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정부를 생각하면 ‘물’부터 떠오르고, 김영삼 정부 하면 ‘역사 바로 세우기’와 ‘IMF’가 생각납니다. 김대중 정부 때는 ‘게이트’라는 단어가 유난히 유행했죠. 노무현 정부 때는 대통령이 워낙 말이 많다 보니 기억에 남는 단어도 참 많습니다. ‘코드’, ‘로드맵’, ‘혁신’, ‘매뉴얼’ 같은 단어가 그렇습니다. 천안함 침몰 사태를 보면서 매뉴얼(manual)이란 걸 생각해 봅니다.
상당수가 매뉴얼이라는 단어를 친숙하게 접한 것은 자동차 운전을 배우면서입니다. manual gearbox(수동변속기), automatic gearbox(자동변속기)를 줄여서 ‘매뉴얼’, ‘오토’라고 흔히 쓰지요. 그런 시절에도 사용설명서, 교본(敎本)과 같은 원래의 의미의 매뉴얼은 물론 있었습니다. 이것을 대통령이, 정부가 쓰면서 신문에도 자주 등장했던 것은 노무현 정부 때입니다.
대통령에 의한 첫 공식화가 2005년 1월 정부혁신토론회였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3년에는 로드맵을 만들었고 지난해에는 혁신문화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올해는 혁신 매뉴얼의 해”라고 말했습니다. 그 후 정부 언저리에서는 그야말로 한바탕 매뉴얼 소동이 벌어졌습니다. 각 기관마다 기존 업무처리지침이란 것을 모두 ‘매뉴얼’로 새 포장했습니다. 1년도 안된 2005년 12월 정부 안에는 위기대응(危機對應) 매뉴얼만 270개 정도가 생겼습니다. 북핵(北核) 우발사태, 산불 재난, 소요, 폭동…. 이런 것들에 대비한 것입니다. 당연한 일이지요. 국가적 재난을 극복하기 위한 절차를 사전에 정해 놓으면 그만큼 혼란과 혼선이 줄어들지 않을까요. 이번 호에 실린 ‘백선엽이 만난 6·25의 영웅들’에 보면 휴전협정 당시 미 8군 사령관 맥스웰 테일러는 항상 “지휘관은 놀라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고 합니다. 지휘관은 늘 선견지명(先見之明)을 갖고 앞날에 대비해야 한다는 말 아니겠습니까. 어떤 상황이든 대응절차가 잘 마련돼 있다면 ‘놀랄’ 일을 아주 없앨 수는 없겠지만 ‘놀라는’ 정도를 줄일 수는 있지 않겠나 싶습니다.
2005년 러시아 잠수함 사고, 매뉴얼대로 전원 구조
▶2005년 8월 북태평양 오호츠크해에서 승조원 7명을 태운 러시아 AS-28 소형 잠수함이 수심 190m 지점에서 그물에 걸렸습니다. 러시아 정부는 그물을 끊는 수중탐사선이 영국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곧바로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영국 정부는 수중탐사선을 보냈고, 승조원들은 모두 살았습니다. 러시아가 2000년 최악의 선박 침몰사고를 겪은 후 해난구조 대응 매뉴얼을 만든 결과라고 합니다. 이 매뉴얼은 잠수함 승선 인원에 따른 침몰 대응조치, 외국과의 사고 정보 공유, 각종 해양 구난 장비 보유, 해저 지도 등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사고를 당했어도 즉각 매뉴얼에 따라 구조를 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 매뉴얼이 정말 효자 노릇을 한 셈이지요. 매뉴얼도 잘 만들었고, 그에 따른 대응도 신속·적확(的確)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상당수 매뉴얼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조선일보 사람들팀을 맡고 있을 때 매뉴얼을 하나 만든 적이 있습니다. 일반 기사 외에도 동정(動靜), 인사(人事), 부음(訃音) 등을 챙겨야 하니 항상 기준(基準)을 놓고 논란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부(寄附)는 얼마 이상, 인사는 중앙부처 서기관급 이상을 쓰고, 향우회·동창회 소식은 넣지 않되, 대학교 총동창회장 동정 기사는 싣는다 등등을 정리했습니다. 정말 다양했습니다. 1년 이상 사람들팀을 맡고 있던 후배 기자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모호한 것은 편집국 회의에서 결론을 냈습니다. 그렇게 탄생한 ‘사람들팀 매뉴얼’이었지만 실제 적용 과정에서 그대로 지키지는 못했습니다. 매뉴얼이 완벽하지 못했던 탓도 있겠지만 세상이 복잡한 탓이 더 컸습니다.
하물며 국가 위기 사태가 벌어지면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노무현 정부에서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처장, 통일부장관을 했던 이종석씨도 “전쟁이 언제 매뉴얼대로 전개되느냐”고 말했다는 얘길 전해 들은 적이 있습니다. 매뉴얼을 만들 당시 모든 상황을 다 상정할 수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매뉴얼에 없는 ‘창의적’인 방식으로 대응한 것이 오히려 최상의 결과를 낳는 경우가 더 많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왜 처음부터 총력 구조 체제로 가지 못했을까 아쉬움
▶천안함 사건을 보면서 왜 이렇게밖에 안될까 하는 생각을 지우지 못하겠습니다. 단순화해서 말하면 침몰한 초계함에서 생존자를 구조하는 일과 배를 끌어올리는 일 두 가지가 이번 사건에서 가장 시급히 해야 할 일 아닙니까. 그렇다면 침몰이 알려진 직후부터 총력 구조체제를 갖춰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해군 구조함인 3000톤급 광양함은 사고 시각으로부터 41시간이 지나 파견됐고, 미군 구조함인 살보함은 그보다도 12시간 이상 더 늦게 구조에 나섰다고 합니다.
또 잠수했던 구조요원들의 사고 방지를 위한 감압 장비(減壓·챔버·고압산소치료실)도 1개밖에 없어 구조가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지요. 처음엔 침몰한 배의 위치도 찾지 못했고요. 사정이 없진 않겠지만 세금 꼬박꼬박 내온 일반 국민들로선 납득하기 어려운 일들입니다.
왜 처음부터 구조함, 구조요원을 총동원하지 못했을까, 미군과의 공조체제는 왜 늦었을까, 외부에 공개할 정보의 수위를 놓고는 또 왜 우왕좌왕했을까, 해난 구조에 필수적인 감압 장비가 1개에 불과하다면 평소 더 확보하려는 노력을 왜 하지 않았을까. 도대체 대한민국 해군은 해난 구조 훈련을 하기는 하는 것일까. 이런저런 궁금증이 들면서 신문을 뒤적이지만 명쾌하게 해답을 제시해 주는 곳이 없습니다.
왜 우리는 매뉴얼 운운하는 얘기를 귀가 따갑게 들었으면서도 사건만 나면 “매뉴얼은 무용지물이었다”는 평가를 들어야만 하는 것일까요. 그간 신문 보도를 찾아 보니 ‘미사일 위기관리 매뉴얼 부실’, ‘국외테러 위기 대응 매뉴얼 있으나마나’, ‘태안 기름 유출 사고 대응 매뉴얼 예측 벗어나’ 등이 눈에 띄었습니다. 큰 사건이 날 때는 거의 예외 없이 ‘매뉴얼 잘못’이 등장합니다. 무엇이 얼마나 잘못됐기에 이럴까요.
‘이러다가 정말 크고도 큰 사태가 터지면 그땐 매뉴얼이 제대로 작동할까’에 생각이 미치자 답답함이 밀려왔습니다. 북한 급변사태입니다. 장기간의 불규칙한 음주, 폭식에다 낮과 밤을 바꿔 생활하는 습관, 게다가 고혈압·당뇨병에 시달리고 있는 68세는 언제 어떤 일을 맞을지 모릅니다. 우리는 그 이후에 대비하고 있습니까.
북한 급변 사태 후 후회없도록 훈련 거듭해야
▶매뉴얼의 역사가 깊듯이 북한 급변 사태 대비 계획도 그렇습니다. 20여 년 전엔 ‘평화계획’이란 게 있었고, 이후 ‘충무계획’, ‘부흥계획’ 등의 이름으로 바뀌어 왔습니다. 북한이 갑작스럽게 무너질 때 북한의 행정권을 인수해 ‘비상통치’하는 방식이라고 합니다. 북한이 무너지더라도 어떤 계기로 그렇게 될지 모르는데 어떻게 제대로 된 계획을 세워놓겠느냐고 하는 분도 많습니다. 물론 그렇지요. 그렇지만 소설가에게 물어서라도 최대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계획을 세워두고 평소에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으면 될 것입니다. 이건 군사부문의 대응책인 작전계획과는 별개의 얘깁니다. 그러니까 북한 급변 사태가 벌어지면 우리의 각 부문은 평소 마련해서 관리하고 있는 대비계획에 따라 곧바로 ‘실천’에 옮길 수 있는 체제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런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정부 주변을 취재하다 보면 여러 종류의 훈련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게 여름에 하는 을지 포커스 렌즈입니다. 작전 수행에 필요한 한미협조관계, 업무 수행절차, 계획 및 체제를 평가·발전시키기 위한 일종의 전쟁 연습이지요. 이건 말 그대로 도상(圖上) 연습입니다. paper로만 공격하고 방어하는 식이지요. 그나마 지난 정부에서는 북한 측 반발로 축소하기까지 했습니다.
이런 정도의 대비 태세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계획도 계획이지만 시뮬레이션이 됐든 실전 훈련이 됐든 훈련을 자주 해야 합니다. 그런 후 현실에 맞지 않는다고 판단되는 부분을 꾸준히 고쳐 나가야 합니다. 그래야 맥스웰 테일러의 말처럼 유사(有事)시에도 놀랄 일이 적어지지 않을까요.
이런저런 대비계획이 만들어져 있고 훈련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올해 초 사진 몇 장 때문에 얼마나 놀랐습니까. ‘중앙고속도로 춘천-부산 374㎞’, ‘호남고속도로’ 등을 써놓은 도로에서 북한 탱크가 기동훈련을 하고 있었던 사진 기억나십니까. 군인들까지 굶어서 기력이 없고, 탱크나 장갑차는 기름이 떨어져 훈련도 못한다는 정도로 알려졌던 북한입니다. 북한도 급변 사태 대비 계획을 세워놓고 그에 따른 훈련을 하고 있나 봅니다. 정말 어이가 없는 일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시간이 많은지 적은지도 모릅니다. 독일 통일이 되기 3개월 전 열린 국제 안보세미나에서 독일 통일을 예상한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지 않습니까. 제대로 준비하지 않으면 ‘매뉴얼 부실’ 얘기를 해봤자 돌이킬 수 없는 사태를 맞게 됩니다. 그 엄청난 사태에서 그런 소리가 절대 나올 수 없도록 매뉴얼을 점검하는 매뉴얼이라도 만들어야겠습니다.⊙
상당수가 매뉴얼이라는 단어를 친숙하게 접한 것은 자동차 운전을 배우면서입니다. manual gearbox(수동변속기), automatic gearbox(자동변속기)를 줄여서 ‘매뉴얼’, ‘오토’라고 흔히 쓰지요. 그런 시절에도 사용설명서, 교본(敎本)과 같은 원래의 의미의 매뉴얼은 물론 있었습니다. 이것을 대통령이, 정부가 쓰면서 신문에도 자주 등장했던 것은 노무현 정부 때입니다.
대통령에 의한 첫 공식화가 2005년 1월 정부혁신토론회였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3년에는 로드맵을 만들었고 지난해에는 혁신문화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올해는 혁신 매뉴얼의 해”라고 말했습니다. 그 후 정부 언저리에서는 그야말로 한바탕 매뉴얼 소동이 벌어졌습니다. 각 기관마다 기존 업무처리지침이란 것을 모두 ‘매뉴얼’로 새 포장했습니다. 1년도 안된 2005년 12월 정부 안에는 위기대응(危機對應) 매뉴얼만 270개 정도가 생겼습니다. 북핵(北核) 우발사태, 산불 재난, 소요, 폭동…. 이런 것들에 대비한 것입니다. 당연한 일이지요. 국가적 재난을 극복하기 위한 절차를 사전에 정해 놓으면 그만큼 혼란과 혼선이 줄어들지 않을까요. 이번 호에 실린 ‘백선엽이 만난 6·25의 영웅들’에 보면 휴전협정 당시 미 8군 사령관 맥스웰 테일러는 항상 “지휘관은 놀라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고 합니다. 지휘관은 늘 선견지명(先見之明)을 갖고 앞날에 대비해야 한다는 말 아니겠습니까. 어떤 상황이든 대응절차가 잘 마련돼 있다면 ‘놀랄’ 일을 아주 없앨 수는 없겠지만 ‘놀라는’ 정도를 줄일 수는 있지 않겠나 싶습니다.
2005년 러시아 잠수함 사고, 매뉴얼대로 전원 구조
▶2005년 8월 북태평양 오호츠크해에서 승조원 7명을 태운 러시아 AS-28 소형 잠수함이 수심 190m 지점에서 그물에 걸렸습니다. 러시아 정부는 그물을 끊는 수중탐사선이 영국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곧바로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영국 정부는 수중탐사선을 보냈고, 승조원들은 모두 살았습니다. 러시아가 2000년 최악의 선박 침몰사고를 겪은 후 해난구조 대응 매뉴얼을 만든 결과라고 합니다. 이 매뉴얼은 잠수함 승선 인원에 따른 침몰 대응조치, 외국과의 사고 정보 공유, 각종 해양 구난 장비 보유, 해저 지도 등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사고를 당했어도 즉각 매뉴얼에 따라 구조를 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 매뉴얼이 정말 효자 노릇을 한 셈이지요. 매뉴얼도 잘 만들었고, 그에 따른 대응도 신속·적확(的確)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상당수 매뉴얼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조선일보 사람들팀을 맡고 있을 때 매뉴얼을 하나 만든 적이 있습니다. 일반 기사 외에도 동정(動靜), 인사(人事), 부음(訃音) 등을 챙겨야 하니 항상 기준(基準)을 놓고 논란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부(寄附)는 얼마 이상, 인사는 중앙부처 서기관급 이상을 쓰고, 향우회·동창회 소식은 넣지 않되, 대학교 총동창회장 동정 기사는 싣는다 등등을 정리했습니다. 정말 다양했습니다. 1년 이상 사람들팀을 맡고 있던 후배 기자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모호한 것은 편집국 회의에서 결론을 냈습니다. 그렇게 탄생한 ‘사람들팀 매뉴얼’이었지만 실제 적용 과정에서 그대로 지키지는 못했습니다. 매뉴얼이 완벽하지 못했던 탓도 있겠지만 세상이 복잡한 탓이 더 컸습니다.
하물며 국가 위기 사태가 벌어지면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노무현 정부에서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처장, 통일부장관을 했던 이종석씨도 “전쟁이 언제 매뉴얼대로 전개되느냐”고 말했다는 얘길 전해 들은 적이 있습니다. 매뉴얼을 만들 당시 모든 상황을 다 상정할 수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매뉴얼에 없는 ‘창의적’인 방식으로 대응한 것이 오히려 최상의 결과를 낳는 경우가 더 많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왜 처음부터 총력 구조 체제로 가지 못했을까 아쉬움
▶천안함 사건을 보면서 왜 이렇게밖에 안될까 하는 생각을 지우지 못하겠습니다. 단순화해서 말하면 침몰한 초계함에서 생존자를 구조하는 일과 배를 끌어올리는 일 두 가지가 이번 사건에서 가장 시급히 해야 할 일 아닙니까. 그렇다면 침몰이 알려진 직후부터 총력 구조체제를 갖춰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해군 구조함인 3000톤급 광양함은 사고 시각으로부터 41시간이 지나 파견됐고, 미군 구조함인 살보함은 그보다도 12시간 이상 더 늦게 구조에 나섰다고 합니다.
또 잠수했던 구조요원들의 사고 방지를 위한 감압 장비(減壓·챔버·고압산소치료실)도 1개밖에 없어 구조가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지요. 처음엔 침몰한 배의 위치도 찾지 못했고요. 사정이 없진 않겠지만 세금 꼬박꼬박 내온 일반 국민들로선 납득하기 어려운 일들입니다.
왜 처음부터 구조함, 구조요원을 총동원하지 못했을까, 미군과의 공조체제는 왜 늦었을까, 외부에 공개할 정보의 수위를 놓고는 또 왜 우왕좌왕했을까, 해난 구조에 필수적인 감압 장비가 1개에 불과하다면 평소 더 확보하려는 노력을 왜 하지 않았을까. 도대체 대한민국 해군은 해난 구조 훈련을 하기는 하는 것일까. 이런저런 궁금증이 들면서 신문을 뒤적이지만 명쾌하게 해답을 제시해 주는 곳이 없습니다.
왜 우리는 매뉴얼 운운하는 얘기를 귀가 따갑게 들었으면서도 사건만 나면 “매뉴얼은 무용지물이었다”는 평가를 들어야만 하는 것일까요. 그간 신문 보도를 찾아 보니 ‘미사일 위기관리 매뉴얼 부실’, ‘국외테러 위기 대응 매뉴얼 있으나마나’, ‘태안 기름 유출 사고 대응 매뉴얼 예측 벗어나’ 등이 눈에 띄었습니다. 큰 사건이 날 때는 거의 예외 없이 ‘매뉴얼 잘못’이 등장합니다. 무엇이 얼마나 잘못됐기에 이럴까요.
‘이러다가 정말 크고도 큰 사태가 터지면 그땐 매뉴얼이 제대로 작동할까’에 생각이 미치자 답답함이 밀려왔습니다. 북한 급변사태입니다. 장기간의 불규칙한 음주, 폭식에다 낮과 밤을 바꿔 생활하는 습관, 게다가 고혈압·당뇨병에 시달리고 있는 68세는 언제 어떤 일을 맞을지 모릅니다. 우리는 그 이후에 대비하고 있습니까.
북한 급변 사태 후 후회없도록 훈련 거듭해야
▶매뉴얼의 역사가 깊듯이 북한 급변 사태 대비 계획도 그렇습니다. 20여 년 전엔 ‘평화계획’이란 게 있었고, 이후 ‘충무계획’, ‘부흥계획’ 등의 이름으로 바뀌어 왔습니다. 북한이 갑작스럽게 무너질 때 북한의 행정권을 인수해 ‘비상통치’하는 방식이라고 합니다. 북한이 무너지더라도 어떤 계기로 그렇게 될지 모르는데 어떻게 제대로 된 계획을 세워놓겠느냐고 하는 분도 많습니다. 물론 그렇지요. 그렇지만 소설가에게 물어서라도 최대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계획을 세워두고 평소에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으면 될 것입니다. 이건 군사부문의 대응책인 작전계획과는 별개의 얘깁니다. 그러니까 북한 급변 사태가 벌어지면 우리의 각 부문은 평소 마련해서 관리하고 있는 대비계획에 따라 곧바로 ‘실천’에 옮길 수 있는 체제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런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정부 주변을 취재하다 보면 여러 종류의 훈련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게 여름에 하는 을지 포커스 렌즈입니다. 작전 수행에 필요한 한미협조관계, 업무 수행절차, 계획 및 체제를 평가·발전시키기 위한 일종의 전쟁 연습이지요. 이건 말 그대로 도상(圖上) 연습입니다. paper로만 공격하고 방어하는 식이지요. 그나마 지난 정부에서는 북한 측 반발로 축소하기까지 했습니다.
이런 정도의 대비 태세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계획도 계획이지만 시뮬레이션이 됐든 실전 훈련이 됐든 훈련을 자주 해야 합니다. 그런 후 현실에 맞지 않는다고 판단되는 부분을 꾸준히 고쳐 나가야 합니다. 그래야 맥스웰 테일러의 말처럼 유사(有事)시에도 놀랄 일이 적어지지 않을까요.
이런저런 대비계획이 만들어져 있고 훈련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올해 초 사진 몇 장 때문에 얼마나 놀랐습니까. ‘중앙고속도로 춘천-부산 374㎞’, ‘호남고속도로’ 등을 써놓은 도로에서 북한 탱크가 기동훈련을 하고 있었던 사진 기억나십니까. 군인들까지 굶어서 기력이 없고, 탱크나 장갑차는 기름이 떨어져 훈련도 못한다는 정도로 알려졌던 북한입니다. 북한도 급변 사태 대비 계획을 세워놓고 그에 따른 훈련을 하고 있나 봅니다. 정말 어이가 없는 일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시간이 많은지 적은지도 모릅니다. 독일 통일이 되기 3개월 전 열린 국제 안보세미나에서 독일 통일을 예상한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지 않습니까. 제대로 준비하지 않으면 ‘매뉴얼 부실’ 얘기를 해봤자 돌이킬 수 없는 사태를 맞게 됩니다. 그 엄청난 사태에서 그런 소리가 절대 나올 수 없도록 매뉴얼을 점검하는 매뉴얼이라도 만들어야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