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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과 역사

개인과 양심, 그리고 문명

‘개인과 양심’은 정치적으로는 자유민주문명과 통해

글 : 이강호  한국국가전략포럼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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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심은 성찰을, 성찰은 나(我)의 존재를 전제로 해
⊙ ‘양심’에 해당하는 말이 구약에는 없어
⊙ 바울의 사상에 ‘개인주의’ 잠재… 기독교 통해 ‘개인’ 개념 발전
⊙ 맹자, “인의지심(仁義之心)이 양심(良心)”

이강호
1963년생. 서울대 사회학과 졸업 / 前 대통령비서실 공보행정관, 《미래한국》 편집위원 역임 / 現 한국자유회의 간사, 한국국가전략포럼 연구위원 / 저서 《박정희가 옳았다》
대니얼 디포의 소설 《로빈슨 크루소》는 근대 개인의 탄생을 잘 보여준다.
  ‘더불어’ 간다는 이들이 앞세우던 것 중 하나가 양심(良心)이다. “행동하는 양심”을 소중히 한다 했다. 그런데 그랬던 자들이 언젠가부터 완전히 양심불량(良心不良)이다. 아니 불량 정도가 아니다. 양심이 아예 보이지 않는다. 일일이 언급은 관두자. 뭐가 잘못됐을까?
 
  “행동하는 양심”이라는 말은 울림이 있다. 불의(不義)에 맞서는 것은 칭송받아 마땅한 고귀한 일 아닌가? 하지만 좀 더 헤아리면 조심스러워야 마땅하다. ‘자신의 판단’은 올바를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행동에 나서기 전에 고민을 한다. 나의 판단은 맞는가, 그리고 나의 행동은 합당한가? 바로 이게 양심이다. 양심은 주장과 행동 이전의 것이다. 양심은 주장 이전에 자신에 대한 응시(凝視)다. 양심은 행동의 구호가 아니다. 양심은 행동 이전의 성찰(省察)이다.
 
  성찰은 ‘나’를 전제로 한다. 《방법서설》(1637)에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한 데카르트(1596~1650년)는 《성찰(Meditationes)》(1641)이라는 저서도 썼다. 데카르트의 말은 흔히 근대의 비종교적 합리주의의 출발을 상징하는 말로 인용되곤 한다. 그런 점이 있지만 사실 원조(元祖)는 기독교 교부(敎父)철학자인 아우구스티누스(354~430년)의 “의심하는(오류를 범하는) 나는 존재한다”라는 말이다.
 

  데카르트의 합리주의와 아우구스티누스의 신앙은 강조점과 지향이 다르다. 하지만 “Cogito(나는 생각한다)”를 공통적으로 말한다. ‘나’라는 개인(個人)이 전제다. 양심도 그러하다. 양심은 ‘더불어’ 이전에 ‘홀로’이다. 그리고 나대기 전에 자신에 대한 성찰이 먼저다.
 
 
  근대적 개인
 
아우구스티누스
  개인이 만개(滿開)한 때는 근대(近代)이다. 근대는 실로 개인의 시대다. 근대 이전에 인간의 정체성을 기본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가족이나 친족, 부족이나 종족, 그리고 제의적 종교와 같은 집단적 동질성이었다. 정체성을 규정하는 기본은 ‘소속’이었다. 하지만 근대는 전통적인 ‘소속’에서 벗어나 인간을 개인이게 했다. 다른 한편 ‘개인’이라는 관념의 성장과 확산이 근대의 성장이기도 했다.
 
  이와 관련해 야코프 부르크하르트(1818~1897년)는 르네상스가 중요한 계기였음을 말하고 막스 베버(1864~1920년)는 프로테스탄트의 의의를 설명한다. 그리고 일반적으로는 계몽주의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한다. 확실히 ‘근대적 개인’은 이렇게 자리 잡아 갔다.
 
  그러나 개인은 근대에 들어서면서 비로소 탄생한 것은 아니다. 개인은 근대에 들어 탄생한 것이라기보다는 ‘발견’되었다. 독일 역사학자 리하르트 반 뒬멘(1937~2004년)은 《개인의 발견(Die Entdeckung des Individuums)》(1997)에서 “기독교 중세에도 개인은 있었다”고 지적한다. 그는 ‘개인’에 대한 인식과 관념은 이미 중세 기독교에서부터 싹터 18세기에 이르러 정점에 이른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도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의 의의를 간과하지 않는다. 르네상스가 ‘세속에서의 개인’을 발견하고, 종교개혁은 ‘개인의 결단’을 요구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신(神)과 나’라는 일대일의 신앙의 중요성을 강조한 신교가 ‘개인의 양심’을 만들어갔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중세 가톨릭의 ‘고백성사’가 종교개혁가들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결코 무의미하지는 않았다는 것도 지적한다.
 
  그리고 뒬멘은 중세에도 이미 자기 성찰에 대한 많은 기록이 있다고 강조한다. 특히 더 거슬러 올라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을 상기시킨다. 뒬멘의 얘기처럼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은 ‘개인’과 관련해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고백’의 전제는 당연히 개인이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마지막 고대인이자 최초의 중세인이라 일컬어진다. 중세 가톨릭은 그 영향을 이어갔다. 그런데 그렇다면 더 거슬러 올라 고대에는 어땠을까? 마지막 고대인인 아우구스티누스는 그 이전에는 없었던 개인을 최초로 발명하여 제시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기독교와 개인의 탄생
 
사도 바울(바오로)
  아우구스티누스의 종교인 기독교 자체가 개인을 말한다. 출발에서부터 그랬다. 기독교와 그 이전의 유대교는 공통적으로 구원론이 있다. 그런데 구원 대상의 단위가 다르다. 유대교의 구원의 대상은 ‘이스라엘 민족’이다. 하지만 기독교의 구원은 ‘신자 개인’이 대상이다.
 
  기독교의 형성기인 사도 바울(바오로) 때부터 그랬다. 바울의 구원의 조건은 유대인이라는 자동적 소속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었다. 바울은 “유대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남자든 여자든 차별 없이”(갈라디아서 3장 28절) 그리스도를 믿는 게 구원의 조건이었다. 개인의 신앙이 구원의 조건이라는 것이다. 유대교는 ‘율법’을 세웠고 기독교는 ‘개인’을 탄생시켰다.
 
  바울의 사상에는 ‘개인주의’가 잠재돼 있었다. 이것은 유대인의 민족 단위의 구원이라는 관념을 넘어서는 보편주의였다. 그런데 바울의 이 같은 관점은 로마의 파테르(Pater·아버지)를 중심으로 한 파밀리아(familia·가족)라는 전통적인 공동체적 가치관과도 대비되는 것이었다.
 
  로마의 공화정(共和政)은 오늘날에도 이어지는 중요한 정치적 유산이다. 하지만 고대 로마 공화정의 중심은 개인인 시민이 아니라 시민권을 가지고 파밀리아를 이끄는 가부장(家父長) 파테르 파밀리아스(Pater familias)였다. 기독교의 ‘개인’은 로마의 이 같은 전통적 질서와 부딪혔다. 그리고 가족윤리와도 충돌했다.
 
  수도 로마에는 그야말로 ‘모든 신’이 다 있었다. 로마는 이방 종교에 대단히 개방적이고 관용적이었다. 그러나 기독교에 대해선 그럴 수가 없었다. 흔히 기독교의 일신교(一神敎)로서의 배타성이 문제였다고 하지만 핵심은 그게 아니었다. 당시 로마를 누빈 종교들 가운데 자신의 고유성과 특별성을 강조하지 않은 종교는 없었다. 기독교가 로마의 탄압을 받은 핵심적인 이유는 파밀리아에 바탕한 전통적인 질서와의 충돌 때문이었다.
 
 
  ‘축의 시대’
 
  그러나 이것은 문명사적 관점에서 보면 불가피할 뿐만 아니라 결국에는 이루어져야 할 문명적 성숙의 과정이었다. 문명의 성장은 자연적 혈족 관계를 넘어서는 비자연적인 2차적 사회관계의 고도화를 가져오게 된다. 이 같은 변화는 근대에서만이 아니다. 고대 문명의 시기에도 정도 차이는 있었지만 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2차적 관계의 발전과 확산은 정신문화적 차원에서 자연적 감성적 유대감을 넘어서는 가치관을 요청할 수밖에 없다.
 
  수메르 문명 이래 흥망해온 동서양의 고대 문명 모두 마찬가지였다. 칼 야스퍼스(1883~1969년)가 축(軸)의 시대(Axial Age)라 일컬은 기원전 8~3세기 무렵 인도의 석가모니, 중국의 공자, 그리스의 소크라테스 등이 대표적으로 동서세계 곳곳에서 수많은 사상가가 등장해 나왔다. 각 문명권은 이들의 등장과 함께 거의 동시적으로 정신문명의 도약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원 원년 무렵 로마의 변방 이스라엘에서 예수가 등장했다.
 
  이 같은 사상들에 공통적인 요소는 ‘자연적·일차적 감성’을 넘어서는 ‘세계에 대한 인식’과 ‘인간 자신에 대한 성찰’이다. 철학의 모습을 갖든 종교의 형식을 갖든 마찬가지다. 문명권 각각의 지역과 역사적 경과에 따른 특성의 차이는 있었다. 하지만 그 차이와 상관없이 ‘자아(自我) 성찰(省察)’은 공통점이었다. 소크라테스를 통해 유명해진 그리스 델포이 신전의 “너 자신을 알라”는 경구가 상징적이다. 그리스 문명을 스승으로 여긴 당시의 로마에도 이런 문제의식이 수용되고 자라나고 있었다.
 
 
  ‘인간 내면의 입구를 지키는 문지기’
 
세네카
  그런 가운데 마침내 등장한 기독교는 직접적이고 강력하게 ‘개인’을 제기했다. 기독교는 단순히 유대교의 전통만이 아니라 지중해 문명 세계의 정신문화 전반을 흡수하고 있었다. 기독교는 직접적인 종교적 전통은 유대교를 이었지만 그냥 헤브라이즘이 아니었다. 서구 정신문명은 흔히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을 양대 축으로 한다고 일컫는다. 그런데 기독교 자체가 사실은 유대교 전통의 헤브라이즘에 그리스 문명의 헬레니즘적 사유(思惟)가 결합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그리스-로마의 정신문명적 문제의식과 개념도 함께 안았다.
 
  《신약성경》이 그리스어로 쓰인 것은 당시로선 특이한 일이 아니었다. 그리스어는 유대까지 포함한 지중해 세계의 보편어였다. 언어의 보편화는 그 언어가 품고 있는 정신문명적 문제의식과 개념의 공유도 가져온다. ‘양심(良心·conscience)’이라는 개념도 이런 과정을 거쳐 등장했다.
 
  영어로 양심을 뜻하는 conscience는 라틴어 conscientia가 어원이다. 라틴어 conscientia의 접두어 con은 “함께”라는 뜻이며 scientia는 의식(意識)·지식(知識)이다. scientia는 science(과학)의 어원이기도 하다. conscientia는 “타인과 함께 자신을 앎”이다. 법률가이자 정치가인 키케로와 특히 철학자 세네카가 자주 썼다고 한다. 세네카는 “콘스시엔티아는 인간 내면의 입구를 지키는 문지기다”라 했다 한다. 오늘날의 ‘양심’과 같은 함의를 느끼게 한다.
 
 
  구약에는 ‘양심’이 없다
 
  그런데 conscientia는 그리스어로는 συνείδησις(syneidesis·쉬네이데시스)이다. 신약은 그리스어로 쓰였다. 신약에는 συνείδησις라는 단어가 30번가량 나온다. 바울 서신과 사도행전을 비롯한 여러 문헌에서 언급된다.
 
  대표적인 영어 번역 성경인 킹제임스판 성경(KJV)은 신약의 그리스어 단어 συνείδησις를 conscientia를 어원으로 한 conscience로 번역하고 있다. KJV판에는 conscience가 27번 나온다. 다른 영문 번역도 비슷하다. 그런데 conscience는 구약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한자어(漢字語)권 단어로는 양심으로 번역된다. 우리말 성경도 마찬가지다. (번역본에 따라 다르지만 대체로 30번 전후다.) 그런데 우리말 구약에도 양심이라는 단어는 등장하지 않는다.
 
  이스라엘의 역사가인 마틴 반 크레벨드는 《양심이란 무엇인가(Conscience: A Biography)》(2015)에서 그 점을 담담히 설명한다. 그는 “구약에는 양심이라는 단어가 없다”고 지적한다. 비슷하게 해석할 수 있는 단어들이 없진 않다. 하지만 율법(律法)을 전제로 율법을 어긴 죄책감이 기본 개념이지 내면의 고뇌라는 뜻의 말은 없다고 지적한다. 그는 “히틀러는 양심은 유대민족이 지어냈다고 했지만” “유대인은 양심이라는 개념을 기독교로부터 받아들였다”고 말한다.
 
 
  개인과 양심은 문명 자체의 소산
 
  개인의 전적인 전면화는 근대에 들어서면서다. 그러나 ‘개인의 탄생’은 근대만의 산물은 아니다. 전면화한 것은 근대지만 뿌리와 싹은 이미 거슬러 올라 고대에도 있었다. 즉 ‘개인’은 단지 시대의 산물이 아니라 더 본질적으로는 문명 자체의 소산이다. 양심도 그러하다.
 
  영국 정치철학자 래리 시덴톱(1936~)의 《개인의 탄생(Inventing the Individual)》(2014)은 그 점을 고찰한다. 부제(副題)는 “서구 자유주의의 기원(The Origins of Western Liberalism)”이다. 자유주의의 역사를 밝히는 책이다. 그런데 제목의 일견에서의 느낌과는 달리 개인이 근대에 의해 ‘발명’된 것이라 주장하지는 않는다.
 
  한국어 번역본의 부제는 “양심과 자유, 책임은 어떻게 발명되었는가?”이다. ‘양심, 자유, 책임’은 근대적 개인의 핵심이다. 그런데 저자는 그것이 단지 근대 계몽주의만의 성취가 아니라 오랜 역사적 뿌리가 있으며 장구한 과정을 거쳐 이룩됐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그 출발에서부터 기독교가 있었다고 한다. 그는 기독교의 탄생기, 바울이 ‘내적(內的) 진리에 따른 도덕적 평등’이라는 가치관으로 ‘세상을 뒤집었다’고 지적한다. 미국의 《월스트리트저널》은 서평에서 “현대 세속주의와 그 자유는 기독교가 인간 사회에 준 선물”이라고 하며 이 책은 “그 잃어버린 족보를 추적하려는 시도”라고 평했다.
 
  ‘개인과 양심’은 근대문명의 성숙과 함께 그 중추가 됐다. 정치적으로는 자유민주문명이다. 그런데 그것은 근대라는 시대만의 소산이 아니다. 그 씨앗과 싹과 뿌리는 고전고대의 정신문명적 도약기에 주어졌으며 그것이 역사를 거치면서 성장하여 꽃을 피우게 된 것이다.
 
  고대 로마는 기독교를 수용하는 데 300여 년이 걸렸다. 그리고 5세기 말 서로마제국 멸망 뒤 근대문명이 본격적으로 개화를 시작하기까지 1000년 남짓의 세월이 걸렸다. 중세 기독교 시대는 한때 암흑기로 불리기도 했다. 근대 계몽주의가 폭발적으로 대두하던 무렵에는 이 같은 인식이 지배적 통념이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날 역사학은 더 이상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서로마제국 멸망 후 중세는 한편으로는 야만을 안은 후진적 시대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거대한 문명적 학습의 시대였다. 게르만의 대이동으로 차례로 과거 로마세계에 들어와 자리 잡은 새로운 주역들은 문명적 성장의 경로를 다시 밟아갔다. 일본의 정치학자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1914~1996년)는 그와 관련해 “유럽의 중세 시기는 그 새로운 주역들이 기독교를 매개로 하여 그리스-로마 고전고대문명의 성취를 배우고 자기 것으로 만들어간 장구한 학습의 기간이었다”고 했다.
 
  그들에게는 서로마제국 멸망 이전에도 이후에도 로마문명과 기독교문명은 동일체의 선진문명이었다. 서로마 멸망 후의 혼란기와 중세시기 동안 그 의미는 각별했다. 교회는 문명을 보존하고 이어가는 역할을 했다. 무엇보다도 문자를 보존했다. 유대교가 그렇듯 기독교도 단순히 제의(祭儀)의 종교가 아니라 ‘책의 종교’였기 때문이다. 기독교적 내용이 아니라도 그리스-로마의 여러 문헌도 보존했다. 배격하는 극단주의자가 없진 않았지만 일반적이진 않았다. 로마법 체계도 보존했다. 로마가 기독교화하면서 교회가 그 체계를 수용한 덕분이었다.
 
 
  도덕적 의무의 본질
 
둔스 스코투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재발견이 십자군전쟁을 계기로 이슬람권의 문헌이 전수되면서였다는 것은 부분적으로만 의미 있는 얘기다. 더 중요한 것은 문헌의 보존과 학습이 교회와 사제들의 당연한 전통이었다는 점이다. 기독교는 그냥 종교가 아니라 ‘문명의 보존자’ 역할을 했다. 의도했든 아니든 그랬다.
 
  그런 가운데 중세 기독교는 서서히 이후 만개하게 될 근대적 가치관의 싹을 틔워가기 시작했다. 스콜라 신학자·철학자들이 그 문을 열었다. 알베르투스 마그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가 대표적이었다.
 
  특히 아퀴나스는 《진리론(Quaesti ones Disputatae de Veritate)》에서 근원적 양심(synderesis)과 양심(conscientia)을 논하고 있다. (synderesis는 아직 확정된 번역어는 없다.) 한편 그 외에도 많은 신학자·철학자들이 역할을 했다. 특히 ‘자유’와 관련해선 영국 스코틀랜드의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신학자이자 스콜라 철학자였던 둔스 스코투스(1266~1308년)의 언명이 각별하다.
 
  시덴톱의 《개인의 탄생》은 스코투스가 도덕적 의무의 본질에 대해 분석하면서 ‘자유’를 특별히 강조했음을 소개한다. 스코투스는 “자유의지에서 나온 행동이 아니라면 그 어떤 행동도 칭찬을 듣지 못하고 탓도 듣지 않는다”고 언명했다 한다. 《개인의 탄생》은 “스코투스에게 자유는 적절한 도덕적 행동의 선제조건”이었다고 설명한다. 13세기 기독교 신학자라고 설명하지 않으면 완전히 근대적 자유주의자의 말로 여겨질 만하다.
 
 
  로빈슨 크루소가 웅변한 ‘개인’
 
  르네상스를 거쳐 계몽주의가 대두되고 근대가 무르익어가는 가운데 ‘개인’을 말하는 많은 사상가가 줄을 이었다. 그런데 철학적·정치적 저술만이 아니라 ‘이야기’들도 매우 의미 있다. 대니얼 디포(1660~1731년)의 《로빈슨 크루소》(1719)도 그중 하나다. 디포는 상인 출신이며 정치가이자 언론인이기도 했다. 그리고 개신교인이었다. 소설의 주인공 로빈슨 크루소도 상인이며 개신교도였다. 크루소는 무인도에 조난한 뒤 28년을 ‘홀로’ 살아낸다. 홀로 ‘문명’을 재건하고 살아간다. 종교적으로도 그랬다. 당시의 ‘개인’을 웅변한다.
 
  그러나 ‘개인주의’에 대해선 좀 달랐다. ‘개인주의’라는 단어는 1830년대 무렵 사용되기 시작했을 때는 ‘비난의 뜻’에서였다. 사회적 결속력에 악영향을 준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왕당파적 보수주의자들만이 아니었다. 사회주의자들은 물론 온건한 우파들도 꽤 그러했다.
 

  그런데 알렉시스 드 토크빌(1805~ 1859년)은 달랐다. 그는 《미국의 민주주의》(1835) 2권 2장 ‘민주주의 국가의 개인주의에 관하여’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개인주의는 새로운 개념을 표현하기 위해 생겨났다. 우리의 조상들은 이기주의라는 말밖에는 알지 못했다. 이기주의는 열정적이고 과장된 자기애로서 (…) 자기 자신을 이 세상 모든 것보다 우선시한다. (그러나) 개인주의는 성숙하고 냉정한 감정(이다.)”
 
  물론 토크빌도 개인주의의 약점에 대해 지적했다. 그러나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음 또한 지적했다. 그렇게 됐다. ‘주의’가 붙는 것은 어떤 것이든 일정하게는 위험이 있다. 개인주의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개인의 책임’을 전제하는 한 개인주의는 폄하돼선 안 된다. 오히려 경계돼야 할 것은 ‘더불어’의 남발이다. ‘책임의 실종’과 ‘양심의 증발’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individual과 個人
 
후쿠자와 유키치
  한자어 개인(個人)은 라틴어 indivi duus에서 유래한 영어 individual의 번역어다. 나뉠 수(dividual) 없는(in) 존재라는 뜻인데 메이지유신 시대 일본의 신문명론자들이 개인으로 번역했다.
 
  일본의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1834~1901년)가 시작이었다. 그는 메이지유신 초기 무렵 쓴 〈일신(一身)의 자유(自由)를 논(論)한다〉라는 논설문에서 “individual”을 일본식 고유어인 “인각(人各々)”, 즉 “사람 각각”이라고 옮기며 자유를 논했다. 그러다 〈문명론지개략(文明論之槪略)〉(1875)에서는 “독일개인(獨一個人)”으로 표현했다. 이후 “일개인(一個人)”이라는 표현이 널리 사용되다 1890년대 들어 “개인(個人)”이라는 용어가 정착됐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서구 근대문명의 핵심에 개인이 있음을 각별히 주목했다. 《학문의 권장》 《문명론지개략》에서 그 점을 거듭 강조하고 일본도 ‘개인’을 세워야 함을 주창했다. 그렇게 하여 일본은 서구문명이 장대한 역사적 과정을 거쳐 다진 개인을 수용해내기 시작했다. 이후 군국주의(軍國主義)의 폭주 시대를 겪는 동안은 퇴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당연히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중국을 어떨까?
 
  중국은 결국 공산전체주의로 가버리면서 ‘개인’은 설 자리를 잃었다. 더러는 중국이 고대 이래로 늘 그랬던 듯이 보기도 한다. 그러나 늘 그랬던 것은 아니다. 중국의 전제정(專制政)이 분명히 그런 모습을 보이기는 했지만 고대 춘추전국시대로 올라가면 다르다. 통념적 생각과는 달리 유학의 시조인 공자(孔子)와 맹자(孟子) 모두 ‘개인’의 의미를 담은 언급을 했다.
 
  공자(기원전 551~479년)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을 말했다. “화합은 하되 소신 없이 남을 따르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당연히 개인이 전제가 돼야 가능한 말이다. 그리고 공자는 무뇌동(毋雷同), 즉 “뇌동(雷同)하지 말라”고도 했다. 뇌동은 천둥소리에 허둥대듯 “아무 생각 없이 다른 사람의 의견에 동조”하는 것을 뜻하는데, 여기에 부화(附和)가 붙어 부화뇌동(附和雷同)이 유래했다. 부화뇌동은 오늘날 식으로 말하자면 포퓰리즘이다. 공자의 ‘화이부동 무뇌동’을 예견적인 경구라 하면 과할까?
 
  한편 맹자(기원전 372~289년)도 이런 언급을 했다. 맹자는 ‘이위위 아위아(爾爲爾, 我爲我)’라는 말을 했다. “너는 너, 나는 나”라는 뜻으로 “너는 너의 할 바를 하라, 나는 나의 할 바를 한다”는 의미다. 굳이 설명이 없으면 마치 오늘날의 개인주의적 언명처럼 느껴지지 않는가?
 
 
  conscience와 良心의 만남
 
  ‘양심’도 그러하다. conscience가 양심(良心)으로 번역된 것은 그 한자어에 유사한 함의의 기원이 있기 때문이다. 맹자의 말이다. 인의지심(仁義之心)이 양심이라 했다. 인(仁)은 “어질다”는 뜻으로 공자 사상의 핵심이다. 사람 인(人)과 둘을 뜻하는 이(二)가 합쳐진 것으로 “타인을 안다”는 의미를 갖는다. 맹자는 인(仁)과 함께 의(義)를 강조했다. 의(義)는 올바름이다. 맹자는 둘을 함께 일컬어 양심이라 했다. 즉 양심은 타인을 생각하고 올바름을 지키는 마음이다. “함께 안다”는 말에 뿌리를 둔 conscience가 양심으로 옮겨졌다.
 
  물론 한계는 있다. 맹자의 양심은 직역하면 “좋은 마음”이다. 맹자는 인간은 본래 천성적으로 ‘좋은 마음’을 갖고 있다고 했다. 성선설(性善說)이다. 그러나 그것은 믿음일 수는 있어도 확언할 수는 없다. 근대적 정신은 인간의 성선 성악에 매이는 게 아니라 규칙과 법을 중히 한다. 그리고 내면의 conscience에는 관여하지 않는다.
 
  그러나 폄하할 것 또한 아니다. 맹자의 양심론은 칸트의 도덕관과 통한다. 칸트도 인간의 본성 안에는 ‘선에의 의지’와 ‘실천이성의 능력’이 있다고 보았다. 물론 칸트와 맹자는 차이도 크다. 하지만 어떻든 좋은 싹이었던 고대 동아시아의 양심이 conscience를 만나 결합한 것은 의미가 크다. 근대적 재탄생이다. 동서와 시대를 넘은 문명적 가치의 생명력과 소중함을 거듭 웅변한다. 그런 가운데 ‘개인과 양심’은 이제 우리의 것이기도 한 문명적 가치가 되었다. 그 건강함을 지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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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EONARD    (2023-06-02) 찬성 : 2   반대 : 0
이해되면 이해되는대로 숭배하며 따르고, 자기의 기준으로 이해되지 않으면, 이해되지 않는 그대로 살면됩니다. 하느님족(세계종교인 유교나 가톨릭)과, 창조신보다 높다는 부처 Monkey의 침팬치족은, 완전히 다릅니다. 성씨없는 천민 점쇠 부처 Monkey족의 괴수(히로히토,아키히토,나루히토)가 하느님보다 높고 예수님보다 높아서, 자기와 다르다고 일제 강점기에 자기들이 강제로 포교한 기독교의 신부 억압하고, 목사 구타하던 불교 Monkey일본의 불법 강점기를 겪은 한국. 점쇠천민 Monkey가 세운 마당쇠 불교 Monkey서울대와 각종 왜구 잔재학교들이 발호하고 있어서, 겉은 멀쩡한데, 속은 원숭이 생각으로 세뇌되어, 유교나 가톨릭을 파괴해야만 하는 일본 불교Monkey 침팬치족들의 파괴가 수시로 발생하느 나라 한국입니다.오죽하면 미국이 원자탄을 투하했을까요? 사람이 아닌 침팬치족의 자살특공대식 항거를 끝내기 위해 그런것으로 보여짐. 서유럽에는 그렇게 못할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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