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청년 논객 임명묵의 ‘역사로 세계 읽기’ ② ‘만주 모델’

日帝의 만주 실험, 전후 일본·한국·중국의 경제 발전 이끌어

글 : 임명묵  작가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목록
  • 프린트
  • 스크랩
  • 글자 크게
  • 글자 작게
⊙ 일본, 만주사변 이후 만주에서 군부의 정치적 지지, 관료의 기획, 재계의 역동성이 결합한 중화학공업 건설
⊙ 제1차 세계대전 경험한 새 시대의 일본의 장교·관료·기업인들… 과학기술·산업 고도화 통한 ‘고도국방국가’ 건설 추진
⊙ 지금 대한민국에서는 기술과 사회 변동, 다가오는 지정학적 위협에 대응하는 새로운 구상 不在

임명묵
1994년생. 서울대 아시아언어문명학부 졸업, 現 서울대 대학원 아시아언어문명학부 재학 중. 《조선일보》 《시사저널》 칼럼니스트 / 저서 《러시아는 무엇이 되려 하는가》 《K를 생각한다》 《거대한 코끼리, 중국의 진실》
1976년 5월 31일 포항제철소 제2 용광로 화입식에서 직접 불을 댕기는 박정희 대통령(맨 아래). 국가 주도의 중화학공업 발전이라는 모델은 일제의 ‘만주 모델’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사진=조선DB
  현재 2024년에 접어든 지 얼마 지나지 않았지만, 세계정세에 관심이 지대한 이들은 벌써부터 연말에 있을 하나의 대사건에 주목하고 있다. 바로 11월에 있을 미국 대통령 선거다. 권토중래(捲土重來)를 노리는 공화당의 도널드 트럼프가 다시 대통령의 자리에 오를 것인지, 아니면 민주당의 조 바이든이 재선을 통해 정권을 지켜낼 것인지 귀추(歸趨)가 주목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양측의 경제 공약이다. 트럼프는 수입품 관세를 대폭 인상하고, 감세(減稅)를 통해 낙후된 제조업 지역에 투자를 유치하여 미국을 다시 제조업 초강대국으로 만들겠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바이든은 세계화와 국제 무역의 중추 국가로서 미국의 지위를 유지하되, 증세(增稅)를 통해 확보한 재원(財源)을 반도체, 전기차 등의 핵심 산업 보조금으로 지급해 자국 제조업을 활성화하는 전략을 꾀하고 있다. 여기서 트럼프노믹스와 바이드노믹스가 방법은 다를지라도 ‘미국 제조업의 부흥’이라는 대의를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미국의 공화·민주 양당이 제조업에 대한 투자를 외치는 이유는 지난 반세기 동안 미국이 겪은 거대한 경제적·사회적 전환에서 찾을 수 있다. 50년에 걸쳐 미국의 제조업이 쇠퇴하는 가운데, 중국은 세계의 공장으로 떠올랐다. 미국은 IT와 금융이라는 신산업에서 새로운 번영을 창출했지만, 실직한 과거 제조업 종사자들에게 그 과실은 돌아가지 않았다.
 
  2016년에 도널드 트럼프는 중국에 대한 무역전쟁과 제조업 부흥이라는 구호를 내걸며 전통적인 민주당 지지층인 백인 노동자층을 우군으로 확보해 승리할 수 있었다. 집토끼를 빼앗긴 민주당은 이에 대응해 자신들만의 제조업 정책을 내걸면서 역시 미국 제조업의 부흥이라는 대의에 동참했다. 경제와 기술의 변화와 지정학적(地政學的) 위협에 대처해 산업 지형을 어떻게 새로이 재편할 것인가라는 문제의식은 2024년 선거 이후에도 미국, 나아가 세계의 화두(話頭)로 남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의식은 오늘날에 처음 등장한 것은 아니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20년대와 1930년대에도, 새로운 산업을 진흥하고 지정학적 위협에 대비해야 한다는 격렬한 논쟁이 있었다. 1870년대에 모습을 드러낸 내연(內燃)기관과 전기라는 신기술을 바탕으로 어떻게 사회를 조직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세계로 확산되었다. 그리고 제조업에 종사하는 블루칼라와 화이트칼라로 구성된 전후(戰後) 대중사회가 이 질문 속에서 등장했다. 트럼프와 바이든의 경제 공약에서 나타나듯, 전후 대중사회의 해체와 복원이 화두가 된 지금의 미국에서는 100년 전의 질문과 실험에 새로이 주목하는 흥미로운 연구들이 등장하고 있다.
 
 
  ‘자이바쓰’의 탄생
 
  그렇다면 우리가 사는 동아시아는 어떨까? 100년 전의 동아시아에서도 마찬가지 질문이 제기되었고, 그 결과 다양한 논쟁과 실험, 파괴적인 침략과 전쟁이 등장했다. 이 모든 과정을 거쳐 동아시아는 북미, 서유럽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세계 3대 산업 지역으로 부상했다. 100년 전 동아시아를 휩쓸었던 문제의식을 살펴보면, 기술, 사회, 지정학을 통합하는 사고 속에서 어떻게 우리가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알 수 있음은 물론이고, 앞으로의 세계를 바라보는 상상력의 원천도 발견할 수 있는 셈이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의 동아시아에서 자체적인 산업 기반을 갖추고 경제 발전을 추진할 수 있는 나라는 일본밖에 없었다. 중국은 1911년 신해혁명(辛亥革命) 후의 혼란 속에서 강력한 국가로 발돋움할 수 없었다. 한반도는 일본의 식민통치하에 놓여 있었다. 다른 아시아 국가들도 대부분 구미(歐美)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이 시기 일본 또한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제조업 강국’ 일본과는 한참 거리가 있었다. 물론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통해 등장한 신정부는 ‘식산흥업(殖産興業)’을 내걸며 유럽의 산업혁명을 따라잡고자 노력했다. 19세기 후반부터 일본에서는 국가 주도의 산업 투자를 통해 근대적인 철강업, 조선업, 광업이 시작되었다. 미쓰이(三井)와 미쓰비시(三菱)로 대표되는 굴지의 ‘자이바쓰(財閥)’가 이 시기에 탄생했다.
 

  그러나 후발주자인 일본이 일찍부터 산업화에 착수한 영국, 미국, 독일을 따라잡기는 어려웠다. 세계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춘 일본 상품은 저가(低價) 노동력을 활용한 면직물이나 비단 같은 저부가가치 영역에 국한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1914년 유럽 열강 간에 발생한 제1차 세계대전은 일본에 큰 경제적 기회를 안겨주었다. 세계 제조업의 중심인 유럽의 생산품이 모두 총력전(總力戰)에 동원되는 사이, 일본 기업은 유럽 기업의 빈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고, 그야말로 급속한 산업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이 시기에 갑작스럽게 거부가 된 벼락부자들을 두고 ‘나리킨(成金)’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일본의 경제 위기
 
  문제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유럽의 산업체들이 다시 수출을 재개하면서 시작됐다. 앞선 기술력에 드넓은 식민지 시장까지 가지고 있던 유럽 국가와의 경쟁에서 일본은 당해낼 수 없었다. 1920년대에는 세계대전 기간에 확장된 산업 설비의 가동률이 떨어지며 불경기가 시작되었다. 1923년에는 수도 도쿄를 강타한 간토(關東)대지진으로 막대한 복구 비용이 지출되며 경제 위기가 더욱 심화되었고, 결국 1927년의 쇼와공황(昭和恐慌)으로 이어졌다. 결정적인 타격은 1929년 뉴욕 월스트리트 주식 시장이 붕괴하며 벌어진 세계 대공황이었다.
 
  일본 경제를 떠받치던 중하층과 하층 계급에서 타격이 가장 극심했다. 당시 농민 대부분은 소작농(小作農)으로 고된 노동을 통해 근근이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런 와중 농산물 가격이 폭락하면서 소작 쟁의가 급증했다. 농촌과 지방 도시의 중소기업들도 줄도산을 맞았고, 수많은 노동자가 실직해 도시 빈민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었다. 1930년대가 시작될 때 일본은 농촌과 도시에서 이어지는 쟁의와 시위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그러나 세계 경제는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세계 경제의 중추 국가들은 자유무역을 복원하기보다는 자신들의 정치적 권력이 닿는 공간에서 최대한의 자급자족(自給自足)을 추구했다. 미국과 소련은 드넓은 북미 대륙과 유라시아를 개발하고자 했고, 영국과 프랑스는 전 세계에 걸쳐 있는 그들의 식민지를 시장과 원료 공급처로 적극적으로 통합하고자 했다. 일본의 경제 성장에 필수적이던 우호적인 시장 환경은 당분간 돌아오지 않을 것이 분명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제1차 세계대전을 관찰한 새로운 세대의 엘리트 그룹이 등장해 일본의 국가 개조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일본은 세계대전에서 영국·프랑스 등 연합군에 합류해 독일과 싸웠고, 전시(戰時) 호황이라는 혜택을 누렸다. 당시 이를 위해 유럽에 체류한 이들에게 제1차 세계대전은 미래의 세계 쟁패()를 미리 경험할 수 있는 기회로 다가왔다. 세계대전은 국가의 인적·물적 자원 동원 역량을 모두 쏟아붓는 ‘물량전’이었다. 종래의 보병과 소총, 야포를 넘어 전차와 전투기같이 기계화된 신무기들로까지 확장되었다. 유럽에 주재하면서 장차 이뤄질 전쟁의 형태를 미리 엿본 일본 무관(武官)들은 1921년 독일의 바덴바덴에서 만나 일본을 총력전에 대비할 수 있는 국가로 개조하는 데 힘을 쏟자고 결의한다.
 
  관료와 재벌에서도 유사한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이들이 속속 등장했다. 이들은 메이지 시대를 거쳐 1920년대에 정착한 다이쇼(大正) 데모크라시에 환멸을 느끼는 신생 엘리트들이었다.
 
  이 시기까지 일본의 정치·경제는 영미식 자유시장 모델을 따랐다. 메이지 정부가 육성한 산업체를 불하(拂下)받은 민간 자본이 재벌로 성장해 입헌민정당과 입헌정우회라는 의회 양당을 후원했다. 하지만 이들 구(舊)재벌은 경공업, 중공업, 금융업에 이르기까지 서로 관련이 없는 산업 영역을 방만하게 거느리면서 일본에 이미 축적된 기득권(旣得權)을 지키는 데 주력했다.
 
  하지만 1890년대 이후에 태어난 새로운 세대의 관료와 기업가들은 달랐다. 도쿄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구 관료와 상인 출신이 많은 구 재벌과 달리, ‘혁신관료’와 ‘신재벌’이라 불리는 신생 엘리트들은 도쿄제국대학 공학부를 졸업한 경우가 다수였다. 교육 배경으로 인하여 그들은 과학기술에 입각하지 않은 기존의 정치·경제 구조로는 총력전 시대의 국가 경쟁에서 살아남기가 불가능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독일과 미국을 방문하고 연구하기 시작한 이들은 유관 기업을 계열화하여 경영을 합리화하고, 과학기술의 발전과 산업 고도화를 체계적으로 추진하는 두 국가의 제도를 일본에 이식하기를 꿈꾸었다.
 
 
  통제파
 

  1931년, 총력전 세대의 군인, 과학기술에 정통한 혁신관료와 신재벌이 대대적 실험을 할 수 있게 된 일대 사건이 발생했다. 관동군의 이시와라 간지(石原莞爾·1889~1949년)가 주축이 되어 만주를 침공, 영국, 프랑스, 독일을 합친 것보다 거대한 신생 괴뢰국인 ‘만주국(滿洲國)’을 세운 것이다.
 
  만주국에는 이시와라 간지의 독특한 사상이 녹아들었는데, 이는 이시와라뿐 아니라 당대 일본 신생 엘리트가 광범위하게 공유하는 정서이기도 했다. 일본 육군의 엘리트 장교였던 나가타 데쓰잔(永田鐵山·1884~1935년)은 군부(軍部) 내에서 ‘통제파(統制派)’라는 파벌을 만들었다.
 
  통제파의 핵심 관심사는 자원, 시장, 영토, 과학기술을 ‘갖지 못한’ 일본이 이미 그러한 힘을 ‘가진’ 나라와 싸우기 위한 국가의 변혁이었다. 통제파는 이를 위해 영국, 프랑스, 미국, 소련 같은 나라와 마찬가지로 일본이 통제할 수 있는 광역권(廣域圈)이 필요하다고 믿었고, 과학기술을 확보한 ‘고도국방국가’를 만들기 위해 재벌과 민간 정치를 군과 관료가 통제해야 한다는 생각을 공유했다.
 
  이시와라는 군사 과학의 발전에 따라 ‘한 발의 포탄으로 도시를 지울 수 있는 신무기’와 ‘대륙을 넘나들며 폭격할 수 있는 장거리 투발 수단’의 등장을 예측하기도 했다. 군사 기술의 발전과 불교 일련종(日蓮宗) 사상을 결합한 이시와라는 미국, 독일, 소련, 일본이 영국과 프랑스라는 구시대의 잔재를 치워버리고, ‘세계최종전쟁’에 돌입할 것이라 주장했다.
 
 
  통제파의 실험장 만주
 
기시 노부스케
  이시와라와 통제파는 이 전쟁에 대비하는 최적의 방안이 광대한 만주에서 일본에 정착시킬 새로운 국가 모델을 실험하는 데 있다고 보았다. 스탈린의 5개년 계획에 깊은 감명을 받은 관동군과 남만주철도주식회사(만철)는 소련의 계획을 면밀히 연구하고 ‘만주산업개발 5개년 계획’을 발표했다. 민간 자본에 자율적으로 개발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관동군이 통제하는 만주국 기획처(企劃處)가 주도하여 만주의 산업, 특히 중공업 역량을 극대화한다는 계획이었다.
 
  기존 엘리트 집단이 강고하게 자리 잡고 있던 일본 본토와 달리, 관동군이 장악하고 있는 만주국은 신생 엘리트들이 자신들의 구상을 직접 실행해볼 수 있는 ‘실험장’이 되었다. 만주국이라는 실험실을 운영한 실무진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은 훗날 전후에 총리에 오르는 기시 노부스케(岸信介·1896~1987년)였다. 상공성 관료로 경력을 쌓은 기시는 기존 재벌들이 사익(私益)만을 추구, 국가 경제의 발전을 도외시한다고 생각했으며, 재계에 대한 합리적 통제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독일 연수를 통해 독일의 산업합리화 정책에 감명을 받은 기시는 1931년 ‘중요산업통제법’을 입안하여 통제경제의 제도적 기초를 쌓기 시작했다. 정부가 중요 산업을 하나의 카르텔로 묶고, 국가 주도의 통제 규칙을 따르도록 하되 반대급부로 산업 발전을 촉진하도록 지원하는 것이 법안의 핵심이었다. 하지만 기존 재벌은 기시의 프로그램을 따를 의향이 전혀 없었고, 기시는 상공성 국장직을 사임하고 1936년 만주로 근무지를 옮겼다.
 
아유카와 요시스케
  기시는 이시와라 간지와 관동군 ‘이상주의자’ 그룹이 만주의 산업 개발을 지나치게 통제하는 것 또한 문제라고 생각했다. 낙후된 만주를 빠르게 개발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힘에만 의지할 것이 아니라 민간 자본의 역량도 활용해야만 했다. 기시는 대표적인 신생 재벌인 아유카와 요시스케(鮎川義介·1880~1967년)의 닛산(日産)을 설득, 만주에 투자해달라고 했다. 아유카와는 야마구치 동향 출신인 기시의 요청을 받아들였고, 만주국 정부와 합작한 만주중공업개발회사(만업)를 만들었다. 만업의 목표는 정부의 통제를 수용, 향후 총력전에 대응할 수 있는 고도국방국가를 실현하면서도, 민간 기업의 자율적 역량을 활용해 자본의 이윤 추구도 놓치지 않는 데 있었다. 관동군의 정치적 지지하에서, 관료가 구상한 기획안에 맞추어 재계가 체계적으로 중공업을 발전시키는 전후 동아시아 자본주의의 기틀이 되는 정치·경제 모델의 탄생이었다.
 
 
  황도파
 
기타 잇키
  ‘만주 모델’은 산업 사회의 위기를 맞아 전 세계에서 진행되고 있던 각종 대응을 학습하고, 다른 모델과의 경쟁을 통해서 부상한 것이었다. 1929년 대공황으로 촉발된 산업 선진국의 위기는 일본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농촌 빈곤과 도시 실업은 사회 갈등에 불을 지폈다. 스탈린이 대기근을 겪으면서도 산업화를 일으키면서 세계 각지의 사회주의자들은 소련을 새로운 미래로 여기고 있었다. 미국에서는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뉴딜(New Deal)을 외치며 미국의 자본주의를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독일의 히틀러는 동유럽을 생활권(Lebensraum)으로 삼고 모든 독일 민족이 하나의 유기체로 협력해야 한다는 나치즘에 입각한 경제 재편을 진행했다.
 
  일본의 지식인과 엘리트들은 세계 각지에서 전개되는 이런 실험들을 조사하고 살펴보면서 어떤 모델이 일본에 적합한지를 둘러싸고 논쟁을 벌였다. 정당 정치인과 구 재벌은 기존 영국식 자유경제가 여전히 옳다고 이야기했지만, 사회 각계각층의 불만은 이미 끓어넘치고 있었다. 노동자들을 조직하고자 했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소련 모델을 따라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도호쿠(東北) 지역의 가난한 농민 세계를 경험한 급진 우익들은 일본식의 독특한 파시즘과 국가사회주의를 주창했다. 기타 잇키(北一輝·1883~1937년)를 대표로 하는 국가사회주의자들은 자본가들의 사적 이윤 추구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고, 농촌 빈곤을 해결하기 위한 사회주의 정책의 도입, 천황제에 입각한 도덕적 사회의 회복을 내걸고 있었다. 이에 동조하는 장교들은 통제파와 대립하는 일군의 장교단, 황도파(皇道派)를 구성했다. 이들은 존황토간(尊皇討奸), 즉 ‘천황을 높이고 간신을 토벌한다’는 구호와 함께 쇼와유신(昭和維新)을 외쳤다. 1936년 2월 26일에 이들이 일으킨 쿠데타는 실패로 끝났으나, 농촌과 도시의 평민들은 황도파 청년 장교들을 우국지사로 치켜세우며 동정했다.
 
 
  수렁에 빠진 일본
 
  이런 여러 경쟁 조류 속에서 통제파, 혁신관료, 신재벌의 통제경제론은 침략 전쟁을 통해 최종 승자가 될 수 있었다. 다가올 총력전에 대비하여 자체적으로 국방을 강화해야 한다는 그들의 주장과 정책은 일본을 매우 공격적인 국가로 만들었다. 만주와 인접한 소련, 중국과의 군사적 긴장이 격화되면서 1937년에는 중일 전쟁이 발발했다. 중일 전쟁으로 이미 악화되고 있었던 영국, 미국과의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극동에서는 일본의 팽창을 견제하는 연합국의 포위망이 형성되었다. 이 포위망을 돌파하기 위해 일본은 1941년에 하와이 진주만의 미국 함대를 기습 공격하며 태평양 전쟁을 개전했다.
 
  전쟁은 일본을 계속해서 수렁으로 몰아갔다. 허약해 보였던 장제스의 국민정부는 항일 투쟁의 전열을 정비하며 막강한 일본 육군을 막아내고 있었고, 미국은 산업 역량을 총동원하며 일본을 압도해나갔다. 초기의 승전보는 견디기 어려운 패전(敗戰)으로 빠르게 전환되었다.
 
  역설적으로 이런 난국은 만주에서 통제경제론을 실험하고 귀국한 기시 노부스케 등의 총력전 엘리트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었다. 마르크스주의나 황도파의 국가사회주의는 전차, 항공기, 항공모함 등 첨단의 과학기술과 중공업 역량이 필요해진 상황에서 힘을 쓸 수 없었다. 일찍부터 제1차 세계대전을 관찰하며 ‘고도국방국가’를 논한 통제경제론자들은 나아가 일본 본토에서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구 재벌과 민간 정치인도 압박할 수 있었다. 1940년에 전시 경제를 위한 국가 개조를 지지하는 고노에 후미마로(·1891~1945년)의 ‘신체제 운동’이 시작되며 일본 정치는 더욱 파시즘적인 색채를 띠게 되었고 기업인들의 자율적 활동을 국가 관리하에 종속시키고자 하는 줄다리기가 본격적으로 개시되었다.
 
  그러나 기시가 주도한 총력전 경제는 실현될 수 없었다. 미국과의 전쟁이 패망(敗亡)으로 달려가고 있었고, 재계는 기시를 사회주의자라 비난하면서 저항했다. 총력전과 산업 사회의 불안이라는 도전에 대응하려 한 일본의 시도는 아시아 각지의 민족에게 씻을 수 없는 만행과 잿더미가 된 일본을 남겼을 따름이었다.
 
 
  전후에 꽃핀 혁신관료들의 꿈
 
  그러나 이런 상황을 맞았음에도 일본은 결국 고도의 산업 국가를 완성시킨다. 역설적으로, 일본의 통제경제론자들이 맞서려고 했던 미국과 소련을 통해서다. 일본을 점령한 미군정(GHQ)은 일본 침략의 근원을 제거한다며 재벌을 해체했다. 이 덕분에 혁신관료들의 가장 큰 적이 사라졌다.
 
  이런 상황에서 소련과 중공의 동아시아 적화(赤化) 위협이 가시화되자 미국은 일본을 다시 주요 공업국으로 부흥시켜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꼈다. 만주에서 훈련받고 이후 전시 경제를 운영한 관료와 재계 엘리트들이 복귀했다. 주식을 통해 자본을 조달하는 민간 자이바쓰는 일본은행과 연계된 주거래 은행을 통해 묶인 게이레쓰(系列)로 바뀌었다. 예산을 담당하는 대장성(大藏省·현 재무성)은 외환(外換)을 통제하며 관에 협조하는 자본을 후원했다. 게이레쓰들은 일본경제단체연합회(게이단렌·經團蓮)를 구성했고 통상산업성 관료들의 계획하에서 체계적인 산업 고도화에 나섰다.
 
  결정적으로 미국의 주도하에 세계 무역이 회복되면서, 일본은 만주나 대동아공영권 따위의 개념이 없이도 광대한 수출 시장에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1920년대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철강, 조선, 자동차, 화학, 기계 산업이 1970년대에는 일본의 대표 산업이 되었다. 이 무렵 일본이 전쟁의 패배를 경제로 복수하고 있다는 말이 태평양 양편에서 울려 퍼졌다.
 
 
  만주에서 배운 박정희
 
  물론 1970년대 이후에는 다른 이야기가 펼쳐진다. IT 혁명, 세계화, 시장자유주의의 귀환과 함께 미국은 제조업을 희생시키며 일본과의 격차를 다시 벌렸고, 일본 경제는 침체의 늪에 빠진다.
 
  이러한 1930년대에 등장해 전후에 완성된 일본의 산업주의 실험은 결과적으로 막대한 유산을 남겼다. 한국의 박정희(朴正熙) 정부는 만주국을 거쳐 일본에서 완성된 제도를 모방했다. 경제기획원과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서 만주국의 흔적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박정희 정부는 민간 자본을 통제하며 그들을 수출 전선에 투입했고, 중화학공업 기술을 학습하며 자주국방의 토대를 쌓았다. 이 역시 지정학적 위협에 대응하여 경제와 국방의 통합을 추구한다는 통제경제론자들의 기획과 유사하다.
 
  차이가 있다면 국방의 방향성이었다. 일본이 총력전에 대응한다며 침략 전쟁에 몰두한 반면, 박정희 대통령은 북한과 공산권의 적화 위협에 맞선 반공(反共)과 조국수호를 목표로 했다. 어쨌든 이를 통해 한국이라는 ‘갖지 못한 나라’는 ‘가진 나라’로 부상(浮上)할 수 있었다. 개혁개방에 나선 중국의 덩샤오핑(鄧小平) 또한 일본과 한국의 사례를 학습하며 대륙의 경제 기적을 이끌었다. 만주 모델이 마침내 자신의 고향인 중국에도 확산된 것이다.
 

  침략 전쟁에 봉사했다는 역사적 과오를 잊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1930년대 일본과 만주의 실험은 오늘날에도 시사(示唆)하는 바가 크다. 1870년대 전기와 내연기관으로 인한 사회 변동, 강대국 간 지정학적 대립은 1930년대의 세계를 만들었다. 100년 뒤인 오늘날의 세계는 어떤가?
 
  1970년대에 등장한 인터넷은 거대 기술 기업과 플랫폼 제국을 만들었고, 정체성(正體性)에 따른 문화 대결이 20세기의 노동쟁의만큼이나 격렬하다. 한편으로는 반도체, 데이터, 인공지능을 둘러싼 산업 전투가 미중 대립과 연계되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고, 드론은 우크라이나와 중동(中東)에서 전장의 풍경을 완전히 바꾸고 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유럽 전선과 미국 디트로이트에 헨리 포드가 건설하는 자동차 제국을 본 일본의 엘리트가 처한 상황과 작금의 우크라이나 전선과 인공지능의 중심지인 실리콘밸리, 중국의 선전()을 바라보는 우리의 상황이 겹쳐 보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문제는 절박함이다
 
  안타깝게도 1930년대에 한국인에게는 국권(國權)이 없었다. 100년 전 식민지 조선은 만주의 실험을 곁눈질로 지켜만 보았고, 30년이나 지난 뒤에야 이를 대한민국에도 적용해볼 수 있었다.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한국은 세계적 산업 대국이자 정보통신과 문화 대국으로 떠올랐다. 새로운 기술의 최전선에 있는 만큼 이에 따른 사회 변동의 충격도 다른 어느 곳보다 크다. 그런데 지금 대한민국에서는 기술과 사회 변동, 다가오는 지정학적 위협에 대응하는 새로운 구상이 부재한 것 같다.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인도, 아랍 지역에서 진행되는 새로운 실험에 대한 관찰과 토론도 찾기 어렵다. 100년 전 만주에서 실험을 행한 일본과 한국의 결정적인 차이는 국력이 아니라 절박함과 시야의 지평에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새로운 세대가 이런 절실함과 너른 안목을 갖고 21세기의 격변에 대응할 수 있는 ‘혁신’을 하기 위해서는 다시금 100년 전의 만주를 보아야 한다.⊙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NewsRoom 인기기사
Magazine 인기기사
댓글달기 0건
댓글달기는 로그인 하신 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