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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의 편지

과거지향(過去志向)의, 그것도 잔인한, 한국인들의 미래

글 : 문갑식  월간조선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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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6년 나온 한 권의 책이 낙양(洛陽)의 지가(紙價)를 높였다. 이어령씨가 쓴 《축소지향의 일본인》이다. 이씨는 책에서 뭐든 작게 만드는 일본인들의 사상과 문화를 산업, 자연물, 인간사회 등의 다방면에서 예증했다. 한국인 저자를 평가하는 데 그간 인색했던 일본 지성계도 뜨거운 찬사를 보냈다.
 
  《요미우리신문》은 “축소 지향이라는 키워드를 사용해서 일본의 문화구조를 풀어가는 솜씨는 마술을 보는 것 같다. 처음에는 의심했으나 읽어감에 따라 눈에서 비늘이 떨어지고 근시(近視)가 안경을 썼을 때처럼 분명하게 보였다”고 평했다.
 
  《축소지향의 일본인》은 루스 F 베네딕트가 쓴 《국화와 칼》과 더불어 일본 사회의 심연(深淵)을 파헤친 명저(名著)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이 나온 지가 벌써 30년이 넘었다. 《축소지향의 일본인》이 나올 무렵 한국은 반대로 확장(擴張) 일로를 걷고 있었다.
 
  1986년, 아시아에서 두 번째로 아시안게임을 개최하고 1988년, 역시 아시아에서 두 번째로 서울올림픽을 준비하던 한국인은 1964년 도쿄(東京)올림픽 때의 일본인들과 비슷했다. 당시 세계에서 두 번째로 힘세다는 일본을 20년이면 따라잡을 수 있다고 믿었다. 모두가 활기찼다. 모두가 희망을 가졌다. 모두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충만했다.
 
  그런데 10년 새 우리는 확장 지향은커녕 ‘과거지향(過去志向)’의 한국인이 되고 말았다. 그 징조가 처음 나타난 것은 우리의 역사를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한 나라”라고 규정한 한 정치지도자에 의해서였다. 국군 총사령관이던 그는 스스로 자기가 지켜야 할 나라를 ‘지킬 가치가 없는 나라’로 규정한 뒤 지킨 셈이 되고 말았다.
 
  하필이면 이 말이 나온 게 그가 대통령에 취임한 후 처음 맞은 3·1절 행사에서였다. 스스로 생각해 봐도 허망한 이 임무를 맡은 그는 결국 퇴임 후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과연 그의 삶이 어떻게 규정될지 궁금하다. 역사를 개조(改造)하겠다는 꿈은 무모한 것이다. 해서 될 일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가 말한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한 나라’라는 말은 다른 어느 나라에 도입해도 다 통용될 수 있다. 영국의 경우 로마-덴마크-프랑스가 차례로 지배했으니 본토인(本土人) 입장에선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한 나라가 아닐 수 없다. 유럽 중앙부의 최강국 프랑스도 마찬가지다. 제 1, 2차 대전에서 잇달아 독일에 패배했으며 부역자를 낳았으니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한 나라’였던 것이다.
 
  미국도 같다. 인디언을 역사상 유례없이 잔인하게 살해했으니 마찬가지 논리가 적용될 것이다. 이런 궤변은 역사가 무엇인지에 대한 인식과 교양 부족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의 자살과 함께 그런 기류가 사라졌는가 했는데 웬걸 과거 지향의 조류(潮流)가 더 거세지고 있다. 광주 민주화운동이 일어난 게 1980년 5월이다. 그런데 아직도 민주화유공자 선정 작업이 계속되고 있으며 국가보훈처는 막대한 혈세를 쓰는 유공자 명단을 공개하지 않고 있다.
 
  유공자(有功者)라면 당연히 공이 있는 사람들일 테니 일부러 홍보라도 해야 마땅한데 정반대의 일이 벌어지고 있다. 최근의 예만 봐도 그렇다. 북한 핵미사일과 핵폭탄을 겨냥해 미국 항공모함 전단(戰團), F-35스텔스 전투기, 전략폭격기 등 최첨단 무기들이 속속 한반도로 다가오고 있다.
 
  그런데 우리 언론의 1면을 장식하는 것은 3년 전 펄 속에 파묻혔다가 중국 인양업체에 의해 건져 올려진 세월호 사진이다. 우리 목숨이 경각에 달렸는데 정작 당사자는 무관심하기 짝이 없다. 우릴 살리려고 오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소가 닭 보듯’ 하는 블랙코미디 같은 일이 며칠 전까지 벌어진 것이다.
 
  만일 내가 미국인이라면 1953년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맺은 당사자들에게 이렇게 사자후(獅子吼)를 토하며 질책했을 것이다. “왜 미국은 돈과 젊은이들의 목숨까지 바쳐가며 스스로를 지킬 마음이 전혀 없고, 오히려 미국을 틈만 나면 헐뜯는 저 우매한 코리안들을 무한 방어해 주려는 것인가!”
 
  나는 지금의 대한민국이 뭔가 집단최면에 걸려 과거를 향해 전원(全員)이 거꾸로 걷는 괴상한 나라가 됐다고 생각한다. 안타깝게도 《월간조선》 5월호가 발매된 지 20여 일 후에 뽑힐 새 대통령 후보들도 하나같이 손가락의 방향이 과거를 향해 있다. ‘적폐청산론’이 그것이다.
 
  ‘적폐(積弊)’란 말 그대로 ‘오랫동안 쌓이고 쌓인 폐단’을 말한다. 그것을 청산하겠다는 말은 10년 전 누군가 그랬듯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한 나라” 혹은 그 역사를 송두리째 바꾸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슨 일이 5년 동안 벌어질 것인지는 자명하다. 수도 없이 겪어봤기 때문이다.
 
  마음에 안 드는 세력을 ‘친일파’ 혹은 ‘미국에 아부하는 사대주의’로 몰아 망신 주고 조리돌림을 할 것이다. 기업의 자유로운 활동을 방해하고 빈부격차 혹은 형평이라는 단어를 내세워 돈을 내놓으라고 강요할 것이다. 자유로운 언론의 비판을 수구(守舊) 기득권 세력으로 몰아 말살하려고 할 것이다.
 
  나만 정의롭고, 나를 제외한 반대편은 모조리 수구·기득권 세력·국가 발전 저해 세력·불구대천의 원수들이라면 대체 이 좁은 땅덩어리에서 우리가 함께 부대끼며 살아야 할 이유가 무엇이라는 말인가. 차라리 서로 깨끗하게 ‘다시는 서로 만나지 말자’며 등을 돌리는 것이 훨씬 이성적일 것이다.
 
  60년대 중국에서 일어난 문화대혁명의 재판(再版)이 21세기 한국 땅에서 벌어질 것이다. 유혈이 낭자하고 죽고 죽이는 싸움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무한 반복될 것이다. 10년 전 실패를 맛본 그들은 더 집요하고 잔인하게 숙청(肅淸)의 날 시퍼런 칼날을 휘둘러댈 것이다.
 
  여기서 우려되는 점이 있다. 우리 민족이 과거에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잔인해졌다는 사실이다. 나는 박근혜 전 대통령을 상대로 언론이 보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야차(夜叉)나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겠다. 박 전 대통령이 검찰에 출두할 때 모든 언론의 관심은 머리 모양이 어떠하며, 무슨 옷을 입었으며, 점심이나 저녁식사 때 무엇을 먹는지에 집중됐다.
 
  만일 박 전 대통령이 올림머리가 아닌 산발(散髮)을 하고 나왔다면 “마침내 멘붕(멘탈이 붕괴)이 왔다”며 조롱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평소 ‘전투복’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던 푸른색 정장 대신 소복(素服)을 입고 나왔다면 “동정을 자아내려 한다”고 보도했을 게 뻔하다.
 
  굽이 6cm라는 구두 대신 흰고무신을 신고 나왔다면 “감옥에 갈 준비를 했다”거나 “자신의 죄(罪)를 인정하는 시늉”이라고 해석했을 것이다. 성정(性情) 잔인한 사람들 앞에 자비나 관용은 있을 수 없다. 저승사자처럼 집요하게 물고 늘어져 부관참시(剖棺斬屍)라도 해야 직성이 풀리는 것이다.
 
  성격 잔인한 과거 지향의 한국인들은 지금도 멈출 줄을 모른다. 구치소가 지저분하다고 안 들어가고 ‘시위’를 벌였네, 구치소장이 도배를 새로 해주는 ‘특혜’를 베풀었네 하며 연신 조롱의 풍악을 울리고 있다. 그 모습을 보며 북한의 김정은은 “마침내 할아버지 때 못 이룬 뜻을 이룰 날이 왔다”며 희희낙락하고 있을 것이다.
 
  고래(古來)로 관용이 없는, 과거 지향의 잔인한 민족은 살아남은 적이 없다. 관용이 없는 민족에게 관용을 베풀 이웃이 있을 리 없다. 집단으로 광기(狂氣)에 빠져 뒤로 행진하며 휘청대는 바보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베풀 이웃이 있다면 웃기는 것이다. 평소 잔인하고 제멋대로 굴어온 민족은 도와주기는커녕 조롱의 대상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현재 대한민국이 처한 상황은 엄중하기 짝이 없다. 우리는 왜 미래를 바라보지 않고 뒤만 돌아다보는 것일까. 그것은 자신감 부족이 아닐까 싶다. 정해진 과거를 복기(復棋)하는 것은 쉽다. 미지의 세계를 개척해 나가는 것은 웬만한 용기가 없으면 할 수 없다. 우리는 어느새 확장 지향의 DNA를 잃어버린 것이 아닐까. 그것을 회복하는 것이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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