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 ‘베트남의 실패’를 이라크와 아프간에서 되풀이
⊙ 해외에서 쓴 막대한 돈을 미국 내 인프라와 공동체에 투자했어야 한다는 불만
⊙ 대외 개입에 대한 반감에 포퓰리스트 세계관 겹쳐
⊙ 미국, 1950년대 ‘슈퍼맨’에서 베트남전 이후 ‘기진맥진한 아틀라스’로 전락
⊙ 미국의 대외 개입에서 개발된 강압적 전술은 국내 불안정을 관리하는 데도 적용
임명묵
1994년생. 서울대 아시아언어문명학부 졸업 / 現 서울대 대학원 아시아언어문명학부 재학 중. 《조선일보》 《시사저널》 칼럼니스트 / 저서 《러시아는 무엇이 되려 하는가》 《K를 생각한다》 《거대한 코끼리, 중국의 진실》
⊙ 해외에서 쓴 막대한 돈을 미국 내 인프라와 공동체에 투자했어야 한다는 불만
⊙ 대외 개입에 대한 반감에 포퓰리스트 세계관 겹쳐
⊙ 미국, 1950년대 ‘슈퍼맨’에서 베트남전 이후 ‘기진맥진한 아틀라스’로 전락
⊙ 미국의 대외 개입에서 개발된 강압적 전술은 국내 불안정을 관리하는 데도 적용
임명묵
1994년생. 서울대 아시아언어문명학부 졸업 / 現 서울대 대학원 아시아언어문명학부 재학 중. 《조선일보》 《시사저널》 칼럼니스트 / 저서 《러시아는 무엇이 되려 하는가》 《K를 생각한다》 《거대한 코끼리, 중국의 진실》
- 지난 2월 28일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정상회담을 가졌지만, 파국으로 끝났다. 사진=AP/뉴시스
3월 1일에 전 세계는 전날 백악관에서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J.D. 밴스 부통령이 우크라이나의 볼로미디르 젤렌스키 대통령과 벌인 노골적 설전(舌戰)을 보고 충격에 빠졌다. 트럼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에 항전(抗戰) 대신 평화가 필요하다면서 러시아와 굴욕적인 평화 협상을 체결하라고 압박을 시작했고, 미국의 지원 금액은 우크라이나의 희토류(稀土類)와 광물로 갚으라는 협정도 제시했다. 가장 든든한 후원자이던 민주당의 조 바이든 전 대통령 대신에 싸늘해진 트럼프를 찾아야 했던 젤렌스키는 백악관에서 시종일관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고, 부통령 밴스가 그에 분개해 공개적인 면박을 주었다.
국제 외교 무대가 아니라 리얼리티 쇼가 아닌가 의심하게 만드는 이 장면은 트럼프의 미국이 자유주의 국제 질서를 위해 헌신하겠다는 의지를 본격적으로 내려놓았다는 상징으로 다가왔다. 역시 충격을 받은 유럽의 각 정상(頂上)들은 젤렌스키를 위로하며 우크라이나의 항전에 계속 함께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하지만 러시아군에 맞서 싸우기 위한 핵심 정찰 자산은 물론이고 군수(軍需) 물자와 국가 운영 비용까지 미국이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했을 때, 유럽 단독으로 우크라이나가 충분히 잘 싸울 수 있게끔 지원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6·25 당시의 미국이 아니다
많은 한국인들은 이를 보며 6·25 한국전쟁 당시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외교적 ‘곡예’를 통해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한 이승만(李承晩) 전 대통령을 떠올리며 우크라이나를 향한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하지만 이승만 전 대통령의 공은 별개로 평가하되, 1950년대의 한국과 2020년대의 우크라이나가 굉장히 다른 처지에 놓여 있음을 인식할 필요도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2020년대의 미국이 1950년대의 미국과 완전히 다른 대외(對外)정책의 철학을 가지게 되었다는 데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변화가, 이승만 전 대통령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할 수 있었지만 젤렌스키는 면박을 받을 수밖에 없게 된 결정적인 운명의 차이를 만들었다.
1950년대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 국력이 절정에 달했던 초(超)강대국이었다. 미국은 구(舊)시대의 유럽 제국주의를 몰아내고 미국 자신의 이상(理想)에 맞게 설계된 자유의 세계를 만들 야심에 불타고 있었다. 소련 공산주의는 이를 정면에서 방해하는 잠재적인 적수로 여겨졌다. 1945년부터 1948년 무렵까지 소련군 치하의 동유럽에 공산 정권이 수립되는 것을 지켜보고, 결정적으로 1949년에 중국이 적화(赤化)되는 것을 보면서 미국은 냉전(冷戰) 대립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미국이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만 한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김일성(金日成)의 남침(南侵)에 미국이 그토록 신속하게 반응하여 자국 젊은이들의 목숨을 희생하게 하고, 끝내 신생 대한민국에 안보 보장까지 해준 것은 미국이 공산주의로부터 세계의 자유를 지켜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국의 압도적인 경제력과 산업력은 그 의무 수행을 가능하게 해주는 현실적 힘이었다.
하지만 2020년대의 미국은 전혀 달라졌다. 자유주의에 그다지 동의하지 않는 비서구 국가들의 힘이 주요 선진국과 비등해졌다. 미국은 여전히 초강대국으로서 첨단 기술과 금융에서 패권을 유지하고 있지만 산업적 역량은 오랜 탈(脫)산업화를 거치면서 고갈된 상태다. 국내적으로는 마약과 인종 문제, 불법 이주민과 난민 문제로 국경 내에서의 안전이 미국 바깥의 자유보다 중요하다는 여론이 계속 커져 왔다. 서유럽 동맹국들이 미국의 안보 우산에 무임(無賃)승차한다는 불만도 팽배해졌다. 이런 불만은 자유주의 국제 질서가 미국에 짐이 될 뿐이라고 믿는 새로운 엘리트 그룹의 형성으로 이어졌다. 이들은 미국이 앞으로도 세계 초강대국으로 남지 못한다면 자유주의 국제 질서를 떠받치는 일은 그만둘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70년 동안 자신과 세계를 바라보는 미국의 시선은 그야말로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 그러니 이승만 전 대통령이라고 할지라도 지금 직무를 수행했다면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맺는 것은 아마 언감생심이었을 것이다.
베트남 전쟁의 유령
그렇다면 미국은 어쩌다 자신만만한 슈퍼맨에서 기진맥진한 아틀라스가 되었을까? 그 변화의 핵심에는 50년 전에 끝난 베트남 전쟁의 ‘유령’이 자리하고 있다.
베트남 전쟁은 1950년대와 1960년대에 격화된 제3세계의 탈식민 투쟁의 중대 분수령(分水嶺)이었다. 미국은 영국과 프랑스의 제국주의를 구시대의 유물로 생각하고 있어 식민지 독립을 지원했지만, 신생 독립국들이 소련이 지원하는 사회주의 혁명가들에게 넘어가는 것도 동시에 우려했다. 하지만 제3세계 사회주의자들은 강력한 민족주의 투쟁가들로 명성을 떨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의 제3세계 냉전 전략은 많은 비판을 받기도 했다.
1950년에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필리핀의 항일 무장군 후크발라하프가 토지개혁을 요구하며 공산주의 성향을 드러낸다는 이유로 라몬 막사이사이가 이끄는 광범위한 진압작전을 지원했다. 공산화는 막았지만 한국과 달리 토지개혁이 이루어지지 않은 필리핀은 대지주 가문이 다스리는 과두정(寡頭政) 국가가 되었다.
필리핀뿐 아니라 제3세계 전반에 만연했던 토지 불평등은 사회주의 게릴라들이 지속적인 농민 반란을 일으킬 수 있는 비옥한 토양을 제공했다. 여기에 농민과 한 몸이 되어 지구전(持久戰)을 수행하는 마오쩌둥(毛澤東)의 유격전(遊擊戰) 교리까지 확산되며 미국은 제3세계 농민 혁명에 대처하기 점점 더 곤란해지고 있었다. 1959년 1월에는 쿠바에서 피델 카스트로와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가 이끄는 소수 게릴라가 풀헨시오 바티스타 정권을 전복하며 미국의 턱밑에도 사회주의 정권이 등장했다. 이런 위기감 속에서 미국의 전략가들이 바라본 다음 싸움터가 바로 동남아시아였다.
거대한 실험장
당시 미국은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베트남이 호치민이 이끄는 베트남 공산당(월맹)의 손에 완전히 떨어질 것을 우려했다. 월맹군은 이미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군에게 패배를 안기면서 베트남 민족 해방의 상징으로 완연히 자리 잡은 상태였다. 하지만 미국 입장에서 북베트남의 공산당은 북쪽 소련과 중국의 공산주의가 동남아시아까지 남하하는 증거로 받아들여졌다.
이 상황에서 국제 사회는 일단 베트남 문제 해결을 위해 1954년 제네바 회담에서 우선 북위 17도선을 기준으로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을 나누고, 향후 총선거를 통해서 통일 베트남 정부를 출범시키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북베트남에서 공산당이 토지개혁을 진행하며 강력한 사회 장악력을 확보하는 동안 남베트남은 여전히 불안정한 상태가 지속되고 있었고, 공산당 주도 통일을 목표로 하는 북베트남은 계속해서 인력을 파견하여 남베트남의 후방을 교란하고 있었다.
북베트남을 신뢰하지 못한 미국은 총선거를 거부하고, 남베트남 정부를 강화해 공산 세력의 남하를 저지하기로 결심했다. 이에 분개한 북베트남이 적화통일 사업을 시작했고, 미국은 남베트남 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공군력을 지원하고 후에는 대규모 지상군까지 파병하면서 본격적으로 베트남이라는 수렁에 빠지게 된다.
베트남은 1950년대를 거치면서 필리핀, 한국, 쿠바 등 다양한 제3세계 농민 사회주의 운동에 직면하며 미국이 개발한 각종 ‘처방전’이 총동원된 거대한 실험장이었다. 여기에는 롤링썬더 작전으로 대변되는 무자비한 융단 폭격부터, 한국전쟁 시기에 발전한 심리전(心理戰)과 첩보전 교리, 그리고 농촌이 사회주의 게릴라에 넘어가지 않게끔 군사적 방어와 근대적 발전을 동시에 제공하는 전략촌(戰略村) 사업이 포함되었다. 미국은 압도적 무력(武力)과 농촌의 적화를 막을 효과적 근대화 프로그램이 있다면 남베트남을 충분히 지킬 수 있으리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미국의 이런 노력이 무색하게 베트남 전쟁은 끝이 보이지 않는 골칫거리가 되었다.
수렁에 빠진 베트남
가장 큰 원인은 남베트남 정부의 불안정이었다. 케네디 행정부는 미국의 통제를 따르지 않는 응오 딘 지엠 대통령을 제거했는데, 남베트남에서 그래도 정치적 권위를 갖고 있던 지엠의 공백은 곧 치명적인 것으로 드러났다. 연이어 쿠데타가 발생하며 제 기능을 하지 못한 남베트남 정부는 통제 불능의 부패로 얼룩지게 되었고, 이는 농민들이 남베트남 국가 자체를 불신하게 하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한편 남베트남의 정치적 안정을 미군이 제공하는 더 큰 무력으로 해결하려 한 전략은 두 번째 원인인 국제 여론의 악화를 불러왔다. 공산권은 물론이고 제3세계에서도 미국의 베트남 개입은 적화를 막기 위한 자유 수호가 아니라 철 지난 제국주의의 연장으로 받아들여졌다. 게다가 미디어가 발전하면서 베트남전의 각종 참상이 신속하게 보도되었는데, 이 역시 대의(大義)는 민족해방전선(NLF)에 있다는 믿음이 세계적으로 확산되는 데 기여했다.
정치가 표류하고 군사력으로도 해결이 안 되는 가운데 국제 여론도 악화되니 미국의 국내 반전(反戰) 여론도 들끓었다. 전후(戰後)의 풍요 속에서 성장한 베이비붐 세대는 1968년을 계기로 급진적 사회운동에 눈을 떴는데, 이들은 부도덕한 전쟁인 베트남에 징집될 수 없다며 징집 거부 운동을 벌였다. 남부의 인종 분리에 도전하기 시작한 흑인 민권운동가들도 국내의 인종 정의도 실현하지 않는 미국이 타국에 군사적 개입을 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며 베트남과 민권운동을 연결했다.
베트남 철군
이러한 국내 여론의 악화는 베트남에 들어가는 천문학적인 전비(戰費)를 미국이 감당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미국의 제조업 경쟁력이 약화되고 무역 적자가 늘어 가는 가운데 베트남에 계속 돈을 쏟는 것이 맞냐는 회의론이 널리 퍼졌다.
1969년에 취임한 리처드 닉슨 대통령과 그 책사(策士) 헨리 키신저는 우선 베트남 전쟁을 마무리 짓고자 노력했다. 베트남이라는 수렁에 미국의 힘을 쏟으면 그 공백을 소련과 중국의 공산주의 세력이 채울 수밖에 없다는 위기감이 맴돌았다.
닉슨 행정부는 우선 베트남에서 미군을 점차적으로 철군하는 대신에, 남베트남군이 자체적으로 국가를 방위할 수 있도록 훈련과 장비를 지원하는 ‘베트남화’ 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미군 없이 남베트남이 기울어진 전세(戰勢)를 뒤집을 수는 없었고, 1975년에 남베트남의 수도인 사이공이 함락되며 베트남 전쟁은 마침내 끝이 났다.
미국은 남베트남을 버렸다는 자유 진영 내부의 비난을 감내해야 했지만, 그사이에 국내 경제 개혁에 착수하고 마오쩌둥과 정상회담을 하며 소련과 데탕트에 나서면서 미국의 힘을 재조직할 시간을 벌었다.
‘여러 베트남들’
그러나 베트남 철군 이후에도 미국은 곧바로 국내외의 ‘여러 베트남들’에 또다시 대처해야 했다. 우선 호치민과 보 응우옌 잡 장군이 초강대국 미국을 무찌르며 획득한 명성은 제3세계의 숱한 사회주의 게릴라 운동에 영감을 제공했다. 마오쩌둥의 유격전론과 체 게바라의 게릴라론에 더해서, 국제 여론을 움직이고 농촌에 은밀히 침투하여 기반을 확대하라는 베트남식 방법론은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각지로 퍼져 나갔다.
가장 대표적인 조직이 야세르 아라파트의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였다. 아라파트는 인접한 요르단을 ‘팔레스타인의 하노이’로 만들겠다고 선언하며 이스라엘 인접 팔레스타인 난민촌에 해방구를 건설해 대(對)이스라엘 게릴라 투쟁에 나섰고, 팔레스타인에 동정적인 국제 여론을 형성하고자 노력했다. 한편 남미의 정글에서는 쿠바 모델을 따르는 혁명가들이 활동하고 있었고, 남아프리카에서는 앙골라와 모잠비크에서 대포르투갈 투쟁이, 로디지아(현 짐바브웨)와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대아파르트헤이트 투쟁이 격화되었다. 물론 닉슨과 키신저는 중국, 소련과 데탕트를 하더라도 추가적인 공산주의의 확장은 절대 용인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고, 미국은 다시 베트남 전쟁에서 축적한 대반란, 대게릴라 전술을 동원하여 이에 맞서고자 했다.
미국의 전술은 베트남전처럼 국제 사회와 국내 여론을 자극하는 대규모 군사 개입을 피하되, 더 은밀히 작전을 수행하며 ‘여러 베트남들’을 관리하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라틴아메리카에서 미국은 반공 정권들과 함께 공산주의 활동가를 색출하는 콘도르 작전을 수행했고, 남아프리카에서도 마찬가지로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에 채찍과 당근을 제공하며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고자 했다. 헬리콥터를 활용한 촌락 급습, 공군기를 통한 정찰과 폭탄 투하, CIA를 활용한 요원 납치와 암살은 대부분 이전 베트남에서 대규모로 실시된 전술이었다. 이런 개입은 인도차이나에서도 계속해서 이루어졌는데, 미국은 베트남의 세력 확장을 막겠다며 라오스와 캄보디아에 각종 지뢰와 폭발물을 투하했다.
국내에도 강압적 전술 도입
동시에 미국의 대외 개입에서 개발된 강압적 전술은 국내의 불안정을 관리하는 데도 적용되기 시작했다. 베트남 전쟁과 참전자들이 겪는 심리적 곤경, 히피 운동의 부상(浮上), 도시 흑인 게토의 위기는 미국에서 마약 소비의 폭증으로 이어졌고, 급진적 사회운동과 인종 소요, 범죄의 증가는 다수 미국인의 일상을 해치는 위험으로 여겨졌다. 이런 사회 혼란의 확산은 베트콩이 활약하는 베트남의 농촌과 같은 ‘위험지대’가 미국의 도심 게토나 대학가 캠퍼스에 퍼지고 있다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닉슨은 미국에 ‘법과 질서’를 회복하겠다는 구호로 큰 인기를 끌었고, 이후 행정부에서도 더 강화된 경찰력과 각종 군사화된 수단을 통해 마약과 범죄를 퇴치하겠다는 공약이 이어졌다. 미국의 경찰, 군, 정보기관은 국내외의 마약 재배지를 급습하고, 감시 네트워크를 통해 ‘위험 분자’를 색출하며 미국의 국토를 안전하게 만들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베트남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노력은 많은 문제를 완전히 해결할 수 없었고, 계속해서 천문학적인 예산과 막대한 인력의 투입을 요구하고 있었다. 제3세계의 불평등한 토지 구조는 게릴라나 카르텔이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었고, 이들은 중앙정부의 감시를 피해 마약 재배와 밀수를 수익성 있는 사업으로 개발했다. 마찬가지로 미국 도시의 사회적 위기는 마약 수요를 끝없이 창출했고 도시 빈민을 범죄로 계속해서 내몰았다.
결과적으로 1980년대, 나아가 냉전이 끝난 이후 1990년대에도 미국은 베트남의 유령에서 탈출하지 못했다. 멕시코, 콜롬비아, 니카라과에서는 마약 재배지가 계속 확대되었다. 이 지역의 농촌 갈등은 종종 냉전과 연계되어 심각한 내전으로 이어졌고, 게릴라와 군벌(軍閥)의 영향력을 더 강화했다. 중동에서는 PLO에 자극을 받은 각종 게릴라 단체들이 생겨났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레바논 남부에서 이란의 지원을 받으며 성장한 헤즈볼라였다.
지하드와 네오콘
한편 미국은 소련 공산주의의 팽창을 막을 수 있다면 마약상과 게릴라를 역으로 지원하기도 했다. 니카라과에서 공산주의 정당인 산디니스타가 정권을 획득하자 미국은 우익 콘트라 반군을 지원했는데, 콘트라는 미국이 연구한 공산 게릴라 전술을 학습하여 기반을 구축했다. 콘트라 지원을 위해 CIA가 이란과 무기를 거래하고 마약 밀매를 묵인한 사실은 레이건 행정부의 최대 스캔들로 번지기도 했다.
동시에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에서 공산주의 정부를 지키려 주둔한 소련군을 압박하기 위해, 각지의 이슬람주의 지하드 전사들을 포섭해 아프가니스탄으로 파견했다. 이들은 〈람보 3〉(1988)와 같은 영화에서 ‘자유의 전사들’로 등장했지만, 훗날 미국의 가장 골치아픈 적수로 돌변했다.
군사화된 개입주의는 조지 W. 부시 행정부와 네오콘 각료들이 추진한 ‘테러와의 전쟁’에서 절정에 달했다. 베트남전에서 개발된 대반란 전술을 은밀히 사용하되, 베트남과 같은 대규모 군사 개입은 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동안 미국이 베트남 트라우마를 다루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소련이 무너지고 미국이 세계 유일 초강대국으로 부상하는 과정에서, 네오콘은 미국이 더는 베트남의 유령에 시달릴 필요가 없다는 자신감을 적극적으로 표출했다. 부시 행정부는 소련과 맞선 미국의 친구였으나 끝내 9·11 테러로 미국 본토를 공격한 오사마 빈 라덴을 응징하고, 그를 숨겨 준 아프가니스탄의 반문명적 탈레반을 몰아내고, 또 다른 ‘악(惡)의 축(軸)’인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도 끌어내려 세계에 자유를 확대하겠다는 원대한 구상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되풀이된 베트남의 악몽
그러나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베트남의 악몽은 다시 시작되었다. 현지의 섬세한 권력 관계를 이해하지 못한 미국은 두 국가에서 안정적인 정부를 수립하는 데 실패했고, 압도적 무력을 통한 군사적 해결에만 집착했다. 그러는 사이에 아프가니스탄은 최대의 아편 생산지로 부상했고, 이라크에서는 석유 밀매에 뛰어든 군벌이 시리아 내전을 틈타 ISIS(이라크·시리아 이슬람국가)로 진화했다. 부시의 개입을 끝내겠다는 오바마도 사태를 해결하지 못했다. 무아마르 카다피 정부를 끌어내리고자 오바마도 리비아에 개입했지만, 정치가 붕괴하며 리비아에서도 내전이 펼쳐졌다.
끝내 미국은 2021년에 아프가니스탄에서 굴욕적으로 철수하면서 1975년 사이공 함락의 악몽이 세계에 생중계되는 것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리비아, 이라크, 시리아에서도 사태는 정치적 합의를 도출해 내는 지역 강국들의 능력으로 해결되었지 미국의 군사력으로 해결되지 않았다.
계속되는 ‘여러 베트남들에서의 실패’는 미국 유권자의 강한 반감 표출로 이어졌다. 미국이 해외에서 그 많은 예산을 쓰는 대신에 일부라도 미국의 무너져 가는 인프라와 공동체에 투자했더라면 미국인들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었으리라는 것이었다. 갈수록 늘어만 가는 마약 중독자들과 도심의 인종 소요, 치안 불안은 이들의 주장을 입증하는 증거로 여겨졌다.
이후 대외 개입에 대한 반감에 포퓰리스트 세계관까지 더해졌다. 포퓰리스트 유권자들은 미국의 대외 군사 개입이 미국 일반 국민의 안정과 번영을 위해서가 아니라 ‘세계제국을 움직이는 엘리트 일당’의 이해관계를 위해서 벌어진다고 믿었다. 누구를 대통령으로 뽑든 어떤 정당을 뽑든, 월스트리트와 펜타곤, 군산(軍産) 복합체와 CIA를 오가는 이 세계제국의 엘리트는 바뀌지 않은 채 미국 국가와 세계 전체를 좌지우지한다는 믿음이 확산되었다. 국가 안의 국가라는 ‘딥 스테이트’와 국민을 배신하는 ‘글로벌리스트’가 일반 미국인의 생명을 버려 가며 자신들의 세계적 기득권에 집착한다는 비난은 도널드 트럼프가 출마한 2016년, 2020년, 2024년의 대통령 선거들에서 지속적으로 폭발했다.
‘뮌헨의 유령’
바로 이것이 트럼프가 미국의 외교 전문가들과 유럽 우방국 지도자들의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우크라이나에서 손을 털고 나오겠다고 공언한 이유다. 자신은 ‘또 다른 베트남’과 마주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이 트럼프를 지지하는 유권자에게 호소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물론 비난의 대상이 된 전통적인 대외정책 결정권자들에게는 나름의 변명이 있다. 그들은 미국이 부도덕한 군사 개입에 무모하게 돈을 쏟는 ‘베트남의 유령’을 피하느라 ‘뮌헨의 유령’을 마주할 수도 있다고 믿었다. 1938년 뮌헨에서 영국과 프랑스는 히틀러의 체코슬로바키아 합병 시도를 보며 ‘이쯤 하면 멈추겠지’라고 안일하게 생각하여 히틀러를 용인했다. 이 뮌헨 협정의 실수가 히틀러에게 ‘무엇이든 해도 된다’는 사인을 주어 결국에는 제2차 세계대전을 불러왔다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자유주의 엘리트들은 ‘뮌헨의 유령’을 피하기 위해 자유주의 질서를 해치는 적들에 대한 단호한 군사 개입과 우방국을 향한 관대한 지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따지고 보면 1950년의 대한민국도 뮌헨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미국의 의지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던 국가 중 하나였다. 그러나 어쨌든 지금 미국의 다수 유권자는 ‘뮌헨의 유령’을 피한다는 이유로 만나야만 했던 ‘베트남의 유령’에 더 질색하는 모양새다.
국가를 강화할 유능한 지도자
문제는 ‘베트남의 유령’과 ‘뮌헨의 유령’을 동시에 피하는 새로운 길이 있냐는 것이다. 그리고 미국 입장에서 보더라도, 북미(北美)의 안전만을 위해서 그린란드, 파나마, 캐나다를 합병하는 게 그 길이 될 것 같지는 않다. 미국은 북미에 고립된 섬이 결코 아니다. 유라시아의 평화는 한국처럼 유라시아에 있는 국가뿐 아니라 유라시아와의 무역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미국에도 중요하다.
어쩌면 과거 한국의 길에서 아이디어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숱한 ‘베트남들’에서 미국이 실패한 이유는 안정되고 유능한 국가를 만들 현지 지도자를 발굴하는 데 계속해서 실패했기 때문이다. 이 정치적 실패는 지역을 불안정하게 만들었고, 그 어떤 군사적 노력도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반면에 국민적 지지를 받는 지도자가 국가 재건과 발전에 매진한 한국은 큰 성공을 거두며 지역 안정에 기여하는 국가가 되었다. 냉전기 다른 성공 사례도 한국과 유사한 경우가 많았다.
미국이 끝없는 ‘베트남 전쟁의 유령’에 질려서 ‘자유주의 질서’라는 짐을 내려놓으려고 하는 지금, 한국과 일본을 포함한 세계 주요 국가가 불안정 지역에서 국가를 강화할 유능한 지도자를 판별하고 지원하는 일이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 그리고 정치적 안정을 통해 폐허에서 기적을 일군 한국의 사례는 분명 기준점을 마련할 좌표로서 계속해서 깊이 탐구되어야 할 것이다.⊙
국제 외교 무대가 아니라 리얼리티 쇼가 아닌가 의심하게 만드는 이 장면은 트럼프의 미국이 자유주의 국제 질서를 위해 헌신하겠다는 의지를 본격적으로 내려놓았다는 상징으로 다가왔다. 역시 충격을 받은 유럽의 각 정상(頂上)들은 젤렌스키를 위로하며 우크라이나의 항전에 계속 함께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하지만 러시아군에 맞서 싸우기 위한 핵심 정찰 자산은 물론이고 군수(軍需) 물자와 국가 운영 비용까지 미국이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했을 때, 유럽 단독으로 우크라이나가 충분히 잘 싸울 수 있게끔 지원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6·25 당시의 미국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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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가운데)은 벼랑 끝 외교 끝에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얻어냈다. 사진=조선DB |
하지만 이승만 전 대통령의 공은 별개로 평가하되, 1950년대의 한국과 2020년대의 우크라이나가 굉장히 다른 처지에 놓여 있음을 인식할 필요도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2020년대의 미국이 1950년대의 미국과 완전히 다른 대외(對外)정책의 철학을 가지게 되었다는 데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변화가, 이승만 전 대통령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할 수 있었지만 젤렌스키는 면박을 받을 수밖에 없게 된 결정적인 운명의 차이를 만들었다.
1950년대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 국력이 절정에 달했던 초(超)강대국이었다. 미국은 구(舊)시대의 유럽 제국주의를 몰아내고 미국 자신의 이상(理想)에 맞게 설계된 자유의 세계를 만들 야심에 불타고 있었다. 소련 공산주의는 이를 정면에서 방해하는 잠재적인 적수로 여겨졌다. 1945년부터 1948년 무렵까지 소련군 치하의 동유럽에 공산 정권이 수립되는 것을 지켜보고, 결정적으로 1949년에 중국이 적화(赤化)되는 것을 보면서 미국은 냉전(冷戰) 대립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미국이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만 한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김일성(金日成)의 남침(南侵)에 미국이 그토록 신속하게 반응하여 자국 젊은이들의 목숨을 희생하게 하고, 끝내 신생 대한민국에 안보 보장까지 해준 것은 미국이 공산주의로부터 세계의 자유를 지켜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국의 압도적인 경제력과 산업력은 그 의무 수행을 가능하게 해주는 현실적 힘이었다.
하지만 2020년대의 미국은 전혀 달라졌다. 자유주의에 그다지 동의하지 않는 비서구 국가들의 힘이 주요 선진국과 비등해졌다. 미국은 여전히 초강대국으로서 첨단 기술과 금융에서 패권을 유지하고 있지만 산업적 역량은 오랜 탈(脫)산업화를 거치면서 고갈된 상태다. 국내적으로는 마약과 인종 문제, 불법 이주민과 난민 문제로 국경 내에서의 안전이 미국 바깥의 자유보다 중요하다는 여론이 계속 커져 왔다. 서유럽 동맹국들이 미국의 안보 우산에 무임(無賃)승차한다는 불만도 팽배해졌다. 이런 불만은 자유주의 국제 질서가 미국에 짐이 될 뿐이라고 믿는 새로운 엘리트 그룹의 형성으로 이어졌다. 이들은 미국이 앞으로도 세계 초강대국으로 남지 못한다면 자유주의 국제 질서를 떠받치는 일은 그만둘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70년 동안 자신과 세계를 바라보는 미국의 시선은 그야말로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 그러니 이승만 전 대통령이라고 할지라도 지금 직무를 수행했다면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맺는 것은 아마 언감생심이었을 것이다.
베트남 전쟁의 유령
그렇다면 미국은 어쩌다 자신만만한 슈퍼맨에서 기진맥진한 아틀라스가 되었을까? 그 변화의 핵심에는 50년 전에 끝난 베트남 전쟁의 ‘유령’이 자리하고 있다.
베트남 전쟁은 1950년대와 1960년대에 격화된 제3세계의 탈식민 투쟁의 중대 분수령(分水嶺)이었다. 미국은 영국과 프랑스의 제국주의를 구시대의 유물로 생각하고 있어 식민지 독립을 지원했지만, 신생 독립국들이 소련이 지원하는 사회주의 혁명가들에게 넘어가는 것도 동시에 우려했다. 하지만 제3세계 사회주의자들은 강력한 민족주의 투쟁가들로 명성을 떨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의 제3세계 냉전 전략은 많은 비판을 받기도 했다.
1950년에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필리핀의 항일 무장군 후크발라하프가 토지개혁을 요구하며 공산주의 성향을 드러낸다는 이유로 라몬 막사이사이가 이끄는 광범위한 진압작전을 지원했다. 공산화는 막았지만 한국과 달리 토지개혁이 이루어지지 않은 필리핀은 대지주 가문이 다스리는 과두정(寡頭政) 국가가 되었다.
필리핀뿐 아니라 제3세계 전반에 만연했던 토지 불평등은 사회주의 게릴라들이 지속적인 농민 반란을 일으킬 수 있는 비옥한 토양을 제공했다. 여기에 농민과 한 몸이 되어 지구전(持久戰)을 수행하는 마오쩌둥(毛澤東)의 유격전(遊擊戰) 교리까지 확산되며 미국은 제3세계 농민 혁명에 대처하기 점점 더 곤란해지고 있었다. 1959년 1월에는 쿠바에서 피델 카스트로와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가 이끄는 소수 게릴라가 풀헨시오 바티스타 정권을 전복하며 미국의 턱밑에도 사회주의 정권이 등장했다. 이런 위기감 속에서 미국의 전략가들이 바라본 다음 싸움터가 바로 동남아시아였다.
거대한 실험장
당시 미국은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베트남이 호치민이 이끄는 베트남 공산당(월맹)의 손에 완전히 떨어질 것을 우려했다. 월맹군은 이미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군에게 패배를 안기면서 베트남 민족 해방의 상징으로 완연히 자리 잡은 상태였다. 하지만 미국 입장에서 북베트남의 공산당은 북쪽 소련과 중국의 공산주의가 동남아시아까지 남하하는 증거로 받아들여졌다.
이 상황에서 국제 사회는 일단 베트남 문제 해결을 위해 1954년 제네바 회담에서 우선 북위 17도선을 기준으로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을 나누고, 향후 총선거를 통해서 통일 베트남 정부를 출범시키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북베트남에서 공산당이 토지개혁을 진행하며 강력한 사회 장악력을 확보하는 동안 남베트남은 여전히 불안정한 상태가 지속되고 있었고, 공산당 주도 통일을 목표로 하는 북베트남은 계속해서 인력을 파견하여 남베트남의 후방을 교란하고 있었다.
북베트남을 신뢰하지 못한 미국은 총선거를 거부하고, 남베트남 정부를 강화해 공산 세력의 남하를 저지하기로 결심했다. 이에 분개한 북베트남이 적화통일 사업을 시작했고, 미국은 남베트남 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공군력을 지원하고 후에는 대규모 지상군까지 파병하면서 본격적으로 베트남이라는 수렁에 빠지게 된다.
베트남은 1950년대를 거치면서 필리핀, 한국, 쿠바 등 다양한 제3세계 농민 사회주의 운동에 직면하며 미국이 개발한 각종 ‘처방전’이 총동원된 거대한 실험장이었다. 여기에는 롤링썬더 작전으로 대변되는 무자비한 융단 폭격부터, 한국전쟁 시기에 발전한 심리전(心理戰)과 첩보전 교리, 그리고 농촌이 사회주의 게릴라에 넘어가지 않게끔 군사적 방어와 근대적 발전을 동시에 제공하는 전략촌(戰略村) 사업이 포함되었다. 미국은 압도적 무력(武力)과 농촌의 적화를 막을 효과적 근대화 프로그램이 있다면 남베트남을 충분히 지킬 수 있으리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미국의 이런 노력이 무색하게 베트남 전쟁은 끝이 보이지 않는 골칫거리가 되었다.
수렁에 빠진 베트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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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은 베이비붐 세대의 반전 데모에 직면하면서 동력을 잃었다. 사진=퍼블릭 도메인 |
한편 남베트남의 정치적 안정을 미군이 제공하는 더 큰 무력으로 해결하려 한 전략은 두 번째 원인인 국제 여론의 악화를 불러왔다. 공산권은 물론이고 제3세계에서도 미국의 베트남 개입은 적화를 막기 위한 자유 수호가 아니라 철 지난 제국주의의 연장으로 받아들여졌다. 게다가 미디어가 발전하면서 베트남전의 각종 참상이 신속하게 보도되었는데, 이 역시 대의(大義)는 민족해방전선(NLF)에 있다는 믿음이 세계적으로 확산되는 데 기여했다.
정치가 표류하고 군사력으로도 해결이 안 되는 가운데 국제 여론도 악화되니 미국의 국내 반전(反戰) 여론도 들끓었다. 전후(戰後)의 풍요 속에서 성장한 베이비붐 세대는 1968년을 계기로 급진적 사회운동에 눈을 떴는데, 이들은 부도덕한 전쟁인 베트남에 징집될 수 없다며 징집 거부 운동을 벌였다. 남부의 인종 분리에 도전하기 시작한 흑인 민권운동가들도 국내의 인종 정의도 실현하지 않는 미국이 타국에 군사적 개입을 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며 베트남과 민권운동을 연결했다.
베트남 철군
이러한 국내 여론의 악화는 베트남에 들어가는 천문학적인 전비(戰費)를 미국이 감당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미국의 제조업 경쟁력이 약화되고 무역 적자가 늘어 가는 가운데 베트남에 계속 돈을 쏟는 것이 맞냐는 회의론이 널리 퍼졌다.
1969년에 취임한 리처드 닉슨 대통령과 그 책사(策士) 헨리 키신저는 우선 베트남 전쟁을 마무리 짓고자 노력했다. 베트남이라는 수렁에 미국의 힘을 쏟으면 그 공백을 소련과 중국의 공산주의 세력이 채울 수밖에 없다는 위기감이 맴돌았다.
닉슨 행정부는 우선 베트남에서 미군을 점차적으로 철군하는 대신에, 남베트남군이 자체적으로 국가를 방위할 수 있도록 훈련과 장비를 지원하는 ‘베트남화’ 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미군 없이 남베트남이 기울어진 전세(戰勢)를 뒤집을 수는 없었고, 1975년에 남베트남의 수도인 사이공이 함락되며 베트남 전쟁은 마침내 끝이 났다.
미국은 남베트남을 버렸다는 자유 진영 내부의 비난을 감내해야 했지만, 그사이에 국내 경제 개혁에 착수하고 마오쩌둥과 정상회담을 하며 소련과 데탕트에 나서면서 미국의 힘을 재조직할 시간을 벌었다.
‘여러 베트남들’
그러나 베트남 철군 이후에도 미국은 곧바로 국내외의 ‘여러 베트남들’에 또다시 대처해야 했다. 우선 호치민과 보 응우옌 잡 장군이 초강대국 미국을 무찌르며 획득한 명성은 제3세계의 숱한 사회주의 게릴라 운동에 영감을 제공했다. 마오쩌둥의 유격전론과 체 게바라의 게릴라론에 더해서, 국제 여론을 움직이고 농촌에 은밀히 침투하여 기반을 확대하라는 베트남식 방법론은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각지로 퍼져 나갔다.
가장 대표적인 조직이 야세르 아라파트의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였다. 아라파트는 인접한 요르단을 ‘팔레스타인의 하노이’로 만들겠다고 선언하며 이스라엘 인접 팔레스타인 난민촌에 해방구를 건설해 대(對)이스라엘 게릴라 투쟁에 나섰고, 팔레스타인에 동정적인 국제 여론을 형성하고자 노력했다. 한편 남미의 정글에서는 쿠바 모델을 따르는 혁명가들이 활동하고 있었고, 남아프리카에서는 앙골라와 모잠비크에서 대포르투갈 투쟁이, 로디지아(현 짐바브웨)와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대아파르트헤이트 투쟁이 격화되었다. 물론 닉슨과 키신저는 중국, 소련과 데탕트를 하더라도 추가적인 공산주의의 확장은 절대 용인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고, 미국은 다시 베트남 전쟁에서 축적한 대반란, 대게릴라 전술을 동원하여 이에 맞서고자 했다.
미국의 전술은 베트남전처럼 국제 사회와 국내 여론을 자극하는 대규모 군사 개입을 피하되, 더 은밀히 작전을 수행하며 ‘여러 베트남들’을 관리하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라틴아메리카에서 미국은 반공 정권들과 함께 공산주의 활동가를 색출하는 콘도르 작전을 수행했고, 남아프리카에서도 마찬가지로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에 채찍과 당근을 제공하며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고자 했다. 헬리콥터를 활용한 촌락 급습, 공군기를 통한 정찰과 폭탄 투하, CIA를 활용한 요원 납치와 암살은 대부분 이전 베트남에서 대규모로 실시된 전술이었다. 이런 개입은 인도차이나에서도 계속해서 이루어졌는데, 미국은 베트남의 세력 확장을 막겠다며 라오스와 캄보디아에 각종 지뢰와 폭발물을 투하했다.
국내에도 강압적 전술 도입
동시에 미국의 대외 개입에서 개발된 강압적 전술은 국내의 불안정을 관리하는 데도 적용되기 시작했다. 베트남 전쟁과 참전자들이 겪는 심리적 곤경, 히피 운동의 부상(浮上), 도시 흑인 게토의 위기는 미국에서 마약 소비의 폭증으로 이어졌고, 급진적 사회운동과 인종 소요, 범죄의 증가는 다수 미국인의 일상을 해치는 위험으로 여겨졌다. 이런 사회 혼란의 확산은 베트콩이 활약하는 베트남의 농촌과 같은 ‘위험지대’가 미국의 도심 게토나 대학가 캠퍼스에 퍼지고 있다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닉슨은 미국에 ‘법과 질서’를 회복하겠다는 구호로 큰 인기를 끌었고, 이후 행정부에서도 더 강화된 경찰력과 각종 군사화된 수단을 통해 마약과 범죄를 퇴치하겠다는 공약이 이어졌다. 미국의 경찰, 군, 정보기관은 국내외의 마약 재배지를 급습하고, 감시 네트워크를 통해 ‘위험 분자’를 색출하며 미국의 국토를 안전하게 만들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베트남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노력은 많은 문제를 완전히 해결할 수 없었고, 계속해서 천문학적인 예산과 막대한 인력의 투입을 요구하고 있었다. 제3세계의 불평등한 토지 구조는 게릴라나 카르텔이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었고, 이들은 중앙정부의 감시를 피해 마약 재배와 밀수를 수익성 있는 사업으로 개발했다. 마찬가지로 미국 도시의 사회적 위기는 마약 수요를 끝없이 창출했고 도시 빈민을 범죄로 계속해서 내몰았다.
결과적으로 1980년대, 나아가 냉전이 끝난 이후 1990년대에도 미국은 베트남의 유령에서 탈출하지 못했다. 멕시코, 콜롬비아, 니카라과에서는 마약 재배지가 계속 확대되었다. 이 지역의 농촌 갈등은 종종 냉전과 연계되어 심각한 내전으로 이어졌고, 게릴라와 군벌(軍閥)의 영향력을 더 강화했다. 중동에서는 PLO에 자극을 받은 각종 게릴라 단체들이 생겨났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레바논 남부에서 이란의 지원을 받으며 성장한 헤즈볼라였다.
지하드와 네오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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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5월 2일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항공모함 USS 에이브러햄 링컨호에서 이라크에서의 주요 전투가 끝났다고 선언했지만 이후로도 전쟁은 계속됐다, 사진=AP/뉴시스 |
동시에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에서 공산주의 정부를 지키려 주둔한 소련군을 압박하기 위해, 각지의 이슬람주의 지하드 전사들을 포섭해 아프가니스탄으로 파견했다. 이들은 〈람보 3〉(1988)와 같은 영화에서 ‘자유의 전사들’로 등장했지만, 훗날 미국의 가장 골치아픈 적수로 돌변했다.
군사화된 개입주의는 조지 W. 부시 행정부와 네오콘 각료들이 추진한 ‘테러와의 전쟁’에서 절정에 달했다. 베트남전에서 개발된 대반란 전술을 은밀히 사용하되, 베트남과 같은 대규모 군사 개입은 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동안 미국이 베트남 트라우마를 다루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소련이 무너지고 미국이 세계 유일 초강대국으로 부상하는 과정에서, 네오콘은 미국이 더는 베트남의 유령에 시달릴 필요가 없다는 자신감을 적극적으로 표출했다. 부시 행정부는 소련과 맞선 미국의 친구였으나 끝내 9·11 테러로 미국 본토를 공격한 오사마 빈 라덴을 응징하고, 그를 숨겨 준 아프가니스탄의 반문명적 탈레반을 몰아내고, 또 다른 ‘악(惡)의 축(軸)’인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도 끌어내려 세계에 자유를 확대하겠다는 원대한 구상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되풀이된 베트남의 악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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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5월 2일 아프가니스탄 남부 헬만드주 캠프 앤소닉에서 열린 임무이양식에서 미군과 아프가니스탄군이 성조기를 내리고 있다. 석 달 후 미군은 아프간에서 완전 철수하고,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했다. 사진=AP/뉴시스 |
끝내 미국은 2021년에 아프가니스탄에서 굴욕적으로 철수하면서 1975년 사이공 함락의 악몽이 세계에 생중계되는 것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리비아, 이라크, 시리아에서도 사태는 정치적 합의를 도출해 내는 지역 강국들의 능력으로 해결되었지 미국의 군사력으로 해결되지 않았다.
계속되는 ‘여러 베트남들에서의 실패’는 미국 유권자의 강한 반감 표출로 이어졌다. 미국이 해외에서 그 많은 예산을 쓰는 대신에 일부라도 미국의 무너져 가는 인프라와 공동체에 투자했더라면 미국인들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었으리라는 것이었다. 갈수록 늘어만 가는 마약 중독자들과 도심의 인종 소요, 치안 불안은 이들의 주장을 입증하는 증거로 여겨졌다.
이후 대외 개입에 대한 반감에 포퓰리스트 세계관까지 더해졌다. 포퓰리스트 유권자들은 미국의 대외 군사 개입이 미국 일반 국민의 안정과 번영을 위해서가 아니라 ‘세계제국을 움직이는 엘리트 일당’의 이해관계를 위해서 벌어진다고 믿었다. 누구를 대통령으로 뽑든 어떤 정당을 뽑든, 월스트리트와 펜타곤, 군산(軍産) 복합체와 CIA를 오가는 이 세계제국의 엘리트는 바뀌지 않은 채 미국 국가와 세계 전체를 좌지우지한다는 믿음이 확산되었다. 국가 안의 국가라는 ‘딥 스테이트’와 국민을 배신하는 ‘글로벌리스트’가 일반 미국인의 생명을 버려 가며 자신들의 세계적 기득권에 집착한다는 비난은 도널드 트럼프가 출마한 2016년, 2020년, 2024년의 대통령 선거들에서 지속적으로 폭발했다.
‘뮌헨의 유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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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히틀러에게 굴복했던 뮌헨 회담의 기억은 자유주의 질서 유지를 위해 적극 개입해야 한다는 의지로 이어졌다. |
물론 비난의 대상이 된 전통적인 대외정책 결정권자들에게는 나름의 변명이 있다. 그들은 미국이 부도덕한 군사 개입에 무모하게 돈을 쏟는 ‘베트남의 유령’을 피하느라 ‘뮌헨의 유령’을 마주할 수도 있다고 믿었다. 1938년 뮌헨에서 영국과 프랑스는 히틀러의 체코슬로바키아 합병 시도를 보며 ‘이쯤 하면 멈추겠지’라고 안일하게 생각하여 히틀러를 용인했다. 이 뮌헨 협정의 실수가 히틀러에게 ‘무엇이든 해도 된다’는 사인을 주어 결국에는 제2차 세계대전을 불러왔다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자유주의 엘리트들은 ‘뮌헨의 유령’을 피하기 위해 자유주의 질서를 해치는 적들에 대한 단호한 군사 개입과 우방국을 향한 관대한 지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따지고 보면 1950년의 대한민국도 뮌헨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미국의 의지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던 국가 중 하나였다. 그러나 어쨌든 지금 미국의 다수 유권자는 ‘뮌헨의 유령’을 피한다는 이유로 만나야만 했던 ‘베트남의 유령’에 더 질색하는 모양새다.
국가를 강화할 유능한 지도자
문제는 ‘베트남의 유령’과 ‘뮌헨의 유령’을 동시에 피하는 새로운 길이 있냐는 것이다. 그리고 미국 입장에서 보더라도, 북미(北美)의 안전만을 위해서 그린란드, 파나마, 캐나다를 합병하는 게 그 길이 될 것 같지는 않다. 미국은 북미에 고립된 섬이 결코 아니다. 유라시아의 평화는 한국처럼 유라시아에 있는 국가뿐 아니라 유라시아와의 무역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미국에도 중요하다.
어쩌면 과거 한국의 길에서 아이디어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숱한 ‘베트남들’에서 미국이 실패한 이유는 안정되고 유능한 국가를 만들 현지 지도자를 발굴하는 데 계속해서 실패했기 때문이다. 이 정치적 실패는 지역을 불안정하게 만들었고, 그 어떤 군사적 노력도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반면에 국민적 지지를 받는 지도자가 국가 재건과 발전에 매진한 한국은 큰 성공을 거두며 지역 안정에 기여하는 국가가 되었다. 냉전기 다른 성공 사례도 한국과 유사한 경우가 많았다.
미국이 끝없는 ‘베트남 전쟁의 유령’에 질려서 ‘자유주의 질서’라는 짐을 내려놓으려고 하는 지금, 한국과 일본을 포함한 세계 주요 국가가 불안정 지역에서 국가를 강화할 유능한 지도자를 판별하고 지원하는 일이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 그리고 정치적 안정을 통해 폐허에서 기적을 일군 한국의 사례는 분명 기준점을 마련할 좌표로서 계속해서 깊이 탐구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