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적인 눈빛
徐廷友(서정우·57) 변호사는 인상적인 눈빛을 가졌다. 단번에 상대를 압도하는 정열의 눈빛은 아니지만, 안경 너머 그의 눈을 들여다보면 은근하면서도 힘 있는 호소와 설득력을 느낄 수 있다.
「사나이」를 연상시키는 널찍한 어깨와는 거리가 먼, 조금은 안으로 굽은 듯한 어깨, 어딘지 조금 어색해 보이는 옷 매무새, 주머니에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아도 불룩해 보이는 사람. 허리를 곧추세우고 걷기보다는 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넣은 채 생각에 잠겨 조금 구부정한 모습으로 걷는 모습이 어울리는 사람이 바로 徐변호사다.
그가 수임해 1심에서 사실상 무죄판결을 이끌어냈던 姜慶植(강경식) 전 경제부총리와 金仁浩(김인호) 전 청와대 경제수석에 대한 외환위기 사건 공판의 선고가 있기 며칠 전인 지난해 가을 어느 날, 기자는 서울 서초동 서울지방법원 엘리베이터 안에서 徐변호사를 만났었다.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기자가 물었어야 할 질문이었을 법한데, 徐변호사에게 선수를 뺏겼다. 우물거리던 기자는 『무죄 같긴 한데 1심이라서』라며 말꼬리를 맺지 못했다. 기자의 대답을 들은 徐변호사는 고개를 끄덕거릴 뿐,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만 지었다.
며칠 뒤 직무유기 혐의 무죄, 직권남용 혐의 선고유예 등 사실상의 무죄판결이 났을 때 徐변호사는 재판부에 감사를 표하는 것으로 소감을 대신했다. 徐변호사의 勝訴(승소)소감은 『용기 있는 판결을 내려준 재판부에 경의를 표한다』는 것뿐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의 「우물우물 답변」이긴 했지만 『제 말이 맞았죠』라고 자랑(?)이라도 하고 싶은 은근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던 기자의 촌스러움이 부끄러웠던, 간결한 답변으로 기억된다.
미루어 짐작했고, 이번에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徐변호사에게 확인한 사실이지만 당시 徐변호사가 소속된 법무법인 「광장」은 축제 분위기였다고 한다. 전날 저녁부터 판결 결과가 알려지기 직전까지 이어지던 徐변호사의 줄담배는 무죄 판결 결과가 알려지면서 그쳤다고 한다. 물론 기뻐서 또 한 대 피워 물었을지 모르지만.
사실 엘리베이터에서 있었던 기자의 「우물우물 답변」은 재판과정을 지켜봤던 많은 기자들과 방청객들이 생각에 담아두고 있던 것이었을 게다. 상대방의 논리적 허점을 파고드는 徐변호사의 정연한 변론과정을 지켜본 사람이었다면 당연히 가졌을 생각이다.
徐변호사를 잘 아는 사람들은 그가 감정을 겉으로 쉬 드러내진 않지만 잔정이 많고 유머가 있는 인물로 기억한다. 20여년의 법관생활과 초대 대법원 수석재판연구관(고등법원 부장)을 거치면서 쌓은 쟁쟁한 경력 이외에도 그의 간단없는 노력을 높이 평가하기 때문이다. 「장래 대법관감」이라는 주위의 기대를 저버리고 그가 지난 93년 변호사로 개업했을 때 주변의 안타까움을 산 것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현재 법무법인 광장의 공동대표 변호사로 있다. 그가 배석판사 시절 부장으로 모셨던 朴禹東(박우동) 전 대법관이 대표였을 때 「부대표」 격으로 합류했다가, 지금은 朴변호사가 대외적인 일과 소속 변호사들의 교육을 맡고 경영 등 「집안살림」은 徐변호사 몫이 됐다. 그의 말대로라면 경기고등학교를 中上位(중상위) 정도의 성적으로 졸업했고, 서울大 법대 재학시절에도 중간 정도 성적, 사법시험(6회)도 어중간하게 합격했다. 자칭 항상 중간이었다던 그가 최고로 대접받는 이유는 뭘까.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기자는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徐변호사와의 인터뷰는 5월2일 오전 법무법인 광장의 회의실을 빌려 이루어졌다. 인터뷰는 점심식사 시간을 포함해 3시간 만에 끝났다. 徐변호사는 특유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때론 유머를 섞어가며 말을 이어나갔다.
徐변호사는 누구 못지 않은 喫煙家(끽연가)이다. 외환위기 사건 재판 당시 재판이 길어져 잠시 休廷(휴정)할 때면 어김없이 담배를 입에 물었다. 법무법인 광장이 자리한 포스코 빌딩은 건물 전체가 「금연구역」. 하지만 그의 사무실은 치외법권 지역이다. 『발각이 되면 창피를 당하겠지만 그때까진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냐』며 인터뷰 중에도 연신 담배를 입으로 가져갔다.
―담배를 꽤 즐기시는 것 같습니다. 법정 밖에서도 가끔 그런 모습을 뵌 것 같구요. 끊을 생각은 안해보셨습니까.
『하루 평균 한 갑 정도 피우는데 일이 있으면 세 갑도 네 갑도 좋습니다. 법정에서도 변론을 하다 담배 생각이 간절할 때가 있어요. 사법연수원 교수로 강의를 할 때도 문득 담배 생각이 나면 참기가 힘들었지요. 여러 번 끊어도 봤는데 의지가 약해서 그런지 이내 다시 피우게 되더군요』
京幾高 3大 기적 중 하나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사실 변호사님에 대한 뒷조사(?)를 좀 했습니다. 판사들에게 수소문해서 숨겨진 얘기들을 좀 들었죠. 그 중에 하나가 대학시절 연애를 열심히 하면서도 사법시험에 쉽게 통과한 일을 두고 자칭 「경기 3大 기적 중 하나」라고 말씀하신 일이 있다던데요.
『누가 그런 얘길 다 해줍디까. 그런 말을 한 적은 분명 있습니다. 정확하게는 연애하다가 司試(사시)에 붙은 것이 기적이 아니라, 사실은 내가 법대 다닐 때 성적이 별로 좋지 않았고, 우수한 사람들이 워낙 많았고 해서 어중간한 내가 합격한 것이 기적이라고 얘기한 것입니다』
―부친께서 변호사이셨던데(그의 부친은 일제시절 高試 행정과에 합격한 서극형 변호사로 지난 98년 타계했다) 법조인의 길을 택한 것은 혹시 부친의 영향은 아닙니까. 위로 형님이 두 분 계시던데 법조인과는 관련이 없고 모두 외국에 계시더군요(그의 큰 형인 서정훈씨는 미국 GM社 이사, 둘째형 서정윤씨는 웨스팅하우스 上海지사장이다).
『그렇진 않아요. 법조인 代를 이어야 한다는 말씀을 하신 적은 없습니다. 법조인의 길을 택한 것은 사실 우연한 결정이었어요. 사실 저는 고교 3학년 여름까지 理科生(이과생)이었습니다. 의대에 가겠다고 했었죠. 그런데 친구들이 「너는 의사 체질은 아니다」라고 그러는 거예요. 머리가 나쁘다고 그런 건지 잘 모르겠지만요(웃음). 轉科(전과)를 고민하고 있는데 때마침 문과생 친구 중 이과로 옮기고 싶다는 친구가 있어서 맞바꾸게 됐습니다. 그땐 맞바꿀 수 있어야 轉科가 가능했습니다』
―법관직을 사직하실 때 얘기를 좀 해주십시오. 듣기론 협심증을 앓고 있던 부인의 약값도 없고 경제적 문제도 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만. 대법관감이 나간다고 해서 주변의 아쉬움도 많이 사셨다는데요.
『사실 경제적인 문제로 나갔다는 것은 맞아요. 부끄러운 얘기지만 그때 돈 없어서 나왔어요. 고등부장 월급이 적다면 나쁜 놈이라고 욕을 먹을 겁니다만. 또 가난하게 산 것도 아니고 먹을 것 먹고 입을 것 입으면서 살았지만 모아 둔 돈이 없었어요. 큰 돈도 아닌 100만원 정도 돈이 필요했는데 글쎄 그게 없더라구요.
지금 사위가 됐습니다만 제 딸이 남자친구를 소개해서 시집보낼 걱정도 들던, 그런 시절이었습니다. (사직 결정을 위해서는) 아내의 결재가 제일 큰 문제였는데, 평소 「고기 대신 콩나물 먹으면 되지 않느냐」고 얘기하던 아내가 말을 꺼내자마자 그러자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날로 사직서를 냈어요. 상사들에겐 혼이 좀 났죠. 당시엔 고등부장이 사표내고 나가는 일이 흔치 않았거든요.
법원에, 또 후배 판사들에게 끼칠 영향도 있었고. 한 선배가 꾸지람을 하시길래 「그럼 저 먹여 살려 주실 겁니까」 했죠. 물론 농담이지만요. 대법관 얘기는 제가 법원에 있으면서는 들어보지도 못했고 꿈도 꾸지 못할 자립니다. 지금 제 동기생들이 참 우수한 사람이 많아요. 그들이 지금 대법관 후보群에 올라 있지만 아마 제가 법원에 있었으면 저는 그림자도 없었을 겁니다. 저는 항상 중간 정도의 실력이었고, 뛰어난 사람들을 따라잡아보려고 노력만 무척 했어요. 그런데 막상 사표를 던지고 나니 그런 얘기가 나오더군요. 「사표를 내니까 대법관 되는구만」이라면서 아내 하고 맞장구를 치면서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웃음)』
李一珪·李會昌 존경
―수석재판연구관을 2년6개월 하시면서 대법원장을 비롯해 많은 대법관들을 지척에서 보좌했을 텐데 기억에 남는 분들이 있습니까.
『당시 李一珪(이일규) 대법원장 시절이었습니다. 참 엄한 분이셨는데 판사가 일 잘하는 것은 당연한 일로 생각하시고 공부 안하는 판사는 호되게 꾸짖는 분이셨어요. 법원장 시절엔 배석판사들의 판결문까지도 꼼꼼히 챙겨보셨죠. 하지만 판단 결과에 대해서는 당신 생각과 달라도 전혀 말씀을 하지 않으셨어요.
가까이서 모시면 편안하고 잔정이 많은 분이셨습니다. 본인 스스로에게 그처럼 엄격하신 분이 없었어요. 제 마음속으로 항상 경외심을 가진 분이었습니다. 판사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그분으로부터 제대로 배웠다고 말하는 것이 맞을 겁니다.
지금 모시고 있는 朴禹東 전 대법관도 배석 때 부장으로 계셨는데 그분처럼 노력하시는 분은 없을 겁니다. 시간만 나면 도서실에서 연구를 하셨어요.
李會昌(이회창) 대법관도 잊을 수 없습니다. 제가 가장 존경하는 분으로 꼽을 수 있는 분입니다. 저를 무척 귀여워해주셨구요. 그분이 정치에 입문하셨을 때 별로 찬성을 하진 않았습니다만 대통령감으로 가장 적당한 인물이라고 생각했고, 지금도 변함없이 지지합니다.
정치판이 사람을 망친다는 말도 있지만, 법관 때부터 마음속에 가진 대쪽 같은 지조를 잃지 않을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게 없다면 그 분은 아무것도 아닐 겁니다. 어느 정권이고 법을 도구로 이용해 왔지만 李대법관은 법을 행동규범으로 여기시는 분입니다. 이론도 탁월하신 분으로, 만날 때마다 왜 나는 이런 생각을 못할까 하는 깨우침을 주셨습니다. 법이론뿐만 아니고 법의 정신이 무엇인지를 배웠습니다』
―따르는 후배들이나 가깝게 지내는 후배들이 있습니까.
『저를 따르는 것보다 제가 (후배들을) 따라다니는 분들이 많죠(웃음). 제가 술도 잘 못하고 해서 인간적으로 깊이 사귀진 못했습니다만, 다들 현역으로 법원에서 쟁쟁한 분들입니다. 申明均(신명균) 서울가정법원장이나, 孫智烈(손지열) 법원 행정처 차장이나 朴在允(박재윤) 서울지법 민사수석부장, 金滉植(김황식) 고법 부장 등은 후배이지만 제가 대단히 존경하는 분들입니다. 사석에선 「내가 당신들보다 먼저 태어난 것을 대단하게 고맙게 생각한다. 내가 늦게 태어났으면 명함도 못 내밀 텐데 그래도 선배라서 다행이다」라는 말도 하고 그랬습니다』
변론 초기엔 金仁浩 수석과 싸우기도
변호사 개업 이후 徐변호사는 항상 대형사건 재판의 중심에 서 있었다. 성수대교, 삼풍백화점 붕괴사건, 가수 김성재씨 피살사건, 이후 외환위기 사건과 稅風(세풍)사건에 이르기까지. 그중에서 그는 가수 김성재씨 피살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된 여자친구 김유선씨 사건과 외환위기 사건에서 무죄 판결을 받아냈다.
탄탄한 이론도 이론이지만 그의 끈질긴 노력 때문이라는 평가가 많다. 경제학 강의를 방불케 했던 외환위기 사건을 변론하기 위해 관련 서적을 30여 권이나 탐독했고 밤샘을 밥먹듯이 했다. 오전 8시에 출근해 밤 11시까지는 「기본」으로 일한다는 그가 끈질긴 노력파라는 데 이견을 다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동안 큰 사건을 참 많이 맡아 오셨는데 현재 수임하신 사건은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지금은 외환위기 사건 항소심이 진행중이고, 아시아 자동차 사기 사건, 稅風사건, 민사로는 JP모건과 SK증권 간 분쟁 사건을 들 수 있겠습니다. 모든 재판에 직접 참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최근 기억에 가장 남는 것은 1심 무죄판결을 받아낸 외환위기 사건일 텐데요, 숨은 얘기들을 좀 해주시죠. 변론에 필요한 경제학 지식은 어떻게 습득하셨습니까.
『사실 제가 경제학을 압니까. 막상 사건을 맡았을 때 뭐 아는 것이 있어야죠. 하지만 적어도 검찰보다는 많이 알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열심히 공부한 덕에 지금은 경제학자들이 모인 자리에 가면 무슨 소리를 하는지는 이해할 정도가 됐어요. 남의 사건을 맡아놓고 엉터리로 하면 안될 것 같고, 이 사건은 정책판단의 사법처리 문제를 다룬 것이라서 법적으로 큰 의미가 있겠다는 책임감도 들고 해서 사람들에게 물어보기도 하고 책도 많이 읽었어요.
기자들이 쓴 책까지 한 30권 봤죠. 당시 변론 요지서에 「정책판단을 사법처리한 것은 고대 그리스 이후엔 없다」고 썼는데 이건 미국의 한 정치학자가 해준 얘깁니다. 당시 세계적으로도 상당히 관심을 끈 사건이었던 것 같아요. 그 사람이 찾아와서 해준 얘기를 제가 좀 인용했죠.
변론을 맡았을 때 초기엔 金仁浩 前 수석과 사이가 좀 안 좋았어요. 제가 金수석을 구치소로 찾아가서 나눈 대화가 말썽이 됐는데, 수임 후 처음 찾아갔을 때 「변호사들 다 있는데 네가 왜 끼느냐」고 그러시더군요(金 전 수석은 徐변호사의 고교와 대학 1년 선배다). 변론 방향에 대한 그의 의사를 타진하기 위해 「잘못은 했다고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판단을 받는 방향으로 할 것입니까, 아니면 결과적으론 마땅히 도의적 책임을 져야 하지만 법적으로는 무죄주장을 펴면서 당당히 싸울 겁니까?」라고 했더니 「넌 필요없다. 그런 얘기 하려면 가라」고 해서 변호를 하면서도 한동안 저하고 말도 안하셨어요. 전관예우나 받는 변호사라고 생각하셨던가 봅니다. 나중에 姜 전 부총리의 중재도 있고 해서 金수석을 달래서 변론을 했지요』
『권력에 저항하기보다 여론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가 더 어렵다』
―외환위기 사건 당시 「광화문에서는 돌멩이 맞을 일이지만 법적으로는 단연코 무죄」라는 말씀을 하셨다고 들었는데요.
『정확히 그런 말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여러 사람들에게 그런 취지의 말을 했습니다. 들끓는 여론의 비난을 지칭한 말이었어요. 여론은 사형에 처하라는 정도의 분노를 드러냈습니다. 하지만 정책의 잘못을 사법처리한다는 것에 동의할 수가 없었습니다. 당연히 무죄라는 생각을 했어요. 법적인 판단은 여론과는 별개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재판부의 현명한 판단에 경의를 표하고 후배 법관이지만 당시 재판장인 李鎬元(이호원) 부장을 존경합니다. 저도 판사를 오래 했습니다만, 정부의 압력에 저항하는 것은 비교적 쉬운 일이지만 여론에 맞서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가수 김성재 살해사건
―가수 김성재 살해사건의 피고인 김유선씨가 무죄를 받은 일은 어떻습니까. 당시 사회적인 관심도 많았고, 언론에도 크게 보도됐던 사건이었는데요.
『김유선씨는 사실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습니다. 미혼의 처녀에게 무기징역은 사형선고나 다름이 없었지요. 사건을 처음 맡을 때부터, 당시 기록을 훑어보고 당사자들을 만나본 뒤 가진 느낌은 무죄라는 것이었습니다. 후배 변호사들의 의견을 구하고 싶어서 세 명의 후배 변호사에게 사건 기록을 읽어보라고 말했습니다. 결론은 두 명은 무죄라는 의견이었고 나머지 한 명은 아무리 보아도 김씨가 살인범이라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김씨가 살인범이라는 의견을 낸 변호사와 함께 일을 시작했습니다.
생각이 한쪽으로 치우치는 것을 막을 수도 있고 완벽한 변론을 위해서는 그편이 나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습니다. 고생도 많이 했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이 달려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신중에 신중을 거듭했고 돈을 많이 받고 안 받고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재판 진행과정에서 검찰이 제시한 유죄의 증거들을 하나하나 제거해 갈 수 있었는데 딱 한 가지가 걸렸습니다.
당시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시체를 찍은 사진이 있었는데 그 사진을 근거로 사망시간이 추정됐습니다. 당시 법의학자들의 분석에 의하면 사진상으로 나타난 사망추정시간으로는 김유선이 범인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며칠을 엎치락뒤치락하면서 잠을 못 자고 고민 고민했는데 문득 「사진기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사진을 한번 찍어봤습니다. 그랬더니 살아 있는 사람이 (죽은 사람과) 똑같이 나오더라구요.
즉시 재판부에 감정신청을 하고 모의 실험을 해보기로 했습니다. 屍身(시신)과 살아 있는 사람을 침대에 올려놓고 찍어서 비교하는 실험이었어요. 그때 또 한 가지 문제가 발생했는데, 누가 모델을 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누가 올라갈 거냐고 주위를 둘러보는데 뜻밖에도 김씨가 유죄라고 생각했다는 후배 변호사가 자청을 했어요. 현직 변호사가 벌거벗고 屍身을 올려놓는 침대에 올라가 사진을 찍었습니다. 결과는 屍身과 산 사람의 모습이 똑같이 나왔습니다. 屍身에 생기는 얼룩(사반)까지 나오더군요. 그 이후는 (재판) 결과를 볼 필요도 없었죠』
徐변호사의 「법정비화」를 더 듣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그래서 또 다른 질문을 던졌다.
―형사사건을 맡은 판사의 경우, 알쏭달쏭한 사건이나 도대체 알 수 없는 사건의 경우엔 현장 검증 등으로 모자라서 자신이 직접 시뮬레이션을 해보는 경우가 있답니다. 점잖지 못한 얘기지만 한 판사로부터 「청바지 입은 여성을 성폭력하는 것이 가능한가」 「엑셀 승용차 운전석에서 성폭력이 가능한가」 같은 경우의 사건을 심리하기 위해 며칠간 고민한 끝에 부인을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말을 듣기도 했었는데요. 변호사님은 그런 경험 없으십니까.
『지나가는 말처럼 했겠지만 법관들은 실제로 그런 고민들을 많이 해요. 자기 판결이 옳았는지 틀렸는지에 대해서도 늘 고민을 가지고 삽니다. 제가 형사재판부 부장을 할 때 있었던 사건인데 자기 아버지를 살해한 범인이 기소돼 왔어요. 모든 증거들이 모두 유죄의 증거였는데 이번에도 딱 한 가지가 걸렸어요.
새벽 2시에 자기 아버지를 죽이고 강도로 위장하기 위해 동네 한 바퀴를 뛰어서 집에 다시 들어왔다는 그런 스토리였어요. 당시 목격자가 시험공부를 하던 학생이었는데 밤 2시에 「구둣발로」 뛰어가는 소리를 들었다는 겁니다. 아버지를 아무 이유없이 죽였기 때문에 당시 유죄가 인정되면 사형 아니면 무죄였는데 이 문제 때문에 판단이 잘 안 서는 겁니다. 살인범이 태연하게 구두를 신고 도망을 쳤다? 선고날짜는 다가오는데 참 답답합디다.
고민고민하다가 결국 선고 이틀 전에 배석판사들과 현장에서 試演(시연)을 하기로 했죠. 밤 2시 시간을 맞춰서 똑같은 장소에 가서 배석판사가 범인 役을 하기로 하고 저는 목격자인 수험생 역할을 맡아서 그 학생의 방으로 올라갔습니다. 「뛰어보세요!」라고 외쳤더니 막 뛰는 거예요. 발자국 소리가 하도 크게 나길래 「아, 신발 벗고 뛰시오」라고 외쳤는데 배석판사 왈, 「맨발입니다」라는 겁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어요. 시멘트 바닥에서 맨발로 뛰는데 꼭 「구두 신고 뛰는 소리」가 나는 겁니다. 결국 모든 의문점이 풀리게 된 거죠. 모든 사건이 비슷하겠지만 강력사건에서는 피의자들이 항상 혐의를 부인하게 마련입니다. 그럴 경우 법관들은 판단에 항상 고민과 오판의 위험성을 안고 삽니다』
성수대교 재판에선 敗訴
무죄 판결을 많이 이끌어낸 徐변호사지만 아픈 기억도 있다. 성수대교 사건이 그 대표적인 경우. 그는 당시 서울시 구청 하위직 공무원들의 변호를 맡았지만 패소했다. 그는 당시 대법원 확정 판결에 아직도 아쉬움이 많다고 했다.
『당시 대법원의 판결에 아직도 아쉬움이 많이 남아요. 법원이 응보주의에 너무 치우친 것 같다고나 할까요. 당시 구청 공무원들의 혐의내용은 다리의 부실과 붕괴위험을 알면서도 제대로 막지 못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과연 그만한 지식이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을 가졌고 전문가들에게 문의해서 증언을 이끌어냈습니다.
성수대교 같은 철구조물 다리의 붕괴위험의 경우 외국은 상황상황에 따라 지표들이 정해져 있는 것이 관행이지만, 우리나라의 경우는 그런 것이 전혀 없는 상황이었거든요. 전문가들은 적어도 그 분야의 석사학위 정도를 가진 전문가라면 위험의 징후를 판단해 낼 수 있을 것이라고 얘기했습니다. 그들의 증언이 법정에서 증거로 채택됐죠. 그런데 당시 기소된 공무원들은 대부분 工高(공고) 출신들이었어요.
석사학위를 가진 사람 정도가 판단해 낼 수 있는 사안을 고등학교 졸업 학력만으로 어떻게 알아낼 수 있느냐는 것이 제 논리였지요. 하지만 대법원은 「그렇다고 해도 모르면 공부를 해서라도 알아냈어야 한다」는 식이었습니다.
참 아쉬움이 남고, 맘에 안듭니다. 어떻게 工高 나온 사람에게 월급도 조금 주면서 공부해서 석사가 되라고 요구할 수 있을까요. 좋은 얘기이긴 하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을 요구한 판결이었다고 저는 봅니다』
미국 법관들에 비해 우리가 뒤지지 않는다
徐변호사가 퇴직할 무렵인 1993년만 해도 법관들의 퇴직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요즘은 중견간부들의 퇴직이 러시를 이룬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 같다.
『법관으로 임용되는 사람은 경제적인 문제는 어느 정도 각오를 하고 시작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친구들과 비교해서 차이가 나는 것은 사실입니다. 법관은 꿈을 먹고 사는 직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저희가 법관이 될 때만 해도 주위에서 판사라고 하면 참 존경을 해줬습니다. 그런데 최근 들어 판사들이 자긍심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공직자라면 국가에 봉사한다는 자긍심으로 생활을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요즘은 완전히 사라져가고 있어요. 제가 대법원 수석재판연구관 시절, 밤 늦게까지 일을 하다 층계를 더듬거리면서 내려 와서 퇴근을 하곤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마음은 정말 뿌듯했습니다. 그 재미로 저는 판사생활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의 법관들과 우리 법관들을 비교할 때 저는 우리 법관이 청렴도나 실력 면에 있어서 전혀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미국의 소설이나 언론은 법관을 신성한 것으로 그리는 반면 우리는 반대인 것 같습니다. 공무원들을 자꾸 격려해주는 사회분위기가 조성되면 될수록 그들은 더욱 청렴해지고 열심히 일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자기 책임이 선행돼야 하겠지만 언론이나 사회가 한쪽으로 너무 몰아가는 식이 되어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합니다』
―법관이 초심을 유지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보수 인상 등 현실적인 처우개선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많습니다.
『법관의 자긍심이 많이 떨어지고 있다는 말을 자조적으로 표현하는 말이 있어요. 옛날엔 사표를 내려고 하면 가족들이 나서서 극구 말렸는데, 요즘은 아내가 먼저 왜 사표 안 내느냐고 닦아세운다는 농담섞인 말입니다. 사실 지금 법관 봉급이 적긴 적죠. 많은 판사들이 처가의 도움을 받기도 합니다. 사실 저도 초임 시절엔 처가의 도움을 받곤 했어요. 하지만 자긍심이 있다면 큰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돈은 나중에 변호사를 하면 먹고 살 만큼은 벌 거라는 생각을 해요. 변호사가 큰 부자가 되긴 힘들지만 생활하는 데는 지장이 없을 정도는 됩니다. 일하는 시간만큼 버는 직업이기 때문이죠. 판사봉급이 변호사들에 비하면 적지만 상대적으로 그리 적은 월급은 아닙니다』
『나는 人權 변호사가 아니고 物權 변호사』
―판사시절 연수원 교수를 하셨습니다만 1997년부터 연수원에서 변호사 실무를 가르치신다고 들었습니다. 지금도 후배 법조인들을 가르치십니까. 그들에게 무슨 말씀들을 해주십니까.
『얼마 전에 잘렸습니다. 권광중 원장이 부임하면서 쉬고 싶다고 했더니 처음엔 안 들어주다가 면직을 시켜주더군요. 그만두시는 분들과 權원장이 식사를 하는 기회가 있었는데 「다른 분들은 너무 수고하셔서 이제 그만 고생을 면하게 해드리는데 徐廷友는 잘렸습니다」라고 농을 걸어서 한번 크게 웃은 적이 있습니다.
연수원생들에게는 그런 얘기를 많이 합니다. 공부를 안하는 변호사, 실력 없는 변호사는 쓸모가 없다, 공부 안하면 너희들 사법시험 붙은 것도 말짱 헛일이다, 부단히 실력을 연마하라고 얘기합니다. 엉터리 변론을 하는 변호사는 사기꾼이나 다름 없다는 얘기도 합니다. 거액의 수임료를 주고 사건을 맡긴 사람들에게 그만한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인권 변호사도 마찬가집니다.
사실 1세대 인권변호사는 정말 쟁쟁한 분들이 많았습니다. 姜信玉(강신옥) 변호사나 洪性宇(홍성우) 변호사 같은 분은 법이론에 대해서도 大家로 손꼽히는 분들입니다. 그런 분들이 활약을 하셨기에 우리나라의 인권이 이만큼 성장을 할 수 있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요즘은 좀 다른 것 같습니다(그는 이 대목에서 담배를 하나 피워 물었다). 극히 일부이긴 하지만 「나는 인권 변호사를 할 거니까 공부 안해도 상관없다」는 얘기를 하는 예비법조인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충고를 해줍니다. 우스개 얘기로 저 같은 로펌 변호사들을 인권 변호사에 빗대 「物權(물권) 변호사」라고 합니다. 저는 인권 변호사를 지망하는 연수원생들에게 「나 같은 物權 변호사를 이기려면 그만큼의 실력을 갖춰야 한다」고 잔소리를 합니다. 그러다보니 저를 잔소리꾼이라고 싫어하는 경우도 많은가 봅니다. 하지만 저는 항상 공부하고 자신이 뒤진다고 생각하면 노력하는 것을 제 신조로 삼아왔습니다』
―법률시장 개방 문제가 법조계의 당면 문제로 떠오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보십니까.
『우리나라는 이미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우리끼리만 해결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이미 상당부분을 외국 로펌 등과 함께 문제를 해결하고 있어요. 외국에 나가서 하느냐 국내에서 하느냐의 문제는 아니죠. 문제는 실력없는 외국 변호사 등이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엉터리 변론을 했을 경우 나타나는 부작용이나 우리의 국익을 침해할 우려가 있다는 점 등에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아직은 크게 걱정할 단계는 아니라고 봅니다. 미국의 경우 법률서비스를 비즈니스적인 측면에서 보지만 우리는 공익적인 성격이 강하다고 보는 법률문화의 차이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우리나라의 변호사는 돈을 벌기 위해 개업을 했지만 공익적인 성격이 무척 강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배우지 않았습니다. 다만 너무 폭넓게 개방을 할 경우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것은 적절히 수위를 조절해 나가야겠죠』
『검사는 국가의 권한을 자신의 권한으로 착각하면 안된다』
―20여년의 법관생활을 거쳐 7년간의 변호사 생활까지 30년 이상 법조인으로 살아가시면서 갖게 된 법조론에 대해 말씀해주시죠.
『저는 검찰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하지만 연수원이나 젊은 변호사들에게 이런 말들을 해줍니다. 판사가 공정해야 한다는 것은 직업 자체가 그러니까 새삼 강조할 것도 없는 것이고,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판사는 제 느낌에는 그렇습니다. 귀를 열어두고 있어야 합니다. 자기 주관이 아니라 의견이 다른 많은 사람들의 얘기를 듣고 존중할 줄 알고 자기 것으로 만들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法의 형평을 찾는 길입니다.
검사는 권한을 자제할 줄 알아야 할 뿐만 아니라, 범죄에 대한 불타는 증오심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대신 그것은 국가의 권한입니다. 자신의 권한으로 착각을 해서는 안됩니다. 간혹 그런 사람들이 있죠. 무죄를 주장하는 사람들을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법원이 무죄를 선고하면 자신의 권위가 깎이는 것으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국가가 국민을 위해 부여한 권한을 자신의 것으로 착각해서는 절대 안됩니다.
변호사는 내가 하는 일이 사회악을 끼치는 것이 아닌가를 항상 의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법률이란 칼의 양날과 같아서 잘못 쓰기로 한다면 얼마든지 사회에 큰 해악을 끼칠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저 자신을 독실한 크리스천이라고 말하면 많은 분들이 꾸중을 하시겠지만 아내를 따라 교회에 나가서 항상 드리는 기도는 「제가 하는 일이 남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게 해 주십시오」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직업인으로서의 제 기도입니다.
후배들에게 자주 듣는 질문이 「변호사가 거짓말을 해야 한다면 어떻게 합니까」라는 것입니다. 저는 모른다면 할 수 없겠지만 아는 한에서는 절대 거짓말을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당사자의 이해관계에 대해 미주알 고주알 일러바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소송 천국이라고 불릴 정도로 고소·고발의 남발과 넘치는 소송 속에 묻혀 있습니다. 법관들의 업무과중 문제도 바로 이런 문제에서 기인한다고 보는 사람이 많습니다. 올바른 소송문화를 위해 어떤 것이 필요하다고 보십니까.
『우리는 재판을 하면서 요행을 바라는 측면이 많은 것 같습니다. 법관의 실수를 바란다든지 하는 것 말이죠. 저는 법치주의, 법대로 하자는 말을 무척 좋아합니다. 법대로 하자는 말이 무조건 소송으로 해결하자는 뜻은 아니죠. 법의 정신에 따르자는 말이죠. 법이라는 것이 뭡니까. 법은 상식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개개인이 가진 상식의 조화가 중요한 것이죠. 성문법도 그 때문에 나온 것이죠. 은행원이 돈을 떼먹었다고 칩시다. 누가 손해를 봐야 할까요. 고객입니까, 은행원입니까, 아니면 은행입니까. 누군가는 책임을 지게 만든 것이 법입니다.
법대로라면 누군가는 반드시 손해를 보게 됩니다. 법대로 하자는 얘기는 상식의 선에서 화해와 타협을 유도하자는 뜻입니다. 저는 지방부장 시절 처음으로 집중심리제를 도입해봤습니다. 1심을 진행하면서 그 결과와 함께 재판부의 의견을 분쟁 당사자에게 일러주어 화해를 유도하고 濫(남)항소, 濫상고를 방지하는 것이죠.
그러던 와중에 법원장님이 저를 부르시더니 「徐판사 때문에 내가 죽겠다. 변호사들마다 와서 너를 욕하는데 어떻게 된 거냐」 하시는 겁니다. 남들이 안하던 일을 하다보니 쌍방의 변호사에게 다 욕을 먹게 된 것이죠.
법의 정신이란 법에 따라 평화적으로 해결하자는 것이 목적이지 분쟁을 붙이자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모두 재판으로 해결하자는 뜻도 아닙니다. 화해를 잘 이끌어내는 판사로 지금은 개업한 李健雄(이건웅·열린 합동 대표변호사·1994년 서울고등법원 부장 재직시 퇴직)씨가 유명했습니다. 저와 같이 소액단독을 할 때였는데 절반 이상은 화해가 되는 겁니다.
그 비결이 궁금해서 물었더니 해답이 이렇더군요. 우선 원·피고 쌍방에 「내가 판결 많이 틀리기로 이름난 판사인데 그러다 나중에 날벼락 맞지 말고 타협을 하는 것이 좋겠다. 시간을 30분 주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는 겁니다. 그러면 당사자들도 십중팔구 법정 밖에서 타협을 해온다는 거예요.
사실 李健雄 부장처럼 근엄한 얼굴을 가진 사람이나 써먹을 수 있는 秘法이지 저같이 생겨가지고는 힘든 방법이더군요. 저도 써먹어봤는데 잘 안되더라구요. 제가 가장 경멸하는 판사는 모든 것을 다 안다는 식의 오만에 빠진 사람입니다. 판사는 그런 오만에 빠지면 안됩니다』
『헌법에 언론이 제4府라고 적혀 있나요?』
徐변호사는 언론관련 분야의 소송과 이론에 대해서도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기자들이 이 분야의 논문을 쓰거나 학위를 얻고자 할 때 빠짐없이 찾아가는 사람 중 한명이다. 그는 朝鮮日報가 국내 언론 중 처음으로 실시한 변호사 기사열람제의 고문 변호사로 아직도 활약하고 있다. 무척 귀찮은 일이겠지만 언론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개인의 사생활 침해 소지 등을 차분하고 설득력 있게 지적해 주곤 한다.
―대법원 수석 재판연구관으로 계실 때 사실상 대법원 공보관 역할을 하셨다는데요. 기자들과의 사이에서 재미있는 일화는 없습니까.
『당시 대법원엔 공보관 제도가 없을 땝니다. 사실상 대법원의 기사를 제공하는 역할을 했는데 자꾸 오보가 나곤 했습니다. 거꾸로 나곤 했어요. 오보가 나면 제가 윗분들께 꾸중을 들어야 할 판이었어요.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제가 직접 나서서 판결이 날 때마다 기사를 제공하고 박스기사까지 주제를 잡아주곤 했어요. 그래선지 기자들이 나를 참 좋아했습니다. 일을 덜어줘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기자협회에선 감사패까지 받았습니다.
감사패를 받을 당시 한 기자가 농담으로 「세상에 공무원이 기자들에게 커피 한 잔 안 사고 감사패받는 사람은 판사님이 처음일 겁니다」라고 했어요. 진짜로 커피 한 잔 사지 않았거든요. 기자들이 사주는 주스를 얻어먹으면 먹었지(웃음). 기자들하고 친한 덕분에 퇴직할 때 신문에 큰 박스 기사가 나간 적도 있어요.
사실 무척 창피스러운 일이었고 오보였어요. 「대법관감이 나간다」는 기사였는데 그 기사 때문에 법원 간부들에게 불려가서 혼난 일도 있습니다. 「너 때문에 판사들 사기 다 떨어지게 생겼다」는 얘기였습니다. 사실 내게 한 번만이라도 물어봤더라면 안 나갔을 기사였는데. 나중에 기자를 만나서 제가 「만나보니까 별 것도 아닌 사람 아니냐. 완전 오보다」라고 말하면서 크게 웃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기사로 인한 명예훼손 책임을 묻는 소송들이 최근 급증하는 추세입니다. 언론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을 말씀해 주십시오.
『언론의 자유는 항상 정치적인 국민의 지지를 받아왔습니다. 그러나 무관의 제왕이니 제4府니 하는 명예로운 이름은 기자 개개인이나 언론사에 부여된 것이 아닙니다. 저는 농담으로 그럽니다.
「언제 누가 무관의 제왕이라고 했나, 헌법에 제 4府가 있나?」
언론은 자유에 걸맞은 책임을 져야 합니다. 또 검사들의 예를 들 때 말씀드린 것처럼, 국민들이 언론을 지지하는 것은 언론이 사회의 목탁이기 때문이지 기자의 권한을 인정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만 항상 마음에 새긴다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김유선씨 사건을 진행하면서 모 방송사와 명예훼손 소송을 벌인 적이 있었습니다. 많은 액수는 아닙니다만 최근 고등법원에서 승소판결을 받고 확정됐습니다. 당시 많은 언론들이 추측보도를 했는데 유독 왜 그 방송사만을 문제삼았는가 하면 다른 언론사들은 그래도 균형감각을 유지하려고 노력한 반면, 그 방송사는 그런 노력을 포기했다는 것 때문입니다. 여러 차례 자료제공 등을 제의했으나 거절당했고 억울하면 소송하라는 식으로 나온 데 대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법원을 향한 애정
점심식사 자리까지 이어진 인터뷰를 마칠 무렵 徐변호사는 법관 초년병 시절의 일화를 하나 끄집어냈다. 지방 법원에 처음 부임하고 며칠 지나지 않아서였다니까 1960년대 후반 얘기다. 법관이 뭔지도 모르던 시절 얘기라면서, 그는 한 民事사건과 관련해서 양측의 변호를 맡고 있는 까마득한 선배 변호사들과 술을 마셨다고 했다(『지금 같으면 아마 큰일 날 얘기겠죠?』 라는 말을 덧붙였다).
술 실력이 형편없었음에도 새벽 2시까지 어느 술집에서 술을 마신 뒤 겨우 출근한 다음 날이 마침 그 사건 재판 기일이었다. 그런데 양쪽 변호사가 다 나오지 않아 쌍방불출석으로 사건을 취하시켜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술을 「얻어마신」 죄로 우물쭈물하다가 재판장에게 『사건을 연기시켜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얘기를 꺼냈다가 『그것과 재판은 별개』라며 일언지하에 거절당해 머쓱해졌다고 한다.
며칠 후 술을 샀던 변호사가 판사실에 들렀을 때(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당시엔 변호사들의 판사실 출입에 큰 제한이 없었다) 미안한 마음에 벌떡 일어선 그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사정을 말했을 때, 그 老변호사는 껄껄 웃으며 『그거야 당연한 일 아닌가』하고 흔쾌하게 말했다고 한다. 그 「너그러움」에, 주눅들었던 초임판사의 마음이 활짝 펴졌음은 물론이다.
기자는 그가 이 이야기를 꺼내면서 대부분의 판사들이 깨끗하고 바른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말하고 싶었으리라는 짐작을 했다. 법원을 향한 徐변호사의 변함없는 애정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사나이」를 연상시키는 널찍한 어깨와는 거리가 먼, 조금은 안으로 굽은 듯한 어깨, 어딘지 조금 어색해 보이는 옷 매무새, 주머니에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아도 불룩해 보이는 사람. 허리를 곧추세우고 걷기보다는 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넣은 채 생각에 잠겨 조금 구부정한 모습으로 걷는 모습이 어울리는 사람이 바로 徐변호사다.
그가 수임해 1심에서 사실상 무죄판결을 이끌어냈던 姜慶植(강경식) 전 경제부총리와 金仁浩(김인호) 전 청와대 경제수석에 대한 외환위기 사건 공판의 선고가 있기 며칠 전인 지난해 가을 어느 날, 기자는 서울 서초동 서울지방법원 엘리베이터 안에서 徐변호사를 만났었다.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기자가 물었어야 할 질문이었을 법한데, 徐변호사에게 선수를 뺏겼다. 우물거리던 기자는 『무죄 같긴 한데 1심이라서』라며 말꼬리를 맺지 못했다. 기자의 대답을 들은 徐변호사는 고개를 끄덕거릴 뿐,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만 지었다.
며칠 뒤 직무유기 혐의 무죄, 직권남용 혐의 선고유예 등 사실상의 무죄판결이 났을 때 徐변호사는 재판부에 감사를 표하는 것으로 소감을 대신했다. 徐변호사의 勝訴(승소)소감은 『용기 있는 판결을 내려준 재판부에 경의를 표한다』는 것뿐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의 「우물우물 답변」이긴 했지만 『제 말이 맞았죠』라고 자랑(?)이라도 하고 싶은 은근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던 기자의 촌스러움이 부끄러웠던, 간결한 답변으로 기억된다.
미루어 짐작했고, 이번에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徐변호사에게 확인한 사실이지만 당시 徐변호사가 소속된 법무법인 「광장」은 축제 분위기였다고 한다. 전날 저녁부터 판결 결과가 알려지기 직전까지 이어지던 徐변호사의 줄담배는 무죄 판결 결과가 알려지면서 그쳤다고 한다. 물론 기뻐서 또 한 대 피워 물었을지 모르지만.
사실 엘리베이터에서 있었던 기자의 「우물우물 답변」은 재판과정을 지켜봤던 많은 기자들과 방청객들이 생각에 담아두고 있던 것이었을 게다. 상대방의 논리적 허점을 파고드는 徐변호사의 정연한 변론과정을 지켜본 사람이었다면 당연히 가졌을 생각이다.
徐변호사를 잘 아는 사람들은 그가 감정을 겉으로 쉬 드러내진 않지만 잔정이 많고 유머가 있는 인물로 기억한다. 20여년의 법관생활과 초대 대법원 수석재판연구관(고등법원 부장)을 거치면서 쌓은 쟁쟁한 경력 이외에도 그의 간단없는 노력을 높이 평가하기 때문이다. 「장래 대법관감」이라는 주위의 기대를 저버리고 그가 지난 93년 변호사로 개업했을 때 주변의 안타까움을 산 것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현재 법무법인 광장의 공동대표 변호사로 있다. 그가 배석판사 시절 부장으로 모셨던 朴禹東(박우동) 전 대법관이 대표였을 때 「부대표」 격으로 합류했다가, 지금은 朴변호사가 대외적인 일과 소속 변호사들의 교육을 맡고 경영 등 「집안살림」은 徐변호사 몫이 됐다. 그의 말대로라면 경기고등학교를 中上位(중상위) 정도의 성적으로 졸업했고, 서울大 법대 재학시절에도 중간 정도 성적, 사법시험(6회)도 어중간하게 합격했다. 자칭 항상 중간이었다던 그가 최고로 대접받는 이유는 뭘까.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기자는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徐변호사와의 인터뷰는 5월2일 오전 법무법인 광장의 회의실을 빌려 이루어졌다. 인터뷰는 점심식사 시간을 포함해 3시간 만에 끝났다. 徐변호사는 특유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때론 유머를 섞어가며 말을 이어나갔다.
徐변호사는 누구 못지 않은 喫煙家(끽연가)이다. 외환위기 사건 재판 당시 재판이 길어져 잠시 休廷(휴정)할 때면 어김없이 담배를 입에 물었다. 법무법인 광장이 자리한 포스코 빌딩은 건물 전체가 「금연구역」. 하지만 그의 사무실은 치외법권 지역이다. 『발각이 되면 창피를 당하겠지만 그때까진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냐』며 인터뷰 중에도 연신 담배를 입으로 가져갔다.
―담배를 꽤 즐기시는 것 같습니다. 법정 밖에서도 가끔 그런 모습을 뵌 것 같구요. 끊을 생각은 안해보셨습니까.
『하루 평균 한 갑 정도 피우는데 일이 있으면 세 갑도 네 갑도 좋습니다. 법정에서도 변론을 하다 담배 생각이 간절할 때가 있어요. 사법연수원 교수로 강의를 할 때도 문득 담배 생각이 나면 참기가 힘들었지요. 여러 번 끊어도 봤는데 의지가 약해서 그런지 이내 다시 피우게 되더군요』
京幾高 3大 기적 중 하나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사실 변호사님에 대한 뒷조사(?)를 좀 했습니다. 판사들에게 수소문해서 숨겨진 얘기들을 좀 들었죠. 그 중에 하나가 대학시절 연애를 열심히 하면서도 사법시험에 쉽게 통과한 일을 두고 자칭 「경기 3大 기적 중 하나」라고 말씀하신 일이 있다던데요.
『누가 그런 얘길 다 해줍디까. 그런 말을 한 적은 분명 있습니다. 정확하게는 연애하다가 司試(사시)에 붙은 것이 기적이 아니라, 사실은 내가 법대 다닐 때 성적이 별로 좋지 않았고, 우수한 사람들이 워낙 많았고 해서 어중간한 내가 합격한 것이 기적이라고 얘기한 것입니다』
―부친께서 변호사이셨던데(그의 부친은 일제시절 高試 행정과에 합격한 서극형 변호사로 지난 98년 타계했다) 법조인의 길을 택한 것은 혹시 부친의 영향은 아닙니까. 위로 형님이 두 분 계시던데 법조인과는 관련이 없고 모두 외국에 계시더군요(그의 큰 형인 서정훈씨는 미국 GM社 이사, 둘째형 서정윤씨는 웨스팅하우스 上海지사장이다).
『그렇진 않아요. 법조인 代를 이어야 한다는 말씀을 하신 적은 없습니다. 법조인의 길을 택한 것은 사실 우연한 결정이었어요. 사실 저는 고교 3학년 여름까지 理科生(이과생)이었습니다. 의대에 가겠다고 했었죠. 그런데 친구들이 「너는 의사 체질은 아니다」라고 그러는 거예요. 머리가 나쁘다고 그런 건지 잘 모르겠지만요(웃음). 轉科(전과)를 고민하고 있는데 때마침 문과생 친구 중 이과로 옮기고 싶다는 친구가 있어서 맞바꾸게 됐습니다. 그땐 맞바꿀 수 있어야 轉科가 가능했습니다』
―법관직을 사직하실 때 얘기를 좀 해주십시오. 듣기론 협심증을 앓고 있던 부인의 약값도 없고 경제적 문제도 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만. 대법관감이 나간다고 해서 주변의 아쉬움도 많이 사셨다는데요.
『사실 경제적인 문제로 나갔다는 것은 맞아요. 부끄러운 얘기지만 그때 돈 없어서 나왔어요. 고등부장 월급이 적다면 나쁜 놈이라고 욕을 먹을 겁니다만. 또 가난하게 산 것도 아니고 먹을 것 먹고 입을 것 입으면서 살았지만 모아 둔 돈이 없었어요. 큰 돈도 아닌 100만원 정도 돈이 필요했는데 글쎄 그게 없더라구요.
지금 사위가 됐습니다만 제 딸이 남자친구를 소개해서 시집보낼 걱정도 들던, 그런 시절이었습니다. (사직 결정을 위해서는) 아내의 결재가 제일 큰 문제였는데, 평소 「고기 대신 콩나물 먹으면 되지 않느냐」고 얘기하던 아내가 말을 꺼내자마자 그러자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날로 사직서를 냈어요. 상사들에겐 혼이 좀 났죠. 당시엔 고등부장이 사표내고 나가는 일이 흔치 않았거든요.
법원에, 또 후배 판사들에게 끼칠 영향도 있었고. 한 선배가 꾸지람을 하시길래 「그럼 저 먹여 살려 주실 겁니까」 했죠. 물론 농담이지만요. 대법관 얘기는 제가 법원에 있으면서는 들어보지도 못했고 꿈도 꾸지 못할 자립니다. 지금 제 동기생들이 참 우수한 사람이 많아요. 그들이 지금 대법관 후보群에 올라 있지만 아마 제가 법원에 있었으면 저는 그림자도 없었을 겁니다. 저는 항상 중간 정도의 실력이었고, 뛰어난 사람들을 따라잡아보려고 노력만 무척 했어요. 그런데 막상 사표를 던지고 나니 그런 얘기가 나오더군요. 「사표를 내니까 대법관 되는구만」이라면서 아내 하고 맞장구를 치면서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웃음)』
李一珪·李會昌 존경
―수석재판연구관을 2년6개월 하시면서 대법원장을 비롯해 많은 대법관들을 지척에서 보좌했을 텐데 기억에 남는 분들이 있습니까.
『당시 李一珪(이일규) 대법원장 시절이었습니다. 참 엄한 분이셨는데 판사가 일 잘하는 것은 당연한 일로 생각하시고 공부 안하는 판사는 호되게 꾸짖는 분이셨어요. 법원장 시절엔 배석판사들의 판결문까지도 꼼꼼히 챙겨보셨죠. 하지만 판단 결과에 대해서는 당신 생각과 달라도 전혀 말씀을 하지 않으셨어요.
가까이서 모시면 편안하고 잔정이 많은 분이셨습니다. 본인 스스로에게 그처럼 엄격하신 분이 없었어요. 제 마음속으로 항상 경외심을 가진 분이었습니다. 판사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그분으로부터 제대로 배웠다고 말하는 것이 맞을 겁니다.
지금 모시고 있는 朴禹東 전 대법관도 배석 때 부장으로 계셨는데 그분처럼 노력하시는 분은 없을 겁니다. 시간만 나면 도서실에서 연구를 하셨어요.
李會昌(이회창) 대법관도 잊을 수 없습니다. 제가 가장 존경하는 분으로 꼽을 수 있는 분입니다. 저를 무척 귀여워해주셨구요. 그분이 정치에 입문하셨을 때 별로 찬성을 하진 않았습니다만 대통령감으로 가장 적당한 인물이라고 생각했고, 지금도 변함없이 지지합니다.
정치판이 사람을 망친다는 말도 있지만, 법관 때부터 마음속에 가진 대쪽 같은 지조를 잃지 않을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게 없다면 그 분은 아무것도 아닐 겁니다. 어느 정권이고 법을 도구로 이용해 왔지만 李대법관은 법을 행동규범으로 여기시는 분입니다. 이론도 탁월하신 분으로, 만날 때마다 왜 나는 이런 생각을 못할까 하는 깨우침을 주셨습니다. 법이론뿐만 아니고 법의 정신이 무엇인지를 배웠습니다』
―따르는 후배들이나 가깝게 지내는 후배들이 있습니까.
『저를 따르는 것보다 제가 (후배들을) 따라다니는 분들이 많죠(웃음). 제가 술도 잘 못하고 해서 인간적으로 깊이 사귀진 못했습니다만, 다들 현역으로 법원에서 쟁쟁한 분들입니다. 申明均(신명균) 서울가정법원장이나, 孫智烈(손지열) 법원 행정처 차장이나 朴在允(박재윤) 서울지법 민사수석부장, 金滉植(김황식) 고법 부장 등은 후배이지만 제가 대단히 존경하는 분들입니다. 사석에선 「내가 당신들보다 먼저 태어난 것을 대단하게 고맙게 생각한다. 내가 늦게 태어났으면 명함도 못 내밀 텐데 그래도 선배라서 다행이다」라는 말도 하고 그랬습니다』
변론 초기엔 金仁浩 수석과 싸우기도
변호사 개업 이후 徐변호사는 항상 대형사건 재판의 중심에 서 있었다. 성수대교, 삼풍백화점 붕괴사건, 가수 김성재씨 피살사건, 이후 외환위기 사건과 稅風(세풍)사건에 이르기까지. 그중에서 그는 가수 김성재씨 피살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된 여자친구 김유선씨 사건과 외환위기 사건에서 무죄 판결을 받아냈다.
탄탄한 이론도 이론이지만 그의 끈질긴 노력 때문이라는 평가가 많다. 경제학 강의를 방불케 했던 외환위기 사건을 변론하기 위해 관련 서적을 30여 권이나 탐독했고 밤샘을 밥먹듯이 했다. 오전 8시에 출근해 밤 11시까지는 「기본」으로 일한다는 그가 끈질긴 노력파라는 데 이견을 다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동안 큰 사건을 참 많이 맡아 오셨는데 현재 수임하신 사건은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지금은 외환위기 사건 항소심이 진행중이고, 아시아 자동차 사기 사건, 稅風사건, 민사로는 JP모건과 SK증권 간 분쟁 사건을 들 수 있겠습니다. 모든 재판에 직접 참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최근 기억에 가장 남는 것은 1심 무죄판결을 받아낸 외환위기 사건일 텐데요, 숨은 얘기들을 좀 해주시죠. 변론에 필요한 경제학 지식은 어떻게 습득하셨습니까.
『사실 제가 경제학을 압니까. 막상 사건을 맡았을 때 뭐 아는 것이 있어야죠. 하지만 적어도 검찰보다는 많이 알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열심히 공부한 덕에 지금은 경제학자들이 모인 자리에 가면 무슨 소리를 하는지는 이해할 정도가 됐어요. 남의 사건을 맡아놓고 엉터리로 하면 안될 것 같고, 이 사건은 정책판단의 사법처리 문제를 다룬 것이라서 법적으로 큰 의미가 있겠다는 책임감도 들고 해서 사람들에게 물어보기도 하고 책도 많이 읽었어요.
기자들이 쓴 책까지 한 30권 봤죠. 당시 변론 요지서에 「정책판단을 사법처리한 것은 고대 그리스 이후엔 없다」고 썼는데 이건 미국의 한 정치학자가 해준 얘깁니다. 당시 세계적으로도 상당히 관심을 끈 사건이었던 것 같아요. 그 사람이 찾아와서 해준 얘기를 제가 좀 인용했죠.
변론을 맡았을 때 초기엔 金仁浩 前 수석과 사이가 좀 안 좋았어요. 제가 金수석을 구치소로 찾아가서 나눈 대화가 말썽이 됐는데, 수임 후 처음 찾아갔을 때 「변호사들 다 있는데 네가 왜 끼느냐」고 그러시더군요(金 전 수석은 徐변호사의 고교와 대학 1년 선배다). 변론 방향에 대한 그의 의사를 타진하기 위해 「잘못은 했다고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판단을 받는 방향으로 할 것입니까, 아니면 결과적으론 마땅히 도의적 책임을 져야 하지만 법적으로는 무죄주장을 펴면서 당당히 싸울 겁니까?」라고 했더니 「넌 필요없다. 그런 얘기 하려면 가라」고 해서 변호를 하면서도 한동안 저하고 말도 안하셨어요. 전관예우나 받는 변호사라고 생각하셨던가 봅니다. 나중에 姜 전 부총리의 중재도 있고 해서 金수석을 달래서 변론을 했지요』
『권력에 저항하기보다 여론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가 더 어렵다』
―외환위기 사건 당시 「광화문에서는 돌멩이 맞을 일이지만 법적으로는 단연코 무죄」라는 말씀을 하셨다고 들었는데요.
『정확히 그런 말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여러 사람들에게 그런 취지의 말을 했습니다. 들끓는 여론의 비난을 지칭한 말이었어요. 여론은 사형에 처하라는 정도의 분노를 드러냈습니다. 하지만 정책의 잘못을 사법처리한다는 것에 동의할 수가 없었습니다. 당연히 무죄라는 생각을 했어요. 법적인 판단은 여론과는 별개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재판부의 현명한 판단에 경의를 표하고 후배 법관이지만 당시 재판장인 李鎬元(이호원) 부장을 존경합니다. 저도 판사를 오래 했습니다만, 정부의 압력에 저항하는 것은 비교적 쉬운 일이지만 여론에 맞서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가수 김성재 살해사건
―가수 김성재 살해사건의 피고인 김유선씨가 무죄를 받은 일은 어떻습니까. 당시 사회적인 관심도 많았고, 언론에도 크게 보도됐던 사건이었는데요.
『김유선씨는 사실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습니다. 미혼의 처녀에게 무기징역은 사형선고나 다름이 없었지요. 사건을 처음 맡을 때부터, 당시 기록을 훑어보고 당사자들을 만나본 뒤 가진 느낌은 무죄라는 것이었습니다. 후배 변호사들의 의견을 구하고 싶어서 세 명의 후배 변호사에게 사건 기록을 읽어보라고 말했습니다. 결론은 두 명은 무죄라는 의견이었고 나머지 한 명은 아무리 보아도 김씨가 살인범이라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김씨가 살인범이라는 의견을 낸 변호사와 함께 일을 시작했습니다.
생각이 한쪽으로 치우치는 것을 막을 수도 있고 완벽한 변론을 위해서는 그편이 나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습니다. 고생도 많이 했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이 달려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신중에 신중을 거듭했고 돈을 많이 받고 안 받고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재판 진행과정에서 검찰이 제시한 유죄의 증거들을 하나하나 제거해 갈 수 있었는데 딱 한 가지가 걸렸습니다.
당시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시체를 찍은 사진이 있었는데 그 사진을 근거로 사망시간이 추정됐습니다. 당시 법의학자들의 분석에 의하면 사진상으로 나타난 사망추정시간으로는 김유선이 범인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며칠을 엎치락뒤치락하면서 잠을 못 자고 고민 고민했는데 문득 「사진기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사진을 한번 찍어봤습니다. 그랬더니 살아 있는 사람이 (죽은 사람과) 똑같이 나오더라구요.
즉시 재판부에 감정신청을 하고 모의 실험을 해보기로 했습니다. 屍身(시신)과 살아 있는 사람을 침대에 올려놓고 찍어서 비교하는 실험이었어요. 그때 또 한 가지 문제가 발생했는데, 누가 모델을 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누가 올라갈 거냐고 주위를 둘러보는데 뜻밖에도 김씨가 유죄라고 생각했다는 후배 변호사가 자청을 했어요. 현직 변호사가 벌거벗고 屍身을 올려놓는 침대에 올라가 사진을 찍었습니다. 결과는 屍身과 산 사람의 모습이 똑같이 나왔습니다. 屍身에 생기는 얼룩(사반)까지 나오더군요. 그 이후는 (재판) 결과를 볼 필요도 없었죠』
徐변호사의 「법정비화」를 더 듣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그래서 또 다른 질문을 던졌다.
―형사사건을 맡은 판사의 경우, 알쏭달쏭한 사건이나 도대체 알 수 없는 사건의 경우엔 현장 검증 등으로 모자라서 자신이 직접 시뮬레이션을 해보는 경우가 있답니다. 점잖지 못한 얘기지만 한 판사로부터 「청바지 입은 여성을 성폭력하는 것이 가능한가」 「엑셀 승용차 운전석에서 성폭력이 가능한가」 같은 경우의 사건을 심리하기 위해 며칠간 고민한 끝에 부인을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말을 듣기도 했었는데요. 변호사님은 그런 경험 없으십니까.
『지나가는 말처럼 했겠지만 법관들은 실제로 그런 고민들을 많이 해요. 자기 판결이 옳았는지 틀렸는지에 대해서도 늘 고민을 가지고 삽니다. 제가 형사재판부 부장을 할 때 있었던 사건인데 자기 아버지를 살해한 범인이 기소돼 왔어요. 모든 증거들이 모두 유죄의 증거였는데 이번에도 딱 한 가지가 걸렸어요.
새벽 2시에 자기 아버지를 죽이고 강도로 위장하기 위해 동네 한 바퀴를 뛰어서 집에 다시 들어왔다는 그런 스토리였어요. 당시 목격자가 시험공부를 하던 학생이었는데 밤 2시에 「구둣발로」 뛰어가는 소리를 들었다는 겁니다. 아버지를 아무 이유없이 죽였기 때문에 당시 유죄가 인정되면 사형 아니면 무죄였는데 이 문제 때문에 판단이 잘 안 서는 겁니다. 살인범이 태연하게 구두를 신고 도망을 쳤다? 선고날짜는 다가오는데 참 답답합디다.
고민고민하다가 결국 선고 이틀 전에 배석판사들과 현장에서 試演(시연)을 하기로 했죠. 밤 2시 시간을 맞춰서 똑같은 장소에 가서 배석판사가 범인 役을 하기로 하고 저는 목격자인 수험생 역할을 맡아서 그 학생의 방으로 올라갔습니다. 「뛰어보세요!」라고 외쳤더니 막 뛰는 거예요. 발자국 소리가 하도 크게 나길래 「아, 신발 벗고 뛰시오」라고 외쳤는데 배석판사 왈, 「맨발입니다」라는 겁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어요. 시멘트 바닥에서 맨발로 뛰는데 꼭 「구두 신고 뛰는 소리」가 나는 겁니다. 결국 모든 의문점이 풀리게 된 거죠. 모든 사건이 비슷하겠지만 강력사건에서는 피의자들이 항상 혐의를 부인하게 마련입니다. 그럴 경우 법관들은 판단에 항상 고민과 오판의 위험성을 안고 삽니다』
성수대교 재판에선 敗訴
무죄 판결을 많이 이끌어낸 徐변호사지만 아픈 기억도 있다. 성수대교 사건이 그 대표적인 경우. 그는 당시 서울시 구청 하위직 공무원들의 변호를 맡았지만 패소했다. 그는 당시 대법원 확정 판결에 아직도 아쉬움이 많다고 했다.
『당시 대법원의 판결에 아직도 아쉬움이 많이 남아요. 법원이 응보주의에 너무 치우친 것 같다고나 할까요. 당시 구청 공무원들의 혐의내용은 다리의 부실과 붕괴위험을 알면서도 제대로 막지 못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과연 그만한 지식이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을 가졌고 전문가들에게 문의해서 증언을 이끌어냈습니다.
성수대교 같은 철구조물 다리의 붕괴위험의 경우 외국은 상황상황에 따라 지표들이 정해져 있는 것이 관행이지만, 우리나라의 경우는 그런 것이 전혀 없는 상황이었거든요. 전문가들은 적어도 그 분야의 석사학위 정도를 가진 전문가라면 위험의 징후를 판단해 낼 수 있을 것이라고 얘기했습니다. 그들의 증언이 법정에서 증거로 채택됐죠. 그런데 당시 기소된 공무원들은 대부분 工高(공고) 출신들이었어요.
석사학위를 가진 사람 정도가 판단해 낼 수 있는 사안을 고등학교 졸업 학력만으로 어떻게 알아낼 수 있느냐는 것이 제 논리였지요. 하지만 대법원은 「그렇다고 해도 모르면 공부를 해서라도 알아냈어야 한다」는 식이었습니다.
참 아쉬움이 남고, 맘에 안듭니다. 어떻게 工高 나온 사람에게 월급도 조금 주면서 공부해서 석사가 되라고 요구할 수 있을까요. 좋은 얘기이긴 하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을 요구한 판결이었다고 저는 봅니다』
미국 법관들에 비해 우리가 뒤지지 않는다
徐변호사가 퇴직할 무렵인 1993년만 해도 법관들의 퇴직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요즘은 중견간부들의 퇴직이 러시를 이룬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 같다.
『법관으로 임용되는 사람은 경제적인 문제는 어느 정도 각오를 하고 시작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친구들과 비교해서 차이가 나는 것은 사실입니다. 법관은 꿈을 먹고 사는 직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저희가 법관이 될 때만 해도 주위에서 판사라고 하면 참 존경을 해줬습니다. 그런데 최근 들어 판사들이 자긍심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공직자라면 국가에 봉사한다는 자긍심으로 생활을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요즘은 완전히 사라져가고 있어요. 제가 대법원 수석재판연구관 시절, 밤 늦게까지 일을 하다 층계를 더듬거리면서 내려 와서 퇴근을 하곤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마음은 정말 뿌듯했습니다. 그 재미로 저는 판사생활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의 법관들과 우리 법관들을 비교할 때 저는 우리 법관이 청렴도나 실력 면에 있어서 전혀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미국의 소설이나 언론은 법관을 신성한 것으로 그리는 반면 우리는 반대인 것 같습니다. 공무원들을 자꾸 격려해주는 사회분위기가 조성되면 될수록 그들은 더욱 청렴해지고 열심히 일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자기 책임이 선행돼야 하겠지만 언론이나 사회가 한쪽으로 너무 몰아가는 식이 되어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합니다』
―법관이 초심을 유지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보수 인상 등 현실적인 처우개선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많습니다.
『법관의 자긍심이 많이 떨어지고 있다는 말을 자조적으로 표현하는 말이 있어요. 옛날엔 사표를 내려고 하면 가족들이 나서서 극구 말렸는데, 요즘은 아내가 먼저 왜 사표 안 내느냐고 닦아세운다는 농담섞인 말입니다. 사실 지금 법관 봉급이 적긴 적죠. 많은 판사들이 처가의 도움을 받기도 합니다. 사실 저도 초임 시절엔 처가의 도움을 받곤 했어요. 하지만 자긍심이 있다면 큰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돈은 나중에 변호사를 하면 먹고 살 만큼은 벌 거라는 생각을 해요. 변호사가 큰 부자가 되긴 힘들지만 생활하는 데는 지장이 없을 정도는 됩니다. 일하는 시간만큼 버는 직업이기 때문이죠. 판사봉급이 변호사들에 비하면 적지만 상대적으로 그리 적은 월급은 아닙니다』
『나는 人權 변호사가 아니고 物權 변호사』
―판사시절 연수원 교수를 하셨습니다만 1997년부터 연수원에서 변호사 실무를 가르치신다고 들었습니다. 지금도 후배 법조인들을 가르치십니까. 그들에게 무슨 말씀들을 해주십니까.
『얼마 전에 잘렸습니다. 권광중 원장이 부임하면서 쉬고 싶다고 했더니 처음엔 안 들어주다가 면직을 시켜주더군요. 그만두시는 분들과 權원장이 식사를 하는 기회가 있었는데 「다른 분들은 너무 수고하셔서 이제 그만 고생을 면하게 해드리는데 徐廷友는 잘렸습니다」라고 농을 걸어서 한번 크게 웃은 적이 있습니다.
연수원생들에게는 그런 얘기를 많이 합니다. 공부를 안하는 변호사, 실력 없는 변호사는 쓸모가 없다, 공부 안하면 너희들 사법시험 붙은 것도 말짱 헛일이다, 부단히 실력을 연마하라고 얘기합니다. 엉터리 변론을 하는 변호사는 사기꾼이나 다름 없다는 얘기도 합니다. 거액의 수임료를 주고 사건을 맡긴 사람들에게 그만한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인권 변호사도 마찬가집니다.
사실 1세대 인권변호사는 정말 쟁쟁한 분들이 많았습니다. 姜信玉(강신옥) 변호사나 洪性宇(홍성우) 변호사 같은 분은 법이론에 대해서도 大家로 손꼽히는 분들입니다. 그런 분들이 활약을 하셨기에 우리나라의 인권이 이만큼 성장을 할 수 있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요즘은 좀 다른 것 같습니다(그는 이 대목에서 담배를 하나 피워 물었다). 극히 일부이긴 하지만 「나는 인권 변호사를 할 거니까 공부 안해도 상관없다」는 얘기를 하는 예비법조인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충고를 해줍니다. 우스개 얘기로 저 같은 로펌 변호사들을 인권 변호사에 빗대 「物權(물권) 변호사」라고 합니다. 저는 인권 변호사를 지망하는 연수원생들에게 「나 같은 物權 변호사를 이기려면 그만큼의 실력을 갖춰야 한다」고 잔소리를 합니다. 그러다보니 저를 잔소리꾼이라고 싫어하는 경우도 많은가 봅니다. 하지만 저는 항상 공부하고 자신이 뒤진다고 생각하면 노력하는 것을 제 신조로 삼아왔습니다』
―법률시장 개방 문제가 법조계의 당면 문제로 떠오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보십니까.
『우리나라는 이미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우리끼리만 해결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이미 상당부분을 외국 로펌 등과 함께 문제를 해결하고 있어요. 외국에 나가서 하느냐 국내에서 하느냐의 문제는 아니죠. 문제는 실력없는 외국 변호사 등이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엉터리 변론을 했을 경우 나타나는 부작용이나 우리의 국익을 침해할 우려가 있다는 점 등에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아직은 크게 걱정할 단계는 아니라고 봅니다. 미국의 경우 법률서비스를 비즈니스적인 측면에서 보지만 우리는 공익적인 성격이 강하다고 보는 법률문화의 차이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우리나라의 변호사는 돈을 벌기 위해 개업을 했지만 공익적인 성격이 무척 강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배우지 않았습니다. 다만 너무 폭넓게 개방을 할 경우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것은 적절히 수위를 조절해 나가야겠죠』
『검사는 국가의 권한을 자신의 권한으로 착각하면 안된다』
―20여년의 법관생활을 거쳐 7년간의 변호사 생활까지 30년 이상 법조인으로 살아가시면서 갖게 된 법조론에 대해 말씀해주시죠.
『저는 검찰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하지만 연수원이나 젊은 변호사들에게 이런 말들을 해줍니다. 판사가 공정해야 한다는 것은 직업 자체가 그러니까 새삼 강조할 것도 없는 것이고,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판사는 제 느낌에는 그렇습니다. 귀를 열어두고 있어야 합니다. 자기 주관이 아니라 의견이 다른 많은 사람들의 얘기를 듣고 존중할 줄 알고 자기 것으로 만들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法의 형평을 찾는 길입니다.
검사는 권한을 자제할 줄 알아야 할 뿐만 아니라, 범죄에 대한 불타는 증오심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대신 그것은 국가의 권한입니다. 자신의 권한으로 착각을 해서는 안됩니다. 간혹 그런 사람들이 있죠. 무죄를 주장하는 사람들을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법원이 무죄를 선고하면 자신의 권위가 깎이는 것으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국가가 국민을 위해 부여한 권한을 자신의 것으로 착각해서는 절대 안됩니다.
변호사는 내가 하는 일이 사회악을 끼치는 것이 아닌가를 항상 의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법률이란 칼의 양날과 같아서 잘못 쓰기로 한다면 얼마든지 사회에 큰 해악을 끼칠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저 자신을 독실한 크리스천이라고 말하면 많은 분들이 꾸중을 하시겠지만 아내를 따라 교회에 나가서 항상 드리는 기도는 「제가 하는 일이 남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게 해 주십시오」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직업인으로서의 제 기도입니다.
후배들에게 자주 듣는 질문이 「변호사가 거짓말을 해야 한다면 어떻게 합니까」라는 것입니다. 저는 모른다면 할 수 없겠지만 아는 한에서는 절대 거짓말을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당사자의 이해관계에 대해 미주알 고주알 일러바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소송 천국이라고 불릴 정도로 고소·고발의 남발과 넘치는 소송 속에 묻혀 있습니다. 법관들의 업무과중 문제도 바로 이런 문제에서 기인한다고 보는 사람이 많습니다. 올바른 소송문화를 위해 어떤 것이 필요하다고 보십니까.
『우리는 재판을 하면서 요행을 바라는 측면이 많은 것 같습니다. 법관의 실수를 바란다든지 하는 것 말이죠. 저는 법치주의, 법대로 하자는 말을 무척 좋아합니다. 법대로 하자는 말이 무조건 소송으로 해결하자는 뜻은 아니죠. 법의 정신에 따르자는 말이죠. 법이라는 것이 뭡니까. 법은 상식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개개인이 가진 상식의 조화가 중요한 것이죠. 성문법도 그 때문에 나온 것이죠. 은행원이 돈을 떼먹었다고 칩시다. 누가 손해를 봐야 할까요. 고객입니까, 은행원입니까, 아니면 은행입니까. 누군가는 책임을 지게 만든 것이 법입니다.
법대로라면 누군가는 반드시 손해를 보게 됩니다. 법대로 하자는 얘기는 상식의 선에서 화해와 타협을 유도하자는 뜻입니다. 저는 지방부장 시절 처음으로 집중심리제를 도입해봤습니다. 1심을 진행하면서 그 결과와 함께 재판부의 의견을 분쟁 당사자에게 일러주어 화해를 유도하고 濫(남)항소, 濫상고를 방지하는 것이죠.
그러던 와중에 법원장님이 저를 부르시더니 「徐판사 때문에 내가 죽겠다. 변호사들마다 와서 너를 욕하는데 어떻게 된 거냐」 하시는 겁니다. 남들이 안하던 일을 하다보니 쌍방의 변호사에게 다 욕을 먹게 된 것이죠.
법의 정신이란 법에 따라 평화적으로 해결하자는 것이 목적이지 분쟁을 붙이자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모두 재판으로 해결하자는 뜻도 아닙니다. 화해를 잘 이끌어내는 판사로 지금은 개업한 李健雄(이건웅·열린 합동 대표변호사·1994년 서울고등법원 부장 재직시 퇴직)씨가 유명했습니다. 저와 같이 소액단독을 할 때였는데 절반 이상은 화해가 되는 겁니다.
그 비결이 궁금해서 물었더니 해답이 이렇더군요. 우선 원·피고 쌍방에 「내가 판결 많이 틀리기로 이름난 판사인데 그러다 나중에 날벼락 맞지 말고 타협을 하는 것이 좋겠다. 시간을 30분 주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는 겁니다. 그러면 당사자들도 십중팔구 법정 밖에서 타협을 해온다는 거예요.
사실 李健雄 부장처럼 근엄한 얼굴을 가진 사람이나 써먹을 수 있는 秘法이지 저같이 생겨가지고는 힘든 방법이더군요. 저도 써먹어봤는데 잘 안되더라구요. 제가 가장 경멸하는 판사는 모든 것을 다 안다는 식의 오만에 빠진 사람입니다. 판사는 그런 오만에 빠지면 안됩니다』
『헌법에 언론이 제4府라고 적혀 있나요?』
徐변호사는 언론관련 분야의 소송과 이론에 대해서도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기자들이 이 분야의 논문을 쓰거나 학위를 얻고자 할 때 빠짐없이 찾아가는 사람 중 한명이다. 그는 朝鮮日報가 국내 언론 중 처음으로 실시한 변호사 기사열람제의 고문 변호사로 아직도 활약하고 있다. 무척 귀찮은 일이겠지만 언론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개인의 사생활 침해 소지 등을 차분하고 설득력 있게 지적해 주곤 한다.
―대법원 수석 재판연구관으로 계실 때 사실상 대법원 공보관 역할을 하셨다는데요. 기자들과의 사이에서 재미있는 일화는 없습니까.
『당시 대법원엔 공보관 제도가 없을 땝니다. 사실상 대법원의 기사를 제공하는 역할을 했는데 자꾸 오보가 나곤 했습니다. 거꾸로 나곤 했어요. 오보가 나면 제가 윗분들께 꾸중을 들어야 할 판이었어요.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제가 직접 나서서 판결이 날 때마다 기사를 제공하고 박스기사까지 주제를 잡아주곤 했어요. 그래선지 기자들이 나를 참 좋아했습니다. 일을 덜어줘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기자협회에선 감사패까지 받았습니다.
감사패를 받을 당시 한 기자가 농담으로 「세상에 공무원이 기자들에게 커피 한 잔 안 사고 감사패받는 사람은 판사님이 처음일 겁니다」라고 했어요. 진짜로 커피 한 잔 사지 않았거든요. 기자들이 사주는 주스를 얻어먹으면 먹었지(웃음). 기자들하고 친한 덕분에 퇴직할 때 신문에 큰 박스 기사가 나간 적도 있어요.
사실 무척 창피스러운 일이었고 오보였어요. 「대법관감이 나간다」는 기사였는데 그 기사 때문에 법원 간부들에게 불려가서 혼난 일도 있습니다. 「너 때문에 판사들 사기 다 떨어지게 생겼다」는 얘기였습니다. 사실 내게 한 번만이라도 물어봤더라면 안 나갔을 기사였는데. 나중에 기자를 만나서 제가 「만나보니까 별 것도 아닌 사람 아니냐. 완전 오보다」라고 말하면서 크게 웃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기사로 인한 명예훼손 책임을 묻는 소송들이 최근 급증하는 추세입니다. 언론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을 말씀해 주십시오.
『언론의 자유는 항상 정치적인 국민의 지지를 받아왔습니다. 그러나 무관의 제왕이니 제4府니 하는 명예로운 이름은 기자 개개인이나 언론사에 부여된 것이 아닙니다. 저는 농담으로 그럽니다.
「언제 누가 무관의 제왕이라고 했나, 헌법에 제 4府가 있나?」
언론은 자유에 걸맞은 책임을 져야 합니다. 또 검사들의 예를 들 때 말씀드린 것처럼, 국민들이 언론을 지지하는 것은 언론이 사회의 목탁이기 때문이지 기자의 권한을 인정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만 항상 마음에 새긴다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김유선씨 사건을 진행하면서 모 방송사와 명예훼손 소송을 벌인 적이 있었습니다. 많은 액수는 아닙니다만 최근 고등법원에서 승소판결을 받고 확정됐습니다. 당시 많은 언론들이 추측보도를 했는데 유독 왜 그 방송사만을 문제삼았는가 하면 다른 언론사들은 그래도 균형감각을 유지하려고 노력한 반면, 그 방송사는 그런 노력을 포기했다는 것 때문입니다. 여러 차례 자료제공 등을 제의했으나 거절당했고 억울하면 소송하라는 식으로 나온 데 대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법원을 향한 애정
점심식사 자리까지 이어진 인터뷰를 마칠 무렵 徐변호사는 법관 초년병 시절의 일화를 하나 끄집어냈다. 지방 법원에 처음 부임하고 며칠 지나지 않아서였다니까 1960년대 후반 얘기다. 법관이 뭔지도 모르던 시절 얘기라면서, 그는 한 民事사건과 관련해서 양측의 변호를 맡고 있는 까마득한 선배 변호사들과 술을 마셨다고 했다(『지금 같으면 아마 큰일 날 얘기겠죠?』 라는 말을 덧붙였다).
술 실력이 형편없었음에도 새벽 2시까지 어느 술집에서 술을 마신 뒤 겨우 출근한 다음 날이 마침 그 사건 재판 기일이었다. 그런데 양쪽 변호사가 다 나오지 않아 쌍방불출석으로 사건을 취하시켜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술을 「얻어마신」 죄로 우물쭈물하다가 재판장에게 『사건을 연기시켜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얘기를 꺼냈다가 『그것과 재판은 별개』라며 일언지하에 거절당해 머쓱해졌다고 한다.
며칠 후 술을 샀던 변호사가 판사실에 들렀을 때(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당시엔 변호사들의 판사실 출입에 큰 제한이 없었다) 미안한 마음에 벌떡 일어선 그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사정을 말했을 때, 그 老변호사는 껄껄 웃으며 『그거야 당연한 일 아닌가』하고 흔쾌하게 말했다고 한다. 그 「너그러움」에, 주눅들었던 초임판사의 마음이 활짝 펴졌음은 물론이다.
기자는 그가 이 이야기를 꺼내면서 대부분의 판사들이 깨끗하고 바른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말하고 싶었으리라는 짐작을 했다. 법원을 향한 徐변호사의 변함없는 애정을 확인할 수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