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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칙한 미술가들

스캔들로 보는 미술사 10 / 사랑과 전쟁 - 피카소의 여인들

글 : 추명희  작가  vinosh@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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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섯 명의 공식적인 연인과 두 명의 아내 그리고 셀 수 없이 스쳐 지나간 여인들
⊙ 대작 〈게르니카〉 속에는 피카소의 두 연인 마리 테레즈와 도라 마르 그려져 있어
⊙ 프랑수아즈, 이혼 후 《피카소와 함께한 삶》 펴내 피카소에게 타격 입혀
⊙ 도라, “당신은 화가로서는 비범할지 모르지만 도덕적으로 말하자면 쓰레기”

추명희
《월간조선》 《톱클래스》 《더 트래블러》 기자로 일했다. 미술 작품 애호가로, 꾸준히 컬렉션을 모으고 있다. 서강대학교에서 문학사와 정치학사, 서강대학교 언론대학원에서 언론학 석사를 마쳤다.
파블로 피카소(Pablo Ruiz Picasso·1881~1973년)
스페인 출신으로 프랑스에서 활동. 회화, 조각, 도예, 판화 등 다방면으로 활약했으며 20세기 미술을 지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강력한 천재성을 발휘했다. 마치 카멜레온처럼 양식과 매체를 변경해가며 다수의 작품을 남겼다. 또 1930년대에서 1970년대까지 왕성한 사회·정치 활동을 통해 프랑코 정권을 비난하기도 했다.
  천재는 악마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어떤 천재들은 주위 사람들을 가해자로 여기면서 정작 자신이 그들에게 준 피해는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것 같다. 이와 비슷한 얘기가 루소의 《고백록》에도 나와 있다.
 
  “천재들의 소설이나 자서전을 읽어보면, 그들이 세상사의 모든 것을 놀랍도록 예민하게 파악하면서도 자신이 부인이나 자식들을 얼마만큼 괴롭히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우둔할 정도로 무지함을 알 수 있다.”
 
  영국의 대문호 셰익스피어가 아내에게 남겨준 유산이 겨우 ‘침대와 가구’뿐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셰익스피어는 1616년 6월 26일 세 페이지 분량의 양피지에 유언을 빼곡하게 적고 각 장마다 직접 서명을 했다. 전체적으로 딱딱하고 공식적인 표현투성이인데 그나마도 아내에 대한 부분은 건조하기 짝이 없는 한 줄이 전부였다.
 
  “나의 아내에게는 두 번째로 좋은 침대(가구가 달린)를 물려준다(Item, I give unto my wife my second best bed with furniture).”
 
  셰익스피어가 런던에서 극작 활동을 하는 동안 고향 집에서 홀로 아이들을 기르며 25년간을 기다린 아내 앤 헤서웨이의 기분은 어땠을지. 이따위 유산을 받느니 차라리 먼저 죽는 것이 나았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을까. 헌신적인 아내에게 이처럼 얼음장 같은 사람이 인간의 존재론적 의미를 성찰한 대문호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뿐이다.
 
  20세기 최고의 천재, 파블로 피카소(Pablo Ruiz Picasso·1881~ 1973년)는 이러한 셰익스피어를 가뿐히 뛰어넘는다. 그는 다른 방식으로 아내와 가족들에게 고통을 주었는데, 그것은 바로 공허한 사랑이다. 그야말로 침대와 가구조차도 남아 있지 않은 텅 빈 방 안 같은 허무였다고 할까. 여섯 명의 공식적인 연인과 두 명의 아내 그리고 셀 수 없이 스쳐 지나간 여인들. 여덟 살부터 시작해 아흔한 살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80여 년 동안 구축한 그의 방대한 예술세계는 그야말로 여인들의 눈물을 먹고 자라 꽃을 피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평화롭지 않았던 평화운동가
 
〈게르니카(Guernica, 1937)〉
가로 7.8m, 세로 3.5m에 달하는 압도적인 규모의 대작으로 파시즘에 저항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1937년 스페인내전 중 독일군 폭격기들의 공습으로 2000여 명에 달하는 무고한 게르니카 시민들이 목숨을 잃고 도시는 폐허가 돼버렸다는 소식에 분개한 피카소는 이 대작을 불과 6주 만에 완성했다. 스페인이 민주주의 국가가 되었을 때 반환해달라는 피카소의 요청에 따라, 프랑코가 죽은 후, 1981년에 스페인으로 돌아왔다. 현재 마드리드에 있는 레이나 소피아 국립미술관에 걸려 있다.
  〈게르니카〉는 피카소의 대표작을 넘어 20세기를 대표하는 최고의 미술작품 중 하나다. 가로 7.8m, 세로 3.5m에 달하는 압도적인 규모의 이 대작은 알려진 대로 전쟁의 학살을 주제로 한다. 1937년 스페인내전 중 독일군 폭격기들의 공습으로 2000여 명에 달하는 무고한 게르니카 시민들이 목숨을 잃고 도시는 폐허가 돼버렸다는 소식에 분개한 피카소는 이 대작을 불과 6주 만에 완성했다.
 
  절규하는 여자들과 산산이 부서진 조각상처럼 토막 난 군인들의 시체,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탄하는 듯한 황소와 혀에 송곳이 꽂힌 채 비명을 지르는 말, 그리고 이 모든 참상을 바라보는 목격자의 눈처럼 불 켜진 전구.
 
  그가 영감(靈感)을 받았다는 고야의 명작 〈1808년 5월 3일〉의 사실적인 표현과는 달리 그는 매우 상징적이고 해체주의적으로 공포를 표현했다. 당시 가해자인 독일은 이 작품을 향해 “초등학교 4학년이면 누구나 그릴 수 있는 인체 부분들의 잡동사니”라고 조롱했다. 하지만 이런 상징성 때문에 〈게르니카〉는 반전(反戰)과 저항의 아이콘이 되었고 그는 이 그림으로 일약 슈퍼스타 자리에 오른다. 피카소는 논란이 많은 〈한국에서의 학살〉 같은 전쟁 고발 그림을 계속 그리면서 나아가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하고 정치적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넌 너무 무식해서 더 이상 반응이 없어”
 
  피카소는 정치 행보를 하며 ‘평화운동’을 벌였다. 하지만 정작 그의 삶에서는 끊임없이 내전을 일으키고 있었다. 말 그대로 사랑과의 전쟁. 어떤 비평가는 “〈게르니카〉는 정치적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한 사적인 브레인스톰의 표현”이라고 비판했는데 그의 지적이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게르니카〉는 공적(公的)으로는 전쟁의 비극을 담은 그림이지만 사적(私的)으로는 그가 일으킨 내전, 정확히 말하자면 도라와 마리의 비극이 그려져 있다.
 
  〈게르니카〉를 그리기 1년 전인 1936년 중년의 피카소는 스물아홉의 재능 있는 초현실주의 사진작가 도라 마르를 만나게 된다. 파리의 유명 카페 마고에서, 도라는 테이블 위에 손을 올려놓고 날카로운 칼로 손가락 사이를 빠르게 왔다 갔다 하는 장난을 치다가 그만 실수를 하고 마는데, 그녀의 붉은 피가 공중으로 솟아오르는 순간 그 모습을 본 피카소는 그녀에게 푹 빠져들었다.
 

  피카소는 미모는 물론 지적이고 세련된 예술 감각을 가진 도라를 단박에 사로잡았고 〈게르니카〉 프로젝트를 시작하면서 오직 그녀에게만 자신의 작업 과정을 촬영하도록 했다. 하지만 그는 이미 마리 테레즈와 몇 년째 동거 중이었다. 마리는 그리스 여신의 조각 같은 미모에 빛나는 금발을 지닌 그야말로 완벽한 육체의 소유자였다. 피카소의 그림 속에서 마리는 늘 꿈꾸듯 행복하게 잠들어 있거나 자신의 풍만한 육체를 자랑하고 있다. 피카소는 그녀의 육체에 달려들어 욕정을 퍼붓는 투우장의 황소처럼 자신을 그려 넣었다.
 
  개인적인 욕망을 표현하기에는 마리가 완벽한 뮤즈였지만 〈게르니카〉 작업을 할 때는 달랐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 자의식이 강한 도라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반항적인 에너지가 필요했던 것이다. 마리가 그의 딸을 낳은 지 채 몇 달이 지나지 않아 피카소는 그녀를 버리고 도라에게로 갔다. “넌 너무 무식해서 더 이상 반응이 없어”라는 비수까지 날리면서. 하지만 순종적이었던 마리는 이별 중에도 갓난아기인 딸을 안고 작업실로 자주 찾아왔고 그럴 때마다 내부는 일촉즉발의 긴장감에 휩싸이곤 했다.
 
 
  〈게르니카〉 속 피카소의 여인들
 
  도라와 마리는 감정이 격해지면 육탄전까지도 불사했다. 소유욕이 강했던 도라는 피카소가 자기만의 남자가 될 수 없는 현실에 절망했고, 누구보다 자부심 강하고 주체적인 자신이 왜 이런 구질구질한 상황에서 허우적대는지 분노와 자괴감에 시달렸다. 도라의 초상화 〈우는 여인〉을 보면 신경질적이고 사나운 느낌의 도라가 그려져 있다. 도라가 울 때마다 피카소는 그녀를 달래주기는커녕 “울보야, 또 울어!”라며 놀려댔다.
 
  피카소는 도라를 〈게르니카〉 오른쪽에 절규하는 여인의 이미지로 그려 넣었다. 왼쪽에 아이를 안고 있는 여성이 마리. 중앙에 있는 말의 혀에는 날카로운 송곳이 꽂혀 있는데 이것은 도라의 독설을 의미하는 것 같다. 마리가 올려다보는 곳에 자리한 지친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보는 황소는 피카소 자신일 것이다. 주변에 토막 난 채로 널브러진 병사들은 상처받고 버려진, 그를 거쳐 간 수많은 여인일지도….
 
  사랑의 고통이 전쟁만큼 잔혹하다는 것은 겪어본 사람만이 알 것이다. 원래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던 도라는 결국 전쟁에서 패한 것처럼 피폐해졌고 정신과 치료를 받기에 이르렀다. 급기야 도라는 정신질환에 시달리다가 피카소가 죽은 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4세 때부터 情婦 가져
 
  피카소는 스페인 남부 소도시 말라가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여자들에 둘러싸여 살았다. 어머니와 할머니, 누이 두 명, 네 명의 이모, 사촌들까지 여자 일색이었다. 이런 환경에 떠받들어지며 어머니의 지극한 사랑 속에 자란 그는 자신감이 지나치게 넘쳐흘렀다. 네가 무엇이 되든 항상 최고가 될 거라는 어머니의 말에 그는 “난 화가이고 피카소가 될 거야”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의 말대로 그는 정말로 세상 유일무이한 존재 ‘천재 화가 피카소’가 되었다.
 
  어릴 때 이름이 파블로였던 그는 아버지의 성이 아닌 어머니의 성을 따라 모든 작품에 피카소라는 사인을 썼다. 그는 지방 박물관의 큐레이터로 평범한 화가였던 아버지보다 자신을 항상 최고라고 칭송해주는 어머니를 더 사랑하고 존경했던 것 같다. 열세 살에 미술학교에 들어간 그는 스무 살짜리 동기들보다 뛰어난 데생 실력을 자랑했다. 일설에 의하면 그는 이미 열네 살 때 정부(情婦)를 두었고 열여섯 살에는 성(性)에 대해 보통의 성인 남자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었다고 한다.
 
  불어를 전혀 할 줄 모르는 데다 무일푼이었던 그는 파리로 건너가 친구 카사헤마스의 낡은 아파트에서 더부살이를 했다. 그런데 그가 잠시 고향에 내려간 사이 카사헤마스가 짝사랑에 실패해 권총 자살을 하는 비극이 발생한다. 그는 자신이 파리에 있었더라면 막을 수 있었을 거라는 후회를 안고 서둘러 파리로 돌아왔다. 하지만 친구를 죽게 한 그 여인 제르망과 친구가 쓰던 침대에서 잠자리를 갖는 만행을 저지른다. 물론 둘의 관계는 오래가지 못했다.
 
 
  “드디어 피카소가 미쳤다”
 
〈아비뇽의 처녀들(Les Demoiselles d'Avignon, 1907)〉
미술사 최초의 입체주의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그림에는 다섯 여성의 누드가 등장하는데, 바르셀로나 아비뇽 인근 사창가 여성을 그린 것이라고 전해진다. 여성들의 인체, 천, 커튼, 그리고 배경이 원근법에 구애되지 않고 하나의 면 위에서 뒤섞여 처리되었으며 19세기 말 유럽 예술계를 강타한 원시 아프리카 미술의 모티프도 뒤섞여 있다.
  파리 아틀리에에서 모델들과 문란한 성생활을 즐기던 그에게 첫 번째로 사랑하는 여인이 생겼다. 페르낭드 올리비에. 그는 집에서 알몸으로 다녔던 페르낭드와 똑같이 알몸으로 작업했고 마음이 동하면 즉각적으로 섹스에 탐닉하곤 했다.
 
  친구들의 증언에 의하면 이때부터 피카소는 청소와는 담을 쌓고 살았다. 그는 산더미 같은 자료들과 온갖 잡동사니 그리고 쓰레기에 파묻혀 간신히 이젤이 있는 곳으로 이동할 수 있는 좁다란 길만 내놓고 지냈다.
 
  여기에 개와 고양이, 쥐, 원숭이까지 길렀다. 자신의 애완동물들을 무척 사랑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특별히 잘 돌본 것은 아니었다. 동물들은 각자 알아서 밖에서 먹을 것을 물어다가 끼니를 해결해야 했다. 여자든 동물이든 돌보는 것은 그의 체질이 아니었나 보다.
 
  페르낭드와 동거할 때 그는 대표작 〈아비뇽의 처녀들〉을 그렸다. 그는 우연히 친구 마티스가 수집한 아프리카 미술품을 보고 그 강렬한 형태와 대담한 추상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아프리카 가면을 닮은 기괴한 얼굴과 뾰족한 삼각형 모양의 가슴, 토막 같은 다리 등 기존의 미의 형상을 파괴해버린 이 작품을 보고 사람들은 “드디어 피카소가 미쳤다”며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친구인 마티스조차도 대상을 다중의 평면으로 분해해버린 그의 그림을 두고 “피카소의 그림은 작은 큐브(cube)들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는데 여기서 ‘큐비즘(Cubism)’이라는 용어가 탄생했다. 이때부터 피카소는 평생 형태에 천착하게 된다.
 
 
  ‘황소’ 피카소
 
〈팔걸이 의자에 앉은 올가(Olga in an Armchair, 1917 by Picasso)〉
피카소는 러시아 출신 발레리나 올가와 결혼했지만, 후일 사이가 멀어지자 양육비와 재산 분할을 한사코 회피했다.
  페르낭드와의 관계가 종지부를 찍자마자 그는 마르셀 앙베르와 연애를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작업을 후원해주었던 그녀를 에바라고 부르며 진심으로 사랑했다. 안타깝게도 1916년 에바가 결핵으로 사망하자 그의 인생은 잠시 황량해지는 듯했으나 곧 러시아 출신의 발레리나 올가가 등장한다. 이때 그의 그림도 엄숙한 파란색 톤의 청색 시대에서 빠져나와 장밋빛 시대로 접어들었다.
 
  상류사회에서 활동한 귀족 혈통의 올가는 그에게 정식 결혼을 요구했고 피카소는 그녀를 갖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결혼이라는 굴레를 뒤집어쓰게 된다. 둘은 1918년에 결혼했고 1921년 그의 첫아들 파울로가 태어났다. 하지만 올가의 출산으로 성적 관심이 떨어진 그는 자유분방한 남자로 되돌아갔고 두 사람은 온갖 추태와 냉전을 반복하다가 결국 1927년에 갈라서게 된다. 피카소는 절대로 이혼만은 하지 않겠다고 버텼는데, 올가에게 미련이 남아서가 아니라 양육비와 재산 분할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피카소는 올가와 헤어지기 전부터 마리 테레즈와 연애를 시작했다. 우연히 거리에서 만난 열일곱 살의 마리를 보고 반한 피카소는 그녀에게 다가가 “나는 피카소라고 해. 당신과 나는 앞으로 굉장한 일을 하게 될 거야”라며 소녀를 낚아챘다. 그는 서른 살 연하의 그녀를 독점하고 그녀의 모든 것을 소유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아이를 출산하자마자 또 다른 여자에게 눈을 돌렸다. 그는 부인 올가 외에도 마리와 도라, 공식적인 정부가 둘이나 있었고 다른 젊은 모델들과도 수없이 관계를 가졌다. 그가 왜 자신을 황소로 표현했는지 알 법하다.
 
 
  피카소에게 완승한 여자
 
프랑수아즈 질로는 피카소와 결별한 후 《피카소와 함께한 삶》을 펴내 피카소에게 통렬하게 복수했다.
  도라와 마리의 시끌벅적한 사랑 전쟁이 채 끝나기도 전인 1943년, 마침내 피카소는 그의 인생에서 가장 인상적인 여자를 만난다. 그가 유일하게 매달렸던 여자 프랑수아즈 질로. 그녀는 유일하게 피카소에게 모든 것을 걸지 않았던 똑똑하고 자립심 강한 여자였다. 처음 만났을 때 피카소는 예순한 살, 그녀는 스물한 살이었다. 명문대 법학도에서 화가로 전향한 그녀는 부모님의 반대에 가출까지 감행하며 그와 동거에 들어갔고 딸 클로드와 아들 팔로마를 낳았다. 그녀와 함께한 10여 년의 시간은 피카소의 인생에서 가장 안정적이고 빛나는 시절이었다. 문제는 피카소의 고쳐지지 않는 병, 도저히 그칠 줄 모르는 바람기였다.
 
  지친 프랑수아즈가 결국 피카소를 떠나기로 마음먹었을 때 그는 “그 누구도 나 같은 남자로부터 떠날 순 없어!”라며 광분했고 그녀의 대답은 “과연 그럴까?”였다. 그녀가 아이들을 데리고 정말로 떠나버리자 피카소는 충격에 빠졌다. 이후 프랑수아즈는 피카소의 사생활을 폭로한 책 《피카소와 함께한 삶》을 펴냈다. 그가 그토록 반대했던 이 책이 출간되자 피카소는 난생처음으로 모욕감과 패배감을 느꼈고 정신과 치료를 받을 정도로 트라우마에 시달리게 된다. 반면 프랑수아즈는 막대하게 거둬들인 책의 인세로 자신의 아이들에게 피카소라는 성을 물려주고 유산 상속까지 받을 수 있게 하는 등 법정 투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승부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작품 활동을 못 하도록 피카소가 영향력을 행사하자 그녀는 뉴욕으로 건너가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완전히 성공하게 된다. 오늘날 그녀의 작품은 세계 유명 미술관에 영구 소장되고 있다. 2010년에는 예술에 대한 기여를 인정받아 레지옹도뇌르, 프랑스 최고 훈장을 수여받기도 했다. 이미 100세가 넘은 그녀는 맨해튼의 어퍼웨스트사이드에 위치한 고급 스튜디오에 살면서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한때 미술가 마르셸 뒤샹이 살았던 이곳은 그녀가 오래도록 꿈꾸던 공간이었다. 피카소는 다른 여인들은 몰라도 프랑수아즈에게만큼은 완전히 패배한 것으로 보인다.
 
 
  피카소의 마지막 여자
 
피카소의 마지막 뮤즈 자클린 로크.
  피카소의 마지막 여자는 자클린 로크이다. 처음 만났을 당시 그녀는 스물일곱, 피카소는 일흔두 살이었다. 그들은 1961년에 결혼을 했는데 올가가 죽은 지 몇 년 후였다. 자클린은 그의 손에 키스를 퍼부으며 ‘나의 태양’이라고 부를 정도로 그를 숭배했다. 피카소는 여든 후반까지도 건강하고 에너지가 넘쳤다. 이런 천하의 피카소도 아흔을 넘기자 기력이 쇠해지기 시작했다. 1973년 봄 심부전증으로 사망한 후 그가 남긴 유산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평생 5만여 점가량의 작품을 만든 그는 그림 1900점, 도자기 3200점, 드로잉 7000점, 조각 1200점, 삽화 3만여 점을 남겼다. 뿐만 아니라 미술사에 있어서도 400년 앞선 미켈란젤로에 버금가는 영향력을 남겼다. 피카소를 좋아하든 안 하든 그의 인간성이 어떻든 간에 서양미술은 피카소 이전과 이후로 나눠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피카소는 독수리가 사냥을 하듯 사랑을 했다. 먹잇감을 발견하면 순식간에 낚아챈 뒤 공중에서 떨어뜨려 먹어치우곤 유유히 떠나는 것이다. 그러곤 곧바로 다른 먹잇감을 노린다. 불타는 열정의 화신처럼 보이는 그의 내면은 어쩌면 채워지지 않는 허기와 공허함으로 가득 찼던 건 아닐까. 공허함이라는 눈을 가진 태풍. 그가 지나간 자리에는 항상 파괴의 흔적이 남았다.
 
  피카소의 맏아들이자 그의 이름을 물려받은 파울로는 평생 이렇다 할 직업도 없이 아버지의 운전사로 살다가 알코올 중독자로 전락했다. 프랑수아즈의 자녀 클로드와 팔로마는 프랑수아즈가 그를 폭로하는 책을 쓴 이후 그에게서 절연을 당했다. 피카소의 곁을 지킨 마지막 여인 자클린은 그들이 장례식장에 참석하는 것조차 막았다. 피카소가 죽은 뒤 마리는 목을 매 자살했고 몇 년 후 자클린도 권총 자살로 그가 없는 삶을 끝내버렸다.
 
 
  “당신은 도덕적으로 말하면 쓰레기”
 
  상처는 대를 이어 파고들었다. 파울로의 딸 마리나는 자신의 비참했던 유년 시절이 다 할아버지 피카소 탓이라고 원망하는 책을 썼다. 그녀의 남동생 파블리토는 독극물을 마시고 자살을 했다. 피카소가 불씨를 남긴 후예들의 내전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사랑과 전쟁의 후속편으로 상속 전쟁을 찍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화가로서는 비범할지 모르지만 도덕적으로 말하자면 쓰레기야.”
 

  도라가 생전에 피카소에게 날린 이 말은 생각해보면 상당히 절제된 표현이었다. 여성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피카소의 여인들이 불쌍하다, 바보 같다, 또는 어찌 그리 답답한가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자, 눈을 감고 한 번 상상해보자. 당신 앞에 피카소가 앉아 있다. 그가 당신에게 눈을 맞춘다. 과연, 당신은 그를 거부할 수 있을까?
 
  이것은 마치 갑자기 하늘에서 핵폭탄이 터지며 전쟁이 발발했는데 그 도가니에서 벗어날 수 있겠느냐고 묻는 것과 같은 우문(愚問)일 수도 있다. 죽느냐 사느냐는 각자의 운명이지만 전쟁의 포화에 휘말려 들어가는 것은 아무도 막을 수 없으니 말이다. 피카소, 이 문제적 인간. 그는 애정사로 보든 미술사로 보든 인류 역사에 있어서 정말이지 강력한 폭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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