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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현의 KOREA WATCH

The Admiral

고독한 제독(提督)은 나라의 운명을 양 어깨로 짊어졌다

글 : 문갑식  월간조선 편집장

사진 : 이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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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한산도대첩이 벌어진 곳이다. 일본수군이 수장된 바다다.
  10월 11일 경상남도 통영(統營)으로 가 12일 첫 배를 타고 한산도(閑山島)로 들어갔다. 작정한 것도 아닌데 뜻밖의 호사를 누리게 됐다. 이날 오전 11시부터 향사(享祀)가 열리고 있었다. 해군 사령부격(格)인 한산도에 삼도수군통제영이 건립된 지 423년, 한산대첩을 거둔 지 424년을 기념하는 행사였던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3대 대첩 가운데 하나인 한산대첩 전적지(戰跡地)는 분명 통쾌해야 할 텐데 볼수록 안타까운 증거들만 나왔다. 한산도 높은 곳에서 통영을 바라보는 곳에 세운 제승당(制勝堂)의 행정명은 두억리다. 왜군 머리(頭)를 경상도 식으로 말하자면, ‘억수로 많이 잘라’ 두억리로 붙여졌다는 것이다.
 
통영 바다에는 거북선 세 척이 전시돼 있다. 동틀 무렵 햇살을 받은 거북선은 비록 모형일지언정 당당해 보인다.
  통영에서 한산도로 가는 30분 뱃길에는 작은 섬들이 많다. 저마다 사연이 있다. 한산도 관암 선착장 근처 작은 섬 이름이 해갑도(解甲島)다. 이순신 장군이 적을 무찌르다 잠시 갑옷을 벗고 쉬었다고 한다. 맞은편이 죽도(竹島)다. 섬에 빼곡한 대나무를 잘라 화살 등을 만들었다고 한다.
 
  통영 앞바다 맞은편이 거제도다. 그쪽에서 왜군이 밀려와 이순신 장군은 저 유명한 학익진(鶴翼陣)을 펴 왜군을 수장했다. 얼마나 다급했던지 왜군 400명이 도망친 곳이 하필이면 조선 수군 총사령부인 한산도다. 그들의 머리 역시 수없이 가라앉은 자기 전우(戰友)들의 곁으로 돌아가 물고기 밥이 됐다.
 
통영 세병관에 부속된 수항루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조선은 수군병사들을 왜군처럼 변장시켜 매년 항복절차를 밟는 행사를 여기서 열었다. 항복을 받는다고 해 수항루다.
  왜군에게 한산도는 ‘원한의 섬’이었다. 보복의 날은 3년 뒤 다가왔다. 이순신 장군을 미워한 한심한 왕 선조(宣祖)가 그를 파직하고 고문하고 계급을 빼앗는 사이 왜군은 원균(元均)이 이끄는 조선 수군을 칠천량에서 궤멸시켰다. 그후 왜군이 처음 저지른 일이 이를 부득부득 갈아 온 한산도를 짓밟는 것이었다.
 
  제승당이 중건된 것이 그로부터 140여 년 뒤인 영조 15년(1739년)이다. 지금 제승당 안에 보관돼 있는 ‘제승당’이라는 현판은 가운데가 뚝 잘린 것을 붙인 것이다. 역사를 모르는 인부가 불쏘시개로 쓰려고 그런 짓을 저지르고 말았다. 역사에 무지(無知)한 민족이 살아남았다는 역사를 우리는 들어본 적이 없다.
 
진남관은 여수에 있는 국보다. 전라좌수영의 본진이었던 이 건물은 남쪽을 진압한다는 뜻으로, 세병관, 서울의 경회루와 함께 조선을 대표하는 대형 건축물이다.
  다시 뭍으로 올라가 세병관(洗兵館)을 본다. 세병관은 서울 경회루, 여수 진남관(鎭南館)과 함께 조선시대를 상징하는 3대 대형 건축물이다. 공무를 집행하는 이곳 마루에 앉으면 통영 앞바다가 훤히 보인다. 일제는 조선을 강점한 뒤 삼도수군통제사의 집무공간이었던 이곳마저 철저하게 유린해 버렸다.
 
  특이하게 세병관만 살아남은 것은 이곳이 옛 통영국민학교로 쓰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여기서 〈깃발〉의 시인 청마 유치환, 대하소설 《토지》의 작가 박경리 선생 등이 공부했다. 세병관 기둥에는 군데군데 시멘트로 구멍을 메운 자국이 있는데 이 넓은 공간을 교실로 사용하기 위해 막대기를 꽂아 놓은 흔적이라고 한다.
 
진도대교 밑에 설치된 해남 전라우수영 관광지에는 성곽과 함께 이순신 장군의 동상이 있다. 진도대교 밑이 명량대첩의 전적지인 울돌목이다.
  다시 이순신에게 돌아가 본다. 장군은 백의종군하며 확인했다. 겨우 남은 열두 척의 배를 거느리고 장군이 머문 곳이 전라남도 진도 벽파진(碧波鎭)이다. 푸른 파도 넘실대고 앞으로 섬들이 점점(點點)이 박힌 이 섬 언덕에서 맞은편 해남 어란진(於蘭鎭)에 진을 친 왜군 133척과 싸움을 준비하고 있었다.
 
  ‘죽기를 각오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건곤일척의 일전(一戰)이었다. 제주도와 추자도를 잇던 벽파진은 지금 한적한 해변으로 변했다. 장군은 자기 목숨을 바칠 장소를 울돌목(명량)으로 정했다. 물결 울부짖는 소리가 수십 리까지 들린다는 곳이다. 그 소리는 장군의 몸속에서 나온 비명(悲鳴)이었을 것이다.
 
전남 진도 벽파진은 배중손 장군이 삼별초를 이끌고 강화도에서 도착한 장소이자 백의종군하던 이순신 장군이 남은 배 열두 척을 모아 왜군과의 결전을 준비하던 장소다.
  명량대첩 전적지 위로는 진도대교가 걸려 있다. 밑에는 최근 만든 장군의 동상이 서 있는데 그렇게 외로워 보일 수가 없다. 물결은 조선시대처럼 지금도 소용돌이치며 거세게 몸부림친다. 그걸 보며 장군이 하늘에서 “왜 이 민족은 이렇게 백척간두 위에서만 싸워야 하는가” 하고 한탄하는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한산도를 지금처럼 꾸민 사람이 고 박정희 대통령이다. 대통령은 이곳을 보수하라고 지시한 지 3년 뒤 다시 대대적인 정비를 지시했다. 박 대통령이 한산도를 돌아본 시점은 김일성이 침략의 발톱을 턱밑까지 드러낸 시점이다. 대통령은 한산도에서 이순신 장군이 느낀 고독을 맛보며 결단을 준비했을 것이다.
 
진도 울돌목 근처에 마련된 충무공 이순신 장군 동상이다.
고독하게 바다를 응시하고 있다.
  러시아 발틱함대를 궤멸시킨 일본 제독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1848〜1934)가 말했다. “나를 영국 넬슨에 비교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이순신 장군에 비교하는 것은 감당할 수 없다.” 도고에겐 섭섭하게 들리겠지만 그는 이순신뿐 아니라 넬슨과도 동격(同格)일 수 없다.
 
  이순신과 넬슨의 최후는 흡사하다. 1805년 10월 21일 나폴레옹함대가 발사한 탄환이 호레이쇼 넬슨(1758~1805)의 가슴을 관통했다. 제독은 말했다. “저놈들이 끝내 나를 해치웠군.” 이미 오른쪽 눈과 오른쪽 팔을 잃은 제독이 죽기 직전 물었다. “적선이 몇 척이나 투항했는가.” 13척 혹은 14척이라고 하자 그는 말했다. “잘했네. 하지만 나는 여왕께 스무 척을 약속했는데 ….” 나는 그 장면을 한산도의 해풍 속에서 곱씹어 보았다. 이순신 장군과 그를 되살린 박정희 대통령, 넬슨 제독 …. 위대하니 제독(提督)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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