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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칙한 미술가들

스캔들로 보는 미술사 14 / 예술의 블랙홀 - 워홀과 줄리아

글 : 추명희  작가  vinosh@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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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로잉에 흥미를 갖게 해준 어머니 줄리아가 평생 사랑한 유일한 여자
⊙ “액자에 넣으면 어떤 것이든 예술이 된다”… 팝아트 개척
⊙ “당신은 미술의 살해자야, 아름다움의 살해자이고 웃음의 살해자!”(추상표현주의 화가 윌렘 드 쿠닝)

추명희
《월간조선》 《톱클래스》 《더 트래블러》 기자로 일했다. 미술 작품 애호가로, 꾸준히 컬렉션을 모으고 있다. 서강대학교에서 문학사와 정치학사, 서강대학교 언론대학원에서 언론학 석사를 마쳤다.
앤디 워홀(Andy Warhol·1928~1987년)
본명은 앤드루 워홀라 주니어(Andrew Warhola Jr.)로 슬로바키아(당시는 체코슬로바키아)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1960년대 미국과 영국을 중심으로 나타난 새로운 미술 장르인 팝아트의 대표 주자. 일상적인 소비재인 캠벨 수프 캔의 대량 생산을 상징하는 작품으로 예술계에 큰 동요를 일으키며 등장한 그는 후에 아방가르드 영화, 레코드 프로듀서, 작가로도 활동했다. 그는 예술은 대중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생각으로 작품을 대량 생산해서 저렴하게 팔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죽고 나자 그의 작품은 세계에서 가장 비싼 예술품이 되었다.
  빛조차 빠져나가지 못할 정도의 가공할 중력으로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시공간의 영역, 블랙홀. 천체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은 “블랙홀은 별들의 최후이자 우주가 탄생한 시작이기도 하다”며 “블랙홀을 이해하면 우주의 시작과 끝을 모두 파악할 수 있다”고 했다. 지난 2019년 4월 10일, 드디어 인류 역사상 최초로 블랙홀이 관측되었고 사람들은 마치 우주 비밀의 열쇠를 손에 쥔 것처럼 흥분했다.
 
  60년도 더 전에 지구에서 인간 블랙홀이 나타난 적이 있었다. 그는 바로 팝아트의 선구자 앤디 워홀(Andy Warhol·1928~1987년). 블랙홀처럼 사람을 빨아들이는 ‘명성’이라는 에너지에 대해 그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아마도 이제껏 그리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예술보다 명성’
 
1928년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에서 태어난 워홀은 1945년 카네기공과대학(현재 카네기멜론대학교)에서 그림 공부를 시작한 후 졸업하자마자 예술가로서 경력을 쌓기 위해 뉴욕으로 진출했다. 《글래머(Glamour)》라는 잡지사에 취직하여 삽화와 구두 광고 일러스트를 제작, 당시의 일반적인 일러스트와 다르게 얼룩진 잉크를 선으로 활용한 독특한 스타일로 상을 여럿 받게 되면서 주목을 받았다.
  스무 살의 디자이너 앤디 워홀은 유명해지고 싶었다. 그는 20세기 최고의 유명 화가 피카소의 인기를 뛰어넘을 정도의 유명인사가 되고 싶었다. 그에게는 예술보다 명성이 더 중요했다. 그리하여 그는 대학 졸업과 동시에 꿈의 도시 뉴욕으로 떠났다. 워홀은 보통의 아티스트 지망생들과 달리 갤러리 사장들을 쫓아다니는 일에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다. 대신 돈벌이가 되는 상업미술에 전념했다.
 
  워홀은 10여 년 동안 패션잡지 《하퍼스 바자》에 수백 점의 삽화를 실었다. 그가 처음 일을 맡게 된 것은 이 잡지의 보조편집자 러셀 라인즈의 추천 덕분이었다.
 
  “안녕하세요, 라인즈 씨. 정말 고맙습니다. 제 인생은 관제엽서 한 장 분량도 안 됩니다. 1928년 피츠버그에서 태어났습니다(다들 그렇듯 제철소에서). 카네기공과대학을 졸업했고 지금은 뉴욕시의 바퀴벌레가 들끓는 아파트에서 다른 아파트로 이사 중입니다. 앤디 워홀.”
 
  그의 성격만큼이나 시크하고 참신한 삽화들은 반응이 좋았고 1955년 밀러&손스 구두 광고캠페인 수상으로 그의 이력은 정점에 이르렀다.
 
 
  “사람들이 매일 보는 것을 그리면 어떨까”
 
캠벨 수프 캔(Campbell's Soup Cans)
1961년 11월부터 1962년 4월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캠벨 수프 캔 시리즈는 미국인들이 일상에서 자주 먹는 식품을 소재로 만든 것으로 워홀의 대표적인 팝아트 작품 가운데 하나다. 캠벨수프사가 당시 제조하던 32가지 종류의 통조림을 반자동 실크스크린 기법인 판화로 그려냈다. 초창기에는 예술작품인지 아닌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기도 했다.
  워홀의 두 번째 스텝은 자기만의 화풍(畵風)을 창조하는 것이었다. 신발 마니아였던 그는 신발 연작을 그렸지만 기존의 광고 디자인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고 만화 캐릭터를 확대하여 그려봤지만 그것 역시 이미 선점한 작가가 있었다. 당시에는 추상주의가 유행하고 있었으니 디자인에 뭔가 추상적인 기법을 가미해야 할 것 같은 압박감이 그를 짓눌렀다. 고민의 늪에 빠져 있던 그에게 어느 날 한 친구가 무심코 던진 말이 날아와 확 꽂혔다.
 
  “사람들이 매일매일 보는 것을 그리면 어떨까.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예를 들면 수프 캔 같은 거랄까?”
 

  음악가의 천재성은 연주 기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곡에 대한 해석 능력에서 나온다고 한다. 모든 예술이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저 지나가는 평범한 이야기였지만 워홀의 천재적인 감각이 폭발했다.
 
  그는 당장 식품점으로 달려가 수십 종의 캠벨(Campbell's) 수프를 한 캔씩 모두 사 왔다. 캠벨 수프는 어려서부터 그가 자주 먹었던 음식이었다. 그는 수프 캔을 사진으로 찍어 컬러 슬라이드를 만든 후 스크린에 비추어 윤곽선을 따라 그렸다. 캔버스 위에 수프 캔을 종류대로 하나씩 그린 후 색칠을 했다.
 
 
  팝아트의 시대를 열다
 
  1963년 캠벨 수프보다 유명하고 인기 있는 메릴린 먼로가 죽자 워홀은 그녀의 초상화 연작을 제작했다. 그는 물감 칠에서 한층 더 발전시킨 실크스크린 기법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바로 티셔츠에 문양을 찍어내듯이 똑같은 이미지를 여러 번 찍어내는 것이 가능한 스텐실 인쇄 기법이었다. 그는 이 방법으로 〈금빛 메릴린 먼로〉와 〈메릴린 먼로 두 폭〉을 포함해 스물세 점의 메릴린 초상화를 만들어냈다. 명성을 상품화하고 그것을 다시 예술로 승화한 세상에 없던 창조적 작품이었다.
 
  뉴욕 미술계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주류였던 추상표현주의가 한순간에 고리타분한 과거의 장르로 전락해버릴 정도였다. 잭슨 폴록과 함께 액션페인팅의 기수였던 추상표현주의 화가 윌렘 드 쿠닝은 한 파티에서 워홀과 마주치자 “당신은 미술의 살해자야, 아름다움의 살해자이고 심지어 웃음의 살해자야!”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야말로 열등감 내지는 질투의 폭발이었다.
 
  사실 추상표현주의자들이야말로 그 이전의 화가들 입장에서는 회화의 미학(美學)과 형식을 파괴한 범죄자들이었다. 심지어 대표주자인 폴록은 그림의 가장 기초인 드로잉은 물론 선을 베껴 그리는 것조차 제대로 못했으니 말이다.
 
  이렇게 새로운 팝아트의 시대가 열렸다. 게다가 워홀은 작품보다 더 강력한 이미지 메이킹을 선보였다. 워홀은 자신의 이야기를 언론에 노출시킬 홍보매니저를 고용했고 항상 모델들과 게이들을 몰고 다니며 가십거리를 만들었다. 그는 머리털이 빠지기 시작하자 가발을 착용했는데 처음엔 자신의 모발과 같은 금발을 썼다가 후엔 더 특이한 은회색 가발로 바꿨다. 여기다 얼굴을 강조하기 위해 두꺼운 뿔테 안경을 쓰고 블랙진에 블랙 가죽 재킷을 걸쳐 자신만의 고유한 스타일을 창조했다.
 
  워홀의 부모는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미국 피츠버그로 이주한 이민자들이었다. 워홀이 이름을 바꾸기 전 그의 본명은 체코식 이름 앤드루 워홀라 주니어(Andrew Warhola Jr.)였다. 이민 1세대인 그의 아버지는 펜실베이니아 탄광지대의 광부였고 그의 삶에서 아버지의 자리는 늘 비어 있었다. 어려서부터 몸이 약했던 그는 신경쇠약으로 학교 생활에 잘 적응하지도 못했다.
 
  가난하고 불우했던 과거를 숨기고 싶었던 그는 자신의 얘기를 거의 하지 않았다. 그는 아버지가 오염된 물을 마시고 오랜 투병 끝에 사망한 사실도 자동차 사고로 바꾸어 말하곤 했다. 워홀은 아마추어 예술가였던 어머니 줄리아의 영향으로 드로잉에 흥미를 갖게 되었고 다행히 거기서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게 되었다.
 
  줄리아는 유독 병약한 셋째 아들 워홀을 응석받이로 키웠다. 1952년 줄리아는 워홀이 사는 뉴욕으로 이사를 단행했다. 그녀는 밥하고 빨래하며 혼자 사는 아들을 살뜰히 보살피고 싶었다. 이제 막 일러스트레이터로서 자리를 잡고 게이들과 비밀스러운 관계를 시작하던 워홀은 어머니가 달갑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어머니는 동성애자(同性愛者)인 그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여자였고 아무도 그녀를 막을 수 없다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었다.
 
 
  동성애자의 어머니
 
  워홀은 거의 지구를 침공한 외계인처럼 색다른 생명체였지만 그를 낳은 어머니는 평범한 지구인이었고 아메리칸 스타일도 아니었다. 그녀는 전통적인 사상을 가진 털털한 성격의 아줌마였고 고양이도 열 마리 넘게 돌보는 인정 넘치는 사람이었다. 워홀의 친구들은 모두 그녀를 좋아했다. 1960년대 초 워홀은 명성이 높아지자 어머니와 함께 더 넓은 고급 복층식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줄리아는 지하에 살았고 너무 유명해진 아들의 얼굴을 점점 보기 힘들어지자 자기 방에서 워홀의 통화를 몰래 엿듣곤 했다. 20세기 최고의 슈퍼스타가 된 워홀은 통화 중에 종종 “엄마, 수화기 좀 내려놔요!”라고 10대 소년처럼 소리를 지르곤 했다. 줄리아는 “우리 아들이 좋은 여자를 만나서 결혼할 때까지만 함께 살 거야”라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워홀이 몇 명의 동성 애인과 장기적인 관계를 맺을 때도 그녀는 함께 살고 있었고 제드 존슨과는 무려 12년이나 연인 사이를 유지했다. 워홀이 게이라는 사실을 어머니가 알았는지의 여부는 알려지지 않았다. 알면서도 애써 외면했는지도 모르지만 정말로 몰랐을 가능성도 있다. 완전히 사랑한다고 해서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아니니까.
 
 
  “내 마음속의 채널을 다른 데로 돌려”
 
메릴린 먼로 초상화
워홀은 메릴린 먼로가 죽은 지 2년 후인 1964년, 그녀의 출세작 영화 〈나이아가라〉의 현란한 포스터 사진을 실크스크린으로 제작했다. 작품 제목 〈샷 메릴린〉 시리즈는 1964년 가을 행위예술가 도로시 포드버가 워홀의 스튜디오를 찾아와 벽에 먼로의 초상화 작품들을 겹쳐 세워달라고 말한 뒤 갑자기 권총을 발사한 사건에서 유래했다. 워홀은 먼로 시리즈를 각각 다른 색으로 5점을 완성했는데 이 사건으로 두 점에 총알구멍이 생겼다. 무사히 남은 세 점 중 하나인 〈샷 세이지 블루 메릴린(Shot Sage Blue Marilyn)〉은 2022년 크리스티 경매에서 1억9504만 달러(약 2500억원)에 낙찰됐다.
  줄리아는 1972년에 세상을 떠났고 워홀은 몇 년이 지나도록 주변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한 번은 지인이 줄리아의 죽음에 대해 물었고 그는 “나는 엄마가 생각날 때면 TV를 볼 때처럼 내 마음속의 채널을 다른 데로 돌려”라고 대답했다. 피도 눈물도 없을 것 같은 그이지만 엄마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은 꽤 컸던 모양이다.
 
  1963년 그는 실크스크린 장비들을 설치하기 위해 창고를 하나 얻어서 그곳을 스튜디오가 아닌 공장(The factory)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이곳은 곧 24시간 열리는 파티장으로 변신했다. 이곳을 드나드는 사람들은 대부분 게이이거나 성전환자이거나 약물 중독자였다. 워홀 역시 마약에 중독되었으나 작업은 계속 이어나갔다. 실험영화를 제작하고 TV 드라마에 출연하는가 하면 음악 밴드 활동까지 영역을 넓혀나갔다.
 
  유명세가 높아질수록 그에 대한 비난과 야유도 늘었다. 하지만 그는 늘 침착하게 냉정함을 유지했다. 공장에 자주 드나들었던 프레디 허코가 약물 과다 복용으로 5층에서 뛰어내려 사망했을 때도 워홀은 눈 하나 깜짝 않고 “미리 말했으면 우리가 밑에 내려가 있다가 그 장면을 촬영했을 텐데”라고 말할 뿐이었다.
 

  워홀의 추종자들을 비롯해 주변인들은 점점 마약에 중독되거나 여타 다른 무절제를 이유로 쓰러져 갔다. 자신의 삶이 파괴된 것이 워홀 때문이라며 원망하는 사람들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러다 그중 한 명이었던 급진적 성향의 페미니스트 발레리 솔라니스가 어느 날 워홀의 사무실에 찾아와 총으로 그를 쏴버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두 발의 총탄이 그의 몸을 관통했고 바로 병원으로 실려가 응급처치로 겨우 살아났다. 그 후로 그는 더 이상 예전의 생활로는 돌아갈 수 없었다. 그는 항상 의료용 코르셋을 착용하고 다녀야 했고 몸의 흉터들은 무리할 때마다 다시 벌어지기 일쑤였다. 경찰에 자수한 솔라니스는 법정에서까지 “워홀이 내 삶을 좌지우지했다”며 격분했고 3년형을 선고받았다.
 
  죽다 살아난 워홀은 암페타민 복용을 끊고 몸에 좋다는 생마늘을 먹을 정도로 건강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그 후로도 그의 작업실에서 총격 사건이 두 번이나 더 발생했는데 다행히 그를 비껴갔다. 대신 작품 메릴린 시리즈가 총에 맞았고 이 해프닝으로 워홀은 오히려 더 유명해지고 작품 가격도 치솟았다.
 
 
  ‘워홀리즘’
 
여덟 명의 엘비스(Eight Elvises, 1963)
워홀은 유명인의 초상화에 실크스크린 기법을 적용했다. 메릴린 먼로의 초상화로 명성을 얻게 되자 그는 사교계와 유명인사로부터 커미션을 받고 초상화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엘리자베스 테일러, 믹 재거, 마오쩌둥 등의 초상화가 유명하며, 특히 엘비스 프레슬리의 초상화 〈여덟 명의 엘비스〉는 2008년 1억 달러에 재판매되어 세계에서 가장 가치 있는 그림 중 하나가 되었다.
  공장 문을 닫고 ‘스튜디오 54’로 작업실을 옮긴 그는 1969년에는 명사들의 세계에 관한 잡지 《인터뷰》를 공동 창간한다. 그는 그동안 어울렸던 성전환자들과 사회 부적응자들 대신 상류층 명사, 유명 셀럽들과 관계를 형성해나갔다. 1970년대 말부터 워홀은 젊은 예술가들에게 전설이 되기 시작했고 워홀리즘(Warholism)이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팬덤이 형성되었다.
 
  거리의 부랑자이자 낙서 화가였던 장 바스키아 역시 워홀을 선망했고 그는 《인터뷰》의 영업담당자 포웰을 통해 워홀과 만나는 데 성공한다. 바스키아가 워홀의 건물로 이사한 후 둘의 관계는 급속도로 가까워졌고 전시회도 함께 열었다. 두 사람이 어떤 관계(?)였는지에 대해서는 소문만이 무성하다. 바스키아는 젊고 매력적인 양성애자였으니 나머지는 상상에 맡기겠다.
 
  워홀은 1980년대에 친구들이 에이즈로 죽어 나가는 것을 목격하며 사람들에게 갑자기 신앙에 대해 언급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에 기초한 작품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죽음에 대한 공포 앞에서 그 역시 한낱 나약한 인간에 불과했을 뿐이었다. 1986년에 제작된 그의 자화상 시리즈는 그가 죽기 불과 몇 달 전에 제작한 것인데 머리칼이 하늘로 쭈뼛 선 이미지가 죽음에 대한 영적 느낌을 받은 것 아니냐는 추측을 낳기도 했다.
 
 
  “액자에 넣으면 어떤 것이든 예술이 된다”
 
앤디 워홀의 드라큘라 〈Blood For Dracula〉 영화
워홀은 뉴욕에 ‘The Factory’라는 자신의 스튜디오를 설립한 뒤 작가와 음악가 등 다양한 예술가들과 교류하며 영화와 다큐멘터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는 1963년 영화산업에 뛰어든 후 5년 동안 약 60편의 영화를 제작하였는데 하나같이 실험적이었다. 1974년 〈앤디 워홀의 드라큘라〉라는 제목으로 개봉한 영화 〈Blood For Dracula〉에서는 직접 디자인과 미술을 담당했다.
  담석으로 수술 치료를 받게 되자 그는 운명론적인 태도를 보였다. 의사가 간단한 수술임을 아무리 강조해도 그는 “이번에 병원에 들어가면 다시 살아 나오지 못할 것”이라며 불안에 떨었고 그의 예민한 촉은 현실이 되고 말았다. 워홀은 수술 다음 날 죽었고 그의 유족 측은 병원을 의료 과실로 고소했다. 그의 시신은 피츠버그에 있는 줄리아의 무덤 옆에 안장되었다.
 
  “액자에 넣으면 어떤 것이든 예술이 된다”고 말했던 워홀. 물론 아무나 아무것을 집어넣는다고 예술이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예술적인 시선과 감각이 전제되어야 함은 물론이고 그것이 예술이 되느냐 마느냐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일 테니까.
 
  하지만 워홀에게는 단순히 운이 좋았다고 말하기에는 부족한 그만의 특별함이 분명히 있었다. 살아남은 자가 강한 것이 아니라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이것을 예술에 적용하면 좋은 작품이 인기를 얻는 것이 아니라 인기를 얻는 작품이 진정 좋은 작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 워홀은 수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천재적인 예술가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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