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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핵 개발사

화보로 보는 북핵 개발사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사진 : 조선일보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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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과 마오쩌둥. 김일성은 1950년대부터 중국과의 의견교환을 거치며 핵개발 의지를 불태웠다.
  북한이 9월 3일 제6차 핵실험을 감행했다. 북한은 이번에 실험한 핵폭탄은 수소폭탄이라고 주장했다. 미국·일본 등도 이를 인정하고 있다. 8월 30일에는 ICBM급 미사일 발사에 성공했다. 북한의 기나긴 핵개발 여정이 드디어 끝을 보고 있는 것이다.
 
파키스탄 핵개발의 아버지 압둘 칸 박사는 북한에 핵기술을 넘겨준 장본인이다.
  북핵문제는 1993년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대북 특별사찰 요청 결의안을 채택하고, 북한이 NPT 탈퇴를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 통보하면서 국제적 이슈가 됐다. 이후 미북 간 제네바합의(1994년),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 설립과 경수로 공사(1995~2000년), 햇볕정책(2002년), 6자 회담(2003~2007년)과 2·13합의(2007년) 등의 노력과 유엔안전보장이사회 제재 등이 있었지만, 핵개발을 향한 북한의 질주를 막지는 못했다. 2006년 10월 9일 제1차 핵실험 이후 북한은 6차례의 핵실험과 ICBM 및 SLBM 실험을 강행했다.
 
영변 핵시설. 북한 핵개발의 산실이다.
  김일성이 핵을 보유하려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은 1950년대부터였다. 중국과 파키스탄이 이에 협력했다. 한국도 박정희 대통령 시절 핵무기 보유를 생각한 적이 있지만, 여러 가지 이유에서 실천에 옮기지 못했다. 이제 한국은 핵을 가진 북한을 상대로 생존을 모색해야 하는 궁지에 몰렸다. 북한의 핵개발사를 사진으로 살펴본다.⊙
 
미북 간 제네바합의에 따라 한·미·일이 참여하는 한반도 에너지개발기구(KEDO)가 만들어지고 북한에 경수로를 제공하기로 했지만, 북핵개발을 저지하지는 못했다. 왼쪽이 제네바합의를 이끌어낸 갈루치 미국 국무부 핵대사.

1992년 1월 14일 남북비핵화공동선언문을 교환하는 임동원 통일원차관(우)과 최우진 북한외교부 순회대사.
한국은 이를 충실히 지켰지만, 북한은 핵개발로 치달았다.

2007년 2·13합의 이후 북한을 방문한 국제원자력기구(IAEA) 실무 대표단.
IAEA는 북한 핵개발 상황을 사찰하려 노력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미북 간 ‘핵불능화’ 합의에 따라 2008년 6월 27일 북한 영변 핵시설의 냉각탑을 폭파했지만, 이는 쇼에 불과했다.

한 시민이 제1차 북핵실험이 있던 2006년 10월 9일 《조선일보》 ‘특별판’ 신문을 심각한 표정으로 읽고 있다.

1998년 12월 19일 자 《로동신문》에 실린 포스터.
3기의 미사일이 워싱턴, 동경, 서울을 겨냥하고 있다.

미국의 북한 전문 사이트 38노스가 공개한 북한 풍계리 핵실험장의 모습.

북한은 2016년 6월 1일 잠수함발사 탄도미사일(SLBM) ‘북극성’ 발사에 성공, 핵무기운반체계 개발을 진전시켰다.

북한은 지난 8월 30일 ICBM이라고 주장하는 ‘화성-12형’ 발사에 성공했다.

김정은은 지난 9월 10일 수소폭탄 개발에 성공한 핵 과학자·기술자를 위한 축하연회를 베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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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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