무고한 사람들의 자유를 한정된 시간이지만 본의 아니게 구속한 것은 입이 열이라도 할말이 없지만, 세상에서 흔히 인식하고 있는 그런 인질극은 분명 아니었다. …재판과정에서도 그곳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스스로 「인질」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고 증언하고 있다>
權씨는 또 인질들이 자신의 입장을 이해해주었으며 심지어 기자로 가장한 경찰들이 그를 체포할 당시 「도망가라」고 소리칠 정도로 자신에게 우호적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權씨의 말대로 88시간 동안 잡혀 있던 인질들은 權씨에게 우호적인 감정을 가졌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그러나 인질들이 인질범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고 심지어 재판정에서 유리한 증언을 해주었다고 해서 인질극이 아니라는 주장은 심리학적 상식에서 어긋나는 것이다.
심리학자들은 당시 인질들이 보여준 權씨에 대한 태도를 스톡홀름 증후군(Stockholm Syndrome)이라는 심리학 용어로 설명한다. 스톡홀름 증후군이란 인질들이 자신들이 억류되던 당시의 폭력을 잊어버리고 강자의 논리에 동화돼 경찰이나 사회보다는 그들을 잡고 있는 인질범들의 편을 드는 현상을 설명하는 용어다. 이 용어는 1973년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발생한 은행 인질강도 사건에서 유래됐다.
은행 강도들이 4명의 인질을 잡고 경찰과 대치한 이 사건은 6일 동안 계속됐다. 강도 사건 발생 초기에 인질들은 강도들을 무서워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가고 강도극이 진행될수록 인질들은 강도들에게 호감을 갖게 되었고, 점차 경찰보다는 은행 강도들에게 충성하게 된다. 이러한 상태에서 인질극은 끝났다. 인질들은 경찰이 인질범들에 대한 증언을 요구했을 때 인질범들에게 불리한 증언을 전혀 하지 않았다. 심지어 한 여자 인질은 강도들 중 한 명에게 애정을 느껴 그 사건 이후 약혼자와 파혼까지 하게 된다. 이때부터 인질이 인질범들의 편을 드는 현상을 스톡홀름 증후군이라는 말로 설명하기 시작한 것이고, 이런 현상은 인질극에서 자주 발견되고 있다.
「후지미야 증후군」
페루 좌익반군 투팍아마루 혁명운동(MRTA) 게릴라들이 1996년 12월17일부터 이듬해인 1997년 4월23일까지 126일 동안 500여 명을 인질로 잡고 벌인 페루 수도 리마 일본대사관 인질사건에서도 이 같은 일이 벌어진다. 사건이 벌어지던 중 게릴라들은 인질 가운데 225명을 12월22일에 풀어주는데, 이때 풀려난 인질들 중 상당수가 투팍아마루 혁명운동 게릴라들에게 동정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행운까지 빌어주는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심리학자들은 이 사건도 스톡홀름 증후군 범주에 넣고 있으며, 때로는 사건이 벌어진 地名에서 이름을 따 「리마 증후군」으로 부르기도 한다.
심리학자들은 이런 심리변화가 세 단계를 거치며 일어난다고 설명한다. 첫 번째 단계에서 인질들은 자신들의 생사를 가름할 인질범들이 자신을 해치지 않는 것을 고마워하면서 그들에게 온정을 느끼기 시작한다. 두 번째 단계에서는 인질들은 자신들을 구출하려는 경찰들에게 오히려 반감을 느끼게 된다. 오히려 경찰의 그러한 행동이 자신들에게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마지막 단계에서는 인질과 인질범들이 동화되는 과정이다. 인질과 인질범들 사이에 함께 고립되어 있고, 두려움을 함께 하는 「우리」라는 믿음이 생겨나는 것이다.
심리학자들이 權씨의 인질극 사건에 진작 주목했다면 스톡홀름 증후군이라는 용어 이전에 「후지미야 증후군」이라는 말이 만들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權씨는 회고록에서 인질들에게 『내가 왜 아무 관계도 없는 여러분께 이런 짓을 해야만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러나 죄송하다는 말만으로 끝낼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여러분께 죽음으로 사죄할 생각입니다』라고 말했다고 적고 있다.
장동환 共譯(공역) 「심리학 입문」(박영사 刊) 672쪽에는 인질범들의 심리를 설명하는 이런 구절이 있다.
<그들의 대의명분을 위해서는 기꺼이 죽을 수도 있다고 선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흔히 자신들의 생각을 굽히게 된다. 살아남기 위해서 그들은 흔히 인질들을 해치는 행동은 삼간다>
그는 스스로를 英雄이라고 생각했다:아내에게도 선생님이라 부르도록 시켜
權禧老씨는 인질극을 벌이는 동안 일본 경찰이 『공권력에 의한 민족차별이 있었다』는 것을 시인만 했으면 곧바로 자결을 결행할 마음이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그는 자결에 실패했다. 만약 그때 權씨가 자결에 성공했다면 「英雄 權禧老」의 존재는 없었을 지도 모른다. 「英雄 權禧老」의 모습은 일본 지식인들의 도움을 받으며 진행된 8년여의 재판과 감옥 생활 31년7개월 동안 줄기차게 한국과 일본에서 진행된 구명과 석방 운동을 통해 만들어진 이미지로 보이기 때문이다. 자결을 했다면 한복을 입고 태극기를 배경으로 감옥에서 찍은 사진에서 느껴지는「烈士(열사)」 「義士(의사)」의 이미지는 아예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적어도 그는 태극기를 미리 준비한 상태에서 인질극을 벌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權씨의 주변을 취재하면서 기자는 權씨 자신도 스스로를 「英雄」으로 생각했나가 궁금했다. 자신을 英雄으로 호칭한 적은 없어도 그는 스스로를 「남들로부터 대우를 받아야 할 특별한 사람」으로 생각했던 것만은 분명하다.
權씨와는 1981년 3월부터 지난 11월 말까지 20여 년 간 법적인 부부였으면서, 2000년 2월부터 4월까지 부부로 함께 산 적이 있는 頓(돈)모(52) 여인은 『그 사람은 자기를 대단한 사람으로 여겼다』면서 『심지어 부인인 내게도 자신을 부를 때 선생님이라고 부르라고 했고, 그렇게 부르지 않으면 화를 냈다』고 말한다. 頓여인은 또 『그 사람의 영웅심은 박삼중 스님이 구명운동에 참여하면서 더 심해졌다』면서 『옥중에 있을 때 면회를 가서 한 번은 「나는 영웅이 아니고 죄인이다 하는 마음으로 있어야 석방이 빨라질 수 있다」고 했다가 그 사람이 너무 심하게 화를 내서 당황한 적이 있었다』는 일화도 소개했다. 三中 스님도 頓여인의 말을 인정했다. 三中 스님의 말이다.
『권희로씨는 자신을 안중근 의사에 견주는 영웅으로 생각했어요. 일본의 어떤 사전에 그렇게 기록돼 있다며 일제에 직접적으로 맞서 싸운 것은 자신과 안중근 의사뿐이라는 말을 하곤 했죠. 그런 마음을 갖도록 내가 부추긴 측면이 있다는 걸 인정하고 지금에 와서는 책임을 통감합니다. 후회스럽기도 하고요. 면회를 가서 권희로씨가 한국 정치인들이 싸움질 하지 말고 담합해야 일본을 물리칠 수 있다고 한국 국민에게 전해달라고 하면 내가 그의 말이 한국의 매스컴을 타도록 하고, 그 사람 이름으로 수재의연금도 내서 그의 존재를 다시 한 번 국민들에게 일깨우기도 하고 하는 식으로 민족의 영웅을 만들려고 했었죠. 그렇게 만들어진 모습을 권희로씨는 자신의 진짜 모습으로 착각했을 지도 모르지요. 한국 사람들이 그를 잊어가고 있을 때 나는 그런 식으로 그의 존재를 알렸어요. 그래야 석방 운동이 힘을 얻게 될 뿐만 아니라 민족주의자인 권희로씨를 차디찬 감옥에서 꺼내는 것은 국민을 위한 내 사명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지금은 국민들의 가슴을, 내가 결과적으로 멍들게 한 것 같아 마음이 무겁습니다』
석방을 놓고 二重的 태도로 일관하다
權禧老씨에 대한 취재를 하면서 기자가 처음으로 만난 사람은 三中 스님이었다. 權씨를 석방시키는 데 일등공신이었고, 한국사회에서 權씨를 가장 잘 아는 것으로 알려진 三中 스님을 제일 먼저 찾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를 만나러 가면서 기자는 두 사람의 인연으로 미루어 짐작컨대 權씨의 최근 사건에도 불구하고 그가 權씨를 옹호하려 할 것이라는 예단을 가졌었다. 기자를 만난 三中 스님의 첫 마디는 『누군가에게 김희로에 대해 탁 터놓고 이야기하고 싶었다』였다. 그는 할 말이 많아 보였고, 정말 할 말이 많았다.
그는 기자의 예단에서 벗어나 네 시간 가까이를 權씨에 대한 섭섭함과 석방운동을 벌인 것에 대한 후회, 權씨의 본질을 제대로 보지 못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정신적 피해를 입힌 국민들에 대한 송구스러움을 이야기하는 데 할애했다.
그는 인터뷰 내내 자기가 덧칠해 만든 權禧老라는 偶像을 하나 둘 허물어버렸다. 물론 그는 權씨가 옥에 갇히게 될 경우 한때 인연을 맺었던 사람으로서 그를 계속 도울 것이라는 입장은 분명히 했다. 다만 『權씨가 일본 형무소에 갇혀 있을 때만큼 열정적인 도움을 줄 자신이 현재로서는 솔직히 없다』는 말도 덧붙였다.
三中 스님이 털어놓는 權씨에 대한 불평의 주조는 權씨의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이었다.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이라고는 했지만, 정확히 표현하면 이중적인 성격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때(權씨 구명 운동을 할 때)는 몰랐지만」이라는 말을 단서로 붙이면서 三中 스님은 權씨의 종잡을 수 없었던 행동에 대해 이야기했다.
三中 스님은 權씨가 감옥에 있는 동안 50여 차례 그를 면회했다. 1990년부터였다. 權씨의 존재는 그에게 「꼭 구출해야 할 애국 동포」였고, 그런 마음은 權씨가 한국으로 영구 귀국할 때까지 이어졌다. 權씨의 석방을 위해 노력하면서 그는 權씨가 석방되기 위해서는 行刑(행형) 성적이 좋아야 한다고 판단하게 됐다. 權씨는 行刑 성적 중 최하위인 4급에 자주 머물러 있었다. 무기수가 석방되기 위해서는 모범수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아는 三中 스님은 權씨를 만날 때마다 權씨의 어머니 이야기를 해가며 살아서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서는 우선 行刑 성적이 좋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때로는 行刑 성적이 좋아지기도 했지만 민족차별 문제를 내세우며 간수들과 자주 다툼으로써 行刑 성적은 다시 4급으로 곤두박질치기 일쑤였다.
석방되기보다는 감옥에서 일제와 싸우다 죽는 길을 택하겠다며 간수들과 다툼을 했던 것이다. 때문에 일본 법무성에 지인들을 내세워 權씨 석방 운동을 돕던 丁海昌(정해창) 前 법무장관조차 석방운동을 포기하라는 충고를 할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 일본에 있는 丁 前 장관의 지인들이 權씨의 行刑 성적이 4급인 이상 석방은 어려울 것이라는 의견을 丁 前 장관에게 보내왔기 때문이었다. 三中 스님은 丁 前 장관을 다시 설득해 權씨 석방 운동을 벌였고, 석방과정에서 丁 前 장관의 일본 內 지인들이 큰 역할을 했다. 그리고 權씨는 마침내 석방돼 한국으로 영주 귀국을 했다.
죽음을 말하면서도 석방을 꿈꿨다
앞서 밝힌대로 權씨는 입버릇처럼 『일본놈들에게 굴하지 않고 감옥에서 죽겠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三中 스님은 『당시에는 권희로씨의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혹시 죽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런 權씨의 말이 진심만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그는 살고 싶어했고, 오히려 그런 태도를 유지함으로써 자신이 처한 상황을 유리한 국면으로 이끌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權씨가 귀국을 할 때였다. 三中 스님은 방탄조끼를 준비했다. 석방되면 살해하겠다는 일본 야쿠자의 위협도 있었지만, 權씨가 미리 방탄조끼를 준비해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에 마련한 것이었다. 하지만 三中 스님은 방탄조끼를 가지고 공항에 나갔다가 무안을 당한다. 權씨가 주변에 있는 사람들 앞에서 『내가 방탄조끼를 입어서야 되겠습니까』라며, 방탄조끼 착용을 거부했던 것이다.
三中 스님은 이 외에도 權씨가 『감옥에서 죽겠다』는 말을 하는 한편에서는 자신의 석방 여부에 대해 많은 신경을 썼다고 전한다.
三中 스님의 말대로 적어도 權씨가 감옥밖에서 벌어지는 구명운동에 초연한 입장이 아니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오히려 그는 구명운동을 요구하기도 했다. 「김희로 석방 후원회장」을 지낸 李在鉉(이재현·54)씨는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1988년에 내가 권희로씨를 면회했습니다. 그때 권희로씨가 우리나라 저명 인사들의 서명을 받아 일본 당국에 제출하면 석방이 가능하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돌아오는 그 길로 김대중 대통령과, 김영삼 전 대통령 등 우리 사회의 저명 인사들을 찾아다니며 서명을 받아 일본에 보낸 일이 있습니다』
三中 스님은 權씨가 주변 사람들을, 자신의 감옥 생활은 물론이고 석방에 이용했다고 말한다. 그 한 예로 드는 것이 종교다.
三中 스님이 權씨 구명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서기 전까지 權씨는 기독교 신자였다. 權씨의 구속 직후 도와준 사람들이 주로 목사였던 인연 때문이었다. 「김희로 후원회장」이었던 李在鉉씨도 『權씨가 기독교 신자였기 때문에 원효로 심원정 교회 이석순 목사의 도움을 받아 성경과 찬송가 등을 보내주었다』고 당시를 술회했다.
三中 스님은 1992년에 權씨를 처음으로 면회했다. 權씨가 기독교 신자인 것을 알고 있던 三中 스님은 조심스럽게 자신은 스님으로서가 아니라 한국인으로서 면회를 온 것이라는 설명부터 했다. 혹시 기독교인으로서 타종교에 대한 거부감을 가질까봐서였다. 한국어에 익숙치 못한 權씨와의 대화를 위해 통역이 함께 있었는데 그 분은 목사였다. 權씨는 어떻게 들었는지 모르지만 三中 스님이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三中 스님이 사형수를 살려내는 등 재소자 교화에 힘쓰고 있는 종교인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종교인이 아닌 한국인으로서 왔다는 三中 스님의 말에 權씨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나는 기독교나 불교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내게 중요한 것은 민족입니다』
당시 너무나 그럴 듯한 말에 三中 스님은 감격했다고 한다.
감정의 기복이 심한성격
三中 스님은 權씨가 병적일 정도로 감정의 기복이 심하고 화를 참지 못하는 성격이라고 말한다. 기자가 權씨 취재를 위해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도 三中 스님과 비슷한 입장이었다.
權씨가 귀국한 후 가깝게 지낸 白承判(백승판·55)씨는 『감옥 생활을 오래 해서인지 우리 상식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는 행동을 할 때가 간혹 있었다』면서 『감정의 기복이 심했다』고 말한다. 白씨는 그 이유를 『귀국 후 마음을 풀어줄 상대가 주변에 많지 않은 것도 한 원인』이라고 진단했다. 權씨가 거주하던 아파트의 경비원도 『금방 기분 좋았다가도 금방 기분이 나빠지고 했다』면서 『화가 나면 참으려는 노력도 했지만 쉽게 마음을 다스리지는 못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어쨌든 權씨 주변의 말을 종합해 보면 權씨의 현재 정신상태가 非정상인 것은 틀림없는 것 같다. 검찰 역시 9월3일에 벌어진 사건과 관련해 權씨의 정신감정을 의뢰하기도 했다. 검찰의 의뢰를 받아 權씨의 정신을 감정한 공주치료감호소의 崔相燮(최상섭·51) 소장은 『권희로씨는 심신 미약 상태』라면서 『심신 미약이란 정신질환이나 알콜, 약물 등의 영향으로 인격에 장애가 와 사물에 대한 변별과 판단 능력이 저하된 상태를 말한다』고 설명했다.
崔소장에 의하면 심신 미약 상태는 보통은 정상이다가도 환경 변화시 주관적으로 판단하거나 충동적 반응을 보이는 경계선 인격장애를 일으키기도 한다고 한다. 경계선 장애의 특징은 사실이 아닌 현상을 사실로 믿는 망상, 이를테면 영웅이 아닌데도 자신을 영웅이라고 믿는 증상과 심한 감정의 기복이라고 한다. 또 이런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임기응변에 강하고 현상을 주관적으로 판단하면서 거짓말을 쉽게 하는 특성도 지니고 있다고 한다.
崔소장은 權씨가 심신 미약 상태에 빠지게 된 원인에 대해 『어릴 때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繼父 밑에서 자라야 했던 환경과 일찍부터 범죄에 빠져 정상적인 생활을 못한 것과 오랜 囚刑 생활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崔소장은 『권씨는 충동적으로 범행을 저질렀으며 앞으로도 재범의 위험성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고 덧붙였다.
두 번의 옥중 결혼
權禧老씨의 이력 중에 특이한 것은 옥중에서도 두 번씩이나 결혼을 했다는 사실이다. 權씨는 인질극을 벌이기 전 일본에서 한 여자와는 정식 결혼을 했고, 그 여자와 헤어진 뒤에는 두 여자와 차례로 동거를 했다. 물론 인질극을 벌이고 감옥에 갔을 때 그의 어머니 외에 그를 옥바라지해준 여자는 없었다.
감옥생활 5년여가 넘었을 때 권씨는 한국 여자와 결혼을 한다. 1973년 6월의 일이다. 權씨의 아내가 된 사람은 金모 여인으로 당시 「김희로 석방후원회장」을 맡고 있던 조중태(사망)씨의 중매로 맺어졌다. 그러나 두 사람의 결혼은 얼마 안 가서 없던 일이 돼 버린다. 李在鉉씨가 전하는 말에 의하면 金여인이 귀국하면서 두 사람 사이에 오해가 생겼고, 그 오해가 끝내 두 사람을 갈라서게 했다는 것이다. 이 일로 후원회 회장이던 조중태씨와 權씨의 사이도 벌어지게 된다.
두 번째의 옥중 결혼은 현해탄을 건너는 무기수와 무기수의 결혼으로 화제를 뿌렸다. 지난 11월 말까지 權씨의 법적 아내였던 頓씨가 그 주인공이다. 일본인의 현지처였던 頓여인은 1974년 8월 한국을 찾아온 일본인의 본처를 살해한 죄로 대전교도소에서 무기수로 복역중이었다. 權씨가 頓여인을 알게 된 것은 1978년이었다. 「김희로 후원회」에서 보내주는 한 신문에 頓여인의 기사를 읽게 된 것이다.
權씨는 한국인으로서 일본인을 죽였다는 점과 똑같은 무기수라는 점에 마음이 끌렸다. 權씨는 당장 李在鉉씨를 통해 頓여인의 연락처를 알아봐 달라고 했다. 대전교도소에서 頓여인을 찾은 李씨는 頓여인에게 權씨가 편지를 교환하고 싶어한다는 말을 전했다. 頓씨는 『내가 왜 그 사람과 편지를 주고받느냐』며 펄쩍 뛰었다고 한다. 결국 李씨가 서너 번의 면회를 더 한 다음에야 頓여인은 權씨와의 서신 교환을 승낙했다. 그렇게 편지를 주고받던 두 사람은 1981년 3월28일에는 혼인신고까지 마침으로써 법적 부부가 되었다.
그 후 무기에서 20년형으로 감형된 후 頓여인은 석방되었다. 석방 후 頓 여인은 일본을 다니며 權씨의 옥바라지를 했다. 그러다가 頓여인은 갑자기 아무 말 없이 1993년에 權씨가 모아둔 돈을 가지고 한국으로 돌아간 후 연락을 끊었다. 이 사건으로 權씨는 頓여인을 죽이겠다고 별렀고,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일본 당국은 權씨를 석방하면서 三中 스님에게 頓여인과 만나지 말게 할 것을 다짐받는다. 頓여인은 그 당시 자신이 아무 말도 없이 잠적한 게 아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국에 오면 그때 다시 만나자, 그때까지 연락을 않겠다는 편지를 나는 분명히 보냈어요』라고 말하고 있는 것.
재결합과 頓여인의 잠적
어쨌든 頓씨는 權씨가 영주 귀국한 후 그에게 연락한다. 법률상 부부로 돼 있기 때문에 어차피 호적 정리를 위해서라도 만날 수밖에 없었다는 頓여인의 설명이다. 두 사람이 다시 만났을 때 權씨 곁에는 귀국 후 三中 스님이 소개해준 진모(56)여인이 있었다. 권씨와 진여인은 이미 주변에는 부부로 공인돼 있었다. 그러나 權씨는 지난 2월 서울 사당동에서 어린이방을 운영하고 있던 頓씨를 데려왔다. 진여인은 그 길로 짐을 싸서 나가야 했다.
그렇게 돌아왔던 頓여인은 權씨와 함께 산지 두 달여 만인 4월25일에 權씨의 돈을 가지고 집을 나갔다. 頓여인은 자기가 가지고 나간 돈은 자신의 정신적 피해에 대한 보상이라고 말하고 있다. 頓여인의 말이다.
『옥중 결혼을 하고 내가 석방된 후 일본에서 그 사람의 옥바라지를 할 때 나는 그 사람이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았어요. 그 사람은 광인이었어요. 나한테 못되게 굴고 소리쳤다가는 금방 돌아서서 무릎 꿇고 빌고 1993년에 연락을 끊을 수밖에 없었던 것도 다 그 때문이었어요. 그 사람이 귀국 후 함께 살자는 말에 응했던 것은 감옥밖으로 나왔으니까 변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어요. 하지만 그는 하나도 안 변했어요. 여전히 난폭했고 나한테 말로 할 수 없는 정신적 고통을 수 없이 주었어요. 그래서 다시 뛰쳐나온 겁니다』
頓여인의 가출 후 등장하는 여인이 朴모(44)여인이다. 부산 범일동에서 꽃집을 운영하는 朴여인과 權씨가 알고 지낸 것은 權씨가 귀국한 지 얼마 안 돼서다. 범일동 소재 한 식당에서 權씨를 만난 朴씨는 權씨 어머니의 영정에 매주 한 번씩 꽃을 바치기로 약속했다. 그때가 1999년 9월22일이었다. 두 사람의 관계는 그 이상 가까워지지 않다가 頓여인이 잠적한 후 朴여인이 權씨에게 위로 전화를 하고, 權씨 집을 위로 방문하는 정도로 발전한다. 수사 관계자에 따르면 權씨는 이 무렵에 2회에 걸쳐 구혼을 했고, 첫 구혼 때는 거절했던 朴여인이 고민 끝에 權씨의 구혼을 받아들이면서 급속도로 가까워졌다고 한다.
두 사람은 함께 여행을 다니기도 했고 7월부터는 일본어를 배운다는 명목으로 이틀에 한 번씩 朴여인이 權씨의 아파트를 찾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朴여인의 남편이 눈치를 채게 됨으로써 살인미수 사건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權禧老씨와 같은 구치소에 수감돼 있는 한 재소자는 三中스님에게 보낸 편지에서 權씨의 근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희로씨의 하루 일과로는 오전 朴00씨의 접견으로부터 시작하여 朴씨께 편지 쓰는 것으로 하루를 마감하는 것 같아요. 참 늘그막에 사랑에 푹 빠졌나 봐요. 朴씨의 사진을 온벽에 가득 붙여놓고 朴씨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족한 지 매일매일 기쁨으로 충만해 있습니다>
權禧老의 행복
편지에 적힌 대로 朴여인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權씨를 면회하고 있었다. 朴여인은 『그분이 나를 매일 기다리는 게 희망이듯 나도 그분을 매일 만나는 게 희망』이라면서 앞으로의 계획을 묻자, 『그분을 위해서 살 것』이라고 말했다.
朴여인은 현재 남편과 별거상태로 지내고 있다. 항간에는 朴여인이 사건 후 權씨의 아파트에서 기거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과 다르다. 朴여인은 부산에 있는 한 절에서 묵고 있고, 權씨의 아파트에는 우편물 등을 챙기기 위해 간혹 들른다고 한다.
權씨가 사는 아파트 경비원도 朴여인이 그곳에 머물지 않고 가끔 들르기만 한다고 전했다. 사건 후 종업원에게 가게를 맡겼다가 한 달 전부터 다시 직접 장사를 시작했다는 朴여인의 모습은 의외로 밝았다. 그녀는 『나로 인해 그분이 이렇게 됐고, 세상이 우리를 주목하고 있다』면서 『나는 이런 일들이 자업자득이고 업보라고 생각하며 그분 곁에서 살아갈 것』이라고 다짐하듯 말했다.
權씨는 朴여인을 가리켜 『이 세상에서 나를 다스릴 수 있는 유일한 여자』라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權씨가 朴여인의 말을 잘 듣는다는 말이다. 朴여인은 權씨와의 만남을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 朴여인에게 權씨에게 지금 당장 절실한 게 무엇인지를 물었다. 그녀의 대답은 이랬다.
『그 분의 가장 큰 문제는 애정결핍이에요. 그 분이 영웅으로 떠받들어졌을 때 그 분 곁에는 많은 사람이 있었지만 그 분은 외로웠습니다. 그 분이 감옥에서 나오면, 아니 지금부터 그 분은 영웅이 아니고 자연인 권희로입니다. 하지만 그는 지금 행복하고 앞으로도 행복할 겁니다. 내가 그 분을 외롭게 만들지 않을 겁니다』
기자는 權禧老씨를 취재하면서 품었던 의문, 감옥에서도 일본에 굴하지 않는 한국인의 기개를 보여준 權禧老와 유부녀와 사랑에 빠져 그 유부녀의 남편을 살해하려고 했던 한 노인의 모습 중 어느 것이 진짜 權禧老인가에 대한 답을 끝내 얻지 못했다. 분명한 것은 의문의 前者(전자), 즉「감옥에서도 일본에 굴하지 않는 한국인의 기개를 보여준 權禧老」라는 偶像은 무너졌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